미라쥬mirage [n.] 1 신기루 2 망상(delusion) 3 공중 누각 Prologue 살아···있다. 아픔도 없고, 정신은 맑다. 가슴에도 목에도 상처는 없었다. 고통의 잔재는··· 없었다. 오히려 활기가 가득 찬 몸이었다. 한적한 산속에서만 맛볼 수 있었던 상쾌함이 몸에 멋대로 잔류하고 있다. ‘······.’ 이질적인 상쾌함에 오히려 불쾌감을 느꼈다. 심호흡으로 불쾌감을 뱉어내고 중얼거려본다. “···꿈···이었던 건가?” 그렇게. 운명은 터닝 포인트를 돌고 있었다. 0 take start, prize winning 소년은 침대에 누워 책을 보고 있었다. 어느 순간, 그는 책을 덮었다. 아까부터 한 가지 주제로 집중이 잘 안 되기 때문이었다. 침대에서 돌아누웠다. 깨끗한 잿빛 천장이 보였다. "오늘이 외할아버지의··· 기일이었나." 철이 들기 전, 그는 외할아버지와 살고 있었다. 제주도, 정확히는 한라산 외진 곳에 지어진 별장에서 주야를 보냈다. 외할아버지는 괴짜였다. 어찌 보면 광인狂人이라고도 할 만 했다. 겨우 4살 된 어린아이에게 서바이벌을 가르치는 건 기본이요, 인간의 육체로 무리하게 사이보그용 브레인 컴퓨터를 컨트롤 하게 했으며, 더욱 나아가서 엄연한 불법인 크랙킹Cracking까지 가르쳤다. 옛날 생각이 났다. 지옥 같았던, 하지만 친근했던 생활의 끝. 외할아버지의 죽음이 닥쳐온 때가 떠올랐다. 죽음. 대체로 악몽의 주제였다. 그러나 그는 악몽으로 느끼지 못했다. "그 때는··· 젊었나." 지금도 충분히 젊었다. 그러나 그런 것을 말하는 게 아니라 감성의 성장을 말하는 것이다. 창밖으로부터 내리쬐는 햇빛을 느끼며 소년은 편안한 표정의 외할아버지를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영원에 이르는 깊은 잠을 이해하도록 노력했다. 하지만 아무리 머리가 좋다고 할지라도 이제 갗 10세로 감성적 성장이 덜 된 어린아이에게는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다. 전쟁터에서 오직 고효율이라는 이유만으로 뇌의 반을 스스로 기계로 바꾼 행동적이며 냉철한 외할아버지. 그런 그에게 침대에서의 조용한 침묵은 어울리지 않았다. 외할아버지의 육체는 반은 생체머신, 또 반은 사이보그화 되어있어 30세 정도로 젊었다. 그 때 소년은 무뚝뚝하게 변호사협회에 유언장을 집행했다. 기뇌(機腦, Brain core)화한 인간의 사망신고는 편했다. 죽은 사람이 마지막으로 일으키는 뇌파만 체취해서 넷을 통해 보내면 되니까. 유언장에 기록된 내용은 소년 자신 앞으로 전 재산이 양도된다는 내용과 10테라바이트의 데이터를 수용할 수 있는 마이크로칩이라는 유물이었다. 엄밀히 말하면 전 재산 안에 그 마이크로칩도 포함이 되겠지만, 마이크로칩의 중요함이 이를 제외한 다른 모든 재산의 가치와 맞먹는다는 메시지라고도 할 수 있겠다. 소년은 편안한 표정이 된 외할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변함없던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웃음이 나왔다. 마이크로칩을 튕겼다가 다시 받으며 소년은 고인이 직접 육성으로 한 유언을 떠올렸다. 세상 속에서 자신을 숨겨라. 능력을 발휘하지 말고, 조용하게. 눈과 귀를 틀어막아라. 그리고, 목적을 이뤄내라. 소년에게는 사명 같은 건 없었다. 다만, 외할아버지의 부탁이 있을 뿐이었다. 그 때는 어떻게 해서든 외할아버지의 부탁을 이뤄드리고 싶었다. 성장한 지금은 부탁이란 게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떻게 하든··· 생존Survive만 하면 되니까." 그러나 그게 어려운 거다. 2078년. 문명이 발달한 이 세계는 겉으로는 질서로 유지되지만 안을 살펴보면 치밀하게 짜인 블랙리스트들로 판치는 세계다. 원수를 지면 아무도 모르게 제거 당할 수 있는 사회 시스템 속에서 생존은 힘만 좋으면 살아남는 고대보다 더 힘든 목표였다. ···그렇게 고뇌하던 때가 있었다. 지금은 무신경하게 모든 걸 관망한다. 오면 받고 가면 버리고. 단순한 생활패턴만 지키면 위험할 일도 없었다. ―삐빅! 전자음이 울렸다. 메일이 도착한 것이다. 입체화상 컴퓨터는 제멋대로 메일을 띄워 고운 여인의 목소리로 내용을 읽어나갔다. ―플라넷Pla_net에서 우수사용자 1000명을 추첨하여 경품을 발송했습니다. ID: NAT_Ilion 인증번호 AD611907 유성우 씨에겐 딥 스타 일렉트로닉스의 최신형 슬립머신이 주어집니다. 축하드립니다. 박수소리가 한동안 울리더니 자동으로 화상이 꺼졌다. “기일에 선물소식이라··· 외할아버지의 선물인가보군." 그럴 리는 없다. 그러나 왠지 오늘만큼은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 외에는 별다른 감정이 없었다. 공짜라는 데에서 느끼는 기쁨도 없었다. 그리고 의심도. 단순한 생활 패턴처럼 오면 받을 뿐이다. lost another Sleep-machine “음, 미영 씨. 제고가 하나 남는데?” 자그마치 2078년이 되어 최첨단 시스템이 도입되어도 절차상의 오류는 남아있었다. 그런 오류를 수정하기 위해 유연한 사고思考를 할 수 있는 인간의 고용이 일어나며, 세계의 경제활동은 멈추지 않고 계속 나아가는 것이다. “에, 앗, 정말이다! 주임님! 경품발송용 슬립머신이 하나 더 있네요.” “어찌된 일이지? 분명 어제 게이트를 통과할 때는 100대였는데 말이야.” “음, 위의 상품발주서류에서도 오류는 찾아볼 수 없어요.” 주임과 미영이라는 직원은 서로를 쳐다보았다. 의미심장한 미소를 교환하는 것이 매우 사악해보였다. “가위바위보로 할까, 사다리타기로 할까?” “가위바위보로 하는 게 좋겠어요.” 그 말이 끝난 즉시, 둘은 타이밍에 맞춰 한손을 내밀었고, 두 손가락을 내민 여인이 몸을 방방 뛰며 좋아했다. “럭키!” 다섯 손가락이 쫙 펴진 손바닥을 내민 남자는 허망하게 자신의 손바닥을 쳐다보았다. “이건 사기야!” “남자는 주먹이라면서요~” “······.”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미영은 남은 제고품 위에 붙어있는 스티커 위 주소란에 자신의 집주소를 적었다. 그렇다. 인간의 고용이 가는 곳에는 언제나 검은손(?)의 위험이 숨어있는 것이다. “대신 오늘 술은 미영 씨가 내라구.” “3차까지 화끈하게 쏘죠!” 그런 그들은 자신들이 한 일이 한 사내의 운명을 괴이하게 비틀어버리는 일이라는 것을 전혀 깨닫지 못했다. chapter 1, The Sleep and Death dream ――――First Connection to Machine “상품 전해드렸습니다. 싸인 해주십쇼!” 예나 지금이나 바뀌지 않는 택배서비스고, 대사다. 유성우柳成宇는 주문서를 받아들고 그 위에 자신의 이름을 휘갈겼다. 주문서를 되돌려 받은 택배원은 꾸벅이며 “좋은 하루 되십쇼!”라는 서비스 업계의 꺼지지 않는 명언을 남기고 사라졌다. 말 그대로 사라졌다. 그 안드로이드 택배원은 자신의 미간에 박힌 바코드 값을 한 것이다. 로봇의 진화형이라는 그것의 육체적 능력은 보통 인간의 세 배. 그 정도면 인간의 육안으로는 사라진 것처럼 보일 게다. 성우는 문을 닫았다. 그는 택배원이 거실에 놓고 간 상자를 살폈다. 가로길이 2미터, 세로길이 70센티미터, 높이 70센티미터로 꽤 크다고 할 수 있는 규격이었으나, 온갖 앤티크 가구로 들어차 있어도 17평이나 남는 거실 가운데 있으니 그리 커보이지는 않았다. “침대를 치워두길 잘했군.” 먼지조차 도망갈 정도로 공허한 혼잣말이었다. 이제 갗 9일 전에 고등학교 2학년 시업식을 마친 애송이가 내기에는 뭔가 어색한 목소리이기도 했다. 그는 택배원이 오기 전까지 보고 있었던 책을 소파에 툭 던져놓고 상자 아래 달려있는 바퀴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방으로 끌고 갔다. 살풍경이었다. 장식 없는 책상, 제목조차 알 수 없는 책이 가득 들어찬 서가, 다섯 벌의 옷만이 걸려 있는 옷걸이. 위아래 합쳐서 다섯 벌, 그 외에 다른 옷은 없었다. 살아가기 위한 최소요건과 책을 제외하면 그 자신 외엔 아무것도 없는 방. 그것이 그의 방이었다. 10평에 달하는 넓이는 황량함을 더한다. 광원은 형광등, 창으로 들어오는 빛. 그 외엔 없다. 장식도 치장도 없는 방은 주인의 성격을 고스란히 투영하고 있었다. 그런 대열에 ‘그것’이 끼게 되었다. 딥 스타Deep star 일렉트로닉스의 2078년형 숙면기계 슬립머신. 캡슐형인 이 기계는 2060년에 첫 모델을 출시한 후부터 지금까지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고 있었다. 살풍경한 방이 증명하듯 그에게 하이테크머신을 모으는 취미는 없다. 단지, 그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넷Net 우수이용자 대상 1000명을 추첨하는 과정에서 행운이 따라 3등에 당첨되었을 뿐이다. 2078년, 즉 올해의 신상품이라 오직 수백 대밖에 생산되지 않았을 터인 슬립머신을 공짜로 손에 넣은 것이다. 공짜를 거절하는 취미는 없다. 취미라면 오히려 한밤 중 날 새기 독서라는 괴이한 것만 가지고 있던 유성우였다. 그의 평균 수면시간은 3시간 내외였다. 당연히 몸이 견디지 못한다. 그렇지 않아도 몸이 부실해져서 수면용 캡슐을 사들일까 하고 있었는데 마침 당첨이었다. 이제 방에는 침대조차 보이지 않는다. 침대보다 차지하는 공간이 적은 슬립머신이 들어섰으니까. 그 때문에 방은 더욱 살풍경해보였다. 그나마 침대가 가장 화려한 가구였었던 것이다. 상자 위에 Open이라 써 있는 빨간버튼을 누르자, 상자의 모서리부분이 퓨슉하는 보존가스 배기음과 함께 서서히 떨어졌다. 상자를 구성하고 있던 부분은 완전히 접어져 슬립머신 아래로 쏙 들어갔다. 그렇게 해서 드러난 슬립머신은 부드러운 곡선의 향연을 표현한 디자인을 주축으로 코디되어있었다. 세단이나 포르쉐등 유명한 자동차 동체처럼 매끄러운 곡선형을 이루고 있었다. 새까만 동체는 왠지 고풍스럽다거나 어른스런 느낌이었다. “좋군.” 무색으로 일관된 얼굴에 만족이 잠시 떠올랐다 사라졌다. 밖에서 캡슐을 여는 방식은 자동형이 아니라 손잡이였다. 스르릉 하는 부드러운 소리와 함께 캡슐 뚜껑이 반쯤 후퇴하며 내부가 드러났다. 검은색 시트가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그 다음으로 검은색 시트 한 가운데 새하얗게 떠 있는 한 장의 설명서가 보였다. 고딕체의 설명서는 슬립머신의 사용법을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었다. “고장난 부분은 없는 것 같군.” 그의 새로운 가구 감상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30분 수면으로 최고 8시간의 숙면효과를 보게 한다는 생활에 윤택함을 줄 가구의 감상치곤 매정했다. 유성우는 거실로 돌아와 소파 위에 몸을 실었다. 어느새 그의 손에는 책 한권이 들려있었다. 택배원이 왔을 때부터 덮어놓았던 책이다. 독서광인 그에게 있어선 새 가구의 시험운행보다 책 한 권 완독하는 게 더 시급한 일이었다. 결국 그가 독서를 끝낸 시간은 그로부터 4시간이 지난 오후 7시였다. 그동안 그는 400페이지 두께에 신국판 양식으로 작성된 두 권의 책을 완독하고 또 하나의 책을 들고 있었다. 가만히 놔두면 시간가는 줄 모르고 책을 읽었을 터였다. 하지만 그의 여동생의 귀가시간이었기에 독서를 계속할 순 없었다. 오늘은 그가 식사당번이다. 골동품 괘종시계가 정확히 7시를 알려왔다. 그 순간부터 그는 앞치마를 두르고 냉장고를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여동생의 귀가시간은 언제나 정확했다. 7시 10분. 머리에 시계를 심어놓아도 정확도엔 오차가 생길 텐데,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완벽했다. 그 10분. 그 10분 안에 차가운 바깥공기를 쒠 어린양에게 대접할 따스한 음식을 만들어야 했다. 3분 요리 같은 화학조미료투성이 음식은 절규할 정도로 싫어하는 어린양을 대접하기란 참 까다로웠으나 17년 간 그녀와 살아온 경험은 까다로움에 적응되게 만들었다. 야채박스에서 야채를 꺼내 손질, 양념보관통을 확인하고 분량을 정확히 재서 야채와 함께 냄비 안에 털어 넣는다. 다른 전열레인지 위에 스테이크 팬을 올리고 생선을 구웠다. 결국 메뉴는 한국식이다. 저녁 메뉴답게 따스하지만 적은 분량의 반찬과 밥이 4인용 식탁 위에 차려졌다. 국은 작은 냄비에서 가늘게 증기를 뿜어 완성을 알리고 있었다. 그리고 7시 10분. 쾅― 하는 소리와 함께 현관문이 열렸고 그와 동시에 화려한 복장에 긴 생머리가 돋보이는 한국형 미소녀 하나가 들어왔다. 숨을 몰아쉬는 게 뛰어온 듯 했다. 성우는 그런 그녀에게 태연히 말을 걸었다. “샤워, 아니면 식사?” 대답은 들을 것도 없었다. 불규칙적인 생활습관이 있는 성우는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스케줄이 딱 잡혀있는 그녀가 할 말과 일은 하나로 귀일. “식사!” 성우가 눈짓으로 식탁을 가리키자 그의 여동생 유성하柳晟河는 밝게 웃으며 식탁을 향해 걸어갔다. 그런 그녀에게 성우는 물 컵 한잔을 내밀었다. “우선 숨부터 돌려.” 성하는 물잔을 들더니 원 샷을 하고 그대로 성우에게 컵을 돌려줬다. “터프한 게 좋은 건 아닌데······.” “네비두시와요.” 충고는 비아냥으로 돌아왔다. 성우는 쓰게 웃으며 성하 맞은 편 의자에 앉으며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밥이 죽 됐느니, 생선이 좀 탔느니, 된장국이 싱겁다니, 반찬이 가짓수가 적다니, 하는 불만이 쉴 세 없이 터지긴 했지만 전자신문을 펼쳐든 성우에게는 조용한 배경음악 정도의 소음밖에 되지 않았다. 밥 먹으면서 신문 따윌 펼쳐드는 행동은 예절바깥이고 신나게 투덜거리는 사람을 짜증나게 할 행동이었지만 차라리 귀찮은 것보다 욕먹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신경 쓸 계제는 아니었다. 전자신문 위로 7시 정보가 업데이트 됐다. 대부분 정치, 경제, 외교에 대한 이야기였고, 그 중 두세 개는 연예인의 가쉽기사였다. 조회수를 보면 정치부분은 바닥을 기는데 반해 연예부분은 시시때때로 올라가는 것으로 보아, 시대가 바뀌어도 정치가는 국민의 신뢰를 받지 못하는 족속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성우, 그 자신도 보고 싶은 마음은 없었으나 배경음악 수준의 투덜거림이 콘서트가 되기를 바라지 않는 마음에 신문에 정신과 신경을 집중하며 밥을 깨작거렸다. 그 중 주식부분을 보던 성우의 눈길이 가늘어졌다. “아, 빙고.” 얼마 전 사비로 투자한 곳의 주식이 오늘 하루 만에 다섯 배로 뛰어올랐다. 사비라고는 해도 수만 주에 육박하는 양이었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조그맣게 중얼거린 것이다. 다만, 수억대의 돈을 만지게 된 것치곤 그의 반응은 너무 소탈했다. “무슨 소리야?” 지금까지보다 훨씬 더 크고 뾰족한 소음에 그는 신문을 덮을 수밖에 없었다. 그 앞에는 물컵을 던질 듯한 기세로 들고 있는 소녀가 있었다. 컵의 물이 출렁출렁 역동하는 게 밥 먹다 말고 샤워할 뻔 했다는 걸 깨닫게 했다. “아무 것도 아니야.” 주식투자를 하는 것은 가족에겐 비밀이었다. 화제를 돌릴 필요가 있었다. “그나저나 밥맛은 어땠어?” “밥맛이었지!” 그 순간부터 투덜거림이 계속된다. 어쩔 수 없이 그녀의 잔소리를 콘서트로 들어야 했다. 여동생의 스트레스 해소용 인형이 되는 것도 오빠의 운명인 것 같았다. 항상 이러는 건 아니었다. 바깥에 나가서 즐거운 일이 있었을 땐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단체 미팅···. 폭탄이라도 뽑았나 보군.’ 아마도 맞을 것이다. “그 남자는 어때?” 그냥 넌지시 던진 말에 그녀는 반사적으로 반응했다. 그녀의 눈꼬리가 앙칼지게 치켜 올라간다. “최악最惡! 옷 빼입은 티하고 더러운 성격! 반반한 얼굴 가지고 개처럼 나불대고 발정난 고양이처럼 지랄하는 것 보면 구토가··· 가 아니라! 무슨 소리야!” 이제는 식탁을 뒤엎을 기세다. 응원군을 찾을 때가 되었다. 성우는 식탁에 있는 시계를 들어다가 여동생 눈앞에 들이밀었다. 마침 7시 29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 순간부터 여동생은 말없이 남은 밥과 반찬을 처리하기 시작했다. 완벽히 짜놓은 스케줄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여동생을 보면 안쓰러운 생각이 들 정도였지만 이럴 때가 되면 이해가 갔다. 그녀의 일요일 7시 30분 스케줄은 샤워를 겸해 반신욕半身浴을 하는 시간이었다. 물론 그녀는 어디까지나 인간이라 잘 짜여진 프로그램처럼 순순히 다음 스케줄로 이행하는 것은 아니다. “내일 아침 밥, 기대해도 돼.” 보복의 의지가 담긴 여동생의 발언에 성우는 피식 웃으며 식탁을 정리했다. 그 전에 전자신문을 통해 주식사이트에 접속, 다섯 배의 이율을 남긴 수만 주의 주식을 모두 매각했다. 이것으로 용돈은 벌었다. 8시 10분, 여동생은 샤워를 마치고 욕의를 입고 나와 이 시각 방송되는 드라마 프로그램을 시청한다. 성우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창밖으로 네온사인이 비추고 있었다. 행정도시 광주는 2041년―해양에너지 자원 문제로 인해 일어난 동방전쟁Asian war이 2045년 9월 18일 평양회담을 끝으로 끝난 이후로부터 적극적인 예술가 우대정책을 펴며 본격적인 예술의 도시로 탈바꿈되었다. 물론 그 바탕에는 관광산업발전에 이바지라던가 하는 금전적인 문제가 포함되었긴 하지만, 오히려 그 때문인지 투자가들의 자금 조달이 순조로워 공사라던가, 건물보수라던가, 하는 일은 어렵다는 테마도시건설치고는 쉽게 이뤄졌다. 뜻있는 예술가들의 망명으로 외국인이주자가 평양을 제외하고 전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은 이 도시는 도시 설계조차 예술가들이 머리를 맞대 밤하늘을 환히 밝히는 네온사인조차 밝음으로 무장된 어둠을 표현하는 퇴폐미를 풍긴다. 빌딩사이를 가로지르는 도로에도 빛이 있다. 마치 숲을 가로지르는 하천과 같은 경치로 광주사람들 사이에선 낙은하落銀河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야경 중 하나이기도 했다. 성우가 살고 있는 아파트는 광주권 내에 가장 경치가 좋은 아파트로 경매를 통해서만 입주권을 따낼 수 있었다. 잠깐 동안 창밖을 보던 성우는 커튼을 쳤다. 수많은 사람들의 눈을 매혹하여 업무나 생활에 지장을 주게 만드는 네온사인의 향연조차 성우에게는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성우는 연합시장에서 20,000원이면 살 수 있는 0.7mX2m 크기의 싸구려 플라스틱 서가에서 지금부터 읽을 책 다섯 권을 꺼냈다. 그 중 4권은 지식도서, 1권은 소설. 4권을 모두 읽은 후, 복잡해진 머리를 흥미위주의 소설로써 풀어주는 식으로 나름대로 쓸만한 독서법이다. 개중에는 모든 세상이야기에 무신경한 그로써도 감탄이 날 소설도 있어서 5권 중 한 권은 꼭 복권 뽑기를 하는 기분으로 소설을 챙기는 그였다. 하드쿠션 의자에 앉았다. 소프트 쿠션은 몸의 피로를 풀어줌과 동시에 정신의 긴장까지 풀어버리는 경우가 많기에 학업용으로나 독서용으론 알맞지 않았다. 성우가 느끼고 생각하기에 가장 피로를 느끼지 않는 자세로 독서를 시작했다. 책을 통해 전해지는 정보는 같은 글이라도 쓴 사람의 기분이 느껴지는 것 같다. 음성처리장치로 옮긴 넷의 문장이라도, 책으로 손끝을 통해 보는 것과 맛이 다르다. 정보의 전달에 적합한 방식은 사람마다 각각 다르게 나타난다고 한다. 어떤 이는 넷이, 어떤 이는 직접 하는 대화가, 어떤 이는 바디 랭귀지가 정보를 깨닫는 데에 적합하다. 물론 다른 방식도 충분히 전달가능하다. 다만, 효율이 그쪽이 훨씬 더 좋다는 뜻이다. 그 정확한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고 결론은 단순한 개성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성우는 책을 통해서 정보를 습득하는 걸 좋아한다. 책장을 넘기면서 얻게 되는 감각은 정보를 잊어버리게 하지 않았다. 썩 머리가 좋은 편인 성우는 지금도 9년 전 처음 읽은 외할아버지의 책의 촉감에 따라 그 정보를 눈앞에 떠올릴 수 있을 정도였다. 그외에 다른 건 희미하게 밖에 기억 못한다. “후우, 읽을 만하군.” 성우가 마지막 소설책, 정확히는 ‘미지의 세계 너머’라는 제목의 환상문학도서를 넘겼을 때는 이미 이른 아침 수준인 5시 20분이었다. 일요일에 늦잠을 잔 턱에 몸의 피로가 평소보다 덜 쌓여, 피로한 지도 모르고 읽어버린 모양이다. 참 애매한 시간이었다. 등교를 제외하면 불규칙한 일상을 하고 있는 그는 차치하고 6시면 벌써 인간 스케줄표인 여동생의 기상시간이다. 그리고 6시 30분에 아침식사를 하고 7시 20분에 등교를 한다. 지금 수면을 취하면 90% 이상의 확률로 늦잠을 자버리게 될 것이다. 그 때 일상생활의 기억과 일치하지 않은 부분을 발견했다. 슬립머신, 30분을 최고 8시간의 숙면처럼 이용할 수 있다는 숙면기계는 그의 고민에 금쪽같은 해결책이었다. 정확한 원리는 기업비밀, 뇌신경을 특수한 초음파로 안정화시키고 몸의 누적피로를 물리적인 에너지로 풀어주는 게 대략적인 원리였다. 성우는 설명서에 쓰인 대로 뚜껑을 열고 그 안에 들어가 누웠다. 푹신한 쿠션에 그의 몸이 5cm 정도 묻혔다. 그리고 머신의 뚜껑을 닫자 뚜껑하단, 즉 천장부분에 야광버튼이 보였다. 수면시간, 기상예정시각, 숙면정도, 기상 후 몸의 상태 정도. 수면시간은 말 그대로 수면을 취하는 시간이라, 성우는 30분으로 맞춰놨다. 수면시간을 맞추자 기상예정시각은 자동으로 AM 6시로 변했다. 숙면정도는 최소 2시간부터 최대 22시간까지 있었는데, 사실 Min―Max로 되어있는 조절버튼을 컨트롤하기가 좀 귀찮았다. 사실 22시간 쯤 숙면을 취해본 적이 없는 터라 그 경험을 해보고 싶었기에 max 부분까지 스위치를 올려버렸다. 설명서에는 깨알만한 글씨로 될 수 있으면 이런 행동은 피하라고 했지만, 매우 소극적인 문체라 신경 쓰지 않았다. 원체 성격이 무신경한 탓이다. 기상 후 몸의 상태 정도는 세 가지 목록이 있었다. 상쾌한 상태, 보통수면 후의 기상처럼 좀 멍한 상태, 찬물을 끼얹은 상태. ‘찬물을 끼얹은 상태라니···.’ 호기심은 있었지만 상쾌한 상태를 선택하기로 했다. 모든 선택이 끝나고 시작버튼을 누르자 쿠션에 몸이 반쯤 묻혔다. 부유감이 느껴지는 몸에 신기함을 느끼고 있는 사이, 잠시 후 닫힌 망막으로 직접 메시지가 투영되었다. [편안한 세계 속으로 어서 오십시오.] 그 순간 끝없는 암흑 속으로 그의 시선이 묻혔다. 눈을 뜨자 세상은 암흑이었다. 어둡다기보다 무채색만이 존재하는 공간 같았다. 한 번도 경험해본 적이 없는 시야. 성우는 의식을 차리자마자 이것을 꿈이라고 단정했다. 어느 순간, 허공에 글자가 떠올랐다. 무슨 글자인지는 모르나, 성우는 자신도 모르게 능력치배분이라고 이해했다. “무슨 헛소리냐.” 지금까지 한 번도 경험해본 적 없는 글씨가 게임에서나 등장하는 그런 소리로 이해될 리 없지 않은가. 하지만 곧이어 등장하는 다른 글자들을 보고 읽기 시작하는 자신의 무의식적 행동에 그 생각은 수정되었다. “체력 3, 지력 7, 민첩성 4, 근성 6, 행운 7······ 능력치 배분 가능 수치 8. 정말··· 게임인 건가.” 이상한 일이었다. 초등학교 다닐 때, 외할아버지의 영향으로 하던 모든 게임을 접은 지 오래였다. 그런데 이제와서 이딴 영상이 꿈에 투영되다니, 게임을 하던 그 시절에도 요즘 아이들처럼 심각한 게임 중독증에 걸린 것도 아니었는데, 욕구불만欲求不滿적 몽정이라도 하는 듯 게임 틱하면서도 리얼한 영상을 토해 내다니. 아무리 꿈이 잠에서 깨어날 때 70~90%는 손상된다고 하지만 이건 잊어버릴 것 같지 않은 경험이었다. “근데, 나 체력이 이렇게 약했나······. 좀 올라갔으면 하겠는데 말이야.” 생각 없이 중얼거린 순간, 체력 3 부분이 체력 4로 바뀌었다. 배분 가능 수치는 8에서 7로 떨어졌다. ‘진짜 게임인 건가.’ 그는 어찌되었든 이 상황을 벗어나기로 했다. 우선 몸을 움직여보니, 기이한 구속감이 느껴지고 있었다. 예전에 체험했던 가상현실 게임에서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한 적 있었다. 아이디와 패스워드 체크, 캐릭터 생성/선택, 초기 능력치 배분···등등. 경험상으론 우선 망막 앞에 둥둥 떠다니는 이 항목이 사라지는 게 우선이다. 현실에서나 꿈속에서나 게임을 할 마음 따윈 없었다. 그렇기에 그의 능력치 배분은 그야말로 대충이었다. 결과는 체력 5, 지력 9, 민첩성 6, 근성 7, 행운 8로, 배분 잔량殘量을 한 바퀴 돌려 투자한 것뿐이었다. 배분 잔량이 0이 되자, 눈앞에 떠있던 글자가 눈 녹듯 사라지고 주변공간이 일그러졌다. 보는 것만으로 고통스러운 시야의 굴절 때문에 눈을 깜빡하는 사이, 주변풍경은 거짓말처럼 바뀌었다. “놀···랍군!” 키 높은 나무가 울창한 숲이었다. 잎과 가지가 무성했고, 그 틈으로 보이는 하늘은 맑고 선명했다. 그리고 비강鼻腔으로 청량하게 새어 들어와 폐로 거부감 없이 부드럽게 들어차는 공기. 이것이 진정한 게임이라면, 그로서도 계정등록을 생각할 정도로 맘에 드는 풍경이었다. 아스팔트 숲속이 들어찬 덕분에 환경조성은 되어있어도 이 정도로 맑은 에너지가 가득 찬 곳은 현실 세계에선 찾아보기 힘들었다. 이런 곳에서 독서를 한다면 효율은 무궁무진할 것 같았다. “근데, 묘한 리얼리티다.” 몸에서 느껴지는 감각은 게임의 차원을 넘어 꿈이라는 전재 안에선 있을 수 없는 현실감을 말하고 있었다. 너무 현실적이라 오히려 위화감이 들 정도였다. 과학의 발달이 우주정거장을 태양계 전역에 설치해 은하철도 999를 어느 정도 재현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지만 가상현실로 이런 현실감을 줄 수 있을 정도는 아니다. 설령 그 정도로 발달했다고 해도 그의 오감을 초월한 육감은 이건 현실이다, 라고 말하고 있었다. “어찌 되었든, 여기에 죽치고 있을 수만은 없지. 책이라도 있다면 모를까.” 많은 독서에 따라온 사색 덕분에 버릇의 경지를 넘어 A.I를 가지게 된 혼잣말신경(存在與否確因不可)이 현실을 가장 냉정하게 이끌었다. 우선 눈앞에 보이는 길을 따라 걸었다. 꿈인지 뭔지는 나중으로 차치하고, 사람들의 편리를 목적으로 한 길이었다. 길 주변이 조잡한 게 책에서나 읽거나 본 사냥길인 듯 했다. 문명의 높낮이는 상관없이 형편없는 길이었다. 걸음을 걷다가 치밀려오는 통증에 문득 생각나는 게 있었다. “신발이··· 없군.” 옷을 끄집어 올려보니 슬립머신에 들어간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점점 이 상황에 의심이 가긴 했지만, 꿈의 여부는 나중으로 미루기로 차치했기에 어쨌건 걷기로 했다. 중간에 쓸만한 풀과 나뭇잎들이 있기에 그것으로 초혜草鞋를 짰다. 덕분에 편해지긴 했지만 책으로 읽은 지식이 통용되는 게 기뻐해야 될지 슬퍼해야 될지 웃지 못 할 기분이 되었다. 내리막길을 따라 7,000 걸음. 시간을 샐 수 없으니 거리로 시간을 재야했고 일보 당 0.5초 정도의 시간을 소요하는 걸로 치면 결국 1시간 쯤 걸었다는 소리다. 그 와중에 깨달은 건 많았다. 체력은 자신이 놀랄 정도로 쉽사리 떨어지지 않았다. 간간히 장애물이 보여 뛰면 제자리 멀리 뛰기 2.1m의 기록을 넘어 꽤 멀리 뛰는 걸 체감할 수 있었다. 직접 재보진 않았어도 3미터는 넘는 것 같았다. 더욱 놀라운 것은 위화감이라곤 전혀 없이 급격히 능력이 상승한 몸을 예전부터 움직였던 것처럼 완벽히 컨트롤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정말··· 꿈이 아니라면 이런 거짓말 같은 상황이 연출될 리 없다. “배고파.” 이런 괴이한 상황에 빠지면서 하는 소리치곤 유치하다 할 수 있겠지만 배고픈 건 사실이었다. 원채 성격조차 심각한 걸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무신경함으로 무장되어 있어 생리현상에 대한 걱정이 훨씬 더 심각하게 느껴지는 그였다. 성우는 어디 먹을 것이 없나 찾아보기 시작했다. 나무가 많으니 나무열매 따위를 찾아보는 게 옳다는 생각 따윈 없었다. 이 아름다운 숲의 나무들은 성우의 지식 속에선 존재하지 않은 완전 새로운 품종이긴 해도 키가 높고 햇빛을 차단할 정도로 무성한 잎을 가진 나무 아래 사람이 먹을 만한 열매가 열린다는 소리는 못 들어봤다. 혹여 열린다고 해도 눈대중으로 봐도 50m는 될 큰 키의 나무를 경험자가 아닌 그가 확신도 없이 오르고 싶을 리는 없었다. 다만, 열매가 아닌 버섯이라면 열릴 것이다. 숲에 깔린 습기는 마침 버섯을 생산하기에 좋았다. “적당한 그늘, 적당한 틈새, 죽은 고목 아래인가······.” 2041년 전쟁 당시 군 내부 특수작전부의 정보장교로 있었던 외할아버지의 말에 따르면 숲속의 죽은 고목은 보급소다. 방사능지대의 숲을 제외하면 그럭저럭 먹을 만한 버섯이 열리기 때문이다. 땅에도 있고 나무에 붙어 자라기도 한다. 임지발생균류林地發生菌類의 버섯은 땅에 떨어진 낙엽을 뒤져보면 나오겠고, 목재발생균류木材發生菌類는 말 그대로 죽은 나무에 기생하는 버섯이다. 간단한 정제만 거치면 환각제로 쓰일 독버섯도 간혹 열리기에 식량이 충분해도 고목을 한 번 뒤져보는 일은 필수적으로 해본단다. 고목을 발견한 성우는 10m의 언덕을 미끄럼틀 타듯 내려왔다. 백색 T―셔츠와 주머니가 많은 긴바지는 순식간에 개성 있게 변했다. 성우는 고목 아래에 깔려있는 나뭇잎을 들춰봤다. “빙고.” 나뭇잎으로 가려진 고목의 뿌리에는 크고 못생기긴 했지만 송이버섯의 탄력에 가까운 버섯들이 자라나고 있었다. 송이버섯과 닮긴 했으나 엄밀히 말하면 본 적 없는 타입이었다. 독버섯일 가능성도 있긴 했지만 확률은 낮은 편이었다. 독버섯이 자라기엔 주위환경이 너무 좋았다. ···물론 이런 방심이야 말로 식중독의 원인이지만 배고픔은 그의 무신경함을 주의상실의 경지까지 끌어올렸다. 그렇게 주운 버섯, 일명 송이버섯―mk2(Mark two)는 20여개에 달했다. 맛은 모르지만 어떻게든 배는 채울 수 있을 것이다. “생각해보니 흙투성이로군. 씻어야겠는데?” 산속의 물의 대부분은 계곡에 분포한다. 능선은 대략 파악했으니 계곡을 찾아내는 건 시간문제였다. 삼백여 걸음쯤 발품을 파니, 시냇물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규모는 작지만 버섯을 씻는 데는 문제없었다. 주변에 있는 버들나무 비슷한 걸로 망을 대신하고 거기에 송이버섯-mk2를 올려놓았다. 물의 낙차에 의해 송이버섯-mk2에 붙어있던 흙덩어리는 금방 씻겨 내려갔다. 그렇게 버섯을 챙기고 있던 때였다. 성우는 시냇물의 하류를 돌아보았다. 그 곳에서 분명 말소리 같은 게 난 것 같았다. ‘정확히는 고함소리. 싸움인가.’ 어찌되었든 꿈인지 뭔지 모를 미지의 공간에서 처음으로 사람을 만나게 된다. 그것만으로 충분히 발품을 팔, 가치가 있었다. 버섯하나를 입에 문 후, 나머지 버섯을 바지주머니에 챙기고 걸음을 옮겼다. 싸움 중에 나서면 여러모로 공동의 적이 될 수도 있다는 지론에 의거하여 조용하게 그들을 시야에 담을 수 있을 정도로만 접근했다. 충분히 상황을 보고 나서야 했다. 그들은 범인이라면 보기만 해도 가슴이 서늘해지는 병기를 서로에게 겨누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몸 구석구석에 피어난 혈화血花는 싸움의 수준을 사투(死鬪)라 증명했다. 그 전에 생김새와 옷차림이 눈에 띄었다. 검은머리에 황색피부는 동양인의 그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눈동자는 검은색이 아니었다. 벽안, 푸른 눈동자는 싸구려 사파이어처럼 잘도 빛나고 있었다. 그들의 옷차림은 고대 동양의 대부분의 의복이 그렇듯 품이 넓은 옷으로 활동성을 강조한 차림이었다. 창을 든 사람은 삼십 대 중반의 남자로 댕기머리를 땋아 끈으로 한 번 더 동여 묶고 있었다. 검을 든 사람 역시 삼십 대 중반의 남자였다. 특이한 것은 포니테일 머리를 목에 두르고 있다는 것일까. “합!” 짧은 기합성과 함께, 검수가 발을 통통 튕기며 빠른 속도로 창수의 측면으로 돌아서면서 나선형 궤적을 남기며 1.2m길이의 장검을 휘둘렀다. 창수는 익숙한 동작으로 창을 뱅글 돌리며 검을 막았고 두 쇳덩어리가 부딪히는 소리가 채 가시기도 전에 창대를 발바닥으로 후려쳐 검을 밀어내고 검수의 자세가 흐트러진 순간 저자세를 잡았다. 잡은 순간부터 시작되는 강맹한 돌진, 그리고 검수의 민첩한 대응으로 인한 격돌. 그리고 다시 난타전이 되었다. 성우는 그들의 움직임에 몸이 전율하는 걸 느꼈다. 무술가들의 대련을 보여주는 어떠한 동영상도 성우의 신경을 건드리지 못했다. 무협시리즈가 보여주는 화려한 영상에서도 흥미를 받지 못했다. 그러나 이건 다르다. 진짜 피와 살점이 튀는 장면. 소도구남용, 와이어 액션, 컴퓨터 그래픽이 아니다. 성우는 치밀어오는 갈증을 느꼈다. 아마 이곳에 오면서 씹은 맛대가리 없는 버섯에 문제가 있었던 것일까?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청량제가 필요했다. 마실 것이 없나 주위를 둘러보다가 마침 세 걸음 안에 복숭아 비슷하게 생긴 열매 두 개를 발견했다. 크기는 복숭아보다 2배는 작고 자두보다 약간 컸다. 분홍색 바탕에 붉은 반점이 선명하게 난 열매는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성우는 조용히 다가가 열매를 땄다. 주먹한줌에 들어오는 크기는 한입에 털어 넣기 딱 좋았다. 직접 땄을 때는 단단한 느낌을 주었지만 직접 입에 넣었을 때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부드럽게 녹아들어갔다. ‘음? 맛 자체가 느껴지지 않는 열매라니, 상쾌한 청량감만 있을 뿐이잖아. 게다가 씨가 없다. 이런 열매가 있다니······.’ 신기함에 하나 남은 열매도 따서 입에 물었다. 맛은 여전히 느껴지지 않았다. 굳이 있다면 물맛이랄까. 갈증은 그것으로 해소되었다. 그것뿐만이 아니라 머리끝에서 발원해 발끝까지, 알 수 없는 청량함이 몸을 관통했고 성우는 그 여운에 취해 있었다. 그렇기에 느끼지 못했다. 싸움이 끝난 것도, 그들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돌려져 있다는 것도. 그리고 그 시선의 의미가 허탈함과 분노라는 것도. 모두 느낄 수 없었다. 그리고 청량함의 여운이 가셨다. 그 순간, 성우는 목을 조르는 강렬한 힘을 느꼈다. “커어억···!” 공업용프레스에 압착당하는 느낌이 이럴까. 압력에 목 혈관이 터지고 부어올랐고 곧이어 호흡곤란으로 시야가 흐려지기 시작했다. 순간적으로 상황을 판단하지 못했지만 흐린 시야를 통해 보이는 인영이 지금 자신의 목을 조르고 있는 것은 공업용 프레스 따위가 아니라 사람의 손이라는 것을 깨닫게 했다. 아프다던가, 살려줘라던가, 본능이 외칠 법한 소리는 그의 머릿속에 있지 않았다. 다만 하나, 대체 왜 이런 꼴을 당해야 하는 건가. 그 주제에 그의 머리는 산소부족에도 아랑곳없이 빠른 속도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답은 나오지 않았다. “네 놈이, 네 놈 따위가!”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언어, 하지만 머릿속에 번역기를 심어놓은 것처럼 시간상의 오차는 있지만 이해는 가능했다. “네 놈이 먹은 게 뭔지 아는가.” 목에 대한 압박이 증가했다. 파열된 목젖에서 발원한 피가 목구멍을 통해 장으로 넘어가는 것을 느꼈다. “일류무사를 목표로 같이 수련을 쌓아오던 우리들이, 우정을 버려가며 서로의 목숨을 노릴 만큼의 가치다.” 벌레, 그 이하를 대하는 것 같은 싸늘한 말투였다. 그 어떤 신경을 가진 사람이라도, 변태가 아닌 이상 이 상황이 달갑지 않을 것이다. 성우는 정상인이었다. 생명의 위협을 받으면 어떻게든 반항하는 인간이란 말이다. 주먹을 쥘 힘 따윈 없었다. 폭력으로 그들을 이길 수 있다는 생각도 없었다. 압박으로 내부에서부터 피가 넘치고 있는 목구멍과 아직은 움직일 수 있는 혀와 턱. 이 세 가지는 하나의 반항을 이끌어냈다. “웃기는 소리··· 그게··· 내··· 목숨보다 소중할까.” 알지도 못하는 언어를 입에 담고 있었다. 신경 쓰지 않는다. 죽고 사는 것보다 중요한 문제는 없다. 대신 대가는 치러야 했다. “이런 씨팍새끼!” 거친 욕설과 함께 성우의 복부로 돌진하는 그림자, 그것은 싸커 킥처럼 빠르고 정교하게 성우의 내장을 끊어놓았다. 비명을 토하는 대신 성우는 살점을 토했고, 그 후로도 비명을 지를 시간 따윈 받지 못했다. 여전히 적의 손은 성우의 목을 잡고 있었다. 그 때문에 몸이 날아가거나 하진 않았다. 그렇기에 더 치명적이었다. 옆차기에 가까운 킥의 각도로 보면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다른 한 사람이 나선 모양이다. “힘을 못 쓰는 걸 보니 무인이 아니군. 옷차림도 괴이하니 이방인이로군. 그런 주제에!” 퍽― 묵직한 주먹이 왼쪽 가슴을 강타했다. 순식간에 뇌 속이 텅비어버린다. 귀로 들어오는 말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렇다고 정신이 붕괴된 것은 아니다. 단지 체념했을 뿐이다. 이들은 그 자신을 죽일 것이다. 철저히 괴롭히고, 웃으며 자신의 죽음을 바라보겠지. 지나친 억측일 수도 있지만, 사람은 이익과 감정에 휘둘리는 생물이다. 성우가 지나온 생애동안에 일어난 간접경험은 그것을 증명하기에 충분했다. 10테라바이트에 가득 찬 마이크로칩의 정보를 4년이란 시간을 투자해 뇌 속에 집어넣은 그가 아니어도 쉽게 도달할 수 있는 결론이다. 정신이 육체로부터 점점 멀어져갔다. 목에 계속되는 압박에 신경계고장이 생겼다. 몸이 축 늘어지고, 피가 몰린 얼굴은 홍시처럼 붉게 달아올랐다. 그러나 아직 죽은 건 아니다. “이봐, 죽을 것 같은데? 이대로라면 너무 편한 거 아냐?” “그건, 그렇군.” 교살은 결코 편한 죽음이 아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편하다고 한다. 그들은 고통의 익숙함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꽤 오랜 시간동안 목을 졸라 괴롭혀 왔으니 이제 목 조르는 것에 대한 통증은 몸 자체가 망각했을 터다. 결코 원하지 않는 결과다. 그들의 분노는 그렇게는 풀리지 않았다. 성우는 희미한 정신 속에서 쇠 긁는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파공음을 들었다. 푹― 툭! 서걱― 캉! “!!!!!!” 성우는 몸속 깊은 곳에서부터 잠재된 모든 감정이 일제히 폭발하는 것을 느꼈다. 그 모든 감정을 하나의 행동에 쏟고 있었다. 비명 끝에 절규. 목젖을 뚫고 목뼈에 걸린 창날과 옆구리를 거칠게 가르고 척추에 걸린 칼날. 일부러 뼈는 남겨뒀는가. 남자들의 웃음소리가 자극적으로 들려오기 시작했다. 치명상이었으나 절명상은 아니었다. 죽음 앞에 고통은 순간이라고 누가 말했는가. ‘모든 건 역시 상상에 불과해.’ 성우의 세계는 그 생각을 끝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피바다 한 가운데 내장을 흘린 채로 꼬꾸라진 시체를 보던 검수와 창수는 서로를 보고 중얼거렸다. “찝찝하군.” 뭔가, 뒷간에 갔다가 뒤처리를 안 하고 나온 느낌이 강하게 머리를 때렸다. 그러나 끝내 그들은 그 의미를 알 수 없었다. “근데, 양손의 의미는 뭐냐.” 시체의 양손에는 가운데 손가락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아있었다. Fuck sign― 지구권 어느 곳에서나 통용되며, 하는 순간 맞아죽을 걸 각오해야 하는 핸드 랭귀지다. 이곳의, 이 세계의 문화는, 현실과는 달랐다. “음?” 검수의 푸른 눈동자가 이채를 발했다. 시체가 갑자기 사라져버린 것이다. 피와 내장이라는 흔적조차 말끔히 . 시체가 있던 자리에는 피와 내장은커녕 토실토실한 버섯 이십 여개만이 남아 있었다. “우리들 설마, 버섯의 정령을 죽인 건가?” “하하하··· 그런 게 있었냐?” “신산술사神算術士조차 알지 못하는 정령은 꽤 많으니··· 있을 지도.” “······.” “하하···” “하하하···.” “비밀이다.” “비밀이지.” 20여개의 버섯을 둘러싸고, 둘의 범행은 조용히 묻혀가는 것 같았다. 삐이이이―― 귀를 멍하게 울리는 소음이 들렸다. 순간 막혔던 것이 탁 풀리는 느낌과 함께 상쾌한 감각이 뇌를 거쳐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방금 전까지 깊은 어둠을 만들고 있었던 눈커풀이 열렸다. “······.” 천장이 보였다. 움직여본다. 손가락이, 손목이, 팔꿈치, 어깨, 허리, 다리! 평상시보다 오히려 상쾌한 기분으로 몸을 일으켰다. 살풍경한 방. 슬립머신. 호흡. 그리고 빛을 느꼈다. 살아···있다. 아픔도 없고, 정신은 맑다. 가슴에도 목에도 상처는 없었다. 고통의 잔재는··· 없었다. “···꿈···이었던 건가?” ―――――Lie or Truth··· Really? chapter 2, Reckless day ――――――Timing and Reckless. 쾅―――!! 젊은이의 유쾌한 목소리와 함께 매그넘의 44구경 총구가 성의 없이 겨눠졌다. 정조준이라는 딜레이도 없이 대포소리에 비견되는 폭음과 함께 새까만 총염이 토해진다. 총알은 슬로우 모션처럼 느리게 궤적을 남기며 방금 전 잠에서 깨어난 성우에게 다가왔다. 성우는 총알이 몸에 아슬아슬하게 닿기 전에 땅바닥에 구르는 하나의 물건을 리얼타임으로 총처럼 들어 쏘았다. 총알이 심장에 닿는 순간. 파직― 3차원 홀로그램 영상 광고는 신기루처럼 흩어졌다. “후우, 간 떨어지게 하고 있어.” 리모컨을 신경질적으로 땅바닥에 던진 성우는 시계를 보고 옷을 갈아입었다. 6시 5분을 지나고 있었다. 월요일 아침 6시부터는 세면, 아침운동, 식사, 준비물정리 시간이었다. 물론 스케줄은 여동생 것이고, 이 시간만큼은 성우도 따르고 있었다. “아··· 리메이크 완성이었던가.” 학교에 갈 준비를 마친 성우는 다시 리모컨을 들어 컴퓨터를 켰다. 전쟁이 없던 때, 우후죽순처럼 발생했던 판타지 소설을 영화나 애니메이션으로 제구성하는 일은 2060년대부터의 유행이었다. 편리함으로 무장한 대신 사회적 감성도는 낮아져버린 요즘 시대에 과거의 소설 같은 건 일상의 빛이라 할 수 있었다. 옛 도서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써는 좋은 일이다. “타이밍이 안 맞아서 문제지.” 자신에 대한 현실감이 없는 순간에 그런 광고가 나올 건 또 뭐냐. 덕분에 다른 의미로 리얼리티를 찾게 되었지만 정말 자신이 죽은 게 아닐까 의심했던 순간이었다. 샤워룸의 거울 앞에 섰다. 평소와는 묘한 이질감이 나긴하지만 동시에 99%에 부합되는 동질감을 가진 녀석이 손을 뻗으면 닿을 만한 그곳에 서 있다. 레이저 커터 된 깔끔한 단발, 검은 눈동자, 남들에게 꿀려본 적 없는 미형외모, 건장하진 않지만 날렵한 체격. 순간, 불길한 영상이 거울 안에 올랐다. 이 몸이 죽는 광경의 생중계. 목에선 피분수, 옆구리는 내장의 홍수, 뼈에 전달되는 고통은 뇌를 비우고, 얼굴은 창백함과 뜨거움을 믹스한 죽은 보랏빛, 입은 끝없이 소리 없는 절규를 한다. 구역질이 치밀어 올랐다. ‘정말 그게 꿈인가.’ 쏴아아아아――― 적당한 온도의 물이 그의 몸을 둘렀다. 그것은 마침 극도의 피곤에 처한 그의 정신을 깨게 했다. “앗! 제길, 차갑잖아!” 평소에 안 하던 욕설이 절로 나왔다. 이 정도면 과장 보태 절대영도 수준이다. 호스를 잠그면서 자동화 장치를 보니, 과연 수동으로 되어있었다. 누군가의 조작이다. “성하 녀석······.” 이번 타이밍은 좋았다. 자칠 잘못했으면, 샤워장에 토사물더미를 쌓는 엽기적인 일을 벌였을지도 몰랐다. 성우는 상관하지 않기로 했다. 빌어먹을 꿈에 대해서도. 동생 성하의 장난에 대해서도. 트라우마Trauma처럼 남을 수도 있었으나, 이미 트라우마 따윈 뇌 안에 가득 차 있다. 이제는 분류해서 구겨 넣을 수도 있을 것이다. 멋지신 외할아버지를 둔 덕분에 할 수 있는 망할 일이다. 망치질 같은 노크가 샤워장 안을 울렸다. 마침 성우가 샤워를 끝냈을 때였다. “빨리 나오셔! 밥 차려 놨으니까!” 동생에 재촉에 성우는 수건으로 대충 닦은 몸을 건조기에 말리고 팬티를 입은 후, 욕탕 안에 준비된 교복을 입었다. 주름이 잘 잡힌 하얀 와이셔츠에 벤드넥타이를 매고 감색 바지를 입으니 교복이 아니라 남성 정장이라는 느낌이었다. “맘에 안 들어.” 벤드넥타이의 중간부분이 뚝 끊어져있었다. 모양새는 그럴듯했지만 누가 멱살이라도 잡는다면 단숨에 풀려버리고 말 것이다. 누가 끊어놓은 건 아니었고, 어딘가에 마모된 모양이었다. 그렇기에 더욱 불길했다. “구두끈도 아닌데, 뭐.” 그의 강철 같은 무신경함이 다시 발휘되었다. 성우가 주방에 들어가기 전, 본 광경은 언젠가 많이 봤던 모습이다. 검은색 레이스가 달린 스포츠용 속옷만 입은 채로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서 TV를 보는 여성. 소파 앞에 탁자 위에는 빈 맥주캔이 가득했다. 정돈되지 않은 부스스한 머리카락은 전쟁이 일어났나, 걱정해볼 정도였다. 그러나 머리카락의 불안정정도로 가려질 미모가 아니다. 선천적인 동안이라 40대 전반의 나이에도 20대의 팽팽함을 가지고 있었다. 한마디로 소설에나 나올만한 캐릭터인 것이다. (주)자가 붙는 대기업 비서실장을 하고 있는 오피스 레이디. 철저한 일처리와 시원한 말투, 연예인 뺨치는 외모로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사내(社內)에서의 인기는 대단하다고 한다. 그런 명성과 신뢰를 받는 사람치곤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으나, 성우에겐 암울하게도 소설 쓰는 재능은 없었다. 그녀의 이름은 유현정. 허벅지와 어깨라인을 제멋대로 드러내는 선정적인 포즈를 남자 앞에서도 제멋대로 취하고 있는 여성은 불행히도 그의 엄마였다. “여~ 아들, 좋은 아침인가!” 그녀의 남성적인 어조에 고운 목소리는 묘하게도 어울렸다. “일처리는 잘되셨어요?” “하암, 일요일을 몽땅 일에 투자한 만큼, 성과는 있었지. 덕분에 3일간은 포상휴가다.” “그래봤자, 휴가 반납하시겠지만요.” “···가정파탄이 일어나지 않았는가 싶을 정도로 삭막한 가정을 불쌍한 월급쟁이의 퇴근길에 안겨주는 재미없는 남매들은 할 말 없다 뭐.” 가정파탄, 이미 일어났는데요. 성우는 간신히 말을 삼켰다. 문득, 성우의 얼굴을 유난히 세세하게 쳐다보던 그녀가 성우의 얼굴을 스윽 만지며 물었다. “요즘 어떤 화장품 쓰니? 이 깨끗한 피부, 반할 것 같아.” 소름이 돋아 올랐다. 아가페적 사랑이 담긴 것 같은 매우 부드러운 손길이지만 동시에 끈적끈적한 불안감이 고개를 들고 있었다. “하아, ···시키고 싶다.” “에?” 성우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여장시키고 싶다. 드레스를 입히고 싶다. 예쁘게 코디하고 싶다. 베리베리큐티하게 꾸미고 싶다. 사랑의 하트로 장식해주고 싶어져~.” 성우는 한동안 침묵하다가 툭 내뱉었다. “그러시던지.” “······재미없는 반응이다. 남자가 되어가지고 자존심도 없는 거냐? 그래가지곤 훌륭한 사람이 되지 못해.” “신경 안 써요.” 그녀는 탈력된 채로 소파에 몸을 던졌다. “그런데 진짜 화장품 안 쓰냐?” “안 써요.” 성우의 대답은 칼날 같았다. “근데, 그렇게 깨끗해요? 잘 모르겠는데?” “···눈알 갈아 끼워라. 수술비용은 친히 대주지. 밤새워 뭘 하는 모양인데, 그 때문에 눈이 나빠진 거냐? 음, 그러고 보니 뭐하는 거냐? 새벽 3시가 되어서도 불이 켜져있던데··· 혹시······?” 음흉스럽고 수줍은, 언밸런스로 한 없이 치닫는 미소에 성우는 그녀의 다음 말을 유추할 수 있었다. 성우로서도 이건 대답하기 곤란했다. “오빠, 빨리 안 와!” 여동생의 히스테릭한 음성이 그렇게 고울 줄은 지금까지 몰랐다. 그는 급히 주방으로 달음질했다. 평소에는 무신경한 그도 자신의 빈틈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어머니 앞에선 장난감이 될 수밖에 없는 모양이다. “사춘긴가, 좋은 때다.” 어딘가 의미심장한 소리는 못 들은 걸로 하자. 아침밥은 맛없었다. 계란말이는 얇고 푸석푸석했고, 된장국은 미각테러수준으로 짰다. 새까만 소시지 구이는 그나마도 양이 적었고 개중 밥을 효율적으로 소화시킬 수 있는 김치는 먹을 만했으나(공동음식이잖아!), 눈앞에 펼쳐진 다른 세계가 있었으니 마음이 편찮았다. 동생의 두껍고 먹음직스런 계란말이를 훔쳐볼까, 생각할 정도였다. 서로의 앞에 펼쳐진 반찬은 그렇게 극과 극이었다. ‘정말 치졸하다.’ 어제 있었던 트러블 하나에 결국 피해를 입고야 말았다. 보복을 해주자, 라는 생각을 안 한 것 아니었지만 결국 먼저 태어났다는 점에서 이해를 하고 넘어가는 성우였다. ‘먹을 수만 있으면··· 되는 거지.’ 시간이 지나고 괘종시계가 흔들리며 울었다. 총 일곱 번. 7시, 슬슬 등교시간이었다. 성우는 문득 생각났다는 듯 조용히 말을 꺼냈다. “음 성하야. 내 생각이 잘못된 건지 어떤 건지는 확신이 안 가는데···.” “음? 무슨 소리야 갑자기?” “너 이번 주 주번 아니냐?”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성하가 손에 든 책가방이 날았다. “이런 바보! 그런 건 진즉에 말해야지!!” 성우는 새빨간 자국이 남은 얼굴을 쓰다듬으며 변명했다. “나도 방금 생각난 거라니까. 내가 주번도 아닌데 뭐.” 거짓말이다. 9년 전의 기억도 키워드를 떠올리는 것만으로 어제 일처럼 떠올릴 수 있는 성우였다. 학교라는 키워드에 주번의 기억이 떠오르지 않을 리 없었다. 다만, 성하를 비롯한 그의 주변 인물들은 그의 그런 능력을 알지 못하는 게 문제다. “어쨌든 빨리!” “뉴스를 보고 가야 하는데······. 잠깐, 내가 왜 너랑 같은 시간에 가야 하는 거냐.” “오빠니까!” “···이럴 때 만인가.” 가슴 속에서 우러나오는 말이었다. 성우와 성하의 시끄러운 등교소동이 원인과 함께 사라지자 16년간 홀몸으로 그들을 키운 어미, 유현정은 뒷머리를 북북 긁으며 TV채널을 돌렸다. <속보입니다! 방금 전, 과격 무정부주의자Anarchist단체인 블루 이스트Blue East의 일원들이 빛고을 17호 지하철을 점거했습니다!> “호오, 요즘의 테러도 데몬스트레이션이 꽤 쓸 만한데?” TV화면에는 테러리스트는 괴물처럼 생겼을 거라는 많은 사람들의 망상을 허물고 양복정장차림의 멀쩡한 중년인이 떨고 있는 사람들을 배경으로 힘찬 논조로 자신들의 요구를 말하고 있었다. 첫째, D-no.0 파일을 공개하라. 둘째, 최근에 너희들이 붙잡은 ‘그’를 풀어 달라. 갖은 미사여구를 제외하면 이 정도가 다였다. 요구에 응하지 않는다면 지하철 안의 생명은 책임질 수 없다는 협박성 말과 함께 테러리스트는 모습을 감췄다. 그에 대해 경찰기자회견과 대책토론이 급격히 이뤄지고 있는 반면, 언론들은 테러리스트가 한 말인 ‘그’와 D-no.0 파일에 대해 조사, 또는 추측성 기사를 남발하고 있었다. 발생한지 겨우 10분만이라 글 자체가 날림이고 문법이 틀린 기사도 꽤 있었다. 어느 순간, 그녀의 얼굴에는 흥미가 지워져 있었다. “하암, 잠이나 자야지. 바깥세상 일 따윈 될 대로 되라~” 어쩌면, 아들의 무신경함은 그녀에게서 유전된 게 아닐까 한다. 월요일 am 6:30. 인적이 뜸한 신설도로였다. 이 도로 끝에는 신개발 사업이 한창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었다. 도로 한 가운데엔 스포츠 스타일의 경찰차 한 대가 놓여 있었다. 경찰차에서 2m 쯤 떨어진 곳에는 시체 두 구가 쓰러져 있었다. 머리에 매그넘탄 한 발씩, 두 인두편은 끔찍하게 흩어져 있었다. 그 중 한 사람의 뇌는 구식 전자형 브레인 코어 융합이 되어있었기에 더욱 그로테스크 해보였다. 복장은 전형적인 경찰복이다. "제길! 일이 생각지도 못한 데서 틀어지다니!" 거칠게 욕설을 내뱉으며 30대 중반의 사내, 민강은 2006년도 생산품인 데져트 이글Desert eagle을 회수했다. 시체 두 구의 앞에는 운송용 승합차 한 대가 서 있었다. 민강은 그 안 조수석에서 탄환을 발사해 경찰을 죽인 것이다. 운전자석에 앉은 그의 수하는 벌벌 떨고 있었다. 이 상황은 모두 그가 자초한 것이었다. 흥분된 마음에 도로에서 150km를 밟아버렸다. 인적이 뜸한 도로라 그의 취미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고개를 들었던 것이다. 비록 민간인은 잘 다니지 않는 길이라 하더라도 경찰은 코스를 익히기 위해 순찰을 한다. 그리고 걸린 것이다. 평소 때라면 딱지를 때고 말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방금 전 광주연합은행을 싸그리 털어오지 않았는가. 광주연합은행의 모든 돈은 지폐가 아닌 보석이었다. 그것도 경매에서면 평균적으로 하나당 3000천만은 나갈 고액의 가치를 지닌 보석들이다. 그런 보석을 다섯 주머니나 챙겨왔다. 총 예상 수익금 1300억, 그야말로 대털이다. 그러나 경찰에게 걸려버렸다. 요즘 경찰 역시 최첨단이라 망막에 떠오른 사람의 신원 정보는 1~2분 정도면 검색할 수 있었다. 이런 기록이 경찰에 남아버리면 그들은 끝장이다. 그리고 경찰을 만난지 30초도 안 되는 짧은 시간, 각기의 전문가 11명을 이끄는 민강은 결국 죽기 아니면 살기 식으로 살인을 감행했다. 별 몇 개 더 달더라도 안 잡힐 가능성이 훨씬 높은 검색정보를 남기지 않겠다는 행동판단이었다. "야, 이 개새꺄아! 거기서 그 따위 짓을 하면 어쩌겠다는 거야!" 민강은 운전수를 마구 구타했다. 기세를 보면 비오는 날 먼지 나도록 팰 것 같았는데, 구타는 30초 만에 끝났다. 시간이 아까웠던 것이다. 그래도 끔찍한 전쟁을 최전선에서 경험했던 민강의 주먹은 이미 흉기라 그것만으로 운전수는 빈사상태에 빠졌다. 민강은 운전수를 뒷좌석으로 던져버리고 차를 몰기 시작했다. "저 새끼 누가 데려왔어! 이런 중대사에 흥분하는 놈이라니!" "죄송합니다, 그래도 서울 강남에서는 방현철 하면 꽤 날리던 놈인데······." 오래전부터 신뢰하던 부하인 이경삼이 뒷좌석에서 조수석으로 넘어오며 대답했다. "지가 아르센 루팡이라도 되는 줄 아는가! 썩을!" 수백 년의 세월을 넘어 모리스 드 르블랑이 무덤에서 기어 나와 통곡할 비교를 하며 민강은 엑셀레이터를 더 강하게 밟았다. 어느새 속도계는 180km를 넘어가고 있었다. 구타당한 방현철은 억울해할 것이다. 물론 깨어있다면. "어쩌실 계획입니까." 그 물음에 민강의 대(對)정보전으로 개조된 브레인코어가 맹렬히 자료를 토했고, 경험이 자료를 바탕으로 이 사태를 무사히 벗어날 방법을 도출했다. "충장로 14번가로 간다!" "그곳은···?" "그래 지하철 종착점. 말을 바꾸자면 시승역이 있다. 우리는, 우리답게 살아남는다." 그들 중 민강을 포함한 6명은 군 내각특전정보부 소속 23소대 출신. 지옥에서 살아 돌아온 역전의 용사들이다. 그들은 다행이 러쉬 아워가 되기 전에 충장로로 들어왔다. 앞으로 일어날 일의 피해자들에게는 불행이었다. 충장로 14번가 지하철역. 빛고을로 이어지는 3번, 12번, 17번, 22번의 종착역이자 시승역이다. 차가 지하철 입구에 도착하자마자, 그들은 복면을 썼다. 미리 숨겨두었던 기관총을 들었다. 모델은 가지각색이었으나 탄환은 소총탄으로 통일되어있었다. 그들은 미리 작전을 짠 대로 이제 막 출발하려는 열차를 30초의 시간을 남겨두고 차에서 내려 달리기 시작했다. 그냥 달리는 게 아니라 놀란 군중들을 향해서 총을 난사하며 달렸다. 특별한 목표를 가지고 쏜 것은 아니지만 사람들이 많이 몰려있는 지하철이기 때문에 쏘는 데로 사람들은 육편과 피를 흩뿌리고 넘어졌다. 열차입구 도착까지 15초가 걸렸고, 따라오려는 경비원을 모두 처리하는데 5초가 더 걸렸다. 도착 후, 지하철 컨트롤 룸을 완전히 장악. 출발까지 예정시간을 4초 남겨놓은 채로 지하철문은 강제로 닫혔다. 때 아닌 괴인들에 놀란 사람들이 지하철문을 통해 바깥으로 나가려고 아웅 했을 때, 강제로 문이 닫히는 바람에 목을 바깥에 내두고 죽은 사람도 있었다. 비명성이 마구 지하철을 덮쳤으나 비명성보다는 총성이 더 컸다. 그것으로 트레인 패닉train panic은 끝났고, 은행털이범들의 계획은 시작이었다. 투툭― 코드가 끊기는 소리와 함께, 카메라 앞에 섰던 양복 남자의 몸이 기둥처럼 뻣뻣하게 쓰러졌다. 그런 남자의 머리 위에 군용 워커가 신경질적으로 내리 앉았다. 민강은 송신용 유선을 왼쪽귀밑에 있는 수용장치로 회수했다. 2044년 형, 군용 코어 네크워킹 시스템에 달린 모델이었다. 민강, 그는 양복 남자의 코어를 해킹해, 그 사람의 얼굴을 팔아 방송사로 터무니없는 성명聲明을 발표한 것이다. D―넘버 제로 따위의 파일은 본 적이 없다. 최근 그들이 붙잡은 누구라는 특정인은 본 적도 없다. 단지, 이 성명은 경찰과 언론을 헷갈리게 하는데 목표가 있을 뿐이다. 이 덕분에 그들이 턴 은행에 대한 정보는 묻힐 것이다. 전쟁터에서 배운 교란작전, 그 간단한 응용일 뿐이다. “쳇, 전쟁터에도 나간 적 없는 새끼들이 코어를 쓰는 꼴은 못 보지. 그래도 덕분에 일이 잘 풀렸으니 고맙군. 그런 의미에서······.” 민강은 총구를 겨눴다. 과녁은 양복남성의 관자놀이. “위대한 혁명전사로 평생을 남게 해주지.” 탕―! 매캐한 초연이 퍼졌다. 위대한 혁명전사, 죽음으로써 탄생했다. 그 사실로 파고 들어가면, 단지 비밀을 지키기 위해 사라진 생명일 뿐이다. 뇌수와 코어가 방전을 일으키면서 새어나오고, 걸쭉한 피가 스틸로 코팅된 바닥을 적셨다. TV 생방송에 방영되었던 그 지하철이다. 순식간에 이뤄진 죽음에 여자들의 비명소리와 조그만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뒤섞여 아비규환을 일으켰다. “시끄럽군. 어째서 이 시간에 사람들이 많은 거야?” “한솔초등학교의 소풍이랍니다.” “이거 미안해지는군. 하지만 이것도 좋은 추억일 거야. 세상에 테러를 당한 시민이라니, 복권당첨보다 더 힘든 확률이라고.” 맞는 말이다. 복권회사는 세계에 5000여 개는 산재해 있을 테니까. “글쎄요. 추억으로 남을 지, 하늘로 가지고 올라갈지는···.” “거기까지. 누가 들으면 오해할라!” 이경삼의 말에 민강은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나저나 너무 많은 것도 안 좋은데. 관리하기 불편하니까.” “총알은 넉넉히 있긴 하지만, 부족할지도 모르겠군요. 찬성입니다.” “좋아, 다음 역에서 일부 방출한다. 단 4초만이지. 그 정도면 꽤 많이 나갈 것 같지 않아?” “적어도 이 시끄러운 소리만큼은 줄일 수 있겠죠.” “지금 줄일 수도 있어, 볼래?” 탕―! 제대로 된 조준도 없이 총구 밖을 튀어나간 총알은 떨고 있던 아이를 달래던 어미의 관자놀이를 뚫고 그녀가 기대어있던 창문에 박혔다. 방탄소재라 쉽게 깨지지 않은 창문은 붉은색 페인트가 흠뻑 묻게 되었다. “엄마···, 엄마···.” 탕―! 울고 있던 아이의 머리가 박살났다. 연한 아이의 두개골은 사방으로 흩어졌다. “영혼의 미팅은 기본이지.” 아이와 어머니의 시체가 흘린 피는 시트를 그대로 적시고, 그 곁에 있는 사람들의 옷까지 물들였다. 결과적으로, 지하철 안은 조용해졌다. 툭―하는 탄피 굴러가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좀 심하군요.” “어차피 조금 있으면··· 아, 비밀이지.” 민강은 목 뒷부분을 슬쩍 건드렸다. 코어에 첨가된 통신기가 단방향통신 상태로 바뀌자, 각각 열차 한 칸씩을 지키고 있는 수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다음 역에서 사람을 방출할 것이다. 허튼짓 하는 놈 있으면 쏴 죽여 버려.” 치이익― <저어, 대장, 년은 어떻게 합니까?> 수하 중 하나의 목소리였다. 군대에 있을 때부터 있던 인연이 아니라, 이번 일에만 동업을 한 녀석이다. 골치가 아파왔으나 이해 못하는 건 아니었다. 도둑질을 하면서 발생한 흥분이 성욕으로 연결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결국 민강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아 대답했다. “니그들 맘대로 해, 개자식들아!" 민강은 통신을 닫았다. “제길, 시간이 걸리더라도 동업 따위 하는 게 아니었는데!” 굳이 열두명의 인원을 맞춘 이유는 광주연합은행의 금고의 잠금장치가 10개나 있어서였다. 금고는 하나의 잠금장치가 풀릴 때마다 특정한 전파를 발생시키는데, 그 전파는 각각 지역경찰기구인 가디언, 경비회사, 은행장에게로 퍼진다. 동시에 10개를 푸는 데는 열쇠 역할을 맡은 10명의 해커가 필요했고, 최대의 위협인 전파를 잡기위해 고안된 전파수거기(Electric wave removal machine)를 운용하는 데는 2명의 사람이 필요했다. 은행털이는 절도범죄의 특정상 시간이 매우 촉박하기 때문에 결국 더 나은 선택을 위해 6명을 추가했다. 이들이 없었다면 전파수거기를 4번 정도 더 돌려야 했을 것이다. 전파수거기를 가동시키는데 걸리는 시간은 5~10분 정도이기 때문에 여러모로 위험했다. ‘교토사주구팽狡兎死走狗烹. 허접을 써먹으면 버려야지.’ 은행을 털기 전부터 짜둔 계획은 꼭 이룰 거라 다짐하며 민강은 시간을 살폈다. 7시 10분. 그 시침과 분침은 그 시간을 향해 도달해가고 있었다. 곧 다음 역에 도착할 시간이다. “오늘 준비물 중에 빼먹은 건 없나, 다이아몬드 나이프, Y자형 보드, 순간접착제 탄력강화 버젼, 초전도회로용 PDA··· 이것으로 끝인가? 앗, 가장 중요한 메탄하이드레이트 석질石質!” 성우는 어깨에 멘 스포츠백을 가슴 앞으로 들어, 속 내용물을 확인하고 있었다. 현성대학 부속 고등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인 그는 통합수업인 오전 과목은 이과, 재량수업인 오후과목은 공과工科에 등록되어있다. 오전수업은 수업용 컴퓨터만 있으면 되지만, 오후수업인 공학은 실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준비물이 필요했다. 오늘부터 나흘 후까지 치러질 수업은 블루(해양) 에너지 발전과 원리에 대한 실습이었다. 직접 구조를 만들고, 프로그램까지 구성하는 게 실습의 전부였다. 한 마디로 고난이도의 수업인 것이다. 현성대학 부속고등학교가 명문인 이유도 거기 있었다. "찾았다." 메탄하이드레이트 석질은 팩에 쌓인 채로 보조가방 속에 들어있었다. "그런 거 할 시간 있으면 뛰기나 해!" 성하는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7:10분에 도착하는 지하철을 타려면 걸어서 20분 거리인 지하철역까지 10분내로 주파해야했다. 그러나 그녀의 말은 평소와는 다르게 힘이 없었다. "음? 좀 더 빨리 달릴까?" "됐어!" 필사적으로 달리는 그녀와는 달리 성우는 그녀와 같은 속도로 달림에도 많은 여유가 있는 것인지, 아직 땀한방울조차 흘리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아무리 성우가 남자라고 할지라도 오후과목이 체육계, 그것도 육상부인 성하를 달리기로 이길 순 없었다. 운동신경 면에서도 그녀가 더욱 낫다고 할 수 있었다. '이상한 걸?' 성우는 위화감이 들었다. 사실 진작부터 들어야할 위화감이었다. 육체적 능력이 급상승했던 것이다. 위화감을 못 느꼈던 것은 선천적인 무신경함도 무신경함이지만 우선 몸을 사용하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었기 때문이다. 마치 전부터 써왔던 육체인 것처럼. 지금보다 두 배 정도는 더 빨리 달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무리를 하면 그것보다 더 빨리 달릴 수 있을 것이다. 비정상적이다. '어째서?' 꿈이 생각났다. 묘한 리얼리티를 가진 그곳에서 자신은 이와 비슷한 속도로 움직였던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은 꿈일 뿐이다. 그것도 성우 자신이 처참하게 죽어버리는. "오빠! 너무 빨라!" 뒤편에서부터 성하의 목소리가 들렸다. 성우는 속도를 줄였다. 무심코 힘을 더 해버린 결과가 바로 이것이었다. 그럼에도 지치지 않았다. 체력이 바닥남에 따라 성하의 보행속도가 느려졌다. 성우는 성하의 걸음에 자신의 걸음을 맞췄다. 어느 정도 숨이 골라지자 성하가 물어왔다. "어째서··· 하아··· 오늘은 오빠가 나보다 빠른 거야?" "음, 사실 나는 너의 사랑스럽고 자랑스럽기까지 한 오빠를 모델로 한 XX연구소에서 나온 안드로이드로···." "헉헉···헛소리하려면 차라리 죽어." 성우의 농담에 화가 난 건지, 성하는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지하철 입구가 보이자 성하는 오히려 속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그 속도 그대로 계단을 9칸씩 뛰어 내려갔다. "하하하, 나 먼저 간다! 아! 착한 어린아이는 따라하지 마세요~" "그 지기 싫어하는 성격, 민폐다." 성우는 점잖이 충고를 했지만 들렸는지 안 들렸는지는 미지수였다. 성우는 성하와는 달리 느긋하게 한 칸씩 걸음을 옮겼다. 동시에 스포츠 백에서 안경을 꺼내 썼다. 평범한 디자인의 안경이었지만, 그 성능은 안경의 원래목적과는 사뭇 달랐다. 단지, 시력을 향상하기만 위해서 오버테크놀러지에 속하는 나노머신이 바이오 시스템을 탑재한 채, 안경대를 형성하지는 않았다. 성우는 안경대에서 미세한 침 하나를 뽑아 귀밑에 박아 넣었다. 그 순간, 시야의 일부가 3차원 공간으로 변했다. 'Loading'이라는 단어가 시야 구석에서 반짝이다, 곧 Complete로 변했다. 안경대에서 발원한 나노머신이 무사히 연수신경을 통해 대뇌피질에 안착한 것이다. 성우는 오늘 뉴스를 검색했다. 오버테크놀러지가 집약된 안경대에는 송수신 무선 네트워크가 구축되어있었다. 이것은 브레인 코어의 일부성능과 같은 개념이다. 말이 인공장기지 생체기술부분을 제외한 모든 부분은 기계인 브레인 코어는 정보라는 개념 안에서 편이성이 컸다. 손을 거칠 필요 없이 생각만으로 정보를 찾아가는 시스템은 과거 일류해커들의 노하우로 무장된 정보검색 속도와 비견될 만 했다. 엄연히 브레인 코어는 인공장기로 등록된 것이고, 병과 사고로 인한 장기교체가 아니라면 추가 세금을 더 내야 하는 품목이었다. 특히 미성년의 뇌에 국가의 인정 없이 브레인 코어를 심으면 엄중한 법의 처벌을 받게 된다. 성우의 경우에는 뇌를 개조한 게 아니기 때문에 법에 저촉될 이유가 없다. 그 전에, 그가 쓰는 바이오 시스템 탑재 나노머신은 그가 직접 만든 것이기 때문에 문제될 이유조차 없었다. 주식투자로 버는 자금 중 반을 '이런 것'을 만드는데 투자했다. 10테라바이트의 메모리칩에 의거하여. 외할아버지의 유산에서 비롯된 지식인 것이다. 성우의 뇌파에 따라 반응한 나노머신은 성우의 시야를 넘어선 한 부분에 넷 뉴스를 띄워주었다. 망막을 통하지 않고 바로 시각에 도달한 정보는 눈을 통해보고 있는 것과는 약간 달랐다. 작게 느껴지긴 하지만 23인치 모니터로 보는 것같이 눈에 확실히 들어온다는 느낌일까. 성우는 급보부분에 접속했다. 접속자수가 굉장히 많은 모양인지, 초고속 무선통신기가 장착된 것임에도 화면을 띄우는데 지연시간이 생겼다. "오빠 빨리 와!" 7:10분이 아직 안 된 것 같은데, 지하철은 도착하고 있었다. 그 순간 그는 하나 괴이한 점을 발견했다. 지하철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수가 거의 없었다. 아니, 붉은 미니스커트가 인상적인 미인과 자신들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었다. 덕분에 성하와 성우는 사람들을 밀칠 필요도 없이 지하철을 향해 달릴 수 있었다. 지하철 문이 열렸다. 봇물 터지듯 사람들이 꾸역꾸역 밀려나왔다. 말이 꾸역꾸역이지 실제로 나오는 사람들은 별로 되지 않았다. 원체 지하철 문이 작기 때문이다. "공공규범도 지키지 않다니!" 내릴 문이 아닌 타는 문을 통해서 나오는 사람들을 보고 성하는 분노하며 사람들을 몇 명 당겨서 '빼버린' 뒤에 지하철 안에 '끼어서' 겨우 탔다. 덤으로 내리려는 사람들의 엉덩이를 힘차게 짜증을 담아 밀어주었다. 그 틈을 타, 성우는 성하의 곁으로 다가섰다. 곧, 문이 세차게 닫혔다. 안전장치는 프로그램 되지 않은 듯 했다. 그 순간, 성우는 귀청이 찢어질 듯한 비명소리와 함께, 하나의 글을 볼 수 있었다. <광주 지하철 17호선, 테러리스트들이 점거!> "···밟았다." 뭐를? 생지옥이었다. 비명과 울음소리가 뒤섞여 죽음의 하모니를 이뤄냈다. 안전장치가 해제된 채로 닫혀버린 지하철 문덕분에 신체가 분리되어버린 사람이 시야에 파악된 것만 해도 열다섯 명은 되었다. 지하철에 남은 신체는 가지가지였다. 상반신, 하반신, 머리, 한쪽 다리, 발, 팔을 제외한 전신, 정수리부터 사타구니를 경계로 나눠진 시체. 마치 인체시장이라도 되는 것 같았다. 차가운 스틸바닥은 사람들의 뜨거운 피와 배설물이 뒤섞여 추잡하게 적셔졌다. 역겨운 고통의 냄새가 코를 찔렀다. “아아아······!” 기세등등하게 지하철 안으로 들어왔던 때와는 다르게 성하는 하반신의 힘이 풀렸는지, 주저앉고 있었다. 눈물을 흘리는 그녀는 발작적으로 오빠의 팔을 잡고 있었다. 성우는 아팠지만 참았다. 그리고 자신의 몸을 인의 장벽에 최대한 숨겼다. 동시에 이런 상황을 연출한 연출가, 즉 테러리스트의 위치를 파악했다. 테러리스트는 한명으로 앞 칸으로 향하는 문 앞에서 서브 머신건을 들고 위협 또는 여성인질들에게 추파를 던지고 있었다. 복장은 눈코입만을 드러낸 전형적인 복면에 이종격투기 메이커의 이름이 붙은 T셔츠. 패션인지, 프롤레타리아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인지 모를 찢어진 청바지를 입었다. 다만, 청바지의 찢어진 부분에서 언뜻 보이는 정밀검사용 바코드는 그의 신체의 일부, 아니면 전신이 의체(依體), 즉 사이보그화 되어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들고 있는 총의 모델은 H&K MP5. 신뢰도는 높은 총이지. 근데··· 현재 정규시장에서 볼 수 있는 건 아닌데?’ 이상한 일이었다. 뉴스대로 이번 테러를 일으킨 게 정말 블루이스트라면 시대가 지난 H&K MP5따위의 외제 서브머신건을 쓸 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블루이스트의 전신은 세계의 수많은 전쟁을 경험한 베테랑 용병이다. 거기에 그들의 스폰서는 대외적으로 널리 밝혀지진 않았어도 아는 사람은 다 알 정도로 유명했다. 대한민국의 총기개발업체인 백강정밀이기 때문이다. 블루이스트가 사건을 일으키면 광고라도 하듯 백강정밀의 무기만이 남길 수 있는 흔적을 뚜렷이 남긴다는 게 그 증거다. 게다가 그들은 무정부주의자이긴 해도 부패정치인 몰살 같은 테러를 제외한 민간인 테러는 안 일으키는 주의다. 더 꼬집어보자면, 블루이스트의 당원들은 촌스러운 복면 따위 안 쓴다. ‘뉴스를 더 읽어보았다면 좋았을 것을!’ ‘뉴스를 더 읽어보았다면 좋았을 것을!’ 지하철 문이 닫히자마자 통신은 두절되어버렸다. 덕분에 미리 다운된 조그만 정보밖에 얻질 못한 상태였다. 범죄성명이 무언지, 요구사항이 뭔지. 성우는 하나도 몰랐다. 트르륵―! 삼점사로 나간 총알은 팔을 잃은 채로 비명을 지르고 있는 40대 중년인의 심장과 폐를 관통했다. “엥? 뭐야?” 찢어진 청바지의 테러리스트는 갑자기 사람이 죽자 총성의 진원지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뒤편에 있는 열차간문을 열고 나온 옛 군복(야전복)의 복면인이 쏜 것이었다. “어차피 죽을 거라면 빨리 죽여주는 게 도리가 아닌가.”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익숙하게 방아쇠를 당겼다. 글록의 총염이 곧 지하철 안을 뒤덮었다.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짧게 울렸다 사라지고, 곧 침묵이 차 안을 지배했다. 그렇게 시체는 늘어났다. 야전복의 테러리스트는 총알이 다 떨어진 탄창을 회수하고 새롭게 탄창을 장착했다. 탄창교환시간은 정말 순간이었다. ‘찢어진 바지하고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베테랑이다. 저 정도로 사람 죽이는 데 무감각하고, 조준조차 정확하다면······음?’ 성우의 팔에 전달되는 떨림이 점점 커졌다. 여동생은 갑작스런 공포에 적응을 한듯 벌써 유아퇴행증을 보이고 있었다. 그녀의 엄지손톱은 너덜너덜해지고 있었다. “오빠··· 오빠···.” 성우에게만 겨우 들릴 정도의 작은 목소리가 성아의 입에서 흘러나온다. 성우는 그녀의 등을 두드리며 더욱 몸을 움츠리게 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될 수 있으면 눈에 띄지 않는 게 목숨을 조금이라도 더 보전하는 방법이다. 살육을 끝낸 야전복의 테러리스트가 청바지의 테러리스트에게 무언가 은밀히 말했다. 성우는 무심코 귀를 기울여 보았다. “···통신주파수는 단방향으로만 갈 거다. 네놈은 기절하는 중이었으니 순찰중인 내가 수고하며 알려줘야 하는 거였지. 아, 희소식 하나 있는데, 여흥이 허락되었다.” “큭.” “그럼, 계속 수고해라. 더 이상의 실수는, 대장이 용서해도 우리들이 용서치 않아.” “···맡겨줘.” 야전복의 테러리스트는 열차간문을 열고 자신이 맡은 칸으로 돌아갔다. 동시에 성우는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을 힐끗 보았다. 사이거리는 약 5m 정도, 분명 자신의 청력으로 귓속말을 들을 수 있는 거리는 아니었다. ‘몸이 이상해졌어. 좋은 쪽으로······?’ 성우는 자신의 짐을 살펴보았다.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여동생만은 무사히 집으로 보내야 했다. ‘어머니의 잔소리는 감당하기 힘드니까.’ 쾅―! “제길!” 청바지의 테러리스트, 방현철은 열차간문에 주먹을 꽂았다. 때렸다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았다. 안전장치가 해제된 사이보그-팔에는 4mm두께의 합금도 가볍게 우그러뜨리는 힘이 있었다. “감히 날 우습게보고 있어!” 서울에서 그의 이름을 우습게 보는 사람은 없었다. 고액전문털이나 히트맨등. 위험한 방법으로 명성을 쌓은 그의 자존심은 이 상황을 용납하지 않았다. 단지 가속을 했기 때문에 이런 꼴을 당해야 하다니···. 하지만 쌓였던 흥분도 그의 얼굴을 떠올리면서 금방 꺼졌다. 민강. 이 계획의 리더. 그에게서 처음 계획을 들었을 때부터 방현철이란 인간은 그에게 반했고 또한 무서움을 느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는 그의 명령에 따를 준비가 되어있었던 것인지도 몰랐다. 이런 징계도, 그의 명령이다. 그는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화가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방현철은 근처에 반반한 여자를 찾기 시작했다. 동시에 코어의 안전장치 바깥에 있는 하나의 회로를 건드려 정신을 흥분상태로 만들었다. 쾌락물질의 과도한 분비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인공심장의 박동수가 1.3배로 늘어났고, 눈은 새빨갛게 충혈 되었다. 몸이 가벼워지는 듯한 착각이 들었고, 근육이 수축과 이완을 반복하는 시간이 짧아졌다. 무심코 머신건의 방아쇠를 당기기까지 했다. 다행히 안전장치가 걸려있는 터라 유혈사태로 번지지는 않았다. 과거 브레인 코어를 민간용으로 개발할 당시, 첨부할 기능으로서 논란이 많았던 항목이었다. 전쟁당시의 군인들에게나 효율적으로 쓰일 시스템. 이성을 상실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민간용으로는 1급 제한을 걸어둔 항목이었다. 그러나 암흑가에서는 이런 제약을 강제로 풀어주는 브로커가 있었고, 이 쾌락을 맛본 코어유저들은 강한 법의 규제에도 불구하고 브로커를 찾아들어갔다. 최근 쾌락주의범죄가 늘어버린 이유를 꼽자면 대부분이 이런 코어의 부적합한 사용 때문이라 할 수 있겠다. 열차 안에 있는 사람들의 수는 대략 30~40명 쯤 되었다. 그에게는 좋은 운이 작용했는지 그 중 20명 이상이 여자였다. 그는 여자를 제외하고 남자들은 한 구석에 몰아넣고 머신건을 갈겨버리는 게 좋겠다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일어나는 충동을 억제했다. 될 수 있으면 인질을 함부로 죽이지 말라는 민강의 명령은 쾌락보다 위에 있었던 것이다. ‘죽이지만 않으면······.’ 명령과 충동이 버무려져 황당한 결론을 내어버렸다. “여자들은 다 벗어! 남자들은 저쪽으로 찌그러져있고!” 당연히 그의 말대로 되진 않았다. 현실에 순응한 소수의 여인들만 그의 말에 얌전히 따를 뿐 대부분의 여인들은 수치심으로 벌겋게 된 얼굴로 그의 말에 따르지 않는 무의미한 반항을 했다. 그것도 곧 방현철이 머신건의 안전장치를 풀고 그런 여자들 곁에 있는 남자들의 다리를 향해 난사하자 사라졌다. 다리가 피투성이가 된 채 차가운 스틸바닥을 기던 남자는 곧 쇼크사로 죽었다. 과도한 스트레스와 갑작스런 충격이 만들어낸 희생자였다. 압도적인 죽음의 공포는 모든 반항심을 희석시켜버렸다. 울먹이는 소리와 옷자락이 내려앉는 소리가 블랜딩되어 추잡한 분위기를 형성했다. 방현철은 오른쪽 구석에 박혀있는 남자들과 바닥에 주저앉아있는 나체의 여인들을 번갈아보았다. “음··· 역시 만화처럼은 안 되나 보군.” 무슨 상상을 한 것인지, 방현철은 남자들의 하체를 보고 중얼거렸다. 남자들의 하체에는 무슨 특별한 것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음, 아! 너는 사나이다!” 방현철이 가리킨 치킨헤드 스타일의 가죽자켓의 청소년. 얼굴에 피어싱을 잔뜩한 게 눈에 띄는 불량청소년의 하체는 뭔가 특별했다. 사타구니의 바짓단이 남들보다 수배는 더 불룩 튀어나왔던 것이다. “······.” 불량청소년을 제외한 남자들은 그를 보고 경멸의 시선을 던졌다. 불량청소년의 하체는 그들의 시선을 느끼자 자연스럽게 수그러들었다. 그에 방현철의 탄식이 뒤따랐다. “아아! 너의 사나이는 죽은 것이냐!!” 투두두둑―! “끄아아악!” 머신건에서 뿜어진 총탄이 불량청소년의 사타구니를 갈아버렸다. 불량청소년은 하체에 손을 댄 체로 스틸바닥을 기었다. 게거품이 그의 입을 타고 흘렀다. “아, 이런, 조금 흥분했군. 너무 안타까웠다고. 뭐, 한명쯤은 죽여도 되겠지.” 방현철의 정신상태는 정상이 아니었다. 언제 총을 난사할지도 모르는 상태에 열차 안의 모든 사람은 공포에 떨었다. “으흐흑.” 방현철의 민감해진 귀는 그 순간에서도 남자들의 집단에서 들린 여성, 정확히는 여자아이의 목소리를 포착했다. “비켜.” 방현철은 남자들의 인벽을 발로 후려 찼다. 호쾌한 타육음과 함께 다섯 명의 남자들이 그의 발길질 한 방에 한쪽 구석으로 뭉텅지어 날아갔다. 시야의 장애물이 사라지자 주저앉아있는 여자아이와 그녀를 달래는 한 소년을 볼 수 있었다. 성하와 성우였다. “어째서 이 아이는 명령에 따르지 않았지?” “여동생을 건드리지 말아주시겠습니까.” 성우는 겁먹은 표정으로 성하를 끌어안았다. 성하는 몸을 떨며 오빠의 품으로 파고들어갔다. “그럴 순 없지.” 미성년자에게는 담배를 팔지 않겠다는 듯한, 슈퍼마켓 아저씨 같은 말투였다. “원칙은 지켜져야 되고, 이 안에서의 원칙은 나니까 거부는 용서치 않는다, 큭큭. 그런 의미로 자네의 동생은 내가 직접 벗겨주지.” “동생에게 가까이 다가가면 좋지 않은 일이 생길 겁니다. ···그래도?” “총알 맛을 보고 비껴야 정신을 차릴까?” 성우는 한숨을 쉬더니 자신의 옷자락을 꼭 쥐고 있는 성하의 손을 풀고 성하를 방현철을 향해 밀었다. 성하는 뭔가를 갈구하는 듯한 표정으로 성우를 쳐다보았으나, 성하의 신형은 방현철에게로 나아가는 걸 멈추지 않았다. “호오 좋은 선택이야.” 방현철은 그렇게 말하며 머신건의 총구를 성우의 다리를 향해 겨눴다. “비겁한 것은 좋지 않아~ 소년.” 성하의 몸이 방현철의 품에 안겼다. 방현철이 웃는 낯으로 방아쇠를 당기려던 차에, 성우는 국어책읽기 식으로 중얼거렸다. “초전도 시뮬레이션 PDA에 자주 쓰이는 초전도자석을 인공장기나 의체에 가져다 대면, 전자기장에 적응 할 때까지 모든 의체는 7초간 기능이 마비된다. ――――현성고등학교 수업준비물 고급공학백과 389페이지, 의체의 문제점.” 순간, 방현철은 몸에 이상을 느꼈다. 전신마비와 한 없이 붕 떠 있는 것 같은 부유감이 그것이었다. 무엇보다도 몸을 컨트롤 할 수 없었다. 털컥―― H&K MP5 머신건이 스틸바닥을 굴렀다. 성우는 발을 박찼다. 순간가속으로 인한 이동은 사람들의 밀집된 시야에서 한 순간 사라졌다는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그들이 다시 성우의 모습을 인식했을 때는 이미 그는 방현철의 등 뒤에 점하고 있었다. 그것으로 1초. 성우는 자신의 목에서 벤드넥타이를 잡아 뺐다. 한 번 끊어졌던 것이기 때문에 쉽게 풀어졌다. 넥타이의 양끝을 잡은 성우는 그것을 방현철의 목에 걸고 죄였다. 방현철의 등과 성우의 등이 맞닿았고, 성우의 당기는 힘에 넥타이는 완전히 방현철의 목을 파고들었다. “브레인코어 역시 뇌의 원리를 기본으로 한다. 하지만 조금 다르다. 산소나, 영양이 정해진 시간대로 공급되지 않으면 인간은 죽는다. 이에 브레인 코어는 그에 대한 대비책을 첨가한다. 산소나 영양이 공급되지 않으면, 브레인 코어는 뇌를 잠시 잠재우고 생명활동부분에 기능을 다한다. 그 결과 몸은 완전히 정지하고, 복구는 가까운 인공장기 센터에서만 가능하다. ――――생체학백과 230페이지, 인공장기.” 그렇게 7초가 지났다. 그러나 방현철은 움직일 수 없었다. 부유감 다음에는 어둠이 덮쳐왔기 때문이다. 쿠당――― 인공근육과 신경 등을 비롯한 방현철의 모든 장기는 침묵했고, 생명활동을 최우선하는 시스템으로 브레인 코어는 전환되었다. 성우는 바닥에 쓰러진 채로 기절해있는(자기보호모드로 되어있는.) 방현철을 보며 자신의 벤드넥타이를 검지로 돌려 감았다. “불길한 예감은 기이하게도 잘 맞는다니까.” 열차 안에 침묵이 감돌았다. 공포를 일으키던 장본인이, 단지 장난감에 불과했던 한 소년에게 쓰러져버린 것이다. 기뻐할 일이었어도, 비현실적인 광경이라, 쉽게 적응하는 사람이 없었다. 가장 처음 옷을 벗었던 여자가 또 다시 가장 처음 옷을 입었다. 그것을 시작으로 나체의 여인들은 다급하게 옷을 걸치기 시작했다. 성우는 방현철의 가슴 위에 쓰러져있는 성하를 일으켜 세웠다. “음··· 어떤 의미로는 다행이다.” 성하는 기절했다. 공포가 극에 이르렀을 때,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하는 시추에이션을 경험했으니, 정신이 달아나도 이상하지 않을 일이다. ‘미안하다.’ 성우는 성하의 교복 앞주머니에서 말굽처럼 생긴 초전도자석 두 개를 빼냈다. 에너지 분할 시뮬레이션용이라 자기장의 영역이 꽤 넓었다. 그렇기에 성하가 접근한 것만으로 방현철의 모든 의체가 마비되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앞으로 할 일은 자기장이 없을수록 좋았다. 자석을 자신의 PDA로 회수한 성우는 안경 귀걸이 부분에서 단말기를 빼냈다. 덮개를 벗겨내니, 특수합금으로 된 코드가 드러났고 성우는 코드를 방현철의 코어에 연결시켰다. 성우의 대뇌피질에 안착해있던 나노머신이 성우의 시신경과 방현철의 코어가 보내는 전기신호를 연결시켰다. 시야가 갑자기 360도를 볼 수 있는 확장형으로 변했다. 그 속에서 가지각색으로 이미지 된 정보들이 드러났고, 성우는 지금 이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필요한 정보를 방현철의 기억장치에게서 최대한 빼내기 시작했다. 30초 정도 지났을 때, 성우의 몸이 갑자기 전율을 일으켰다. “무슨 일 있나요?” 성우는 말을 거는 활동성을 강조한 붉은색 옷차림의 여성을 올려다보았다. 나이는 20대 중반이었고 미모가 출중한 편이었다. 외모라던가, 테러리스트의 불쾌한 명령에 가장 먼저 순순히 따랐던 행동이라던가. 그 외에도 꽤 눈에 띄는 여자였기에 성우는 첫 대화인데도 별 이상함을 느끼지 않고 대답했다. “아뇨, 그보다 조용히 해주시겠습니까?” 그의 말에 곳곳에서 한숨소리가 터져 나왔다. 벌써 별 논의도 없이 피해자들은 성우를 이 상황을 타개할 지도자로 선택했던 것이다. 그렇기에 성우의 단순한 손짓하나에도 숨소리도 바뀌는 것이다. 잠시 멍하게 있던 성우는 갑자기 일어나서 자신의 가방을 뒤지기 시작했다. 성우는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는 순간, 꺼낸 물건을 휘둘러 방현철의 정수리에 꽂아 넣었다. 그 순간, 예의 여자가 입을 열어 제지하려 했다. 그러나 성우의 행동이 그것보다 훨씬 빨랐다. 콰직―! 방현철의 정수리를 깊숙이 파고들어간 ‘무언가’를 타고 방전이 일어났다. “어째서··· 죽인 거지?” 성우는 방현철의 정수리, 정확히는 코어의 생명유지장치에 박힌 공작용 다이아몬드 나이프를 식기를 정리하듯 가볍게 뽑아냈다. “···했으니까.” “뭐?” “여동생을 죽어가는 오빠의 눈앞에서 범하겠다고 생각했으니까. 제거한 겁니다.” 여자는 할 말을 잃었다. 테러리스트의 잔혹함 따위에 할 말을 잃은 게 아니다. 이것이 겨우 고등학생 정도나 될 법한 젊은 아이에게서 나올 말과 행동인가? “사람을 죽였어······.” “아, 죽인 겁니까? 세상에 놓인 수많은 바이러스 중 하나를 제거했을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조금 다른가?” 성우는 뒷머리를 긁으며 다른 적당한 단어가 있나 잠시 생각하다 그만두었다. “무슨···?” “조용히. 우리들은 아직 위험에서 벗어난 게 아닙니다.” 성우는 어린아이를 어르듯 말하며 눈을 감았다. 현실세계와는 단절된 가상공간 안에서 나오는 사람들의 모습을 가상세계속의 성우는 어느 때보다 더 냉철한 눈으로 보고 있었다. 마치 다른 사람이라고 착각할 정도로 차가운 눈이었다. ‘내각특전정보부, 카타콤부스의 리빙 데드. 외할아버지의 전 부하들···.’ 생각이 바뀌었다. 여동생의 안전만 확보되면 어떻게든 이 열차에서 벗어나려 했는데, 싸워야 되는 이유가 생겨버렸다. 방금 전까지 세웠던 작전이 모두 폐기되었다. 열차의 칸을 분리해서 탈출한다는 이기적이고 여동생‘만’을 구하기엔 가장 효율적인 작전. 그 작전은 가장 비효율적이고 공익을 위한다는 사상 따윈 조금도 들어있지 않았지만 가장 위험한 것으로 바뀌었다. 적의 전멸, 아니, 카타콤부스에서 살아 돌아와 범죄까지 저지른 무리들의 기억회수 또는 소거. 성우는 예기치 않게도 외할아버지의 메모리칩에 방대한 지식과 함께 남겨진 유언을 집행해야 되는 상황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 순간이었다. 삐빅삐빅― <요오~ 여기는 작전지휘부~ 작전지휘부~ 나 참모장인 이경삼이다. 상황은 열심히 즐기고 있나? 갑자기 난데없는 통신이냐고? 뭐, 의례적으로 하는 것이다. 그게 뭐냐고? 이 녀석들, 군대 안 가봤나보구만. 쯧쯧쯧. 하여간 젊은 놈들이란. 자그마치 인원파악 겸 상황보고다. 아, 뭐 그 반대라도 상관없지만.> 방현철의 코어에 붙어있던 통신기가 그런 내용의 단방향통신을 받아들였다. 농담으로 점칠되어있어도, 그 내용의 뜻은 확실히 전달되는 메시지였다. 카타콤부스 출신이라면 당연한 행동이었다. 그 어떤 상황이라도 방심하지 않는 훈련을 생과 사의 경계에서 이겨낸 그들이라면 말이다. “좀, 위기일까?” 성우는 상황에 안 어울리는 태평함으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시선을 천천히 한 곳으로 돌렸다. 통신을 받아야할 바이러스-테러리스트-는 세상에 쇳덩어리만 남기고 가버린지 오래였다. 민강이 기관제어실을 컨트롤해야 했기에 혼자서 첫 번째 칸을 맡은 이경삼은 원래 민강이 해야 할 일인 상황보고청취를 대신했다. 돌발상황은 어느 때던지 생겨나고, 특히나 어떤 인종이 탔는지 확인할 수 없는 지하철 같은 데선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그래도 긴장의 수준은 전성기 때보다 덜 했다. 그 날을 잠시 회상해본 것만으로 구역질이 치밀 정도였다. “우선 순찰을 도는 아저씨 나와 주실 라우?” <바로, 니 옆에 있잖아. 보고도 예전에 끝났고. 장난도 어지간히 하실 라우?> “육성으로 재방송 해줄까? 바로, 니 옆에 있잖냐!” “마이크 테스트 종료. 그럼 이호차~ 뭔 짓하고 있나? 라고는 해도 바로 옆집이니···” 말장난을 싫어하는 동료를 가볍게 무시하고 다음 차례로 넘어갔다. <계속 감시중, 이상 무. 유선통신을 하려고 한 여자 하나를 잡아냈을 뿐이다. 알고 보니 치한 미끼수사중인 여경찰이더군. 전리품으로 굉장한 걸 얻어냈다. 마테바의 초기형 피스톨이야. 이 여자 매니악하잖아?> 그걸 알아내는 네 녀석도 굉장히 매니악하다만, 입 안에 감돌았지만 내뱉지는 않았다. “오오, 나중에 보여줘. 자아, 그럼 삼호차 나와 주세요.” <반항하는 녀석 있기에 나이프로 다리를 절단해줬다. 그리고 그 녀석 앞에서 다리뼈를 발라주고 인체근육에 대한 강의까지 해줬지. 참 불성실한 학생이었어, 도중에 죽어버리지 뭐야?> 인체에 대한 집착이 강한 녀석으로 유지비가 비싼 바이오의체를 사용하는 괴짜다웠다. “섬뜩하잖아. 네 녀석의 패티쉬즘은 이해하기 힘들겠어. 인간의 육체가 좋아서 코어를 제외하고 장기조차 바꾸지 않으니 원. 뭐, 계속해서 사호차!” <하아하아하아 최곱니다!> 4호차부터 8호차는 카타콤부스 출신이 아닌 인간들로 한 명씩 채워져 있었다. 그 결과가 바로 본능에 충실한 상태로 나타나 버린 것 같았다. “뭔가 대단하군. 뭐 열심히 하라고. 근데 몇P?” <어디보자, 하나 둘, 서이, 너이, 다섯, 여섯, 일곱, 으음. 열 셋은 훨씬 넘는 것 같습니다!> 그거 기네스북에 오르니 않을까. 이경삼은 계속해서 다음 사람의 보고를 들었다. 대부분 일을 치르고 있었다. 개중에는 사람들의 비명소리도 섞여서 들렸다. 반쯤 미쳐 살육을 즐기는 녀석도 있었고, 그저 승객들의 돈까지 챙겨놓는 녀석도 있었다. ‘쓸모없는 녀석들.’ 이경삼의 얼굴에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냈다. 비록 겉모습은 20대 중후반이라도 2040년대에 일어난 아시안 전쟁을 겪은 나이대의 이경삼으로써는 젊은 놈들의 광태가 맘에 들지 않았다. 그 때 당시에는 오직 냉정만이 살 길이었다. 적어도 이경삼을 비롯한 그의 동료들은 그렇게 배웠다. 그건 아무리 시대가 변했다고 해도 절대로 변하지 않는 교훈이었다. “어차피 버릴 말들이니까.” 육성으로 중얼거린 후, 이경삼은 다시 단방향통신상태로 전파를 맞추어 말했다. “8호차의 트러블 메이커씨 나와 주시죠~” <······끄응, 미안한데, 잠시만 기다려주쇼.> 뒤이어 신음이 1970년대 라디오의 잡음처럼 들려왔다. “···가는 거냐? 절정?” 이경삼은 바닥에서 조용히 흐느끼고 있는 어린아이들의 성교육 수준을 멋대로 믿으며 편집 없이 하고 싶은 말을 내뱉었다. 눈치 빠른(?) 부모들은 아이들의 귀를 막고 있었다. 이경삼이 아무리 살인기계로 훈련받았다고 해도 어느 정도 지킬 사항은 있었다. 그 중에 쾌락행위 중 하나인 성교는 전쟁과 함께 따라다니는 것이기 때문에 스스로는 방조하는 편이다. “음, 아직도 안 끝났냐?” <아, 끝났습니다. Code 203. 당신의 단말기, 고맙게 사용할 게요.> 통신기를 통해 들리는 목소리는 그가 아는 트러블 메이커 방현철의 그것이 아니었다. 변성기조차 제대로 지나지 않은 것 같은 소년의 목소리였다. 그리고 Code 203. 그의 이름인 이경삼의 어원이 되는 그것은 그가 내각특전정보부, 카타콤부스에 있을 때, 그를 지칭하는 숫자였다. “무슨······!” 그 순간, 전신이 마비되고 시야에 어둠이 덮쳐들었다. <······해킹 완료.> 메아리처럼 들려오는 소리를 끝으로 의식은 멀어졌다. “이봐, 뭐하는 거야?” 기껏 용기를 내서 물었건만 소년은 여자의 말을 무시했다. 포기하지 않고 재차 건드리자 소년은 육성으로 내뱉었다. “영웅이 한 번 되어볼까 생각중이니까 조용히 좀 해주시겠습니까?” 오직 귀찮음만이 가득한 목소리에, 여자는 오한을 느꼈다. 그와 동시에 소년에 대한 분노가 일어났다. 터무니없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단지, 무시당했다는 분노랄까. ‘두고 보자.’ 뇌파는 그렇게 육체를 제어했다. 잠시 후, 테러범들의 수뇌가 보낸 통신이 청바지의 테러범에게로 왔다. 이상하게도 무전 저편의 인간은 방현철이 살아있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일정 경험을 한 성인남녀라면 낯 뜨거워지는 말도 내뱉으면서 말이다. 그리고 3분 정도가 지난 후, 소년은 안경을 벗고 이마에 맺힌 땀을 손으로 훑으며 중얼거렸다. “성공.” 무엇이 성공인지 여인은 알 수 없었다. “음, 도와줄 사람이 필요할 것 같은데.” 그렇게 말하며 일어난 소년이 여자를 유심히 쳐다보았다. 투명하게 빛나는 소년의 시선은 마치 자신을 기계장치에 넣어 분석하는 듯한 기분이 들게 했다. “손가방에 들어있는 총 정도는 사용할 수 있겠습니까?” “······!” “뭐, 군용의체를 사용하는 분이니, 어떤 총이라도 사용할 수 있겠지요.” “···무슨 소릴 하는 건지 모르겠네. 호호호.” 소년은 그녀의 곁으로 다가서며 지나가듯 말을 꺼냈다. “정체를 숨기시려면 정비바코드 정도는 제대로 숨기셔야 했습니다. 머리카락이 어느 정도 가리지만 남에게 등을 내보이면 결국 들킵니다.” 여자는 자신도 모르게 뒷목을 만졌다. 날개뼈까지 내려오는 머리카락 사이로 이질적인 감촉이 느껴졌다. 사이보그화 되어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피할 수 없는 문신인 바코드였다. 의체는 군용(軍用)과 민간용으로 분류된다. 민간용의 경우에는 바코드가 잘 드러나지 않는다. 제어 OS, 운영체제의 용량이 최소한의 것만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군용의체는 민간용에 비해 바코드가 세 배 정도 컸다. 이 역시 OS의 문제였다. 군용의체는 그 자체만으로 모든 능력이 보통사람의 것을 몇 배 이상 상회하기 때문에 시스템 측면에서 여러 가지가 필요했다. 여기에 전투전용이라는 명목으로 전투교본 소프트를 여러 가지 인스톨시키니, 용량이 클수록 면적도 커지는 바코드는 몇 배로 커졌다. 그래도 그녀가 가지고 있는 의체는 민간에는 발표조차 안 된 최신식이었다. 단순히 메니아 정도의 지식으로는 알 수 있을 만한 게 아니었다. “너 대체, 정체가···.” 그녀는 말을 하는 도중 멈췄다. 소년이 멋대로 땅바닥에 떨어져있는 손가방을 뒤적거리더니 오토매틱 38구경의 권총을 멋대로 꺼내 자신에게로 던졌다. 그녀는 여자들이 호신용으로 쓰기에는 과히 묵직한 총을 받아 익숙하게 쥐었다. “시간이 별로 없어요.” ‘이번엔 또 무슨 소리야?’ 소년은 제대로 된 대답도 없이 열차간문을 열고 앞 열차로 넘어갔다. “쳇, 말이나 좀 하고 가란 말야!” 성우는 H&K MP5, 라이플의 축소판으로써 서브머신건으로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은 만큼 우수한 성능을 자랑하는 기관총의 총구를 수박만한 구체에 가까이 가져다 대고 망설임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트르르륵―! 파파팍―! 석류알처럼 구체의 내용물이 흩어졌다. 새빨간 액체와 새하얀 점액질 고체와 뒤엉켜 사방으로 튀었다. 사람들의 옷에, 차가운 스틸바닥에. 쾅― 육중한 거체, 인간의 몸이라기엔 중요한 머리가 없는 육체가 쓰러졌다. 성우는 쓰러진 인간의 몸을 뒤적여 토카레프 권총 한 정을 주머니에 끼워넣고, 5.45mm NATO탄을 쓰는 러시아제 기관총인 AK―74를 허리에 걸었다. 성우는 저린 오른손을 바라봤다. 근력이 하루 만에 많이 늘었기에 한 손으로 9mm 파라블럼 탄을 쓰는 기관단총을 쏘는 사이보그틱한 일을 저지른 결과였다. 두 손으로 들면 총구를 머리에 대기 힘들었기에 부득이하게 한손으로 든 건데, 여파가 꽤 있었다. 머리를 두 손으로 부여잡고 바닥에 엎드린 사람들을 내려다본다. ‘무정한 사람들이다, 정말.’ 남들을 특히 위하는 편은 아니지만 요즘 꿈자리가 그리 좋지 않았기 때문에 별다른 희생은 바라지 않았다. 그렇기에 한손으로 잡고 쏘는 수고를 저질렀는데, 현실을 외면하는 모습 따위나 보여주고 있다. “이거 대단한 일을 저질렀네. 타살(打殺)에 사살(射殺), 전과2범이 눈앞에 있는데 잡아야 되는 거야 말아야 되는 거야?” 이름도 제대로 모르는 젊은 요원, 아마 대한민국에 존재하는 세 경찰 중 하나인 공안요원일 것으로 사료되는 여성은 농담처럼 말을 건넸다. 성우는 저린 손이 빠르게 회복되어가는 것에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처럼 느끼며 대충 말을 받았다. “정당방위로 봐주세요. 음, 정 뭐하면, 직접 하시든가. 아니, 그게 좋겠네요. 직접 조지면서, 음 학생이 쓰기엔 심한 말. 그래, ‘처리’하시면서 제일 앞칸까지 와주세요.” “에? 이봐!” “누나 멋쟁이! 땡큐!” 성우는 다음 열차간문을 열고 사람들을 피해 달리기 시작했다. 마음 같아선 3일 전에 읽은 무협소설에 나오던 초상비나 흉내내며 밟아버리고 싶었지만, 오히려 시간이 더 걸릴 거라는 생각에 충동을 억눌렀다. 대신 멍하니 풀린 눈과 흐느적거리는 몸으로 간신히 서 있는 테러리스트의 얼굴을 향해 달리는 그대로 점프해서 무릎으로 찍었다. 평화로운 일상을 방해받은 소년의 분노의 일격! “그 이름하여 인과응보! ···일까?” 우직! 코뼈가 박살나는 소리와 함께 테러리스트의 신형은 타격받은 그대로 넘어갔다. 성우는 결과를 확인하지도 않고 계속 달렸다. 쾅―! 한 발의 총성이, 아니 총성이라기엔 너무 커서 포성(砲聲)이랄 정도의 큰 소리가 뒤편에서부터 들려왔다. “제길! RDX화약 따위를 9mm 탄에 쓰다니! 미쳐도 단단히 미쳤군, 이 여자! 무기메니아 집단인 공안 녀석 따위 저주받아라! 으쓰쓰. 제길 뼛속까지 아프다.” 그리고 성우로서도 이해할 수 없는 그녀의 긴 욕설이 뒤를 이었다. 달리는데 탄력이 받은 성우가 무심코 뒤를 돌아보려 했을 정도로 황당한 내용이었다. 성우는 멈추지 않았다. ‘근데, 전신의체 사이보그가 아플까?’ 그런 헛생각을 한 순간, 그의 몸은 벌써 네 대의 전차를 넘어 3호차와 4호차를 잇는 문 앞에 도달해 있었다. 3호차부터는 조심해야 했다. 3호차부터 1호차까지는 두 명의 테러리스트가 짝을 지으며 가드를 보고 있었다. 이인일조는 감시의 기본. 4~8호차까지는 솔직히 그들에게도 있으나마나 한 인원보충용 떨거지일 뿐이었다. 3호차부터는 성우의 외할아버지가 조직한 최악의 전투부대인 카타콤부스의 잔병들이 맡고 있었던 것이다. 부지불식간 바이러스를 사용한 덕분에 승률은 0에서 30%로 올라갔다. 100%가 아닌 이유는 그들의 대장인 민강에게로 통하는 서버가 완전히 차단되어있었기 때문이다. 그 대장 하나만 상대하기도 벅찼다. 그나마 30%인 것은, 하루 만에 부쩍 성장한 몸의 능력을 감안한 결과일 것이다. 그래도, 백전노장 사이보그를 상대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능력이다. ‘생각보다 시간이 걸렸는걸, 4분 정도··· 남았나.’ 아마, 열차안에 있는 사람들을 해치며 달린 결과겠지. 열차 자체도 꽤 긴 편이었고.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해서는 안 된다. 성우는 문을 열었다. 그 순간, 거대한 등빨이 성우의 시야를 가로막았다. 성우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등빨이 서서히, 그리고 부자연스럽게 돌아갔다. 곧 험상굳게 생긴 테러리스트의 얼굴이 성우의 시야에 잡혔다. 그의 입가에는 침이 흐르고 있었다. 시스템 바이러스가 침투해 각 기능이 마비된 결과였다. “네, 네 녀석···은 뭐, 뭐냐.” 역시 부자연스러운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Back street train hero!” 문법 틀린 영어로도 굉장히 자신 있게 대답하며 성우는 AK―74를 한손으로 잡고 겨드랑이에 낀 다음 지체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테러리스트의 턱밑을 노린 총구가 불을 뿜었다. 정수리로부터 하얗고 붉은 덩어리가 튀어나와 천장에 달라붙었다. 기계화된 안구가 유리구슬처럼 틱틱 소리를 내며 땅바닥을 구르다가 탄피에 부딪히고 멈췄다. 탄피가 미미한 금속음을 냈다. 그 순간, 은빛 하나가 테러리스트의 목을 가른 후, 성우의 귓가를 아슬아슬하게 스쳤다. 테러리스트의 갈라진 목에서부터 피분수가 튀었다. 혈관대신 뇌에 피와 더불어 산소를 공급해주는 튜브가 끊겨버린 이유인지, 압축물총처럼 튀어나온 피는 높게 치솟아 천장을 더럽혔다. 이래저래 천장의 수난시대다. “이런 등교시간인데 위험할 뻔했다.” 성우는 교복에 피가 안 묻은 것에 안심하며 스러져가는 테러리스트의 신형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아니, 테러리스트의 몸 뒤편에 존재하는 또 하나의 테러리스트를 말이다. “관리가 힘든 생체융합형 의체를 쓰는 녀석인가.” 치리릭― 하는 기분 나쁜 소리와 함께, 길게 늘어난 팔이 보통사람과 같은 사이즈로 돌아갔다. 손에는 필요이상으로 날이 선 군용대검이 들려있었다. “크르, 크르. 큭큭·· 네, 네 놈이 적이냐.” 부자연스럽게 침을 뱉어내는 입을 열어 그는 말했다. 바이러스가 확실히 먹혔다는 증거였다. 성우는 말없이 총구를 들이댔다. 그 때, 테러리스트 뒤에 엎드려있던 아이가 갑자기 목을 들어올렸다. 갑자기 조용해짐에 따라 무의식적으로 안심한 탓일까. 갑자기 이대로 총을 쏘면 아이가 맞아버릴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장에서 그런 모랄(moral, 도덕)을 챙기다니, 외할아버지가 웃겠군.’ 목 근육을 좀 더 편하게 하겠다는 아이의 생각에서 일어난 계기는 성우를 잠시 머뭇거리게 만들었고, 그건 공격할 순간을 찾지 못한 테러리스트에게 훌륭한 계기를 만들어주었다. “크아아악!!” 바닥에 엎드려있는 인질들을 밟으며 괴성과 함께 테러리스트는 이동했다. 생체융합의체의 특징은 기계화의체와는 다르게 인체와 똑같은 신경계를 사용한다. 기계화의체가 따로 전자고속링크를 만들어 몸을 움직인다면, 생체융합형은 원래의 몸 그 자체를 세포만 융합·진화시켜 사용한다는 것이다. 전자 바이러스에 대한 저항력은 생체였기에 영향력이 없을 정도다. 현재의 인간으로는 무리한 진화라, 특수 안정제가 다량 필요하다는 점에서 유지비가 많이 들어가긴 하지만, 몸 자체의 일체감은 기계의체의 그것보다 훨씬 뛰어난 편이다. 그 위력 또한 군용이라면 보통기계의체보다 훨씬 뛰어나다! 우드득! 군화에 짓밟힌 학부모의 다리뼈가 부러지는 소리, 그 소리의 크기에 비례하여, 테러리스트는 빠르게 성우와의 거리를 단축했다. 성우는 AK―74를 정면으로 겨눴다. 정면으로 튀어올 거라는 예상이었다. 그러나 틀렸다! 갑자기 테러리스트의 팔이 늘어나더니 왼쪽, 화물가(架)를 잡았고, 그 반동으로 왼쪽 창문에 빠르게 붙었다. 붙은 순간, 창문이 금이 갈 정도로 박차고 성우의 드러난 허점 중 한 곳인 하체를 노리며 길어진 팔에 들린 군용대검을 휘둘렀다. 순간적으로 일어난 변화에 성우의 사격은 쓸데없는 구멍만 늘렸을 뿐이다. 하지만 영 쓸데없는 짓도 아니었다. AK―74의 반동으로 빠른 위치이동이 가능해졌다. 겨우 뒷걸음질일 분이었지만, 분명 치명적인 상황만큼은 피했다. 아슬아슬하게 테러리스트의 군용대검을 피해내고, 호주머니에서 전리품으로 챙겨둔 베레타를 꺼내 빠르게 3연사 했다. 퍽퍽퍽― 묘기에 가까운 트릭샷은 성공했다. 9mm 파라블럼은 손목과 손등, 팔뚝에 차례로 박혔다. “크으윽!” 테러리스트는 얼굴을 찡그리며 뒤로 몸을 튕겼다. “과연, 바이러스라는 놈이 끝까지 당신을 괴롭히는 모양이로군.” 생체융합형 의체를 썼다 하더라도 결국 카타콤부스의 일원. 빠른 반응, 정보처리를 위해 바꿔 낀 뇌의 코어가 그의 행동에 발목을 붙잡은 것이다. 충분히 피할 수 있는 총알조차 피할 수 없다. 그렇다면 무서워할 것은 필요이상으로 긴 팔 뿐이다. 그러나 그것조차 총알 3발에 신경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가 되어버렸다. “크아아악!” 테러리스트는 괴성을 지르며 팔을 휘두른다. 성우는 둔화되어 쓸데없이 동작만 큰 테러리스트에게 조소, 동시에 동정을 보내며 테러리스트의 시야를 가리는 절묘한 위치에 AK―74를 던졌다. 테러리스트의 팔은 곧장 기관총을 튕겨냈고, 그 덕에 테러리스트의 가슴은 활짝 열렸다. 성우는 전리품인 토카레프를 꺼내 베레타와 함께 듀얼 쇼트로 테러리스트의 가슴을 꿰뚫었다. 6발을 차례대로, 왼쪽 가슴과 양 가슴 사이를 꿰뚫린 테러리스트는 허무하게 허물어졌다. 죽은 건 아니었다. 사이보그의 심장은 에너지동력원, 혈류를 관장하는 심장, 뇌의 생명유지장치등으로 세 개가 존재했다. 동력원과 심장이 정지하더라도 생명유지장치만 건재하다면, 그건 죽음이 아니었다. 성우는 테러리스트의 머리 위에 두 개의 총구를 얹었다. “다음 생에서는 제발 약속은 지키시며 살기를.” 탕탕탕탕― 성우는 피범벅이 된 바지를 가만히 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교복세척제, 엄청 비싼데.” 쾅―! 뒤편에서 폭음이 울렸다. RDX화약 특유의 폭음이었다. ‘시간을 너무 끌었나. 그 여자가 따라와 버렸잖아.’ 성우는 AK―74를 회수함과 동시에 테러리스트의 손에서 50Cm 길이의 곡도형 군용대검을 들었다. 무게중심이 칼끝에 가깝고, 4kg 이상의 무게를 지닌 묵직한 대검은 그야말로 사이보그용이 아닐까 싶었다. 그러나 하루사이에 일어난 몸의 변화는 이런 무게조차 가볍게 견디게 만들었다. “좋은 게 좋은 거지.” “우리, 사는 건가요?” 성우는 갑작스레 들려온 어린아이의 목소리를 듣고 시선을 돌렸다. 예의 성우를 주저하게 만든, 괘씸한(?) 아이였다. 아이의 부모는 두려워하는 눈빛으로 성우를 보고 있었다. “어. 아마도. 아니 살 수 있을 거다. 적어도, 너에게 닥칠 위험은 없어. 그래 적어도, 나는 그렇게 판단했어.” 대답은 더듬더듬, 하지만 뜻은 전해졌다. 성우는 웃었다. 마음속에서 우러나온 웃음이 아니었다. 이성적인 판단으로 만들어낸 가벼운 일그러짐일 뿐이었다. 그런 가식적인 웃음으로도, 아이는 안심한 듯 엄지손가락을 세웠다. “힘내요!” 참으로 끔찍한 응원이라고 성우는 생각했다. ‘테러리스트라도 사람, 그들을 처리하는 내가 하는 일 역시 살인. 범죄자가 되는 것도 칭찬 받을 수 있구나. 따위 농담은 이제 그만.’ 성우는 열차간문을 힘차게 열어 2호차로 넘어갔다. 그 순간, 철컥하는 소리와 함께 성우를 향해 총구가 겨눠졌다. 그러나 심하게 흔들리는 총구는 성우에게 위협이 되지 못했다. 자세제어소프트가 바이러스에 침식당한 사이보그는 보통인간보다 못한 상대였다. 성우는 망설임 없이, 듀얼 쇼트로 힘겹게 움직이는 테러리스트의 머리를 날려버렸다. 그래도 썩어도 준치라고, 짧은 순간에도 방아쇠를 당긴 덕분에 사출당한 유탄에 쓸데없이 민간인의 다리만 무릎 아래로 박살나는 헤프닝이 벌어졌다. 비명소리가 탄성과 함께 뒤섞였다. 어설프고 저열한 환희와 함께, 살 수 있다는 희망으로 열차는 떠들썩해지기 시작했다. 성우는 이제는 시체가 되어버린 테러리스트에게서 22구경 마테바 리볼버를 입수했다. “그나저나, 굉장히 메니악한 테러리스트도 다 있었군.” 그렇게 중얼거리며 성우는 재빨리 마테바를 사람들 사이로 성의 없이 겨눈 후, 방아쇠를 당겼다. 탕. 탕. 탕. 탕. 탕. 탕. 쉴 세 없이 터지는 총성에 2호차의 모든 사람들은 패닉상태가 되어 3호차로 이어지는 열차간문을 통해 몰려들었다.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사람들 속에서 피와 투명한 점액질로 물든 가슴을 부여잡은 한 사내가 빠져나와 비틀거리며 성우 앞에 섰다. 예전에, 글록으로 부상자를 죽였던 그 사내였다. “어떻게··· 알았지? 광학미채(光學迷彩)로, 몸을 확실히 숨겼을 터인데.” 절뚝거리며 다가오는 사내를 보며 성우는 마테바를 호주머니에 끼워 넣은 동시에 베레타를 꺼내 남김없이 총탄을 비웠다. 총구가 정확히 4번의 총성을 토해냈고, 사내 역시 네 번의 비명을 토했다. 베레타의 저지력에 사내의 몸을 뒤로 2m 날아갔다. 큰 대자로 사내는 스틸바닥에 쓰러진 채로 입을 벙긋거렸다. 머리 부분을 제외한 모든 기능이 정지해버렸던 것이다. “바이러스 전송 시, 단 한 사람이 전송을 차단했죠. 이미 예상은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딱히 찾을 방법이 없어서 답답해하고 있었는데, 들리더군요. 소리가." 귀를 톡톡 치며 성우는 몇 초간 호흡을 끊고 다시 입을 열었다. “카타콤부스의 광학미채가 생각났고, 결과는 이겁니다.” 광학미채의 특성, 그것은 광학미채 자체에서 발생하는 고주파였다. 그 고주파의 잡음을 성우의 귀는 포착해낸 것이다. 놀란 눈으로 사내는 성우를 보았다. 그가 입을 발작적으로 뻐끔거렸다. 하지만 발성기관이 완전히 망가진 탓에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성우는 그의 입술을 주시하다가 잠시 후 말했다. 정확히는 그의 블랙홀 같은 목구멍을 보고 조용하게 내뱉었다. “당신들의 아버지, 그의 외손자입니다. 그리고 사이보그는 아닙니다.” 사내의 동공이 완전히 수축되었다. 그 순간, 성우는 사내의 이마에 군용대검을 박아 넣었다. 그리고 사내의 오른손에 들린 글록을 회수했다. 딱히 넣을 데가 없어서 오른손에 들었다. “······,” 전리품은 적당히 챙기는 게 좋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오랜만에 만져보는 무기를 쉽게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이걸 보면 성우도 아직 어린아이였다. “어째서 들어버린 걸까, 고주파의 소리를. 어째서 그렇게 빨리 깨달아버린 걸까, 광학미채라는 걸. 이상해져가고 있는 것 같아, 나의 몸.” 육체적 능력도, 두뇌회전도, 모두 두뇌를 코어화한 인간의 평균능력을 상회하고 있었다. 두려움 따위는 없었다. 희열 또한 없었다.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단지, 오늘 학교 지각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러고 보니 열차의 속도가 평소보다 훨씬 느리게 달리는 것 같았다. “대충 평소보다 반 정도인가?” 어째서 일까? 대충 생각을 하면서 1호차의 열차간문을 열었다. 성우는 한동안 1호차의 중심공간을 쳐다보더니 한숨을 쉬었다. “이런이런, 뜻밖이라는 표정정도는 할 거라 생각했는데.” “쉽게 해킹당한다고 생각 했을 때 지은 표정을 다시 지을 순 없잖습니까.” 1호차 정중앙에는 44구경 6연발 매그넘을 겨눈 채, 웃고 있는 이경삼이 있었다. “으으, 이런, 협조 부탁합니다. 비켜주세요!” 38구경의 오토매틱 권총을 눈앞에 흔들어보아도, 패닉상태의 시민들을 컨트롤 할 수 없었다. 하염없이 그녀는 인파에 밀려 5호차까지 밀려나고 말았다. 2톤의 트럭조차 가볍게 끌 수 있다는 사이보그의 힘을 가지고서도 밀릴 정도라니. 그녀는 시민들의 삶을 향한 집념에 경의를 표했다. 그건 그렇다 쳐도. “좀 비켜보란 말야!!” 히스테릭한 음성이 기차를 진동했지만, 그 정도 음성은 열차 곳곳에서 나는 터라 금방 묻히고 말았다. “좀 비켜보란 말야!!” 여성의 히스테릭한 목소리가 짧게 귀를 파고들었다. “음. 나름대로 운이 좋은 건가.” 성우의 중얼거림에 이경삼은 고개를 까닥이며 의문을 표했다. “뭐냐?” “아니요. 그런데, 왜 안 쏘는 겁니까?” “함부로 쏠 수야 있나. 계산 밖의 만남이긴 하지만 총대장의 후손인데, 적어도 이야기는 나눠봐야지.” ‘역시 다 듣고 있었나.’ “근데, 무슨 이야기?” 성우의 의문에 이경삼이 뭐라고 대답하려는 그 때, 조종실로 통하는 열차간문이 열렸다. “아. 이제 내 소관이 아니군.” 열차간문을 통해 스포츠 스타일로 머리를 짧게 깎고, 군복을 차려입은 사내가 나타났다. 아무리 많이 쳐봐도 20대 후반의 연령대는 넘지 않은 것 같았다. 게다가 꽤 미남이었다. 독수리처럼 날카로운 인상을 지닌. 그는 외모에 어울리지 않게 헤프게 웃으며 한손을 들어올렸다. “여어, 잡상인. 카타콤부스 17소대의 민강이라 한다.” 성우는 무심코 민강과 대칭되게 손을 들어올렸다. “여··· 가 아니라. 안녕하세요.” 황급히 말을 바꾸긴 했지만 그거나 저거나 상황에 안 어울리기는 마찬가지였다. “하하핫, 그리 긴장할 필요는··· 총 한 발 쏠 준비 정도로만 해줘.” ‘···심히 긴장되는군.’ “하나만 묻자. 잡상인, 너, 몸 갈아치웠냐?” 의체화, 그러니까 인체를 의체로 바꾸는 대수술을 거쳤냐는 물음이었다. 그런 돌발적인 민강의 물음에 성우는 고개를 저었다. “호오, 그래? 그럼 아직 죽을 때는 아니군. 총대장의 명령은 지켜야지.” “어째서 이 열차를 공격했습니까?” “음?” “방현철이라는 자의 기억과 계통정보를 읽었습니다. 은행을 턴 것부터, 방현철의 신경을 해킹하여 일부러 경찰 앞에서 과속시킨 것까지.” “호오, 훌륭한 해커였군. 총대장이 교육 잘 시켰나보군.” “정말입니다. 저도 하마터면 몸의 제어권을 모두 빼앗길 뻔했죠.” 이경삼은 아찔한 기억을 떠올렸다. 바이러스에 저항하지 않은 것이 정답이었다. 바이러스의 타입 자체가 융합형이었기 때문에, 항체가 건드렸다가는 바이러스만 늘려버리는 사태가 되어버렸을 것이다. 지금까지 성우에게 당한 사람들은 기다리지 못하고 백신으로 손을 대었기에 몸의 제 기능을 찾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을 것이다. 바이러스가 자기소멸할 때까지 걸리는 시간은 6분, 그 정도라면 충분히 모두를 2호차까지의 동료들을 살상했을 터였다. “에 그러니까, 왜 이 열차를 습격했냐에 대한 거였지? 음, 문자를 좀 쓰면, 토사구팽일까?” “아?” “돈의 분배도 그렇지만, 카타콤부스의 다른 녀석들이 버거워진 거지. 투쟁심이 너무 강해서 문제야.” “이성적으로 움직이지 못하는 녀석들은 카타콤부스의 일원이 될 자격이 없다. 이 상황에 적용할 수 있는 총대장의 말씀이십니다.” 이경삼이 민강의 말에 이유를 더했다. 즉, 전쟁터에서의 충동적이고 과격한 분위기를 잊지 못한 사회부적합자들을 데리고 다니기가 민강, 그로서도 힘들어졌다는 얘기였다. “그렇다면······.” 성우는 가설 하나를 정립했다. 그러나 부정했다. 이해할 수 없었다. 수십 년간 함께해온 전우를 그렇게, 정말, 팽개칠 수 있단 말인가. 민강은 창가로 다가갔다. 찰랑, 찰랑, 피웅덩이를 밟는 소리가 조용하게 울렸다. 지금까지 시선이 집중되었기에 보지 못했던 광경이 그 소리에 보이기 시작했다. 죽음. 새파란 어린아이도, 공경 받아야 할 어른도,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 죽어있었다. 그 때서야 이경삼의 다른 한 손에 들린 다마스커스 스타일 세라믹 나이프를 발견했다. 피에 완전히 물든 채, 맹수가 침을 흘리듯 피를 뚝뚝 떨어트리고 있었다. 총으로는 결코 이 정도 출혈을 만들지 못할 터였다. 내장이 드러날 정도의 깊은 참상(斬傷)이 아니라면 이 정도 인원으로 열차바닥 전부를 피웅덩이로 만들 수 있을 리 없었다. “자네가 죽이지 않았어도, 우리들이 죽였을 터다. 다만, 이 열차에 탄 시민들도 함께 죽였겠지.” 말을 다 한 순간, 민강은 유리창을 향해 아무런 준비동작도 없이 빠르게 세 번의 잽을 날렸다. 한 방에 유리창은 금갔고, 두 번째에 완전히 박살났으며 세 번째에 인간이 빠져나갈 만큼 구멍이 커졌다. 민강은 보석주머니를 어깨에 매단 체 문턱에 발을 올렸다. 금방이라도 바깥으로 뛰쳐나갈 듯한 모습이었다. 박살난 창문바깥으로 헬기의 프로펠러가 토해내는 소음이 들려왔다. “흐음, 역시 나는 대한민국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니까. 치안이 이만큼 뛰어난 나라는 적어도 중동에는 없었지.” “하나만 물어도 될까요.” “음? 아아, 뭐든지 물어봐. 다만 시간이 별로 없으니까 짧게.” “왜 제가 잡상인입니까?” 그건 너무나 사소한 질문. “······.” 민강은 잠시 성우를 유심히 쳐다봤다. “큭 크하하하핫. 아아, 그래 심히 궁금한 거였겠군. 힌트만 가르쳐주지. 자네의 지금 모습을 돌아보게! 이런! 시간이 없군. 그럼 다음에 좋은 만남 가지세!” 갑자기 민강으로부터 무언가가 빠르게 날아왔다. 성우는 오른손에 들린 글록으로 그것을 막았다. 틱― 소리를 내며 그 물체는 튕겨져 궤도를 바꾸며 성우의 배를 강타했다. 성우는 신음을 흘리며 배를 때린 물체를 잡았다. “그건 선물.” 민강이 창밖으로 뛰었다. 순간, 열차가 어둠에 휩싸였다. 터널을 지나는 것이다. 그제야 성우는 열차의 속도를 늦춘 이유를 깨달았다. 터널을 통해 안전한 탈출로를 확보하고 이곳에서부터 효율적으로 도망치는 거였다. 곧이어 이경삼이 준비했다. 성우는 그를 향해 글록을 순간적으로 겨누고 쐈다. 이경삼은 가볍게 오른손을 바깥쪽으로 휘둘렀고, 팅― 하는 소리와 함께 우편 유리창에 나무의 잔뿌리 같은 금이 일어났다. 순간적이지만 이경삼은 총알을 튕겨낸 것이다. “호오, 안타깝지만 이번에는 계산 안이야.” ‘이것이야말로 사이보그의 진정한 힘인가.’ “즐거웠어, 무기잡상이~~~인!” 이경삼은 민강이 나간 그곳으로 뛰쳐나갔다. 그를 향해 또 총을 겨눴지만 또 다시 날아온 물체에 의해 성우는 멈출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는 가까스로 피했지만 허리에 걸린 AK―74에 맞고 바닥을 굴렀다. 툭투툭― 그 물체는 이경삼이 들고 있었던 44구경 매그넘 리볼버였다. 성우는 배에서 떨어진 물체를 봤다. 그것은 민강이 쓰는 것으로 방현철의 기억에 기록 되어있었던 데져트 이글이었다. “잡상인··· 무기잡상인. 후후후. 한방 먹었는걸.” 성우는 민강의 조언대로 자신의 모습을 돌아봤다. 전리품들로 무거워진 허리가 눈에 잡히고, 권총이 들어갈 대로 들어가 불룩해진 호주머니가 기분을 요상케 만들었다. 짧게 한숨을 쉰 성우는 허리에 걸린 모든 무기를 풀었다. 철컥― 차라라라락! 총은 플라스틱 특유의 둔탁한 음을 내면서 시체들 위로 떨어졌다. 성우는 그대로 열차간문을 통과해 기관실에 들어갔다. 그 때, 공안요원이 성우를 따라잡았다. “후우, 테러리스트는?” “없더군요.” “다행이군. 근데 뭘 할 거야?” 성우는 기관실의 전자기기판을 조작하며 건성으로 대답했다. “학교 지각입니다.” 공안요원은 멍한 표정이 되었다. 무슨 뜻인지 도통 모를 말이다. “이런, 이제 알겠네. 거의 동급 실력을 가진 테러리스트와 많은 수의 시민들을 어떻게 예정시간 안에 죽일까 궁금했었는데 풀렸군. 수소전지를 폭주시킬 생각을 했었다니.” 성우는 반응로의 아날로그 계기판을 살피며 중얼거렸다. 현재, 광주의 지하철은 모노레일의 방식을 채택하고 있었다. 원래 군사용과 대중용 구별 없이 다목적용으로 사용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열차이기 때문에 전시에 전력공급이 특별히 없어도 움직일 수 있게 중용량의 수소전지를 탑재한 것이었다. 그것이 폭주하게 된다면 열차가 끓어오를 정도로 발열하게 되어 도시방어시스템이 동작하는 방벽에 도달하기 전까지 가로막는 모든 것을 초토화시킬 것이다. 성우는 안경의 단말기를 통해 기관실의 시스템과 동화한 후 수소전지 폭주코드의 해체를 시작했다. 다급했기 때문인지 성우 그 스스로도 무아지경이 되어 작업에 들어갔다. 그 결과 겨우 20초 만에 수소전지의 안정화를 가져올 수 있었다. ‘하나는 처리했나. 이제··· 원래 생활로 돌아가야지.’ 성우는 다른 프로그램을 조작했다. 그 때, 공안요원이 넌지시 물어왔다. “이 사건을 정말, 블루 이스트가 일으켰다고 생각하니?” “음? 그건 왜요?” “그냥, 네 견해를 듣고 싶어서.” 성우는 잠시 프로그램의 조작을 멈추고 공안요원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마치 얼굴을 기억해두겠다는 집요함이 깃든 표정이라 공안요원은 자신도 모르게 주춤 물러났다. “블루 이스트에 대한 저의 평가는 꽤 호의적이죠. 썩어빠진 정치인을 무료로 암살해주는 곳은 그곳밖에 없으니까요. 제 외할아버지의 평가도 꽤 좋았어요. ‘미미한 곳에서 일어나는 현대판 체 게바라’ 라고 하시더군요.” 성우는 다시 시선을 돌려 작업을 계속했다. “그 혁명가?” “아아, 예. 20세기 때에는 가장 완벽한 인간이라고 평가된 그죠.” “그 이유를 물어도 될까?” “거절하겠습니다. 시간이 별로 없거든요. 다만, 블루 이스트가 이 사건을 일으켰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정치인들이 멍청이라도 그런 생각을 안 할 것 같군요. 다만, 수사에 혼선은··· 비속어를 좀 쓰자면 ‘졸라’ 있을 것으로 사료됩니다만. 매스컴을 탄 정보는 통제하기가 어렵거든요.” 말이 끝난 후, 성우는 단말기를 분해했다. “이제 되었네요. 이제 우리는 일반시민으로 돌아가는 겁니다.” 성우가 열차간문의 문을 열었다. “음? 잠깐! 움직이지 마!” 철컥― 성우는 양손을 들어올렸다. 공안요원은 총을 겨누고 있었던 것이다. “예측했겠지만 공안이다. 그러니··· 위험분자는 포획하는 게 원칙이겠지?” 성우는 고개를 슬쩍 돌려 공안요원의 얼굴을 보았다. 미인의 웃음이 장난스러워 보였다. 그 미인은 총을 내리고 농담처럼 말했다. “근데, 연약해 보이는 몸을 가진 미소년이 베테랑 테러리스트를 처리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사이보그도 아닌데. 그리고 그런 미소년이 위험분자일 수도 없겠지?” 그녀의 말대로 성우의 몸은 적당히 근육은 있는 편이었지만 단련되었다고 보기에는 어려웠다. 덤으로 얼굴선도 곱고 피부도 화장품이 필요 없을 정도로 깨끗해서 도저히 살인을 할 외모로는 안 보였다. “대신 이름을 가르쳐주는 게 어떠니?” 성우는 씁쓸하게 웃었다. “성우, 유성우입니다.” “왠지 시험 볼 때 상처받을 이름 같구나.” 성우는 걷기 시작했다. “반 평균을 떨어트리는 이름상(象)이라고 많은 질시를 받기야 하죠.” 성우는 1호차에 떨어트린 총기를 주워 끌면서 계속해서 나아갔다. 중간 2호차에서 이마에 군용대검이 박혀 죽은 테러리스트의 이마에서 군용대검을 뽑아 회수했다. “어째서 무기를 회수하는 거지?” “아, 저는 어린아이라서 공짜를 보면 사족을 못 씁니다.” 주인 없는 장난감은 회수해주는 게 어린아이 세계의 법칙이다, 라고 논설하는 듯한 성우의 어조에 공안요원은 어처구니가 없으면서도 그를 말리지 않았다. “아, 이제 사람이 모여 있는 곳이네요.” 성우는 4호차로 통하는 열차간문 앞에 서서 말했다. “괴물로 볼지, 영웅으로 볼지 내기해보겠습니까?” “괴물에 걸지.” 공안요원은 낭만주의를 싫어하는 건 아니었지만 그만큼 현실을 잘 알고 있었다. 어찌되었던 자신들은 살인자다. 일반인은 살인자를 배척하는 법이다. “저는 이 상황이 너무너무 기뻐서 자신들의 처지를 망각했다는 쪽에 걸죠.” “무슨 소리야?” 성우는 그녀의 의문에 슬쩍 미소만 짓고 열차간문을 열었다. 그 순간, 그녀는 자신의 뇌 깊숙한 곳으로 감당할 수 없는 정보가 짓쳐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뭐, 뭐야?” 그녀의 눈은 허공에 떠 있는 지하철 광고용 입체영상이 떠 있는 것을 ‘주시되었다.’ 평소에는 어여쁜 연예인이 나와서 자신의 몸매를 과시하며 상품을 소개했을 게 당연한 그것은 지금 전혀 차원이 다른 영상을 보여주고 있었다. 인간의 시야로는 그 뜻을 완성할 수 없는 영상이었다. 그 영상에 발원한 해일 같은 정보에 정신은 잠식되어갔다. 아니, 덮여 씌워져가는 것이다! 목표는··· 오늘 있었던 기억 전부! “어떻게······.” “최면 프로그램입니다.” “말도 안······.” 그녀는 말을 끝맺지 않았다. 멍하게 허공에 떠 있는 입체영상을 응시할 뿐이었다. 성우는 공안요원을 힐끗 보더니 등을 돌렸다. “아직까진 평범한 생활을 깨고 싶진 않아요.” 성우는 8호차에 도착했다. 그의 기절한 여동생을 제외한 시민들은 모두 멍하니 입체영상을 응시하고 있었다. 최면프로그램, 원래 심리학과 뇌腦전문의였던 외할아버지가 군대에 있을 때, 효과적인 작전활동을 위한 암호를 생각해낼 때 만들어둔 압축언어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고밀도로 집약된 정보가 전자파와 함께 눈을 통해 뇌로 들어오게 되면, 그 정보대로 뇌가 움직이게 되는 문제점을 역이용한 것이었다. 뇌를 코어화한 사이보그뿐만 아니라 아무 개조도 거치지 않은 인간에게까지 통용되는 것이었다. 그의 외할아버지는 이 연구를 폐쇄했고, 이 연구가 오직 혼자만의 독자적인 연구였음을 다행이라 생각했다. 이 프로그램만 있으면, 몇 천, 몇 만 명은 우습게 세뇌시킬 수 있고, 그 힘은 결코 작지 않았다. 성우는 외할아버지의 유산에서 이 프로그램을 발견했고, 정체를 숨기고 싶을 때만 쓰라고 되어있었다. 어떤 식으로 최면과 세뇌가 이뤄질지는 그도 궁금했다. 프로그램의 알고리즘은 아직 건드려보지도 못해봤으니 결과를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건 아니다. 성우는 자신의 스포츠 백에서 압축팩과 스프레이를 꺼냈다. 압축팩에 달린 버튼을 누르니 내부공기가 일어나 압축팩을 단숨에 스포츠백의 크기 이상으로 키웠다. 성우는 그곳으로 자신이 입수한 전리품을 쓸어 담았다. 그 후, 스프레이를 자신의 몸과 여동생의 몸에 뿌렸다. 곧 스프레이의 분무가 지나가는 곳마다 옷에 묻은 각종 오물이 깨끗이 덩어리져 떨어지기 시작했다. 성우의 피에 절은 옷은 그것으로 몰라보게 깨끗해졌다. “이것으로 준비 하나는 끝난 건가.” 성우는 창밖을 쳐다봤다. 그리고 자신의 손목시계를 내려다보았다. “다행히 시간 안에 도착인 건가.” 성우는 압축팩을 손안에 들고 스포츠백을 어깨에 건 후, 여동생을 등에 업었다. “···무겁다.” 여자를 들면서 하지 말아야 될 말 1순위를 쉽사리 내뱉으며 천천히 수를 세었다. ‘···7, 6, 5, 4, 3, 2, 1,' “제로.” 스으응 부드러운 바람소리와 함께 열차는 급정차했고, 그와 동시에 입체영상이 사라졌다. 그리고 급정차를 했기 때문인지, 멍하게 서 있던 사람들은 모두 쓰러져버렸다. 쿠탕탕― 그 순간 열차의 모든 문이 열렸고, 성우가 서 있던 열린 문 앞에는 자동개폐식이 아닌 비상용 강철제 여닫이문 하나가 있었다. 선로정비를 목적으로 생성된 지하통로였다. 성우는 성하를 고쳐 업고 여닫이문을 열었다. 겨우 두 사람 정도 지나갈 만한 계단이 눈앞에 나타났고, 성우는 망설임 없이 그 계단을 올라갔다. 계단의 끝에는 지문인식용 자동문이 있었다. 성우의 지문으론 열리긴커녕 비상용 벨을 울릴 게 분명했다. 성우는 해킹을 시도했다. 그전에 단말기로 통신선을 해킹하여, 지하철 내 모든 카메라의 기능을 정지시켰다. 덤으로 이전 30분간의 기록을 삭제하도록 바이러스까지 살포했다. “뭐가 덤인지, 알 수 없게 되었지만. 하여간 열려라 참께!” 결국 가장 나중이 된 자동문은 신뢰도가 매우 적은 주문과 함께 열렸다. 자동문에게 자존심이 있었다면 땅을 치고 분해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자동문을 열자마자 사람들의 부산한 움직임이 눈에 띄었다. 그보다 더 눈에 띈 건 ‘현성대학지점’이라는 표지판이었다. “열차는 언제 오는 거야?!” “지하통로에서 갑자기 멈춘 모양이야!” “뭐? 설마 테러가 진압된 거야?” “알까보냐! 제길, 조수! 카메라 들고 따라와! 저널리즘의 혼을 보여주는 거다!” 그들의 신경은 온통 테러리스트들이 점거한 열차에 가 있었다. ‘행운이로군.’ 성우는 물품 보관소로 가서 대형코인로커에 비닐팩을 집어넣고, 평소대로 걸었다. 곧 성우와 그가 업은 성하는 사람들 사이로 녹아 없어졌다. 사람들은 현성대학부속고등학교의 교복을 입은 두 사람에게 신경 쓰지 않았다. 바깥에 나가면 널리고 널린 게 그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었으니까 말이다. 출입통제가 이루어졌다는 사소한 것조차 잊어버리고 말이다. “으음.” 서서히 눈을 떴다. 일자형 형광등 다섯 개가 줄지어 있는 천장이 눈에 띄었다. 익숙하진 않은 광경이었지만 모르는 광경은 아니었다. ‘양호실?’ “어? 이제 일어났니? 1학년 2반 출석번호 22번 유성하양?” 20대 중반의 젊은 여인이 책상을 앞둔 채 그녀에게 물어왔다. 2차원 화면이 빽빽한 글씨로 가득 차 있는 걸 보면 일을 하고 있는 중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양호선생님. 으음···!” 성하는 양호실 침대에서 반쯤 몸을 일으키다 갑자기 머리에서 이는 통증에 눈살을 찌푸렸다. 가만히 몸을 체크해보니 아픈 곳이 한두 곳이 아니었다. 마치 높은 곳에서 떨어진 것 같았다. ‘가만··· 어째서 내가 여기 있는 거지? 분명 나는 지하철에서··· 아악!’ “왜 그러니 성하야?” 양호선생은 성하가 짧은 비명과 함께 몸을 웅크리는 것을 보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괘, 괜찮아요. 근데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되었죠?” “아, 성우 군이었던가? 좋은 오빠를 뒀더구나. 지하철계단에서 미끄러져 기절한 너를 업고 이곳까지 왔단다.” “그, 그래요?” 성하는 위화감을 느꼈다. 하지만 지금 자신의 고통과 양호선생의 말은 정확히 부합되는 것이기에 별다른 의심의 여지는 없었다. 문득 한 생각이 떠올랐다. “아! 나, 주번인데.” “과연 형제로군. 네가 그런 말 할까봐 네 오빠가 이런 말을 남기더구나. 주번은 대신 봐준다, 우선 푹 쉬라고 말이야.” “헤에, 그래요? 오랜만에 맘에 드는 짓 했네요.” 양호선생은 피식 웃었다. “네 오빠에게 그런 말 하는 여자는 너밖에 없을 거야. 그런데 뭐 필요한 건 없니? 네 착한 오빠를 봐서 학교 삼대 비고 중 하나를 개방할 용의도 있는데.” 마치 무협소설에서나 나오는 기진이보가 가득 찬 창고처럼 소개했으나 실상은 선생들이 사비로 비축해둔 간식거리가 잔뜩 들어있는 냉장고, 또는 상자일뿐이다. 확실히 시대와 공간을 초월해 언제나 배고픈 학생들에게는 기진이보라 할 수도 있겠다. “으음, 그것보다······.” “그것보다?” 성하는 머릿속에 가득 찬 음식의 이름을 무의식적으로 내뱉었다. “해물 스파게티가 먹고 싶네요.” “······해물 스파게티?” 매우 예상외라는 듯 양호선생은 성하의 주문을 되씹었다.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잖아. 성하는 스스로 생각해도 자신이 이상하다고 느꼈다. 먹어본 적도 없는 음식을 자연스럽게 먹고 싶다고 말하다니. 그런데, 치밀어 오르는 해물 스파게티에 대한 식욕은 진실이었다. “으음, 조금만 기다려.” “······에? 만들 수 있는 거예요?” “이래 뵈도 1급 요리사 자격증은 가지고 있다고.” “아니,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데요···.” 양호선생은 말보다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그녀는 약품보관용 냉장고 중 하나를 보란 듯이 활짝 열었다. 냉장고 내부에는 약통과 함께 TV에서만 간혹 보던 각종 해산물들이 정리되어있었다. “더불어 저기 3번 냉장고에는 최고급 한우 등심살도 있어.” 자랑스럽게 냉장고의 보물들에 대해 설명하는 양호선생의 태도에 성하는 할 말을 잃었다. ‘근데 어째서 먹고 싶었던 걸까.’ 성하는 그 계기조차 생각해 낼 수 없었다. ――――――Really, did you keep plain everyday? chapter 3. Reconnect ――――――Eternity in Other-plane. 성우는 동생의 주번 일을 대신한 다음 자신의 교실인 2학년 5반으로 들어왔다. 어느 곳이나 그랬지만, 그의 학급인 2학년 5반 역시 떠들썩했다. 광주시민 전체가 가지는 공통화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17호 선 지하철 테러사건. “여어, 성우~ 안녕! 테러 안 당했냐?” 성우는 갑작스레 물어오는 학급친구의 물음에 뜨끔했다. 그 때, 그의 뒤로 성우보다 늦게 온 다른 학급친구가 들어왔다. 그 학급친구는 성우에게서 떨어져 그에게 다시 인사를 날렸다. “여어, 철수 씨 안녕하신가~ 테러 안 당했냐?” “무슨 소릴 하는 거냐 바보 자식! 그 놈의 테러 때문에 지각할 뻔했구만.” 테러 안 당했냐? 라는 물음은 아마 오늘 하루의 의례적인 인사가 된 것 같았다. 성우는 한숨을 쉬며 흔히 ‘명당’이라 일컫는 맨 뒤 창가의 자신의 좌석에 앉았다. 탕―! 성우의 책방을 두드리는 두 손이 있었다. 성우는 손의 주인을 올려다보았다. 오른쪽 귀에 피어스를 잔뜩 한 녹색 브릿지의 학생이 있었다. “영우냐. 무슨 용건이냐?” “테러 안 당했냐?” 성우는 말대답 대신 잽 두 방과 함께 몸을 반쯤 일으키며 깨끗한 호를 그리는 스매쉬로 답했다. 그의 악우인 영우는 복부의 고통을 느끼고 황급히 피했으나 스매쉬에 턱 끝을 스치고야 말았다. 애초에 성우가 그것을 노렸으니 망정이지, 자칫 잘못했으면 양호실 신세를 질 뻔 했다. 영우는 몸의 균형이 크게 흔들려 교실바닥에 쓰려졌다가 힘겹게 일어났다. 힘겹게 일어난 보람은 없었다. 정작 그를 다운시킨 성우는 책상에 양 팔을 포갠 후 얼굴을 묻고 있었기 때문이다. “야 자식아! 스매쉬를 날려놓고 자신은 꿈나라냐!” 성우는 얼굴을 묻은 채로 대답했다. “······후우, 잠이 안 온다.” “왜?” “방금 전에 죽인 테러범의 망령이 악몽을 꾸게 할까봐 두렵거든.” “뭐? 우···움화하하하하핫, 성우! oh my friend! ···농담이 늘었구나.” 성우는 무시했다. 진실을 가르쳐줘도 농담으로 듣는 우민愚民과 그 건에 대해 대화할 마음을 가지긴 힘들었다. 학교 내에서의 성우는 사실 매우 평범한 인간이었던 것이다. 당연히 그의 진실은 농담으로 밖에 들리지 않았다. 물론 성우가 지금이라도 테러범들에게서 회수한 베레타나, 글록을 꺼낸다면야 말이 달라지겠지만 말이다. “근데, 삼대미인 중 한 명인 레이디 씨를 업고 왔다며?” “레이디? 아, 성하 말이냐.” 따분한 학창생활을 조금이라도 즐겁게 보내기 위해, 학생들은 학교 내부에서 스타를 지정한다. 그리고 그 스타의 움직임에 갖가지 ‘소설’을 붙여 연예인의 가쉽처럼 즐거워한다. 먼 거리의 프로스타보다 가까이에 있는 아마추어스타를 더 체감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생겨난 아주 평범한 일이었다. 특히 광주권은 문화성장을 최우선으로 하는 도시이기 때문에 학교는 사회를 배우는 놀이터라는 방침이 기본이라 교사들의 의견도 스쿨스타를 선정하는데 큰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물론 스타선정에 학교선생들의 영향이 끼치는 만큼, 그에 따른 일상침해는 금지. 거기에 편의까지 봐주는 우선권까지 주어지는 훌륭한 아르바이트다. 현성대학 부속고등학교의 삼대미인이란 1,2,3학년 별로 나누어 1학년의 퍼팩트 레이디, 2학년의 얼음공주, 3학년의 여왕님을 말하는 것이다. 그 중 1학년의 레이디란 성우의 동생인 성하를 칭했다. “그래서? 뭐가 문제라도 되냐?” “정보가 들어와서 말이야. 너와 여동생이 피가 안 섞였다는.” “무슨 미연시 오타쿠들이나 내뱉을 소릴 하냐?” “뭐, 이 본인은 믿지 않지만. 다른 곳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더군. 벌써 해킹동아리, 아니 연합이 움직였데.” 원래는 해킹동아리가 정상이지만 그 규모가 현성대학 부속고등학교만이 국한 된 게 아니라 해킹연합이라 칭한다. 그들의 부장이 연합에서 꽤 높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소문이 있었다. 더불어, 그들의 부장은 별 몇 개 달고 있다는 소문도. “후우우, 그래서. 이 소동을 잠재우기 위해선 정확한 정보가 필요한 거냐?” 갖가지 추측성 소문이 난무하기 전에, 미리 신뢰도 높은 정보를 공개하는 게 편하다. 그리고 그의 악우는 그런 역할을 하기에 좋은 위치에 있었다. “후후후, 이 신문부의 다이너마이트 주영우가 절친한 친구를 위해, 가쉽거리를 미리 차단시켜주겠다는 거 아니냐.” “어느 정도로 불릴 거냐?” “교내신문정보를 전교생이 모두 다운로드 받을 수밖에 없을 정도로.” “후우, 네 녀석이 문제야. 그래그래, 멋대로 써라. 우선 레이디 씨가 지하철 계단에서 굴렀고, 나는 택시를 잡아 그 녀석을 이곳까지 옮겼다. 하필이면 여동생이라 땅바닥에 질질 끌고 갈 수도 없고, 업어서 옮겼을 뿐이다.” ‘남동생이라면 질질 끌고 갔을까?’ 영우는 식은땀을 흘리며 질문했다. “그런 거치곤 꽤 소중한 것을 다루듯 옮겼다는 보고가 있었는데.” “당연하지. 그 녀석의 몸에 상처 입으면 나 어머니께 죽는다.” 성우는 끔찍하다는 듯 ‘진실’을 얘기했다. 영우는 자신의 PDA에 글씨를 입력하더니 궁금한 게 있다는 듯 물었다. “근데 어째서 학교로 데리고 온 거지? 네 녀석의 어머니가 그럴 정도라면 병원에 갔어야 하는 게 아냐?” “아, 녀석 때문에 지각은 할 수 없으니까. 게다가 양호실의 장비와 양호선생님의 실력은 알고 있으니까. 이쪽이 훨씬 건설적이라고 판단했을 뿐이다.” 영우의 눈이 번쩍였다. “호오라, 그러니까. 성우 씨는 우리의 천사님을 믿고 레이디 씨를 맡겼다는 겁니까?” “뭐, 그런 셈이지.” 성우는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방금 전, 영우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그러고 보니, 언제부터 네 녀석이 내게 ‘씨’를 붙였냐?” “아아, 버릇이 되다보니. 어찌되었든 정보, 고맙다.” 영우는 성우에게서 멀어지더니 학급을 나섰다. “어디 가냐. 곧 HR이라고!” “재낀다. 기사를 잡았으니 빨리 써야지. 아, 그리고 씨를 붙인 이유 말인데, 나는 내 기사의 주인공이 되는 사람에게는 존칭을 붙여준다.” “······.” “알고 보면 네 녀석도 꽤 인기 많다고~ 눈치 채지 못한 게 죄악입니다아~” 영우는 그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성우는 책방에 얼굴을 묻고 좌절에 빠졌다. 무엇보다 정보를 중요시하던 자신이 자신에 관한 정보를 모르다니, 아무리 평범함을 가장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이건 크나큰 실책이었다. ‘후우 될 대로 되라. 오늘은 조금 지쳤다.’ 테러범들과의 총격전이 아무리 쉽게 이뤄졌다 할지라도, 어디까지나 생사를 결하는 전투였다. 그것도 처음으로 경험하는 실전이었다. 실전의 중압감은 어렸을 때 외할아버지의 권유로 수많은 전투 시뮬레이션을 치룬 그라 할지라도 영향이 컸다. 이상하게도 정신적 피로에 비해 몸의 피로는 없었지만 말이다. ‘오늘 고서점에 가봐야겠군. 무기도 보관할 겸.’ “선생님 오신다~~” 예나 지금이나 쉬는 시간에서 수업시간으로 넘어가는 사이는 언제나 시끄러운 대사로 이뤄졌다. 성우는 자신의 PDA에서 메모리 스틱을 빼서 책상 위에 나있는 홈에 끼워 넣었다. 그러자 책상이 양옆으로 열리며 자판과 모니터가 튀어나왔다. 책상의 변신은 아무리 봐도 적응이 안 된다. 변형제품이 이렇게 많아지다간 정말 삼단합체변신로봇이 튀어나와 도시의 안전을 지킨다고 광고하지 않을까? “아무리 시험용 최신식이라 해도, 이건 좀 적응이 안 되는군.” 시니컬하게 울리는 목소리가 귓가에 들렸다. 성우는 옆을 돌아다보았다. 꼭 자신이 할 대사를 남에게 빼앗긴 기분이라 흥미가 생겼다. 거기에는 무테안경을 쓴 이지적인 외모의 학생이 양손을 깍지 낀 채로 모니터 부팅을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성우의 시선을 느꼈는지, 성우와 마주보았다. “무슨 용건이라도 있어?” “아니, 이거 적응이 안 되지?” 그는 조금 놀란 눈으로 성우를 다시 보았다. 그리고 안경을 고쳐 쓰더니 빙긋 웃었다. “귀가 좋구나. 그 중얼거림을 듣다니.” “예? 중얼거림이라니?” “그래? 우연인가?” “무슨 소릴 하는지 모르겠네.” 성우는 속으로 놀랐지만 태연하게 시치미 땠다. 그의 이름은 알고 있었다. 류시안, 이탈리아에서 살다가 올해 광주로 전학 온 아이로서 이지적인 외모와 신비한 분위기로 유명한 아이였다. 그 유명도가 어느 정도면, 성우의 악우인 자칭 저널리스트 영우가 항상 ‘씨’를 붙일 정도였다. “차렷! 경례!” 어느새 담임선생님이 들어오고 학급위원이 일어나 전통적으로 동양의 학교에만 전해 내려오는 ‘선생님께 경례’를 붙였다. “후우, 결석한 사람은 없겠죠?” 2학년 5반의 담임인 박선영은 창창한 나이 26세의 여자였다. 미인이란 단어가 아깝지 않을 미모를 가지고 있었고 부가적으로 독신이란 점 때문에 많은 남학생들의 인기를 얻고 있었다. “오늘 이런 인사를 받았네요. 테러 안 당하셨습니까?” 그 순간, 학급 아이들 대부분이 웃음을 터트렸다. 성우는 웃지 않았다. 직접 테러를 당해보면 웃을 기운도 사라지는 것이다. 성우는 자신 외에 유일하게 웃지 않는 옆 사람에게 시선을 돌렸다. 시안은 흥미본위가 없다는 듯 모니터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는 독수리 타법으로 신중하게 자판을 두드리고 있었다. 독수리 타법인데도 손의 진퇴가 매우 빨라 분당 200타는 나올 정도였다. 이지적인 외모에 안 어울리는 독수리 타법은 정말 안 어울려보였다. 웃음이 절정에 달할 때, 담임은 교탁을 노크하듯 두드리며 말했다. “웃으라고 한 말이 아니에요. 우리 학교 사람들 중에 피해자가 나왔다고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그 중에는 바로 옆 반인 4반의 아이도 있어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줄어들었다. 처음엔 엄숙한 선생의 분위기에 압도되어, 다음엔 테러에 대해 생각하면서 웃지 않게 된 것이다. 자신들이 테러를 당한다면 웃을 수 있을까? “마침 우리나라엔 말이 씨가 된다는 속담이 있네요. 될 수 있으면 그런 말은 그만해주세요. 그리고 방송부나 신문부 학생 있습니까?” 아이들 몇이 손을 들었다. 선생은 그들을 향해 말했다. “적어도 오늘만큼은 테러에 대한 정보는 규제해주시겠습니까?” “저기··· 보도엔 생생한 정보가 중요한 데요.” “물론 생생한 정보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이 학교엔 테러사건에 휘말린 사람들의 가족이 많이 있어요. 그들의 기분도 생각해줘야죠.” “학교의 결정입니까?” 한 학생의 질문에 담임은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저었다. “교사회의에 그런 안건은 없었습니다. 이건 명령이 아니라, 부탁일 뿐이죠.” “그렇다면 적어도 2학년 5반의 부원만큼은 규제하겠습니다. 훌륭한 기자는 부당한 기사를 폐기해야할 의무가 있는 거니까요.” “정말 고마워요.” 담임은 환하게 웃었다. 성우는 사회가 아주 썩지만은 않았다는 걸 체감하며 팔에 고개를 묻었다. 학급회의는 꼭 끼어들어야 할 필요는 없었다. 자율에 맡기니, 이렇게 잠을 청하는 것도 가능했다. ‘후우, 그나저나 테러범에 대한 얘기가 나올 때마다 뜨끔뜨끔하니 견딜 수가 있나. 음, 이번 시간 끝나고 성하나 보러가야겠다.’ 그런데··· 잠이 안 온다. ‘슬립머신··· 성능 되게 좋군.’ 성우는 다시 고개를 들어올렸다. “평소에 오던 잠이 오늘은 안 오나 보지?” 시안이 물어왔다. 대화는커녕, 평소에 사담(私談)같은 건 한마디도 하지 않는 녀석이라, 성우는 적잖이 당황했다. 조용한 게 정상인 녀석에게 이렇게 쉽사리 남에게 말을 거는 변화는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성우는 원하지 않는 거였다. 최대한 귀찮은 걸 피하기 위해 자신을 연기하고 있는데, 돌발적인 변수는 원하지 않았다. ‘나에게 흥미를 가진 건가? 어째서?’ 성우는 생각이 너무 지나쳤음을 느끼며 상념을 흩어버리고 손을 높이 들었다. “선생님, 양호실에 가 봐도 될까요?” “아, 양호선생님에게 들었어요. 여동생이 기절했었다죠? 가보아도 좋아요.” 담임은 이해한다는 듯한 표정으로 허락했다. “고맙습니다.” 3층에 있는 학급을 나서, 1층의 양호실로 향했다. 뒷머리를 거북스럽게 강타하는 시선들을 무시하고서. “설마, 시스콤?” “피가 안 섞였다는 소문이 있던데?” “성우의 여동생이··· 그··· 레이디였지?” “항상 멍해서 그렇겐 안 봤는데!” “가능성이 있어, 금단의 사랑이라니··· 로맨틱해. 꺄아~” 이내 반전체가 떠들썩거렸다. 담임선생의 통제도 소용없었다. “우리 응원해주자!” “오오오오~ 가라가라~ 결혼까지 GO!" ‘···다 들려.’ 성우는 그 때 처음 자신의 비상식적으로 뛰어난 청각을 원망했다. 그것 덕분에 목숨을 건졌으면서 이런 말을 하다니, 귀가 배은망덕이라고 쿠데타 일으켜도 할 말 없었다. 성우는 양호실까지 도달했다. ‘음? 무슨 냄새지?’ 맛있는 냄새가 양호실에서 발원했다. 성우는 양호실 문을 열었다. “실례합니다···아?” “음? 오빠?” 성우는 눈을 비비고 다시 양호실을 둘러보았다. 아침에 왔을 때와 외관상 달라진 부분은 없었다. 다만, 누워있던 성하가 일어나 있다는 것과, 깨끗하던 탁자가 각종 그릇과 냄비로 어지러워져 있다는 것만이 다를 뿐이다. “성우니? 너도 먹을래? 해물스파게티.” 양호선생이 팔팔 끊는 물에서 능숙하게 파스타를 건져내며 물었다. 성우는 우선 성하의 곁에 앉았다. “갑자기 웬 해물 스파게팁니까?” “성하가 먹고 싶다고 해서 솜씨 좀 내봤지.” 양호선생은 접시에 담긴 파스타 위에 각종 생선을 얇게 잘라낸 고명 같은 걸 얹고 거기에 하얀 소스와 붉은 칠리소스를 뿌렸다. “자. 먹어.” “뭐, 주신다면 고맙게 먹겠습니다만.” 성우는 거부하지 않고 자신의 앞으로 밀려온 해물 스파게티 그릇을 잡고 포크를 능숙하게 놀려 먹었다. “하얀 소스는 치즈에 명태를 우려낸 건가요? 점성이 생각보다 강하네요. 붉은 칠리소스도 사실 칠리말고 다른 재료가 들어간 것 같은데?” “해물 스파게티니까, 시원한 맛이 우선이겠지?” “헤에? 그럼 이건 선생님의 오리지널인 거예요?” “아, 해물스파게티가 어떻게 생긴 건지 본 적도 없어.” 성우가 묻자 양호선생이 대답했다. “······뭐, 맛있으면 되는 거겠죠.” 성하는 묵묵히 스파게티를 먹고 있다가 말했다. “해물 스파게티는 외할아버지가 잘 먹던 건데. 처음엔 먹기 힘들었는데, 나중에서야 그 맛에 길들여졌죠. 그런데 이것은 처음부터 입맛에 맞네요.” “그건 기쁜 걸?” 성우와 양호선생간의 화기애애한 대화를 유심히 지켜보던 성하는 반쯤 남은 스파게티 그릇을 놓았다. “꽤 친밀한 사이네요.” 성우는 동생의 말에 당황했다. 하지만 양호선생은 그렇지 않았다. “ABC로 하자면 R까지 간 사이 일까나?” 누군가를 놀리듯 양호선생은 그에게 다가가 머리를 슬며시 만지며 말했다. 성하의 얼굴이 붉어졌다. “불결하군요!” 성우는 당장이라도 열을 올릴 듯한 성하를 만류했다. 그리고 골치 아프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ABC에서의 R은 수리(Repair)와 개조(Reconstruction)의 R이다.” 성하는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수리? 개조? 남녀상열지사에 그런 단어는 아무리 대봐도 어울리지 않았다. 성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냉장고를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1학년 때, 내가 우연히 이 녀석을 수리했고 그 다음 선생님의 요구에 따라 개조했지. 교환조건은 양호실의 마스터카드키.” “어째서?” “어째서긴, 편안한 수면을 취하기 위해서지. 양호실 침대는 푹신하니까 꽤 편안하게 잘 수 있어.” “수업은?” “아슬아슬하게 재끼지.” “선생님들이 뭐라 안 하셔?” “수업에 방해가 안 된다면 괜찮다는 대답을 이미 받아뒀어.” “이해할 수 없어.” 성하는 말 그대로의 표정을 지어내는 풍부한 표정을 뽐내고 있었다. “이해받을 거라 생각하지 않지만, 학교에서의 평판은 이해되고 있으니 잠자코 있어주렴.” 성하는 양호선생에게 돌발적으로 물었다. “양호실에서 오빠가 이상한 짓은 안 하나요?” “어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성우는 그런 물음에 당황하며 성하를 막아섰으나 오히려 양호선생은 성우를 바라보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음? 사실대로 말해야 할까?" 성우는 찜찜한 얼굴이 되었다. "···당연하죠." '이 사람, 즐기고 있어.' 성우는 혹여 그녀가 거짓말할까봐 노려본다. 양호선생은 그런 눈빛을 '사람 다루기 베테랑'이란 스킬을 이용하여 가볍게 흘려버렸다. 그렇게 정적이 생겼다. 성하는 두 사람의 커뮤니케이션(?)을 바라보며 의심어린 눈초리로 그들을 노려보았다. 두 사람이 잠시 신경전을 벌이는 사이, 성하의 눈초리는 날카로워질 대로 날카로워졌다. 그 긴장을 즐기던 양호선생은 입을 열었다. “네 오빠라는 녀석은 이곳에 오면 시체가 되지.” “···?” “너무 깊이 잠들어. 장난도 못 칠 정도로 말이야. 물론 장난도 못 칠 정도로 이쪽이 바쁘긴 해도.” 성하는 미심쩍은 눈빛을 지우지 않았다. 오빠에 대한 신뢰도를 단호히 보여주는 일면인 것 같았다. 성우는 속으로 유감을 표했다. ‘슬슬, 자구책이 필요할 것 같은데···.’ 마침 양호실 벽 한구석에 걸린 무언가가 눈에 띠었다. “HR시간 끝나가는 군. 빨리 먹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 성우는 벽에 걸린 시계를 보며 모르는 척 중얼거렸다. 성하는 다시 스파게티를 먹기 시작했다. 매우 빠른 속도였는데, 그러면서도 흘리거나, 소스가 튀어 옷이 더러워지는 일 같은 건 없었다. 과연 퍼팩트 레이디라는 별명이 붙을 만했다. “근데 어째서 해물 스파게티가 먹고 싶어진 거냐? 이런 거 먹는 거 한 번도 본 적 없는데.” “음? 그러니까. 으음, 그냥 먹고 싶어졌어. 파직― 하고 떠올랐다고 할까나?” “그래? 헤에, 파직―이라. 어딘가의 외계인과 교신이라도 한 거야?” “···시선이 있으니 집에서 말하죠.” 성하는 양호선생을 흘끗 보고 있었다. 동생님은 말을 주먹으로 하십니까? 성우는 그렇게 생각했으나 크게 내색하진 않았다. 난처한 웃음으로 때울 뿐이었다. [딩동~ 댕동~ 1교시 수업이 끝났습니다.] 수업종이 울렸다. “이런, 이제 올라가봐야지?” 양호선생이 스파게티 그릇을 싱크대에 담그며 말했다. 말을 맺은 후에도, 손은 부산히 움직여 어느새 식기세척기 안에 모든 그릇이 들어가 있었다. 성하는 인사와 함께 산뜻한 움직임으로 양호실을 나섰다. 그 움직임이야 말로 교내에서 그녀의 명성을 한층 더 넓게 퍼트린 절기, 레이디 스텝이었다. 성우는 성하가 사라지자 교실로 돌아가기는커녕 오히려 양호실의 소파에 몸을 묻으며 중얼거렸다. “인간의 삼대본능 중 하나로 기억을 덮어씌운 건가. 그것도 자기취향으로··· 대단하군. 외할아버지는.”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차라도 마실래?” “아뇨. 이제 신학기가 시작되었는데, 벌써부터 땡땡이를 쳐선 안 되죠.” “그래? 항상 멍하게 있으니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몰랐어.” 성우는 씁쓸하게 웃었다. 자신이 그녀의 분위기에 이상함을 느끼고 있듯 그녀 역시 자신이 평범함과 거리가 멀다는 것을 느끼고 있을 터였다. 그가 파악한 그녀는 이런 양호실에 처박혀 장부나 정리할 사람이 아닌 것이다. 그런 그녀의 앞에선 오히려 편해질 수 있었다. 다른 사람이 성우를 보는 이미지인 ‘멍한 소년’은 그녀에겐 통하지 않을 것이라는 걸 미리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따금 그녀의 정체를 밝혀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긴 했다. 하지만 생각을 하는 순간 그만둔다. 이 관계를 유지하고 싶다는 마음에서이다. 그에게 그녀가 있는 양호실은 편안한 쉼터인 것이다. “앞으로 거의 안 올 것 같아요.” “응? 어째서?” “경품에 당첨되었거든요. 슬립머신이.” “호오. 그거? 우리 집에도 하나 있는데. 상당히 효과가 좋아. 최소 2시간으로 8시간의 효과를 낼 수 있으니 말이야.” 성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2시간으로 8시간? 꽤 구식인가 보죠?” “음? 아니야. 가전제품만큼은 해가 지날 때마다 최신식으로 업그레이드 하거든.” 30분으로 8시간 숙면의 효과를 볼 수 있는 자신의 슬립머신과 그녀의 슬립머신의 차이는 4배 차이였다. 그녀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 갭은 어떻게 설명해야 될까? ‘뭐, 이쪽의 것이 더 좋은 것인가 보지. 추첨경품이라 부가기능이 달려있거나.’ 가슴속 깊숙한 곳에서부터 자리 잡고 있던 무신경함이 일어나 상념을 제거했다. “쓸쓸해지겠네?” 양호선생은 장난스럽게 말했다. “어차피 잠자는 모습밖에 못 봤잖습니까. 그게 그건데요 뭐.” “네가 잠자는 동안 할 수 있던 유희거리가 줄어버린 게 문제란 소리야.” “거짓말은 그만. 여하튼, 건강하세요.” “그래그래 다치면 보자. 신체가 없어진 것만 아니라면 다 고쳐줄 테니까.” 터무니없는 자신감이 담긴 양호선생의 말에 멍한 웃음으로 답하며 성우는 양호실 문을 닫고 자신의 반을 향해 걸었다. “변함없이 자기관리가 철저하네?” 성우의 흐릿한 눈빛을 떠올리며 양호선생은 모니터를 살폈다. 그곳에는 수많은 창이 떠 있었다. 파일 제목은 학생신체검사기록표. 그러나 신체검사기록표치고는 너무나 많은 숫자와 기하학적 문양이 화면을 뒤덮고 있었다. 2045년. 전쟁이 끝난 후, 학교는 다시 개혁 전으로 변했다. 재능개발활동을 중심으로 하던 학업이 다시 어디에나 재단하여 쓸 수 있는 ‘평범한 인재’개발로 바뀐 것이다. 재능대로 사람을 키우기엔, 전쟁의 상처는 너무 컸다. 학생들의 단일화, 병렬화가 이뤄지며 나라의 복구는 빠르게 이뤄졌지만, 발전은 오히려 퇴보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2061년, 완전한 지역자치화가 이뤄지며 적어도 광주의 교육만큼은 변했다. 예술중심, 문화중심이란 표어를 내걸고 도시전체가 움직이는 광주에서 획일화된 인재양성은 썩어빠진 구세대의 종양에 불과했다. 하지만 지역자치화가 이뤄진 지금시대는 여러 가지의 의미로 공동교육 역시 필요했다. 그래서 한 것이 고등교육 일시통일화. 1~5학년까지를 초등학교, 6~9학년까지를 중학교로 하여 이때의 학생들은 재량활동에 중심을 맞추지만, 10~12학년의 고등학교는 기본적인 문과, 이과를 나누어 사람들을 한 반에 가두고 획일화된 교육을 시켰다. 다만, 오전과목만. 오후과목은 다시 재량활동에 들어간다. 오전과 오후의 과목 분리. 이것이 광주자치구 고등부 교육이었다. 성우가 택한 오전의 통일과목은 이과였다. 그리고 오후의 재량과목은 공과―시스템 설계였다. 성우는 가방을 싸고 교실을 나섰다. 그가 교실에 남은 마지막 사람이었다. 성우가 교실을 나서자, 2―5라고 써져있던 글자판이 ‘문예부’로 바뀌었다. 교실 내에서 지잉― 하는 울림이 들렸다. 교실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벽이 개방되면서 교실을 합치는 것이다. 학교자체가 일(一)자 형과 같은 직선형이 아닌 곡선형이라 교실을 합쳐도 교단의 위치는 비슷했던 터라 합동수업이 가능했다. “디자인의 승리로군.” 성우는 걸음을 옮겼다. 재량수업까지는 앞으로 40분이나 남았다. 평소에는 양호실에 점심 먹으러 갔을 테지만, 지금은 해물 스파게티 때문에 배가 불렀다. ‘음, 오랜만에 거길 가볼까?’ 성우가 그런 생각과 함께 발품을 판 곳은 별관의 정보보관실이었다. 별관 최상층인 5층에 위치한 곳이라 사람이 뜸했다. 종이책이 성할 때, 도서실이라 불렸어야 정상일 곳이었다. 하지만 손목시계대신 컴퓨터를 찰 정도의 시대가 되어서는 종이책의 가치는 골동품의 가치 이상은 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때문에 더 비싸진 것일지는 몰라도, 정보보급의 가치는 떨어졌다. 성우는 자신의 학생증 역할을 하는 카드를 문 앞에 붙어있는 검사기에 가져다 대었다. 미닫이문이 자동으로 열렸다. 보관실 내부의 풍경이 한 눈에 들어왔다. 원통형의 동선에 마치 벌집처럼 육각형을 이루는 서가들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었다. “아.” 성우는 순수한 의미로 감탄했다. 오래된 퀴퀴한 냄새는 의외로 좋았다. 그리고 천장의 유리를 통해 들어오는 햇빛이 책장 사이사이를 지나가는 광경도 아름답다, 라는 표현을 붙이기 아깝지 않았다. ‘생각 없이 쉬기는 좋은 곳이네.’ 성우는 서가 사이를 걷다가, 책 페이지를 넘기는 소리에 무의식적으로 소리를 따라 이동했다. 미로처럼 이어진 서가를 다섯 개 정도 지나서야 인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성우는 서가에 등을 기대에 땅바닥에 엉덩이를 맡긴 채로 독서 중인 소년을 보았다. 그는 천장에서 내려오는 빛과 빛 사이의 그늘에 책을 놓고 보고 있었다. 성우는 그를 알아봤다. 무테에 직사각 안경을 쓴 이지적인 외모는 쉽게 잊어버릴 만한 게 아니었다. 그것도 올해 들어 매일 아침 보고 있는 얼굴이라면 더욱. “류시안?” 시안은 성우의 중얼거림에 고개를 들어 성우를 쳐다보았다. “유성우?” “어, 성우지.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거야?” 성우는 동공에 힘을 풀며 말했다. 그렇게 하니 평소보다 더욱 졸린 듯한 모습이었다. 목소리 역시 피곤함이 느껴졌다. “책보지. 너도 볼래? 이거 추천할 게.” 시안이 들어 올린 책의 제목은 ‘세계의 미스터리, 세계종교의 이면’이란 책이었다. 꽤나 오래된 책인 것 같았다. 칼라판이긴 하지만 표지에 금이 갔을 정도니 말이다. “이상할 것 같은 책이구나. 그런데 왜 그늘에 놓고 책을 보는 거야?” 성우가 보기에 서가가 만들어내는 그늘은 너무 어두웠다. 책을 보기에는 알맞지 않았다. “음? 이상한 걸 묻는 구나. 책의 바탕인 하얀색은 빛을 잘 반사하고, 빛을 직접 쐬면 눈이 아프거든.” “그런 건 알고 있긴 한데. 자외선은 이곳의 천장이 차단하잖아? 아플 리가 없을 텐데?” “그렇긴 하지만, 밝은 빛 자체를 눈이 안받아주니까 할 수 없는 거지. 뭐, 그늘에서도 책을 잘 읽을 수 있으니 굳이 자리를 바꿀 필요는 없잖아?” 시안은 책을 덮고 바닥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책을 자신이 기대고 있던 서가 한 구석에 집어넣었다. “여기 자주 오나 보지?” 성우가 물었다. “전학 왔을 때부터 점심때면 이곳을 찾았지. 사색에 빠지긴 좋은 곳이거든.” “아, 미안. 방해한 것 같네.” 성우의 사과에 시안은 고개를 저었다. 더불어 싱긋 웃었다. “사색이라 해봤자, 별거 아닌데 뭐.” “그렇다면 다행이네. 그 책보고 하는 사색은··· 어떤 의미론 별거 일 것 같지만.” “하하. 그 말도 그럭저럭 틀린 건 아니네.” 시안은 말을 하는 도중, 바지주머니에서 둥그런 물체를 꺼냈다. 딸깍하는 소리와 함께 뚜껑이 열렸다. 그 속에는 복잡하게 돌아가는 초침과 분침이 있었다. 요즘에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회중시계였다. “나는 이만 가봐야 될 것 같아.” “음? 수업이 시작하려면 아직 30분이나 남았는데?” “아아, 이쪽은 신학부거든. 미리 먼저 가두는 게 여러 가지로 좋아.” 성우는 그가 종교인이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 아니, 그 전에 이 학교에 신학부라는 게 있었던 것조차도 말이다. 시안은 출구를 향해 걸어가다가 슬쩍 고개를 틀었다. “향수가 있다면 뿌려두는 게 좋아. 피냄새가 진하니까.” “······.” “뭐, 이쪽의 인간이 아니라면 파악하지 못하겠지만.” 그 말을 끝으로 시안은 서가사이로 사라졌다. 성우는 그의 이상한 말을 곱씹었다. 그리고 자신의 소매를 코에다 가져다 대었다. 특별한 냄새는 나지 않았다. 오히려 책에서 뿜어지는 퀴퀴한 냄새만 옷에 배었을 뿐이다. “뭐야, 저 녀석.” 성우는 자신보다 더 이상한 사람이 이 학교 내에 있는 것에 대해서 기뻐해야 될지 슬퍼해야 될지 잠시 고민에 빠졌다. 사람들은 소문을 먹고 산다. 명언도 뭣도 아니다. 솔직한 감상일 뿐이다. 성우는 이 때, 그 말을 생각해냈다. 공과―시스템 설계과의 교실로 향하는 복도에서부터 사람들의 미묘한 시선이 느껴졌다. 걷고 있으면 모세의 기적처럼 인파가 양쪽으로 갈라졌다. 아무리 원체 말초적 신경이 무딘 성우라도 신경 쓰이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성우가 가장 신뢰하지 않은 대사가 바로 “신경 탓인가?”라는 짧은 문장이다. 그 자신의 무신경함이란 베리어를 뚫고 들어올 신경 쓸 계제가 그 자신에게 직접적으로 닥치는 일 이외에 있을 거라는 건 믿지 않았다. 맞았다. 이 일련의 모든 분위기는 성우를 중심으로 일어난 것이었다. 성우는 그 증거를 포착했다. 너무나도 쉬웠다. 학교에 있으면 보기 싫어도 봐야하는 것, 교내곳곳에 설치되어있는 사이버 광고판이 그 증거였다. 광고판 한쪽 란에 대서특필로 특종! 이란 단어와 함께, ‘교내 3대미인 퍼펙트 레이디의 오빠는 시스콤?’라는 글이 보였다. 성우는 한동안 멍하니 광고판을 응시했다. 주변에서 사람들이 소곤소곤 거리는 게 들려왔다. 좋은 귀는 필터링 기능까지 있는 것인지, 삐이이~ 삐이이~ 소리로만 민중의 음성을 번역했다. 밀레니엄시대에 악명을 떨친 영등위급 필터링이었는지, 쇼크 받을 내용은 뇌리까지 전달되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성우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걸음이 향하는 곳은 원래의 목표였던 공과가 아닌 방송학과였다. 딸깍― 성우는 안경을 꺼내 쓴 후 방송학과 건물 뒤편으로 돌아갔다. 건물 뒤편에는 전선관리장치가 모여 있었다. 성우는 그 중에서 통신선 관리용 장치의 문을 열고 통신선의 일부에 안경의 단말기를 연결했다. “후우, 학교에서 이런 짓하긴 싫었지만, 받으면 갚아줘야지.” 성우는 그의 악우인 영우가 서식(?)하는 신문부의 컴퓨터에 접속했다. 학교차원에서 설치한 고차원적인 해킹방어라인이 있었지만 성우에게 그것을 돌파하는 건 그냥 길거리를 달리는 것보다 쉬운 일이었다. ‘방어라인이 허술하군. 이참에 개조해주지. 후후후, 근데 직접 사용하는 것도 어려울지도 모를 것 같네 친구.’ 성우는 컴퓨터의 전 시스템에 걸쳐 암호화를 진행했다. 확실히 25겹의 암호화 장벽은 시스템을 완전히 파괴해버리는 크랙킹에서도 안전하겠지만 암호를 모르는 이상 컴퓨터를 영구히 사용 불가능으로 만들어 버릴 게 분명했다. 영우가 자주 하는 말 중 하나가 자신의 컴퓨터는 도저히 자신의 손으로 포맷시키지 못할 것 같다, 라는 거였다. 그 안에 들어있는 학교기사용으로 모아두었던 자료 때문이었다. 컴퓨터를 사용하기 위해선 영우는 50기가에 육박하는 하이퀄리티 자료들을 그 자신의 손으로 지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한순간, 친구를 판 것이 엄청난 화로 다가오는 것이었다. 그래서 우정은 중요하다. 오후 4:30분. 3시간에 걸친 재량수업이 끝나고 운동부를 제외한 학생들은 하교하기 시작했다. 추가적으로 방송학부의 학생들도 남았다. 지금까지 보지도 듣지도 못했던 바이러스가 신문부에 출현했기 때문이라는 소문이 있었다. 만약 그 정체가 바이러스고, 그 타입이 전염성이라면 방송학부의 모든 컴퓨터가 위험하다는 말이 되니, 철야작업을 하며 원인을 밝혀낼 수밖엔 없었다. 성우 역시 하교했다. 가장 처음 들린 곳은 역의 코인박스였다. 그곳에서 압축팩을 찾아들고 역에서 나왔다. 그 후 바로 현성고등학교가 있는 곳에서 남서쪽에 위치한 빌딩지대에 들어갔다. 빌딩자체는 무미건조했지만, 빌딩들의 배치는 매우 절묘하여 빌딩들이 만들어낸 그림자들은 아스팔트 아트라는 말을 떠올리게 했다. 위성으로 내려다보면 팔각형의 배치가 되는 빌딩군 한 가운데에는 공원이 있고, 그 공원의 숲의 샛길을 쭉― 나아가다 보면 미개발지역이 나온다. 성우는 그곳으로 향했다. “웬일이냐. 연락도 없이 갑자기 찾아와 신체검사를 해달라니.” 반백머리에 산골서당 훈장처럼 턱수염을 길게 기른 60대 노인은 복잡한 전선을 점검하며 침대 위에 앉아있는 소년을 향해 물었다. 완전히 드러난 소년의 상체 위에는 수많은 스티커가 부착되어있었다. 호리호리하지만 체형이 망가지지 않은 선에선 최선으로 단련된 몸이었다. 그런 몸은 피부가 거짓말 같은 표현인 백옥 같아, 마치 하나의 예술품 같아보였다. “요즘 몸이 이상하게 좋아져서요.” 유난히 피부가 좋고 원래부터 뛰어난 외모 때문에 평범한 소녀보다 아름다운 소년, 성우는 전선이 잔뜩 이어진 장갑 낀 손을 보고 쥐었다 폈다 했다. “시스템 체크, 올 그린. 헤헴 시작하자꾸나.” 노인이 터치스크린에 떠 있는 Start 버튼을 누르자 성우의 몸에 부착된 스티커가 반짝이기 시작했다. 성우는 매뉴얼에 따라 움직였다. “성우야 하나만 묻자.” 성우는 스티커를 때어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말씀하세요.” “네 놈, 무슨 약이라도 먹었냐? 어떻게 하루 만에 모든 신체능력이 급상승한 거냐. 모든 신체능력이 최고의 밸런스 수준을 유지하면서 극한까지 도달했다. 이건 현재의 사이보그 테크놀로지로도 불가능한 수치야.” “하나를 선택하면, 하나를 버려야 한다, 라는 말씀인가요.” 성우는 교복을 하나씩 걸치기 시작했다. “그런데, 네 놈의 몸은 인간의 한계수치까지 도달한 거다. 네 놈이 그 체형으로 할 수 있는 최선의 수련을 거치면, 탄생할 이상적인 몸이 바로 지금의 그것이란 말이다!” “헤에, 생각보다 대단했군요.” “문제는 그게 아니다. 신체 자체의 밸런스는 완벽하지만, 어쩐지 뇌파가 뿜는 주파수가 예전과 비교해 2배는 고속화되었다.” 노인은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그는 마를 대로 마른 고목 같은 손가락으로 수염을 꼬고 있었다. 긴장할 때마다 나오는 버릇이었다. “주파수라··· 어쩐지 해킹스피드가 빨라졌더라.” 성우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여전히 시선은 노인에게 두지 않고 옷 입는 데만 집중할 뿐이었다. “그런 건 상관없다. 다만, 하나 말할 것은··· 네 놈··· 대체 어떻게 살아있는 거냐.” 성우는 어느새 옷을 다 입고 있었다. 노인은 성우의 등을 대고 계속 말한다. “뇌가 일부 변형되었다. 우뇌와 좌뇌 사이에 순수한 단백질로 이뤄진 무언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리고 그 무언가를 통해 뇌의 혈류가 비정상적으로 빨라졌다. 이 변화는 일종의 진화라고 할 수 있을 정도다.” 그 무언가가 어떤 종류의 물건인지 자세히 알아내려면 머리뚜껑을 열어야 된다는 소리와 구성 물질을 알아봤자 전혀 의미 없는 짓이라는 소릴 덧붙였다. “흐음. 그래요?” “하나만 더 말하지. 흥분하면, 죽는다.” 성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그럴 줄 알았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거 흥분되는 사실이로군요.” 농담처럼 말했지만 그건 진실이었다. 흥분하면 죽는다니, 두려울 정도로 흥분될 일이었다. “전신의체화를 하면 살 수 있을 지도 모른다.” 노인은 유일한 희망이라는 듯 절박한 어조로 말했다. ‘정인관’이란 이름을 가진 이 노인에게 성우는 친손자와 같은 존재였다. 그런 존재가 생기(生氣)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기계의 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가슴 아프지만, 존재자체가 사라지는 것보다는 나았다. 성우는 대답대신 물음을 던졌다. “이 몸으로 사이보그와 맞짱 뜨면 이길 수 있을까요?” 엉뚱한 물음이었지만 정노인은 성실, 솔직하게 대답한다. “민간용이라면 이길 수 있겠지만, 네가 그런 것과 굳이 싸울 리는 없고. 군용을 말하는 거라면, 애초에 최첨단 장비로 원거리사격 전용 중무장을 하고 그대로 원거리공격을 하지 않는 한, 절대로 이길 수 없다. 군용의체는 말 그대로 군용으로 전신이 흉기니까.” 극한과 초월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성우가 보통 인간의 몸이 가질 수 있는 극한의 신체를 가졌다면 사이보그는 인간의 몸 자체를 오래전에 초월한 것이다. “그럼 할아버지가 개발 중인 의체라면 군용을 이길 수 있나요?” 정노인은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2089년도 생산품까지는 문제없다.” 현재가 78년, 그렇다면 시간을 뛰어넘는 오버테크놀로지란 셈이다. 과거 군용의체개발팀장이었던 정노인의 말은 신뢰가 갔다. 성우는 생각에 잠겼다. 그가 침묵을 깨는 데까지는 그리 많은 시간이 소요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일정을 잡아주세요. 자금은···?” “전에 준 3억으로 충분하고도 2억 정도 남는다. 개발은 모두 되었고 부품 값도 사실 8000만 정도다.” “거기에 10억 더 보탤 게요. 좀 더 개발시켜주세요. 평생 쓰게 될지도 모르니까요.” 성우는 자신의 PDA로 은행창구에 접속하여 정노인의 계좌로 즉석으로 송금했다. 그래봤자 돈은 많았다. 외할아버지의 유산과 그 돈으로 불린 돈은 50억이 조금 더 넘었다. 정노인은 성우의 말을 듣고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손으로 친척보다 더욱 가까운 친구의 평생 쓰게 될지도 모르는 몸을 만들다니. 부담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으나 그만큼 개발자의 정신은 뜨거워졌다. 성우는 구석에 놓여진 압축팩을 들어다 놓았다. 그 속에는 오늘 지하철 테러에서 얻은 총화기를 비롯한 무기가 들어있었다. “이것 좀 맡길 게요.” “어디서 얻은 거냐?” “지하철 바닥에 떨어져 있던 걸 주은 것뿐이죠. 아, 데저트 이글과 매그넘 리볼버는 선물이었지. 이건 챙겨가야겠다.” 성우는 가방에서 그 두 권총을 꺼내 자신의 바짓주머니에 넣었다. “오늘 테러··· 네 녀석이 처리한 거였냐?” 성우는 정노인의 물음에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약은 녀석.” 정노인은 실실 웃었다. 원래 성격이 웃음이 많은 소탈한 성격이었으나 지금까지의 대화 자체가 심각노선을 달리고 있었기에 쉽게 웃지 못한 것이다. “그렇게 웃으니 보기 좋네요. 웃으면 장수한다니, 잘 하면 저보다 오래 사실 수 있으시겠네요. 그럼, 저는 이만. 슬슬 여동생이 하교할 시간이라······.” “그래, 다음에 만나지. 다음에는 여동생 좀 데리고 와 보거라.” 성우는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왔다. 앞이 보이지 않는 깜깜한 어둠이 먼저 보였다. 방금 전까지 있었던 곳은 지하 20m에 위치한 지하실이었던 것이다. 계단을 올라간다. 탁탁탁― 체중이 실려 부딪히는 발소리가 메아리쳐 되돌아와 귀를 때렸다. 성우는 중간에 걸음을 멈춰 세웠다. “후우.” 한숨이 나왔다. “제길······” 쿵― 주먹으로 벽을 때린다. 살갗이 벗겨지며 피가 살짝 튀었다. 벽에서 주먹을 때니, 핏자국이 묻어있었다. 벽을 타고, 네 줄기의 피가 흘렀다. 성우는 멍하게 그 모습을 보았다. “결국 이렇게 되는 건가.” 성우는 자신의 스포츠백에서 소독용 스프레이를 꺼내 상처부위에 뿌리며 다시 지상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로부터 잠시 후 ‘책의 무덤’이라는 이름의 고서점古書店에서 스포츠 백을 어깨에 멘 소년 하나가 나왔다. 성우는 거실 소파에 앉아 서책을 펼쳤다. 흐릿한 눈길이지만 내용은 확실히 보고 있었다. 누가 보면 성우를 따분하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그러나 성우는 따분하지 않았다. 책을 든 손길에서 안정을 느낀다. 책에 고정한 시선 자체가 즐겁다. 책의 내용을 생각하는 두뇌활동에 두근거린다. 책 속에 담긴 필자의 마음에 심장이 꿰뚫린다. 전자책으로는 결코 느끼지 못할 감각. 성우는 그 어느 때보다 집중력을 높이고 있었다. 성하가 바로 옆에서 불러도 듣지 못할 정도였다. 결국 물리적인 힘에 의해 그 집중은 파괴되었다. “음? 성하냐?” 성우는 성하에게 얻어맞은 뒤통수를 문지르며 멍하니 말했다. 맞은 데가 맞은 데라 제 정신은 차리는데 꽤 시간이 걸렸다. 성하는 매우 화난 표정이었다. 소설의 표현을 빌리자면 49일간 밤낮으로 살을 바르고 뼈를 뽑아 다시 살을 접어 꼬치로 꿰어 불에 구워 씹어 먹을 정도로 화가 나있는 것 같았다. “이게 뭐야.” 성하는 고저 없는 음성으로 말했다. 성하의 입에서 액체질소가 뿜어져 나오는 게 아닌가, 성우는 걱정이 되었다. 그런 허구가 인정된다면 필히 자신은 얼어 죽을 것이다. “음?” 싸늘한 음성과 함께 성하가 내민 것은 목제 무늬가 인상적인 PDA였다. 성우 자신이 성하의 중학교 졸업선물로 준 것이라 잊어버리지 않고 있었다. “고장 난 거야?” “···농담하세요? 바보 오빠야! 화면을 봐야지! 기계 상태 따윌 봐서 뭘 할 거야?” 성하는 화면을 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리다가 성우의 복부에 정권을 쳐 날렸다. 성우는 복부를 감싸고 괴로워하다가 겨우 일어서 성하가 가리킨 화면을 다시 보았다. “······.” 거기에는 그의 악우가 제멋대로 휘갈겨 써놓은 기사가 있었다. 퍼팩트 레이디의 오빠는 시스콤? 이라는······. “아냐. 너 같은 여자 그리 좋아하진 않아. 연애대상이 아냐.” 성우는 기사를 부정했다. 그 보답은 성하의 정강이 차기였다. 성하는 화가 났는지 붉어진 얼굴로 외쳤다.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이 잘난 여동생을 싫어··· 가 아니라! 내용을 보란 말이야, 내용을!” 성하는 PDA를 조작해 기사 내용 일부를 거대화 시켰다. 성우는 그것을 읽었다. “음, 그러니까··· 양호선생님의 코멘트. 성우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매우 이상한 학생이다. 이상할 정도로 멍해서 존재 자체만으로 분위기가 평화로워지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 매우 호감을 가진 편이다. 테크닉도 매우 뛰어나 장래의 신랑감으로는 손색이 없다. 음, 이게 뭐 어째서?” “······정말 몰라서 그러는 거야?” “사실만을 적어놨잖아. 뭐가 문제인 거야?” 성우의 태연스러운 답변에 성하는 말문이 막혔다. 성하는 숨을 몰아쉰 후, 다시 PDA를 조작해 기사의 다른 부분을 거대화시켰다. “오라버님의 코멘트, 사랑스런 여동생을 맡기는 데엔 병원보다 양호선생님을 신뢰한다, 고 한다. 조사한 결과, 유성하 양에 대한 양호선생님의 진단은 전치 1주일의 얄팍한 전신타박상이었고, 전문가가 아닌 사람이 보기엔 매우 위험한 상태로 판단이 되었을 거라는 말을 덧붙였다. 본 기자는 이렇게 판단한다. 전문가의 눈 같은 건 가졌을 리 없는 퍼팩트 레이디의 오라버니가, 왜 일부러 병원에 성하를 데리고 가지 않은 것인가. 그것은 분명, 양호선생과 만날 자리를 일부러 마련하기 위해서라고. 흐음, 사람의 말을 이렇게도 받아들일 수 있구나.” 성우는 영우의 작문에 순수하게 감탄했다. 자신과 달리 그의 악우는 이야기를 지어내는 데 천부적인 재능을 지닌 것 같았다. “어이, 여동생을 그냥 양호선생을 만나기 위한 도구로 사용한 보답정도는 각오해 뒀겠지?” 성하는 외모에 안 어울리는 말투를 과감하게 토해내며 뼈마디를 꺾었다. 순식간에 평화롭던 집안은 살벌한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퍼팩트 레이디라는 별명에 걸맞게 성하는 모든 운동종목에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아쉽게도 그 중에는 격투기 역시 끼어있었다. “하하하, 설마 이런 기사를 믿는 거야?” 성우는 어색하게 웃으며 기사를 부정했다. “호호호, 증거는 있어?” 성우의 웃음을 똑같이 웃음으로 답한 성하는 망설임 없이 정권 찌르기, 무에타이의 미들 킥의 순으로 성우의 복부를 공략하여 푹신한 소파에 몸을 묻어버린 다음 무차별 구타에 들어갔다. 그나마 얼굴을 때리지 않는 것은 친 혈육의 정 때문인지, 아니면 학교의 평판을 신경 써서인지. 구타는 한참 뒤에 끝났고, 성하는 바닥에 쓰러져 있는 자신의 오빠를 외면하며 코웃음을 쳤다. “테크닉이 뛰어나? 정말 대단하신 오라버니군. 흥!” “···테크닉이 뭐 어때서? 말 그대로 기술력Technique일 뿐이잖아. 기술력이 뛰어난 게 그렇게 불만인 건가. 이 오빠가 기계공업을 배우지 말았으면 한 거냐.” 성우는 쑤시는 전신을 주무르며 몸을 일으켰다. 급소는 아슬아슬하게 피했기 때문인지, 움직이는데 불편하진 않았다. 오히려 아팠던 부위가 시원해지기 시작했다. 회복은 매우 순조로웠다. “음? 아··· 그렇긴 하지만. 에잇, 하여간 불결한 오빠에게 저녁밥은 없어!” 성하는 붉어진 얼굴로 그렇게 내뱉으며 주방으로 달려갔다. “······치사하다.” 성우는 자신의 여동생의 행동에 투덜거려주며 다시 소파에 몸을 맡기고 독서에 집중했다. 전신에서 계속해서 시원함이 느껴지고 있었다. 이상했다. 원래 몸에 타격을 받으면 발열이 먼저인데, 시원함이 느껴지다니. 자신이 모르는 또 다른 뭔가가 몸에 존재하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자신이 모르는 몸. 기분 나쁠 건 없다. 인간은 아직 단백질 구조조차 다 파악하지 못했고, 유전자 증후군 역시 완치할 의술을 갖지 못했다. 기분 나빠할 계제가 못 된다. 이 정도로는. 마침 보고 있었던 책이 그런 말을 하고 있었다. ‘인간의 신비, 그 비밀 속의 이면.’ 성우는 마지막 페이지까지 모두 읽은 후, 책을 덮고 표지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갑자기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하하핫, 하하하.” 성우는 폭소를 터트렸다. 웃으면서 자신의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중간에 성하의 이상한 것을 보는 듯한 시선을 느꼈지만 무시했다. 성우는 책을 서가의 빈 공간에 끼워 넣었다. “시안의 사색도 이런 식이었을까? 한 번 물어봐야겠다.” 그것은 현실에 대한 도피, 하지만 정정해야한다. 중요한 현실에 대한 무시다. 자신의 몸이 가지고 있는 폭탄 같은 건,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았다. 목숨에 미련? 있다. 그러나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죽음 같은 건 맞이할 각오 역시 되어있다. 그러니 무시한다. 성우가 가질 수 있는 최선의 마음가짐이었다. 도피처이자 돌파구. 수많은 결정이 교차하는 의지의 바다에서 사람들은 도피처를 찾고 돌파구를 찾는다. 성우 역시 잠시 의지의 바다를 유영하다 온 것인 건지도 모른다. 그리고 찾은 거였다. 지극히 개인적인 자신의 목숨 같은 것보다. 사람들이 남긴 지식을 자신의 손끝을 통해, 자신의 시선을 통해, 자신의 마음을 통해, 자신의 뇌를 통해 느끼는 게 가장 크고 보람 있는 일이었다. 기쁘게 다음 책을 고른다. 성우는 날이 넘어가는 줄도 모르고 책을 읽었다. 중간에 식은 밥이라도 먹으라는 제안을 하며 이끌어낸 동생의 노크소리나, 직장에서 뒤풀이를 하느라 새벽에 집에 돌아온 어머니가 술에 취해 발하는 “아이, 사랑하는 우리 아들딸~ 테러 안 당하셨습니까~” 라는 식의 돌아왔다는 소리를 대신한 농담도 듣지 못했다. 성우의 집중력은 그야말로 절정에 달했다. 누가 몰래 들어와서 그나마도 별로 없는 가구를 챙겨가도 모를 판이었다. 그런 집중력도 신국판 500페이지에 달하는 소설책을 덮음으로써 끊겼다. “후······ 하.” 성우는 오랫동안 참고 있었던 숨을 몰아쉬었다. 긴 숨소리 뒤에는 짧게 끊어지는 심호흡이 따랐다. 그리고 나직한 한 마디. “좋았다. 소설이라는 것, 이야기라는 것, 그 존재자체만으로도 좋구나.” 행복한 여운에 성우의 동공은 텅 비었다. 아주 멀고 먼 존재를 바라보는 듯한 그의 망막에는 수많은 환상이 자리 잡았다가 다시 산화했다. 사색에서 깨어났을 때는 이미 5시가 훨씬 넘어있었다. ‘아차 학교에 가야 하는데. 이대로라면 지각한다······!’ 그 순간 슬립머신이 시선에 잡혔다. 강렬한 데자뷰를 느낀다. 그리고 기억해냈다. 울창한 수해, 계곡, 버섯, 대결, 혈전, 열매, 그리고 고통과 살해. 마지막으로 죽음! “그건 환상이야.” 세차게 뛰는 심장을 제어했다. 몸은 생각대로 움직여주었다. 차갑게 식어가는 심장과 더불어 그의 손은 무의식적으로 책상 서랍을 열고 있었다. 그곳에는 총알이 가득 찬 데져트 이글과 매그넘 리볼버가 짧은 잠을 자다가 주인의 부름을 기다리고 있었다. 환상이라는 건 알고 있다. 그런데 이 행동은 무엇인가. 성우는 자신이 우스워 두 권총을 놓으려 했다. 그러나 손은 의지를 배반하고 필사적으로 권총을 잡고 있었다. 손안에 가득 차는 두 묵직함만으로 성우의 심장은 안심하고 있었다. “그래, 부적이야, 부적.” 성우는 그렇게 자위하며 두 권총을 넓은 통바지 주머니에 끼워 넣고 슬립머신에 등을 받쳤다. 등부분에 감촉이 느껴지고 다리가 가지런히 자리를 잡히자 성우는 뚜껑을 닫았다. 야광버튼이 천장에 속속히 모습을 드러냈다. 어제와 설정이 같다는 것을 이해한 순간, 성우는 망설임 없이 시작버튼을 눌렀다. 쿠션에 몸이 반쯤 묻혔다. 부유감이 느껴졌고, 잠시 후 닫힌 망막으로 어제와 같이 메시지가 투영되었다. [편안한 세계 속으로 어서 오십시오.] ‘과연 그럴까?’ 끝없는 몽환세계로 직행하는 도중, 성우는 그런 의문을 던졌다. 의식이 눈을 뜨고 전신에 촉감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등은 딱딱함에 투덜거리고 가슴과 배는 바람이 간질거렸다. 서서히 눈을 떴다. 첫 감상은 어두웠다. 그러나 밝았다. 천장을 가득 채운 진한 갈색과 녹색의 무한한 질주만이 보였다. 태양조차 가릴 정도로 울창한 수해가 만들어낸 나뭇가지와 나뭇잎만으로 된 천장이었다. “······결국 불안은 맞았다는 얘긴가?” 슬립머신에서 깨어나면 보는 광경과 다르다. 형광등 달랑 하나만 존재하는 삭막한 천장이 아니었다. 옷차림을 돌아보니 슬립머신에 들어갔을 때와 같았다. “제기랄, 이라고 투덜거려야 정상인 걸까. 아니면 반쯤 미쳐야 정상인 걸까? 아니면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처럼 토끼라도 찾아볼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성우는 침착했다. 손에 들린 두 권총 때문일 것이다. 인간은 안전하게 자신을 지킬 힘이 있으면 어느 상황에서나 잘 적응한다. 성우가 외할아버지에게 배운 건 알고 보면 생존법이었고, 해킹 역시 2070년도를 안전하게, 그리고 거침없이 살기 위해서 필요한 그 나름의 생존법이었다. 그렇다곤 해도 두려움이 없는 건 아니었다. 여긴 전혀 알지 못하는 세계다. 알지 못한다? ‘그러고 보니··· 여기 낯익은데?’ 생각을 쥐어짰다. 대입을 반복해도, 완벽하게 어울리는 곳은 머릿속에서 찾기 힘들었다. “하!” 한참동안 주변을 둘러보며 생각을 집중하던 어느 시각 성우는 탄성을 흘렸다. 찾아버렸다. 머릿속에 기록된 풍경 중 이곳과 똑같은 곳이 있었다. “이곳은 내가 살해당했던 곳이잖아···.” 자그마한 연못이 보였고, 한쪽으론 숲길이 보였다. 잔디과 식물이 자라있는 공터도 보였다. 공터엔 병장기가 스치고 간 바닥의 흉터도 그대로였고, 주변의 나무엔 날카로운 흉기가 쓸고 지나간 흔적도 존재했다. 성우는 나무의 상처를 손으로 만졌다. 환상 따위가 아니었다. 걸음을 급하게 옮겼다. 성우가 걸음을 옮긴 곳은 연못과 숲의 경계, 풀이 상대적으로 높이 자라난 곳이었다. 발견했다. 자신이 엎드려 두 무인의 혈전을 지켜본 흔적이었다. 제멋대로 자라나 삐죽삐죽한 풀이 가지런하게 양옆으로 누워있는 것으로서 증명되었다. “이거··· 잘하면 그 사람들도 볼 수 있겠군.” 성우는 아무런 감정도 담기지 않은 얼굴로 총을 점검했다. 리볼버는 언제든지 쏠 수 있었고, 데져트 이글은 안전장치만 풀면 아무 때라도 표적을 박살내 버릴 수 있었다. “음? 무슨 냄새지?” 주변을 보는 시각에만 신경 쓰느라, 감지하지 못했던 냄새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아주 오래 전에 맡았던 냄새였다. 제주도에서 외할아버지와 캠프파이어를 할 때 맡았던 냄새에 가까웠다. 바로 장작을 태우는 냄새. 더불어 군침이 도는 노릿한 향기가 풍겨지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성하 녀석에게 아무것도 건져내지 못했지.” 성우는 책에 집중하느라 성하가 남긴 식은 밥의 존재를 알지 못하고 있었다. 어찌됐든 배가 고프다는 소리였다. 성우는 냄새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언제든지 쏠 수 있도록 미스 샷이 없는 리볼버를 앞세워 걸었다. 둘 다 매그넘 탄을 쓰지만 데져트 이글의 경우는 슬라이드 식이라 잘못 쏘면 탄피가 걸리는 잼 현상이 일어나버린다. 여러모로 전문가용 권총이라는 것이다. 생각 외로 냄새의 진원지는 가까웠다. 숲길을 따라 나무를 10개 정도 지나치면 나오는 곳이었다. 바위가 많아 상대적으로 나무는 적은 곳이고, 나무 자체도 다른 나무들에 비해 키가 작았다. 목재로 쓰기 좋은 나무였다. 가까이 가자 매캐한 냄새가 더불어 풍겨왔다. 생나무를 태우면 필연적으로 생기는 냄새였다. 그리 인간의 몸에 나쁜 건 아니지만 냄새 자체는 고약하게 느껴지는 특성이 있었다. 성우의 코 역시 그런 고약한 냄새를 느꼈지만 곧 익숙해져버렸다. ‘편리한 코군.’ 성우는 그런 사소한 생각을 떠올렸다. 원래라면 떠올리지 조차 아니 했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답답하게 발작하는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해선 그런 생각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생나무를 장작으로써 태우는 장본인은 바로 그를 죽인 두 무인이었던 것이다. 성우는 진정하고 나무를 타고 올라가 나뭇가지 사이로 몸을 숨기고 상황을 살폈다. 그의 시선은 두 살인용의자의 정수리를 약 70도 각도로 잡고 있었다. 창과 검은 땅바닥에, 그것도 언제든지 들어 곧바로 사용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둘의 자세는 결가부좌라는, 조금 특이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양발을 꼬아 허벅지 위에 올리는 요가의 기본동작이었다. 성우 역시 할 수 있는 동작이기도 했다. ‘이상하군. 일어서기 어려운 자센데.’ 덧붙이자면 음식 먹기 엄청 불편한 자세다. 돌발적인 상황을 대처하기 힘든 자세라는 건 분명했다. 예를 들어······. 탕. 탕. 탕. 탕. 성우처럼 그들의 자세를 포착하자마자 예고 없이 권총으로 저격을 한다든지 하는. 44구경 매그넘 4발은 각각 그들의 양쪽 허벅지를 관통했다. 매우 빠른 연사였는데도 성우가 생각한 데로 목표에 맞아버렸다. 성우는 자신이 쏴놓고도 놀라고 있는 중이었다. 전문가도 감탄할 사격도 그렇지만 문제는 망설임 없이 사람을 쐈다. 자신의 죽음이 지금 살아있는 것처럼 단순한 환상이었을 경우엔, 그들은 무죄다. 정당방위가 아닌 것이고, 단순한 학살이다. 그러나 성우는 뒤늦게 조차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무의식적으로 리볼버의 방아쇠를 한 번 더 잡아당기고 있는 손가락에 다시 놀랐을 뿐이었다. 자신의 몸에 내재된 살의는 이미 신체의 일부를 지배하고 있었다. ‘본능은 저들을 적으로 판단···했다, 라는 건가?’ 지금까지 멍하게 살아오긴 했어도, 본능에 모든 걸 맡긴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충동적인 행동들조차 이성의 제어아래에서 이뤄졌다. 이제 와서 본능이 어쩌고저쩌고 해봤자 윤곽이 잡히지 않았다. 다만, 이 감각을 무시하는 건 아니었다. ‘제어할 수 없는 본능도 존재하며, 그것은 높은 확률로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 존재한다.’ 그런 구절을 읽은 기억이 있었다. 사이비 이론일지는 몰라도, 지금 머릿속에 떠오르는 구절은 묘하게 신뢰가 갔다. 긴 상념을 마치고 두 살해용의자의 반응을 지켜봤다. 기묘했다. 신음소리 같은 건 없었고, 다만 두 손을 하늘을 잡으려는 듯 허우적댔다. 가부좌는 풀려있었다. 성우는 나무에서 내려와 데져트 이글과 매그넘으로 듀얼 쇼트를 준비한 채, 그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성우가 지척에 다가왔을 때까지 그들의 반응은 허공을 향한 허우적으로 일관했다. 마치 익사하는 사람의 모습이었다. 지척에 다가가고 그들의 모습을 봤을 때, 성우는 경악했다. 말 그대로 44구경 매그넘탄에 그런 효과가 있었는지는 몰랐다는 표정을 그대로 표현했다. 두 사내 모두 온몸에 지렁이처럼 굵은 핏줄이 튀어나와 살갗이 부풀어 올랐다. 얼굴 표정은 흉신악살처럼 일그러져있었고, 부릅뜬 눈은 충혈 될 대로 충혈 된 체, 피눈물을 막 쏟으려는 참이었다. 성우가 가까이 다가가자 그들의 눈알이 데구르르 일정한 방향 없이 굴렀다. 마치 불안한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들과의 거리가 1m 정도 밖에 되지 않았을 때, 창을 옆에 둔 사내가 고개를 푹 숙이더니 한순간 고개를 번쩍 쳐들고 입을 열었다. 왈칵―!! 목구멍에서부터 가히 한 바가지나 되는 선홍색 피가 쏟아져 나왔다. 그는 매우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열심히, 그리고 빠르게 턱을 움직였다. 천천히 그는 무릎을 가지런히 하면서 성우를 향해 꿇었다. “산의 정령이시어! 감히 영체靈體를 손상 입힌 것. 심히 죄송스레 생각합니다! 부디 이 목숨을 거두시고 노여움을 푸시어, 저의 가족에게 닥칠 저주를 거둬 주시옵소서!!!” 한 마디 한 마디 할 때마다 피를 토한다. 너무나 비장한 그의 표정과 목소리는 성우의 가슴에 한 가닥의 파문을 일으켰다. 핏핏핏―――! 물이 지나가는 고무호스를 구멍 내어 물줄기를 만들어낼 때나 나오는 소리와 함께, 창수의 전신 혈관이 몸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며 분수처럼 핏줄기를 뿜어냈다. 그럼에도 무릎을 꾼 자세는 흐트러지지 않았고, 고통 속에 일그러진 표정도 더 이상 변화하지 않았다. 눈동자에 생기가 사라질 때까지 그의 표정과 자세는 유지되었다. “대체, 뭐야.” 성우는 멍하니 평범한 대사로 감상을 뱉었다. 이해가 가지 않았다. 쾅―! 이번에는 검수가 머리로 땅을 받았다. 그는 혈관이 역류해 터지고 근육이 비틀려가는 고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손을 품속에 넣더니 책 한 권을 꺼내고 성우의 발 앞에 정중히 놓았다. “형산炯山의 모든 버섯을 관장하는 정령이시어! 낭인 중 하나, 가후가駕逅家의 차정車庭! 절친한 친구까지 공격하면서까지 무武에 뜻을 뒀으나 인연이 없었고 결국 의를 해친 죄로 천벌과 함께 생을 마칩니다. 그러나 이 무급, 영께서 거둬주시고, 제가 이루지 못했던 협俠을 이룰 인재에게 주시면 비록 지옥에 가서나마 영靈의 공덕을 칭송할 것입니다!” 검수는 이마를 다시 한 번 땅에 받았고, 그 결과 퍼석하는 소리와 함께, 뇌수가 바닥에 고였다. 그곳을 통해 봇물 터지듯 덩어리진 피가 울컥울컥 뿜어졌다. 가후=차정은 일찍이 부모를 여흰 고아였고, 우연히 스승을 만나 안정적인 생활을 하였다. 협을 좋아했으나 그저 그런 낭인이 될 수밖에 없음을 한탄한 그는 자신의 무력을 위해 일생을 바치는 여타 낭인처럼 살아왔고, 그 비탄에 찬 생을 후회하고 참회한 후, 여기서 마친다. 그가 성우에게 준 무급은 그의 스승이 남긴 유산으로 뛰어난 공부功夫는 아니나 일신을 수호하는 데는 충분했다. 그러나 그건 성우가 알 수 있는 사항이 아니었고, 그냥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버섯?” 성우가 한참동안 고민하다가 무의식적으로 내뱉은 한마디였다. 그들의 행동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래도 주는 걸 마다하는 성격은 아니라 검수가 준 무급을 들었다. 모르는 글자였으나, 신기하게도 읽을 수 있었고 쓸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박투搏鬪, 비검飛劒, 세각細脚?” 무심코 펼쳐본 부분에는 그런 뜻의 단어가 큰 글씨로 적혀있었다. 성우는 수많은 책을 읽었고, 그 중에는 팔괘장, 태극권 같은 무술교련서도 있었기 때문에 이 책의 용도를 금방 파악할 수 있었다. ‘근데, 정말 모르겠군. 왜 나를 버섯의 정령이라 했을까.’ 성우는 아직도 활활 타오르고 있는 장작을 보았다. 단지 무심코 시선이 갔을 뿐이다. 따닥따닥 소리가 신경 쓰였기 때문일까? “송이버섯··· mk―2?" 장작불 가까이서 꼬치에 옆구리가 꿰뚫린 채, 구워지고 있는 물체를 성우는 그렇게 부른 적이 있었다. 성우는 각각 버섯이 다섯 개씩 꽂혀있는 꼬치 두 개를 손에 들었다. 겉 표면이 먹음직스럽게 익은 버섯은 향기도 먹음직스러웠다. 아니, 배고프면 기피하던 음식도 먹음직스럽기 마련이다. 성우는 두 개의 꼬치를 들면서 바닥을 보고 다시 시선을 하늘로 향했다. 한숨을 조금 쉬었다. “······.” 피바다가 되어있는 땅바닥을 보고 음식을 먹을 기분 들 사람 없고, 혈향이 짙게 배어나는 곳에서 맛을 감상하는 사람 없다. ‘무리하면 못 먹을 것도 없지만···.’ 무리할 이유 같은 건 없었다. 그리고 시체를 장사지내줄 의리도. 성우는 숲길을 따라 걸으며 두 시체에 등을 보였다. “전리품은 용도를 알 수 없는, 돈처럼 생긴 것하고, 지도··· 인가?” 그 중 하나는 형태가 일정한 손가락만한 막대 12개였다. 재질은 파악할 수 없었지만 금속 개열이었고, 겉 표면에 이곳의 언어로 숫자를 뜻하는 문자가 새겨져있었다. 다른 하나는 정교한 지도였다. 기호 대신 그림이 조금 더 첨부된 것을 제외한다면 20세기에 발행된 지도처럼 생겨있었다. 성우는 지도를 접고 걸음을 옮겼다. 꼬챙이에서 이빨로 버섯을 빼내 씹으면서 오직 눈에 보이는 글을 따라 걸었다. 정처는 없었다. 애초에 지도가 있어도 방위를 모르니 무용지물이었다. 산세를 파악한 후, 지도에 따라 움직이기엔 목적도 없는 삽질일 뿐이었다. “음, 송이버섯보다··· 좀 더 부드러운 건가.” 이미 하나의 꼬챙이를 버리고 다음 꼬챙이의 버섯을 씹어 먹을 때 내뱉은 한 마디였다. 저번에 먹었을 때는 생으로 씹었기에 제 맛을 못 느꼈는데, 구워먹으니 꽤 먹을 만 했다. 툭―― 그의 발밑에서 흙먼지가 일어났다. “근데······왜 이리··· 몸이 둔하게 느껴지지?” 그 뿐만 아니라 타오르는 갈증도 있었다. 마치 태양을 삼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묘한 감각에 성우는 부유감에 지배당하는 자신의 두 손을 보았고, 거기에는 버섯 꼬챙이가 없었다. 두 손 너머 내려다본 땅위에는 구운 버섯 네 개가 꽂힌 꼬챙이가 떨어져있었다. “···못···먹겠군.” 배는 어느 정도 불렀으니 흙투성이가 된 걸 굳이 주워 먹을 필요는 없었다. 그래도 맛을 생각하면 아깝다는 느낌이 들었다. 세상이 일제히 혼란을 일으키고 있었다. 시선이 향하는 곳마다 잔상을 일으켰다. 세상의 흐름이 엄청 느리게 흘러가는 것 같았다. 그 자신의 몸조차 그 흐름에 맞춰가고 있는 데 의식만이 마치 부적합한 존재가 된 것처럼 혼자서 폭주하고 있는 것 같았다. 지나치게 가속하고 있었다. 이러다간 정말로 세계가 멈춰버릴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한참 뒤, 강렬한 현기증이 해일처럼 밀려왔다. 그것은 결코 항거하지 못할 거력을 내재하고 의식을 쓸고 몸을 지배했다. ‘왜 이러는 거지.’ 세상이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대체 뭣 때문에 내가 이곳에 있는 거야.’ 아주 한참 뒤 눈앞까지 돌진해온 땅이 보였다. ‘아니 반대인가?’ 어느 순간부터 몸이 회전했다. 성우의 의식이 완전히 제어불가능의 영역에 들어갔더라도, 몸만은 낙법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 다시 한참 후. 등에서 짧은 충격과 함께 긴 고통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것도 어느 순간부터 느껴지지 않았다. 서서히 시야가 흐려지기 시작했다. 차가운 물줄기같은 게 관자놀이를 스치고 귓가까지 도달했다. ‘눈물···.’ 제어는 불가능. 몸의 제어를 잃기 전, 언제부터인가 고통을 느끼고 있었다. 머리가 깨질 듯 아팠지만 무감각하게 넘겼다. 사실, 무감각이라는 단어를 차용해서 넘기기엔 참기 힘든 고통이었다. 굳이 참은 건 아니었다. 고통을 어떻게 표현하면 되는 것인지 그게 서툴렀을 뿐이다. 아무도 봐주지 않는 몸부림을 어떻게 표현하면 되는 것인가를······. 결국 사람은 혼자다. 외할아버지의 말이 떠올랐다. 사람 인人자는 사실 사람과 사람이 기대어 만들어진 상형문자가 아니라 혼자선 못 걷던 옛날사람 하나가 지혜를 짜내 지팡이를 사용하면서 만들어진 문자라는 엉터리이자 사이비적인 예를 들면서 강조했던 내용이었다. ‘지혜인가.’ 지혜를 의지하기엔 이곳은 모르는 것 투성이었다. 인종을 모르고, 문화를 모르고, 지리를 모르고, 식물과 동물의 개성과 특성을 모른다. 안다면 먹음직스러운 버섯 같은 거 먹지 않았을 터였다. 성우는 제어가 되지 않는 시야에 들어온 풍경을 보고, 생각을 추가했다. ‘다만, 하나는 알 것 같군.’ 새빨갛게 타오르는 불덩이 하나가 산 너머로 천천히 모습을 숨긴다. 아주 오랫동안부터 존재해왔던 불덩이가 수 억겁에 달하는 세월을 못 이겨 떨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석양은 다름없이 아름답다는 것.’ 그것으로 의식은 끊겼다. 석양빛이 깔린 숲은 아름답지만, 그 아름다움의 끝은 위험일 뿐이다. 크르르르릉―― 안 그래도 어두운 숲에서 태양이 달아나 칠흑 같은 어둠이 깔리자 붉은색 털을 가진 늑대들이 하나 둘씩 모습을 드러냈다. 거짓말 보태서 황소만한 크기의 늑대들은 크기만 황소였지 그 날렵함은 고양이가 도망칠 정도였다. 새파란 귀안을 빛내는 늑대들은 숲 속을 질주해나가며 먹이를 찾아다녔다. 땅바닥을 박차 나무를 타는 늑대도 있었다. 성우가 보았다면, 자신이 알고 있는 늑대들과 확실히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크기도 크기지만, 발목 쪽으로 갈고리가 두 개 씩 더 있었고, 뒷다리의 생김세가 표범에 비견될 만큼 훨씬 탄력적이었다. 나무 위를 평지처럼 질주하던 늑대 중 하나가 우연히 길바닥에 놓여있는 먹이를 보았다. 인간이자 남성이었고 젊었다. 소년이다. 체격은 왜소한 편이었으나, 키는 그럭저럭 컸다. 하루치 식량으로는 충분했다. 무엇보다 살아있다는 데에 점수가 많이 주어졌다. 늑대는 죽은 고기는 안 먹는다. 그리고 자신이 사냥한 고기만 먹는다. 다른 곳의 동족들이 가지는 습성은 다를지는 모르겠지만 형산의 늑대는 동족 사이에서도, 인간을 포함한 지성생물체 사이에서도 긍지 높기로 유명했다. 늑대는 뒷다리의 탄력만으로 나무에서 솟아올라 먹이가 있는 지점을 향해 정확히 낙하했다. 약 3미터정도 지상과의 거리가 남았을 때, 갑자기 탕― 하는 총성의 메아리가 숲속을 가로질렀다. 사실, 총성이 들리기 전부터, 가엽게도 먹이를 노리고 낙하하던 늑대의 몸은 비역학적으로 날카로운 직각을 그리며 날아갔다. 늑대는 그대로 나무에 부딪히고 땅바닥에 떨어졌다. 그 순간 이미 늑대는 살아있지 않았다. 잠시 후, 늑대의 표적이었던 사람에게로 한 인영이 다가왔다. “늑대가 달려들기에 살아있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후우, 길 좀 물어보려 했는데··· 이거 틀린 건가요?” 멍청할 정도로 태평하게 중얼거리는 인영의 정체는 여자였다. 그것도 미인에 17, 18세 정도로 아주 젊어보였다. 귓가의 머리카락의 일부를 땋고 나머지는 목까지 내려오는 칠흑의 단발이라는 특이한 헤어스타일에 무거워 보이는 새까만 가죽 코트를 걸쳤다. 천성적으로 밝아 보이는 동양적 외모였지만, 영롱한 에메랄드 빛 눈동자가 중심이 된 눈가에는 싸늘함에 가까운 냉정함이 감돌았다. 소녀는 왼손으로 들고 있던 여행용 대형 가방을 가볍게 땅에 내려둔 후, 오른손 안의 회전식 탄창의 권총을 숲속 깊은 곳을 향해 쐈다. 깨갱 소리가 폭음이 체 가시기도 전에 들렸고, 그것을 신호로 수십 쌍의 귀안이 내뿜는 불꽃이 숲을 가로질러 소녀와 쓰러진 인간을 향해 다가왔다. “이거 귀찮게 되었네요.” 소녀의 빈 왼손이 살짝 흔들린다 싶더니, 어느새 또 하나의 권총이 들려있었다. 방아쇠를 당기는 손가락이 분주히 움직이자 어두운 숲속에 불꽃이 마구 튀었다. 더불어 늑대들의 단말마가 숲속에 퍼졌다. 그녀가 들고 있는 권총은 리볼버와 비슷하게 생겼어도 굉장히 달랐다. 탄수가 12발 들어가는 것부터가 달랐고, 총신의 길이도 20센티미터 정도로 굉장히 길었다. 총구는 매우 작았다. 11구경보다 크고 22구경보다는 작았다. 매우 작은 총알의 크기로 봤을 때, 권총의 밸런스는 오래전에 무너졌어야 했다. 그러나, 이건 보통 권총이 아니었다. 권총이라면 모두 있는 격철擊鐵이 없는 권총. 약실藥室에서 탄약이 자동 발화하는 특이한 권총이었던 것이다. 그 위력은 약 시속 30킬로미터로 낙하하던 100킬로그램짜리 늑대가 직각으로 튕겨져 나가고···. 탕― 탕― 곧바로 달려들던 늑대의 미간을 꿰뚫는 것도 모자라 항문까지 꿰뚫어 날려버릴 정도였다. 사실 늑대의 항문을 빠져나간 건 단 한 발 뿐이었다. 소녀의 사격이 가지는 정밀도는 매우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물체의 같은 곳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다시 맞출 수 있을 정도라는 말이었다. 두꺼운 늑대의 혈관과 근육을 꿰뚫을 위력과 그 위력에 필히 따라오는 물리학적 반동을 견디어 내고 그도 모자라 뛰어난 정밀도까지 자랑했다. 그것도 연약해 보이는 팔과 어깨만으로. 이 정도 되면 총이나 소녀나 괴물이란 소리다. 가장 처음에 달려들었던 늑대들 10마리가 사라지는 건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그러나 늑대들의 수는 전혀 줄지 않은 것 같았다. 총소리는 지울 수 없었기 때문에 늑대들을 끌어들일 수밖에 없었고, 애초에 형산의 늑대들은 결코 꼬리를 말고 도망가는 일이 없었다. 오히려 흉폭함이 절정에 달했다. “중부의 육식동물들은 모두 괴물이라더니······.” 총알은 양쪽에 4발씩밖에 남지 않았다. 명백한 위험상황이었으나 소녀는 공포는커녕 위기감조차 느끼지 않고 있었다. “커컹――!” 또 한 무리의 늑대들이 달려들었다. 소녀는 차분히 방아쇠를 놀려 약실의 화약을 비우기 시작했고, 총성이 8번 울리기까지의 시간은 매우 짧았다. 그리고 늑대들의 단말마가 8번 울렸다. 그러나 달려든 늑대는 8마리뿐이 아니었다. 총 12마리, 그것도 원래는 사방에서 달려드는 체계적인 조직을 갖추고 있었다. 다만, 방금 전의 사격으로 정면과 좌우편에서 달려드는 늑대들을 모두 죽였으니 남은 건 뒤를 노리고 달려드는 4마리의 늑대들밖에 없었다. 본능에 가까운 조직적인 움직임으로 무장한 덕분에 그들은 비록 4마리여도 까다롭게 공격했다. 바깥쪽에 위치해있던 두 마리는 다시 양옆으로 빠졌다가 탄력적인 허리를 이용해 공중에서 방향을 바꾼 다음 뒷다리의 힘을 최대한 발해 섬광처럼 소녀의 사각을 노렸다. 안쪽에 있던 두 마리 중 하나는 공중을 날아 떨어졌고, 다른 한 마리는 오히려 자세를 낮추며 언제든지 이빨을 들이댔다. 단지 0.5초대에서 일어난 콤비플레이였다. 평범한 인간이었다면, 순식간에 다리가 뜯기고 머리가 날아갔을 것이다. 어디까지나 평범한 인간이라면. 늑대들의 배치가 달라진 시점에서 이미 소녀는 낮은 자세로 땅바닥을 쓰는 발차기를 날리고 있었다. 아슬아슬하게 땅바닥을 닿을락말락하는 발차기는 과감한 각도였으나 완벽한 정밀도를 지니고 있었다. 그냥 발차기도 아니고 바닥에 금속이 박힌 가죽부츠로 날린 발차기라 늑대의 머리가 주저앉았고 눈알이 튀어나왔다. 그대로 소녀의 발 앞에 쓰러졌다. 앉은 자세 그대로 소녀는 양팔을 날개를 펼치듯 뿌렸고 그녀의 양손에서 묵직한 덩어리가 날았다. 그것은 매우 빠른 속도로 소녀의 좌우 사각을 공격하던 늑대 두 마리의 크게 벌린 입을 파고들었다. 우드득하는 소리와 함께, 늑대 두 마리의 신형은 소녀를 비껴나갔고 한참 떨어진 땅바닥에 착지했다. 그로부터 1초도 안 되어 둘 다 새까만 핏덩이를 토하고 쓰러졌다. 그보다 전, 소녀가 앉은 자세 그대로 발목에 손을 가져다댔고, 은색 섬광이 하늘로 치솟아 떨어져 내리던 늑대의 가슴을 꿰뚫었다. 늑대의 가슴에는 손잡이가 매우 작은 비수가 박혀있었다. 그러나 이 정도에 죽을 늑대는 아니었다. ‘옷이 더러워······’ 소녀는 날카로운 이빨을 들이대면서 떨어지는 늑대를 아슬아슬하게 피했다. 그 순간, 이미 늑대는 절명해있었다. ‘···지겠네요.’ 소녀의 오른손에는 늑대의 가슴에 박혀있었던 비수가 들려있었다. 소녀가 늑대의 가슴에 박힌 비수를 잡고 있었던 덕분에 늑대는 떨어지는 힘 그대로 배가 갈릴 수밖에 없었다. 늑대의 쩍 벌어진 배에서부터 피가 튀고 뒤늦게 내장이 흘러나왔다. 소녀는 피분수를 피해 세 걸음 물러섰다. 덕분에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를 인간에게서 조금 멀어졌다. 스스스스―― 바람이 나뭇잎을 스칠 때 나는 소리가 들렸다. 소녀는 나무 위를 향해 튕기듯 비수를 던졌다. 깨깽 소리가 들린 직 후, 쿵 하고 지상으로 늑대 한 마리가 떨어졌다. 소녀에겐 쉴 틈이 없었다. 그 늑대의 죽음이 신호 인듯 수십 마리의 늑대들은 하나 둘 씩 떨어지더니 곧 일제히 낙하했다. 하늘을 가득 메우며 낙하하는 늑대들을 피할 길은 없었다. 그 전에, 그러니까 비수를 던진 순간부터 소녀는 다시 권총을 꺼냈다. 괴이하게도 권총에는 탄창이 존재하지 않았다. 권총과 동시에 속주머니를 뒤져서 두 개의 쇳덩이를 꺼냈는데, 공교롭게도 회전식 탄창이었다. 그것도 탄약이 가득 찬. 소녀는 권총에 탄창을 끼워 넣고 총구 아래 붙어있는 고정핀을 당겼다. 찰깍 소리가 나며 탄창이 고정되었다. “후우. 첫 번째 단어는 관貫.” 소녀의 한숨소리와 함께 겨눠진 총에서 갑자기 희미한 금빛이 어리기 시작했다. 방아쇠를 당기자 총구에서부터 손바닥만한 광륜과 함께 빛줄기 하나가 튀어나오더니 앞길을 가로막는 모든 늑대들의 몸을 관통했다. 말도 안 되는 위력이었다. 그에 따른 대가도 꽤 되는지, 반동으로 인해 소녀의 발이 땅에 한 치 정도 들어가 있었다. 늑대들의 수가 수라 싱글액션만 취한 게 아니었다. 방아쇠를 당기는 손가락은 계속 움직였고, 순간적으로 떨어지는 늑대들의 일부를 단순한 가죽 달린 고깃덩이로 만들 수 있었다. 그러나 단순한 직선관통으로 처리하기엔 늑대의 수는 너무 많았다. “두 번째 단어는 폭爆.” 소녀의 권총은 두 자루였고, 이번에는 다른 한 자루의 총구를 겨눴다. 역시 희미한 빛이 어렸다. 이번엔 붉은색에 가까운 빛이었다. 쾅― 강맹한 폭음과 함께 권총에서 튀어나간 것은 총알은 뜻밖에도 매우 느렸다. 물론 보통 총알에 비해서일 뿐이었다. 프로야구선수의 공보다는 빨랐으니까. 총알의 진면목은 늑대의 몸에 닿는 순간 발현되었다. 쾅―! 늑대의 몸에 맞는 순간, 늑대의 몸 자체가 폭발하며 비산했다. 콰과과광!!! 폭발에 휘날린 늑대의 파편이 다른 늑대에게 붙은 것뿐이었다. 다만, 그랬을 뿐인데도, 파편이 닿자마자 다른 늑대 역시 총알에 맞은 늑대처럼 몸이 터져버렸다. 폭발의 전염이었다. 늑대의 파편에 터진 늑대에서의 전염은 되지 않았다. 그래도 그 폭발 하나만으로 13마리에 달하는 늑대가 육편으로써 흩어져버렸다. 그것으로 하늘에서 떨어지는 늑대의 반수가 줄었다. 그리고 반수가 땅으로 착지했고, 흉폭한 이빨을 소녀에게 들이밀었다. 연사는 불가능했다. 가능하긴 했으나, 소녀 역시 파편을 피해야 하는 처지였기에 연사할 수 없었다. 늑대의 파편이 땅바닥에 부딪히며 작은 폭발을 일으켰다. 떨어진 파편은 한 두 개가 아니었기 때문에 수많은 폭발이 일어났고, 시체인지 생체인지 모를 사람 하나가 거기에 휩쓸려버렸다. 그 사람의 신형은 우연히 소녀에게로 날아왔다. 공교롭게도 소녀는 늑대의 이빨을 피하고 있는 시점이었다. “앗!” 사람의 신형을 받은 소녀는 다시 던져버리려 했다. “음? 살아있어?” 이래서야 던질 수가 없었다. 하지만 당장이 급했다. 퍽― 그녀는 던지지 않았다. 단지 그 사람의 팔을 잡고 세차게 휘둘러 그 사람의 발에 늑대의 눈가를 맞췄을 뿐. 덕분에 그 사람의 어깨뼈는 빠져버렸다. 대신 늑대는 눈알이 뭉개진 채로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생각보다 좋은 신체네요.” 한동안 소녀는 사람의 두 팔을 잡고 휘둘러 근거리까지 온 늑대들을 격퇴시켰다. 소녀에게까지 피해는 가지 않았지만, 난데없이 소녀의 무기로 채택된 사람의 몸에는 여기저기 깊은 상처가 나 있었다. 사실, 늑대의 물린 상처 자체는 치명상이었다. 57kg이라는 묵직한 인간채찍에 맞은 늑대들은 죽지는 않았으나 뇌가 흔들리는 타격을 받아 주위의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좀 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오히려 이제 시작인가보네요.” 소녀의 시선이 숲 한곳을 향했다. [인간··· 내 영역에서 무얼 하는 것인가.] 숲 전체가 울리는 거친 음성이었다. 꺼끌꺼끌한 쇠 긁는 소리로서, 인간의 성대로는 도저히 낼 수 없는 목소리였다. 잠시 후, 붉은색 털을 지닌 늑대들 사이에서 별빛조차 통하지 않아 사위가 어두운 밤의 숲에서도 스스로 빛나는 은색 털의 늑대가 소녀를 향해 걸어왔다. 붉은 털의 늑대들은 그가 향하는 진로에서 슬그머니 물러서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마치 황제의 행차에 백성들의 경배인듯 한 행동이었다. 은색 털의 늑대는 오히려 붉은 털의 늑대들보다 작은 편이었다. 그러나 그가 내뿜는 위압감은 다른 늑대들보다 수 배 이상이었다. “산의 왕께 경배를··· 올리지 못하는 점 죄송합니다.” 소녀의 여유로운 표정 위에 식은땀이 서렸다. 그러나 표정만은 자연스러웠다. [자네가 죽인 건가.] “방어했을 뿐.” [형산에서 늑대를 죽인 것에 각오는 되어있나?] “다시 오지 않을 각오는··· 했던 것 같군요.” [그런 각오에는 조건이 필요할 텐데?] “원래는 당신을 능가하는 힘! 하지만 이곳이 당신께서 말할 데로의 형산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지겠네요.” 은빛 늑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소녀는 은빛 늑대의 의아한 시선을 즐기며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려다가 “어라?” ···라는 의문사와 함께 전신을 뒤지다가 땅바닥에 떨어진 가방에 손을 가져다대었다. “휴~ 여기 있었네.” 가방을 뒤진 후, 3분 후에 그녀가 꺼낸 대사였다. 그녀는 가방에서 다섯 개의 날카로운 흉기를 꺼냈다. 모양은 호랑이 발톱이었으나 눈에 보이는 날카로움은 날을 잘 세운 명검보도를 능가했다. 사실, 모양만 호랑이 발톱이 아니었다. [그건··· 북산北山의 인호絪虎가 주는 인장印藏?] “그 분은 형산에 아는 친구가 있다고 하시더군요.” [덫 붙였겠지, 인장을 보이면 부탁을 이뤄줄 것이라고.] “말씀대로입니다. 도와주세요.” 천연덕스럽게 소녀는 결론을 내렸다. 그녀의 말에 은빛 늑대는 한참동안 침묵하다가 말했다. [대신 인장은 내꺼다.] 소녀는 인장을 던졌다. 실에 엮어진 호랑이 발톱 다섯 개는 은빛 늑대의 목에 정확히 걸렸다. [그래, 본本의 가족을 죽인 너의 이름은?] “유라. 유라柔邏=풍여랑楓如朗=나연娜衍!” [그게 진짜 이름인가?] “비밀입니다. 그편이 멋있고요.” 여전히 천연덕스럽게 대답하는 소녀. 늑대는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그럼, 빨리 떠나라. 너희들의 몸에 나의 체취가 묻어있는 동안에!] 아우우우우―――! 하늘을 향해 은빛 늑대가 길게 포효하자 붉은 늑대들이 따라 포효하며 일제히 대이동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은빛 늑대의 포효가 끝날 때쯤, 죽었던 늑대들의 시체에서 시퍼런 불꽃이 일어나며 전신을 태웠다. 잠시 후, 늑대가 흘린 핏자국만이 늑대가 존재했음을 가르쳐주는 증거가 되었을 뿐, 늑대의 시체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있었다. 소녀는 땅바닥에 굴러다니는 핏덩이 두 개를 털었다. 연근처럼 생긴 그것은 회전식 탄창이었다. 방금 전 늑대의 입을 통해 내장을 뚫고 다시 핏덩이로 토해져 나온 역사가 있었다. 소녀의 손에 들린 탄창에서 핏빛 연기가 일어났다. 반대로 탄창에 묻은 핏자국은 사라져가고 있었다. “그나저나 여기가 형산이었다니······.” 소녀는 방향치도, 길치도 아니었다. 다만, 오랜 세월동안 타지에 있다가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을 밟았고, 전과는 다르게 너무 변한 길에 헷갈렸을 뿐이었다. 소녀는 지도를 꺼냈다. 매우 오래 되어 보이는 그것은 정밀도라던가, 선명도라든가 하는 게 매우 떨어졌다. 지도로서의 가치는 목적지에 도착한다면 기적, 급이었다. “40년 전 지도로 어떻게 해보려는 것은 확실히 무리였지요. 에후후.” 한탄의 한숨을 쉬었다. 그 때, 거의 시체나 다름없는 남성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단순히 꿈틀, 하는 것뿐이었지만 그것은 그녀에게 짐을 하나 더 늘여주는 움직임이었다. “아직도 살아있으셨군요.” 그 때, 우연히 늑대의 이빨에 찢겨져 덜렁거리던 그의 바지주머니에서 종이 하나가 권총처럼 생긴 무언가와 함께 빠져나왔다. 사실 권총이었다. 다만, 소녀가 보기에는 특이하게 생긴 권총이었다. “연금술사鍊金術師?” 소녀는 권총과 동시에 종이를 집어 들었다. 권총은 묵직한 느낌이 들었으나 자신의 것보다는 가벼웠다. ‘어두우니 자세히 보기도 힘들군요.’ 그런 어둠속에서도 사람의 형태와 권총의 형태를 분간해내고 늑대들과 난투를 벌여 승기를 계속잡고 있었던 인물이 소녀였지만 그녀도 이런 어둠속에선 정밀한 관찰은 불가능했다. 이번엔 종이를 펼쳤다. 그러자 은은한 녹색으로 종이가 빛났다. “야광지도?” 중부지역만이 표기된 지도는 길목과 산의 이름마다 야광으로 빛나 알아보기 쉬웠다. “이거······ 잠자코 짐을 맡을 수밖에 없겠네요.” 어찌되었든 도움을 받았으니, 그녀의 성격상 그냥 넘어갈 수는 없었다. 그를 들쳐 업었다. 그리고 놀랐다. 그의 몸에 난 상처들이 이미 모두 아물었던 것이다. “이거 호기심 때문이라도 당신을 구할 수밖에 없겠군요.” 가방까지 한손에 든 유라는 지도를 보며 가볍게 걸음을 옮겼다. 쾅쾅쾅―! “오빠! 일어나!” 그런 소리가 들렸다. 일어나야 했다. 안 그러면 여동생의 팔꿈치 찍기에 명치를 얻어맞는 결과를 낳게 될 것이다. 그래야 했다. 하지만 일어났을 때 느낀 감정은 허탈감뿐이었다. “···여기는 어디?” 자신이 모르는 천장, 자신이 모르는 침상, 자신이 모르는 방, 자신이 모르는··· 사람. 이름을 모르는 매우 예쁜 소녀. 자신이 모르는 소녀는 친절한 태도로 상대 없던 질문에 대답해줬다. “응란국鷹卵國의 변두리 도시인 장흥長興이죠. 그런데 당신은 누구?”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는 소년.” 멍청하게 답했다. 그러니까 비슷한 질문이 또 와버린 건지도 모른다. “그 이름은?” 말 같은 거 할 기분이 아닌데도, 소녀의 집요함이 느껴져 자신도 모르게 대답해버렸다. “···유성우. 아마도.” 이 빌어먹을 꿈은, 아직도 깨지 않았다. ―――――That come to the strange country, may I welcome? chapter 4, Alchemist. ―――Girl meet boy, Boy meet girl···? “무언가··· 물어야 됩니까?” 잠에서 깨어나고, 약 2시간 정도 후 성우가 한 말이었다. 2시간 정도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가진 덕분인지, 성우의 모습은 한결 여유로워 보였다. ···라기 보다, 멍해져 있었다. 아직도 꿈결인듯한 표정이었다. “왜 갑자기 그런 말을 하는 거죠?” “아니, 그래야 당신의 질문을 받기가 쉬울 것 같아서. Give and Take. 절대적인 진리는 아니지만 원활한 인간관계에는 필수항목이잖습니까?” 자신을 유라라는 이름으로 소개한 소녀는 자신의 얼굴을 매만졌다. 너무 호기심을 드러낸 것이다. 얼른 표정을 고치긴 했지만 이미 상대에게 본심을 파악되어버린 것 같다. “후우, 그것도 그렇네요.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그냥 물어보는 건데··· 한국이란 나라 아십니까?” “새롭게 탄생한 나란가요?” “중국은?” “현재 동양국가를 북국, 중국, 남국이라 분류하긴 하지만 왠지 그 중국을 말하는 게 아닌 것 같네요.” “일본이나 미국은 말할 것도 없겠고··· 이거 그냥 물어보는 건데··· 여기의 달은 몇 개입니까?” 판타지 소설을 읽으며 생긴 얄팍한 지식이었다. 달이 두 개라던가 하는 것으로 다른 세계를 구분한다든지 하는···. “당연히 한 개죠. 또 당연한 말이겠지만, 위성이 한 개 이상이면 이상 중력의 영향으로 대륙이 엉망이 되 버릴 걸요?” 맞는 말이었다. 판타지 소설을 읽으면서 가장 먼저 생긴 의문이 바로 그것이었으니. 달이 두 개라 하면, 대륙은 해일의 영향으로 내륙산간지방을 제외하고 생명이 살지 못하게 되어버리고 말테다. “북극성(北極星)···이나 북두칠성(北斗七星)은 있습니까? 있다면 북두칠성의 모양은 어떻게 생겼습니까?” “북극성을 포함해 동서남북의 이정표가 되는 사극성四極星은 있고, 북두칠성 역시 있네요. 근데··· 북두칠성에 언제부터 모양이 있었죠? 북극성을 호위하듯이 항상 자리를 바꾸는 별인데.” 이제는 확실히 깨달았다. 여긴 다른 세계다. 정말··· 다른 세계다. 성우는 침묵했다. “아, 질문을 받기 위한 질문이었는데··· 너무 많은 것을 물었네요. 이제 질문하시죠.” “뭐, 다 아는 간단한 질문이었는데요. 그럼 제가 질문하죠. 당신은··· 어느 별 사람이죠?” “······.” “농담이에요, 농담. 지구 사람이라는 건 확실할 테니까요. 다만, 연금술사인지 아닌지, 지금으로선 그게 궁금하네요.” 성우는 고개를 갸웃거린다. “연금술사? 그··· 납으로 금을 만든다던지 하는··· 사람들?” “분명 어느 학파에선 그런 과정이 기초실습과목으로 있다곤 들었지만··· 보통은 그런 짓 안 하죠.” 유라는 자신의 앞머리를 손가락으로 꼬면서 말했다. 연금술 학파들의 방대한 수련과정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한 금속을 다른 금속으로 만드는 작업은 변한 금속으로 얻을 수 있는 금전적 이득을 얻기 위한 게 아니라 물질연성의 정밀도를 측정하기 위해서였다. 보통 합격점이 60%의 물질변환이었다. 그로써 금전적인 이득은 없었다. 성우는 대답했다. “아닌데요.” 터무니없을 정도로 허탈한 답변이었다. “그런가요? 그럼 이건 어떻게 만드신 거죠?” 유라가 꺼내든 건 성우의 데져트 이글과 매그넘이었다. 성우는 반사적으로 양손을 들어 올려 만세 자세를 취했다. “뭐하는 거예요?” “아, 체조요. 꽤 많이 잔 것 같아서 몸이 뻐근하거든요.” 상대가 쏠 생각이 없는데, 과민반응을 해버린 탓에 부끄러움이 생겼다. 그래서 둘러댔는데, 솔직히 형편없는 말이었던 것 같았다. “그래요? 그럼 계속하면서 들으세요.” 통한 것 같았다. 오히려 체조를 권하는 상대에게 성우는 부담감이 들었다. 사실 몸 상태는 최고조에 달해있었다. 거짓말을 한 셈이라 더욱 창피했다. “특이한 권총이더군요. 연금술사가 아닌 민간인조차 쓸 수 있는··· 아주 효율적인 형태요.” 그녀가 가리킨 건 매그넘이었다. 성우는 일반인이 잘못 쐈다가는 손목이 부러진다는 사실을 속으로 지적했다. “격철이 달려있는 권총은 딱 한 번 본 적이 있었죠.” “그렇습니까? 누가 사용하는 것인지 궁금하네요.” “남부제국의 황녀가 사용하고 계시죠. 하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 권총의 재질과 구조군요.” 언뜻 들으니 이 세계에도 권총이 존재하는 것 같았다. 그것도 총 하나 가지고 있는 것 갖고 연금술사라 부른 걸 보면 연금술사들이 주로 사용하는 것 같았다. “연금술로 20년의 세월을 보낸 저도 처음 보는 물질이네요. 손잡이에 덧대어진 이건.” 플라스틱을 말하는 것이었다. 매우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44구경 매그넘이라 할지라도 21세기 개량품이라 곳곳에 강화플라스틱을 쓰고 있었다. 이것들의 역할은 충격방지가 되겠다. 성우는 그 말 한 마디로 이곳의 과학수준을 어렴풋이 짐작했다. 근대 산업혁명 시기와 비슷할까? 그리고 그 생각은 곧이어 진 한 마디로 뒤바뀌었다. “제가 직접 만든 물질보다야 뭐 내열성이나 내구성이 약하긴 하지만요. 아 탄성도 좀 떨어지네요.” “개인이··· 물질을 그렇게 쉽게 창조할 수 있는 겁니까?” 그것도 하나의 기업체가 더 나은 품질을 위해 수십 년간 개량해온 물질보다 뛰어난 물질을? “물질개량은 연금술사들의 취미생활, 또는 목표니까요.” 개인이 강화플라스틱보다 더욱 뛰어난 물질을 얼마든지 만들 수 있는 세계라면, 문명을 측량하는 것이 무의미한 세계다. “여하튼 연금술사는 아니란 말이네요.” “아, 뭐 그렇죠.” “그럼 자신의 몸 상태도 모르시겠네요.” 갑작스럽게 꺼내어진 말에 성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몸 상태라니. ‘그러고 보니 뭔가 잊고 있던 것이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드네?’ 그 때, 유라는 벽에 걸린 무언가를 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앗, 그러고 보니··· 시간이 되었네요.” 유라는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작은 알약 세 개가 들어있는 종이봉지였다. 거기서 유라가 알약 하나를 꺼내기 시작했다. 그냥 꺼낸 게 아니라 꺼내기 시작했다는 말로 표현된 이유는 시야에 들어오는 정보의 때문이었다. 석양을 봤을 때와 같은 느낌이 전신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세계가 느려지기 시작했다. 몸의 무게가 느껴졌다. 아주 세세한 부분까지 느끼며, 침의 맛을 느끼고 냄새의 성질을 파악하고 미세한 소리와 너무 커서 오히려 들을 수 없었던, 땅에서부터 일어나는 고동소리를 들었다. ‘머리가 이상해져가고 있어······.’ 다시 눈물샘이 터졌다. 시각정보를 받아들이는 눈은 섬세하기 이를 데 없어, 단련이 되지 않은 채로 극한의 능력을 발휘하기엔 아직 일렀다. “어···쩔··· 수··· 없···군요···” 유라의 몸이 느리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자신의 입을 벌려 알약을 씹은 채 성우의 입을 강제로 벌리고 입을 맞추고 혀를 놀려 구강까지 들이밀어 먹였다. 목구멍에 걸리던 약은 혀와 혀가 얽히며 만들어진 두 사람의 침들이 매끄럽게 넘겼다. 아주 오랫동안 혀와 혀가 얽혔다. 생애 두 번째 맞이하는 키스는 그렇게 갑작스럽게 만났다. 여운은 매우 길었다. 그리고 사라지는 순간은 맹렬했다. 세상이 일제히 가속해가는 느낌을 받으며 성우는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가속되는 세상을 바라보다간 기절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약을 먹은 3분 뒤, 눈을 떴다. 그리고 깨달았다. 뭔가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고맙단 인사··· 안 하고 있었습니다.” “에? 으음. 그러고 보니 못 들었네요. 당신의 총과 몸 상태에 쏟는 신경이 좀 있었기 때문일까요?” “그렇습니까? 총의 구조에 대해 궁금한 게 많으신 것 같은데, 원하신다면 몇 가지 가르쳐드릴 용의도 있습니다.” “그보다는 자신의 몸의 상태에 대한 것을 먼저 알아야 되지 않을까요?” 성우는 좀 생각에 빠지다가 입을 열었다. “아마··· 두뇌 쪽 문제겠죠. 이상혈류, 좌우뇌간左右腦間에 생긴 가속송과체加速送過體, 그에 따른 뇌내腦內 주파수 불안정화와 가속화, 신경정보전달에 부적합한 몸에 나타나는 반동이 만들어낸, 언제 터져도 할 말 없는 뇌내폭탄. 원인은··· 모르겠지만요.” 유라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점점 당신이 중부 연금술사가 아닐까 의심이 가는 군요. 몸 상태는 잘 알고 계시는 군요. 뭐, 중부연금술사라면 마혈균魔血菌을 구워먹을 리 없을 테니까요.” “마혈···균? 버섯?” 불길한 상상이 일었다. 유라는 자신의 가방에서 버섯을 꺼냈다. 성우는 무의식적으로 손가락을 펼쳐 가리키며 외쳤다. “마크 투!” “에?” “···설마 그것의 이름이··· 마혈균입니까?” 조금 흥분된 가슴을 억누르고 말을 돌렸다. “역시 모르고··· 드셨군요. 중부 연금술사, 그중에서도 연단가鍊丹家의 자격증 시험에서나 나오는 식물이라 평범한 사람들은 모르는 게 당연한 것이에요.” “효능은?” “효능이라면 매우 미량에다가 특별한 약품을 첨가하면 각성제로 쓰이긴 합니다. 하지만 그냥 쓰면 뇌의 혈류를 몇 배 가속시키죠. 때때로 중부 연금술사들이 수련을 위해 쓰기도 하는데, 그 수련에 쓰이는 양은 아무리 많아도 버섯의 3/4 정도라더군요. 그 이상 쓰면 뇌는 혈압상승으로 터져버린다고 하네요.” 성우는 자신도 모르게 손가락을 접고 있었다. 하나, 둘, 셋··· 일곱 개. 손가락은 일곱 개가 접혔다. 성우가 구워먹은 버섯의 개수였다. 또 하나의 상상이 일어났다. 버섯을 굽고 있던 두 무인. 그들의 죽음도 마혈균이란 이름의 버섯 때문에 일어난 것일지도 모른다. 허벅지에 총알을 맞은 것치곤 화려하게 죽은 게 이상했다. “그럼 저는 죽는 겁니까?” 말의 내용치고는 너무나 멍한 말투였다. 유라는 고개를 저었다. “혈류가 문제라면 혈류는 느리게 하는 진정제를 먹으면 안정 되죠. 단지, 약효가 겨우 6시간 밖에 지속되지 않는 게 문제죠. 부작용도 꽤 있는 편이고.” 그러고 보면 성우의 눈은 반쯤 감겨있었다. 원래 멍한 분위기였지만 표정마저 그런 덕분에 완전히 졸린 것처럼 보였다. 사실, 졸렸다. 졸리느라 꾸벅 고개를 숙인 사이, 입술 사이로 담배처럼 생긴 막대가 걸렸다. 유라가 물려준 것이었다. “이게 뭐죠?” 입에서 빠져나온 바람이 담배막대의 구멍을 빠져나오며 미약한 소리를 냈다. 초음파에 가까운 소리였다. “이것을 한 번 불 때마다 30분 간 뇌의 혈류가 안정될 거예요.” “즉··· 이게 생명줄이라는 소리입니까? 원리가 뭐죠?” “기업 비밀··· 이라고 하면 마음이 불편할 테니, 어쩔 수 없이 공개해야겠네요. 송과체를 느린 혈류로 제어할 수 있게 고유공명음을 맞춰놓은 거죠. 어떻게 만드는 거야 말로··· 기업비밀이지만요.” 성우는 바람을 잔뜩 담배막대에 불어넣었다. 삐이익― 하는 미음이 허공에 맴돌았다. 원래는 들리지 않았어야 정상일 소리였다. 왠지, 입에 물고 있는 것만으로 마음이 편해지는 막대였다. “후우우, 음! 이름은 ‘생명줄’로 하죠.” “에? 생명줄? 온혈도인소溫血導引簫라는 이름이 있는데···.” “부탁한다, 생명줄.” “···요.” 성우는 과감하게 유라의 말을 무시했다. 그리고 담배를 피듯이 생명줄을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고 한 번 다시 불었다. 어울리지 않는 개폼을 잡자 유라도 할 말을 잃은 듯 했다. “뭐, 된 거죠. 그나저나 슬슬 밖에 나가야 할 것 같네요. 여긴 집이 아니라 여관이라서 오래있을 수록 돈을 내야거든요. 먼저 내려가서 음식을 시켜놓고 있겠어요. 옷은 정리해두었으니 갈아입고 내려오세요.” 유라가 나가자 성우는 시선을 돌렸다. 침대 옆, 방금 전까지 유라가 앉아있었던 의자 위에 성우의 T셔츠가 있었다. 깔아뭉갠 것은 아니고 유라가 무릎에 놓아두었다가 일어났을 때 의자 위에 내려둔 거였다. “······.” 생각해보면, 성우는 매리아스 같은 내의는 잘 입지 않았다. 요즘 T셔츠의 재질이 매우 좋아 그런 것을 껴입을 필요가 없이 편안했던 것이다. 그런 게 문제가 아니다. “남사스럽게··· 나체로 있었던 거냐.” T셔츠 위에는 성우가 잘 때 잘 입던 통바지도 있었다. 황급히 이불을 들추고 하반신을 내려다보았다. ‘팬티는··· 다행이군.’ 근데, 팬티의 밴드가 전에 봤을 때보다 늘어져있는 것은 단지 기분 탓이었을까? 여관의 양식은 특이했다. 이제야 깨닫는 게 우스울 정도였다. 침대가 있고, 창문이 유리로 된 투명창이었기 때문에 깨닫는 게 늦은 건지도 모르지만, 재료는 최신식이어도 주택양식 자체는 분명 동양식이었다. 마치 어설픈 테마파크에 온 듯 했다. 계단을 통해 1층으로 내려가니 식당이 존재했다. 딱딱한 쿠션이 존재하는 의자와 통나무를 통째로 깎아 만들어낸 식탁이 줄지어 늘어져있었다. 더불어 술에 취해 식탁에 엎어진 사람도 줄지어 늘어져 있었다. “여기요.” 유라가 주위를 둘러보는 성우를 불렀다. 성우는 그 목소리에 반응했고, 유라를 찾아 식탁을 가운데 두고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주변에서 그들을 보는 시선이 미묘했다. 응원하기도 하고 음충맞은 듯하기도 한 시선에 거북함을 느낀 성우는 유라에게 귓속말을 준비했다. “저 사람들 왜 저래요?” “아, 부부사이라고 했거든요. 여관이 부부동반에겐 할인중이라···.” “······.” 생각하는 것은 누구나 같을 것이다. 해가 중천에 뜬 정오가 되어서야 내려온 부부. 늦잠을 잘 정도로 밤에 무언가를 했다는 소리와 같다. 이제야 시선이 이해가 갔다. 성우는 신경 끄기로 했다. 이 정도 시선이라면 꽤 익숙한 편이었다. 동생 성하와 함께 길거리를 걷다보면 자연스럽게 익숙해진다. 원체 신경이 평소엔 둔하기 짝이 없어서이기도 했다. “몸은 어때요?” 유라가 물어왔다. 검은색 코트를 벗어놓은 그녀의 옷차림은 신축성이 좋은 재질로 만들어진 폴라 티셔츠 비슷한 옷가지였다. 특징은 몸매가 드러난다는 것. 색깔은 자주빛이었다. 작지도 크지도 않은 가슴이 만들어낸 계곡 사이로 팬던트 하나가 눈에 띄었다. 멍해져서 그 팬던트를 보고 있었기에 유라의 물음을 듣지 못했다. 유라가 다시 묻자 성우는 그제야 반응했다. “···음, 피곤한 것 같네요.” 그 순간, 그들의 말에 귀를 쫑긋 세우고 있던 심심한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성우와 유라를 향해 돌아갔다. 성우는 몰랐으나 지뢰를 밟은 것이었다. “하기야 피곤한 게 당연한 거죠. 어제 그렇게 휘둘렀으니···.” 유라의 말은 늑대들을 상대하느라 성우를 무기로 삼은 것을 말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의 귀에는 다르게 들렸다. ‘여자가 리드를 한 거야?!’ “뭐, 괜찮아요. 이 정도의 몸 상태를 즐기는 편이니까요.” ‘즐겨어?!’ “그 날 밤일은 너무 격렬해서 잘 기억도 못하겠네요. 잘 설명할 수 없는 데에 대해서 사과를 드려야겠네요.” ‘격려얼?!!’ “맹수에게 상처는 입지 않으셨나요?” ‘맹수처럼 달려든 거냐?’ “아뇨, 이래 뵈도 저는 맹수 다루는 것에는 능숙하거든요.” ‘저래 뵈도 테크닉이 뛰어나다는 소리인가?!!’ 그 때, 13살 쯤 되어 보이는 종업원이 식탁 위로 음식을 하나 둘씩 내려놓았다. 성우 앞으로는 버섯이 떠 있는 야채스프 비슷한 것이 올라섰고 유라의 앞에는 시루떡 위에 박하향에 가깝지만 미묘하게 다른 시럽이 뿌려진 음식이 놓여졌다. “다른 주문은 없으세요?” “포도 셰이크(shake, 混液)··· 얼음 띄워서 가지고 오면 좋겠네요.” “남성분은?” “같은 걸로 해야겠죠, 보통?” “원래는 안 시켜야 예의지만요.” “그렇습니까? 그것도 그렇겠군요. 오랜만에 무전無錢의 설움을 느낄 수 있겠습니다. 덕분에 말이죠.” “농담이에요. 포도 셰이크 둘로 부탁드려요.” 종업원은 유라의 말을 받아 적으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어젯밤에 무얼 하신 거죠? 신음소리가 들려오던데.” ‘신음소리이이?!!’ 질주하는 망상을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종업원 소년의 한마디는 직격이었다. 망상은 폭주하기 시작했고, 술에 취한 정신 그대로 부러움을 못 이겨 코피를 쏟으며 쓰러지는 사람까지 생겼다. “뭐, 죽다가 살아난 거겠죠. 덕분에. 그런데 그렇게 시끄러웠습니까? 제 신음?” 성우가 유라에게 물었다. “발작은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거라. 사실 몇 번 의식을 차렸다가 기절했다 했지요. 뭐, 자세한 사정은 나중에 얘기하기로 하죠. 우선 식사하는 게 어때요?” 유라는 시럽을 잔뜩 얹은 떡을 씹으며 대답했다. 성우도 나무수저를 들어 수프를 떠먹기 시작했다. 때때로 수프 뒤에 동동 떠다니는 버섯을 걸러냈다. 편식에는 취미 없지만 당분간 버섯을 먹기는 힘들 것 같았다. 성우는 수프를 다 비우고 주위를 둘러봤다. 그리고 잠시 후, 귓속말로 유라에게 물었다. “근데··· 여기 사람들 왜 저러는 거죠?” 난장판이 따로 없었다. 갑자기 술을 시키는 사람이 많아졌다. 어떤 이는 울먹이고 어떤 이는 얼굴이 벌겋게 된 채 침을 질질 흘렸다. 그건 그런 데로 괜찮은데, 자신들을 보며 알 수 없는 단어로 이뤄진 문장을 고래고래 지르는 사람들도 있었다. 어깨동무까지 하며 벌이는 술주정은 확실히 민폐였다. “글쎄요. 노총각들의 설움일까요?” 의외로 날카로운 유라였다. 또 오시라는 내용의 종업원의 배웅을 뒤로 했다. 기와지붕과 유리창이라는 어설픈 테마파크처럼 생긴 집들로 이뤄진 길을 지나, 논과 논 사이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농민들은 날의 중간 부분이 톱처럼 되어있는 낫을 들고 있었다. 그것만 조금 다를 뿐이지 성우 자신이 살고 있던 곳과 비슷한 인상이었다. 방금 캐낸 고구마처럼 생긴 뿌리 식물을 주는 구수한 인심도 말이다. 생명줄을 손가락에 걸고 고구마를 씹었다. 훨씬 달았다. 정면으로 가까이 산이 보였다. 경사진 언덕이 구불구불 보여, 산악지대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오른쪽을 보면 추수철이 되었는지 누렇게 익어 햇빛을 황금으로 만드는 곡식들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왼쪽은 많은 거대한 덩굴식물들이 자라고 있었다. 유라의 소개론 포도농장이라고 했다. 다시금 이곳이 다른 세계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비슷한 것은 존재하나, 똑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 곳. 성우는 때 아닌 외로움이 덮쳐드는 것을 느꼈고, 금방 신경 쓰지 않게 되었다. 성우는 고구마를 다 먹고 생명줄을 입에 걸었다. 숨소리와 함께 피이이― 소리가 울려 뇌 속을 진정시킨다. “그러고 보니··· 중요한 것을 잊었네요.” “네?” “왜 저를 구해주신 겁니까? 자선 사업가는 아닐 거라 생각됩니다만.” “그런 것이라면 흥미···라는 단어 하나에 모두 압축될 것 같네요.” “흥미라··· 대체 어떤 점이 흥미로운 지 물어도 될까요?” “연금술사가 아니면서 뛰어난 지식과 총을 가지고 있고, 전치 2개월은 거뜬히 나가는 늑대에게 물린 상처를 순식간에 회복시키는 신체. 그리고······.” “그리고?” “죽음이 다가왔어도 변하지 않는 멍한 분위기. 재미있거든요.” 성우는 쑥스러워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러더니 슬쩍 웃음을 지으며 말한다. “재미있는 것치곤 한 번도 웃는 모습 본 적 없군요.” “천성일 거예요.” 말투와 안 맞는 무표정을 계속적으로 유지하고 있는 그녀는 어떤 의미로나 성우에게 신비했다. 유라와 성우의 대화는 어딘가 붕 떠 있었다. 핵심을 모조리 피해가는 듯 하는 대화이면서도 가끔가다 나오는 말들은 핵심을 정통으로 꿰뚫는 말이었다. 어느새 그들의 걸음은 언덕에 올라 산길을 따라가고 있었다. 유라는 목적지를 말해주지 않았고 성우는 어디로 가는 것인지 묻지 않았다. 애초에 동행한다, 라는 말을 꺼낸 적도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동행하고 있었다. 이상한 일행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상함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성우가 먼저 말을 꺼냈다. 그는 이상異常을 느끼고 걸음을 멈춰 세웠다. 유라가 한 걸음 앞서다가 그를 돌아다보았다. 두 시선이 마주쳤다.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아, 이상하네요. 서로가 경어를 쓰니 왠지 대화가 딱딱한 것 같네요.” “그것도 그렇지만······ 이 숲의 분위기 말입니다. 뭔가 부정확한 게 씌어있는 것 같군요.” 데자뷰랄까, 풍경이 겹친다든지 하는 그런 거슬리는 느낌이 들었다. “아, 걱정 마세요. 진법陳法이 베풀어져 있는 것뿐이에요. 방향감각을 현혹시키는 삼류 기환술奇幻術에 불과하니 길을 잃을 걱정은 안 해도 되요. 그나저나 슬슬 말을 놓으실래요? 존대를 받는 건 쑥스럽거든요.”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저 역시 존대하는 게 속이 편해서······.” 둘은 계속 걸음을 옮겼다. 중간 중간에 바위를 뚫는 경우도 생겼다. 사실 환상에 불과했지만 어느 정도 상식에 잡혀있던 성우에게는 충격이었다. “이게 정말 삼류입니까?” “일류 기환술은 환상과 현실을 모호하게 만들거든요. 이 정도는 기초죠. 그런데, 정말 존대만 하실 거예요? 경계의 의미로 받아들여도 될까요?” “정답입니다. 사실 경계하고 있어요.” “매정하네요.” 그 때, 여자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남자들의 음탕한 목소리가 섞여있었다. 마침 유라가 가고 있는 길목에서 나는 소리였다. 소리의 진원지와 성우 일행은 그리 오래지 않는 시간이 지나자 필연적으로 마주쳤다. 남자 다섯 명이 여자 둘의 옷을 벗기고 땅바닥에 굴리는 장면이 성우의 눈앞에 리얼하게 연출되었다. ‘···가 아니라 겁간이군. 영어로는 레이프Rape.’ 남자들은 아직 아랫도리를 벗지 않았다. 흉물스런 물건이 달랑거리는 꼴을 보지 않아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유라는 상황을 보더니 성우에게 물었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에? 아, 뭐 무시해야죠. 여자들을 보니 뛰어나게 예쁘긴 해도 손발에 고생한 흔적이 보이는 중산층中産層의 자제이고, 남자들은 얼굴은 더럽게 생겼어도 손발에 고생한 흔적이 없고, 옷 하나는 삐까번쩍하니 명문가 자제 쯤 되어 보이는군요.” “헤에? 공명심에 구해주는 게 보통이다, 라고 말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생긴 것과는 많이 다르네요.” “우리가 저 아이들을 구해주고 난 뒤, 가버리면 저 아이들은 이보다 심한 꼴을 당할 게 분명하니까요. 저열한 공명심으로 간섭하긴 싫군요. 무시하고 지나치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일 겁니다.” 유라는 다시 물었다. “그럼 이건 어때요? 우리가 가야할 길목을 저 사람들이 막고 있다면?” 성우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일부러 험한 길로 피할 필요는 없겠죠.” “시비를 걸면?” “받아줘야죠.” 작은 목소리도 아니고, 그리 멀리 떨어진 곳도 아니었다. 다섯 명의 강간범의 시선이 유라와 성우에게 집중되었다. 그들은 험악한 표정을 짓다가 유라의 얼굴에 시선을 멈추고 있었다. “야, 기환진을 펼쳤으니 사람 걱정 안 해도 된다며?” “우연이야 우연. 그런데··· 오히려 운이 좋은 거 아냐?” 알고 보면 유라는 강간범들에게 깔아뭉개지고 있는 여자들보다 훨씬 더 예뻤다. 고생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하얀 피부와 귀족적인 외모. 연약해 보이는 가느다란 몸매는 전형적인 강간범들의 사냥감이었다. “흐흐흐” “그쪽 아가씨도 이쪽으로 오시지?” “오늘은 횡재했군!” 세 명의 남자가 음소淫笑를 흘리며 다가왔다. 남은 둘은 유라를 상대하지 못한 아쉬움과 여자 하나를 독점할 수 있다는 희열에 가득 차 두 여자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면 문제가 있군요.” 성우가 남성에게는 결코 친절하지 않은 그들의 시선을 느끼고 조용히 중얼거렸다. “뭐죠?” “몸에 힘이 안 들어가요.” 그러고 보면 성우는 약을 먹은 지 얼마 안 됐다. 뇌의 혈류를 완화시킨다는 것은 각 기관의 신경전달속도를 둔화시킨다는 것과 비슷하다. 즉, 전투 같은 고산소 소비운동을 할 수 있을 리가 없다는 것이다. “쓸모없는 남자네요.” 그 말을 들은 순간, 반사적으로 성우는 유라의 손을 잡았다. 정확히는 유라가 들고 있는 가방을 넘겨받았다. 유라는 멍한 표정이 되어 성우를 보았다. “아······.” “생각해보면 가방은 들어줄 수 있을 것 같군요.” 유라의 손에서 빼앗다 시피 든 가방은 무거웠다. 10킬로? 20킬로? 어떠한 계기인지는 몰라도 비약적으로 상승된 완력이 아니었으면 몸이 휘청거릴 뻔 했다. 가방의 무게는 안심의 정도와 비례했다. 표정하나 바뀌지 않고 이런 가방을 한손으로 들 수 있는 여자는 결코 약하지 않을 것이다. “···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건가요?” “정답. 너무 표정이 뻔뻔했던 것 같군요.” 토시하나 틀리지 않고 생각을 꿰뚫는 말을 해버린 유라에게 솔직한 감탄을 전하는 성우였다. “무슨 대화를 그렇게 즐겁게 하는 거냐! 우리를 무시하는 거냐!” 가장 가까이 다가온 강간범 하나가 그렇게 외치자 성우와 유라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로 향했다. 갑작스런 주시에 강간범은 당황했다. “그렇죠.” “뭐?” 빠각―! 성우가 웃는 낯짝으로 대답했고, 그 대답에 경직된 강간범의 얼굴을 유라가 몸을 띄워 양발차기로 부숴버렸다. 멋진 콤비플레이였다. 구두바닥으로 얼굴의 연골을 전부 부숴버리는 무시무시한 발차기는 성우에게 한 가지 망상을 일으켰다. “그러고 보니 코트 안에는 스커트를 입지 않았습니까?” 강간범의 신형은 3m 정도 날아갔다. 강간범은 완전히 기절했다. 그래도 그는 행복할 것이다. 양발차기는 공기의 압력에 많은 영향을 받고 그로써 코트와 스커트 자락이 휘날려 여인의 비처를 볼 수 있었을 테니. 유라가 굳은 얼굴로 말했다. “주의하죠.” 그녀 자신도 신경 쓰였나 보다. 그래도 안색은 변하지 않는 걸 보니 보통 여자는 아니었다. 챙챙―― 강간범들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그들은 허리춤에 걸린 검을 일제히 뽑았다. 단순히 장식품인줄 알았던 성우는 솔직히 놀랐다. 그들의 검은 장식품치고는 너무 날카로웠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여기 지검문知劒門의 영역이었네요.” “지검문이라니요?” “모르세요? 60년 전부터 이곳에 뿌리내렸던 문파죠. 제자들의 수는 그리 많지 않지만, 문주인 지극검知極劒 유철산有鐵傘의 능력이 전 무림에서도 무시할 자가 몇 안 된다고 하더군요. 특히 무림의 영향이 큰 응란국에서는 꽤 인기가 높은 무인이죠.” “무림武林··· 인가요?” “무림이죠. 다른 이름으로는 무장武場으로도 불리죠.” “그 뭐랄까··· 법과는 거리가 먼?” “알고 계시면서 자꾸 물으면 보통 귀찮아지죠. 더군다나 적을 앞에 두고서······.” 강간범들이 기세를 올리고 있었다. 기세를 올린 그들은 더 이상 강간범이 아닌 지검문의 제자들이다. “칫, 알고 있었나.” “문파의 명예를 위해··· 죽어라.” ‘이제 와서는 이미 늦은 것 같지만.’ 검을 뺀 그들은 방금 전까지 파락호 짓을 했던 사람들이 아닌 것 같았다. 성우에게는 먼 세계가 갑자기 다가오는 것 같았다. 명예 하나에 사람 죽이는 세계는 머리로는 알고는 있지만 삶에 연관이 없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이제는 연관이 생겼다. 문득 두려움이 들었다. 죽음의 공포가 아닌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처음에 버섯을 씹을 때만해도 자신이 있었는데, 지금은 아니었다. ‘인생 공부 톡톡히 하는군.’ “물러서요!” 성우를 밀치는 유라. 순간, 믿기지 않는 속도로 검첨이 다가와 성우의 미간이 있던 자리를 찔렀다. 약해 보이는 사람을 먼저 공격하는 건 당연한 전법이었다. 효과는 주적의 신경분산. 또는 변수제거. 여자 옷을 벗기던 강간범들도 어느새 다가와 있었다. 그들의 신형은 믿기지 않을 정도로 빨랐다. 순간적으로 나무둥치를 밟아 신형을 튕겨내듯이 이동하는 수법은 인간으로서 가질 수 있는 탄력과 근력을 초월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간단히 행했다. ‘설마 사이보그인 거냐?’ 멍청한 생각을 해버린 순간, 그 죄를 탓하듯 쾌속한 검격이 반월을 그리며 옆구리를 노렸다. 황급히 가방으로 막았다. 금속음이 일어나며 검이 막혔다. 사내가 한걸음 물러나자 성우 역시 뒷걸음질 쳤다. 어느새 나무에 등이 받혔다. 정말 다행인 것은 눈이 그들의 움직임을 따라잡고 있다는 것이었다. 안타까운 것은 몸의 반응이 턱없이 느리다는 것. “죽어라!” 검격이 뇌전처럼 바람을 가르며 떨어졌다. 노리는 건 정수리. ‘학교에선 죽으라면 죽어, 라고 가르쳤던가? 아니었지!’ 가방을 슬쩍 위로 올렸다. 그 순간, 사내의 검격이 번개처럼 빠르게 비틀어지며 가방을 피해 성우의 옆구리를 노렸다. 탕――! 폭음과 함께 중국의 제식검祭式劒에 가까운 패검이 땅을 굴렀다. “끄어어억! 뭐··· 뭐냐!” 사내는 괴악한 괴성을 지르며 물러섰다. 그의 오른손에선 피가 쉴 세 없이 뿜어지고 있었다. 손목이 덜렁거릴 정도로 큰 구멍이 나있었다. 성우의 오른손에서부터 연기가 피어올랐다. 데져트 이글의 총구에서부터 피어오르는 총염은 어딘지 모르게 서글펐다. ‘요즘 따라 자주 놀라는군.’ 가방을 시선교란용 방패로 삼고 총을 쏜다. 다만, 그 때 검이 그런 식으로 꺾일 줄 모르고 있었기에 조금 놀라 예상보다 빨리 총을 쏴버렸다. 덕분에 오른쪽 손목이 결렸다. 다행히 골절까진 안 간 것 같았다. 총을 본 사내는 놀란 표정이 되었다. “이 자식! 연금술사였나!” 왼손으로 검을 주워 다시 공격하는 그의 얼굴은 악귀 같았다. 성우의 눈에는 그의 움직임이 전부 파악되었다. ‘정형화定型化되어있어. 흥분해서 방금 전에 썼던 패턴을 또 쓴다고는 생각하지 못하는 건가.’ 성우는 그의 공격이 다가오는 순간, 다리에 완전히 힘을 빼고 주저앉았다. 원래부터 힘이 안 들어갔던 다리라 쉽게 앉을 수 있었다. 그의 머리 위로 아슬아슬하게 검극이 스쳤다. 검극은 그대로 나무둥치에 박혔다. 명치를 노린 일수였는데, 풀석 주저 앉아버린 턱에 완전히 빗나가 버렸다. “바이바이. 강간+살인미수범.” 그 틈을 노려 성우는 매그넘과 데져트 이글을 듀얼로 잡고 손목을 교차하여 팔을 고정시키고 방아쇠를 당겼다. 탕탕탕탕탕. 강간범의 신형이 6m나 날아갔다. 뛰어난 저지력을 가진 매그넘 탄환의 위력은 알아줘야 했다. 힘이 잘 전달되지 않는 허벅지를 쐈음에도 사람이 날아갈 정도였으니까. ‘덕분에 손목이 엉망이 되어버렸다.’ 완력을 100% 발휘할 수 없는 지금, 매그넘과 데져트 이글은 부담스런 무기였다. 허벅지를 맞췄어도 그 충격이 내부를 흔들어 피를 토하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죽지 않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아마 그는 평생 불구가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성우는 신경 쓰지 않았다. 강간범에게 쓸 신경이 있었다면 성우는 이 세계 자체에 쓰여지는 신경에 어지러워 돌아가실지도 모른다. ‘그나저나 유라 씨는?’ 그 쪽의 상황은 이미 종결되어있었다. 팔다리가 괴이한 각도로 꺾여있는 세 남자가 비명을 지르며 뒹굴고 있었다. 말 그대로 죽을 맛이었다. 거품까지 물면서 괴로워해도 기절까지는 가지 않았다. 유라는 그들의 검을 한곳에 모아두고 손바닥만한 부적을 꺼냈다. 무언가 주문을 읊는다 싶더니 강간범들의 검이 순식간에 녹아 부적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여, 연금술사! 남부의 연금술사인가!” 강간범 중에서도 특별히 부티가 나는 청년이 경악성으로 외쳤다. 유라는 그를 싸늘한 눈길로 보았다. “아쉽게도 그렇네요. 생각보다 학식이 뛰어난데요?” “크윽, 연금술사였다면 건들지 않았을 것이다! 개 같은!” “건물에 정의(正義)라는 표어가 써진 깃발을 꽂아놓은 지검문의 문도가 담을 말은 아니네요. 그리고 이곳의 연금술사는 연금술사라고 대놓고 다니나요?” 청년은 수치심에 얼굴을 벌겋게 물들였다. 그녀의 말은 정의맹正義盟에 가입한 지검문도가 대낮에 이런 짓을 하는 것에 대한 비판이었다. 사실 청년은 강간범들 중에서도 특별했다. 지검문의 막내공자 유제정有提呈이 지검문에서의 그의 이름이었다. 무명(武名)은 없었고 문내에서 스스로 뇌전검雷電劒이라 떠벌리는 게 전부였다. 애물단지인 그에게도 자신이 속한 문파는 소중했다. 한낮계집에게 깔보여져서는 곤란했다. “그런데, 연금술에 대해서 잘 아시네요. 평범한 사람들이 연금술사를 칭할 때, 북부, 남부 같은 건 안 가리거든요. 어디서 배웠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물어봐도 모른다! 대답해줄 것 같으냐!” 청년은 강간범치고는 단호했다. 그러나 단순한 오기일 뿐이다. “연금술사들에게는 신비한 비술이 있다는 것, 아시죠? 그 중에 뇌를 해부해 조직에서 정보를 얻는 비술이 있는데··· 시험해볼까요?” 유라는 속주머니에서 날카로운 칼을 꺼내 날부분으로 유제정의 이마를 긁었다. 날의 서늘한 한기가 뇌로 직접 전달되자 유제정은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 없었다. “아버지의 부하에게서 배웠다! 그도 연금술사였어! 그러니 그만둬!” “고맙네요. 그럼 볼일이 없겠군요.” 유라는 청년의 미간에 용두권을 찔렀다. 그는 그대로 단말마와 함께 기절했다. 곧이어 고통스러워하던 강간범들도 기절했다. 그들 모두 미간이 음푹 들어가 있었다. 강간당할 뻔 했던 미인자매를 나름대로 위로하고 돌려보낸 성우는 유라에게 가방을 건넸다. “수고하셨습니다. 라고 말해야 할까요?” “해주면 고맙겠네요.” 유라는 가방을 건네받아 가방에 묻은 흙먼지를 털었다. “그럼 됐네요. 이것으로 동행할 이유는 생긴 것 같군요.” “네?” 성우는 자신의 총을 가리키며 웃어보였다. “이거 없으면 곧 죽을 사람이 되니까요. 될 수 있으면 살고 싶군요. 더 될 수 있으면 생명줄 없이도 살 수 있도록 몸이 정상이 되었으면 하네요,” 총알이 없으면 총을 쓸 수 없다. 또 이런 상황을 만나지 않는다고 예견할 수도 없었다. 그 때는 영락없이 죽게 될 것이다. 목뼈가 갈리고 척추가 꿰뚫리며 죽어가는 체험은 한 번이면 족했다. “어째서 그런 걸 제가 신경 써야죠?” “당신이 연금술사고, 당신이 저에게 흥미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저는 당신의 흥미를 만족시킬 충분한 연구재료가 될 테니까요.” “똑똑한 실험재료는 하품下品 중에 최하最下에요.” “이 얼굴이 똑똑해보이나요?” 유라는 성우의 얼굴을 자세히 뜯어보았다. 눈을 반쯤 감은 외모는 똑똑함과는 거리가 멀어보였다. “몸을 정상으로 만들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요?” “마혈균은 원래 중부연금술사들이 수련용으로 쓰던 약이라고 듣지 않았으면 그런 생각은 없었겠지만 들었습니다. 게다가 버섯 먹고 죽지 않았으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성우는 여유롭게 말을 내뱉었다. 사실, 상황은 그에게 전혀 좋지 않았다. 그녀가 NO라는 단어를 뱉기만 하면 나락으로 떨어진다. 무엇을 믿고 자신 있는 말을 하는 것인지, 상대하는 유라는 신기하기만 했다. 사실은 필사적이었다. 전혀 모르는 세계에서 혼자서 잘 해나갈 수는 없는 것이다. 성우의 상황적응력이 남달리 뛰어나다고 해도 여긴 완전히 외딴곳이었다. 원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도 없으니 무턱대고 아무렇게나 버틸 수도 없었다. 여유로워 보이는 것은 그의 개성일 뿐이다. "······.“ 침묵이 흘렀다. 유라는 고민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고, 성우 역시 안절부절 하지 않고 미약한 미소만 띄우고 있었다.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은 후, 유라는 가방을 내밀었다. “요즘 따라 가방이 무겁더군요. 들어줄 수 있겠어요?” “물론. 제 가치는 그 정도가 적당할 것 같군요.” 성우는 웃으며 가방을 받았다. “경어는 쓰지 말아주세요. 나이도 10살 쯤 많아보이시는데··· 감당할 수 없군요.” “에? 제가 몇 살로 보이십니까?” “30세 중반 정도?” 충격 먹었다. 그렇게 늙어 보이나? “하루 24시간 일 년 365일이 아닌가요?” “하루 24시간 일 년 366일이네요.” 오히려 하루가 더 많았다. “실례지만 숙녀분의 나이가······.” 성우의 괴이할 정도로 격식을 차린 물음에 유라는 조금 망설이더니 대답했다. “으음, 24세군요.” 다시금 깨달았다. 이번엔 좀 더 특별하고 크게 깨달은 것 같다. 이곳은··· 다른 세계다. 그래도 걸음은 옮겼다. 무슨 일이 있어도 지구가 도는 것처럼. ――――――Still, the world turns. chapter 5, Crimson by road. ―――――Pursuit and running away 동양대륙은 크게 북서부, 북동부, 중부, 남부로 나뉜다. 그중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중부에는 또 네 나라로 분류되고 있었다. 연비국燕飛國이 존재하고 있었고, 방위상으로는 중부 서쪽에 해당하는 나라였다. 이어 중부북동의 응란국, 남해 바다에 맞닿은 남중부의 홍명국鴻鳴國, 중부의 중심이 되는 붕련국鵬聯國이 위치한다. 중부의 나라는 그 이름대로 새가 많이 존재하며, 대부분이 숲과 산맥으로 이뤄져 있었다. 농사는 대체로 밭농사가 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상업은 활발했고, 정치수준은 왕정체제에 머물러있었다. 다만 문文보다 무武를 숭앙했고, 관직 체계도 무를 중심으로 이루어져있었다. 무를 숭앙하는 건 민족의 성질 자체가 그랬고, 무를 숭앙한 나머지 오랜 세월에 걸쳐 많은 무술이 국민들에게 보급되었다. 그리고 무는 국가의 통제를 벗어났다. 무림, 또는 무장이라는 국가를 초월하는 세계가 탄생한 배경은 그러했다. 국가는 무림을 통제하려고 하지 않았다. 협상을 통해 좋은 관계를 가지려 했을 뿐이었다. 그런 결과 무림문파는 산업체의 형식으로 취급되었고 그 결과 돈의 유통이 활발한 만큼 무술의 보급도 활발해졌다. 전쟁의 역사가 그러했듯 무림에도 이념과 이념, 성향과 성향이 부딪쳐 다툼이 일어났다. 국가는 국가의 존폐위기만 아니라면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눈치였고, 국민들은 피해만 안 입는다면 누가 이기든 상관없어했다. 무림이란 그런 개념이었다. 성우는 유라의 설명을 듣고 있다가 신음과 함께 말문을 열었다. “그거··· 프로야구구단?” “에?” “아니, 뭐랄까··· 이미지가 매우··· 세속적世俗的이군요.” “문파도 단체를 이룬 이상 일종의 기업이니까요. 이념에 따라 움직인다고 해도··· 결국 이익을 쫓기 마련이고······. 국가에서 아예 대놓고 놔두고 자신의 책무만 집중해서 규정지은 덕분에 평범한 국민의 피해는 거의 없죠. 그리고······” “피해 없는 싸움 구경을 좋아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고 마침 좋은 구경거리가 있으니 여러 가지 거래가 있겠군요.” 성우는 단정했다. “많은 도박이 이뤄지고··· 또 많은 응원이 이뤄지죠. 응원단까지 있을 정도니까요.” 정답이었다. 성우는 트렁크형 거대가방을 들고 일어났다. 오랫동안 산길을 걷다가 잠시 쉬는 틈에 나온 대화가 어느새 무림에 대한 설명회가 되어버렸다. 이렇게 된 이상 무협소설은 믿을 게 못 되는 게 아닐까 싶었다. “뭐 개중에는 참고할 수도 있겠지.” 유라가 걸음을 옮기자 성우가 그녀의 뒤를 따랐다. “원래 혼잣말을 많이 하세요?” “생명줄을 물고 있는 덕분에··· 될 수 있으면 소리 내서 말을 하네요. 자신도 모르게 숨을 참고 있으면 죽을 지도 모르니까요.” 유라의 무표정에 그늘이 졌다. “사실 버섯 한 개 정도 먹었을 때 30분을 제어할 수 있는 거였다니··· 이제와서 실력부족을 통감하네요.” 유라가 한숨을 쉬었다. 겨우 하루 전에 생겼던 일이었다. 1분 동안 음식을 먹느라 생명줄을 입에서 때어낸 성우가 세계가 느려지는 현상을 경험했다. 그리고 몇 초 지나지 않아 성우는 갑작스럽게 몰려드는 고통을 체험했다. 다행히 곁에 유라가 있어서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성우는 긴 고통의 체험과 함께 죽었을 지도 모른다. 원인은 가속성분의 양을 파악하지 못했던 것. 유라는 성우가 마혈균을 먹은 개수가 7개였다는 것을 계산하지 않았던 것이다. 계산한 결과 딱 1분, 1분 2초가 한계였다. 사실 계산을 안했던 게 아니라 못했던 것이었다. 설마 마혈균을 1개 이상 먹고도 또 다른 마혈균을 먹을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마혈균은 불에 익혔을 때, 가장 흡수가 빠르며 그만큼 치사량의 가속성분을 내포한다. 구운 마혈균을 1개라도 먹었을 경우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그 즉시 긴 고통의 시간이 찾아오고 죽는다. “이제야 물어보는 건데··· 왜 먹은 개수를 말 안 했죠?” “아시는 줄 알았거든요.” “후우, 될 수 있으면 성우 씨의 모든 것을 알려줬으면 하네요.” “바지춤까진 안 내려도 되겠죠?” “이미 그건 확인··· 뭐, 안 내려도 되겠죠.” 성우는 생명줄을 한 번 불었다가 손가락 사이에 끼웠다. 마치 담배 피우는 모습 같았다. 사실, 생명줄에는 정신 안정의 효과도 있었다. 더불어 찾아오는 의존증이다. “흐음, 수고를 덜었군요.” “평균치 이상이었으니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어요.” “왜 걱정해야 하는 건지, 물어도 될까요?” “아뇨. 안 되겠죠.” 유라는 태평했다. 그래도 얼굴에는 희미한 홍조가 일었다. 성우는 무신경했다. 남녀 간의 사정이나, 다른 사람의 심리. 성우가 굳이 알려고 하지 않는 항목들이었다. “뭐, 빨리 걷기나 하죠. 어제 급하게 걸어서 번 시간을 여기서 다 까먹을 순 없잖습니까. 추격대가 언제 올지도 모르고.” 어제 지검문의 문도들과 통보도 없이 한탕하고, 상해까지 입혔으니 문제가 되었다. 더군다나 뒤처리가 바람직하지 않았다. 1명은 안면박살에, 3명은 전신골절, 나머지 한 명은 총상. 죽은 자는 없었지만 모두 중상이었다. 게다가 얼굴을 내비치지도 않고 도망치듯 떠났으니, 정황 파악 겸 응징을 위해 추적대를 조직하는 게 당연한 수순인 것이다. “아직 시간은 많이 남아있으니 걱정할 필요 없을 것 같은 데요? 게다가 추적을 한다고 해도 많은 인원을 투입하진 못하겠죠.”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 겁니까?” “명분이 없으니까요.” 성우는 유라의 단정적인 말에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 “명분은 있어요.” “에? 설마 문파의 일원을 다치게 했다는 거요? 그거라면 차라리 덮어놓을 문제에요. 패배했다는 것 자체가 명예의 먹칠이니까요.” “저도 그렇게는 생각 안 하죠. 그리고 그런 것을 명분으로 삼으면 소수의 일원 정도만 동원할 수 있겠죠. 명예회복이 명분이니까요. 하지만······ 명분이 단순한 정의실현이라면?” “정의실현? 갑자기 무슨 소리죠?” “뭐··· 제가 우리들을 잡으려고 많은 인원을 빼내고자 한다면··· 이란 가정일 뿐이지만요. 생각해보니 설마 정파의 명숙이 이런 치사한 짓을 할까 싶네요. 덮어두죠.” 성우는 머쓱한 듯 뒷머리를 쓱쓱 긁었다. “그런 가요? 그럼 좀 더 빨리 걷도록 하죠.” 정말 유라의 걸음이 빨라졌다. 보폭도 넓어졌다. 달리는 것보다 약간 느릴 정도였다. “갑자기 왜죠?” 성우는 그녀를 따라잡으며 물었다. “여자의 감이에요. 당신의 덮어진 의견이 바람직할 것 같다는.” 성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참 설득력 있군요.” 주연, 주미 자매는 방문자를 맞이했다. 비단 경장을 차려입은 중년사내는 장흥이란 커다란 마을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했다. 사형필蛇形筆 곽기륭郭機隆. 지검문의 총관이었다. 지검문의 총관이 되기 전, 사형필 두 자루로 응란국 서남성西南省 일대를 독보했고,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는 냉철한 신경을 가진 자로 유명했다. 그리고 중소문파와 대문파의 경계를 걷고 있는 지검문의 총관으로도 손색이 없을 정도의 실력도 가지고 있었다. 장흥에서는 과거는 덮어지고 청수한 인상 덕분에 나름대로 인심을 얻고 있었다. “무슨 일이시죠?” 언니 주연은 미세하게 몸을 떨고 있었다. 주연은 어제 일을 떠올렸다. 지검문의 막내공자 일행에게 겁간당할 위기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구해졌다. 그 와중에 막내공자 일행은 매우 큰 중상을 입었다. 마을 사람들은 모르고 있는 사실이었다. “사실은··· 어제 있었던 강간범들 말씀이오만······.” 곽기륭은 표정하나 바꾸지 않고 말을 꺼냈다. “······!” 주영은 올게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생 주미가 객이 온 탓에 차를 타고 있다는 사실이 고맙게 느껴질 정도로 분위기는 무거웠다. “정말 안타깝소. 마을 내 최고의 미인이라는 두 자매가 그런 변을 당하다니···.” “무슨···.” 곽기륭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굳이 떠올리실 필요는 없소. 그래도 도와주신다면야 고맙게 받겠소. 강간범들의 인상··· 이게 맞소?” 곽기륭은 품에서 종이 두장을 꺼냈다. 거기에는 백색 바탕에 검은색 날카로운 펜으로 그려진 것 같은 그림이 있었고, 그림의 종류는 인물화였다. 그리고 그 중 한 인물은 잘 기억하고 있었다. ‘악몽이라 생각하는 게 좋습니다. 뭐, 무의미한 짓일지도 모르지만, 어서 여기서 벗어나는 게 좋겠죠.’ 유난히도 피부가 고왔던 미남이었다. 그리고 그는 강간범이 아니라 강간범들 퇴치한 사람 중 하나였다. “아니···!” 그녀는 그들이 강간범임을 부정하려다가 말을 멈췄다. 그가 한 말이 생각났다. ‘살고 싶으면··· 잠자코 따르는 게 좋을 겁니다. 그렇게만 한다면 단체의 생리라는 게 있어서 해는 가하지 못할 겁니다. 대신··· 이 마을에선 빨리 벗어나는 게 좋겠군요. 아, 그러고 보니··· 우리에게 덤태기를 씌울 지도 모르겠군요. 그 때는 이기적이 되어도 됩니다. 그게 우리로선 마음 편하거든요.’ 주영은 한참 뒤 입을 열었다. “···맞아요.” “협조 감사하오.” 곽기륭은 그림을 품속에 집어넣으려고 했다. 주영이 그림을 잡았다. “그림은 놓아두셔도 됩니다.” “필요 없으실 텐데··· 음, 뭐 많으니 상관없겠구려.” 무언가 의지로 빛나는 주영의 눈을 본 곽기륭은 인물화를 놓았다. 대신, 다시 품에 손을 넣어 주머니 하나를 꺼냈다. “이건 지검문에서 드리는 위로금이오. ‘입막음 값이겠지.’ 주머니는 묵직했다. 마을을 떠날 수 있을 정도로. 곽기륭은 주영에게 확답을 받자 바로 집을 나섰다. “언니···.” 곽기륭이 나온 뒤, 주미가 텅 빈 손으로 방에 들어왔다. 차는 핑계였을 뿐, 사실은 지검문도와 마주치지 싫기 때문이었다. 주영은 눈물을 흘렸다. 억울함과 답답함에서 나오는 한이었다. 은혜를 갚기는커녕 오히려 배신하는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주영은 남자의 인물화, 유성우의 얼굴이 세밀히 그려진 종이를 붙잡고 그 말만 되풀이했다. 탁― 장기將棋말이 장기판에 부딪히며 좋은 소리를 낸다. 80세, 마른 체격이지만 인상은 강인한 중년인. 지극검 유철산은 이 소리를 좋아했다. 장포자락을 걷으며 낸 한 수에, 상대편은 바로 대응했다. 그 대응은 유철산의 장기말을 먹고 외통수로 치고 들어가는 훌륭한 수였다. “흐음.” 유철산은 상대편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40세 중반 나이에 젊지만 날카로운 외모에 뛰어난 학식을 자랑하는 자. 항상 회색의 장포만을 걸치기에 회의사灰衣師라는 별칭으로 불리우고 있는 자. 이름도, 목적도 모르지만 하나는 알고 있다. 지검문을 대문파의 반열에 올려놓을 비장의 인재라는 사실. 인기척이 느껴졌다. 분명 곽기륭이었다. 항상 장중한 걸음걸이로 이곳을 밟는 자는 그밖에 없었다. 곽기륭은 문밖에서 보고했다. 이 방은 원래 문주밖에 들어오지 못하는 곳이었다. 그의 상대인 회의사만 제외하고. “일을 마쳤소. 문주.” “설득은 잘 되었나?” “의외로 상황을 인정하는 것 같았소. 마음씨가 나쁜 건 아닌데 말이오.” 사실 주영이 완강하게 요구를 거절했다면 심한 수를 썼을 지도 모른다. 반대로 은인을 비웃고 이득에 집착했다면 인간으로써의 가치를 느끼지 못하고 그가 죽여 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우선은 살고 참회했다. ‘분명 좋은 여자다.’ 그 생각은 유철산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여자라면 신부감으로도 좋겠군. 그건 그렇고 확실한가? 그들이 연금술사라고?” “총과 화약은 북부의 것. 부적을 이용한 주술집금呪術集金은 남부의 것. 그들은 연금술사.” 대답은 회의사가 했다. 필요한 단어만 내뱉고 말을 끊어버리는 심각히 예의에 어긋나는 말투였다. 목소리 자체는 깊숙하게 울리는 중저음이었다. “연금술사라··· 자네가 만드는 영단靈丹에 필요한 자들인가?” 유철산이 장기판을 응시한 채로 말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지식, 필요.” “그럼 잡지. 생포하려면 몇 정도 필요할 것 같은가?” “2대 제자 정도는 차출해야 됨.” “음? 생각보다 약한 건가?” “2대 제자까지 정예부대 전부를 말하는 것임.” “흐음, 그럴 만한 명분은?” “이미 만들었을 것이라고 사료됨. 무의미한 질문은 받지 않겠음.” 유철산은 고개를 문 쪽으로 돌리며 얼굴을 찡그렸다. 울상에 가까웠다. “총관, 뭐라 말 안 나오나? 다른 집 아해兒孩들은 무례하다며 난리를 피울 텐데.” “명령이시라면 하고, 단순한 투덜거림이라면 들어만 드리겠소. 회의사를 문파에 초대한 것은 당신. 소인이 이래라 저래라 할 게 아니오.” 사형필은 매정했다. “후우, 좋아좋아. 슬슬 추격하는 게 좋겠지!” 탕―! 유철산은 장기말을 움직였다. 그러자 장기의 판도가 완전히 뒤바뀌었다. 단순히 장기말 하나가 적진에 돌격했을 뿐인데, 그 뒤를 잇는 다른 장기말들의 포진이 완벽하여 최고의 수가 되었다. “반칙. 경勁을 사용하여 장기말의 포진을 은밀히 바꾸다니, 초보라도 치사해서 안 쓸 수.” 회의사는 치밀했다. “제길, 좀 넘어가주면 안 되나? 졌다졌어! 총관! 제자들을 소집해! 지급至急이다!” 유철산은 투덜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장기판이 가루로 화化했다. “쓸만한 무급이네요. 비급의 반열까지는 못 갈 평범한 내용들이지만 오히려 성우 씨에게는 득이 되겠네요.” 성우는 검수의 유품을 유라에게 넘겨받았다. 그가 죽으며 성우에게 건넨 무급. 환상인지 현실인지 모를 곳에서, 자신을 죽인 그가 남긴 물건이라, 독서를 좋아하는 성우로서도 읽기를 조금 망설인 물건이었다. ···라고 해봤자 둔감한 신경은 그 사실을 잊어버리기라도 한 듯 펼치고 있었다. 그것을 유라가 발견한 것이었다. “생각보다 평가가 쓸만한데··· 객관적으로 봤을 때, 이걸 수련하면 전에 봤던 사람들 정도는 이길 수 있을까요?” “1명을 말하는 거예요, 아니면 5명 전부를?” “···1명으로 만족하죠.” “현재로도 충분히 이길 수 있잖아요? 그 총들이 있으면.” 성우는 그녀의 말에 매그넘을 꺼냈다. 그리고 탄창을 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 “총알이 없잖아요.” “가득 차 있는데요?” “네?” 성우는 몹시 놀란 표정으로 매그넘의 탄창을 보았다. 전부 가득 차 있긴 했다. 성우는 한숨을 쉬었다. “당연하잖습니까. 원래 리볼버는 탄피가 탄창에 남는 거니까.” 성우는 탄피를 손바닥에 털었다. 탄피들이 일제히 떨어졌다. 묵직한 쇳덩어리 6개가 손에 내려앉았다. “어라?” 시선을 손바닥에 고정시켰을 때, 그의 동공은 크게 흔들렸다. 비었어야 할 탄피에는 탄환이 붙어있었다. 그것도 6개 전부 다. “이거··· 내가 정말 꿈을 꾸고 있는 건가.” 분명 사용한 총알이 분명했다. 그러나 분명 존재하는 건 사용한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 전혀 새 탄환. 찰칵― 탄창을 끼워 넣고 바로 방아쇠를 당겼다. 탕― “언제 들어도 가슴 시원해지는 소리군.” 찌르르 손목을 울리는 반동 역시 마찬가지. 이 탄환은 매그넘 탄환이 분명하다. 분명 존재하고 있는 탄환인 것이다. “이보세요, 성우 씨. 갑자기 예고 좀 하고 쏠 수 없었을까요?” 유라가 귀를 두드리며 투덜거렸다. 예비가 없을 때 가까이서 쏘는 총성은 매우 위험했다. 청각을 단련시키지 않았다면 한동안 정신이 멍해져있었을 것이다. 원체 신경을 다른 곳에 잘 두지 않기 때문에 의식하지 못했던 것 같다. “죄송합니다. 그런데 유라 씨··· 제 총을 손대신 적 있으세요? 예를 들어 빈 탄환을 갈아치웠거나···.” “없는데요?” 없는 척이 아니라 진짜 그런 적 없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저절로 생성되었다는 소린데···. ‘설마··· 가, 사람 잡지.’ 데져트 이글을 꺼내어보면 알 일이다. M50―A라는 매그넘 탄의 한 종류를 쓰는 파괴력 발군의 권총 역시 매그넘과 같은 현상이 일어났다면 생각해 볼일이었다. 탄창을 꺼냈다. “뭐야~ 역시··· 꿈인가.” 거짓말 같이 탄창은 총알로 가득 차 있었다. 자동권총의 특징상 사격시 탄피가 바깥으로 튕겨나간다. 그런데도 거짓말처럼 총알이 남아있었다. “유라 씨. 정말 손 안 댔죠?” “아직까진 거짓말 한 적 없네요.” “언젠간 할 거란 소리로 알아듣죠.” 그녀의 말은 사실일 것이다. 적어도 유라를 만난 후 권총을 품에서 벗어나게 한 적은 없었다. ‘정말 저절로 생성된 거란 말인가? 대체 왜···?’ 이유는 몰랐다. 알고 싶은 마음은 있었다. 하지만 꼭 알고 싶은 의지는 없었다. 다만 생각나는 것은······. ‘땡 잡았다.’ 총탄 값은 비싸다. 특히 매그넘탄 값은 매그넘을 왜 함부로 쏘지 말아야 하는가, 하는 이유 중 하나로 꼽힐 정도였다. 금전적인 문제가 아니라도, 총알을 보급할 수 없는 세계에 있는 지금, 생존율은 높아졌다. 그 사실 하나는 확실했다. “아, 이런··· 생각해보니··· 핑계 하나가 사라졌잖아?” “아까부터 왜 그리 혼잣말을 많이 해요?” “아, 하여간··· 음. 총이 없어도 이길 수 있을까요?” 성우는 말을 돌렸다. “성우 씨의 신체능력은··· 경勁, 기氣, 영靈, 정精, 신神을 사용할 수 없는 상태에선 최고에요. 어설프게 경을 사용하는 녀석들보다는 강한 신체를 가지고 있는 거죠.” “음, 어설픈 경의 사용자··· 그 때의 그들?” 강간범을 말하는 것이었고, 유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 내 몸의 한계가 그들을 넘는다는 거군요. 흐음, 그런가.” “조언 같은 거··· 필요 없을까요?” “깨기는 힘들겠지만··· 한 번 해봐야죠. 머리에 박힌 상식을 깨는 거.” 자신도 모르게 육체의 한계를 정하는 것. 갑작스런 발전이 있었을 때, 인간의 무의식이 몸에게 요구하는 한계치다. 흔히 있는 얘기다. 2030년대부터는···. 참고로 2030년대는 가장 처음으로 기계의체가 보급된 시대다. 수련이 안 된 인간의 몸에서 뛰어난 기동성을 자랑하는 의체로 몸을 바꿨을 때, 의체가 가지고 있는 원래 힘의 30%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게 보통이다. 의체와 싱크로가 잘 되는 체질이라면 훈련이 없어도 최고 50%. 성우가 그런 체질이었다. 어떠한 환경변화에도 잘 적응하는. “그럼 한계를 새로 측정해 봐야겠는데······.” 유라가 기지개를 켜며 일어났다. 성우도 주머니 속에 넣어둔 데져트 이글의 안전장치를 풀었다. 인기척을 느낀 것이다. 평소엔 한 번도 느끼지 못했던 날카로운 기세가 느껴졌다. 남쪽 숲길에서 두 개의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의 차림은 남색 경장에 회색 장삼이었다. 옷의 색깔은 달랐지만 옷의 형태는 사흘 전에 본 강간범들의 것과 비슷했다. 나이는 20대 중반으로 보였다. 이곳의 나이대로 하면 40대 후반일 것이다. 성우는 생명줄을 세 번 끊어 불었다. 멜로디는 전설의 음악, ‘학교종’이었다. 원래는 소리가 안 나야 정상인데, 성우의 피리 부는 테크닉도 성장했는지, 리코더 수준의 음향이 일어났다. 유라가 돌아보며 물었다. “무슨 곡이죠?” “수많은 패러디 곡들을 탄생시킨 전설의 멜로디죠. 이런 식으로 맞춰 부를 수 있겠군요. ‘추격자가 왔어요, 빨리 모였네. 지검문이 우리를 잡으려 하네~’ 라는 식으로.” “박수를 쳐드리고 싶지만··· 장난을 할 상대는 아니군요.” 추격자는 둘 다 키가 크고 마른 체격이었다. 지검문의 절기 중 하나인 잔선검殘線劒을 익힐 때 필요한 다섯 가지 수련을 거치다 보면 자연스럽게 얻게 되는 체격이었다. 다른 점은 한 사람은 오른쪽에 칼집을 차고 있었고, 다른 한 사람은 왼쪽에 칼집을 차고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 그들이 일류수준의 고수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물론 성우는 짐작만 할 뿐이었다. 유라의 말과 행동을 보면 충분히 알 수 있는 사항이었다. “운이 좋군.” 감청안紺靑眼의 사내가 입을 열었다. 그는 유라와 성우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이렇게 빨리 사냥감을 만나게 되다니.” 감청안의 사내는 투기가 넘치는 기세를 조절하지 못하고 있었다. 당장 봐도 싸우고 싶다는 의지가 넘치는 얼굴이었다. 그에 비해 녹안綠眼의 사내는 차분했다. 그가 물었다. “당신들이 한 짓을 알고 있으시오?” “아마도요.” 유라가 대답했다. “그렇다면 얌전히 우리들을 따라와 줄 수 있겠소?” “못 하겠다면요?” “불구를 만들어서라도 데려가야지!” 감청안의 사내가 외쳤다. 검병을 움켜쥐고 있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자신의 투지를 억누르기 힘겨워 하는 모습이었다. “저기, 물어볼 게 있는데··· 우리의 죄명은 뭡니까?” 성우가 끼어들었다. 특유의 졸린 듯한 목소리는 감청안의 사내가 끌어올린 투기의 일부를 푹 꺼지게 만들었다. 감청안의 사내는 멍청한 표정이 되었다. “모르고 있었냐?” “네.” 순간, 그는 분노했다. “이런 사악한 놈! 벌건 대낮에 청초한 소녀 둘을 그··· 범해놓고 자신의 죄를 모른다고?” “저기 질문이 있네요. 그럼 우리를 잡으려고 몇 명이나 문에서 나왔나요?” 유라는 왜 우리가 강간범이 되어야 하느냐 라는 평범한 질문 대신 그렇게 물었다. 유라는 태평하지만 누구처럼 신경이 둔한 건 아니었다. “음, 일대제자 9명에 이대제자 27명. 그 쯤 될 거다. 중간에 있던 기환진奇幻陣 덕분에 뿔뿔이 흩어졌지만 말이지. 생각해보니 펼쳐져 있던 건 2급 주술진呪術陣, 남부 연금술사의 짓인가?” 그 외로 그는 친절했다. 그리고 바보가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성우는 놀란 표정이 되었다. 하는 짓을 보면 그냥 바보였는데. “죄명을 인정 못하건, 인정하건. 우리들이 당신들을 데려가야 한다는 점은 변함이 없소. 그리고 그 죄를 보아··· 심한 상처를 입힐지도 모르오.” 녹안의 사내가 먼저 검을 꺼냈다. 어느 순간, 성우의 시야에서 벗어났고, 이미 은백색 선으로 공간을 가르는 동작과 함께 유라에게 일격을 날리고 있었다. 챙―! 유라는 어느새 꺼낸 손바닥크기의 비수로 사내의 검을 막았다. 어깨를 내려치는 참격이라 의외로 일격 째는 막기 쉽다. 어디까지나 일격 째만. 그 반동으로 검의 방향을 바꾼 뒤, 유연한 허리의 탄력을 살린 횡선橫線베기는 그 교묘한 각도로 인해 피하거나 막기가 힘들었다. 단지 힘들 뿐이다. 챙― 다리를 노린 공격은 유라가 들어 올린 부츠바닥에 막혔다. 녹안의 사내는 놀랐다. 그의 검은 그가 쥐었을 때 0.5센티 두께의 철판도 가볍고 매끄럽게 자르기 때문이었다. 바닥에 달려있는 건 단순한 금속이 아니다. 그를 당황케 한 것은 연금술사의 강점 중 하나이기도 했다. 필요한 형태의 금속을 개발해서 사용하는 게 기초 작업인 연금술사에게 이 정도 일은 쉬웠다. 유라는 검력으로 조금 신형을 띄웠고, 그대로 몸을 회전시켜 돌려차기를 날렸다. 맞으면 최소 중상이 되는 어마어마한 힘을 내포한 발차기였다. 녹안의 사내는 가까스로 공격을 피해내며 생각보다 일이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 소녀는 강했다. “에? 벌써 시작한 겁니까?” 성우가 당황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이미 녹안의 사내가 일격을 날리기 전부터 5보나 후퇴하고 있었다. 표정은 일부러 지어낸 것이다. 요즘 따라 오감을 초월해 느껴지는 예감이 종종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예전부터 육감은 뛰어난 편이라고 외할아버지에게 듣기는 했으나 이렇게 표면적으로 나올 정도는 아니었다. 이곳에 온 후 많은 것이 변한 것이다. 그리 신경을 쓰지 않는 게 문제지만. 지금도 얼마 안 있어 검이 날아올 거라는 식의 예감이 느껴졌다. 예감을 확인한 것은 유별난 동체시력을 소유하게 된 눈이었다. 감청안의 사내는 매우 큰 동작으로 검을 치켜들었고, 그대로 내리쳤다. 매우 큰 동작이었으나, 그 기세는 보통사람이라면 전신의 털들이 전부 서버릴 정도로 사나웠다. 기세검氣勢劒, 기세만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검식이었고, 감청안 사내의 문내 별호 중 하나이기도 했다. 일단 떨어지는 검은 매우 빨랐다. 그것은 그대로 오른쪽 어깻죽지를 노렸다. 말 그대로 불구로 만들어서 데려갈 속셈인 것이다. 덕분에 성우는 편했다. ‘보통사람’보다 천성적으로 신경이 둔한 성우에게 살기는 단순한 감정표현의 효과 외에는 없었다. 기세는 느끼나 위압은 느끼지 않았다. 관심을 갖거나 하는 순간에는 좀 달라질지도 모르나 살기에 관심을 가질 리 있나. 가볍게 왼쪽으로 몸을 틀었다. 검의 속도는 빨랐으나 자세를 알아보는 성우의 눈은 더욱 빨랐다. 피하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무급에 기록된 독특한 신체활용법을 살려 정강이 차기를 시도했다. 무릎과 발목의 탄력을 이용해 최대한의 힘을 이끌어내는 세각細脚. 검수의 무급에 들어있던 기술 중 하나로 타이밍이 중요하고 원리는 촌경寸勁에 가까웠다. 완벽한 타이밍이라고 할 수 없다. 움직이는 것은 멈춰있는 것과는 다르게 타점이 항시 변화한다. 그리고 그게 살아있는 생물이라면 그 변화의 폭은 크다. 팍―! 공격은 들어갔으나 타격은 얕은 정도. 오히려 정강이를 후려친 발바닥이 아팠다. 매우 단련이 된 하체였다. 반격이 따라왔다. 일직선으로, 유도를 하는 것처럼 검을 매다 꽂는 것 같은 날카로운 각도로 어깨를 노려왔다. 똑같은 곳을 노렸어도 베는 방식은 달랐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떨어지는 사선베기였다. 방금 전과 같이 피했다간 허리부터 다리가 절단 날 것이다. 안 피하면 죽음이다. ‘생포할 생각이 아니었던가?’ 안심할 수 없어졌다. 성우는 태클을 걸었다. 레슬링 기술이라기보다 삼보에 가까운 군용 실전무도 상의 태클이었다. 성우가 원하는 것은 상대의 당황. 검을 쥔 자에게 파고드는 의외성은 일말의 방심을 낳을 수 있을 것이다. “제법!” 이 젊은 검수는 뭔가 달랐다. 단순히 싸움을 좋아하는 성격인지라 검문인 지검문에서도 주먹질을 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그에게 이런 종류의 태클은 처음이었으나, 싸움판에서 단련된 감은 이미 대처법을 내놓았다. 몸의 탄력을 최대한 끌어내고 정수리를 중심축으로 회전한다. 걸리적거리는 검은 망설임 하늘 위로 던져버리고 팔을 휘두르는 게 아니라 어깨를 휘두르는 듯이 상체를 돌리고 팔을 안쪽으로 접는다. 둥― 가죽 북 울리는 소리와 함께 3미터는 족히 날았다. 성우는 몸을 회전하며 몸을 가눴다. 아슬아슬하게 착지에 성공했다. 살짝 체중을 아래쪽으로 옮기는 것만으로 낮게 달려드는 성우와 같은 시야를 가졌고 어깨로 성우의 가슴을 받은 것이다. ‘제대로 된 촌경. 발경發勁인가?’ 성우는 흔들리는 몸을 다잡았다. 아직도 내부를 울리는 게 정말 북이 된 기분이었다. 데미지는 미들급 스트레이트 펀치를 복부에 맞은 정도. 군용 사이보그에 필적하게 만드는 신체활용술을 가진 이곳 사람과 접근전을 벌이다니, 바보 같았다. 감청안의 사내는 하늘로 던졌던 검을 받아냈다. 아주 짧은 순간에 일어난 일인 것이다. 유라에게 신체능력의 한계에 대한 말을 들었더니 시험해보고 싶었던 것일 게다. “아, 이 사람들 어설픈 무인이 아니에요. 전에 싸웠던 사람들 5명이 한 사람에게 달라붙어도 못 이기길 실력을 가지고 있죠." 유라는 녹안 사내의 공격을 피하고 때때로 반격을 넣으며 설명했다. “빨리도 말씀 주시네요.” 설마 그 정도로 강할지는 몰랐다. 강하다는 건 짐작했지만 그 정도라면 지금까지 한 짓은 말 그대로 자살행위 이상은 되지 않았다. “그런데··· 빨리 끝내고 이쪽도 처리해주시겠습니까?” “몸의 한계를 시험해 본다면서요?” 그녀는 매정했다. “전투 중에 사람 무시하며 화기애애하게 대화하는 게 아니다!”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대사다. 감청안의 사내가 검으로 땅을 쓸어 올리듯 참격을 가했다. 분노의 감정이 들어간 일격이라 그 위력은 지금까지와 차원이 달랐다. 잔선검의 심득을 담고 있지만 형식이 특별히 없는 검술. 성우는 황급히 준비해둔 데져트 이글과 매그넘의 빼내고 쏜다. 탕―! 총성이 울린다. 하지만 비명은 없었다. 감청안의 사내가 총탄을 피한 것이다. 덕분에 죽을 염려는 덜었다. “흥! 드디어 본색을 드러내는 구나, 연금술사 새끼! 편법으로 사람을 희롱하고, 사회를 어지럽히는 무리인 너희들을 이 격세랑激勢郞 이윤강利輪江 용서치 않는다!” 하늘에 검을 던져 다시 받고 멋지게 포즈까지 취한다. 특촬 전대물의 주인공들이나 취할 포즈였다. 더불어 총알 한 방 갈겨주고 싶을 정도로 빈틈 많은 자세였다. 솔직히 너무나 유치해 꼴 보기도 싫었다. 너무나 허탈해 빈틈을 노리고픈 마음조차 안 생겼다. “설마··· 이 순간을 기대하고 있었던 겁니까?” “······.” 쑥스러운 듯 뺨을 긁는 사내였다. 이상한 데서 부끄러워하는 것을 보면 처음 본 그대로 바보에 괴짜가 맞는 듯 했다. ‘정의물 메니아···, 인가. 강간범이 사실 우리가 아닌 자기네 사람이라면··· 굉장히 충격 받을 것 같군’ 이 정도로 낯 두껍게 정의타령 하는 사람치고 나쁜 사람은 그리 없다. 그렇기에 무심코 그런 생각을 했다. 대인관계에 의미를 안 두는 성우로서도 그는 흥미가 생기는 ‘인종’이었다. “하여튼 북부 연금술사! 정의의 철퇴를 받아라!” “죽을 지도 모릅니다.” “누가 감히 나를 죽인단 말인가!” “제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소리죠.” “당연하잖아!” “지검문에서는 살아있는 나를 원하지 않았던가요?” “······.” ‘바보다.’ 성우는 단정했다. 그러니 더 무서웠다. 쓸데없이 머리 쓰는 사람보다 자기가 한 번 정한 것을 그대로 밀어붙이는 무식할 정도로 정석적인 사람이 무서운 법이다. 이런 사람들을 세인들은 상식이 안 통하는 사람이라 칭한다. 한참동안 조용하던 이윤강은 그 조용함 그대로 신형을 이동했다. 스스스― 풀 스치는 소리가 옷깃에서 일어날 정도로 빠른 고속이동, 전진후퇴로 움직이는 게 아닌 좌에서 우로 움직이고 있다. 정확히는 불규칙한 지그재그. 풀잎 스치는 소리조차도 사라졌다. 소리 없이 움직이며 흔적을 남기는 이동은 시야에 착각을 일으켰다. ‘이게 저 남자의 진면목인가. 아니면 단순히··· 빡돈 거야?’ 한 순간, 마주친 그의 눈의 동공은 풀려있었다. 한 마디로 제정신이 아니라는 소리다. 그에게 관심을 가지는 순간, 성우의 가슴 속으로 여러 가지 감정들이 공기처럼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 그러나 아무것도 성우의 이성을 건드리지 못했다. 하지만 영향은 주었다. 약간의 흥분興奮상태가 되었다. 성우는 흥분하면 죽는다. 지금은 생명줄이 있어 어느 정도는 괜찮지만 과다 흥분상태가 되어 급혈류急血流가 되면 생명줄조차 성우의 파멸을 막지 못한다. 위험한 만큼 얻는 법이 있는 법. 감각의 반경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윤강의 움직임이 뚜렷히 보이고 몸이 가벼워졌다. 이윤강이 펼치고 있는 보법은 사행보蛇行步라는 것으로 사실 지검문의 무공이 아닌 사형필 곽기륭의 독문절기였다. 성취 수준은 8성成 정도. 가볍게 신형의 진행을 바꿀 수 있는 게 특징으로 사형필은 이 보법과 척사팔식斥蛇八式라는 필법 하나로 수많은 고수가 난립하는 무림에서도 고개를 뻣뻣이 들 수 있었다. 단지 맘에 들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전수해준 절기치곤 성취도가 뛰어난 걸 보면 어지간히 맘에 들었거나, 이윤강이란 사람이 인재였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면··· 빡돌면 강해지는 특수한 체질이거나. 성우는 위협사격이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행동은 빨랐다. 탕. 탕. 탕. 그러나 이윤강의 발목을 잡지는 못했다. 사행보는 진로에는 규칙이 없었다. 조준점을 잡기 힘들었다. 성우가 이윤강의 사정거리에 들어왔다. “먹어라아앗!!” 이윤강이 노호성과 함께··· 빠각! 기절했다. 어느새 유라가 이윤강의 뒷머리에 양발을 올려놓고 있었다. 아직 이윤강은 쓰러지지 않았으나 눈이 하얗게 풀린 것이, 아예 정신이 나가버렸다. “아? 음, 미안해요.” 순간적으로 녹안의 검객이 달려들어 이윤강의 머리를 밟고 있는 유라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유라는 그대로 뛰어올라 그 검세를 가볍게 피했다. 덕분에 발판이 된 이윤강은 땅에 이마를 박았다. 땅이 피로 물들었다. “···아프겠다.” 성우의 솔직한 감상이었다. “도움을 받았군요.” 시선을 돌려 유라를 본다. 유라는 어찌된 일인지 피하기만 하고 있었다. 물론 때때로 반격을 넣긴 하나, 승부를 결정지을 요량은 아닌 것 같았다. 마치 장난치는 것처럼. 녹안의 검객이 펼치는 잔선검의 탄경彈勁과 예기銳氣는 분명 일류수준이었으나 어찌된 일인지 그는 유라의 옷 끝자락 하나 건드려보지 못했다. ‘대체···!’ 잔선검의 요결은 쾌와 탄이다. 그 외에 회廻와 절切도 있었다. 수련방식은 관절을 최대한 단련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필요 없는 근육을 모조리 빼버릴 때가 가장 괴로운 단련이다. 중반에는 폭포를 가르고 종반에는 일 장 바깥의 나무둥치에 15센티 깊이로 일검一劒에 네 개 이상의 흔적四痕을 남겨야 된다. 그래야 10성 성취라 할 수 있었다. 녹안의 실력은 10성이었다. 그러나 그의 잔선殘線은 유라를 건드리지 못했다. 잔미랑殘渼浪이라는 잔선검 상의 절초로 공격했을 때, 그의 진한 녹색 눈동자가 유라의 영롱한 에메랄드 빛 눈과 마주쳤다. 그는 두려움에 전율했다. 탄경이 만들어낸 파문이 유라의 머리 위로 아슬아슬하게 스쳤다. 잔미랑이란 절초가 만들어낸 초진공파라 할 수 있었다. 그런 기예奇藝를 오히려 접근해서 피하다니 미친짓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런 짓을 했기 때문에 유라는 녹안의 조용한 혼잣말을 들을 수 있었다. “보석안寶石眼···!” 유라의 몸이 움찔했다. 그 순간 녹안은 유라의 팔꿈치에 관자놀이를 후려 맞았다. 그는 언제 타격을 입었는지도 모르고 정신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어지간히도 중부사람들은 이야기를 찾나보네요.” “에? 그게 갑자기 무슨 상관입니까?” 성우가 유라의 가방을 들고 다가왔다. 유라는 고개를 저으며 이야기를 넘겼다. “그보다 슬슬 가야겠네요. 기환진의 효력이 다할 때가 가까웠으니까요.” 소모용 부적을 주로 쓰는 남부 주술연금을 이용한 기환진은 부적에 담긴 에너지가 완전 연소될 때까지만 유지된다. “이 사람들은 어떻게 우릴 찾았을까요?”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이었다. 제대로는 모르지만 유라가 펼친 기환진은 초일류라 불리는 고수라 해도 기환술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이상 쉽게 빠져나갈 수 없다고 했다. 유라는 기절한 두 사람들에게 시선을 던지며 중얼거렸다. “글쎄요. 운이 억세게 좋거나 나쁜 사람들이겠죠.” “뭐? 두 사람이 사라졌어? 그 중 하나가 이윤강이라고?” 강철대검鋼鐵大劒 유황천有黃天. 추격대의 수장인 그는 보고를 하러온 이대제자의 말에 한숨을 쉬었다. 격세랑 이윤강. 어지간히 생각이 가슴에 몰려있는 그는 단체행동이란 걸 죽기보다 싫어했다. 이런 상황을 예상치 못한 것은 아니었다. “여여건餘黎乾을 붙여놨으니 괜찮겠지.” 무시했다. 그게 속이 편하다. “그나저나 이곳은 어디야?” 전혀 모르는 동네가 나왔다. 중간에 기환진을 만난 것까진 알겠는데, 빠져 나오고서야 전혀 모르는 동네라는 걸 깨달아버렸으니 낭패가 아닐 수 없었다. 실제로, 그는 성우 일행과 정반대에 위치해 있었다. “우선 보고를 올릴까요?” 서당을 오랫동안 다닌 이유 하나로 서기書記의 임무를 맡게 된 이대제자가 물었다. 유황천은 아버지에게 부끄러웠으나, 공과 사를 구분해야 된다는 결심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허가가 떨어지자 서기는 작은 붓의 대롱 끝에 준비해둔 흑진주 빛 먹을 부었다. 대롱 끝에 달린 털이 검게 반짝이며 뻣뻣하게 물들기 시작했다. 그것으로 테두리에 이상한 문자가 써져있는 황색 종이 위에 글을 썼다. 매우 정교하며 빠른 필법으로 간단한 문장만 쓰니 시간이 오래 걸리진 않았다. 유황천이 서기가 써놓은 내용을 보고 끄덕였다. “빠짐이 없군. 전송傳送하게.” 서기가 황지를 뒤집었다. 황지의 뒷면에도 이상한 문자들이 있었는데, 서기는 그 문자에 먹물을 떨어트렸다. 그러자 황지에서 짧게 빛이 났고, 순식간에 사라졌다. 황지는 그대로 있었는데, 괴이하게도 글의 내용은 사라져있었다. 유황천은 필기구를 정리하는 서기를 보며 말했다. “연금술사들은 신기한 걸 많이 만들어낸단 말이야.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그리고 한숨으로 덧붙였다. “개인이 사용하기엔 비싸지만.” 주술연금에 들어가는 재료는 생각 이상으로 비쌌다. 모두 회의사라는 연금술사가 문파 자체에 무료로 제공해주는 거긴 하지만 개인용으로 쓰려면 뒷돈이 필요했다. 유황천은 가까운 바위 위에 앉아 무언가를 기다렸다. 파직― 바로 눈앞의 땅에서 순간적으로 방전 비슷한 게 일어났다. 땅을 보니 짧은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후후후, 대답이 빨라서 좋군. 모두들, 지금부터 일대제자들은 2명, 이대제자들은 3명 씩 짝을 지어서 서쪽으로 이동한다. 아무대로나 가도 좋다. 산산이 흩어져라! 우선 목표를 찾기만 하는 거다. 공격은 명령이 떨어질 때까지 보류하라!” “명!” 미리 짜두었던 조대로 지검문도들이 흩어졌다. 서기도 자신의 조로 가려고 했다. 유황천이 그의 옷깃을 잡았다. “어딜 가냐? 너는 서기해야지.” “저··· 짜둔 조가 있는데······.” 손가락으로 자신을 기다리는 동료들을 가리켰다. 유황천이 그들을 보고 으름장을 놓듯 쏘아보자 그들은 달아났다. 다시 시선을 서기에게로 돌렸다. “설마 나보고 글을 쓰란 얘기는 아니겠지?” 유황천의 얼굴은 훤칠한 편이었으나 눈을 가늘게 뜨고 들이대니 예외 없이 무서웠다. 서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래야 착한 서기지. 그럼 우선··· 형천瀅川으로 가볼까.” “제길··· 하필이면 이 시간에 보고를 올리는 거냐, 아들놈은!” 유철산은 엉망이 된 장기판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인과응보. 속임수는 나쁨.” 상대 없는 물음에 대답을 해주며 회의사는 서기가 썼던 것과 똑같은 종이에 글을 쓰고 똑같은 방법으로 먹물을 떨어뜨렸다. 빛이 일어났고 똑같은 현상도 일어났다. 유철산은 정교한 글씨로 된 보고서를 눈물로서 읽었다. 사랑하는 장기판 위에 새겨진 보고라 몇 번 봐도 질릴 수 없었다. 그래봤자 장기에서 패배했을 때마다 사라진 장기판 102개 중 하나에 추가될 뿐이겠지만. “후우, 바깥바람 좀 쐐야겠다. 회의사, 당신도 따라 갈 건가?” 회의사는 대답이 불필요하다는 듯 고개만 끄덕였다. 그의 행선지는 대충 짐작이 갔다. “그런데 어디로 가는 겁니까?” “남쪽으로.” chapter 6, Canvas Melody ―――――Picture and boys and a girl. 형천. 북해의 빙원에서 발원하여 수많은 산맥을 꿰뚫고 남쪽 해안까지 내려오는 청영강淸永江. 북서, 남서 바다에서 발원한 양강兩江이 겹쳐서 한줄기로 중부대륙을 횡으로 관통하는 중부민의 젖줄이 되는 유형강流瀅江. 형천은 그 두 대강大江이 교차하는 몇 안 되는 지점 중 하나인 승령호昇靈湖에 맞닿은 도시이자 응란국 최대의 선박도시船泊都市였다. 많은 문물이 교차하는 선박도시라, 상업도시로서의 크기도 대단했다. 응란국에선 왕도王都 다음으로 번화한 도시였다. 이곳에 터를 둔 무림문파도 중소규모로 다섯 개 정도 있었고 대문파의 영향도 분당分黨이라는 것을 통해 존재했다. 여러 가지로 먹을 것이 많은 곳이라 날이면 날마다 문파간의 마찰극摩擦劇이 벌어졌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다섯 개의 무림문파가 위치하는 곳은 형천을 다섯 개로 나누면 각각 끝부분에 존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다섯 부분은 사람들의 성향을 나누는 기준이 된다. 무림문파의 영향은 그 정도였다. 어찌 되었든, 성우와 유라는 우여곡절 끝에 형천에 도착했다. 장흥에서 형천까지는 평범한 사람의 걸음으로 평균 12일 걸릴 거리였다. 그러나 그들은 6일 만에 도착한 것이다. 우여곡절, 유라는 겪지 않았지만 성우는 겪었다. 유라가 짐이 되는 꼴을 보지는 않겠다며, 자신들을 쫓아온 지검문도와의 싸움을 치룬 그날부터 성우를 혹독하게 굴린 것이다. 무표정 그대로 할 수 없을 것 같은 행동을 취하라 할 때면 그녀가 무서워졌다. 맛없는 식사를 먹게 된 것도 그 때부터였다. 마치 인간의 한계를 테스트하는 것 같았다. 덕분에 조금 몸이 강해진 것 같았지만 성우는 심리상태에 따른 착각이라 보고 있었다. 순수하게 누구를 원망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보상심리를 완전히 무시하고 있었다. “어디 숙소가 좋을까요?” 원망의 실체가 물어왔다. “약간 사람이 붐빌 정도면 되겠죠. 많이 낡지 않은 곳이라면 환영. 어차피 돈은 유라 씨가 내는 거잖습니까.” “으음, 그것도 그렇군요. 경비가 부족할 텐데······.” 그래서 선택된 곳은 볼품은 없지만 맛 좋다고 소문난 객잔이었다. 여관으로서의 기능은 형편없지만 사람들이 붐비기는 했다. ‘이슬 안 맞는 것만 해도 어딘가.’ 유라는 숙소를 예약하고 성우에게 방 열쇠를 준 뒤, 바깥으로 나섰다. “잠시 다녀올 데가 있어요.” 말 그대로 짧은 말만 남기고 사라졌다. 추적조차 하지 못하게 지금까지 보여준 적 없는 속도로 어디론가 가버린 것이다. “그건 좋은 데··· 음식은 시켜줘야죠.” 성우에겐 돈이 없었다. 침구세트가 하나 뿐인 방이었다. 문 열 때부터 삐거걱 소리가 의미심장하게 들리긴 했지만 이렇게 낡을 줄이야. 완전 거미가 주인인 방이다. 성우는 가장자리에 거미줄을 치고 있는 거미에게 신사풍의 인사를 올렸다. “변종거미에게 경례를. 후우우.” 성우는 침대에 풀석 몸을 맡겼다. 먼지가 일어나니 입으로 불어 쫓았다. 다리가 8개 인 건 같은데, 이곳의 거미는 분리, 합체도 가능했다. 거미줄 한 가운데에 배를 놔두고 가슴과 머리를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태연하게 떨어졌던 배를 가슴 뒷부분과 접합시키는데, 무심코 웃음이 나왔다. “배도 웃기는 것 같군.” 순수 지구태생인 성우의 배에는 물론, 입 같은 건 안 달려있었다. 덕분에 나오는 건 꼬르륵 소리일 뿐. 큰 도시에 도착한다고 여기오기 하루 전, 모두 먹어 치워버렸다. 성우에겐 그런 음식마저 맛없었다. ‘대체 육포에 무엇을 뿌리면 그렇게 맛이 비릴 수 있는 걸까.’ 꼬르륵~ 지금 생각할 건 그게 아니었다. 언제 도착할지 모르는 유라를 기다리는 것보다 먹을 것을 찾아다니는 게 좋을 듯 했다. 먹을 것 대신 유라를 발견해도 좋다. ‘어찌 되었든 사람 찾기군.’ 성우는 트렁크를 방에 두고 문을 나섰다. 가게가 번화가에 있는 탓인지, 문밖을 나서자마자 사방에서 덮쳐오는 소리에 정신이 멍해졌다. 남보다 좋은 귀는 좋은 점만 있는 게 아니었다. 귀를 파며 거리를 걸었다. 특수한 돌에 특수한 에너지를 넣어 특수한 빛을 발하는 등이 널려 번화가를 밝히고 있었다. 모르는 원리로 모르는 세계가 밝혀진다니, 이방인이라는 것을 절실히 느낀다. 개중 가다보면 나무 장작으로 불을 밝히고 있는데가 있었는데, 그렇게 친숙할 수 없었다. 아이러니 했다. 최고의 문명해택을 받고 있던 자신이 오히려 나무장작이 밝히는 불에 친숙함을 느끼다니. 나무 장작불들의 군집소를 향해 다가갔다. 의식했을 뿐이나 이미 발걸음은 그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그곳은 광장이었다. 거대한 매의 석상이 나래를 펴고 있었고, 그 곁으로 분수가 뿜어졌다. 장작불이 분수에 반사되어 화려하게 빛났다. 분수 곁으로 장작불을 쐬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들은 길가의 무명화가처럼 화판畵板과 의자로 자리를 잡고 앉아, 자신이 맡은 자리에 앉은 손님의 모습을 그리고 있었다. 그런 사람이 여섯 명 쯤 되었다. ‘이런 곳에도 화가는 존재하는 구나.’ 묘한 동질감을 느꼈다. 마침 자리에 앉은 손님 하나가 벌떡 일어났다. 화가는 그에게 자신이 그린 그림을 주었고, 그것을 받은 손님은 그림을 보더니 버럭 화를 냈다. 그는 화가가 보는 앞에서 초상화를 구기고 뭉개고 던졌다. 그게 우연히 성우의 발 앞으로 떨어졌다. 성우는 무의식적으로 그것을 주어 펼쳤다. 그 때 손님의 고함소리가 들렸다. “야 이 새끼야! 그림도 못 그리면서 여기에 눌러앉았냐!” “뭐, 이 양반아! 예술도 알지 못하면서 왜 여기에 앉았냐!” “그 따위 낙서를 예술이라 부르는 놈도 있냐!” 성우는 펼친 종이를 보았다. “예술이군······.” 정확히는 예술적으로 엉망인 그림이라는 말이다. 피카소가 최고 인정받지 못한 입체그림은 후세에 라도 인정을 받았으나, 이 그림은 그마저 못할 것 같았다. 말 그대로 낙서였다. ‘러프를 일부러 비뚤어지게 한 건가. 아무 감흥도 느끼지 못하겠군.’ “낙서라고! 이 자식 죽어봐라!” 화가는 입고 있던 장포를 걷어 가슴을 드러냈다. 붕대로 감고 있는 복부가 보였고 가슴 위로 나 있는 칼자국이 인상적이었다. 마른 체격에 붙어있는 근육은 단단해보였다. 생김새는 성우의 또래였으나 사실 두 배는 더 나이를 먹었을 것이다. 비단 옷, 통통한 체격 등으로 부티가 보이는 손님 역시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래 덤벼라!” “오오옷! 싸움 났다!” “또 구나! 만세~” 광장을 지나다니던 사람들은 싸움이 일어나자 가던 길을 멈추고 순식간에 내기 판이 이뤘다. 사람들은 편을 갈라 응원했고, 그 여세에 맞춰 손님 쪽에서 통통한 손바닥, 마치 부처님 손바닥 같은 두꺼운 손으로 일장을 후려갈겼다. 그것을 화가가 살짝 가벼운 몸놀림으로 피했고 오히려 손님의 뻗은 팔목을, 몸을 회전해 발로 채찍처럼 후려쳤다. “크윽” 신음을 삼키며 손님이 타격이 완전히 끝나기도 전에 손을 휘둘렀고, 그 여력에 못 이긴 화가의 몸이 부자연스럽게 바닥에 처박혔다. 통통한 체격임에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몸을 놀려 화가를 후려갈겼고, 화가는 이어타정鯉魚打艇으로 몸을 튕겨 손님의 공격에서 벗어났다. “헤헤헤, 아저씨 꽤 강한데. 어디 출신이야?” 화가가 자신의 관절을 풀며 물었다. “당경문撞勁門 출신이냐, 큭 꽤 수련을 쌓았나 보군. 나는 철장파鐵掌派다.” “후후후, 사형들이 말하더군, 철장파에 날아다니는 돼지 한 마리가 있다고.” “큭큭큭, 어디 한 군데 부러져서 그런 말 하지 않더냐?” 손님이 자세를 취했다. 화가가 손바닥을 쫙 펼쳐 보였다. 손님이 자세를 멈췄다. 손바닥을 쫙 펼치는 행동은 비무 중에 제안이 있다는 표시였다. 이 행동 없이 하는 제안은 농담 이상은 되지 않았다. “여기는 우리들이 놀기엔 너무 좁다고 생각하지 않아?” “그것도 그렇군. 다른 데로 가는 게 좋겠군. 따라와라 마침 좋은 곳이 있다!” 손님은 장포를 휘날리게 몸을 돌리며 성큼성큼 걸었다. 그의 뒤를 따라 내기에 참여한 많은 사람들이 결과에 대해 갑론을박하며 걸음을 옮겼다. 주변을 둘러보던 화가가 성우를 보았다. 자신의 그림을 들고 있으니 눈에 띤 것이다. “어이 형씨!” “무슨 용건이십니까?” 성우에게로 다가온 화가는 자신의 그림용구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것 좀 맡아주지 않겠어?” “네?” “보수는 돌아와서 꼭 줄 테니까. 응? 부탁해!” 화가는 그대로 손님을 따라갔다. 날렵한 움직임으로 튕기듯 이동하니 잡을 타이밍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이런······ 어쩔 수 없군.” 성우는 방금 전 손님이 흩으려 놓고 간 의자를 원래대로 하고 화가전용석에 앉았다. 딱딱한 나무 의자였으나 엉덩이 부분이 음푹―파여 있어 앉기가 의외로 편했다. ‘그 사람, 이곳에 오래 앉아 있었나 보군.’ 노력과 열정만은 인정해 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재능은··· 어쩔 수 없지만. 원래부터 사람이 붐비는 광장인지라 방금 전 썰물처럼 빠져나갔던 사람들 대신 다른 사람들이 가득 채웠다. 성우는 화가의 간식을 씹어 먹고 있었다. 건빵에 가까운 과자는 생각보다 맛있었다. 문득 다른 화가들을 보았다. 몇 명은 손님을 받고 있었고 몇 명은 안 받고 있었다. 인물화를 의뢰하는 사람이 원래 적은 듯 했다. “뭐, 상관없나.” 화판 너머의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반딧불처럼 빛나는 번화가의 가지각색의 등불이 몽환적으로 시야 속에 다가왔다. 생명줄에 숨을 불어넣었다. 의식하고 분 생명줄은 리코더의 음색을 띄고 있었다. 기억에 남는 곡들을 흉내 내서 불러본다. 원곡과의 싱크로는 70% 정도였지만 충분히 아름답게 느껴지는 곡이었다. 무아지경이 되어 생명줄에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는데, 어느새 사람들이 몰려와 있었다. “무슨 일이시죠?” “음? 아아, 에에 그러니까··· 초상화··· 안 그리나?” 겸연쩍은 표정을 짓고 있는 40대 중년인, 이곳의 나이로는 80세가 넘어 보이는 사내는 손님으로서 성우 앞에 앉아있었다. 세월이 만들어낸 강인한 인상은 할아버지 뒤로 처음이라 조금 당황했다. 인상이 짙은 사람 뒤에 있는 많은 사람들도 신경 쓰였다. 곧 신경이 저절로 꺼졌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있었다. 아무래도 이 도구들은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으음··· 그림이라.” “피리··· 계속 불지 않을 건가?” 중년인이 손님의 자격으로 질문하듯 제안했다. “아, 이거요? 뭐, 어렵진 않으니 불어드리죠. 그런데 그림이라··· 뭐 건빵 값은 해야겠지.” 성우는 생명줄을 통해 자신의 기억 속에 있는 과거의 여러 명곡들을 연주했다. 손은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연한 연필과 목탄이 화판 위에 놓여있었고 그것을 활용해 그림을 그리는 중이었다. 인물위치선정을 위한 기준선 그리는데 2초. 대략적인 인물상을 그리는 데 15초. 러프를 완성하는데 1분 30초. 세세한 묘사를 넣고 손으로 문질러 음영을 넣는데, 3분. 그림 그리는데 도취되어 자신도 모르게 배경까지 넣었다. 번화가가 만들어낸 색색의 등불은 멍한 시선을 붙잡는데 충분한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게 5분. 인물화가 완성되었다. 성우는 자신이 그린 그림을 보았다. 무언가에 도취된 표정. 기분 좋은 음악 같은 것을 들으면 자연스럽게 나올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아저씨가 있었다. 현실로 돌아와서 그 아저씨를 보니 비슷한 표정이었다. 성우는 화판에서 그림을 때어 손님에게 넘겼다. “좋은 표정이었습니다.” 말을 하느라 음악이 멈췄다. 그 순간 손님은 잠에서 깬 듯 화들짝 놀라며 눈을 깜빡였다. “벌써 끝인가?” 그는 성우가 그린 그림을 받았다. “좋은 그림이군. 현실적인 나와 몽환적인 배경이 매치되는 게 아주 좋아. 이런 그림 처음이군. 자네 취향인가?” “리얼리티도 좋아하고, 판타지도 좋아합니다.” “나도 좋아질 것 같군.” 인물자체는 정밀한 터치였으나 그 배경은 몽환세계인 듯 흐리게 표현되었다. 어찌 보면 성우다운 그림이었다. 꿈꾸는 듯한 표정을 짓지만 어느 때나 현실적으로 살아가는 사람. 중년인은 정말 그 그림이 맘에 들었는지 기분좋게 웃고 있었다. “얼마를 주면 되는가?” “에? 아··· 주시고 싶은 데로 주시면 됩니다.” 가격 같은 건 신경 쓰지 않았다. 말 그대로 성우는 이 자리의 주인이 아닌 대리인이었다. 게다가 그림 자체를 얼떨결에 그린 거라 값을 받을 거라곤 생각도 못했다. “으음, 그건 괴롭군. 마음 같아서는 전 재산을 다 주고 싶을 정돈데··· 현실에 타협할 수밖에 없겠군! 여기 있네!” 중년인은 일정한 크기의 직육면체 금속막대 세 개를 꺼냈다. 높이가 5센티 정도 되는 거였는데, 색깔이 적금색赤金色이었다. 동양에서 화폐로 쓰이는 것은 청동靑銅, 백은白銀, 황금黃金, 적금赤金으로 고정되어있었다. 그 길이에 따라 또 다시 가치가 나뉘며, 1센티미터가 최단最短이며 10센티미터가 최장最長이었다. 단위는 지팡이 또는 막대를 뜻하는 장杖으로 표현된다. 적금의 가치는 최고급, 더구나 높이가 5센티라면 작은 집 한 채도 살 수 있을 화폐가치를 뜻했다. 표면엔 ‘오만五萬’이라는 수치가 적혀있었다. 숙박비가 십장이니 그 가치는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그런 게 세 개였다. 그 광경을 본 사람들은 탄성을 내질렀다. “감사합니다.” 주변이 시끄러움에도 불구하고 성우는 아무 부담 없이 십오만이라는 금액을 품속에 챙겨 넣었다. 화폐에 대해 배운 것이 없었던 지라 놀라지도 않았다. 유라에게 배운 것은 간단한 연금술의 상관관계나, 체술 같은 생존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것들뿐이었다. 지나가면서 가르쳤을 지도 모르지만 기억 속에 없는 걸 보면 신경 쓰일 만큼 자세히 가르친 건 아닐 터다. 중년인은 많은 금전소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성우의 배포가 큰 것에 대해 크게 칭찬했다. 이래서 모르는 게 약이다. “그러고 보니 자네 어디서 많이 본 것 같군. 설마, 어릴 때 해어진 아들은 청천淸泉이는 아니겠지?” “설마요.” “하하하 농담이네. 좋은 연주 고마웠네.” “별말씀을.” 중년인은 바닥에 놓아둔 3척 길이의 패검을 둘러차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순식간에 사람들의 시야에서 벗어났다. 중년인이 사라지자 냉큼 다른 사람이 자리에 앉았다. 웃긴 것이 같은 생각을 한 사람이 꽤 되는 것 같았다. “빨리 비켜요 아주머니.” “그러는 아가씨도 비키시죠?” “그런 너도 비켜라 아들아.” 결국 아주머니의 엉덩이에 깔린 아가씨에 깔린 청년의 아버지가 다음 초상화의 모델이 되었다. 성우의 연주가 시작되며 화판에 고정된 백색 바탕 위로 검은색 실선이 형태를 이뤄갔다. 마치 최면에 빠진 것처럼 성우 주위로 모여 있던 사람들은 그렇게 무명화가가 만들어나가는 예술에 넋을 다했다. 유라는 적엽상摘葉商이라는 이름의 가게의 난간을 넘었다. 쾌쾌한 약초냄새가 고약하게 풍겼다. 코를 막지는 않았다. “어서오십쇼, 손님. 오야오야, 이거야 어여쁜 아가씨가 아닙니까.” 신선도를 유지시키기 위한 장치. 마치 식육점의 고기전시용 냉장고 같은 기계를 사이에 두고 유라와 가게주인은 대치했다. 얼굴 반을 가리는 거대한 돋보기안경렌즈 위에 새까만 먹물을 부어놓은 듯한 특이한 선글라스. 가게주인은 그 선글라스를 자랑스럽게 여기듯 한껏 들쳐 올리며 말했다. “무엇을 원하십니까? 말만 하세요. 웬만한 건 다 준비되어있습니다. 미용에 좋은 약초도 완비되어 있···” “바닷바람에 말린 남부련南莩蓮.” 유라가 주인의 말을 끊었다. 주인의 표정이 굳었다. 말 그대로 그건 순간. 어느샌가 다시 실실거리며 묻는다. “흠흠, 어느 바람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북풍北風. 싸늘한 한기寒氣를 쐰, 얼음 속의 남부련을 원한다.” 주인은 유라의 말을 듣더니 잠시 후 냉장실을 열어 세 가지 약초를 꺼냈다. 각각 적색, 황색, 청색을 띄고 있었다. “찾으시는 건 어느 것이오?” 유라는 적색의 약초를 들었다. 코에 가까이 대었다. 농밀한 향기가 났다. “홍백초紅栢草··· 오랜만이로군요.” 주인은 유라를 물끄러미 보더니 몸을 돌려 세웠다. “따라오시오.” 유라가 주인을 따라 들어간 곳은 각종 호화찬란한 장식이 돋보이는 지하실이었다. 주인은 요란한 장식품이 쌓여있는 찬장을 치우고 그곳에서 작은 손가방 하나를 꺼내, 유라에게 건넸다. “전달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넣으시오.” “고마워요.” “별 말씀을 임무일 뿐이오. 그럼 다 끝나면 말하시오. 뭔가 필요한 것이 따로 있으시다면 조달해드리겠소.” 주인이 말을 남기며 방에서 나간다. 그 모습은 너무나 정중해, 구멍가게주인의 행세를 하기엔 인재가 너무 아까워 보였다. 유라는 방에 준비된 종이 위에 빠르게 글을 적었다. 많은 글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알아보기 쉬운 글도 아니었다. 글 위에 또 다시 글을 겹쳐 쓰는 괴이한 필법. 보안을 위한 연금술사들만의 주술어呪術語였다. 그래도 못 읽는 글씨만이 있는 게 아니었다. ‘곧 도착합니다. 아버님.’ 범인凡人도 읽을 수 있는 단 한 문장을 끝으로 마침표를 찍는다. 그 때 유라의 얼굴 위로 표정이 나타났다. “······.” 그것은 웃는 얼굴이었다. 유라는 방에서 나와 편지가 담긴 손가방을 주인에게 넘겼다. 주인은 손가방을 받으며 물었다. “뭔가 필요하신 물건은···.” “아, 그러고 보니 필요한 게 있군요. ‘통기경通奇經’ 있을까요?” “통기경이라면··· 그 중부의 생체연금生體鍊金에서나 쓰는··· 그거 말씀이신지?” “네, 잘못 쓰면 굉장히 고통스러운 약이 되는 그거요.” “설마 직접 복용하실 겁니까?” “말 그대로 설마네요.” “후우, 다행이오. 뭐, 애완동물에게 소량 복용시키면 훌륭한 영약이 될 약이니··· 역시 그런 곳에 쓰는 거요? 그렇다면 분량은 잘 조정하도록 하시오. 뭐, 연금술사에게 이런 말 하는 것도 어색하구려. 허허허.” “······.” ‘성우 씨··· 당신의 수준은 애완동물이 되었네요.’ 유라는 적엽상을 나서, 번화가 사이를 걸었다. 숙소로 향하는 발걸음은 거침이 없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눈길을 끌 갖가지 상품의 행렬에는 관심조차 표하지 않았다. 숙소로 가는 데 필연적으로 지나치게 되는 광장에 들어갔다. 수많은 사람들이 한 곳에 모여 있었다. 그 역시 그녀의 눈길을 잡아둘 수 없었다. 하지만. 삐이이이― 선명한 음색, 감정을 자극하는 피리소리는 그녀의 귀를 붙잡았다. 그제야 시선이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을 향했다. 정확히는 소리의 진원지로 향한 것이다. 유라의 키는 167센티로 또래의 여자들 사이에서는 큰 편이지만 사람들 중에는 건장한 남자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에 정체를 확인하기가 힘들었다. ‘그냥 갈까?’ 동행인 성우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이런 데에서 시간을 허비하기가 갑자기 미안해졌다. 발걸음을 옮기려는 그 때, 익숙한 목소리 하나가 그녀의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유라 씨!” 성우는 10대 후반으로 보이는 여성의 인물화를 그린 후, 배경을 넣으려고 고개를 내밀어 화판 너머의 주변을 살폈다. 쓸 만한 배경을 찾는 것이다. 그러던 중, 성우가 잡은 배경 안에서 소녀 하나를 보았다. 17세 정도로 자기 또래로 보이며, 어울리면서도 어울리지 않는 흑색에 옷소매가 넓고 긴 가죽 코트를 입고 안에는 몸매가 드러나도록 달라붙은 특수한 재질의 T셔츠와 미니스커트를 입었다. 항상 무표정을 유지하는 그녀의 얼굴은 말 그대로 아름답다라는 수식어가 아깝지 않으며, 한 쌍을 이루는 에메랄드 빛 눈동자는 그녀의 자랑인 듯하다. 몽환적인 배경을 찾는 눈으로 그녀를 본 감상은 새로웠다. ‘꽤··· 아름다웠구나.’ 사실 눈이 획 돌아갈 정도로 예쁘다. 그의 여동생이나 어머니가 상당한 미형이라 사람의 아름다움에 어느 정도 적응이 되어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원체 신경이 둔감해서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장점을 모르는 그의 성격 때문일지도. 유라가 두리번거렸다. 성우가 있는 곳을 보려고 하고 있었다. 그리고 곧 포기하고 걸음을 옮겼다. 멍하니 그 모습을 쳐다보던 성우는 다급하게 소리를 질렀다. “유라 씨!” 유라는 그 소리를 들은 즉시, 고개를 돌렸다.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을 보고 있었다. 성우가 피리 부는 것을 멈추고 소리쳐 부르니 음악에 취해있던 사람들 전부가 관심을 가진 것이다. “성우 씨? 여기서 뭐하는 거예요?” 유라가 반응했다. 무표정이 살짝 변했다. 성우는 그것을 놀란 표정으로 이해했다. “기다려주세요.” 성우는 마저 그리며 말했다. 그리고 다시 피리를 불었다. 사람들의 소요騷擾는 성우가 낸 피리소리에 순식간에 파묻혔다. 유라는 성우가 만들어낸 소리의 경계로 마치 다른 세계에 와있는 기분이 들었다. ‘어째서 이런 현상이···?’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에 이미 성우는 다 그린 그림을 손님에게 넘겨주고 있었다. 여성 손님은 성우의 뺨에 살짝 키스한 후, 5센티 길이의 백은 화폐 다섯 개를 건넸다. 그 모습을 보고 유라는 생각을 단념했다. 왜인지는 모른다. 다른 손님들이 자리에 앉으려 했다. 성우가 말렸다. 어딘가 필사적인 면도 있었다. “저기 부탁입니다. 제 지인知人에게 먼저 양보해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음··· 댁이 그러길 바란다면야 그래야지.” 의외로 순순히 유라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사람들이었다. “자, 젊고 예쁜 처자, 어서 앉으시오.” 유라는 얼떨결에 사람들에게 떠밀리듯 자리에 앉았다. 성우는 다시 새로운 곡을 입으로 불며 연필을 움직였다. 사각사각― 연필심이 종이 위를 스치는 소리가 피리소리와 어우러졌다. 어울릴 수 없는 화음인데도 어울렸다. “갑자기 그림을 그리고 있다니··· 이해할 수 없군요.” 유라가 굳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성우는 씨익― 하고 웃을 뿐이었다. 더욱 더 상황을 알 수 없어졌다. 다만 하나 알 수 있는 것은······ 정말 포근한 선율이라는 것이다. 단순한 피리소리가 이렇게 좋을 수도 있다는 것은 지금까지 생각도 못해본 일이었다. 이상했다. 뭐가 이상한지는 몰랐다. 그리고 그 이상함에 동질감도 느끼고 있었다. 성우의 피리소리를 경계로 한 번 구분되었던 세상이, 또 다시 성우와 유라 사이의 교감으로 세상이 나뉘어졌다. 성우는 그렇게 세 개의 세상을 느끼고 있었다. 그 생각은 여감餘憾없이 그림으로 표현되고 있었다. 어느 때보다 그림 그리는 시간은 길었다. 그러나 그 어떤 사람도 시간을 신경 쓰지 않았다. 성우는 그림을 완성했음에도 전처럼 음악을 중단하지 않았다. 자신이 그린 그림을 확인하고 있는 중이다. 그림 속의 유라와 현실 속의 유라. 표현된 아름다움은 현실과 같았다. 그러나 달랐다. 그림 속의 유라는 어쩐지 웃고 있었다. 그것도 매우 포근한 미소였다. 현실에서는 전혀 보지 못한 일면이었다. 지금의 그녀는 여전히 무표정이다. 편안한 것처럼은 보이지만 포근함을 주는 효과는 없었다. 어째서 이렇게 그렸던 것일까. “······.” 성우는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더욱 생각한다면 초상화肖像畵가 추상화抽象化가 되어버린 것 같은 괴리감이 느껴질 것 같았다. 일부러 그런 괴이한 감정에 동화될 필요는 없었다. “여기 있습니다.” 말과 함께 음악이 멈췄다. 승무원을 유혹하는 세이렌의 노래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사람들이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유라의 경우에는 반쯤 감았던 눈을 슬그머니 떴을 뿐이었다. 취한 게 아니라 감상한 것뿐인 것 같았다. “좋네요.” 그녀의 감상은 짤막했다. 그리고 그림을 보았다. “나쁘진 않네요.” 그림에 대한 감상 역시 짤막했다. 표정은 흔들림 하나 없었다. “사례비를 줘야 하나요?” 유라는 그림을 돌돌 말아 품속에 집어넣으며 말했다. 성우는 도리질했다. “아뇨, 돈 같은 걸 받긴 싫군요. 초상화가 아닌 추상화···를 그려버린 것 같으니까요.” 유라는 품속에서 손바닥 두 개를 겹쳐놓은 크기의 목곽木槨을 건넸다. “그럼 대신 이것을 드리죠. 통기경이에요.” “아··· 이게 그건 가요.” 성우는 목곽을 열었다. 적금赤金을 칠해놓은 것 같은 단환丹丸이 나란히 다섯 개 놓여있었다. 뚜껑을 닫고 허벅지 위에 놓았다. 주머니는 두 개의 권총으로 가득 차 들어갈 데가 없었다. 약의 정체는 바로 하루 전날 들어서 알고 있었다. 자신의 몸을 정상화 시키는데 필요할 지도 모르는 약재. 아마 유라는 이것을 구하려고 급하게 나갔던 것일지도 모른다. 성우는 그녀를 보는 시선에 일말의 감사를 담았다. 유라는 부담스러운 듯 시선을 넘겼다. “그건 그렇고 언제 돌아올 건가요? 아, 그러고 보니 방열쇠는?” “오늘따라 유라 씨, 왠지 급해 보이는 군요. 쉬시는 편이 낫겠습니다. 저는 이 자리의 주인이 오면··· 밥 좀 먹고 들어가지요.” 성우는 열쇠를 건네며 말했다. “······.” 유라는 묵묵히 열쇠를 받아들고 몸을 돌려 모여 있는 인파를 해치며 숙소로 나아갔다. “몸이··· 안 좋아 보입니다.” 성우는 유라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걱정되는 표정이 떠올랐다. 사실 그럴 시간도 없었다. 우르르 털석― 유라가 떠나자마자 사람들이 좌석위로 몰려들었다. 질서 같은 건 예나 지금이나 찾아보기 힘들었다. “아줌마―― 무릎 위에 오르시면 안 되죠!” “그러는 형씨도 비키시지!” “말버릇 안 좋은 아가씨도 어른의 무릎 위에 함부로 올라설 나이는 지났다고 보는데? 할아버지는 이대로도 좋긴 하지만.” 찰싹! “하여간 좀 비키게나.” 이번 좌석의 차지는 성성한 턱수염과 백발이 특징인 음흉한 70대의 노인이었다. 뺨에 영광의 손바닥 훈장이 인상적이었다. “예쁘게 그려주게나.” 그는 노인 특유의 여유로운 웃음을 지으며 성우를 재촉했다. 이 웃긴 상황을 받아들이는 웃음과 함께 성우는 다시 생명줄을 피리 삼아 불며 연필로 화판 위의 종이를 괴롭혔다. 유라는 성큼성큼 걸었다. 발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경직된 움직임. 극도의 수련을 쌓은 그녀에게는 안 어울리는 걸음걸이였다. 유라는 걸음을 멈췄다. “웃는 얼굴인가······.” 유라는 알 수 없는 감정으로 그림을 보았다. 웃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분명히 자신인데도 자신과 아예 다른 사람이 그려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흔히 말하는 질투란 감정. 그것에 가까운 기분이었다. 억누른다. 그녀와 성우는 달랐다. 성우는 어떠한 감정도 무시할 수 있었다. 그것은 천성이다. 말 그대로 선택된 자들만이 할 수 있는 일종의 기술이었다. 유라는 달랐다. 그런 재능은 없었다. 수양을 쌓아 감정을 억누르는 법을 배웠을 뿐이다. 성우의 멍함은 천성과 의지가 결합되어 만들어진 진실眞實이나, 유라의 태평함은 거짓도 어느 정도 섞인 사실事實일 뿐이다. 그래서 감정에 북받칠 때도 있다. 계기가 되는 그림. 그림 속의 자신. “웃기는 일이네요. 자신에게 질투라는 감정을 가지다니. 자기혐오라는 것일까요.” 스스로에게 물음을 던져보나 돌아오는 것은 지나가던 사람의 어처구니없다는 감정과 동정이 가득한 시선뿐이다. 현실이 닥치니 신경 쓸 계제가 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래도 신경이 쓰였다. 그림을 다시 꺼내어 보았다. 유라는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일그러트렸다. 그러나 그것은 그림에 비하면 부자연스럽기 그지없는 억지웃음이다. “엄마, 저 언니 이상해.” 연금술사의 좋은 귀는 지나가는 소녀의 말을 포착했다. 와락― 종이를 구겼다. 갑자기 성우에게 미안한 감정이 들었다. 그러나 후회하지는 않았다. 버린다. 웃는 얼굴의 자신이 담긴 초상화는 그녀에게 필요 없었다. 다시 걷기 시작했다. 한결 가벼운 걸음이 되어있었다. 종이뭉치가 그녀의 걸음 뒤에 남았다. 잠시 후, 회색 장포를 걸친 한 청년이 허리를 숙여 종이뭉치를 들었다. “우연, 필연, 모름. 다만, 운이 좋음.” 회색장포의 청년은 어두운 골목으로 들어가 품속에서 종이 하나를 꺼냈다. 그 종이 위에 ‘연금술사 발견, 형천에 있음’이라는 짤막한 문장을 적었다. 그리고 뒷면에 먹을 떨어트렸다. 미약한 빛이 일어났고 꺼졌다. 종이 위에 글씨는 사라졌다. 회의의 청년은 유라의 그림을 다시 살펴봤다. “아름다운 그림.” 구겨질 대로 구겨진 그림이었으나 그림 자체에 손상은 없었다. 물감을 사용했다면 금이 쫙쫙 갔겠지만 크로키는 물감을 사용한 그림이 아니다. 청년은 그림의 한쪽을 잡고 기합을 넣었다. 그 순간, 구겨진 그림은 거울표면 같이 빳빳하게 일어났다. “역시 좋은 그림. 화가··· 보고 싶음.” 청년은 유라의 그림을 가지런히 네 겹으로 접어 품속에 넣었다. 골목에서 나왔다. 이제 그림의 주인을 찾을 때였다. 그림도구의 주인, 청강당淸江撞은 힘겨운 걸음으로 돌아왔다. 결투에서 패했다. 철장파의 비돈飛豚의 명성은 괜한 게 아니었다. 청강당의 재능이 꽤 뛰어나다고 해도 비돈 역시 기재 소리 듣고 자란 동시에 자신보다 숱한 실전을 겪으며 살아온 하나의 무인이었다. 비돈의 삼겹살을 강경强勁으로 다지긴 했어도, 그의 뼈는 철장에 바스러졌다. 살을 가지고 뼈를 깎인 셈이랄까. 결국 500여 합이 지나고 대지에 드러누웠다. 많은 사람들이 환호성을 질렀고, 그에 비하면 적은 사람들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사람들은 비돈의 승리에 돈을 많이 걸고 있었던 것이다. 몸의 타격보다 그런 곳에서 일어나는 자존심의 타격이 훨씬 컸다. 그렇다고 몸의 타격이 적당적당한 것도 아니라 한걸음 내걷기가 힘들 지경이었다. “제길··· 제길···.” 생각해보면 무공수련으로 보내야 하는 시간을 되지도 않은 그림에 투자한 게 잘못인 것 같았다. 조금만 무공에 노력했더라면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터인데, 하는 막심한 회한이 밀려왔다. 청강당은 그림도구를 처분하기로 마음먹었다. 적어도 비돈을 이길 때까지는 그림에 손을 대지 않을 것이다. 자신의 그림도구가 있는 광장에 도착했다. 그림도구를 중심으로 사람들이 양편으로 갈려있었다. 많은 사람이 몰려있었으나 그림도구까지 걷는 데 불편함이 없기에 신경 쓰지 않았다. 그림도구 근처로 걸음을 옮기니 피리소리가 감미롭게 귀를 간질였다. 긴장이 풀렸다. 무심코 근처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사실 청강당, 자신이 준비한 손님용 의자였다. “마지막 손님이시군요.” 화판을 사이에 두고 앞에 있던 사람이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응? 손님? 아! 당신은?” 그림도구를 맡겼던 ‘모르는 사람’이었다. 물론 성우다. 성우는 아무 말 없이 피리를 불기 시작했다. “무슨 짓이지? 나는 음악 따위 듣고 싶은 마음 없어! 없는데··· 없어야 하는데··· 됐어. 제길 맘대로 해.” 청강당은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찡그린 표정으로 참던 눈물은 곡이 계속됨에 따라 쉴 세 없이 흘렀다. 패배로 북받쳐 올랐던 감정이 음악이라는 계기를 만나 터졌다. 조용한 울음. 누구도 그 눈물을 눈치 챌 수 없었다. 청강당은 마음 놓고 울었다. 그의 눈물이 그칠 쯤에 성우는 그림을 완성했다. 그림을 청강당에게 넘겼다. 청강당은 무심코 그림을 들었다. 거기에는 초상화 같은 게 아니라 자신의 뒷모습이 담겨져 있었다. 어딘가를 생각 없이 달려가는 느낌이 바로 전해져 오는 그림이었다. 알 수 없는 자유와 정열이 느껴졌다. “인상적이었을 뿐입니다.” 성우는 곡을 중단하고 말했다. 그리고 화가의 자리에서 일어났다. 멍하니 그림을 보고 있던 청강당을 억지로 화가의 자리에 앉혔다. 청강당은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부러진 갈비뼈가 쑤셔왔다. “그럼 저는 이만 사라져야겠군요.” “아, 보관료는?” “도구 사용료와 쌤쌤으로 계산합시다.” 그림도구로 번 돈은 청강당이 상상도 못할 정도로 많았다. 금전적인 지식이 없는 성우에게는 무겁게만 느껴질 뿐이겠지만. 손해라 할 것은 없지만 청강당이 이 사실을 알았다면 한숨을 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당신의 이름은 뭐요?” “유성우.” 피리 부는 사나이가 사라졌다. 동화가 그러했듯이 피리 부는 사나이가 피리를 불지 않으면 쥐들은 흩어진다. 사람들도 제각기 할 일을 상기하고 흩어지기 시작했다. 머릿속에 매혹적인 음률을 가득히 채운 체, 사람들은 하나 둘 씩 사라졌다. 텅 빈 광장은 통로 이상의 가치가 없었다. 청강당은 허탈한 한숨을 쉬었다. “유성우인가······.” 연필을 잡았다. 날카롭게 갈아진 연필심이 눈에 띄었다. 짜리몽땅해진 연필대도 보였다. 수많은 그림을 그렸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림실력도 사진에 가까울 정도였다. 어느 면에선 넘어서는 정도였다. 그의 재능은 광장을 가득 채울 정도였다. 자신의 재능은 지나가는 사람조차 붙잡지 못한다. ‘열정과 자유······,’ 그의 그림을 본다. 자신에게 느낀 것을 그림에 표현했다고 한다. 그를 감탄하게 만든 자신의 장점은 그것이었다. 패배감이 물러가고 희열이 돋았다. 무엇이든 그가 감탄한 이 자유와 열정을 담고 열심히 하고 싶어졌다. 우선 눈앞에 그림을 그리고 싶어졌다. 그래서 그렸다. 고통도 시간도 잊고 그렇게 그림을 그렸다. 어느 순간 사람 하나가 손님용 의자에 앉았다. “초상화를 그려줄 수 있겠나?” “···기꺼이.” 그림용구를 처분할 때는 오지 않을 것이다. chapter 7, Doping ―――Alchemist's battle method. 언제나 통용되는 법칙은 아니지만, 서비스는 가격에 따라 질이 결정된다. 예를 들어 성우와 유라가 투숙한 추영유숙趨迎留宿은 그 질이 극단적으로 갈려진다. 식당은 그럭저럭 좋지만 숙소로 쓰기엔 최악에 속한다. 가게의 종업원이 가족으로 세 명 뿐이고, 호위도 없다. 음식이 맛 좋다는 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음식을 시키기 때문에 숙소 쪽으로는 신경 쓸 세도 없었다. 더불어 그들에게는 숙객을 지킨다는 의욕도 없었다. 여행을 하는 사람 대부분이 한두 수씩 무공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지킨다는 말은 언제나 무색할 뿐이다. 그래서, 좀도둑이라는 명칭이 붙은 사람들이 선호하는 곳이다. 오늘의 건수를 챙기러온 좀도둑 A씨는 슬쩍 눈을 흘겨 카운터를 본다. 열쇠가 빈 번호판을 본다. 비었다는 말은 사람이 묵고 있다는 증거. “룰루루~ 루루.” 사내는 바지주머니에 한 손을 쑤셔 넣고 태연스레 2층으로 올라간다. 손가락으로 열쇠를 빙글빙글 돌리는 것이 마치 숙소를 진짜로 잡은 것 같기라도 한다. 탁탁- 노크를 하며 걷는다. “뭡니까?” 방 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있다. 이곳은 작업에 쓸 수 없는 곳이다. 바로 걸음을 옮겼다. 문이 열리고 그 안에 있던 사람이 자신을 봤다. 그 때 좀도둑 씨의 걸음은 이리저리 꼬인 걸음이었다. “뭐야? 주정뱅인가?” 쾅- 소리와 함께 문이 닫힌다. 좀도둑 씨는 다른 빈방에 어깨를 기대어 노크했다. 그리고 반응을 본다. 반응이 없으면 10초 후에 노크를 한다. 역시 없었다. ‘2번째 만에 당첨인가? 오늘 일진 좋은가본데?’ 콧노래를 흘리며 가는 바늘을 열쇠구멍에 넣는다. 콧노래의 리듬에 맞춰 살짝- 비틀어주고 위로 올리고 다시 비튼다. 틱- 찰칵- ‘역쉬, 좋구만!’ 0.5초도 안 돼서 풀리는 것이 진짜 열쇠로 푸는 것보다 훨씬 빠르다.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닌 것이다. 당장에 문을 열고 들어간다. 방안은 공허했다. 침구세트 하나, 옷걸이 하나, 그것으로 끝. 그 외에는 먼지만이 떠다니고 있는 듯 했다. 며칠 전, 사전정찰을 왔을 때랑 비슷했다. 그러나 조금 다르다. “이거야··· 제대로 걸렸군!” 언뜻 보기에도 무게 있어 보이는 트렁크가 침대 옆에 세워져 있었던 것이다. 섣불리 열어보는 짓 따윈 안 한다. 이곳은 적지였다. 언제 방의 투숙객이 쳐들어올지 모른다. 건수를 챙겼으면 빨리 나가는 게 최상책이었다.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간다. 태연하게, 제 발을 저리는 도둑은 하중하下中下다. 베테랑인 그는 그런 초보적인 실수 같은 건 안 한다. 계단으로 내려가 식당 사이를 지난다. 와중 카운터를 보고 있는 주인아줌마에게 의례적인 인사말을 건넨다. “화장실 잘 썼수다.” “또 당신이야? 다른 곳에서 싸! 손님에겐 공짜라도 수도세가 들어간다고!” “큭큭큭- 그래도 이 집 화장실에 정들어버렸는걸요~” 욕지거리를 등 뒤로 하고 문턱을 넘었다. 완벽했다. 이제 길거리의 인파에 뒤섞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트렁크의 무게를 보면 이 가방의 주인은 아무래도 건장한 사내일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혹여 라도 부딪히지 말아야 할, 오늘 피해야할 사람은 건장한 사내가 될 것이다. 마침 반대편에서 신장 2미터를 훌쩍 넘는 건장한 사내가 눈에 띄었다. ‘이크. 안 되지 안 돼.’ 그를 피해서 사람들 사이에 깊숙이 섞여 들어갔다. 툭- 그 와중 행인 하나와 부딪쳐버렸다. 부딪힌 행인은 곧바로 넘어졌다. 가벼운 체격, 젊은 여인이었던 것이다. “아야야. 죄송합니다.” 검은색 코트를 입고 있는 여성은 군침이 돌만큼 예뻤다. 한 탕으로 모은 돈을 가지고 오늘 가기로 예정된 기루의 어떠한 기녀들보다 더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프로. 장물을 안전한 장소까지 옮기기 전에는 추파 같은 별개행동은 금물이었다. “미안, 아가씨!” 그래도 그런 쪽의 양심은 있었기에 사과를 한 뒤, 다시 인파속으로 사라졌다. 유라는 흙먼지가 묻은 코트 자락을 털며 몸을 일으켰다. 헛생각을 하다가 갑작스레 튀어나온 사람을 피하지 못했던 것이다. 평소였다면 가볍게 피하거나 그 사람을 멈춰 세울 수 있었겠지만 지금 그녀의 머릿속은 성우가 준 그림덕택에 복잡했다. “아··· 그런데, 그 가방··· 디자인이 제 것과 똑같네요. 이런 우연이······· 있을 리가 없군요.” 유라는 생각이 들자마자 발을 박차 바로 앞에 존재하는 건물 옥상 위로 올라갔다. 자그마치 4미터가 넘는 높이였지만 그녀는 너무나 가볍게 신형을 옮겼다. 연금술사의 가방. 그것은 자기가 직접 만드는 것이다. 그렇기에 존재하는 것은 단 하나! 우연히라도 같은 디자인이 나올 리가 없으며 10년 이상을 써왔기에 존재하는 상흔傷痕, 그것까지 같을 수가 없었다. 같다면 그것은 자신의 것! “그 속에는··· 아주 중요한 것이 들어있단 말이에요!” 그렇게 중얼거리며 좀 더 높은 건물 위로 뛰었다. 그런 행동의 반복은 시야가 한 구획區劃을 담을 만큼 넓어지자 자연히 멈췄다. 그러나 높은 만큼 보이는 사람의 크기도 손가락만 했다. 유라는 안쪽 코트에서 손바닥만한 청지靑紙를 꺼냈다. 희미한 얼룩이 가득한 종이로 결코 인위적인 느낌이 들지 않은 이상한 종이였다. 유라는 종이를 한 번 흔들고는 하늘을 향해 던졌다. 종이를 떨어지지 않고 뻣뻣하게 펴진 채로 유라의 눈앞에 떠 있었다. 그런 종이에서부터 희미한 빛의 파문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색색유심色色幽深” 유라는 낭랑한 목소리로 주문을 영창했다. 그리 길지는 않았지만 평범한 암기로 외울 수 있는 형태의 주문이 아니었다. 목소리가 복잡하게 겹쳐 울리는 창법唱法. 결코 평범한 것은 아니다. “여방일현如方逸顯. 급扱! 추영랑追靈狼!” 검지와 중지, 손가락 두 개만 벌린 채 수인手印을 맺으며 주문을 외웠다. 주문이 끝남과 동시에 검지와 중지 끝을 겹쳐 청지의 중심을 꿰뚫었다. 순간, 공간을 일그러뜨리던 빛의 파문이 한순간 수축收縮하여 청지로 몰려들었다. 청지에 늑대를 뜻하는 단어가 떠올랐다. 처음엔 좁쌀만 한 글씨였으나 점점 커지더니 마침내 청지의 양 끝단에 닿았다. 그 순간, 폭발하듯 청색 빛 무리가 터져 나왔다. 터져 나온 빛 무리는 허공에서 하나로 합쳐졌다. 늑대의 형상에 가까웠으나 목에 둘러진 갈기는 사자를 보는 것 같았다. 반투명한 푸른빛의 늑대는 쏜살같이 건물 위를 뛰어갔다. 건물과 건물 사이에 떨어진 거리는 늑대에겐 무의미한 것이었다. 매우 빠른 속도로 달려가는 늑대를 보고 유라는 허공에서 떨어지는 청지, 아니 청지였을 백지白紙를 잡아 안주머니에 넣고 늑대를 쫓아가기 시작했다. 늑대는 옥상에서 뛰어올라 지상 한 가운데, 그러나 사람이 몰려있지 않은 곳에 착지했다. “꺄악!” 갑작스런 늑대의 등장에 놀란 사람들이 엉덩방아를 찍었다. 사람들이 일제히 물러섰다. 사람들 사이를 가르며 늑대는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그 속도가 어찌나 빠르던지 한줄기의 질풍이 휘몰아치며 사내들의 좋은 구경거리를 만들어냈다. “흰색, 줄무늬, 물방울, 검은색?! 헉 그리고 저건 노팬(삐-)?!! 이제 죽어도 좋아!” “그럼······ 죽어버려.” “켁-!” 무슨 소린지 아는 여성, 특히 짧은 치마를 입은 여성은 자신이 배운 무술의 기본을 살려 곁에 멍하니 침 흘리고 있는 남자들을 있는 힘껏 후려쳤다. 순식간에 일어난 소동에 포장되지 않은 거리에는 온통 흙먼지가 뭉게뭉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유라는 건물 옥상을 번갈아 밟으며 이동했다. 늑대 때문에 일어난 소란에 한숨을 쉬었다. 실제로 늑대는 가방의 희미한 흔적을 따라가기 때문에 가방을 끌고 갔을 땅바닥을 달려야 했다. 그에 따른 소란을 생각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죄책감은 없지 않지만 오히려 기대했다. 소란은 부자연스러운 것을 빨리 드러낸다. 과연, 커다란 트렁크를 가진 중년의 건장한 체격의 남성이 당황하며 허둥대고 있었다. ‘찾았다.’ 유라는 품에서 백지를 꺼내 허공에 던지며 외쳤다. “회回, 입入, 보保, 위位” 특유의 수인과 함께 한자, 한자 또박또박 끊어 외칠 때마다 허공에 뜬 백지를 중심으로 광륜이 몇 겹씩 겹쳐 일어났고, 한참 도둑을 향해 달려가던 늑대는 한줄기의 빛이 되어 백지 속으로 들어갔다. 방전이라도 일어나는 듯한 소리를 내며 빛이 모두 백지로 흡수되자 백지는 다시 청지로 변했다. 유라는 청지를 다시 품에 넣고 확인된 도둑을 쫓았다. 밤에도 별처럼 빛나는 보석 같은 눈을 가진 제응啼鷹은 많은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응란국 북부밀림오지에서 살며, 난폭하여 쉽게 사람을 따르지 않는 제응. 이 거대한 새가 자신의 등을 맡기는 사람은 그것만으로 존경받을 가치가 있었다. 생김새는 지구의 매와 별반 다르지 않고 크기만 수십 배가 큰 것뿐인 이 맹금猛禽은 영성靈性까지 지니고 있어 스스로 주인을 선택하기까지 하는 모양이었다. 성우는 제응의 연한 녹색으로 반짝이는 눈을 주시하고 있었다. 마구馬具 같은 것을 등에 걸친 제응에게는 구속감보다 당당함에 가까운 기품이 느껴졌다. 그것만으로 제응의 주위를 걷는 사람들의 시선이 땅바닥으로 내려갈 지경이었다. 여관 옆에 매어져 있는 제응을 보기 시작한 것도 꽤 오랜 시간이 지났다. 그래도 성우의 시선은 제응의 녹안에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내 애조愛鳥에 무슨 볼일이라도 있으신가?” 중년의 사내가 성우에게로 다가와 조용하게 물었다. 성우는 주인이 나타나자 제응에게로 향한 시선을 거둔 후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아? 첫 번째 손님?” “어라? 이거야 화가분이 아닌가?” 여관 옆에 매여진 제응의 주인이자 성우 앞에 선 중년인은 성우에게 첫 번째로 그림을 의뢰했고 또한 15만장이라는 거금을 준 손님이었던 것이다. “다시 만나서 반갑군. 따로 자리를 내보고 싶었는데 마침 만나다니. 근데 어찌된 일인가? 비조영飛照影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으니 그··· 이상한 의심이 들어 일부러 나왔는데, 자네라니.” “도둑으로 오해받을 뻔 했군요.” “하하하, 뭐 그런 걱정은 안 하네. 제응은 한 번 주인을 선택하면 주인의 명령이 아닌 이상 다른 주인을 섬기지 않으니까 말이네. 사실 기본상식인데도 모르는 사람이 많더군.” 여기저기 노리는 도둑이 많다는 소리였다. “사람의··· 본능이겠죠, 그건. 눈앞의 귀한 것은 가지고 싶다. 아무도 보지 않으니 슬쩍해도 될 것이다. 슬쩍할 수 있다. 하기야 터무니 없는 자신감 없이는 그 짓도 못할 테니까요.” 성우는 제응의 눈에서 눈을 떼지 않고 말했다. 이 거조의 눈은 자신이 아는 한 사람의 눈과 비슷했다. 부드러움을 머금었지만 사실 근처에만 가도 둘로 나뉠 것 같은 날카롭고 차가운 보고寶刀. 성우는 그런 눈에 매력을 느꼈다. “···가지고 싶을 만도 하군요.” “자네는 처음 봤을 때도 그렇지만 참 신기하군. 보통 사람들은 제응의 거대한 몸과 날개를 보고 감탄하기 마련인데, 자네는 눈을 보고 그런 반응을 보이다니 말이야.” “그렇습니까? 음?” 성우의 극히 예민해진 귀는 멀리서 들리는 소리의 변화를 잡았다. 평소의 웅성거림이 아닌 고성의 비명. 이런 종류의 소리에는 이곳으로 넘어와서 한 번 죽음을 경험한 뒤부터 민감해졌기 때문에 평소보다 쉽게 느낄 수 있었다. “서방상가 쪽이 약간 소란스럽군.” 중년인은 역시 뭔가를 느낀 듯 중얼거렸다. 그 순간, 사람들을 해치며 달려가는 중년의 사내가 보였다. 낡은 경장에 거대한 트렁크를 들었음에도 굉장히 빠른 것을 보니 강도 높은 수련을 쌓은 것 같았다. “저건 비익채飛翊寨의 비요행형飛嶢行形이군. 꽤 능숙하게 펼치는 걸 보니 상급제자인 것 같은데··· 번화가에서 소란을 피우다니 인개鱗介채주寨主의 수준을 알겠군.” 중년인은 굳은 얼굴로 차갑게 불만을 내뱉었다. 비익채는 형천을 크게 다섯 부분으로 나누는 다섯 개의 문파 중 하나였고 빠르고 독특한 신법身法과 신법의 특성을 잘 살린 각법脚法으로 유명했다. 비익채의 수좌는 인개 현鱗介 賢으로 응란국 십대신법대가로 더 유명하다. 그런 비익채주를 맘대로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적어도 응란국에서는 따로 꼽아서 샐 수 있을 정도였다. 성우는 성우대로 굳은 얼굴이 되어있었다. 그 사람이 들고 있는 트렁크는 자신이 알고 있는 트렁크와 매우 닮아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것을 들고 있는 사람은 자신이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원래 주인은······’ 성우의 시야에 매우 빠른 속도로 건물 옥상을 뛰어다니는 인영하나가 잡혔다. 검은색 스커트와 가죽코트가 세차게 휘날렸다. 유라였다. 유라 역시 성우를 발견했다. 도둑에게로 시선을 두고 있지만 제응의 크기가 크기라 시선이 가지 않을 수 없었는데, 성우가 마침 그 옆에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성우 옆에 있는 중년인 역시 발견되었다. ‘저 사람은··· 설마?’ 마침 도둑이 성우 옆을 5미터 사이에 두고 스쳐지나갔다. 그의 몸이 내는 속도는 매우 빨랐다. 예전 안드로이드 택배원이 계단을 내려갔을 때처럼 잔상만을 쫓을 뿐이었다. “이런······.” “왜 그러나?” “도둑입니다.” 말의 교환은 너무나 빠르게 이뤄졌다. 그러나 도둑은 그보다 더 빨랐다. 그 대화가 이뤄지는 순간에 이미 성우에게서 20미터나 멀어진 것이었다. ‘이런 너무 늦겠는 걸?’ 성우는 44매그넘을 빼들었다. 그 순간 중년인이 도둑을 향해 신형을 날렸다. 그와 동시에 유라 역시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던졌다. 탕-! 하늘 높이 울리는 총성에 주변의 사람들이 놀라고 도둑이 놀랐다. 갑자기 무언가가 오른쪽 팔를 관통했고, 관통한 무언가가 가지고 있는 저지력沮止力에 몸의 균형이 완전히 무너지고, 무너지다 못해 몸이 날아버렸다. 최대한 몸을 가볍게 하고 있었기 때문에 신형은 그야말로 형편없이 날았다. 그 충격에 트렁크를 놓쳤고 그대로 5미터를 날았다. 그 순간에 맞춰 중년인이 도둑의 신형 옆으로 도달했으며 몇 초 지나지 않아 유라가 던진 무언가가 도둑 옆에 떨어졌다. ‘뭐지?’ 중년인은 도둑이 갑작스레 울린 총성과 함께 격렬히 날아가자 놀란 와중에 바로 그 옆에 떨어진 물체를 유심히 쳐다보았다. 그것은 주먹만한 계란형 구체였다. 알 수 없는 금속으로 되어있는 그것은 중년인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중년인이 그것에 손을 뻗었다. “무슨 소란?” 회색옷을 입은 청년이 중년인이 묵던 객잔 위층 창문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그는 넓은 시야를 가졌는지, 순식간의 아수라장이 된 거리의 상황을 파악했다. 그의 시선이 트렁크를 향해 달려오는 성우와 성우를 향해 달려오고 있는 유라에 멈췄다. “연금술사!” 그가 부지불식간 외쳤다. 그의 목소리에 구체에 손을 뻗던 중년인의 고개가 돌아갔다. “뭐라고?” 그 순간 구체가 새하얀 빛을 토했고 그 빛을 받은 사람들은 안구가 타들어가는 통증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그 때를 노려 유라는 성우를 낚아챘고 성우는 얼떨결에 유라에게 끌려가면서도 트렁크를 잡았다. 이내 빛이 사라졌다. 더불어 트렁크와 성우도 사라졌다. 남은 것은 거리를 걷고 있던 사람들 뿐. 많은 사람들이 눈을 싸쥐며 땅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중년인은 눈을 길게 감았다가 뜨며 회색 옷의 청년에게 물었다. “회의사··· 방금 뭐라고 했나.” 청년, 회의사는 대답 대신 그림 세 장을 꺼냈다. 거기에는 성우가 유라를 그린 추상화에 가까운 초상화와 중년인의 집에 거하는 화가가 그려낸 두 장의 몽타주를 꺼냈다. 거기에는 무표정을 하고 있는 성우와 유라의 얼굴이 그려져 있었다. 중년인은 이마를 툭 치며 중얼거린다. “어쩐지 만난 적이 있었다, 했는데···. 보물을 눈앞에 두고 놓친 셈이 되는가?” “아직 쫓을 수 있음.” 회의사는 제응에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중년인, 지검문주 유철산은 대답 대신 자신의 애조 비조영의 등에 올라타며 회의사에게 손을 내밀었다. 회의사는 그 손을 잡고 유철산의 뒤에 올라탔다. 제응이 크게 날갯짓을 했다. 거대한 날개가 움직일 때마다 강풍이 몰아쳐 사람들의 옷자락을 펄럭였다. 안타깝게도 고수인 유철산과 연금술사인 회의사를 제외하고는 눈이 회복되지 않았기에 진풍경(?)을 본 사람은 없었다. 통나무처럼 두껍고 쇠토막처럼 단단한 다리를 나누는 세 개의 관절이 일제히 굽혀졌다. 순간, 관절이 스프링처럼 튕기듯 펴지며 제응의 신형이 8미터 높이로 솟아올랐고 다시 한 번 날갯짓을 하자 15미터까지 올라갔다. 제응은 계속 날갯짓을 하며 이 높이를 유지했다. 유철산은 강도 높은 수련을 통해 50미터 바깥의 바늘도 분간하는 시력을 바탕으로 성우를 찾았다. “그럼 잡아보지.” 주인의 마음을 느낀 제응이 빠르게 활강滑降하기 시작했다. 유라는 자신의 연금술로 만든 빛으로 가득한 공간에서 최대한 빠른 속도로 벗어났다. 그녀의 옆구리에는 성우가 끼어져있었고 성우의 손에는 거대한 트렁크가 덜렁거리고 있었다. 언뜻 지면이 스쳐가는 걸 보니 시속 70킬로미터 정도로 달리는 것 같았다. “갑자기 무슨 일입니까?” 성우는 유라의 팔에 몸을 맡기는 그대로 물었다. 유라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성우를 일견하다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방금 성우 씨 옆에 있었던 사람이 누군지 아시나요? 그 사람이 바로 응란칠대검객鷹卵七大劒客 중 하나이자 검을 앎이 극에 달했다고 알려진 지검문주 지극검 유철산이에요!” “···과연.” “감상이 겨우 그 정도인가요?!” 유라는 어처구니없어졌다. 방금 전까지 최악의 적과 같이 있었던 사람이 하는 말이 겨우 ‘과연’이라니? “저에게 있어선 지극검이란 명호보다 첫 번째 손님이란 명사가 더 가까이 와 닿는 사람이라서요. 방금 전까지 대화도 나눴고.” “계획적인 접근이었겠죠! 설마 지극검 유철산이 성우 씨의 얼굴도 못 알아보겠어요?” 물론 못 알아봤다. 그러나 그런 걸 알지 못하는 성우는 그럴 수도 있겠다고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근데 어디로 가는 겁니까?” “선착장이에요. 형천에 존재하는 배는 꽤 많으니 우선 몰래 배에 타면 쉽게 추적하진 못할 거예요. ···물론 겨우 시간벌기 수준이겠지만.” 그 말을 끝으로 유라는 입을 다물고 더욱 속력을 내기 시작했다. 어느새 번화가에서 벗어난 지는 오래되었고 인적이 뜸한 거리를 달리고 있었다. 300미터 쯤 더 달렸을까? 성우는 지면을 응시하면서 대답을 구하지 않는 물음을 던졌다. “그런데··· 시간도 숨어야 벌 수 있는 거였죠?” “에?” 성우는 생명줄을 입안으로 더 집어넣어 이빨로 물었다. 그리고 트렁크를 휘둘러 머리 위로 올렸다. 그대로 손바닥을 펼쳐 트렁크를 받쳤다. “조심해요 유라 씨!” 그 순간 끼이이이잇-! 하는 새의 고성과 함께 쿵- 하는 강한 진동음이 일어났다. “으극!” 트렁크를 통해 강렬한 충격이 전달되었다. 유라는 성우의 말에 자신도 모르게 미리 반응한 탓에 별 충격은 없었으나 덕분에 성우를 놓쳐버리고 말았다. 아니, 성우가 미리 유라의 손을 풀어내고 몸을 날린 것이다. 이름 없는 무급, 박투편의 류수流水의 무리를 겉핥기식으로 이용하여 유라의 단단한 팔을 풀어낸 후, 그대로 유라의 어깨를 역으로 잡은 뒤 트렁크를 휘둘렀고 그 반동을 이용하여 유라의 스피드를 줄인 틈을 타 땅바닥을 박차 몸을 방패로 삼았다. 설명은 길지만 순간에 이뤄진 행동. 지면을 통해 희미한 달빛에 비춰진 제응의 그림자를 본 순간부터 취한 행동이었다. 이리저리 생각할 시간이 없었음에도 성우는 훌륭하게 제응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었다. 그러나 있는 건 오직 지력과 체력 밖에 없는 성우였다. 아무리 훌륭하게 막았다고 해도 결과까지 훌륭한 건 아니었다. 제응이 급속으로 활강하면서 이끌어온 풍압과 무게에 따른 역학적 에너지가 고스란히 담긴 제응의 발톱을 막기에는 성우의 몸은 너무나 연약하고 가벼웠다. 성우의 몸은 트렁크와 함께 7미터를 고스란히 튕겨나갔다. 성우는 찢어진 옷을 일견하고 한숨을 쉬며 힘겹게 일어났다. “크윽, 꽤 아프군요.” “성우 씨!” 유라가 급히 성우를 향해 달려왔다. 그러나 유라는 성우에게 다가갈 수 없었다. 쿵-! 성우와 유라 사이에 사람 하나가 떨어졌기 때문이다. 유철산의 제응으로부터 떨어진 회의를 입은 젊은 청년은 회의사라고 불리는 연금술사였다. 그의 위치는 성우와 유라를 점으로 놓고 직선을 그으면 필히 거치는 지점이라 만남은커녕 서로의 모습도 제대로 확인하지 못할 정도였다. 다시 한 번 제응이 크게 한 번 울며 성우를 향해 활강했다. 그 모습을 본, 유라는 답답해졌다. “비켜주세요!” 유라의 말에 회의사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럴 수 없음.” 동시에 손을 쫙 펼쳐들더니 오른쪽 손바닥에서 불꽃이 이글거렸고 불꽃은 그대로 손바닥을 중심으로 기류氣流를 일으키더니 금세 커다랗게 변하여 유라를 향해 날았다. 유라는 발을 박차 옆 구르기를 시도했다. 구르기라기에는 몸의 높이가 공중낙법 수준이었지만 구르기는 구르기. 그 덕에 불덩이는 유라의 왼쪽을 아슬아슬하게 스쳐지나갔다. “방심은 금물.” 회의사가 중얼거림과 동시에 유라의 옆을 스치고 지나갔던 커다란 불덩이가 산탄散彈처럼 폭발하며 유라의 등에 작렬했다. “크윽!” 유라의 신형이 주춤거렸다. 그와 동시에 제응의 거대한 발이 성우를 노렸고, 성우는 다시 한 번 트렁크를 들어 올려 제응의 발을 막았다. “에에?” 그런데 이번엔 공교롭게도 제응이 트렁크를 단단히 잡은 채 놓지 않고 곧바로 다시 날아오른 것이다. ‘트렁크로 막은 게 안 좋았던 거··· 였나?’ 성우는 유라의 트렁크를 놓을 수도 없는 상황에서 멍청히 제응에게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내심이야 어찌 되었든 유라의 트렁크는 상징적인 성우의 존재가치였던 것이다. 그것을 놓고 도망치는 건 유라와의 관계가 파탄나는 것과 동시에 이 괴상한 세계에서 가장 쉬운 생명유지법 하나가 사라지는 것을 뜻했다. 총으로 쏴 떨어트릴 수도 있었겠지만 높이가 높이라 쏘는 순간 몸이 피떡이 되는 것을 각오해야했다. 제응은 유유히 성우를 잡은 채 서쪽 강가를 향해 날아올랐다. 유라는 멍청히 끌려가는 성우를 멍청히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이런 바보 같은 일이 있을 수도 있는 거군요.’ 그러나 유라에게 하늘을 나는 성우를 감상할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회의사가 다가오며 수도手刀를 휘둘렀고, 그의 수도를 따라 허공중에 불길이 일어나며 유라를 덮쳐왔기 때문이었다. 유라는 황급히 몸을 굴러 피함과 동시에 땅바닥에 널려있는 돌 중 하나를 집어 회의사를 향해 던졌다. 맞추는 건 기대하지 않았다 단지 공격의 연계를 대비한 견제였던 것이다. 유라의 코트가 방열기능을 가지지 않았다면 첫 번째 산탄과도 같은 불꽃에 큰 화상을 입고 쓰러졌을 것이다. 그 정도로 회의사의 공격은 무섭기 짝이 없었다. 과연 회의사가 돌을 피하느라 공격의 흐름이 끊겼다. 경황 중에 던진 거긴 했지만 짱돌 하나에 담겨있는 역도는 승기를 잡은 회의사로서도 가볍게 보기 힘든 것이었다. 유라는 신색을 회복하며 물었다. “중부연금술사인가요? 그게 바로 중부연금술사들의 자랑이라는 단공鍛功이라는 건가보죠?” 회의사는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임으로 긍정했다. 중부 연금술은 무술과 밀접한 연관이 있었다. 무술의 기본이 몸을 단련하여 몸 안에 있는 경勁을 일깨우고 경을 단련하여 사람의 능력을 초월하는 공功에 도달하는 것이다. 공이야 말로 무림문파가 가지는 특색이고 전통이었다. 중부 연금학계는 무림이 틀을 잡기 전부터 공을 연구했다. 경을 수련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을 단축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었다. 생물학, 의학이 극도로 발달된 중부 연금학계는 많은 시행착오 끝에 마침내 따로 경의 수련 없이 공에 도달하는 방법을 개발해냈고 그 방법으로 공을 사용하는 사람을 단륜부湍倫夫라 불렀다. 물론 부작용이 없는 건 아니었다. 신체능력의 모든 기본이 되는 경의 단련 없이 일궈낸 공은 불균형하기 짝이 없었다. 약물과 각종 의학을 통한 신체개조로 이뤄낸 인간을 초월하는 힘은 말 그대로 ‘급류에 싸인 인륜[湍倫]’이란 명칭이 그러하듯 위험을 가져왔다. 그래도 위험에 비해 지식과 필요한 약재만 있으면 빠르게 강해질 수 있는 방법이라 많은 중부의 연금술사들이 이를 포기하지 않았다. 작금에 이르러서는 그런 단공을 익힌 단륜부들이 중부 연금술사 연합이 중부 사국四國을 좌지우지하는 원동력이 되어있었다. “연합의 사람인가요?” “무의미한 대화일 뿐!” 회의사의 장포자락이 크게 펄럭이며 화기火氣가 가득한 장력이 발출되었다. ‘성우 씨, 구하러 가는 거 조금 늦을 지도 모르겠네요.’ 유라는 재빨리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던졌고 그것은 회의사의 장력과 정면으로 충돌했다. 쾅--! 강렬한 폭음과 함께 화끈한 열기가 사방으로 퍼지며 싸움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렸다. “이쯤이 좋겠군.” 날고 있는 제응의 등에 앉은 채로 사방을 둘러보던 유철산은 불빛은 많으나 인적이 뜸한 강가에 성우를 떨쳐놓았다. 쿵- 소리나게 떨어진 성우, 그의 주위로 먼지가 일어났다. 성우는 뒤늦게 신음을 뱉었다. “우욱 콜록콜록!” 5미터 높이에서 떨어지는 것이라 몸이 크게 진동했고 그 여운에 성우는 정신이 얼떨떨해지는 기분이었다. 게다가 먼지와 함께 목구멍 깊숙한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기침은 고통스러웠다. 기침을 거칠게 하고 있는 성우 곁으로 제응이 크게 날개를 펼쳤다 접으며 착지했다. “괜찮은가?” “아아, 뭐 죽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병 주고 약 주는 격이지만 어느 정도 진심이 느껴졌기에 성우는 성심성의껏 대답해줬다. 그게 아니어도 건성으로라도 대답해줬겠지만. “무슨 용건인지 알고 있겠지?” “진실眞實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니면 사실事實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것보다야 본질이지.” “본질?” 진실은 성우와 유라가 누명을 썼고 그것을 은폐하기 위해 손을 쓴다는 뜻이었고, 사실은 성우와 유라를 강간범으로 몰아넣고 치죄를 한다는 뜻이었다. 비슷한 단어라도 뜻이 크게 달라지는 것이다. 그러나 본질은? “연금술사의 비서秘書.” “아.” 성우는 조용하다 못해 맥없는 탄성을 터트렸다. 연금술사의 비서. 그것은 단순히 명칭일 뿐이었다. 수많은 연금술사의 학파, 그 학파에서 갈라져 나온 학자들이 가지고 있는 지식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이었다. 연금술사는 그 자체로도 쓸모 있지만 연금술사의 지식은 더욱 탐욕스러운 것이다. 같은 학파라도 사람에 따라 다른 연구가 나와 새로운 지식이 이뤄지고 그것은 다른 사람의 지식과 연동해서 아주 새롭고 혁신적인 결과를 일궈낼 수도 있었다. 그래서 연금술사들에게는 적과 동료의 경계가 모호했다. 언제라도 동료가 될 수 있지만 언제 배신하고 모든 연구결과를 독식할 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런 건 둘째치더라도 무인들의 경우 연금술사에게 바라는 것은 한 가지다. 경勁이나 공功의 성취를 빠르게 하기 위한 영단靈丹. 많은 연구결과가 합치되면 영단의 질 역시 높아진다. 성우는 유라에게 연금술사에 대한 것을 어느 정도 배웠기에 유철산이 하는 말을 비교적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서 생포하라는 명령으로 문도들을 풀었나 보군요.” “음? 그건 어떻게 아는가?” 유철산은 목표와 만나지 못했다는 제자들의 소식을 장기판 하나와 바꿔서 접했기 때문에 그 점에 의아했다. “만났습니다. 이윤강이라는 사내와.” “호오, 강이를 뿌리치고 형천까지 온 것인가? 생각보다 대단하군.” 격세랑 이윤강은 재질과 열정이 뛰어나 일대제자들 중에서도 돋보이는 사내였다. 경을 이루고 이제 공의 경지에 곧 닿을 몇 안 되는 제자였던 것이다. “뭐, 제가 처리한 게 아니니까요.” “그런가, 일행을 이끄는 것이 그 아름다운 여인이었나? 내 생각이 틀렸군.” “저를 너무 과대평가하시는 군요.” “후후, 그건 그렇고 어떤가? 얌전히 나를 따르는 게.” 성우는 트렁크를 들어 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순 없죠. 저는 이 가방을 전해줘야 하거든요.” “나를 따라가도 전해줄 수 있을 걸세. 회의사는 녹록치 않으니까.” 성우는 돌연 미소를 지었다. “그럼 내기할까요? 회의사라는 사람이 먼저 오나, 제 일행이 먼저 오나.” “호오, 그거 재밌군. 그런데 나는 별로 기다리기 싫은 걸 어쩌나.” “그럼 그밖에 조건을 걸어서 내기를 하죠.” 성우는 호흡을 멈추고 길게 생명줄을 분 다음 말을 꺼냈다. “서로 무기를 쓰지 않고, 한 사람이 기절하거나 서로의 일행이 올 때까지 겨루는 겁니다. 물론 기절한 사람이 패배하는 거죠. 그리고 아무도 기절하지 않았을 때, 오는 사람이 저의 일행이라면 제가 이긴 것이고 문주님의 일행이라면 저의 패배입니다.” 유철산은 고민했다. 사실 고민할 것도 없었다. 그 자신에게 불리한 건 하나도 없었다. 성우가 비록 상당히 맘에 드는 청년이라 해도 무골도 아니고 겉으로 드러나는 공력조차 얄팍하기 그지없었다. 북부연금술사일 게 분명한 청년이 무기인 총을 쓰지 않는다. 고수인 유철산이라도 연금술사의 총탄은 위험했다. 물론 총을 가지고 있어도 패배할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단지 ‘위험하게’ 귀찮아질 뿐이었다. “그것도 좋겠군!” 유철산은 승낙했다. “내가 이겼을 시엔 어떻게 하겠나?” “제가 아는 지식을 모두 적극적으로 제공해드리죠.” “호오, 그건 좋군. 그럼 만에 하나 자네가 이겼을 시에는?” “우리를 쫓지 말아주셨으면 합니다.” 이 제안이야 말로 이 지극히 불리한 내기의 핵심이었다. 이런 제안이 바탕이 되지 않고서야 얌전히 유철산과 오순도순 대화를 나눌 이유가 없었다. 필사적으로 탄창을 비우고 도망쳤을 것이다. 설사 그런 방식으로 요행히 그를 떨친다 해도 지검문이라는 단체의 추적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원하지 않는 결과였다. 그리하여 상대가 절대로 놓칠 수 없는 미끼를 던졌다. 한편 유철산의 경우에는 예상치 못한 변수가 있어서 패배하는 것을 고려하다가 문득 자신의 행태를 깨달았다. 너무 계산적인 것이다. 언제부터 비무, 아니 싸움에 임하여 패배할 것을 먼저 생각했던 것일까? 속으로 자신을 질책했다. 잠자고 있었던 호승심이 일어났다. 행여 연금술사가 자신이 모르는 신기한 비술을 사용하여 요행히 자신을 이긴다 해도 상관없었다. 연이 안 닿는 것으로 하면 그만이다. 연금술사는 오랜만이긴 하지만 세상에 연금술사가 그들만 있는 건 아니었다. “좋아! 내 이름을 걸고 이 조건을 맹세하지!” 어딘지 모르게 시원한 목소리였다. 성우에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그가 자신의 제안을 승낙했다는 것이다. “그럼 시작할까요.” 성우는 말을 꺼냄과 동시에 트렁크를 내려두고 품 안에서 목곽하나를 꺼냈다. 유철산은 그 목곽 속에 들어있는 것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설마··· 그건 통기경이 아닌가?” “네, 맞습니다.” “괴이하군. 회의사에게 들어서 알고는 있는데··· 싸움하고는 전혀 상관없는 약이 아닌가?” 통기경通奇經은 원래 육체적으로 제한이 걸려있는 모든 신경을 한 순간에 완전히 열어버리는 비약이다. 제한이 걸려있는 신경을 연다는 것은 그 의미처럼 시원하고 좋은 것은 아니었다. 무엇이든 도가 지나치면 안 하는 것보다 나쁘다. 신경의 제한이 모두 풀려버리면 몸은 자그마한 접촉에도 큰 고통을 느끼는, 굉장히 민감한 체질로 변해버리고 만다. 일순간 한 번 느껴야 할 감각을 빠르기 그지없는 정보전달 속도 때문에 수십, 수백 번을 다시 느끼고 그것이 한순간에 몰려오기 때문에 큰 고통으로 느끼는 것이다. 한마디로 통기경은 육체의 반응을 최고조로 끌어올리지만 그 역으로 통증에 수십에서 수백 배 정도로 반응하게 되는 것이다. “그걸 먹을 셈은 아닐 것이고···. 설마 내게 그것을 먹일 셈인가?” 소름끼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통기경으로 사람을 고문한 사람을 본 적 있다는 회의사의 지나가는 말을 들은 적 있었다. 그 말에 따르면 고통에 몸부림치고 목이 쉴 정도로 비명을 지르다가 끝내는 벙어리가 된 채로 미쳐버리는 게 기본이었다. 그 어떠한 고수도 피할 수 없는 고통이라는 소리에 그렇게 꼴사납게 고통스러워하느니 차라리 자결하는 게 속 편하겠다고 속으로 생각한 적도 있었다. 성우는 멀뚱하게 유철산을 쳐다보았다. “왜요? 아깝게 시리.” 그렇게 말하더니 통기경 하나를 집어 선뜻 자기의 입으로 털어 넣는 거였다. 망설임 없는 그 모습에 유철산은 성우가 들고 있는 약이 정말 통기경인가 하고 의심했다. 하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저렇게 칙칙한 적금빛을 내뿜는 단환은 그가 생각하기로 통기경 밖에 없었다. 단환의 빛깔은 약재의 혼합에 의해서 이뤄지기 때문에 부자연스러운 색상이 나올 수 없었다. 게다가 그 자신이 통기경이라 하지 않았나? ‘그렇다면 왜 복용한 거지?’ 독보다 더 독 같은 약을 싸움을 앞두고 복용한 성우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성우는 목구멍을 타고 넘어간 통기경이 완전히 용해되며 약기운이 순식간에 전신으로 퍼져가는 것을 느꼈다. 서서히 신경이 열리며 피부로 느껴지는 감각이 확장되었다. ‘이거 대단하군.’ 약효가 순식간에 퍼진 것도 놀라웠지만 무엇보다 놀란 것 단순히 바람이 스쳤을 뿐인데 둔기로 얻어맞은 듯 고통스러웠기 때문이다. 성우는 눈을 감았다. 피부를 통해 5미터 안에 존재하는 모든 바람의 흐름조차 읽을 수 있을 정도로 육체는 민감해졌다. 팔을 들어 올린다는 생각을 함과 동시에 이미 팔은 올라가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올린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빠른 반응이었다. 역시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아프다.’ 통기경이 유명하지만 잘 쓰이지 않는 이유가 되는 부작용은 너무나 빠르고, 갑작스럽게 닥쳐왔다. 대비를 했지만 그것과는 전혀 상관없는 충격이 전신을 울렸다. 사실 근육이 움직였을 뿐이다. 심장이 뛰었을 뿐이다. 뼈마디가 마찰했을 뿐이다. 그런데도 입을 한껏 크게 벌리고 목젖을 괴롭히고 싶어졌다. 힘껏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비명으로 고통을 내보내고자 했다. 하지만 때가 아니었다. ‘심하군.’ 몸의 점검은 그 정도로 끝내야 했다. 유라가 짜낸 이론이 맞던지 틀리던지 어서 이 상태에서 벗어나야 했다. 성우는 천천히 생명줄을 입에서 때었다. 천천히 움직였을 뿐인데도 전신이 비명을 질렀다. “미리 말하자면, 이건 문주님에게는 그냥 가벼운 내기일 뿐이지만 저에게는 도박과 도박이 겹친 확률 최저의 배팅입니다.” 생명줄을 손에서 놓았다. 생명줄이 땅바닥에 떨어져 구르다가 트렁크에 막혀 멈췄다. 심호흡을 한다. 하나 둘. 단지 그뿐인데도 비강鼻腔과 목이 비명을 지르고 공기가 고양이 발톱처럼 폐를 긁는다. 그럼에도 정신은 점점 안정화되고 있었다. “그럼 가도 되는가?” 유철산이 말을 걸어왔다. ‘안 돼. 아직은 아냐.’ 아직 움직일 수 없었다. 조금만 움직여도 고통에 탈진할 것 같은 상황이었다. 그러나 더 이상 시간을 끌면 오히려 상대가 의심할 것이다. 의심이 확신이 되는 순간, 그는 적극적으로 공격하여 쉽게 승리를 취할 것이다. ‘운에 맞길 수밖에 없나.’ 움직이기 시작한다. 유철산이, 주변의 기류가, 자신의 내부가. 한 번 움직이기 시작한 유철산의 걸음은 장중하게 느껴졌다. 가벼운 바람도 망치로 느껴질 지경이니 단지 걸음 하나에 그렇게 느껴지는 것도 결코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것을 감안하더라도 유철산의 한 걸음 한 걸음은 결코 평범하게 볼만한 것이 아니었다. 그 한 걸음이 자신의 미래를 결정하는 기준이었다. 그와 떨어진 거리가 좁아질수록 자신의 미래는 자신의 것이 아니게 된다. ‘이제 40초, 제길··· 왜 이리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거야? ···느려?’ 성우는 황급히 자신의 몸 상태를 점검했다. 눈으로 살펴본 게 아니라 감각으로 상태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성우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기다리던 증상이 다가오는 것이었다. 세계가··· 느려지기 시작했다. 마혈균의 부작용이 나타난 것이었다. 생명줄을 입에서 땐 이상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러나 두려워하거나 하는 것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이론적인 것이지만 마혈균의 부작용 중 하나인 청각, 시각, 후각을 제외한 세계가 느려지는 현상과 부서질 듯한 아픔은 뇌의 혈류가 빨라짐과 동시에 뇌파의 수십 배로 가속되고 그 가속된 뇌파를 머리 부분을 제외한 전신의 신경이 받아들이지 못한 반동으로 일어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전신의 신경이 가속된 뇌파를 받아들일 수 있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간단한 이론이었다. 그러나 둘 중 어느 하나의 분량이 부족하거나 더 많다면 어느 쪽이 됐든 목숨이 위태로운 위험한 이론이기도 했다. 하지만 위험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통기경의 분량과 마혈균의 농도에 대한 계산이 바탕이 된 뒤 이뤄져야 하는 이론인데, 마혈균의 농도는 몰라도 통기경의 분량은 재어본 적이 없었다. 통기경은 아까 전에 받은 것이고, 그에 대해 취한 행동은 받았을 때 한 번, 그리고 지금 한 번 열어본 것뿐이다. 그것도 모자라 열자마자 바로 먹어버리지 않았는가. 성우가 취한 행동은 분명 확률 엄청 나쁜 도박이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본인은 조금 흥분했을 뿐, 태연한 기색을 내보이고 있었다. 이미 천운이라면 천운이었다. 유철산을 만나면서 시작된 흥분이 성우의 뇌의 혈류와 뇌파를 가속시키면서 몸을 움직일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에 맞춰준 것이다. 성우는 점점 몸이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통증도 점점 사라져갔다. 생각대로 움직일 수 있었다. 몸을 움직이는 것이 조금 갑갑하고 괴롭긴 하지만 움직이는데 불편함은 사라졌고 오히려 활기가 넘쳐흘렀다. ‘넘쳐흐르는 것인지 새하얗게 불태워지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운은··· 좋은 건가?’ 그 생각을 함과 동시에 성우는 몸을 숙여 유철산의 일수를 피했고 반사적으로 다리를 걸었다. 유철산의 예정된 공격은 슬로우 모션처럼 느리게만 보였다. 그리고 그에 반응한 몸 역시 굉장히 빠르게 움직여 턱 두 치 앞 근처까지 온 장저掌低를 피함에도 모자라 진각을 이룬 오른 발을 걸기까지 했다. 유철산은 놀랐다. 아무리 전력을 다하지 않았어도 가까이까지 다가간 자신의 일장을 피함과 동시에 유효한 반격까지 한 것이다.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없을까. 게다가 발을 채찍처럼 휘두르는데, 그 속도는 알고 있어도 피하기 힘들 정도로 빨랐다. 팍! “큭!” 신음을 흘렸다. 그런데 이상했다. 공격한 사람은 성우인데, 신음 역시 성우가 흘리고 있었던 것이다. ‘제길, 뭐가 이리 단단해!’ 현실에서였다면 유철산을 무쇠인간 마징가 제트에 비견될만한 강철의 사이보그로 착각했을 정도로 단단했다. 하지만 수련으로 조금 뻣뻣해졌을 뿐인 살가죽 안에는 근육과 뼈 등, 인간을 이루는 기본물질 이외에 더 들어있는 건 없었다. ‘경··· 이라는 건가?’ 인간의 능력을 초월시켜주는 힘. 유철산이 가질 만하고 성우가 경험한 힘은 그것밖에 없었다. 성우 역시 경을 익힐 생각을 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경이라는 걸 익히는데 많은 시간이 든다는 유라의 말을 듣고 포기한 상태였다. 이곳 사람들의 시간으로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는 않겠지만 이곳 사람이 아닌 성우에게는 당장이 급한 문제였다. “경을 익히진 않았군. 그런데 어떻게 그런 속도로 움직일 수 있는 거지?” 유철산은 유철산 나름대로 성우가 가진 힘에 궁금함을 표했다. 극도로 경을 단련한 사람에게는 감경感勁이라는 능력이 따라온다. 즉, 경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고, 상대방이 특수한 무언가를 익히지 않는 한 이 능력은 상대방의 경의 수준을 파악한다. 성우의 경력勁力은 지검문의 최하급 제자조차 따라오지 못할 정도였다. 즉, 경을 단련한 적이 거의, 아니 아예 없는 사람이라는 소리였다. 그런데도 자신의 반응속도를 능가할 정도로 움직이게 해준다. ‘통기경을 먹었기 때문인가? 그런데 멀쩡하지 않은가.’ 유철산은 고개를 흔들며 생각을 털었다. “과연 연금술사로군. 정말 신비해.” 연금술사는 사람마다 각자의 특성이 있었고 그 특성이 수천수만 가지라, 비전문가들은 신비하다는 한 마디로 평가를 일축시킨다. 성우로서는 맘에 들지 않는 평가다. 좋던 싫던 자신은 목숨을 걸었다. 목숨을 걸고 만든 몸 상태가 신비 정도의 형편 좋은 단어로 포장되면 기분이 좋을까? 안 좋다. 그 결과 대답을 기다리는 유철산에게 돌아온 것은 땅바닥을 스치며 들어오는 스매쉬였다. 성우는 정말 갑작스레 다가왔다. 준비동작도 없었다. 가히 예상치 못한 각도로 날카롭게 들어오는 그 일권은 유철산의 턱을 노리고 있었다. 성우의 일권이 내는 속도 역시 유철산의 반응속도를 능가하고 있었다. 그러나 유철산이 고수란 칭호를 얻어내기까지 한 수련은 결코 장난이 아니었다. 유철산의 몸은 유철산이 위험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것보다 훨씬 빠르게 반응했다. 자세를 낮추고 성우의 어깨에 손을 가져다댄다. ‘뭐야?’ 그것만으로도 어처구니없게 스매쉬가 파훼되었다. 몸 전체를 휘돌려서 내는 펀치이니 만큼 몸이 전진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는 것이다. 그 순간, 어깨에서 강렬한 통증이 일어나 모든 신경을 타고 몸 안으로 파고들었다. 숨이 막히긴 했지만 어느 정도 참을 수 있었다. ‘발경?’ 생각과 동시에 성우는 양발을 체조선수 준비운동 하듯 양 다리를 최대한 벌려 자세를 낮추고 브레이킹 댄스를 하듯 팔을 축으로 삼고 다리를 휘둘렀다. 매우 빠른 공수전환에 유철산은 반응할 틈도 없이 왼쪽다리로 타격을 받았지만 굳건하게 버텼다. 더욱이 상대의 공격에 접촉한 부위를 통해 경을 집중시켜 오히려 타격을 입혔다. 성우는 화끈한 기운이 다리를 통해 넘실대는 것을 느꼈다. 방금 전과 같은 종류의 기운이었다. ‘아직 참을 수 있어!’ 호흡이 조금 비정상적이 될 뿐이지 고통은 그리 크지 않았다. 몸을 튕겨 일으켜 세움과 동시에 몸을 휘돌리며 팔꿈치로 유철산의 옆구리를 가격했다. 하지만 동작 자체가 크고 이번에는 유철산이 미리부터 공격을 대비했던 터라 반응을 허락하고 말았다. 유철산은 자신이 아는 절기 중 가장 동작이 짧은 무번장無飜掌의 일수로 성우의 동작을 끊었다. “크윽.” 성우는 짧은 신음과 함께 내리 2미터를 튕겨져 나갔다. 이 역시 동작은 짧지만 그 나름의 발경의 진수가 담겨있기에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런··· 맞아버린 건가.” 유철산은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일장을 정통으로 맞은 성우가 태연하게 중얼거림과 동시에 일어나는 광경이 눈 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물론 그 현실을 믿기 힘들어서 눈을 크게라도 뜬 것이고. 유철산에게는 안타깝게도 그 현실은 진실이었다. 성우는 유철산에 일장에 맞음과 동시에 몸을 최대한 뒤로 빼 충격을 해소했다. 하지만 겨우 그것만으로 무번장에 담긴 경력이 파훼될리는 만무했다. 어느 한 순간, 몸에 잔류하고 있던 유철산의 발경이 성우의 생각에 따라 타격부위에 집중되는 것을 느꼈다. 마치 예방주사와 같은 효과를 발휘한 것이다. 물론 방어수단으로 넣다시피 한 경력이 공격수단으로써의 경력을 모두 막을 수는 없었지만 같은 종류의 두 기운의 충돌로서 대부분의 기운이 흩어졌기 때문에 치명상은 면할 수 있었다. 덕분에 호흡은 조금 괴롭긴 하지만 통증은 없었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화끈거림을 경력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게 어째서 자신의 생각대로 움직인 것인가? 조금만 더 생각하면 무언가 떠오를 것만 같았다. 그러나 유철산은 기다리지 않았다. 아까부터 떠오르는 불안감이 공격을 재촉했다. 무번장이 은밀하면서도 날카롭게 뻗어왔다. 성우의 몸은 무번장이 만들어낸 기류를 느끼고 이미 그 공격을 피하고 있었다. 하지만 피한 곳 역시 막대한 경력이 덮치고 있었다. 허공중에 마치 물결이 퍼지듯 날아오는 날카로운 기운은 장력 같은 것과는 전혀 다른 경력이었다. 이런 형태의 경은 전에도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녹안검사가 유라에게 펼치던 바로 그것이었다. ‘너구리 같으니라고!’ 검 대신 수도를 펼쳐 쓴 것이지만 그와 같은 고수가 쓴 것이라 위력에는 별로 차이가 없을 것이다. 피하지 못할 것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피하라고 쓴 기술 같았다. 허벅지 높이로 다가오는 그 경력은 오직 림보를 하듯 몸을 숙이던가, 점프해서 피하는 수밖에 없었다. ‘약점을 안 것인가?’ 두 자세 모두 신경발달과 반응속도 가속능력에 상관없이 움직이는데 속도가 안 붙는 자세였다. ‘역시 운에 맡겨야 되는 건가. 오늘 자체에 배팅을 거는 셈이 되는군!’ 성우는 약 1미터 높이로 몸을 띄우고 감각을 최대한 활성화시켰다. 체공시간이 엄청나게 길게만 느껴진다. 세상이 느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흥분도가 최고조로 오르면서 뇌파가 더욱 가속된 것이다. 머리가 욱씬거리는 게 위험수위까지 오른 것 같았다. ‘이름하여 성우 인생의 막바지~ 라고 하는 순간인가?!’ 장난처럼 생각하는 거지만 정말 내부이건 외부이건 위험하다는 건 똑같다. 느리게 다가오는 유철산이 보였다. 그의 손에서 잔뜩 휘몰아치는 기류 역시 똑똑히 보였다. 성우의 발이 땅에 닿기 바로 전, 그의 허리가 돌아가며 2회전 돌려차기가 마지막 발악처럼 유철산을 향해 날았다. ‘그래봤자 공중공격은 제한된 움직임이다.’ 유철산은 혼신의 공격을 너무나 가볍게 흘려냄과 동시에 성우의 복부를 향해 경을 집중한, 일장을 쏘았다. 쾅!! 가죽북이 터지는 소리, 성우의 내부에서 울린 그 소리와 함께 유철산의 막대한 경력이 성우의 전신을 향해 치달리고 각각의 기관을 망가트리기 시작했다. 성우의 신형은 유철산의 일격에 실 끊긴 연처럼 훨훨 날아갔다. 풍덩-! 강물에 빠진 성우의 신형은 한동안 떠오르지 않았다. “이런··· 너무 강했나?” 유철산은 죽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자신을 탓했다. 연금술사가 죽으면 연금술사의 비서 역시 물거품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생각과는 달리 성우의 정신은 그 어느 때보다 맑았다. ‘···그런 거였었구나.’ 머릿속을 지배하는 것은 몸 내부에 휘도는 에너지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몸속에 퍼지는 화끈거림이 경이라면 그 경은 무엇에 의해 움직인 것인가. 무엇을 타고 움직인 것인가? 유라의 설명에 의하면 경은 태어났을 때부터 사람의 몸속에 내재되는 삼차원적인 힘이라고 했다. 신체身體와 기력체氣力體가 각각 몸의 한 차원을 유지하고 있다면 경체勁體는 그것의 중간적인 힘으로 두 개의 힘을 순탄히 연결하고 보조하는 역할을 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자신에게도 있지 않을까. 그 경체라는 것이. 예전에 생각한 것이었고 유라에게도 긍정적인 답변을 얻어냈다. 물론 유라는 그가 다른 세계의 인물인 것은 생각조차 하지 않고 내뱉은 답변이었겠지만 희망은 있었다. 그리고 그 희망은 정답이었다. 내부에서 휘몰아치는 전혀 새로운, 그리고 너무나 친숙한 에너지덩어리는 신체의 각 기관을 파괴하던 유철산의 경력을 받아들이고 융화시켰으며 더불어 몸 밖으로 튕겨 내보냈다. 무심결에 화끈거리며 거슬러오던 유철산의 경력을 해소한 것처럼. 유철산에 비하면 너무나 미약한 경력을 보유한 경체지만, 성우의 몸에도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성우는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7미터 깊이의 강바닥까지 몸이 들어가 있었다. 성우는 몸 상태를 점검했다. 뇌의 가속은 더 이상 빨라지지 않았다. 장력을 받으면서 몸내부가 모두 흔들리는 타격을 입은 덕분에 뇌내腦內가속물질의 유입이 중단된 것 같았다. 몸은 전 신경이 열려있기에 고통스럽기 그지없었지만 고통을 받아들이는 뇌의 속도가 훨씬 더 빠르기에 통증조차 분할해서 받아들이는 덕분에 크게 아픔이 느껴지는 건 아니었다. 다만, 신체가 한계에 달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나타내는 괴로움만이 계속해서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그래도 아직은 견딜 만 했다. 잠자고 있던 경체가 깨어난 뒤로부터는 신체의 회복력도 빨라지고 있었다. 그러나 상대는 이런 경력을 자신보다 몇 배에서 수십 배 정도는 가지고 있을 유철산이다. ‘유라 씨가 빨리 오는 것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겠군.’ 성우는 강바닥을 박차고 수면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좀 더 쉬었으면 좋았겠지만 벌써 물속으로 들어 온지 3분이나 지났다. 산소부족으로 천당 가기 일보 직전이란 말이다. 유철산은 성우가 떠오르지 않자 확인하기 위해 물속에 뛰어들었다. 공교롭게도 성우가 수면에 올라올 때였다. 쿵-! 귀에 물이 들어간 성우는 머리가 크게 울리는 것을 느끼고 신음을 흘렸다. 무엇에 부딪쳤나 했더니 머리를 매만지고 있는 유철산이 눈에 띄었다. “흠, 다행히 죽지 않았군.” 황급히 매만지던 손을 때며 체면을 차리는 유철산이었지만 고통에 찡그려지는 얼굴을 어떻게 하지는 못한 것 같았다. 무심코 웃을 뻔했지만 좋은 것을 알았다. 아무리 유철산 같은 고수라도 대비하고 있지 않으면 경력의 발동은 없는 것이다. 공격의 수단이 되는 깨달음이 아니라 경체를 믿고 방어에 신경 쓰지 않으면 필히 당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성우는 뭍으로 나와 자세를 취했다. “그럼 2회전을 시작하겠습니까?” “응應하지!” 회의사가 손가락을 튕기자 매우 빠른 속도로 작은 불꽃이 일어나 유라를 덮쳐갔다. 유라는 잔상만이 지나갔음을 알릴 정도로 빠르게 손을 휘둘러 불꽃을 튕겨냈다. ‘방격부防擊符도 이제 한계인가.’ 유라의 손에는 부적하나가 쥐어져있었다. 지금까지 회의사의 모든 공격을 막아준 물건으로써 남부 연금술의 정화가 담겨 있었다. 이제 그것도 한계였다. 벌써 수십 차례 공방이 있었고 회의사의 공격 하나하나는 그 하나만으로써 치명적인 기운을 담고 있었다. 피할 수도 있지만 회의사의 공은 어염적화御炎積火의 성질, 즉 불꽃을 마음대로 컨트롤 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냥 피하기만 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모든 물리력을 방어할 수 있는 방격부로 막을 수밖에 없었다. 그게 한계에 달했으니 다른 자구책을 생각해봐야 한다. ‘우선 기회를 살려 공격부터 하고!’ 유라가 몸을 회전시키자 코트의 끝자락 뻣뻣하게 일어서며 일자로 휘날렸다. 회의사는 황급히 피했지만 조금 늦었는지 그의 짧지 않은 머리카락이 코트에 날카롭게 잘려나갔다. “축화畜火 염발炎髮!” 회의사가 낭랑하게 기합을 대신 사자성어를 외치자 회의사의 잘려나간 머리카락에서 불꽃이 일어나며 유라를 공격했다. 마침 회의사의 옆구리를 향해 연속적으로 회륜각廻輪脚을 날리던 유라는 그 불꽃을 보았다. 이대로 공격을 계속한다면 얼굴이 타버릴 지도 모른다. 피해야 했다. ‘하지만 상대는 그것을 노리고 있겠지요.’ 유라는 회륜각의 투로를 그대로 유지했고 불꽃은 그대로 그녀의 얼굴을 향해 날아들었다. 빠각. 유라의 발뒤꿈치가 단단한 무언가가 부러지는 것을 느끼고 회의사의 갈비뼈가 위치한 가슴팍에서 골절음이 일어났다. 회의사는 매우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고통으로 일그러지는 정도보다 놀라서 멍해져가는 얼굴은 그의 놀라움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케 하지만 정작 시선을 받은 유라는 회륜각을 성공시킴과 동시에 닥쳐오는 화염을 받아내고 있었다. 등으로! 정말 아슬아슬 순간에 회륜각의 반동을 이용하여 역회전 상승을 했던 것이다. 하지만 회의사에겐 피하지 않았다는 게 중요했다. 쾅! 망치로 후려친 것 같은 뜨거움이 등을 타고 달린다. 코트의 방열기능은 이미 한계에 도달해 코트의 원료와 함께 녹아버렸다. “크읍.” 유라를 목구멍을 타고 치밀어 오르는 피를 뱉어내며 몸을 일회전 시켜 불꽃이 준 충격파를 흘려보냈다. 회의사 역시 오른쪽 갈비뼈가 대부분 작살난 충격이 상당히 컸는지 비틀거리고 있었다. ‘한 번은······ 가능!’ 회의사의 왼쪽 팔 전부가 불타오른다. 그의 마지막 기술인 염왕익炎王翼이 일어나는 순간이었다. 염왕익의 화염은 팔부분을 넘어 심장까지 도달하려고 기를 쓰고 있었다. 하지만 심장까지 도달한다면 그는 단륜부로서 존재할 수 없어진다. 인간으로써의 기능을 전혀 못하게 된다는 소리다. 최대한 염왕익의 폭주를 막아가며 유라를 향해 손가락을 세웠다. 유라는 벌겋게 드러난 등을 보이고 있었다. 한참동안 피를 토하던 유라는 피의 색깔이 깨끗한 적색이 되자 몸을 일으켜 세웠다. “후우, 이거 참. 당분간 살인은 하기 싫었는데 말이죠.” 태연하게 그녀가 한숨을 쉬는 순간, 회의사는 염왕익의 폭주를 제어할 수 없었다. ‘으윽! 뭔가······!’ 자신의 공功이 유라가 내뿜고 있는 무언가에 영향을 받고 있었다. 회의사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 살리건 죽이건 이 염왕익을 빨리 사용해야 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역행자逆行者가 되어버린다!’ 염왕익이 펄럭이자 주변의 공기가 모두 태워지며 진공상태가 된다. 공기의 산소가 비명을 지르며 염왕익의 먹이가 되어갔다. 회의사가 유라를 향해 달렸다. 염왕익을 앞세우며 매우 빠른 속도로 달려드는 그는 이내 달리는 것을 멈췄다. 그러나 그의 전진이 멈춘 건 아니었다. 염왕익이 그의 신형을 끌고 가는 것이다! 유라는 회의사가 지척에 와서야 그의 공격에 반응했다. 한 줄의 문장으로써. “첫 번째 단어는··· 왜歪.” 화르르륵!! 그 순간, 회의사의 염왕익이 유라를 꿰뚫었다! 유라의 신형이 일그러지며 기화되어간다. 유라는 고통스러운 표정도 없이 소멸해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의 입은 계속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두 번째 단어는 경鏡.” 소멸해가는 그녀의 입이 또 하나의 문장을 뱉어내자 갑자기 염왕익을 꺼트리려고 하는 회의사의 주변에 또 하나의 유라가 나타났다! 하나 뿐만이 아니었다. 총 다섯! 회의사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설마··· 북부의 공포······?!!” 다섯 명의 유라는 각자의 에메랄드 빛 눈을 빛내며 한숨을 쉬었다. “중부의 사람들은 이야기를 많이 탐하네요.” 유라들이 긍정적인 답변을 보이자 회의사의 안색이 더 없이 창백해졌다. 회의사는 비명을 지르며 손을 휘둘렀다. 언제나 과묵하던 회의사였지만 북부의 공포, 라는 자 앞에 홀로 서서 과묵할 수 있진 않았다. 염왕익이 더욱 커져나가며 이윽고 심장에 도달하기까지 했지만 회의사는 멈추지 않았다. 염왕익의 불꽃이 지나갈 때마다 유라들은 사라져갔다. 그럼에도 유라들은 태평하게도 불꽃에 타 엉망이 된 코트 안쪽에서 부적하나와 비수 하나를 꺼내고 있었다. 유라들은 비수에 부적을 둘렀다. 그 순간, 유라들이 꺼지듯 사라졌고 회의사에게 5미터 떨어진 곳에서 단 하나의 유라가 나타났다. “첫 번째 단어는 인刃.” 유라가 들고 있는 비수에 기류가 몰려들었다. 기류는 검병에서부터 차곡차곡 검신을 쌓아갔다. 대략 폭이 4센티에 1미터 정도 길이의 검신. 수백 세제곱미터 단위의 기류가 칼날 하나로 압축되자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사실 기류 속에 조금씩이나마 섞여있는 빛의 입자가 대량으로 융합하거나 분열하거나 충돌하는 것뿐이었다. 회의사는 그 빛의 검을 보며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광인마탄光刃魔彈······!!” 회의사의 얼굴의 체념하는 빛이 지나갔고, 다시 결연한 빛이 떠올랐다. 그리고, 회의사는 염왕익을 앞세우며 돌진하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보다 빠르고 어느 순간보다 강렬하게 타오르는 그 불꽃은 유라의 연약한 몸으로 막기에는 불가능해보였다. 유라가 움직인다. 정면으로 산보를 하듯이 걸어간다. 그녀는 파리채를 휘두르듯 광검을 휘둘렀다. 화르르륵--! 유라와 회의사의 신형이 교차되었다! 조금 이상했다. 분명 회의사는 유라의 정면을 공격했는데 유라는 한참이나 옆에서 걷고 있는 것이다. --그(그녀)를 향한 모든 공격은 왜곡된다! 북부의 살아있는 전설이었다. 그리고 그 생각과 함께··· 염왕익에 먹혀 전신이 불타게 된 회의사의 신형은 형편없이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불꽃과 함께 수백조각이 되어······. 언제 배었는지 모르는 광검의 전설! 그 전설은 죽어서야 떠올릴 것이다. “미안해요, 이 빛을 본 자는 죽어야 하기 때문에······.” 정체를 숨기기 위해. 화르르르---! 유라는 재가 되어가는 회의사의 시체를 내려 보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뜨거운 불꽃 안에서도 타지 않는 원통이 보였다. 유라는 광인을 휘둘러 불꽃을 조각내고 원통을 잡았다. 조금 뜨겁긴 했지만 장갑을 끼고 있는 덕분에 화상 입을 걱정은 없었다. 어째서 원통에 눈이 간 것일까. 죽은 자의 물건은 손대지 않는 게 원칙이다. 그런 원칙을 무시해서라도 이 원통 속의 물건을 보고 싶었다. 나온 건 한 장의 그림이었다. “이건··· 짓궂은 인연이네요.” 자신의 미소가 그림에 보인다. 자신은 웃으려 해도 웃을 수가 없다. 이 그림을 그린 성우 역시 웃는 모습을 보고 그린 건 아니다. 그렇기에 이 그림은 거짓이다. 그러나 다시 버리고 싶진 않았다.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일그러트려본다. 이내 자신의 행태를 깨닫고 어색한 미소를 지웠다. 유라는 원통 속에 그림을 넣고 품속에 원통을 넣었다. “이렇게 되면 연습용으로 잘 쓰지요. 그럼 지검문주에게서 가방과 성우 씨를 구해볼까요?” 원통을 품에 넣고 달려가는 유라의 얼굴은 분명 미소를 짓고 있었다. 유철산이 한 번에 세 가지 기운을 발출했다. 너무 가볍게 다른 초식을 한 순간에 내쏜 그 행동은 애초에 한 초식인 것 같이 교묘하게 성우의 허점을 요구했고 교활한 뱀처럼 파고들었다. 성우는 전에 비해 별 다른 변화가 없는 반응속도로 교묘하게 피해냈다. 그러나 좀 전보다 훨씬 여유가 돋보였다. 땅에 발을 대고 일순간 탄력 있게 몸을 튕기며 낮게 유철산의 하체를 노렸다. 유철산은 새롭게 진각震脚을 밟으며 성우의 공격을 차단했으나 성우의 발은 어느 순간 있을 수 없는 각도로 꺾이며 유철산의 허리를 가격하고 있었다. 퍽-! 시원하게 울리는 타육음에 반해 성우의 표정과 유철산의 표정은 그리 많은 변화가 없었다. 유철산은 간지럽다는 듯 손을 털어냈고 성우는 다급하게 몸을 낮추며 날카롭게 뻗어 나오는 무번장의 장력을 피해냈다. 어느새 둘은 3미터라는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거리를 사이에 두고 있었다. “조금 강해졌군.” 유철산의 드문 칭찬에도 성우는 반응하지 않았다. 유철산의 눈꼬리가 조금 위로 올라갔다. 자존심을 건드린 것이다. 그러나 성우는 대답할 상황이 아니었다. 성우는 다시 새로운 느낌이 몸 안에서 꿈틀대는 것을 느꼈다. 경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런데, 뭔가 조금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다. 익숙하게 착 붙어오는 감각. 분명히 지금까지 자각하지 못했던 힘인데도, 거짓말처럼 쉽게 다룰 수 있었다. ‘음, 이런 감각 처음이지만 처음이 아닌 것 같은데··· 뭐였지.’ 그것은 너무나도 쉽게 떠오른 감각이었다. 마치 성우가 촉감을 떠올리며 책의 내용을 기억할 때의 감각처럼, 대뇌피질에서부터 쉽게 연상되었다. 인간의 생뇌生腦로 사이보그용 코어 컴퓨터를 다루게 만드는 나노머신 단말기의 흔적에서부터 발원한 정보다. 생뇌로 코어 컴퓨터를 다룰 때와 비슷한 감각이었다. 자신의 뇌로 자신의 몸이 아닌 동 떨어진 무언가를 움직일 때와 비슷하단 말이다. 오히려 더 쉬운 면이 많았다. 경체는 전선 하나로 연결되었던 코어컴퓨터에 비하면 자신의 몸에 가깝기 그지없었다. 코어컴퓨터로 1부터 100까지 등차순열 계산을 하는 것보다 경체를 움직이는 것이 훨씬 쉬웠다. 성우의 변화를 모를 유철산이 아니었다. 방금 전부터 성우의 단련되지 않은 경이 일정한 형태로 움직이는 게 자신의 감각에 잡혔다. 그는 매우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경을··· 다룰 수 있었나?” “다루게··· 되었습니다.” “되었다? 설마 이 싸움 중에 터득한 것이란 말인가?” “에에···· 아마도.” “믿을 것이라 생각하는가?” “그건 모르지만, 사실, 진실, 본질··· 모두에 거짓은 없으니까. 찔릴 건 없군요.” 외계의 생물을 보는 눈은 분명 지금의 유철산의 눈을 가리키는 관용어일 것이다. 누천의 무림역사를 뒤져봐도 단련되지 않은 경체로 어경에 달했다는 기록은 없었다. 자신이 제자를 가르칠 때도 경을 단련하지 않고 어경에 달할 수는 ‘절대로’ 없다, 라고 가르쳐왔다. 물론 그것은 수련을 재촉하기 위한 말일 뿐이었지만 분명 사실이자 진실이기도 했다. “과연 연금술사인가······.” 다행히(?) 그는 연금술사다. 이런 말도 되지 않는 일을 저지를 준비(?)는 그 명칭 하나로 다 되어있던 것이다. 연금술사의 신비로 치부해버리면 이 문제는 쉽게 해결되는 것이다. 아니, 연금술사의 신비여야 한다. 이런 신비는 지검문을 강화시킬 수 있었다. 경을 단련시키지 않은 사람이 어경의 경지에 닿을 정도라면 많은 수련을 거친 지검문도는? 연금술사의 비술을 거친다면 자신과 몇몇 문도 외에 쓰지 못했던 지검문의 비공秘功에 달할 수 있을 것이다. 유철산의 눈빛이 탐욕으로 타올랐다. “지금부터는 조금 다를 것이네.” 유철산은 반듯하게 손날을 펼쳤다. 성우는 그 동작 하나에 전신의 감각이 비명을 지르는 것을 느꼈다. ‘이건 위험하다!’ 어경을 체득한 후부터 유철산의 거대하기 짝이 없는 경체가 대략적으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태산 같이 굳건하던 유철산의 경체가 갑자기 크게 확장되며 거대한 바람 같은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 기세는 막을 수 없는 질풍처럼 빠르게 주변으로 퍼져나갔고 대지를 에워싸고 그 뒤를 따라오는 기운이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을 한정시켜버린다. 그것은 태풍과도 같다. 성우와 유철산의 사이는 오히려 고요했다. 그러나 이것이야 말로 태풍의 눈이라 할 수 있다. 마치 다른 세계가 된 듯한 착각이 일어났다. 숨 막힐 듯한 고요가 성우를 압박한다. 쿵쾅쿵쾅··· 멀리서 들려오는 것만 같은 심장소리가 음울한 오페라 곡의 북소리처럼 느껴졌다. 흥분이 싸늘하게 식는다. 주변의 산소가 모두 사라지고 오직 질소만이 남은 것 같을 정도였다. ‘죽을 지도 모른다.’ 오히려 살 것이다. 그러나 호흡을 억제하는 유철산의 괴롭힘은 죽음을 간접체험시켰다. 유철산의 손날이 일정한 흐름으로 움직인다. 유철산의 바람과 같은 경체는 더욱 빠르고 더욱 날카롭게 변화시킨다. 바람이 백업하는 24센티길이의 살덩어리는 날카롭게 벼려진 검. 그 이외는 아니었다. 비록 살덩어리긴 하지만, 검이라 칭해질만한 존재를 빼든 유철산은 무림에서 그를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별호, 지극검의 기품을 마음껏 내뿜고 있었다. 태산이 태풍이 된 순간. 성우의 승산은 제로가 되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였을까. 성우가 앞을 향하여 걷기 시작한 때는. 숨 막히는 고요가 지배하는 대지, 성우는 요령도 좋게 유철산을 향해 걷고 있었다. 후두둑, 후두둑- 물기가 가득한 풀이 성우의 발에 끌려왔다. 유철산은 그 모습을 보고도 별다른 반응 같은 건 없었다. 공을 사용하는 자신에게 똑바로 다가올 자가 무림에 별로 없다는 것도, 그게 상상을 초월하는 심력을 고갈시키는 것도, 모두 알고 있지만 신경 쓸 일은 아니다. 저것은 연금술사. 신비를 주무르는 사람들 중 하나다. 성우의 모든 행동은 신비일 뿐이다. 하지만 진실은 신비가 아니다. 짓누르는 압박에 경체는 물론이고 장기까지 수축收縮한다. 장기가 한데 뭉치고 자리를 이탈하며 주인의 호흡을 괴롭혔다. 모든 신경이 비명을 지르며 빨리 성우에게 기절하라고 투덜덴다. ‘할 수 있을 리가 있나. 이 썩을 놈의 몸아.’ 두 눈 멀쩡히 뜨고 노예생활하기는 싫다. 구속당하는 건 기계냄새 풀풀 나는 현실로 족했다. 남아일생男兒一生 열혈일도熱血一道. 언젠가 꿈꿨던 삶의 방식이다. 말 그대로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지금의 자신과 정 반대되는 삶을 그려본 적이 있었다. 소설 쓰는 재능이 없어서 결국엔 생각하는 것조차 포기했지만, 아마 지금 이 순간의 버들가지 같은 반항이 그에 가장 가까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뭐··· 아님 말고. 도핑으로 한계에 도달했던 신경은 마혈균과의 상승작용에 의해 한계를 초월했다. 이 순간이 지나면··· 죽을 지도 모른다. ‘그것도 나쁘진 않겠지.’ 검공이 유철산의 손안에서 펼쳐진다. 그 장면은 매우 느리게 다가왔고 또한 확실히 보였다. 그것은 환상. 지극히 폭력적인 그 기운은 믿을 수 없게도 성우의 감각을 뛰어 넘어 어느샌가, 천지사방을 가득 매우고 있었다. 환幻의 검공劒功. 인간을 초월하게 해주는 공이라는 존재를 성우가 처음으로 접하는 순간이었다. 그 순간, 믿을 수 없는 일이 또 벌어졌다. 유철산에 비하면 오직 백분의 일정도 밖에 되지 않은 경을 지닌 성우가 유철산의 검영을 피해내고 있었던 것이다. 이건 단호히 평가하자면 불가능한 일이다. 무림인 백 사람을 부여잡고 진실을 호소시켜도 백이면 백 불가능하다는 말을 할 것이다. 이미 펼쳐진 유철산의 검공은··· 막을 수는 있어도 피할 수는 없다. 이건 사실을 넘어 상식으로 자리 잡은, 일종 살아있는 전설이었다. 상식을 위배하든 어쨌든, 성우는 피하고 있다. 그것도 확실히 검로를 느끼고, 읽어내면서 피한다. 뇌는 민활히 정보를 받아들이고 계산하며 가장 알맞은 움직임을 근육에 요구하고 근육은 비명을 지르면서도 훌륭하게 몸을 움직이고 있다. 성우의 IQ는 별로 높지 않다. 한 125정도로 조금 똑똑한 편이다. 그것이 외할아버지의 훈련을 거치면서 쓸데없는 생각에 활용되는 공간을 절약시켜 고효율의 두뇌가 되었다. 그래도 내노라하는 천재들보다는 떨어지는 머리다. 그런데 그런 천재들에게 유철산의 검로를 계산하라하면 할 수 있을까? 못한다. 투지나 계산이 불가능한 변수는 차치하고. 성우가 계산할 수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천재들의 ‘초당, IQ단위’의 효율이 성우에겐 ‘초당, IQ단위 곱하기 수십’이라는 계산이다. 뇌의 움직임은 이미 인간의 한계점을 돌파한지 오래였다. 인간을 초월한 것을 공功의 기준으로 본다면, 이것 역시 공이라 할 만하지 않을까? ‘세상은 느려 보인다.’ 머리는 두들겨 맞은 듯 아프다. ‘검로가 눈에 들어온다.’ 붉고 흐리게 보이는 게 혈관과 눈물샘이 터진 것 같다. ‘빈틈인가.’ 총 148검. 149번째 검을 피할 때, 놀랐다는 유철산의 얼굴과 함께 물샐틈없는 검로에 빈틈이 보였다. 피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왜냐하면 피할 자리까지 미리 검로로 덮는 검공이니까. 그러나 피했다. 단 3초간에 뿌린 모든 검로 중 성우의 몸을 포함하는 건, 겨우 4개, 그것도 모두 스친 것일 뿐이다. 우득우득우득. 관절이 뒤틀리는 소리가 들린다. 유철산 자신의 것이 아닌 성우의 것이다. ‘무엇이 이 청년을 이토록 뜨겁게 만드는가?’ 유철산은 자신의 왼쪽 가슴을 가격하는 성우의 주먹을 보며 생각했다. 주변을 메우던 고요한 압기壓氣는 이미 씻은 듯 사라져있었다. 신기루처럼 수많은 환상을 만들며 내달리던 검로도 마찬가지였다. 성우는 피투성이가 된 채 서 있었다. 그 앞에 유철산이 조금 먼지에 더러워진 채 서 있었다. 성우의 주먹이 유철산의 왼쪽 가슴에서 떨어졌다. 동시에. 유철산의 수도가 성우의 왼쪽 옆구리에서 빠져나왔다. 피시이이이이-- 핏줄기가 분수처럼 솟았다. “오류··· 였군요.” 성우는 비틀거리면서 물러섰다. 전신의 근골과 신경이 뒤엉켜서 고통의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단 3초였지만 단련이 덜된 몸으로 한계를 몇 백 번이나 넘었다. 서 있는 것만 해도 기적이었다. 그런 고생을 하면서 꽂아 넣은 스트레이트마저, 아주 간단한 오류 하나에 헛고생이 되고 말았다. 검의 간격. 성우의 눈에는 유철산의 수도가 90센티미터의 장검으로 보였던 것이다. 그 길이를 봤을 때, 분명 빈틈이었다. 하지만 유철산은 검을 들고 있지 않았다. 24센티미터의 수도手刀는 간격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것이 지극검의 검공이 가지는 위력이었다. 상대가 환상을 보게 될 정도의 검공이다. “웩!” 성우는 피를 토하고 주저앉았다. 살점이 토해낸 피에 섞여 중상이라고 토로했다. “내기는 내가 이긴 건가.” “후후후, 과연 그럴까요.” 성우는 확정된 패배와 고통 속에서도 웃고 있었다. 유철산은 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 ‘이해할 필요도 없겠지. 처음부터 끝까지 신비로 둘러싸인 청년이니 말이야.’ 유철산은 고개를 흔들며 손을 들어올렸다. 성우를 기절시켜 편하게 해주기 위해서였다. “그 손··· 내려놓길 바래요.” 유철산의 등뒤에서 너무 맑아 오히려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불에 여기저기 탄 코트를 걸친 소녀가 비수를 든 채 싸늘한 표정으로 유철산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녀의 말은 예를 차리고 있지만 실은 짙은 살기를 담고 있었다. 마치 살예殺藝의 본질을 담은 듯한 음성이었다. 결코 몇 명 죽여서는 닿을 수 없는 그것에··· 소녀는 닿아있었다. ‘위험한···.’ 소녀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결코 경시할 수 없는 기운이 소녀에게서 넘실거리고 있다. 이렇게 되면 내려놓고 싶어도 내려놓을 수 없었다. 움직이기만 해도 소녀에게 당할 것 같은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신체를 덮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두 노소는 서로를 견제하고 있었다. 의외로 이 상황은 쉽게 해결되었다. “제가 이겼군요.” 고통에 신음하면서도 의연한 표정으로 성우가 일어난 것이다. “······그렇군.” 성우가 호흡을 고르며 다시 말했다. “그럼 가주시겠습니까? 그리고 절대 쫓지 말아주세요.” “······!!” “남아의 일언은 수만금의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배웠습니다. 설마 두 말 하진 않겠죠.” 유철산은 손을 내리고 침묵했다. 유라는 유철산의 행동을 감시하며 최악의 사태를 대비했다. 유철산은 갑자기 품안에서 곱게 접어진 그림 한 장을 꺼내 펼쳤다. 예의 유철산의 모습이 담긴 초상화였다. “자네의 이름을 적어주겠나.” “······.” “그냥 기념하고 싶을 뿐일세. 그림과 이 황당한 내기를 말이야.” 그의 말투는 성우를 손님으로써 만났을 때의 그것이었다. 성우는 한참을 외계생명체를 본 것 같은 표정으로 있다가 결국엔 입을 열었다. “사인은··· 서툽니다만.” 성우가 필기구가 없어 대신 자신의 피로 사인했다. 오히려 유철산은 더욱 기억에 남을 거라며 좋아했다. “행로에 행운이 있길 바라지.” 유철산은 그림을 품에 넣자마자 그의 애조, 비조영과 함께 한 가닥의 회오리바람을 남기고 사라졌다. 성우의 몸은 유철산이 사라지는 순간 기울어졌다. 긴장이 풀린 것이다. “성우 씨!” 유라가 얼른 부축했으나 성우는 발을 새롭게 내딛으며 스스로 몸을 가눴다. “걱정을 끼쳤습니다. 여러 가지로······ 죄송하군요,” 성우의 왼쪽 어깨는 축 늘어져 있었다. 근육과 뼈, 신경. 모두 꼬이고 풀리는 것을 반복해 기능을 상실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폐인廢人. 성우의 몸은 폐인이다. 그런 몸을 움직이는 것은 다른 무림인들에 비하면 희미하기 짝이 없는 경체였다. 흠잡을 데 없는 완벽한 경의 컨트롤로 고통의 전달을 차단하고 근육의 방향과 관계없이 힘을 전달했다. 그러함으로 조금 절뚝일 뿐 무리 없이 걸었다. 경체가 보조를 넘어 아예 육체를 대신하는 것이다. 그런 성우를 유라는 경이의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처음 봤을 때도 그러했지만 이 사람은 연금술사의 눈으로도 신비했다. 힘들게 걸었던 성우는 유라의 가방 위에 엉덩이를 걸쳤다. 한동안 성우는 말이 없는 유라를 쳐다보고 멍한 웃음을 띠웠다. 평소의 그 웃음이었다. 그것만으로 유라는 안심이 되는 것 같았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성우는 유라의 가방 옆에 떨어진 생명줄을 쥐고 입에 물었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유라 씨.” “예, 무슨 다른 할 말이 있나요? 빨리 해주세요. 늦지 않게 배편을 타야하기 때문에······.” 짐짓 쌀쌀 맞게 말한다. 평소의 유라가 아니라는 것을 성우는 쉽게 알아챘다. 미안할 뿐이다. “뒤를 부탁해요.” 그는 밑도 끝도 없이 말하고는 숨을 들이켜 생명줄을 불었다. “무슨······?!” 생명줄이 로렐라이의 음색을 타고 허공에 퍼졌다. 그 순간, 음색에 담겨진 유라가 베푼 생명줄의 주술에 마혈균의 가속물질이 급속도로 숨어들었고 성우의 뇌는 원상태에 가까워졌다. 그 순간, 몸 전체의 감각을 제때에 받아들이지 못한 뇌는 일순간에 큰 고통을 성우에게 주었고, 그는 암공暗空을 찢는 비명과 함께 그대로 기절했다. “성우 씨!” 암공 위로 유라의 비명이 뒤따랐다. 유철산의 새, 비조영은 유철산의 명령에 따라 형천 서쪽에 위치해 있는 인망산人忘山 공동묘지에 내려섰다. 다른 이유가 아니라 마침 그곳을 넘어가는 일단一團의 사람들이 보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지검문의 문도로써 한참 유라와 성우를 찾던 자신의 아들을 포함한 상급제자들이었다. 그들은 비조영이 천천히 내려서자마자 한쪽 무릎을 꿇으며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았다. “문주님께 례禮를 올리옵니다!” 유철산은 고개를 끄덕이며 제응의 등에서 내려왔다. 아들인 유황천이 예를 풀며 물음을 구했다. 당연하지만 례를 풀라는 말은 없었기에 다른 제자들은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런 곳에 어찌된 일이십니까?” “놀러왔다.” “·······.” “물론 농담이다.” “아, 아버님, 그래도 문주잖습니까. 위신을 세우는 데 농담 같은 건 그만두는 게······.” 유황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유철산이 말을 이었다. “어떤 빌어먹을 아들놈이 이기고 있는 장기판을 단지 몇 문장만으로 태워버렸기에 장기판 좀 사러왔다. 근데 ‘그래도’는 뭐냐?” 유황천은 아무 말도 못하고 고개를 파묻었다. 그의 민감한 귀는 뒤에 부복하고 있는 수하들의 히히덕거리는 웃음소리를 포착했다. ‘이 자식들이···? 두고 보자.’ “뭐, 그런 건 이제 되었고, 문門으로 돌아간다. 추적은 그만둔다.” “에?” 자신이 잘못 들은 게 아닌가, 하고 유황천이 반문했다. 아버지 유철산이 어떤 사람인가, 한 번 결정한 일이 있으면 목에 칼이 들어와도 번복하지 않을 사람이었다. 일종의 도박사 성향까지 가지고 있어서 그게 비록 잘못된 일이라도 결정하면 몸을 빼지 않는 사람이었다. 유황천은 머리신경이 타버릴 정도로 혼란스러웠다. 평소의 아버지로는 절대로 나올 수 없는 말이 50년의 세월을 같이 해온 아들로써는 다시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다. 그의 혼란은 거의 심마 급에 가까웠다. 50년 동안 쌓이고 쌓인 다음, 종내에는 한자루의 검처럼 벼려진 고정관념은 지금 유철산이 뱉어낸 말을 거부하고 있었다. 그는 이내 강렬한 안광을 내뿜으며 자신의 1.3미터 길이의 강철대검을 뽑아들었다. “그래! 아버지가 아닌 것이다!” 물론 그 말을 내뱉은 순간, 성우와의 일전에서부터 잔류殘留하고 있던 공功의 기운을 담은 쾌속한 일수로 가죽북 소리 나게 맞아 3여미터를 날아간 다음, 맹렬한 구타가 이뤄졌다. 유황천은 검을 쥔 채, 그대로 내뻗었다. 그 때 지검문도들은 한마음으로 생각했다. ‘저건(?) 분명 문주다!’ “저런 녀석을 아들놈이라고 키워왔다니, 자식 농사 잘못해도 한참을 잘못했군.” 유철산은 추적의 계기를 만들어낸 막내아들과 후에 가문을 이끌어가야 할 장남의 꼬락서니를 번갈아 떠올리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돌아간다!” 그 때 송구스럽다는 듯, 한 사내가 고개를 더욱 숙이며 말했다. “이사형과 여사형이 행방불명입니다.” “그들은 내버려둬라. 어차피 윤강이 녀석의 악운으로 멋대로 경험을 쌓다가 살아서 돌아오겠지. 죽으면··· 그게 그 녀석들 명운命運인 거고.” ‘확실히 문주님이다!’ 뭉쳐진 한마음은 또 다시 같은 대답을 냈다. 그 때 또 한 사내가 말문을 열었다. “저기······.” “뭐야?” 유철산이 계속해서 이어지는 질문에 짜증을 내자, 그 사내는 고개를 숙이다 못해 땅에 대며 말했다. “문주님··· 코에서 피가······.” 유철산은 그때서야 입가의 수염을 타고 흐르는 피의 존재를 깨달았다. 경체의 도움을 받아 코피를 멈췄다. 그리고 코피의 원인을 알아보던 중 크게 대소를 터트렸다. 난데없이 유철산이 웃자 지검문도들은 영문을 몰라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때 한마음은 이런 말을 내뱉었다. ‘저 사람··· 문주 맞아?’ 한참을 웃던 유철산은 지검문도들에게 복귀명령을 내렸다. 유철산은 지검문도들이 사라지자 유황천을 자신의 애조에 짐짝 걸치듯 걸쳐 놓았다. 비조영의 짐칸에 들어있는 호리병의 마개를 열어 내용물을 한모금 마시고 유황천을 보았다. ‘비교가 되는군.’ 문주의 위엄을 해칠 뻔한, 코피의 원인이 된 사람과 아들놈을 비교해본다. 분명히 닿지 않았다고 느꼈는데, 심장에 알게 모르게 타격을 줬던 것이다. 그게 공의 여력이 사라지자 발동했고 빨라진 심장박동에 대비하지 못한 혈관의 일부가 터져버린 것이다. 그의 경체의 양이 공을 이룰 정도가 되지 못했다면 위험했을 타격이었다. 현재의 유철산에게는 가벼울 뿐이었지만 일격을 먹었다는 의미 자체가 중요했다. “연금술사인가··· 생각보다 그리 속편한 족속들은 아니었나보군.” 유철산이 비조영의 등에 올라탔다. 비조영이 다시 어두운 하늘을 날았다. 유라는 다시 적엽상의 문을 두드렸다. 문이 열리고 피곤한 얼굴의 주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이고, 영업 끝났습··· 아니 아가씨가 아닌가. 무슨 용건인가? 아니, 우선 들어오시게.” 주인은 유라의 상태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보고 유라를 들여보내고 적엽상의 문을 잠갔다. 타버린 게 분명한 단면을 보여주는 코트, 누더기가 된 옷가지 안에 담겨진 살은 벌겋게 익어 괴사乖死하기 일보직전이었다. 연금술사인 유라에겐 그리 큰 상처는 되지 않겠지만 타이밍을 놓치면 연금술사의 비술로도 흔적이 남을 수도 있었다. 아무리 위험한 세계에서 산다고 해도 여자의 몸에 흔적이 남는 것은 마음에 큰 상처다. 그러나 유라 자신은 자신보다 성우의 상태를 봐달라고 했다. “나에겐 이 친구의 몸보다 아가씨의 몸이 더 중요하네. 아가씨 자신은 어떤가?” 유라는 싸늘하게 얼굴을 굳혔다. “나 역시 내 몸이 더 중요하죠. 하지만 일행은 눈 뜨고 죽게 내버려두는 것은 아무래도 기분 나쁜 일이죠.” “이 친구는 아무리 봐도 가망이 없어. 가망 없는 녀석보다야 충분히 살 수 있는 아가씨를 치료하는 게 장사꾼으로써도 내게 이익일세.” 그 대답에 유라는 웃었다. 비웃음이었다. 평소 타인에게는 보이지 않는 표정. 그 의미는 지대했다. 주인은 마음에 섬뜩한 칼날이 디밀어지는 것을 느꼈다. 심장박동이 빨라지는데, 몸은 갈수록 차가워졌다.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감히 소녀를 치료한다고 말하시는군요.” 그것은 소녀, 라는 겸양의 호칭을 쓰는 것과는 달리 너무도 오만한 말이었다. 평소의 유라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대사였다. 하지만 주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선 이쪽이 그녀의 본 모습인 것이다. 북부의 전설. ---한 손에는 술법으로 빛나는 남부를 담았고, 다른 한 손에는 격렬한 저주로 타오르는 북부를 담았다. 그 손들 만에도 감당할 자 몇 없는데, 그 몸은 뜨겁게 타오르는 생명을 다루는 중부를 가득 채우니 누가 감히 빛을 보고 살 수 있으리오? “아, 알았네. 성심성의껏 치료해보지. 그러나 그리 큰 기대는 버겁네.” “고맙군요. 그리고 안에 있는 옷들 좀 빌리지요.” 주인은 태연하게 얼굴에 무표정을 만들며 비밀방에 들어가는 유라의 뒷모습을 보고 한숨을 쉰 후, 침상 위에 눕혀져 있는 성우를 보았다. 살아있긴 하지만 이미 죽어 살덩어리로만 보이는 그것을 어떻게 치료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우우우, 그 놈의 불면증. 그냥 수면제 먹고 잠들었으면 좋았으련만. 약값 한 푼 아낀다는 생각에 재앙을 들여놓고 말았구나.” 차라리 푹 자버렸으면 유라에게 닦달당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고개를 흔들던 주인은 의례적으로 하는 진맥을 시도했다. 진맥 결과는 안 한 것보다 나았다. 진맥하기 전에는 ‘어쩌면’이라는 생각에 ‘절대’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치료할 수 있다, 가 절대 치료할 수 없다, 로 바뀌니 좋아질 리가 있나. 주인은 의료기구인 통심경通審鏡을 꺼냈다. 안경 크기를 하고 있는 이것은 중부연금연합에서 개발하고 남부연금연합에서 개량한 주술기구로써, 사용자가 원하는 환자의 몸 내부의 상태를 보여준다. 마치 현실의 X-ray와 초음파검시기에 가까운 효능이 있었던 것이다. 통심경을 통해서 본 성우의 몸은 더욱 더 그를 절망의 늪으로 빠트렸다. 혈관, 신경, 모두 말할 것도 없이 형편없이 꼬여있었기 때문이다. 시체 몇 십구를 해체하면서 휘파람까지 불던 주인에게도 징그럽기 그지 없는 상태였다. “도저히 손을 댈 수 없는 상태잖아.” 통심경에서 눈을 돌린 순간, 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눈을 돌리기 바로 전, 통심경 안에서 믿을 수 없는 변화가 보인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설마?’ 다시 통심경을 통해 성우의 몸상태를 본다. 그리고 그 순간, 주인의 얼굴은 자신도 모르는 놀라움으로 가득 찬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그런 상처가 워, 원상 복구되어가다니 무슨 말도 안 되는 조화인가!!’ 뼈가 천천히 돌아가고, 엉켜 붙었던 신경이 제멋대로 움직인다. 수없이 터져 걸레가 되었던 혈관은 제멋대로 살을 돋아내더니 자리를 착착 잡아갔다. 근육은 말할 것도 없었고, 심지어 피웅덩이가 되었던 내장조차 콩팥이라도 되었는지 피를 저절로 정제하더니 피를 심장으로 보내고 자신들은 제자리를 잡아갔다. 재생 수준을 넘어 시간을 역전하는 것 같았다. 그 놀라움이 얼마나 컸는지, 생각에서조차 말을 더듬었다. 그로부터 3시간. 유라는 만족스런 표정으로 적엽상을 나왔다. 그녀의 등에는 곤히 자고 있는 성우가 함께였다. 그리고 그녀의 등을 보는 주인의 눈빛은 아직도 의혹으로 가득 차 있었다. “괴물남녀인가.” 그들이 사라진 한참 뒤 식은땀을 닦으며 내뱉은 말이었다. ---------------------------------- 막간幕間 Deja vu 삐이이이이- 길게 이어지는 기계음에 눈을 뜬다. 어느 때보다 상쾌한 기분으로 일어났다. “아··· 슬립머신을 받았었지.” 경품으로 슬립머신이 당첨되었고 시험 삼아 이용했다는 것을 뒤늦게 떠올렸다. 앞으로 많이 이용해야겠다는 생각을 끝으로 슬립머신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켠다. 뜻밖에도 몸이 굳은 느낌은 없었다. 최신식 나노머신에 의한 마사지 기능이 달려있다는 소문이 사실이었던 것 같다. 샤워실로 들어가 샤워를 했다. 쏴아아아아-- 다리 사이로 떨어지는 물방울이 겹쳤다가 흩어진다. 무슨 기분이 들었는지, 물방울을 피해본다. 하지만 물방울이 떨어지는 속도는 사람의 반응속도보다 빨랐다. 애초에 물방울이 튀는 것 자체가 갑작스럽기 그지없어서 미리 대비하고 있어도 물로 범벅되기 일쑤였다. ‘불가능하잖아.’ 그런데 이상하다. 분명 이것보다 더 심한 것도 피해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더 틈이 없고 더욱 갑작스러우며 더욱 위험한. 그런 것을 피했다는 기억이 있다고 몸이 말하는 것 같았다. “자신도 모르는 꿈이라도 꿨던가?” 사람이 잠을 깨면 꿈의 기억이 대부분 소실된다고 한다. 소실된 기억 중에 피했을 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것도 결국엔 사람의 생각 속에서의 행동이라 몸이 반응하는 건 이상하다. ‘또 검사를 받아야 하나?’ 물기를 닦으면서 생각했다. 뭔가 이상했다. “또?” 또, 라는 말의 의미를 생각하지만 기억나지 않는다. 아니, 애초에 공백이 심하다. 어제는 무슨 일을 했었지? 오늘은 무엇을 해야 하는 거지? 어지럽다. 머리가 빙글빙글 도는 것 같다. 옷걸이에 준비된 옷을 입고 주방에 들어갔다. 거기에는 동생의 요리하고 있는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무심코 안심. 잔잔한 호수 같이 안정되는 머릿속. 더불어 맑은 정신이 되어 식탁에 몸을 의지했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언제부터 머리를 짧게 자른 거야?” 왠지 잘 기억나지 않지만 평소 동생의 머리카락은 등허리까지 내려오는 장발이었을 터였다. 죽어도 머리카락은 자르지 않겠다고 맹세까지 한 적은 없어도 꽤나 소중히 다뤘던 장발이었던 것 같았다. 이제 와서 신경 쓸 건 없겠지. “40년 전에요. 많이 울었죠. 아마.” 그런데 동생은 뜻밖의 대답을 했다. 농담하는 걸까? 웃으려 했다. 그러나 웃을 수 없었다. 뒤돌아보는 동생의 얼굴은 동생이 아닌, 다른 사람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동생의 이름도 잘 기억하지 못하는 지금에서는 오히려 선명하게 기억되는 이름의 소유자였다. “유···라 씨.” 유라는 빙긋 웃었다. 놀라웠다. 그렇게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에 놀랐고 그녀도 웃을 수 있다는 사실 자체에 놀랐다. 놀라움에 취해있을 동안 그녀가 조용히 웃는 낯으로 말했다. “이제 일어날 때도 된 것 같네요.” 그 순간, 집안이, 바닥이, 공기가, 주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흔들렸다. 균열이 달린다. 바닥, 벽, 온갖 앤티크 가구 할 것 없이 균열이 일어나 덩어리째로 나뉘며 사라져간다. 그리고 유라 씨의 얼굴 역시 금이 가고 무너졌다. 마치 큰 충격으로 석상이 부서지듯, 사라지는 유라 씨를 멍하니 보고만 있었다. 무너진 바닥에서부터 어둠이 튀어나왔다. 어둠은 아귀처럼 무너져가는 물건, 물건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파편을 탐욕스럽게 먹어치운다. 갑작스럽게 생각한 거지만 손이 허전했다. 보니 팔을 타고 질주하는 검은색 균열이 보인다. 가슴을 타고, 목을 타고 오른 균열은 부순다. 그를 부쉈다. “아아······.” 그는 오히려 평안한 얼굴이 되어 소멸을 즐긴다. 그의 얼굴을 가득 채운 균열에서 어둠이 튀어나와 그를 먹었다. 그리고. 아무것도 없었다. 그가 기억할 만한 뒤의 일은. 눈을 뜬다. 어둠으로 익숙한 시각이 갑작스레 덮쳐드는 빛에 마비되었다. 불규칙적으로 흔들리는 공간. 비린내가 후각을 덮친다. 숨을 쉴 때마다 입에 물린 손가락 길이의 막대피리가 기음을 토했다. 피이이이- 탄성 대신 기음이 터져 나왔다. 흐리게 빛을 보는 눈을 비비고 몸을 일으킨다. 어느 때보다 상쾌한, 그러면서 이질적인 기분이었다. “여기는 어디?” 모르는 천장과 모르는 공기가 덮쳐도 불안하지는 않았다. “남쪽으로 향하는 배 안이죠.” 아는 소녀가 같이 였으니까. “기분은 어때요?” 전과는 다른 감색紺色 가죽코트를 걸친 유라는 그에게 익숙한 무표정으로 물어왔다. 안심이 되는, 하지만 조금은 서운한 기분으로 대답했다.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들 뿐. 괜찮아요.” 꿈은 아직 깨지 않았다. --------------------------- chapter 8, Raves ―――――VS Monster. 푸른 하현달이 중천에 떠올라있는 심야深夜. 유철산은 상대가 없는 장기판에 깊은 쓸쓸함을 느꼈다. 5일전만 해도 무표정으로 어미 빼먹은 대사를 나불댄 후, 외통수를 쳐대며 그를 골치 아프게 했던 회의사였지만, 막상 없으니 쓸쓸한 것이다. 지금까지 유철산의 연금술사에 대한 편견을 모조리 허문 소년, 성우를 만나고 헤어진 그날부터, 연금술사 회의사는 지검문에서 자취를 감췄다. 물론 형천에서 장흥까지의 도보로 7일 내외 걸리는 것을 생각하면 너무 이른 추측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연금술사의 서신을 보내도 서신이 회의사에게 전송되지 않는 사건이 일어났다. 오류는 있을 리 없었다. 한 번 쓰기도 아까운 먹물을 다섯 번이나 들이붓다시피 했으니. 그러나 메시지 전송은 되지 않았다. 역으로 다른 문도들과의 전송은 순조롭게 귀문 중이라는 메시지를 받음으로써 송신지送信紙의 고장은 아니라는 결론을 이끌어냈다. 상호신호가 완벽하게 조합되어야 서신이 송신된다는 송신지. 회의사의 신변에 무슨 일이 생긴 게 아니라면 서신이 전송되지 않을 리 없었다. 추측할 수 있는 건 두 가지였다. 하나는 회의사가 모습을 감춘 것. 송신지를 지검문에 도입한 사람이 회의사였기 때문에 송신지의 서신을 완전히 거부할 수 있는 방법도 알 수 있을 터였다. 가능성이 있는 일이었다. 애초에 그는 지검문에 섞이려들지 않았다. 부르는 명칭이 회의사인 것도 같은 의미였다. 이름을 가르쳐주지 않았으니까. 유철산으로서는 아깝긴 하지만 다른 추측을 하려면 차라리 이 상황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둘은 회의사의 죽음. 하지만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회의사는 편법이긴 하지만 유철산도 쉽게 보지 못할 위력적인 공을 익히고 있었다. 손을 휘둘러 어른 몸통 크기의 바위를 통째로 녹였을 때는 단순히 지검문의 객客으로써만이 아니라 평생을 같이할 동료로서 그를 맞이하고 싶을 정도였다. 그런 자를 제압한다? 그것도 젊디젊고 연약하기 그지없는 소녀가? 물론 연약하다는 것은 소녀를 대면한 뒤, 슬며시 지워버린 어구였지만 그래도 젊은 소녀, 그것도 가장 배움이 까다롭다는 남부의 연금술로는 회의사를 이기기 힘들 것이다. 그러나 그 때 나타난 결과는 자꾸만 부재의 이유를 회의사의 죽음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소녀가 그 자리에 나타날 수 있을까? 철저한 회의사가 그냥 보내줬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그렇다고 회의사가 소녀를 만나지 못했을 리도 없다. 소녀의 옷에는 화상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회의사만이 남길 수 있는 흔적이었다. 그것도 회의사의 염왕익만이. 탁- 유철산은 적색 장군기를 다섯 칸 정도 자신의 군진으로 이동시켰다. 유철산의 진영은 청색기였다. 적색은 회의사가 쓰던 군기였다. “외통수··· 인가. 어째 매번 지는군.” 그 순간, 유철산은 장기판 옆에 자신의 검을 잡아갔다. 순간, 찻잔의 물에서 소용돌이가 일어나며, 수많은 물방울이 튀어 올랐다. 장기판을 중심으로 새하얀 은선이 가로질렀다. 유철산의 일수가 만들어낸 변화였다. 15센티 두께의 장기판이 7.5센티 씩 두 조각으로 나뉘며 그 중 위에 위치했던 판이 떠올랐다. 물방울은 총알처럼 유철산의 가슴을 향해 날았다. 파바바박!! 마침 떠올랐던 장기판이 유철산의 호심경護心鏡이 되어 물방울들의 진격을 막아냈다. “흠!” 유철산은 장기판을 뒤집어 찻잔을 후려쳤고, 찻잔은 그대로 미세한 가루가 되어 방안 구석구석으로 흩어졌다. 그러나 물은? 방바닥에 떨어지며 산산이 부서지던 그것은 어느 순간, 다시 허공중에 작은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모여들고 있었다. 분명 찻잔은 200밀리리터 정도나 담을 수 있는 작은 컵인데도 불구하고 물은 갑자기 용량이 불어나기라도 하듯 하나의 인간크기의 물덩어리가 되어있었다. 물덩어리는 형체를 갖기 시작했다. 190센티, 마른 체격의 남성. 체격이 형성되자 의복이 투명하게나마 형성되었고, 이내 달걀귀신 같던 얼굴부분에 사마귀 같은 눈과 오뚝한 콧날, 얄팍한 입술을 만들어 거만한 얼굴형이 무엇인가에 답했다. 하지만 그것조차 투명했다. 물속에서 새파랗게 부딪히는, 부서진 찻잔이 가지고 있던 색소가 없었다면 형체도 제대로 분간하지 못할 정도로 사람의 형상은 투명했던 것이다. “누구냐!” -킥킥킥. 알 거 없어! 액체인간이 입을 형상화한 ‘그것’을 움직이며 손을 채찍처럼 휘둘렀다. 단순히 채찍처럼 휘두른 것만이 아니라 그야말로 채찍처럼 쭈욱 늘어나며 유철산의 신형을 감아오는 것이었다. 길게 늘어난 액체채찍은, 채찍이라기보다 지독하게 날카로운 한 자루의 검이었다. 걸리는 것마다 예리하게 배어내며 유철산의 신형에게로 돌진하는 것이다. 유철산은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생소한 공격에 당황했지만, 더 큰 당황도 느껴봤기에 대처가 빨랐다. 아무리 처음 보는 위력적인 공격방식이라도 그 기본은 단순한 참격일 뿐이다. 누군가가 보여줬었던 자신의 반응을 뛰어넘는 움직임에 비하면 피하기도, 막기도 간단했다. 유철산은 앉은 자세 그대로 검을 휘둘렀다. 검갑채로 휘둘러진 검은 수많은 줄기의 기류를 휘감았다. 검이라기보다는 거대한 몽둥이. 몽둥이는 액체채찍과 부딪쳤고, 결과는 시끄럽고 강렬하기 짝이 없는 소음과 유철산의 방이 박살날 정도로 거센 충격파였다. 유철산은 냉엄한 신색으로 박살난 집 처마 위에 내려섰다. 신색에 비해 유철산의 옷은 상당히 해져있었다. 유철산은 왼손 새끼손가락으로 귀를 파며 오른손에 들린 검을 휘둘렀다. “한 가지 중요한 것을 알려주자면 내가 장기를 두고 있을 때는, 싸가지 없는 아들놈도 안 건드린다.” 귀찮은듯 토해내는 말이었으나, 유철산의 성격을 잘 아는 이가 들었다면 소름끼쳐했을 정도로 유철산의 기분은 더러웠다. 유철산이 검에 담은 것은 중重이었다. 수만근의 경력이 유철산의 검 끝에 모이면서 휘둘리자 공간이 일그러지는 듯한 기압변화가 일어나며 방금 전까지 유철산이 있었던 별채가 모조리 가루가 되어버렸다. 마치 거대한 해머에 눌린 듯한 흔적만이 별채가 있던 공간을 대신했다. “이런, 또 저질렀나.” 유철산에게 집을 부수는 일은 장기가 뜻대로 안 풀리면 장기판을 부수는 버릇의 연장선이었다. 평생에 걸쳐 3번이나 집을 부쉈으니 또 저질렀다, 라는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이번엔 완전히 가루로 만들어버리는 등, 스케일이 너무 달랐지만 상관없었다. 돈은 이름 모를 무명화가에게도 퍼줄만큼 많았고 집안 실내 꾸미는 건 유철산의 남모르는 취미이기 때문이었다. ‘이번엔 그 그림을 중심으로 꾸며볼까?’ 유철산은 이내 헛생각을 털어내고 검갑에서 검을 뽑았다. 새파랗게 빛나는 검신이 모습을 들어내자 주변의 공기가 싸늘하게 얼어버리는 것 같았다. ‘아니······· 이건 검의 한기寒氣같은 게 아냐.’ 유철산은 경을 집중했고, 감각을 확장해 땅바닥의 모래 한 톨 굴러가는 것까지 파악했다. 그 순간, 폭삭 무너져 내린 집안에서 마치 대포가 터지듯, 큰 소리와 함께 한 덩어리의 물이 유철산을 향해 정면으로 날아왔다! 그것은 범인이 쏘는 화살만큼 빨랐다. 이미 대비하고 있었던 유철산은 검을 한 번 내리그어 물덩어리를 배어냈다. 폭포조차 둘로 배어내는 유철산의 검기劒技가 펼쳐지자 물덩어리 역시 깨끗이 둘로 나뉘어 유철산의 양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끝난 것이 아니었다. 양옆으로 날아간 물덩어리가 터질듯 부풀어 오르더니 이내 폭발했다. 하늘을 가득 매우며 날아오는 물방울들의 기세는 유철산으로써도 위험할지도 모른다, 는 생각을 갖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래봤자 물방울. 경으로 보호되고 있는 육체에 타격을 입히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 정확히는 물방울들이 어느 공간을 지나친 순간, 유철산은 생각을 급히 수정하고 내부에 잠자고 있던 공功까지 끌어올렸다. 물방울들이 급속히 딱딱하게 얼어붙더니, 가느다란 비침飛針이 되어 더욱 가속했기 때문이었다. 꺼림칙했었던 한기의 정체가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유철산은 신형을 튕기려했다. 그러나 어느새 침습한 것인지, 한기가 그의 발목을 붙잡고 있었다. 한기에 굳어버린 몸을 푸는 데는 그리 시간은 걸리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날아오는데 0점대의 시간조차 소비하지 않는 비침을 피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요즘 따라 많이 놀라는 것 같군.’ 어딘지 모르게 피곤한 생각을 하며, 유철산은 수중의 검을 가볍게 쥐고 기하학적 궤도에 검을 태웠다. 지극검至極劒! 눈을 뜨면 상대의 빈틈이 보이고, 눈을 감으면 공간이 요구하는 검로가 보인다는 극히 검에 맞춰진 시각이 타오르고 있었다. 성우를 상대할 때는 보여주지 않은 면목. 검을 뽑은 지극검은 인간이 아닌 초인이었다. 시간이 단절된듯, 느리게 기하학의 궤도를 타던 검이 어느 순간부터 가속하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공간을 검봉에서 일어난 은선으로 매우고 있었다. 일종의 검막劒幕이랄까. 하지만 그의 검막은 검을 빠르게 움직여 검면劒面을 방패로 삼는, 헬기의 프로펠러를 연상시키는 그런 게 아니었다. 압도적인 존재감으로 공간을 일그러뜨린다. 오직 그것만으로 접근을 불허하는 강철의 방패가 되는 것이다. 유철산의 검막에 얼음비침이 부딪혔다. 비침은 검막에 부딪힐 때마다 하나 둘 씩 입자단위로 터져나갔고 다시 물로 변해 마당에 의미 없이 쌓여갔다. 일단 활성화된 공은 유철산의 고통에는 상관없이 슬그머니 침입한 한기를 해일처럼 밀어냈다. 모든 비침이 단순히 마당을 어지럽히는 물방울로 변했다. 수유의 시간 만에 일어난 일이다. “나와라!” 유철산은 당당하게 외쳤다. 마침, 소란에 잠을 깬 문도들이 문주전門主殿에 하나 둘씩 모습을 드러냈다. “무슨 일입니까? 사부님.” 원래라면 아들인 유황천이 했을 문안을, 일대제자인 도진渡津이 대신 했다. 유황천은 약방에서 막내아들과 같이 몸져 누워있었다. 자식 자랑하는 건 아니고, 유황천이라면 괜찮았을 터였다. 취이이이이익---! 그것은 방울뱀의 경호성처럼 나타났다. 하늘에 다소곳이 있어야 할 새파란 현월(弦月, 초승달)이 한순간 강림했고, 곧바로 도진의 오른쪽 팔을 깨끗하게 잘라냈다. 정말 제자들 중에선 유황천이나 이윤강 정도 밖에 막지 못할, 그런 싸늘함의 도가 지나친 날카로운 일격이었다. 피.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고. 기역자로 굽은 도진의 오른팔이 핏방울을 흩뿌리며 뱅글뱅글 돌아가는 부메랑처럼 허공을 날았다. 그러나 그의 팔은 부메랑처럼 돌아오지는 않았다. “크아아아악!!” 도진의 비명성과 함께, 제자들의 도열이 흐트러졌다. 암격. 본격적으로 전쟁 같은 것을 치러본 적이 없는 지검문도들에게 이런 예상치 못한 암격은 치명적이었다. 훈련받지 못한, 경험하지 못한 상황에 문도들은 당황했다. 만약 유철산이 뛰쳐나가는 게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피해는 확산되었을 것이다. 취이이이익!! 캉! 유철산의 검과 싸늘함의 정수가 부딪쳤다. 그 순간, 이미 싸늘함은 이동하며 다른 먹이를 노리고 있었다. “크윽!” 평소에도 인내심 많은 것으로 칭찬을 받던 경문산상景門山桑이 짧게 신음을 토했다. 가슴을 훑고 간 한기가 뼛속까지 침투해가는 것을 느끼며 의식을 잃었다. 그러나 사라져가는 의식 속에서도 경문산상은 최대한의 힘을 짜내어 눈앞에 보이는, 부자연스러운 무언가를 잡았다. “음?” 경문산상이 쓰러지면서도 예상치 못하게 흉수를 잡아내자, 유철산은 기뻐하면서도 다급했다. 그의 걱정대로 흉수는 자신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경문산상의 손목을 너무나 가볍게 때어냈다. “이 노옴!” 노호성을 지른다. 뜨겁게 타오르는 가슴이 살의라는 장작을 받아 거센 불길로 진화했다. 쾌快. 모든 흐름을 끊어내는 번개처럼. 검의 모든 성질이 오직 날카로움으로만 치환되며 모든 자연에서의 저항을 불허하는 일검이 뿜어졌다. 하지만. 자연의 존재가 아닌 존재는 그를 부정했다. ‘뭐냐!’ 유철산이 밟고 있었던 물웅덩이가 갑자기 점액질로 성질이 변하며 유철산의 움직임의 일부를 구속했다. 발바닥에 점착제가 붙기라도 한 것처럼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보법步法, 내식內息, 경량勁量, 의지意志. 어떠한 무공이건 이 네 개의 화합으로 최고의 효과를 내는 것이다. 특히 쾌검은 보법과 내식에 대한 의존도가 다른 무공보다 높았다. 보법이 방해받고, 덕분에 호흡이 끊어졌다. 지금까지 없었던 빈틈. 그 순간, 현월은 유철산을 향해 돌진했다. 서걱--! 깨끗한 초승달. 평소라면 아름다움에 경탄해마지할 그 달이 붉게 물들었다. “문주님!!” 하현이 탐욕스럽게, 지검문도들의 탄식을 먹었다. 붉은 하현은 불길한 초승달이었다. 초승달이 멈췄다. 목표를 이뤘기 때문일까. 존재감이 없던 초승달의 주인이 허공중에 부표가 떠오르듯 모습을 드러냈다. 165센티, 늘씬한 몸매를 가진 여성이었다. 살얼음이 몸 주위에 붙어있는 것이 보기만 해도 추워지는 여성이었으나 그 자신은 전혀 추위를 타지 않고 있었다. 얼음을 깎아놓은 듯한 외모였다. 아름답기는 해도 차가움이 물씬 풍겨 나왔다. 싸늘함의 정수. 바로 그녀가 유철산이 느꼈던 기운의 총채였다. 초승달의 정체는 그녀가 들고 있는 곡도. 그냥 단순한 강철이나 합금으로 만들어진 무기 따위가 아니었다. 또 하나의 그녀 자신이라 불러도 될, 빙정氷晶으로 쌓여 형태가 이뤄진 얼음곡도였다. 투명한 도신에서 달빛이 산란했다. 산란하는 빛이 얼고··· 유철산의 핏방울이 얼었다. “제린醍燐···은 어디 갔나.” 현월의 주인이 입을 열었다. 그녀의 입은 싸늘함의 정수에서는 싸늘함밖에 나올 수 없다는 것을 증명했다. 숨결에 공기가 얼어붙었다. 평소의 지검문도라면 신기하다고 쳐다볼 수도 있을 장면이었다. 하지만. 검이 들린 오른손. 지금까지 한 번도 타의에 의해 땅을 짚은 적 없는 그 손이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다. 잘려나가 피 웅덩이를 만들고 있는 팔. 잘못된 검로를 교정했고, 잘못한 행동에 용서 없었고, 호탕하게 휘둘려 긴장한 신입문도들의 길잡이가 되었던 팔. 검이 쥐어졌을 때, 모든 문도들의 이정표가 되었고 지검문 60년 역사를 함께 해왔던 그 팔이 떨어졌던 것이다. 지검문도들은 분노했다. 분노로 뜨겁게 타오르다 못해, 생명까지 태워버릴 정도로 그들은 노호怒虎가 되어 돌진할 기세였다. 하나 둘씩 검이 뽑혀진다. 소리 없이 검을 뽑으라는 가르침도 잊어버린 채, 서늘한 마찰음이 문도들의 사이에서 공명했다. 절대로 용서할 수 없는 그녀를 향해 지검문도들은 칼을 향했다. “그만!” 유철산이 소리쳤다. 유전자에 새겨져 있기라도 한 것처럼, 절대로 그의 말에 반할 수 없는 지검문도들은 전진을 멈췄다. 모든 문도들의 시선이 유철산에게로 쏠렸다. 원래부터 없었던 것처럼, 유철산의 팔은 더 이상 피를 흘리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오른쪽 측면에 피로 얼룩진 부위는 원래 존재했어야 할 것의 부재不在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제린··· 이라고 했나? 그럼 이쪽에서 하나 묻지, 연금술사인가?” 현월의 주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회의사를 찾아왔나보군. 회의사의 이름이 제린이었나, 나쁘지 않는 이름이었어. 음음, 그렇군. 안타깝지만 회의사, 아니 제린이란 자는 이쪽으로써도 행방불명일세.” “······!” 싸늘함에 안타까움이 스쳤다. 신색을 회복하는 것은 순간이었지만, 유철산의 눈에서 벗어날 순 없었다. ‘무슨 관계일까.’ 통증이 심해, 이제는 감각조차 없는 오른팔을 잊어버리고, 문득 그런 호기심이 떠올랐다. “어디서··· 잊은 건가.” 끓어오르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내는 소리처럼, 그녀가 말했다. “형천. 두 연금술사를 쫓다가··· 사라졌다.” “역시··· 인가.” 형천이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그녀는 싸늘한 한숨을 쉬었다. 공기가 얼어붙어 얼음덩어리로서 땅바닥에 떨어졌다. “무슨?” “회의사가 죽었다. 형천에서.” “설마 했지만··· 정말인가?” “알 거 없다. 그보다··· 흉수의 정보를 제공하라.” “그리 간단히 넘기긴 싫네만.” “제자들의 목숨이 위협당해도 말인가?” 그녀의 말이 끝난 순간, 땅바닥에서 물의 입자가 모이며 액체인간이 나타났다. -킥킥킥킥. 언제든지 간단이라구. 유철산은 내색하지 않았으나 침음성을 삼켰다. 자신의 검에도 죽지 않는 액체인간 정도라면 분명 몰살이 가능할 것이다. 무엇보다 연금술사들을 추격하러간 대부분의 일대제자들이 지검문을 비우고 있었다. 지검문의 수호는 유철산 하나만으로도 충분했지만 한쪽 팔이 잘린 지금은 그렇지 않다. 애초에 난데없는 습격은 이 순간을 위한 것일 게다. “어쩔 수 없지.” 유철산의 결정은 빨랐다. 성우와 유라의 몽타주를 든, 두 흉수가 사라진 뒤. 지검문도들은 고개를 떨어뜨려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이 놈들!” 유철산이 버럭 소리 질렀다. 전과 전혀 변함없는 위엄 가득한 소리에 지검문도들은 고개를 들었다. “다친 사람을 빨리 의사청醫師廳에 들이지 못할까! 사형제들이 영원히 외팔이가 되는 꼴들을 보고 싶으냐!” “아!” 지검문도들은 잘려나간 팔들과 쓰러진 사형제들을 업고 밖으로 달려나갔다. 의술이 발달한 중부에선 이런 절단상도 하루 이내라면 가볍게 치료할 수 있었다. 아이러니 하게도 연금술의 발달에 따라 이런 일도 가능해진 것이다. ‘연금술은 병인가, 약인가.’ 공통적으로 떠올리는 문장이었다. “문주님께서는?” 조심조심 누가 물어왔다. 유철산은 피식 웃으며 땅바닥에 떨어진 자신의 팔을 가리켰다. 잘려나간 팔은 얼어붙은 그대로 쩌걱쩌걱 갈라지고 있었다. 극도의 냉기에 경질화硬質化되어 얼음처럼 부서져버리는 것이다. 다른 문도들과는 다르게, 유철산의 내경을 생각하여 최대의 일격을 선사한 덕분이었다. “박제공剝製工을 불러라. 오늘을 기념해서 장식해두지. 더불어 의체기관장인依體機關匠人도. 북부의 암왕暗王처럼 고급스런 의체를 준비하라 해라.” 평생을 함께 해온 팔이 잘린 것쯤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유철산은 피식 웃으며 가볍게도 말한다. 문주로써. 인간으로써, 정말 강인하기 짝이 없는 자였다. 그들의 문주는. “존명!” 지검문도들의 복명은 어느 때보다 힘찼다. 형천. 잿더미가 널린 외진 곳에 그녀는 주저앉았다. “죽었나. 죽은 건가. 하··· 하하하. 병신 같아. 병신, 병신! 죽어버린 거야? 꿈도 이루지 못하고··· 죽어버린 거야?” 격정적이다. 얼음의 격정. 한 번도 흘린 적 없는 눈물이 그녀의 볼을 타고 흐르다가 얼어버린다. 얼음이 흘리는 눈물은 결국 차가울 뿐. 이내 눈물이라기보다 얼음구슬이라 할 게 그녀의 눈에서 떨어지고 있었다. “복수해줄게. 후후, 내가 뱉기엔 이상한 말이지만, 복수해줄게.” 그녀는 잿더미를 손으로 모았다. 세줌의 잿더미를 손안에 모으고 허리에 찬 호리병을 때어 물을 붓는다. 물이 재와 섞이며 걸쭉한 액체가 되었다. 걸쭉한 액체를 토대로 주변의 습기가 모였다. 모이고, 변형되고, 압축되고, 빈틈을 메워, 부서질 틈조차 없는 하나의 칼이 된다. 극음도極陰刀. 그녀가 익힌 빙한단공氷寒鍛功을 형체화 시킨 칼. 어떠한 신병에도 모자람이 없고 어떠한 마병조차 부술 수 없는 그녀만의 칼. 이제는 회의사의 몸까지 하나가 되었다. 그녀 뒤편에서 흐르고 있던 냇가에서부터 물의 소용돌이가 일어나며 물이 쌓여져 올라갔다. 그리고 액체인간의 형상이 만들어졌다. -찾아냈다. 이곳에서 도보로 13일 거리 정도 되는, 압제강鴨啼江에 있었다. 순례선巡禮船을 타고 있더군. 시간 상 맞는 것을 보니 지검문주의 말이 거짓이 아니었다는 것이 되겠군. “그런가. 그럼 가지. 그리고··· 끼어들지 마라.” -큭큭큭, 성주의 명령은 따라야만 하는데? 현월의 주인의 눈이 날카롭게 액체인간을 보았다. 액체인간은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쉬었다. -어쩔 수 없지, 네가 적이 되면 내가 제일 곤란하니. 도망치지 못하게만 해주지. 큭큭큭. 문득, 극음도 속에 있는 새하얀 재와 액체인간을 번갈아보며 그녀가 물었다. “역행자···가 되고 괴롭지 않았나?” -갑자기 무슨 소리냐? “아니, 그냥.” -괴로웠지. 인간으로서의 기능을 완전히 잃어버린 건 둘째치고라도··· 인간으로서의 감정이 모조리 물이 되는 것 같더군. 망각이랄까? 그래서 역행자로써의 감정을 새롭게 쌓아갈 수밖에 없지. 큭큭큭. 왜? 동료가 될 생각 있나? 처음엔 괴롭지만 나름대로 즐겁다구? 키키킥. 괴상하게 웃자 현월의 주인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것은 역행자로서의 고통을 잊으려는 버릇이었을 뿐이었을까. 그래도 듣기 싫은 건 싫은 것이다. “그 땐 빙상氷像으로 만들어주지.” 액체인간은 ‘앗 뜨거라’ 하는 표정을 짓고 물속으로 스며들었다. 그와 동시에 지상에 거대한 그림자가 생기더니 이내 하늘에서 거대한 새가 떨어져 내렸다. 거대한 눈망울을 굴리는 새는 붕련국에서만 태어난다는 대붕大鵬이었다. 제응보다 거대한 날개가 펼쳐졌다. 하늘을 덮을 듯 거대한 날개는 주변의 공기를 밀어내며 한순간의 진공상태를 만들어냈다. 현월의 주인이 대붕의 등에 올라타자 대붕은 크게 홰를 치며 날아올랐다. 배를 탄지 6일, 성우가 깨어나고 4일째 되는 날이었다. 성우의 몸은 정상이었다. 죽기 일보 직전까지 간 몸이 단지 사흘 만에 정상수위로 돌아왔다는 게, 당사자인 성우 자신으로써도 믿기 힘들었다. 실은 3시간만에 복구되었지만, 유라는 그 사실을 숨겼다. 확실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유라가 먹을 것을 조달하기 위해 바깥으로 나갔을 때, 성우는 혼자 자신과 유라에게 배정된 방에 있었다. “음···.” 성우는 몸속에 내재된 경체를 움직였다. 깨어났을 때부터 느끼고 있었던 그것은 지금 이 세계가 거짓이 아님을 말하고 있었다. 오히려 반대여야 정상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러나 경체는 너무 몸에 친숙했다. 억지로 문자를 붙이자면 죽마고우 같은 친숙함이 느껴졌다. 경체를 움직여본다. 자신의 몸 크기였던 그것을 여러 가지 형태로 만들어보았다. 다른 무인들이 보면 허탈해할 정도로 쉽게, 경은 성우의 의지를 따라주었다. 성우는 경을 압축시켜 경의 밀도를 높여보았다. ‘음. 누르면 튕겨 나오는 성질이 마치 고무 같군.’ 이번에는 경을 늘려보았다. 그러자 이번엔 되돌아오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형상을 보존하는 게 경이 가지는 기본 성질이었다. “그럼 바깥으로 내보내볼까?” 경은 몸 밖으로 나가지 않으려는 성질을 가지고 있었다. 이른바 패쇄성閉鎖性이 짙었다. 성우가 만약 유철산에게서 경을 사용하는 법을 보지 못했다면 여기까지가 경의 한계라고 생각했을 정도로 경은 쉽게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다행인가.’ 그렇다고 유철산을 흉내 낼 정도로 성우는 어리석지 않았다. 유철산의 경체가 가지는 양은 성우의 백배. 유철산처럼 경체를 최대한 풀어 폭풍의 경계를 만들려다가는 바람은커녕 미풍微風의 한숨만이 불어올 것이다. “뭐하고 있어요?” 유라가 방안으로 들어왔다. “아, 경을 다뤄보고 있었습니다.” 성우는 경을 원상태로 돌리며 대답했다. 이를 산경散勁이라 세간에서는 칭한다고 했다. “그런가요? 생각해보면 성우 씬 정말 연구대상이네요. 경을 모르고 있던 사람이 경이라는 단어를 안지 며칠 만에 어경이라니.” “하하하, 그렇다고 실험체로 쓰진 말아주시죠.” “아깝네요.” ‘농담같이 안 들립니다만.’ 머쓱한 나머지 성우는 입에 물고 있던 생명줄을 한 번 불었다. 여유가 생기는 것을 느꼈다. “그런데, 생각보다 늦게 오셨군요.” “뭐, 귀찮게 치근덕대는 사람이 있어서요.” “헤에, 유라 씨는 예쁘니까요.” “······.” 침묵이 흘렀다. 사실 유라가 답변하지 않고 입을 꾹 다문 것뿐이지만 그것만으로 대화의 흐름이 끊겼다. “유라 씨?” “아, 네? 아아, 배고프시겠네요. 이것 드세요.” 유라가 내민 것은 건량 주머니였다. 성우는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렸다. “이거 저번에 먹었던 거라면······.” 끔찍한 맛을 기억하며 중얼거렸다. “아니네요. 안타깝지만. 정 부담스러우시면 전 것으로 준비할 까요?” 유라의 말에 성우는 대답 없이 건량 주머니를 열었다. 안에는 육포肉脯와 어포魚脯, 훈제육등 평범한 건량이 있었다. 평범한. 평범하지 못한 건량을 경험해본 성우로써는 다행이었다. 성우는 생명줄을 입에 문 채, 건량을 씹었다. 평범하게 맛있었다. 건량과 함께 한도의 한숨을 삼켰다. “그런데, 안 풀리는 곳이 있으세요?” 한동안 건량과 물을 번갈아 먹는 성우를 보고만 있던 유라가 물었다. “발경··· 이랄까요? 외부로 경체를 내보내는 게 잘 안 되네요. 뭐랄까, 내부에서의 움직임은 자유자재로 할 수 있는 반면에요.” “성우 씨는 뭐든 습득 순서가 뒤바뀌었네요.” 유라가 고개를 살며시 저었다. 성우가 의문을 표하기도 전에 그녀는 말을 이었다. “두서없이 말하자면 원래 쓸모없어 보이는 초식은 성우 씨 같은 사람을 위한 것이라 할 수 있겠네요.” “에?” 정말 밑도 끝도 없는 말에 성우는 자신도 모르게 반문했다. “경을 구분하는 경지로, 감경感勁, 동경動勁, 어경이 있다는 건 아시죠?” “전에 말했으니까요. 감경은 경의 존재를 느끼는 경지, 동경은 몸동작에 경이 움직이는 경지, 어경은 느껴지는 경을 자신의 마음대로 다루는 경지, 라고 했었죠.” “그 중 성우 씨는 동경의 단계를 빼먹었어요. 어경이 포괄적으로 잡긴 하지만 원래 동경에서 발경의 단계가 이뤄지죠.” “아, 그렇다면 초식은 효과적으로 발경을 해내기 위해 고안된 동작이란 소리네요. 그런데 그것과 무슨 관계가?” “요점만 잡자면, 목표와 집중이죠. 어경이 경을 마음대로 움직인다고 해도, 의지와 몸이 한 목표에 집중되지 않으면 바깥으로 나오긴 힘들어요. 내부에만 있는 것이라면 경 자체에만 집중하면 되니까 쉽게 되죠?” “흐음, 그렇군요. 목표라.” 실마리는 잡았지만 애매했다. “하지만 이 문제를 해결하는 건 쉬워요.” 유라는 쉽게 대책을 내놓았다. 그녀는 품 안에서 손바닥 길이만한, 재질불명의 막대기를 꺼냈다. 성우는 엉겹결에 유라에게서 막대기를 받았다. 살펴보니 낚시대처럼 내부에 또 다른 막대가 숨겨져 있었다. 그렇게 된 막대로 가득 차 있었다. “그것이 목표에요.” “아!” 유라의 말은 경을 이 막대에 집중해보라는 것이었고, 성우는 그것을 깨닫자마자 바로 실행했다. “처음엔 잘 안 되겠지만 반복하다보면··· 잘 하시네요.” 유라는 집중한 성우에게 요령을 설명하려 했으나 뜻밖에도 성우는 쉽게 경을 집중해낸 것이다. 막대가 점점 늘어나는 것을 보면 쉽게 알 수 있었다. 원래 그 막대의 용도 자체가 경이건, 공이건 에너지를 불어넣어 무기로 쓰는 것에 있었다. 쓰지 않은 지 오래되었지만 발경의 양을 측량하는 데는 더 없이 좋은 물건이었다. 막대는 점점 늘어나더니 이내 1미터 길이까지 늘어났다. “멈춰요! 성우 씨!” 유라가 대경하며 버럭 소리질렀다. 성우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경의 집중을 해제했다. 그러자 차르륵 소리와 함께 막대가 원상태로 돌아왔다. “왜입니까?” 유라는 기가 차다는 듯 성우를 바라보았다. 이 남자는 자신이 한 짓이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도 모르고 있다. “몸 안의 모든 경을 막대에 집중하면 안 돼요!” “아, 안 되는 거군요.” 반응이 맹했다. 오히려 소리를 높인 유라가 무안해졌다. “몸에 이상은 없나요? 경의 손실은?” “없어요. 후자도 마찬가지고요.” “······놀랄 만한 제어력制御力이군요.” 보통 한 물건에 경을 집중하고, 그 도가 몸에 있는 경의 잔량殘量보다 많아진다면 오히려 물건 쪽에 경력이 쏠려 몸의 경력까지 빨아들이는 경우가 많았다. 경력이 모두 물건에 쏠리는 순간, 경체는 보조로써의 능력을 잠시 동안 상실하고, 신체는 매우 빨리 지치게 된다. 그리고 경체가 경력을 되찾아 회복되기까지 지친 신체는 회복되지 않는다. 제어력이 아무리 뛰어난 사람이라고 해도 이 도를 넘게 되면 일순간이지만 폐인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성우는 총량 중에 대부분을 물건에 집중하고, 몸에는 쥐꼬리만큼만 남겼어도 정상이었던 것이다. 이쯤 되면 이 남자의 존재 자체가 비정상이지만. 뭔가 생각이 났는지 성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막대도 함께였다. “유라 씨, 이것 좀 빌릴게요.” “마음대로 쓰세요. 그런데 왜?” 성우는 기분 좋게 웃으며 막대를 흔들었다. “낚시나 해볼까 하고요.” 경운린瓊韻麟은 애가 탔다. 끝내주게 아름다운 미녀가 있길 레, 말 좀 걸었더니 돌아온 것은 정강이의 강한 통증과 어느새 날아온 팔꿈치였다. 솔직히 밝히자면 좀 과하게 그녀의 몸을 만졌을 뿐이다. 경운린도 요즘 젊은이답게 한두 수의 무술을 배웠다. 아니 결코 한두 수로 치부할 게 아닐 정도로 고급절기를 배웠다. 그가 속한 문파는 응란국 육대세력 중 하나인 쌍륜보雙輪堡였고, 집안에 돈이 많고 운도 좋아, 마침 도박으로 돈이 부족했던 대가의 눈에 들어 한 수의 금나수擒拿手를 배웠다. 그렇기에 방심했던 것일까. 쉽게만 봤던 그녀의 공격은 그의 빈약한 상상의 범주를 넘어선지 오래였다. 결과는 잠시 동안의 기절. 아마 지나가는 선원이 깨워주지 않았다면 한정 없이 복도 벽에 머리를 처박고 있었을 터였다. 물론 경운린이 애가 탄 건 그 때문이 아니다. ‘젊은’ 여자는 남자가 지켜줘야만 될 연약한 존재, 아니면 노리개, 라는 문장이 뼛속깊이 뿌리박힌 그는 자신의 실력이 그녀보다 모자람을 결코 깨닫지 못했다. 애초에 깨달았어도 인정하지도 않았을 속 좁은 놈이지만. 속 좁은 놈답게 하는 생각은 그녀에게 다시 접근하는 방법일 뿐이었다. 방법은 역시 기다림뿐이었다. 정규순례선의 내부는 민박처럼 수많은 선실로 되어있어 열쇠가 없으면 문을 열 수 없었다. 평생 기다림이란 단어를 모르던 녀석이 막상 기다리기만 하자니 애가 탈 수밖에. “대체 언제 나오는 거냐.” 결국 문 앞에 뻗대고 있은 지 10분도 못 돼서 포기하고 마는 경운린이었다. 포기하고 돌아서는 순간, 쾅! 훌륭하게 뒤통수를 갈기는 문짝이 있었다. 뜻밖의 습격(?)에 경운린은 형편없이 바닥을 굴렀다. “어떤 개새끼······!” 욕설을 내뱉으려던 입을 닫았다. 주저앉아서 뒤를 돌아보는 순간, 한 소년이 선실에서 나오고 있었다. 그 뿐만이 아니라 그가 애를 태우던 미녀도 선실에서 나온 것이다. “이쪽으로 가면 갑판이에요. 그리 오래 돌아다니지 마세요. 완치되었다고 해도, 명목상 성우 씨는 환자니까요.” “네, 알겠습니다. 그럼 유라 씨는 주무시고 계세요. 3일 동안, 한숨도 못 주무시는 것 같은데, 쉬셔야죠.” “···알고 있으셨군요. 그럼 조심하세요.” “혹시 모르니까 문은 잘 잠그시고요. 열쇠는 가지고 있으니까요.” 소년이 갑판을 향해 사라지자 경운린은 흐트러진 머리를 다듬으며 닫혀지려는 선실 문을 잡았다. 미녀가 문이 닫히지 않자 원인을 살펴보는 도중 경운린을 봤다. “또 당신이군요.” “후후후, 외롭지 않으십니까, 아가씨?” “······.” 대답은 없었다. 다만 복부를 강타하는 구두굽이 있었을 뿐. 늑대의 두개골조차 가볍게 부수는 부츠였다. 아무리 단련을 한 신체에, 가볍게 때렸다고 해도 그 타격이 결코 작을 수는 없었다. 경운린이 호흡곤란으로 괴로워하고 있는 동안, 유라는 매정하게도 문을 닫았다. “끄아아악!” 뒤늦게 그가 비명을 질렀다. “유람선을 겸용하는 순례선이라서 그런지, 매우 안정적이군.” 배의 크기는 승객 150명에 승무원 40명을 수용하고도 남을 정도로 컸다. 갑판은 나무로 되어있었지만 물에 닿는 부분은 전혀 새로운 물질로 이루어져있었다. 불에 약한 대신 적당한 무게에 단단하며 물에 잘 뜨는 소재라 했다. 그런 덕분에 안정적인 항해가 가능했다. 성우는 역풍을 받으며 강을 살폈다. 수면은 깨끗하기 그지없었다. 그러고 보니 역풍인데도 배는 전진하고 있었다. 그것도 꽤 빠르고 안정적인 속도로. ‘배의 재질뿐만이 아니라, 전기와는 다른 에너지로 모터까지 돌리는 건가?’ 성우로선 신기할 뿐이었다. 승무원들의 주의와 함께 낚시를 허가받을 수 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승객 중에서도 낚시를 즐기고 있는 사람이 꽤 되었다. 선미船尾 근처, 낚시 전용 난간에 다가선 성우는 경을 막대에 집중했다. 그러자 막대가 낚시대처럼 펴지며 최장 길이인 1.5미터까지 늘어났다. 자신이 낼 수 있는 최대의 경력을 집중한 것이다. 유라가 위험하다고 말리긴 했어도 성우로선 이게 최선의 방법이었다. 강해지기 위한. 만약 자신이 상상한 대로 경을 쓸 수 있다면 현재 자신의 바지주머니에 있는 두 총보다 유용하게 사용할 수도 있었다. 발경이 능숙해진다면, 유철산과 싸우던 때처럼 몸을 강화시키는 것보다 훨씬 효과적인 전투를 펼칠 수 있을 터였다. 경체의 양이 다른 사람들보다 월등히 적은 성우로서는 이런 집중으로 다른 사람 이상의 효과를 얻어야 했다. 성우는 경체를 막대에 집중하는 동안, 막대가 자신의 몸이 되는 착각을 겪었다. 유라와 있을 때에도 막대가 늘어나는 것을 직접적으로 느끼다가 유라에게 제지를 받아 이런 현상까지 겪지는 못했다. 그렇다고 위험하다는 기분이 드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한없는 일체감에 붕 뜨는 기분이 될 뿐이었다. 어느 순간, 성우의 경이 막대의 뾰족한 부분까지 닿았다. ‘후우, 여기까진 성공인가.’ 막대를 매개로 한 발경은 성공했다. 하지만 이 정도에 만족해서는 안 된다. 멀게는 유철산, 가깝게는 이윤강의 경우로도 보았지 않은가. 이 세계에서 좀 한다는 사람들은 매개체 없이 하는 발경을 당연하게도 쓰는 자들이었다. 손이 아닌 다른 부분을 통해서 발경을 성공시킬 때까진 이보다 더한 노력도 불사할 각오가 되어있었다. ‘오랜만인 걸. 이런 감각. 나도 하면 되는 건가?’ 스스로에게 대견. 그리고 나서 피식 웃는다. 겨우 이 정도에 만족해서 나중엔 무엇에 만족할 것이냐는 질책을 가볍게 날려준다. 기쁨은 나중에 해도 된다, 나중에. 모든 일이 일단락되고 나서······. ‘일단락이라··· 어떻게 하면 되는 거지? 그건? 역시 현실로 돌아가는 게? 방법도 모르는데?’ 복잡해지는 기분이었다. 그 순간, 마음이 흐트러졌기 때문인지 예상치 못하게 경을 제어할 수 없었다. 경의 요동침이 거셌기 때문인지 자각도 빨랐고 덕분에 빠른 대처가 가능했다. 제어에 성공한 성우는 뜻밖의 변화를 보았다. 막대 끝에서 그의 눈에만 보이는 희미한 기운이 새어나왔다. “에에에?” 그렇게 애써도 안 될 것 같았던 경의 외부방출이 쉽사리 이뤄진 것이다. 막대에 경을 담는 것과 외부에 방출하는 것은 큰 차이를 보인다. 제어 없이 외부에 방출된 경은 몸으로 되돌아오거나 공기 중에 흩어지는 등의 변화를 보인다. 성우는 방출된 경을 제어하게 된 것이다. 성우는 느낌을 되살려 경을 회수했다가 다시 빼내었다. 쉽게 되지 않았지만 된다는 확신이 있었기에 몇 번 반복된 시도 끝에 실처럼 가는 기운을 뽑아낼 수 있었다. ‘몸에 배인 고정관념··· 이라는 것인가.’ 늙은이 같은 비유를 들자면, 자립할 수 있는 자녀를 한없이 품안에서 보호하고 싶은 부모와 같았다고 할 수 있겠다. 충분히 밖에서도 경의 제어에 따를 텐데, 자신도 모르는 미지의 두려움이라는 감정이 그것을 방해했다. 때 맞춰 감정이 흔들리는 바람에 잠시 동안이나마 통제에 벗어났고 이미 바깥으로 세어나간 경은 뒤늦게라도 제어를 받아들여 가능성을 제시했다. ‘가출한 자식이 부모를 성장시킨다는 소리도 영 허풍은 아니었나 보군.’ 더불어 파멸시킬 수도 있다고 전해오는 말대로, 성우에게는 위험한 순간이었다. 경을 재빠르게 통제하지 못했다면 요령을 깨닫기는커녕 경체의 소실로 며칠 동안 폐인이 될 수도 있었다. 그것을 모르는 성우는 아니었으나 지나간 일을 걱정하는데 신경 쓸 정도로 그는 민감한 신경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것뿐만이 아니라 경의 방출을 성공시켰다는 기쁨에 현실세계로의 귀환걱정 역시 쉽게 묻어버리는 성우였다. 막대 끝에 달린 가느다란 기운이 점점 길어졌다. 실처럼 가는 경의 실(勁絲)은 어느새 수면까지 닿았다. ‘이거 진짜 낚시해도 되겠는데?’ 막연히 상상만 하고 있던 생각이 현실로 이뤄지는 순간이었다. 유라가 주는 막대를 보는 순간, 외할아버지와 함께 했던 낚시를 생각했다. 물론 책과 함께 아느라 낚시가 주는 인내의 교훈보다 책보는 겸 하는 진열陳列의 목적으로만 사용했지만 추억은 미화되기 마련이었다. 낚시는 명목이었고, 흉내만 낼 생각이었으나 마음이 바뀌었다. “월척이나 해볼까?” “헛소리 하는 군. 실도, 낚싯바늘도 없으면서 낚시를 하겠다니. 큭, 웃겨도 크게 웃기는 놈을 보는군!” 난데없는 목소리에 성우는 고개를 돌렸다. 그러면서도 경사의 끝은 계속 수면 위를 스치더니 이내 성우의 의지에 따라 물속으로 들어갔다. 그야말로 완벽한 제어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시비조로 성우에게 말을 건건 성우의 세계로 20대 초반, 이곳에서는 30대 중후반 정도의 나이로 보이는 젊은이였다. 먼지가 좀 묻긴 했지만 고급스런 옷감의 황색장포를 걸치고 금태를 허리에 두르고 있는 것으로 봐서 집안 걱정 안 하고 사는 사람 같았다. 꽤 잘 생긴 외모였으나, 안타깝게도 얼굴에 허영심이 철철 넘친다고나 할까? 거만한 미소를 항상 입에 달고 다니는지 입에 주름까지 잡힌 그는 아무리 봐도 좋은 사람으로 보긴 힘들었다. “누구신지?” “알 거 없고, 너랑 같이 한방을 쓰는 미녀와 네놈은, 무슨 관계냐?” 유라를 말하는 것이라는 것쯤은 쉽게 알았지만, 모르는 사람에게 간단히 그것을 드러낼 정도로 순진하지는 않았다. “무슨 말인지?” “그래? 아무 사이도 아닌 거지? 그렇다면 다행이군. 내가 덮쳐도 상관없는 건가.” 듣기를 바라는 마음이 다분히 묻어나는 말을 뱉는 게, 음담패설 수준까지 가도 성우는 여전히 무관심했다. 무시당하자 청년, 경운린은 속이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폭발하기 바로 직전, 성우는 대답했다. “마음대로. 다만, 할 수 있다면 이겠지만요.” 툭 던져놓듯 뱉어놓는다. 비웃음과 어울리는 말투가, 무표정과 함께 나오니 경운린에게는 오히려 무시당하는 것보다 성질나는 대응이었다. “이···!” “낚시하는데 방해됩니다. 어서 자신이 한 말이나 실행시켜보실래요?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응원이라도 날려줄 테니까요.” “낚시? 흥! 네 놈이 고기를 낚으면 내가 손바닥을 지진다!” “흐음, 어느 불입니까?” 마치 그것만은 흥미가 생긴다는 듯 눈을 반짝이며 물어오는 성우였다. 경운린으로써는 시비 걸러왔다가 오히려 화만 잔뜩 안게 되는 상황이었다. 그가 생각하는 음모는 어느 누구나 할 수 있는 간단한 것이었다. 우선 미녀의 동료에게 시비를 걸고, 한 대 맞아준다. 그리고 정당방위로 동료를 쥐어 패고, 그에게서 방열쇠를 갈취한다. 자고 있을 그녀를 덮친다. 명분은 동료의 책임을 대신한다는 것으로 해결. 강호의 공분을 살만한 행동이지만 그 자신에게는 권력이라는 게 있었다. 오히려 자신의 권력을 보고 미녀는 자신의 것이 될지도 모른다(본인은 이것을 노리고 있다). 시비는 자신이 걸었지만 약육강식弱肉强食이란 단어는 이런 데에 쓰라는 게 아닌가. 뭔가 허점이 상당히 많은 계획이었지만 뇌에는 색정이, 몸에는 오만함만으로 가득 찬 경운린이 눈치 챌 리 없었다. 그런데 초장부터 빗나갔으니 분통이 터질 만도 했다. 그래도 이번에는 좋은 시비거리를 잡았다. “만약 네 녀석이 잡으면 손바닥 위에 담뱃불을 놓지. 대신 잡지 못하면······.” “앗.” 언제부턴가 경운린의 말을 무시하던 성우는 자신이 수면 위로 펼쳐낸 경사 근처로 오는 파동을 잡아냈다. 막대도 그랬지만 경사에서도 일체감을 느끼고 있었던 터라, 수면의 감촉이 시각에 비견될 정도로 확연히 느껴질 정도였다. 첨벙-! 물이 튀며 성인 남자 팔뚝만한 비단잉어가 모습을 드러냈다. 경사에 꽁꽁 묶인 채로, 제대로 반항도 못하는 잉어는 많은 사람의 탄성을 한 몸에 받았고, 한 사람의 증오에 가까운 경악을 받았다. 막대 끝에 따라 허공에서 발버둥치는 잉어는 마침내 성우의 손에 잡혔고, 성우는 경을 담은 주먹으로 후려쳐 잉어를 기절시켰다. 퍼덕퍼덕 기세 좋게 꿈틀거리는 잉어. 햇살을 반사하는 비늘이 경운린을 비웃는 것처럼 보였다. 성우가 경운린의 얼굴 앞에 잉어를 들이대며 씨익 웃었다. “언제 지지겠습니까? 지금?” “이이익!!” 경운린이 인내를 참지 못하고 추영금나수追影擒拿手를 펼치려는 그 순간. 시끄러운 꽹과리 소리가 갑판을 넘어 압제강을 한 가득 채웠다. 언제부턴가 날카롭게 물길을 가르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커다란 충격이 배를 뒤흔들었다. 무공을 펼치려는 준비를 하느라 돌발적인 상황에 미처 대응을 하지 못한 경운린이 충격에 갑판 위를 데굴데굴 구르다가 선실 입구에 부딪쳤다. “수적이다아앗!!” 사람들의 비명성이 선두船頭에서부터 울려왔다. 세월아, 하며 태연히 낚시를 하던 사람들은 언제 그랬냐고 따지기라도 하는 듯, 후다닥 낚시도구를 버리고 선실로 도망쳤다. 난간을 잡고 충격을 버텨낸 성우는 멍하니 손에서 사라진 잉어의 잔영殘影을 응시했다. 잔영이 사라졌다. 텅 빈 손이 허전했다. 때맞춰 배에서부터 3미터 정도 떨어진 수면에서 풍덩, 소리가 울렸다. 성우는 한숨을 쉬었다. “왠지 흔한 패턴 같지만. 갑작스럽게 다가오는 점에선 이야기의 주인공이나 나나 어쩔 수 없는가 보군.” 다시 한 번 떨리는 강 수면을 응시하며 한숨을 쉰다. 배와 배가 부딪쳐, 모터의 출력대결이 일어난 덕분에 수면이 요동치고 있는 것이다. 덕분에 잉어를 다시 볼 순 없었다. 미련이 심했다. “맛있게 보였는데.” 손질 한 적 없어 보이는 텁석부리 수염, 소매를 뜯어 활동성을 강조한 복장, 장대한 체구. 그야말로 수적의 본보기라 할 수 있는 사내가 확성기에 입을 들이대고 외쳤다. “아아, 아시다시피, 쾌적한 여행을 위해선 한 두 번씩은 거쳐 가는 관문이올시다. 얌전히 가지고 있는 물건의 3분의 1만 때어놓으신다면 압제강을 무사~히 건너게 해드리지요. 이 호강채虎降寨, 약속을 어긴 적 없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단, 반항하면 확 돌아버릴 수도 있으니 주의하시구려.” 위압적이진 않지만, 그 내용만으로 충분히 사람을 압박하는 소리가 태연하게도 흘러나왔다. 호강채는 10년 전부터 압제강의 물길을 휘어잡은 수로채로, 배를 기가 막히게 잘 몰고, 수공과 백병전에 능한 사내들로 구성되어있어, 적어도 물길 위에서는 패배를 모른다는 수적들이었다. 도적질을 금지시킨 응란국 관부에서도 몇 번 토벌이 행해지려 했으나 본부가 유동적으로 변하고, 호강채의 사람들만큼 물길을 잘 아는 사람이 별로 없으니 찾아도 끝까지 추적할 수가 없다. 그렇다고 제응을 가진 비공대飛空隊를 투입하자니 수지가 안 맞았다. 혹여 라도 눈먼 화살에 비공대가 맞기라도 한다면 그만큼 손해도 없었다. 그래서 관부는 무림의 일로 돌려버렸다. 호강채만이 아니라 다른 수채, 산채도. 표국, 용병단으로써는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공생공사라고, 수적이나 산적들은 돈줄을 불러들이는 사냥감인 것이다. 그러나 호강채는 사냥감이 아니라 사냥꾼이었다. 얄팍한 무공을 믿고 반항하다가 멸문당한 표국이 한 둘이 아니었고, 헛되이 죽어나간 용병들이 댐을 이룰 정도가 되었다. 다만, 3분의 1. 이 조건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키기 때문에 조금 빠른 대신 비싼 여행이라 생각했다. 돈을 미리 준비해 놓고 마는 요령도 언제부터인가 생겼고, 서로가 편해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래봤자 두 눈 멀쩡히 뜨고 대가 없이 재물을 빼앗긴다는 건 속 쓰리다. 경험자들이나 미리 선착장에 쓰여 있는 경고문을 본 사람들은 미리 준비해놓은 재물을 꺼내기 시작했다. 오직 성우만이 멀뚱히 서서 승객들의 행동에 섞이지 못할 뿐이었다. 더하자면 이미 기절해버린 경운린도. “음, 무림을 닮았기로서니, 과거 중국사정까지 닮아버린 건가. 그것도 가속하는 돌진선박이라. 아니 오히려 업그레이드인가?” 수적들의 배는 필요이상으로 선수가 단단했고, 그에 대한 밸런스를 맞추느라 선체가 무거웠다. 그리고 발견되자마자 급속도로 돌진해, 피할 시간도, 대비할 시간도 주지 않고 무식하게 박아버리는 것을 보아 엔진의 순간가속능력이 뛰어나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스스로도 제어할 수 없을 정도로. 이 정도의 효율을 보이는 엔진이라니, 문득 도적주제에 하이 테크놀러지를 사용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순히 편견일지도 모르겠지만, 도적하면 똥구멍 찢어지는 가난을 못 이겨, 부유한 남의 것을 강탈함으로 굶주림을 해결하면서 만들어졌다는 기원이 있지 않은가. ‘뭐, 현실에도 집에다 돈 처바르는 도적놈들이 있지 않나.’ 법을 태연하게 어기고, 웃으면서 사람 죽이고, 그 목숨 값을 한 없이 거대한 탐욕의 주머니에 쓸어 담는 녀석들. 겉으로는 아메리칸 조크 식으로 어깨 으쓱하며 ‘법 같은 건 안 어겼어요~‘ 따위의 말이나 뱉어내는 그들에 비하면, 저들은 양반이다. 3분의 1만 가져가는 게 어딘가. “어찌되었든, 위기군. 가진 게 몸과 낚시대, 총밖에 없는데······ 순순히 ‘아 그러세요, 날이 추운데 수고하십니다.’ 따위의 만담이나 읊으며 넘길 수도 없으니까.” 한숨을 내쉰 성우는 막대를 회수한 후, 선실로 이동했다. “어이, 거기!” 선실 문턱을 넘으려는 순간, 커다란 주머니를 든 말상의 수적이 성우를 불러세웠다. “3분의 1은 놓고 가.” “······재물은 선실에 있습니다만.” “선실은 좀 있다 쓸어갈 거야. 정확히 3분의 1만 말이지. 그 전에 지금 네 녀석이 가지고 있는 3분의 1을 가져갈까 하는 데 말이야.” “그냥, 선실에서 계산하면 안 되겠습니까?” “안 되지. 미리 준비해놓은 물건만 가져가다보면 재미있는 물건이 발견되지 않거든. 혹시, 재미있는 물건이라도 가지고 있는 거냐?” “······설마요.” “에이, 거짓말, 있는 것 같은데?” “없습니다. 있는 건 이런 옷뿐이에요.” “그거라도 줘.” 수적의 탐욕스런 눈길을 본 성우는 아차 했다. 이곳의 옷, 장포 같은 것을 덧입긴 했지만 옷 안에 드러나는 것은 현실에서부터 입었던 T셔츠였다. 합성물감으로 프린트된 문양이 그의 눈에 든 것이었다. 옷이란 게 신기할 건 없다. 하지만 객관적이나 그렇지 수적에게는 처음 보는 옷인 것이다. 이것만으로 그의 욕구를 충족시키고 있었다. 하지만 성우로서는 난감했다. 지금 입고 있는 T셔츠는 현실과 현재의 자신을 잇는 끈으로서의 의미가 강했다. 무엇보다도 성하가 처음 자신에게 사준 옷이라는 점에서 죽어도 지켜야했다. ‘아니, 죽으면 안 되고.’ 하여튼 될 수 있으면 깨끗하게 보관해야 했다. 남에게 줄 수는 없는 것이다. 고민하던 성우는 어쩔 수 없이 전통적인 방법을 써야 했다. 성우가 손가락 하나를 펼쳐 45도 각도로 하늘을 찔렀다. “앗! UF··· 아니 새가 날아든다!” 성우는 무슨 생각이 든 것인지 원래 뱉어내려했던 미확인 비행물체에서 ‘새’로 바꿨다. 리얼리티를 위해서였을까? “큭, 그런 뻔한 수작에 속을 것 같으냐? 잔말말고 내놔!” 의외로 이런 방법은 이 세계에서도 전통적인 방법이었나 보다. 게다가 이 수적은 얼빵··· 아니 순진하게도 많이 속았는지, 호기심으로 떨리는 고개를 바로 잡으며 성우를 응시하고 있었다. “이른바 양치기 소년··· 현상입니까.” “음?” 성우의 중얼거림에 수적이 의문을 표했다. 성우는 그 의문에 해답을 주는 대신 입구의 벽을 잡고 한쪽 무릎을 땅에 대었다. 마치 충격에 대비하는 듯한 자세였다. “엎드리는 게······.” 성우가 뒤늦게 중얼거린 순간, 쾅------!!! 또 다른 충격이 선박을 뒤흔들었다. 이번 충격은 옆에서 옆으로의 횡적충격橫的衝擊이 아닌 위에서 아래로의 종적충격縱的衝擊이었으므로 그 흔들림의 정도가 아까보다 3배는 심했다. 순례선이 물에 푹 잠겼다가 부웅- 떠올랐고, 그 반동에 갑판위에 올라와있던 승객들과 수적들이 2미터의 허공중에 떠올랐다 떨어졌다. 연속적으로 타격음이 울렸고, 후폭풍처럼 비명성이 퍼졌다. 물이 참방이는 소리도 계속적으로 들리는 것이 강물에 빠진 사람이 꽤 되는 것 같았다. 성우의 옷을 탐내던 수적 역시 물리적 상황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2미터를 붕 뜨다가 중심을 못 잡고 그대로 갑판에 얼굴을 박았다. 피가 섞인 누런 옥수수 두 알이 성우의 발 앞으로 떨어졌다. “···좋을 것 같았지만, 뭐 늦었네요.” 양치기 소년의 거짓말에 만성이 되면, 진실을 말해도 거짓으로 듣는다. 많이 속았던 사람의 지레짐작은, 이래서 치명적인 것이다. “잘 닦고 다니시지. 이 세계에도 치약은 있던데.” 옥수수 아닌 옥수수 알을 보고 성우는 중얼거렸다. 성우는 다른 사람과는 다르게 무사했다. 충격에 대비하고 발경을 응용해 발을 선실바닥과 일체화시킨 덕분에 몸의 중심이 흩어지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애초에 예기치 못하게 처음부터 끝까지 상황을 지켜본 덕분이었다. UFO 대신, 딱 한 번 봤을 뿐인 제응을 방불케 하는 거대한 새가 급전강하急轉降下하는 것을 보았을 뿐이다. 새는 브레이크도 없이 거대한 발을 앞세워 갑판 위로 떨어졌다. 단지 그랬을 뿐이다. 그것만으로 이딴 상황이 연출되었지만. 사람만이 떨어진 게 아니었다. 이 충격으로 수적들의 배와 순례선의 선수가 떨어져나갔다. 수적들의 배에도 충격이 퍼졌는지, 혹시 있을 일을 대비해 무기를 준비하던 수적들이 당황하고 있었다. 수금원으로 전투원이 아닌 비전투원들이 갔었기에 뜻밖의 전력손실은 막을 순 있었으나, 그렇다고 놀란 가슴이 진정되는 건 아니었다. “대붕!” 누군가가 외쳤다. “뭐야 대붕이라고? 붕련국의 신조가 갑자기 응란국엔 어째서?” 붕련국의 상징인 대붕이 난데없이 순례선을 덮쳤으니, 당황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산전수전 공중전 다 겪은 호강채의 수적들도 대붕의 출연에 매우 놀랐다. 그도 그럴 것이 순수 응란국 사람으로만 이뤄져 있는 호강채 수적들에게 대붕은 그림이나 조각으로 밖에 보지 못한 것이기 때문이다. 붕련국 사람들조차 평생에 한 두 번 밖에 못 본다는 새를 응란국에서 보게 된 것은 확실히 놀랄 일이다. 그러나 수적들에겐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반항은 용서하지 않는다고 했을 텐데!” 확성기에서 굵직한 목소리가 성난 파도처럼 넘쳐 나왔다. 그가 태연하게 말할 때도 무서웠는데, 노성怒聲까지 내니 평민들은 충격 때 쓰러진 그대로 엎드려 머리를 쥐고 신음까지 흘렸다. -뀌아아아악-! 시작은 괴음怪音, 끝에서는 청음淸音. 대붕이 내는 소리를 뜻하는 것이었다. 입에서 나올 때는 소음공해지만, 공기 중에 퍼져갈 때 울리는 공명은 옥구슬소리가 따로 없다 한다. 어느 순간 그런 소리가 압제강의 분위기를 지배했다. 대붕이 날개를 펄럭였다. 홰를 한 번 쳤을 뿐인데도, 물결 위에 파랑이 일었다. “에잇, 새대가리를 공격해! 될 수 있으면 기절만 시키고! 아마 채주님께서 좋아하실 것이다!” 마취제를 묻힌 화살이 하나 둘씩 단궁에 재어졌다. “사射!” 누군가의 외침에 일제히 대붕을 향해 화살이 날았다. 그때, 대붕은 뭔가 달랐다. 영성을 가지고 있는 대붕이라면 날개를 접어 화살을 막았을 것이다. 그러나 대붕은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피하는 것도, 막는 것도. 다만 구슬프게 한 번 크게 울었을 뿐이다. 마치······ 앞으로 일어날 참상을 미리 예견하듯. 대붕의 등에 붙어있던 그림자 하나가 일어섰다. 날개 뼈에 감춰져 있던 그것이 섰지만 누구도 그것의 등장에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대붕만 주시하고 있었던 성우만 제외하고. 다름이 아니라 대붕이 등장했을 때부터 신경 쓰였다. 성우는 원래 신경이 예민해서 아무것에나 신경 쓰는 캐릭터가 아니다. 그럼에도 신경 쓰인다는 것은, 전에도 말했다 시피, 자신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을 때 만이다. 대붕이 떨어지고 난 뒤부터, 무언가 집요하게 몸을 감싸는 시선 같은 것을 느꼈다. 대붕은 분명 수적들의 배 쪽에 몸을 향하고 있었는데, 시선 같은 게 느껴지다니, 이상했다. 그런 이질감에 주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대붕의 변화를 눈치 챘다. 아주 서서히 일어나는 그림자는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것도 여자?’ 대붕의 등에 누워있던 그녀가 일어나자, 우연인지 성우와 시선반경이 교차했다. 싸늘한 냉기가 느껴졌다. 화살이 바로 그녀의 뒤에서 날아오고 있는데, 의미 없는 자신이나 쳐다보고 있는 그녀가 이상하게만 느껴졌다. 화살 따위는 신경 쓰지도 않는 다는 듯, 성우만 쳐다보고 있던 그녀의 등 뒤로 매정한 화살이 꽂혀들었다. 대붕에게도 하나둘씩 꽂혔다. 수적들은 쉴 세 없이 재장전하여 화살을 발사했고, 8할의 확률로 대붕과 그녀의 몸에 박혀들었다. 그러나 대붕과 여자, 둘 다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제 서야 수적들도 여자의 존재를 눈치 챘다. “이런··· 주인이 있었나! 안타깝군!” 확성기에서 전혀 안타깝지 않은 목소리가 의례적으로 내뱉는 대사인양 가볍게 입 밖으로 빠져나왔다. 하지만 그의 입은 결코 자의에 의해 닫힐 수 없었다. 대붕과 여자의 몸에 박혔던. 아니, 박힌 줄 알았던 화살이 싸늘하게 경직되며 미세한 단위로 부서졌다. 얼음가루들은 마치 지구 남극에서 일어나는 다이아몬드 더스트(Diamond Dust)현상처럼 휘날렸다. 그 광경을 본 모든 사람들의 입이 함지박 만하게 벌어졌다.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인간의 육신으로, 초속 170미터를 넘는 화살을 단숨에 얼릴 냉기를 뿜어낼 수 있다니. 그녀의 고개가 옆으로 움직였다. 그녀가 가지는 시선의 반경이 수적들의 배를 포함했다. “방해자인가.” 너무나 맑아 오히려 섬뜩한 목소리. 여자의 입이 움직인 것으로 봐서 그녀의 목이 낸 소리임에 틀림없다. 그녀는 빈손을 휘둘렀다. 빈손이었음에도 언젠가부터 얼음으로 만들어진 곡도가 들려있었다. 마치 옛날부터 함께인듯 그녀의 손에 붙어있던 곡도가 웅웅웅 진동음을 토해냈다. 그 순간 강에서 난데없이 몇 줄기의 물이 지하수처럼 뿜어져나왔다. 그것은 그대로 얼음곡도를 향해 달려들었다. 쩌거거걱--!! 85센티미터 쯤 되는 도신刀身을 중심으로 많은 양의 물이 모여들자 또 다시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도신은 도심刀?이 되어 칼의 기본틀을 만들었고, 물은 도신에서 뿜어진 극음極陰에 휩싸여 칼을 이루는 재료로서 역할을 다했다. 한순간에 만들어진 15미터 길이의 투명한 얼음도. 휘두를 수나 있을까, 라는 누군가의 의문에 여인은 스스로 답을 낼 시간도 주지 않고, 순례선의 갑판을 향해 가볍게 휘둘렀다. 서걱- 가볍게 휘두른 만큼 가벼운 마찰음만 일어났을 뿐이다. 그러나 결과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사람을 떠받치는 배의 갑판에서부터 물에 대항하여 배를 떠받치는 배의 밑창까지. 칼의 형태를 취한 그것은 헛웃음이 나올 정도로 가볍게 배어버렸다. 배가 기울었다. 전체 길이의 6분의 1이긴 하나, 배를 두 동강낸 것이다. 선수가 잘려나간 배는 배로써의 가치를 잃어버린 것이다. 단지 뗏목일 뿐이다. “우아아아악!!” 15년 동안을 함께 해온 배가 복구불가의 손상을 입자, 선장은 괴성을 끝으로 기절했다. 승객들은 그에 조금 못 미치나 나름대로 살기 위한 아우성을 치며 강물로 뛰어들었다. 난데없이 구명복求命服 쟁탈전이 벌어지며 배위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모르긴 몰라도 선실은 더 심하면 심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난 건 아니었다. 끝날 리가 없었다. 그녀가 방해자로 정한 것은 병장기를 든 수적들이지, 자기생명 귀한 것을 일찍이 깨달아 남의 생명 밟고 올라서려는 불쌍한 승객들이 아니었다. 그녀는 가볍게 몸을 띄웠다. 6미터 높이로 치솟은 그녀는 수적들의 배를 향해 수직으로 칼을 휘둘렀다. 강력한 역도를 담은 그 일도에, 갑판을 비롯한 내실까지 걸리는 것은 모조리 잘려나갔다. 물론, 잘려나가는 갑판 위에 있던 확성기와 확성기를 든 수적마저도. 피가 뿜어졌고, 내장이 터져나가며 정수리를 시작으로 회음까지 다다른 혈선을 기준으로 양쪽으로 갈라졌다. 믿을 수 없다는 의미를 담은 두 눈이 각기 다른 방향으로 쓰러졌다. 피가 얼어붙어 새빨개진 칼을 망설임 없이 횡으로 휘둘렀다. 단지, 팔과 팔목만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전신을 회전시켜 칼을 휘두르는 것이다. 부웅-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지나갔다. 갑판에 내리 비취던 26개의 그림자가 한 순간, 반으로 갈렸다. 그녀의 반경 15미터 안에 있는 모든 수적들의 상체와 하체가 이별해야 했다. 갑판에 우뚝 선, 26개의 자랑스러운 뱃사람의 하체에서부터 26줄기의 피분수가 터져 나왔다. 갑판을 기는 26개의 상체에서부터 꾸역꾸역 내장이 밀려나왔다. “우웩!” “웨웩!” 구토와 기절을 하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수적들이건 승객들이건, 이순간은 한 마음으로 강대한 힘에 약자가 되어 괴로워하는 것이다. 지옥도가 따로 없었다. 갑판이 피바다가 되는 건 순간이었고, 맑았던 호수가 피로 물드는 것도 다른 시간이 지나지 않았다. “도망쳐!!” 자맥질이 능한 수적들은 강물에 몸을 던졌다. 최대한 빠르게 이 구역에서 벗어나야 했다. 용맹한 수적이 화살을 쏨과 동시에 분수자分水刺를 꺼내 여인에게 달려들었다. ‘거리를 좁히면 한 방 먹여줄 수 있어!’ 훌륭한 대처법이었다. 물론 그녀가 도만 쓸 때, 성립되는 이야기겠지만. 여인이 도를 사선으로 휘둘러 화살을 튕겨내며 다시 4명을 죽였고, 그녀가 쏟아내는 일도를 아슬아슬하게 몸을 피한 수적은 그녀를 향해 분수자를 휘둘렀다. ‘어라? 어째서··· 이렇게 몸이 느려지는 거지?’ 언제부터인가, 수적의 몸에는 하얀 서리로 뒤덮여있었다. 여인이 뿜어내는 극도의 냉기에 혈관이 얼어붙고 근육이 뒤엉키고 골수를 잃은 뼈가 부서졌다. 안에서부터 얼어 부서지는 수적의 몸에 용서 없는 여인의 얼음도가 떨어졌다. 그렇게 1분이 흘렀을 것이다. 1분이지만 수적에게는 억겁 같던 시간. 선수를 잃은 순례선과 밑창이 뚫린 수적들의 배가 침몰하기 시작했다. 혼란의 와중에도 살아남은 수적은 체면이고 복수고 뭐고 다 포기하고 강물로 뛰어들었다. 이제 갑판이라는 것 위에 있는 사람은 오직 그 여인과 성우뿐일 게다. 여인은 성우를 한 번 흘겨보더니 순례선과 수적선 한 가운데를 향해 뛰어들었다. 당연히 강물이 있었고, 그녀 역시 강물에 빠졌다. 그 순간, 여인이 빠지면서 생겨난 파문에서부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쩌저저저저- 즈가가가각-! 강물이, 얼고 있었다. 남방에 위치해 비교적 따스한 곳에 위치한 압제강이다. 겨울이 되어서야 살얼음도 겨우 끼는 곳이란 말이다. 살얼음은커녕, 무기를 깎아 만들어도 효과적일, 단단한 얼음으로 강물이 뒤덮이고 있었다. 얼음의 범위는 점점 넓어지더니 수적선과 순례선의 침몰까지 막아냈다. “어어어어어!!” 덕분에 수면에서 자맥질을 하던 승객이나 수적들은 모조리 얼음감옥에 갇힐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어갔다. 강물이 동결되면서 시간까지 얼어붙은 듯. 주변에 움직이는 게 모두 없어졌을 때, 성우는 한숨을 쉬며 생각했다. ‘역시··· 관계된 일입니까.’ 그리고 입을 열었다. “저에게··· 무슨 볼 일이라도?” 어느새 강물에서 빠져나온 여인에게 물었다. 어떠한 놀람도, 어떠한 두려움도 없이 성우는 말했다. 수많은 사람이 죽어나가도 태연 수많은 비명이 귀를 어지럽혀도 귓구멍을 후빌 뿐 그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다만 침몰하는 배 위에서 책상다리를 하고 상황을 관조할 뿐. 놀라웠다. 이 정도까지 상황을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은 그녀로서도 본 적이 없다. 그녀는 고개를 흔들었다. 이 사내에게 감탄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15미터의 칼이 부서져나갔다. 천천히 부서지다가 오직 도심, 원래의 도신만이 남았다. 잿빛이 안에 섞인 새파란 얼음도, 그 도극이 성우를 가리켰다. “네 놈이··· 제린을 죽였나.” 현월의 주인은 차갑게, 말했다. 살인의 여운도, 쾌감도, 죄책감도 없이 싸늘히 한 마디를 뱉어낼 뿐이었다. “아니요.” 성우는 고개를 젓고 툭- 하고 내뱉었다. 2분, 단 2분만에 잔잔한 강물 한 가운데, 지옥을 만들어낸 여인. 그런 그녀에게 하는 말치곤 담백하기 짝이 없는 대답이었다. 13미터, 12미터, 천천히 성우에게로 다가오던 그녀는 그 대답에 걸음을 멈췄다. 기대했던 대답이 아니다. “무슨 소릴 하는 거냐.” “그런 사람 모릅니다.” 거짓을 말하는 기색도 없이, 썰렁하게 뱉어버린다. “불꽃을 사용하는 남자다. 그래도 모르나?” “불꽃을 사용하는 남자를 만나기는커녕 화식火食을 한지도 오래되었군요.” 대답을 들을 때마다 속이 꽉 막히는 것 같았다. 말투에서, 분위기에서, 내용에서. 또한 도저히 연금술사로 보기엔 어려운 행동양식에서 마음 속 깊은 곳부터 갑갑함을 느꼈다. 그녀는 한숨 대신 짧게 숨을 뱉어내고 말을 달리했다. “후후후, 그럼 유철산이라는 사람은 아는가?” “지극검 유철산을 모르는 사람이 응란국 안에 있습니까?” 너무나 당연한 말을, 당연하게도 뱉었지만, 원하는 대답이 아닌 이상 그녀의 분노를 살 수밖에 없었다. 극음도가 새파란 한기를 휘감으려 할 때. 성우가 때맞춰 말꼬리를 이었다. “4일, 아니 3일 동안 정신을 잃었으니 6일이 되는 군요. 그 정도 시간이 흐르기 전에 개인적으로 만난 적은 있습니다.” “나를··· 놀리는 건가?” 씨익. 돌연히 그가 웃었다. 어떠한 의미도 담지 않고, 그냥 입 꼬리를 올렸을 뿐이다. 그러나 그녀에겐 화가 나는 반응이 아닐 수 없었다. 그녀가 살기를 흘려도, 성우는 말했다. 석년의 소크라테스처럼. “사실을 말했을 뿐입니다.” “······!” 화가 났다. 화가 날수록, 그녀는 입을 열지 않았다. 분출되는 감정은 모두 급속도로 얼어붙어, 스스로도 무서울 만큼 순식간에 냉정해져버린다. 역으로 속으로 안는 감정은 더욱 오래간다. 그녀 자신만이 가질 수 있는 분노의 색깔로 덧칠되어버린다. 어느 때보다 냉혹하며, 어떤 순간보다 더욱 싸늘하게 분노를 불태운다. 가슴 가득, 차가운 청염靑焰이 타올랐다. “뭐··· 상관없어. 중요한 것은 네 일행 중에 하나가, 제린을 죽였다는 거고, 연죄죄連坐罪를 물어 내 분노를 받는다는 것이다. 지옥을 경험할 준비는 되었나? 어린 연금술사여.” 극음도에서 흘러나오는 냉기가 짙어졌다. 그녀의 주위에 안개가 끼기 시작했다. 그녀가 딛고 있는 갑판에 얼음구슬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밝은 청색 경장에, 속이 비치는 하얀 면포를 꼬아 상반신 전체를 휘감은 특이한 옷차림에는 더없이 어울리는 배경이다. 길게 뻗은 흑발이 한 올 한 올씩 치솟아 오르며 푸르슴한 빛깔로 덧입혀갔다. ‘화폭에 담고 싶군.’ 멍청하기까지 한 생각과는 달리 손안에서는 식은땀이 잡혀있다. 담백하게 말하긴 했어도, 위기를 모를 만큼 바보는 아니었다. ‘통기경은 유라 씨에게 회수 당했는데······. 나, 정말 위기?’ 아직 정상인지 아닌지 제대로 알 수 없는 몸에 휴식기간을 두지 않고 통기경을 쓴다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며 압수했다. 어쩔 수 없는 돌발상황이 일어난다면 그 때, 돌려주겠다고 했는데, 지금이 그 돌발상황이다. ‘그러고 보니 유라 씨는?’ 유라와 같은 연금술사가, 이런 소동을 눈치 못 챌 리 없었다. 소동이 일어나고 벌써 4분 정도 경과했는데, 모습조차 드러내지 않다니, 이건 뭔가 이상했다. 최소한 유라의 트렁크만이라도 손 안에 쥐고 있으면 안심이 될 것이다. 방패로는 그것보다 적격인 게 없었으니. 방패가 있다면 행동반경에 많은 여유가 생긴다. 지금은 없다. 무엇보다 상대에게 틈이없다. 그녀의 허락 없이 움직였다간 언제 죽은지도 모르게 죽을 수도 있다. 방금 전, 수적들을 몰살시킨 솜씨에서 유추해낸 결론이었다. ‘난감하군.’ 그 순간, 기적이 일어났다. “으으으, 음? 썩··· 을! 아파 죽겠군.” 마침 갑판 위를 나무토막처럼 굴러다니던 경운린이 깨어난 것이다. 그의 위치는 공교롭게도 성우와 여인의 한가운데였다. “제길! 그 새끼 어디··· 음.” 경운린은 다행인지 불행인지, 여인에게 시선을 먼저 돌렸다. 오른쪽으로 돌렸다면 성우를 먼저 봤을 텐데, 그의 고개는 왼쪽으로 먼저 돌아가 있었다. 그는 헛기침을 하며 자신의 옷차림을 정돈했다. “아가씨, 당신의 방명··· 저에게 가르쳐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의 말은 어딘가 모르게 신선함이 부족했다. 바로 몇 시간 전, 유라에게 한 말과 한 치의 오차도 없었다. 여인은 무슨 헛소리냐는 듯 멀뚱히 경운린을 쳐다보다, 성우에게 시선을 옮겼다. 입가에 피어나는 차가운 미소. 성우는 어느 때보다 더욱 큰 위기감을 느꼈다. 경운린이 여인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하지 않는 것을 느끼고 뒤를 돌아다보았다. 성우가 보였다. 당연히 그의 얼굴이 고와질 리 없었다. 하지만 작업 걸 여인 앞이다. 신중해야 했다. ‘제길 좀 있다 죽여주마! 개호로잡새끼!’ 얼굴을 일그러뜨려 성우를 위협했다. 그러나 성우는 그의 얼굴 따윈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여인의 차가운 미소가, 그의 시선을 완전히 뺏었기에. “좋겠지. 내 이름은 아리야蛾利冶. 기억해둬라.” 경운린의 얼굴이 여인을 향해 돌아갔다. 작업성공! 회색이 만연한 얼굴이었다. 그 순간, 그녀의 차가운 웃음은 비웃음이 된다. “너를 죽인 단륜부일지니.” 누구에게 한 말일까. 그 의미도 제대로 전달이 되지 않은 채, 그녀가 움직였다. 신형이 잠시 흔들렸다. 어느새, 도를 옆으로 세워들고 있다. 몸이 잔상을 일으킬 정도로 빠르게 튕겨 앞으로 전진하고, 극음도가 현월을 그렸다. 웃고 있는 경운린의 머리가 붕 떠서 하늘로 치솟았다. 목에서는 피분수가 터져 나왔다. 그리고 피분수채로, 급속도로 얼어, 얼음기둥이 되었다. 피로 만들어진 얼음 기둥 위로 경운린의 머리가 꽂힌다. 정수리 위로 새빨간 창날이 모습을 드러냈다. 피로 범벅이 되어있어도 여전히 웃고 있는 낯이었다. 섬뜩함을 느낄 새도 없이, 성우는 양 주머니의 권총을 빼내 난사했다. -탕탕탕탕! 난사라고는 해도 범인을 뛰어넘는 완력과, 경에 의한 고정이 곁들여진 것이라 베테랑 스나이퍼도 놀랄 만큼 정밀한 사격이었다. 인간을 한참 뛰어넘는 동체시력을 가지고 있어도, 총알을 잡기엔 무리가 있었다. 공을 익힌 인간의 시력이라 해서 별다를 게 없다. 다만 단륜부로서 공을 익히며 쌓아오고, 실전에서 단련된 감각은 시각 같은 현실적인 것보다 훨씬 이런 갑작스러운 기습에 잘 대응했다. 수증기처럼 일어나는 한기의 장막. 총알은 얼어붙고 회전은 둔화되었다. 궤도가 살짝 틀어지고, 그녀 자신도 몸을 낮췄다. 그 결과 네 발의 총알 중, 세 발이 헛되이 날아갔다. 하지만 워낙 갑작스러웠던 사격이라 그녀로서도 전부피하는 것을 무리였다. 한 발의 총알이 그녀의 흉부 위, 어깨살을 파고들었다. “북부 연금술사!” 아리야는 이를 뿌드득 갈았다. 유철산은 연금술사라고만 했지, 북부 연금술사라고는 하지 않았다. ‘능구렁이 같은 노인네.’ 전진을 멈추고 반쯤 박혀들었던 총알을 빼냈다. 그녀의 얼음 같이 차가운 피부 아래는 또 한 겹의 얼음보막保膜이 있다. 그것은 어떠한 날카로운 공격에서도 그녀의 몸을 보호하는 역할을 했다. 찢어진 면포와 구멍 난 경장, 총알이 뚫고 지나간 그곳에서부터 서리가 낀 금속알갱이 하나가 빠져나왔다. “도망치는 것도 총 쏘는 것만큼 빠르군.” 어느새 성우는 아리야의 시야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사실, 성우가 정면대결을 하면 그게 이상한 거다. 누가 봐도 전력 차는 명확했으니까. 하지만 그녀가 처리했던 숫한 무인들과 연금술사들 중에, 이렇게 쉽게 도망치는 인간은 없었다. 물론 그들에겐 지킬 것이 있고, 긍지가 있기 때문이겠지만. 그녀로선 너무나 생소한 성우의 반응에 신선함은커녕 짜증을 느낄 뿐이었다. “나오지 않는다면, 나오게 할 수밖에.” 아리야는 왼손을 위로 뻗었다. 그러자 얼어버린 강 표면을 뚫고 물줄기가 하늘로 치솟았다. 이내 6톤쯤 되어 보이는 대량의 물줄기가 배 위를 지나가다가 아리야의 손이 흔들리자, 그대로 얼어 배 위로 떨어졌다. 쾅- 쾅- 쾅- 쾅-! 갑판이 꿰뚫리며 선내에 얼음의 창이 파고들었다. 자그마한 비명소리가 울렸다. 선내에는 아직도 사람이 남아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에 구애받을 아리야가 아니었다. 계속적으로 뿜어져 나오는 물줄기를 자신이 가지는 한기로 모조리 얼려, 갑판에 구멍을 늘릴 뿐이었다. 성우는 선실 복도를 달리고 있었다. 총 갑판을 포함한 3층 구조로 선실 중, 2층 선실이라 그런지 물이 질퍽질퍽하게 전진을 방해했다. 쾅- 콰드득! “음!” 성우는 천장을 뚫고 나오는, 20년 산 소나무 정도 되는 크기의 얼음의 창을 피했다. 갑작스러웠지만 충분히 피할 수 있었다. ‘확실히··· 강해진 건가?’ 깨어났을 때부터 뭔가 조금 다른 느낌이 들었다. 그냥 내기를 승리로 이끌어 뭔가 정신적으로 강해졌다는 것인가 보지, 하고 넘겨버렸던 감각이었지만, 위기 때가 되니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통기경을 복용해서 한계를 넘는 움직임을 보였을 때, 몸 전체가 망가졌었다. 통상 몸이 완전하게 복구될 정도라면 망가진 뼈, 근육, 신경 같은 종류는 예전보다 더욱 강하게 진화한다고 한다. 한계를 체험하고 돌아온 몸 자체가, 성장했다고 보는 게 맞았다. 그래서인지, 통기경을 먹었을 때보다는 훨씬 느렸지만, 예전보다는 훨씬 빠르게 위기에 대처할 수 있었다. 성우는 어느새, 숙실 앞에 도착했다. “유라 씨! 유라 씨!” 쾅쾅쾅-! 성우는 문을 강하게 두드리며 유라의 이름을 불렀다. 문고리를 돌려도 찰칵찰칵 소리가 날 뿐이었다. “잠겨있나, 아직 안 나갔다는 소리인가!” 성우는 끔찍한 장면하나가 머릿속을 스치고 가는 것에 몸을 슬쩍 떨었다. 조금쯤 떨리는 손으로 열쇠를 꺼냈다. 열쇠구멍에 넣으려 했을 때, 얼음의 창이 맞은 편 복도에서부터 선을 이루며 떨어지고 있었다. “제길!” 순차적으로 떨어지는 얼음의 창을 피했다. 그러자 문 앞에는 얼음감옥처럼 창살이 가지런히 서 있었다. 그 빈틈으로 열쇠구멍이 보였다. 그보다는 열쇠, 방금 충격에 떨어트리고 만 것이다. 발목까지 차오른 강물, 어두웠고, 그나마 있는 빛도 산란시켰기 때문에 눈이 필요이상으로 밝아진 성우로서도 쉽사리 찾기가 힘들었다. “이것을 찾으시나요?” 찾고 있던 열쇠가 물방울을 뚝뚝 흘리며 성우의 눈앞에 드리워졌다. “고맙습니다.” 성우는 얼음창살 사이로 손을 비집어 넣어 열쇠구멍에 열쇠를 넣었다. 찰칵-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문고리를 돌리기만 하면 유라 씨의 상태를 확인할 수 있었다. “···와, 같은 행동을 할 때가 아닙니다. 유라 씨.” 유라는 조금 젖은 옷차림이었다. 그녀의 오른손에는 커다란 트렁크가 들려 있었는데, 이 역시 젖어있었다. 젖은 머리카락에서 물방울이 떨어졌다. “잠수라도 하고 오셨나요?” 실례라는 걸 알지만, 문득 궁금증이 일어 물었다. 대답 대신 유라는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트렁크를 휘둘렀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반사적으로 성우가 주저앉아 트렁크를 피했다. 촥-! 수면을 때리는 소리가 울리며 물방울이 어지럽게 흩어졌다. 이상한 현상이었다. 난데없이 왠 물소리와 물방울이란 말인가? 성우가 조금 멍해져 있는 사이, 유라는 그의 손을 잡고 달렸다. “물속에는······.” “······?” 달리던 유라가 말을 꺼내자 성우는 멀뚱하게 그녀의 달리기에 보조를 맞추면서 귀를 기울였다. “물속에는 거대한 빙산도 가라앉는 것을 막아낼 괴물이 있어요.” “우연인가요?” 성우도 1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보며 중얼거렸다. 1층으로 올라갔다. 선실복도를 지나 갑판으로 향했다. “갑판 위에는, 그런 빙산도 만들 수 있는 괴물이 있는데 말이에요.” 그 순간, 갑판위로 모습을 드러내는 그들에게 용서 없이, 얼음의 창이 떨어졌다. 콰드득! 뾰족한 창날이 거대한 네모방패에 박혀 형체를 잃었다. 유라가 어느새 트렁크를 들어 막아낸 것이다. 하지만 얼음 창의 분량은 소나기와 같았다. 한 번, 두 번, 세 번······. 단지 위치에너지를 이용할 뿐이라, 힘들이지 않고 다량의 얼음 창을 쏠 수 있었다. 얼음 창이 대량으로 부딪히며 나는 파괴음이 귀를 괴롭혔다. 어느새 성우와 유라의 주위에는 얼음가루가 산처럼 쌓여있었다. ‘팥과 시럽만 있으면 팥빙수 장사해도 될 정도군.’ 성우는 무심코, 그렇게 생각했다. 아닌 게 아니라, 보기만 해도 시원해지는 하얀 얼음가루가 모래성처럼 쌓여있으면 누구나 그런 생각을 할 것이다. 물론 콰드득, 콰드득, 하는 뼛속깊이 울리는 섬뜩한 소리만 없다면. “조금 힘드네요.” 내용과는 달리 가볍게 나오는 음성이었다. 성우는 지금 유라가 들고 있는 가방의 정체가 갑자기 궁금해졌다. 높은 곳에서 떨어져도, 사람을 후려패도, 날카로운 검으로 후려쳐도, 멀쩡했다. 두꺼운 나무로 이뤄져있는 갑판조차 꿰뚫어버리는 얼음의 창마저 막아낸다. 그것도 한 번이 아닌 여러 번이나. 그야말로 질량대비내구력의 한계를 보여주는 가방이었다. 그것뿐만이 아니라 유라의 연약한 몸무게에도 중심이 흩어지지 않고 충격을 견디는 것을 보면 충격흡수기능까지 있는 것 같았다. 그런 가방 안에는 대체 무엇이 들어있을까? 생각해보면 한 번도 유라가 가방을 여는 걸 본 적 없었다. ‘무엇이 들어있을까.’ 얼음 부서지는 소리가 멈췄다. 유라는 가방을 내리고 지금껏 얼음의 창을 맹렬히 꽂아 넣던 여인을 쳐다보았다. “당신인가요?” “네 녀석이냐.” 두 사람은 동시에, 그렇게 서로를 확인했다. “내 수면을 방해한 사람이.” “제린을 죽인 것이.” 분위기가 상반된 내용이 서로 오갔다. 성우는 유라쪽이 진지함이 떨어진다고 내심 생각했다. ‘······그런데, 분위기는 필요이상으로 진지하잖아.’ “연금술사의 수면을 방해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나요?” “연금술사의 동료살해가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알고 있나?” 그들은 동시에 말을 교환하고 있었다. 마치 짜고 하는 연극처럼, 누구도 귀뜸 하지 않았는데, 같은 시간대에 말을 뱉는다. 서로의 기세. 대면하는 순간, 만만치 않다는 것을 느꼈고, 이런 단순한 말다툼이라도 밀리는 기색을 보이는 건 위험하다는 본능적인 감각이 앞서서였다. 그리고 그들은 서로를 향해 선언한다. “죽음이네요.” “지옥이다.” 누가 먼저랄 건 없었다. 두 사람의 신형이 사라졌다. 성우의 동체시력이 쉽게 따라잡기 힘들 정도의 빠르기였다. 굳이 누가 먼저라면 아리야가 먼저라 할 수 있었다. 그녀의 무기, 극음도는 이미 그녀의 손에 쥐어져있었다. 극음도가 반원을 그렸다. 오른쪽에서 왼쪽 아래로, 잔광대신 서릿발을 남기는 곡도가 유라의 어깨 위로 떨어졌다. 유라의 경우, 트렁크를 성우에게 던지고, 안주머니에서 비수를 빼내야 했다. 아리야보다 조금 늦었다. 츠캉! 재질불명의 비수에 서리가 눌러 붙으며 극음도의 전진이 막혔다. 유라의 손안에서 비수가 돌았고, 극음도의 도신은 타의에 의한 전진을 시작했다. 극음도가 완전히 휘둘려져 빈틈이 생겼다. 유라는 아리야의 복부를 향해 짧게 발차기를 날렸지만, 어느새 생겨난 한기가 하체를 침습하고 있었다. “에잇!” 그러나 기어코 부츠를 아리야의 가느다란 복부에 꽂아 넣었다. 아리야가 물러서면서 극음도를 횡으로 휘둘렀다. 유라가 림보를 하듯, 허리를 눕혀 극음도에서 뻗어 나온 한기와 진공인眞空刃을 피했고, 한기에 침습당한 발을 왼손으로 후려쳐, 바닥에서 때어냈다. 동시에 오른손에 들린 비수를 아리야를 향해 던졌다. 아리야는 복부를 손으로 어루만지다가 갑작스레 다가온 비수를 극음도로 후려쳤다. 동시에 유라의 입이 열렸다. “광光, 폭爆!” 비수에서 광문光紋이 잠시 일어났다 사라졌다. 극음도와 비수가 마주치자, 빛의 폭발이 일어났다. 어떠한 충격파도 없이 생성된 그 빛은 갑판위의 모든 것을 삼켰다. 빛을 틈타, 유라는 비수에 연결된 강사鋼絲를 이용해 비수를 회수하고 안주머니에서 부적을 꺼내 허공에 던졌다. “방放, 철우鐵雨!” 그 부적은 예전, 지검문의 망나니들의 검을 흡수했을 때 사용한 부적이었다. 수많은 검과 날붙이를 흡수했을 그 부적이 일제히 지금까지 모아왔던 것을 토해냈다. 허공을 뒤덮는 칼날에 의해 빛이 반사되며 아리야가 있을 공간을 덮쳐간다. 그러나 어느 순간, 나선으로 갑판을 뚫고 물이 치솟더니 빛을 산란시키고 쏘아져나가는 날붙이를 막았다. 날붙이는 물을 뚫고 계속적으로 전진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물의 원자가 재정립되고 서로 긴밀한 연결체제를 구축하자, 날붙이는 정지할 수밖에 없었다. 날붙이가 모조리 물에 감싸여 그대로 얼어버린 순간, 갑판 위를 뒤덮던 빛도 사라졌다. 나타난 것은 1미터 두께의 얼음장벽. 그것은 수많은 날붙이를 포함하고 있었으며, 수많은 날붙이를 막고 있었고, 결론적으로 아리야를 지키고 있었다. “상관하지 말랬잖아!” 아리야가 신경질적으로 뱉어내며, 수중의 극음도를 강하게 휘두른다. 얼음장벽이 횡으로 쪼개지며 허공에 붕―떴다. 그렇게 거대한 빙벽이 떠오르자 아리야는 일장을 내쏟았다. 평소보다 더욱 진득한 한기가 담긴 일장에, 얼음은 더욱 굳어 스스로 조각조각 났다. 안에 존재했던 날붙이마저도. 아리야가 가리킨 힘의 방향대로 얼음 파편들이 날았다. 순수한 얼음파편이라 하기 힘든, 가히 만천화우라 할 수 있는 그것에 유라는 자신의 코트를 벗어 휘돌렸다. 그 전에, 네모난 방패 하나가 유라의 앞을 막아섰다. 성우가 트렁크를 앞세워 바리케이드를 만들고 몸을 숙이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원심력으로 막을 수 있는 양과 질이 아닌데요.” 트렁크를 타고 거친 충격이 몸으로 전해져오기 시작했다. 또 다시 거친 금속성이 귓가를 멍멍하게 했다. “좋은 타이밍이네요.” 유라가 치하하자, 성우는 콧잔등을 긁적였다. ‘이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으니까요.’ 과연 그럴까? 스스로에게 물었다. 외할아버지의 가르침이 어떠한 전투에서든지 승리를 생각하라는 거였다. 어떠한 위기가 닥쳐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없을 것 같아도, 항상 유동적으로 생각하고 움직이라고 했다. ‘빌어먹을 할아버지. 살아남으라, 해놓고, 딱 죽기 좋은 것만 가르쳤군.’ 어떠한 의미로든 전투에 적극적이 되면 죽을 확률이 높다. 게다가 그런 가르침을 배워버리면 농땡이 칠 핑계를 댈 수 없다. “방해하지 마!” 설명은 길었지만 시간은 짧기 그지없다. 다시 아리야는 극음도를 앞세워, 트렁크 채로 성우를 배어 버리려했다. 유라가 트렁크를 발로 후려쳤다. 트렁크는 갑판을 미끄러져 아리야의 발을 노렸다. 아리야가 살짝 몸을 띄운 동안, 유라는 매섭게 달려들었다. “첫 번째 단어는······” 달려들면서 비수에 부적을 두른다, 피로 쓰인 부적이 비수의 칼날에 달라붙으며 맹렬한 빛을 토했다. “인刃!” 단어를 뱉기 무섭게, 기류氣流와 광륜光輪이 비수 날을 중심으로 모였고, 이내 1미터 길이의 길고 투명한 칼날이 생성되었다. 소립자가 압축된 칼날 안에서 부딪히며 빛을 발했다. 빛의 검이 횡으로 휘둘려지며 아리야의 허리를 베어갔다. “하압!” 아리야는 극음도를 도끼로 장작 패듯 휘둘렀다. 어느 쪽이 먼저가 되었든 두 칼날을 부딪칠 것 같았다. 하지만, 두 칼날은 서로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한 듯, 부딪히지 않고 서로를 통과해 곧바로 두 사람의 신체를 노려갔다. 서로의 칼날이 몸을 후벼 파려고 했을 때, 갑자기 아리야의 신형이 뒤로 튕겨져 나갔다. 그녀의 허리에는 투명한 액체 채찍이 감겨있었다. “끼어들지 말라고 했잖아!” 그녀는 채찍을 손으로 되돌리는 액체인간에게 날카롭게 소리를 질렀다. 대답하는 액체인간은 태연했다. ―큭큭, 저 검이 뭔 줄 아냐? 광검光劒이다. 아리야가 침묵했다. 그녀도 연금술사라, 광검이란 단어가 뜻하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 북부, 중부, 남부. 세 지역을 통틀어 오직 한 사람만이 완성한 술법. “광인마탄光忍魔彈의······ 광마光魔? 저 여자가?” ―광마가 여성이었다는 것은 뜻밖이지만··· 빌어먹을 정도로 찬란한 광검이 증거다. 큭큭··· 위험했다고. 안 그런가? 도살자屠殺者여! 유라는 무표정을 유지할 뿐이었다. 다만, 전에 더 없던 싸늘함이 짙게 배인 무표정을. “강함을 추구해, 인도人道를 벗어난 자. 역행자逆行者인가. 아까웠어, 너만 아니었다면 확실하게 죽여 버릴 수 있었는데.” 유라는 더 이상 경어를 쓰지 않았다. 정중하지 않은 그녀의 말은 무채색.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감정한계를 벗어나 있었다. 단지, 말투를 바꿨을 뿐인데, 인간의 냄새가 사라져버렸다. 성우는 유라의 변화를 보고도 태연했다. 유라가 성우를 쳐다봤다. 반응 없는 그의 모습에 유라는 자신도 모르게 안심하는 자신을 느끼고, 내부로 침전시켰다. 마음을 다잡듯 검을 세웠다. 일곱까지 빛깔로 반짝이는 검. 칠채색七彩色 투명한 검신이 보석처럼 빛나고 있다. 그 기세는 결코 줄어듦이 없었고, 오히려 점점 길이를 키워갔다. “두 번째 단어는··· 도韜.” 말이 끝나자, 빛의 칼날이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유라가 뛰쳐나갔다. 유라는 비수를 아리야를 향해 던졌다. 그 쾌속한 일수는 아리야로서도 쉽게 막기 힘든 거겠지만, 좋으나 싫으나 액체인간과 함께 있는 아리야는 무적이었다. 액체인간이 물을 공급하고, 아리야가 급속으로 얼렸다. 어느새 그녀의 앞에는 두꺼운 얼음으로 된 장벽이 있었다. ―큭, 단순한 공격 따위. 그 모습을 본 성우가 중얼거렸다. ‘과연 그럴까.’ 유라의 팔이 크게 휘저어졌다. 그러자, 비수의 궤도가 크게 틀어지며 상승했다. 얼음의 장벽을 넘은 비수, 비수의 운두에 달려있는 강사가 장벽에 걸치며 비수가 반월을 그리며 회전했다. 하지만 비수는 비수. 칼날의 길이가 아리야를 베기엔 터무니없이 짧았다. ‘짧아?’ 아리야는 자신의 감각을 믿으며 얼음장벽을 발바닥으로 후려치고, 그 반동으로 몸을 뒤로 튕겼다. 그 순간, 빠르게 후진하느라 앞으로 휘날렸던 긴 머리카락이 무엇에 베인 듯 잘려나갔다. 완전히 대기 속에 녹아든 칼날, 보이지 않는 그것에 제린이 사랑했고, 그녀가 귀찮아했던 머리카락이 잘려나간 것이다. “네 녀석······!” 화낼 시간도 없었다. 어느새 다가온 유라의 투명검이 휘둘러지며 아리야의 목을 노렸다. 길이를 알 수 없는 그 검, 하지만 마침 허공중에 휘날리는 그녀의 머리카락은 짐작을 가능케 했다. 피하기는커녕 역습까지 했다. 극음도의 극도의 한기를 담고 유라의 하체를 쓸었다. 유라는 피하지 않았다. 단지, 빈 왼손이 코트 안주머니에 들어갔다 나왔을 뿐이다. 탕! 탕! 탕! 총성이 세 번, 울렸다. 팅! 팅! 팅! 타악기를 두드리는 듯한 소리가 세 번 터져 나왔다. 아리야의 극음도가 크게 튕겨나갔다. 유라의 총에서부터 나간 세 발의 총알이 완전히 휘둘려져 최고의 힘을 내기전인 극음도를 때린 것이다. 작지만 상상 이상의 힘을 담고 있는 총알은 방패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해냈다. 이번엔 아리야의 어깨 위로 투명검이 떨어졌다. 막을 수도, 피할 수도 없는 일격이었다. ―제길! 적당히 좀 해! 무식돌격은 우리들의 타입이 아니잖아! 킥! 아리야는 타의에 의해 몸의 중심을 잃었고, 그대로 미끄러져 유라에게서 멀어졌다. 아리야는 화가 났다. 화가 나도 어쩔 수 없었다. 액체인간의 말은, 적어도 틀린 부분은 하나도 없는 것이다. 탕! 탕! 유라는 미끄러지며 멀어져가는 아리야를 향해 총을 쐈다. 하지만 불규칙적으로 흔들리며 미끄러지는 아리야의 몸에 총알을 맞추는 건, 그녀로서도 힘든 일이었다. 6번째 총알을 사용하려는 순간, 발밑에 갑자기 물웅덩이가 고이더니, 뾰족하게 얼음창이 솟아올랐다. 유라는 슬쩍 몸을 띄워 오히려 솟아오르는 뾰족한 얼음 창의 창극을 밟고 섰다. “성우 씨!” 성우는 기다렸다는 듯, 데져트 이글과 매그넘의 총구로 아리야를 가리켰다. 방아쇠를 당기는 손가락은, 유라 못지않게 망설임이 없었다. 유라 역시 남은 총알 7발을 차례대로 비우기 시작했다. 그러자 액체인간과 한기에 보호를 받고 있던 아리야의 몸 구석구석에서 하나둘씩 피가 솟구쳤다. 그러나 치명상은 아니었다. 액체인간은 총알에 대한 대처법을 잘 알고 있었다. 총알이 치명적인 이유는 총구의 강선에 의한 맹렬한 회전 때문이다. 회전이 없는 총알은 관통력이 터무니없이 부족해진다. 탄속도 느려지기 때문에, 웬만큼 몸을 단련한 사람이라면 두부頭部와 심장만 제외한다면 무리 없이 견뎌낼 수 있을 정도였다. 액체인간은 자신의 이능에 속하는 물이라면 어떻게든 다룰 수 있었고, 그 능력으로 물속에 들어간 총알의 회전력을 죽여 버린 것이다. 유라가 더 이상 총을 쏘지 않자 아리야가 튕기듯 몸을 일으켰다. 미끄러지는 그대로 일어난 것이라, 섰음에도 몇 미터 쯤 더 미끄러졌다. 아리야가 난데없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성우를 노려봤다. 성우는 불길한 느낌이 들어 남은 총알을 살폈다. 데져트 이글에 2발뿐이었다. ‘음?’ 미세한 소리가 성우의 귀에 잡혔다. 경이 없었을 때도 인체의 기본능력을 초월했던 성우의 청력은 집중만 하면 20미터 바깥 낙엽 떨어지는 소리도 들을 수 있었다. 스스스슷― “······!” 성우는 급히 자리에서 물러나며 정신을 집중했다. ―큭큭, 늦어 들러리! 이번엔 성우의 발밑이었던 곳에서 소용돌이치며 물웅덩이가 생겨다더니 액체인간이 빠르게 모습을 드러내 손을 휘둘렀다. “위험해요!” 유라가 경호성을 토했을 땐 이미 늦었고, 그나마 도와줄 수도 없게 아리야가 갑판 위의 물을 모아 얼음을 만들어 투창하듯 그녀에게 던졌다. 액체인간의 손은 채찍처럼 늘어났고,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그 순간, 액체인간과 성우의 사이에 갑자기 인영하나가 끼어들었다. ―큭, 방해닷! 서걱―! 목이 없는 경운린의 시체가 난데없이 액체인간의 시야를 방해한 것이다. 잘려나간 단면이 얼어버린 탓에 내부의 피가 그대로 남아있던 시체는 잘려나가며 혈무를 진득하게 뿌려댔다. ―크윽! 액체인간은 자신의 몸에 피가 묻자, 아니 섞이자 괴로워하며 다시 갑판 아래로 사라졌다. 성우는 경운린의 시체를 끌고 온 경의 채찍을 내부로 회수했다. 낚시 때의 요령으로 경운린의 시체를 낚아 방패로 삼은 것이다. 생각만 해오던 게 성공했다는 기쁨도 없이, 성우는 액체인간의 반응에 대해서 고민했다. ‘피를 맞고, 괴로워한 건가?’ 하지만 그럴 시간은 별로 없었다. 귓가로 들려오는 물 스치는 소리는 위협적으로 들려오고 있었다. 그 때, 유라는 얼음의 창을 잘라내고 자신의 품에서 남은 다른 총을 꺼내 성우에게 던졌다. “받아요!” “줄까보냐!” 가만있을 아리야가 아니었다. 극음도가 크게 휘둘러지자 서리를 단 진공파가 생기더니, 유라의 총을 후려쳤다. 그 순간, 액체인간이 피를 모두 제거하고 갑판 위로 올라가, 유라의 총을 받아냈다. ―큭, 이것이 바로 북부를 공포로 떠들게 했던 마총魔銃인가. 웃음을 참을 수 없다는 듯, 몸을 크게 떠는 액체인간은 자신의 흐물흐물한 손가락으로 마총을 잡아 성우를 겨눴다. 그 때, 성우가 태연하게 유라에게 질문했다. “유라 씨, 저 총은 어떻게 사용하는 거죠? 격철이 없는 것을 보면 다른 무언가의 준비가 필요할 것 같은데.” “죽고 나서 대답해주는 게 좋아!” 유라의 머리 위로 극음도가 떨어졌다. 유라의 얼굴에서 다리 사이까지, 두 조각으로 나뉘었다. 두 조각으로 나뉜 유라의 입이 벌어졌다. “경을 사용하면, 총과 일체화가 될 거에요. 그럼 안 보이는 게 꽤 많겠죠. 예를 들어 이런 것?” 놀랍게도 말을 토해내고 있었다. 조각난 유라의 신형이 일그러지고 꺼졌다. 그리고 어느새 인가 하늘로부터 유라가 떨어져 내리며 발꿈치로 아리야의 어깨뼈를 부쉈다. “첫 번째 단어는 관이라 하며, 두 번째 단어는 폭이라 하니, 마탄의 저주는 하늘조차 꿰뚫는다.” 어깨뼈를 부순 것으로도 모자라, 허리를 틀어, 발등으로 아리야의 얼굴을 후려쳤다. 아리야는 유라의 발차기에 그대로 당해, 난간을 넘어 강물에 빠졌다. 아니, 얼음으로 된 빙판 위로 떨어졌다. 한편, 그녀의 말에 권총이 반응했다. 두 개의 광륜이 한순간 빛났고, 이내 사라졌으나 성우만큼은 그 기운을 느끼고 있었다. 왜냐면 권총이 액체인간의 손에 들어가자마자, 경사를 뽑아내어 마총을 휘감았기 때문이었다. 마총 안에는 여러 가지 장치가 있었다. 인간의 손가락이 닿을 수 없는 자동발화장치, 화학반응장치. 어떠한 원리로 움직이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감각으로는 가장 위험하게 느껴지는 ‘어떤’ 장치. 유라의 말에 가장 격심한 반응을 보인 장치도 바로 이것이었다. 그것은 유혹했다. 성우의 경력, 경이 가지는 에너지원을 낼름낼름 핥고 있었다. 애무를 하듯, 매혹적인 감촉이 경을 통해 성우를 사로잡으려 했다. ‘이건가.’ 성우는 유혹에 응했다. 하지만, 노예로서가 아닌 대응한 위치에 서서 총에게 요구했다. 내 적을 뚫고, 너의 적을 파멸시켜라. 액체인간이 빙판으로 떨어진 아리야를 신경 쓰고 있는 틈을 타, 성우의 의지와 함께한 총은 마탄을 발사했다. 총구를 중심으로 광륜 두 개가 터졌다. 하나는 황금색, 하나는 붉은색. 액체인간의 몸을 뚫고, 그 뒤에 있는 시체를 꿰뚫었다. 펑―! 시체가 폭발했다. ―끄아아아아아아!! 시체의 파편, 시체에서 퍼져나간 피가 액체인간을 뒤덮는다. 액체인간의 투명하던 몸은 새빨갛게 물들었다. ―하아하아하아, 돈, 여자, 쌍륜보, 술, 주루, 기루, 여자, 여자, 여자, 배, 잉어, 개잡종, 개잡종, 아파, 괴로워, 히히히! 여자, 아리야, 아리야, 아파, 괴로워, 괴로워, 괴로워, 괴로워, 괴로워, 괴로워, 괴로워! 아아아!! 기억이 휘몰아친다. 피 속에 녹아든, 시체의 기억. 오직 고통뿐인 그 기억에 액체인간은 자신을 유지할 수 없었다. 인간의 길을 벗어난 역행자로서 가지는 능력. 그것은 축복이 아닌 저주였다. 이 고통에서 도망쳐야 했다. 그러려면 이 장소에서 벗어나야 했다. ―으아아아아아!! 촥―! 괴성과 물소리, 그 둘을 남기고 액체인간은 모습을 감췄다. “그러니 누가, 가슴 아픈 소릴 하라고 했습니까? ···들러리라니.” 성우가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손안으로 회수한 유라의 총을 내려다보았다. 참으로 끔찍한 위력이었다. 액체인간의 신체를 가볍게 뚫는 건 이해가 되는데, 시체를 폭발시켜버린다. 그 덕에 살 수 있었지만, 뭔가 비상식적인 위력에 몸이 자신도 모르게 떨린다. 성우는 한 구석에 내팽개쳐진 유라의 가방 위로 엉덩이를 걸쳤다. ‘후우, 이번엔 정말··· 지쳤다.’ 그에게로 유라가 다가왔다. “고생하셨네요. 성우 씨.” “······들러리였을 뿐입니다. ···음?” 난데없이 성우는 다가오는 유라를 덮쳤다. 유라는 갑작스런 성우의 기습에 자신의 얼굴을 성우의 가슴에 묻었다. 그리고 그 순간, 거대한 얼음곡도가 갑판을 뚫고 올라갔다. 이 일도에 성우가 깔고 앉았던 가방이 잘려나갔다. 빙판 위, 아리야가 숨을 세차게 쉬고 있었다. “제··· 길!” 마지막 힘을 다한 공격이었다. ‘아냐, 아직 한 번은 더···!’ 아리야는 15미터의 도를 치켜세웠다. 이제는 그 무게도, 형체도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지쳐있었다. 이번이 정말 마지막이었다. 뀌아아아아악― 다른 곳으로 잠시 피해있었던 대붕이 울며 날아왔다. 그녀의 애조는 멋대로 그녀의 근처에 내려앉았다. 그리고 날개로 그녀를 후려쳤다. “······!” 극음도가 깨져나가며, 도신에 집중되었던 한기가 흡수되었다. 그녀의 몸으로 흡수되었다. 아리야는 몽롱해지는 정신으로 자신의 애조에게 배신감을 느끼며 눈물을 흘렸다. 대붕은 기절한 아리야를 등에 태우고 구슬프게 한 번 울고는 다시 날아올랐다. 대붕이 날아오르는 반동으로, 빙판이 주저앉았다. 빙판 위에 남아있던 얼음파편과 회색 잿더미가 가라앉았다. 성우와 유라는 서로를 안은 채로, 갑판 위를 뒹굴고 있었다. 아리야의 극음도가 배에 준 충격으로 배는 다시금 가라앉고 있었다. 둘은 어색하게 서로를 껴안은 채로 바라보다가 잘려진 가방을 발견하고 거기에 화제를 집중했다. “가방이··· 부서졌군요.” 단 한쪽 면 만이지만, 내부가 훤히 드러날 정도로 깊이 베였다. “···그렇네요.” 성우가 먼저 일어났다. “괜찮습니까?” “성우 씨는?” 성우는 괜찮다고 말하며 유라를 일으켜 세웠다. 사실 유라도 여러 번 극음도의 한기에 노출되고 여러 가지 비술을 한꺼번에 쓰는 바람에 지쳐있었다. 특히, 아리야의 복부를 가격했던 발은 절뚝거리기 까지 했다. 그렇기에 이번만큼은 성우의 손길에 얌전히 따랐다. ‘위험했군.’ 손에 잡힌 유라의 코트자락이 얼음가루가 되어 손안에서 바스라지자 내심 가슴을 쓸어내렸다. 갑자기 대붕이 날아왔다. 그것은 배 근처, 빙판에 착지했다. 대붕에게 갔던 시선은 거대한 도를 든 아리야를 발견했다. 성우는 아리야를 조준했다. 뀌아아아아악― 대붕이 아리야를 보호하기라도 하는 듯, 날개를 펼쳤다. 성우와 대붕의 눈이 서로를 봤다. 갑자기 대붕이 아리야를 후려쳤다. 성우로서도 놀란 일이다. 대붕은 아리야를 입에 물어 등에 태우고 홰를 친 후, 날아올랐다. 그 반동이 성우와 유라가 있는 갑판에 까지 느껴졌다. “으윽.” 유라는 무의식적으로 근처에 있는 무언가를 잡았다. 알고 보니 성우의 옷자락이었다. 성우는 오른손으로 자신의 옷을 잡는 손의 손목을 잡고 왼팔로 한쪽에 기다란 구멍이 난 트렁크를 껴안고 갑판 위를 달렸다. 성우는 한시가 급했다. 배가 물속으로 가라앉고 있는 것이다. 강물에 부력을 보조해주던 액체인간이 사라지자 진작부터 가라앉고 있었는데, 거기에 대붕이 불난 집에 기름 부은 꼴로, 빙판 위에서 반동상승反動上昇을 해버린 것이다. 아래로 향한 힘의 방향으로 빙판은 급속도로 가라앉았고, 배 역시 가라앉고 있었다. 성우는 구명보트를 찾았다. 하지만 구명보트는 전에 아리야가 날린 얼음의 창에 꿰뚫려 본래 목적을 상실하고 말았다. “수적의 것을 이용해야겠습니다.” 유라는 성우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그리 많은 시간은 지나지 않았지만 성우에게 의존했기에 충분한 휴식을 취할 수 있었던 유라는 성우의 손을 놓았다. “고마워요. 그러나 이제는 스스로 가겠어요.” 앞서 달리는 그녀의 귓불은 평소 때보다 조금 붉게 보였다. ‘한기가 침습한 탓일까?’ 성우는 천천히 노를 저었다. 수적들의 배는 고속전투에 맞게 개조된 거라 한 번 노를 저을 때마다 앞으로 쑥쑥 밀려나갔다. 덕분에 흔들림이 커서, 휴식을 취해야 하는 지금은 천천히 노를 젓는 것이다. “이제 어디로 가는 거죠?” “남쪽으로요.” “음······.” “왜 그러시죠?” “전에도 있었던 일 같아서요.” 유라는 뱃전에 몸을 기대며 그녀답지 않은 한숨을 쉬었다. “이런 일, 다시는 겪기 싫네요.” “···동감입니다.” chapter 9, Justice ―――Group's justice is distorted always. 정의正義란 무엇일까? 단순히 낼 수 있는 대답은 ‘착한 일과 옳은 일’이다. 맞다. 가장 절대적인 정의에 가까운 대답은 그게 될 것이다. 하지만 사람에게 정의는 어디까지나 상대적으로 찾아온다. 개인, 개인에게 정의는 모두 다른 것이다. 다른 사람의 옳은 일도, 자신에게는 틀린 일이 될 수도 있고, 그 역도 성립한다. 절대적인 정의란 없다.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존재로 절대적인 정의를 지향하는 단체는 존재한다. 무림에서 가장 넓은 영역을 보이며, 가장 많은 구성원을 자랑하는 단체가 있다. 정의맹正義盟. 처음에는 단지, 서로간의 무력을 시험하기 위한 친선약속 정도로 만들어진 회합일 뿐이었다. 하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에 퍼지면서 친선의 규모가 거대해져 갔고, 비무 뿐만이 아닌 다른 이익을 위한 연합의 자리가 세워졌다. 목적이 어쨌든, 사람이 모이자 큰 힘을 가지게 되었다. 어느 순간 그들은 깨달았다. - 이 힘은 효율적으로 쓸 수 있다! 그러기 위해 건물을 세웠다. 처음에는 거대한 공터였을 뿐이다. 비무를 위해, 그리고 관전을 위한 쓸데없이 넓기만 한 땅이었다. 사람이 모일 때마다, 건물이 한 채, 두 채 세워져갔다. 이익을 위해 그들에게 참가한 사람은 아낌없이 돈을 투자했고, 건물은 너무나 쉽게 지어졌다. 그러한 건물에 멋대로 환상을 가지고 찾아온 많은 젊은이들이 있었다. 오직 정의. 정의라는 단어 하나에 신념을 품고 맹에 들어왔다. 그들도 자신들이 하는 짓이 망상덩어리인줄 알고 있었다. 알고 있기에 변화할 수 있었다. 그리고 대를 걸쳐 쌓아져온 신념은 신앙이 되고, 무력이 되어 아무도 무시하지 못할 단체를 일구는 초석이 되었다. 젊은이들의 어리석은 정의. 어리석지만 절대적인 정의를 지향하는 단체가 만들어진 것이다. 시작은 순수했고, 성장은 탐욕으로 가득 찼지만, 무림 최고가 되기까지는 젊은이들의 희생과 신념으로 벼려진 단체. 그게 바로 정의맹이다. 압제강 혈사는 수수께끼가 많은 사건이었다. 정의맹 신강지단晨鋼支壇의 지단주 신권수사神拳秀士 규연赳然은 이 사건을 일급으로 분류했다. 신강지단이 세워진지 90년, 겨우 다섯 번 기록되었던 일급사건이 여섯 개로 느는 순간이었다. 압제강 혈사는 말 그대로 난데없이 일어난 사건이다. 어떤 사건이라든지 조짐이라는 게 있기 마련, 하지만 압제강 혈사는 그런 조짐이 발견되지 않았다. 생존자는 하나도 발견되지 않았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죽은 사람의 수만 늘어날 뿐이다. 실종한 사람은 대부분 시체가 되어 하류에서 발견되었던 것이다. 흉기는 정확치 않음, 다만 신검보도에 비할 정도로 날카로운 병기. 물속에서 죽였으며 흉수는 물속에서도 신속神速으로 병기를 휘두를 수 있는 자로 추측. 하류에 떠내려 온 시체를 부검해본 결과, 위와 같은 대답만 반복되어 나올 뿐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이라면 골치 아플 일도 없다. 어디까지나 우연히 하류에 떠내려 온 시체들만 피해자가 아닌 것이다. 아니, 그들은 피해자 중 일부에 불과했다. 신권수사 규연은 자신의 제응을 타고 직접 사건현장으로 출두했다. 수많은 배가 모여 인양작업에 열중하고 있었다. 군선 반, 정의맹 소속선 반으로 이뤄진 배들은 예전부터 이런 일이 많았던 듯, 능숙하게 영역을 나눠, 서로의 방해가 되지 않게 배들을 인양했다. “작업은 잘 되어 가오?” “아, 오셨군요, 지단주. 다행히 군부의 최신 인양기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규연은 사람들을 지휘하고 있던 청년에게 말을 걸었다. 뒷머리를 가볍게 땋고 청색 군포軍布로 틀어 묶었다. 나머지 머리카락은 귀밑까지만 오게 짧게 깎은 나름대로 단정한 머리스타일을 가지고, 수려한 외모를 자랑하는 청년이었다. 평범한 옷으로 치장되어있고, 낡은 혁대를 차고 있긴 하지만, 결코 범상치는 않았다. 천무군天武君 백상린柏常潾. 반년 전 출도하고, 그 반년 만에 천무군이라는 거창한 명호를 이름 앞에다 달 자격을 보여준 청년고수였다. 백상린의 직책은 무경武卿. 정의맹에 오직 아홉 밖에 부여되지 않은 특수직이었다. 군왕부의 감찰사監察司와 같은 종류의 일을 하는 그들에겐, 무림이란 영역 안에선 감찰사와 같으면서도 더한 권리를 가질 수 있었다. 권리가 따르면 의무가 따르는 법. 그들은 이런 한 지단인력의 반 이상이 투입될 것 같은 일급 사건을 담당하고 처리해야 했다. “흉수는 둘 이상의 능력자입니다.” 백상린은 흉수에 대해 능력자라고 말했다. 흉수에게 고수라는 말을 붙이지 않는 것은 정의맹의 무경으로써 가지는 자존심이었다. 고수라는 칭호는 정의맹에서도 함부로 받을 수 없는 칭호였다.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도 그 의지가 악하다면 받을 수 없었고, 의지가 올바르다 해도 능력이 떨어지면 받을 수 없었다. 정의맹 안에서도 둘을 겸비하기는 힘들다. 그런데 한 낯 범죄자 따위에게 고수라는 명칭이 붙는다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다. “그것도 모두 공을 사용하는 것으로 보여 집니다.” 규연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놀란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그 정도 능력자가 관계된 사건이라면 충분히 일급을 받을 이유가 된다. 그 뿐만이 아니라 정의맹에서도 선언한 적이 별로 없는 특급사건으로 승격될 여지 역시 있는 것이다. “정확한 것은, 흉수가 극음을 다루는 공을 사용했다는 겁니다. 물속에서 건져낸 시신 대부분이 얼어 죽은 것으로 판명되었습니다.” “그럼 흉수를 쉽게 짐작할 수 있겠군. 극음의 공을 쓰는 사람이라면 그리 많지 않지 않을 것 아니겠소?” 백상린은 고개를 저었다. “그게 그렇지 않습니다. 물밑에 가라앉은 파편들을 살펴보고, 파편들이 퍼져있는 범위를 살펴보니, 대략 방원 100미터 정도를 얼려버렸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정도 위력은 북해빙궁北海氷宮의 궁주나 호법 한천녀寒天女가 직접 오지 않으면 나오지 않습니다.” 백상린은 인양된 배 갑판 위로 올라갔다. 무엇에 뚫렸는지는 몰라도 구멍투성이에, 날카로운 무언가에 베인 것 같은 자잘한 상흔傷痕이 가득했다. 백상린의 손이 그 상흔에 손을 가져다 대며 말을 이었다. “게다가 수적들의 배와 순례선에 남아있는 수많은 도흔刀痕을 살펴보면, 이 배는 가라앉는 도중, 수면이 얼어버림으로써 침몰이 막혔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문제는 가장 처음에 생겨난 도흔이, 이 배를 침몰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할 수 있습니다.” 도흔이 생겨난 순서를 파악하는 것 정도는 규연 정도의 고수에게는 식은 죽 먹기였다. 하지만 물이 가지는 산성작용으로 훼손된 배에 남은 흔적. 부정확하기 짝이 없는 것에 순서를 매기는 것은 그로써도 쉽지 않았다. “그런데 그게 무슨 상관이오?” “강물은 민물입니다. 바닷물이 아닌 물이 이 정도 얼음을 떠받칠 부력이 존재한다고 보십니까?” “그렇다면··· 말이 안 되지 않소? 계속적으로 가라앉는 배 위에서 이 정도의 흔적을 남길 수 있는 무공 따위 존재하지 않잖소. 적어도 어경을 할 수 있는 무인 수십 명이 달라붙어야 할까?” “아까도 말했다 시피, 흉수는 극음의 공을 쓰는 사람입니다. 이 정도 도흔을 남길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어경에 달한 사람이라도 한공寒功을 목표로 경을 단련하지 않으면 택도 없겠죠. 그렇다면 답은 간단합니다. 부력이 존재했던 겁니다. 가라앉은 배를 떠받칠 비정상적인 부력이.” 규연은 더욱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흐르는 강물에 없는 부력을 불어넣다니? 그것은 강물을 통째로 얼리는 것보다 더 힘들지 않소?” 백상린은 고개를 저었다. “흐르는 강물조차 되돌리는 인종들은 동부대륙에 상상외로 많습니다. 물론 부력을 불어넣는 것도요.” “무슨··· 연금술사도 아니··· 설마?” “정답입니다. 물질의 성질을 변화시키는 것을 주로 사용하는 북부 연금술사나, 고대의 술법을 그대로 전승시켜온 남부 연금술사 정도라면, 충분히 가능한 이능異能입니다.” “그렇다면 극음의 공을 사용하는 흉수는?” “모르죠. 다만, 사건의 실마리는 잡은 셈입니다. 도살의 범위에서 벗어난 전투의 흔적과 목격자를 남기지 않으려는 의지가 보이는 물속에서 죽은 시체의 참상斬傷. 그에 비해 어설픈 뒤처리. 세 가지를 추측해보면, 이 사건에 관여된 연금술사는 살아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우선 선객명단과 사망자명단을 대조해, 실종 파악된 사람들에게 수배령을 내려주십쇼. 더해서 순례선의 입항入港 예정된 도시에 있는 연금술사들을 모두 파악해주십쇼.” 파악이라 했지만 체포를 뜻하는 것이다. 규연은 자신도 모르게 되물었다. “무고한 연금술사가 잡히면 어쩌려고?” “파악된 것만 해도 사백 명이 넘습니다. 이런 사건을 일으키는 잔악무도한 녀석들을 빨리 잡지 않는 것이야말로 무고한 사람들을 희생시키는 일일 겁니다.” 사망자의 수를 말하는 것이리라. 규연은 가슴 깊이 백상린의 말에 동조되며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켰다. “알겠소!” 오늘부터는 바빠질 것이다. 그렇게, 성우와 유라는 자신도 모르게 정의맹의 표적이 되었다. 아리야와 액체인간과 일전을 벌이고 하루 후. 성우와 유라는 목적지인 신강에서 도보로 5일 거리 떨어진 산길을 걷고 있었다. 수적들의 조각배로 압제강을 넘어간다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그래서 택한 것이 산길. 소거법으로 도달한 방법답게, 시작부터 애로사항이 많았다. 그날은 뜻하지 않게 비가 내리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는 맑게 빛나는 별들을 비추고 있었던 하늘에서 먹장구름이 끼는 건 순식간이었다. 뇌우와 폭풍이 산을 덮는 건, 그야말로 순간이었다. “스콜(squall, 갑작스럽게 불고 갑자기 멈추는 강수와 뇌우를 동반한 돌풍)인가?” 성우가 팔로 떨어지는 빗방울을 가리며 중얼거렸다. 스콜은 야전野戰에서 가장 위험한 기상변화 중 하나였다. 의문점이 있었다. 스콜이 생기기엔, 요건이 그리 맞지 않았다. 바람이 심하긴 하지만, 바람보다 비가 주체인 것 같은 날씨였다. 스콜은 돌개바람의 일종이라, 비 같은 건 세차게 내리긴 해도 장기간 내리진 않았다. “아뇨, 성산聖山의 정기강수定期降水에요.” “정기강수?” “설명은 마을에 가면서 하죠. 이대로라면 위험할 지도 모르겠네요.” 그렇게 둘은 빗속을 뚫고 달렸다. 기륭산맥岐隆山脈은 응란국 최대의 산맥이다. 북해에서 발원해 수많은 산조차 뚫고 일직선으로 남해까지 달려가는 청영강조차 슬며시 외곽지역으로 돌아서 나갈 만큼 대산맥이었다. 대산맥 안에는 성산, 즉, 축복 받은 산이 많이 있다. 동식물이 살기에 최적의 요건을 스스로 갖추는 생명의 산. 스스로 강수량을 조절해, 토양의 과대 산성화, 염기성화를 막는다. 간단한 원리였으나 동시에 현실에서는 있을 수 없는 현상이었다. 이 세계에선 이런 산들이 당연하게 있었다. 그래서 아무런 의문도 갖지 않았다. 심지어 연금술사조차도. 성우와 유라가 있었던 온여산溫黎山 역시 성산의 한 부류였다. 온여산은 응란국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간다는 온천생산지였다. 온천생산지답게 마을도 거대했다. 성우와 유라는 마을에 도착해 숙소를 찾았다. “이상하네요.” “뭐가요?” 유라의 중얼거리는 목소리를 들은 성우가 물었다. “너무 조용해요.” 온여산의 모든 마을은 여름이나 겨울 등, 온여산이 가장 아름다울 때가 되면 관광객들로 북적거린다. 아무리 시즌이 아니라지만, 이런 조용함은 이 온천마을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성우도 어느 정도 동감했다. 물론 온여산에 대해 모르고 있었기에 그저 조용하다고만 느꼈을 뿐이다. 그렇다고 폐촌이라던가, 유령도시라는 말은 아니었다. 소수이지만 마을 곳곳엔 창문을 통해 빛을 발하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간 객잔에서는 말소리까지 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숨길 수 없는 적막함이 마을 밑바탕에 깔려있었다. “그렇다고 하루 온종일 샤워만 할 수도 없잖습니까?” “그것도 맞겠네요.” 성우가 트렁크를 앞세워 객잔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유라도 그의 뒤를 따랐다. 객잔에서 들려오던 말소리가 멈췄다. 성우는 옷에 가득 찬 물기를 짠 후에서야 자신에게로 몰려드는 시선을 느꼈다. “아, 안녕하세요.” “·······.” 멀뚱히 인사를 하자 시선이 묘해졌다. “저기 숙소 남아있습니까?” 객잔의 주인이 다가오자 성우가 물었다. 190센티의 거구를 가진 주인은 자기의 힘을 위시하기라도 하는 듯 성우의 바로 앞에 섰다. 그림자가 성우의 신형을 덮었다. 주인의 눈길이 성우의 트렁크를 스치고 성우의 얼굴에 향했다. “연금술사인가?” 성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금까지 객잔주인에게 연금술사라고 추궁 받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물론 그 자신은 아니기에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주인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연금술사라는 단어에 유라가 반응한 것을 놓치지 않았다. “미안하지만 방은 없네.” “그렇다면 다른 남은 숙소 있겠습니까?” “없을 걸세.” 거구의 주인은 차갑게 대답했다. 성우는 식당을 둘러보다가 물었다. “그럼 식사, 될까요?” “마침 재료가 다 떨어졌네.” “앉아만 있는 것은···.” “안 되네.” “왜죠? 우리들이 연금술사이기 때문에?” 그 순간, 주인을 비롯한 식당에 있던 손님들 대부분의 눈에서 적의가 스쳤다. “알면 나가라.” 주인의 말투가 바뀌었다. 나가지 않으면 폭력이라도 불사하겠다는 듯 주먹관절을 풀고 있었다. 손님들 중에서도 슬슬 몸을 일으키는 사람들이 있었다. “성우 씨, 가죠.” 유라가 성우의 옷자락을 잡고 문을 열었다. 성우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쉬고 몸을 돌려세웠다. “잠깐.” 객잔주인이 성우를 멈춰 세웠다. 그의 손가락이 바닥을 가리켰다. 성우가 흘린 물기로 젖은 바닥이 있었다. “네 녀석이 흘리고 간 거, 챙겨라.” 바닥에 흡수된 습기를 지우라고 한다. 손님들 사이로 비웃음소리가 들렸다. 성우는 주인의 억지소리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유라를 재촉해 밖으로 나가려했다. “이 놈! 어르신의 말이 들리지 않은가!” 부웅-! 아무런 형식도 잡지 않은 마구잡이 주먹이 휘둘려졌다. 그러나 그 크기가 어린아이 머리통만 하고 속도 역시 헤비급 복서의 스트레이트에 비할 만큼 빨라 제대로 맞으면 중상을 면치 못할 게 분명한 공격이다. 그러나 괴물들과의 실전으로 적의에 대한 감각이 날카로워진 성우에겐 통하지 않았다. 성우는 허리를 중심으로 옆으로 숙여 주먹을 피한 후, 경으로 강화된 발뒤꿈치로 주인의 복부, 간장肝臟을 찔렀다. “웨에엑!” 유라는 문을 열고 밖에서 성우를 기다리고 있었고, 갑작스럽게 주인이 위액을 토하며 주저앉자 놀란 손님들이 성우를 보고 악을 질렀다. “저 새끼 잡아!” “씨팔! 족쳐!” 성우는 아차, 하는 표정으로 객잔 밖으로 뛰쳐나갔고, 유라는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맹렬하게 달려 나오는 성우를 앞서서 인도했다. 객잔은 주인의 위액에 젖었고, 그들은 바람에 젖고 있었다. “이해가 안 되네요.” 마을 사람들을 완전히 따돌리고, 거대한 나무 아래 비를 피한 유라는 그렇게 첫 말을 시작했다. “연금술사를 적대하는 이유 말이죠?” “네. 무엇보다 연금술사의 대부분은 살상능력이 뛰어나죠. 그런데도 다칠 것을 뻔히 알며 공격하다니.” “죽음을 불사할 정도의 분노가··· 있었는지도 모르죠.” 유라는 수긍이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비를 피해야겠네요.” “천막 같은 건 없겠고, 역시··· 동굴을 만들어야 할까요?” 성우는 나무 옆에 보인 절벽을 손으로 만져보고 의견을 냈다. 천운으로 단단하면서도 무른, 석회질과 비슷한 성질을 가진 토양이었다. 경을 사용할 수 있게 된 지금은 시간이 걸리더라도 손으로 파낼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도구를 사용하는 것보단 비효율적이겠지. “곡괭이 같은 게 있다면···.” 유라는 대답대신 부적하나를 꺼냈다. 철편을 모아 담던 그 부적이었다. 성우는 부적 뒤에 있는 그녀의 무표정한 얼굴이 내심 웃고 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방放.” 언제 모았는지 모를 곡괭이 두 개가 땅에 떨어졌다. 손잡이까지 모조리 금속제인 이것은 그럭저럭 적당한 무게를 가지고 있었다. 육체를 한계까지 끌어올리고, 경까지 사용하는 성우와, 숫한 괴물들과 정면으로 맞서 싸운 유라가 번갈아가며 곡괭이로 절벽을 괴롭히자, 단 10분 만에 더 이상은 못 버티겠다는 듯, 절벽은 선뜻 양질의 동굴을 토해냈다. 내려가며 판 게 아니라 올라가며 판 동굴이라 습기가 올라올 리는 없었다. 유라는 동굴을 완성하자마자 부적 하나를 불태웠다. 그러자 동굴 안이 전등이 켜진 것처럼 환하게 밝아졌다. 그것뿐만이 아니라 동굴 자체의 온도도 포근해졌다. “남부연금술의 주술연금은 대단하네요.” “성우 씨도 배워보실래요? 어렵긴 하지만 요령만 알면 실생활이 편해질 거예요.” “남부의 연금술은 실전보다는 실생활에 쓰이는 군요. 연금술이 그렇게만 쓰인다면 세계는 평화롭겠네요.” 유라는 침묵했다. ‘광검은··· 남부연금술의 집합체. 이미 실전에서 쓰이고 있어요.’ 잠시 후, 유라는 처음으로 가방을 열었다. 별 다를 게 들어있을 줄 알았던 성우는 내심 실망을 감추지 못했다. 거기엔 옷가지를 감싼 백색 천 하나와 책 하나, 평범한 주머니 세 개가 들어있을 뿐이었다. 유라가 꺼낸 것은 천이었다. 형형색색의 옷가지를 감싸고 있던 그것이 풀리자 동굴 전체도 감쌀 수 있을 정도로 큰 보자기가 되었다. ‘보쌈용인가?’ 납치범죄의 초기형태라는 옛날 잘못된 풍습을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유라는 형형색색의 옷가지를 감싸지 않은 채로, 넣고 가방을 닫았다. 보자기 하나만이 가방 밖으로 나와 있었다. 유라는 비수로 보자기를 잘라냈다. 두 개로 나뉜 보자기 중 하나는 성우에게로 돌아갔다. “옷을 벗고, 그것을 걸치세요.” 이미 짐작했던 성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망설임없이 상의를 벗고 하의로 손을 가져다 대었다. “될 수 있으면 벽을 보고 하시길······.” “아아··· 그랬지요. 이성이라기보다, 오랫동안 함께한 동성친구 같아서 착각했나보군요.” “······영광이네요.” 성우가 벽을 보며 옷을 갈아입기 시작하자, 유라도 옷을 벗기 시작했다. 백옥 같은 살결, 완벽한 신체비례. 하나의 조각 같은 그녀의 나신이 동굴 안을 환하게 비춘다. 그러나 아름답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등에 진하게 파인 총알자국, 살을 심하게 휘감아 자세히 보지 않으면 장미문신처럼 보이는 그것은 한 두 개가 아니었다. 오랜 세월동안 새 피부에 먹혀들어가 보기 좋게 완화되었지만, 그 당시에는 얼마나 끔찍한 상처였을까. 유라의 발은 새하얗게 변색되어있었다. 아리야의 한기가 침습했기 때문이다. 잘 찾아보면 유라의 몸 곳곳에는 상처가 가득했다. 세월이 지남에 따라 기억과 함께 퇴색되어버린 상처들이지만, 이렇게 비가 오늘 날씨면 쓰라려온다. ‘왜인지 기분이 울적하군요.’ 누구에게 말한 것일까. 의미 없이 내심으로 뱉은 소리와 함께 유라는 순백의 보자기로 나신을 감쌌다. “다 입었나요?” “아, 네. 유라 씨는?” “다 입었죠.” 누가 먼저 말하지도 않았는데, 둘은 서로의 모습을 확인했다. 그리고 안심. 너무 오랜만이라 오히려 놀라운, 그러나 따스하기 그지없는 그 감정이 그들의 마음속에서 잔잔하게 퍼지고 있었다. “잠이 안 오는가 보군요.” 빗소리가 계속되는 가운데, 성우는 계속적으로 들썩거리는 유라를 보고 중얼거렸다. “당연하잖아요? 그러는 성우 씨야 말로 잠이 안 오나 보네요.” “그거야 저는 원래 그 약이 없으면 잠을 잘 수 없잖습니까. 이상하게도 평소에도 잠 같은 건 안 잤지만. 체질이 이렇게 된 것이기 때문일까요··· 마치 잠을 박탈당한 것 같은 기분이 드네요. 피곤하지 않다면, 그것보다 좋은 몸은 없을 텐데.” 그러고 보면, 성우는 잠이 없었다. 유라가 식사에 수면효과를 지닌 마혈균의 부작용 완화제를 첨부하지 않았다면, 그녀 앞에서 자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죄송한 말을 꺼냈군요.” “신경 쓰지 마세요. 일천한 지식으로 배고픔을 때우려했기 때문이죠.” 성우는 유라의 사과에 고개를 저으며 자조했다. “그런데 유라 씨는 어째서 잠이 오지 않는 거죠?” 유라는 성우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이 사람만큼 무신경한 사람도 없을 것 같았다. 이성끼리 조금 다용도 적인 천 하나로 나체를 감싸고 있을 뿐인데, 어찌 가슴이 두근두근하지 않겠고 또한 어떻게 그 가슴을 얌전히 끌어안고 잠을 잘 수 있겠는가. 알면서 하는 말이라면 성우는 대단한 심술쟁이고, 모르면서 하는 말이라면 굉장한 무신경이다. 표정을 보니 포커페이스지만, 눈빛을 보면 후자 쪽인 것 같다. 유라는 난데없이 한숨을 쉬었다. 이 사람과 계속 여행을 했다간 이상해져버릴 것 같았다. ‘계속?’ 유라의 표정이 씁쓸해졌다. “유라 씨, 아까 보니 책 같은 게 있던데···.” “에? 책이요?” “네, 상당히 얇은 두께에, 오래 되어 보이던데.” 성우의 눈이 전에도 없는 초롱초롱한 눈빛이 되어있었다. 아마 자신도 이런 눈빛이 되는 건지는 모르고 있을 터였다. 유라는 전에 한 번 그 눈빛을 본 적 있어,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 쉽게 짐작했다. “보고 싶은 가요?” 성우는 조금 놀란 표정이 되었다. 정답이었기 때문이다. 조금 망설이다가,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실례가 안 된다면, 보고 싶군요.” “괜찮아요. 어차피 여행 중에 우연히 얻은 것이고, 색다른 언어로 쓰여 있어 번역조차 엄두내지 못한 것이니까요, 내용을 이해할 수 없어도, 보고 싶나요?” “네.” 유라는 가방을 열고 책을 꺼내, 성우에게 건넸다. 성우는 유라에게 책을 받았다. 받고 보니, 책이라 부르기엔 무리가 있었다. 겨우 8페이지 정도 밖에 되지 않았던 것이다. 얇다고 생각했으나 종이 두께는 두꺼웠다. 그래서 더욱 얇았다. 성우는 책을 펼쳤다. 내부에는 과연 이상하게 생긴 언어로 가득 차 있었다. 얇은 대신 빽빽하게 글이 들어차 있었는데, 언어들의 곁에는 그림 같은 게 그려져 있었다. “총경삼권록銃勁三拳錄?” “읽을 수 있나요?” 유라가 놀란 듯, 물어왔다. 며칠이라는 시간을 해석하는 데 쏟았어도 한글자도 번역할 수 없었던 책이다. 물론 한글자만 번역하는 게 더 어렵겠지만. 그만큼 긍지 높은 지식을 가진 연금술사 유라로서도 풀 수 없는 수수께끼 같은 책이었다. 성우 자신도 놀라고 있었다. 읽었다기보다 문득 그렇게 느꼈다, 랄까? 문장이 눈 안에 들어오자, 머릿속 어딘가에서 문장의 의미만 뽑아내 망막으로 투영한 것 같았다. 생각해보면 이 세계의 언어는 자신도 알지 못하는 것들이었다. 쓰지만 못할 뿐이지, 읽고 말하는 건 간단했다.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지나치고 가버린 느낌일까. ‘으음, 무신경했기 때문일까. 살아남는 것에만 집착했기에, 중요한 것을 잊어버린 것인가. 여러 가지로 사는 방식에 문제가 많았군.’ 우선 유라의 의문에 답하기로 했다. “어째서인지··· 읽을 수 있군요. 그 정확성은 스스로도 신뢰하지 못하겠지만요.” 사실대로 이야기했다. 꾸며봤자, 성우는 소설 같은 이야기를 새롭게 창조하는 것에는 재능이 없었다. 거짓말에 서툴다는 얘기다. 유라는 못 믿겠다는 눈치를 보내겠지만, 사실인 이상 스스로에게 떳떳했다. “믿어요. 다만, 제게도 내용을 알려주시겠어요?” “애초에 유라 씨의 것입니다.” 성우는 총경삼권록이라고 이름이 붙은 책을 소리 내어 읽기 시작했다. 총경삼권록의 내용이란 이랬다. 재능은 뛰어났지만 체질상 공功을 익힐 수 없는 천형을 진 무인이 북부의 실전연금술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총의 원리를 이용, 연구하여 극강의 경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는 서문으로 시작하고 있었다. 젊은 나이에 어경에 달한 지 40년이라는 세월이 지나도 공에 다가갈 수 없자, 공을 넘는 경을 만들어냈다. 그 점으로 볼 때, 굉장한 호승심의 소유자인 것 같았다. 북부연금술사로서 이름을 날리기까지 했는데도, 본래의 목적을 잊지 않아, 결국에는 총경이란 것을 개발해냈다고 했다. 사용하기에 따라 공에 버금가는 위력을 낸다고 하는 총경에게도 조건이 있었다. “오직 경을 사용하는 사람만이 사용할 수 있고, 중부연금술의 단공과 같은 편법을 사용해 공에 달한 자는 이론적으론 사용할 수 없다.” “어경을 달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몸에 존재하는 모든 경을 자유자재로 컨트롤 할 수 있어야 한다.” 다행히 경의 용량에는 상관없다고 했다. 오히려 적은 양의 경으로 최대한의 효과를 보는 것이야말로 총경의 핵심이라 했다. 어경은 단순히 기본조건이 아니라 필수조건이었다. 총경은 어경에서부터 시작했다. 어경으로 몸 전체에, 책에 그려져 있는 그림의 형태대로, 한치의 오차도 없이 발사관發射管을 짜야했다. 경사를 뽑아 꼬는 방법에서부터, 경이 가지는 인력과 척력까지. 그야말로 어경으로 할 수 있는 최고 난이도의 경체정립勁體定立이었다. 발바닥에서부터 각 관절을 거처 팔까지. 복잡하게 짜인 기하학적 도형이 몸 안을 가득 채운다. 뼈에 엉겨 붙은 근육들이 가지는 복잡함보다야 덜했지만, 누군가의 손으로 만들어내기엔 어려운 구조였다. 발사관의 두께는 손가락 굵기에서부터 다리뼈 굵기까지. 굵기가 작으면 작을수록 만들기는 어렵지만 효율은 좋아진다고 한다. 8페이지 전부가, 경체를 짜는 그림과 그에 대한 설명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언젠가부터 성우는 소리 내어 읽지 않았다. 책에 집중한 그는 더 이상 몇 문장의 말로는 표현할 수 없게 되는 부분에 돌입하자, 신경을 모조리 책 보는데 투입했다. 유라는 그에 대해 지적하지 않았다. 책의 내용이 궁금하긴 했어도, 그녀가 사용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그녀는 턱을 괴고 책에 집중한 성우의 얼굴을 관상용 식물을 보듯이 감상하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는 표정 변화에 유라의 입술이 슬그머니 일그러졌다. 2시간 쯤 지났을까. 탁- 종이와 종이가 맞부딪쳤다. 박수소리 같은 책 덮는 소리에 유라는 잠을 깼다. 유라는 잠을 자버린 것에 속으로 자신을 질책하며 성우를 보았다. 성우는 유라가 깨어난 것도 모르고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몸을 덮는 보자기가 스르륵 내려갔다. 유라는 예의상 눈을 손으로 슬쩍 가리고, 손가락 사이를 벌려 성우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성우의 등 뒤만 보일 뿐이었다. 성우는 진각을 땅바닥에 꽂아 넣듯 내딛고, 발에 몸의 중심을 실었다. 그리고 튕기듯 상체를 움직이고, 궁체弓體처럼 탄력 있게 팔을 휘둘려 앞으로 이동시키고 그 여력 그대로 주먹 쥔 손을 내질렀다. 그렇게 뻗은 주먹이 가리키고 있는 곳은 오목하게 파여진 동굴 끝부분. 유라의 시선이 자신도 모르게 그곳으로 향했다. 디릭- 무언가, 눈으로 쫓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공기가 일렁이더니 미약한 관통음과 함께 벽에 구멍이 생겼다. 두께는 손가락 세 개가 들어갈 정도. 그 깊이가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없었으나, 보통 발경으로는 결코 낼 수 없는 기현상인 건 분명했다. “조금 더 강하게 해도 될까.” 성우는 방금 전과 같이 움직이며, 주먹을 내질렀다. 그드득- 무언가가 빠르게 압착壓着되는 소리와 함께, 또 하나의 구멍이 생겼다. 방금 전의 구멍보다 약간 더 컸다. “그럼 다음 것으로······.” 성우는 자신감을 얻었는지, 빠르게 발 위치를 이동했다. 시작은 빠른 위치 이동이었으나, 그 발은 진흙탕에 빠진 듯, 지면을 느리게 스치고 있었다. 무언가를 끌어 모으는 듯, 성우의 온신경이 집중되는 것이 눈에 띄게 보였다. 근육의 미세한 움직임이 보였기 때문이다. 발의 전진이 끝났을 때, 상체가 전보다 부드럽게 운동했다. 그러나 성우의 움직임은 여전히 빨랐다. 튕기듯 팔을 내쏜 것과는 달리, 무언가를 밀어내듯 움직였을 뿐이다. 성우의 손바닥에서 강한 역도가 실린 기운이 발출되었다. 부드러운 동작과는 달리, 유라조차 자신이 벽이었다면 끔찍해했을 정도로 빠른 발출이었다. 기운이 벽에 부딪쳤다. 쾅-! 상상치 못한 폭음에 유라는 깜짝 놀랐다. “아!” 폭음도 폭음이지만 위력은 더 놀라웠다. 40센티 깊이 반구형半球形 폭흔爆痕이 남아있었다. 성우는 어느새 다시 부드럽게 손바닥을 폈고, 다시 큰 폭음이 동굴 안을 크게 울렸다. 동굴전체가 진동할 정도로, 거대한 폭발이었다. 성우는 조금 지친 듯, 창백한 숨을 토하고 천천히 숨을 골랐다. 그리고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고는 재빨리 바닥에 떨어진 천을 주워 몸을 감쌌다. 그런 와중 멍하니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유라를 보았다. “아, 깨어나셨습니까?” “네, 그런 것 같군요.” 어딘지 모르게 멍청한 질문에, 유라는 멍하게 답했다. 성우는 한동안 천장을 보고 있었다. 제딴엔 고민하는 것 같은 모습을 보이려는 것 같았다. 고개를 내려 유라의 눈을 마주 봤다. 살짝 고개에 각도를 주는 것이, 나름대로 부끄러워하는 모습 같았다. “···보셨습니까?” “대단하더군요.” “그런가요? 별로 그렇게 느끼진 못했는데······.” “범인이라면 한방에 죽을 지도······.” 성우는 대단한 것이라도 말하는 것처럼 주저주저 말을 꺼냈다. “그거라면 안 죽었어요. 조금 아프다고 말했을 뿐.” 유라는 문득 이상함을 느꼈다. 분명 벽에다 대고 내쏜 기운은 총경삼권록인가, 하는 책에서 발견한 것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터 실전을 경험했단 말인가? 그제서야 성우가 지금 손으로 특정부위를 가리고 있는 행태를 발견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남자의 오묘한 신체를. “······무슨 소릴 하는 거예요. 총경銃勁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인데.” “에에에? 후우,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물론 보지 못하진 않았지만.” 유라가 먼 산을 쳐다보듯 고개를 돌리며 조용히 뒷말을 덫 붙였다. 조금 붉어진 안색이었다. 성우의 뛰어난 귀가 못 들을 리 없었다. “······유라 씨. 조금 심술궂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유라는 평소보다 굳은 표정으로 묵비권을 행사했으며, 성우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으며 벽을 두드렸다. 방금 전, 관통형貫通形인 제일총경과 폭발형爆發形인 제이총경을 쏘면서 느껴지는 감각이 있었다. 도구를 사용해서는 절대로 느끼지 못할 감각. 이 인조동굴 너머에는 더욱 거대한 동공이 있었다. 방금 전, 유라의 말을 귀를 기울이느라 청력에 신경을 집중한 덕분에 빗소리와는 전혀 다른, 물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성우는 유라에게 물었다. “이 산··· 분명히 온천생산지였죠?” “그런데요?” “그럼, 대단한 거 몇 번만 더 쏘겠습니다.” 드득-! 난데없이 제일총경이 벽을 두드렸다. 그 반동으로 다시 사격! 모든 무술의 시작인 진각. 네 개로 나눠 니접충평泥摺衝平의 자결 중, 충衝으로 대지를 꽂아 경체의 중심을 잡았다. 발이 반듯하게 펴지는 평平으로 몸의 중심을 잡고, 경체를 제 정립시켜, 발사관을 만든다. 이때까지 걸리는 시간은 많이 걸려도 1초 안팎이 되어야 한다. 총의 격철을 튕기듯, 발에 집중된 경체를 상체로 상승시킨다. 총경의 원리는 연속추진이다. 발사관은 상승할 때마다 매듭과 같은 것으로 기운을 튕겨 올리는 역할을 한다. 매듭은 어깨관절과 팔꿈치까지 이어지며 손목에서 마지막 가속을 한다. 이를 위해 튕기듯 팔을 휘둘러야 하는 것이다. 말아 쥔 주먹으로 경이 도달하는 순간, 가격할 물체를 향해 방향을 정한다. 여기서 중지를 접어 앞으로 내미는 용두권龍頭拳의 형을 취하면, 더욱 날카로운 공격이 가능하다. 하지만 구멍의 크기가 작아지기 때문에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게 좋다. 그드득- 펑- 압착소리의 끝에는 샴페인 뚜껑 따는 소리보다 조금 거친 공파음이 울렸다. 조금 후, 후끈한 열기와 함께 듣기만 해도 가슴이 시원해지는 소리가 구멍을 타고 들려왔다. 화아아아- “온천발견!” 온천이 있는 동공까진 오십여 센티미터 정도 남아있었다. “오랜만에 목욕이나 할까요?” 성우는 유라를 보고 희소嬉笑를 지었다. “이 정도 깊이라면 폭발형인 제이총경을 쓰는 것보다 곡괭이로 파는 게 효율적이겠군요. 그럼 파보실까요?” 유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곡괭이를 들었다. ‘그런데 뭔가 중요한 추궁거리를 잊은 듯한······.’ 유라의 상념은 성우의 곡괭이질 소리에 묻혀 깊은 곳으로 침전했다. 그녀로서도 오랜만에 하는 목욕은 참을 수 없는 매혹이었다. “극락일세.” 성우는 늙은이 같은 대사를 외우며 나른하게 적셔가는 감각에 몸을 맡겼다. 온천은 깊었다. 자연온천이라 그런지, 대략 일 미터 이상의 깊이로 수영을 해도 될 정도였다. 나쁘다는 소리는 아니다. 오히려 깊은 온천일수록 깨끗하기 마련이었다. 보글보글 기포가 올라오는 온천수는 지금까지 알게 모르게 쌓여왔던 정신적 피로를 풀어주었다. 게다가 눈도 즐거웠다. 석회질토양과 지하온천이 만나니 종유동鐘乳洞이 생성되어있었다. 유라의 술법으로 생성된 빛을 은은하게 산란시키는 벽면은 벽옥의 보석처럼 아름다웠다. 이런 종유동온천은 현실에서도 결코 보기 힘든 장소였다. 유라는 바위 하나를 가운데 두고, 성우와 등을 돌린 채 그녀 나름대로 온천을 즐기고 있었다. 가방에서 향수입욕제까지 꺼내 온천에 뿌릴 정도였다. “역시 좋군요. 이렇게 되면 마을 사람들에게 감사해야겠는데요?”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유라는 천장을 보았다. 고드름 같은 게 달려있었다. “저것··· 아리야 씨인가, 했던 사람이 쏘아내던 것과 닮아있군요.” 성우가 농담처럼 입에 담았다. 유라도 마침 그 생각을 했던 참이었다. 종유석鐘乳石의 생성과정 자체가 고드름과 닮았고, 아리야의 얼음 창은 고드름의 생성원리를 기본으로 짜인 한기의 집합체라 둘은 닮을 수밖에 없었다. “그럼 이 물은, 액체인간과 닮았나요?” 석회의 성분을 다량 포함한 물은 약간의 점성을 지녔고, 미끌미끌한 감각은 어딘지 모르게 액체인간을 떠올리게 했다. “하하하핫, 유라 씨도 재밌는 농담을 하시는군요.” “어머, 진담이었는데.” “······상상하고 싶으세요?” 성우는 침묵했다. 액체인간이 몸을 휘감고 있다니,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장가는 다 가버린 기분이다. “······취소해도 될까요?” 유라도 뒤늦게 그것을 깨달았다. 특히 여성인 점으로 미루어 볼 때, 그런 상상은 능욕이나 다름없었다. “이쪽에서 먼저 부탁합니다.” “고맙기 그지없네요. 후후후.” 성우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기포가 터지는 소리보다 더욱 선명하게 울리는 그 소리는 분명, 바위 뒤에 있는 유라의 발성기관에서 발원했을 것이다. ‘역시 웃을 수도 있군요.’ 사실, 유라의 행동양식을 보면 웃지 않은 게 이상할 정도였다. 여유 있고, 어느 면에서 보면 태평하고, 진지한 중에 농담도 잘 하고. 어느 때나 여유롭기 짝이 없는 그녀가 왜 하필이면 웃지 않을까? 그녀의 얼굴에 가장 잘 어울리는 것은 역시 웃음일 것이다. 초상화에 무의식적으로 투영되었을 정도로, 성우가 상상한 그녀의 웃음은 아름다웠다. 어째서 웃지 않은 것인가. 혹시 그녀가 가지는 비상식적 힘 대신, 웃음을 박탈당한 것인가? 그렇다면 슬프다. 아깝다. 안타깝다. 어째서 생판 타인인,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시간을 보냈을 뿐인 그녀. 왜, 그녀의 사정에 가슴 아파해야 되는 지, 의문도 떠올리지 못한 채, 마냥 슬퍼졌다. 동시에 웃고 있는 유라를 상상하며 그녀의 얼굴을 보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 잠수한다. 뜨거운 온천수에 담겨진 얼굴이 시원해지다가, 점점 뜨거워졌다. 바닥을 딛고 있는 발을 때고, 온천의 흐름에 몸을 맡겼다. 부유감을 즐기며 숫자를 샜다. 하나, 둘, 셋··· 백구십구, 이백, 이백일··· 오백구십구. 육백··· 경의 도움을 받았어도, 더 이상 버티기는 힘들었다. 발을 땅에 딛고, 수면위로 얼굴을 내밀었다. 유라가 그를 부르고 있었다. “···씨? 성우 씨? 성우 씨! 듣고 있나요?” 동굴 전체에 공명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어느 때보다 크게 들렸다. “아, 네. 듣고 있습니다.” 성우는 얼떨떨하게 대답했다. 휘몰아치는 상념에 정신을 비웠더니, 멍해져버렸다. 평소 때처럼. “왼쪽, 성우 씨에겐 오른쪽이겠네요. 그쪽을 봐주세요. 그리고 천천히 천장 쪽으로 시선을 옮기며 벽면을 눈여겨봐요.” 성우는 유라의 말대로 시선을 옮기다가, 문득 위화감이 드는 부분을 발견했다. 미세하게 무늬가 엇갈리는 벽 표면이 보였다. 온천의 열기에 석회질이 녹아 흐르면서 자연스러운 수직문양이 생성되어야하는데, 수직문양에 수평에 가까운 대각선이 섞여있었다. 끼익- 갑작스레 이질적인 벽이 밀려나오며 피로 젖은 장삼을 걸친 두 청년이 들어왔다. “후, 벽지에 와서 무슨 고생이냐 이게. 오늘만 해도 해부가 몇 개였냐. 아무리 연구결과가 중요하다지만, 이건 지식개발활동이라기보다 막노동이다, 막노동!” “그나마 온천이 없었다면 실험이고 뭐고 다 때려 쳤을 거······ 왜 그래?” 쥐수염 청년이 다른 말상 청년의 모습이 심상치 않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청년은 손가락으로 한 곳을 가리키고 있었다. 청년들의 시선이 한 곳으로 향했다. “······.” “······.” “······.” 부글부글- 싸한 침묵이 흘렀다. 한참 뒤, 말상의 청년이 입을 열었다. “···선녀인가.” “···실험용 환각제를 너무 많이 마신 걸지도.” “······.” “······.” “그럼 옆에 있는 사내새끼는 뭐냐.” “···지나가던 나무꾼일지도···.” 성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선녀와 나무꾼입니까?’ 청년들의 눈이 크게 떠지고 입이 헤- 벌어졌다. “그래도··· 눈요기는 잘하는 걸···.” 유라가 자신도 모르게 몸을 깊이 담갔다. “근데··· 단순히 놓고 보면··· 침입자 아냐?” “응. 그렇지.” “호각 있어?” “너는 목욕할 때 호각 가지고 다니냐?” 멍하게 이어지는 둘의 만담이 슬슬 현실적인 문제로 넘어가려고 할 때, 유라는 상황의 심각성을 깨닫고 미리 바위위에 올려둔 보자기로 중요부위를 가렸다. 물에 젖어 비치긴 하지만 없는 것보다 안심이 된다. 성우 역시 행동했다. 마침 총경삼권록에 사용할 만한 게 있었다. 짧은 동작으로 효과적인 위력을 낼 수 있는 총경. 온천바닥에 발을 내딛었다. 평平의 진각으로부터 느슨한 발사관이 짜여졌다. 오른팔을 근육에 긴장이 생기지 않을 정도로 가볍게 뒤로 당기고, 주먹은 가볍게 쥔다[空拳, 반줌쥐기라고도 한다]. 어깨에서부터 발사관의 형태는 제일, 제이총경과 극명하게 달라진다. 고무동력기의 고무처럼 꼬여진, 오히려 수십 배는 복잡하게 꼬여진 발사관. ‘음!’ 느슨하게 풀어졌던 발사관이 활시위처럼 팽팽하게 당겨졌다. 동시에 발바닥에서부터 매듭이 풀리듯 총알이 쏘아져 올라왔다. 퉁- 퉁- 퉁- 연속추진, 총경의 핵심구조인 매듭구조가 풀릴 때마다, 경의 총알은 배가된 속력으로 목표를 향해 내달렸다. 익숙해지면 총경의 공격성향이 정해지는 어깨까지 상승하는데 수유의 시간조차 걸리지 않는다고 한다. 성우의 경우, 익숙하지는 않지만 놀라운 집중력과 이미지 메이킹 덕분에 수유에 버금가는 짧은 시간 만에 총경을 쏠 수 있었다. 제삼총경의 백미白眉는 팔의 회전이다. 표현은 총알이었지만 원래는 에너지 덩어리. 경의 총알은 꼬일 대로 꼬인 발사관을 지나며 용권처럼 회전했다. 동시에 성우가 주먹을 꽉 쥐는[充拳] 동시에 손목, 팔꿈치, 어깨관절을 일제히 회전시켰다. 총알이었던 경은, 어느새 태풍이 되어있었다. 주먹을 통한 제삼총경 발출. 폭풍처럼 주위의 공기를 휘감으며 돌진했다. 총경이란 이름답게 매우 빠른 속도로 말이다. 슈가가각-! 성우의 권경拳勁은 온천수의 상당량을 휘감으며 청년들에게로 떨어졌다. 청년들은 갑작스럽게 다가온 해일 같은 물 더미에 휩쓸려 들어왔던 통로 그대로 나가 떨어졌다. 기절시키려고 그들에게 다가갔던 유라는, 나가떨어지는 청년들을 보고 멀뚱히 성우를 보았다. 성우 역시 총경의 위력에 놀라 자신의 주먹을 돌아보기만 했다. 최선의 힘을 다한 건 아니었다. 제대로 된 위력이라면 원래 그들의 몸은 갈기갈기 찢겨져 나갔을 것이다. ‘공에 필적하는 경··· 인가.’ 어쨌든 지금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심상치 않은 곳입니다.” 성우는 기절한 청년들을 보며 중얼거렸다. 아무리 봐도 피로 보이는 액체가 잔뜩 묻은 옷을 입었으니, 확실히 범상하진 않았다. “···그렇네요. 그런데··· 분명 실험이라 했지요?” “해부라고도 했고, 실험용 환각제라고도 했습니다.” 유라의 얼굴에 심각함이 감돌았다. 성우의 얼굴엔 의아함이 떠올랐다. 유라는 분명 표정을 짓고 있었다. 평소 때와는 다르게 일그러짐이 확연했다. ‘걱정? 분노? 대체 뭐야?’ 항상 무표정을 유지하던 얼굴에 표정이 떠오르자 그것만큼 곤혹스러운 건 없었다. 오히려 대화를 나누던 중에 나오는 말을 계산해서 심리를 파악하는 게 차라기 쉬울 것 같았다. “어쨌든, 옷부터 입어야겠군요.” 물에 젖어 거의 나체나 다름없는 유라의 몸을 슬쩍 보며, 성우가 제안했다. 온천의 습기가 조금 차긴 했지만, 유라의 술법에 의해 마른 옷은 전보다 포근하게 몸을 감쌌다. 유라는 코트자락을 수평으로 펄럭일 정도로 빠르게 움직였다. 청년들이 연 출구를 통해서. “조사할 것이 있어요. 성우 씨는······” “따라가죠.” 유라는 성우가 자신의 가방을 들고 걸음을 내딛자 재빨리 몸을 돌려 세우고 앞장섰다. ‘심술쟁이 다음에는 부끄럼쟁이일지도 모르겠군요.' 성우는 청력에 신경을 집중했다. 생명줄에서 흘러나오는 미세한 음파가 귀에 거슬리긴 했지만, 곧 적응이 된다. 예민한 청각에 동굴 특유의 공명음이 잡혀왔다. 소라껍질에 귀를 대면 들리는 바다소리랄까. 그런 종류의 것이 한동안 잡히다가 갈림길에 서자 찢어지는 듯한 비명성이 메아리치며 날카롭게 귀를 후볐다. ‘오른쪽에서 들린 것인가.’ 유라는 정면으로 향했다. 성우는 말해야 될 것인가, 말 것인가를 고민하다가 조금 더 몸을 긴장시킨 채 얌전히 뒤따르기로 마음먹었다. 걸으면서 귀에 신경을 집중하고, 권총을 점검했다. 2시간에 한 번씩, 마술처럼 빈탄창이 백업되는 기현상이 존재하는 권총에는 그날의 격전의 흔적이 전혀 남지 않아있었다. ‘다행이군.’ 총에 총알이 가득 차, 손안에 묵직함이 느껴지면, 전쟁터에선 그것보다 안심되는 것은 없다고 한다. 있다고 해도, 그것은 마약이나 정신이상계열로 의심되는 사이비일 뿐. 성우의 외할아버지조차 극찬한 성우의 육감은 경고성을 반복적으로 토해놓으며 성우의 발걸음을 늦추고 있었다. 그러나 훌륭하게도 성우는 유라의 뒤꽁무니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유라의 발걸음이 점점 거침이 없어졌다. 그녀의 전투에는 어울리지 않는 손이 소매로 들어갔다. 20세기 만화책에나 나올듯한, ‘무엇이든 나오는 신비한 애완동물의 만능주머니’는 아니지만 지금까지 어떠한 위기가 닥쳐도 이 소매에서 나온 물건으로 처리하지 못한 건 없었다. 물론 성우의 관점일 뿐이다. 오래전부터, 성우의 귀에는 거슬리는 소리가 무단침입을 시도했다. - 크흑크흑······ 듣기 만해도 서러워지는 소리. 여성의 것인지, 남성의 것인지, 아니면 둘 다의 것으로 믹스되어 나오는 소리인지. 알 수 없는 괴성이었다. 유라의 귀에도 들리기 시작했다. 유라는 망설임 없이 소리의 방향으로 달렸고, 이내 허술한 문짝 하나를 볼 수 있었다. 끼익- “누구냐?” 50대 장년인으로 보이는 날카롭게 생긴 남자가 차트에서 시선을 때어 난데없이 들어온 성우와 유라를 쳐다보았다. “아···.” 성우가 말을 꺼내려 하자, 어느새 사라진 유라가 강맹한 기세의 발차기를 날려 남자의 얼굴을 함몰시키고 있었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남자는 핏덩어리와 옥수수알을 쏟아내고 벽 한 구석에 처박혔다. “과하지 않나요?” “······.” 유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뚜벅뚜벅 걸어가, 쓰러진 남자의 앞에 서서 싸커킥을 휘둘렀다. 빠각- 턱이 박살난 그는 진짜로 기절한 듯 했다. 평소의 유라치고는 과하기 짝이 없는 제압이었다. - 크흑크··· 누군가? 괴성이 들려오자 성우와 유라는 고개를 그쪽으로 돌렸다. 거기에는 사람의 평균신장에서 두 배는 거대한, 3미터 크기의 거대한 인영이 있었던 것이다. 긴팔원숭이 같은 기다란 팔을 가진 그의 가죽에는 새하얀 털이 덮고 있었다. 다만, 사람의 형태가 뚜렷했다. 원숭이라기보다 털 많은 사람의 이미지가 강했다. 유라가 그 인영에게로 다가갔다. “원앙猿仰······ 왜 당신이 여기에 이렇게 있는 겁니까.” 유라는 잠시 침묵했다가, 조용히 덧붙였다. “그것도 이런 꼴로······.” 원앙의 전신에는 투명한 호스가 끼워져 있었다. 그것도 전신에 빽빽하게. 사실 그의 털 중 삼분지 일이 바로 이런 가는 투명호스였다. 그것을 통해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밝게 빛나는 푸른 액체가 유리관으로 이동했다. 몸의 진액을 탐욕스럽게 빨아들이는 투명호스의 모습은 잔인하기 그지없었다. “영액靈液···.” 유라가 유리관에 든 미량의 액체를 보고 침음성을 흘렸다. - 이 음성은··· 풍여랑, 풍여랑인가? “네, 기륭의 북산주北山主여.” 유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풍여랑, 그녀의 미들네임이자, 성우로선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다. 궁금했으나 끼어들 때가 아님을 느끼고 잠자코 바깥의 상황에 창각을 집중했다. 누군가 다가오면 이만저만 큰일이 아니다. - 오랜만이로군. 이게 몇 년 만이지? 상당히 오래 전의 일인 것 같은데···. “그것보다 어째서 당신이?” - 크흑크흑, 자네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빌어먹을 연금술사들에게 당했다. “성산의 관리자인 당신을? 그런 바보 같은!” 성산. 단순히 동식물이 살기 좋게 강우량을 컨트롤하기만 하는 산을 말함이 아니다. 성산이라 이름 붙은 산에는 그 나름의 영수영조靈獸靈鳥가 있기 마련이고, 그들의 역할은 눈에 보이지 않는 땅의 기운을 조절하는 것이다. 그들 스스로가 의도하는 것이 아니지만,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땅의 기운이 조절되는 것이라 그들의 존재는 성산에 있어서 필수불가결이었다. 전에 유라가 만났던 형산의 은빛 늑대도 산의 영수였다. 성산과 영수는 표리일체表裏一體의 관계. 그것이 망가졌다. 그것도 인간에 의해서. “무엇을··· 위하여 라고 했습니까?” 듣고 있던 성우가 물었다. - 실험을 위하여 협조 부탁한다고 입바른 소리를 지껄이더군. 그러고 보니··· 매일매일 인간의 비명이 내 정신을 괴롭게 해. 저 소리만 줄여준다면 지금의 상태도 괜찮은데 말이야. 부탁이 있네. 저 소리를 멈춰줘. “······인간의 비명. 그것도 매일매일··· 이라고?” 유라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속으로 신음을 삼킨다. 같은 인간에 대한 분노가 휘몰아쳤다. 또······ 또 인거다. 인간의 비정상적 탐욕은 어느 곳이나 존재했다. 많은 사람을 희생시켜서 얻어야 하는 게 뭔가. 무엇을 위해 같은 사람을 희생시키고, 누천년 동안 내려오는 법칙을 깨부수는 건가. 마블링처럼 뒤섞인 인간의 시체를 계단 삼아, 지식의 종탑 도달한다고 해도 그것은 어떠한 가치가 있는 것인가. 연금술사. 어디까지 타락해야 만족할 수 있을까. 유라는 생각했다. “근데 여기는 동서남북 중, 동에 해당하는 영역. 기륭의 동산주, 은린표銀鱗豹는 어디가고 원앙이 여기에 있는 거죠?” - 동산주는 먼저 죽었지. 유라는 고개를 저으며 믿을 수 없다는 의심의 눈빛을 띄웠다. “말도 안돼요. 그의 무력은 일개대군도 어찌할 수 없는 데······.” - 흐흐흐, 말도 안 되는 능력을 지닌 하나는 어찌할 수 있는가 보더군. 원앙은 덜덜 떨었다. 사시나무가 흔들리듯, 간질을 앓는 불쌍한 소녀의 연약한 몸처럼, 그의 거구가 떨렸다. 투명호스가 출렁이며 역류하다가, 다시 정상적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 여러 개의 생명을 가진 녀석이었다. 죽여도 죽지 않는 놈이었고, 다시 일어날 때마다 점점 강해지는 놈이었다. 은린표는 그를 세 번 죽였고, 세 번째로 일어난 그의 일격에··· 정신을 잃고 연금술사 놈들의 실험재료가 되었지. 크흐··· 나는 두 번 죽이고 이 꼴이고. “맙소사······ 그런 말도 안 되는!” 성우는 유라가 그녀답지 않게 감정표현을 많이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중, 바깥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슬슬 가야겠습니다.” 성우의 말에 정신을 차린 유라가 결연한 눈빛으로 비수를 뽑아들었다. “원앙, 구해드리겠습니다.” - 싫네. 어차피 자네가 구해봤자 다시 잡혀 들어올 거야. 그를 다시 보기··· 솔직히 무섭네. 무서워. 크흐크흐흐흐흐. 유라는 영수조차 뼛속깊이 두려움을 새겨버린 그에 대해 심한 분노와 동시에 궁금증이 생겼다. “상商 연단가鍊丹家, 실험체 시험형試驗型에 대해, 보고 드립니다.” “들어오게.” 성우는 방금 전에 들었던 장년인의 목소리를 흉내 내었다. 복화술複話術을 배운 적이 있었기에, 흉내 같은 건 쉬웠다. 특히 벽을 사이에 두고 하면 차이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에 상대에게는 의심 같은 건 생기지 않을 것이다. 문이 열렸다. 성우는 예전 검수가 준 비급, 박투편의 자세를 응용한 반보충권半步衝拳을 찔러 넣었다. 퍽- 사내의 고개가 획 돌아갔으나, 타격은 받지 않은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순간, 성우의 경체가 맹렬하게 달리더니, 성우의 주먹과의 접점을 통해 사내의 머리내부를 파고들었다. 푹- 뇌가 뭉개져 단순한 점액질덩어리가 되자 경체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사내의 칠공에서 피와 뇌수가 뿜어져 나왔다. 사내의 안구가 튀어나와, 성우의 발치에 붙었다. 발경의 방법에는 세 가지가 있었다. 육체보다 경체의 움직임을 빨리하는 속速. 육체와 경체의 움직임을 같이하는 충充. 경체보다 육체의 움직임을 빨리하는 둔鈍. 속의 경우에는 장풍과 같이 몸에서 멀리 떨어져있어도 물리력을 행사 할 수 있었다. 총경과 경사 역시 이 종류에 들어간다. 충의 경우는 공방일체의 신체강화였다. 경체와 육체의 싱크로를 극대화시켜 훨씬 강한 위력의 공격을 할 수 있음과 동시에 타격을 해소하는 방어에 쓰였다. 가장 경체의 체력소모가 적은 발경이었다. 둔은 이른바 내가중수법內家重手法이다. 몸과 몸을 맞대어 상대의 몸에 경체를 흘려 타격하는 방법이었다. 적은 경으로 큰 효과를 볼 수 있는 발경이지만, 반드시 접근해야 한다는 리스크가 따랐다. 성우가 쓴 발경은 둔이었다. 처음으로 쓰는 내가중수법이라 그런지, 시체의 상태가 참혹했다. 성우는 살인의 여운을 가볍게 지워버렸다.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지는 오래되었고, 신상을 위협할 적이라 판단되면 사정 같은 건 두지 않는 전투논리 역시 오래전부터 정립되어있었던 것이다. ‘일종의 세뇌洗腦인가? 외할아버지도 참··· 편리한 것을 손자에게 걸어놓는군요.’ 성우는 조상탓을 하며 죽은 연금술사의 손에서 서류 한 장을 빼어들었다. “상양촌 마을 사람 3분의 1을 병기화하는데··· 성공했다. ···[中略]···이제부터 실전단계에 들어가며, 그 일차적인 사항으로 일부를 위화감 없이 마을로 돌려보내는 것에 성공했다. 정신개조사항은 완벽한 것으로 추정되며 마을은 전혀 위화감이 없이 축제 분위기에 있다. 명령이 떨어지는 즉시, 마을 사람들은 병기로서의 역할을 하게 될 것이며 실험은 종료. 상부에 양산화의 기틀을 마련하는 좋은 발판이······ 이것 참··· 제기랄, 이로군요.” 섬뜩하게 타오르는 유라의 눈을 봤기 때문일까. 담담한 성우는 유라의 감정에 말으로라도 동조를 표했다. 자기에 관련된 사항이 아니면 무신경해지는 그로썬 그것밖에 할 수가 없었다. 유라는 한손에는 권총, 한손에는 비수를 들었다. “···저··· 잠시만··· 잠시만 화낼 게요.” 유라는 눈을 감았다. 엄숙해진 그 모습은 백일기도를 드리는 성직자보다 성스러웠다. 마치 성우에게 용서를 빌기라도 하듯, 그녀는 말했다. “···모두 받아드리겠습니다. 용서할 수 있을 거예요.” 그리고 성우는 마치 면죄부를 손안에 가지고 있기라도 하는 듯 유라를 미리 용서했다. 유라의 표정이 조금은 편안해졌다. 하지만 그 특유의 무표정은 더 이상 무표정이라 부를 수 없는 분노의 감정으로 가득했다. 조금의 편안함은 분노의 바다에 잠겨버린 듯, 더 이상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가 방을 나섰다. 성우는 그녀의 가방을 들고, 예전과 같은 행동을 했을 뿐이다. 짐꾼은······ 얌전히 따를 뿐. 귀향도鬼響刀 적산積山은 돈을 세고 있었다. 연금술사들은 무인들이 보기에는 음침한 족속이지만, 금전계약하나만큼은 확실한데다 적은 노력으로 많은 금전을 벌 수 있는 일을 쥐어준다. 이번 일도 그랬다. 산채山寨에 있는 연구시설을 지켜주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방향치 여행객들이 한 두 번씩 찾아오면 산적질 해주고, 연금술사 일행이 찾아오면 암호를 주고받은 후, 연구시설로 안내해주기만 하면 되었다. 그 외에 할 일은 없었다. 정기적으로 연금술사들은 사람들을 끌고 왔다. 어디를 봐서 그런지는 몰라도 그를 협객으로 지레짐작한 한 여인이 그의 옷자락을 붙잡고 사정을 설명한 적이 있었다. 이 일대의 온천소유권을 국가에게 사버린 후, 합법적으로 온천을 강탈하고 세금을 징수했다고 한다. 온천으로 먹고 사는 그들에게 온천강탈과 갑작스럽게 닥쳐온 세금은 청천벽력이었다. 부당하다고 말하는 마을사람들에게 연금술사들은 대신 할 것을 요구했다. 몸. 한정기간동안 마을 사람들 중 일부분을 노예로 쓴다고 했다. 한 달이라는 한정기간이라면 괜찮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솔선수범, 가정을 지키기 위해 투신했다. 물론 그런 사람들만 있는 게 아니라 억지로 끌려온 사람도 있었다. 그 아가씨도 그런 종류였다. 그녀의 말을 들은 적산의 반응은 비웃음이었다. 구원은커녕 엉덩이를 빵 쳐버렸다. 협의지심 같은 건 돈으로 바꾼지 오래였다. 그들이 실험실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모른다. 어렴풋이 짐작하기는 하지만 일부러 알 바는 없었다. 오히려 장기계약기간 동안 쌓인 성욕을 풀 수 있어서 좋았다. 대표적인 예로 그를 협객이라 착각한 아가씨는 그의 성욕받이가 되었다. 연금술사들도 그와 다를 바가 없었다. 대부분이 젊은 사람들이라 끌려온 마을처녀들은 지켜야 할 것 중 하나를 가볍게도 잃어버렸다. 단 하나 남은 불만이라고는 숙소. 동굴을 파서 만든 이 숙소는 공기가 탁했다. 물론 돈에 비하면 무시해도 좋을 불만이었다. 돈을 다 센 적산은 이번에도 계산이 철저하다며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이제 가봐야겠군.” 시계를 보니 교대시간이었다. 잔참검殘慘劒 여각礪角에게 인수인계 받아야했다. 으아아악-!! 비명성이 길게 문틈을 파고들었다. 땡땡땡땡---!! 이어지는 경보음. 단순하지만 처음 들어보는 소리였다. 그도 그럴 것이 실험산채에 침입자는 한 번도 없었다. ‘장난이 아니다!’ 적산은 자신의 귀향도를 챙겨들고 문을 열었다. 그 순간, 동굴 벽을 파고든 한줄기의 빛이 그의 허리를 갈랐다. 그리고 문이 열렸다. “아···아아!” 지금까지 이 여인 같이 아름다운 여인을 만난 적은 없었다. 무표정을 하고 있지만, 가슴 속 깊이 파고드는 여인의 감정분출은 문득 사랑하고 싶다는 이상한 감정을 적산에게 불러일으켰다. 더 보고 싶었다. 그런데 허리가 기울었다. 적산의 상체가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적산은 자신의 하체를 올려다, 보며 생각했다. ‘그녀의 얼굴을 가리지마.’ 마침 하체가 피분수를 뿜으며 앞으로 쓰러졌다. 여인의 가죽코트가 피로 물들었다. 여인의 얼굴이 보였다. 자신을 가리키는 여인의 손이 보였다. 여인의 손에 들린 총을 보았다. 총구에서 빠져나오는 총알을 보았다. 의식은 사라졌다. 원앙이 있는 방에서부터 나오고, 유라가 맨 처음 한 일은 방아쇠를 당기는 일이었다. 동굴 안으로 총성이 퍼져나가자 사람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개중 가장 가까이 있었던 사람이 유라를 보고 침입자다, 따위의 대사를 뱉었을 때, 이미 그의 인두人頭는 동굴 천장에 닿고 있었다. 뒤따라온 젊은 사내가 찢어질 듯한 비명을 지르고, 그 소리를 들은 한 연금술사가 타종을 미친 듯이 때렸다. 동굴전체에 비상이 걸리는 건 순식간이었다. 유라의 손속은 거침이 없었다. 네 명의 연금술사가 한 번에 들어오느라 걸음이 엉킨 틈을 타, 유라는 가운데에 있는 연금술사의 앞으로 몸을 날렸다. 날이 피로 물든 비수를 역수로 잡아 연금술사의 관자놀이에 꽂아 넣었다. 그리고 단음주單吟呪를 외웠다. “인刃, 정霆, 선旋, 패覇.” 광검이 생성되었고, 뇌전雷電이 검병에서 일어나 투명한 검신을 타고 검극까지 달리자 연금술사의 머리가 수박처럼 폭발했다. 피와 뇌수를 안개처럼 증발시키며 벽력霹靂의 푸른빛을 띠는 검신이 모습을 드러내자 주위의 대기가 명동鳴動했다. 유라는 인두폭발에서 생긴 혈무를 휘감으며 나머지 셋의 연금술사의 목을 쳐 날렸다. 세 개의 인두가 굴렀고, 타종을 듣고 쫓아온 연금술사들의 발치에서 멈췄다. “광인마탄!” 한 연금술사가 외쳤다. 연금술사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살아있는 전설이었다. 그의 보답으로 유라는 총을 쐈다. 뇌와 뇌수를 휘감은 총알이 퍽- 하고 연금술사의 뒤통수를 뚫고 나왔다. 연금술사들은 도망쳤다. 유라는 그들을 향해 총을 쏘며 천천히 걷다가 인기척을 느끼고 벽을 향해 광검을 휘둘렀다. 막힘을 용서치 않는 패 자결이 함축된 광검은 벽을 두부처럼 뚫고 지나가며 벽에 기다란 일자一字를 새겼다. 문을 여니 막 건장한 체격의 도객의 상체가 서서히 떨어지고 있었다. 피가 뿜어져 그녀의 코트를 더럽혔다. 유라는 코트가 더러워지는 것도 신경 쓰지 않은 채, 무심한 눈길로 양단된 도객의 몸 덩어리를 바라보았다. 도객은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기분이 나빠, 미간에 총알을 선물했다. 수많은 사람을 희생시킨 주제에, 자신의 죽음에 웃다니. 이 얼마나 부조리한가. 유라의 귀로 발소리가 들려왔다. 연금술사들이다. 타락한 연금술사들이다. 유라의 뇌리 속에 주문처럼 들려오는 소리는 그렇게 생겨먹었다. 단순한 악인은 용서할 수 있어도, 타락한 연금술사만은 용서할 수 없다. 그것이 같은 길을 가는 연금술사의 도리. 그렇게 배웠다. 배움을 실천해야 했다. 옛날처럼. 유라의 질주는 광풍 같았다. 추아아악-! 횡으로 휘둘러지는 광검은 휘어지는 뇌전. 거침이 없었고, 걸림 역시 없다. “아아악!” 비명이 울린다. 스쳐갔는지도 모르는 빛이, 진한 물리력을 행사했을 때, 이미 연금술사들의 몸은 사람의 것이라 할 수 없는 타진 고깃덩어리가 되어있었다. 새까맣게 탄 상처의 단면에서도 피가 터져나왔다. 약으로 찌든 변색된 피였다. 동굴은 진득한 피비린내로 가득했다. 유라가 달렸다. “······위험하군.” 피와 살점으로 그로테스크하게 색칠된 동굴벽면을 보며 성우가 뒤따랐다. ‘심해. 변화의 폭이··· 너무 커.’ 제어가 되어줄 사람이 필요하다고 성우는 달려가며 생각했다. 연금술사들의 대처는 빨랐다. 발목과 팔이 날아간 한명의 연금술사가 실험용 환각제까지 써가며 고통을 참고 도망쳐왔다. 그는 다른 연금술사들에게 정보를 전달했다. “광인마탄··· 북부의 공포가 나타났다아!” 물론 그 후, 그는 죽었다. 과다출혈과 약물과다복용에 의한 부작용이었다. 그가 죽으면서 남긴 피비린내는 연금술사들의 정신을 바짝 들게 했다. 중부연금술사답게 그들은 우선 약물을 복용했다. 철근폭경단鐵筋爆勁團. 단 두 시간 동안이지만, 몸의 근육을 도검불침의 강철로 만들고, 경체를 살라, 단 시간 동안의 강력한 경력을 내뿜을 수 있게 만들어주는 단환이었다. 게다가 이 단환에는 마혈균이 소량 첨가되어있어 육체의 강화를 견딜 수 있는 정신력까지 만들어낸다. 원래 마혈균의 용도를 안전한 한도까지 훌륭히 개발해낸 약이었다. 남은 연금술사의 수는 15명. 그들의 지도자는 이미 목숨을 잃었다고 판단했다. 지도자인 연단가가 있을 원앙의 거처가 있는 방향에서부터 광인마탄이 나왔기 때문이었다. 부지도자는 단륜부였다. 실험연금술사인 연단가 지향의 연금술사들로선 전투연금술사인 그를 의지하지 않았다. 자존심 같은 형편 좋은 단어로 포장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이것은 옛날부터 중부연금학계에 뿌리 깊이 내려온 갈등으로 이성은 알고 있는 데 감정으로는 어쩔 수 없는 거였다. ‘괴물에겐 의지하지 말자.’ 그러는 그들 역시 약물복용으로 잠시 동안 괴물이 되는 것이지만 자기 옷에 묻은 흙은 원래 잘 안 보이는 경우라 할 수 있겠다. 우선 그들은 장소를 선점했다. ㄱ자로 꺾인 통로가 있었다. 이런 곳이라면 기습에 용이했다. 특히 그녀가 미리 지나갈 통로에 놓인 횃불로 상대의 출연을 미리 알 수 있었다. 철근폭경단의 약효가 돌자 연금술사들은 노弩를 들었다. 총이 있었다면 총을 들었을 연금술사들이지만, 총에 대한 모든 기술은 북부 연금학계가 독점하고 있었다. 그들이 들고 있는 노도, 중부군부의 병기특수개발부에서 가장 최근에 만들어진 신형으로, 시창矢倉이 연결되어있어 장전이 간편했고 한 번 장전에 4연발이 가능했다. 철시鐵矢를 시창에 신중히 넣고 시위를 당겨 화살을 장전한다. 그리고 연금술사들은 기다렸다. 그들은 전투연금술사와 같은 성질 급한 자들이 아니다. 그러나 공포는 누구에게나 공평히 찾아온다. 유라가 동굴의 꺾인 통로에 갑작스럽게 모습을 드러냈다.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바람소리하나에도 방아쇠를 당길 정도로 예민했던 연금술사들은 그녀가 총을 겨누기도 전에 철시를 쏘았다. 노에 달린 네 개의 방아쇠가 차례대로 뒤로 꺾였다. 열 명이 차례대로 날린 철시는 허공을 가득히, 그렇지만 너무 빨라 짧게만 메우고 유라의 전신에 박히기 시작했다. 유라의 몸은 철시에 박히면서도 쓰러지지 않았다. 비에 젖은 그녀의 몸은 타격이 아예 없는 것인지, 한치의 흔들림조차 없었다. “성공한 건가? 북부의 공포를··· 우리들이 죽인 거야?” 연금술사들은 서로를 의심의 눈빛으로 쳐다보았으나 얼굴에는 희락喜樂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 때였다. “웃지마라. 입을 열지 마라. 그 숨결을 멈추어라. 죽음에서 눈 돌리지 마라. 일말의 기쁨조차 가지지 마라. 너희에게는 오직 절망 뿐, 희망은 아깝다.” 화살이 몸에 가득 박힌 유라의 입이 움직였다. 연금술사들의 의심의 눈빛은 곧바로 경악의 눈빛으로 바뀌었다. 황급히 노를 다시 장전하고 방아쇠를 당겼다. “그리고 편하게 지옥으로 보내지도 않겠다. 폭爆은 두 번째 단어. 다만 광풍狂風처럼.” 유라는 방아쇠를 당겼다. 온몸에 빼곡하게 철시가 박혀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의연한 자태로. 총구에서 광륜 두 개가 터졌다. 붉은색과 푸른색이 합쳐진 자수정의 광륜이었다. 단 한 발의 총알이었다. 그러나 마탄이라 이름 붙은 총알은 그 한 발조차 치명적이다. 푹- 나름대로 중심에서 다른 연금술사들을 지휘하고 있었던 연단가 지망생의 가슴에 총알이 박혔다. 총알이 박힌 것도 모르고 계속적으로 철시의 방아쇠를 당기고 있던 그는 갑자기 가슴에 강렬한 통증을 느꼈다. 그제서야 그는 마총의 총구에서 일어난 광륜을 발견했고, 죽는구나, 하는 무가치한 깨달음을 얻었다. 그러나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가슴을 시작으로 전신의 피가 끓어오르는 감각을 느끼고, 전신의 경체가 폭주하기 시작했다. 폐에 들어 찬 모든 공기와, 뇌수를 비롯한 점액질성분이 모조리 미칠듯이 타오르고 있었다. 다른 무엇보다 피부가 부풀어올라가는 게 가장 고통스러웠다. 그 고통과 동시에 상대적으로 잠잠하던 뼈가 폭발했다. 뼛조각은 살을 뚫고 사방으로 퍼졌다. 찢어진 살점이 튀었다. 펑-! 풍선 터지는 소리와 함께 살점과 뼛조각이 수류탄처럼 터져나갔고, 연금술사는 한줌의 혈무로 변신했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난데없는 폭발에 휩싸인 연금술사들은 살점에 맞은 부위가 뜨거워지기 시작했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 순간 첫 번째 마탄의 희생자와 똑같은 과정을 치러야 했다. 펑펑펑--! 폭발의 전염. 과거 유라가 형산의 늑대들을 처리했을 때와 다를 바 없는 위력이었다. 아니, 확 트여진 그 때와는 다르게 좁디좁은 동굴이라 그 위력은 배가 되어있었다. 게다가 주제에 병법을 안다고 노를 쏘는 데 밀집대형을 취했기 때문에 그 효과는 더욱 컸다. 단 한 발의 쇳덩어리에 열 셋의 연금술사가 터져 죽었고, 한 사람의 연금술사가 순수한 폭발로 발생된 뼛조각에 미간을 관통되어 죽었다. 단 하나. 철시에 아무런 효과가 없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뒤돌아보지도 않고 곧장 도망친 그만이 살아남아 도망치고 있었다. 철시에 꿰뚫려 있던 유라의 신형이 흐려졌고 이내 완전히 사라진 후, 전혀 엉뚱한 데서 유라가 걸어 나왔다. 방금 전까지 철시를 맞던 유라는 애초에 거기 있었던 듯, 기역자 통로를 돌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통로는 피와 살점으로 덕지덕지였다. 저주의 마탄, 그 원리는 북부연금에서 최악 살상기술로 치는 인체 내부물질변환이었다. 총알을 통해 저주를 전달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유라처럼 폭발전염을 가능케 하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하다. 술법이나, 저주를 전이시키는 남부주술연금의 이재移載의 원리를 추가함으로 상승효과를 본 것이다. 폭발의 흔적은 끔찍했다. 천장에 붙은 살점과 피가 뚝뚝 떨어졌다. ‘···더러워.’ 무엇이 더럽다는 뜻일까. 단순히 피와 살점이? 타락한 연금술사의 피가? 아니면 무감동한 살인을 가볍게 해치우는 자신이? 그게 어쨌든 유라는 광검을 휘둘러 떨어지는 족족 피를 태워버리며 도망친 연금술사를 쫓았다. 성우가 뒤 따라왔다. 성우는 굴러다니는 눈알을 자신도 모르게 발로 밟았다. ‘더러워.’ 눈썹을 일그러트리며 중얼거렸다. 우연인지 유라와 같은 생각이었다. 다만, 성우로선 훨씬 현실적이었다. 방금 전 목욕했는데, 그것을 의미 없게 만들고 싶진 않았다. 평의 진각을 밟았다. 발사관, 캐터펄트를 만들고 경체의 일부를 꼬고 느슨하게 조였다. 짧지만 강렬한 임팩트를 주는 동작으로 성우의 상체가 움직였다. 일권이 허공을 가로질렀다. 성우의 어깨에서부터 경체로 인한 풍륜風輪이 일며 주먹으로 치달렸다. 제삼총경이 동굴을 휩쓸었다. 성우의 권이 가리킨 방향으로 용권이 휘몰아치자 피와 살점이 휩쓸려 날아가다가 권의 여력이 정점에 달하는 곳에서 한곳에 모여 부딪쳤다. 거대한 살덩어리가 제멋대로 꼬여 굴렀다. 마치 말똥구리가 X를 굴린 것 같은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더욱 그로테스크하게 보였다. 죄책감은 들지 않았다. 유라만큼 증오하는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옹호해줄 마음이 드는 족속들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편리하군." 두 번째로 쓴 제삼총경에 대한 감상은 그것뿐이었다. 고안자가 들었다면 땅을 치고 되돌려받겠다고 지하에서 통곡할 정도로 썰렁했다. 성우는 예의상(?) 침을 뱉어주며 다시 유라를 쫓기 위해 가방을 들었다. 성우는 유라와 길이 엇갈렸음을 깨달았다. 흔적을 중간에 끊겨, 청각을 의존해서 찾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소리가 큰 곳을 향해 걸었다. 나타난 것은 유라가 아닌 연구소장실. 우연히 들어온 방일 뿐이었다. 그 때, 성우의 귀를 잡아 끈 기계음이 다시 울리더니 고급 탁자 위에 놓은 종이판에서 부표가 떠오르듯 글자가 떠올랐다. 신기해서 종이판을 보고 있는데, 뜻밖의 소식이 거기에 적혀져 있었다. -광인마탄발견. 각 기관추적바람. 발견시 격돌금물. 그렇게 시작한 문구는 이내 그림으로 바뀌었다. 다름 아닌 성우와 유라의 얼굴을 담은 몽타주였다. 중요한 건 마지막으로 떠오르는 단어. “구요성九耀城의 구혈당九血當······. 이상한 데서··· 우릴 귀찮게 할 예정인 사람의 정체를 만나게 되는군.” 위세 좋게 쓰여 있는 글의 마무리를 짓는 이름. “구혈당이라······ 적어도 지금 신경 쓸 필요는 없겠지.” 성우는 눈앞에 보이는 신기한 것들을 챙기고 다시 유라를 쫓았다. “헉헉헉!” 철근폭경단의 효력이 몸에서 폭발하고 있었다. 몸의 비정상적인 활력은 모두 달리는데 투자되어 비겁한 연금술사를 도주의 달인으로 만들고 있었다. 연금술사는 어느 한 문 앞에 도착했다. ‘이곳을 통해서라면······!’ 딱 보기에도 육중한 철문이었다. 평소 때라면 연구소장의 허락을 받고 들어갈 수 있는 곳이었다. 철문에 손을 대었다. “다 도망쳤나? 쓰레기?” “헉!” 그가 고개를 돌린 순간, 뇌전이 떨어져 그의 전신을 산산조각 냈다. 광검의 여력에 철문조차 산산조각 났다. 유라는 얼굴을 찡그렸다. 악취, 피비린내와 오물들이 뒤엉켜, 수많은 경험을 한 그녀조차 구토기가 일어날 만큼 절묘한 오물향의 하모니를 이뤄낸 것이다. 후각 등을 앞세운 본능이 이 문턱을 넘지 말라고 경고한다. 그러나 순수하게 분노하는 연금술사로서의 프라이드는 설마 있을 연금술사의 편린을 용서하지 못했다. 통로였다. 통로 옆에는 죽- 철창들을 세워 만든 감옥들이 존재했다. 거기에는 하나 씩 사람들이 들어있었으며, 미약한 숨을 쉬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인가?’ 피이이익--! 통로 저 깊은 곳에서부터 피리소리가 길게 울렸다. 그 순간, 마을사람들이 하나둘 씩 일어나기 시작했다. 일어난 사람들의 의지가 텅 빈 시선이 유라를 향해 돌아갔다. 유라를 포착한 그들의 눈빛이 점점 채워지기 시작했다. 살기와 증오로······! 집중되는 시선에 유라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들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것은 느꼈지만 우선 그들이 내뿜는 비상식적인 살기부터가 포착되었다. 사람들이 자신을 가둔 철창을 향해 맹수처럼 사납게 팔을 휘둘렀다. 캉-! 캉-! 캉-! 철장이 도끼에 나무에 잘라지듯, 가볍게 두 동강 났다. “우아아아아악!!” 범인이라면 정신이 모두 달아날 괴성! 평범했다면 오줌을 저렸을 살기! 그런 야수가 약 사십! 그들은 좁은 통로를 넓다하고, 유라를 향해 일제히 달렸다. 바닥, 천장, 벽면, 철창. 어느 것 하나 그들의 도로가 되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유라는 천장으로 몸을 붙여오는 사람에게 폭의 마탄을 쏘았다. 그런데 목표로 한 사람은 떨어져내려 마탄을 피하고 난데없이 뒤에 붙어서 따라오던 사람이 맞고 폭사했다. 그 파편을 맞고 바닥을 딛고 달려오는 사람들 중 다섯 이 폭사해서 무의미한 유탄이 되지는 않았지만, 피했다는 게 중요했다. “괴물인가?!” 그들이 날려 오는 시선은 살기로 포장된 증오! 원래는 그들도 인간이었을 터이다. 길들여지지 않은 그들은 같은 인간을 증오한다. 자신을 이렇게 만든 연금술사를 증오한다. 자신처럼 되지 않은 정상인을 증오한다! 평범한 생활, 평범한 정신, 평범한 신체······! 모든 것을 갖춘 사람 자체를 증오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내뱉는 증오의 괴성에 유라는 정신을 더욱 굳게 잡았다. “관! 첫 번째 단어일지니, 다만 뇌전처럼!” 유라의 총알이 대기를 갈랐다. 빛이 꼬치 꿰듯 땅바닥을 달리던 괴물들의 머리를 관통했다. 머리를 잃은 괴물들은 바닥을 굴렀다. 유라에게 다가온 괴물들이 손을 휘둘렀다. 그 전에 유라의 손에 들려있는 광검이 움직였다. 빛이 폭발하며 괴물들의 팔을 두 갈래로 갈랐고, 그도 모자라 가슴까지 나눠버렸다. 유라의 광검이 춤췄다. 가장 최후까지 숨겨놓았던 그녀의 단공이 발휘되었다. 공의 힘까지 머금은 그녀의 검은 어느 때보다 빨랐고, 어느 때보다 거침없었으며, 어느 때보다 강했다. 약으로 찌든 탁한 빛깔의 핏방울이 허공에 흩뿌려지다가 눈물처럼 벽을 타고 내린다. 천장에서 떨어져 내린 괴물이 팔을 휘둘렀다. 드러난 괴물의 팔에는 물고기의 그것 같은 은색 비늘이 갑옷처럼 감싸고 있었다. ‘은린銀鱗? 은린표! 그렇다면 그들이 만든 것은···!’ 유라는 섬머쏠트로 발을 휘둘러, 떨어져 내리는 괴물의 가슴을 후려쳤다. 깡! 무쇠보다 더 단단하다는 늑대 두개골조차 깨부숴버린 유라의 부츠가 통하지 않았다. 충격량은 어디 가는 게 아니라 괴물의 몸은 8미터 가까이 날아가 떨어졌지만, 기본적으로는 무사했다. “합생체合生體!” 유라의 놀람. 그것은 괴물들에게는 틈으로 작용했을까, 먹이의 유혹으로 작용한 것일까. 여성체 괴물이 뾰족한 비명을 지르며, 비명에 어울리는 손톱으로 목을 찔러왔다. 그 뒤로 한 괴물이 인간의 것보다 더욱 날카로워진, 마치 육식동물의 이빨 같은 송곳니를 앞세워 하체를 노렸다. 유라는 몸을 띄워 여성의 얼굴을 짓밟은 채로 몸을 회전시켜 검을 휘둘렀다. 난데없이 발판이 되어준 여성의 얼굴은 완전히 뭉개졌고, 높은 타점에서 갑작스럽게 나타나 섬광처럼 사라진 거침없는 뇌전은 대부분의 괴물의 존재를 용서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여성형 괴물의 몸이 수직으로 양단되며, 뇌전이 일으킨 용권은 유라라는 한 개체로 다시 돌아왔다. 남은 괴물은 하나. 유라의 부츠에 가슴을 맞고 떨어져나갔던 괴물이었다. 그것은 통로로 봐선 벽이라 할 수 있는 철장에 매달려있었다. 모든 동료들이 한줌의 재가 되거나 싸구려 식육점에서도 팔지 못할 고깃덩어리가 되자, 본능적 위험을 느꼈는지 괴물은 철창을 번갈아 잡으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마지막이라고 봐주는 유라가 아니었다. 등이 밟힘으로써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가슴이 철창에 눌려 괴물이 캑캑 괴로운 숨을 토했다. 구속력에 괴물은 발버둥 쳤다. 유라는 슬픈 눈을 한다. 총구가 괴물의 머리를 보았다. 괴물의 눈이 유라를 보며 괴성을 질렀다. 유라는 슬프게 선언했다. “당신들은 이제··· 인간이 아니에요.” “·······.” 한 순간이지만 괴물의 움직임이 멈췄다. 탕! 퍼걱-! 괴물의 눈동자가 땅위를 굴렀다. 여전히 고통과 증오를 담고 있었다. 그 눈을 바라보는 유라는 그 눈에 비췬 자신의 눈이 그와 같은 빛을 담고 있지 않은가 되새겼다. ‘아마··· 같을 지도 모르지.’ 유라는 괴물들을 일으킨 피리소리가 울린 방향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잔참검 여각은 인수인계를 하러 오지 않는 귀향도 적산을 향해 욕을 퍼부으며 연구소이자 숙소인 동굴로 걸음을 옮겼다. 빼빼마르고 휠대로 휜 매부리코의 인상대로, 그의 성정은 계산적이긴 했지만 날카롭고 잔인하기 짝이 없었다. 무림공적으로 낙인찍히지는 않았지만, 정의맹의 감시권 안에서는 절대로 활개칠 수 없는, 말 그대로의 악인이었다. 그의 별호를 결정한 잔영검법殘影劒法은 상당한 절기였지만, 그의 사부되는 이가 그의 성정을 고려해 정수를 모두 가르쳐주지 않은 덕분에 여각은 겨우 이류를 벗어나는 정도의 무인일 수밖에 없었다. 그 덕분에 잔인함은 더욱 도를 더했지만, 일일일살日日一殺하는 대마두까지는 되지 않았으니, 그의 사부는 결과적으로 어설픈 협객행보다 더 크게 무림을 구원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애초에 제자로 받아들이지 않았으면 더욱 좋았겠지만. 쏴아아아아아-! “에이 씨팔! 이노무 산은 다 좋은 데 비는 개떡 같이 내리네!” 그 같은 고수가 앞길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였으니, 그의 불만도 당연하다 할 수 있었다. 여각은 발걸음을 빨리했다. 그렇게 가기를 원했던 동굴이 눈앞에 있었다. ‘흐으, 이제 들어가서 여자나 품어야지.’ 전에 눈여겨봤던 소녀를 떠올리며 동굴 안을 들어가려던 차에 이질감을 느낀 그의 단련된 실전감각이 위기를 알려왔다. 그는 몸을 뒤집어 땅바닥을 굴렀다. 동시에 탕- 하는 총성과 함께 여각의 어깨에 구멍이 생기며 피가 뿜어져 나왔다. “누구냣!” “적!” 순간, 총성이 다시 울리며 여각의 심장을 노렸지만, 여각의 발검은 그보다 조금 더 빨랐다. 팅-! 맑은 쇳소리가 울리며 총알이 튕겨나갔다. 잔영검범의 두 개의 검술 중, 잔영쾌검 삼검식이 펼쳐졌다. 선인先人들이 경을 효과적으로 발출할 수 있게 하며, 그 자체로도 강한 힘을 내는 자세와 검로를 종합한 것을 초식이라 했다. 잔영쾌검 삼검식 역시 이름 그대로 잔상을 남길 정도로 빠르게 검을 발출하는 세 개의 방법이었다. 총알은 막은 유선식流線式이 또 한 번 펼쳐지며 동굴 안에 퍼졌고, 발출된 기세가 동굴 안에서 반사되며, 상대의 위치가 파악되었다. “거기냐!” “당신이야말로!” 갑자기 강한 물리력을 동반한 회오리바람이 동굴 안을 휘몰아치더니 막 동굴에 들어서려하는 여각의 신형을 덮쳤다. “으아아악!” 수직으로 내려오는 비까지 일부 다시 승천시킬 정도로 강한 회오리바람이었다. 여각은 그야말로 폭풍 앞, 썩은 낙엽처럼 7미터를 날아가 진흙탕 속으로 처박혔다. 동굴 안에서부터 특이한 복식의 젊은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전체적으로 멍해 보이는 사내였다. 그러나 순간, 여각의 위치를 파악하는 눈은 결코 멍청하기만 사람이 가질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놀랍군.” 길이 완전히 엇갈려 오히려 유라보다 먼저 출구로 나온 성우였다. 그는 유라를 기다리다가 발견하게 된, 적일 게 뻔한 검수가 총알을 튕겨내자 말한 그대로 놀랐다. 총을 한 번 더 쏴, 신경을 딴 데로 돌리고, 유라에게서 얻은 총경, 제삼권을 사용해서 결과적으로 성우의 승리가 되었지만, 감탄은 감탄이었다. 하기야 전투의 베테랑이 되면 상대가 쏘겠다는 의지를 먼저 느낄 수 있다고 한다. 감각만큼은 전쟁터의 베테랑에 비할 바가 못 된다는 경을 다루는 무림인이다. 총 두 자루로 종횡강호는 불가능하다는 얘기다. 문명의 이기가 못 미치는 힘도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그럼 핵폭탄을 막을 수 있는 무공도 있을까?’ 말도 안 되는 생각은, 어느새 이어타정으로 몸을 일으킨 여각의 검에 멈췄다. “개자식 죽어랏!” 잔영쾌검의 수단식水斷式이 빗살을 가르고 성우를 노렸다. 물을 베는 검식답게, 어느 때보다 시원하게 날아가는 쾌검이었다. 성우는 빗속에서 웃고 있었다. 공격이 사납게 몰려와도, 성우는 여유만만이었다. ‘그 말 그대로 돌려주지.’ 성우는 왼손을 빠르게 당겼다. 그 순간, 여각은 수단식 자세의 중심이 되는 발이 앞으로 쭈욱 미끄러지는 것을 느끼며 검을 놓쳤다. 정확히는 발목에, 어떠한 물리력이 작용한 것이다. ‘뭐냐!’ 그의 대답 없을 물음에 답해주는 사람은 있었다. “빈틈. 찾은 사람은 중수요, 만드는 사람은 상수라 했습니다.” 어느새 성우가 다가왔다. 아니 성우의 경사에 여각이 끌려온 것이다. 여각의 머리위에 세례를 하듯, 손을 얹은 성우는 둔의 내가중수로 여각의 뇌기관의 위치를 바꿔버렸다. 게거품 대신 뇌수를 토한 여각은 타의에 벌려진 다리 그대로 몸을 뉘었다. 개구리 표본처럼 늘어져 있는 여각의 시체에 성우는 뜻 모를 한숨을 쉬었다. 성우는 어경에 달해 있었고, 여각은 동경의 극에 달해있긴 하지만 어경에 닿지는 못했다. 성우가 어경을 사용하는 사람인 것을 꿈에도 모를 그는 성우의 능력이 연금술사의 그것밖에 없는 것인 줄 지레짐작하며 가장 동작이 큰 초식을 펼친 것이다. 그의 패인은 상대를 파악하지 못한 것일 뿐이었다. “조금··· 힘들군.” 성우는 경사를 회수했다. 경체를 둘로 나눠, 서로의 반대성질을 가진 기술을 써낸 것이다. 속의 발경인 경사와, 둔의 발경인 내가중수는 그 성질도 성질이지만, 두 개를 동시에 써냈다는 것은 어떤 의미론 한 가지에 특질된 공을 사용하는 것보다 힘든 일이었다. 물론 성우는 모르고 있는 일이었다. 단순히, 총경의 발사관을 만들면서 얻은 경체의 활용법을 응용한 것 뿐이었다. 그만큼 총경은 어려웠던 것이다. “그런데 왜 안 오는 거지?” 그 순간, 어처구니없는 사실을 떠올렸다. 어째서 입구와 출구가 하나뿐일 거라는 생각만 한 걸까? 이렇게 철저하게 만들어진 동굴이다. 역으로 돌려서 생각해보면 동굴이 넓은 것이다. 그런데도 호흡하는데 전혀 어색함을 못 느꼈다. 동굴이 단지 한 개뿐이라면, 공기청정이 가능할까? 불가능하다. 그 뿐만 아니라, 동굴의 방향도 문제였다. 한쪽 방향으로만 뚫려있으면 쉽게 공기를 얻을 수 없다. 정반대쪽에도 분명 통로가 있을 것이다. ‘생각해보니, 그렇게 열나게 쫓던 마을 사람들이 갑자기 되돌아간 이유도··· 바로 이 시설 때문이었군. 이곳의 위치를 알고 있었던 거야. 분명 그쪽에도 출입구가 있겠어.’ “돌아가야겠군!” 성우는 제삼총경을 쏘느라 동굴 안에다 놔뒀던 유라의 트렁크를 들고 다시 동굴 내부로 향했다. 동굴 앞에는 진흙탕에 빠진 개구리만 죽어서 늘어져있을 뿐이다. 여각이란 이름을 가졌던··· 마와魔蛙가 말이다. 객잔주인 철문은 기뻤다. 세금을 대신해서 연금술사들의 기한종복으로 끌려갔었던 아들이 돌아왔기 때문이었다. 다른 마을 사람들도 돌아왔다. 갑작스럽게 오랫동안 그리워했던 사람들이 돌아오자, 마을은 축제분위기에 빠졌다. 가장 많은 사람들을 수용할 수 있는 장소는 철문의 객잔뿐이었다. 원래대로라면 마을 한 가운데 장작 쌓아놓고 축제라도 벌였을 테지만, 비가 내리고 있어 그럴 수는 없었다. “아하하하하핫!! 마셔마셔! 오늘 술값은 무조건 반값이다!” “에이~ 무료로 해버리지!” “크하하하핫, 나 보고 땅 파라는 소리야? 그런 거야?” “에이이잇! 뭐 좋다! 먹고 죽고 배 째자!” “와아아아아!” 사람들은 왁자지껄하게 떠들다가 웃고 울고 다시 웃으며 다 큰 어른 주먹만한 술잔을 잡고 들어올렸다. “건배!” 지난 한 달간 쌓아왔던 근심을 모두 기쁨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그런데 조금 이상했다. 웃고는 있지만 어딘가 멍한 눈빛의 사람이 마음껏 떠드는 사람들 사이에 하나 둘씩 끼어있었다. 이런 분위기에 명백하게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이었으나, 마을사람들은 지금까지 고생했으니 그러려니 했다. 그들은, 이 파티의 주인공들이었다. 쏴아아아아!! 폭풍이 불고 나무가 허리를 숙인다. 비가 내린다기보다 물이 떨어진다라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세 찬 빗방울이 산에 깔린 토양을 늪으로 만들었다. 진흙탕이 푹 파여졌다 새까맣게 흩어졌다. 그렇게 흩어지는 진흙이 순식간에 일렬을 그렸다. 실로 쾌속하다 아니할 수 없는 질주였다. 185센티미터의 키에 곰처럼 건장한 체격을 가진 자였다. 특이한 것은 옷소매를 찢은 거친 옷을 입었고, 입에 15센티 길이의 피리를 물고 있었다. 사내다운 호안虎顔을 하고 있는 그의 얼굴이 흉악스럽게 일그러졌다. ‘광마··· 단 한 사람 때문에 전멸이라니!’ 자신의 뒤를 쫓아오고 있는 한 여인 때문에 난데없는 우중질주를 해야 했다. 기분이 좋다면 그것은 미쳤기 때문일 것이다. 온여산 연구소는 그가 속한 단체의 상부에서 세력을 강화하기 위한 병기를 만들기 위한 전초기지이었다. 그러나 연단가가 소장을 맡자 지금까지 연구해왔던 모든 가설을 시험하는 단순한 실험실로 사용되는 경향이 강했다. 그러던 중 위에서부터 명령이 내려왔고, 단륜부인 그가 이곳으로 파견되면서 연구소는 원래의 목적대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연단가와 단륜부의 경쟁상태를 이용해, 연구소장에게 압박을 준 것이다. 이제 결실을 맺을 때가 왔는데, 난데없이 연금술사를 죽이는 연금술사, 광마의 출현이라니! ‘하지만 그곳에 가면 광마··· 광마라도······!’ 야수단공野獸鍛功을 익혀 상승된 후각에 짙은 혈향血香이 잡혔다. 순수한 혈향이 아닌 약으로 찌든 피비린내. 잡히기까지 그리 멀지 않았다! 다행인지, 그가 목표로 하던 곳에 가까이 왔다. 단륜부 강팽强澎은 있는 힘껏 피리를 불었다. 시끄럽던 객잔 안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난데없이 가만히 앉아 파티을 즐기고 있던 귀환자들이 미리 짜기라도 한 듯, 일제히 일어났던 것이다. “왜, 왜 그러냐?” 아들의 돌연한 행동에 철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멍하긴 했어도 웃음 짓던 아들이 무언가에 홀린 듯한 표정으로 빗소리가 들어오는 창문 밖을 보았다. 문제는 그의 아들뿐만이 아니라, 다른 귀환자들 모두 갑작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 밖을 보았다는 것이다. 바보가 아니더라도 무언가 잘못된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다만 술에 취해 판단이 느릴 뿐이었다. 어느 순간, 귀환자들은 자리에서 완전히 벗어나더니 우산도 없이 문밖으로 나갔다. 술에 만취한 마을사람들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그들을 따라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유라는 총구를 앞서 달리는 연금술사를 향해 조준하고 방아쇠를 당겼다. 관의 마탄은 빗방울조차 모조리 훑어버리며 연금술사의 척추를 향해 날아갔다. 그러나 방아쇠가 당겨진 순간부터, 연금술사가 주저앉아, 관의 마탄은 애꿎은 나무들에 구멍만 만들고 이내 땅을 향해 돌진했다. 달리던 중이고, 마탄의 하중이 하중이라 연사가 불가능했다. ‘결국 잡아버릴 수밖에 없는가.’ 유라는 광공光功의 섬閃자결을 끌어올렸다. 전신의 존재감이 희미해지는 것을 느꼈다. 몸의 가벼움이 극에 달하자, 유라는 발을 박찼다. 섬광. 유라의 몸은 신속을 돌파해 뇌전조차 따라잡을 정도가 되었다. 중간에 그녀를 가로막는 나무가 있었으나, 유라의 광검은 방해물을 용서하지 않았다. 고목이 차례대로 쓰러트린 유라는 연금술사의 등에 가까워지자, 광검을 휘둘렀다. 선, 빗방울을 휘감고 초진공을 만들어 검로를 개척하고. 정, 달리는 뇌전, 방전을 일으키며 치명상을 남기고. 패, 거침없는 돌진, 가로막는 모든 것을 소멸시키며. 인, 타락한 연금술사를 벤다! 네 개의 결이 하나로 합쳐진 빛의 편린片鱗에 단륜부 강팽의 허리가 양단되었다. 강팽의 허리는 피와 내장을 흩뿌리며 하늘을 날다가 나무의 가지 위로 떨어졌다. “크하하하핫!!” 그 순간, 강팽의 상체에 짐승의 털이 돋더니 놀랄 만큼 빠르게 절단면을 치유했다. 강팽은 양손으로 가지를 잡고 몸을 던져 원숭이처럼 나무를 타기 시작했다. 그의 진로는 마을이었다. 강팽의 피리소리는 더욱더욱 커져만 갔다. 신속으로 달리느라 강팽을 벤 후, 몸을 주체 못하던 유라는 가까스로 신형을 멈췄다. 그녀는 사라지는 강팽의 상체를 본 후, 강팽의 하체에 폭의 마탄을 쐈다. 강팽의 하체가 사라지는 것을 확인한 유라는 마을을 내려다보았다. 마을 광장에 사람들이 집결하고 있었다. “설마?” 성우가 읽어준 보고서, 그 내용이 생각났다. 사실 시간대가 맞지 않았으나, 도망친 연금술사가 조절할 수 있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유라는 다시 강팽을 쫓았다. 겨우 5초간의 고민이었으나 그 정도 시간이라면 꽤 멀리 도망쳤을 지도 모른다. 유라의 몸이 다시 빛으로 밖에 표현될 수 없게 되자, 다시 나무들이 연쇄적으로 쓰러졌다. 그리고 강팽의 뒷모습을 발견했다. 상체만으로 몸을 이동한 그는 어느새 마을 안에 심어진 나무의 가지를 잡고 있었다. 유라는 그에게 총을 겨눴다. “뭐하는 짓이야?!” 마을 사람들이 유라를 보고 외쳤다. 그들이 보기에는 마을의 신목을 향해 총을 겨눈 모습이었다. 비는 볼 것을 봐야하는 자유를 박탈했다. “감히 마을을 수호하는 나무에 흉측한 것을 겨누다니!” 비를 맞고 있던 한 청년이 앞으로 나서며 외쳤다. 총을 본 적 없는 평범한 시골사람들이 어떻게 위험한 것 인줄은 알았을까? 어이없어서 강팽을 다시 보는데, 강팽은 어느새 나무 뒤로 몸을 숨겼다. “그 총을 치우질 못할까!” 급기야 그 청년은 유라를 향해 달려오며 주먹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제법 위세가 강한 주먹이었지만, 유라를 맞추는 것은 어림도 없었다. 하지만 그 순간, 두 번째 주먹이 허공을 갈랐다. 첫 번째 주먹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빠른 주먹! 유라는 그것을 가까스로 피하는 중에, 청년의 손등에 일어난 은색 비늘을 보았다. ‘설마?’ 세 번째 주먹이 복부를 노려오자 더 이상, 피하고 만 있을 수 없게 되었다. 유라의 부츠가 빠르게 상승하며 청년의 팔꿈치를 찍었다. 탕-! 쇳소리가 일어나며 유라의 복부로 향하던 청년의 팔이 위로 상승했다. 양쪽 다리가 수직이 되도록 높게 상승한 유라의 오른쪽 발은 그대로 떨어지며 청년의 어깨를 찍었고, 그 반동을 이용해 유라는 몸을 띄워 신목에 내려앉았다. 갑작스럽게 유라가 다가오자 상체만 남은 강팽은 놀라면서 연신 피리를 불어댔다. 난데없는 이 피리소리에 마을 사람들 중 일부, 즉 귀환자들은 원래대로라면 있을 수 없는 능력을 사용하여 유라를 향해 몸을 날렸다. 마치 수십 년 동안 무술에 전념한 무림인들이나 겨우 낼까 말까한 점프력이었다. 유라는 그들이 다가와도 망설이지 않았다. 지름 70센티미터 두께의 나무둥치가 가로막긴 했지만 강팽을 처치하는데, 고려할 필요 없는 사항이었다. “나를 죽인다면 저들은 모두 폭주할 거다!” 강팽이 급히 외쳤다. 유라의 검은 멈추지 않았다. 신목과 함께 타락한 연금술사의 목을 쳐 날렸다. “타락한 자의 말 따윈 듣지 않겠다!” 덥수룩하게 털로 덮인 강팽의 머리가 피를 흩뿌리며 땅바닥에 떨어짐과 동시에 귀환자들의 신형은 유라에게 도달했다. 유라는 그들을 피해, 몸을 띄워 광장에 내려섰다. 그녀의 착지에, 마을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아이고 이년아! 수호목을 손상시키다니 무슨 천벌 받을 짓이냐!” 100년은 족히 살았을 노파가 유라를 향해 돌맹이를 던졌다. “이 놈! 내 아들을 때리다니! 그 때 패죽였어야 할 것을 한을 남기는 구나!” 전에 유라와 성우를 쫓아냈던 객잔주인 철목이 우람한 근육을 앞세워 유라를 공격했다. 유라로선 난감해졌다. 일반인을 패죽일 수는 없는 일이다. 그것은 연금술사로서 가지는 기본소양이었다. -연금술사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자를 말한다. -연금술사는 사사로운 욕심으로 피해를 입히지 않는 자를 말한다. -연금술사는······ ‘그러나 연금술사는 타락의 편린을 용서하지 않는다!’ “아아아아아!” 유라는 내부의 있는 숨을 내뱉었다. 아름다운 선율을 태운 아리아처럼 고운 소리가 사나운 빗소리와 마을사람들의 애통과 노성과 어우러져 짧은 단막의 오페라가 펼쳐진다. 소프라노는 노성의 바리톤을 공격한다. 노성의 바리톤은 천생신력은 대단하지만 평범한 사람이라 그녀의 일격을 견디지 못하고 쓰러졌다. 그를 방패로 삼아 뒤에서부터 공격하려 했던 마물에게는 뜨거운 뇌전을 선물했다. 광검에 입이 꿰뚫린 귀환자가 쓰러졌다. 마을 사람들의 가슴은 싸늘해졌다. 살인을 본 것이다. “연금술사아아아아!!” 아들의 죽음에 철문은 비통함으로 소리 질렀다. 유라는 그들의 눈에는 싸늘한 마녀로 보였지만, 그녀의 내부에서는 금방이라도 구토할 듯한 감정의 폭풍이 일어나고 있었다. 지금까지 쌓아온 경험. 그 경험으로 만들어낸 연금술사 풍여랑이라는 캐릭터가 무너질 정도로 강한 폭풍이었다. 마물, 귀환자들과 평범한 마을사람들이 뒤엉켜 유라를 공격했다. ‘······타락.’ 마물들을 공격하면 마을사람들까지 위험했다. 마을사람이 없다고 해도, 모두 배어낼 수 있을까 어떨까는 모른다. 거기에 마을사람들까지 합세하면 위험했다. 필시 강팽은 유라가 이름만 무성한 연금술사 기본법도에 신경 쓰고 있을 줄은 몰랐을 것이다. 단순히 마을에 있는 전력을 유라를 막는 데 쓰겠다는 생각은 의외로 효과가 있었다. 하지만 결국 그의 작전은 실패라 할 수 있었다. 그 자신이 죽으면 무슨 상관인가. 단지, 혼자 죽을 수 없다며 폭주시킨 마물들이 물귀신의 성능을 최대한 발휘할 뿐이다. 유라는 재빨리 마물과 범인을 파악했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 모두 증오와 살기로 덕지덕지라 파악하는 건 쉽지 않았다. 이미 유라와 상양촌의 사람들은 철천지원수관계를 맺은 것이다. ‘결국··· 희생을 만들어야 하는 건가요.’ 분노, 슬픔. 두 개의 감정이 휘몰아치며, 광검의 형태가 일그러졌다. 증오든, 분노든, 평정심이든, 곧은 마음이 중심이 되어야 이뤄지는 그녀의 마음속에 방황이 일어나니 광검이 효과를 발휘할 리 없었다. “숙여!” 유라는 그 목소리에 자신도 모르게 주저앉았다. 그 순간, 강력한 선풍이 휘몰아치더니, 유라에게 달려들었던 사람들을 9미터 바깥으로 날려버렸다. “뭐냐!” 빗속에서 나타난 하나의 인영이 네모난 무언가를 휘둘러 인벽을 후려쳤다. 마을사람이건 마물이건, 질량병기였기 때문에 힘에 상관없이 무게가 가벼운 인간형이라면 거침없이 날려버린다. 인영이 회전하며 빗방울을 사납게 튕기면, 어김없이 마물과 마을사람이 엉켜 날아갔다. 5미터씩은 쭉쭉 날아가는 그런 공격은, 평범한 사람이라면 죽을 지도 모르는 공격이었지만, 인영은 망설임이 없었다. 인영이 가방을 휘두르자, 은린이 팔에 빽빽하게 돋아난 마물이 손을 휘둘렀다. 마물의 몸이 날아가긴 했으나, 인영에게도 충격이 전해져, 그는 자신도 모르게 가방을 놓고 말았다. 인영은 가방을 놓음과 동시에 유라의 근처에 섰다. “성우 씨!” “분노는··· 용서하겠지만, 방황은 용서하지 않을 겁니다.” “···그렇지만 아무런 관계없는 사람이 죽을 지도 몰라요. 연금술사로서··· 자신을 용서할 수 없어요.” “네, 그렇습니까. 하고 수긍하긴 싫군요. 지금까지 유라 씨에게 죽은 사람들은 모두 평범한 시절 없었답니까? 죽은 그들이 지하에서 비웃겠습니다.” 급하게, 하지만 차분한 어조로 말을 토해낸 성우는 바닥을 향해 제삼총경을 펼쳤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절대로 견딜 수 없는 물리적인 회오리바람에 사람들이 모로 쓰러졌다. 회오리바람만이라면 모르겠지만, 진공파가 뒤따른 터라, 하체에 모두 상처를 입고 말았다. 몇 주간 제대로 걷기 힘든 상처였다. 하지만 일어서는 사람들이 있었다. 피부에 은린이 일어나는 사람들. 마물이었다. 성우는 양손에 총을 들고 마물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타락墮落의 사신死神이 되려면 철저하게. 그것이 살인자들이 가질 수 있는 단 하나의 예의입니다.” 비늘은 안구 안까지 일어나는 게 아니었다. 성우가 주안점을 둔 이것은 훌륭하게 맞아 떨어져, 성우가 총을 쏘는 족족, 안구가 박살나고 뒤통수가 뻥 뚫려 뇌수대신 비바람이 들어왔다. “······성우 씨는··· 가차 없군요.” “잘못배운 탓입니다. 악을 베려면 자신도 악이 되어라. 네가 쌓은 죄가 너 자신을 파먹어 네 죄의 천칭을 맞출 것이다··· 절 가르친 분의 말입니다. 배운 게 이 따위라, 정상인이 되기엔··· 글러먹었죠.” 성우는 딱딱하게 내뱉으며 방아쇠를 당겼다. 그러나 총알이 다 떨어진 것인지, 틱틱- 소리만 날 뿐이었다. 그 때,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던 마물들은 동료들이 죽어나가고 피가 주변에 가득하자 서서히 광기를 눈에 담기 시작했다. 연금술사의 제어가 되지 않는 그들은, 전에 유라가 감옥에서 상대했던 그들과 다를 바 없이 광폭했다. 어이없게도 그들의 첫 번째 목표는 주변에 있는, 옛 자신의 가족들이었다. “성현아! 왜····왜···! 끄아아악!” 팔을 북 찢긴 노모는 눈물과 비통에 젖은 얼굴로 성현이라 불린 마물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떨궜다. 기절한 것이다. 하지만 성현은 생전, 어머니라 불렀던 그녀의 안식을 용서치 못했다. 빠각! 은린이 덮인 주먹은 너무나 가볍게 인두를 박살냈다. 그런 상황이 마을 안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고 있었다. “아아아!” 유라는 분노했다. 어찌하여 연금술사가 만든 마물은 이런 금기들을 간단히도 범해버리는 걸까! 자신이 연금술사인게 그렇게 증오스러울 수 없었다. 증오가 가득차고, 방황했던 마음이 분노로 곧아졌다. 오히려 유라에게는 그들의 폭주가 다행스러웠다. 망설임이 사라진 유라의 광검은 찬란하게 빛났고, 패륜을 저지른 마물을 갈랐다. 집을 이루고 있는 차가운 벽면에 칙칙하고 뜨거운 마물의 피가 튀었다. 망설임이 없는 유라를 막을 수 있는 건, 더 이상 없었다. 성우는 굳은 얼굴로 경사를 휘둘러, 자신에게 다가오는 마물을 오히려 끌어당기고 영거리에서 제일총경을 쐈다. “우아아아악!!” 심장부분의 가슴이 뻥 뚫린 마물이 심장이 없음에도 살아있기라도 하는 듯, 팔을 휘둘렀다. 성우는 충의 발경을 팔에 채운 후에 마물의 공격을 막았다. “크윽!” 짧게 신음을 내뱉은 성우는 마물의 움직임이 멎자마자 몸을 콤팩트하게 휘둘러 제삼총경을 펼쳐냈다. 이 역시 영거리였고, 그 결과는 끔찍했다. 총알조차 튕겨냈던 단단한 피부가 무의미하게도 내부에서부터 휘몰아친 폭풍의 경력은 마물을 산산조각 냈다. “목욕··· 무의미해졌군.” 피를 덮어쓴 성우는 자신에게로 달려드는 마물들을 향해 경사를 휘둘렀고, 그에 걸려든 마물은 균형을 잃은 채 끌려와 제삼총경에 걸레조각이 되어야 했다. “안 된다··· 이놈아!” 마물의 시체를 들고 있던 성우는 다신의 다리를 잡는 노인을 내려다보았다. “괴물입니다. ‘이것’은··· 당신의 자손이 아니에요.” “그래도··· 내··· 내 아들이다!” 알고 있어도 어쩔 수 없는 것. 그건 분명 혈육의 정일 것이다. 하지만 성우의 전투논리는 부정확한 것을 용서치 않았다. “패륜을 저지르는?” 비웃음이 담긴 성우의 말에 성우의 발목을 잡았던 노인은 가슴이 섬뜩해져 자신도 모르게 손을 놓았다. “우워어억!!” 노인을 향해 마물의 공격이 날아들었다. 성우는 반사적으로 팔을 들어 마물의 공격을 막았다. 경체가 담긴 팔이었지만 은연중이라 집중도가 떨어졌고, 그 때문에 날카롭게 떨어지는 마물의 공격을 팔 자체의 내구도가 견뎌주지 못했다. 우드득-! 왼팔의 뼈가 모두 박살나자 성우는 이를 꽉 물어 신음을 참고, 동시에 니의 진각을 취한 후, 오른손으로 폭발의 제이총경을 펼쳤다. 쾅-! 배를 중심으로 일어난 폭발은 마물의 상체와 하체를 나눴고 각기 다른 곳으로 떨어졌다. 노인은 멍하니 성우를 바라보았다. “어째서··· 나를··· 구했나···?” 성우는 다친 사람이라고는 상상도 못할 단조로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것이 당신, 그리고 평범한 사람들이 말하는 구원의 정의입니다. 그러나 이런 위기를 만들지 않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정의겠죠. 그러나 현실은 당신과 같습니다.” 그에게서 몸을 돌린 성우는 덜렁거리는 팔을 옷으로 묶어 몸에 고정시킨 후, 마을 사람들을 도살하는 괴물들을 공격했다. 마물이 된 귀환자들을 모조리 죽여버린 두 연금술사 남녀는 사라졌다. 남은 것은 폐허뿐이었다. 남은 사람들은 눈물조차 흘리지 못했다. 숨이 막힐 듯한 정적 속에 한 어린아이의 울음이 지나갔다. “엄마~ 아빠~ 으아아아앙~!” 그것을 시작으로 마을은 눈물바다가 되었다.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무엇이 시작이었는가. 누구도 생각할 수 없었다. 다만, 미칠 듯이 솟아나는 눈물을 참기 힘들었다. 그리고 마을은 원치 않은 방문자들을 맞았다. 백상린은 정의맹 총단에서 온 서류를 받아들였다. 그는 굳은 표정으로 서류를 읽어나갔다. “반드시 잡아야겠군요.” 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의맹 신강지단의 이름을 걸고 말일세.” -압제강혈사, 상양촌혈사. 흉수는 광마로 추정. 서류에 담긴 두 얼굴은 분명, 성우와 유라였다. 하늘이 슬퍼하던 그날. 유라는 성우의 품에서 눈물을 쏟았다. 처음 보는 그녀의 연약한 모습에 성우는 안절부절 하다가 그녀의 등을 감쌌다. 오른팔과 그녀의 등이 따뜻한 체온을 나눴다. “용서할 거예요. 분명······.” 작문에 재능이 없는 성우가 할 말은 그것밖에 없었다. chapter 10, Awake ―――――Hunt, Death, Separation. 하늘에는 제응들이 날아다니고, 성벽은 오래되었지만 길고 높았다. 군사도시이자 개발도상도시인 신강. 남부반도의 강국 백환국柏環國과의 국경에 가장 가까운 대도시라, 군사, 상업, 교통이 고루 발달한, 사실 상 응란국 제이의 수도였다. 신강은 응란국 제일의 병기창兵器廠이자, 대장장이의 마을이라 불릴 만큼 대장간이 많은 곳이었다. 현재 무림에 돌아다니는 신병이기 중 대부분이 이곳에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가깝게 보면 지극검 유철산의 애검 역시 이곳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국가의 관점에서는 중요전략요충지였고, 무림의 관점으로 볼 때는, 무림인의 첫발이 내딛어지는 곳이라 할 수 있었다. 청영강의 깨끗한 물과 광산으로 둘러싸인 도시에, 유라와 성우가 들어온 것은 3일 전. 상양촌혈사로부터 5일이라는 시간이 지나있을 때였다. 그들은 신강이란 도시를 음미할 세도 없이 대장간 안에만 쳐 박혀있었다. 성우와 유라는 바보가 아니었다. 압제강혈사나 상양촌혈사 같은 끔찍한 사건에 연루된 순간부터 몸을 자중하는 것은 당연히 취했을 행동이었다. 게다가 구요성의 구혈당이라는 자에게서 온 메시지에 자신들을 노리는 내용을 발견했으니 더욱 철저할 수밖에 없었다. 성우는 특수한 에너지로 움직이는 형광등의 밝은 빛을 의지해, 무언가를 만드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끼익- 성우의 등 뒤에 위치한 문이 열리고 유라가 들어왔다. “성우 씨, 재료를 부탁한 형태로 만들어왔어요.” “아, 거기 나둬요.” 성우는 뒤도 안 돌아보고 말했다. 성우가 지금 조립하는 것은 집중이 흩어지면 안 된다. 유라는 위에 들고 온 보자기를 풀었다. 보자기 안에는 정밀기계에 쓰일 만한 부품이 가득했다. 기다란 관부터 압연강 기술이 필요한 스프링, 누가 봐도 규격품인 나사가 10종, 그 외에도 고리쇠부터 용도를 알 수 없는 것들까지 다양한 구성이었다. 틱- 철컥! 조립이 끝났다. 성우는 몸을 돌려 조립한 물건을 한쪽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러던 중, 무언가가 발에 걸렸다. 툭 그것은 너무 익숙해서 되려, 이질감이 느껴지는 물건, 소총들이었다. 지금까지 성우가 조립하던 것은 모두, 현실에서 사용되는 총기류였다. 물론 최신기술의 집약이 심해, 사이보그가 아니면 쓸 수 없는 총들은 아니었다. 모두 나름대로 20세기 전쟁과 범죄를 주도하던 정밀소총인 것이다. 모델과 부품만 같았지, 내용성분은 완전히 달랐다. 총은 옛날부터 정밀무기로 이름이 높았다. 총의 구조는 일면 단순하지만, 그 정밀부품의 재질은 결코 단순하지 않았다. 그래서 화학을 주로 다루는 북부연금학계가 아닌 이상, 총 개발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내용성분이 다르다고, 총으로써 단순히 레플리카의 가치만 있는 게 아니었다. 위력은 오히려 뛰어났다. 유라가 만들어낸 합금은 모두 소총의 정밀한 부분을 연동시키기에 합당한 것들 뿐. 잼 현상을 일으키는 문제가 되었던 부품조차 훨씬 목적에 맞게 조성되어있었다. 성우가 총의 설계도와 정밀부품의 성질분석도를 유라에게 넘긴 건 바로 5일 전이었다. 그 마음을 먹은 것은 8일 전, 즉 혈전을 겪고 나서였다. 성우는 자신들이 거대한 격류에 휩쓸리는 일엽편주一葉片舟나 다름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미 정보전情報戰으로 특화된 현실보다야 격류의 정체를 알기 쉽겠지만, 대신 적들이나 다름없는 세력들이 너무 방대했다. 유라의 무력은 이 세계에서도 첨단에 위치해있었다. 하지만 언젠가는 지치기 마련이었다. 그 기간을 좀 더 안전하게 버티기 위해서 만들어낼 결심을 하게 된 것이었다. 유라의 반응은 성우가 예상했던 거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어떠한 다른 감정도 섞이지 않은 철저한 경악. 그가 설명한 소총이라는 개념 자체를 어이없어하던 그녀는 그래도 성우를 믿었다. 성우가 거짓을 말했다면 어리석은 행동이었겠지만, 성우는 어디까지나 사실만을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유라가 정밀부품을 만들고 성우가 조립하여 만들어진 소총, AK-74R(Automatic Kalashnikov-74 Replica)은 북부의 수많은 총을 본 유라로서도 입 크기를 늘릴 만한 성능을 보여주었다. 남부주술집금으로 총알을 만들고, 반응변환으로 화약으로 쓸 물질을 만드는 유라에게 5.45밀리미터 전용소총탄을 만드는 것 정도는 조금 피곤하긴 하지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유라는 그녀가 쓰는 권총보다 반동이 적은 소총은 한손으로 쓸 수도 있었다. 그녀는 성우가 설명도 하기 전에 권총처럼 잡고 쐈다. 풀 오토 사격으로 탄창을 한 번에 다 비운 유라는 스스로 쏴놓고도 경악하는 면모를 보였다. 방아쇠를 당기기만 하면 연사되는 기능은 정말 획기적인 것이었다. 현실의 성우가 애용했던 만큼, 그 능력이 인정된 제품이었다. 유라는 소총의 놀라운 능력에 상양촌 참사를 잊어버리고, 정밀부품 주물연구에 몰두했다. 그녀 역시 연금술사라 불리는 존재였던 것이다. 성우가 방금 만든 총은 총 중에 가장 정밀부품의 역할이 가장 중요한 저격총이었다. ‘티거 투쓰Tiger Tooth를 만들고 싶었지만··· 구조도 제대로 모르는데다, 국산이니 모조품 따위를 만들 순 없지.’ 티거 투쓰 시리즈는 한국유일의 총기제작업체, 백강정밀의 메이커였다. 보다 강하고, 보다 오래 쓸 수 있고, 보다 다채로운, 등을 모토로 삼은 메이커라서 그런지 마이 건My Gun을 선호하는 용병들이 쓰기에 편하게 제작되어있다. 하지만 타지에 있어도 한국인이라고, 국산을 불법제작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라기 보다 판매루트가 엄격히 제한된 터라 현실에서도 정식으로 구해서 분해해본 적이 없었다. 덕분에 성분분석표를 제작할 수 없는 게 문제였다. 생명이 달려있는 데, 어디에 박혀있는지 모를 세계의 법 따윌 신경 쓸 수 있을 것 같은가! 성분분석표가 없고, 외형적으로만 티거투쓰라면 차라리 다른 것을 사용하는 게 나을 것이다. 총이란 것은 그런 것이다. 제대로 된 지식도, 공정도 없이 양산해내는 게 가능하다면 동방은 오래 전에 건 파이트Gun Fight로 피바다가 되어있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이미 무림은 칼부림으로 피바다지만. ‘난데없이 헤이~호~ 하고 카우보이가 뛰는 것을 볼 수 있을지도?’ 쓸데없는 생각을 마지막으로 성우는 몸을 일으켜 총들을 점검했다. 부품 하나라도 잘못되면 바로 폭발··· 하지는 않겠지만 위험해지는 건 사실이었다. 여기에 경체를 사용하면 시간은 훨씬 단축되었다. 복잡한 사람의 몸 내부조차 관조할 수 있게 만드는 경체였다. 총 내부정도는 간단했다. “후- 끝났군.” “수고하셨어요.” “아, 고마워요, 유라 씨. 그런데 바깥의 상황은 어때요?” “최악이에요. 우리들의 초상화가 마을 곳곳에 붙어있더군요. 죄목은 일급 살인죄. 마두의 칭호를 내렸더군요.” 마두란 칭호가 붙으면 평생 동안 감옥살이가 되거나, 보이는 즉시 참살이 일반적이었다. “흐음, 그래요?” 예상 못 했던 일이 아니었다. 참사가 일어났던 그날, 유라에게 연구소장의 방에서 봤던 전문에 대해 물은 적이 있었다. 유라의 반응은 분노와 경악이 섞인 외줄기의 탄성이었다. “구요성!” 구요성은 중부연금학계의 성지였다. 단순히 중부 붕련국에 위치해 있는 성을 말함만이 아니라, 중부 구석구석에 퍼진 모든 연금술사들의 대부분이 구요성이라는 이름 아래 죽고 살고 하는 초거대 세력인 것이다. 그녀의 입에서는 더 놀랍게도 이른 바, 시대를 주도하는 세력으로 표현되었다. 연금술의 발전이 문명발전과 동의어가 된지 오래였다. 특히 생명연장의 연금술에 관계된 중부연금술은 많은 권력자들의 사랑을, 아니 추종을 받아왔다고 한다. 성우와 유라를 노리는 자들은 그런 단체다. 그런 그들에게 증거를 조작해 누명을 씌우는 것 정도 일도 아니다. 몽타주 정도야 더욱 쉽게 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국경을 넘을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든, 요. 정 노인이 방법을 있다고 하면서 5일 동안 기다리라고 했잖아요. 그 방법이 다행히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 같아요.” 대답을 망설이던 유라가 한숨과 함께 대답했다. 정 노인은 대장간의 주인이었다. 어찌 된 일인지, 유라를 보자마자 눈물을 흘리며 ‘아가씨’라 했고, 눈을 벌게져서 그들을 찾아다니는 관원, 정의맹도들과 정반대되는 따뜻한 시선으로 그들을 환대했다. 이제 성우로서도 신경 쓰이는 일이 되었다. 유라의 정체, 그리고 남쪽으로 향하는 목적은. “그럼 남은 하루 동안, 가방을 개조해도 될까요?” “에? 가방이요?” “제가 죄송하게도 가방을 거칠게 다뤘기에, 많이 파손되었잖습니까. 그래서 수리 겸 총들도 넣을 수 있게 개조 좀 하려는데, 괜찮겠습니까?” 유라는 고민했다. 총을 만들자고 난데없이 말해도 흔쾌히 수락하던 그녀가 고민하고 있었다. 당연했다. 북부 연금술사의 가방은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 노력으로 만든 결실체인 것이다. ‘하지만······.’ 유라는 슬쩍 곁눈질로 성우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성우는 멀뚱하게 유라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좋아요. 대신 저도 돕게 해주세요.” 성우는 헤프게 웃었다. “물론이죠.” 대답과 동시에 부품성분설계도를 꺼내는 성우였다. 천무군 백상린은 북부의 비류국比流國에서 생산된 합성직모合性織毛로 만든 경장으로 갈아입었다. 피비린내가 잔뜩 베인 옷을 손수 접어 빨래통에 넣었다. “비류국은 군부중심체제로 움직이는 것치곤, 좋은 것을 많이 만들어내는군.” 옷을 걸친 것 같지 않은 편안함이 느껴졌다. 물론 평범한 사람들은 그런 옷을 선호하지 않는다. 옷을 걸친 느낌이 주는 안정감은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천무군은 무인이고, 감각이 뛰어나다. 그의 평소감각은 그런 옷에도 안정감을 충분히 느끼고 있었다. 좋게 말하면 청백淸白한 분위기, 나쁘게 말하면 썰렁하기 짝이 없는 방이었다. 단정하게 옷을 차려입은 백상린은 안락의자를 끌어당겨 몸을 실었다. 의자 역시 단조로운 디자인이었지만, 나무 재질은 남부에서만 자생한다는 자단목紫檀木이었다. ‘상양촌······ 이상했다.’ 그는 어제까지 압제강 혈사와 상양촌 혈사를 연동해서 수사했다. 마을 사람들의 증언은 하나 같이 한결 같았다. 두 남녀의 초상화를 가리키며 증오의 눈빛으로 저들이 이 따위 짓을 벌였다고 한다. 압제강 혈사와는 달리 증인이 있어서 수사하기에는 편했으나, 오히려 찜찜한 구석이 많은 사건이었다. 더욱 이상한 건, 사람의 수였다. 300여 명은 족히 있을 것 같은 마을인데, 생존자와 시체의 수를 합해도 생존자 50여명, 시체 150여구로 200여 명을 약간 넘고 있었다. 이 정도 오차는 살다보면 있기 마련이긴 하지만 찝찝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톡톡톡- 그는 팔걸이를 연신손가락으로 두들겼다. 일종 버릇이었다. 난마처럼 얽힌 사건을 만났을 때만 간혹 보이는······. ‘사건의 주안점은 남녀 연금술사 두 사람, 압제강 혈사의 생존자, 지금까지 그들이 행한 경로··· 인가.’ 하지만 그보다는 압제강 혈사에서의 극음의 공이 남긴 흔적, 참사의 생존자들의 반응, 상양촌 사람들의 수, 난데없이 일어난 산사태가 자꾸만 신경 쓰였다. ‘어찌 되었든, 잡아야 한다.’ 그것만은 확실하다. 그렇다면 잡는다. 반항한다면 죽일 수도 있다. 그들은 상양촌의 사람들을 학살했고, 그 증거는 명확하다. 죄인은 잡는다. 섣부른 예측은 수사에 혼선을 가져올 뿐이다. 그렇게 생각을 마친 백상린은 눈을 감고 조용히 잡에 빠졌다. “천무군 백상린이라··· 누구였지?” 상당히 아름다운 남자였다. 남자여도, 옥용이라 칭할 수 있을 정도로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거의 이 정도가 되면 요사스러운 수준이었다. 무지개의 다채로운 빛깔의 팔찌를 차고, 옷은 품이 넓은 하얀색 장포를 걸치고 있었다. 그는 보석이 박힌 안락의자에 몸을 실은 채, 발을 책상 위에 올렸다. 손가락 사이에 들린 서류철이 갑자기 잔영을 일으켰다. 비표처럼 날아간 서류철은 부복한 사내의 뺨을 스치고 벽에 박혔다. “반 년 전, 탈주한 단륜부, 무림에서는 야수객夜獸客이라 불린 자를 죽인 무인입니다.” “하아! 그 녀석인가? 그런데 야수객이라면, 내가 직접 나서야 될까 생각도 해볼 정도로 강한 녀석이지 않았어? 그 빌어먹을 회복력과 신경질 나는 육체능력으로 말이야!” “백상린이 훨씬 강했을 뿐입니다.” “호오? 그래? 그럼 광마를 잡을 수 있을까?” “못할 겁니다.” 팔찌의 사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때, 사내가 말을 이었다. “다만, 죽일 수는 있을 겁니다.” 그제야 팔찌의 사내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근데, 광마와 같이 다니는 사내는 누구지?”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아 돌연 굳은 표정으로 물어온다. 부복한 사내는 다혈질적인 그의 반응에 숨이 막혔으나, 침착하게 대답했다. “북부연금술사로 추정되나, 특이하게도 어경에 달한 절정무인이기도 합니다.” “그걸 말하는 게 아냐. 어디서 튀어나왔느냐는 거지. 광마가 동행이라니, 나는 기만하는 건 줄 알고 그 소식을 가져온 녀석을 자신도 모르게 죽여 버렸잖아? 연금술사가 아니라서 다행이었지만, 피비린내 지우기 힘들었다고.” 그는 너무나 쉽게 투덜거리는 어조로 끔찍한 내용을 입에 담았다. “제자··· 일지도 모르지요.” “호오, 제자라. 제자인가. 이성의 제자인가? 재밌군, 재밌어서 소름이 돋을 지경이야. 광마가 여자였다는 것만 해도 며칠 동안 심심하지 않았는데, 이성의 제자를 삼았다니··· 소설 몇 편은 쓸 수 있겠군. 하하핫!” 요사스러운 웃음소리가 방안에 울려 퍼진다. 부복한 사내는 심장을 직격하는 그의 목소리에 가슴을 쥐었고, 이를 악물었다. 성우와 정반대되는 성격을 가진 자. 구요성 깊은 곳에서는 그를 구혈당이라고 불렀다. +++++++++++++ 성우는 완성된 부품을 짜 맞추고 있었다. 부품이 정밀하게 연결되며 가방의 형체를 이뤄가고 있었다. 대장간에 있는 도구를 조금 개조하기만 했어도, 정밀기계 조립 같은 건 쉬운 편이었다. 게다가 핀셋으로 연결해야 될 정도로 정밀한 부분은 경체를 사용하면 되었다. 그러다 보니 경체를 다루는 연습도 되어 일석이조라 할 수 있었다. 나중에는 경체를 다루는 데 재미가 생겨서 정밀부품 부착하는데, 시간까지 잴 정도였다. 같은 부품이라도 시간이 지날수록 부착속도가 빨라지고 있었다. 수많은 무인들이 꿈꾸는 어경도 완숙에 경지에 달해있는 것이다. 폭이 20센티, 가로길이 80센티, 세로 길이 45센티. 내부면적 72000세제곱센티미터의 트렁크였다. 내부에는 계층구조階層構造로 완전히 열면 계단처럼 열린다. 정리정돈에 편하고, 급한 순간에 열어 꺼내기 편했다. 성우는 가방을 열어 각각의 층마다 소총을 집어넣었다. 개머리판을 접은 소총들은 길이가 길어도 75센티 정도 밖에 되지 않아, 집어넣기에 용의했다. 다만 저격총은 완전히 분해해야 했다. 급하게 쏠 필요도 없는 최하층에 저격총을 놓고, 최상층에는 시험 삼아 만든 나트륨 섬광탄閃光彈, 연막탄煙幕彈, 소이탄燒夷彈, 수류탄手榴彈 등, 포위당했을 때와 같은 급한 경우에 쓸 만한 물건들을 넣었다. 생기긴 조잡하게 생겼어도, 그 위력은 상당할 것이다. 탁- 성우는 가방을 닫았다. 무기는 모두 챙겨 넣었고, 유라의 개인적인 물건은 자신이 관할 할 것이 아니었다. 성우는 시계를 물끄러미 보았다. 12시 30분을 넘고 있었다. 오후가 아닌 오전, 즉 지하실에서 나와도 태양빛은 보기 힘들 한밤중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직접 설계, 도안해서 가방을 손수 조립한 것치곤, 그리 많은 시간은 흐른 건 아니었다. “후우, 올라가 볼까. 배도 고픈데.” 유라는 2층에 있을 터였다. 1층은 대장간이라 사람들이 가끔씩이나마 오기 때문에 10초 이상 머무르면 안 된다. 2층 복도를 통해 식당에 들어갔다. 주먹김밥 비슷한 음식이 접시 위에 놓여있었다. 접시채로 들고 김밥을 먹으며 식당을 지나 유라가 짐을 풀어놓은 방문을 열었다. ‘아, 실례.’ 발끝으로 톡톡- 노크를 한다. 이미 늦은 거지만, 예의는 지켰다고 정당화시키며 문을 열고 들어간다. 유라는 책상의 엎드린 채로 자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요 8일 간 쉬질 못했군.’ 유라는 잠을 박탈당한 것처럼 피곤함이 없는 성우와는 달랐다. 그녀는 평범한 사람보다 조금 더 강할 뿐이었다. 그리고 조금 더 배려심이 있었고, 심정표현에 서투를 뿐이었다. 성우는 유라의 짧은 머릿결을 만지며 주먹밥을 씹었다. “······” 꿀꺽! ‘뭔가 분위기에 안 맞는 소리가··· 그나저나 정말 부드럽군.’ “으음··· 아버지······” 유라가 몸을 들썩였다. 성우는 책상에 처박혀있던 그녀의 자는 얼굴이 드러나자 깜짝 놀라, 몸을 뒤로 빼냈다. 접시가 자유낙하했다. 턱- 성우는 몸을 최대한 숙여, 서커스의 광대처럼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아슬아슬한 자세로 접시와 내용물을 차례대로 받아냈다. 성우는 한숨을 쉬고, 유라를 다시 봤다. 그녀의 몸이 다시 한 번 더 들썩이면서 그녀의 품안에 있던 보자기가 빠져나왔다. 툭- 성우는 무심코 보자기를 열었다. 주인의 허락이 없으면 안 되는 행동인줄은 알지만 그의 호기심은 이미 이성의 수위를 넘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더 그녀를 알고 싶었다. 그런 생각이 자신도 모르게 행동으로 투영된 것이다. 보자기가 펼쳐졌다. “······의외로군···요.” 거기에는 화려한 궁장이 반듯하게 접혀져 있었다. 복대는 일본의 기모노를 닮았고, 저고리와 넓은 치마는 한복을 닮았으며 품이 넓은 소매는 중국의 그것에 가까웠다. 활동성이 강조된 그 옷은 그 디자인이 어떤 식이던, 아름다웠다. ‘그러나 유라 씨에게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아요.’ 문득 그렇게 생각했다. 좀 더 어울리는 옷이 있을 것 같았다. 물론 코트에 몸매가 드러나는 폴라T셔츠와 미니스커트 투피스풍의 밀착모의密着毛衣를 말하는 게 아니다. 좀 더 여성적인 매력을 살리는 그런 곳을 알고 있던 것 같다. “으음··· 성우 씨···” 성우는 화들짝 놀랐다. 나중에 그게 잠꼬대라는 것을 알았을 때는 이미, 보자기에 그녀의 옷이 얌전히 원상복구 되어있었다. 손놀림이 비정상적으로 빨라진 건 확실했다. “···축하해요··· 기연.” 그러고 보면 그녀는 참사가 있던 그날 이후, 분위기 쇄신을 위하여 성우에게 축하한다고 했다. 게다가 작문에는 재능이 없는 성우를 대신해 제일총경은 전사통시纏絲通矢, 제이총경은 폭작철련爆灼鐵連, 제삼총경은 선풍완격旋風緩擊이라는 초식명招式名을 지어주기도 했다. 무리해서 분위기를 올리려고 대화속도를 맞추려 했기 때문인지 총경의 성질과 원리 그대로를 사자성어로 풀이했을 뿐인 작명이었다. 그리 특별한 멋도 없는 초식이름이었지만 성우는 그것대로 좋았다. 그날은 그녀가 가지고 있는 무표정 속에 인간적인 면을 들여다 본 날이기도 했다. 성우는 침상에서 모포을 걷어 유라의 등 위에 덮어주고, 보자기를 책상 위에 놓아둔 뒤, 방을 나섰다. 추레하게 생긴 작은 키의 노인, 정 노인이 마침 계단으로 올라오며 성우에게 다가왔다. “마침 잘 만났군. 예정대로 내일 이 시간에 국경을 넘겠네. 계획은 그 때 전달해주지.” 성우는 시계를 보았다. 시간은 새벽 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뭔가 필요한 건 없나? 앞으로의 일정은 험난할 걸 세. 기본적인 무장이라도 챙기는 게 어떤가?” 성우는 고개를 저으려다 말고 고개를 끄덕였다. “연필과 물감, 그리고 화판과 16절지 크기의 종이가 필요합니다.” 정 노인은 가까운 화방畵房에서 성우가 부탁한 물건을 구해줬다. “그런데, 안 쉬어도 되겠나?” 그가 보기엔, 성우는 단 한 번도 쉰 적이 없었다. 아무리 몸에 피로가 잘 안 쌓이는 무림고수라고 해도, 정신의 피로는 어쩔 수 없을 터였다. 성우는 씨익 웃기만 하고 대답하지 않았다. 정노인 역시 쯧쯧 혀를 차기만 하고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다시 지하실에 내려가 캔버스를 세운 성우는 눈을 감기 시작했다. 잠시 후, 폭풍 같은 기세로 연필이 종이 위를 스치더니, 16분의 1 크기로 축소된 여성의 전신상이 그려졌다. 전신상 위에 그림이 그려졌다. 주렁주렁 레이스를 달고, 단정한 주름이 잡힌 옷이었다. 그 후 시작된 색칠. 완성된 후, 성우는 생명줄로 캐논 변주곡을 불어내며 중얼거렸다. ‘너무 매니악하군.’ 서양식 귀족집안 하녀정복. 일명 메이드 복이라는 마물이 유라라는 옷걸이에 걸려 그림 안에 등장해 있었다. 확실히 어울려보였다. 성우는 물감이 마르기도 전에 그림을 탁상 위에 놓고 다른 그림을 그렸다. 잠시 후, 차이나 드레스, 일본식 욕의浴衣, 정통한복, 개량한복, 과거 뛰어났던 디자이너, 디자인메이커들의 유명드레스를 각각의 자세로 입힌 그림들이 차례대로 화판을 스쳤고, 나중에는 탁상 위로 모두 올라갔다. 어느 것 하나 정밀하지 않은 것이 없었고, 어느 것 하나 아름답지 않은 게 없었다. “···아······!” 성우는 자신도 모르게 그린 그림을 보고 한참동안 멍한 얼굴이 되어있었다. 백의, 면사, 날개······ 그리고 부케. 넷의 키워드가 잘 들어맞는 그것은 분명 웨딩드레스라 불리는 물건이었다. “······아름답군요.” 성우는 그림이 유라 본인이라도 되는 듯, 그림 속 유라의 얼굴을 매만졌다. 그림물감이 마를 정도로 한참동안 보고 있었던 터라, 번지거나 묻거나 하지는 않았다. “···바보 같아, 바보 같군. 후후후.” 결국 웨딩드레스의 그림도 탁자 위에 놓는다. 수십 장은 족히 되는 그림들은 꽤 많은 양이 쌓이자 저절로 흩어져 바닥에 널렸다. 지하실 안에 널린 모든 그림 속에 있는 그녀는··· 웃고 있었다. 정 노인은 동료들을 돌아보았다. “후회하지 않겠는가?” 50대의 건장한 체격의 젊은이가 호탕하게 웃었다. “이미 목숨을 바친지, 오래! 그 대상이 미인이라면 스스로 목을 잘라줄 수도 있소!” “빚은 갚아야 성질이 풀린단다, 정 가야.” 정 노인보다 10살은 더 먹었을 노인이 말했다. 입은 걸걸했지만, 청수해 보였고 인상이었고, 학자와 같이 고아한 기품을 가지고 있었다. 정 노인은 그들을 번갈아보더니 눈을 부릅떴다. 탁한 빛을 띄고 있었던 그의 눈이, 새파란 빛을 뿜기 시작했다. 젊은이의 녹안 역시 그에 못지않은 기세를 내뿜었고, 학자풍의 노인 역시 청자안에 불길이 감돌았다. “우리들의 목적은?” 정 노인이 말했다. “풍여랑을 제국으로!” 다른 두 사람이 외쳤다. “무슨 일이 있어도, 무슨 일을 하더라도, 무슨 일을 당해도! 어떠한 희생도 감수하며, 어떠한 희생도 무시하며, 잔인한 방법이라도 필요할 때는 망설임 없이!” 세 사람은 동시에 입을 모았다. “해낸다!” 창문 밖으로 아침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유라는 햇살의 따스함에 눈을 비비며 기지개를 켰다. 문득 고인 침이 입가를 타고 흘러나왔다. 누가 보지나 않았을까, 손등으로 얼른 입가를 훑고 주위를 둘러본다. 스르륵- 이불이 떨어져 내렸다. “정 노인이 들어왔을 리는 없고··· 성우 씨일까?” 유라는 가볍게 스트레칭을 함으로써 내리 9시간을 자버린 것으로 굳어진 몸을 풀어주고 지하실로 내려왔다. 지하실 문을 열기 전, 지하실 안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사각사각, 하는 소리는 종이의 마찰음과 다를 바 없었다. “성우 씨?” “유라 씨? 아아,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아직 열지는 마시구요.” 사각사각 소리가 더욱 거세어졌고, 이내 씻은 듯 사라졌다. 유라는 문을 열었다. 마침 성우는 가방을 닫고 있었다. “가방이 완성된 건가요?” 성우는 떨떠름하게 웃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저번보다 좋은 지, 어떤 지는 잘 모르겠으나, 내구력이나 특수장치 계열에는 쓸모가 많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성우는 말보다 행동이 더 설득력 있다는 듯, 가방을 열었다. 차르륵- 하며 계단처럼 내부구조가 일어나 총을 내밀었다. 그것을 제외하고도 다른 물건을 수납할 공간은 충분히 많았다. 유라의 눈에도 흥미가 감돌았다. “좋네요. 그런데··· 성우 씨에겐 요즘 받기만 하네요. 어쩌죠?” “아니··· 받은 건 당연히 이쪽이 더 많죠.” 성우는 손을 흔들며 치하를 넘겼다. 사실 소총개발도감은 기관장치의 발상을 전환시켜주는 일면으로 30년 정도 문명의 발전을 앞당기는 것으로 예측되었다. 의례적으로 하는 말이라도, 거짓은 아니었던 것이다. 물론 성우가 유라에게서 받은 총경삼권록은 성우의 생명을 지키는 데 쓰일 것이며, 그에게 효율적인 전투법을 제시한 길이었다. 절대적으로 볼 때는 성우가 유라에게 베푼 것은 많았지만, 상대적으로 볼 때 총경에 비하면 총기지식은 별 거 아니었다. 유라는 뭐 줄 것이 없나 고민하다가 품에서 권총 한 자루를 꺼냈다. “이것을 드릴 게요.” “···아니 이것은 유라 씨의 마총이지 않습니까? 이런 걸 줘도 되는 겁니까?” “마총을 만드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아요. 게다가 소총들에 비하면, 이건 아무것도 아닌데요.” 성우는 유라에게 총을 다시 건넸다. “어차피 마탄을 사용할 수도 없는데······ 이런 건, 유라 씨가 가지고 있는 게 앞으로 있을 위기에 도움이 될 겁니다.” “성우 씨도 마탄을 사용할 수 있어요.” 유라는 뜻밖의 말을 꺼내더니 난데없이 성우의 오른손을 잡았다. 따뜻한 온기가 서로의 손을 타고 전해졌다. ‘따뜻해? 아니! 뜨겁다!’ 결코 착각이 아니었다. 유라의 손에서부터 무언가가 전해지면서 손바닥을 달구고 있었다. 캉! 격철이··· 손부위를 보호하고 있던 경체에 떨어졌다. 그 순간 경체 자체에서 무언가가 새겨졌다. “주문을 하나 씩, 외워보세요. 관貫, 폭爆, 진震, 열裂.” “관.” 손등이 뜨거워지더니, 그 위로 황금빛 선으로 이뤄진 직선적, 기하학적인 문양이 떠올랐다. 육망성이 겹쳐있는 것 같았다. “폭.” 뜨거움이 더욱 진해지고 손등이 떨렸다. 황금빛 선이 끝나는 부분에서부터 붉은색 선이 달리며 손목까지 덮쳤다. 손목 위에는 원을 중심으로 직선이 퍼지는 모양의 문양이 떠올라 있었다. “진.” 새파란 선이 균열 같이 문양의 선을 이으며 팔꿈치를 향해 달렸다. 보이는 그대로 전기가 팔을 타고 오르다가 팔꿈치에서 멈춘 것 같았다. 저릿저릿한 기운에 팔 전체가 힘을 잃은 것 같았다. ‘으윽.’ 성우는 무엇에 취하기라도 한 듯, 마지막 단어를 외우려고 했다. “그만! 해解, 라고 외쳐요! 빨리요!” 만약 유라가 막지 않았더라면, 고통스러워도 결국에는 외쳤을 것이다. 성우는 그녀의 말에 따랐고, 팔꿈치까지 가득하던 불규칙 광선들은 모두 눈 녹듯이 사라졌다. “·······단음주를 연속으로 외우면 어떡해요? 하나씩이라고 하지 않았나요?” “으음··· 귀가 짧았네요.” “3개 이상 단음주가 겹친 탄을 쏘면··· 저라도 반동을 참지 못해요.” “명심할 게요. 그런데 이건······?” “연구에서 얻어낸 성과죠. 경체에 마탄의 저주를 불러일으키는 주술문呪術紋을 심어, 경체의 에너지로 마탄의 고유 에너지를 대신하게 만들어, 마탄을 쓸 수 있게 해준답니다.” “다른 사람에게 시험해봤나요?” 유라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무표정 그대로 손을 들어 입을 가렸다. 마탄주술문을 새기는 건 성우가 처음이었다. 호감을 넘어서 가증스럽기까지 한 모습에 성우는 어이가 없어졌다. ‘결국······ 실험대상인가.’ 그녀의 눈에 비취는 자신의 모습이란 겨우 그 정도였다. 신기한 몸이 가지는 가치로 밖에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이번 사건으로 새롭게 예상 밖의 지식이 추가되었을 뿐이다. 내부에서 자조적인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여하튼··· 고맙게 쓸 게요.” “별 말씀을··· 오히려 죄송하기 까지 하네요.” “그런데 총이 하나 비니 허전하실 것 같군요. 음······.” 성우는 자신의 주머니에서 44매그넘을 빼내 유라에게 건넸다. “에? 이건 성우 씨의······?” “마총보다야 못하지만, 쓸 만하니 받아주세요.”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단순히 빚을 만들기 싫어서 그런 겁니다.” 성우는 딱딱한 어조로 말했다. 말 그대로였다. 받기만 하는 건 이제 사양이었다. 그녀와는 대등한 위치에 서고 싶은 것이다. 처음 그녀와 만났을 때와는 다르다. 뭔가가··· 달랐다. 유라는 성우의 눈에서 평소에 보기 힘든 고집을 읽어냈고, 결국 44매그넘을 자신의 안주머니에 넣었다. “그럼 슬슬 내일 새벽 1시를 위한 준비를 해볼까요?” 성우는 기지개를 켜며 2층으로 올라갔다. 유라는 성우의 뒷모습을 한참동안 쳐다보았다. 왠지 차갑다는 느낌을 받았다. 평소와는 뭔가가 달랐다. ‘뭐가 다를까?’ 평소에는 택하지 않았을 주제로 고민하며 유라 역시 2층으로 올라갔다. 콰당-! 가방의 예비공간을 가득 채운 종이뭉치가 문 닫는 충격에 흔들려 빠져나왔다. 하얀 면사포를 쓴 유라의 웃는 얼굴이 살짝 드러났다. +++++++++++++ 정의맹 신강지단 총수, 신권수사 규연은 충혈充血된 눈으로 상급무사가 가져온 서신을 받았다. “음? 모래 오전 6시. 광마가 동쪽 관문을 통해 도망칠지도 모른다고?” 규연은 탐스러운 수염을 쓰다듬으며 다시금 중얼거렸다. 조금 후, 규연은 무경을 호출했다. 천무군 백상린은 그리 오래지 않아 규연 앞에 섰다. “어떻게 생각하오?” 서신을 두 번, 세 번 다시 검토한 백상린은 서신을 쓰레기 통에 던지며 고개를 저었다. “기만입니다.” 단정하듯 말했다. “그 이유는?” “내용을 보면 광마의 목적을 아는 사람이고, 어떻게든 광마를 정의맹에 넘기려고 한다면, 차라리 광마가 현재 있는 위치를 가르쳐주는 게 당연합니다. 이런 번거로운 짓은 안 할 테죠.” 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익명의 서신 따위 믿을 게 못 된다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서신대로 움직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은 인간의 이성으로는 어쩔 수 없는 심리적 오류였다. “그러나, 광마가 신강에 있다는 건 확실합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신강을 떠날 것이라는 것도.” “경비를 관문에 집중시켜야겠군. 어느 쪽이 좋을 것 같소?” “남쪽. 지금까지의 광마의 행동패턴으로 보면, 남쪽으로 갑니다. 다만, 동쪽도 신경 쓰이는 군요. 이쪽의 수를 미리 읽고 보낸 서신이라면, 동쪽으로 향할지도 모르죠. 으음.” 백상린은 침음성을 흘리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제가 동쪽 관문 가까운데 집을 얻어놓죠. 다섯 명 정도 지원해주시길. 다른 대원들은 남쪽 관문에 집중시켜주십쇼.” 규연은 필기구를 꺼내 백상린이 말한 대로 인원을 종이 위에 기입하고 있었다. 동문 여섯, 남문 백이십 명. “가장 중요한 건··· 언제라는 거군.” “네. 하지만, 이거 하나는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지금부터 행동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 서신이 기만을 목적으로 한다면, 이 서신이 온 순간부터 광마의 탈출 준비는 이미 끝났다는 것을 의미했다. 스스로에게 자신이 없다면 이런 행동은 취하지 않을 테니. “이 서신이 광마의 것이라면, 그녀는 왜 이런 행동을 했을까? 탈출하기 오히려 힘들지 않을까?” “두 가지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는 광마의 행적을 알고 있는 다른 집단의 유희라는 것과 하나는 광마의 것이며, 무언가 보이지 않는 노리는 게 있다.” 아무리 봐도 기만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 내용으로 보면 전자나 후자나 문제였다. 결국 통하는 것은 한 가지였다. 오늘밤은 쉽게 잠들지 못할 것이다. 좁은 다락방. 두 남녀가 서로를 보고 있었다. 하나는 화난 표정을 짓고 있는 특이한 복장의 청년이었고, 하나는 검푸른 가죽코트를 입고 있는 무표정의 아름다운 미녀였다. 성우와 유라였다. 화난 표정의 성우가 먼저 입을 열었다. “어째서 네놈이 풍여랑이 된 거지?” 유라가 비웃음을 얼굴에 담았다. “그거야 제비뽑기에서 내가 풍여랑의 것을 뽑았기 때문이지.” “말도 안 돼! 나에게 오도록 미리 조작해놨다고!······헙!” “후후후, 역시 그랬군. 어쩐지 통 벽면에 붙어있어 조금 뽑기 힘들더군, 신경 쓰여서 뽑고 나머지 하나를 벽에다가 붙여놨는데, 빙고라. 고마워, 고마워.” 유라는 환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아름답다기보다 사악했다. 성우는 제 꾀에 제가 넘어간 것에 바닥을 긁고 있다가 문득 생각나는 게 있는 지 일어나 유라에게 다가갔다. 상당히 진지해보이는 성우의 얼굴에 유라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그녀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그녀의 발은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순간 성우의 팔이 쾌속하게 움직이더니 사라졌다! 말랑말랑- “좋구나. 일류둔갑一流遁甲의 술법이란.” “······.” 말랑말랑- “그래, 이 감촉··· 풍여랑 님의 몸을 완벽하게 구현한 게 틀림없어. 죽어도 여한이 없겠군.” “······.” 말랑말랑- “맨날 만질 수 있다면··· 이름도 성분도 알지 못하는 놈으로 둔갑한 것도··· 나쁘진 않겠군!” “···말은 다 했냐? 변태야!” “응? 커헉!” 쾅-! 성우의 능청스러운 얼굴이 경악으로 일그러져가는 그대로, 유라의 훅이 작렬했다. 성우의 몸은 트위스트 춤을 헤드스핀으로 거꾸로 추는 것처럼 머리로 팽이 축軸을 대신해, 지면을 뱅글뱅글 구르다가 여력에 못 이겨 벽에 처박히며 굉음이 일어났다. 지면에 핏자국이 선명했다. 유라는 성우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자신의 가슴을 만졌다. 말랑말랑하면서도 탄탄한 가슴은 그녀 스스로로서도 감촉이 좋다고 느낄 정도였다. “제길··· 혼자서만 간직하고 싶었는데.” 40대 아저씨가 만들어낼 만한 아쉬운 표정으로 그녀가 중얼거렸다. 쾅-! 천장이 들썩할 정도로 굉음이 일어났다. 정 노인에게로 가 있던 유라의 시선이 잠시 천장으로 향했다. “다른 사람들은 위에 있나요?” 정노인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유라는 무표정 그대로 끄덕이더니 수인을 맺고 벽과 천장을 차례대로 가리켰다. 벽에 희미하게 특이한 문양이 일어나더니 이내 사라졌다. “방음防音의 주呪입니까. 실력이 많이 늘었구려, 풍여랑.” “그것보다, 나를 따로 부른 이유를 말해보세요.” 유라는 평소처럼 딱딱하게 말을 꺼냈다. 정 노인은 진지한 표정이 되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소. 풍여랑과 함께 다니는 남자는 풍여랑에게 소중한 사람이요?” 유라는 그 질문에 한동안 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정 노인은 이미 대답을 받았다. 유라의 무표정은 더 이상 무표정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얼굴에 가득 웃음을 피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답은 신강에서 나가고 제국에 가서 듣겠소. 후후후.” 유라는 8살 꼬마의 비밀이 들킨 얼굴을 한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성우는 눈을 감고 편한 자세로 앉아, 경체를 움직였다. 총경삼권록을 보는 도중, 원리만 나온 채 총경을 사용하는 데 가장 중요한 발사관의 구조가 존재하지 않는 이론상 환상의 기술이 있었다. 경체를 두 개로 나눈 다음, 각기 다른 성질로 만든다. 두 개의 섞이지 않은 성질을 경체의 구를 만들어 그 안에 넣고 서로의 힘을 물고 물리도록 하나의 고리처럼 묶는다. 거기에서 생기는 에너지는 지금까지 썼던 총경과는 궤를 달리하는 고효율을 자랑한다. ‘서로 다른 성질의 경······ 상생상극··· 융합원리인가. 문제점은 두 가지. 반발력이 일어날 정도로 서로 다른 경체는 만들어 본 적이 없어.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에너지를 견딜 정도의 총경의 발사관 따위··· 있을 리 없겠군.’ 성우의 경체의 양은 정식수련에 막 들어간 사람보다 적을 정도였다. “결국 할 수는 없는 건가.” 하지만 총경삼권록을 되새기는 것만으로도 당장의 성과는 있었다. 총경의 발사관이 가지는 메커니즘을 순간변환 시켜, 서로 다른 성질의 총경이라도 바로 넘어갈 수 있도록 만들 수 있었다. 신체의 무리가 가지 않을 정도라면 최대 5연발도 가능했다. ‘물론 그 후에는 그로기 상태가 될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그 위력은 상당하다. 성우는 오른손을 보며 중얼거렸다. “첫 번째, 관.” 손등이 뜨거워지더니 기하학적인 문양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음······.’ 성우는 그대로 경체를 발출했다. 선명한 경사가 그의 손바닥에서 일어났다. 경사는 성우의 의지를 따라 그의 주머니에 들어있는 마총을 꺼냈다. 마총의 총구가 성우의 눈앞에 보였다. 마총이 허공에 떠서 성우의 미간을 가리키는 그 모습은, 투명인간이 성우를 향해 총구를 겨누고 있는 환영이 보일 정도로 섬뜩했다. 성우는 경사를 통해 마총과 일체화되었다. 그러자 과거 혈사에서처럼 총의 내부가 드러났다. 경체에 새겨진 마탄주술문이 마총내부의 ‘어떤 장치’를 활성화시켰다. 존재하지 않을 투명인간이 망설임없이 마탄의 방아쇠를 당긴다. 총구는 여전히 성우를 향한 채였다. 방아쇠가 완전히 당겨졌을 때, 총알이 총구를 미끄러지듯 빠져나와 성우를 향해 날아갔다. 성우는 어느새 고개를 옆으로 꺾고 있었고, 그의 눈은 총구에서 일어난 황금색 광륜을 주시하고 있었다. 드르르륵-! 성우를 스쳐, 뒤편, 벽면으로 날아간 총알은 보통 총알의 수십 수백에 달하는 회전력으로 벽면을 뚫고 전진하고 있었다. 지하실을 이루고 있는 석재는 소총의 총알조차 상흔만 약간 남기고 튕겨낼 정도로 내구력이 뛰어났지만, 마탄 앞에서는 무른 석회질이나 다름없었다. “해解. 음··· 경사로 써도 되는군. 조금 피곤하긴 하지만··· 써먹을 수 있겠어. 역시.” 성우는 목이 쓰라려오자 만져봤다. 손에 미끌미끌한 게 잡혀왔다. “치료··· 해야겠군.” 성우는 천을 찢어 목에 댔다. 천은 금방 젖어왔지만, 피는 반비례적으로 빨리 멈췄다. 끼이익- 문이 열렸다. 성우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으나 그가 아는 사람은 아니었다. 이곳 나이로는 50세 초반대로 보이는 청년이었다. 성우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건장한 체격에 움직일 때마다 율동하는 근육은 시각적으로도 위압감을 주었다. “총소리가 나서 와봤다. 자네가 풍여랑과 함께 왔다는 청년인가?” “그렇습니다만. 누구십니까?” 위압적인 어조에 성우는 평소대로 답했다. 그의 얼굴에 비웃음이 서렸다. “부담을 못 이겨 자살이라도 시도한 것 같군.” “그런 일은 없으니 걱정은 무용無用합니다.” 성우의 별거 아니라는 말에 그는 굳은 얼굴이 되었다. “솔직히 말하지. 나는 네가 싫다. 풍여랑께서 네 놈과 같이 다녔다는 사실이 싫고, 네가 특별취급 받는 것도 싫다. 그리고 사내답지 못한 네 놈이 싫군.” 탁- 성우는 피가 흥건한 헝겊을 탁상 위에 놓았다. 우연인지 거기에서 일어난 소리가 절묘하게 사내의 호흡을 끊었다. “그러한 충고를 하시는 당신의 이름을 물어도 되겠습니까?” “···수강秀江=신대영信代影. 수강이라고 알아둬라.” 그는 딱딱하게 대답했다. 성우는 생명줄을 씹듯이 이빨 사이에서 굴렸다. 그런 요령에 의해 피리에서 미약한 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성우로서도 이름 모를 관악곡이 흘러나왔다. 조용하면서도 기대감에 가까운 불안감을 심어주는 곡조가 흘러나오자 수강은 웃었다. “난 정말 네가 싫어. 하지만 너는 그녀의 행보에 필요할 거다. 너 스스로는 잘 모르겠지만, 너는 대화하는 사람의 감정을 배가시키는군. 대화의 흐름을 가져가 버리는 데는 천부적인 것 같아. 풍여랑껜 네 놈과 같이했던 시간이 좋은 경험이 될 것 같군." “무슨 뜻에서 하는 소리입니까?” “아아, 네 놈의 자기중심적 대화에서 벗어나기 위한 헛소리다. 다만, 전언하지. 될 수 있으면 살아남아라.” 수강은 그 말을 끝으로 문을 열고 지하실에서 나갔다. 한동안 지하실 계단을 두드리는 발소리가 성우의 귓바퀴를 돌았다. “남은 시간은··· 2시간.” 시계는 오후 1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예정된 시간이 되자 수강에게서 정 노인이 부른다는 소리를 듣고 성우는 3층 다락방으로 올라갔다. 기다리는 건 정 노인뿐만이 아니라 유라도 있었다. ‘당연한가?’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있었다. 그러나 그리 큰 신경을 쓰진 않았다. 이 집의 분위기야 언제든지 이상했다. “성우 씨, 어서 오세요.” “있었군요.” 수강은 문 앞까지 안내만 하고 다시 2층으로 내려갔다. 성우가 배정된 자리에 앉자 정 노인이 신강의 지도를 탁자 앞에 꺼내놓으며 회의를 시작했다. “그럼 지금부터 탈출계획을 말씀드리겠소. 풍여랑께선 동쪽으로 가시오. 그러나 관문정면으로 향하진 마시오. 아시다시피 관문을 통과할 수도 성벽을 넘을 수도 없소. 관문의 높이는 총 20미터, 그 폭은 3미터 정도 되고 중요군사도시이기 때문에 성벽에는 항상 보초가 대기 중이오. 게다가 주인의 명령에 따라 하늘을 날아다니는 제응은 성벽을 넘는 수상한 것이라면 놓치지 않소. 예를 들어 쥐새끼라도, 제응의 시야에서 벗어나지 못하오.” “그냥 변장하고 낮에 관문을 넘을 수는 없었던 겁니까?” 성우가 물었다. “관문에는 신산술사가 쳐놓은 결계가 있소. 술법에 의한 변장은 안 되오, 그렇다고 인피면구라던가 가면이라던가 하는 것이 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오. 투시경이 있어 지나가는 사람의 짐 내부까지 검사한다오. 가면 따위야 금방 발견되지.” “다른 곳에서는 그렇게까진 안 하던데······.” “신강은 국경도시. 이 정도 방비는 당연한 것!” 나라의 기술, 정보와 같은 것을 쉽게 넘길 수는 없다. 특히 중요인사명단이라는 게 있는데, 거기에 등록된 사람은 국가의 허가서가 없이는 왕이 와서 경비병을 때려죽여도 통과시킬 수 없다. “결국 야반도주인가.” 성우가 자조하듯 중얼거렸다. 정 노인이 헛기침을 하며 지도 한쪽을 가리켰다. 동문에 가까운 성벽이었다. “이럴 때를 대비해서 만들어놓은 지하통로가 여기에 있소. 사실 지금까지 준비한 것은 도망가기 위한 게 아니오. 제랑산맥帝靈山脈을 넘기 위한 준비였지.” “맞아요. 굉장한 험로죠.” 유라가 맞장구치자, 성우도 수긍했다. 지하통로가 있는 장소는 북쪽을 12시 방향으로 놓고 분침으로 11분에 해당하는 애매한 위치에 있었다. ‘동북쪽인가···.’ “그럼 유라 씨의 가방을 챙겨야겠군요.” 성우의 말에 정 노인이 손을 내저으며 웃었다. “이미 수하 중에 하나가 비밀통로에 놔두었다오. 자네들은 몸만 가면 되는 걸세.” 성우는 자신도 모르게 굳은 얼굴이 되었다. 그의 시선이 유라의 변하지 않는 얼굴로 향했다. 뚫어질 듯 쳐다보는 시선을 느껴선지 유라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시선이 마주치자 그녀의 눈가가 떨렸다. 성우는 시선을 거두고 한숨을 쉬었다. ‘짐꾼 주제에··· 여러 가지 하는군.’ “준비가 다 끝났다면··· 가도록 하죠.” 성우는 생명줄을 불며 말했다. 바Bar에서나 어울릴 발라드풍의 쓸쓸한 곡조가 방안에서 울려 퍼진다. 두 남자가 앞서고 그 뒤를 특이한 가방을 든 여인이 걸었다. 그 중 여인은 밀착형의 가벼운 합성모직 옷을 입고 얼굴을 가릴 정도로 모자를 눌러썼다. 모자의 모양은 챙이 넓은 산책전용보다 약간 작은 정도에 재질은 고급 가죽이었다. “신호가 울리면······ 망설임 없이 열린 문을 향해 나가십쇼.” 일행을 이끌던 건장한 체격의 사내가 다른 두 남녀를 향해 충고했다. 여인이 고개를 저었다. “걱정은 필요 없어요, 이래 뵈도 많은 전투를 거쳤으니까요.” 따스한 목소리가 가슴을 진동시키자 사내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풍여랑, 행운을 빕니다.” 고개를 든 유라는 모자를 슬쩍 들이올리고 남문南門을 올려다보았다. 군사도시에 어울릴 법한 거대한 관문이었다. 그런 그녀를 동경의 눈으로 쳐다보는 멍한 표정의 소년이 있다. 그는 특이한 그림이 그려져 있는 옷을 장포 안에 껴입고 있었다. 정노인이 길을 이끌었고 유라와 성우는 그의 뒤를 따랐다. 추정인구 8만의 도시인만큼 집이 빽빽이 들어서 있었다. 그 사이를 지나가는 것은 쉬우기 짝이 없으나, 문제는 남들에게 들키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빛이 없는 곳을 골라 몸을 기역자로 낮춰 빠르게 이동했다. “어이, 술 한 잔 더 하세!” “큭큭큭- 마누라 엉덩이나 더 두드리고 말지, 돈 아까워 못하겠네!” “쳇 이래서야 솔로는 어디 살 겠나?” “눈앞에 극락이 있는데 뭘 더 바라나?” 우연인지 술에 만취한 사내들이 지나갔고, 그들 중 하나가 성우가 있는 곳을 가리켰다. 성우는 몸을 더욱 움츠렸고, 그러던 중에 머리 위를 보았다. ‘미인 항시 대기 중. 전국술집연합 공식지정 우수홍루. ···라니 술집입니까? 게다가 미인항시 대기?’ 간판에 새겨진 문장에 어이없는 웃음을 짓고 있을 무렵, 사내들은 골목에 숨어있는 그들을 지나쳐 술집에 들어갔다. 한숨소리가 연신 터져 나왔다. 다시 정노인이 달리기 시작했고, 성우로서도 조금씩 지칠 무렵, 육안으로 성벽이 가깝게 보일 거리에 다가왔다. “후, 다 왔군.” 정노인은 허리를 펴고 두드렸다. 그의 태연한 모습에 몸을 숙이고 있던 성우는 이상함을 느꼈다. 이내 유라가 몸을 일으키고 정노인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정노인은 고개를 슬쩍 끄덕였다. “시작해.”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성우는 유라의 말투가 이상해짐에 놀랐다. 그리고 더욱 놀라야 했다. 유라가 정노인을 향해 갑자기 쌍장을 내질렀다. 정노인의 가슴을 정통으로 격타한 쌍장은 큰 폭발음을 일으키며 정노인의 신형을 6미터 거리까지 날려버렸다. “크허헉!” 정노인이 입에서 피를 뿌리고 날아가는 순간, 자신의 품안에서 무언가를 꺼내 하늘을 향해 던졌다. 막대처럼 생긴 그것은 하늘을 한참 날아가다가 펑-! 하고 굉음을 내며 터졌다. 펑펑펑! 한 번도 아니고 연속적으로 터지는 폭음이었다. 그 소리가 일어난 순간, 동문초소東門哨所에서 불빛이 일어나며 집안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동문주위의 집들에 불이 하나 둘씩 켜지자 성벽이 낮처럼 환하게 밝아졌다. “하··· 속았군요.” 성우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유라를 보았다. 유라는 성우를 향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미안하네. 풍여랑을 구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네.” “닥치시길. 유라 씨의 얼굴과 목소리로 짜증나는 말 하지 않아주시길 바랍니다.” 성우는 자조적인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모든 위화감이 유라가 가짜라는 사실 하나로 사라지기 시작했다. 처음 작전회의에서 느낀 위화감은, 정 노인이 상석에 앉았고 유라가 하석에 앉았다는 것이었다. 말 그대로 작전회의라 그럴 수도 있다, 생각하며 넘겨버렸다. 게다가 성우의 시선은 얼마든지 받아 넘길 수 있는 유라였다. 눈길을 피한 건 어딘가 이상했다. ‘그렇다면 유라 씨는?’ 딸칵- 곁에 몰려있던 집들의 창문이 열리며 사람들의 시선이 성우에게 모였다. 그들은 하나같이 외쳤다. “광마가 여기 있다!” “잡아라!” 그렇게 큰 소리로 외친 후, 그들은 훈련이라도 받은 것처럼 일제히 집안으로 모습을 감추고 창문을 닫았다. 신강이란 도시 전체에 비하면 그들의 외침은 아주 작은 불씨였다. 그러나 난데없는 폭음에 일어나 있던 사람들이 있어 전염이라도 된 듯 같은 소리를 내뱉기 시작했다. “동문 쪽에 광마가 있다~!” “광마과 종자가 동문으로 향하고 있다!” 성우는 유라를 다시 한 번 싸늘한 눈길로 쳐다 본 뒤, 품안에서 목곽를 꺼냈다. 황금빛으로 빛나는 단환, 통기경이 있었다. 성우는 통기경을 입에 넣기 전, 유라의 모습을 취한, 다른 사람에게 물었다. “진짜 유라 씨는 어딥니까. 설마··· 남문?” 에메랄드 빛 눈이 흔들렸다. 성우는 알기 쉬운 반응이라고 생각하며 몸을 돌렸다. 그 순간, 다섯 명의 사람들이 집들의 지붕 위를 달려오다가 성우를 발견하고 몸을 뒤집어 땅으로 내려섰다. 왼쪽 가슴에 정의를 뜻하는 글자가 수놓인 청색 경장을 입고 있었다. 정의맹 신강지부 청룡당에 속한 무인들이었다. 그들은 일제히 자신의 병장기를 꺼내며 외쳤다. “각오해라! 광마! 그리고 광마의 종자여!” ‘들러리 취급인가? 좋아 나쁘진 않겠지!’ 성우는 비웃음을 날리고 통기경을 씹어 목구멍에 넘겼다. 생명줄을 입에서 때어내 주머니 속에 넣고 호흡을 골랐다. 1분을 기다릴 필요는 없었다. 조용해 보이나 화가 나 있다. 지금까지 조용히 지나갔었던 모든 분노가 한꺼번에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그에 혈류가 빨라지며 마혈균의 부작용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통기경으로 몸이 민감해졌다. 그러나 마혈균에 의해 고통은 금방 가셨다. 이제 세계가··· 느려지기 시작했다. 성우는 순간적으로 데져트 이글을 들어 한 사람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주머니에서 총이 빠져나오고 방아쇠를 당기기까지 걸린 시간은 수유에 불과했다. 탕-! 잠깐 움직였다 싶더니, 총성이 울리고 총알이 날아오고 있었다. 50EA의 괴물탄두가 총성에 놀란 청룡당원 중 하나의 가슴을 헤집어놓았다. 내부를 깊이 울리는 충격과 총알 자체가 가지고 있는 저지력에 그가 3미터를 날아가며 피를 토하자, 남은 청룡당원들은 경악하며 성우를 쳐다보았다. 광마는 가만히 있는데 광마의 종자가 설치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음?’ 한 청룡당원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광마조차 자신의 종자의 돌연한 행동에 놀란 표정을 숨기지 않았던 것이다. 어째서 일까, 생각하려고 해도. 종자는 그럴 시간을 주지 않았다. 어느새 그에게로 다가왔던 것이다. 성우는 청룡당원의 발을 충의 진각으로 밟은 후, 채찍처럼 경이 충만한 손을 휘둘렀다. 청룡당원의 턱이 90도로 돌아갔다. 그 때까지 무슨 일이 일어난 줄, 다른 청룡당원은 모르고 있었다. 성우는 그들의 반응속도를 한참이나 초월한 속도로 움직였던 것이다. 그들이 잡는 것은 성우의 잔상! 성우는 그들이 움직일 여지를 주지 않았다. 한 청룡당원이 검을 휘둘렀지만 이미 그들에게 최대한 접근 한 성우에게는 통하지 않는 수였다. 거리가 멀었다면 원심작용에 의해 검극의 속도가 무서울 만큼 빨랐었겠지만 접근을 하니 그런 점이 소용없었다. 검을 쥔 손을 발등으로 후려치고 수도로 목젖을 강타했다. “커헉!” 숨막히는 신음을 토한 뒤, 청룡당원의 신형이 무너지자, 성우는 그의 옷깃을 잡고 그의 몸을 휘둘러 남은 두 청룡당원을 공격했다. 그들은 병기로 동료의 몸을 막았지만, 동료의 상처를 늘렸을 뿐, 무게에서부터 비교가 안 되는 몸을 그대로 막을 수는 없었다. 동료의 몸을 잡고 물러서자 성우는 그 동료의 등을 향해 날아 차기를 먹였다. 둔의 발경이 담긴 그 공격은 세 청룡당원을 한꺼번에 기절시키기에 충분한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세 사람의 몸을 발판으로 삼은 성우는 지붕 위로 올라갔다. 설명은 길었지만 단, 7초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유라의 모습을 취한 사람이 성우를 멍하게 올려다보았다. 피를 연신 토하던 정 노인도 그를 멍청하게 보고 있었다. 그들은 복잡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성우는 그들을 향해 비웃음을 날렸다. ‘후회하나. 웃기는 사람들이로군.’ 성우는 더욱 높은 집의 지붕에 서서 사람들의 이동을 보았다. 남문에서 사람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정의맹의 사람들이었고, 동시에 남문의 수문 병사들이었다. “광마가 여기있다아~!” “광마와 그 종자가 여기 있다!” 사람들의 외침소리가 그들을 끌어주고 있는 것이다. “유인책인가. 유인책이란 말이지. 후후후. 재미있군.” 성우는 화가 날수록 더욱 더 짙은 미소를 지었다. 그는 멍하고 무신경하기는 하지만 자신에 관계된 일조차 신경을 쓰지 않는 사람은 아니다. 오히려 다른 것에 무신경하기에 자신에 관계된, 거기서 위험하게 만드는 일은 총력을 기울인다. 받은 것은 되돌려준다. 그것은 현재의 성우를 이끌어온 삶의 방식 중 가장 최초의 것이었다. ‘우선··· 유라 씨를 만나자.’ 성우의 표정이 씁쓸하게 바뀌었다. 그의 신형이 지붕 위에서 사라졌다. 빠른 속도로 지붕에서 지상으로 낙하했기 때문이다. “저··· 저 정도였었나!” 정 노인이 다시 한 모금의 피를 토하며 한숨을 쉬었다. 유라의 모습을 취한 사람은 멍청하게 성우의 잔영을 바라보다가 북문을 향해 도망치기 시작했다. ‘아직··· 잡혀서는 안 된다. 풍여랑께서 신강의 영역을 완전히 벗어나실 때까지!’ 잠시 후, 지단에서부터 곧장 달려온 신권수사 규연이 정의맹도들을 이끌고 정 노인을 향해 달려왔다. “부상자? 아니, 진노야眞老爺? 노야께서 왜 여기에?” 정 노인은 쌓아뒀던 피를 울컥 토해냈다. “광마에게 당했다네······크윽!” “노야!” “괘, 괜찮네.” “누구신데 지단주님이 그러시는 겁니까?” 따라온 정의맹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자네는 몰라도 되네! 으음, 그보다 어서 들것을 준비시켜! 들것을 들 2명만 빼고 나머지는 추적을 계속해!” “합!” 정의맹도들이 사라지자 규연이 물었다. “어째서 봉공이신 진 노야가 여기에 있는 겁니까. 설마 광마를 추적했던 겁니까? 그렇다면 편지를 보낸 것도 노야가?” 정 노인은 실실 웃기만 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곧이어 기절했다. 규연은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진 노야를 내려다봤다. 정의맹에서 오직 다섯 명 밖에 없는 봉공이 쉽게 당해버린 것이었다. 이내 들것이 정 노인을 태우고 의원으로 향했다. 규연은 다시 북문으로 도망쳤다는 광마를 향해 달렸다. 동문 쪽에서 폭죽이 터지고 소란이 일어났다. 광마가 나타났다는 소리가 들려오자, 정의맹의 사람들이 그쪽으로 몰려가기 시작했다. 남문 근처의 집에서 상황을 보고 있던 수강은 두 남녀를 바라보았다. “이제 남문이 열리면 바로 나가시길.” 수강은 그렇게 말하고 집밖으로 나갔다. 수강이 사라지자 유라는 성우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성우 씨는 어딨죠?” “무슨 소릴 하는 겁니까?” 성우는 흔들리는 눈으로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되물었다. 유라의 눈이 말없이 차갑게 빛났다. “그런 가요. 착각이었나 보네요. 그런데 저번에 갔었던 온천, 재밌었죠?” “아, 예, 그랬지요.” “무슨 소릴 하는 거예요. 온천 간 적 없는데요?” 성우의 표정이 무너졌다. 그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떨궜다. “후우, 어떻게 알았습니까?” “피리.” 성우의 모습을 취한 사내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입에 물린 막대를 잡았다. “똑같이 만들었을 텐데요?” “그건 제가 만든 거예요. 주술까지 넣은 그것이, 똑같을 리 없죠. 설령 주술까지 완벽하게 해낸다고 해도, 저의 눈을 속일 순 없어요.” 사내는 탄성을 터트리며 피리를 떨어트렸다. 그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몸을 떨어트려 이마를 바닥에 박았다. 쿵- 피가 튀었다. “죄송합니다! 풍여랑!” “어째서 이런 짓을 했죠?” “풍여랑의 추적의 꼬리를 달게 하지 않기 위해서! 국가를 위해서!” 유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렇다면 동쪽의 유인책에··· 성우 씨가 있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유라는 당장에 몸을 일으키려다가 사내에게 제지를 받았다. “수강의 노고를 무의미로 만들 셈입니까!” “······!” “곧 남문이 열리고 풍여랑께서 나가신 후, 바로 남문이 닫힙니다. 그 때 이외엔 무사히 신강을 빠져나갈 방법이 없습니다. 성벽을 그냥 넘었다가는 성벽 위의 주술에 걸려 제응들의 추적을 받게 되니까요.” “어째서 성우 씨를 희생물로 삼았죠.” “당신의 정체는 비밀입니다.” 유라의 눈이 더욱 더 차가운 한기를 내뿜었다. “겨우 그것 때문에?” “국가의 중대사입니다.” 유라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눈에는 분노도, 슬픔도 남아있지 않았다. 남아있다면 오직 허무함뿐이었다. “바보 같군요. 정말 바보 같아요. 국가 때문에 희생되어야 하는 사람들이 바보 같고, 사람의 가치를 외모로만 판단하는 사람들이 바보 같군요.” 사내의 얼굴에 궁금함이 떠올랐다. 유라는 그의 궁금증을 풀어줄 생각도 없이 연신 탄식할 뿐이었다. 성우가 가지고 있는 지식은 대단하다. 가까이에 있는 총기류만 해도 미지의 기술이 담겨있었다. 이런 총기공정은 북부에서도 찾지 못했다. 그 외에 여러 가지에 뛰어났다. 드러난 힘보다 감춰진 지식이 더욱 많은 사내. 안타까울 뿐이었다. “그와 함께한 온천··· 그리워지겠네요.” 그런데, 안타깝다는 한마디로 표현하기엔 뭔가 허전한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 수강은 한꺼번에 빠져나간 사람들을 보고 계획대로라고 생각했다. 정의맹의 사람들이 단 한 명이라도 남문에 광마가 이쪽으로 온다는 정보를 흘리면 언제나 공명심에 취해 있던 남문의 수문장이 광마를 쫓으라는 명령을 내릴 것이다. 그래도 꽤 많은 사람들이 경비초소에 남아있었다. 하지만 전처럼 철저한 관리가 이뤄지는 건 아니었다. 수강은 암행술로 몸의 기척을 숨기고 남문의 개폐레버를 관리하는 방으로 스며들어갔다. 단추를 지키는 사람이 있었다. 하지만 이른 바, 고수라 불리는 존재는 아니었다. 그렇기에 충분한 고수급인 수강에게 쉽게 뒤를 빼앗기고 말았다. 우득- 목뼈가 어긋나는 소리가 짧게 울렸다. 수강은 망설임 없이 레버를 잡아당겼다. 끼기깅- 자동장치가 발동하자, 시끄러운 기계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물레가 돌아가며 거대한 쇠사슬을 감았다. 성문이 열렸다. 초소가 시끄러워졌다. 계획에도 없던 개문이 일어났으니 황당할 뿐이었다. “뭐야?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관리! 관리! 뭐하는 거야!” 수강은 속으로 열을 세었다. ‘10···9···’ 쾅쾅쾅-!! “야 씨팔! 문 안 열어?!”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8···7···’ 쾅! 방문이 부서져나갔다. 수강은 수를 세며 방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을 향해 권을 쳐냈다. 그의 주먹이 대기를 가로지를 때마다 거대한 경력이 바람을 휘감으며 사람들을 날려버렸다. “광마다! 광마가 성문을 나간다!” 바깥에서 관병들의 합창이 들려왔다. ‘3···2···1!’ “나갔···겠지.” 수강은 쓸쓸하게 웃으며 일권에 경을 응축시켜 물레를 후려쳤다. 쇠사슬이 시끄럽게 풀려나갔다. 쾅-! 바깥에서 거대한 굉음이 울렸다. 수강은 포위한 관병들을 향해 자신의 절기인 팔황권八荒拳을 휘두르며 굳게 닫힌 성문 앞까지 도달했다. 그가 지나가면서 쓰러진 관병들의 신형이 길처럼 늘어섰다. 그는 자신을 포위한 관병들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광마를 잡으려 하는 자, 오라! 그리고 내 시체를 넘어라!” 주마등처럼 스쳐가는 풍경들이 시선에 담긴다. 경이 충만한 발이 지면을 스치면 한 걸음에 3미터 씩 성우의 신형이 쭉쭉 앞으로 나갔다. 통기경으로 인한 반응속도의 상승은 안 그래도 빨리 움직이는 성우의 다리를 더욱 빠르게 하여, 초당 열여섯 걸음은 걷게 했다. 그것도 점점 가속도가 붙어 걸음수가 상승하고 있었다. 정의맹도들과 관병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북문을 향해 도망쳤다는 광마를 쫓아 남문에서부터 북문으로 직진하다가 성우와 마주치게 된 것이다. “광마의 종자다!” 누군가가 외치자, 다른 사람들과 보조를 맞추며 달리던 사람들 중에서 몇 사람이 신형을 빨리하여 성우에게로 먼저 도달했다. 성우는 경사를 뽑아 휘둘러 그 중 하나의 발을 잡아채 균형을 허문 다음, 지금까지 달려오며 쌓은 가속도 그대로 다른 한 사람을 향해 몸통박치기를 달렸다. 와작-! 가슴뼈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비명이 터지며 정의맹도가 날아갔다. 동시에 경사가 발목에 휘감긴 정의맹도는 성우의 운동력을 모조리 발목으로 받았다. 발목이 꺾이며 그의 비명소리가 달리던 정의맹도를 주춤하게 했다. 그런 사람들 사이에 어느새 성우가 끼어들어 선풍완격을 쳐냈다. 성우의 어깨에서부터 일어난 풍륜이 주먹에서 뭉쳐졌다, 한꺼번에 튕겨나가자 대기가 불규칙적으로 급순환하면서 사람들의 신형을 튕겨내 거나 꺾어버렸다. -끄아아아악! 튕겨나간 사람이 아홉, 몸이 꺾여 움직일 수 없게 된 사람이 여덟. 그들은 모두 비명성을 토했으며, 안 그래도 어지럽던 대열을 더욱 혼란스럽게 만드는 역할을 했다. 성우는 경사를 낮게 휘저었다. 경사에 발목이 걸리는 사람마다 넘어져서 곁에서 달리던 사람에게 밟혀 신음을 토했다. 성우를 향해 검을 쳐내오는 사람이 있었다. 빠른 반응속도는 데져트 이글을 꺼내고 총을 쏴, 총알로 검을 깨트려버린다. 동시에 채찍처럼 휘둘려진 발등에 검수의 목이 걸렸다. 우득! 성우의 발차기에 목이 부러지며 날아간 검수는 다른 동료들에게 날아갔다. 한쪽 대열이 주춤하는 사이, 성우는 뒤로 몸을 튕겨 팔꿈치를 휘둘러 수투를 끼고 서 있던 정의맹도의 어깨를 때리고 그 반동으로 몸을 빙그르르 돌려세운 후, 곁에 있는 사람의 얼굴을 발바닥으로 뭉갰다. 그들에게는 난데없는 빛만이 지나간 것처럼 느껴질 것이다. 성우는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도 자유롭게 움직이고 있었다. 때때로 사용하는 경사와 총경삼권은 많은 무림인들을 허수아비로 만들기엔 충분한 위력과 효과를 가지고 있었다. “에잇! 국법으로 명한다, 비켜라!” 자꾸만 당하고 있는 정의맹도들에게 갑갑함을 느낀 남문수문장 장태호는 국법까지 외치며 정의맹도를 물렸다. 정의맹도들은 불만이 가득한 얼굴이었지만,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정의맹도들이 빠져나가자 관병들이 진을 취했다. 창수와 궁수들로 이뤄진 진법에 성우는 피식 비웃음을 날렸다. 그 웃음을 본 장태호는 노성을 내지르며 궁수들에게 발사명령을 내렸다. “쏴라!” 탕-! 궁수들이 시위를 놓기도 전에, 한발의 총성이 울렸다. 캉-! 하는 쇳소리가 들리더니 장태호의 투구가 내리 2미터를 날았다. 장태호는 발사를 하라는 뜻의 수신호를 취한 자세 그대로 굳어버렸다. “히이이이익!!” 그의 바지에 오줌을 저리자, 궁수들은 화살을 쏠 생각도 못하고 멍하니 지휘관과 성우를 번갈아 보았다. 성우는 비웃고 있는 총구에서 피어나는 총연을 훅 불고 말했다. “쏘라며?” “······.” 궁수들은 그제야 자신들이 할 일이 생각났는지 시위를 놓았다. 하지만 성우의 동체시력은 통기경과 경체의 보조를 받아 날아오는 화살조차 볼 수 있을 정도였다. 그의 눈에는 시속 30킬로미터로 날아가는 야구공 정도로만 보였다. 콤팩트하게 몸을 휘돌려 주먹을 쏘아낸다. 평소보다 훨씬 강하고 빠르게! 소닉 붐 현상이 일어나며 화살이 산개해 다른 사람들에게로 날아갔다. 갑작스럽게 날아온 화살에 사람들은 경악성을 내지르며 각자의 병장기를 휘둘렀다. 그렇게 전장이 어지러운 틈을 타, 성우는 지휘관으로 보이는 자를 향해 신형을 쏘았다. 그렇게 쏘아져 나간 성우는 지휘관의 목에 팔을 휘감았다. 몸이 진행하는 도중이라 그대로 지휘관은 뒤통수를 지면과 만나게 해줄 수밖에 없었다. 비정상적인 각도로 넘어진 지휘관의 몸에서 파골음이 일어나더니, 더 이상 관병들은 그의 지휘를 받을 수 없게 되어버렸다. “장구운!” 넥 브레이커로 지휘관을 쓰러트려 관병들의 대열조차 혼란되어버린 틈을 타, 성우는 그들을 지나쳐 남문으로 돌진했다. 그를 쫓아오는 사람들이 많기는 했으나 성우에겐 오직 저돌맹진猪突猛進 밖에 없었다. 그들을 일일이 상대하다 보면 시간이 많이 걸릴 것이고, 더군다나 포위를 당하면 몸이 쉽게 지친다. 그렇다고 애초에 상대를 안 해주면 얕보인다. 그것은 적에게 틈을 보이는 것이나 마찬가지고 적의 기세를 높이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적당히 몇 사람 패주고 도망치면, 그 몇 사람을 구호하느라 사람들이 자연히 빠지기 마련이고 피해에 비해 성과는 없어, 사기가 떨어지기 마련이다. “동료의 원수를 갚자!” 다른 것은 몰라도 후자만큼은 성우의 오산이었다. 끈끈한 정으로 뭉친 정의맹도라 그런지 복수를 외치며 오히려 더욱 적극적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미 흐트러진 전열이 제대로 정비되긴 글러먹었고, 더군다나 지휘에 혼란이 생긴 관병들이 단지 관병으로써의 역할이 아닌 방해물의 역할을 맡게 되자 사람들이 엉켜버리는 사태가 발생했다. “우어아아어아아!” 괴상한 신음소리와 함께 엉켜버린 사람들을 제외한 정의맹도는 겨우 40명. 그 중에서 성우의 신형을 따를 만큼 발에 자신이 있는 사람은 그 반인 20명뿐이었다. 성우는 달리는 도중 니의 진각을 밟으며 몸을 끌었다. 한 순간, 몸을 회전시켜 자신을 쫓아오는 사람들을 향해 일장을 내갈겼다. 무형의 장력이 허공에서 폭발했다. 그 폭발력은 가히 수류탄에 비할 수 있을까? 폭발은 빨랐고, 강했으며 갑작스러웠다. 가속도를 그대로 니의 진각으로 실은 폭의 총경, 폭작철련은 지금까지의 어떠한 폭발보다 더욱 강한 파괴력을 낼 수 있었다. 폭발에 휘말린 사내들은 피를 토하며 주저앉았다. “가, 강하다! 과연 광마의 종자인가!” 성우는 폭작철련을 날린 직후, 그 반동으로 몸을 다시 돌려 달리기 시작했다. 폭발에서 겨우 몸을 가눈 사람들은 마무리조차 하지 않고 등을 돌리는 성우를 멍하니 쳐다보다 외쳤다. “우우욱, 정의맹도로서 이런 굴욕 처음이야!” 남은 정의맹도들은 투혼을 불태우며 성우를 다시 쫓기 시작했다. 핏물이 눈에 튀었다. 수강은 붉어진 시야를 닦아냄과 동시에 다른 손으로 팔황권, 진황개산陳荒開山을 전개하여 필사적으로 창을 찔러오는 관병을 격살시켰다. 상당한 무공을 닦았는지, 굉장한 속도로 날아왔으나 진황개산은 팔황권의 절초, 그 위력은 창을 창날채로 갈라버릴 정도였다. 관병의 몸에 커다란 구멍이 생겼다. 피가 튀어 수강의 전신을 덮었다. 수강은 문에 몸을 기대고 숨을 골랐다. 그의 앞에는 피가 강처럼 흐르고 내장이 지렁이처럼 기어 다녔으며 시체가 나무토막처럼 굴러다니고 있었다. 모두 수강이 해치운 것이다. “후우, 후우. 이제 조금 쉴 수 있을까······라고 생각하기엔 아직 이른 것 같군.” 수강은 남문을 향해 달려오는 사람을 눈여겨봤다. 그를 확인하기 전에 자세를 취한다. 일각이라도 빨리 쓰러트리고 쉬고 싶은 것이다. 남문을 향해 달려오는 사내가 특이한 자세를 취하며 자신을 향해 몸을 날리자, 수강은 그에 응수했다. 팔황권, 진혼약탕鎭魂躍蕩! 탄의 요결을 쓰는 이 권은 가장 빠른 속도로 발출할 수 있는 기법이었다. 순간, 사내가 한 발을 크게 내딛고 일권을 내질렀다. 권경과 권경이 서로의 영향을 받지 않고 스치며 서로를 향해 질주했다. 수강은 자신이 불리하다는 것을 느꼈다. 사내가 달려올 것까지 계산을 해서 내지른 권이었기에 그랬다. 하지만 그리 큰 걱정은 하지 않았다. 결국 장거리 공격! 그리 타격은 없을 게 당연하다. 진혼약탕의 경우 빠른 탄경을 쓰기 때문에 경의 회수가 빨라 방어에 집중할 시간이 충분했다. ‘아니! 다르다!’ 그의 예상과는 달리 상대의 권경은 힘을 잃지 않고 있다. 오히려 뻗어나가는 그 속력은 빨라지기만 했다. 쾅-! 경으로 가슴을 보호했는데도 모든 장기가 찌르르 울릴 정도로 강력한 관통력! 경체와 육체, 모두가 복구하기 힘든 손상을 입었다. 수강의 육체가 붕 떠서 지금까지 지켰던 관문에 부딪쳤다. “수강?” “···성우인가?” 놀랍게도 전혀 새로운 경의 주인공은 성우였다. 성우의 총경, 전사통시가 작렬한 것이었다. 성우는 수강의 경력에 옷만 약간 훼손당하고 호흡이 흐트러진 정도의 피해 말고는 당하지 않은 모습이었다. “비키십시오.” 성우가 말했다. “···못 비키겠다. 방금 전에 말한 걸, 철회할 수는 없지. 풍여랑을 잡으려면, 내 시체를 넘어서 가라! 라고 말이야. 후후후.” “그럴 의도는 없습니다만.” “큭, 남자로서 여자를 잡는 것은 잡는 게 아니란 말이냐!” 성우는 그 말에 침묵했다. 그의 말이 뜻하는 게 무엇인지 모르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생각할 시간은 없었다. “그렇다면··· 뚫을 뿐.” “흐흐흐, 순순히 뚫려주진 않을 거다.” “그 전에··· 나를 이용하기로 계획한 사람 중에, 당신이 끼어있습니까?” “···후 당연하지.” 순간, 성우의 주먹이 수강이 모르는 세에 가슴에 닿아있었다. 쾅-! 철문에서 폭음이 울리며 수강은 등에 화끈하다는 생각을 가졌다. 성우의 주먹이 후퇴하고, 그의 상체 전부가 콤팩트하게 휘둘려지며 그의 권이 다시 수강의 가슴을 후려쳤다. 쾅-! 전신이 찢겨나가는 통증과 함께 정신을 몽롱해지는 것을 느꼈다. ‘전언철회하지··· 너는 남자다.’ 방해가 되는 것은 때려 부수고 나아가는 것 역시 남자! 수강은 자신을 지금까지 이끌어온 하나의 의지를 접어가며 의식을 잃었다. 제이총경, 폭작철련과 제삼총경, 선풍완격이 차례대로 수강의 몸을 통해 철문을 때렸다. 형편없이 허물어진 수강의 몸에 비해, 철문은 두 번의 총경에도 꼼짝하지 않고 있었다. ‘한 번이 안 된다면 두 번, 두 번이 안 된다면 수십 번이라도 때려 부술 수밖에!’ 성우는 다시 폭작철련으로 철문을 때리고, 그 반동으로 선풍완격의 준비를 한 다음, 철문의 진동이 가시기도 전에 후려쳤다. 가가가가각-!! 또 다시 일어난 폭작철련에 이은 선풍완격의 폭발적인 힘의 돌풍에도 철문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뭔가 다르다. 새롭게 진각이 땅을 박고 힘이 일점에 집중된 주먹이 대기를 가른다. 섬뜩한 파공음과 함께 일권, 전사통시가 철문을 때려 막자, 수백 년 동안 외적의 허가 없는 침입을 막아왔던 철문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허억허억, 이제··· 한 번··· 한 번만 더!” 퓩-! 그 순간, 등이 쇠꼬챙이가 박힌 것 같은, 통증이 느껴졌다. 한 번이 아니었다. 퓩-! 퓩-! 퓨퓨퓨퓨퓩-! 성우는 가슴 앞으로 삐죽 튀어나온 일곱 개의 칼날을 보고 있었다. 뜨겁다. 뜨겁다. 뜨겁다. 뜨겁다. 뜨겁다. 뜨겁다! 검날을 통해 피가 흘러나왔다. 새빨개진 검신이 맹수의 혀처럼 성우의 고통에 일그러진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앞으로··· 한 방이면 되는데······!’ “우아아아아악!!” 성우는 크게 비명에 가까운 기합을 내지르며 모든 경을 집중시킨, 하지만 평범한 주먹을 철문에 대었다. 파직- 빠지지지직!! 철문 전체에 금이 달렸다. 성우의 주먹에서부터 일어난 새까만 선은 멈춤을 모르고 최상부까지 달렸다. 이내, 우르르르르-!! 철문이 무너졌다. 그러나 성우는 기뻐할 수 없었다. “······.” 성우의 동공은··· 텅 비어있었다. 무너져 내리는 철문의 파편이, 혼이 빈 성우의 육신을 감췄다. “·······음?” 유라는 돌연 걸음을 멈췄다. 그 뒤를 따르던 성우, 아니 성우의 모습을 취하고 있는 현앙鉉央도 유라의 돌려진 시선에 자신의 고개를 돌렸다. 시선을 따라 가니 신강의 성벽과 울창한 숲으로 둘러싸인 대로大路만이 보일 뿐이었다. “풍여랑, 무슨 문제라도 생겼습니까?” 유라는 한참동안 시선을 고정하더니,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아뇨. 가죠. 착각··· 이었나보네요.” “그럼 서두르도록 하죠. 국경을 넘을 때까진 안심할 수 없습니다.” 국경까지 펼쳐져 있는 길은 잘 닦여있기는 하다. 하지만 사정상 국가에서 관리하는 정규루트로는 갈 수 없었고, 세작, 즉 스파이들이 이용하는 비정규루트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그 길은 숨겨져 있기에 험했고, 산을 빙 돌아서 가는 것이랑 다름없었다. 제령산맥을 빙 돌아간다는 소리는 목숨의 반을 하늘에 맡겨둔다는 소리와 별 다를 바 없었다. 국경에서만 아니라 동부 대륙에서 가장 높고 험할 지도 모르는 산맥! 그게 바로 남부의 패자, 백환제국 제일의 제령산맥이었다. ‘돌아가는 거구나. 고향에··· 40년 만의 귀향인가요.’ 유라는 앞에 펼쳐진 험한 산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신강의 남문을 보았다. 쓸쓸한 눈빛이 새어나왔다. ‘무사하시길······.’ 그것을 마지막으로 이제 그녀를 막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 천무군 백상린은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다. 우르르르르- 누백년 동안 신강의 치안을 지키던 철문이 무너져 내린다. 그것도 어떠한 기물에 의해서가 아닌 단 한 사람의 주먹에 의해서! 그 주인공은 백상린이 날린 일곱 개의 검들에 등을 꿰뚫린 채 다시금 주먹을 날렸다. 그리고 무너져 내리는 쇳덩어리에 깔리며 생을 마감했다. 백상린의 탄성은 철문이 부서진 것에 대한 놀라움만 있는 게 아니었다. 그는 순수하게 철문을 부순 사내에 대해서 감탄했고, 그를 죽인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한탄했다. ‘비록 잔악했을지 몰라도, 주먹 하나로 장해를 뚫는 그의 행동은 사내의 귀감이다. 길만 잘못 들지 않았다면···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지도 몰랐겠는데.’ 백상린은 곁에 있는 남문수호장 장태호를 내려다보았다. 장태호는 털썩 주저앉아 무릎을 꿇은 채, 남문 입구에 쌓인 쇳덩어리들을 멍청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남문이 부서져 내리다니이이!! 우아아아악!!” 그는 한참동안 비명을 질렀다. 무릎 꿇은 그대로 상체가 넘어가는 그의 모습은 정말로 남문을 충심으로 수호한 명장의 모습을 방불케 했으나······. ‘진짜 명장이었다면 저 꼴은 안 되지.’ 백상린은 이번 새벽, 단 10분조차 소요되지 않고 도입부를 넘어 결말 부분까지 도달한 이번 사건에 대해 규연이 올 때까지의 짧은 시간을 투자해 생각해보았다. 지단에 온 괴문서는 단 하나의 정의맹도라도 남문에 보내기 위한 술책이었다. 남문의 수문장의 성격까지 계산해서, 남문의 경비를 허술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정의맹도를 유인하는 것은 남문의 정 반대인 북문으로 향하는 가짜광마. 백상린의 걸음은 쌓인 쇳덩어리들을 향하고 있었다. ‘술법을 통해 광마로 변장한 젊은이는 내게 제압당하자마자 기화산氣化酸, 몸을 기체로 녹여버리는 독한 약물을 스스로에게 뿌려 자신의 정체를 숨겼다. 어째서 그렇게까지 하는 거지? 거기에 무슨 정의가 있다고······.’ 남문이 부서지며 쌓인 쇳덩어리들 앞에 선 그는 분주히 쇳덩어리를 나르며 정리하는 관병이 다가오자 그를 멈춰 세우며 물었다. “여기에서 일어났던 상황을 아는 사람··· 있습니까?” 백상린은 발에 밟히는 처참한 관병의 시체를 보고 기대하지 않고 있었지만 뜻밖에도 목격자가 있다는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백상린은 친절한 관병의 안내를 따라 초소 안으로 들어갔다. 거기에는 부상자들이 연금술사의 치료를 받고 있었다. 부상당한 사람들이 흘리는 신음소리가 귀를 간지럽게 하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남쪽 관문에서 일어난 모든 사태를 관망한 목격자는 허벅지에 큰 부상을 입고 침상에 누워있었다. 그는 순순히 말을 털어놓았다. “난데없이 관문이 열렸다네, 그러자 나를 포함한 문을 지키던 병사들은 당황했지. 그 순간, 광마와 그의 종자가 나타나더니 우리들을 공격하고 바깥으로 나가버렸지. 그 후, 문을 고정시키던 쇠사슬이 풀려나가며 철문이 떨어졌고, 그 뒤 초소에서 한 사람의 권사가 튀어나와 관문에 서더니 외치더군. ‘광마를 잡으려 하는 자, 오라! 그리고 내 시체를 넘어라!’ 관병들은 그를 공격했지, 그러나··· 결과는 때죽음이었어. 광마에게 미리 다쳐 한 구석에 처박히지 않았더라면, 나도 죽었겠지. 그리고 34세 쯤 먹었을까, 젊은 청년이 그를 향해 다가가더군. 말소리는 멀어서 듣지 못했어. 그러더니 돌연 청년이 기습적으로 그의 심장을 때렸고, 또 때렸지. 그의 몸이 산산조각남과 동시에 철문이 크게 진동했어, 그래도 부서지지 않자, 또 다시 주먹을 휘둘렀고, 금이 가더군. 어느 순간, 몇 자루의 철검이 날아오더니 청년의 등을 꿰뚫고 가슴 앞까지 삐죽 튀어나왔어. 그리고 철문이 무너졌지.” “방금··· 광마와 그 종자가 철문 밖을 나갔다 하셨습니까?” “음! 아, 나갔어. 그러고 보니··· 철문을 부순 청년이 종자랑 똑같이 생겼더군. 쌍둥이였을까?” 백상린은 신형을 돌려세웠다. 이제 보니 규연이 찾아올 걸 기다리는 게 아니라, 그 자신이 찾아가야 할 정도로 급한 사안이었다. 광마의 행적이 발견된 것이다. “이봐! 보답은 주지 않는 거야?” 병사가 백상린을 불러 세웠다. 백상린의 얼굴에 냉소가 감돌았다. “제 목숨을 구하기 위해 동료의 죽음을 내버려둔체, 자신의 몸을 자해한 비겁자에겐 보답 같은 게 필요 있나? 하지만 네가 산 덕분에 좋은 정보를 얻었으니, 치료비는 무료로 해주지.” 공무활동을 하다 다친 상처는 원래 무료다. 하지만 자해는 다르다. 병사의 얼굴이 굳었다. 백상린의 말이 사실이었다. 수강의 광풍같은 팔황권에 두려움을 느껴 도망친 다음, 모든 상황이 종료되자 변명을 위해 검으로 자신의 허벅지를 찌른 것이었다. 하지만 백상린의 눈에 걸린 게 실수였다. 역수로 잡은 칼날에 만들어진 상처 정도는 가볍게 파악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백상린은 그에게 등을 보이며 규연을 찾았다. 규연은 백상린의 말에 정의맹도와 신강에 잠자고 있는 무림인들을 소집해 광마의 추적에 나섰다. 이제 신강사태는 결말이 아닌 새로운 도입부로 접어 들어가고 있었다. 삐이이이- 귀를 멍하게 하는 소음이 울렸다. 두 번째라 그런지 친숙했다. 눈을 뜨는 순간, 막혔던 모든 것이 탁 풀리는 상쾌한 기분이 된다. 인위적인 상쾌함. 이질적인 감각에 오히려 눈살을 찌푸린다. 이 상쾌함은 뇌 속까지 모조리 비워버릴 정도로 강렬하다. 상쾌함도 도가 심한 것은 좋지 않았다. 눈을 뜨는 순간, 높다란 천장이 보였다. 친숙한 회색빛 벽지가 그를 맞이했다. 성우는 슬립머신에 누운 채로 자신의 가슴을 만졌다. 구멍은 없다. 물론 새빨간 칼날도. “휴우우우···.” 한숨이 토해졌다. “꿈··· 이었나.” 언젠가 해본 소리가 또 나왔다. 꿈이라기엔 너무나 리얼한 영상이 눈앞을 스쳐지나갔다. 유라 씨와의 만남, 강간당할 뻔한 자매를 구해준 일, 정의물 매니아 같은 격세랑 이윤강, 형천에서의 초상화를 그렸던 일, 유라 씨의 추상화를 그린 일, 지극검 유철산과의 내기, 얼음의 마녀 아리야와 액체인간, 수많은 사람이 죽어간 선상, 온천, 유라 씨의 인간적인 모습, 은린에 뒤덮인 사람들을 살해한 일. 그리고······ “나를 속인··· 사람들.” 손으로 눈을 가리며 자조했다. 속아버렸다. 너무나 쉽게 속아버렸다. 철저하게 이용당해버렸단 말이다! 이용당하지 않기 위해, 지금까지 해왔던 일은 무엇이었나. 자신을 숨기고, 자신의 감정을 억류하며, 자신의 충동을 짓밟는다! 인간이라기보다 청소년으로써 당연히 누려야 할 것들 중 일부를 포기하면서까지 추구했던 것이 무의미해져버린다. 꿈이라기엔 너무나 사실적인 영상과, 뚜렷이 잔류한 기억이 성우를 더욱 화나게 했다. 현실이라면 이처럼 맥없이 당하지는 않았을 거라는 변명이 자신도 모르게 가슴 속에서 일어났기에 더욱 자학한다. 어떤 상황에서든, 어떤 조건에서든 살아남는 인간이 되어야 했다. 그게 외할아버지의 목표였고, 성우의 신념이었다. “그만··· 그만 생각하자.” 성우는 몸을 일으키려 했다. 오늘의 식사당번은 자신이었다. 방금 전은 먼 나라의 이야기일 뿐이다. 꿈에서 일어난 일일 뿐이다. 그런데··· 툭- “···제길.” 밤사이, 부적처럼 주머니에 넣었던 데져트 이글과 44매그넘을 꺼내던 중, 성우는 평소에 잘 하지 않던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그의 눈에서 방울방울 눈물이 떨어져 나왔다. 눈물이 떨어져 매그넘이 있어야 할 위치에 대신 놓여진, 장식총裝飾銃을 내려다본다. 방아쇠를 당기면 필히 생명을 살상한다는 마탄을 발사하여 마총이라 이름 붙여진, 그 총을 하염없는 눈으로 보고만 있었다. 눈물이 앞을 가린다. “아아아아······!” 그건··· 또 다른 현실이었다. 다만 성우는 무표정한 소녀를 떠올리며 입을 들썩일 뿐이었다. 약간의 억울함, 약간의 원망, 약간의 증오, 약간의 애정. 그리고 약간의··· 그리움. 그들이 브랜딩되어 칵테일처럼 하나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유라···!” chapter 11, Prepare ―――――He moves, because he realized. 성우는 유라를 떠올리면서 흘린 눈물을 이해할 수 없었다. 어째서 눈물이 나온단 말인가? 알 수 없었다. 머릿속을 휘몰아치는 상념 중에도 성우는 본분을 잊지 않고 방문을 열었다. ‘아침식사를··· 만들어야지.’ 6시가 되어있었다. 여동생의 분노는 언제가 되어도 감당할 수 없었다. ‘그래··· 이게 현실이지.’ 성우는 시원한 물로 상념을 씻어내듯 샤워를 한 뒤, 옷을 갈아입었다. 상념을 씻어내기 위한 샤워였으나, 꿈속에서 꾼, 꿈이라 할까, 약에 취해 잠들었을 때, 동생 대신 유라 씨가 보였던 그 꿈처럼, 행동해버리고 말았다. 데자뷰가 다시 일어날 뻔했지만, 자해수준까지 의심해볼 정도로 스스로의 머리를 벽에 박으니, 결국 괜찮아졌다. 시간이 지난 지금, 이제 꿈이라고 치부할 수 없다. 통기경과 마혈균의 부작용이 그대로 따라온 것인지, 마음만 먹으면 피부 9센티미터 앞에 떨어지는 물방울의 수도 포착할 수 있었다. “피할 수··· 있잖아.” 꿈과는 다른 한 마디와 그 한 마디가 뜻하는 행동에 의해 데자뷰는 파괴되었다. 옷을 갈아입고 나온 성우를 기다리는 것은 뜻밖에도 식재료가 아닌 완성된 식사였다. 주방 앞에는 그의 어머니가 앞치마를 두르고 양배추를 썰고 있었다. 드래싱 소스가 그 옆으로 늘어졌으니 샐러드를 만든 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엄마? 웬일입니까?” “보면 알잖아, 아들님? 어머님은 식사 준비 중이란다.” 성우의 어머니, 유현정은 아들의 접근을 진즉부터 눈치 챘는지, 뒤도 안 돌아보고 말했다. ‘그러니까 그게 난데없는 일이란 말입니다.’ 그녀가 차린 식사를 먹어본 지도 3년 정도 지난 것으로 알고 있다. 3년이나 지난 지금에서야 어머니로서의 본분을 하다니, 이상하지 않을 리 없잖은가. 성우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의자에 앉았다. 식탁 위에는 포크커틀릿, 크림스프, 프랑스 바게트, 브로콜리, 등등 양식에 가깝게 준비되어있었다. 물론 한국인이 어느 때나 꺼내는 밥 역시 소량이지만 놓여 있었다. 중간, 바게트 옆에 생야채를 가득 담은 샐러드를 놓는 것으로 식사준비는 끝. 유현정은 앞치마를 뱅글뱅글 손안에서 돌리다가 주먹을 감싸듯 휘감겨 덩어리가 되자 한구석에 집어던졌다. “요즘 학교에 무슨 일 없니?” 성우 맞은 편 식탁에 앉으며 물어오자 성우는 고개를 얌전히 저었다. 일이야 많지만 그런 건 일상수준에서 충분히 일어날 만한 변수였다. 일상생활 중에 생긴 일··· 슬립머신을 제외하곤 아무 것도······. ‘카타콤부스가 있었지.’ 그리고는 없다. 정말로. “흐음, 그래? 그렇다면 안타깝고.” “···대사가 틀렸어요.” “뭐, 상관없지. 성하나 깨워서 단란한 아침식사나 해야겠다!” 그녀는 곧바로 일어나더니 기지개를 크게 키우며 곧장 성하의 방으로 달려갔다. 곧이어 뾰족한 비명과 히스테리가 가득한 소성이 울렸고 그를 비웃는 마녀의 웃음소리가 일어나 귀를 간지럽게 했다. 그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어느새 현실감에 만족하게 되었다. 그래. 지금은. 그러나 머릿속 한구석에서는 계속적으로 선혈이 튀어 오르고 있다. 이름 끝마다 씨, 를 붙이며 존대했던 그녀의 목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아휴, 하여간 우리 엄마라는 인종은 이해할 수 없어! 난데없이 아침식사를 자기 맘대로 차리더니, 밥 식는다고 딸에게 점핑 엘보 어택를 후릴 건 뭐야?” 성하는 지하철을 기다리며 성우을 향해 투덜거렸다. 그녀의 오른손은 연신 배를 쓰다듬고 있었다. 그녀의 어머니 되는 사람이 침대에 곤히 누워 자고 있는 그녀의 복부를 몸을 날려 팔꿈치로 내리 찍어버린 탓이다. 옷 내부에는 벌겋게 부어있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복부는 쉽게 붓는 곳이 아니다. “굳은살이라도 생기면 엄마 책임이야!” “어, 그래.” “대답이 왜 그 따위야?” 성우의 멍한 답변에 성하는 짜증을 냈다. 하지만 성우는 그녀의 심경변화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문득, 멀리서부터 피비린내가 달려오기 시작했다. 성우는 섬칫하여 그 방향에 시선을 돌렸다. 아무 것도 없었다. 다만, 지하철 한 대가 조용한 소리를 내며 정착할 뿐. 성우는 지하철에서 풍기는 피비린내에 눈썹을 찌푸리며 걸음을 옮겼다. 성하는 아무렇지도 않게 평소대로 산뜻하게 몸을 실었다. ‘정부도··· 무책임하군. 아직도 제대로 청소하지 못한 거야?’ 대량 살인사건이 일어난 그 열차를 피비린내와 각종 흔적제거하고 정규운행시킨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란 말은 어폐가 있었다. 바로 24시간 전에 일어난 사건이었다. 17호선 테러사건은 그런 단어를 쓰기에는 사람들의 의식 속에 너무 뚜렷이 남아있는 사건이다. 꿈일지, 현실일지 모르는 이상한 세계에서 한 달여의 생활은, 시간감각을 일부 앗아간 것이다. 통기경과 마혈균으로 상승된 감각을 가지게 된 성우에게는 고역이 아닐 수 없었지만 그것도 잠시, 피비린내는 너무도 빨리 익숙해졌다. 이미 범인이라면 상상도 하지 못할 혈전을 넘나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경험은, 성우를 세상에 더욱 더 이질적인 존재로 만들었다. “오, 마이 프랜드! 썩을! 내 얘기 좀 들어봐! 어제 말이야, 끝내주는 기사를 써냈는데 말이야, 우 젠장! 괴상망측한 바이러스로 모든 게 봉인 당했다고! 우어어어어어!” ‘오랜만에’ 학급에 들어오자 역시 오랜만인 악우, 영우를 만날 수 있었다. 성우는 그가 반갑기도 했지만, 아직도 머리내부를 휘몰아치는 상념이 있어 귀찮게만 느껴졌다.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몸을 비틀어 빠르게 영우의 옆구리, 간장을 후려쳤다. 퍽-! 가죽 때리는 소리가 시원하게 울리자, 학급 내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그들에게로 돌아갔다. “커허허허헉!!” 영우는 옆구리를 감싸 쥐고 주저앉았다. 헛구역질을 연신해대는 그의 머리 위로 성우의 손이 슬그머니 내려앉았다. “기사는··· 제대로 써야지.” “I··· know··· Good··· shot, you ···best! 우우욱!” 영우는 쥐어짜듯 알 수 없는 소리를 하며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그의 엄지손가락이 자랑스럽게 치켜세워져 있는 건 둘째치고. “보··· 보이지도 않았다!” “보지 않았지만··· 예술적인 음향이었어!” “우오오옷! 멋진 스매애애애쉬이! 유성우 선수, 초절의 악마급 상상기사의 대가 주영우 선수를 멋진 일격으로 KO! 넉다운, 넉다운입니다!” “···가 아니라 드, 들것! 들것!” “그 딴 게 학교에 어딧어!” “그럼 구급차라도!” “소동을 크게 만들 셈이냐!” “그럼 경찰차!” “···네 녀석 뭐야.” 결국 영우는 그냥 냅두자~ 라는 관계자(성우)의 의견에 띠라 기절한 그대로 자신의 책상에 얼굴을 묻었다. 팔을 곱게 포개어 놓은 것이, “이대로 자면 분명히 팔 저리기 쉬운 학교수면법”에 의거하여 만들어져 있어, 누가 봐도 자는 것으로 착각할 것이다. 선생님이 들어와서도 영우는 깨지 않았지만, 선생님은 천사 같은 마음씨와 어제 바이러스 소동의 정보가 있었기에 휴식을 허락했다. 단지 다음 시간에 들어오는 선생이 문제였다. 국사 선생 머신건 최. 전자 학습 시스템을 갖춘 학교에 분필 같은 건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졌는데, 백발백중분필투사신공百發百中粉筆投射神功이라는 과거의 공포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선생무공을 그대로 전승한 사람이었다. 분필 대신 분필 크기의 나무토막을 사용하며, 잠자거나 집중을 안 하는 인간이 있으면 여지없이 날아가는 나무토막에 호된 꼴을 당하게 되는 것이다. 그날 머신건 최에게 걸린 학생은 두 사람이었다. 한 사람은 주영우. 그의 기절은 그 시간까지 계속되고 있었던 것이다. 나무토막이 비조처럼 날았으며 딱딱딱- 하는 맑기 그지없는 소리를 영우의 머리통을 통해내 일궈냈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은 유성우. 그는 멍하게 창문 바깥을 바라보고 있었다. 언제나 멍했지만 수업에 집중하지 않는 경우는 없었기에 머신건 최로서도 의외였지만 이제 반사 신경계의 관할이 되어버린 나무토막 던지기는 그 스스로도 막을 수는 없었다. 성우는 날아오는 나무토막에도 관심 없이 창가만 보고 있었다. 성우의 이마를 후려치는 순간, 나무토막은 어느새 튕겨져 나갔다. 그것은 교묘한 우연으로 머리와 복부를 감싸줘며 일어나는 주영우의 뒤통수에 그대로 직격했다. “쿠헉!” 최 선생이 던진 나무토막보다 훨씬 더 강한 위력의 나무토막에 대한 감상은 그것뿐이었다. -하하하하하 학생들은 웃었다. 최 선생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지금껏 한 발도 빗나간 적 없던 내 나무토막이?’ 최 선생은 고개를 저으며 주영우와 유성우에게 역사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주영우는 어리둥절하며, “지금 국사시간입니까?”라는 질문으로 다시 나무토막을 맞았고, 성우는 교과서에서 되돌아 나온 것 같은 훌륭한 답변으로 무사히 앉을 수 있었다. 웃음바다가 된 교실 중, 웃지 않는 사람이 있었다. 고통에 인상을 쓰는 주영우, 여전히 멍한 유성우. 그리고 유성우의 옆얼굴을 날카롭게 노려보는 류시안이었다. 점심시간. 성우는 아직도 정리되지 않은 문제로 머리가 어지러워지는 것을 느꼈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도 하지 않고 교실을 나왔다. 그들의 시선에는 이유가 있었다. 각 수업마다 들어오는 모든 선생들에게 지적을 받았던 것이다. 피곤한 것도 아니고, 단지 멍하게 푸른 하늘을 쳐다볼 뿐이었다. 그들이 보기에도 유성우는 오늘 정말 이상했다. 그런 그를 따라가는 사람이 있었다. 단지 존재하는 것만으로 주위사람의 시선을 가져가 버리는 소녀. 현성대학부속고등학교에 소속된 모든 사람들은 그녀를 두고 학교삼대미녀, 2학년의 얼음공주라 칭송했다. 성우는 옥상에 올라갔다. 남들이 잘 안 오고, 상쾌하면서도 조용한 곳을 찾다보니 자연스럽게 나온 답이었다. 호흡을 한다.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기 전에, 그곳에서 살아있었다는 것을 느꼈다. 그곳, 그곳도 호흡이 된다. 상쾌하기 짝이 없는 공기가 폐부를 살짝 만지고 내부에서 또아리 틀다가 몸 구석구석으로 퍼지고 이내 배출된다. 성우는 자신의 오른손을 보았다. “관.” 설마··· 하는 기대감과 동시에 뱉어내는 단어. 그 순간 오른손이 뜨거워지며 광선이 피부 위를 달렸다. 광선이 모여 하나의 기하학적 문양이 되었고, 갑작스런 뜨거움은 서서히 익숙해진다. “결국··· 이것도 실상. 신기루 따위의 환상이··· 아닌가.” 그 사실을 인정해버리자 지금까지는 무시했지만, 온전히 존재했던 경체가 또아리를 풀고 몸 구석구석을 돌아 활기를 불러 일으켰다. 인간이 태어났을 때부터 가지고 있었던 힘. 그러나 그것을 개발하는 방법은 이 세계에는 없고, 저 세계에만 있는 그런 힘. 경사를 뽑아 대기를 휘젓고 총경삼권을 차례대로 발출한다. 절삭되는 대기와, 차례대로 터지는 공파음이 성우의 가슴을 더욱 심란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존재한다. 알아, 알고 있고 깨닫고 있다. 나는 인정했다. 그러나 무엇이 한으로 남아서 갑갑하게 만드는 건가.’ 눈앞에 유라를 그린다. 환상. 단지 생존하기 위해, 넘거나 부서야 할 벽으로 보고 전사통시로 그녀의 심장을 꿰뚫었다. 그녀의 잔상이 안개처럼 사라지고, 그 뒤에 존재한 벽을 향해 총경이 돌진했다. 푸카칵-! 강화 콘크리트로 이뤄진 옥상의 벽에 깊은 구멍이 생겼다. 전신이 흥건해질 정도로 땀이 흐르자, 성우는 난간에 몸을 맡겼다. 하늘을 올려다본다. “여기는 맑네요, 유라 씨.” 자신도 모르게 뱉어내는 한 사람의 이름. 감정이 크게 휘몰아친다. 그 순간, 성우는 타오르는 갈증을 느꼈다. 머리가 뜨거워져간다. 더욱 더 세계가 느려진다. ‘제길··· 통기경의 약효가··· 떨어진 건가.’ 다행이 이미 대비책은 세워두었다. 경체를 응용해서 혈류를 효율적으로 보내고, 어지러움의 실질적인 원인이 되는 몸이 받아들이고 남은 모든 뇌파는 경체에 모두 집중한다. 유라가 가르쳐 준 것이 아닌, 오직 성우만의 응용법이었다. 컴퓨터의 정보처리능력상한에 대한 문제점을 자신의 신체에 적용시킨 것일 뿐이다. 위험하지만 가능성이 있는 그의 판단은 결국 옳았다. 두통이 가시고 갈증은 멈춘다. 세계는 다시 가속했으며 약간의 어지러움만 잔류한 채, 몸은 괜찮아진다. 총경을 비롯한 경을 이용한 능력은 사용할 수 없게 되었지만, 이걸로서 괜찮은 것이다. 다만, 아직도 뇌는 얼마든지 가속이 가능해서 정보처리능력은 오히려 상승해 있었다. “누구지?” 성우는 옥상의 난간을 잡은 채로, 말했다. 누군가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에게 다가와 있었던 것이다. 이미 마혈균으로 인한 감각확장으로 은연중에 존재는 파악하게 되었지만 자신에게 용무가 있는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다가온 그녀는 상당히 아름다운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짧고 단정한 단발에 또래에 비해 성숙한 육체는 상당히 매력적일 게 분명했다. 성우는 자신의 기억속에서 얼음공주라는 명칭을 떠올렸다. 이름은 아마··· 정수린鄭水潾이었을 것이다. 가장 뚜렷한 기억은 주영우가 “한 반만 옆으로 갔으면 2-4반의 얼음공주를 바로 옆에서 볼 수 있었을 텐데.”하고 한탄하는 것이었다. 그 외에는 관심이 없었다. “저기··· 할 말이 있어요.” 그녀는 싸늘한 외모에는 조금 어색한, 하지만 그래서 귀여운 결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말해도··· 될까요?” 성우는 호흡을 고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뜻밖의 소리를 듣게 되었다. “저, 당신을 좋아하나 봐요.” “······.” 성우는 어이가 없어 고개를 번쩍 들어 그녀의 수줍은 얼굴을 보았다. 순간, ‘몰카냐? 그런 거냐?’ 하고 주영우의 모습을 찾아보았지만, 아쉽게도 그의 모습은 그림자조차 발견되지 않았다. 발견되지 않자, 단순한 청각의 이상으로 치부하기로 했다. 그러나 몸을 일으키는 그의 머리 위로 단언이 떨어져 내렸다. “좋아해도··· 될까요?” “······!” 성우는 그 순간, 머리가 텅 비어가는 것을 느꼈다. 어째서, 왜, 무슨 일이 있어 그녀가 자신을 좋아하는 것인지는 모른다. 그리고 지금에서 생각나는 것에 그녀가 들어설 자리는 없었다. 단지, 좋아한다, 라는 키워드. 어째서 증오했고, 어째서 그리워했으며, 어째서 안타까워했나. 해답일지는 모른다. 다만, 만나고 싶었다.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자신의 감정을 확인하고 싶었다. 배신의 감정이 더욱 커 그녀를 죽이든. 애정이 더욱 커 그녀를 살리든. 그건 나중 일이었다. 지금은 우선 만나고 싶었다. 성우는 몸을 일으켰다. “고마워요.” 같은 학년인 것을 까맣게 잊고, 경어를 취해 인사했다. 그리고 그의 몸은 그녀의 곁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수린은 사라지는 성우를 보고 안타까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고마워해야 할 사람은··· 저인 걸요.” 양호선생은 자신의 귀걸이 타입의 휴대전화를 받았다. 성우였다. “무슨 일이야?” [저 조퇴할 게요. 선천성 간염이든, 우울증이든, ADIS든, 아무거나 써서 처리해주세요. 담임선생님에게도 말씀 부탁합니다. 그럼 이만.] “어······.” 정말 ‘어’ 란 한 마디의 말조차 뱉기 힘들 정도로 폭풍 같은 전화였다. 양호선생은 한숨을 쉬며 휴대전화를 오프Off로 돌리고 눈앞에 있는 학생에 집중했다. “웬일이지, 이지적인 학생 군?” 이지적인 외모의 소유자, 류시안이 안경테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흔적을··· 찾은 건지도 모르겠어.” 양호선생과의 연결을 끊은 성우는 고서점의 주인이자 의체개발전문가였던 정 노인에게 전화를 연결했다. 그와 동시에 성우는 어느 한 지점으로 향하고 있었다. 안경으로 위장된 나노 컴퓨터가 정 노인과의 통신을 연결했고, 곧 성우의 망막한쪽에 정노인의 모습이 떠올랐다. [성우냐? 무슨 일이라도 생겼느냐?] “아, 부탁이 있어서요.” 성우는 빌딩 숲을 지나 미개발 단지로 향했다. 미개발 단지 한 구석에는 예전 전투기들을 보관했다가, 이제는 차고로 전락해버린 건물들이 늘어서 있었다. 성우는 자신의 스포츠 백에서 카드를 꺼내고 차고에 등록된 일련번호를 맞춰가며 수를 세었다. 13번 째 건물. 성우는 그 건물을 올려다보며 정 노인에게 말했다. “유효사정거리 최소 1000미터에서 정도는 무리없이 나아갈 수 있는 탄환을 발사할 수 있는 저격총, 무개는 8킬로그램 이내로 한 정. 음, 될 수 있으면 장탄수가 4발 이상인 게 좋겠군요.” [누구 암살하려고?] 성우는 그의 말을 부정하며 차고 앞에 달려있는 전자자물쇠에 카드키를 긁었다. “그 다음은 외할아버지의 컬랙션 중에 있을 텐데, HK의 UMP45 커스텀Custom 두 정. 베너리의 M3커스텀 한 정. 그리고 외할아버지가 고안하셨던 부비트랩 세트를 준비해주세요.” [전쟁···이라도 하려는 거냐?] 성우는 자신도 모르게 웃었다. 그럴 지도 모른다는 생각 이전에, 걱정해주는 사람이 있기에 기쁜 것이다. 드르르르륵- 시끄러운 마찰음이 울리면서 셔터가 올라갔다. 몇 년 동안 보지 못했던 차고의 내부가 드러났다. 안은 매캐한 먼지 냄새와는 다르게 단정했다. 한쪽 벽면에는 공구가 크기 순서대로 걸려 있었고, 다른 한쪽 벽면에는 타이어가 쌓여있었다. 그리고 그 한 가운데. “후우, 외할아버지의 취향 같은 건··· 정말 모르겠군요.” 20세기를 풍미했던 국산중형차, 액셀이 서 있었다. 컬러는 블랙. [설마, 차고에 있는 거냐? 나 역시 니 외할애비는 그 비싼 수소엔진과 초고속 모터가 달린 환상의 차체에 돈도 많으면서 하필이면 옛날 똥차의 커버를 덮었는지 모르겠더군. 아아, 문제는 그게 아니라, 왜 갑자기 무기를 준비하라는 건지 물어도 되겠냐?] “대답할 수 없겠습니다만, 굳이 대답하자면 꿈을 좇기 위해서··· 랄까요?” [개폼 잡는 군. 블루 이스트에라도 들어갈 생각이냐? 아서라!] 어느 정도 사실을 밝힌 것이었으나, 상대에게는 다른 의미로 전달 되는 것 같았다. 오해를 풀어줄 필요는 없었기에 미약하게 웃기만 하며 차의 앞문을 열었다. 성우는 액셀의 좌석에 몸을 맡기고 안전벨트를 맸다. 외부와는 다르게 내부는 근현대라 할 수 있을 정도의 첨단장비들로 무장되어있었다. 성우는 시동박스 대신, 존재하는 지문검색기에 엄지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최신기술의 수소엔진이 가지는 특성답게 미세한 소음조차 내지 않고, 액셀의 동체에 모든 에너지가 돌기 시작했다. 계기판이 야광으로 빛나자, 성우는 매뉴얼 변속기를 조작하고 액셀레이터를 밟았다. 액셀이 조용히 차고를 빠져나가 포장 되어있으나 텅 빈, 도로 한 가운데에 섰다. “제가 탄환을 가져올 동안, 준비해주세요. 그리고 될 수 있으면 용봉에 있는 독고 아저씨에게 미리 전화 주셔서 빨리 가져갈 수 있도록 선처해주시면 고맙겠군요.” [후후후, 지독하구나! 알았다, 그 놈에게는 미리 전화하지. 뭔 짓을 해도 좋으니 살아만 다오.] 성우가 탄 액셀은 여느 스포츠 카 못지않은 놀라운 가속으로 시속 130킬로미터의 속도로 전진하기 시작했다. 용봉의 독고 아저씨, 독고지훈은 40대 중년인으로 용봉의 총포상 거리에 있는 가게 중 하나의 주인이었다. 총이 좋아 군대에 자원입대하고, 총의 마력에 빠져 라스베가스까지 건 스미스 수업을 받고 온, 총의 폐인이라 할 만 했다. 외할아버지와의 관계는 조금 특별한 사격훈련교관과 사격훈련생 정도였다. 지금에 와서야 단순한 총기거래 업자일 뿐이지만. 성우가 그의 건 스미스에 왔을 때는 먼저 온 사람이 그와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음?’ 그 중 한 사람은 그도 아는 사람이었다. 지하철의 공안요원. 그녀는 붉은 가죽 자켓과 빛을 반사하는 소재의 몸에 착 달라붙는 바지를 입고 있었다. 그녀의 곁에는 성우 또래의 소녀가 벽에 등을 붙이고 얘기가 끝날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평범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지만, 결코 평범하지 않은 아이였다. ‘전신의체···? 사이보그인가?’ 성우의 시력은 소녀의 눈에서 미묘한 빛을 발견했다. 인공안구의 회로가 내뿜는 불규칙한 빛이었다. 그것 가지고는 사이보그라 단정할 수 없었으나, 호흡수를 보면 인간의 몸이 가지기엔 비정상적이었다. 인간보다 보통 세 배는 느리게 숨을 쉬거나 아예 쉬지 않았다. ‘지금 알아야 할 필요는 없지.’ 대화가 끝났는지. 그들이 문으로 향하고 있었다. 성우는 뒤로 물러섰다가 그들이 나가는 것을 보았다. 우연히 붉은 옷의 공안요원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왜 그래?” “아니, 어딘가에서 본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요, 선배.” 성우 또래의 소녀가 물어오자, 붉은 옷의 여자가 대답했다. 놀랍게도 소녀에게 경칭을 하고 있었다. “후우, 이번 사건은 수수께끼가 많군요. 블루 이스트를 사칭한 테러리스트, 그들을 진압한 사람, 피해자들의 기억상실··· 그리고 해물 스파게티. 다른 건 모르겠는데, 해물 스파게티만큼은 최악이네요. 왜인지는 몰라도 취미 나빠.” “너도 먹었잖아.” 소녀가 웃으며 말하자, 붉은 옷의 여성은 얼굴을 찌푸리며 한숨을 쉰다.. “그리고 토했지만. 후우, 다음 총포상으로 가죠. 불법 총기류 유통망에 대해 알았으니, 다른 곳에서도 정보를 취득해, 조합해봐야 하는데. 귀찮은 일이네요.” “나는 격투전문인데 말이지. 후우우 귀찮아, 너만 가면 안 되는 거야?” “당연!” 그들은 공무원에게는 안 어울리는 새빨간 스포츠카에 탑승하고 다른 곳으로 향했다. 성우는 그들의 대화를 듣고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상관없다. 지금의 그에겐 먼 곳의 이야기일 뿐이었다. 성우가 가게로 들어가자 무언가를 열심히 옮기고 있던 독고지훈은 반색했다. “음, 성우냐? 정 노인에게 들었다. 근데, 너 정말 전쟁이라도 하러 가는 거냐? 난데없이 7.62mm x 59mm 텅스텐 카바이트탄에 45 ACP. 산탄, 등을 준비해달라니···” “그보다, 물건은?” “아아, 지금 꺼내고 있어. 옛날에 비해 탄피가 가벼워졌지만, 그래도 탄창채로 들면 무겁다는 건 알고 있지?” “7.62밀리는 20개, 45ACP는 500발, 산탄은 30개.” “·······내 말을 똥으로 들었냐? 너 같이 허약한 놈이 들 수나 있겠어?” “응.” 성우는 태연하게 긍정했다. 독고지훈은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성우를 쳐다보다가 고개를 저으며 지하창고에서 다시 한 보따리의 탄약을 가져왔다. “화기에 가까이 대지 말고. 불꽃놀이용으로 삼지도마. 변태는 사용금지인 거 알지? 혹여나 허튼 짓 했다가는 바로 목숨 잃는다고.” “···폭죽인가. 충고, 고마워요.” 독고지훈이 경악하든 말든, 성우는 가볍게 총알뭉치를 들고 가게 밖을 나가 액셀에 실었다. 그리고 책의 무덤 지하로 내려갔다. 정 노인은 총화기를 마른 수건으로 닦아내고 있었다. “왔냐.” “준비는요?” “완벽하지.” 정 노인은 씁쓸함을 감추지 않고 대답했다. 성우는 정 노인 앞에 놓인 총기들을 살펴보았다. H&K UMP45, 45구경의 총알을 발사하는 기관단총으로 그 위력은 45구경의 파워를 최대한 살렸다고 할 수 있었다. 게다가 재질 자체를 바꾼 커스텀 버전이라 0.3킬로그램 정도 중량을 낮췄고, 그에 반비례해 내구력은 10% 정도 높아졌다. 총 장탄 수는 25발이었다. 그런 괴물 기관단총이 두 정이나 있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M3, 과거 미국 SWAT를 비롯한 각국 경찰기관에서 사용했던 진압용 산탄총으로 그 성능은 아직까지도 불멸이라 한다. 커스텀 버전의 장탄 수는 6발로, 과거보다 1발정도 더 넣을 수 있었다. “PSG-1? 이런 게 있었나요?” H&K의 PSG-1은 20세기 저격총의 왕자라고 부르는 총이었으나, 그 높은 가격에 의해 결국 국가기관의 채택은 받지 못한 불우의 명작이었다. 하지만 그 당시, 세계에서 가장 정확한 반자동 방식의 저격용 소총이란 명예를 얻었을 만큼 뛰어난 성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1000미터가···.” 그가 알기론 유효사정거리는 300~600미터 정도였다. “어디가 PSG-1이냐? 7.56x51mm NATO탄, 308윈체스터는 써야 PSG-1이겠지. 네 놈 할애비가 멋대로 뜯어고친 것이다. 이래저래 사이보그용이지. 그 덕분에 최소유효거리는 1킬로미터를 넘었다. 극악의 텅스텐 카바이트 탄을 쓰는 덕분이지.” PSG-1 역시 커스텀인 셈이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오스트리아 슈타이어사의 IWS2000의 불펍식 발사장치의 원리를 차용해, 더욱 강화된 위력을 낼 수 있는 것이다. 600미터까지 내다볼 수 있던 망원렌즈 역시 업그레이드되어 1킬로미터까지 가능해졌으며, 그 중량은 밸런스 조정에 문제로 10킬로 정도였다 8.1킬로였던 전에 비해 오히려 무거워졌다. 하지만 그 성능을 생각하면 충분히 고개를 끄덕일 만한 사항이었다. 성우는 마지막으로 부비트랩 세트를 보았다. 의료상자 같이 생긴 상자였다. 상자 안에는 엄지손가락만한 캡슐이 있었다. 캡슐을 양쪽으로 잡아당기고 비트니 붉은 빛이 일어나 깜박였다. 이대로 사람의 말소리 정도 되는 40데시벨 이상의 소리를 받거나, 50(J) 이상의 진동에너지를 받으면 터지도록 설정할 수 있다. 폭발력은 작은 크기에 비해 굉장한 것으로 방원 3미터를 날려버릴 수 있을 정도였다. 성우는 다시 캡슐을 닫았다. 떨리는 눈으로 성우를 보고 있던 정 노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 놈아! 노인 심장마비로 죽일 일 있어!” “······아!” 성우는 그제야 정 노인의 존재를 눈치 챘다는 듯 탄성을 터트렸다. “······네 놈, 나 같은 건 신경 안 쓴다 이거냐?” 성우는 모른 척 하며, 정 노인이 준비한 압축 팩을 불어 총기를 챙겨 담았다. 정 노인은 그런 성우를 괘씸한 눈으로 보다가, 무슨 생각인지 옆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나왔을 때, 정노인의 손에는 성우의 몸 사이즈에 알맞은 조끼가 들려있었다. 주머니가 많은 것을 보니 서바이벌용인 듯 했다. 정 노인은 성우의 머리 위에 조끼를 던졌다. “입어라. 사이보그의 내부강화용 피질, 케블라-C타입으로 만들어진 방탄조끼다. 여타 방탄조끼와 다른 점은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한다.” “아!” 완전히 까먹고 있었다. 방탄조끼에 대해서는, 총격전을 벌이러가는 게 아니라 필요 없을 것 같아도, 웬만한 총알이나, 칼날에도 쉽게 뚫리지 않는 방탄조끼 자체의 방어력은 상당한 이점으로 작용할 것이다. “고맙습니다.” “무슨 일을 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아까도 말했듯 살아만 와다오. 늙은이는 몰라도, 너희 가족을 걱정하게 하진 마라.” 정 노인의 기원을 뒤로 했다. 성우는 총기가 가득 든 압축팩을 들고 정노인의 고서점을 나섰다. 슬립머신에 들어가기 전, 성우는 슬립머신의 경험을 살려 법칙을 정의했다. 법칙 1. 죽으면 현실로 돌아올 수 있다. 간단한 것 같아도 중요한 사항이었다. 평생 그곳에 있을 필요는 없었다. 법칙 2. 3~4시간의 주기를 가지고 백업된다. 이것 역시 생명활동에 중요한 사항이었다. 데져트 이글의 탄창이 비어도 몇 시간 후면 다시 가득 채워진다. 어째서인지는 몰라도 총기를 쉽게 버려서는 안 될 것 같았다. 게다가 몸 자체도 백업이라는 게 있어, 어떠한 상처도 그 시간만 지나면 슬립머신에 들어갔던 그 상태로 돌아간다. 법칙 3. 기억은 그대로 남는다. 그리 중요한 건 아닐 지라도, 슬립머신이라는 접점을 가진 현실과 저쪽 세계에 있어선 기억이라는 존재 자체가 중요했다. 법칙 4. 습득물은 어떤 법칙에 의해 현실로 가져올 수 있다. 역시 원인은 모른다. 모든 것을 가져올 수는 없고, 어떤 법칙을 통해서만이 가져올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마혈균과 통기경의 약효. 맥동하는 경체. 단련된 감각과 같은 몸에 작용하는 것들은 확실히 이쪽으로 전승되어 넘어온다. 하지만 생명줄이나 옷 위에 걸친 장포, 신발이나 통기경을 담은 목곽 등은 넘어오지 않았다. 이 일련의 것만 보면 경험한 것은 넘어오고 물건 등은 넘어오지 않는다는 법칙으로 보일 것이다. 하지만 마총이 있다. “······.” 물론 지금 당장 밝힐 필요가 있는 법칙은 아니다. 그러나 성우는 생명줄이라 불리는 피리가 필요했다. 경체로 뇌의 폭주를 어느 정도 조절할 수는 있어도 일정한 형태를 가지고 조절해줄 수 있어야했다. “실마리는··· 현재로선 보이지 않아.” 짐작 가는 게 있긴 하지만, 확신할 수는 없었다. “아무튼, 지금은 어떻게 포위망을 돌파하는 것부터 생각해야지.” 그러다가 죽어도··· 그래서 만날 수 없게 되어도··· 괜찮다. ‘다시 가면 되지.’ 그곳에서의 그는 불사신. 끔찍한 고통이 닥쳐와도, 마인드 컨트롤로 어느 정도 견딜 수 있게 된 그에게 있어 ‘부활이 기다리고 있는 죽음’은 조금 더 끔찍한 고통 그 외에는 아니었다. 성우는 움직이기 편한 운동화와 검은색으로 통일 된 복장을 선택했다. 주머니가 많은 T셔츠와 주머니가 많은 헐렁한 바지였다. 그 위로 흑색 방탄조끼가 덮어졌다. 원래는 밝은 색이어야 했을 그것은 성우에 의도 하에 착색료로 검어진 것이다. 법칙 5. 다시 그곳으로 들어갔을 경우, 죽은 장소에서 깨어난다. 그것도 그리 많은 시간이 지나지 않은 때에 깨어날 것이다. 그 때는 새벽 1시에서 그리 많은 시간이 지나지 않은 심야. 어두운 색 계통이어야 무림인들의 눈에 띄지 않을 것이다. 모든 무기를 각 부분에 착용한 성우는 슬립머신에 몸을 뉘었다. 그리고······ 잠이 들었다. [편안한 세계 속으로 어서 오십시오] 거짓말이라 생각하며, 성우는 깊은 잠속에 빠졌다. 눈을 뜨자 어둠이었다. 등에는 무게감이 느껴졌다. 배낭Back Pack을 들고 와서 현실에서도 무거웠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넘은 중량감이었다. ‘어떻게 된 거지?’ 말소리가 들려왔다. 현실에서 들을 수 있는 언어가 아니었다. “어이, 그 쪽 잘 들어! 자, 하나 둘 하면 간다, 하나 둘!” 등을 누르던 무언가가 사라졌다. 동시에 성우는 빛을 볼 수 있었다. 그것은 수많은 사람들이 켜놓은 등불들. 부서진 남문을 정리하려고 남겨진 정의맹도들과 관병들이 합심해서 철조각들을 옮기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성우를 누르고 있던 철조각이 들린 것이다. “아아! 과, 광마의 종자다!” 성우를 알아본 정의맹도 중 하나가 잡고 있던 철조각까지 떨어트리며 그렇게 외치자, 많은 사람들이 못 미더워하면서도 자신의 병장기를 꺼내 들어 성우를 향해 다가가기 시작했다. 성우는 그들이 다가와도 가만히 있었다. 정확히는 가만히 앉은 채로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던 중, 익숙한 물건이 땅바닥을 구르고 있는 게 보였다. 생명줄이었다. 아니, 생명줄뿐만이 아니라 통기경을 담은 목곽까지 보였다. 그리고 자신이 입었던 장포라던가 하는 것들까지. 성우는 눈앞에 있는 그것들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 순간 경각심을 가지고 접근하려고 하던 정의맹도들이 일제히 성우를 향해 병장기를 쏟아내었다. 성우는 허리에 미리 걸어두었던 UMP45, 기관단총 두 정을 양 손에 각각 하나 씩 잡고, 경으로 몸을 고정시킨 다음, 방아쇠를 당겼다. 드르르르르륵-! 퍼버버벅!! 어둠을 꿰뚫는 수십 발의 섬광. 사람들은 역으로 달려오는 그 섬광들에 놀라기도 전에 고통을 느꼈다. “으아아아악!” “아악!” 순간, 피바다가 되었던 남문 위는 더 많은 피로 덮였다. 그 위로 새로운 단말마와 비명이 함께했다. 45구경의 총알들은 살기를 품고 달려드는 부나방을 여지없이 산산조각 내버렸다. 총을 쏘고 있는 성우의 양손이 각각 바깥쪽으로 나아갔다. 기관단총이 느릿하게 곡선을 그리며 탄창을 비우자, 더 멀리 있던 사람들은 반항조차 하지 못한 채, 죽어나갔다. “···아, 악마!” 누군가가 총탄에 무릎 아래를 잃은 채 땅을 기며 외쳤다. 제일 먼저 성우를 향해 몸을 날려 왔던 검수였다. 성우는 무신경하게 텅 빈 탄창을 배낭에 집어넣고 방탄조끼에 끼워져 있던 탄창을 뽑아 장착했다. 그리고 그 누군가를 향해 총구를 겨눴다. 누군가의 안색은 하얗게 질렸다. “천사라도 자신을 향해 살기를 품으면 상대를 응징합니다.” 드득-! 누군가는 미간을 꿰뚫린 채, 죽어버렸다. 고통은 줄었으나, 사실 그것조차 느낄 새도 없었을 것이다. 성우는 감정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무표정으로 독백했다. “저는 그보다 과하거나 단순하게 처리할 뿐입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결과는 파멸적이었다. 6초. 찰나라고 해도 좋을 시간이지만 그것이 명암을 갈라버렸다. 단 한 순간, 방아쇠가 당겨졌을 뿐인데 탄환이 나아가는 모든 공간의 법칙은 엉망이 되었다. 인간은 순식간에 고깃덩이로 전락하고 살아남은 자들마저 압도적인 공포에 점령당한다. "후우." 비명을 지르며 달아나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짧은 한숨을 흘린 성우는 생명줄과 통기경이 든 목곽을 집었다. 통기경을 씹은 성우는 남문을 통해 바깥을 보았다. 무수한 별빛들이 내려앉고 있는 거대한 숲이 보였다. 맹수들조차 피해가고 싶을 정도로 어두웠다. 혹시 어둠을 살라먹고 자라는 나무들로 이뤄진 숲이 아닐까 공공연하게 말해질 정도라 한다. 성우의 육감엔 방금 짜낸 생피가 땅을 타고 흐르는 이곳보다 더 짙은 더 피비린내가 느껴지는 곳이었다. 성우는 허리에 기관단총을 걸고 그곳을 향해 달려갔다. 유라가 향했을 그곳으로. 혈풍血風이 예상되는 전장戰場으로. chapter 12, Death metal ――――――――Will you survive? 총염과 길항하는 검극. 강철과 비명이 쏟아지는 그곳은 전장. 사냥하고 사냥당할 자의 구분은 무용. 물러설 길은 이미 무너지고 남은 길은 오직 투쟁. *** 신강 남쪽에 위치한 제령산맥 계곡지대. 등불을 앞세워 걸음을 내딛는 사람들이 있었다. “후우, 제길. 정의도 좋지만 좀 쉬면서 할 순 없나?” 정의맹 청운단 소속 제가란은 고개를 푹 숙이며 투덜댔다. 그러면서도 땅 위에 걸음이 방해되는 요소는 없는지 꼭꼭 살폈다. 그게 그가 맡은 역할이었다. 총 100명을 남짓 하는 추격대는 다시 15개 조로 나뉘었다. 한 추격조엔 최소 3명에서 최대 5명의 인원이 들어갔다. 그들은 각각의 역할을 분담했다. 하나는 등불을 들고 사위를 살피고, 하나는 땅을 살피며 하나는 청각에 신경을 집중한다. 사족일지도 모르지만 신호탄은 청각에 신경을 집중한 사람들이 대부분 맡고 있었다. 예외라면 어경 이상의 고수 정도일까. 사실 뒤꽁무니만 잡아내려고 맹렬하게 달리는 추격전은 이미 탐색전이 되어버렸다. 중간에 광마의 흔적이 사라지면서 신강지단주 규연은 천무군 백상린과 의견을 나눠 이 산 어딘가에 숨어있다, 라는 추리를 맞췄다. 고속이동 중에는 아무리 좋은 기술이 있다 하더라도 흔적이 남기 마련이었다. 흔적이 없다는 것은 이 깊고도 넓은 숲속 어딘가에 은밀히 숨어있다는 증거였다. “조용히 해, 안 그래도 귀에 집중해서, 시끄럽단 말이다.” “으우, 수고하쇼.” 잠자코 횃불과 사위를 맡고 있던 사내가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기분 나쁜 숲이로군. 낮에 볼 때는 그렇게 아름다울 수 없었는데 말이야.” 신강을 터전으로 삼고 무술을 수련한지 약 4년, 제령산맥 깊은 곳까지는 가보지 않았어도, 신강에 근접한 남산南山의 경우 매주 한 번씩은 드나드는 곳이었다. 풍광이 수려하고 공기도 맑고 사냥에 적합한 짐승들도 많아, 휴식처로서는 더 없이 안성맞춤이었다. 그러나 오랫동안 살아온 그들로써도 이런 한밤중에 남산을 올라가는 일은 없었다. 한 번쯤은 호기심으로 올라갈 만도 했지만, 그 호기심조차 앗아갈 정도로 압도적인 어둠이 깔리는 곳이 바로 남산이었다. “헛소리 하지 말고 횃불이나 잘 지켜!” 그 순간이었다. 날카로운 한줄기의 바람이 그들 사이를 스쳤다. 그로인해 횃불이 꺼졌다. “······!” 당황조차 제대로 할 세도 없이, 날카로운 기운이 바람의 길을 그대로 따라갔다. 스윽-! 핏- 옷깃 스치는 소리가 난다 싶더니, 단말마조차 뱉어내지 못하고 횃불의 사내와 귀를 기울이던 사내는 목숨을 잃었다. “어으어억······!” 제가란은 자신의 목을 압박하고 있는 가느다랗지만 강인한 감촉에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것을 느꼈다. 어둠이 그의 몸을 먹어갔다. 정신이 어둠에 잠식되었다. 눈물이 자신도 모르게 흘렀다. 압도적인 공포의 원인이 되는 에메랄드처럼 빛나는 광채 한쌍이 한 번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났다. 광채에 붉은빛이 물든다 싶더니 제가란은 정신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무엇을 하고 있죠?” 몽롱한 그의 정신에, 말 그대로 꿈속에서나 들을 만한 선녀의 목소리가 살포시 물어왔다. “광마와 그의 종자를 쫓고 있소.” “몇 명이나?” “제대로 세진 못했지만 전체 약120명, 정의맹 85명, 그 외엔 신강에 있던 공명심에 젖은 무림인들이오.” “그 중 고수라 할만한 자는?” “천무군, 신권수사, 신마정검神魔正劒, 천곤天棍, 제응을 타는 두 비관飛官이 있소.” “······고마워요. 이만 쉬세요.” 우득- 목뼈가 어긋나는 소리와 함께, 제가란의 정신은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유라는 그에게서 시선을 거둔 후, 성우, 아니 성우의 모습을 취하고 있는 현앙에게 말했다. “의미 없는 희생이 되어버렸네요.” “·······이럴 리가, 남문은 상부관원의 허가가 없으면 열 수 없는데··· 관원의 허가가 난다고 해도, 나가는 사람들을 일일이 조사하느라 시간이 걸려야 합니다. 충분히 시간을 벌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이대로라면, 숨겨진 길로 바로 향할 수 없어요.” 그 길은 국가의 극비였다. 타국인들에게 알려졌다간, 그 효용성은 사라지고, 국가 간의 갈등을 가져오는 원인이 될 것이다. “훨씬 더 험한 길을 갈지도 모르지만 절벽지대로 올라가야겠습니다. 도주에 제일 큰 문제는 제응, 그곳의 기류는 제응에 의한 조사가 불가능합니다.” 그곳의 기류를 어찌하기에는 제응은 둘째 치고, 제응을 탄 사람이 문제였다. 아무리 숙련된 조종사라도 그런 기류에는 미리 바람을 읽고 피하는 게 전부였다. 정찰이 가능할 리 없었다. “후우, 그럼 가볼까요.” 유라는 한숨을 쉬고, 주변에 쳤던 기환진을 해제했다. 그들은 술법으로 기척을 감추고 절벽지대로 향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지나간 곳에는 두 구의 시체와 단기간 회복불능의 중상을 입은 사람이 남아있었다. 그러나 어둠에 묻혀 보이지는 않았다. 잠시 후, 장포를 뒤집어 쓴 두 그림자가 그곳에 도착했다. 그 중 하나가 자세를 낮추며 죽은 시체를 살펴봤다. 이내, 일어나며 다른 하나에게 보고했다. “둘 다 일격입니다. 그것도 자신이 죽었는지조차 모를 정도로 빠른 쾌검. 무기는 손바닥 크기의 비수로, 뼈까지 깨끗하게 갈랐습니다.” “흐음, 깨끗하군. 광마, 광마하더니, 이 정도였을 줄이야. 암살자로 취직해도 쓸만하겠는 걸?” “이 남자는 살아있습니다만, 어떡할까요?” “죽여, 상처 정돈 위조할 수 있겠지? 광마에게 일말의 인정이 있다는 것을 보여선 안 되겠지.” 그는 땅바닥을 굴러다니고 있는 신호탄을 손에 들었다. “그리고 이 정도는 해야겠지.” 그는 하늘을 향해 신호탄을 발사했다. 피유우우우우우-! 팡! 무미건조하지만 칠흑 같은 어둠속에서는 그 자체로도 아름다운 백열의 불꽃이 하늘을 수놓았다. 백상린이 봤고, 유라가 봤고, 여타 무림인들이 봤고. 이방인, 성우가 본 불꽃은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흩어졌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의 걸음을 한 곳으로 모으는 중요한 이정표로서, 사람들의 뇌리 속에 잔영으로 오랫동안 남아있을 것이다. 13번째 추격조는 신호탄이 터진 곳을 향해 있는 힘껏 달리고 있는 중이었다. 하나 같이 190센티를 넘는 건장한 체격의 소유자들이었다. 정의맹의 사람이 구성되지 않은 누구 씨의 말따마나 공명심에 젖은 무림인들이었으나, 그 자체로는 상당히 유명한 사람들이었다. 쌍륜오호雙輪五豪. 자신들의 문도인 경운린이 압제강 혈사에 희생되자 광마를 잡기 위해 쌍륜보에서 파견한 여덟 명의 무인 중 다섯이었다. 쌍륜보주의 동생, 호철륜虎轍輪 장하생의 직전제자들로서 그 강함은 문도의 직전제자들보다 떨어진다고는 하지만, 그 협동심은 보주직 전승에 대한 다툼으로 한창 시끄러운 그들보다 월등히 뛰어났다. 응란국의 거대문파인 쌍륜보에서 쌍륜을 별호 앞에 붙이는 것을 허락받았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그들의 능력이 상당함을 알 수 있을 터였다. “아, 씨팔! 늦을 것 같잖아!” “이사형이 변소에서 시간 끄느라 그런 겁니다!” 변비였던 것이다. 무안해진 둘째가 주먹을 들어보였다. “셋째 아그야, 뒈질레?” “그럼 넌 나한테 좀 맞자?” “·······.” 둘째는 조루증에 걸린 그것(?)처럼 시들어버렸다. “그러니까 조용히 하고 뛰기나 해!” 대제자의 말에 다른 사형제들은 고개를 숙이며 후일을 기약하고 있었다. 그 때였다. 탕-! 멀리서 아련하게 울려오는 소리. 그러나 너무나 멀어 그들이 듣기에는 조용한 속삭임 같은 소리였다. 쌔애액- 한줄기의 바람이 대기를 휘감아 흩어버리며 돌진했다. 둘째는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그것’을 보며 그렇게 느꼈었다. 퍽-! 신호탄이 터진 곳을 향해 누구보다도 맹렬하게, 한 마리의 야수처럼 달리던 둘째가 갑자기 일행의 보속步速을 맞추지 못하더니 앞으로 고꾸라졌다. 다른 사형제들이 멈췄다. “음? 또 문제인 거야? 헛곳에다가 정신을 팔고 있으니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는 것도 당연한 거지!” 첫째가 크게 웃자, 다른 사형제들도 웃으며 둘째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상하다. 금방이라도 난처하게 웃으며 일어서 전신에 묻은 흙을 털어내야 할 난폭한 덜렁이 둘째가 웬일인지 일어나지 않았다. 더욱 더 가까이 갔다. 둘째는 일어나지 않았다. 첫째는 일이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끼며 다섯째에게 불을 밝히라고 외쳤다. 그가 횃불을 가지고 있었다. 쌔애액- 퍽-! 첫째는 안 그래도 어둡던 시야가 갑자기 일그러지는 것을 느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조금 더 본 것은 그로서도 차마 끔찍한 광경이라 환상이라 치부했다. 그리고 정신을 잃었다. 셋째는 가죽북 터지는 소리가 울리는 곳으로 돌리는 순간, 얼굴에 튄 기분 나쁜 무언가를 손으로 닦아냈다. 미끌미끌하고 진득한 액체였다. ‘우욱, 둘째 형의 숙취할 때 토한 걸쭉한 액체가 생각나는군.’ 그리고 시선 안에 잡히는 첫째 형이 보였다. 그 순간, 그는 이상한 일이 많이 벌어진다고 느꼈다. 정말 이상하게도 첫째의 그림자에 머리 부분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 그 때 다섯째가 횃불을 켰다. “······아아악!” 남은 사형제들은 두 사형을 바라보며 비명을 질렀다. 하나는 명치를 중심으로 두 조각으로 나뉘어졌다. 각종 장기가 여기저기에 널려있었으며, 대지는 그들 형제의 피로 시뻘겋게 타오르고 있었다. 하나는 머리를 잃었다. 혀가 몸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했다. 상부 두개골이 완전히 나가버린 것이다. 셋째는 손에 흥건한 첫째의 뇌수를 심하게 흔들리는 눈으로 보고 있었다. “누구야··· 누구야! 나와아아아!” 셋째의 절규. 그것은 또 다른 비극으로 이어졌다. 드르르르르륵-! “피해!” 넷째의 외침은 늦었다. 퍼버벅! 파바바박! 먼 곳에서 미약하게 불꽃이 튀는 것을 본 순간, 어둠을 꿰뚫고 날아온 작지만 강렬한 에너지를 가진 그것이 그들, 형제들의 몸을 갈아버렸다. 하나의 그것이 지나갈 때마다 생기는 구멍들, 그 어떤 어둠보다 더 새까만 그것들이 셋째의 이마에서 생겼고, 다섯째의 가슴에서 생겼다. 팔이 어깨채로 날았고, 다리가 산산조각 났다. 머리는 형체를 잃었으며, 내장조차 온전한 형태를 가지는 것을 거부했다. 그 난폭한 힘은 영혼조차 갈갈이 찢어버리는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그들의 형제가 가지고 있던 또 하나의 자신들인 철륜이 부서져나갔다. 푸하아아앗! 짙은 선혈의 그림자가 허공중에 뿌려졌다. 피의 분무가 횃불의 미약한 불씨를 집어삼켰다. 둘째를 부축하려고 그에게로 다가갔던 터라, 무언가의 공격에서 벗어난 넷째는 몸을 숙이고 형제들의 시체에게서 멀어졌다. 평소에도 냉정하다는 평을 받는 그였다. 이 정도 행동은 상식으로 이뤄져야 했다.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모르지만, 무언가의 물리적인 공격에 형제들이 노려졌다는 것을 틀림없었다. 적! 적이 우리들, 곧 자신을 노리고 있다! 섬뜩함에 더욱 몸을 움츠린다. 그 때, 극도화된 그의 청각에 발걸음소리가 들려왔다. 철커덕, 철커덕- 무언가 부딪치는 소리가 연속적으로 울려 퍼졌다. 곧 그는 사형제들의 시체로 다가왔다. 넷째는 등 뒤에 걸린 쌍륜을 최소한의 소리만 내고 빼냈다. “나오시죠.” “······!” 넷째는 그의 말을 들은 순간,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끼면서도 용수철 튕기듯 쏘아지는 몸을 제어할 수 없었다. 그의 신형이 튕기자마자 그의 막대한 경력이 담긴 두 개의 륜이 쏘아졌다. 륜의 톱날이 쌍륜보 근처 야산에서만 나는 야광주철 합금으로 되어있어, 륜이 서로를 교차하며 목표를 향해 날아가는 모습은, 가히 어둠의 장막을 찢는 빛과 같았다. 쉬가아아아악! ‘됐다!’ 복수할 수 있다!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 때, 그의 원수 되는 사람의 양 손이 같은 모양의 무언가를 들었다. 무언가에서부터 불꽃이 튀어나오더니 륜은 연속되는 물리력에 형편없이 튕겨나갔다. 부서지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일까. “다행일리 없잖아!!” 넷째는 손을 뻗어 륜을 회수했다! 다른 형제들은 모르고 있던 그의 숨겨진 경지, 어경이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그는 경사로 연결된 륜을 휘돌렸다. 마치 철퇴처럼 휘두르는 것 같았고, 륜은 부메랑처럼 날아, 원수를 베어나갔다. 그러나 그 순간, 원수의 손에 들린 그것에서 다시 불꽃이 터져 나왔다. 드르르륵-! “·······” 몽롱해져가는 정신, 륜을 조종하던 팔이 날았고, 어깨가 터져나갔으며, 폐가 폭발했다. 거센 충격에 내장출혈이 일어났고, 토혈이 치솟아 올랐다. 그를 향해 날아가던 륜은, 그의 제어를 벗어났으나 그 궤도는 안정적으로 그에게로 고정되어있었다. ‘죽어버려··· 개 같은 원수여.’ 그것이 상념의 끝이었다. 무림인이라도 상체의 반이 날아간 채로는 살 수 없다는 것을 몸으로 증명했다. 성우는 목을 스치는 륜을 빤히 바라보았다. 믿을 수 없겠지만, 성우는 륜의 초당 회전수조차 샐 수 있을 정도로 여유가 있었다. 통기경과 마혈균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다. 목에 닿으려는 순간, 발을 올려 륜의 손잡이를 차고 몸을 낮춘다. 궤도가 틀어진 륜은 한참을 날아가다가 나무 두어 그루를 배고 세 번째 나무둥치에 박혔다. 성우는 다섯 형제들의 비통으로 젖은 대지를 무심히 외면했다. “유라 씨를 쫓는 사람은, 나 혼자로도 충분합니다.” 성우는 원래 그들이 향했어야했던 신호탄이 터진 곳으로 신형을 옮겼다. 소년은 전장을 달렸다. 그 와중 방해되는 사람은 모두 처리했다. 저격총의 스코프와 그의 밝은 눈은 둘이 하나로 원근을 초월하는 마안이 되어 사람들을 찾아냈고, 상대에게 돌연사를 안겨줬다. 혼란은 없었다. 단순히 기술이 뛰어날 뿐인 그의 저격총은 여기서는 마총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반응하기도 전에 머리가 날아갔고, 동료가 그것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그의 머리에 총알이 회오리 구멍을 만들고 있는 중이다. 단말마조차 박탈하는 손가락마디만한 탄환은 또 다시 어둠을 갈랐다. 철컥- “음?” 철컥- “아···.” 성우는 스코프에서 눈을 때고 탄식의 한숨을 쉬었다. 총의 반동을 신경 쓰느라, 탄환이 다 떨어진 것을 파악하지 못했다. 표적은 단 하나 남았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하나가 치명적이었다. “우아아아아악!!” 그는 순간 상황을 파악하고 비명부터 질렀다. 이빨이 상할 정도로 떠는 건 그 다음이었다. 누런 토사물 같은 게 여기저기 널려있는 건 비현실적이라 무시할 수 있었지만, 발아래 굴러다니며 빛나는 안구는 아무리 부정해도 동료의 죽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산 전체가 떨어 울릴 정도는 아니지만, 수련을 쌓은 무인이라면 멀리서도 충분히 들을 만한 소리였다. 그는 급히 횃불을 껐다. “늦었군.” 담담한 소리와 함께 빈 탄창을 빼내고 새 탄창을 끼어 넣는다. 성우는 군용사이보그들만이 이겨낼 수 있다는 저격총의 반동을 받느라 욱씬-거리는 어깨를 주무르며, 자리에서 일어나 저격총을 배낭 사이에 걸었다. “자리에서··· 벗어나야지.” 800미터는 떨어져 있을 그곳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희미한 그림자가 사라지는 게 느껴졌다. 성우는 기관단총을 든 후, 15미터 높이의 절벽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조용히 숲이 만들어낸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백상린은 신호탄이 터진 곳에 있었다. 시체를 가장 먼저 발견한 것은 신마정검 당혁련當赫連이었다. 그는 50대 남짓의 상당한 미남에 검을 세운 것 같은 날카로운 인상이었으나, 무림에서는 광명정대하기로 이름났다. 다만, 그 손속이 부정에는 심히 거칠어 마검이란 불명예스러운 별호가 달렸다고 하는 자였다. 백상린보다 먼저 시체를 부검한 그는 흉수를 광마로 추정했고, 백상린 역시 그게 가장 가능성이 높다는 결론을 내렸다. 조금 뒤, 천곤 배양관盃洋灌이 다가왔다. 그는 2미터 10센티를 넘는 거구에 2미터 길이의 곤을 둘로 분리해서 등에 매고 있었다. 80세가 넘어 보이는 나이에도, 젊은이 보다 더욱더 강건한 신체를 유지하고 있는 그는 하나의 산악과 같아 보였다. 응란제일곤법 대가라는 칭호가 달린 사내다웠다. “어찌된 일이오?” “추적조 중 하나가 광마에게 몰살당했습니다.” 천곤의 물음에 백상린이 정중히 답했다. “그렇다면 이곳을 중심으로 탐색을 해야겠구려.” “네, 하지만 우리가 왔던 곳으로 되돌아갈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이곳에서부터 동남이나 동쪽이란 말이 되겠소.” 당혁련이 의견을 냈다. 다른 게 아니라 동남과 동쪽에는 은신하기에 알맞은 숲이 우거져 있었다. 광마가 바보가 아니라면 눈에 띌만한 곳에 향하지는 않을 것이다. 백상린은 그의 말이 타당하다고 여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실은 그도 이미 그렇게 생각해서 신호탄을 보았을 때부터 규연과 몇 개의 조를 그곳으로 미리 향하게 했다. “그럼 나는 먼저 가겠네.” 천곤 배양관은 동쪽 숲길로 걸음을 옮겼다. “아······ 같이 가시는 편이···!” “되었네! 무리를 지어 쫓아다니는 것도 편치 않은데 일신의 안녕을 위해 자존심을 챙기는 것은 원치 않네!” 천곤은 백상린을 향해 일갈을 날리며 숲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백상린은 아쉽다는 표정과 이해한다는 표정을 동시에 지어보이며 당혁련에게 시선을 돌렸다. “당 소협은?” “천곤 어르신과 동감이오.” - 우아아아아악······! 비명소리가 지나온 길에서부터 들려왔다. 메아리보다 더 희미한 소리였지만, 그들에겐 충분한 청력범위안의 소리였다. 당혁련과 백상린은 서로를 쳐다보았다. 당혁련이 먼저 말했다. “본인이 가겠소.” 백상린은 신음을 흘리며 각각 두 방향으로 번갈아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부탁하오.” 백상린은 동남쪽으로 신형을 날렸고, 당혁련은 다시 왔던 길을 되짚으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무인은 슬금슬금 다가오는 어둠에 저항했다. 어둠을 뿌리치자 이번엔 동료의 처참한 시체가 눈앞에 생생했다. ‘아아아, 저리가!’ 박도를 뽑는다. 투박한 칼날을 앞세워 어둠을 뚫고 전진에 전진. 사실 전진이라는 단어조차 아까울 정도로 형편 서러운 현실에서의 도주였다. 그 순간, 불빛을 발견했다. 희미하게나마 이야기 소리가 들렸다. “아아아! 이봐아아!” 그는 들뜬 목소리로 그들을 불렀다. 일단의 무인들은 달려오는 무인에게 시선을 모았다. 그들은 놀란 표정으로 각자의 병장기를 뽑아 그를 기다렸다. 적이면 베고, 동료면 환영할 뿐이다. “어? 좌채잖아? 그들은 안심하며 좌채라는 이름을 가진 무인을 영접했다. 좌채는 같은 정의맹의 동지라는 게 확인되자 한숨부터 돌렸다. “왜 그러는 거야? 다른 동료는? 설마······?” 불길한 상상을 떠올렸다. 그들은 탐색하고 있는 도중, 비명소리 같은 것을 들은 기억이 있었다. 그의 말에 끔찍한 기억이 떠오른 좌채는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다··· 다 죽었·······!” 쾅-! 순간, 갑작스럽게 울리는 난폭한 총성. 탄피가 튀고, 수십 개의 탄환이 한 면을 향해 흩어졌다. 가로막는 것을 모조리 훑어버리고 전진하는 산탄이었다. 말을 하려던 좌채의 상채가 완전히 날아갔다. 그의 입은 계속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땅에 떨어졌을 때, 그의 입은 벌어진 채, 닫힐 줄 몰랐다. 후드드득- 주홍의 소나기가 내렸다. 붉은 빗방울이 그들의 얼굴을 때렸다. 드르르르르륵-! 그야말로 난데없이 흩어져버리는 좌채의 몸을 멍하니 보고 있던 사람들은 이어서 어둠속에서 날아온 총알들을 맞고 자신의 몸뚱이가 푸줏간에서도 취급하지 않을 싸구려 고깃덩어리가 되는 것을 봐야 했고, 맛봐야 했다. 그들은 신음조차 제대로 흘리지 못했다. “크윽!” 암기를 다루던 무인은 경험을 살려 다른 동료들이 당하는 순간, 피할 수 있었다. 그는 비도를 날려 등불을 끄고 근처에 있는 바위 뒤로 숨었다. 트드드드득-! 바윗돌이 맞는 족족 조각나서 그 자신의 머리위로 튀었다. ‘어떻게 되먹은 기관장치인 거야? 이게 북부사람들이 말하는 총? 이런 게 있다는 건 못 들었다고!’ 그가 토한 불만을 받아들이기라도 한 듯 총알의 소나기가 멈췄다. ‘기회!’ 그와 동시에 그는 총알이 날아온 곳을 노려 비도를 달렸다. 투척무기를 쓰는 그에겐 총알이 날아온 방향을 아는 정도는 쉬웠다. 쉬이이익- 비도는 밑도 끝도 없이, 물속에 잠기듯 숲속으로 빠졌다. ‘맞은 건가?’ 다시 총알이 발사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그렇지만 방심해서는 안 된다. 그 순간, 휙- 바람을 가르고 뭔가가 포물선을 그리며 그가 방패로 삼은 바위 위에 떨어졌다. 툭- “뭐야?” 삐빅- 신비한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붉은 빛을 내는 손가락만한 무언가는 주변의 숲을 뒤덮는 새하얀 섬광을 토해냈다. 쿠와앙―――! 그리고 거의 동시라고 생각될 시간, 섬광에 못지않은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후드드득―― 육편의 우박이 떨어지고 피의 안개가 피어났다. 원래는 바위가 있었던 자리에는 수많은 자갈들과 함께 새까맣게 타진 발목만 남은 시체, 이제는 구운 고깃덩어리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것만이 존재했다. 사방으로 날아간 시체 사이에, 성우가 지나갔다. ‘수류탄으로도 사용이 가능한가.’ 성우는 방탄조끼의 윗주머니에 가득 담겨진 캡슐을 생각하며 중얼거렸다. 샷건과 기관단총으로는 그런 거대한 바위를 깨부수는데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가장 위력이 강한 폭약이 담긴 부비트랩캡슐세트를 열었다. 적당한 데시벨 조정과 진동에너지 조절을 한 후, 던지니 좋은 결과가 나왔다. ‘음?’ 성우는 갑작스럽게 몸을 틀었다. 뭔가가 느껴졌다. ‘기분 탓인가?’ 그가 다시 정해진 방향으로 걸음을 옮기려는 그 때. 힘찬 기합과 함께 분노의 뇌전이 떨어졌다. “이야아아아압!” 격세랑 이윤강은 여여건과 함께 길을 헤매고 있었다. 유라에게 당한 그 일로,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그는 단독으로라도 추적하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보였다. 여여건은 미련한 짓이라고 말하면서도, 결국 옛날처럼 그의 의견에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추적했다. 우선 형천에 도착했다. 왜 그곳에 갔느냐면 단지, 이윤강의 야수적 본능이 그곳으로 이끌고 있었다고, 라고 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 물론 이윤강은 나름대로 이유를 붙이지만, 여여건은 형편없는 설명을 속으로 묵살하고, 본능일 뿐이라고 단정했다. 본능은 기가 막히게도 잘 맞았다. 우연히 들어간 숙소에 들어가서 형식상 초상화를 들이미니, 당장에 보았다는 소리가 나왔다. 그리고 말도 없이 떠났다는 소리를 들었다. 이윤강은 이번엔 신강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유는 전과 동일하다. 물론 이윤강의 변명도 전과 동일하다. 여여건은 그가 신기할 뿐이었다. 그 와중에 압제강 혈사의 이야기를 들었고 상양촌을 방문했다. 텅 빈 사람들의 동공을 일견한 이윤강은 전에 더 없는 분노를 태웠다. 여여건은 상대가 광마라는 사실에 신경 썼지만, 이윤강은 참을 수 없는 행위를 신경 썼다. 여여건의 결사적인 반대에도, 이윤강을 막을 순 없었다. 그렇게 투닥거리는 통에 갈 길을 지체하면서도 결국 신강에 도착할 수 있었다. 밤중 아슬아슬하게 관문을 넘어 여관에 짐을 푸니, 이번에는 신강 전체가 떠들썩해지는 사건이 벌어졌다. 광마의 등장! 남문의 파괴! 그 외, 여러 가지 일이 있어, 정의맹 신강지단의 주도 하에 광마추적대를 꾸린다고 했다. 이윤강이 자원했음은 뻔하기 짝이 없는 일이고 결과는 이 꼴이다. 그들은 길을 헤매고 있었다. “사형, 그러니까 앞 사람을 잘 보라고 했잖습니까.” “알았어, 알았어. 그나저나 귀나 기울이고 있어. 방금 전, 비명소리를 들은 것 같아서 말이야. 시야도 이 모양이니, 청각으로 눈을 대신하기라도 해야지.” “후우, 그러니 누가 마음대로 발길을 돌리래요?” 이번에도 발동한 이윤강의 야수적 본능이, 일행과의 발길을 떨어트렸다. 그렇게 해서 지검문의 추적대에서부터 이탈한 것인데, 또 그랬다. 여여건은 그 다음에 일어날 일을 생각하고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그 때도 이탈한 후, 목표물을 만났다. 그렇다면, 이번에도? ‘설마··· 정령이나 신이 붙은 것도 아닌데, 그런 일이 가능할 수가 있을까?’ 하지만 불안했다. 사실 여기까지 온 것만 해도 특정한 정보원도 없는 데, 우연들이 겹쳐 세지 않고 똑바로 쫓아와버린 것이다. 그 때였다. 갑자기 이윤강이 신형을 멈춰 세웠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한곳을 뚫어지게 노려봤다. 착각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착각이 아닌 것 같았다. 그리고 착각이 아니었다. 번쩍-! 아주 희미하긴 하지만, 불빛이 반짝였다. 그것도 연속적으로! 이윤강은 그런 불빛을 알고 있었다. 딱 한 번 본 것일 뿐이지만, 그만큼 인상이 깊었다. “총염이다.” “네?” 난데없는 그의 말에 여여건은 당황했다. “간다!” 이윤강은 빛을 향해 달렸다. 경이 충만한 그의 육체는 지검문에서는 유철산 다음으로 강인했다. 그리고 신법의 달인인 사혈필의 진전을 일부 잇고 있어, 발만큼은 일대제자들보다 훨씬 빨랐다. 어느 순간, 폭발하듯 빛이 터져나왔다. 쿠와앙―――! 폭음이 시끄럽게 메아리쳤다. 조용히 숲 사이에서 잠을 청하고 있던 뱀조차 놀라 일어설 정도로 커다란 폭음이었다. 이윤강은 신형을 튕겨 단단한 나뭇가지 위로 올라섰다. 그의 신형은 나뭇가지의 탄력을 받아, 더욱 더 빨리 그곳을 향해 나아갔다. 그리고 발견했다. 진한 혈무 사이를 지나가는 그를. 이상한 것을 주렁주렁 몸에 매단, 광마의 종자를. 지난 날, 뼈아픈 패배를 안겨줬던 그들 중 하나를! “이야아아아압!” 이윤강은 독수리가 먹이를 잡아채는 것처럼 몸을 강하시키며, 검을 일직선으로 내리그었다. 뇌전이 떨어지듯, 그의 충만한 경이 담긴 검격이 새하얀 선을 허공에 그리며 상대를 배어갔다. 성우의 반응은 경악, 하지만 표정은 그리 변하지 않았다. 상대의 모습이 포착되었을 때는 이미 여유가 있었다. 마혈균의 저주 아닌 저주와 통기경의 축복 아닌 축복이 공존하는 그에게 기습이란 의미가 없었다. ‘그러나 총알은 다 썼다.’ 바위를 향해 총알을 모두 난사했던 것이다. 불빛이 없으니, 참으로 개념 없이도 쏴버렸다. 빠르게 상황을 판단한 성우는 망설임 없이 손에 들린 기관단총을 상대에게 던지고 곧바로 진각을 취했다. 이윤강은 갑작스럽게 날아온 기관단총에 당황하지 않고 퉁겨내는 그대로 성우를 배어갔다. 그러나 성우는 얌전히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하늘을 찌르는 일권. 전사통시가 달조차 꿰뚫을 듯 매섭게 치솟으며 이윤강의 검을 후려쳤다. 카아아앙―――! 거친 쇳소리가 숲을 갈랐다. “치잇!” 이윤강은 검병을 쥔 손바닥이 찢어지고, 손바닥을 이루는 뼈가 깊은 통증에 제어를 벗어나려하는 것을 느꼈다. 그의 검로는 그것으로 완전히 틀어져, 성우에게서 1미터 정도 떨어진 곳을 때리고 있었다. 이윤강은 착지한 순간, 몸을 팽이처럼 회전시켜, 잔선검의 절예, 잔미랑을 펼쳐내 진공칼날을 성우에게 쏘았다. 그 전에, 성우의 공격이 먼저였다. 휘가가각―! 굶주린 늑대처럼 사납게 돌진해오는 회오리! 성우는 전사통시를 쏜 바로 그 순간부터, 선풍완격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윤강이 착지하자 기막힌 타이밍으로 휘몰아쳐 다가오는 것도 우연이 아니었다. 잔미랑의 진공칼날이 선풍에 먹혔다. 선풍은 그도 모자라 이윤강을 집어삼키려고 거대한 이빨을 벌렸다. 위기가 되자 이윤강의 감청색 눈이 사납게 타올랐다. 그의 몸은 이성이 위기를 느끼기도 전에, 미리 검부터 휘두르고 있었다. 십자검로十字劒路! 단순히 십자의 궤도로 검을 휘두르는 게 아니다. 시작은 거침없는 패도의 기운을 담은 일검을 먼저 휘두르는 것이다. 선풍완격을 찢어내는 은색의 광선, 대기가 비명을 지르며 바람의 파편이 흩어졌다. 파편을 훑고 십자의 마지막 궤도가 돌진한다. 수비 후 공격. 반격일체. 단순한 이치였으나, 찰나라고도 불리는 미약한 시간 안에 벌어지는, 대결이라는 순간 안에선 극히 이루기 힘든 일이었다. 횡으로 휘둘려지는 이윤강의 검은 성우로서도 빠르다고 느껴졌다. 하지만, 성우 역시 시각으로 검을 쫓지 않은 지 이미 오래되었다. 충분히 피할 수 있었다. 다만, 무거운 가방이 행동을 제약했을 뿐이다. 성우는 림보를 하듯 몸을 완전히 뒤로 눕힌 후, 그 자세 그대로 배낭끈을 빠르게 풀어낸 다음, 뒤로 물구나무서듯 몸을 뒤집어 빠르게 자리에서 벗어났다. 이윤강의 횡격橫擊이 스치는 정도로 끝났고, 짐을 벗어던진 성우는 이미 이윤강의 감각반경을 넘어서는 빠르기로 그에게 접근해 있었다. 이윤강은 발등을 밟는 무언가를 느꼈다. 그 순간, 그의 시각은 성우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피해야 되는데······.’ 그리고, 어느 순간, 관자놀이가 타오른다고 느꼈다. 성우가 그의 발을 밟고, 그대로 몸을 휘돌려 그의 관자놀이에 발뒤꿈치 차기를 먹인 것이다. 성우의 양손은 그의 허리춤을 잡고 있었기에, 본능적 전투세포로 무장된 그라도 피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대로 이윤강의 신형이 허물어졌다. 그 순간, 이윤강은 기력을 짜내 몸을 튕겨 성우에게서 멀어져 안전거리를 확보했다. “격세랑··· 이윤강이라 했었지. 당신 같은 사람, 싫지는 않지만, 유라 씨를 쫓는다면 죽일 수밖에 없군요.” 성우는 그로기 상태로 서서히 몸을 가누는 이윤강을 향해 말했다. 반쯤 제정신이 아닌 상태를 뜻하는 보통 그로기와는 달라보였다. 이윤강의 눈빛은 예전 압도적인 위압감을 내던 때와 비슷해보였다. 즉 빡 돌았다는 얘기다. “후우··· 후우··· 후······.” 심호흡이 끝나고 감청색 눈동자에 초점이 사라지는 순간, 그의 신형이 뛰쳐나갔다. 맹수처럼 돌진하는 그였지만, 성우의 반응은 이미 준비되어있었다. 그는 미리 조정했던 캡슐을 꺼내 이윤강을 향해 던졌다. 경사에 둘러싸인 채, 날아가는 캡슐은 이윤강의 회피를 용서치 않고 그를 따라갔다. 이윤강의 시선이 불규칙한 포물선을 그리는 캡슐을 본다. 심장이 급하게 뛰었다. 뇌의 움직임은 정지했다. 경체가 폭풍이 되었다. 기세는 씻은 듯이 사라졌다. 순간, 검이 휘둘려졌다. 서서히 흐르듯 펼쳐지는 검세는 매우 유연했다. 그러나 남은 검영은 주위의 대기를 딱딱하게 굳히고 압축하고 일그러트려, 이윤강 만의 방패로 변화되었다. 그 순간, 붉게 깜박이던 캡슐이 터졌다. 쾅――! 이윤강의 몸이 폭발에 휩싸여 형편없이 수십 미터를 날았다. 그의 신형을 잡는 그림자가 있었다. 여여건이었다. “사형, 정신 차리시오! 사형!” 이윤강은 대답 대신 피를 토했다. 그리고 실실 웃어 보이는 그대로 기절했다. 그의 상태는 최악을 달리고 있었다. 전신에는 언제라도 진물이 흐를 듯 노릇하게 익어버렸다. 무엇보다 내부의 손상이 컸다. 방금 뱃어낸 핏덩이에는 점액질을 내포하고 있는 살점이 있었다. 위장조각이었다. “당신도··· 유라 씨를 쫓습니까?” 성우는 배낭을 메면서 집념이 담긴 질문으로 입을 열었다. 어느새 그의 손에는 기관단총이 들려있었다. 총구는 여여건을 향하고 있다. 여여건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사실, 다친 이윤강만 없었어도 그를 공격했을 것이다. “사형을 치료해야 하오. 부탁이니 보내주시오!” 성우는 씨익 웃었다. 여여건의 입장에선 사악하게 보이는 웃음이었다. 과연, 성우는 방아쇠를 당겼다. 여여건은 눈을 감았다. 철컥― 딱딱한 기계소리가 울렸다. ‘······죽지 않았다?’ “흐음. 러시안 룰렛은 당신들이 이겼군요. 운 좋은 사람은 싫어하지 않습니다. 빨리 이곳에서 떠나버려요. 이 위선僞善이 스스로 증오스러워지기 전에.” 러시안 룰렛은 리볼버에 총알 한 발 넣고 서로에게 돌려가며 방아쇠를 돌리는 게 기본이다. 소총으로 하는 러시안 룰렛은 존재할 수가 없다. 있다면 공포탄을 넣거나, 가장 처음 쏜 사람의 죽음으로 끝날 것이다. 그리고 아예 장난이거나. “고맙소!” 여여건은 성우에게 예를 취한 후, 바로 이윤강을 들쳐 매고 숲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성우는 기관단총의 빈 탄창을 회수하고 새 탄창을 넣었다. 다른 쪽 기관단총 역시 탄창을 갈아치웠다. 찰칵― 기관단총의 탄창이 장착되자마자, 성우는 총을 휘두르듯 한 곳을 향해 조준했다. 그곳으로부터 사람 하나가 작은 등불을 밝히며 걸어 나왔다. “대단해, 대단해. 난데없이 공에 달하는 검막을 펼치다니. 유철산도 상당한 제자를 키웠군. 그리고 자네도 대단해. 검막째로 날려버리는 폭발이라니 과연 북부 연금술!” 날카로운 인상의 젊은이였다. 이곳의 나이로는 40대 중반 정도일까. 성우는 방아쇠를 당겼다. 투두둑! 삼점사로 날아간 총알이 허공을 갈랐다. 순간, 청년의 검이 뽑혔다. 60센티미터의 검신은 새하얀 검광을 내뿜더니 믿을 수 없는 속도로 휘둘리어 총알을 후려쳤다. 칼날은 짧지만 강렬한 쇳소리를 내며 총알을 멀리 튕겨냈다. “싸울 생각 없어! 조언을 해주고 싶은 것뿐이야!” 그런 청년의 외침에도 성우의 조준은 풀리지 않았다. 그러나 청년은 쏘지 않는 것만으로 만족하는 듯 했다. 솔직히 그로써도 그런 게 연속으로 날아오면 곤란했다. 성우가 말없이 응시하고만 있자 그는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정확히 하자면 절벽이었다. “추적에는 하늘을 날아다니는 두 제응의 역할이 지대하지. 저것이 있는 한, 광마의 추적은 순조롭게 이뤄질 거라 보는데, 어떻게 생각하지?” “······후우.” 성우는 총을 내렸다. “하나만 알아두시길. 저는 이용당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리고···.” “그리고?” 성우는 웃었다. 메마르게 입가를 비틀기만 했다. “그리고, 저는 기억력이 좋거든요. 얼굴 기억하는 건, 쉽습니다.” “그런가? 하하, 멋대로 생각해. 이용당했다고 생각하면 언제든 찾아오라고.” 성우는 그의 미묘한 웃음을 지나치고, 높은 절벽을 향해 달렸다. 청년은 좀 더 웃으며 중얼거렸다. “얼굴 따윈··· 의미 없으니까.” 갈래길, 남자가 걸음을 멈췄다. “이만, 헤어져야겠군요. 더 모시지 못한 것, 사죄드립니다.” 남자는 두 손을 공수하고, 무릎을 꿇었다. 여자는 변함없는 무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눈이 흔들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많은 경험이 했음에도 말이다. 둘은 서로 다른 곳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두 남녀는 찢어졌다. 성우는 남산에 존재하는 모든 포인트 중, 가장 높은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여러 가지 조건이 있으니 필연으로 암벽등반이 될 수밖에 없었다. 남보다 빨리 위치를 선점해야 하고, 남에게 들키지 않으며, 더 높은 곳으로 향하는 지름길은 말 그대로 지면에 직각으로 뻗은 암벽밖에 없었던 것이다. 다행이라면 각도가 암벽등반에 편하고, 통기경과 마혈균으로 상승된 감각이 다른 암벽등반전문가보다 통상 3.5배는 빠른 이동을 하게 만들어주었다는 것 정도다. 등에 달린 짐만 아니라면 좀 더 빠르게 움직일 수 있을 정도였다. 그렇게 해서 올라온 절벽 위의 평지. 이곳이라면 상황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산 아래 불빛들의 움직임이 보였다. 나무가 우거져 뚜렷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파악은 할 수 있었다. ‘아마, 저것들이 추적대겠지. 그럼, 제응이 문제로군’ 성우는 저격총을 꺼내들고 스코프에 눈을 가져다 댔다. 다른 손가락으로는 스코프의 배율을 조정했다. 그렇게 몇 분이 지나자, 있어야 할 별빛을 가리며 날아다니는 제응을 발견했다. 하지만 쉽게 맞출 수 없었다. 제응이 거대하기는 해도, 거리가 거리였다. 조금만 흐트러져도, 영 잘못된 곳으로 날아가는 게 원거리 사격이었다. 제응의 속도도 문제였다. 끊임없이 유동하는 새는 정말 형편 좋게 맞출 수 있을 만한 것이 아니었다. 성우는 스코프에서 눈을 때고 윗주머니를 열어 캡슐폭탄을 꺼냈다. 캡슐을 충격조정에서 시간조정으로 맞춰 시한폭탄화 시켰다. 10초 후에 터지도록 조정한 캡슐을 경사에 메달이 빙글빙글 돌렸다. 쥐불놀이하듯 돌리는 이유는 되도록 멀리 던지기 위한 포석이었다. 성우는 여덟을 세었을 때, 경사를 회수해 캡슐을 던졌다. 충분한 원심력을 받은 캡슐은 약 200미터를 날아가다가 터졌다. 콰앙――――! 강렬한 섬광이 하늘에서 퍼져, 숲을 덮쳤다. - 끼이이이이―――! 제응이 갑작스러운 빛살이 눈을 찌르자, 몸부림치며 구슬픈 소리를 토했다. 곧 조종사의 제어에 추락할 위험은 사라졌지만, 모든 위험이 사라진 게 아니었다. 성우는 새가 멈칫거리는 그 순간을 노려 방아쇠를 당겼다. 성우의 눈이 대어진 스코프 안에서 수박처럼 터지는, 조종사의 머리가 보였다. - 끼이이이이이익―――! 귀가 멍해질 정도로 강렬한 울부짖음! ‘이런!’ 생각해보면 하늘을 날고 있는 제응은 두 마리였다. 두 마리 중 한 마리는 저공비행을 하고 있었고, 남은 한 마리는 좀 더 위에서 탐색하고 있었던 것이다. 스코프의 시야한정이 패인이었다. “이 자시이익!” 조종사가 마치 기사들의 랜스 차지처럼 3미터가 넘는 창을 앞세워, 성우를 향해 제응을 돌진시켰다. 제응의 발톱이 대기를 찢었고, 조종사의 창이 밤하늘을 가르며 유성처럼 떨어져 내렸다. 가히 신속神速에 가까운 돌진, 거기에 조종사의 창이 먼저 떨어졌다! 하지만, 사실 높은 하늘에서 절벽으로 도달하는 시간보다, 저격총의 총구가 7센티미터 쯤 올라가는 시간이 훨씬 짧다. 가속력이 어찌 되었든, 반응속도가 어찌 되었든 모든 것을 무시해도 거리의 차는 어떻게 해볼 수 있는 게 아니다. 해볼 수 있다면 그것은 이 세계에 존재하는 신선이나 마법사 정도. 총구가 똑바로 조종사의 미간을 향하고 있다. 그러나 어둠에 가려 그 정체는 알지 못한다.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 따윈 군대에 입대했을 때 이미 버린 것으로 오직 제응을 탔을 때부터 배운 건 적에게로의 돌진밖에 없었다. 방아쇠가 후퇴했다. 총구에서 불꽃이 튀어나왔다. 시퍼런 연기가 피어올랐다. 물론 조종사는 보지 못했다. 그는 날아가는 자신의 파편만이 느껴질 뿐이었다. 시야가 닫혔다. “윽···!” 성우는 스탠드, 즉 서 있는 상태에서 총을 쐈기 때문에 그 반동으로 뒤로 날아갔다. 의도했던 바였다. 그 순간, 그가 있던 자리로 제응이 떨어져 내렸다. 제응은 주인을 잃은 분노인지 계속해서 날개를 펄럭이며 성우를 향해 돌진했다. 성우의 손이 허리로 돌아갔다. 샷건이 뽑혀져 나옴과 동시에 권총처럼 총알을 연달아 뿜어냈다. 정확한 조준이 필요 없는 난사. 돌진해오는 거대한 목표물에는 정확하게 타점을 맞추는 것보다 물량공세가 더 효과적이었다. 쾅― 쾅― 쾅― 쾅― 쾅―! 총성이라기보다 포성. 하지만 소리는 의미 없었다. 어느 누구도 신경 쓰지 않고, 극대화된 집중 안에선 들리지도 않았다. 제응의 머리와 가슴이 모조리 날아가고 남은 부분은 누더기가 되어 지금까지 비축했던 속력 그대로 미끄러지면서 지면을 피로 색칠했다. 성우의 발 앞까지 제응의 시체가 다가왔을 때는, 이미 산탄의 저지력에 속력을 잃은 뒤였다. 성우의 발 앞까지 붉은 길이 개통되어있었다. 누구도 사용하지 않을 길의 개통을 축하하듯, 매끄럽게 바람을 가르고 다녔던 제응의 날개깃털들이 눈송이처럼 떨어져 내렸다. 성우는 그 중 하나를 잡고 깃 부분으로 멍해진 귓구멍을 긁었다. “···조금 아프군.” 총들을 내려놓고 탄창을 재정비했다. 그 뒤, 손목을 주무르고 어깨를 주물렀다. 샷건을 한 손으로 쏘는 일만큼은 하지 않아야 했던 것 같다. 반동만큼은 산탄이 제일인 것 같았다. 경의 도움이 없었다면, 팔의 내구력의 한계는 일찍 도달했을 터였다. 성우처럼 총을 쏴댔다간 뼈가 부서진다는 소리였다. ‘뭐··· 이미 착한 어린이는 아닌 걸.’ 쓸데없는 생각을 마지막으로 성우는 지상의 반응을 살펴봤다. 불빛이 불안하게 흔들리는 것 같았다. 단지 착각일 뿐이겠지만, 동요라는 게 느껴졌다. 성우는 동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의 눈이 가늘어진 것도 그 때였다. 깎아 만든 듯한 절벽지대가 광범위하게 펼쳐져 있는 곳이었다. 숲의 지나는 대부분의 불빛이 그곳을 향해 가고 있었다. ‘저곳인가.’ 성우는 경사를 밧줄삼아 절벽에 고정시키고, 번지점프처럼 몸을 던졌다. 느리게 다가오는 대지에, 몸이 흥분하고 망상이 폭주한다. 이대로 죽으면 투신자살이 되는 건가? 아니, 다시 현실로 돌아갈 뿐. 그래, 다시 살아날 수 있는 거지. 무의미한 장난일 뿐이야. 다만, 유라 씨를 만나지도 못하고 가는 건 억울하잖아? 성우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지상에서 8미터를 남겨두고 그의 몸이 낙하할 때였다. 빠르게 몸을 회전시켜 발로 벽을 후려쳤다. 낙하에너지의 전달이라는 명목이지만, 사실 과학적으로는 무의미한 짓이다. 하지만 거기에 경이라는 신비에너지가 붙으면 조금 다르다. 폭발적인 경의 회수와 방출이 동시에 이뤄지고, 벽의 일부가 무너지며 낙하에너지가 어느 정도 상쇄되었다. 성우는 다시 탄력이 강한 경사를 뽑아 나뭇가지에 감고, 타잔처럼 지면에 내려섰다. 턱―! 구르르르르― 물론 몇 바퀴 구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여력은 충분히 쌨다. 성우는 비명을 지르는 몸을 경체로 마사지하며 몸을 적신 흙먼지를 털었다. 그 다음은 배낭점검이었다. 다행이 파손된 것은 없었다. “으음, 그럼··· 가볼까.” 흙먼지를 털듯 불길한 예감을 털어내며 걸음을 빨리했다. “하, 하, 하아, 하아, 읏!” 달린다, 목적지를 향해 달리고 달려서 안전이라는 한 가지 단어를 위하여 총력을 하체에 집중시킨다. 몸에 착 달라붙는 소재의 옷을 입은 그녀는 지나온 길을 돌아보았다. 얼굴에 흐르는 땀방울이 그녀의 비틀리는 눈가에 맺혔다. 단 2시간 남짓한 시간이 흘렀을 뿐이지만, 계속되는 긴장 속에 이동하느라 체력의 소모는 컸다. 결국 잠시 망설임 끝에 거대한 고목에 등을 대고 숨을 골랐다. 그러나. 그녀를 쫓는 사람들은 표적에게 인정을 주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피이이이이- 팡! 신호탄이 터지며, 백열하는 빛이 그녀를 덮쳤다. “이런··· 쫓아왔나.” 분명 자신을 비추는 조명인데도, 그녀는 묘하게도 태연했다. 다른 일행과 갈라지고 오직 홀로. 이제는 믿을 것도, 믿을 자도 없다. 다만, 쏟아져오는 검극에 길항하여, 추적자들과의 경합을 벌이는 것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그녀의 시야 안에 횃불과 등불이 하나 씩 떠올랐다. 그것들은 점점 크기를 키워갔으며 이내, 수십 자루의 병장기를 비췄다. “쉽게··· 잡혀줄 순 없어.”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어느새 그녀의 수중에는 다섯 장의 부적이 들려있었다. 부적이 일렬로 부채처럼 펴졌다. “화염의 방출, 넓고 강렬하게.[放炎廣播].” 신비하게 두 가지 목소리가 한꺼번에 일어났다. 하나의 성대에서 일어나는 두 개의 목소리는 부적 안에 담긴 각인을 일깨웠고, 주술만의 특수한 법칙에 일어나는 현상을 현실화시킨다. “합!” 일직선으로 날아가는 부적들은 섬광이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빛줄기를 남겼다. 어느새 횃불들의 군집에 도착한 부적들은 일제히 자신의 몸에 수백 배는 되는 거대한 화염을 토해놓기 시작했다. 과학적으로는 있을 수 없는 화염의 방출! 그 결과 나무에 불이 붙기 시작하더니, 이내 다른 나무들을 태웠다. 따닥- 따닥- 하는 장작불 때는 소리가 숲 안을 시끄럽게 했다. 어둠을 살라먹는 불꽃이 점점 몸을 키워가며 기승을 부렸다. “으으윽! 제기랄!” “빨리 후퇴해! 다른 길을 택한다!” 사람들의 아우성이 들려오자, 그녀는 희미한 미소를 입가에 띠웠다. 성공이었다. 이제 시간을 더 벌 수 있는 것이다. ‘적어도 10분 정도일까······ 그 정도면 충분하지.’ 그녀는 허리에 걸린 보자기에서 목곽을 꺼냈다. 거기에는 적색과 자주 빛이 뒤섞인 묘한 색깔의 단환이 들어있었다. ‘중부연금술까지 빌릴 줄이야.’ 꿀꺽- 한 알을 삼키니 몸에 활력이 돋는 게 느껴졌다. 정신은 조금 몽롱해졌다. 약의 부작용인 것이다. “후우, 그래도··· 어설프게 할 수는 없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활력을 발에 모아 땅을 박찼다. 그녀가 사라지고 잠시 후, 사람들의 아우성이 멎었다. 뿐만 아니라 환호성까지 뒤따랐다. “천무군이다!” 거대화된 불꽃을 앞두는 사람들의 감정은 공포와 짜증, 허탈감뿐이었다. 그러나 단 한 사람의 등장으로 이 모든 게 환희로 바뀌었다. 기대를 받는 자, 천무군 백상린. 그는 자신들의 앞을 가로막으며 불에 타고 있는 열다섯 개의 나무를 한심스런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미 부적으로 가장 처음 불붙었던 나무는 새까맣게 전소되어 회생불가능해보였다. “후··· 이것으로 도망칠 수 있을 줄 알았나.” 백상린은 냉갈冷喝을 하며 손을 하늘을 찌를 듯 힘차게 내뻗었다. 그러자 백상린의 등 뒤와 주위에 있던 사람들의 도검이 칼집을 벗어나 승천하더니, 백상린의 몸 곁으로 순식간에 이동했다. “어검馭劒의 공功!” 사람들은 한 소리로 부르짖었다. 지난날, 신강 일대를 혈풍에 몰아넣었던 야수객을 단 번에 잠재운 백상린 만의 기술. 마치 하늘을 힘차게 가르는 설화속의 천검天劒과 같았기에 천무군이란 위명을 가져다준 그만의 기술이 지금 다시 세상에 나온 것이다. 어느새 수십 자루의 검들이 날개라도 달린 듯 둥둥 떠서 그의 주위를 보호하듯 맴돌았다. 백상린이 손을 흔들자, 검들은 제각기 방향을 잡고 맹렬한 돌진을 시작했다. 짧은 파공성이 스쳤다. 서걱-! 구구구구구-! 쓰러진다, 불에 타고 있던 나무들이 모조리 꿰뚫리고 베어지며, 몸을 눕혔다. 그것도 거의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일이었다. 한 순간에 한 방향을 향해서 쓰러지는 나무들은 더 이상 장벽이라는 가치를 얻을 수 없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지만, 백상린은 다시 손을 휘저어 검을 컨트롤 했다. 검들이 타오르던 나무들을 난도질했다. 투명한 몸을 가진 무인들이 혼신을 다해 검을 휘두르는 모습이 겹쳐 보이는 것은 단지 시야의 착각만이라 치부하기 힘들 정도였다. 잘게 잘린 나무들처럼 불꽃도 작아졌다. 그리고 이내 숲 사이를 가로지르는 바람만으로 꺼질 정도가 되자, 백상린은 검을 원위치로 돌려놓았다. 그 중 일부는 백상린의 등으로 돌아갔다. 마치 투명한 통이라도 있는 것인냥, 어느 순간 사라져버린 것이다. 차칵- 거의 동시에 칼과 검이 각각의 주인에게로 날아와 회수되었다. 백상린은 무인들에게 주먹으로 가슴을 대고 고개를 숙임으로써 병장기를 빌려준 데에 대한 감사를 대신했다. 말은 하지 않았어도, 그 직후, 그들은 다시 광마를 쫓기 시작했다. 그녀가 생각했던 10분. 백상린이라는 변수에 의해, 그에 한참 못 미치는 시간동안만 지체되고 만 것이었다. 그렇게, 추격전의 종결의 때는 다가오기 시작했다. ‘따라잡았다!’ 성우는 그들 머리 위, 절벽지대로 이어진 산등성이를 달리고 있었다. 횃불들을 급히 쫓다보니 지름길을 찾았고, 험하긴 하지만 훨씬 이동경로를 단축시킬 수 있는 이곳을 택하게 된 것이다. 폭은 1미터 정도. 정신을 놓았다간 50미터가 넘는 절벽 아래로 떨어질 게 분명했다. 이대로 쭉 가면, 횃불들이 목표로 하는 천장단애라 할 수 있는 진정한 절벽지대가 성우가 스코프로 정찰해봤을 때는,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없었다. 숲에 불이 일어났다가 잠시 후에 무언가에 의해 사라지고 추격대가 다시 쫓았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유라가 지극히 위험하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그의 발걸음이 좀 더 빨라졌다. “하아··· 여기까진가.” 그녀는 깊이가 얼마나 되는지 분간을 하지 못할 절벽지대에 도착했다. 목적지에 도달한 것이긴 하나 공교롭게도 추적대가 그녀를 따라잡았다. 추적대라 하기엔 뭐했다. 백상린 혼자였기 때문이다. 백상린을 제외하고는 모두 오고 있는 도중이었지만, 사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백상린 홀로 일인군단의 역할을 맡을 수 있었다. “목을 내놔라. 쓰레기.” 백상린은 자신의 검을 늘어뜨린 채, 싸늘하게 말했다. 차갑게 타오르는 분노가 검에 담겼다. 그가 걸음을 내딛으며 다시 광마를 향해 전진했다. “후후, 네 놈 같으면 쉽게 떼어줄까?” 광마는 그를 비웃으며 새로이 양손에 부적을 부채처럼 펼쳤다. “남의 목은 가볍고, 제 목은 무거운가보지? 좋아. 좋은 성격이다. 딱 마음 편히 죽이긴 좋아! 그럼 목을 벌려라 마녀. 널 죽임으로써 정의를 이루는 쾌감을 느껴주마.” “말이 너무 심하잖아!” “원래 필요 없는 행동일수록 심화되는 법이다!” 말이 필요 없다는 것을 역설하는 순간, 백상린의 몸이 고무줄처럼 늘어나더니, 어느새 광마의 앞에 서 있었다. 쉬익-! “이율배반의 원리도 모르나?!” 은색 선의 질주, 그와 동시에 타악기처럼 울리듯 톡 쏘는 백상린의 말, 둘 모두 어느 하나에 신경을 쓰지 못할 만큼 강렬했다. 광마의 부적이 의미 없게 조각났다. 급히 물러서지 않았다면 백상린의 말대로 되었을 지도 모를 정도로 아슬아슬한 검세劒勢였다. 그녀의 가슴에서 핏물이 튀었다. 기습할 줄은 몰랐다. 상대에 멋대로의 잣대를 대고 방심한 탓이었다. ‘치잇!’ 광마는 뒤로 두 걸음을 때며, 장력을 날렸다. 압축되어 쏘아져오는 무형의 기세에 백상린은 반색하며 검을 내리그었다. 하늘에서 땅까지. 최단거리를 구축하는 그의 검로에 장력은 허무하게 흩어졌다. 하지만 약간의 시간은 광마에게 술법을 준비케 했다. “흐름··· 쇠사슬처럼[放電連鎖]!” 파지직-! 청아하면서도 괴기스러운 목소리에 흩어졌던 부적들이 연결되며 새파란 전기를 뿌렸다. 뿌렸다기보다 주변 대기체계를 바꿀 정도로 영향을 미치는 어떤 물질을 내뿜은 것뿐이지만, 이거나 저거나 백상린에게는 쉽지 않았다. ‘결국 죽일 수밖에 없는 건가?’ 말한 것과는 다르게 그에게 살의는 없었다. 해결할 문제가 있었다. 압제강 혈사와 상향촌 혈사에 대해 심문할 게 너무나 많았다. 압제강에서 발견된 극한極寒의 공을 사용하는 사람은 누구며, 상양촌 사람들은 왜 죽였는가. 왜 그들은 광마에게 공포보다 증오를 느끼는가. 하지만 이대로라면 그녀조차 잡지 못할 지도 모른다. 백상린은 옷에 달라붙은 전기를 털어내며 그녀에게서 물러섰다. 광마는 그대로 몸을 돌려 도망치기 시작했다. 백상린은 차갑게 광마의 등을 노려보았다. 그 순간, 어디에서 튀어나왔는지 모를 수십 자루의 검들이 백상린의 주위를 맴돌기 시작했다. “두 팔과 양 다리는··· 말하는 데 필요 없지!” 사나운 일갈 후, 그의 손가락이 향하는 곳으로 검이 날았다! 절벽 위, 짐을 푼 성우는 스코프에 눈을 가져다 대었다. 유라가 보였다. 옷차림은 달라졌지만, 분명 그녀는 유라의 모습을 취하고 있었다. 급히 달려가는 그녀의 모습에 성우는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스코프의 십자초점이 그녀의 몸을 담는다. 두근- 이대로 방아쇠를 당기면 그녀에게로의 복수는 끝날 것이다. 두근두근- 피와 살점이 뒤범벅된 처참한 모습을 끝으로 그녀와의 추억은 삼류장르소설처럼 가볍게 닫힐 지도 모른다. 더 허무할 지도 모르지. 두근-----! 그리고 이 세계는 더 이상 의미가 없어질 것이다. ‘하··· 하하하하.’ 우스울 만큼 쉬었다. 그러나 웃지도 않고 방아쇠를 당기지도 않았다. 대화를 하지 않았다 대화도 없이 그냥 끝낸다는 것은 차라리 안 온 것보다 못한 일이다. 스코프를 다른 곳으로 돌린다. 일단의 무인들이 질주하고 있었다. 개중 하나가 횃불에서 멀어져 성우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무시했다. 유라의 무력을 믿고 있었다. ‘내가 노릴 건··· 보이는 잔챙이.’ 성우는 횃불을 들지 않은 무인의 머리에 십자초점을 잡고 방아쇠를 당겼다. 탕-! 피슉- “······.” 스코프 안에 날아가는 파편이 보였다. 소리 없는 폭발, 단지 들리지 않을 뿐인 살인에 죄악감도 없이 초점을 이동시켜 다음 표적을 잡는다. 혼란은 생겨도 많은 수의 사람이 있어, 적은 단위로 이동했던 그 때처럼 불빛이 쉽게 꺼지진 않았다. 쪽수의 우세는 자만을 가져온다. 동료에 대한 믿음은 운동경기에서나 마음껏 하라는 외할아버지의 말이 떠올랐다. 탕-! 또 하나가 쓰러졌다. 탕-! ······이상해져가는 상황에 사람들은 우선 달리기 시작했다. 훌륭한 대처였다. 하지만 횃불을 들고 있는 이상 표적이 되는 건 변함없었다. 탕- 달리던 사람 하나가 어깨를 부여잡고 고꾸라졌다. 그의 주변에 있던 사람이 성우를 발견했다. 암기를 다루고 눈썰미가 좋은 사람이었는지, 총알의 각도를 파악해 대략적인 위치를 본 것일게 틀림없었다. 그리고 총구에서 피어나오는 총염에 확신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곳에서 성우까지의 거리는 800미터는 넘었다. 게다가 거리 중 3분의 1은 깎은 듯한 절벽이었다. 입을 크게 벌리며 성우를 가리켰지만 방법이 없다! “제기라아알! 후퇴!” 도저히 어찌 해볼 수가 없다고 느낀 사람들은 후퇴를 외치며 왔던 길을 돌아갔다. 성우는 묵묵히 저격총의 탄창을 갈아 끼웠다. 이제 마지막 탄창이었다. 1분 만에 일어난 짧은 교전, 아니 일방적인 살인을 전과로 남긴 성우는 스코프를 통해 다시 유라의 모습을 보았다. 그녀의 옷이 핏물에 젖은 채, 반쯤 흘러내려가고 있었다. 검에 배인 것이다. “······!” 유라가 낭패를 당한 모습이 보이자 성우는 알 수 없는 감정에 휩싸였다. 당하고 있다? 그녀가? 하하하, 당하는 건가. 언젠가부터 성우는 그녀를 초인이라 생각해버리고 있었던 것 같다. 그녀의 살짝만 드러낸 인간적인 모습에 끌리는 것을 느꼈으면서도, 초인이라고 확정짓고 있었던 것이다. 자기혐오는 둘째 치고, 그녀를 공격하는 자를 보았다. 평범한 옷차림에, 등 뒤에 거대한 칼집, 아니 통이라 불러야 될 그것 안에 어디에 다 사용할 것인지 모를 많은 수의 검을 넣고 있었다. 그를 보자 이상하게도 전신의 세포가 들끓는 것 같았다. 성우의 유전자는, 확실히 십자초점에 맞춘 그 남자를 거부하고 있다. 쏘아라! ‘방해는··· 처리한다.’ 죽여라! ‘적과 적, 증오할 이유는 충분하다!’ 그 순간, 유라가 남자에게서부터 도망쳤다. 남자의 등 뒤에 매달린 큰 통에서 수십 자루의 검들이 튀어나왔다. 그것들 중 일부는 그의 주위를 돌았다. ‘아아아아!’ 플래쉬 백 된다. 등을 뜨겁게 후비고, 가슴을 꿰뚫고 빠져나온 일곱 개의 칼날들! 검들이 날았다. 그의 망막 속에 칼날에 등이 꿰뚫린 자신의 모습과 유라의 모습이 겹쳐지고 있었다. 방아쇠를 당겼다. 그의 본능은 말하고 있었다. 그를 죽이면 저 흉악한 검들의 제어는 풀려진다고! 총알이 날았다. 음속의 음속을 돌파하고, 대기를 돌파한 후, 목표에 도달한다! 캉-! 쇠와 쇠가 부딪히는 소리가 절망의 종소리처럼 맑게 울려 퍼진다. 사내의 주위를 돌고 있던 검들이 멋대로 움직이더니 서로를 겹쳐서 하나의 방패를 만든 것이다. 성우는 손아귀의 힘을 더하며 총의 반동을 흘리는 동작도 생략한 채, 연발했다. 뼈가 부서질 정도로 방아쇠를 당겼다. 하지만 결과는 같았다. 총알은 검의 방패를 넘어서지 못했다. 그 사이, 그녀에의 비극은 시작되고 있었다. 서걱- 유라의 팔이 날았다. 다리가 날았다. 피가 튀어 올랐다. 신체의 한 부분을 잃은 뒤에서야 그녀는 필사적으로 검을 피했다. 그 덕분에 중심이 흐트러졌다. 몸이 허물어졌다. 푹-! 원래대로라면 왼쪽 다리를 노렸을 그 칼날이, 그녀의 가슴 한 가운데를 꿰뚫고 있었다. 그녀가··· 쓰러졌다. “아아아아악!!” 구슬픈 비명소리가 성우의 귀를 짧게 파고들었다. ‘죄송합니다··· 풍여랑.’ 그는 허물어져가는 의식 속에서 한 여자를 향해 용서를 빌었다. 시야는 무겁게 닫혔다. 죽었다. 시야가 얼어붙었다. 정말? 가슴이 텅 비어가는 느낌. 그 어떤 대화도, 대면도, 교감도 없이. 그녀는 죽었다. 자신의 안에서 뭔가 툭 끊어지고, 어떤 것이 풀려나는 기분. ···죽은 거야? “하··· 하하하하··· 뭐야. 뭐하려고 나는 이곳에 온 거야.” 오히려, 어떤 시원함마저 느꼈다. 그런 기분으로 손가락이 후퇴했다. 탕-! 마지막 총알이 돌진한다. 스코프의 도움도 없이, 웃고 있는 그대로 방아쇠를 당길 뿐이었지만, 그것은 정확하게 백상린의 머리를 향하고 있었다. ‘···뭐지 이건? ······음?!’ 무엇인가에 열중하고 있던 백상린은 다시 무언가, 위험을 감지했다. 슈슈슉- 다시금 검의 방패가 움직였다. 검들의 군무는 완벽하게 박자를 맞추고 있었다. 의지가 충만한 검들은 주인의 죽음을 허락하지 않았다. 팅- “거기냐!” 백상린은 손가락을 뻗어 성우를 가리켰다. 한 번도 아닌 여러 번의 저격은, 상대의 위치를 파악하기에 충분했다. 그의 검 중 세 자루가 사납게 허공을 찌르고 고무줄처럼 그림자를 늘인다. 쒜에에엑! 성우는 정신을 차렸다. 공교롭게도 그의 살기가 충만한 검은 성우에게 원초적 분노를 일으켰다. 할 일은 있었다! 조금 늦은 깨달음이라 세 자루의 검은 성우의 회피를 용서하지 않았다. 성우는 수중의 PSG-1을 방패처럼 앞세워 봉을 회전시키듯 빠르게 돌렸다. 탁탁탁-! 칼날이 개머리판을 뚫었다. 총열에 부딪쳤다. 하나는 튕겨져 나갔다. 성우는 과거 시가 9000달러에 육박하는, 그리고 지금에 와서는 레어라는 딱지가 붙는다는 이유로서 2만 달러를 가볍게 넘어서는 그 총을 망설임 없이 버리고, 총에 박힌 두 자루의 검을 뽑아냈다. “간다.” 짧게 뱉어냄과 동시에 성우는 그야말로 미친짓을 하기 시작했다. 절벽을 달리고 있었다. 물론 절벽은 완벽한 직각이 아니었다. 평지까지 남은 거리도 80미터 정도밖에 남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그 행동이 정신이 제대로 박힌 사람의 것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었다. 성우는 대각선으로 달렸다. 다름이 아니라 성우가 있던 곳에서부터 백상린까지 직선으로 이어진 길을 달리는 것뿐이었다. 눈에 뵈는 것이 없는 것 같았다. 성우의 발이 빠르게 교차했다, 초당 열걸음, 그야말로 떨어지는 것보다 빨리 달리는 것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대로만 있으면 결국 속력 대비 충력량에 의해 지면에 떡으로 눌러붙는 일이 될 수밖에 없었다. 성우는 그 짧은 시간 주머니에서 캡슐을 꺼내 위로 던졌다. 동시에 백상린의 검 두자루를 양손에 잡은 채, 벽에 박았다. 성우의 신형은 미끄러지듯 절벽을 긁으며 내려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짧은 시간만 가능할 뿐이었다. 이내 검들은 휘어지며 절벽에서 빠졌다. 그 순간 캡슐이 섬광을 일으키며 터졌다. ‘계산대로······!’ 성우는 칼을 박느라 떨어지는 것을 잠시 멈추는 그 순간, 양발로 힘차게 절벽을 박차고 있었다. 그렇게 날아가는 그의 등 뒤로 폭발의 후폭풍이 덮쳐, 더욱 더 빠르게 떨어지게 만들었다. 다만, 그 각도는 수직선을 그리며 떨어지는 것이랑 사뭇 달랐다. 성우의 신형은 포물선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 착지점은 놀랍게도 백상린이 있는 곳! 초고속 슈퍼컴퓨터로 계산을 해도 불가능한 물리적인 작용이, 성우의 몸을 통해 일어난 것이다. 본능과 계산의 조화로 이뤄낸 전투논리가 이끌어낸 궤도 그대로, 성우는 한 발을 앞세워 떨어져 내렸다. “·······!” 백상린은 갑자기 이상한 행동을 하는 성우를 유심히 지켜보다가, 갑작스럽게 자신을 향해 날아오자, 서둘러 검을 모아 방패를 만들었다. 파아아아아앙---! 그런 방패에 성우의 킥이 틀어박혔다. 자그마치 수십 미터를 날아오며 쌓아온 에너지였다. 성우의 몸무게에 더해진 그 에너지를 간단히 막을 수는 없는 거다. 놀랍게도 검의 방패가 밀려나가기 시작했다. 수십 자루의 검들이 모인 유기체에 균열이 일어나며 비틀리고 있었다. 아무리 훌륭한 방어라인을 자랑한다고 해도, 결국 허공에 떠 있을 뿐이다. 그렇기에 충격량은 어찌어찌 물러나며 배출한다고는 해도, 물러나는 것을 멈출 여력까진 없었다. 그리고 단 1초도 제대로 견디지 못하고, 검의 방패 째로, 백상린은 얻어맞을 수밖에 없었다. 우드득- 성우는 모든 충격을 전달한 뒤에, 검의 방패가 무너지는 반동 그대로 튕겨져 나갔다. 그 결과 미친 짓을 하느라 연약해졌던 발목이 어긋나 버렸다. 결과에 비해선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작은 상처였다. 하지만 결코 무시해도 좋을 만한 상처는 아니었다. “누구냣!” 백상린은 검의 방패를 무너트림과 동시에 성우를 향해 어검을 전개했다. “통성명 따윈 필요 없어!” 자신을 향해 다양한 각도로 날아오는 검들에 성우는 기관단총으로 응수했다. 드르르르르륵-! 따다다다다당--! 쇳소리가 시끄럽게 울리며 불꽃이 어둠속에서 여기저기 일어났다. 새까맣게 깔려 빛을 거부하던 숲이, 그들의 격전에 오히려 어둠이 있을 틈이 없게 되었다. 검극에 대항하는 탄환. 총알에 길항하는 칼날. 두 개가 부딪히며 울리는 청음淸音은 경쾌한 재즈 같았다. 그러나 그 양면에 있는 자들이 내뿜는 투기와 살기는 결코 경쾌하지가 못하다. “아아아아압!” “이익!” 따앙-! 쑤각-! 성우는 날아오는 검을 왼손의 기관단총을 휘둘러 쳐냈고, 백상린은 날아오는 총알을 검을 내리그어 쪼갰다. 드르륵! 슈욱! 검을 쳐냄과 동시에 다른 손의 기관단총을 들어 난사! 백상린은 수중의 검을 다시 던지는 것으로 응대했다. 또 다시 시야를 무시하고, 오직 감각만으로 서로의 공격을 막아낸다. 단, 10미터가 사이에 있을 뿐인데, 그들은 접근전을 벌이듯, 서로를 향해 총과 칼을 내뿜었다. 그들의 싸움은 형식을 배제한 각기 다른 방식으로 서로를 사냥하는 야수들과 같았다. 오직 원하는 건 상대의 죽음뿐! 패배 뿐! 자신에 의한 승리일 뿐! 기회는 백상린이 먼저 맞이했다. 철컥- 철컥- 연신 총염을 피워 올리던 총구에서 둔탁한 쇳소리만 일으켰다. 탄창이 비어버린 것이다. “죽어라!” 백상린은 주변에 떠다니는 검들 중 하나를 집어 던졌다. “거부한다!” 성우는 짧게 외치며 기관단총을 떨구고 그대로 허리를 틀었다. 그 반동에 허리 뒷면에 덜렁거리던 샷건이 성우의 전신前身을 향해 돌아왔고, 성우는 샷건을 난사했다. 쾅- 쾅- 쾅-! 점이 아닌 면의 공격! 백상린의 본능은 뭔가 다르다는 느낌을 가지고, 날아가던 검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검을 모아 다시 방패를 쳐냈다. 산탄에 날아가던 검이 튕겨나갔고, 검의 방패에, 산탄이 하나둘씩 틀어박히기 시작했다. 따다다다당-! 기회는 위기가 되었고, 위기는 기회가 되었다. 백상린은 더 이상 오지 않는 공격에 문득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순간, 무언가가 포물선을 그리며 검의 방패 위를 날아 백상린의 머리 위에 떠 있었다. ‘뭐지?’ 뭔지는 모르지만 수많은 위기를 헤쳐 나가며 단련된 위기감각이 전율했다. 죽을 지도 모른다! 순간, 백상린의 머리 위에 떠 있던 캡슐이 새하얀 빛을 내며 폭발했다. 성우는 첫 번째 폭발이 일어나자, 다시 급속폭발로 시간조정 된 캡슐 다섯 개를 꺼낸 후, 백상린을 향해 던졌다. 콰과과광!! 연쇄폭발이 일어나며 먼지가 자욱하게 피어났다. 주변을 굴러다니고 있던 탄피와 검편劒片들이 사납게 사방으로 쏘아져나갔다. 그 와중, 성우의 몸에도 여러 군데 상처를 입고 있었다. 날아오는 것을 알면서도 피할 수 없을 공격이었다. 클레모아 같은 효과를 낸 폭발이 그리 오랜시간이 지나지 않은 후, 사그라졌다. 성우는 허무감을 느끼다가 흙먼지가 가라앉자 아직 느낄 때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기관단총의 탄창을 갈아 끼웠다. 투두둑- 투두두둑- 용린龍鱗처럼 일어난 쇠의 집합체. 아름다우며, 긍지 높았던 검들이 부서져 내리고 있었다. 철편들이 하나 둘씩 떨어지며, 그것들에 둘러싸여있었던 한 사람의 모습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훤칠한 사내의 그림자. 백상린의 모습이었다. 철편들이 모두 땅에 떨어지자, 백상린은 머리부위를 가렸던 팔을 풀어 내리고 말했다. “···너는 진짜 광마의 종자인가.” 성우는 그의 대답에 대답해줄 마음은 없었지만, 왠지 모를 석연찮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고개를 저었다. “광마의 종자가 맞았다면, 이렇게 홀로 내버려두진 않았겠지!” 쓸쓸한 음성이었다. “너희에게 묻고 싶은 게 많다.” “대답해줄 의무는 없다.” “그래도 들어야겠다! 어째서 압제강 혈사를 일으킨 거지? 어째서 너희의 이익에 아무런 상관도 없는 상양촌 촌민들을 죽인 거지?” “······.” 성우는 그의 반응이 격하다고 생각했다. 격해도 너무 격했다. 마치 울부짖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 같았다. 친인척이 죽으면, 낼 수 있을까? 그리고 깨달았다. 그래서 웃는다. “하, 하, 하하하하, 하하하하핫!” “왜 웃는 거냐!” “그래서 죽인 건가? 우리들이 혈사를 일으킨 원흉이기 때문에? 그렇다면 번지수를 잘못 짚었어!” “······?!!” 성우의 웃음소리가 멎었다. 하지만 성우의 입가의 일그러짐과 새파랗게 이글거리는 광기는 사라지지 않고 도를 더 했다. 성우는 가슴을 벌리고 오페라의 비극적인 결말의 명대사를 던지는 남주인공처럼 말했다. 감미로운 목소리로, 어느 때보다 격정적인 목소리로! “알아라! 그리고 참회해라! 압제강의 혈사를 일으킨 자는 우리가 아닌 아리야 라는 중부연금술사. 한공의 단륜부와 물을 자유롭게 다루는 역행자였다! 상양촌의 혈사는 중부연금술사들의 연구시설에 발견한 그들의 파렴치함을 연금술사의 법으로 처단함으로써 일어났다, 괴물이 된 마을사람들에게 살해당하려는 마을사람들을 구해준 것이 바로 너희가 말하는 상양촌 혈사의 진면목이다! 알았나? 알았으면 참회하라! 그녀는 너의 잘못된 방향으로 맹진하는 정의에 희생될 사람이 아니었음을, 두고두고 참회하란 말이다! 하하하!” 우박처럼 쏟아지면서도, 변주되듯 억양을 바꿔가며 주변을 울리는 노래 같은 외침. 백상린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가슴을 울리는 그의 말.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자신은 얼마나 어리석은 짓을 한 것인가? 엉뚱한 사람을 범인으로 몰아세운 것이다. 단지, 우연히 그녀가 과거 악명 높았던 광마였을 뿐이다. 우연이 겹쳐 진실을 보지 못한 채, 사실만으로 그녀를 쫓아다닌 것이다. 거짓으로 치부하고 싶었다. 하지만 거짓이라고 반박하기엔, 그의 말은 뜨거운 용암 같아, 이성으로부터 판단하는 게 아니라, 가슴으로부터 먼저 깨달아버리는 설득력 있는 울림으로 이뤄져있었다. 도저히 부정할 수가 없다! 영혼을 울리는 외침을 부정했다간, 지금까지 자신이 해온 모든 일이 거짓이 되어버릴 것 같았다. 그의 숨이 거칠어졌다. 광마의 종자가 한 말을 지금까지 있었던 석연찮음과 대입해본다. ······들어맞는다. 모든 게! 원흉은 그의 말처럼 다른 자들에 의한 일이란 말인가! 침묵으로 전투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이 흘렀다. 철컥-! 기관단총의 총구가 겨누어졌다. “참회는 끝났나? 히어로?” 성우는 격정적으로 감정을 토해내고 있었다. 지금까지 무신경으로 관망하던 모든 분노를 한꺼번에 터트리듯 그렇게······. ‘후후후, 이제··· 이 세계와도 끝이군.’ 백상린은 문득 고개를 저었다. “······아직 참회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녀를 죽이진··· 않았으니까.” “·······!” 백상린이 손을 살짝 휘젓는다 싶더니, 하나의 시체가 허공을 떠올라 성우에게로 날아갔다. 성우는 그것이 유라의 것이라 판단하고, 그것을 잡았다. 그런데··· “·······뭐야, 이놈은.” 전혀 모르는 남자가 그의 팔에 안겨있었다. “둔갑이다. 남부의 기환술이지. 최고급이라··· 몸의 형체까지 변형되어있는 것 같더군. 네가 말하는 그녀는··· 미안하지만 도망쳤다.” 백상린은 그렇게, 참회 대신 진실을 말했다. “음?” 현앙과 헤어진 유라는 목적지에 거의 도달하려는 도중, 한 사내를 만났다. 2미터 10센티에 육박하는 거대한 체구를 가진 중년인이었다. 봉치곤 짧은 1미터 길이의 단봉 두 개를 허리에 걸치고 있었다. “후후후, 자네가 광마라고 불리는 아해인가? 생각보다 아름답군.” 유라는 눈을 가늘게 좁히더니 언제라도 튀어나갈 수 있도록 몸을 낮췄다. “누구시죠?” 유라는 조금 굳었지만, 평소와 거의 다름없는 억양으로 물어왔다. “지금은 천곤, 배양관이라는 늙은일세. 과거에는 어떻게 불렸는지는 나 자신도 잘 모르지만 말이야.” “······?” 자신을 배양관이라 칭한 사내는 자신을 소개한 순간, 허리춤에서 단봉을 빼내더니, 유라를 향해 던졌다. “······!” 유라는 황급히 몸을 피함과 동시에 가방을 들어 공격을 막았으나, 애초에, 그녀를 향해 날아간 단봉이 아니기에 무의미한 짓일 뿐이었다. “크어억!” 나무를 관통한 봉에서부터 답답한 신음소리가 울렸다. 잠시 후, 나무가 일그러지더니 복면을 쓴 한 사내의 모습이 드러났다. “어, 어째서!” 그가 외쳤을 때는 이미 배양관의 오른손에 들린 곤봉이 강맹한 기운을 휘감고 그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리고 있는 중이었다. 퍽-! 유라는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잠시 고민하다가, 결국 물었다. “어째서?” 같은 말을 두 번씩이나 들었으니, 설명해주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그 전에 배양관은 짧게 외쳤다. “해解.” 남부의 주술연금에 자주 사용되는 두 개의 음성이 놀랍게도 배양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천생 무인이라는 그에게서. 배양관의 몸이 신기루처럼 흩어져갔다. 하지만 모든 게 사라지는 게 아니라, 내부에 있는 본체를 제외하고 껍데기만 소멸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드러난 배양관, 아니 배양관의 껍데기를 쓰고 있던 사내는 인자한 학자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부드러운 턱수염과 따스해 보이는 눈매가 인상적인 60대 중년인이었다. “오랜만이로구나. 나연.” “·······아버···지?” 유라는 멍청하게 중얼거리는 것밖에 할 수가 없었다. 살아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다른 의미로 미쳐 날뛴다. 조금 전보다 더욱 답답해져온다. 그러나 그것은 나쁜 느낌은 아니었다. “아······.” 이런 감정인 것인지도 모르겠다. 분명 자신은 그녀를 갈구하고 있었다. 그녀의 생존에 기뻐할 정도로 그녀 자체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멍청하게도 웃음이 새어나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투논리는 이런 행동을 용서하는 것은 아니다. 기뻐할 시간은 얼마든지 있다. 그래서 방아쇠는 당겨졌다. 드르르르륵-! 백상린은 총구를 보고 총알의 궤도를 짐작해, 신형을 놀렸다. 미리 올 것만 알고 있다면, 총알은 충분히 피할 수 있는 위험한 물건에 지나지 않다. “어째서인가! 너랑 싸우기 싫다!” 성우의 증언에 싸우고 싶은 마음이 모조리 사라져버렸다. 참회까지는 아니더라도,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싸울 수는 없었다. “위선인가?” 성우는 차갑게 말하며 방아쇠를 당긴 손가락에 더욱 힘을 줄 뿐이다. 파바바바박-! 헛되이 허공을 가르고 절벽에 틀어박히는 탄환, 어느새 그들은 방원 50미터의 공간을 제외하곤 모조리 떨어지기 위한 곳으로만 존재된 절벽지대에 도달했다. 땅에 떨어진 검편들이 조립되며, 다시 강철의 방패가 만들어졌다. 하지만 완벽하게 몸을 굳히던 그 때와는 다르게, 총알 하나에 한 부분 씩 모래성처럼 부서져나갔다. “너와 나는 어쩔 수 없는 원수다. 네 놈은 나를 죽였다.” 백상린으로써는 성우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언제 저 녀석을 죽인 거지?’ 그러나 이어져 나오는 성우의 말은 듣기 싫어도 가슴 속에 틀어박힐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나는 네 놈의 동료들의 목숨을 취했다. 자, 증오할 만할까?” 드르르륵-! “·······어째서냐··· 어째서 그런 것을 내게 알려, 나를 화나게 하는 거냐?” 따다당---! 말과 동시에 총을 쏜다. 상대의 동요를 노린 공격이었지만, 백상린은 그에 동요치 않고 훌륭하게 방벽을 만들어 총알을 막아냈다. 성우는 씨익 웃었다. 어찌 보면 시원한 웃음 같지만, 백상린에게 그것은 악마의 미소에 다를 바 없었다. “그냥, 네 녀석의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을 보고 싶을 뿐이야.” “그렇게 까지냐! 좋아! 증오해주겠다. 마음껏 봐라, 그리고 너의 목을 제전에 바쳐라!” “하하핫, 위선자! 네 녀석의 잘못된 판단으로 인해 희생된 동료들의 넋을 다해라!” 지금까지 성우는 한 번도 발을 멈춘 적이 없었다. 백상린 역시 마찬가지였다. 싸움 도중, 이렇게까지 대화할 수 있다니, 누군가가 봤다면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말 한마디 한 마디가 공격의 일환이었다. 특히 백상린은 어느 전투 때보다 마음에 상처를 입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전투력의 약화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었다. 증오로 기술을 더욱 날카롭게 펼친다. 분노를 담아 검을 후려친다. 성우는 백상린의 일그러진 얼굴에 통쾌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원래 이런 성격이 아니었지만, 그의 몸에 새겨진 유전자가 기뻐하며 내지르는 비명까지 무시할 정도로 야박한 성격 역시 아니었다. 나를 죽인 원수. 동료를 죽인 자. 명분은 충분히 섰다. 이제 서로를 향해 살기를 뿌리며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것뿐이다. 철컥- ‘치잇.’ 성우는 기관단총의 탄창이 세 개 정도 밖에 남지 않자, 탄수를 조절하기 시작했다. 아직 총알이 백업될 예상시간까지 1시간 정도는 남아있었다. 그 때까지는 이것으로 버티는 수밖에 없었다. 아니, 이것만으로 끝내야 했다. 기다릴 수는 없다. 전력과 전화력을 다해, 쓰러트릴 뿐. 요행 따윈 바라지도 않고, 바랄만한 상대가 아니다. 사실, 통기경과 마혈균이 없었다면, 상대조차 하지 못할 자였다. 그의 이름은 모르지만, 그의 강함은 지극검 유철산보다 더욱 거대한 것 같았다. 인정하기 싫었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슈욱! 성우는 사각에서 쏟아져오는 검들을 피했다. 백상린의 어검은 전보다 훨씬 치밀한 각도로 아슬아슬하게 짓쳐들어오고 있었다. 여유를 두지 않는 그의 손속은, 그야말로 악질적이었다. 파캉-! 그 순간, 검의 모양으로 연결되어있었던 검편들이 분쇄되었다. 산탄처럼 철편들이 쏟아져, 성우의 등을 노렸다. ‘가짜는 진짜로!’ 쾅-! 성우는 산탄총을 들어 철편을 향해 탄막彈幕을 쳐냈다. 총알의 비와 철편의 비가 교차되었다. 푸카강! 카카카캉! 푹푹푹-! 하지만 완벽할 수는 없는 노릇, 성우의 가슴에 쇳조각이 틀어박혔다. 다행히 큰 부상은 아니었다. ‘방탄조끼가 아니었으면······.’ 내심 정노인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뱉어내며 숨 돌릴 틈조차 주지 않고 다시금 날아오는 검들을 피해냈다. 또 다시 검 모양의 철편이 쏟아지자, 그것들이 완전히 분열되기 전, 성우는 진각을 힘차게 내리밟고 제삼총경, 선풍완격을 쳐냈다. 부카아아앙! 전력을 다해 쳐낸 선풍완격은 사막에서 일어나는 용권풍龍捲風과 같이 스치기만 해도 베여버릴 칼날처럼 빠른 바람이 집중된 회오리를 만들어냈다. 전력을 다해서 쳐낸 성우의 권은 어느새 한계였던 3단 가속에서 4단 가속을 밟고 있었다. 한 번 씩 가속할 때마다 총경의 위력과 속도는 배가 된다! 근처에만 가도 말려들고 마는 그런 용권처럼, 선풍완격을 통해 발생된 회오리는 검편들을 먹어치웠고, 그에 모자라 마침, 그 자리에서 다른 공격을 준비하고 있던 백상린에게까지 탐욕을 드러냈다. 백상린은 황급히 팔을 교차해 가드를 올렸고, 그 위로 철편들이 모이며 방패를 만들었다. 카카카카캉-! 그의 방패 위로, 그의 검들이 우박처럼 내리박히며 서로 간을 자멸시키기에 이르렀다. ‘크윽! 뭐야?!’ 성우는 지금까지 써오던 총경과 위력을 달리하는 이번 일격으로 생긴 결과를 관조했다. 한계를 넘은 무리한 가속에 경체의 일부가 손상을 입었다. 하지만 그 정도의 위력이 아니었으면 아음속으로 날아오는 철편을 막을 수 없었을 것이다. 덕분에 생각지도 않은 기회까지 얻었으니 좋아해야 마땅하다. 성우의 팔꿈치에서 경사가 일어났다. 뇌의 가속작용 덕분에 손을 통하지 않고도 경사를 내뿜을 수 있었다. 경사는 제멋대로 그의 주머니에서 마총을 꺼내고 어딘가로 날아갔다. “관貫!” 손등 위로 황금빛 광선이 날린다. 광선은 투명해야 할 경사를 환히 비추며 경사 끝에 존재하는 마총에 까지 다다른다. 그 순간 마총은 상대적으로 방어가 약한, 백상린의 오른쪽 하부를 향해 총구를 대고 있었다. 지금 성우의 위치에선, 노릴 수 없는 각도였다. 탕-! 그곳에서 마총이 기염을 토했다. 황금빛 광륜이 총구에서부터 물결치듯 퍼져나가며, 마음껏 날뛰길 바라는 마탄을 풀어놓았다. 통상의 탄환보다 8배는 회전수가 많은, 작은 탄환이 대기를 갈랐다. 위험을 감지한 백상린이 재빨리 검의 방패를 쳤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총알이 날아온 것이다! 하지만 기습이라 할 수 있는 마탄의 전진에 급히 쳐낸 방패가 막을 수 있을 리가 없다. 마탄은 종이장을 찢듯, 가볍게 철편을 꿰뚫고, 백상린의 옆구리를 스치고 사라졌다. 백상린이 자존심을 버리고 몸을 굴린 덕분이었다. 성우는 아쉬워하지 않았다. 이번 공격으로 끝날 거라고는 바라지도 않고 있었다. ‘나에게 좀 더, 이 세계를 즐기게 해줘!’ 광기를 발산하듯 선풍완격을 쳐냈다. 통상적인 선풍완격과는 달랐다. 성우가 던진 4개의 캡슐들을 휘감으며 날아가는 회오리가, 어찌 보통이라 할 수 있을까! 회오리의 끝부분 안에서 계속적으로 회전하는 캡슐은 백상린을 향해 돌진했다. 무기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무인 따위, 이것으로 끝낼 수 있다! “···아듀.” 회오리가 백상린을 덮쳤다. 콰과과쾅-! 폭발이 회오리의 뒤를 따랐다. 새하얀 섬광에, 둘은 아늑해지는 것을 느꼈다. 폭발이 어둠을 잠시 동안 물러가게 했다. 새까맣게 피어오른 흙먼지가 절벽 밑, 계곡에서 솟아오른 바람에 하늘로 높이 흩어져갔다. 바닥에는 의미 없이 타오르는 옷자락들이 있었다. 그 위에 팔을 교차한 채로 얼굴을 가드하고 선, 백상린의 몸이 드러났다. 철조각에 이리저리 상처가 많긴 하지만, 정작 치명상은 없었다. “······괴물인가.” 성우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은린표의 피를 이식 받은 상양촌의 키메라들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백상린은 분명 인간이었다. 표피를 아무리 노려봐도, 없던 은린이 생길 리 없었다. 백상린의 가드가 내려갔다. “굉장하군··· 공인가?” “총경이다.” 백상린의 난데없는 물음에, 성우는 묵묵히 답했다. “경인가? 대단하군. 공이라 표현해도 될 정도야.” “너야말로, 괴물인가?” 성우가 묻자 백상린은 웃었다. “령이다. 철령鐵靈.” 세상에는 공과 경만 있는 게 아니었다. 정확히 파악할 수는 없지만, 공을 넘어서는 에너지도 분명, 존재하고 있었다. 백상린의 철령 역시 그런 것이다. 영혼을 강화시키고, 육체에 특수한 성질을 입힌다. 언뜻 보면 단륜부들이 쓰는 단공과 비슷하다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수련에 의해 도달할 수 있을 만한 게 아니었다. 령은 영혼과 결합하는 하나의 생명이다. 선택받았다. 령을 쓰는 자들은, 그렇게 표현할 수 있었다. “지금 말해서 미안하지만, 네가 쓰는 쇳덩어리는, 나와 궁합이 잘 맞는 것 같다. 끌어당기는 힘과 미는 힘을 조절하기만 하면, 쉽게 막을 수 있거든.” “······자기력인가. 후후, 허튼 짓을 한 거라 할 수 있겠네.” 물론 자기력이 강해도 가속도를 어찌 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는 총알조차 배어낼 수 있는 신속에 닿은 무인이었다. “쿨럭-! 쳇. 끝까지 폼 잡고 싶었지만 안 되는군.” 백상린은 핏덩이를 뱉어내며 중얼거렸다. 철령은 완벽한 게 아니었다. 폭발의 충격은 단련된 그의 내부장기를 뒤집어놓을 정도로 대단한 것이었다. 고통스럽기 그지없었음에도, 그는 참고 있었다. “이름은?” “네 녀석은 통성명의 예절을 잊었나?” “아아, 그렇군, 나는 백상린이다. 너의 이름은?” “···유성우.” “유성우인가. 좋아. 기억해두지.” “할 필요 없을 거야.” 백상린은 성우가 한 말의 뜻을 짐작하고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하, 걱정마! 내가 살아남을 테니까!” 백상린이 양손을 크게 펼치자, 그의 등뒤에 있던 검을 담던 통이, 날아와 그의 손에 잡혔다. “합!” 순간, 그의 손에 잡힌 통이 압축되어 손안에 들어올 정도의 두께가 되었다. 대신 길이는 더욱 늘어나 3미터에 육박했다. 철봉이 된 것이다. 검편들이 멋대로 날아와 철봉의 끝에 다닥다닥 붙어 조립되었다. 창 한 자루 만들 시간은 2초도 되지 않았다. “미안하지만 사부에게 배운 건, 검이 아니라 창이었다.” 창을 만들기 시작한 때부터, 성우는 이미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백상린을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내부 충격만이 통한다면, 접근전을 벌일 수밖에 없었다. 진작이 힘차게, 땅을 찍는다. 수평이 된 발바닥에서부터 발사관이 쌓여져 올라간다. 좀 더, 강렬하게, 좀 더 빠른 신속의 탄환. 가속한다. 빠르게, 빠르게, 빠르게, 빠르게, 빠르게, 좀 더 빠르게! 경의 탄환이 가속했다. 첫 번째 가속은 무릎 관절에서부터, 두 번째 가속은 허리의 4번째 뼈, 세 번째 가속은 등의 6번째 뼈, 네 번째 가속은 어깨, 다섯 번째 가속은 팔꿈치. 무리한 정립에, 네 번째와 다섯 번째 가속을 맡은 어깨와 팔꿈치는 그야말로 형편없이 부서져나간다. 그러나 돌진. 실패하면, 죽는다! 부서지는 것 따윈 아무 것도 아니다. 실제로 죽음 따위 아무것도 아니다. 하지만, 복수의 기회를 놓치고 싶지는 않았다. 이번이 지나면, 더 이상 그를 증오할 수 없게 되어버릴 것 같았다. 허탈함이 남을 뿐. ‘그런 건 싫다!’ 집중한 주먹을 힘차게 내지른다. 관통의 총경, 전사통시! 어찌나 강렬한 위력이었는지, 허공에서 샴페인 뚜껑 따는 소리까지 울렸다. 물론 그들은 의식하지 못한다. 극도의 집중은, 서로간의 시선과, 살기만을 의식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뒤늦게, 창이 뿜어졌다. ――――――······. 소리는 없었다. 다만, 심장을 꿰뚫린 채로 죽음을 향해 날아가는 성우만이 있을 뿐. 패인은 타이밍, 성우의 전사통시는 백상린의 잔영만을 꿰뚫었을 뿐이다. 창이 만들어지고 있을 때, 이미 백상린도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리고 섬광이 날았다. 성우가 아는 건 그것뿐이었다. 뚜렷한 의식 속에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기분이 이럴까? 시원함마저 느꼈다. ‘아직··· 끝나진 않았어!’ 성우는 새까만 무저갱 같은 깊은 계곡 속으로 떨어지며 조끼를 벗어 절벽 위에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백상린을 향해 던졌다. 주머니에 넣어둔 캡슐이 폭발했다. 출혈로 인해 낮아진 성우의 청력범위를 초월한 폭발음이 같은 게 계곡을 진동시켰다. 조끼에 달려있던 남은 세 개의 탄창이 터져나가며 클레모아같이 총탄을 날렸다. 결과는 모른다. ‘유라 씨······.’ 성우는 의식을 닿았다. 유라의 아버지는 주변에 가히 특급이라 할 수 있는 기환진을 쳤다. 밖을 보면, 난데없이 등선이 일어나있을 것이다. 그것도 물리적으로 건드릴 수 있을 정도로 완벽한 게. 그렇게 만들어진 공간 안에서 수십 년 만에 해후한 부녀는 이야기를 나눴다. “표정이 많이 굳어졌구나.” “아니에요. 아버지.” “흐음, 그래? 그래도 귀여운 걸?” 아닌 게 아니라 본바탕이 아름다워, 무엇을 해도 귀엽게 보일 텐데 덤으로 딸아이라는 첨부사항이 있으니, 귀엽게 보이지 않을 리가 있을까. 하지만 그의 말은 마치, 딸이 아닌 여자를 꼬시는 것 같았다. “그런데, 저 사람은 뭐였죠?” “아아, 나를 쫓아온 단륜부다. 그들의 정보망에는 천곤 배양관이란 사람이 신강에 들어왔다는 게, 포착되지 않았을 테니 뭔가 석연치 않았겠지.” “······그게 중부연금술사가 움직인 이유가 될까요?” “계획한 일에 틀어지는 걸 원치 않은 것뿐이겠지. 계획이란 너의 죽음이겠고.” “······역시··· 혈사들은 구요성이 개입했나보군요.” “우리들로선 지금 상관할 바는 아니지. 하지만 그들에게는 급했겠지.” “으음······.” 유라는 고민에 잠긴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순간, 유라의 아버지는 유라의 가방을 열었다. 마치 딸의 비밀상자를 여는 듯한 짓궂은 표정으로 말이다. 그러나 소녀가 가질만한 비밀스러운 무언가는 없었다. 실망 반, 놀라움 반의 탄성이 터졌다. “놀랍군. 이것 현재 북부의 기술이냐?” “아뇨, 그것은 우연히 만난 한 사내에게서 받은 거예요. 북부의 정밀기계장치는 이런 것을 만들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에요.” “으음, 그래. 그렇다면 당분간 이것은 너만이 가지고 있어라. 문명을 파괴할 정도로 압도적인 힘이 될지도 모르겠다.” “에?” “오직 북부에서 얻은 기술만, 남부제국의 발전에 투여해라. 그 사내가 어떤 자인지는 몰라도, 이것들의 제작방식과 위력은 획기적이다. 더 큰 싸움을 불러일으키는 마물이 될지도 모르겠다.” “그··· 정도인가요.” 그는 가방을 계속 뒤적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적어도 한 집단이 가지기엔, 너무나 파멸적인 힘이지. 음?” 가방의 가장 하단 부에, 숨겨진 주머니가 있었다. 아마, 그 자신이 원하는 딸아이의 비밀스러운 것은 여기 있을 것 같았다. 유라는 자신조차 모르는 곳에 달려있는 주머니를 꺼내는 아버지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런 게 있었나?’ 아버지는 주머니를 열고 땅바닥에 내용물을 쏟았다. 그 순간, 유라의 눈동자가 급속히 흔들렸다. 흔들리다 못해, 눈물까지 샘솟았다. “음? 호오, 아름답구나. 상당한 솜씨의 그림인데? 옷도 예쁜 것으로만 입혀졌군. 무엇보다 맘에 드는 건, 웃고 있다는 건데······ 아비의 선물이냐·······? 음. 왜 그러는 것이냐.” “아아아아·······! 유라는 단지 솟아나는 눈물을 참기 힘들어, 답답한 신음만을 토해냈다. 그가 너무 보고 싶었다. [2권 끝] -------------------------------------------------- 외전 Valkyrie † Mirage 철썩-- 바닷바람이 사위에서 휘몰아친다. 높게 갈라지는 파도. 파도를 가르는 선수船首에 그녀는 서 있었다. 고귀한 신분으로써 직접 일어나 수많은 전장에 이르러, 불패의 신화를 이룩해 온 강철의 여인. 또래의 여자가 자신의 얼굴을 꾸밀 때, 그녀는 몸을 단련했다. 또래의 여자가 남자친구를 사귈 때, 그녀는 병사들과 뒤척였다. 그렇게 얻은 명예는 남해의 패자, 바다의 여신. 조각 같은 외모에 햇볕에 그을린 구릿빛 피부여도, 그녀는 아름다웠다. 그 고귀한 기품과 아름다움이 없었다면 그녀는 그저 마녀라고 불렸겠지. 바닷바람의 휘날려진 그녀의 벨벳 같은 머리카락 사이로 한 줄기의 연기와 불빛이 피어오른다. “후우-” 도톰한 입술에 물려진 손가락 길이의 막대. 담배라 불리는 것이었다. 이제는 그녀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어있었다. 매일매일, 단 한 번도 담배를 거르지 않고 피워대기에 안개의 군주라고 까지 불릴 정도였다. 사실 남모를 사정 따윈 없다. 그냥, 예전부터 있었기에 피울 뿐. 해영海營은 담배를 손가락에 끼우고 다른 손으로 도파刀把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칼날이 90센티에 이르는 곡도였다. 손잡이의 길이는 30센티 정도로 상당히 긴 편이었다. 손잡이 끝에는 고리가 달려있어, 끈을 묶을 수 있게 되어있다. 장식과 같은 비효율적인 것을 일체 배제한, 오직 해상에서 실용적으로 쓸 수 있는 무기였다. 그것이 언제 빼들었는지도 모를 속도로 빠져나와 뒤를 향해 날았다. 휘익-! 해영의 뒤에서 잠시 그림자가 나타났다, 사라졌다. 곡도를 피하느라, 은신이 파괴된 것이다. 곡도는 부메랑처럼 배 주위를 한 바퀴 돌다가, 해영의 면전으로 돌아왔다. 해영은 손을 내밀어, 날카롭게 회전하는 곡도의 도파를 잡아채고 다시 칼집으로 회수했다. “후우- 다시는 내 뒤에 서지 마.” “명심하겠습니다.” 웃음소리가 섞인 맑은 목소리였다. 뭔가, 감정 하나가 부족한 목소리라고, 해영은 생각했다. 선실의 그림자에서부터, 한 소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특이한 복장을 하고 있었다. 치렁치렁한 치마에, 상체는 몸에 딱 붙게 되어있고, 곡선의 향연이라 부를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난 수의 레이스들을 달고 있었다. '언제 봐도, 비실용적이군.‘ 그녀가 말한 실용은 아마 전투. 전투뿐만이 아니라 습기가 가득한 바다 위에서는, 불편한 옷차림이 아닐 수 없었다. 비전투시에도, 활동성을 강조한 옷차림을 한 해영에 비하면 바다에 어울리지 않기가 가히 저주 수준일 정도였다. “담배를··· 피우시나 보죠?” “아아, 뭐 그렇지.” 건성으로 대답하며 다시 담배를 한 모금 빤다. 자신을 백환제국의 제상인 하영霞瑩의 딸이라고 소개한 소녀의 이름은 유라. 단신으로 해영을 찾아와, 시중을 들기 위해 왔다고만 말했다. 그녀에 대해선 아무것도 아는 게 없었다. 다만, 숨기고 있는 게 많고, 항상 거대한 가방을 들고 있을 정도로 보기보다 힘이 세다. 그리고 무슨 이유에선지, 웃고 있는 얼굴밖에 보이지 않는다. 이름과 정확한 출신만 알면 된다지만, 신뢰할 수 없는 여자다. 그렇게 생각하고, 평어조로 말했다. “불만인가? 네가 담배 피우는 게?” 그녀는 여전히 웃는 낯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뇨, 다만, 3년 전에 잃어버렸던 소중한 친구가 생각나서요.” 여유로운 미소 속에, 그리움이 맴돌았다. 조금 놀라웠다. 웃는 얼굴도 이렇게 다채로울 수가 있다니. “훗, 그 친구란 얌전히 상대를 따르는 강아지라도 되는가 보군.” 심술궂은 마음으로 스스로를 비하하는 말을 해준다. 해영은 담배를 잘근잘근 씹다가, 담배가 모두 타자 내력을 일으켜 분쇄했다. 연기와 함께 연초가루가 바닷바람에 흩어졌다. “춥군. 들어가지.” 선실로 몸을 돌렸다. “네, 침상은 정리해두었습니다.” 문득, 해영은 걸음을 멈췄다. “자네는 왜 웃지?” 유라는 한참을 생각했다. 어느 순간, 그녀의 얼굴은 무표정이 되어있었다. 눈의 착각인가, 하고 그녀를 다시 봤을 때, 그녀의 표정은 웃는 낯이었다. 그녀가 말했다. “친구가 그것을 원했거든요.” 3년이 지난 지금도, 그녀의 가방 깊은 곳에는 그가 그린 그림이 남아있었다. ---------------------------------------------------- chapter 13, Challenge -------In to the hell? 긴 기계음이 울리고 매끄러운 금속의 덮개가 밀려나갔다. 쉬이이익 밀폐되어있던 공간이 열리며 안개 같은 기체가 뿜어져 나왔다. 시원한 바람이 부는 정도였지만 성우가 상관할 바는 아니었다. 시트에 여전히 등을 대고 있는 채로, 그는 상념에 잠겨있었다. 저곳에서의 자신과, 이곳에서의 자신. 그 괴리감은 상당했다. 괴리감에 치여, 고뇌할 신경 같은 건, 성우는 태어났을 때부터 버리고 왔다고 할 수 있었다. 오히려, 통쾌함마저 들었다. 아니, 통쾌함이라는 단어로 포장하기엔 너무 벅차다. 지금까지 조용한 생활을 영위하던 마음 내부에 웅크려있던, 또 하나의 자신이 날개를 펼칠 곳을 찾아버린 것 같다. 그것은 죽을 때의 강렬한 고통마저 감안할 정도로 아름다운 현상. 성우의 얼굴은 어느 때보다도 희열에 가득 차 있었다. 문득, 그의 얼굴에 걱정이 스쳤다. ‘유라 씨, 당신을 만나는 것은··· 늦겠군요.’ 한 번 죽은 뒤, 다시 슬립머신에 들어가면,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후, 죽은 곳에서 다시 시작하는 것 같았다. ‘어느 정도 시간’은 성우만의 예상이지만, 슬립머신의 한계 수면시간인 30분이 아닐까 한다. 심호흡을 하고, 몸을 일으켰다. ‘스케줄을··· 짜야하는 건가.’ 한 번, 일을 시작한 이상 끝을 봐야 한다. 그리고 끝을 보기 위해선 철저해야 했다. 우선 알아야 할 건 슬립머신과 현실의 관계다. 어떤 법칙이 있는 것인지 먼저 알아야 했다. 하지만 결국 경험이 있어야 하니 현재로서는 뒤로 미룰 일이다. 그리고 저쪽 세계에 대한 정보 역시 필요했다. 그러나 이것 역시 저쪽 세계에서의 경험으로 얻어지니 지금 머리 싸맬 필요는 없었다. 결국 이곳에서 할 수 있는 건 시간표를 짜서 효율적으로 현실과 저쪽세계와의 줄타기를 하는 것뿐이다. 일부러 일상을 버려가면서까지 유라를 만날 필요는 없었다. 충분히 두 가지 일을 할 수 있으면, 두 가지 모두 잡는 게 좋다. “30분이라··· 다행히 편하게 짤 수 있겠군.” 성우는 시계를 쳐다보았다. 현재 시각은 3시 16분, 2시 45분 정도에 슬립머신에 몸을 맡겼으니, 정확히 30분이 소요된 것이다. 스케줄을 편하게 짜기 위해선 3시 30분 정각이 되기를 기다리는 게 좋다. 굳이 이렇게 시간을 두는 건, 그에게도 휴식시간이란 게 필요해서였다. 물론 휴식을 위한 머신에서 나온 몸에 더 이상의 휴식은 필요 없다. 단지, 휘몰아치는 상념을 정돈할 자투리 시간이 필요할 뿐이었다. 휘몰아치는 상념, 이번의 그것은 육편의 우박이 튀고 혈우의 폭풍이 내리는 종류로 가득 차 있었다. 인간을 죽였다. 그가 당긴 방아쇠의 무게보다 훨씬 가치 있을 지도 모를 인간의 생명이 방아쇠를 당기는 만큼의 노력에 사라졌다. 이상하게도 살인의 여운은 없다. 아니 있다. 그러나 보통사람들처럼 한꺼번에 죄책감이 닥쳐오는 게 아니었다. 마치 텍스트가 지나가듯, 소설책을 읽어나가듯 생각이 날 뿐이다. 네 놈은 사람을 죽였다. 따위의 문장을 읽어나가듯. 무미건조한 여운에 오히려 멍청하게 반문까지 하고 싶을 정도였다. ‘몇 명이나?’ 그는 만화에나 나오는 적까지 구원하는 먼치킨 히어로 따위가 아니다. 단지 인간일 뿐이다. 그것도 인간의 본능에 충실하고, 가슴 속 깊이 일어나는 충동을 소중히 여기는, 무언가 비틀려있는 인간이었다. 성우는 거실소파에 몸을 맡겼다. 한쪽 다리를 다른 쪽 다리에 걸치고 눈을 감았다. ‘위선······을 챙길 마음은··· 없어.’ 그러나 이성과는 달리 아직은 연약한 몸이었는지, 조금은 떨고 있다. 철저한 악당이라면 누구의 말처럼 쾌락까지 느끼며 죽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성우에게 백상린을 제외한 그들은 철저한 악당은 못 된다. 정당화하진 않는다. 거부하지도 않는다. 자기혐오 역시 없다. 살인의 공포도 마찬가지다. 결론은 생각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영상은 성우의 머릿속에서 활자화 되어 기록으로 한 구석에 조용히 남을 뿐이다. 죄는 있으되, 악은 없다. 그렇기에 괴로워할 필요 역시 없다. 그렇기에 어느새 성우는 간식을 입에 넣으며 슬립머신 안에 있는 자신의 물건들을 살펴보는 다음 행동에 들어가 있는 것이다. 저쪽 세계에 갔었던 물건 대부분은, 그대로 다시 돌아와 있다. 물론 눈에 띄게 보이는 것은 기관단총 두 정과, 샷건, 배낭뿐이다. ‘음?’ 뭔가가 부족하다. 그리고 뭔가가 늘어나 있다. 부족한 것은 PSG-1 커스텀이다. 배낭 속에 분리해 넣어두고 저쪽 세계로 간 것이 기억났다. 그러나 배낭을 열어봐도 개머리판이나 여타 파츠는 보이지 않았다. ‘그럼 저건 뭐야?’ 슬립머신 시트 한 구석에 얌전히 놓여있는 장검 두 자루. 새파랗게 벼려진 패검으로 검신은 80센티에 폭은 3센티, 손잡이는 20센티 정도 되는 검들이었다. 상당한 수준의 명검인 듯, 예기가 상당했다.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데, 저런 시대에 뒤떨어지는 것을 가져간 적은 없었다. 명검보도라도 깨부수는 총탄이 있는데 칼 따위를 준비할 리 없잖은가. 어느 순간 깨달았다. 백상린··· 그 녀석의 검이었다. 절벽에 박고 내려오면서 썼던 검들이기도 했다. ‘그런데 어째서?’ 이해할 수 없었다. PSG-1은 어디가고, 검들만 두 자루라니. 가만히 앉아서 고민하기보다 가던 때와 왔을 때의 장비를 비교해보기 시작했다. 그 결과 놀라운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어느 틈엔가 생명줄이 주머니 안에 있었던 것이다. 반가움에 생명줄을 입에 물고 불었다. 순간, 전신이 따가워졌다. 마혈균의 효력이 한순간 물러가니, 통기경의 부작용이 드러난 것이다. ‘진품이군.’ 어째서 일까? 다른 것들은 모두 원상태로 돌아와 있었다. 아니, 캡슐이 몇 개 부족했다. 마침, 생명줄과 통기경의 남은 개수와 비슷했다. 이것이 뜻하는 게 뭘까. “설마··· 물물교환? 등가교환인 거야?” 생각해보면 마총은 매그넘과의 교환에서 얻어진 것이었다. 여타 다른 것들도 비슷하게 얻어진 것이라 할 수 있을까? 현실에서 가져간 하나를 버리면 같은 부피의 하나를 이곳으로 가져올 수 있게 되는 거라 추측했다. ‘버리더라도, 대비되는 물건을 얻지 않으면 다시 백업되는 것인가?’ 모두 쓰더라도, 다시 생성되는 총알의 경우를 생각하면 그렇게 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외할아버지의 유품을··· 다른 세계에다 버리고 오다니. 나도 참 대단한 짓을 해버렸군.” 어차피 저격총은 완전히 박살났다. 절벽에서 떨어져 산산조각 난 그 총에 미련은 없었다. 아깝긴 해도 말이다. 성우는 백상린의 검을 벽장 한 구석에 던져 넣었다. 명검이긴 해도, 검을 다뤄본 적이 없는 성우에게 있어, 필요 없는 물건이었다. “배도 채웠고, 슬슬 시간도 되었군. 후우- 그럼 가볼까······” 성우는 무장을 다시 챙기고 슬립머신에 누웠다. ‘죽으러 말이야.’ 시야가 새까맣게 변하더니, 다음은 알 수 없었다. 정신이 든 성우가 제일 먼저 느낀 것은 부유감이었다. “으악!” 그리고 테러처럼 찾아오는 추락. 그 순간 놓치고 있던 것을 깨달았다. 성우는 백상린에 의해 심장을 강탈당하면서 절벽에 떨어졌다. 추락사는 아니었다. 한 100미터 정도를 떨어지는가 싶더니, 그 순간부터 정신이 사라져버렸으니까. 그리고 깨어났을 때는 회색 익숙한 천장이 보일 뿐이었다. 아직도 한참동안의 추락할 거리가 더 남아있다는 소리였다. “꼴사납게 투신자살이라니이이이!” 수많은 노이로제 걸린 고교생들의 허무한 충동을 단순히 꼴사나운 것으로 비하하며 성우는 에어 다이빙을 하듯 몸을 쫙 폈다. 물론 경험은 없었다. 다만, 지식이 있을 뿐이다. 몸의 균형감각 하나는 완벽한 성우였기에, 베테랑까지는 아니더라도 몇 번 경험한 사람보다는 훨씬 바람을 잘 탈 수 있었다. 아직도 통기경과 마혈균으로 인한 남의 수십 배에 달하는 정보처리 능력과 반응력이 있었기에 단순히 추락하는 사람보다 훨씬 여유 있게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1, 나는 떨어진다. 2, 이곳은 상당히 깊다. 3, 이 세계의 물리법칙은 현실과 별반 다르지 않다. 4. 내 몸은 무쇠가 아니다. 사실 무쇠라도 찌그러질 추락속도다. 5. 고로 추락사가 확실하다. 6, 낙하산은 없다. 빌어먹을, 이다. 7, 앞에 꺼 취소한다 치고, 이대로라면 죽을지도 모른다. 8. ······뭘 해? 그 순간 강렬한 계곡풍이 불어, 추락속도를 늦추고 있던 성우의 몸이 뒤틀렸다. 덕분에 추락속도는 빨라졌다. ‘불려면 상승기류로 부탁해. 따위의 부탁을 들어줬으면 나는 먼치킨 마법사가 되는 건가?’ 사실 성우가 마법이라고 부를 수 있는 기술을 사용하는 서대륙에서부유마법, 아니 부유마술은 그리 어려운 게 아니다. 익힌다고 먼치킨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모르기에 약이라는 거고, 알더라도 이 순간만큼은 간절했다. 그러나 끝내 상승기류가 불 기미가 보이지 않자, 결국엔 성우도 포기했다. ‘결국 삶은 스스로 개척해나가는 거다.’ 요상한 상황에서 대각大覺한 성우는 주머니를 열어 모든 캡슐을 꺼냈다. 대략 20개 정도고, 이걸 잘만 터트리면 웬만한 빌딩 하나 무너뜨리는 건 시간문제라 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양이었다. 백상린과의 대결의 시작을 알린, 절벽에서의 재탕이라 할 수 있었다. 폭발의 후폭풍으로 인위적인 상승기류를 만드는 것이다. 우선 캡슐을 충격폭탄으로 맞춰놓고, 새까만 땅을 향해 던졌다. 잠시 후, 상당히 먼 곳에서부터 빛이 일어났다. 하지만 시간상으로면 3초 안에 도착할 엄청 가까운 곳이었다. 그의 몸에 걸린 가속도는 어느새 아음속에 도달하고 있었다. ‘제기랄!’ 가릴 것 없이 성우는 전 캡슐을 지상을 향해 퍼부었다. 그리고 몸을 제어에 절벽 면에 붙었다. 경을 담은 왼발이 절벽을 후려쳤다, 우득, 발목이 꺾여나갔다. ‘하지만!’ 이 정도에 포기할 수는 없었다. 발목이 꺾여지는 순간, 성우의 손에 들린 총들이 일제히 폭염을 토했다. 반동을 이용해 추락을 멈추는 것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정도로 그런 게 가능했으면 총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모두 슈퍼맨이 될 것이다. 반동으로 하늘을 날 수 있을 정도일 테니. 다만, 반동으로 추락하는 몸의 방향을 조절할 순 있었다. 회전하는 성우의 신형이 다시 부딪쳤다. 이번엔 좀 달랐다. 성우의 몸속에서 가속한 경의 탄환이 폭풍처럼 풀려나왔다. 푸카아악-! 선풍완격의 응용이라 할 수 있었다. 절벽을 후려친 발에서 일어난 여력을 모아, 발사관을 정립시켜, 몸 내부에 발사관을 만든다. 다만, 원처럼 출구가 없는 발사관이었다. 적은 여력으로 일어난 폭풍의 탄환에 위력을 주려면 연속된 추진으로 인한 가속 밖에 없었다. 하지만 가속할 부분은 한정되어있었다. 그리고 기적이 일어났다. 환상의 제사총경의 원리가 갑작스럽게 생각난 것이었다. 원을 만들어 힘을 무한히 증폭시킨다는······. 다른 건 필요 없었다. 원이라는 발사관의 개념이 필요했다. 어느 순간보다 빨리, 성우는 경체를 구축했다. 절벽을 때린 여력이 경의 탄환으로 변환되고 성우의 상체까지 도달하자, 성우는 원의 발사관 안에 탄환을 가두고 끊임없이 가속만 시켰다. 그리고 타이밍을 노려 발사관의 입구를 팔로 연결한다! 그렇게 해서 내뿜어진 선풍완격은 정상적인 진각을 취한 후, 때려 넣는 그것보다 위력이 약했으나, 못지는 않았다. 파공음이 일어나며 수천 년 동안을 걸쳐 자연에 깎여졌던 절벽은 인위적인 힘에 다시 깎였다. 성우는 전신이 너덜너덜해지는 반동에 신음을 삼켰으나, 그 반동이 생명줄이었다. 확실히 가속도는 줄어들고 있었다. 콰아앙-! 그 때, 대지에서 폭발이 일어나고 갑작스레 치솟은 거대한 폭풍이 성우의 몸을 덮쳤다. 그리고 내구력의 한계에 달한 성우의 몸은 정신을 잠시 동안 잠들게 했다. ‘으윽··· 살아··· 있나?’ 몸에 아픈 구석은 없었다. 절벽에서 떨어진 후, 주기가 돌아, 몸을 원상태로 백업시킨 것 같았다. 다만, 한기가 침투해 삐걱거릴 뿐이었다. 성우는 심호흡을 하며 몸을 일으켰다. 하늘에는 벌써 해가 뜨고 있었다. 그 빛조차도 겨우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깊은 곳이었다. 하지만 묘하게 밝은 곳이다. 알고 보니, 절벽 곳곳에는 스스로 빛을 뿜는 수정 같이 생긴 광석들이 박혀있었다. 자신이 눕고 있던 바닥을 살펴보았다. 새까맣게 타진 게, 캡슐이 폭발한 자리였을 것이다. 성분을 자세히 알 수 없는 미세한 가루들이 쌓여 백사장 바닥과 같은 감촉을 주었다. 이게 스펀지 역할을 했기 때문에 살아날 수 있었을 것이다. 그 바깥으로 딱딱한 암석이 만져졌다. 폭발로 인해, 이 자리만큼은 가루가 된 것이었겠지. 그로 인해 목숨을 건진 것이고. ‘역시··· 삶은 개척하는 거야. 음?’ 삶을 긍정적으로 돌아보던 그는 귀를 기울였다. 분명, 이상한 소리가 났다. 크르르르르---! 보통 인간이었으면 정신없이 압도될, 살기로 충만한 으르렁거림. 동시에 짙은 피비린내가 성우의 코를 쑤셨다. 절벽으로 만들어진 그림자들 속에서, 하나 둘씩 귀화鬼火가 솟았다. 모두 한 쌍의 눈동자들이었다. 그리고 서서히, 그림자의 막을 빠져나와, 그 육중한 흉체兇體를 드러내었다. 3.5미터~4미터에 육박하는 거체, 보디빌더 같이 잘 짜여진, 아니 오직 파괴력만을 내기 위해 진화한 근육으로 덮인 몸이었다. 인간처럼 이족보행을 하나, 그것은 인간이 아니다. 새파란 피부에 새빨간 혓바닥을 내밀고 있는 괴물들. 그런 괴물들이 성우의 눈앞에 보인 것만 해도 이십은 되었다. -크아아아아앙! 그들 중 하나가 성우의 몸을 탐욕스러운 눈으로 훑었다. 섬뜩한 기운이 몸을 스치고 지나가는 것을 느낌으로서 정신을 차린 성우는 비릿하게 웃었다. “제길, 지옥인가?” 그의 말이 뱉어진 순간, 괴물들의 돌격이 시작되었다! “멸종시켜버릴지도 모르겠어. 나를 막는다면!” 호기로운 외침과 함께 성우의 손이 휘둘렸다. 휘둘리는 손, 그 끝에는 새까만 총구가 자리해 있었고, 기관단총의 탄피가 불꽃과 함께 쉴 세 없이 튀어나왔다. 드르르르르륵-! 퍽퍽퍽-! 육편이 흩어졌다. 새빨간 피가 절벽을 색칠했다. 인간과 그리 다를 바 없는 장기가 휘날려 동족들의 얼굴을 덮어씌웠다. -크아아아아! 괴물들은 괴성을 지르며 성우를 향해 달려들었다. 성우 역시 가만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다가간다. 한걸음을 내딛었다. 하체는 간단하게 움직였지만, 그 한걸음으로 시작된 상체의 움직임은 분주하기 짝이 없었다. 기관단총을 쏘며 육중한 거체의 전진을 저지하는 것과 동시에 다른 손으로 상의의 주머니에서 캡슐을 꺼내 던졌다. 쾅-! 육편이 비산하며 피안개가 자욱하게 일어났다. 흙먼지 따위와 뒤섞인 붉은 안개는 대비를 하지 않았다면 어느 누구도 쉽게 눈을 뜰 수 없을 게 분명했다. 그 틈을 타, 성우는 괴물들의 군집 안으로 들어갔다. 양손에 기관단총을 쥐고, 두 팔을 수평으로 활짝 벌린 다음 성우는 춤을 추듯 기관단총을 휘두르며 방아쇠를 당겼다. 드르르르륵-! 부챗살처럼 퍼져나가는 탄막에, 진득한 피비린내로 후각이 마비되어 우왕좌왕하던 괴물들의 신체가 박살나기 시작했다. -크어어어어! 괴물의 비명! 섬뜩하게 울렸을 그것에 성우는 총알이 다 떨어진 기관단총을 허리에 걸어놓고 산탄총을 들어 쐈다. 투캉-! “소음공해 따윈 집어치워!” 전신에 산탄이 박혀 비틀거리던 괴물의 머리 위로 총구가 대어졌다. 투캉-! 흉악하게 생긴 머리가 흩어졌다. 성우는 영거리 사격 후, 시체의 몸에 강한 진각을 밟아 쓰러트린 후, 산탄총을 들지 않은 다른 한 손으로 전사통시를 쳐냈다. 퍽-! 급속으로 회전하는 관통의 총경. 중거리에서는 오히려 총보다 위력이 있을지도 모르는 무형의 물리력이 뒤이어 괴물의 가슴을 강타했다. 괴물은 피를 토하며 3미터를 날았고, 성우는 다시 캡슐 3개를 꺼내 한 방향을 집중해서 던졌다. 폭발! 순수한 폭음과 괴물들의 신음소리와 비명이 뒤섞여, 절벽에 메아리쳤다. 추잡하기 그지없는 소리들을 뚫고, 다시 한 번의 외침과 함께 한 발의 총알이 사선을 갈랐다. “폭!” 어느새 들린 마총, 성우의 손등을 타고 붉은색 광선이 달렸다. 광선은 그대로 마총까지 도달했고, 마총과 성우의 손은 하나가 되었다. 총구에서 터져 나오는 붉은 광륜! 상대적으로 늦게 빠져나오는 마탄. 그러나 위력은 절대적이다! 마탄은 그대로 괴물의 눈에 틀어박혔다. 단 2초도 되지 않아, 부풀어 오른 괴물의 전신은 풍선 터지는 소리보다 훨씬 날카롭고 강렬한 소리와 함께 터졌다. 마탄의 저주로 산산조각난 괴물의 육편은 동족의 몸에 닿으며 연쇄적으로 폭발했다. 괴물 여섯 마리가 죽는 데 걸린 시간은 3초면 충분했다. ‘음, 현재로선 폭의 마탄은 연발이 불가능한가.’ 경체의 피로도가 너무 컸다. 정신력으로 한계반응까지 이끌어낼 수야 있겠지만 그것은 현재로선 하책이다. 부상으로 신음하는 괴물들을 지나친 성우는 원래, 괴물들의 보금자리였을 곳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달리면서 탄창을 교환하고, 숨을 고른다. 동시에 통기경의 여력이 어느 정도나 남았는지 계산했다. 통기경이 없이는 저들에게서 살아남을 수는 없다. 하지만 소극적인 대처는 없다. 자존심? 그런 단어로 치장할 필요 없다. 길을 막는 자는 파멸시킨다. ‘아니, 멸종인가?’ 단지 그 뿐! 도움닫기를 하여 몸을 띄우고 공중에서 팽이처럼 뒤돌아선 성우는 자신의 뒤를 쫓아오는 괴물들을 향해 기관단총을 난사했다. 그 반동으로 착지했을 때, 발이 엇갈릴 뻔 했으나 결국 무사히 속력을 잃지 않고 달리기를 계속할 수 있었다. 괴물들은 확실히 인간들보다 가죽이 두터웠다. 혈관도 두터웠고, 근육은 쇠심줄이며, 뼈도 통뼈다. 그러나 총알 자체가 가진 저지력은 그들의 육갑肉鉀으로써도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머리를 맞지 않는 이상 치명적이진 않지만, 결코 무시해도 좋을 정도는 아니다. 오히려 총알에 담긴 힘을 모조리 받아들일 수 있는 몸이기에, 훨씬 고통스럽다! 덕분에 괴물들은 원만한 추적을 할 수 없었다. - 크아우크아우! 분노에 찬 괴물들은 성우가 한 방향으로 신형을 돌리자 발작적으로 소리치기 시작했다. 그곳은 그들만의 성역이다. 절대로 식량 따위가 침범해선 안 되는 금역이란 말이다. 쿵쿵쿵- 괴물들은 더 이상 주저하지 않고 성우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이 내딛는 발걸음의 충격에 성우가 던져 놓은 캡슐은 새하얗게 백열하며 폭발하기 시작했다. 쾅---! 연쇄적인 폭발음으로 멍해진 귀를 파던 성우는 계속 걸음을 옮겼다. 두 갈래의 길이 있었다. 성우는 망설임 없이 오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지금은 달리는 중이었다. 망설이다간, 괴물들에게 따라잡히고 만다. 물론 갈림길에 캡슐하나 놓는 건 잊지 않았다. 잠시 후, 폭발음이 들렸다. 절벽에 수직으로 뿌리 내린 나무들이 보였다. 기형적으로 자란 나무들은 벽에서 자라 반대쪽 벽까지 자라 있어, 성우의 걸음을 멈추게 했다. 바닥 대신 절벽에 빼곡하게 뿌리를 내린 나무들은 어떻게 생각해도 신기했다. 나무에 붙은 버섯 같다고나 할까? 그런 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음에야, 걸음을 멈추지 않을 수 있겠나. 하지만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음····· 빙고인가?” 통나무를 쌓아둔 것처럼 가로로 자란 나무들 사이에서 하나 둘씩 흉측한 얼굴을 내미는 괴물들이 보였다. 그들은 성우를 보더니 혓바닥으로 입가를 햩으며 식탐을 드러냈다. 이곳이 바로 괴물들의 본거지였다. “얌전히 먹혀줄 순 없어.” 가장 가까이에 있는 괴물의 머리를 향해 총구를 들이대고 방아쇠를 당겼다. 흩어지는 뼛조각과 뇌수가 체크플래그가 되어 종족간의 사투를 알렸다. - 크아우! 크아우! 첫 번째로 성우를 만났던 괴물들이 뒤따라왔다. 수는 6, 그나마 무사한 괴물은 거의 없었다. 고통에 비명을 지르면서도, 무엇엔가 홀린 듯 성우를 쫓아온 것이다. 사면초가라 할 수 있는 상황에서 성우는 오히려 기형의 숲을 향해 몸을 던졌다. 계단을 밟듯 가로로 뻗어난 나무둥치를 밟으며 이동했다. 나무와 나무 사이간의 거리는 1.5미터 정도로 상당했지만, 이미 그 정도 점프력은 걸으면서 낼 수 있을 정도로 가지고 있었다. 세로로 뻗은 가지를 잡고 몸의 방향을 선회시킨 성우는 자신과 똑같은 방법으로 나무둥치를 올라서고 있는 괴물들을 향해 총구를 겨눴다. 드르르르륵-! 가장 앞서 쫓아오던 괴물의 가슴에 총탄 6개가 박혀들며, 그 여력에 의해 날아간 괴물의 몸은 올라서던 다른 괴물들과 부딪혀 한덩이가 되어 굴러갔다. “스트라이크!” 자신도 모르게 외친 성우는 나무 밑에서 솟아오는 투기를 느끼고 발을 박차 높은 곳에 있는 나무 둥치 위로 올라서며 밑을 내려다보았다. 그곳에는 나무둥치를 부숴버리며 솟아오르고 있는 괴물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이 나무 타는 속도는 성우의 상상을 초월했다. 나무의 탄력을 이용한다 싶더니, 어느새 성우의 곁에 올라와 있었던 것이다! 괴물은 바로 곁에 있는 나뭇가지를 뜯어 몽둥이 삼아 성우의 뒤통수를 향해 휘둘렀다. 강맹하게 떨어지는 몽둥이, 바람 가르는 소리가 섬뜩하게 들렸다. 반면에 성우의 몸은 기민하게 움직여, 나무를 박차고 대각선 점프를 시도함과 동시에 다리를 갈고리처럼 만들어 나무에 다리를 걸었다. 거꾸로 매달린 성우는 헛방질하는 괴물의 정수리를 수직으로 총구를 겨누고 쏜 다음, 그 자리에서 올라서는 많은 무리의 괴물들을 향해 총을 난사했다. 푸가가가각-! 정상적으로 자라지 못한 나무라서 그런지, 총알의 힘을 견디지 못하게 둥치채로 무너져 내리기 일쑤였다. 톱밥들이 하늘하늘 눈처럼 내리기 시작했다. 재수 없게 올라서다가 소나기처럼 떨어져 내리는 총알에 맞은 괴물들은 가로로도 뻗어나는 나무와는 달리 중력이 이끄는 그대로 자유낙하했다. 그러나 가로로 뻗은 나무는, 단지 나무로 볼게 아니다. 나무의 집합인 숲이라 칭할 만큼 광범위하게 뻗어있었다. - 크아아아아앙! 성우의 시야 바깥으로 돌아서 올라온 괴물들이 오히려 위에서부터 떨어져 내리며 성우를 공격했다. 빠각-! 우지끈-! 괴물이 휘두른 몽둥이가 성우가 다리를 걸치고 있던 나무를 격타하자, 나무에 형편없이 꺾였다. 아슬아슬하게 공격을 피한 성우는 바로 대각선 아래쪽에 뻗은 나무 둥치에 발을 딛음과 동시에 반동을 이용해서 날아올랐다. 탄력을 받아 단숨에 괴물의 몸까지 도달한 성우는 카오 드티(올려 무릎치기)로 괴물의 턱을 후려침과 동시에 속 퉁(팔굽 내려찍기)으로 정수리를 가격했다. 성우의 팔꿈치를 통해 흘러들어간 둔의 발경이 괴물의 뇌를 진탕으로 만들었다. “보답은 필요 없어.” 이미 정신을 잃은 괴물의 입에 캡슐을 물려준 성우는 괴물의 몸을 밀어 떨어트렸다. 펑-! 떨어져 내리는 자신의 동족을 얼떨결에 받은 괴물은 동족의 머리에서부터 터져 나오는 하얀섬광과 붉은 폭염에 뒤덮여 목숨을 잃었다. 붉게 피어올라오는 혈무를 내려다본 성우는 황급히 몸을 옮기며 생각했다. ‘······시간이 되었나?’ 슬슬 통기경의 약효가 떨어질 시간이었다. 기절해 있는 동안, 많은 시간이 흐른 덕분에 짧은 전투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피해야 했다. ‘후우, 두고 보자. 멸종시켜주마.’ 절벽에서 가로로 줄기를 뻗은 나무가 모여 있는 숲. 성우는 그가 이름 짓기로 버섯나무의 숲이라 명칭 한 숲을 벗어났다. -크워우우우우! 계속적으로 괴물들이 쫓아오고 있었다. 남은 캡슐로 상대의 추격을 봉쇄하고 숲을 벗어난 성우는 앞에 펼쳐진 절벽에 탄식했다. 그러다가 절벽 한 구석에 보이는 동굴을 발견했다. ‘동굴? 절벽? 절벽에 난 동굴? ·······기연?’ 어째서 그렇게 이어지는 것인지 미처 생각할 겨를도 없이, 성우는 절벽을 오르기 시작했다. 생각처럼 기연 같은 게 없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효율적으로 쉴 곳이 필요한 지금은,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들어가야 하는 게 동굴이었다. 동굴까지 올라선 성우는 급격하게 느려지는 시야를 발견했다. 황급히 주머니에서 생명줄을 꺼내 입에 물었다. 피이이이이- “후우우우- 살았다.” 그 순간, 전신이 성우의 의식과는 상관없이 부르르 떨었다. 성우의 고개가 황급히 동굴 안으로 향했다. “뭐, 뭐야?” 짧은 중얼거림이었으나, 크게 메아리치는 것으로 보아 동굴 안의 넓이와 깊이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갔다. 두------근! 하아-하아-하아---! 숨소리가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어째서 인거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았지만 대답은 없었다. 그 어떠한 외압에서도 무관하게 넘기는 무신경이 바로 성우다. 그런데··· 무언가에 휩쓸려있다. 무신경하게 넘길 만한 게 아니다! 성우가 자각했을 때는 이미, 몸은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아아, 끌려 다니는 건 사양이다!” 저항한다. 끊임없는 저항이야 말로, 그를 지탱하는 가치관인 것은 아니었을 터다. 하지만 계속적으로 다른 사람의 계획에 휘말려든 경험에 의해 반항적이 된 건 사실이었다. 그리고 움직였다. 총을 꺼내 동굴을 향해 난사했다. 탕탕탕-! 하지만 되돌아오는 소리는 없었다. 총성만 메아리 칠 뿐. 위화감이 전신을 흠뻑 적신다. ‘쇳소리도 없는··· 거야?’ 총알이 어딘가에 부딪치는 소리 정도는 나와야 한다. 메아리로 파악한 동굴의 크기가 제대로 된 것이라면 그게 정상일 터다. 그 순간. 부카아아앙-! 무형의 막대한 힘이 바람을 가르고 성우의 머리를 향해 날아왔다. 성우는 피할 수 없었다. 그것은 너무나 빨랐고, 너무나 갑작스러웠으며, 너무나 강렬했다! 퍼걱-! 의식은··· 그것으로 사라졌다. 고통은 없었다. “·······뭐야?” 오후 4시. 잠에서 깨어난 성우는 상쾌하다 못해 나른한 몸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렇게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다. 황당했다. 고통조차 느끼지 못하고 시야가 잠겼다. 그리고 눈을 뜨니 깨어있었다. 무언가 클라이막스를 빼버린 대본을 자신이 직접 연기한 기분이었다. 정말 허무한 죽음. 흉수의 정체는커녕, 무엇에 죽었는지도 몰랐다. 그 허탈함은 도저히 말로 표현할 수 있는 영역에 들어있는 게 아니었다. 다시 제정신을 차리고 슬립머신에 들어간 것은, 그로부터 한참 후인 4시 30분이었다. +++++++++++ “후우, 참 오랜만에 보는 햇빛이군.” 6척 키에 마른 몸매, 몇 년 동안 깎지 않았는지, 수염을 잔뜩 기른 봉두난발의 괴인은 평온한 눈으로 푸른 하늘을 바라보았다. 몇 년 만의 외출일까. 쥐새끼 한 마리가 동굴을 들어오려고 하기에 손을 쓴 김에 시체나 치우려고 나왔는데 시체는 없었고 바닥에 깔리는 빛만이 보였다. 오랜만에 밝은 빛을 보니, 하늘까지 보고 싶었다. 그렇게 본 시리도록 푸른 하늘은, 후회의 감정을 일체 배제했다. 크게 심호흡을 했다. 난데없이 악취에 마비된 줄 알았던 후각이, 피비린내를 포착했다. “음? 식귀食鬼들이 아직도 여기에 있는 건가?” 털로 덮여 부드러운 빛을 띄고 있었던 눈빛이 갑자기 날카롭게 변했다. 그의 시선에 담긴 것은 ‘가로로 자라는 나무들의 숲’을 타넘으며 자신이 있는 곳, 즉, 동굴로 달려드는 수십 마리의 거대생물체들이었다. 식귀라고 불리는 이 생물은 인간에 비해 10배를 능가하는 근력과, 체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에 비례해서 먹는 것도 많았다. 게다가 나름대로의 지능까지 갖추고 있어 인간처럼 무기를 쓴다. 보통 생물이라면 기절할 정도로 심한 살기를 흘리고 두려움을 모르는 투쟁본능으로 똘똘 뭉친 녀석이라, 먹이사슬의 최상층에 속해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그러나 그에게는 식후 운동거리도 안 되는 것들이었다. “오랜만에··· 청소 좀 해볼까.” 그는 자신의 오른손 안에 들린 세 개의 쇠구슬을 머리 위로 한 번 던졌다가 공깃돌쥐기하는 것처럼 가볍게 잡아챘다. 그 순간, 달려드는 식귀들을 향해 세 개의 쇠구슬이 날았다. 피슝-! 총탄보다 빠른 쇠구슬, 사실 이 쇠구슬은 총탄의 탄두였기에 말이 틀리다. 하지만 확실한 건 하나있다. 이 쇠구슬이 가지는 탄속은 소총탄보다는 빠르고, 저격총과 비견될 정도다! 퍽-! 단 한 순간에 그것도 동시에 던졌는데, 세 개의 탄두는 각기 다른 방향으로 흩어지더니, 세 마리의 식귀의 머리를 관통했다. 그에 모자라 뒤 따라 달리던 식귀까지 꿰뚫고서야 멈췄다. 괴인의 발이 절벽 아래, 텅빈 허공을 내딛었다. 당연하게도 괴인은 곧바로 절벽 아래로 떨어졌다. 탁- 그가 떨어지면서 살포시 절벽을 향해 발을 박차자, 그의 신형은 쏜 화살처럼 60미터 정도를 날아가다가 포물선운동을 하면서 안전히 땅에 착지했다. 일단 지면에 발을 내딛은 그는 질주하는 맹호일 따름이었다. 쾅-! 절벽에 매달린 나무까지 흔들리게 하는 강렬한 진각! 그의 헤진 옷자락이 오른팔에 모이는 막대한 기류에 휘감기며 세차게 펄럭였다. “합!” 기합과 함께 발출된 일권. 7개의 공파륜(空破輪. 소닉웨이브현상)을 만들며 돌진하는 권력拳力! 그것은 믿을 수 없게도 그를 향해 뛰어드는 수십 마리의 식귀들을 일순간, 핏덩어리로 만들고, 그도 모자라 수많은 기형나무들을 가루로 만들어버렸다. 약, 25미터. 그의 권력이 영향을 미친 거리였다. 그렇게, 일방적인 도살은 시작되었다. 눈을 뜨자마자 통기경부터 삼킨 성우는 감각반경을 넓히며 혹시나 있을 공격에 대비함과 동시에 두 기관단총의 총구를 동굴이 만들어낸 어둠을 향해 겨눴다.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반응은 난데없는 곳에서부터 일어났다. - 꾸에에에엑! 돼지 멱따는 소리가, 후방에서부터 들려왔다. 뒤를 돌아보니, 폐허가 된 버섯나무숲이 보이고, 그 잔해 위로 괴물들의 육편이 보였다. ‘······떡?’ 난데없이 떠올린 것이 결코 아니었다. 괴물들의 육편은 공업용 프레스로 압축시켜놓은 것처럼, 떡이 되어있었다. 돼지 멱따는 소리는 한참동안 계속울렸다. 그리고 어느 순간. 쾅-! 숲속에서 나무의 파편들이 치솟아 올랐다. 양으로 따지자면 족히 수 톤은 될 대량의 파편들!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톱밥으로 인한 먼지 속에, 붉게 물든 덩어리들이 휘날렸다. “뭐야. 대체··· 뭐인거야?” 마치 80mm박격포가 직격된 것 같은, 숲의 잔해들을 본 성우는 그런 단순한 말 이외엔 내뱉을 게 없었다. “···상관없나.” 언제나처럼 무시한다. 하지만 그의 의지를 벗어나 제멋대로 전율하는 몸은 무시할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성우는 멍하니 숲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먼지들을 해치고 나오는 하나의 인영을 보았다. 봉두난발을 한 그를 보는 순간, 전신세포가 들끓었다. 살의! 분명 성우의 몸은 그의 제어를 벗어나 살의를 내뿜고 있었다. 괴인과 시선이 마주쳤다. 그 순간, 괴인이 동굴을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트르르륵-! 드르르르륵-! 두 개의 총구가 불을 뿜었다. 비 내리듯 쏟아지는 총알, 백상린처럼 방패가 있거나, 철령을 사용하여 인력과 척력작용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자가 아니라면, 값싼 고깃덩어리가 되겠지. 망설임은 없다. 그냥 죽인다. 몸의 본능에 충실할 뿐이다. 탄창을 모조리 비웠고, 미세한 흔들림만으로 총알의 오차를 줄인 총구는 총 50발의 총탄을 배출했다. 그것들은 모두, 기차선로라도 타는 것처럼 정확하게 괴인의 몸을 향해 폭주하고 있었다. 그러나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괴인이 날아오는 총탄에 반응한다 싶더니, 크게 손을 휘둘렀다. 동작은 크지만 수영이 수십 개나 남을 정도로 빠르게 움직였다. 나선을 그리며 손을 올리고, 손바닥을 쫙 펴, 그대로 내리친다. 쾅-! 그 순간, 거대한 망치가 떨어진 것 같은 자국이 땅에 새겨진다. 수많은 총알들이 일제히 수십 톤의 중력을 받기로도 한 듯, 한순간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정확히는 땅속을 파고들었다. “말도 안 돼!” 자신도 모르게 뱉어지는 외침. 그와는 상관없이 성우의 손은 마총으로 향했다. 전투논리에 짜 맞춰진 몸은 보통의 총으로는 상대가 되지 않을 것을 알고 있다. “열裂.” 유라조차 쓰지 않았던 단음주, 백색 섬광이 손등에 일어났다. 단 한줄기의 광선이었다. 그 한 줄기가, 마총과 성우의 손을 긴밀하게 연결하고 있었다. 쾅-! 백색 광륜이 터졌다. 지금, 그 어떤 총알보다 빠른 탄환이 발사되었다. 총알 자체에 가속력을 가하는 열의 단음주, 말 그대로 대기를 찢는 탄환으로써, 탄속은 유라가 쓰는 그 어떠한 탄환보다도 빠르다! 심지어는 성우가 썼던 저격총보다 빠른 탄속을 지니고 있었다. 물론 성우는 모른다, 써본 적도 없다. 설명을 들은 적도 없다! 하지만 본능이 이끄는 데로 발사한 탄환은 손을 휘두르는 것만으로 총알을 떨어트리는 괴인에겐 가장 효과적이다! 손을 휘두를 시간 자체를 주지 않는 쾌속의 승부! 계속해서 성우를 향해 달리던 괴인은 갑작스레 뻗어오는 빛살을 느꼈다. 그 순간, 이미 빛살은 그의 어깨를 뚫고 나와 뒤편의 땅에 박혔다. ‘안 된다, 이것만으로는 안 돼!’ 이번에는 이성이 먼저 몸의 제어권을 잡았다. 그는 분명히 머리를 겨누고 쐈다. 그러나 그 세 반응하여, 어깨를 꿰뚫린 것만으로 피해를 최소화해낸 것이다. 열의 탄환의 약점이다. 오직 속도만 중시되어있는 이 탄환엔, 그에 알맞은 효과적인 회전력이 존재치 않는다. 관통력은 있어도, 그에 따른 저지력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턱없이 부족하다. 급소를 정통으로 맞추지 않는 이상, 승리라고 보기 어렵다. 괴인은 어깨에서 솟아나는 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성우를 향해 달렸다. 그리고 이번은 성우의 상상을 초월하는 빠르기였다. 통기경으로 인해 화살조차 잡아내던 그의 반응이, 조준조차 제대로 할 수 없을 정도였다. ‘괴물인가.’ 그것도 유라보다 더 하다! 상념을 떠올린 순간, 사내가 동굴 입구에 서서, 빛을 가리고 있었다. “···북부의 쥐새끼인가.” 그의 탁한 음성은 그야말로 무감정하기 짝이 없다. 어느 순간, 그의 눈에 분노가 깃들었다. “남자라면 응당 맨손으로 천하를 상대해야 하는 법!” 신념에 위배되는 성우는 죽어 마땅하다! 그가 말을 꺼내지는 않았지만, 그의 몸에서 풍겨 나오는 패도적인 기세는 말로 전하는 것보다 더욱 확실한 뜻을 전달하고 있었다. ‘······원시시대에서 오셨나요?’ 쾅-! 내심 묻는 것과 동시에, 산탄을 쐈다. 방아쇠를 당김과 동시에 어느새 괴인의 손바닥에 쫙 펴져있었다. 물론 총을 쏘기 전, 그의 주먹은 그런 모양을 하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인간을 넘어선 빠르기는 미리부터 펴져 있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소리도 없었다. 산탄을 이루는 작은 쇠구슬들은, 손바닥에 감도는 무형의 장막에 시간이 정지되기라도 한 듯, 둥둥떠있다가, 중력의 영향을 받아, 자유낙하했다. 툭툭- 어이없다는 듯이 쳐다보고 싶은 몸의 욕망을 제어하고 다시 방아쇠를 당겼다. 그러나, 괴인이 쳐오는 주먹이 더 먼저였다. 빠각-! 쾅-! 괴인에게서 발출된 권력을 산탄총으로 막았다. 덕분에 산탄총은 부서졌고, 남은 산탄이 권력의 충격을 받아 일제히 폭발했다. 방탄조끼 덕에 죽지는 않았지만, 큰 상처를 입고 동굴 안으로 튕겨져 들어갔다. 다시 권력이 차례대로 뻗어오더니, 이번에는 기관단총을 부숴버리며 성우의 옆구리를 강타했다. “크윽!” 뼛속까지 아프다는 소리가 이런 것일까? 목구멍까지 치솟은 위액을 뱉어낸 성우는 다시 떨어져 내리는 권력을 감지하고 남은 한정의 기관단총으로 그것을 후려쳤다. 파각! 그와 동시에 권력이 날아온 방향을 향해 달렸다. 진각이 동굴을 울리고 권이 대기를 갈라 적을 관통한다! 관통의 의지를 담은 전사통시. 죽기 살기로 쳐낸 이 일 권은 성우의 경체를 크게 손상 입힐 수도 있는 다섯 번의 추진력을 받고 그 어떤 때보다 빠르고 강력하게 터져나갔다. ‘원하는 데로 권이다!’ 쿵-! 경체가 부서지다 못해 폭발하는 소리가 뇌리를 진동했다. 이를 악물고 단 한 발의 탄환을 내쏟는다. 괴인은 뜻밖이라는 표정을 함과 동시에 마주 권을 휘둘렸다. 쾅-! 결과만 말하자면 무승부였다. 성우의 전사통시는 사내의 일권을 뚫었지만, 권력 자체를 붕괴시키진 못했다. 붕괴되지 않은 남은 권력에, 성우의 상체는 핏덩어리가 되어 한참을 날았다. 그리고 강렬한 충격에 반응한 캡슐들 중 하나가 폭발했다. 쾅-! 연쇄적인 폭발에 의해, 성우의 몸은 남아나지 않았고, 진한 혈무만이 동굴을 자욱하게 덮었다. “크윽, 연금술사 주제에 나름대로 하는군.” 성우의 혼신을 담은 총경에 가슴을 격타당하고도 멀쩡한 괴인은 아깝다는 듯 성우의 파편을 훑었다. “음?” 동굴 안을 진득하게 뒤덮던 혈무가 순간 사라져버리고, 성우의 파편 역시 신기루처럼 스르륵 사라져버렸다. “·······뭐야?”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것인냥 사라지는 과정을 지켜본 괴인은 자신이 꿈을 꿨나, 생각해봤다. 그러나 천장이 무너진 동굴은, 분명 사투를 알려주고 있었다. 괴인은 자신도 모르게 볼을 꼬집었다. “아프군.” 거실, 푹신한 소파에 몸을 묻었다. 깊게, 마치 잠수하듯 몸을 맡겼다. 편안함이 느껴졌다. 하지만 결코 기분이 편안한 것은 아니다. “·······또 인가.” 오늘 하루만 네 번 죽었다. 게임이었으면 계정삭제까지도 생각해볼 일대 사건이다. 하지만 이건 게임 따위가 아니다. 게임 같이 즐길 수 있는 게 아니란 말이다. 고통은 진짜. 총을 쏠 때마다 비명 지르는 손목, 분명 지금은 괜찮은데도, 성우의 손은 손목을 주무르고 있었다. 인물도 진짜. 그에게는 유라를 만난다는 목적이 있었다. 죽음도 진짜. 그에 따른 죽음은, 알루미늄 호일을 씹은 것같이 찝찝하다. 그 괴물들도 진짜. 분명 그곳은 소설로만 볼 수 있는 환상세계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 같은 외모에, 그 운동능력은 인간의 8배를 상회하는 괴물. 그리고 괴물들을 죽인 괴물도 진짜. 아마 다시 슬립머신에서 잠들면, 그 괴물을 만날 수 있겠지. 총알이 통하지 않는 상대다. 생각해보면, 완전 미지의 강함이었다. 군용사이보그라면 총알에 반응할 수 있기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주먹이 휘둘린다고, 50발이나 되는 총알이 한꺼번에 땅바닥으로 가라앉진 않는다. 단순하게 뻗어내는 주먹만으로 포탄과 같은 위력을 낸다. ‘원시시대 생물인가.’ 하지만 철저하게 발전된 전투술을 기본으로 떨쳐내는 원시인이다. 주먹을 쓰는 건 단지, 취향 탓일지도 모른다. 아마 상대는 수많은 경험을 쌓았겠지. ‘북부연금술을 알고 있었다. 대처 방법 역시도.’ 그래서 예측을 불허하는 상대. 그것은 백상린이라는 녀석이 갑자기 자신의 장기인 창을 꺼내든 것이나 다름없다. ‘기세에 눌리다니, 처음인가.’ 상할 자존심 같은 것은 없었다. 다만, 자신을 죽인 상대이니, 생각 만해도 기분이 더러울 뿐이다. 몇 분 지나지 않아, 머리가 텅 비었다. 모든 감정을 배제하고 일체 데이터로만 상대를 파악하기 시작한 것이다. 신장 180센티, 몸무게 추정 75킬로, 선호전투방식 정면대결, 선호무기 주먹, 반응속도 군용사이보그의 평균반응보다 두 배 정도, 공격범위 중단거리 약 20미터, 달리기 추정 속도 50미터 2.1초. “결론은 괴물. 아니 초인이라 불러야 하나?” 손가락의 깍지가 자연스럽게 끼워진다. 정말 오랜만에 해보는 손동작이었다. 이 정도까지 상념의 바다에 빠져볼 줄은 스스로도 생각하지 못했다. 분명한 건, 새롭게 슬립머신에 들어가면 가장 먼저 보는 것은 어둑한 동굴과 괴인이라는 것이다. 싸우게 될 것이고, 십중팔구 죽는다. 통기경과 마혈균으로 해결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닌 것이다. 성우는 봤다. 버섯나무 숲을 완전히 뒤덮은 경력의 폭풍을, 수십 톤을 가볍게 날려버리는 강력한 포탄의 질주를. 아마 성우 자신의 경을 50킬로그램이라 상정한다면 괴인의 경은 그 200배는 될 것이다. 유철산이나 백상린, 그 어떤 자들과 비교해도 압도하는 자였다. 돌연 깍지 낀 손을 풀고 오른손을 뒤통수에 가져다 대었다. 긁적긁적. “그런 사람에게 정면승부라니, 나도 멍청하군.” 멍청하게 중얼거렸다. 어떠한 사심도 없는 순수한 감탄성으로 나온 의견이었다. 자신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답은 얼마 지나지 않아 나왔다. 분노에 몸을 맡겼다. 냉혹한 복수의 전투논리 안에서, 오직 돌진만을 생각했다. 바보군. 불과 오늘 하루 동안의 자신들을 모두 바보로 치부한다. 씁쓰름하지만 바보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니 자기비하는 아니다. 단지, 그곳에서 살아가는데, 너무 험하게 몸을 굴린다는 생각만이 있을 뿐이다. 죽어도 깨어날 뿐이고, 슬립머신에 다시 들어가면 다시 살아난다. 이 항목은 현실성을 앗아감과 동시에 긴장까지 때려 부순다. 고통이 진짜여도, 부활이라는 스킬이 있으면 그에겐 게임과 다를 바 없다. 아주 안 좋다. 그의 목적은 유라를 만나는 것이지, 그 특별한 세계를 즐기는 것 따위가 아니다! ‘조금 더, 냉정해질 필요가 있어.’ 생각 없이 무개념전투를 펼치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그 몸 자체에 새겨진 전술로 효과적인 상대가 가능했지만, 이번만큼은 상대가 다르다. 소파에서 일어난 성우는 슬립머신 안에 차곡차곡 쌓여진 총들을 빼냈다. 통하지 않는 상대에겐 필요 없다. 방탄조끼에서 캡슐을 빼내, 바지주머니에 넣었다. 충격에 폭발하는 경우가 있어, 잘못해서 아까처럼 얻어맞기라도 한다면 개죽음이다. 물론 현실과는 상관이 없겠지만, 폭사라니 찝찝하다. 이런 면에 대해선 성우는 아직 어린학생일 뿐이다. 또 다른 장비는 오직 마총 뿐. 철컥- 신강의 지하실에서 시험삼아 쏜 1발이 빈 나머지 11발이 들어있는 것을 확인한 후, 다시 탄창을 집어넣고, 방탄조끼에 끼워 넣는다. “몇 번이고 죽어주죠. 대신, 목숨과 자유를 받아주겠습니다.” 시야가 닫혔다. 눈을 떴을 땐, 놀란 눈빛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괴인의 시선을 느꼈다. “뭐냐, 네 놈은 설마 정령이기라도 한 거냐?” 그의 말을 제대로 듣기도 전에, 성우는 진각을 밟고 몸을 휘둘러 전사통시의 일권을 내질렀다. 팡-! 5단 추진으로 인해 음속을 넘어서는 초속의 경탄勁彈! 괴인은 이미 반응을 마친 후였다. 가볍게 뻗어내는 손바닥에, 단단한 기류의 방패가 맴돌았다. 쾅-! 동시에 뻗어나간 성우의 몸이 접근하며, 콤팩트하게 휘둘려졌다. 삼권 5단 추진의 선풍완격이었다. 5단 추진으로 인한 이 공격은 총알조차 궤도를 변경할 정도로 강하고 장쾌한 선풍을 뻗어낸다. 일종의 범위 공격! “음!” 괴인은 짧게 신음을 뱉어내며 눈을 감았다. 맹렬한 선풍이 불어오는가 싶더니, 눈을 긁으며 시야를 방해한 것이다. 아무리 잘 막는다 하더라도 이 정도의 범위공격의 영향을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타격 역시 받지 않는다. 힘의 집중도로는 최강인 전사통시조차 통하지 않은 데, 광범위 공격인 선풍완격이 통할 리는 없는 것이다. 선풍이 가지는 진공의 칼날도 괴인에겐 쓸 수 없다. 벌써부터 일권을 뻗어내 상대를 격사 시킬 준비에 들어간 괴인. 하지만 괴인이 짐작한 것과 성우가 노린 것은 애초부터 달랐다. 툭툭툭- 눈을 감은 괴인은 손바닥에서 발목에 부딪히는 거슬리는 무언가를 느꼈다. 아마 선풍에 휘말린 돌멩이들이 부딪힌 거겠지. 말 그대로 아까 전 폭발로 인해 돌멩이들은 널리고 널렸다. 괴인의 다리에 부딪히는 것 역시, 대부분 돌멩이 들인 것이다. 그러나 그 중에, 순수하지 못한 존재가 있었다. 삐빅- 쾅-! 괴인의 몸이 폭염에 휩싸였다. 성우는 폭발의 여력으로 클레모아처럼 쏟아지는 파편무더기를 맞고 동굴 깊숙한 곳으로 튕겨져 들어갔다. 성우의 전신은 생체기로 뒤덮였다. 양쪽 팔은 폭염과 파편들을 막느라 걸레가 되어버렸고, 다리 역시 피로 범벅이 되어 온전하다고 할 수는 없었다. ‘계획대로···인가?’ 기습적인 전사통시로 하나의 자세를 취하게 하고 선풍완격으로 방심을 꾀한다. 캡슐을 휩쓸고 나아간 선풍완격은 그 자체로 상대에게 타격을 안겨준다. 그에 상대가 정신을 쏟는 동안, 수많은 캡슐 중 일부는 상대의 발밑에 도달한다. 그 후는 결과대로 폭발. 근거리 폭발이라 성우 그 자신의 목숨까지 걸어야 했다. 그리고 실패할 확률이 엄청 높다. 하나라도 잘못되면, 말 그대로 개죽음이다. 다행히 성공했다. 상대는 폭염에 휩싸였고, 그에 모자라 동굴이 붕괴되는 바람에 암석에 깔렸다. 살 수 있다면 그건 이미 인간이 아닌 것이다. 그렇게 들어온 곳은 아마 괴인의 주거지. 한 곳으로는 물줄기가 흐르고 있고, 다른 한 곳은 버섯이나 이끼로 가득하다. ‘진짜 초식 원시인이었던가?’ 문명의 혜택이란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곳에서, 그런 의문을 떠올렸다. “크윽··· 정말 천운으로 살아남은 건가. 아프군. 죽을 정도로 말이야.” “···진짜로 죽여줄 테니 각오해라.” “·······!” 쾅-! 새하얀 서기가 돌무더기 사이에서부터 새어나온 순간, 대포를 터트린 것과 같은 폭음이 터졌다. 수많은 파편들이 성우를 향해 쏟아졌다. 치명적인 부상을 입은 성우로서는 손쉽게 피할 수 없는 갑작스러운 공격이었다. 십자 가드 위로 돌덩어리들이 하나씩 박히기 시작했다. 퓩퓩-! 우득-! 피육 찢는 소리가 들렸고 파골음이 울렸다. 성우로서는 신음을 참으며 여력에 휩싸이는 데로, 몸을 날리며 충격을 줄일 수밖에 없었다. 뇌가속으로 인해 신경을 타고 올라오는 고통을 분담하지 않았다면 고통만으로 이미 죽었을지도 모른다. 시야가 붉고 어둡게 물들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최우선적으로 호흡이 막혔다. 이대로라면 죽을지도 모른다. 아니 죽겠지. 퍽-! ‘실패인가·······. 으윽!’ 복부를 강타한 갑작스러운 타격에 목구멍을 막던 울혈을 울컥 토해낸다. 그 바로 후, 숨통이 트이고 멱살을 잡고 자신의 몸을 일으켜 세우는 억센 손길을 느꼈다. ‘냄새··· 얼마동안 안 씻은 거냐.’ 피비린내보다 심한 냄새라니, 하고 잠시 현실도피에 들어간 성우의 머리 위로, 괴인의 말이 떨어졌다. “대답해라, 너의 정체는 뭐지? 어떻게 다시 살아날 수 있는 거지?” 뜨거운 열기가 느껴지는 질문이었다. 집념일까. 마치 어떤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찾은 매드 사이언티스트를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당연하게도 대답은 없었다. 목 전반에 걸쳐 겨우 숨통만 트이는 정도다. 성대는 피로 엉켜있어, 말을 꺼내려면 고통에 시달려야 한다. “흐음, 어쩔 수 없군. 강제로 읽어낼 수밖에.” 그 순간, 성우는 뇌의 중추신경을 파고드는 무언가를 느꼈다! ‘이것은··· 경사?’ 어경에 달한 후, 성우가 자주 쓰던 경사였다. 그런데 갑자기 왜 경사가 중추신경을 파고드는 것일까? 경사의 질주는 아주 은밀했다. 성우조차도 마혈균과 통기경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눈치 채지 못했을 정도였다. ‘마치··· 해킹을 하는 것 같군. 음? 해킹? 강제로 읽어낸다? 설마?’ 뇌전이 머리를 강타하는 기분이었다. 해킹이라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피육으로 이뤄진 인간의 기억을 읽어낼 수 있단 말인가? 사이보그 해킹이라면 몰라도, 인간의 정보를 해킹한다니 말이 안 되지 않은가. ‘···라고 단정하는 것 역시 말이 안 되겠지.’ 상식에 사로잡히지 않기로 오래전부터 약속했다. 상대가 미지이면서도 익숙한 기술로 나온다면 자신은 자신의 특기분야를 응용할 뿐. 그렇게, 이미지를 형상화시켰다. 잠시 후, 뇌 전반을 장악한 경사에서부터 정보의 흐름이 느껴졌다. ‘···정말 인건가?’ 아무런 저항도 없이, 정보를 빼내는 경사는 성우에게 충격을 주었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아직 해야 할 일은 많다. “흐음, 그런가, 그런 것인가? 마혈균에 그런 효능이 있을 줄이야. 으음, 또······.” 괴인은 연신 고개를 끄덕거리며 정보를 빼냈다. 성우는 속으로 웃었다. ‘더미에 만족하시길. 나는 당신의 알토란을 빼먹죠.’ 도리어 역으로 해킹에 들어간 성우였다. 뇌파로 사이보그 용 컴퓨터를 다룰 수 있는 성우로서는, 자신의 뇌 속의 정보 정립 같은 건, 컴퓨터처럼 규격화시켜서 해낼 수 있었다. 진짜정보에 블록을 넣고 거짓정보, 더미를 만들어내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다. 그 사이 경사로 흘러들어가는 정보의 패턴을 분석한 성우는 인체해킹의 방법을 알 수 있었다. ‘경사의 응용방법이 이렇게 많을 줄이야.’ 더미와 함께 빨려나가는 정보에 아주 미세한 경사를 걸었다. 빨려나가는 더미는 훌륭하게도 괴인의 기억창고에 경사를 도달시켰다. 이미지 되어있지는 않지만, 경사에서 느껴지는 새로운 정보들은, 분명 괴인의 것일 터였다. 될 수 있는 데로 빨아들였다. 괴인의 전투방법, 정체, 이곳에 대한 지식, 단련법, 등등. 이 세계에서 살아남는데 꼭 필요한 것들을 가져왔다. ‘뇌가··· 터져버릴 것 같군.’ 자아가 흔들릴 정도로 막대한 정보량이었다. 하지만 뚜렷하게 두뇌의 공간을 분할한 성우에게 있어, 자아의 의심이란 존재할 수 없었다. 괴인에게서 얻은 정보를 정리하던 성우는 괴인의 경사가 다시 회수되는 것을 느꼈다. 제일 깊은 곳에 놓아둔 더미에서, 자신이 원하는 정보를 캐냈을 것이다. “흐음, 그렇다면 너는 죽어도 다시 육신을 짜 맞춰 살아나는 고통의 저주를 받은 건가? 그 유라라는 이름의 북부 연금술사에게? 그녀 자신은 축복으로 줬겠지만, 약한 너에게 있어, 저주라는 건가? 나름대로 로맨스군.” “···그걸··· 어떻게?” 신음을 하며 물었다. 성우는 속으로 완벽한 연기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신음은 진짜였다. 목구멍에 엉긴 피는 까칠하게 성대를 긁고 있었다. “아아, 배웠을 뿐이다. 정확한 건 가르쳐주지 못하겠군.” 성우는 문득 위화감을 느꼈다. 괴인의 말투가 바뀌었다. 이런 변화는 결코 좋지 않다. 불안감이 엄습했다. “약해서 저주라니··· 아까울 수 없더군. 강하게 만들어주지. 대신 9번 정도 죽을지도 몰라.” 기뻐해야 할 일이었지만, 기뻐할 수 없었다. ‘아홉 번 죽어?’ 아홉 번, 아홉 번··· 아홉 번. 그리고 괴인에게서 빼낸 정보에서 그에 관련된 항목을 찾을 수 있었다. ‘설마? 아홉 번 죽었다가 깨어난다면 신선이 될 수 있는 그 허황된 비법 말인가?’ 500년 전 당시 천하제일고수와 중부제일의 연금술사가 합심해서 만들어낸 비법, 다만, 그에 대한 고통과 타격이 죽음을 각오하는 정도가 아니라 진짜로 죽을 정도라, 조용히 묻혀진 비법이었다. “그럼, 각오하시게.” “···자, 잠깐!” 말이 필요 없었다. 자신이 성취하지 못하더라도 꼭 그 끝을 보고야 말겠다는 결심은 이미 가장 먼저 읽어낸 괴인의 기억이었다. 그렇다. 살아있는 전설. 살아있는 신화. 일인군단 십이무적천一人軍團 十二無敵天의 일인. 철권쟁패鐵拳爭覇 구천邱天= 섬유목剡遊牧은 그런 남자였다. 미간을 파고든, 고 에너지에, 성우는 비명을 지르면서도 하나의 기억을 떠올렸다. -3톤의 힘을 가진 경력을 하나로 집중하여 침을 만든다. 사람이 가지는 세 개의 신체, 즉 육체肉體와 영체靈體, 경체勁體를 강제로라도 하나로 만들기 위해선, 강력한 제어가 필요하다. 세 개의 육체 중, 3톤이란 거량의 힘에 닿을 수 있는 건 오직 경체이고, 경체만이 다른 두 육체를 관조하는 힘이 될 것이다. 경력의 침을 만들기 위한 비법은 다음과 같다 (中略) 가장 처음엔 미간에 침을 놓는다. (中略) 죽을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 죽는다. 아아 불사지체가 나오지 않는 이상, 그냥 썩어가는 비법이 되고야 말겠지. 심히 안타깝도다. - 선경도법仙境到法 즉, 3톤에 달하는 막대한 에너지가 미간 한 점에 모인다. 물리적으로라면 당장이라도 부서져버릴 테지만 경체의 제어로 부서질 수는 없다. 그러나 그 고통은 그대로 전달된다. 그러니까 10톤짜리 덤프트럭을 마빡 하나로 막는 것보다 더 심한 충격량이라는 것이다. "으아아아아아악!!“ 동굴 안을 찢어버릴 듯한 절규, 이 절규 하나로 성우는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지른 비명의 양에 제곱을 더할 수 있었다. 기절할 수도 없는 고통에, 성우는 잠시 동안 유라를 잊었다. 그리고 죽음이 달콤할 수도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았다. chapter 14, Exterminater ――――――Evil's slayer “허억-허억-허억-!” 거칠게 숨을 쉬며 샤워실의 문을 열었다. 쏴아아아아- 성우는 옷을 입은 채 그대로 샤워기를 틀었다. 머리 위로 쏟아지는 물줄기는 차가웠다. 그의 육신이 차례대로 젖어간다. “아아아아아!” 비명 같은 신음을 토해낸다. 허밍 같이 맑은 신음. 다만, 만약 이 아파트의 내벽자재에 특수방음효과가 없었다면 아파트 단지를 울릴지도 모를 정도로 커다란 소리였다. 쿵- 성우는 기어코 머리를 감싸 쥐고 주저앉았다. 뜨겁다! 미간을 관통하여, 경체와 영체와 육체를 하나로 묶어버린 강렬하기 짝이 없는 경의 침. 열기가 계속해서 그를 자극했다. 아프다! 기절할 자유까지 박탈해버리는 가공할 고문이다. 그것은··· 이계의 존재이유가 되는 유라의 영상까지 지워버릴 정도로 강렬한 고통이었다. ·······슬프다. 그 순간만큼은, 그녀를 잊었다. 마치 자아를 잃어버린 것 같은 슬픔이 밀려들어왔다. 아니, 사실 자신이 누군지조차 고개를 갸웃거려볼 정도로 새하얗게 퍼졌던 고통이다. 그러나 어째선지 그녀를 잊어버릴 뻔 했다는 자책감이 더 크다. 한동안 그렇게 차가운 물을 맞고 있었다. 고통은 가셨다. 하지만 지끈지끈 거리는 게, 원상태가 되려면 시간이 더 필요할 것 같았다. 뚝- 뚝- 샤워기를 잠그고 목욕용 타올을 어깨에 걸치고 샤워실 밖으로 나왔다. 방탄조끼와 캡슐을 따로 분리해놓고, 모든 옷을 벗어 건조기 안에 넣었다. 몸을 닦고 자신의 방에 가서 옷을 갈아입는다. 오랫동안 입어 이제는 몸에 착 달라붙는 와이셔츠와 청바지를 입었다. 책상 앞에 있는 하드 쿠션의자에 앉아 슬립머신을 보았다. 원수를 노려보는 듯한 눈이었다. 그러기를 한참, 결국 한숨과 함께 시선을 돌렸다. 그새 다시 멍한 눈매를 하고 있었다.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고 했던가. 음? 그러고 보니 뭔가 잊은 듯한······.” 정말 어딘가가 허전했다. “아! 생명줄!” 분명 통기경의 제한시간은 다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아무 이상도 없었다. 생명줄을 부는 것도 아닌데, 아무런 고통도 없었다. ‘설마?’ 내부를 관조해본다. 놀라운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경침이 가지는 억제력에, 육체와 영체와 경체가 하나가 되어 있었다. 이들의 긴밀한 연결체제는 뇌의 폭주를 컨트롤하고 있었다. “다행인 건가.” 마침 통기경도 한 알 밖에 남지 않아 곤란하던 참이었다. 통기경과 마혈균의 배합으로 인한 전투력 상승은 놀랍지만, 통기경은 어디까지나 약물이었다. 쉽게 생각할 만한 것이 아니다. “검사를·· 받아봐야겠군.” 몸은 아마 보통인간의 것이 아니겠지. 통기경의 복용으로 인한 신경가속과 마혈균의 뇌파가속을 수십 시간동안 연속으로 받아온 몸이었다. 혈관 안에 굳은살이 박여도 믿을 수 있을 정도로 과도하게 몸을 굴렸다. 그건 정말 사실이다. 수명이 줄어들었을 지도 모른다. 아니 줄어들었겠지. 뇌의 과도한 혈류작용만 해도, 수명을 깎아내린다. 문제는 많다. 하지만 삶의 미련이 있었다면 성우는 진즉에 슬립머신을 폐기했을 것이다. 오랜만에 집중할 것을 찾았다. 소년의 집념은 강철처럼 고지식했다. “그렇다고 얌전히 죽어줄 수도 없는데 말이야.” 구천 섬유목이 가지는 모든 무술을 머릿속에서 재생시켰다. 그의 권은 예상대로 공의 경지에 달해있었다. 움직임 하나하나에 배어나오는 모든 게, 공이다. 그가 가진 공의 원리 역시 알 수 있었다. -공은 경의 진화형태. 경이 기본적으로 가지는 성질을 극단적으로 만든 것이다. 그래서 무인들은 여러 개의 무공을 가질 수 없다. 오직 하나만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원하는 건, 두 주먹으로 천하제일의 길을 걷는 것이다. 그러나 단순한 주먹만으로는 불가능하다. 나는 무식할 정도로 주먹에 집착하지만 그렇다고 바보는 아니다. 병장기의 장점을 극대화시키는 것으로 공에 달하는 녀석들을 단순히 주먹의 힘을 극대화시키는 것으로 이길 수는 없다. 다방면의 성질을 가진 공이 필요했고 찾아냈다. 균형의 공을. ‘···의외다.’ 즉, 구천 섬유목은 공수양면, 빈틈이 없는 자였다. 주먹에 집착하는 것으로 보아 앞뒤를 가리지 않는 타입인 줄 알았다. 일종 편견이었을까. 권이야말로 균형에서부터 시작한다. 안정된 자세에서 나오지 않는 권은, 철로 뒤덮여도 고수에게는 솜뭉치일 뿐이다. 구천 섬유목은 균형의 공을 이뤄내면서 본말을 전도시켰다. 안정된 자세에서 권이 나오는 게 아니라, 어떠한 자세에서도 안정된 자세처럼 위력적인 권을 발출시킬 수 있다는 것을 전제조건으로 삼는다. 그의 주먹은 무탄無憚, 즉 어떠한 상황에서든 꺼림이 없다. 그렇기에 어떠한 공격이 다가와도, 피한 적이 없었다. 균형은 그에게 있어선 진정한 패도를 이루는 걸음이었던 것이다. ‘자세··· 총경 같은 경우··· 무조건 그 자세를 취해야 했지.’ 발사관이라는 개념이 잡혀있는 터라, 일종의 자유도가 떨어지는 게 사실이다. 지금까지는 안정된 자세를 낼 수 없을 때면, 그 틈이라도 만들어서 쐈다. 달라져야 한다. ‘상대는 일인군단 십이무적천··· 유라 씨는 언급을 하지 않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다 알고 있는 자들이라 나도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해서 가르쳐주지 않았겠지. 동대륙에서 가장 유명한, 당대 최강이란 명칭을 가지고 있는 자들인가.’ 구성원은 다양했다. 북부의 종교인도 있었고, 연금술사도 있었다. 검객은 기본이요, 한 나라의 왕이나 제상까지 있다. 기준은 말 그대로 일기당천一騎當千. 쉽게 말해 전쟁터, 그것도 적진 한 가운데에 떨어트려놔도 살아남을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런 게 성우가 반항해야 할 상대다. ‘죽겠군. 하지만···.’ 의자에서 일어나 슬립머신에 다가간다. “결심을 깨트리면 안 되잖아.” 슬립머신에 누워 눈꺼풀을 닫았다. “······음?” 다시 눈을 뜨니, 야광버튼이 보일 뿐이었다. 잠시 후 야광버튼 아래로 하나의 메시지가 떠올랐다. [연속된 사용으로 전력이 떨어졌습니다. 24시간 동안 충전하신 후에, 다시 이용해주시기 바랍니다.] ········ “···충전인가.” 생각해보면 슬립머신은 전기료를 많이 먹는 기계다. 내부에 수만의 나노로봇을 운용하는 방식이라면 그 수만의 나노로봇을 적어도 2시간 동안만큼은 움직일 수 있을 전기량이 필요하다. 그리고 나노로봇은 그 목적과 크기 상, 유선형이 아니다. 충전으로 밖에 에너지를 대체할 수 없는 것이다. 잊고 있었다. “······아니, 이거 슬립머신이었나.” 정체를 모르는 힘이 있다고 해서, 그 본질은 사라지는 게 아니었다. 세삼 깨닫는 항목이었다. 보통은 한 번 사용하면 연속으로 사용할 필요가 없기에 이런 불편을 느낄 리 없었다. 한숨이 나왔다. 안도의 기운이 많이 담겨있었다. 솔직히 성우로써도 경침의 고통은 거부감이 들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오늘은 쉬자.” 책장에서 책을 꺼낸 후, 거실의 소파에 몸을 묻었다. 독서를 하며 생각을 정리할 목적이었다. 그 때, 시계의 종소리가 울렸다. 6번의 뻐꾸기 소리와 종소리가 성우가 잊고 있던 또 하나의 항목을 일깨웠다. “······식사 당번이잖아.” 6시 10분에 도착할 어린양이 생각나 황급히 책을 소파 위에 던져 놓고 부엌으로 달렸다. 냉장고에서 대충 재료를 빼내고 무계획적으로 음식을 만들기 시작한다. 식칼이 신속으로 번뜩인 후, 튀김냄비와 중국요리냄비가 화끈한 전기스토브 위에서 달궈졌다. 난데없이 중식이었다. 다른 의미는 없었다. 단지, 몸을 정신없이 놀리고 싶었을 뿐이다. 중식이라 해도 볶음밥과 탕수육, 비교적 간단한 요리였다. 화력에 대해서는 어머니와 여동생이 모르는 사이에 개조해뒀다. 안전장치를 벗겨내고 전압을 차지시키면, 웬만한 중국반점의 화력조차 부럽지 않았다. 2인분의 볶음밥을 나름대로의 묘기(냄비에서 볶음밥을 높게 던져 접시 위로 받아내는 것, 멋도 있지만 재료에 붙은 수증기를 빼내 눅눅한 맛이 사라진다)로 담아내 식탁 위에 놓았다. 튀김냄비에서 튀겨진 돼지고기를 건지고 그 위에 소스를 부어, 완성. 이것으로 성하가 투정부릴 이유는 없다. 만들고 보니 6시 12분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탕수육을 만드느라 시간이 걸린 것 같았다. 그러나 성하는 오지 않았다. ‘어찌된 일이지?’ 요, 여동생은 3년 간 특별한 일이 아니면 늦어본 일이 없었다. 특별한 일이 있으면 꼬박꼬박 전화했고, 걱정 끼칠 일이 없는 모범학생인 것이다. ‘오빠인 내가 말하긴 뭐해도 말이지.’ 걱정이 고개를 들었다. “뭐, 오면 먹어야지.” 보온 식탁보로 음식 위를 덮었다. 음식 맛을 보존하는 기능이 있어, 2시간 정도라면 그리 맛을 버리지는 않을 것이다. 소파에 다시 몸을 맡기고 책을 들었다. 몇 분 쯤 지났을까. 책 페이지 수가 100페이지를 넘어서고 있던 순간이었다. 띠링- 띠리리리링- 무미건조해서, 오히려 개성적인 벨소리가 울렸다. 잠시 후, 3차원 복합통신기에서부터 화상이 펼쳐지며 메시지가 펼쳐졌다. [유성우 씨 앞으로 온 영상을 담은 메시지입니다. 읽으시겠습니까?] “음? 영상 메시지? 열어.” 성우는 소설책에서 눈을 때고 잠시 후, 떠오르는 영상을 눈앞에 끌어왔다. 새까만 영상이었다. 그 바로 후, 성우는 소설책을 떨어트리고 영상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눈에 잡히는 게 있어서가 아니다. [흑- 흑흑흑-] 울먹이듯이 잠긴 목소리다. 그리고 그것은 착각이 아니라면, 자신이 아는 한 여자의 것과 한 치의 다름도 없었다. “성하?” 잠시 후, 영상이 살짝 일그러지며 학교에서나 쓰는 규격의자에 앉아있는 한 소녀의 모습이 드러났다. 흐트러진 머리카락, 흐트러진 현성고등학교의 교복, 껌 테이프로 눈을 가렸지만, 그녀는 분명 성우의 동생, 유성하였다. “뭐···냐. 대체 무엇인거냐.” 이글거리는 분노를 참고, 냉정한 눈으로 영상을 본다. 영상이 바뀌며 몇 개의 문장이 떠올랐다. [동생을 구하고 싶으면, 염주동폐경기장, 6번 건물로 와라] “·······염주체육관?” 전쟁 때 한 번 부서진 곳이었다. 동시에 전쟁이 시작되고 20년 동안 전략기지로 사용되었고, 기지철거 후, 치솟아 오르는 땅값에 아무도 살 사람이 없자 광주에서 다시 관리하기로 한 토지였다. 사실 2년 후면, 광주의 전략기지가 세워질 거란 군 내부의 소문이 있었다. 그 전까진 공원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한밤중 음흉한 연인들의 데이트 코스 중 하나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다. 차로는 5분이면 충분할까. [만약 안 오면··· 동생에게 어떤 위험이 닥칠지도 모른다.] 아주 잠시였다. 오페라의 유령에서 나오는 유령이 쓰는 가면 같은, 입만 제외한 나머지 모든 얼굴을 가리는 새하얀 가면을 쓴, 인간이 카메라를 향해 하얗게 웃는 게 영상에 비췄다. [영상이 끝났습니다, 현재 시각 PM6:55. 설정대로 메시지를 자동저장합니다. 다시재생하시겠습니까?] “···지워.” [삭제합니다.] “그리고 연결해, 성하의 오후 재량과목 선생님에게로.” [연결합니다. 연결되었습니다.] 잠시 후,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아, 성하의 오빠인 성우라고 합니다. 혹시 성하 보시지 못하셨습니까?” [음? 아아, 오늘 걔가 좀 다쳤거든? 오늘 4시에 양호실에 갔다가 조퇴했어.] “그렇습니까······. 감사합니다. 그럼 내일 체육시간에 보지요. ···연결해제. 성하의 동아리통신목록을 열어.” [유성하 님의 통신기록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후우. 성하 이 녀석, 펜팔조차 하지 않는 건가. 너무 철저하잖아. 학교와 집은 별 게 라니, 너무 삭막하군.” 한숨을 쉬며 동생의 성격을 탓하던 성우는 소파에서 일어나 자신의 안경을 가져왔다. 안경 대에 부착된 단말기를 통해 통신기가 가지는 통신망에 연결했다. 미리 해킹한 학교의 개인정보를 읽어내다가, 육상부의 데이터를 찾았다. 성하의 입학식 날 업데이트 했으니, 성하의 기록이 남아있을 것이다. 잠시 후, 한 소녀와 연결했다. “민지니? 성하 알지? 유성하. 그 애 오빤데, 성하 어디 갔는지 혹시 아니?” [4시쯤인가? 허들을 넘던 경아를 감싸다가 팔목을 삐어서 양호실에 갔다는 것밖에 몰라요.] “고마워.” 몇 번의 통화를 더했고, 그 때마다 하나 같이 같은 말 아니면 모른다는 대답을 얻었을 뿐이다. [성하에게 고맙다는 말 전해주세요.] “그래, 그럴게. 그럼 잘 자라.” 윤경아라는 여자애를 마지막으로, 얻은 정보란 오직 팔목을 삐고 병원에 갔을지도 모른다는 대답뿐이었다. 마지막으로 양호선생에게 전화를 걸었다. “에? 모른다구요?” [응. 병원에 가라고만 했지, 그 다음에는 몰라. 신경 쓸 필요까진 없잖아? 아, 하여튼 데이트 중이니까, 끊어라.] “······그것 참 죄송하군요.” 쌀쌀맞게 쏘아준 후, 연결을 끊었다. 절망감이 넘실대었다. 삐빅- [메시지가 왔습니다. 읽으시겠습니까?] 메시지를 열었다. [앞으로 6분주지, 그 안에 오지 않는다면 여동생은 각오해야 할 거야.] 영상이 닫혔다. 성우는 소설책을 집어던지는, 예전 같으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만행을 저지르며 벌떡 일어섰다. “제길! 진짜 건 가짜건 가는 수밖에 없잖아!” 성우는 산책용 가죽점퍼를 걸친 후, 데져트 이글과 집안에 깊숙한 곳에 도둑 퇴치용으로 숨겨놓았던 글록 19를 챙겼다. 롱 매거진 3개를 점퍼 안에 끼워 넣고 현관문을 열었다. 멈춰 서서 통신기를 향해 외쳤다. “아, 그 빌어먹을 영상 지워!” [···삭제합니다] ‘죽인다. 말살한다. 가족을 건드리는 자, 이름난 성인이라도 응징하겠지. 나는 성인 따위가 아니다. 훗, 응징 따위의 간단한 단어가 뜻하는 행동으로, 용서할 수 있을 리 없잖아?’ 쾅-! 찰칵- 거세게 문이 닫혔다. 나트륨등에서 나오는 은은한 황색 빛이 깔리는 도로변. 끼기기기긱-! 4륜 드리프트로 코너를 빠져나오는 중형차가 있었다. 새하얗게 빛나는 차체는 특이하다면 특이하다고 말할 수 있는 20세기형, 액셀이었다. 조금 다른 것은 차체가 상대적으로 낮고, 뒷좌석이 없고, 짐칸으로 활용되고 있다는 것 정도일까. 소리 없이 ‘광폭’한 수소엔진에 맞게 풀 튜닝 된 특수합성고무바퀴-시티레이서가 미끄러지면서 일렬로 나란히 섰다. 위이이잉-! 끼기기긱! 바퀴가 미끄러지는 것을 멈추기도 전에 풀 스크롤하자, 다시 맹렬하게 바람을 가르고 나아가기 시작했다. 쌔애앵-! “꺄악!” 주위를 걷던 여고생하나는 자동차가 일으킨 바람에 휘날리던 자신의 치마를 붙잡고 짧게 비명을 질렀다. 여고생은 이미 점으로만 보이는 하얀 자동차를 향해 가운데 손가락을 내밀어준 후, 팔목을 주무르며 몸을 돌렸다. “후, 오늘 스케줄은··· 개뿔이 되어버렸네. 집에 전화도 안 하고, 엉망이야 엉망. 오빠가 저녁을 차렸으면··· 먹어야 되는 건가. 우연이 겹쳐, 차리지 않았기를 바랄 수밖에 없잖아. 배부른데.” 다시 한숨을 쉬며 걷기 시작했다. 속도계는 이미 시속 200킬로미터에 달하고 있었다. 바퀴의 회전수를 나타내는 숫자는 시시때때로 급격하게 변화했다. 그야말로 멈추는 일이 없었다. 성우의 시선은 차창 바깥이 아닌 속도계와 회전수, 네비게이터에 집중되어있었다. 차창 바깥은 최단시간 내에 목적지에 도착하는 주행과는 상관없었다. 사람을 칠 수도 있다는 걱정은 없다. 높아진 무단횡단 방지 턱을 넘을 사람은 자살희망자나 미친 놈 밖엔 없다. 간단한 법조차 어기는 그런 놈은 치어도 싸다! 여동생을 위해 죽어버려라! 엑셀래이터를 밟고, 때며 클러치, 브레이크··· 기어터치, 마치 탱고를 추는 것처럼 빠르고 리듬 있게, 그리고 격렬하게 움직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도 경찰의 정보망에 걸리지 않았다. 네비게이터는 이미 모든 주행코스 안에 있는 경찰차와 과속감시카메라를 파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2분. 끼이익- 기하학적 도형의 바퀴자국을 남기며, 엑셀은 목적지 앞에 도달했다. 차에서 내린 성우는 6번 건물을 향해 달려갔다. 6번 건물은, 과거 수영장이었던 곳이었다. 1층 입구와 2층으로 바로 올라갈 수 있는 통로가 있었다. 성우는 2층으로 걸음을 옮겼다. 2층은 원래, 편의점으로 사용되는 곳이었다. 그리고 그곳의 비상구를 통해 수영장 내부로 들어갈 수 있었다. 가장 처음 보이는 것은 수백 개나 늘어서있는 경기관전용 벤치였다. 그 다음이 수영장. 당연하게도 물은 없었다. 성우가 들어온 편의점 입구 맞은편에는 벽을 대신하는 강화유리만이 있었다. 보수작업은 아예 되지 않아, 형편없이 부서지긴 했지만 말이다. 그곳을 통해, 은은한 달빛이 들어왔다. 수영장 내부는 꽤 밝았다. 요 2일 동안,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성장한 그의 몸, 그의 눈은 이 어둠에 벌써부터 적응해 있었다. 원래 물이 가득 차 있어야 할 풀, 성인용 깊이의 타일 위에, 그녀가 있었다. ‘성하.’ 풀어 헤쳐진 머리, 배와 허리, 다리를 묶여진 채로, 완전히 구속된 여인이 있었다. 기절한 듯 고개를 숙이고 있기에, 껌 테이프로 눈을 구속한 여부는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그녀 옆을 마치 호위하듯 서 있는 가면의 남자가 보였다. 성우 정도의 체격이었다. 특이하게도 서구의 장례식에서나 입는 18세기 풍, 새까만 신부복을 입고 있었다. 사실, 조금 더 활동적인 모습이었다. ‘신경쓸 필요는 없겠지.’ 성우는 경사를 뽑아, 좌석을 고정시키는 철봉에 매달고 1층으로 바로 뛰어내렸다. 타닥- “음?” 가면의 남자가 반응하기도 전에, 성우는 데져트 이글을 뽑았다. 탕-! 그 순간, 가면의 남자는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 그랬을 뿐인데, 총알이 빗겨나갔다. ‘우연인가?’ 생각을 했을 때는 이미 그의 몸이 가면의 남자를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50미터 달리기 3.9초, 기본적인 인간의 몸으로는 불가능한 영역에 걸친 성우는 달려가는 그대로 데져트 이글을 겨눴다. ‘음?’ 가면의 남자의 가려지지 않는 입가는, 살짝 미소를 짓고 있는 것 같았다. 탕탕탕-! 그러나 쏜다. 망설임 같은 건 필요 없었다. 근데, 언제부터였을까. 어째서··· 그녀가 가면의 남자 앞을 가로막고 있는 건가? 팍팍-! 펑-! 정통으로 맞은 총알에, 성하로 추정되는 여자의 몸은 산산조각이 나, 검은색 그림자를 사방으로 뿌리며 떨어져 내렸다. 하늘하늘, 파편이 떨어졌다. “으음. 슬플 뻔 했다.” 멍하게 중얼거린다. 아무리 분노하고 있었다 해도, 눈은 여전히 밝았다. 총알에 부자연스럽게 터져나간 순간부터, 여자의 몸은 단순한 솜 인형일 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솜 인형이라기엔, 이상하게도 성하를 닮아있었지만. “성하는 어디 있나.” “집에 있을 수도 있겠지.” 묘한 톤. 집에 있는 건지, 아직도 구속하고 있는 건지, 확신이 없다. 게다가 부자연스러운 목소리였다. 무언가을 입에 대고 내는 소리 같았다. 거칠한 목소리는 한순간에 인상을 좌우했다. ‘까다로운 자··· 인가.’ 상대는 수많은 전투를 겪은 베테랑일 것이다. 눈빛, 태도, 위치선정, 거래방식. 그리고 반응속도. ‘사이보그··· 일지도 모르겠군. 그렇다면 카타콤부스인가? 아직··· 때가 아닐 텐데?’ “원하는 데로 왔다. 원하는 게 뭐냐.” “하나만 묻지, 네 놈이 세례자(洗禮者, Baptist)인지 아닌지.” “아냐. 무신론자는 아니지만, 종교인도 아니야.” 허탈하게도 빠른 답변이었다. 원래대로라면, 상대의 몸이 휘청거릴 만도 하다. 그런데, 휘청거리기는커녕 오히려 웃으며 말했다. “네 입에 묻고 싶은 게 아냐. 네 몸에··· 묻고 싶은 거다.” “우와··· 야해.” “미안, 동성연애는 취미 없으니, 본격적으로 먼저가지.” 순간, 가면의 남자는 성우조차 파악하지 못할 새까만 어둠 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손이 암흑 속에서 점점 빠져나오며 3미터 길이의 검붉은 창이 일어났다. ‘창?’ “안 좋은 선택이군. 창에는 나쁜 기억이 있는데 말이야.” “기억할 필요는 없을 거야. 나를 만난 기억은 사라질 테니까.” 가면의 남자가 성우를 향해 달리다가 발을 박찼다. 거의 3미터를 솟아오른 그는 정확히 성우에게로 떨어지며 창을 수직으로 휘둘렀다. 탕-! 빠가가가각-! 황급히 뒤로 물러선 성우는 그대로 데져트 이글을 겨눴지만, 수십 개의 타일들이, 그 일격에 일제히 치솟는 바람에, 가면의 사내를 조준할 수 없었다. ‘칫!’ 부웅-! 중거리 전용 병기인 창, 그 리치를 제대로 살린 참격이었다. 횡으로 허리를 갈라오는 창격, 팔로 막을 수 있을 만한 게 아니었다. 창봉이 휘어지는 정도가 거의 직각에 도달해 있었다. 이 정도라면 충의 발경이 있어도, 뼈를 울릴 것이다! 피할 수 있으면 피해야 한다. 황급히 주저앉는 동시에 30발 롱 매거진이 장착된 글록을 꺼내, 방아쇠를 당겼다. 글록의 총구는 기관단총의 그것처럼 연신 불꽃을 터트리기 바빴다. 투르르르륵-! 가면사내의 하체를 노리고 쐈지만, 가면사내는 이미 몸을 살짝만 띄우더니 교묘하게 총알을 피해내고 다시 횡격橫擊에서 종격縱擊으로 창을 내리긋고 있었다. 앉아있는 성우에겐 치명적인 공격! 황급히 몸을 뒤집은 성우는 그대로 휘어지는 창봉을 향해 손바닥을 내밀었다. 그리고 완전히 창이 펴지며 머리가 쪼개질 그 순간, 슬라이딩 태클을 걸어, 몸을 띄운 가면사내의 밑을 지났다. 팡-! 타일 부수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이미 성우는 가면사내의 밑을 지나 그대로 이어타정으로 튕기듯 일어섬과 동시에 물구나무 스는 것처럼 섬머쏠트 킥을 가면사내의 배후를 향해 찍어 차고 있었다. 섬머쏠트라기보다 카포에라의 한 동작에 가까웠다. “흠!” 가면사내는 호락호락하게 당하지 않고, 땅을 찍은 창의 반동을 빌려, 공중에서 팽이처럼 돌더니, 도리어 성우의 발을 향해 발차기를 날렸다. 빠각! 두 개의 발목이 서로를 접 질렀다. “크윽!” “으음!” 두 개의 신음이 교차했다. 창을 다시 잡은 가면사내는 금방이라도 뛰쳐나갈 듯, 흑표범처럼 자세를 낮추고 창극槍極을 겨눴다. 몸을 구르며 일어선 성우는 빠르게 물러섬과 동시에, 아니 물러서는 척 하면서 진각을 내딛었다. ‘먹어랏!’ 5단 추진의 선풍완격이 가면사내를 향해 날았다. 예전처럼 목숨을 걸고 쏘는 게 아니었다. 현재 성우의 미간에 박혀 세 개의 몸을 하나로 묶고 있는 경침은 그 자체로도 성우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경력의 양을 수십 배는 넘는다. 그로 인해 성우의 경량이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고, 그 경량으로 발사관을 더욱 단단히 구축할 수 있었다. 게다가 섬유목의 기억에서 상급발경의 요체를 캐내어 더욱 스무스하게 경의 탄환을 발사할 수 있었다. 부카아아앙-! 가면사내의 공격으로 인해 부서졌었던 모든 타일들이 선풍완격에 휩쓸려 가면사내를 향해 날아가기 시작했다. ‘이것은!’ “흠!” 가면사내는 경악하며 창대를 휘돌려, 창끝으로 원을 그렸다. 따다다다닥-! 나선을 그리며 휘둘려지는 창두에 수많은 타일들이 가루가 되어 부서졌으나, 중과부적이었다. 파바바바박! 가면사내의 전신에 타일들의 소나기가 내려앉기 시작했다. 선풍완격으로 일어난 회오리가 사라지고, 타일의 소나기가 멈췄다. 툭- 툭툭- 투두두둑- 가면사내의 온몸에 붙은 타일조각들이 하나둘씩 떨어지고 있었다. 동시에, 타일에 맞아 표면이 갈라진 백색가면이 떨어졌다. “······너는!” “아아, 들켜버렸군.” 지금까지와 다른, 맑은 목소리였다. 분명 뭔가 하나가 빠져 있지만, 그의 얼굴은 성우가 기억하는 것과 90% 일치했다. “······안경은 필요 없나 보지?” “쪽빛하늘 아래선, 나의 눈은 시리도록 밝아서 안경을 쓸 필요는 없지.” “이름 그대로군. 시안(Cyan, 監色).” 2학년 5반의 클래스메이트, 류시안이 벽록碧綠에 가까운 푸른 눈으로 성우를 보고 있었다. 이질적인 클래스메이트의 모습에, 성우는 한동안 멍하니, 시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안은 씁쓰름한 표정을 지었다. 거북한 침묵이다. 그 때, 성우가 침묵을 깼다. “눈 색깔이··· 다르네? 그게 원래 색깔인 거냐?” 90%에 속하지 않은 나머지 10%는 눈동자의 색깔이었다. 신비하게 빛나는 눈동자는, 일순 유라의 에메랄드 빛 눈동자를 연상케 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래서 분위기와 전혀 상반된 주제도 자연스럽게 튀어나와버렸다. “아니, 둘 다 원색이지.” “······그럴 수도 있는 거냐?” 시안은 미묘한 웃음을 지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너는··· 세례자인가?” “···글쎄, 다시 말하자면 크리스마스 때도 교회는 문턱 근처도 안 갔는데? 문턱 근처에라도 가도 세례 받는 거라 해도 나는 세례자가 아니지.” 진심으로 하는 소리라면 엄청난 편견. 물론, 독서가 취미인 성우가 모를 리는 없겠지만, 불행히도 시안은 그걸 모른다. “그건 안타깝군. 뭔가, 원하는 방향이 관점이 미묘하게 다른 것 같지만. 역시 몸으로 묻는 수밖에 없겠다.” 시안은 다시 창을 겨눴다. 어두워서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면들이 서서히 보이기 시작했다. 30센티미터의 새빨간 창날, 비교적 짧은 창두, 재질 불명의 검붉은 창대, 창대는 주홍색, 끈으로 미라처럼 묶여있었다. 새빨간 창날이 점점 흔들림에, 긴장한 나머지 한숨을 쉰다. “후우, 그러니까, 표현이 너무 야하다니까.” 철컥- 탕! 탕탕-! 데져트 이글의 총신이 들려지더니 폭음과 함께 총알과 탄피가 각각의 배출구를 통해 튀어나왔다. 캉-! 시안의 창끝이 살짝 움직인다 싶더니, 동시에 쇳소리가 일어나며 불꽃이 튀어 올랐다. ‘말도 안 돼! 매그넘 탄두를 견뎌내는 창끝이라니!’ 창날이 마상용 랜스처럼 두꺼운 것도 아니었다. 날카로움을 극대화시킨 얇은 창날, 물론 단단하긴 할 것이다. 하지만 횡압력에는 약하기 마련이다. 총알 같은 걸 쳐냈다간 부서지는 게 당연하다. 그게 혹여, 텅스텐강이나 특수강이라 할지라도! 탄환을 쳐낸 시안은 곧바로 입을 열었다. “Il Mio Jesus. Mio, germoglio per benedirlo anima che si tinge.” 마치, 성가를 부르는 카스트라토의 그것처럼 맑고 투명한 목소리였다. ‘라틴어?’ 그 순간, 시안의 검붉은 창이 빛나기 시작했다. 굳은 피로 뒤덮인 것 같은 그 창두에서부터 창준에 이르기 까지, 창대 전반에 걸쳐 감겨있던 주홍색 끈들이 올올히 풀려나갔다. 진정한 창대의 모습이 드러냈다. 형광등으로 대용할 수 있을 정도로 밝고 선명한 붉은 빛을 내고 있었으나, 막상 그 창대는 새까맣기 짝이 없었다. ‘···이건··· 이상하다. 여긴 분명··· 현실이지 않았어?’ 창을 감싸고 있다가 풀린 주홍색 끈이 창두에 매달린 채로 창 전반부터 뿜어져 나오는 폭풍에 세차게 휘날렸다. 선풍기를 쓴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시안이 맹렬하게 창을 휘두르고 있는 것도 아니다. 시안이 사이보그라서 진동을 주고 있는 것 역시 아니다. 창 자체에 형광등 기능과, 바이브레이터(안마기) 기능이 달려있는 거 역시 아니다. 달려있다고 해도, 이 정도로 영향력을 줄 수 있을 리가 없다! 시안의 창을 중심으로 일어난 폭풍은, 수영장의 풍경을 변화시켰다. 타일들이 밀려다가 서로 부딪혀 부서졌고, 제멋대로 타일이 벗겨져나가며 상승하다가 떨어진다. 평범한 인간의 능력으로는 절대로 일으킬 수 없는 초자연적인 현상에 성우는 할 말을 잃었다. “······아직도 꿈을 꾸고 있는 건가.” 방금 전까지 시안의 능력은 사이보그라는 전제하에 가능했다. 하지만 이건··· 사이보그라도 할 만한 게 아니다! 시안이 씁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럴 리 없잖아. 너와 나는 분명, 여기에 존재하고 있으니.” 폭풍이 멈췄다. 폭풍에 휘말렸던 타일들이 우박처럼 떨어져 내렸다. 그런 배경을 두고, 시안은 창을 겨눴다. ‘승산이······.’ 데져트 이글의 탄창은 비었다. 글록의 총알은 남아있지만, 솔직히 날카롭게 쏟아져오는 선풍과 타일에도 찢겨지기는커녕 먼지하나 남지 않은 시안의 신부복에 통할까 의문이다. 게다가, 매그넘 탄두까지 쳐내는 능력이라니, 시안과 같은 짓을 하려면 웬만한 군용사이보그라도 고장을 각오해야 한다. 시안은 피곤한 기색조차 내보이지 않았다. 아니, 정말로 피곤하지 않은 것뿐이겠지. 이대로 싸운다면, 분명히 질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솔직히 인간인가, 의문까지 들 정도다. ‘······클래스메이트가 괴물이라니. 나 참으로 신기하게도 사는군.’ 흑색창이 휘둘려졌다. 어떠한 허식도 없는 반듯한 일자횡격이다. 붉게 빛나면서도 새까만, 어둠을 품고 있는 창날이 대기를 갈랐다. 위이이이- 쐐애애애액!! 순간, 대기가 명동鳴動했다. 해일이 일어나듯, 무형의 파랑이 일어나, 성우를 향해 돌진했다. 관통력, 절삭력이 없을 뿐이지 총알만큼 빠르다. 수많은 타일들과 함께, 파랑이 성우의 몸을 쳐냈다. “크어억!” 신음을 토했다. 전신 뼈마디를 울리는 이 무형의 타격은, 섬유목의 일권보다는 못하지만, 마혈균과 통기경의 작용으로 인해 고통의 신호를 분담하여 고통에 둔감해지는 효과가 없는 지금에선, 훨씬 아팠다. 거대한 거인이 휘두르는 주먹에 맞기라도 한 것처럼, 7미터를 그대로 날아간 성우는 2층의 관객좌석 위로 떨어졌다. 그 바로 전, 성우는 2층 난간을 이루는 철봉에 경사를 휘감아, 신형을 바로 세웠다. 비틀거리며 글록을 꺼내 난사하며 편의점 입구를 향해 달렸다. 트르르르르륵! 틱! 금방이라도 모든 총알을 토해낼 것 같던 글록은 불쾌한 마찰음을 내며 멈췄다. ‘잼(탄피 걸림 현상)? 제길!’ 방금 전의 일격으로, 내부의 정밀부품이 어긋난 것 같았다. 총알을 가볍게 피해낸 시안은, 이번엔 수직으로 창을 내리그었다. 쾅-! 그그극-! 편의점 입구를 향해 내달리던 성우는 무형의 기운을 감지하고 한 걸음 뒤로 몸을 튕겼다. 그 직후, 도끼로 찍어낸 듯, 폭이 0.5미터에 달하는 크고 깊은 상처가 생겼다. 바로 성우의 발 앞에. 아무리 건물이 노화되었다고 해도, 이 정도 위력이라니. 성우는 할 말을 잃어, 시안을 한 번 흘겨본 후,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아무리 현실감이 없어도, 생존을 위해선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인지, 잊은 건 아니었다. “시안! 내가 목적이라면, 따라와라!” 성우가 도망치는 것을 본 시안은 그 자리에서 3미터 정도 도움닫기를 하다가 몸을 튕겼다. 단 그것만으로 3.5미터 높이의 2층으로 올라감과 동시에 16미터나 떨어져 있는 편의점 입구에 도달했다. “불리한 상황을 파악해서, 무의미한 인질은 가만히 놔두고 목적인 자신을 쫓으라며 도망치는 건가? 제법이네. 하지만 결국은 하나의 결과만이 나올 뿐이야. 성우.” 시안은 그대로 성우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네가 세례자가 아니었으면··· 좋겠다.’ 섬유목의 기억에서 찾아낸 효율적인 신체활용법으로 빠른 달리기가 가능해졌다. 그래서 믿을 수 없는 점프력을 발휘하며 쫓아오는 시안에게도 따라잡히지 않고, 무사히 자신의 차를 탈 수 있었다. 매뉴얼 기어를 최고로 맞추고, 액셀을 힘껏 밟아, 풀 스크롤하면서 핸들을 최대한 꺾었다. 한쪽 바퀴가 들릴 정도로 급한 커브와 함께, 액셀은 염주동폐경기장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무기가 필요하다.’ 그리고 시안을 상대하기 적당한 지형지물도! ‘······기분 최악이군.’ 정말 난데없었다. 여동생은 납치당하고, 학교친구는 납치범에, 괴물 같은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세례자? 무슨 소린지 알 수 없다. ‘···이탈리아 유학생··· 이었다고 했지. 그리고 라틴어···. 지저스Jesus? 그래 제길, 그건 내가 할 말이야.’ 지저스가 뜻하는 원래 의미가 아닌 비틀린 의미. 정말 그것보다 더 심한 비속어를 내뱉고 싶을 지경이었다. 염주체육관에서 완전히 벗어나 인파가 붐비는 시가지에 들어왔다. ‘여기라면, 안전하겠지.’ 미치지 않는 이상, 시가지에서 창을 휘두르는 않겠지. 성우는 운전대에 이마를 기대며, 숨을 골랐다. 비딱한 시야에 들어오는 백미러에서, 자동차의 해드라이트, 신호등, 가로등, 전광판, 입체영상 등 수많은 빛들과 가지각색의 옷을 입은 사람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음? ······설마.’ 잘못 봤겠지. 성우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세상에 새까만 말을 타고 달려오는 장례신부복의 사내라니. 그것도 사람들이 붐비는 시가지에서 그런 미친 짓을 하는 사람이 있을까. 그리고 다시 백미러를 보았다. “제길 미친 거 맞잖아!” 세상에! 오토바이도 아니고 ‘말’이다! 그것도 어둠에 어설프게 녹아들어, 네온사인의 빛을 모조리 다 받아내며 다채롭게 빛나는 흑마黑馬! 시안은 그런 말을 타고 멀쩡히 차로와 인도를 넘나들며 성우가 탄 액셀을 향해 달려오고 있는 것이었다. 보통 말보다 훨씬 빠른 속도였다. ‘어째서 멀쩡히 달려오는 거야? 당신들은 눈도 없습니까?’ 통행인들은 물론이고 말이 밟았던 차의 운전자조차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유령인가. 보이지 않는 건가보군. 이해할 수가 없어, 이런 게 문제가 아니라·· 젠장 엄청 불리하잖아!’ 성우는 급히 액셀을 밟았다. 사람들이 붐비는 거리에선, 오히려 이쪽이 더 불리했다. ‘오늘 범법자가 되는 건가?’ 아슬아슬하게 교통신호를 어기는 건 물론이요, 이차선 추월까지 해버리며 차를 달리게 한다. 그러나 시안이 타고 있는 말은 엉덩이에 추진로켓이라도 달았는지, 전혀 떨어지지 않고 액셀을 따라잡고 있었다. 어느새 시가지에서 벗어나 시속 160킬로미터의 속도에 도달해있었다. 그럼에도 흑마는 떨어지지 않는다! 흑마의 다리는 비정상적으로 빠르게 지면을 때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시안의 몸은 흔들리지 않았다. 상식대로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말도 괴물이냐!’ 흑마가 액셀의 오른쪽에 나란히 섰다. 성우는 한손으로 운전대를 잡음과 동시에, 오른쪽 창문을 열고 임시로 고쳐놓은 글록을 들어 쐈다. 탕탕탕-! 총알이 날아오자 시안은 창을 마상용 랜스처럼 왼쪽 겨드랑이에 끼고 휘둘렀다. 명중은커녕, 오히려 성우 쪽이 고개를 숙여야 했다. 쾅-! 시안의 일격에 앞 유리가 깨져나갔고, 곧이어 액셀의 자동차 커버가 날아가 버렸다. 얼굴을 강타하는 바람에, 성우는 이를 갈며 시안을 향해 외쳤다. “위험하잖아!” “과속도 충분히 위험해!” 탕-! 대답은 글록이 대신했다. “총 쏘는 것도!” 부웅! 그 직후, 시안은 창을 뻗어내 성우를 노렸다. 성우는 핸들을 슬쩍 꺾으며 흑마를 탄 시안에게서 멀어졌다. 하지만 그 일격에, 조수석의 머리부분이 정통으로 박살났다. “창 휘두르는 것이 훨씬 더 움직임이 격하잖아! 우욱, 떨어져라! 조수석의 원수!” “너무 하지 않나, 그래도 학교친구인데!” “···학교친구가 세례자니 뭐니 해서 다짜고짜 동생 인질 삼고 흉기 휘두르냐? 나도 휘둘러줄까?” 탕탕탕! 한참동안 그렇게 공방을 주고받다가 빛이 보이지 않는, 이른 바 개발예정지역까지 도달했다. 어설프게 포장된 도로가 나오자 조준점도 흔들렸다. ‘예정이 완전히 어긋난 건가. 적어도 이곳은 내가 아는 곳이니까.’ 성우는 핸들을 흑마를 향해 꺾었다. 직선 도로인데도, 액셀이 갑작스레 옆으로 돌자, 시안은 놀란 눈으로 흑마의 등을 발판 삼아 딛고 뒤로 날아올랐다. 시안의 몸이 도로 위에 깃털처럼 떨어져 내린 그 직후, 액셀이 흑마를 박았으나, 흑마는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렸다. 액셀은 흑마를 사라지게 만든 후, 한참동안 미끄러졌으나, 두 바퀴쯤 돌더니 안정적인 운행을 하기 시작했다. ‘상당한 실력이군. 기계를 그처럼 잘 다루다니, 부러운 능력이기도 하다. 후우.’ 의미모를 한숨을 쉰 시안은 다시 액셀이 지나간 방향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 시안은 특이하게 생긴 종이인형을 꺼내더니, 발 앞을 향해 던졌다. 다시, 흑마가 모습을 드러냈다. 한참동안 달리니, 폐건물 앞에 주차된, 액셀이 보였다. 시안은 눈을 좁혔다. 그의 눈 조금 특별한 것을 볼 수 있었다. ‘······전쟁에 제대로 휘말린 곳이로군.’ 흑창을 앞세워 보이는 모든 것을 베어낸다. 신의 은총을 받아, 신과 하나로 불리는 자의 피로 완성된 창. 동시에 신의 은총을 받은 자를 죽였기에, 저주의 창이라 불리는 창. 이 창이 가지는 극적으로 상반된 두 가지 속성은, 잡스러운 사념을 정화시키지도, 악령으로 승화시키지도 않는다. 다만 완전히 소멸시켜버릴 뿐. 흑마에서 내린 후, 액셀에 다가가니, 성우는 보이지 않았다. “들어간 건가? 후우, 정말··· 이런 녀석이 세례자라면, 골치 아프겠는데?” 어둠으로 가득 찬, 병원으로 걸음을 옮겼다. “왔나?” 2층 창문에서 시안이 병원으로 들어오는 것을 본 성우는, 예정된 위치로 다가갔다. 그리고 청력을 집중했다. ‘지금!’ 그대로 폭발의 총경, 폭작철련을 끌어 모아, 땅바닥을 후려쳤다. 쾅-! 그 일격으로 터져 나온 폭음에, 노화된 유리창이 깨져나갔고, 그 자체의 충격으로 2층의 콘크리트 내자제가 철근과 함께 떨어지기 시작했다. 계단으로 통하는 좁은 통로를 걷던 시안은 자신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큼지막한 파편들을 창으로 후려치는 동시에, 천장을 향해, 강렬한 나선의 기운을 담아 창을 찔렀다. 창에서 일어난 기운이 천장을 꿰뚫고 올라가며, 시안의 머리 위로 떨어지던 모든 파편들이 단순한 돌부스러기가 되었다. 탁- 그 틈을 타서 내려선 하나의 인영, 성우는 그대로 다리를 낮게 휘둘러, 시안을 발목을 후려침과 동시에 전사통시를 시안의 얼굴을 향해 꽂아넣었다! 파파팡-! “크윽!” 아슬아슬하게 고개를 돌려 성우가 뻗어낸 권을 피해낸 시안, 그러나 성우의 공격은 끝나지 않았다! 속 치앵(팔굽 45도 올려치기)으로 시안의 가슴을 공격하고, 시안이 창대로 막는 틈을 타, 충의 발경을 담은 맛 요크(휘둘러 찍기)어깨 부위를 때려 넣는다! 시안은 급히 물러섰으나, 한 번 기회를 잡은 성우는 결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병원의 통로는 창의 리치가 통하지 않는 곳이다! 성우를 창으로 공격하는 방법은 오직 찌르기와 수직으로 내리긋는 것일 뿐. 덕분에 횡으로 휘둘러대는 범위공격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물론 시안 정도라면 벽을 무시하고 횡으로 창을 휘두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그 나름대로의 틈을 보이게 될 것이고 또한 붕괴를 각오해야 한다! 성우가 짧게 쳐낸 앞차기를 무릎으로 막은 시안은 창을 놓고 주먹을 휘둘렀다. 하지만 초식만큼은 또 하나의 섭유목이라 자칭해도 될 정도로 권에 대한 이해가 넓어진 성우에게 같은 주먹질은 오히려 무덤이다! 팔목을 잡아당기고, 무릎에서부터 빼낸 경사로 시안의 발목을 붙잡는다. 같은 이계사람이 아닌 이상, 상대는 왜, 그러는 줄 모를 것이다. 현실에서는 오직 성우만이 할 수 있는 공격! 어지럽게 쏟아지는 신선하기 짝이 없는 공격에 시안은 창대로 막거나 뒷걸음치는 것으로 피할 수밖에 없었다. “크윽!” “음!” 강하게 진각을 때리고 주먹이 대기를 가른다! 전사통시의 일격이 시안의 심장을 향해 달렸다. 그 순간, 그득-! 둔탁한 소리가 들리더니, 성우는 몸이 솟아오른다고 느꼈다. ‘제길, 지반침하?’ 이 병원의 노화의 수준은 오직 시안에게만 적용되는 게 아니었던 것이다. 강한 진각으로 인한 충격에 1층의 바닥이 주저 앉은 것이다. 균형이 흐트러지며, 전사통시의 질주는 헛되이 천장을 갈랐고, 그 틈을 탄 시안은 무사히 성우에게서 4미터 정도를 물러설 수 있었다. 콰르릉-!! 시안과 성우 사이, 약 0.5톤 정도 되는 돌무더기가 떨어졌다. “후우··· 후우··· 쿨럭. 대단한데? 성우.” 지금까지 클린히트라 칭할 만 한 건 많지 않았지만, 성우의 발경으로 인해, 알게 모르게 타격이 쌓인 시안은 비틀거리며 응혈을 토해냈다. “아깝군. 확실히 끝낼 수 있었는데. 시안.” “아아, 원래 나는··· 다목적 전투용이 아니라, 그랬을 지도 모르지. 하지만 인간의 몸으로 가질 수 없는 능력이 있다는 게 판명된 이상, 전력을 다해 쓰러트려줘야겠지. 세례자인지 아닌지는··· 쓰러진 너의 몸에 물으마.” “그거 강간이냐.” “훗, 멋대로 생각해.” 한 차례 크게 심호흡하며 호흡을 고른 시안은, 창을 들지 않은 왼손으로 병원의 벽을 눌렀다. “π?ρα απ? το σοβαρ? θε?ο ?πλο······.” (일어나라 무덤 속에서 잠자던 성구聖具들이여.) 그 순간, 그의 손에서부터 빛이 일어나더니, 벽 전면으로 빛이 전염되기 시작했다. “······!”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빛으로 휩싸인 벽에서부터 파도가 일어나듯, 무기들이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냈다. 역사의 이면 속에 묻혔던 무기들이 지금 이 자리에 재래했다. “이제··· 본격적이군.” “······설마 쏘아낸다거나 하진 않겠지?” 백상린이 생각났다. 벽 한 면을 중세의 고문 기구를 연상케 할 정도로 빽빽하게 뒤덮은 무기들의 칼날이 그 녀석이 한 것처럼 모조리 쏘아진다면? ‘끔찍하다.’ “글쎄? 그건 두고 봐야 하지 않을까.” 돌아오는 대답은 미묘한 웃음 뿐. 시안은 창을 벽속에 집어넣고, 장식이 없는 쯔바이 핸더를 벽에서부터 빼냈다. “이 정도면··· 싸울 수 있겠지?” 성우는 예의상 고개를 끄덕여줬다. 그 직후, 시안이 달려들었다. 우웅-! 어둠에 녹아 어둠 자체를 휘두르는 듯한 참격. 아래서부터 치솟아 오르는 칠흑의 거검은 터무니없는 범위를 파고 들어와 공간을 휩쓸었다. 하지만 시야보다 전투감각에 의존하는 성우에게 있어, 볼 수 없는 공격과 피할 수 없는 공격의 의미는 많이 다르다. 한쪽 발을 축으로 삼고, 몸을 돌려 6센티 정도의 사이를 두고 피해냈다. 코앞을 스치는, 중량감 넘치는 병기는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대신, 틈이 많지.’ 그러나 그의 클레스메이트는 언제나 상식밖에 있었다. “다음!” 빈틈을 노리고 달려드는 성우를 본 시안이 소리쳤다. 어느새 쯔바이 헨더는 사리지고 배틀 엑스가 시안의 손에 들려 맹렬한 기세로 쪼개오고 있었다. “뭐야?!” 몸을 굴러 아슬아슬하게 피해냄과 동시에 글록을 들어 쐈다. 탱- 탱- 탱- “사기야!” 어느새 시안의 팔에는 강철의 고딕 실드가 들려있었다. 경찰의 진압용 방패보다 훨씬 더 단단하고 두꺼운 고딕 실드는 너무도 가볍게 총알을 튕겨냈다. “마법 같은 일이지?!” 그 직후, 시안은 방패를 휘둘러 성우의 측면을 공격했다. 성우는 날아오는 방패를 향해 발차기를 날렸다. 타점에 도달하여 실드 어택의 위력이 최상으로 도달하기 전, 실드는 성우의 발에 타점을 잃어 더 이상 전진하지 못했다. “합!” 그러나 시안의 공격은 끝난 게 아니다. 어느새 장식 없는 롱소드가 떨어져 내렸다. 성우의 몸에 도달하기 바로 전. 콤팩트하게 몸을 휘돌린 성우의 주먹에서부터 맹렬한 선풍이 뿜어져 나왔다. 롱소드와 고딕 실드는 사라지고 다시 흑창이 시안의 손에 들렸다. 부카아아앙-! 시안은 한 걸음 물러섰다. ‘이미 한 번 본 공격···!’ 그 위력은 수영장에서본 것보다 어쩐 일인지 훨씬 강하지만 원리는 같다. 파악된 기술을, 넘어서지 못할 이유는 없다! 거대한 맹수가 뒤집고 가는 것 같은 상처를 남기며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선풍의 중심을 향해, 힘차게 창을 찔렀다. 선풍의 중심을 돌파한 흑창의 창두에 달려있는 주홍색 끈이 선풍에 휘말렸다. 그 휘말리는 정도를 지켜보던 시안은 한 순간, 힘차게 창을 비틀며 소리쳤다. “폭풍(Tempest)!" 창에서부터 나선의 기운이 올올히 풀려져나갔다. 선명한 붉은 빛의 회오리가 일어났다. 회오리 속에서 일어난 회오리. 결과는 공멸이었다. 부카아아아앙-! 두 개의 회오리가 부딪힌 공간은 진공상태가 되어 블랙홀처럼 주변의 모든 것을 빨아들였다. 물론 한순간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시안과 성우가 서로를 향해 끌려간다는 것이었다. 단숨에 흑창을 내리친 시안은 성우의 아슬아슬한 회피를 보는 순간, 땅에서부터 애초에 거기에 박혀있었다는 듯 존재하는 클레이모어를 빼내 사선으로 올려 벴다. 질풍과 같은 일격. 슈각-! 성우의 가슴에 사선으로 혈선이 그어졌다. 옷자락이 잘려나가며 피로 범벅된 맨가슴이 드러났다. 한줄기의 핏줄기가 튀는 것을 끝으로, 더 이상 피는 나오지 않았다. 경체의 운용으로 제어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오히려 시안은 그로 인해 어떤 문제에 대한 확신을 더욱 더 굳히는 듯 보다 사납게 성우를 몰아쳤다. “네 놈의 무기는 대체 뭐야!” “글쎄?” “칫!” 신음을 흘린 성우는 벽면을 차고 시안이 뚫어놓은 천장의 구멍을 통해 2층으로 올라섰다. 시안 역시 벽을 차고 뒤 따라 올라섰다. 그런 시안을 향해 폭작철련의 총경이 날았다. 쾅-! 고딕실드로 몸을 가린 채로 폭발의 여력에 날아간 시안은 한참을 날아가기만 했을 뿐, 무사했다. “대단한데?” “쳇!” 탕탕탕-! 글록을 들어 쏜다. 하지만 다시 고딕실드에 막혔다. 시안은 고딕실드를 앞세워 성전에 임하는 기사처럼 불굴의 돌진을 개시했다. 그 모습은 경건하기까지 하지만 당사자인 성우에게는 치사할 뿐이다. 고딕실드 채로 강격이 날았고, 성우가 피한 사이, 시안은 또 다른 무기를 벽에서부터 꺼내 휘둘렀다. 이를 테면 암흑으로 물든 섬광. 샤벨이 허공을 긁었고, 세이버가 유성처럼 떨어진다. 슈욱-! 씨이잉-! 쯔바이 핸더가 육중하게 대기를 갈랐고, 날아오는 총알을 또 다시 고딕실드가 막고 있다. ‘틈이······ 없다!’ 상황에 따라 무기를 교체하니, 범위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무기를 교체할 때 나오는 틈을 노리면 될지도 모른다? 웃기는 소리. 한 번 언제 바뀌는지, 타이밍조차 잡을 수 없다. 틈을 잡았다고 생각하고 노리는 순간, 그 틈은 모조리 자신의 틈으로 되돌아온다. 그것이 시안의 공격이다. 결국 피하는 것 밖에 할 수 없다. 시안의 공격이 아무리 다채롭다고 해도 유철산이 펼쳐낸 환검보다는 화려하지 않다. 물론 통기경이 없는 현재 성우의 반응속도로는 그와 비슷한 난이도로 생각되어지겠지만, 통기경에 길들여진 덕분에 통기경 없이도 상당한 수준의 반응속도를 가지고 있었다. 충분하다! 하지만 싸움은 잘 피한다고 해서 이기는 건 아니다. 상처 없는 수세와 빈틈없는 공세가 교차했다. “이제 슬슬······!” 오른손의 모닝스타가 떨어졌다. 동시에 왼손에 들린 레이피어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낭창낭창 갈대처럼 휘며 성우의 허리를 노렸다. 레이피어의 예기, 콘크리트 벽면을 두부 베듯 베어버릴 정도로 날카롭기 짝이 없다. 모닝스타의 흉측함은 막으면 막은 방어구 자체가 박살나버릴 정도다. 슬라이딩하며, 아슬아슬하게 레이피어를 피해낸다, 그런 성우의 머리 위로, 모닝스타가 새까만 어둠을 휘감은 채 떨어졌다! ‘쉽게 당하진······!’ 누운 자세 그대로 발을 올려, 모닝스타를 잡은 손을 쳐낸다. “아!” 모닝스타가 시안의 손에서 떨어져 나가자 허공에서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과연, 그런 건가?!’ 시안의 공격에도 어떠한 법칙이 있다. 벽에서 떨어지거나, 시안의 손에서 벗어나면 무기로서의 효력을 잃어버린다. 어째서인지는 모른다. 알 것도 없다. ‘백상린처럼 쏴대지는 않겠군.’ 그렇게 조금 안심. 시안의 손을 발판 삼아 몸을 뒤집으며 물러섰다. “아직이다!” 다시 흑창이 일어났다. 휘둘리는 일격은 천장까지 닿았지만 거침없이 나아갔다. 가가가가각-! 천장을 이루는 합판들이 종이처럼 뜯겨나갔다. 그리고 붉은 성광을 휘감은 새까만 유성이 떨어졌다. 쾅-! 가까스로 피할 수 있었지만, 창이 바닥에 떨어지며 일으킨 충격파에 성우의 몸은 실 끊긴 연처럼 한참을 날아가다, 창문 근처의 강화유리까지 닿았다. 지반의 붕괴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구구구구- ‘붕괴를··· 피하지 않는 건가?’ “스케일이 생각보다 크군.” 우르르르- 노화된 건물이 견디기에는 강력한 에너지파동이었다. 무너지는 건물 안, 성우와 시안은 여전히 대치하고 있었다. “이렇게 고전해보긴 10년 전 이후로 처음이군.” “······침대 위에서 꼬마여자애랑 씨름이라도 했나보지?” “지금까지의 이미지와는 다르구나, 성우.” 뿌각- 시안은 어깨 위로 떨어지는 돌무더기를 창대를 휘둘러 쳐냈고, 성우 역시 머리 위로 떨어지는 콘크리트 덩어리를 충의 발경이 담긴 손을 휘둘러 부숴버렸다. “장소를 바꿔야겠지?” “······그렇군.” 성우는 왼발을 축으로 앞으로 180도 몸을 회전시키며 주먹을 내지른다. 콰직-! 창문이 깨졌다. 성우는 창문을 깨고 바닥에 내려선 후, 다시 자신의 자동차를 향해 달렸다. ‘역시 이대로라면 내 패배······. 적어도 통기경을 먹고 오지 않으면······!’ “도망치면 안 되지!” 어느새 시안이 성우의 옆을 달리고 있었다. 놀란 성우는 달리면서 몸을 튕겨 돌려차기를 날렸고, 시안은 몸을 낮추고 땅바닥에 손을 집더니, 땅에서부터 철퇴를 빼내, 허공에 뜬 가슴을 향해 던졌다. 퍽-! 성우로서는 처음으로 맞은 클린 히트였다. 흉골胸骨을 우그러뜨린 일격에, 성우는 그대로 2미터를 날아가다가 땅바닥에 처박혔다. 경체의 보호를 받아 심한 타격은 아니었지만, 호흡곤란에 이를 정도로 치명적인 타격인 건 분명했다. 이 기회를 놓칠 시안이 아니었다. 쓰러진 성우의 몸을 밟고 창을 들어 가슴을 찌른다. 급소를 피했지만, 이물질이 몸에 들어오는 고통과 기분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더러운 것이다. 게다가 묘하게 육체에 힘을 쓸 수 없었다. 그러나 신음은 없다. 이런 고통에는 이미 익숙해진 건지도 모른다. 사실 경침 하나만 맞아도 이 정도는 간지러울 것이다. “·······왠지 허무하군.” “도망치는 게 잘못인가보지. 제기랄. 자, 내가 세례자인지 아닌지 어떻게 파악할 거지? 아니, 애초에 네 놈이 말하는 세례자가 뭔데?” “세례자의 특징은 5개야. 하나는 인간으로서는 가질 수 없는 능력을 지녔다는 것, 하나는 몸이 괴멸의 위기에 쳐하면 영혼을 태워 괴력을 발휘하게 되는 것, 보석처럼 빛나는 눈물을 흘린다는 것, 표면적으로 드러날 정도로 뛰어난 재생력에, 정신적으로는 특이한 성격이 되지. 성우 너는 대부분 포함되는 구나.” “세례자는 자신이 세례자라는 것을 아나?” “대부분 알지. 하지만 거의 완벽하게 자신을 숨겨. 적어도 세례자들 중에서 자신을 세례자로 칭한 사람은 없었다. 표정이나 연기도 하나 같이 완벽해서, 착각할 정도였지만 결국 세례자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솔직히 성우 너처럼 물어오는 경우도 있었지. ” “·······그런가.” ‘이름, 영시안永詩眼, 2048년 생, 기이한 술법과 혈족능력을 사역하는 특이한 집안에, 괴물을 멸하는 멸절자로서의 특이한 삶인가. ···30세? 저 얼굴로? 기계를 1분 이상 사용하지 못하는 저주가 걸려있다. 인식장애마법과 가전으로 내려오는 흑마소환술로 이동력은 갖췄다···. 이게 문제가 아니라, 음? 다행히 성하는 무사하구나. 후우, 그럼 그 영상은 어떻게 된 거지? 조금 더 파고 들어가 봐야 하나? 음? 잠깐, 어이, 설마··· 내 가슴을 도려낼 생각이냐!’ 은밀하게 경사를 뻗어내, 시안의 기억을 읽어내고 있었다. 철퇴로 가슴을 맞았을 때, 문득 생각해낸 것이었지만, 시안의 기억을 읽고 보니 괜히 맞아준 건 후회막심이다. “잠깐··· 뭘하려는 거야···!” 성우의 외침을 무시하고 시안은 가슴을 찌르고 있는 창날을, 옮겨 심장을 향해 서서히 그었다. 또 다른 혈선이 그어졌다. 세례자를 파악하는 하나의 방법, 그것은 심장에서 갓 뿜어져 나온 피에 성구를 대어보는 것이다. 세례자라면 어둠의 마력을 가지고 있을 테고, 그 마력에 성구가 어떠한 반응을 일으킬 것이다. ‘제길 종교인들이란!’ 마녀사냥에서 피해를 입었던 무고한 사람들의 고통을 떠올렸다. 종교인들의 비뚤어진 추측에 수많은 사람들이 허무하게 목숨을 잃었다. 물론 종교인의 일면만 본 편견일 뿐이다. 이 경우에는 어떠한 확신이 있었겠지. 그러나 성우는 분명 시안이 말하는 세례자가 아니었다. 그러므로 증오를 품고 시안을 추궁해도 그는 할 말이 없어야 한다! 심장에 도달한 창날. 시안의 목적을 알았기에, 경체의 제어를 풀었다. 피가 뿜어져 나왔다. 시안은 자신의 십자가를 목에서 풀어 심장에 대었다. 마물을 퇴치한다는 상징적인 의미와는 다르게 마물사냥에는 하등 도움이 안 되는 존재지만, 성구로서의 가치는 분명 존재한다. 세계의 이면에 집중된 인간들의 사념思念들이 모여, 신비는 만들어진다. 그 힘을 빌리는 성구(聖句)가 새겨진 십자가였다. ········· “·······어라?” “······뭐가 ‘어라’냐. 세례자 따위가 아니라 했잖아! 쿨럭!” “다행이군.” “······내가 죽어도 다행이겠군. 그렇다면 너는 걸레에 갈보다.” 출혈이 심했다. 경체로 심장과 각 기관을 보호하고 있어도, 혈액부족으로 인한 빈혈은 확실하게 성우를 덮치고 있었다. 게다가 이놈의 상처는 웬일인지 경체의 힘으로 치료할 수 없다. ‘롱기누스의 창··· 성마흑창聖魔黑槍의 힘인가······ 이래서 종교는···.’ 흐려지는 시야에, 성우는 중얼거렸다. “···짜증난다니까.” 시안은 기절한 성우를 보고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 단 시간에, 엄청나게 강해졌기에 세례자가 아닌가 짐작했다. 게다가 기록조사에서 중학생 때와 지금의 성격이 다르다는 것을 봤을 때는 어느 정도 확신까지 품었다. “일반인인데도··· 강한 거야?” 문제는 그게 아니다. “치료를 해야 하는데.” 안절부절하며 고개를 둘러봐도, 무너져 내리는 병원만이 있을 뿐, 보이는 건 없었다. 아이러니하기 짝이 없었다. 병원을 앞두고 막상 사람은 치료할 수 없다니! 설령 멀쩡한 병원이 있다 하더라도 들어갈 수는 없을 것이다. “후우, 기계의 힘을 빌려야 하는 건가.” 시안은 자신의 옷으로 성우의 상처를 압박하고 속주머니에서 새하얀 장갑을 꺼내 손에 끼웠다. “저주 해제(Divine Power).” 시안은 장갑을 낀 손으로 급히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1분··· 1분 안에······.’ [여보세요?] “시안이다. 위치추적해서 곧장 이곳으로 와줘,” [음? 끝난 거야? 역시 성우가 아니었나 보지?] “알면서 말하지 마! ···엄청 죄책감 가지고 있는 중이니까.” [쳇, 꽃다운 중년이 화도 잘 내요.] “빨리 오기나 해, 너의 사랑하는 학생이자, 내 32명뿐인 클래스메이트가 죽어간다.” [10분만 기다려.] 통신이 끊겼다. 그 순간, 파지직-! 하얀 장갑과 휴대폰에서 시퍼런 방전이 일어나더니, 장갑은 새하얗게 타올랐고, 휴대폰은 액정을 비롯한 모든 부품이 타버렸다. “······이 놈의 저주는 매일 돈 깨지게 하는구나.” 고장난 휴대폰을 맨땅에 버리는 경범죄를 저지르며 시안은 탄식했다. *** “성우는 괜찮아?” “죽거나 몸 한 군데가 완전히 사라지지만 않으면 완치시킬 수 있다니까 그러내.” “기억은 제거했어?” “내 최면은 항상 완벽해.” “후우, 다행이군.” “사례금은 톡톡히 주겠지?” “후우, 학생사랑 정신이 부족해.” “그것은 그것, 이것은 이것이지?” “마녀.” *** 액셀의 운전석, 차갑게 불어오는 봄바람을 받으며 성우는 눈을 떴다. “······현실도··· 결코 편안한 것만은 아니군. 현실에도··· 괴물은 있는 건가. 후후후.” 모두 기억하고 있다. 난데없이 양호선생이 와서 신비한 힘으로 몸을 치료했고, 동시에 최면을 걸어 기억소거를 시도했다. 그들의 대화 역시 기억한다. 시트에 몸을 깊숙이 묻은 성우는 그냥 웃기만 했다. 웃는 것 외에는 지을 표정이 없어서 내는 것 같은, 그런 만들어진 미소였다. ‘최면 같은 건 안 통해. 양호선생. 이미 정신은 최면상태였으니까.’ 외할아버지의 덕이랄까? 지하철 테러사건 때, 그 혼자만 영상을 보고도 멀쩡했던 이유는 바로 거기 있었다. 최면은 이중으로 걸리는 게 아니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기억해두겠습니다.’ 시선을 하늘로 향한다. 차체가 날아가, 오픈카 같이 천장이 뻥 뚫려 있기에 밝은 달이 아주 잘 보였다. 검푸른 하늘 역시. “후우, 좋은 달밤이었을지도 모르겠군.” 물론, 오늘 일만 없었다면. 끼기기기긱- 액셀이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chapter 15, Discipline ―――――Power of the ruin. 엑셀을 차고에 두고 집에 돌아온 성우는 날카롭게 눈을 치켜 뜬 성하를 볼 수 있었다. 그녀가 입을 열기 바로 전, 성우는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어디 갔었어? 연락도 없이 늦으니 걱정했잖아.” “···에? 아, 양호선생님을 도와주고 저녁식사를 얻어먹느라······.” “전화는 왜 하지 않았지?” “아니, 음, 하려고 했는데··· 이상하게도 안 했네? 그러고 보니.” 그녀 자신도 영문을 모르는 표정이었다. 성우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곧, 평소의 눈매로 바뀌었다. “그래, 다음부터는 연락해라. 엄마가 걱정하시잖아.” “으응, 그럴게.” 성하는 자신의 오빠의 진지한 면에 위화감을 느끼면서도 기가 질린 듯,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성우는 자신의 방을 향해 곧장 걷다가, 무언가 생각난듯 뒤돌아서 성하의 어깨를 매만졌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성하는 반사적으로 물었다. “무슨 짓이야?” “아프지 않은 건가······.” “······?” “아니, 별거 아냐.” 그 길로 곧장 그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음······? 뭔가 잊은 듯한······ 이런, 오빠야 말로 늦었잖아! 대체 어디를 갔다 온 거야?!” 이미 추궁할 대상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간지 오래였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난 성우는 성하보다도 빨리 학교에 도착해 양호실을 찾았다. “음? 몸은 건강하니? 조퇴했잖아.” “아, 네 덕분에요.” 그녀가 가진 치유의 힘에 외상이나 내상은 씻은 듯이 나아 있었다. “어제 성하가 연락도 없이 늦게 들어와서··· 무슨 일을 했나 물어보려고요.” “음? 어제? 후후, 알고 싶어?” 양호선생은 장난기가 가득 담긴 눈으로 되물었다. 성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소파에 앉았다. 양호선생이 맞은편에 앉자, 성우는 은밀히 경사를 뽑아, 양호선생의 기억에 링크를 연결했다. “별로 한 일은 없어. 마침 양호실 냉장고 정리를 하는데 성하가 오후과목 시간에 친구를 감싸다 다쳐서 양호실에 왔지. 생각보다 상처가 별거 아니더라구. 간단한 치료만 하고, 상처의 명목으로 조퇴시킨 뒤, 돕게 했을 뿐이야.” ‘···골절이 별 거 아닙니까.’ 성우는 이미 성하의 기억을 읽었다. 고통의 패턴까지 읽었기 때문에 그녀의 말이 거짓인지 금방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양호선생의 기억에서 빠져나오는 정보에 의하면, 성하의 부상은 그녀의 신비적인 힘에 의한 것이다. 그녀가 만든 상처는 물론 그녀가 다시 치유했지만, 여동생에게 일어난 일이라 그리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목적을 위한 이용인가.’ “그 뒤에는?” “훗, 이게 목적이었지? 여자 둘이 한 자리에 모이면, 당연히 수다 밖에 할 게 없다는 건 기본으로 알고 있는 걸 보니··· 성우 지식이 있구나? 뭐, 성하의 경우에는 오빠 험담, 내 경우에는 성우의 관찰일기를 일부 풀었다고나 할까나?” “···제가 곤충입니까.” ‘·······진짜잖아.’ 그녀는 어제 전화를 걸었을 때, 데이트 중이라고 말했다. 사실이긴 했다. 성하하고 데이트 중이었으니. “오빠를 끔찍이 아끼더구나. 내가 험담하려고 하니 정색하며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던데?” “흐음, 의외로군요.” ‘마법사··· 한국마법사협회 코아(Circle Of Absolute: 太極)에 등록된 정식 정신계(精神係: Mental) 마법사. 염력과 치유에는 상당한 실력이 있는 건가··· 음?’ 주의를 기울여 양호선생의 이야기를 들은 척하던 성우는 언젠가부터 조용해진 분위기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양호선생을 쳐다보았다. “·······!” 성우는 화들짝 놀라 물러섰다. 등받이가 등에 달라붙고 그에 모자라 소파가 뒤로 밀려날 정도였다. 양호선생의 눈길과 천천히 움직이는 입술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독순술讀脣術을 아는 성우는 입술의 움직임의 뜻을 읽었다. ‘더·이·상·은·비·밀.’ 마지막으로 윙크를 덫붙인다. 그녀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최면술의 가장 높은 경지까지 도달한 대가, 최면이 걸렸는지 안 걸렸는지, 파악하는 것 정도를 파악하는 것은 간단하다. 아마 그때부터였겠지. 성우는 한숨을 쉬며 상황파악에 마침표를 찍었다. “후우, 시안에게는 비밀로 해주세요.” “시안? 시안과 여동생과 무슨 관계있니? 커플 하나 탄생하는 거야?” 그녀는 철저히 모른 척한다. 성우는 경사를 회수하기 전, 역으로 기억을 흘려 넣었다. ‘언젠가 가슴을 터놓고 비밀을 공유할 기회가 있기를 바라죠.’ 양호선생의 눈빛에 놀라움이 담겼다. 뇌리에 깊숙이 박힌 절대로 지워지지 않을 정보로서, 의미가 전달되었던 것이다. 무협소설에서나 나올 전음 같은 게 아니었다. 그것은, 말 그대로 정보의 강제공유. 양호선생의 성우를 보는 눈빛이 달라졌다. 이 정도 능력이라면, 자신의 기억 역시 해킹당할 수도 있다. “서로 봐주는 구나.”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오늘 점심은 양호선생님의 한 턱으로 가죠.” 경사를 회수한 성우는 몸을 일으켰다. “피를 많이 흘렸으니, 푸아그라(거위 간 요리)를 대접해주지.” “영광입니다.” 탁- 양호실 문이 닫혔다. “오늘은 내 패배인가. 성우 많이 컸구나.” 양호선생은 무엇이 그리도 기분이 좋은 지, 아주 밝은 미소로 성우가 닫고 나간 문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 외 학교에서는 아무 일도 없었다. 시안은 여전히 독수리 타법이었고, 영우는 여전히 주절대기 바빴으며, 다른 여타 주변학생들도, 끼리끼리 어울려 친구들과 대화하거나 과제를 처리하기 바빴다. 성우 역시 시안을 모른 척하고 멍한 눈으로 생활하기에 신경을 쏟았다. 살의가 들끓는 몸을 제어하느라 피곤한 것만 제외하곤, 그럭저럭 평온한 하루였다. 집으로 돌아온 성우는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댕-댕- 6시가 되자 책을 덮고 소파에서 일어났다. 24시간이 지나고 슬립머신의 충전이 완료되었을 시간이다. 우선 메모장을 꺼내 그 위에 메시지를 남겼다. [저녁밥 안 차려도 된다] 오늘 당번은 성하였고, 지금 슬립머신에 들어가면 저녁식사시간이 지나버린다. 모든 준비를 마친 성우는 슬립머신에 누워 슬립머신을 가동시켰다. 눈을 뜨니, 동굴이었다. “오랜만이군.” 굵직하면서도 쾌활한 목소리가 들렸다. 성우의 앞에 위치한 어둠 속에서 검은 그림자가 일어났다. 철권쟁패 구천 섬유목, 인간의 모습을 취한 12명의 괴물 중 하나다. ‘그런데, 오랜만?’ 그런 말은 안 어울린다. 슬립머신의 원칙대로라면 그리 시간이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한 30분 정도일까. “1년이었다. 네 놈의 몸이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다시 나타나기까지 걸린 시간이.” “······!” “결국 불사의 저주에 걸린 몸도 대법에서 무사할 수 없었는가, 하고 좌절했지. 그리고 다시 연구하다 보니··· 네 놈이 왔구나.” “······정말 1년···이나 지났습니까?” “미세한 가루가 되어 사방에 흩어져서 정신까지 단세포동물이 된 터라, 신기루가 되었을 때의 기억 같은 건 없나보군. 딱 1년이다. 하루 24시간 366일 동안, 나는 366번 해가 뜨고 달이 지는 것을 봤다.” 섬유목이 한걸음씩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가 한 걸음을 내딛을 때, 성우는 한 걸음 씩 뒷걸음질 쳤다. 섬유목의 몸에서부터 일어나는 기세는, 주변의 공기를 진동시켜, 미약하나마 가슴을 갑갑하게 만들 정도로 물리력을 주고 있었다. 게다가, 섬유목의 손가락이 가지런하게 모이는 것을 보았다. 성우의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면, 그것은 바로 경침을 만드는 기본수형인 것이다. 머리가 텅 비는 느낌이었다. 몸에 경침을 꽂는 고통은 익숙해 질만한 차원의 것이 아니었다. “후후, 솔직히 1년 동안 무료했다. 그러나 너를 보니 환희가 치솟는 구나.” “나는 절망의 계곡으로 떨어지는 기분입니다만.” “이제 강하게 만들어주마.” “······지금도 충분히 강해!” 그러니 몸에 쓸데없는 짓을 하려는 자는 전력으로 거부할 뿐! 쾅-! 진각이 땅을 찍었다. 상체가 돌아가며, 예전보다 훨씬 단단한 발사관이 만들어진다. 5개의 매듭이 차례대로 풀려나갔다. “합!” 단단해진 발사관은 음속을 넘어선 탄환을 무사히 총구, 주먹으로 옮긴다. 그렇게 내질러지는 주먹, 전사통시가 어느 때보다 강렬하게 대기를 뚫고 전설을 향해 날아갔다! “강해졌군!” 호기로운 외침 전, 이미 성우의 권의 자세를 봤을 때부터 준비했던 일권이 먼저 쏘아져나가고 있었다. 쾅-! 총경의 관통력은 작은 탄환에 담긴 음속 단위의 가속도로 이뤄진 힘이다. 그러나 섬유목의 권이 지닌 관통력은 거대한 포탄을 압축시켜 놓은 총알이다. 속도는 느릴 지라도 그 압축에서 나오는 무게의 위력은 총경을 한참 능가하고 있다! 쾅-! 그리고 여기서 또 하나의 문제가 있다. 발사관의 개념을 가지고 있는 총경은 자세를 취하지 않으면 제대로 된 위력을 낼 수 없다. 연발이 가능하기는 하다. 그러나 경로를 거쳐 내는 딜레이는 보통 권보다 크다. 반면 섬유목은 가볍게 일권을 내지르는 정도였고, 연격連擊은 당연한 것이었다. 섬유목의 주먹에서 터진, 경력의 대포가 성우의 전신을 덮쳤다. 성우의 몸이 동굴 한 면에 파묻혔다. 어느새 다가온 섬유목은 경침을 형상화시켰다. “그럼, 오늘 치를 맞아볼까?” 버섯나무계곡의 동굴. 하늘을 찢을 듯한 비명이 터졌다. 성우는 명치를 감싸며 일어났다. “허억, 허억··· 제··· 제기랄!” - “오빠? 무슨 문제있어?” 방문 밖에서부터 들려오는 성하의 목소리에 성우는 자신의 입을 틀어막고 신음을 삼켰다. 덕분에 훨씬 고통스러웠다. 전신을 뜨겁게 달구는 열기는 꺼질 줄 모르고 성우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었다. 성우의 전신은 이내, 땀으로 흠뻑 젖었다. 안색은 새파랗게 변해, 산소를 보급해주라고 아우성쳤다. 물론 성우는 자기 안색까지 볼 수는 없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되자 슬립머신의 커버를 닿고 방음을 확실히 한 다음, 신음을 토했다. 귀가 멍멍해질 정도로 시원하게 고통을 분출했으나, 아직도 갑갑한 느낌이 남아있었다. 그렇게 몇 분. 성우는 물에 젖은 김처럼 축 늘어져 슬립머신의 시트에 얼굴을 묻었다. “······이번엔 명치인가.” 영체, 육체, 경체의 삼체를 꿰뚫어버린 경침. 그 고통은 그야말로 강렬하기 짝이 없었다. 두 번째였으나, 다시 겪기 싫다는 생각만 날 뿐 예상대로 전혀 익숙해지지 않았다. “후우.” 안정을 취하자, 현실적인 문제에 생각이 닿았다. “1년이라고?” 지금까지와는 달랐다. 1년의 시간이란 시간이 흐른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어째서일까?” 성우는 지금까지의 경험을 바탕으로 가설을 세우기 시작했다. 세 가지 가설이 나왔다. 가설1, 슬립머신이 재충전 되는 시간 동안, 이계는 1년이란 시간이 흐른다. 가설2, 슬립머신에서 나오고 24시간 안에 이계로 가지 않으면 1년 이란 시간이 흐른다. 가설3, 6번 죽으면, 1년이란 시간이 흐른다. 법칙을 정리한 성우는 상황이 생각보다 심각하다는 것을 느낀다. 만약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되는 데로 죽어준다면, 시간의 흐름은 엄청 빨라질 것이다. 또한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 때문에 이계로 가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지면 이계의 시간은 맹렬하게 흘려가 유라를 만날 수 없게 된다. 만나도 유라가 자신을 기억할지, 어떨지 모른다. 물론 어떤 게 제대로 된 가설인지, 알 수는 없었다. 그러나 저 세 가설은 하나의 행동을 불러일으킨다. ‘목숨을 가벼이 여기지 마라.’ 목적이 있는 이계로의 여행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어두운 동굴 속, 섬유목을 쳐다보는 성우의 눈빛은 흔들리고 있었다. 깨어나자 마자 들은 섬유목의 한 마디 때문이었다. “3달 걸린다. 경침을 쓸 수 있을 정도로 몸을 회복하는데.” “그럼 저는 나가도 되겠죠?” “미안하지만 도망칠 것 같거든. 나랑 같이 있어야겠다.” “3달이란 시간을 무의미하게 보내란 말이군요. 아니, 경침을 쓰느라 회복기간이 필요하다고 했었죠?” 성우의 얼굴엔 자신도 모르게 음흉한 미소가 떠올라있었다. 그가 생각하는 것은 뻔했다. 섬유목조차 알 수 있을 정도로. “그렇다고 헛생각하지 마라, 지금의 힘으로도 너 같이 약한 녀석을 제압하는 건 충분하니까.” 섬유목의 몸에서 커다란 폭풍이 일어나 성우의 몸을 바람에 이리저리 쓰러지는 갈대처럼 흔들고 사라졌다. 기세에 밀려 쓰러진 성우는 벽에 몸을 기대면서 다시 몸을 일으켰다. “······말이 너무 심하시군.” “내가 인정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해져 봐라. 뭐, 몇 번 죽다보면 자연히 인정하겠지만·······.” 문득 섬유목은 빙긋 웃었다. “나에게 권을 배우는 건 어떠냐?” “싫습니다.” 시원한 대답. 표정조차 바꾸지 않은 섬유목의 권력이 터졌고, 성우는 뱃속이 다 뒤집어지는 고통과 함께 동굴 벽면에 몸을 묻었다. “3달 동안, 아무것도 안 하긴 무료하잖은가.” “그러니까 내보내주세요.” “기각한다니까 그러네.” 말 안 듣는 녀석은 패야 정신을 차린다는 고사를 떠올리며 다시 주먹을 준비하는 섬유목, 순간 성우는 강하게 진각을 내딛으며 5단 추진의 전사통시를 뻗었다. “뻔해.” 쾅-! 전사통시의 관통력은 섬유목의 옆구리를 살짝 스치기만 하고 애꿎은 동굴 벽면을 뚫어놨을 뿐이다. 다시 총경을 준비하는 성우에게, 섬유목의 권력이 닥친 건 당연한 수순이다. 섬유목은 시체처럼 늘어진 성우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너의 권력은 위력적이긴 하지만, 공격할 곳이 모두 뻔하게 보인다.” 순간, 성우의 다리가 휘둘려지며 섬유목의 무릎을 노렸다. 하지만 섬유목은 다리 하나를 들었다, 놓는 것으로 그에 대한 반응을 다했다. 우득- 섬유목의 발에 밟힌 성우의 다리가 기형적으로 꺾였다. “크윽!” “그런 기습적인 공격도 나정도 되면 모두 보인다. 그런데 네 녀석의 총경 같은 기술은 그런 나에게 틈을 노려달라고 말하는 거랑 같지.” 경사를 뽑아 성우의 다리를 휘감은 섬유목은 그대로 성우의 몸을 벽을 향해 던졌다. 그 기세는 야구선수의 와인드업에 비할 정도라, 이대로 던져지면 떡이 될 건 자명했다. 던져진 성우는 몸을 뒤집어, 아슬아슬하게 벽을 발로 내딛었다. 무리한 움직임에 골절된 다리에서부터 통증이 치솟았지만, 견딜 만 했다. “흐음, 좋은 반응이군. 무엇이든 배울 준비는 되어있는 건가.” “·······당신 같으면, 자신을 죽인 상대에게 가르침을 청하겠습니까?” 성우는 쥐어짜듯 말했다. 섬유목은 거침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설사 상대가 원수라도! 배우고 나서 죽일 생각을 할 뿐이다! 강해지는 데에 예정된 길 따윈 없는 거다.” 뜨거운 열기가 느껴지는 말이었다. “······좋습니다. 당신에게 배운 모든 것을, 당신을 쓰러트리는 데 쏟아 부을 때까지 배우도록 하죠. 사부라는 말 따윈··· 안 합니다. 다만, 성의와 예의를 원한다면, 무릎 정도는 꿇도록 하죠. 당신의 면상에 주먹을 박을 미래를 위해.” “크하하하핫, 엎드려 절 받기로군. 말년, 재미있는 수련생을 가르치게 되는 구나!” 섬유목은 동굴이 떠나가도록 큰 소리로 웃었다. “맨손무술의 장점을 뭐라고 생각하나?” 섬유목이 질문했다. "으음, 따로 무기를 준비할 필요 없이 바로 내지를 수 있는 것?" 한참 동안 생각한 성우는 경험으로 얻은 나름대로의 답을 내놓았다. "선발선제先發先制. 정답이다. 그래, 맨손무술을 익힌 사람은 무기가 필요 없다. 무기를 빼내려고 자세를 취할 필요 역시 없지. 적당한 곳을 목표로 삼아, 있는 힘껏, 있는 기술껏 때려 박기만 하면 되는 거니까. 그러나 너의 권에는 속하지 않는 이야기다. 너의 권은 심하게 정형화되어있다. 위력을 살리느라, 실전에 관한 필요사항 같은 건 전혀 연구하지 않은 권 같더군." 맞는 말이었다. 총경을 창시한 북부연금술사는 총경의 이론을 집대성하긴 했지만, 실전에서 응용한 적은 없었다. 게다가 그의 목표는 공에 필적할만한 위력을 내는 것이었지, 특별히 누구나 쓰러트릴 수 있을 정도로 강해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에게 있어서 총경은 수단이 아닌 목적인 것이다. “총경은 삼권으로 이뤄지며, 각각 관통, 폭발, 선풍의 힘을 가지고 있다. 말 그대로 총알 같은 거라, 나간 뒤에 회수 같은 건 불가능하다. 마찬가지로 한 번 쏘아지면 변초變招를 쓸 수 없다, 즉, 권로를 중도에 바꿀 수도 없는 거지. 맞나?” “·······자세히도 아시는 군요.” “나 정도 경지에 오르면 한 번 보고도 파악이 되는 법이다. 커험.” 부자연스러운 헛기침이 나왔다. 섬유목이 빼낸 성우의 기억 중에, 총경에 대한 사항만큼은 소설적 재능이 딸리는 바람에 창조해낼 수가 없어, 99% 진실로 이뤄져 있었다. 아는 건 당연했다. ‘입에 침이나 발랐으면 밉지나 않겠지.’ “하지만 각각의 권을 발출하는 데는 그 나름의 자세가 필요하다. 그런데 이건, 나에게는 틈으로 밖에 보이지 않아.” 필연적으로 총경에는 진각이라는 자세가 들어간다. 총경의 창시자가 작성한 발사관의 그림에는 근육의 모양부터 발사관의 위치까지 자세하게 명시되어있기에 그 자세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다. 섬유목은 말했다. "맨손의 장점을 최대한 살리려면, 우선 자세라는 틀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것은 그의 지론이었다. 맨손은 모든 무기 중에서 가장 용도가 다양하며 단련하기에 따라 위력도 천차만별이다. 주먹, 수도, 장저, 손등, 손가락. 이 다섯 무기로 낼 수 있는 변화는 무한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무리 위력이 뛰어나다 해도, 자세를 고정한다는 건 높은 자유도를 포기한다는 의미이다. 그것은 그의 지론에도 어긋나는 것이었다. 물론 자세도 중요하다. 기본이 되어있지 않은 맨손은 오히려 스스로를 상하게 하는 법. 빠른 속도도 강한 힘도 뽑아낼 수 없다. 그러나 기본은 어디까지 기본. 그 틀을 깨고 나가지 못하면 발전은 찾아오지 않는다. 섬유목은 가볍게 성우에게 권을 내질렀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았기에 성우는 몸을 낮춰 권을 피했다. 그 순간, 권이 수도로 변하더니 그대로 떨어져 성우의 목에 닿았다. 속도의 변화는 없었다. “·······.”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았다. 그러나 피할 수는 없다. 어째서일까?” “···변화.” “그리고 이건 내가 봤을 때의 너의 권이다.” 섬유목은 진각을 내딛고 허리를 돌리며 빠르게 권을 내질렀다. 총경 전사통시를 발출할 때의 동작이었다. 성우 자신도 놀랄 만큼 틈이 많았다. 엄청난 차이다. 눈으로 직접 보니, 단점을 확실히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총경은 기습적으로 사용하지 않는다면, 지쳤거나, 무모한 돌진밖에 모르는 무뇌충 같은 놈들에게나 쓸 수 있는 권이다.” 지금까지 성우가 총경을 썼을 때도, 그런 방식이었다. 상양촌의 키메라들이나, 신강의 일전 때. 하나는 정신이 없는 놈들이었고, 하나는 거의 기습으로 처리하는 경우가 많았다. ‘백상린······.’ 총경이 통하지 않던 가장 처음의 상대. ‘시안···.’ 통하고 말 것도 없이, 있는 그대로의 총경을 부숴버리기 까지 했다. 총경은 허점이 많았다. 지금까지 총이 있었기에, 그런 허점에 관해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시안과의 일전을 겪고 난 후, 무조건 총에만 의지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떠올린 적도 있었다. “어떻게 하면······ 될까요.” “아직 시간은 많아. 천천히 기초부터 다시 시작해야겠지. 우선···” 섬유목의 주먹이 느릿하게 뻗어나갔다. 성우는 그 권을 무의식적으로 막았다. 그 순간, 저릿저릿한 통증이 일어났다. ‘크윽.’ 섬유목은 주먹을 거두며 말을 이었다. “접전接戰과 발경이다. 발을 때지 않고, 나와 방금 전의 속도로 권을 나누면 되는 거다.” “······이게 기초입니까?” “일류 정도 되면, 이 정도는 기본 아니겠나?” “기본과 기초의 언어적 용법은 매우 다르다고 생각합니다만.” “허허헛, 말도 많군.” 다시 뻗어져오는 권, 성우는 충의 발경을 일으켜 막아내고 속의 발경으로 권력을 발출해냈다. 섬유목은 손을 가볍게 휘젓더니 권력을 흩어버린 채, 다시 느리게 권을 뻗었다. 그의 장중한 권의 전진을, 웬일인지 막을 수 없었다. 발이 떨어졌다. 성우가 뒤로 물러선 것이다.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근데, 물러나면 벌칙이 있다는 거 아나?” 물론 당연하게도 성우는 그런 소리 들은 적 없다. 심지어 섬유목의 기억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잠시 후, 성우는 고깔같이 뾰족하게 깎아낸 바위 위에, 손가락 하나를 대고 물구나무를 서야 했다. ‘나는 차력사가 아니라고!’ “경을 집중하지 않으면 힘들고 고통스러울 거다. 아, 경을 조절하지 못해 바위를 부수거나 물구나무의 자세가 흐트러지면 1시간 추가다. 평생 이것만 할 일이 없길 바란다. 진심으로.” “당신··· 즐기는 거 아냐?” “하핫, 그럴 지도 모르지!” 그 날 성우는 5시간 동안 손가락 하나로 물구나무를 서야 했다. 그렇게 10여일이 지났다. 성우는 섬유목과의 접전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발경의 방식이라든지, 응용법이라든지, 각각 공격방식의 장단점을. 물론 알고 있는 것들이 많았다. 하지만 알고 있는 것이라고 해서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지금은 효과적으로 쓸 수 있을 것 같다. 물구나무의 벌칙도 익숙해졌다. 이 벌칙으로 인해 발경의 집중도가 높아진 건 사실이었다. 요즘에서는 물구나무를 서는 시간도 줄어들고 있었다. “그럼 속도를 빨리해볼까?” “예?” 정확히 섬유목의 권은 두 배 정도 빨라졌다. 그에 적응하지 못한 성우는 단 3초 만에 배를 얻어맞고 주저앉았다. ‘3초를 견디다니, 훌륭하군.’ 섬유목은 내심 생각했지만, 입으로 나오는 말은 다른 의미를 띄고 있었다. “헛배웠군! 속도가 다르다고 해서 막지 못하다니, 깨달음은 다 헛것이었나!” “······제길.” 별다른 말도 없었지만, 성우는 스스로 고깔바위 위에 손가락을 얹고 물구나무를 섰다. 물구나무를 서면서 이번에 일어난 변식에 대해서 생각하기 시작했다. 성우의 동공은 어느새 텅 비어있었다. 내면의 세계로 잠식해 들어간 것이다. 슬립머신을 갖기 전 평소의 성우의 모습과 별다를 바 없었다. 그를 보는 섬유목은 언제 봐도 그 때 그 때가 생소한 성우의 멍한 눈에 고개를 갸웃거려볼 뿐이었다. ‘물구나무 벌칙이 좀 약한 건가?’ 그렇게 한 달이 지났다. 팡- 타다닥! 이제는 바람소리가 날 정도로 빠르게 공수전환이 이뤄지며 서로의 권이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섬유목은 내심 놀랐다. 전력을 다한 건 아니더라도 자신과 대등한 속도로 자유로운 변화를 일으키고 있었다. 겨우 한 달 만에 이 정도까지 가능할 줄은 섬유목 자신으로서도 생각지 못했던 사항이다. 30분 동안 접전이 계속되었다. 퍽-! 어느 순간, 성우의 팔을 쳐낸 섬유목의 권이 성우의 가슴에 틀어박혔다. “······!” 섬유목의 눈가에 작은 경련이 스쳤다. 동시에 성우의 권도 섬유목의 배를 때리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섬유목의 권이 먼저 성우의 가슴에 도달했기 때문에 성우의 주먹에는 힘이 제대로 전달되지 못했다. 결국 쓰러진 건 성우였다. 성우는 아무 말 없이 발목에 10킬로그램 상당의 돌덩이를 매달고 고깔 바위 위에 손가락을 올려놓았다. 수련이 시작되고 열흘이 지났을 때, 속도만이 아니라 벌칙까지 가중시킨 것이다. 하지만 성우에게는 조금 힘들 뿐, 죽어날 정도는 아니었다. 여전히 벌칙에 임하는 그의 눈은 멍했으며, 벌칙에 임한 후면 어김없이 성장해 있었다. 가상현실처럼 뚜렷한 이미지 메이킹으로 초식을 연구한 덕분이었다. 게다가 성우는 이상하게도 잠이 없었다. 육체적인 피로는 거의 없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잠을 자지 않음으로써 생기는 정신적인 피로는 상당했지만, 성우의 정신력의 한계범위를 넘어설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그러함으로 생기는 성우의 수면시간은 평균 30분 정도였다. 성장하지 않으면 그게 이상한 것이다. 막 물구나무서려던 성우의 귀에 섬유목의 목소리가 들어왔다. “그만 되었다. 다음 수련으로 넘어가지.” 수련으로 많은 시간이 흘렀다. 그간 섬유목에게 성우는 많은 것을 배웠다. 아니, 이미 알고 있는 지식에 깊이를 더했다고 하는 게 옳을 것이다. 섬유목의 지식에서 빼낸 것을 섬유목이 직접 시연하고, 몸으로 맞아가면서 다시 배우게 되니 자연스럽게 적은 시간 안에 권에 대한 이해가 높아진 것이다. "반보에 진각의 팔 할을 이뤄야 한다." 진각의 일보가 완성되기 전, 상황, 자세, 변식 등을 계산해야 한다. 나머지 이 할은 힘껏 때려눕히는 것에 전력을 다해야 한다. “균형이 중요하다.” 섬유목의 가장 앞서 존재하는 지론이었다. 완벽한 균형 안에서, 가장 효율적인 권이 이뤄진다고 한다. 육체의 균형, 경체의 균형, 정신의 균형. 그 덕분에 신체훈련을 다시 했고, 경체의 조절법에 대한 특강을 연이어 받았으며, 세뇌에 가까운 정신교육으로 하루를 지샜다. 적어도 틀린 말은 없었다. 그렇기에 의심할 것도 없었다. 오직 하나 뿐인 목적도 있었다. 적극적인 성우의 태도에 섬유목은 어느새 제자를 둔 남들이 취하는 흐뭇해하는 눈빛을 가지게 되었다. 의심 없는 공부일수록 성장하는 법이다. 목적이 있는 공부일수록 적극성을 띤다. 가르치는 사람이 교육을 즐거워할수록 영양가 있는 학문이 나오기 마련이다. 그렇게 3달이 지났다. “으아아아아악!!” 오랜만에 비명이 터져 울렸다. *** 계절이 변했다. "나를 따라 공을 이룰 필요는 없다. 너는 네 식대로 경체를 다시 재정립해 균형이 이뤄진 발사관을 만들기만 하면 되는 거다. 그것으로 몸을 제어하는 훈련을 먼저 하는 게 좋겠지." 섬유목의 말에 따라 훈련 스케줄도 변했다. 경체의 다양한 사용법과 이론에 대한 강론 후, 각각 성질에 따른 발경의 응용법을 몸으로 보여줬다. 그 후에는 성우 자신이 경체의 메커니즘을 하나 씩 변경시켜가며 이점과 단점, 그리고 그 위력에 대해 고찰했다. 경체의 양이 늘었고, 한꺼번에 발출할 수 있는 경력의 양도 늘었다. 균형의 발사관. 이론은 쉽다. 경체에 균형이라는 묘리를 담아, 재정립하는 것뿐이다. 그러나 북부의 연금술사가 평생 동안 연구해서 일궈낸 노력의 결정체를, 발사관의 메커니즘을 쉽게 변경할 수 있을까. 쉽지는 않았다. 그러나 불가능한 것도 아니었다. 섬유목의 깨달음과 성우가 가진 현대과학의 메커니즘은 서서히 하나의 무기를 벼려냈다. 그러던 중 또 한 번의 고통이 찾아왔다. 그날 하루 4번 죽었다. 수련의 정도가 심해지면서 격살당한 경우가 포함된 수치다. 즉, 격살이 둘, 경침으로 인한 죽음이 둘. 몸에 박힌 경침의 개수는 4개. 미간, 명치, 배꼽아래, 오른손바닥의 중심. 고통은 여전했다. 중간에 군용대검을 꺼내 손목을 잘라내고 싶다는 충동을 억누르기 힘들 정도였다. 마취약까지 먹었으나, 전혀 통하지 않았다. 인간이 가지는 세 개의 몸을 한꺼번에 꿰는 최상위 에너지였다. 이런 것을 하찮은 약 따위로 제어할 수는 없다. 제어할 수 있었다면 섬유목이 고생할 일은 없었겠지. 마약조차도 통하지 않을 것이다. 몸의 부정한 것을 일체 거부하는 경침은 그야말로 폭군이었다. “과연··· 이 정도가 되지 않으면··· 선체仙體를 이룰 수는 없겠지.” 땀에 흠뻑 젖어서 겨우 꺼내는 말이었다. 선체는 무인과 중부연금술사의 이상향이다. 전설 속의 선인들이 가지는 육체. 하늘을 걷고, 바다를 가르고, 산을 뽑아, 대지를 장식하는, 그런 힘을 가졌다는 전설 속의 선인들. 허황되긴 하지만, 경침을 맞을 때마다 99%의 의심 속에, 1%의 믿음이 일어나고 있었다. ‘결국··· 나도 인간이군.’ 언제부터인가 고장이 나 있던 톱니바퀴가 다시 돌아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감정을 억제하고, 아무런 목적도 없이, 그저 하루하루를 평범하게 살아갈 뿐이었다. 물론 뛰어나기 짝이 없는 동생을 둔 덕분에 학교생활이라는 것이 그리 평범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지만, 자신의 본성을 드러낼 정도로 화려한 것도 아니었다. ‘슬립머신······.’ 예전부터 들었던 의문을 떠올려본다. 난데없이 당첨된 경품, 거기에 신비한 능력. 어떠한 메커니즘을 가졌는지는 알 수 없다. 현대의 전자제품들은 최고의 서비스를 자랑하는 대신, 분해하는 장소가 따로 마련되어있다. 즉, 슬립머신이 고장 났을 때, 개인이 분해하는 건 금지되어있다. 슬립머신의 분해는 오직 대리점의 해체장치에서만 가능하다. 잘못 분해했다간 99%의 확률로 고장이 나버리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즉, 이 슬립머신의 메커니즘을 개인적으로 분해할 수는 없다. 물론 고서점의 정노인의 손을 빌린다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건 성우만의 비밀이다. “그래,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아야 할··· 나만의 비밀.” 그날, 성우는 오랜만에 ‘진짜 숙면’을 취했다. 3월 10일 목요일, 변한 것은 없었다. 학교에 갔다가 돌아올 동안 특별히 기억할 만한 일은 없었다. 단지, 지하철 테러사건의 용의자를 블루 이스트로 규정하고 집중수사에 나선다는 공안경찰의 발표만이 있을 뿐이다. 어둠계통의 정보라인 속에서는 이 사건을 해물 스파게티사건으로 이름이 붙여졌다는 웃지 못 할 정보가 더해졌을 뿐이다. 확인을 위해 세경련(EPU, Earth Police Union: 세계경찰연합)이나 공안(공익안보경찰국公益安保警察局), 가디언(Guardian Police, 지역경찰)의 정보를 해킹했다. 빨라진 뇌파 덕분인지, 그 과정은 너무나 쉬웠다. 아니, 쉽게 라는 표현이 어색할 정도로 간단히 빼왔다. 정보블록이 일어나기도 전에 막대한 명령어를 입력해서 돌파구를 뚫고, 초광속 라인을 연결해 순식간에 모두 다운로드 해버린 것이다. 이 일로써, 성우는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스프린터Sprinter’라는 코드명을 얻게 되지만 지금과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해서 얻은 정보에는 지하철사건의 생존자들이 기억을 잃고 지하철을 떠올리려하면 ‘해물 스파게티가 먹고 싶어진다.’ 라는 알 수 없는 소리를 했다고 기록되어있다. 그 중에는, 2학년 4반의 마스코트이자, 현성고등학교 2학년을 대표하는 미인인 얼음공주도 들어있었다. 그녀의 난데없는 고백을 듣고 이 자료를 보니 석연치 않은 점이 많았다. 그나저나 이상한 일이었다. 분명 블루 이스트의 범행이 아닌 게 뚜렷한 데, 초점을 거기에 맞춘다니. ‘아니, 이상한 일이 아니다. 정치인들이 하는 일이 다 그렇지 뭐.’ 사건파일을 자세히 보면 어이없는 명령들이 한 페이지 당 하나 씩은 있었다. 대부분 높은 직위를 차지한 사람들과 연결되었다고 파악된 사람들의 명령이었다. 부정부패 정치인들을 죽이는 블루 이스트가 영웅시 되고 있다는 것은 기득권층에게는 최악의 흐름이다. 자신을 높일 수 없으면 상대를 깎아내리는 건 당연지사다. 그리고 사람들의 여론은 이런 흐름을 알면서도 블루 이스트를 비판할 것이다. 표면에 드러난 참극의 대상은 어디까지나 그들이다. 씁쓸한 표정으로 모든 정보를 지웠다. 이런 중요파일들은 스파이웨어로 변할 위험이 있기 때문에 흔적을 남겨선 안 된다. ‘한동안 쇼는 잠잠해지겠군.’ 이런 여론 속에서 부패정치인을 죽여 봤자, 연쇄살인자라고 비판만 받고 끝날 것이다. 조용히 여론이 식을 때, 화려하게 벌이는 게 그들을 위한 조치일 것이다. 그리고 6시가 되었다. 성하에게 식사를 차려준 성우는 7시 정각에 다시 슬립머신 안으로 들어갔다. 지극히 현실적인 꿈을 꿀 때가 되었다. *** "권은 연계기가 중요하다. 너의 경우 진각에서 일어나는 힘을 추진시켜 권력을 발출하더군. 덕분에 연속으로 권력을 발출하려면 발을 번갈아 밟아야 하지. 발사관은 분명 연금술사가 만들어냈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효율적인 방식이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 틈으로 이어진다." 총경은 진각에 얽매여있다. 진각이 없는 총경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섬유목의 경우, 앉은 자세에서도 당장에 강력한 권력을 발출할 수 있겠지만 성우의 경우 그게 안 된다. 고민하는 성우에게 섬유목이 말했다. "너는 어떻게 할 것이냐. 틈이 있어도 권력을 강화시킬 것이냐, 아니면 틈을 없애고 권력을 약화시킬 것이냐?" “두 마리의 토끼도, 노력여하에 따라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쁘지 않은 대답이다. 그러나 내가 도와줄 건 없군. 오직 대련해주는 것 밖에.” 만족스럽게 웃은 섬유목은 자세를 취했다. 그리고 또 다시 3개월이 흘렀다. 왼손바닥의 중심에 경침이 꽂혔다. *** 고통이 진정되자, 성우는 다시 결연한 얼굴로 슬립머신에 들어갔다. 어제 하루는 4번 이계에서 죽음을 경험했다. 그 후 슬립머신을 사용하지 않은 이유는 한 가지 가설을 증명하기 위해서였다. 5번을 연속으로 슬립머신을 사용하면 충전으로 인해 사용할 수 없게 된다. 그와 동시에 3가지 가설 중 두 가지를 만족하게 될 것이다. 가장 불가항력적인 가설부터 차례대로 증명해나가는 것이 시간을 절약하는 방편이었다. 이미 죽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다른 가설과는 달리 6번의 죽음은 이미 피해갈 수 없는 것이다. “하하하··· 죽음이 당연한 것이라니. 이렇게 모순적인 일이 또 있을 수 있을까?” 그리고 잠에 들었다. 30분 뒤, 다시 일어났을 때는 오른쪽 발바닥을 잡고 샤워실로 달려가고 있었다. 차가운 물에 발을 식히며 전신을 달리는 고통에 신음을 흘리고 있는데, 갑자기 성하가 노크를 했다. “뭐하고 있어? 설마, 마스터베이션 하는 건 아니겠지? 적당히 하고 잠이나 자!” 오랜만에 동생의 이마에 알까기를 먹여주고 싶다는 생각을 품었다. 이번에 섬유목에게 배운 것은 경의 분할과 성질변환이었다. 단순히 경체를 두 개로 나누거나 성질을 변화시키는 것만이 아니라 경을 나눠 두 경체에 각각의 성질을 부여하는 것이다. 두 개로 나눠진 경체에 각각 극단적으로 갈린 두 개의 성질을 한꺼번에 부여하기란, 차라리 공을 이루는 게 쉬울 정도로 어려웠다. 이것은 가르친다고 해서 배워지는 게 아니었다. 성우의 이미지 메이킹이 아무리 완벽하다고 해도 한계가 있는 법이다. 감각이라는 것은 현재의 최신기술이 집약된 컴퓨터의 연산장치로도 완벽한 파악이 불가능한 영역인 것이다. 섬유목 역시 기대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계획한 대로, 훈련시킬 뿐이었다. 훈련이라 해도 강제로 각각의 성질을 가진 경체를 성우의 몸에 흘려 넣는 것뿐이었다. 다만 그 고통은 참을 수 있을 만한 것이 아니었다. 가벼운 경, 무거운 경, 딱딱한 경, 부드러운 경, 날카로운 경, 차가운 경, 뜨거운 경··· 모두가 각각의 특징에 따라 성우의 내부를 한 번씩 부수고 지나갔다. 고통으로 얻은 이미지들은 경체에 성질을 부여할 수 있게 만들었다. 그러나 동시에 두 개의 상반된 성질을 만들기란 쉽지 않았다. “만들 수만 있다면··· 환상의 4번째 총경을 쓸 수도 있을 텐데.” 제사총경의 기본은 경체의 분할과 상반된 성질이다. 두 개의 성질이 다른 경을 충돌시켜, 거기에서 일어나는 폭발력을 모조리 발사관 안에 가두고 배출시킨다. 마치 핵융합과 같은 원리였다. 다만, 이것은 성공시킬 필요 없이 일부러 실패시킨다는 의미가 강했다. 정확한 계산이 없다면, 오히려 위험한 총경이다. “그러고 보니··· 이 같은 경우에는 진각이 따로 필요 없잖아.” 어쩌면 제사총경은 모든 약점을 극복하게 만드는 해답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된다면, 그 빌어먹을 아저씨의 면상에 주먹을 날릴 수 있을 지도 모르겠군,” 수련은 계속되었다. "분명한 건, 이론고찰 후, 실전응용보다 더 좋은 수련방법은 없다는 거다." 언젠가부터 대련은 실전이 되어있었다. 성우가 죽어도 다시 살아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섬유목은 처음부터 제 실력을 발휘했다. 성우는 생존을 위해 지금까지 배워왔던 것을 모두 토해낼 수밖에 없었다. 확실히 충분한 수련 후에 하는 실전은 성우의 급성장을 이루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그만큼 사망수도 급격히 올라갔다. 그래도 성장하고 있었다. 괄목할 만큼. 그 사이 성우는 지금껏 죽은 경험으로 가설을 법칙으로 바꿀 수 있었다. 슬립머신에서 나온 뒤, 24시간 안에 다시 이계로 가지 않으면 1년이 지난다. 이것을 알게 된 이유는 간단했다. ‘어떠한 이유’에서 일부러 하루 동안 가지 않았던 것이다. “······정말 가야 하나. 유라 씨··· 당신의 죄업이 무겁습니다.” “자, 오늘 치 침 맞자.” “쉽게 당해줄 것 같습니까!” 어느 때보다 격렬하게 성우는 섬유목의 경침을 거부했다. “빨리 바지 까 내려라. 괜히 고생하지 말고” “차라리 일백 번 더 죽고 맙니다!” “이제 딱 두 번 남았는데··· 지금까지 한 고생이 아깝지도 않냐?” “·······그거랑 이거랑은 차원이 다릅니다. 회음이 뭡니까 회음이!” 회음會陰, 해부학명 the perineal region. 남성의 거시기 근육과 연결되어 있는 PC근육이 뭉쳐있는 곳이자, 동양의학 상, 문자 그대로 음기가 모이는 곳. 이른바 다리 사이에 있는 몸의 중심점이라는 곳이다. 문제는 남성의 고환과 항문 사이에 있다는 것이다. 이미 여자 경험이 있는 성우지만, 그렇다고 부모가 아닌 남자 앞에서 바지를 까 내리긴 싫었다. 아무리 성우가 웬만한 일은 무신경하게 넘길 수 있다고 해도, 이것은 웬만한 이라는 단어로 포장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남아로써 쉽사리 부모 외의 외인에게 등짝 보일 수 있겠습니까!” “맞는 소리다만! 스승은 부모나 다름없다!” “언제부터 스승이야!” “허어, 쑥스러운가 보구나!” 쾅-! 섬유목의 우악스러운 권력이 터지며 동굴이 다시 넓어졌다. 예전 같았으면 30평 쯤 되던 동굴이었는데, 지난 3년 간 수련을 하면서 두 사내의 권력에 모조리 깎여나가는 바람에 70평이나 되는 널찍한 공간이 되어버렸다. 두 걸음 대각선으로 물러선 성우는 진각을 내딛고 선풍완격을 쳐냈디. 2년 동안의 수련으로 권뿐만이 아니라 초 근거리 전투에도 능해진 성우였다. 섬유목이 권을 내지를 타이밍 같은 건, 간단히 알 수 있었다. 섬유목의 수도가 떨어지며 선풍을 갈랐지만, 그 충격파에 섬유목은 한 걸음 물러섰다. 총경의 위력도 강해진 것이다. 하지만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선풍을 꿰뚫고 섬유목을 향해 날아가는 관통의 총경! 성우의 자세는 선풍완격을 내쏠 때와 변함이 없었다. 이제 총경의 연발도 가능해졌다! 경체분할에서 힌트를 얻은 것이다. 진각이 꼭 필요해서 연계기를 넣을 수 없다면 하나의 진각에 여러 개의 탄환을 만들면 되지 않은가? 경체를 다루는 능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한 지금, 탄환의 추진이 일어나는 순간의 발사관조차 변화시켜, 탄환의 성질을 바꿀 수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이미 경험했던 것들이었다. 그 때마다 섬유목은 처절하다시피 성우의 권기를 깨부쉈다. 물론 그 다음 날이면 어김없이 조금 더 진화한 총경을 내놓았지만, 지금까지 섬유목이 상처 없이 살아있는 게 증명하듯, 성우는 소원성취를 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번에도 섬유목의 철권이 총경과 정면충돌하고, 그 틈을 타, 사라진 섬유목의 신형이 성우의 뒤편을 제압하고 있었다. 몸을 순간적으로 360도 회전시켜 발을 휘저었으나, 오히려 섬유목의 권에 다리뼈가 부서져나갔다. 우득! 그 순간, 성우의 손바닥이 쫙 펴지며 하나의 장력을 발출했다! ‘이 녀석, 총경을 비축하는 법까지 만들어놓은 건가?’ 마치 탄창에 총탄을 저장하듯 언제라도 치솟을 준비가 되어있는 경을 비축한다. 그리고 몸이 견딜 수 있는 시간 안에 쏴내는 것이다. 제한시간은 짧았지만, 총경의 딜레이는 거의 없어졌다고 해도 무관하다! ‘훌륭하군!’ 쾅-! 폭발의 총경, 폭작철련이 섬유목의 얼굴 앞에서 터졌다. 하지만, 퍽-! 거친 타육음과 함께 성우의 몸은 기역자로 꺾인 채, 수평으로 튕겨나가고 있었다. 섬유목은 대기 중의 폭발에 인해 그을림이 묻은 팔을 털어내고 쓰러져 있는 성우에게로 다가갔다. “후후후, 이것으로 너도 남자가 되는 거다.” “······대사가 틀려먹었잖아! 라기 보다 하지 마아!” “정력에도 좋다고 했으니 기쁘게 맞아라!” 성우의 전에 없던 처절한 외침에도 어김없이 경침은 오늘의 목표에 틀어박혔다. 어느 때보다 더욱 처절한 음파가 동굴 내부를 마모시켰다. 이계에서는 유라와 해어진 지 3년 하고도 6개월. 현실에서는 3월 14일 새벽 1시 경에 있었던 일이다. 3월 14일 오전 6시. 땀으로 흠뻑 젖은 몸을 일으킨 성우는 샤워실에 들어갔다. 쏴아아아아-- 차가운 물에 땀이 씻겨나갔다. ‘······아직도 욱신거린다.’ 회음에 맞은 경침은 그 어떤 때보다 고통스러웠다. 전신을 태워버릴 것 같은 열기는 둘째치고서라도, 심리적인 여운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이제 이것으로 남은 경침은 하나··· 정수리인가.” 아마 지금까지 중 가장 고통스럽겠지. 하지만 회음과 정수리, 둘 중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주저 없이 정수리를 택할 것이다. 그만큼, 성우에게도 회음의 경침이 주는 쇼크는 컸다. 샤워를 마치고 가볍게 식사를 차렸다. 간단한 내용의 식사를 마친 성우의 눈앞에 성하의 손바닥이 내밀어져있었다. “뭐야?” “화이트 데이. 사탕 줘.” “······아, 오늘이 그 날이던가.” 화이트 데이, 남자가 여자에게 사탕 주는 날. 처음의 계기는 단순히 과자회사의 상술일 뿐이었지만, 지금에 와서는 청소년들의 명절 같은 날이었다. 이런 문화를 장려하는 광주에 있어선, 지역정부에서 직접 광고를 하고 따로 행사가 치러질 정도였다. “그렇군, 화이트 데이라······.” 문득, 생각난 게 있는 것처럼, 성우는 성하를 지나쳐 현관문을 나섰다. “오빠, 대답은?” 성하는 텅 빈 손을 거두고 성우를 따라나섰다. 성우는 붐비는 과자가게에서 고급 사탕 세트 한 상자를 샀다. “이런 비싼 걸, 주는 거야?” 다시 성하의 손이 내밀어졌으나 성우는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내가 왜 너한테 줘야 하는 건데?” “······왜라니, 여·동·생이잖아?”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냐. 화이트 데이 사탕은 한 사람에게만 줘야 의미가 있는 거야.” “······우와 보기보다 로맨티스트?” “아니, 너 주기 싫다는 변명.” 팍-! 분노한 성하의 하단 테 치 앵(대각선정강이차기)이 빠르게 치솟으며 성우의 허벅지를 강하게 후렸다. 그러나 신음을 삼킨 건 오히려 성하였다. ‘다, 단단하잖아?’ 일그러진 얼굴의 성하를 멀뚱하게 쳐다보던 성우는 예의상 “아-”라는 신음을 내뱉었다. “아프잖아.” 한 마디 더 뱉어준 뒤, 성우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성하는 학교에 도착하기 까지 무언가 속은 것 같은 기분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성하와 해어지고 나서 성우가 향한 곳은 2학년 교실이 아닌 3학년 교실이었다. 3학년 1반에 들어간 성우는 마침 가방에서 메모리 스틱을 꺼내며 수업준비에 들어가 있는 여학생을 향해 다가갔다. 특이하게도 그녀 주변에는 남자들의 시선이 몰리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그녀 근처에는 한 사람도 없었다. “누가 가장 먼저 사탕을 줄까?” “누가 될지는 모르지만, 그 학생은 그 용기하나로 칭찬받아 마땅할 걸? 감히 여왕님께 사탕을 주다니···.” 여학생들의 대화가 성우의 귀에 포착되었다. 고고한 학 같은 아름다움을 가진 그녀의 이름은 조현미. 현성고등학교 3대 미인 중 3학년의 ‘여왕님’이시다. 의학계열회사 중 세계에서 이름난 그룹, KA-C(Company, 회사)를 세운 조위철 회장의 손녀이자, 학교에서는 항상 1등을 빼놓지 않는 수재, 그야말로 인생의 예정된 귀족이었다. 생활의 전반이 고급으로 시작하는 그녀에게 있어, 그저 ‘학생의 용돈으로는 비싸기만 한 사탕’을 주는 것은 그야말로 모욕일 것이다. 게다가 그녀 앞에 서는 남자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숙일 정도로 몸에 베인 품위가 대단한 여자다. 사탕을 주는 행위 따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보통이라면. 탁- 성우는 멜론만한 캔디세트를 눈앞에 보이는 책상 위에 놓았다. 그 순간, 신음소리가 교실 전체에 퍼졌다. 그들의 시선 안에는 여왕 앞에 도전한, 사내가 있었다.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손에 땀을 쥐고 멍한 눈의 사내를 응원했다. 조현미는 물끄러미 자신 앞에 선 성우를 올려다보았다. 성우의 얼굴을 본 현미는 피식 웃었다. 어찌 보면 비웃음 같기도 했다. 또 다시 교실 안에 탄성이 터진 것은 당연했다. ‘그럼 그렇지. 여왕님이 어떤 사람인데?’ ‘후우, 역시인가.’ ‘아, 그래도 너는 사내다!’ 망상이 난무하여, 검은 오오라가 천장을 뒤덮고 있는 교실과는 별게로 성우의 입이 열렸다. “그녀에게 주세요.” “매년 빼먹지 않는 구나.” “아마, 오늘로서 마지막일 겁니다.” “그래? 아쉽겠네. 그런데 내건 없니?” 성우의 입가가 살짝 비뚤어졌다. "울창한 숲속에 나무 한 그루를 심는다고, 그게 소중하게 보이지는 않을 것 같네요." "시적이구나." "고사를 응용했을 뿐입니다." 정확히는 병법이다. ‘나무를 숨기려면 숲에.’라는. 소설적 재능이 부족해, 문장을 새롭게 창조하지 못하는 성우였지만 읽은 건 많았다. "부탁은 들어주지. 그런데, 다음부터는 몰래 가져다주겠어?" 현미의 시야에, 뜨겁게 타오르는 눈동자로, 자신의 책상 위를 보는 남학생들이 포착되었다. 마치 인기스타의 사인 장에 몰려들어온 열성팬들이나 취할 것 같은 눈빛이다. 무엇이든 처음이 어려운 것이다. 여왕이라도 사탕을 한 번 받아놓은 지금이라면 아무리 줏대 없는 사람이라도 사탕을 줄 순 있다! “······이런 만화 같은 일이 일어날 수도 있네요. 그럼, 고생하시길.” 매정하게 등을 돌린 성우의 뒤로 소란이 일어나고 있는 여왕의 책상이 있었다. [현성학교신문- 여왕님, 사탕을 받다.] 뜨자마자 단 몇 분 만에 수백의 조회수를 기록한 특종. 거기에는 사탕을 주는 성우의 모습과, 사탕을 자신의 가방에 넣는 여왕, 현미의 모습이 있었다. 이 특종기사에 성우는 영우의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내 카메라 앞에서 해야 할 행동을, 다른 카메라 앞에서 하면 어떡해!” 물론 그 뒤 성우는 섬유목에게서 깨우친 초식들을 하나씩, 영우의 몸에 풀어나갔다. 경력을 담지 않은 주먹이었지만, 일반인에겐 충분히 위력적이었다. 자연스럽게 양호실로 옮겨지는 영우를 보며 누군가가 질문했다. “·······친구, 자네는 괴물인가. 무 산소 연타를 30회나 하다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우는 전혀 지친 것 같지 않았다. 성우는 언제나처럼 멍한 미소를 띠울 뿐이었다. 성하가 받은 사탕을 압축팩에 가득 담아 집으로 운반해온 성우는 동생 대신 사탕은 사탕대로, 편지는 편지대로 정리까지 해준 뒤, 슬립머신을 기동했다. 어김없이 섬유목과의 훈련이 뒤를 이었다. 회음의 원한을 잊지 않은 성우는 그 어느 때보다 살기 넘치는 맹렬한 공세로 섬유목을 몰아쳤다. 물론 섬유목도 가만있지는 않았다. 그에게 수세라는 단어는 어울리지 않았다. 공세와 공세가 부딪쳤다. 당연하게도 약한 공세, 성우 쪽이 쓰러지기 일쑤였다. 하지만 섬유목이라고 해서 멀쩡한 건 아니었다. 성우의 성장은 그야말로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이라, 지금에 와서는 3대 때리면 1대 정도 맞을 정도였다. ‘이미 무시할 수 없을 정도군.’ 그와는 별게로 성우는 3년 만에 두 개의 힘을 분할하고, 각각의 상반된 성질을 담는 데 성공했다. ‘제사총경을 쓸 수 있는 건가?’ 당장에 돌입했다. 현재 그의 목표는 섬유목의 면상에 주먹을 박는 것이었다. 그 가능성을 이뤄줄 기술이 바로 제사총경이었다. 경체를 크게 세 개로 나눴다. 하나는 발사관을 구축하고, 나머지 둘은 각각 상반된 성질로 만들었다. 뚜렷한 이미지는 없었다. 정 표현하자면 부드러운 어둠과 강렬한 빛이라 할까? 각각 상반된 성질을 두 개의 경체에 나눈 것이라 할 수 있었다. 하나의 경체로는 그리 위력이 없다. 어째서 사람들은 강해지기 위해 공을 갈구하는가. 하나의 성질에 극단으로 치닫는 게 바로 공이다. 극단으로 치달음으로써 그 성질에서만큼은 완벽한 힘을 내는 것이다. 예를 들어 성우가 경체에 뜨거운 성질을 담은 다고해도, 열양의 공에 비하면 명월 앞에 반딧불 정도의 위력일 뿐이다. 하지만 성우가 사용하고자 하는 것은 어설픈 힘을 담은 경력 따위가 아닌 두 성질의 융합, 폭발에서 일어나는 에너지다. 이것은 순수한 파괴력만이 있는 폭발적인 에너지. 지극히 폭력적이고, 완전히 제멋대로다. 컨트롤할 수 없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힘은 참을 수 없는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지금까지 지적되었던 모든 약점을 커버할 수 있는 전혀 새로운 힘! ‘이거라면 한 방 먹여줄 수도 있어!’ 제사총경을 연구함에 따라 확신은 눈덩이처럼 커져만 가고 있었다. 어느 날이었다. 우르르릉! 호흡과 함께 몸 안에서 진동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거기에 산을 뽑아내는 위력 따위는 없었다. 진각도 구르지 않고 힘의 성질을 변화시키는 것일 뿐. 무겁고 둔한 경. 가볍고 예리한 경. 나선을 그리며 마블링처럼 엉겨가는 두 힘이 진동을 발생시켰다. 섞일 수 없는 성질의 경은 서로를 밀어내고, 때로 폭발할 것처럼 부글부글 끓어오르며 몸 안을 갉아먹었다. 불길 같은 아픔이 혈관과 신경을 타고, 세포 하나하나를 살라간다. 쩌억쩌억- 그 진동에 견디지 못하고 뼈에 금이 갔다. 융합에서 태동된 경이적인 힘을 이기지 못하고 몸이 차례차례 부서져간다. 혼이 불길에 녹는 듯한 통증이 뇌를 삶아간다. 원숭이 골 요리가 법으로 금지된 이유를 알 것 같다는 헛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크······" 목구멍을 빠져나온 피가 안개처럼 자욱하게 퍼졌다. 반발은 점점 더 심해지지만 그것을 억누르는 걸 멈추지는 않았다. 말하자면 폭탄을 품고 있다. 아니 이미 폭발하고 있는 힘을 억지로 억눌러 한 곳에 뭉쳐두고 있는 것이다. 지진으로 따지면 여진과 같은 힘의 방출일 뿐인데, 몸이 모래성처럼 부서져가고 있었다. 한 가닥, 경사를 뽑아냈다. 으르렁거리며 서로를 물어뜯는 상반된 힘의 사이로 들어가, 그 경합을 한 순간 끊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그걸 예정된 발사관에 태워 방출하면 그걸로 끝. 탕-! 방아쇠를 당겼다. 홍수 때 둑이 터지면 이렇게 될까? '힘'은 어마어마한 폭음을 토해내며 대기 중으로 해방되었다. 노도처럼 쏟아지는 파괴의 발톱. 대기가 비명을 지르며 요동치고 땅에 금이 치달렸다. 거대한 압력이 경체를 짓눌렀다. 성우는 비명이 튀어나오는 것을 꾹 눌러참고 힘이 빠져나가기를 기다렸다. 그때, 예상외의 일이 터졌다. 이건 마치 기압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바람이 부는 것과 같아서, 쏟아지는 힘의 격류가 성우의 경 자체를 끌고 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경체를 구성하는 경 모두가 딸려나가면서 힘의 반발을 받아내던 틀도 같이 딸려나갔다. 그 결과는 파멸이었다. 경체가 고갈되면서 힘은 말 그대로 폭발해버렸다. 성우의 몸을 집어삼킨 경력의 붕괴는 땅을 파먹으며 자라나, 파괴의 신처럼 그 이빨을 날려 절벽을 통째로 물어뜯어버렸다. 우르르르릉! 뇌성벽력이 몰아치며 광풍이 불었다. 충격파는 마치 작은 운석이라도 떨어진 것처럼 땅을 파괴하고 절벽 일부를 분해해버린 뒤에야 사라졌다. 후드드드득 잠시 뒤, 돌비가 내렸다. 제사총경의 폭발. 그러나 이것은 실패였다. 폭발력을 이기지 못한 성우의 육신은 누더기가 되었고, 결국엔 죽음으로 이어졌다. “······이것이 녀석이 말하던 환상의 제사총경인가. 그야말로 폭룡뇌규(暴龍雷叫 사나운 용이 뇌성을 토하다.)로구나.” 제사총경이 만들어낸 이무기가 지나간 것 같은 뚜렷한 흔적을 보며 섬유목이 중얼거렸다. 제사총경의 이름은 그렇게 정해졌다. 비명은 현실로 돌아와서 질렀다. 경침처럼 현실에서까지 그 여력은 없었으나, 기억 깊숙이 박히는 그 통증은 경침이 없었더라면 최악의 것으로 남았을 정도로 강렬하다. “······하지만.” 그 힘은 강렬했다. 힘의 크기만큼 유혹적이었다. 포기할 수 없었다. “우선··· 개량이다.” 경험이 있다. 실패한 것이지만, 원래 실패를 시작으로 연구는 시작되는 것이다. “그리고··· 먹여줘야지.” 섬유목의 면상에 주먹 한 방은, 이제 단순한 목적의 차원을 넘어서고 있었다. 그리고 이계에서 4개월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3개월이 아닌 이유는 성우와의 대련에서 빠져나가는 힘 때문이었다. 섬유목으로써도 이제 감춰놓은 전력을 내놓지 않으면 위험한 성우였다. “드디어 마지막이다.” “그 전에, 당신의 얼굴에 주먹을 박아 넣겠습니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르니까요.” “후후, 그래? 그럼 마음껏 덤벼보아, 흠!” 섬유목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전사통시와 선풍완격이 거의 동시에 터져 나왔다. 그러나 섬유목도 성우를 가르치면서 깨달은 게 많았다. 일권이 허공을 밀었다. 섬유목의 평범해 보이는 주먹이, 일순 강렬한 기세를 내포하더니 일직선으로 하나의 권력을 쏘아냈다. “···!” 그것은 공간을 지배하는 권. 공간의 균형을 무너뜨림으로써, 한정적인 천재지변을 일으킨다! 휘류류-! 섬유목의 주먹이 향하는 곳에서 돌풍이 일어나더니 성우의 권력을 먹었다. 물론 물리학 상, 완벽하게 성우의 권력을 소멸시킬 순 없었다. 하지만 궤도는 확실하게 다른 곳으로 틀어버린다. 성우의 포기는 빨랐다. 3연발 폭작철련이 날아, 섬유목의 주변에서 폭발했다. 폭발을 피하느라 몇 걸음 물러서는 그 틈을 타, 강한 진각을 내딛고 6단추진에 이르는 총경, 전사통시를 내쏜다! 경체의 양이 많아지고 질 역시 높아짐에 따라 무리를 하면 6단 추진의 총경도 가능했다. 한 번 추진에 따라 배에 이르는 가속도를 얻게 되는 총경의 원리상, 이 권은 5단 총경보다 최소 4배 이상 강하다! 물론 완벽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 힘은 이론보다 약할 것이다. 하지만 섬유목을 놀라게 하기엔 충분하다. 쾅-! 섬유목은 오랜만에 뼛속까지 저리게 하는 고통이라는 것을 느꼈다. 공의 힘을 담은 주먹으로 막아냈지만, 몸이 둥실 떠버릴 정도로 강한 파워다. ‘하지만!’ 아직 연발은 불가능한 것 같았다. 사실이다. 육단추진 총경을 2번 이상 연발하면 발사관을 이룬 경체에 손상이 일어난다. 그 덕분에 틈이 보였다. 섬유목이 아니라면 생각지도 못할 정도로 작은 틈, 하지만 섬유목에게는 승리의 지름길이다. 아무리 성우가 아무리 노력해도 섬유목에게 못 당하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힘의 출력. 즉, ‘한 번에 얼마나 힘을 발출할 수 있는가’이다. 이것은 꾸준한 노력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이것이 바로 경과 공의 차이다. 성우의 경우를 1이라 하면, 섬유목은 십에서 이십. 총경이란 효율적인 활용법 때문에 파괴력 면에선 그리 많은 차이가 나지는 않겠지만, 문제는 이 출력은 곧 육체의 능력으로 이어진다. 즉, 권력을 발출하는 게 아닌, 접근전의 파괴력은 어쩔 수 없다! 성우 역시 그것을 알기에 섬유목과의 접근전을 피한 것이다. 하지만 살을 주고 뼈를 깎는 식의 전투방법을 섬유목이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체면 같은 건 중시해본 적 없으니, 마음껏 전진했다. 폭작철련이 몸을 때려도, 전사통시가 내장을 울리고 지나가도, 선풍완격의 진공칼날이 수염과 머리카락을 잘라내도 철갑 같은 육신은 돌진했고 결국 접근전으로 접어 들어갔다. 짧게 발을 들어올려, 턱을 후린다. 턱을 살짝 늘어 피했다. 동시에 다리를 건다. 걸리는 데로 넘어지면서 권력을 발출한다. 근거리에서 손바닥을 펼쳐 출력을 개방하며 권력을 막아냄과 동시에 출력을 일으킨 채로 손바닥을 밀어 가슴을 쳐낸다. 슬라이딩하면서 손바닥을 피하고 사타구니를 후린다. 무릎을 슬쩍 굽혀 승천하는 용처럼 치솟는 발을 막는다. 땅바닥을 향해 권력을 쳐냈다. 무릎을 발판삼아 튕기듯 미끄러지며 몸을 일으킨다. 애꿎게 땅바닥을 강타한 권력이 먼지를 일으켰다. “저릿저릿하지?” 섬유목은 땅바닥을 가리키고 있는 주먹을 다시 들며 말했다. 일어난 성우는 섬유목의 질문에 대답 없이, 결연한 표정으로 기합과 함께 주먹을 내뻗었다. “합!” 당장에 권력의 발출은 없었다. 그러나 섬유목은 그 어느 때보다 긴장한 얼굴로 두 주먹을 모았다. ‘폭룡뇌규인가. 성우 녀석, 벌써 그 정도까지 이뤄냈단 말인가?’ 순간, 섬유목의 두 주먹 사이에 존재하는 공간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그의 주먹 사이에서 세계를 이루는 법칙에서부터 이탈된 힘이 일어났다. 아주 작은 공간의 붕괴로 일어난 힘은 짧은 순간에 거대한 폭풍을 일으켰다. 성우의 주먹에서부터 무형의 힘이 터져 나왔다. 그에 맞춰 섬유목의 주먹 사이에서 일어나던 폭풍이 다시 모여 그에 대항했다. 우르르르릉····· 콰르르르릉····· 두 개의 힘이 충돌했다. 수 년 간의 수련을 기적적으로 견디어냈던 동굴이 무너졌다. 섬유목은 몸을 충분히 회복시킨 후, 쓰러진 성우에게 다가갔다. 너덜너덜한 육신이었다. 하지만 4시간이 지나자 언제 그랬냐는 듯 깨끗하게 복구되었다. 그러나 정신만큼은 쉽게 복구할 수 없었는지, 아직도 기절해있었다. 경침을 뽑았다. 성우와의 일전에서 많은 힘을 소비했기에, 경침을 만들려면 전력을 다해야 했다. 이것으로 회복되려면 7개월이라는 세월이 필요했다. 그러나 후회는 없었다. 처음에는 막연히 무적의 신체를 가지고 싶었고, 나중에는 보기라도 하고 싶었다. 꿈이 바로 앞에 있었다. “미안하군.” 섬유목은 망설임 없이 성우의 정수리에 경침을 꽂았다. 성우의 눈이 번쩍 뜨였다. 입이 열렸다. “으아아아아아아········” 비명이 터졌다. 전신의 껍질을 벗겨내는 고통이다. 거대한 손을 가진 거인이 전신의 장기를 잡아 뜯어내는 것 같았다. 몸 내부에서 끊임없이 폭발이 일어났다. 태양을 삼킨 것 같은 뜨거움이 혈관을 타고 전신을 치달렸다. 정신은, 새하얗게 비워졌다. ‘·············’ 아무것도 생각할 것이 없었다. ‘··········’ 시야는 무채색의 공간만을 담고 있었다. ‘·······’ 모든 감각이 모조리 사라지고 태아가 되는 느낌이었다. 두근- 고동이 일어났다. 고통이 일어났다. 두근- 고동을 느꼈다. 이것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감각이 먼저 느껴졌다. 아니, 자신 것이겠지. 그러나 소유할 수 없었다. ‘아냐······ 아냐······!’ 이것은 분명 나의 것.한 없이 어려도, 새롭게 태어나도 소유할 수 있을 이것은 나의 영혼, 나의 육체. 깨달았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경험했던 모든 것이 플래쉬 백 된다. 마지막에 이르러서, 이곳에 있는 목적을 찾게 되었을 때, 명징明澄의 영역은 유리로 세공한 물건처럼 아름답게 부서져나갔다. 그리고 경침으로 인한 마지막 죽음이 그를 찾아왔다. ‘유라 씨···.’ 그의 16년 간 참아왔던 감정의 발산, ‘오직 하나를 향한 소유욕’은, 시련을 이겨냈다. 섬유목은 성우의 변화를 보고 벌어진 입을 다물 줄 몰랐다. 성우의 몸에서 빛이 일어나는가 싶더니, 그를 중심으로 폭풍이 일어났다. 폭풍? 아니다. 이것은, 이것은 그런 아름답기 짝이 없는 자연현상이 아니다. 터무니없이 흉폭한 이것은 그런 단어로 표현하기 죄스럽다. “소멸의 힘······. 나는 설마, 터무니없는 자를 키워냈다는 말인가!” 성우를 포함해서 성우의 근처의 모든 것이 승화昇化되어간다. 본능적으로 상황을 판단한 섬유목은 일찍이 그 폭풍에서부터 벗어났다. “선체仙體가 아닌 선인조차 죽일 수 있는 반선체反仙體······!” 분명, 그는 소원을 이뤘다. 무적의 육신을 가진 자를 목격할 수 있었으니. 하지만 가슴 한구석을 아리는 이 고통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내가 오히려 저주를 씌웠구나.’ 그것은 분명 그의 생애 처음으로 느끼는 죄책감일 것이다. 그렇게, 성우의 육신은 수많은 잔해들과 함께 애초에 없었던 것처럼 사라졌다. 미안하다, 그 한 마디 외엔 할 것이 없었다. chapter 16, Baptist ---a complex probability. 3월 14일 오후 4시. 거대한 서양식 저택이었다. 아니 궁궐이라고 불려도 될 정도였다. 대문에서 현관까지 거리가 100미터, 그 사이에는 수백 평의 정원이 존재하고 있었다. 이른바 기화요초까지는 아니더라도, 계절마다 갖가지 색깔의 꽃이 피도록 시스템이 갖춰진 과학과 미학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 정원이었다. 터무니없이 넓은 저택이었으나, 그 주인을 보면 그리 터무니없지만은 않았다. 한국보다 외국에서 더 유명한 기업. 세계 10대 의학제단 중 하나인 KA-C의 조위철 회장의 본가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곳은 그의 사업의 기초가 된 곳이었다. 전쟁으로 인해 땅값이 잠시 내려갔을 때, 이 지역의 땅 자체를 사고 다시 땅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았을 때, 국가주택공사에게 팔아버림으로써 사업의 주춧돌을 삼은 것이다. 이 지역에서는 유명한 일화였다. 웬만한 부자들은 땅을 치며 통한의 눈물을 흘렸겠지만. 그런 저택의 화려한 대문이 열리고 방범시스템이 해제되면서 새까만 고급자동차 하나가 정원을 가로지르고 현관 앞에 도착했다. 뒷문이 열렸다. 새까만 머리카락을 정돈하며 조현미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사탕을 바리바리 싸든 운전수와 함께 집안으로 들어갔다. 그런 그녀의 손에는 멜론 크기의 사탕세트 하나가 포장된 채로 덜렁거리고 있었다. 겉모습과 매치 되지 않을 정도로 담백해 보이는 내부구조는 이 집 주인의 성품을 드러내는 것 같았다. 사실 그녀는 이런 분위기를 좋아한다. 어느 누구보다 화려해 보이는 그녀였지만, 평생을 이 집에서 생활한 만큼 이런 품격에 물들어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자기를 멋대로 평가하는 학생들의 시선은 무시하는 편이었다. 그렇기에 더욱 더 오해가 쌓였지만, 신경 쓰지는 않았다. “제 방에 놓아두세요. 사탕은 포장을 뜯어서 한 곳에 놓아두시고요. 편지는 따로 정리해서 한꺼번에 볼 수 있도록 텍스트 파일로 변환시켜주세요. 부탁해요.” “알겠습니다. 아가씨.” 공손히 인사하는 집사에게 일거리를 맡긴 그녀는 곧장 계단을 통해 3층으로 올라갔다. 삼층에는 3층 일광욕 발코니 실을 제외하곤 오직 하나의 방 만이 존재했다. 오직 한 소녀만을 위한 방. 현미는 원목으로 만들어진 문을 두 번 두드렸다. 맑은 목탁소리가 퍼졌다. “들어가도 되니?” - “응.” 안에서부터 곱지만, 힘이 없는 목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발에 밟히는 것이 있었다. 내려다보니 그림이었다. 추상적이면서도 현실적인··· 두 개가 엉켜 전혀 새로운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그런 그림들이, 이 방바닥에 늘어져 있었다. 그림의 산 가운데, 캔버스가 놓여있고, 아삭아삭하는 연필 긁는 소리가 묘하게 이 방의 분위기를 현실로 끌어들인다. 그러나 그림의 산은, 아무리 봐도 현실 속의 모습 같지는 않았다. 마치 이 방을 캔버스 삼아, 자신만의 분위기를 그려낸 것 같았다. 소녀는 그렇게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이방에서 나가는 일 없이 3년간을 계속. 달칵- 연필을 놓는 소리가 들렸다. 소녀는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놀랍게도 그녀의 얼굴은 조현미와 완전 똑같았다. 그들은 쌍둥이였다. 다만, 두 소녀를 두고 착각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두 소녀에게서 풍기는 기운은 그만큼 차이가 났다. 안색부터가 달랐다. 병색이 완연해보였다. 살이 빠지지는 않았지만, 한동안 외출이 없었던 것처럼 창백해져 있었다. 그렇다고 기본 외모가 퇴색되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현미가 가지지 못한 청조한 아름다움이 그대로 풍겨 나왔다. 창백한 얼굴의 소녀, 조현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무슨 용건이야?” “오늘 날짜가 3월 14일이라는 것만 가르쳐줄게.” “3월 14일? 벌써 그렇게 되었나? 근데 그게 무슨······?” 현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어보이고 성우에게서 받은 사탕세트를 현지에게 건넸다. 그제 서야 현지는 탄성을 흘렸다. “매년 수고하네, 성우도.” 힘없이 그녀가 중얼거렸다. 너무나 애처로운 눈빛에, 현미는 자신의 반쪽을 토닥거렸다. 사탕세트의 포장지를 여니, 제과점에서 제공하는 편지지가 들어있었다. 그곳에는 짤막한 한 문장만이 있었다. 그 문장을 본 현지는 또 다시 탄성을 흘렸다. 현미가 듣기에는 너무나 슬픈 음성이었다. ‘대체 어떤 내용이기에?’ 남의 편지를 읽는 게 죄악임을 알면서도 너무나 소중한 자신의 언니를 가슴 아프게 하는 내용에 호기심을 감출 수는 없었다. [소유하고 싶은 것이, 생겼어요.] “···뭐야?” 편지지에는 뜻을 알 수 없는 문장만이 한 가운데에 자리하고 있었다. *** 그녀가 그를 만난 것은 3년 전이다. 그 당시 그녀는 K&J중등교육원 미술학부에서 재능을 살리고 있었다. 밝고 쾌활한 성격이었던 그녀는 신분을 숨기고 있었기에 지금의 현미와는 달리 친구가 많았다. 미술학부에서도 자신만의 독특한 화풍을 창조해내어 고등학교 과정에 들어갈 필요 없이 대학교에 특진입학이 예정되어 있었다. 다른 의미로 성공한 인생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학부를 선택하지 못한 전학생이 왔기에 학부위원장으로써 개인적으로 만나려고 했다. 전학생의 이름은 유성우. 하지만 만나려는 노력이 필요 없이 그가 먼저 그녀를 찾아왔다. ‘5억만 빌려주실래요?’ 말도 안 되는 농담이라고 하기엔 그의 눈빛은 너무나 진지했다. 이미 할아버지의 특수교육으로 ‘평생 쓸 돈(따로 용돈은 주지 않는다)’이라는 명목으로 통장에서 차근차근히 이자를 높여가는 10억은 있었지만, 당시 통이 컸던 그녀로서도 그의 소원을 들어줄 리는 만무했다. 물론 그 전에, 그런 돈이 없다는 소리가 먼저 나왔다. 그의 얼굴에 웃음이 달렸다. 의미 없는 입술이 비틀림. 의미를 굳이 달자면 비웃음에 가까울까. ‘KA-C의 영애가요?’ 그는 알고 있었다. 그녀의 정체를. 어떻게 안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정보 하나만으로도 이미 5억의 가치는 있었다. 승낙하려던 차에, 그가 말했다. ‘이번 승부에서 이기면 5배의 이윤이 남거든요. 마침 5억만 더 있으면 굳히기가 가능한데, 아깝군요. 혹시라도 돈이 심심하시면 백운제약의 주식 2만 주 만 샀다가 9일 후에 파세요.’ 소년은 어느새 일류 주식 매니지먼트의 눈빛을 거두며 그녀 앞에서 사라져갔다. 그녀는 급히 소년을 잡고 물었다. “미술학부에 안 들어올래?” 그 거래에서 5억이 사과상자 거래되듯 넘어간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나갔던 5억은 25억으로 되돌아와 그녀의 통장으로 입금되었고, 더불어 성우라는 미술부원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처음에는 가르치는 족족 슥슥 배워가는 성우의 재능에 감탄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새로운 화풍을 창조하게 만드는, 그러니까 열정이 없었다. 그 자신은 소설적 재능이 없다고 치부했지만 그녀가 보기에는 열정, 욕심, 갈구, 등등 예술가들이 필연으로 겪게 되는 감정 자체가 말살되어있었다. 흥미가 생겼다. 사랑이란 단어를 붙이기엔 아까운, 말 그대로 흥미였다. 그를 겪게 되면서 그녀의 화풍은 또 다른 차원으로 발전했다. 미술학부 선생님들 사이에서는 난리가 났다. 당장 직업으로 뛰어도 될 정도로 독특하면서도 사람들의 감정을 뒤흔드는, 극한의 ‘무엇인가’가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경쟁으로 낳은 화풍이었다. 자신이 그림을 그리면 그가 따라 그렸다. 그렇게 그려진 그림은 완벽했다. 분위기도, 표현도, 색채도, 명도도, 심지어는 물감의 마모된 정도까지도. 그가 따라 그리지 못할 정도의 화풍을 창조해 내야 했다. 그녀가 가지는 예술가적 프라이드인지, 아니면 천재들이 가진다는 호승심인지는 그녀 자신도 몰랐다. 그리고 그가 따라할 수 없는 화풍을 손에 넣게 되었다. 성우는 패배를 인정하고 순수하게 축하의 말을 건넸다. 그 순간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어느새 그는 그녀의 마음 한구석을 자리하고 있었다. 이 경쟁을 즐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테러처럼 ‘그게’ 찾아왔다. 병마와 같이 몸을, 영혼을 잠식하는 ‘그것’ 그것은 업계 톱을 달리는 의학회사인 KA-C의 약으로도 치료할 수 없었다. 병세는 급속도로 나빠졌다. 대인기피증까지 생겼다. 졸업을 앞뒀을 때, 딱 한 번 성우를 만났다. 그는 멍하게 오랜만이네요, 라는 말을 던졌다. 그리고 그 날 그녀에게 주어진 단 한 번의 밀월蜜月을 즐겼다. 나이와 윤리, 선생님과 부모님들의 주의를 잊고 뒤엉켰다. 하지만 어느 때보다 정열적이어야 할 그들의 행위는 너무나 담담하게, 그래서 너무나 당연한 듯 치러졌다. ‘흔들어줘야 하나요?’ 멍하게 말하는 그의 얼굴을 보고 피식 웃음까지 나왔다. 그 때만큼은 대인기피고, 병질이고, 모두 사라지는 것 같았다. 서로 간의 첫 키스가 이뤄진 후, 담담함과 달콤함이 공존하는 여운으로 그녀가 말했다. “너는 욕심이 없구나.” 대답은 없었다. 그게 마지막 만남이었다. 깨끗하게 해어졌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만나고··· 싶어.” 그것의 합병증, 그녀를 이 집에 스스로 구속시키게 만든 존재. ‘그것’으로 생긴 마음의 어둠을 파고 들어와 그녀의 몸 내부에서 커져나가며 끊임없이 ‘어떠한 것’에 대한 갈구를 안겨주는 원인. 그 때 마침 ‘그것’이 주는 힘이 그녀를 유혹했다. 마치, 헨델과 그레텔에 나오는 과자로 만들어진 집처럼. 성경에 나오는 선악이 괴리된 탐스러운 열매처럼. 그리고 그녀는 유혹에 넘어갔다. *** 잠에서 깨어난 성우는 한동안 멍하니 천장만 보고 있었다. 특이하게도 고통은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변한 게 있는가, 하면 또 아니었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어?’ 분명 그는 선체를 이뤘다. 그러나 무엇이 변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왠지 머리가 텅 비는 것 같은 느낌이 계속되었다. 그렇게 1시간이 흘렀다. 빈 머리에 새로운 상념을 가득 채우고, 몸을 일으켰다. 성하가 왔다. 저녁식사 후, 다시 슬립머신 안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다시 초인종이 울렸다. 어머니가 들어올 시간은 아니었다. ‘누구지?’ 수십 년 전 같았으면 신문구독권유자일 가능성도 있겠지만, 그건 아니다. 잡상인일 가능성 역시 없었다. 있다면 택배 정도일까? 한동안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지 않기에 슬립머신에서 나와 있었다. “오빠! 손님이야!” 거실로 나온 성우는 짓궂은 표정의 성하에게 한 소리를 들어야 했다. “흥, 대단한데?” “뭐가?” 가볍게 반문해주며 현관을 향해 눈을 돌리는 순간, 성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기억의 영상을 그대로 따르면 오늘 한 번 만난 적이 있는 소녀가 거기에 있는 것이다. 3학년의 여왕님? 아니다. 그녀가 아니다. 더 없이 반가운 표정을 더 없이 창백한 안색으로 지어내는 소녀는 그가 알고 있던 모습과는 많이 달라졌지만 분명 그녀였다. “선배님?” 3년 동안 써본 일이 없는 호칭을 그 음정과 박자, 톤까지 겨우 기억해내며 물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한 소녀는 그 대사가 주는 울림을 즐기다가 문득 밝게 웃으며 말했다. “오랜만이네?” 계절에 맞지 않은 새하얀 원피스를 입고 있는 그녀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성우의 선배였던 조현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