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비케나] 로마의 휴일 ****************************** + 로마의 휴일 prologue 바다 한가운데 표류하는 몸 위로 햇살이 수직으로 떨어진다. 하늘로 향한 얼굴 위로 태양이 물의 장막에 잠긴다. 눈부시게 빛나는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거대한 백색의 수선화가 피었다. 타오르는 불꽃, 추락, 끊임없는 추락. 심해에서 올라오는 듯한 소용돌이가 몸을 감싸고 있다. . . . . . Unde exeo? (나는 어디서 오는가?) . . . Quo eo? (나는 어디로 가는가? ) . . . Quo Vadis Domine? . . .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 . . . . ............... 몸이 천근 만근이 된 것처럼 무거웠다.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아무 것도 기억이 나는 것이 없었다. 입안에서 그리운 이름이 감돌지만 목소리가 되어 나오지는 않았다. 아니, 그 이름이 떠오르지 않아 가슴에 돌이 박힌 것처럼 답답했다. " Salve?" 듣기 좋은 저음의 목소리가 들렸다. 낯설지 않은 외국어였지만 지금의 태우는 그 의미를 알아들을 수도 어느 나라의 언어인지도 파악할 수도 없었다. 힘겹게 눈을 뜨고 나서야 자신에게 말을 걸고 있는 금발의 남자가 보였다. " Tu me videre pote? " 무슨 말이야? 난 어디에 있지? 금발의 남자가 걱정스레 자신을 들여다보는 것 같았지만 주인을 배반한 육체는 손가락하나 까딱할 힘도 없었다. 아니, 육체를 움직일 정신마저 돌아오지 않은 듯 했다. "하아,,,,나는.....나..," "Quispiam?" 떨어졌다. 고통은 공포에 눌려 어떤 감각으로도 느껴지지 않았다. 비행기가 추락하고 바다에 부딪히면서 기체가 두 동강났다. 밀려드는 파도에 휩쓸려 바다 속으로 빨렸다. 온 몸이 덜덜 떨렸다. 그 순간의 공포가 격하게 정신을 헤집어 놓았다. 잊은 게 있어, 그게 뭐지? 난.... " Vide te tremetem....... " "우우우......흐흐흑........흐흑" " Non lacrimare. " "우우욱...........흑흑........." 쉴새없이 두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부드럽게 머리를 쓸어주는 손길을 느끼며 태우는 몸의 경련이 잦아드는 것을 느꼈다. 금발의 남자는 계속해서 태우의 눈가의 눈물을 훔쳐주고 그의 이마를 쓸어주었다. " Non lacrimare, Non lacrimare. " 부드러운 저음의 목소리가 주문처럼 귓전에서 들렸다. 마치 우는 아이를 달래는 어머니의 다정한 자장가처럼 느껴져서 밀려오는 편안함에 지친 심신을 맡겼다. 아득하게 멀어져 가는 목소리 속에서 태우는 잊었던 그 것을 겨우 기억해냈지만 이내 몰려드는 수마에 이름은 어둠 저편으로 묻혀버렸다. '혜준아............어디 있니......... 혜준아..........' " Somo se dare, Hostis." 금발의 남자는 잠이든 태우의 숨결을 확인하고는 어깨에 걸치고 있던 토가를 벗어 그의 몸에 덮어주고 일어섰다. ******************************************** + 로마의 휴일 서장 Quo Vadis? - 어디로 가는가?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고 했던가. 이 천년 전만 하더라도 그 격언은 비유가 아닌 진실이었으리라. 포로 로마노(FORO ROMANO). 고대로마의 중심지였던 이 곳은 현재 거의 폐허나 다름없지만 전성기 로마의 위용은 아직 사라지지 않 고 유령처럼 맴도는 것 같았다. 고대 로마제국의 정치 문화의 중심지. 루비콘 강을 건넌 쥴리우스 시저는 이곳으로 당당히 입성을 하고, 그의 후계자 아우구스투스는 로마의 초대 황제로 등극했었을 것이다. 어떤 황제는 이곳에서 시가를 불태우고 노래했으며 어떤 황제는 심장에 칼을 찔리고 어떤 황제는 신의 목소리를 들었다지. 태우는 이미 미지근해진 콜라를 입으로 털어놓으며 연신 사진을 찍어대는 혜준의 뒤통수를 바라보았다. 그런 혜준 그림자 너머 길게 노을이 드리워진 콜로세움이 과거 로마제국의 향기를 아련히 뿜고 있었다. 한시간 전 콜로세움 안에 들어섰을 때 8만명의 관중들이 그를 향해 ' Mors(죽음!) '을 외치는 듯한 착각이 들었었다. 이번 여행의 종착지로 무리였지만 로마를 집어넣은 것은 정말 잘 한 일이었다고 따가운 초여름의 햇살을 손바닥으로 가리며 태우는 진심으로 그 렇게 생각했다. 시저가 보수했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다는 돌로 된 포장도로를 따라 그의 연인에게 다가섰다. 그의 기척을 느꼈는지 혜준 환하게 웃으며 돌아섰다. 몇몇 사람들이 혜준과 태우를 호기심있게 바라봤지만 한국의 차가운 시선에서 해방된 혜준에게는 그런 것 따위 문제도 되지 않았다. " 사진 다 찍었어? 이제 어디 갈까? " 오래 전부터 자신을 기다렸는지 그의 손에서 미지근해진 콜라를 내밀며 태우가 묻는다. 더위에 약한 그가 연신 땀을 훔치면서도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머물고 있다는 것을 혜준은 알고 있었다. 시원한 이목구비를 가진 이 장신의 동양계 청년은 외국인들의 이목을 끌고 있었다. 한국인치고는 좀 옅은 갈색 머리와 갈색 눈을 가진 혜준과 다르게 태 우는 전형적인 흑발 흑안의 미남이었다. 흐리게 진 속꺼풀은 태우의 검은 눈을 더 검게 보이게 하였고 염색하지 않은 천연 의 검은머리는 검다못해 푸른 무지개 빛을 지중해의 햇살에 반사해내고 있었다. 옛 로마의 풍경을 등지고 서있는 태우의 모습이 금방 어디론가 사라질 것 만 같아 혜준은 얼떨결에 그의 옷자락을 세게 쥐고 말았다. "왜? 힘들어? 그냥 호텔가서 내일 갈 준비나 할까?" "아니! 아냐 아무것도......." 걱정스레 물어오는 태우에게 네가 갑자기 어디론가 사라질 것 만 같아서 라고는 죽어도 말 할 수 없었다. 그가 , 태우가 가기는 어디로 간단 말인가. 혜준은 순간적으로 머리 속을 헤집어 놓은 망상을 치워버리고 로마에 오는 순간 벼르고 별렀던 그 곳의 이름을 힘차게 외 치며 버스 정류장 쪽으로 뛰었다. " Fontana di Trevi ! " * 트레비 분수 ( Fontana di Trevi ) 분수의 도시로 알려진 로마의 분수 가운데서도 가장 유명하다. G.L.베르니니의 원안에 따랐다고 하는 N.살비 설계의 대표작으로, 1732년 착수하여 살비 사후인 1762년에 완성하였다. 흰 대리석 작품으로 개선문을 본뜬 벽화를 배경으로 거대한 1쌍의 반인반수(半人半獸)의 해신(海神) 트리톤이 이 끄는 전차 위에 해신 넵투누스상이 거대한 조개를 밟고 서 있으며, 주위의 거암거석 사이에서 끊임없이 물이 흘러나와 연못 을 이룬다. 이 연못을 등지고 서서 동전을 한 번 던지면 다시 로마를 방문할 수 있고 두 번을 던지면 사랑이 이루어지고 세 번을 던지면 연인과 헤어진다는 속신이 있다. Fontana di Trevi . 트레비 분수, 로마에 와서 이곳을 들렸다 가지 않는 연인들(- 단지 그들뿐이랴...)은 분명히 없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태우는 사실 질린 표정으로 분수 앞에 인산인해를 바라보았다. 저 사람들이 저기에 다 동전을 던지면 도대체 ,,,,,,그게 얼마야?? 설마....... 태우는 로마에 와서 처음으로 불안한 표정을 지으며 혜준을 바라보았다. " 너 저기를 뚫고 들어가서 동전을 던지자는 건 아니겠지? " " 당연히 던져야지!!! 내가 여길 왜 왔는데!!!!!! " 혜준은 난감해하는 태우의 얼굴을 무시한 채 그의 손을 잡아끌고 다 그들의 사랑을 위한 것이라고 그를 설득하면서 정말 초인 적인 힘으로 분수 앞으로 나아갔다. 동전을 만지작거리는 손에 땀이 베어나는 것에 혜준은 흠짓 놀랐다. 간단하잖아? 뒤 돌아서서 한 번, 또 한번 던지면 되는 거야. 주변에서 연인으로 보이는 두 남녀가 동시에 한 번, 또 한번 동전을 분수에 던져 넣었고 그것은 다혈질의 이탈리아 사람들의 짓궂 은 환호로 이어졌다. 하느님, 용기를 주세요. 미신 따위에 흔들릴 혜준은 아니었다. 태우도 물론이거니와. 하지만 사랑을 이루어준다는 달콤한 유혹이 가벼운 관광지의 유희로 치부하기에는 혜준의 사랑은 너무나 절실 했다. 동성간의 사랑, 아직 한국 사회에서는 그들에게 너그럽지 않았다. 언제 그들이 헤어져도 절대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그가 살고 있는 땅은 그런 곳이니까. 그래서 이국의 땅에서 많은 사람들이 사랑을 비는 이곳에서 혜준은 그들의 사랑이 영원하기를 소원하는 것이었다. 퐁당. 훌쩍 손을 떠난 동전이 떨어지는 소리에 혜준은 감았던 눈을 뜨고 태우를 바라봤다. 나 너와의 사랑이 영원으로 이루어지길 바라고 있어. 태우의 모습을 시야에 가득 담으며 혜준은 마지막 동전을 던졌다. 퐁당. "다 했어? 이제 가자." ".......엑 너 안 던져?? 빨리 던져!!!!!!!!! 내가 왜 여기오자고 했는데!!!!!!!" "쪽 팔리게,,,그냥 가자,,나 배고프다,,응?" 태우는 동전 던지기에 집착하는 혜준을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서울에 있을 때는 히스테릭할 정도로 주변의 시선에 신경을 쓰더니 여행에서는 태우가 놀랄 정도로 대담해진 혜준 이었다. 평소에 그가 아는 대로의 혜준이라면 트레비 분수에서 동전을 던져 사랑이 이루어지길 빌자는 이야기는 콧등으로도 안 들 을 녀석이었는데, 지금은 신혼부부보다도 더 닭털을 마구 날리는 것이 아닌가. 태우는 바둥 거리며 악을 쓰는 혜준의 손목을 잡고 돌아 나오면서 등뒤로 동전을 한 개 던졌다. "휴우... 됐지? 이제 제발 가자...응?" "어어!!!!!! 한번 더 던져야지!!!! 그래야 사랑이 이루어진다잖아!! 다시 가서 또 던지고 와!!!!!!!!!" "야, 유혜준..너 진짜 유치하게 왜 그래? " " 유치?? 그게 뭐가 유치한데? " 갑자기 낮아진 혜준의 목소리에 태우는 당황했다. 동전을 던지는 게 그렇게 중요한 일인가? 혜준의 눈에 차오르는 눈 물에 왠지 모를 죄책감이 드는 그였지만 그렇다고 다시 저 인파를 뚫고 들어가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었다. 원래가 조금 건조한 성격의 태우는 혜준이 트레비 분수에 걸고 있는 그런 기대감을 이해하기에는 좀 무리가 있었다. 혜준은 정말 태우가 원망스러웠다. 여행이라는 핑계로 아는 사람들의 시선에서 벗어나 자유를 맛보았다. 동성간의 사람을 지켜가기에는 소 심하고 모질지 않는 스스로를 잘 알고 있기에 이곳에서 소원을 빌고 싶었다. 트레비 분수라는 연인들의 장소에서 당당하게 맹세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아니 사실은 마음 속 깊이 자리한 나약함에 미신을 방패삼았는지도......... " 그래!!!! 너 혼자 로마에 다시 와라!!!!! 나 호텔로 갈래!!!!!!!!!" " 야!! 혜준아!! 유혜준!!!!!!!! " 혜준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택시 정류장으로 걸어 가버렸고 아차 하는 사이에 혜준을 놓친 태우는 스페인 광장에 혼자 남겨졌다. 순식간에 틀어진 태우와 혜준 사이로 길게 땅거미가 드리워졌다. 태우는 혜준을 태우고 어디론가 사라지는 택시를 보며 씁쓸했지만 곧 서둘러서 다른 택시를 찾았다. 그렇게 태우와 혜준의 여행의 마지막 날이 지나고 있었다. . . . ' 단단히 삐졌군........' 비행기가 이륙하자 마자 헤드폰을 쓰고 시트에 몸을 묻어 버리는 혜준을 보는 태우의 입에서 나즈막한 한숨이 나 왔다. 어제 트레비 분수대에서 작은 트러블은 호텔에 가서는 격한 감정 싸움으로 커졌다. 태우가 겨우 평정심 을 찾았을 때 이미 티베리스 강변을 걷고 있었다. 거리에 한적한 카페를 찾아 커피를 마신다는 게 캐나다에서 왔 다는 같은 처지의 새신랑을 만나면서 술자리로 이어졌다. 새벽이 되어서 서둘러 호텔로 돌아왔을 때 태우를 반긴 것은 침 대에 쓰러져 자고 있는 혜준과 그 손에 서 떨어지는 빈 와인병. 문제의 와인은 로마의 마지막 날 마시자고 심혈을 기울여 고른 쏠라이아(Solaia)였기 때문에 순간 태우는 혜준을 그대로 창밖에 던져 버리고 싶은 충동을 억제하기 위 해 노력해야 했다. 빈 병에 남겨진 향을 애틋한 마음으로 맡으며 공항에서 주류 면세점에 들릴 것을 다짐했다. 귀국준비도 하나도 되어있지 않아서 태우는 혜준이 깰 때까지 짐 정리에 매달렸었다. 아침식사도 그럭저럭 마치고 어느 정도 분위기가 좋아지는 듯 싶었지만 공항에서 다시 틀어지고 말았다. 혜준은 어제 마셔버린 와인이 얼마나 좋은 것인가를 살 때부터 태우에게 누누히 들었던 터였다. 내심 미안해했지만 혜준은 탑승 전 면세점에서 신중하게 와인을 고르는 태우의 모습에 오히려 발끈해 화를 내버린 것이다. '후우,,,그냥 내가 조금만 참을걸,,,' 결국 한정품인 쏠라이아(Solaia)는 구하지 못하고 이웃 사촌격의 와인을 사는 태우의 모습에 엄청 양심의 가책을 느꼈 다. 혜준은 와인에 별 흥미가 없어 그 긴 이름들을 외우지 못한다. 따지고 보면 트레비 분수에서 자신이 고집을 부린 것이나, 태우가 와인에 집착하는 것은 오십보 백보가 아닌가. 결국엔 쌤쌤이라고 생각하면서도 태연한 척 말을 붙이지 못하는 스스로의 성격을 저주하면서 혜준은 애꿎은 헤드폰의 볼륨만 망가뜨리고 말았다. 손에든 볼륨 콘트롤러의 부품을 망연하게 바라보는 혜준의 손에서 그것을 빼앗아 태우가 조립을 해주었다. 피아노를 치는 녀석이니 손재주가 좋은 것은 분명한데 혜준도 대부분의 예술가들이 그렇듯이 이상하게 기계류에 약했다. " 자, 계속 음악만 들을거야? " "...................아니." "................" "..............." 태우는 비행기의 작은 창 아래로 펼쳐지는 깊은 청록색의 지중해를 내려다보며 혜준의 손을 잡았다. 이내 마주 쥐어오는 손에 가득한 땀방울을 느끼며 그 때 동전을 하나 더 던졌으면 좋았을거라는 뒤늦은 후회가 밀려왔다. "후후" 그의 웃음소리에 움찔하는 유연한 손가락을 태우는 느끼며 어떤 말을 건 내려 입을 열었다. "내가 ......" ----------콰아앙!!!!!!!! 고막을 울리는 굉음에 묻혀 태우의 목소리는 혜준에게 닿지 않았다. 찢어지는 듯한 귓가의 통증이 느껴졌지만 순간 기이한 적막감이 엄습했다. 현란한 비상등과 함께 떨어지는 산소 마스크 사이로 공포로 일그러진 혜준의 얼굴이 보였다. 태우는 발버둥치는 혜준의 몸에 억지로 산소 마스크를 씌우고 구명조끼를 입혔다. 솜뭉치를 틀어막은 듯 들리지는 않지만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보였다. 33층인 사무실에서 나와 엘리베이터를 탔을 때의 그 중력감. 비행기는 추락하고 있었다. 태우는 온몸이 산산히 부서지는 충격에 그만 혜준을 놓쳐버렸다. ................. 승객 195명과 승무원 11명등 206명을 태운 인천행 이탈리아 포르타로마 항공(IFRA) 소속 FA2304 여객기가 오후 14시 30분 로마공항 을 이륙한 직후 로마 연안에 추락했다. 사고 이튿날 현재, 생존자 21명이 구조되어 로마시내 병원으로 후송되었고 102구의 사체가 인양되었다. 사고 해역에 파도가 높아 실종자 73명에 대한 수색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 ..................... <서장 ; Quo Vadis? - 어디로 가는가? > 끝 ********************************************** +로마의 휴일 제1장 ; Marcus Antonius # 1 기분 좋은 바람이 코끝을 스쳤다. 청문을 통해 들어온 짭짤한 소금기를 머금은 바람이 침대에서 누워있던 태우를 조심스럽게 깨웠다. 깜박 깜박, 까슬까슬한 감촉의 천으로 만들어진 캐노피가 눈앞에서 흔들렸다. 여긴 어디지? 고풍스럽게 꾸며진 방은 분명 익히 알고 있는 병원과는 거리가 멀었다. 지독한 소독약의 냄새도 느껴지 지 않고 팔목에는 흔한 링겔 주사 자국도 없었다. 장도리로 머리를 찢는 듯한 두통에도 태우는 그가 누워있는 곳에 대해 적절한 해답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사고가 났으니 병원에 있어야하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그 것은 살아있다고 가정을 해야한다. 지금 누워있는 곳은 병원과 거리가 먼 곳이니 난 죽은 건가? 아픈 머리로 지금 비이성적인 결론에 들어서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그제 서야 태우는 이 방에 또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가 일어나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들었는지, 지금까지 창문을 열고 바람을 맞고 있던 사내가 다가왔다. " Salve? Quid agis hodie? " 뭐라는 거야? 저 유연한 발음....... 그랬었군, 저토록 아름다운 울림이 있는 언어였던가? 책에서 봤을 때는 딱딱 하다고 생각했었는데......... 햇살이 비쳐 눈부시게 빛나는 금발 머리 때문에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졌지만 남자의 굉장한 미모를 감추지는 못했다. 꿈이 아니었어? 아니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가? 열에 시달리면서 몇 번씩 깨어났다 잠자기를 반복했다. 그 때마나 저 금발의 사내가 눈앞에 있었다. 그래서 천국에 와있는 거라고 안심(?)했었다. 남자는 미술실에서 얼마 전 까지 로마에서 숱하게 보았던 아폴로의 입상과 무척 닮아있었으니까. 종교가 천주교이니 만큼 날개 달린 천사가 있어야하겠지 만 묘하게 희랍 신화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눈앞의 풍경에 아마도 사후세계는 속지주의를 따르고 있는 것이라고 치부해버렸 던 것이다. 분명 사고가 난 해역은 지중해였으니까. 올림푸스(그리스의 신들이 사는 곳)에 가도 이상할 것이 없잖아.. 그래서 잠결에 악몽에 시달리는 나를 달래주던 이 남자의 눈부신 금발과 수려한 외모 때문에 영광스럽게도 이국의 바다에서 죽은(?) 불쌍한 영혼을 위해 아폴로신(태양신)이 친히 마중나와 준 것이 아닌가 하는 망상을 했던 것이다. 하지만 온몸의 감각은 그의 생존을 당당히 주장하고 있었다. 삭신이 쑤셔오는 고통 때문에 작게 신음을 흘리자 서늘한 손의 감촉이 이마에 서 느껴졌다. 맞아 그랬지, 아폴로는 의술의 신이기도 했어. 평상시에는 절대 행하지 않을 논리적 오류를 범하면서 태우는 이 금발의 미남자가 아폴로 신이라고 굳게 믿어버렸다. " Apolo(아폴로) ? " " Quid? HA HA HA ~~~~ Non sum Apollo. Mihi nomen est Marcus Antonius." "!!!!!.......장난하나.." " Quid? " 아폴로라고 하는 말을 알아들었는지 자기소개를 하는 사람을 보고 어이가 없었다. 당신이 안토니우스면 난 클레오파트라다. 지금.......이 사람이 하고 있는 언어는 지난 20년간 가풍에 따라 익힌 언어였다. 현재 대학에서도 신과대에 초빙되어 특별 강사로 나갈 만큼 그의 라틴어 실력은 꽤 괜찮은 편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미 "회화"로써는 죽어버린 언어의 억양을 너무나 자연스럽게, 정말 고대에 라틴어가 그러했을 것 같은 착 각이 들게끔 금발의 남자는 일상언어처럼 구사하고 있었다. 아주 잠깐 그리스 로마 신화의 신인가 했지만 그런 것 같지는 않고.. 우선 살아있는 인간이 신을 만날 확률이 얼마나 될까... 점점 머릿 속이 활발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 Ita, Quid nomen tuum? " ".................." " Inveniebam et servareram te, in Ionia." 오.......이런 억양이었군! 그게 아니지! 라틴어는 묘한 시와 같은 가락이 있어 그이 저음과 잘 어울렸다. 느리지만 그가 했던 말이 머릿속에서 정리가 되면서 한국어로 풀이되었다. 어렸을 때 혼나가면서 읽어야했던 불가타(라틴어로 쓰여진 성경)가 이런 식으로 쓰여질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는 이름을 묻곤 있지만 쉽게 가르쳐줄 상황이 아닌 것 같다는 경고아닌 경고가 머릿속에 일었다. 이오니아 해에서 건져냈다는 말이지? 비행기가 바다에 추락했으니 그 부근에서 구조했다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었다.. 하지만............이런 분위기에, 지금 당신이 쓰는 말........ 일단 다시 확인해야겠다. 믿고 싶지는 않지만 머릿속에서 말도 안되는 결론이 아우성쳤다. 머리 속에서 헤엄치는 단어들은 잡아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 Qui,.... Qui es, Qui vir es tu? " (누구? 누구죠? 당신은 어떤 사람인가요? ) " Ego sum Marcus Antonius. " (나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다.) 동명 이인이려니 했다. 너무나 유명한 이름이기에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처럼 부모처럼 유명한 역사적 인물(레오나르도 다빈치)에서 따온 것일 수도 있다 고 생각했다. 또는 할 일없는 갑부 청년이 고대 로마인으로 코스프레를 한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지금 벤허 같 은 영화를 찍는 세트장에 와 있던가. 하지만 그 어떤 가정도 수백명의 노예들이 노를 저어 나아가는 갤리선과 뒤따르는 함대들의 펄럭이는 사각돛을 설명해줄 순 없었다. " Salve! " 튜닉을 입고 술이 달린 투구를 쓰고 토가를 휘날리며 몇몇의 군인들이 지나갔다. 그가 서있는 곳이 기원전 1세기 지중해를 항해하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기함의 갑판이라는 사실이 다시금 뼈저리게 느껴졌다. 이틀 전, 안토니우스에게 구조된 뒤 사흘만에 정신을 차린 태우는 최우선 과제를 체력의 회복으로 두었다. 주는 대로 다 먹고 주위의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들으면서 라 틴어를 다시 연습하고 나머지 시간은 잠만 잤다. 가끔 안토니우스와 그의 부하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와서 이것저것 묻기는 했 지만 일단 침묵으로 응수했다. 스스로 내뱉는 말 한마디에 죽을 수도 살 수도 있으니까. 중세에 쓰였던 스콜라 라틴어는 기 록을 위한 문자여서 지금 주위의 사람들이 쓰는 언어와 조금 틀리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래서 대학에 와서 배웠던 고전 라 틴어(로마 시대 언어)를 다시금 열심히 복습하고 있었던 것이다. 무엇이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느낌이 확실했고 지금 곁에 혜준이 없다는 사실이 정신의 한계를 갉아먹고 있었다. 정신의 충격을 육체가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체력을 회복시키는 것이 중요했다. 그리고 그 선택은 정말 탁월했다. 오늘 아침에 직면한 현실은 정신분열증이라도 걸렸으면 하는 생각이 들만큼 엄청난 것이었으니까. 아아, 영화 한 장면이 생각나는 구마. 단지 영화 속에서 설경구는 기차길 위에서 배의 난간을 잡고 있다는 것뿐. "우우아아아!!!!!!!!!!!!!!!!! 나 돌아갈래!!!!!!" # 2 그 동안 태우의 침묵, 질문에 대한 일관적인 무시에 안토니우스의 인내심도 바닥이 났는지 오늘 아침식사를 같이하자는 이야기를 노예를 통해서 태 우에게 전했다. 태우 역시 지금 머릿 속을 가득 채운 황당한 가설을 확인할 필요가 있었으므로 노예를 따라 나섰다. 안토니우스가 식사를 하는 곳은 일종의 접견실 같은 곳이었는데 바닥에 깔린 양탄자가 바닷바람에도 신기하리만큼 뽀송뽀송해서 정말 놀랐었다. 그리고는 전부 바닥에 앉아서- 정확히는 반쯤 누운 자세로, 식사를 하는데 환자라는 이유로 태우에게는 북실 북 실한 이름 없는 동물의 털가죽이 깔개로 제공되었다. 척 보아도 '나는 군인이요'라고 얼굴에 써있는 세 사람이 각자 자기 자리 로 주어진 큰 쿠션에 앉으면서 꿈에도 잊지 못할 고대에서의 첫 식사가 시작되었다. 안토니우스의 명령이지만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과 같이 식사를 하는 게 맘에 걸렸던지 그 세 사람은 그들끼리 이야기를 주고받는 도중에도 태우에 대한 경계를 늦추는 것 같지 않았다. 특히 식사 내내 말 한마디하지 않은 짧은 머리의 남자는 식사도중에도 가끔 은근히 칼을 만지작거리면 서 위협했다. " 아헤노발부스 장군이 항해속도에 대한 불만을 표하고 있습니다만." 갈색 고수머리를 목 언저리에서 묶은 남자가 안토니우스를 향해 말했다. 한눈에 봐도 융통성이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는 군인 체질이라는 것이 느껴지는 사내였다. " 시로코(지중해서 부는 바람)는 우리를 브린디시움의 품에 안겨 줄걸세. 그 것을 원하든 원치않든. 늙은 장군이 불평을 해도, 배는 나아가고 있으니 된 것 아닌가. 그 배는 나 안토니우스를 태우고 있으니, 그 역시 브린디시움으로 갈걸세. 아헤노발부스가 뭐라고 했든 배는 앞으로 향해 나아가고 있어." "어쨌든 폴비아님의 반란 (-이 때 그는 힐긋 태우를 쳐다봤다)으로 카이사르 미노르(Caesar Minor)가 어떤 요구 를 해올지 모르는 상탭니다. 시간이 부족합니다. 원로원에서는 최악의 경우 집정관에서 물러날 것을 요구할지도 모릅니다." "이아로스, 자네는 걱정이 많군! 이 델리우스의 이름을 걸고 그런 기쁜 일은 일어나지 않아! 장군이 은퇴하면 알렉산드리아에서 그 미녀들과 지내게 될텐데 무어가 걱정인가! 아니 그 여우같은 클레오파트라가 실업자를 받아 주는가가 문제겠지만! " "그 여왕이야기는 꺼내지도 마십시오! 그녀 때문에 로마에 지금 어떤 소문이 돌고있는지 아십니까? " "그게 어디 그녀만의 잘못인가? 영웅이 색을 즐기는 건 당연한 것을! 그렇지 아니한가!" " 퀸투스님! " 처음 말을 꺼낸 이아로스라는 갈색머리를 어깨에서 묶은 남자는 정말로 열이 받은 듯 퀸투스 델리우스를 죽어라 노려봤다. 방에 누워있을 때 안토니우스와 같이 자주 찾아 왔던 사람, 퀸투스 델리우스라고 했던가. - 난 퀸투스 델리우스라고 하네, 아름다운 청년 처음 그 이름을 들었을 때 태우는 그가 속해있는 이곳에 대해 황당하지만 구체적인 가설을 세울 수 있 었다. 이틀 동안 먹고 자는 시간을 빼고 모두 이 판타스틱한 상황에 대한 추리에 소비했다. 안토니우스라는 이름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고 태우의 귀에 들어오는 대화 속의 이름들, 지금 머릿속을 헤메이는 단서들, 라틴어를 자유롭게 사용하는 사람들, 브린디시움으로 향해가는 배, 퀸투스 델리우스, 아헤노발부스, 폴비아의 반란, 클레오파트라, 카이사르 미노르......... 그리고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 어디서들 많이 들어본 이름 아냐? 바보냐.......... 너무 유명하잖아. 대학 때 전공이 서양사였단 말이다....졸업 논문은 중세사를 썼지만서도... 고대 로마사 정도는 교양으로 알고 있단 말이다!!!!!!! ' 태우는 코스모스 졸업을 하고 청명한 가을날에 이미 프로 연주가로 활동하고 있던 혜준과 겨우 스케줄을 맞추어 유럽여행을 기획했던 것이다. 아직 졸업한지 두 달도 안 되었기 때문에 전공 서적들은 그의 머 릿속에 온전히 남아 있었다. 대학시절 읽었던 역사 개설서를 계속 앞으로 넘기다가 쥴리어스 시저라는 이름에서 멈췄다. 다시 머리 속에서 책장이 뒤로 넘길수록 생각의 타래는 더욱 복잡해져갔지만 판단력과 논리력은 더 예리하고 명료해졌다. 기원전 BC. 1세기, 고대 지중해 세계, 로마가 공화정에서 원수정으로 그리고 제정으로 넘어가던 정치적 혼란기. ' 아헤노발부스는 잘모르겠지만, 퀸투스 델리우스는 클레오파트라에게 안토니우스의 서신을 가지고 갔던 사랑의 메신저였지. 폴비아는 안토니우스의 아내로 시동생 루키우스와 안정환을 물먹였던 페루자에서 반란을 일으켰지만 실 패하고 추방되어 객사했는데, 그리스였나?? 클레오파트라라면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떠오르지만, 아니 그게 아니고........... 지금 대회 속에 나오는 카이사르 미노르, 즉 소(小) 카이사르가 정말 그가 맞다면, 이 남자는 정말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겠지... 제길!!!!! 어째서 이런 결론이 나오는 거야! 말도 안돼!!!!!!!!! ' ".............Hostis! " (여행자, 이방인) " 아, 나 불렀어요? " "그래, 호스티스(Hostis).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지? " 태우는 '그'가 정말 안토니우스인가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그가 깨어난 곳의 연도에 대한 추정, 그리고 그 사실을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라고 주장하는 남자에게 어떻게 확인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잘못했다간 간자(스파이)라는 혐의로 다시 바다에 던져 질지도 모르는 혼란한 시대였다. 그래서 순진한 척하고 물었다. 그냥 어디서 건져 올린 촌뜨기라고 생각해준다면 비명횡사하는 일은 없을 거라고 스스 로를 위로했다. " 저분이 말씀하신 카이사르가 누구죠? 그 사람 죽었잖아요? " "카이사르 미노르가 누구죠?" 안토니우스는 정말 이상한 것을 본다는 표정으로(정확히는 너 진짜 몰라 라고 쓰여있는 것 같았다.) 태우를 바라봤다. 그건 다른 세 사람도 마찬가지여서 두 사람(이아로스와 이제까지 한마디 말도 없던 사내)은 딱딱하게 굳어있었고, 퀸투스 델리우스는.................안토니우스보다 조금 더 재미있어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 위대한 카이사르 임페라토르(Caesar Imperator) 는 올림푸스에 올라 로마의 수호신이 되었다. 카이사르는 그의 이름을 유산으로 그의 양자에게 남겨주었지. 지금 모든 로마인은 그를 카이사르 미노르라고 부르지.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 정말이지 황제의 이름이지 않나? " " 장군! " "주인님!" " 안토니우스! " 안토니우스의 마지막말에 항의하는 그들의 목소리가 쏟아져 나왔다. 이제 확실한 거겠지. 처음으로 입을 연 짧은 머리의 사내는 안토니우스를 주인님이라고 부르네, 부하 군인이 아니었나? 퀸투스 델리우스, 당신은 상관이름을 그렇게 막 불러도 돼? 미쳤구나, 서태우. 지금 상관에 대한 예절을 따질 때가 아니잖아? 하 하 하 하 하..흐흑, 이런 제길! "당신 진짜 안토니우스잖아!!!!!!!!!!!!!!!!!!!!!!" 갑자기 소리치는 여행자 때문에 과묵하지만 성격이 급한 카피토가 칼은 반쯤 빼어드는 것을 저지했다. '저 녀석은 다 좋은데 멧돼지 마냥 저돌적인 면이 있어서 큰일이야.' 은연중에 여행자와 안토니우스의 사이의 공간으로 조금 움직이고 있었지만 퀸투스 델리우스는 저 검은 눈의 여행자가 암살자는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이제 까지 뭘 들은 건가? 분명히 내 소개를 했을 텐데. 나는 군인으로 호민관이었으며 카이사르의 기사단장이었고 집정관이며 삼두 정치관의 한 명으로 동방의 속주를 다스리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다." 이만한 군함을 이끄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또 누가 있다고 그렇게 호들갑인가. 그리고 안토니우스 저 자식은 뭐가 그리 잘났다고 거창하게 자기소개를 하는 것인지 파랗게 질리는 여행자가 안쓰럽지도 않은가? 퀸투스 델리우스는 아직도 긴장을 풀지 않는 카피토를 돌아보며 실소하다가 이아로스에게서 매서운 눈초리를 받아야했다. "흠흠,, 뭐 부상중인 몸에 경황없이 소개를 했으니 그런 오해가 생겼을 수도 있지 않은가. 소심하게 안토니우스 자네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자신을 알아야한다고 생각하는 병에 걸리지는 않았을 테지? " "물론이야, 퀸투스. 자네처럼 언어의 유희를 즐기는 병도 없다네." 이 친구 아까 클레오파트라 이야기를 꺼냈다고 삐졌군, 실소를 머금으며 퀸투스 델리우스는 정신이 어디에선가 헤매이고 있는 이방인을 향해 부드럽게 물었다. 본인 생각에는 분명 질문이었다. "그런데 이방인, 우리가 언제고 당신을 이방인이라는 가엾은 명칭으로 불러야 하지? 이방인! 여행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거룩한 이름! 허니 이 로마의 이름아래 진정한 이방인이 어디에 있겠는가? 자네는 이 거침없는 전함 아이스타스(여름)에 타고 있는 이상 더 이상 이방인이 아니라네. 그대에게 이방인이라는 호칭은 어울리지 않는다네, 그대를 칭하는 다른 아름다운 언어가 분명 있을 거라고 사료되는데, 그대의 생각은 어떠한가?" ".................?"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이방인이 뭐 어쨌다고?? 그 단어가 아름다우냐고? ' 인상을 쓰며 퀸투스의 말을 해석하려는 이방인에게 이아로스는 자신도 모르게 가벼운 한숨을 쉬었다. 저 인간은 입에 올리브기름을 항아리 채 칠했나!!! 이아로스는 한 문장으로 축약될 질문을 저렇게도 돌려 말하는 것도 재주라고 생각하면서 다시 퀸투스를 한껏 째려봐주었다. ".....휴우....그러니까 ........당신의 이름을 묻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이름 뿐 만 아니라 출신은 어디인지 왜 바다에서 표류하고 있었는지도 궁금하군요" 역시 예상했던 난관에 부딪쳐버렸다. 그가 2002년에서 살다가 비행기사고로 기원전 1세기로 왔다고 한다면 저들 가운데 그 뜻을 파악할 사람이 있을까? 아니 라틴어에 타임머신이라는 단어가 있기는 한가? 저들에게 의심을 받지 않고 넘어갈 핑계를 생각하느냐고 머리 속에 그간 읽었던 전공 서적들의 고대사편을 모조리 기억해내야 했다. '젠장!! 내가 서양사를 전공해서 다행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졸업 논문을 고대사로 쓰는 건데! 그나저나 뭐라고 한다???' " Quid nomen tuum? " 딴생각을 하다가 안토니우스의 말을 놓쳤다. 미안한 얼굴로 바라보자 부드럽게 웃으며 .................다시 이름을 물어왔다. '................생각할 시간을 좀 달란 말이닷!!!!!!!!!!!!!!!! 뭐가 좋을까?? 어느 나라 사람이름을 대지? 다리우스(페르시아의 황제이름)? 안돼! 로마랑 페르시아는 숙적이잖아! 한창 전쟁중인 국가의 왕 이름을 대서 어쩌자는 거 야?! 한니발? 젠장 칼맞을 일 있냐!! (한니발은 알프스를 넘어 로마를 쑥대밭으로 만들 뻔한 카르타고의 장군) 왜 이딴 거 밖에 생각이 안나는 거야!!!!! 람세스? 이집트도 안돼! 클레오파트라의 첩자라고 의심 할테고.. 무난하게 가자...우호국 중 에...그래 그리스가 좋겠다.. 그리스 사람 중에,,,, 그리스 로마의 신들 이름도 다 알텐데,,,,, 으악 그 유명한 철학자들은 안돼!!...... 듣자마자 가명인줄 알아 챌거야.......그럼 일단 로마식으로....... 남자니까...우스(- us)로 .....우스개?,,,,,,으윽,,, 바보 아냐...이익!! 우스.?,,,,우스............아 그래!!" "Nomen meum est........... " (제 이름은..............) # 3 " 테리우스! " 그렇다. 현재 이곳에서 태우의 이름은 테리우스다. ' 제기랄! 내가 안정환이냐, 신성우냐, 테리우스라니!!!!!!!!!!!! ' 섬광처럼 이루어진 태우의 자유연상을 간단하게 도식화 하자면,, ->> 우스로 끝나야한다. 이왕이면 태우라는 이름과 비슷했으면 좋겠어.. 안토니우스가 자꾸 쳐다보는데. 영어로는 안토니였지? 그럼 안쏘니인가? 안쏘니는 캔디의 첫사랑이었지? 그 카리스마 덩어리이던,,이름이??? 그래서 그만 입밖에 튀어나온 이름이 테리우스였다. 잠시 정신이 나갔던 게 틀림없다. 혜준이 <들장미 소녀 캔디>를 읽으며 "테리우스"라고 부르짖으며 울먹일 때 얼마나 구박했던가를 생각하며 태우는 그들 이 자신을 '테리우스 '라고 부를 때마다 어색하게 발작해야했다. "테리우스?" "아 퀸투스 델리우스,," "방금 뭐라고 소리친건가? '나도라고라' 였나? 어느 나라 말이지 처음 듣는데? " "아,,,,,,,뭐 그냥, 고향을 그리는 그런 말이죠..." '윽,,,,나도 무르게 한국말로 외쳐버렸나? 조심해야겠다..' " 그래? 나중에 가르쳐주게. 아참 저기 보이는 저 곳이 내 고향인 브린디시움이라네! 아름답지 않은가? 이오니 아의 거친 파도와 아드리아의 잔잔한 흐름이 만나는 곳이지." "고향에 돌아가니 기쁘신가봐요. 델리우스." " 그래, 고향이지, 고향이고 말고," 정말 희한하게도 퀸투스 델리우스의 감상은 그걸로 끝이었다. 좀더 떠들어야 정상이 아니가 싶어 흘깃 눈치를 보지만 그의 눈은 브린디시가 있는 방향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고향이란 곳은 이렇게 말많은 사내도 침묵하게 하는 것이겠지. 한국은 어디에 있을까? 혜준은 살아 있을까? 멀리 보이는 수평선이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퀸투스는 슬픈 표정으로 허공을 응시하는 이방인- 아니 테리우스를 조심스레 관찰했다. 확실히 로마혈족은 아니다, 에투르스카하고도 거리가 멀고 아프리카인은 더더욱 아닌 것 같았다. 파르테아(페르시아)인이 아닐까 의심해 보았지만 그들과도 그의 생김새는 전혀 다른 이민족이었다. 어디에서 왔을까? 안토니우스의 말대로 다이아나 (아르테미스, 달의 여신)이 보낸 사자란 말인가? 이아로스는 테리우스의 출신에 대해 더욱 알아봐야 한다고 강력하게 건의했지만 안토니우스는 천천히 하자고 넘겨버렸다. 멍청한 클레오파트라의 속임수에 놀아나는 척 출발을 최대한 늦추었지만 고지식한 노장군 아헤노발부스가 나타나는 바람에 서 둘러 알렉산드리아를 떠나는 시늉을 했다. 폴비아의 마지막 발악이었을 거다. 안토니우스의 스승인 은퇴한 노장군을 알렉산드리아로 보낸건. 알렉산드리아를 떠나 그리스에 도착했을 때 가엾는 풀비아는 실성한 여자처럼 안토니우스에게 광기를 부렸었다. 멍청한 루키우스는 형수의 장단에 열심히 춤을 추었던 것이다. 처음부터 실패하고 버려질 반란이었는지도 모른 채. 보름달이 수면에 아름다운 오로라를 그리고 있을 때, 북동쪽 (-로마가 있는 방향)을 응시하던 안토니우스가 갑자기 바다 로 뛰어들었다. 뒤따라 뛰어내리려는 폰티우스 카피토를 말리느냐고 그 곰같은 사내와 팔자에도 없는 레슬링을 하고 있을 때 안토니우스가 미친 짓의 결과물인 저 이방인을 데리고 올라왔다. 갑판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고 무장을 하는 녀석들도 있었다. " 뭐야? 이건? " " 주인님!!!!!!!! " "아아 난 괜찮아 폰티우스(카피토의 이름).....그보다 메로스좀 불러줘. 이 사람 몸이 얼음 같아. 맥박도 약하고.... 비 어있는 선실 있나? " 안토니우스는 손수 테리우스를 선실로 옮겼고 원채 할 일도 없었던 터라 심심했는지 그 이방인의 선실에서 죽치고 있었다. 물론 이아로스는 암살의 위험을 들먹이며 말렸고 카피토는 환자 옆에서 칼을 들고 버텼다. 도대체 저 시체 같은 자에게 무슨 힘이 있다고,, 군의관인 메로스는 심한 충격을 받은 것 말고는 큰 외상은 없다고 했지만 이따금 들려오는 처절한 비명소리와 울음은 모골이 송연하게 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메로스 조차 혀를 내두르는 초인적인 회복력의 바탕에는 분명 더 큰 악몽이 도사리고 있음에 틀림없다. 마치 사지에서 돌아온 군인이 지나치게 호승심이 강해 전장을 누비는 것처럼. 차라리 미치는 쪽인 편안할 그들의 모습을 수많은 전쟁터에서 보아왔던 터라 퀸투스는 테리우스에게 어떤 끔찍한 기억이 있었음을 짐작하 는 터였다. 그건 안토니우스도 마찬가지. 그래서 그의 출신을 캐묻지 않는 거겠지. 이질적인 그의 모습에, 무엇인가 두려워하고 떠는 모습에 측은히 여기는 거겠지. 안토니우스, 자네는 다정하고 여린 사람이지. 하지만 작금의 시대는 자네를 전쟁터로 몰고 사랑하는 이를 죽음으로 모는구나. 그대에게 조촐한 행복도 허락하지 않는 구나! 가엾는 안토니우스, 나의 친우여! 울부짖는 영혼이여! 오오, 바쿠스(술의 신)여! 격풍에 휘말려 그대를 찾은 상처받은 영혼을 내치지 마시옵소서! 오오, 아폴로(태양신)시여! 그대의 어린아이를 돌보소서! 언젠가 그 품안에 다시 안겼을 때 따스한 빛으로 감싸주소서! 멀리서 보이는 육지의 모습에 퀸투스는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그의 고향 브린디시에선 카이사르 미노르, 옥타비아누스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 어쩌면 도착하자마자 공격 당할 수도 있다. 내일이 아이스타스의 마지막 항해가 되게 하지는 않을 것이야. 내 손으로 자네의 아내를 케로베로스(지옥의 문지기)에게 안내했지. 자네마저 레테의 강물(저승에 흐르는 망각의 강)을 스스로 마시려는 것을 원치 않네. 미안하네, 안토니우스........ 용서하지 말게. 처음으로 난 자네의 청을 거역할 것이야,, 아폴로나우스(Apollonaus).... 그리운 자네의 이름! 그 이름을 부를 자격도 없는 나를, 어리석은 퀸투스를 용서하지 말게, 나의 친우여! 퀸투스 델리우스는 진심으로 통곡했다. 퀸투스가 걸쳐준 토가를 벗고 침대에 앉으며 테리우스(태우)는 조금 전의 퀸투스 델리우스의 처연한 얼굴을 떠올렸다. 지금 이 배는 브린디시움으로 향해가고 있다. 지금까지 들어온 정보에 의하면 아마 지금 내가 있는 시대는 쥴리어스 시저가 죽은지 3년정도 지난 제 2차 삼두정치 하의 고대 로마. 여기서 다시 그들에 대한 이야기를 정리해 보자. "부루투스 너 마저!" 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고 기원전 44년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그의 독재를 우려하던 공화파에 의해 살해되었다. 이후 공개된 카이사르의 유언장에는 그의 상속자로 양자인 조카 옥타비아누스를 지명하고 있었다. 유언 장은 카이사르가 10년정도는 더 살 것이라고 예상하고 미리 만들어진 것이었기 때문에 18세라는 어린 나이의 상속자에 로마인들은 경악 할 수밖에 없었다. 가장 불만이었던 것은 명실공히 제 2인자였던 안토니우스였다. 이때부터 안토 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 사이의 힘겨루기가 시작되었다. 제2차 삼두 정치는 카이사르 사후 혼란한 정국을 다스리기 위해 옥타비아누스와 장군 안토니우스 대부호 레피두스에 의해 실시되었다. 이 협정에서 서로의 세력권을 인정하게 되는데, 옥타 비아누스는 이탈리를 포함한 서쪽을, 안토니우스는 그리스와 소아시아를 포함한 동쪽을 레피두스는 아프리카를 지배하였다.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는 연합하여 카이사르를 죽인 부루투스 일파를 격파하고 각자의 세력을 키우고 때를 기다린다. 옥타비아누스는 반란을 일으킨 폼페이우스 잔당(카이사르에게 패해 스페인으로 달아난 세력)을 잡기 위한 에스파냐 원정을 시작하였다. 안토니우스는 소아시아에서 파르테아(페르시아)원정을 기획하면서 이집트의 여왕 클레오파트라와 만나 세기적인 사랑 을 나눈다. 이집트에서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기다리다 안토니우스의 아내 폴비아와 동생인 루키우스 안토니우스가 페루자 반 란을 일으켰지만 옥타비아누스에 의해 곧 제압되었다. 그리고 반란에 대한 책임을 묻는 옥타비아누스의 소환장을 받고 지금 안토니우스는 브린디시움로 가는 길이다. 아마 퀸투스는 브린디시움에서 어떤 결정이 내려질지 고민하고 있는 거겠지? 사실대로 말하면 일이 잘 풀려서 당분간 안토니우스에게 직접적인 위협은 없다. 하지만 그 사실을 말해 줄 수는 없겠지. 미안해요, 퀸투스. 하지만 안토니우스에게는 아무 일도 없을 겁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나? " 오늘 이 질문을 많이 받는군,, " 안토니우스....... " 문설주에 기대선 안토니우스가 손에 작은 단지를 들고 서 있었다. 대충 둘러맨 토가가 발 끝에 질질 끌렸지만 전혀 개의치 않고 있었다. 선명한 푸른색의 눈동자가 선한 미소를 지었다. 어깨에서 물결치는 금발머리, 조각 같은 이목구비, 토가 사이로 드러나는 탄탄한 근육, 저러니 처음 봤을 때 아폴론이라고 착각할 만하지 않은가... "아뇨........그런데 무슨 일이에요? " "후훗, 메로스(군의관)가 알면 반나절은 잔소리를 들어야 할 테지만, 원래 술은 신이 내린 선물이요, 만병통치약이 아닌가. 넥타르는 아니지만 모데나의 포도주는 그 이상의 것을 선사하지." (*넥타르 - 올림푸스에서 신들이 마시던 술) "하하하하, 그냥 술 한잔하자고 하면 될 것을 뭐 하러 어울리지도 않는 퀸투스 흉내를 내는 거에요? " " 이런! 암브로시아(신들이 먹는 음식)보다 자네의 웃음이 좋은 안주가 될 것 같군! " 생각보다 질이 굉장히 좋은 포도주여서 잠시 동안 머리 속을 헤메던 망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포도 주는 지중해가 내린 축복이야.. 묵묵히 포도주를 음미하던 안토니우스가 불쑥 말을 이었다. " 넌.........뭐랄까,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 같은 그런 이질감이 들어......하지만 이상하게 묘하게 납 득이 되기도 해. 이상하지? 자네의 신분을 말하지 못하는 사정이 있나? " "!!!!!..............." 전혀 뜻밖의 질문에 태우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침묵은 긍정의 뜻이겠지. 난 자네에게 출신을 이야기하라고 강요하지는 않을 거야. 누구에게나 말못할 사정은 있는 법이니까. 더 이상한 일은 더 이상 그대를 추궁하지 말라는 느낌이 강하다네. 아마 그 바다에서 자네를 구한 것 역시 어떤 신의 안배로 이루어진 일이겠지." 잠시 말을 멈추고 와인을 들이키는 안토니우스를 보면서 태우는 초초하게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후우, 그래서 나는 당분간 자네를 클리엔스(cliens)로 두고 보살필 생각이야. " "클리엔스(피보호자)라고요? 당신이 나의 보호자, 아니 호스페스(후견인)가 되어준다는 이야기인가요? " "하아, 자네는 정말 나를 놀라게 하는군. 그래서 이아로스가 그렇게 경계하고 있는지도 모르지. 사실 밖에 카피토가 검을 들고 보초를 서고 있어..후후후 " 안토니우스는 놀란 표정으로 테리우스를 바라봤지만 곧 부드러운 미소로 바뀌었다. "하지만 내가 처한 상황이 좀 특수해서 자네가 안전할지는 모르겠어. 난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몸이거든? 아니 정확히 말해서 나를 죽이려는 이가 셀 수도 없을 지경이지. 그래서 카피토와 이아로스가 저렇게 안달하는 거겠지. 그러니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주게. 문제는...... 섣부르게 자네를 클리엔스로 삼았다가 내가 죽어버리면 나의 적들은 자네도 살려주지 않을 거라는 것이지. " "그런 일은 없을 거에요!!!!!!" 당분간은.....앞으로 많은 일이 일어나고. 그리고 당신은............태우는 그 말을 입안을 삼켰다. "후후, 그래, 몇 번 봤다고 그래 이아로스를 닮아 가는 건가? 더 시급한 문제는 이아로스와 카피토를 설득시키는 일이지. 아마 이아로스는 차라리 자네를 퀸투스에게 맡기자고 할테고. 카피토는...음... 설마 죽이기야 하겠어? 인상 펴라구......그 녀석도 알고 보면 순둥이라고.......... 퀸투스는 재밌어 할거야." "그래서 어떻게 설득할건데요? " "간단해. 네가 내 정부가 되는 거지." # 4 "뭐라구요?" 지금 이 인간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슬금슬금 뒷걸음 치는 테리우스를 부며 터지는 웃음을 겨우 삼킨 안토니우스는 정색을 하고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후훗, 정말 볼수록 재미있는 친구로군....... "밖에 있는 저 돌덩이들과 시끄러운 원로원을 납득시키려면 가장 좋은 방책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그래도.....자,, 장군씩이나 되가지고,,, 사..사회적 지위라는 게 있잖아요!!!!!!!!" 제길,,난 남자라 말이다...댁도 남자라고!!!!! 아니 난 게이니까 문제가 되지 않을 수도,,,,,,,,,, 그게 아니잖아!!!!!! "내 지위가 어떻다는 거지? 문제될 게 없는데?" " 난,,,남자잖아요! 그리고 당신 부인도 있잖아!!!!!!!!!!!!!" 그래 이건 불륜이라고!!!!!!!!!!!! 잠깐! 안토니우스는 지금 클레오파트라와 불륜을 즐기다가 돌아오는 거였지...... 그..그래도 나보고 정부가 되라니!!!!!!!! "내가 새삼스레 남자애인을 한 명 더 늘린다고 해서 호사가들의 입담에 오를 소지는 없을 거야. 풀비아도 일일이 내 정부들에게 신경 쓰지는 않는다고. 하긴 지금은 그럴 여력도 없겠지만 " "그,,그럼 다른 애인이 남자에요? 클레오파트라가 아니라? " "뭐? 하하하,,클레오파트라도 애인이라고 해두지 뭐...임신까지 시켰으니........ 다른 남자 정부는........후후 지금쯤 타르수스에서 신나게 기마 부대를 이끌고 있을걸? 나머지는 뭐......그때 그때 만나는 주의라......... " 정말 할 말이 없다. 하긴 그리스 시대에는 동성애를 권장하기까지 했었고 그리스를 모범으로 삼는 로마에서 사회적으로 동 성애가 자연스러울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정조관념도 땅에 떨어진 시대란 말인가? 저거 완전 카사노바잖아!!!!!!!!!!! 역시 역사서는 많은 고증과 증거자료를 수집해서 최대한 진실을 적어 놓은 것이었군.... 안토니우스는 방탕하고 싸움만 아는 무식한 군인이라고 했었지.. 누가 그랬더라? 굉장히 유명한 사람의 말이었는데...잘 기억이 안 났지만 그 사람이 정말 사람 보는 눈이 있다고 태우는 진심으로 생각했다. ............................ "무슨 말을 나누는 걸까요? " 이방인-테리우스 방문 앞에서 무장을 손질하던 타루스는 옆에 있던 그의 상관 카피토에게 물었다. "......................" ' 차라리 벽에 대고 말하는 게 났겠다! ' 조금 전에 갑판에서 동료들과 시시한 농담을 하며 놀고 있던 카루스와 케나스는 무장을 하고 이방인의 방을 주시하라는 이아로스의 명령을 받았다. 역시 그 인간 스파이였구나라고 나름대로 생각하며 선실로 내려 가다 카피토를 만났고 카루스보다 신경이 앏았던 케나스는 의리 없게도 동료를 버리고 갑판위로 달아나 버렸다. (카피토는 아 무 말도 없이 자신이 가드의 한 명을 할테니 나머지는 돌아가라고 온몸으로 말했다.) 셀레나(달)가 서쪽으로 조금 치우친 만큼 카루스 정말 말이 없는 상관과 애꿎은 방문과 씨름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에휴~~~내일이면 항구에 내려 삼삼한 처자하나 골라서....응?' "우아아아아아아!!!!!!!" 머릿속에서 스톨라(로마시대의 여자 옷)를 하나씩 벘겨가던 카루스는 발작적으로 손에 검을 쥐었고 어느새 방문을 박차고 멋지게 방안으로 난입한 카피토 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장군!" "!!!!!!!!!!!!" 안토니우스의 토가(망토)는 방안에 아무렇게나 널려져 있었다. 이방인은 침대에 엎드려서 파닥거리고 있었는데 일어나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그의 위대한 장군이 온몸으로 타.고. 있었기 때문이다. 카루스는 장군의 아래 이방인의 몸이 나체임을 깨닫고 얼굴이 붉어지며 시선을 황급히 다른 쪽으로 돌렸는데 이번에는 안토니우스의 손이 이방인의 배 아래 어느 은밀한 부근 에서 맴돌고 있는 것을 보고 머리 속이 하얗게 비워져 감을 느꼈다. 그 때까지도 뒤를 돌아보지 않고 이방인의 목뒤에 키스마크를 새기던 안토니우스가 혀롤 입가를 핥으며(이 때 카루스는 발기하는 페니스를 느끼고 더욱 경악했다..) 무심히 말했다. "무슨 일인가? 무기까지 빼들고......" "..................저 그게...그러니까...비,...명이...." "........... " -> 카피토 안토니우스의 손이 카피토들이 들어온 다음에도 페니스를 주무르는 통에 테리우스는 신음을 삼키기 위 해 양손으로 입가를 틀어 막아야했다. '아앗, 핫,,그만 좀해!!!!!!!!!!! 부하들이..헉..하앗., 보,,보고 있...잖아! 아앗! ' ".......아흑...........핫" 미치겠네!!!!!!!!!!!!!!! 자신이 필사적으로 신음을 참고 있는 걸 눈치 챘는지 안토니우스가 강하게 손을 놀려 민망한 소리가 튀어나왔다... ".......별일 아니니 나가보게..." 이 말이 끝내자 마자 안토니우스는 테리우스의 고개를 돌려 아찔한 딥키스를 하기 시작했고 테리우스는 현란한 기교에 점차 정신이 혼미해지는 것을 느끼며 꿈결처럼 카피토의 목소리가 울리는 것을 들었다. "..............실례했습니다, 좋은 시간 되십시오............" 아냐!!!!!!!!!!!! 돌아와 카피토오!!!!!!!!!!!!!!!! 하윽.........손...읏,,, 네 녀석의 미친 상관 좀 데려가아!!!!!!!!!!!!!!!!!!!!!!! " 그럼 방해꾼도 사라졌으니 본격적으로 해볼까? " '으아아아!!!!!!!!!!!!!!! 혜준아!!!!!!!!!혜준아!!!!!!!!!!!싫어!!! 싫다고!!!!!!!! 혜준아!!!!!!!!!!!!!!!!!'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쏟아지는 아침 햇살에 눈을 떴다. 그리고 가슴 께에서 느껴지는 잔질 거리는 감촉에 조심 스레 몸을 일으켰다. 테리우스는 햇살이 눈이 부신 듯 찡그리면서도 이불 속으로 파고들면서 잠에 취해 있었다. 그의 움직임에 테리우스가 갤까 조심히 침대에서 내려온 안토니우스는 어두운 색의 캐노피를 내려 테리우스에게 향하 는 햇살을 가려주었다. 잠시 뒤척이는 듯하던 그가 찡그렸던 미간을 펴고 다시 규칙적인 숨소리를 내며 깊은 잠에 빠졌다. 그런 테리우스를 미소를 띄며 바라보던 안토니우스는 간밤에 아무렇게나 팽겨처 두었던 옷가지를 주섬주섬 걸치고 조용히 방문 을 열고 나와 집무실로 향했다. "좋은 아침이군, 이아로스. " "..네.... 장군................." 이이로스는 뭔가 이야기를 하려 했지만 끝내 적당한 말을 찾아낼 수 없었다. 도대체 뭐라고 묻는 단 말인가? 간밤에 그 이방인과 안녕,,,,,,,,,윽, 안토니우스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혼자서 얼굴이 붉어지는 이아로스를 보며 득의의 미소를 양피지 두루마리로 감추었다. 카피토는 어제 끝냈고, 이것으로 잔소리꾼 이아로스 해결. "브린디시움의 시민들이여! 그대들의 아내와 딸을 감추어라! 호색한 안토니우스가 나가신다! 브린디시움의 젊은이들이여! 그대들의 탐스런 엉덩이를 조심하라! " ".................퀸투스." "푸후후~ 어젠 굉장했다지? 테리우스의 울음소리가 복도를 울려 밤을 지새우며 허벅지를 꼬집어댄 병사가 한둘이 아니라던데? 카루스 녀석은 메네스(의사) 를 찾아 약을 달라고 깽판을 부렸다는데, 흥분한 페니스에 약이 어디 있어? 아쉬운 대로 손을 쓰면 될 것을! " " 콜록 콜록.... 퀴,,퀸투스님!!!!!!! 닥치고 이 서류나 보세요!!!!!!!! " 굉장했다라, 정말 굉장한 밤이었지. 안토니우스는 파피루스 두루마리 하나를 펼치며 어젯밤의 일을 떠올렸다. .............................. " 하윽, 시..싫어,,,흐흑,,,,,,혜준아,,,,,,,,,,혜준아............ " 알 수 없는 말(한국어)를 외치며 바둥거리는 테리우스의 몸을 집요하게 탐했다. 이미 한계를 보이는 손 안의 페니스에서 사정의 기미가 보였기에 안토니우스는 목덜미에 깊은 애무를 하면서도 손을 쉬지 않았다. 따뜻한 액체가 손안에 느껴지자 경련 하던 몸이 길게 늘어졌다. 다시 가슴에서 아래쪽으로 저돌적으로 키스마크를 새겨가던 안토니우스를 멈춘 것은 자심의 가슴을 밀어내는 팔이 아닌 슬프게 흐느끼는 울음소리였다. "..............테리우스?" "흐흐흑, 흐흑, 혜준아.........혜준아,,,,,, 나 여기 있어,,,미안해,,,,,,,,,,,혜준아,,,," 이것이 인간의 울음소리인가? 지독하게 슬픈....... 처절한 흐느낌........... 가슴을 저미는, 심금을 울리는 울음소리. 허공을 응시하며 슬프게 우는 테리우스의 모습에 안토니우스는 서둘러 그를 안아 올렸다. 끊임없이 중얼거리는 테리우스의 말을 이해하려고 노력했지만 어디서도 들어본 적이 낯선 언어였다. 하 지만 그 느낌이 무엇인가를 하염없이 부르는 것이라는 것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세상의 모든 아픔을 안고 깊은 절망에서 우러나오는 절규에 안토니우스는 당황해하면서도 테리우스를 안은 팔을 풀지 않고 그를 달래려 노력했 다. " Shui, Non lacrimare, Non lacrimare..." (쉬이, 울지마, 울지마,,,) 안토니우스는 울음을 멈출줄 모르는 테리우스를 나고 계속해서 얼렀다. 도대체 무슨 일을 겪었기에, 이렇게 슬프게 우는 것인가. 격하게 떨고 있는 테리우스의 등을 계속해서 쓰다듬으면서 안토니우스는 어린 아이를 얼르듯 가벼운 노래를 불렀다. "Puella mea me non amat! 나의 소녀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구나! Vale, puella! 안녕히, 소녀여! Poeta puellam non amat, 시인은 소녀를 사랑하지 않네, Formam puellae non laudat, 소녀의 아름다움을 찬양하지 않고 Puellae rosas non dat, 그는 소녀에게 장미를 바치지 않고, Et puellam non basiat! 그리고 소녀에게 키스하지 않는다. Ira mea est magna, 나의 중오는 크지만, Obduro, mea Puella, 나는 죽어간다, 나의 소녀여! sed sine te non valleo. 나는 그대 없이 살아가지 못한다 Puella mea me non amat! 나의 소녀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구나! Vale, puella! 안녕히, 소녀여! " 부드러운 저음의 노랫소리가 흐느끼는 울음소리와 함께 방안을 떠다녔다. 이윽고 잦아드는 울음소리를 느끼며 안토니우스는 물기가 흥건한 테리우스의 눈가를 손으로 훔치며 물었다. "방금 한 말은 너희 나라의 말인가? 사람의 이름을 부르던군,,,,,,,Hezuna? 너의 연인의 이름인가? " 움찔하는가 싶더니 굳어버린 어깨를 가볍게 어루만져주자 테리우스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었나, 사랑하는 연인이 있었나. 그래서 그리 슬피 우는 건가.......... ".............바다에 빠졌던 일과 관련 있는 것인가? " 테리우스는 안토니우스의 가슴에 더욱 파고들며 긍정을 표시했다. 가엾은 자여, 네게 도대체 어떤 일이 일어난 것이지? "........강제로 헤어지게 된 건가? 그랬었군......... " "이제 만날 수 없게 된건가? " 거칠게 도리질 치며 부정의 뜻을 표하면서 테리우스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흐흑,,,,,,만나고 ,,,,,,,싶은데...난 여기 살아있는데............ 그 애는 이 곳에 없어........난 여기 있는데.........으흐흑........." "그래, 그래................" 안토니우스는 팔에 더욱 힘을 주어 테리우스를 안아주었다. 맨 가슴에 느껴지는 물기가 비수가 되어 심장에 떨어지는 것 같았다. 아련히 허공을 응시하던 그 시선 속에 너의 연인이 있었던 것인가? 너도 그 가슴에 연인을 묻은 것인가? 너도 나와 같은가? 그래서 처음부터 그리 낯설지 않았던 것이냐.......... ".........나도 가슴에 사랑하는 이를 묻었다. 한번도 사랑한다 말하지 못했고 앞으로도 영원히 침묵할거다..... 그런데 너의 눈물이 내 가슴에 묻은 이를 깨우는 구나. 네 덕분에 나도 오늘은 그 사람을 생각할 수 있구나. 너는 너의 연인을 나는 나의 연인을 생각하자꾸나,,, 내 가슴에서 너의 샘이 마를 때까지 울어도 좋아. 너의 연인을 만날 때까지 내가 품에 너를 안아주마. 오늘은 울어도 내일은 웃을 수 있게, 참지 말고 울어라, 내가 너의 눈물을 모두 받아 줄테니...." "우아아아앙!!!!" 안토니우스는 겨우 잠들었으면서도 쉴새없이 눈물을 흘리는 테리우스를 품에 안고 토닥이면서 밤을 지새웠다. 흙의 아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방인,( terius에서 terr는 라틴어로 흙이라는 뜻) 바다에 드리워진 보름달의 그림자에서 그를 찾았었다. 너는 정말로 다이아나(달의 여신)가 보낸 사자인가? 그녀의 오라비인 아폴로를 등진 나에게 고고하신 여신께서 자비를 허락하시는 건가. 그래서 그를 닮은 검은머리를 가진 이 자를 내게 보내신 겁니까? 제가.........그 사람을 아직 가슴에 품어도 된다는 말씀이십니까? 아폴로시여, 그대를 저버린 당신의 어린아이를 용서하소서. 언젠가 모든 일을 마치고 그대에게 귀의할 수 있는 용기를 주소서. 아폴론이시여............. 어리석은 아폴로나우스(Apollonaus)를 용서하소서........ . . . . - 뿌우우우우우우 긴 뿔나팔의 소리가 안토니우스의 상념을 깨웠다. "브린디시움이군............" 씁쓸한 목소리로 퀸투스가 중얼거렸다. 고향에 도착했는데도 그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이아로스는 안토니우스를 걱정스레 돌아봤지만 평온한하기 까지한 그의 모습에서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 브린디시움을 외치는 장병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 브린디시움(brindisium) " 그곳에서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가 그를 기다리고 있다. <제 1 장 Marcus Antonius > 끝 ********************************* + 로마의 휴일 제2장 In Tempore Antiquo - 고대의 시간 속에서 #1 "후우, 자주빛 바탕에 금사로 포도나무가 수놓아져 있는 돛이라, 역시 바쿠스의 화신으로 불리는 자답군........." 브리딘시움에 마련된 임시 집정관 집무실에서 사과를 베어 물며 위태롭게 창문에 앉아 있던 검은 머리의 사내가 항구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카이사르 미노르, 옥타비아누스는 푸른 바다 위에 다른 수십 척의 갤리 선들 사이에서 한 눈에 들어오는 아이스타스 호를 바라보며 씁쓸히 웃었다. 드디어 오셨군, 안토니우스. 언제부터인가, 옥타비아누스는 아폴로(태양신)의 수호를 받는 자, 안토니우스에게는 바쿠스(술의 신)의 사자라는 별명이 따라 붙었다. 옥타비아누스는 원래 아폴로를 섬겼으니까 오히려 환영할 뿐 이의 는 없다. 하지만 안토니우스의 신이 원래 바쿠스였던가? 그의 어린 시절의 기억을 아무리 뒤져봐도 바커스를 안토니우스에게서 유추시킬 수 없었다. 오히려, 최근에 와서........그는 바커스의 화신으로 불렸다. '역시 그때부터였지? 이집트의 여우가 안토니우스를 찾아갔을 때부터.......' 옥타비아누스와 연합하여 부루투스 일당을 격파한 안토니우스는 바로 동방의 속주를 향해 떠났고 그런 그에게 클레오파트라가 접근했다. 클레오파트라가 안토니우스를 찾아갈 때 그녀는 비너스로 꾸며 자줏빛(포도나무와 함께 바쿠스의 상징)비단 돛과 황금으로 치장한 배를 타고 갔다. 세인들은 비 너스와 바쿠스의 만남이라고 떠들었고 그 소문은 로마로 퍼져 둘은 공공연한 사이로 지중해를 시끄럽게 하고 있었던 것 이다. 그 추잡한 스캔들에 반란을 일으켰던 안토니우스의 아내만큼 옥타비아누스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전에 히스파니아(지금의 스페인)에서 만났을 때는 포도나무가 그의 상징이 아니었는데.......어쨌든 정말 화려한 배구만, 저것 도 클레오파트라라는 요물의 작품인가?..... ' " 공격의사는 없는 듯하군. 저건 군함이라기 보단, 유람선이잖아? " 힐끗 창으로 시선을 돌렸던 마이케나스는 저러고 나타나다니, 역시 대단한 사내라는 생각을 하며 다시 읽다만 두루마리에 고개를 돌렸다. "무슨 생각일까? 내 쪽도 사정은 좋지 않아. 폴비아(안토니우스의 아내)의 반란으로 군사적 손실도 컸고 히스파니아에는 섹스투스 폼페이우스가 내 뒷통수를 노리고 있어. 지금 안토니우스가 군사를 일으킨다면 우리가 불리할 게 뻔한데........" " 맞아. 아직 우리는 안토니우스의 의중을 모르고 있지. 소환을 여러 차례 무시하다 이제야 도착했어. 게다가 여기서 이틀거리에 있는 오리쿰에 그의 함대가 일 부 주둔하고 있지. 내 휘하의 군대로 이곳을 장악한다하더라도 우리의 지원군보다 안토니우스의 함대가 먼저 도착할거야. ..........겉에다 금칠을 했다고 해서 강철이 금붙이가 되는 것은 아니라네, 마이케나스" 딱딱한 인상의 군인이 조용히 말했다. 옥타비아누스는 아그리파의 말이 뜻하는 바를 잘 알고 있었다. 클레오파트라의 치마폭에 쌓여 있었다고 해서 그 실력이 녹슬진 않았겠지. 이 번 한판에서 자신이 죽고 나면 모든 게 끝이고 안 토니우스는 충분히 그럴만한 능력이 있는 사내다. 언젠가는 서로 칼을 겨누어야 할 상대, 둘 중 하나는 사라져야한다. 언제부터? 그런 건 지금상황에서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옥타비아누스의 뇌리속에서 떠나지 않는 의문이 었다. 대체 언제부터 우리는 적이 된 걸까. 상륙하자마자 나를 공격하려는 걸까?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마르쿠스.... 당신은 정말 나를 공격할건가요? ".................." ".................." 갑자기 이어지는 침묵에 레피두스가 보내온 서신 두루마리를 접으며 마이케나스는 그의 친구들에게 조목 조목 따지기 시작했다. 아, 거참, 이 친구들아, 그렇게 걱정할거 없다니까? "먼저 아그리파! 그 돌사자 같은 인상 좀 펴게! 그래서 어디 연애나 하겠나? 아가씨들이 다 도망가겠구먼... 그리고 옥타비아누스, 고민하다 창문에서 떨어진 최초의 집정관이 되고 싶지 않다면 제발 좀 내려오게나. 자네 운동신경도 황이잖아? 어이, 아그리파 그 칼 내려놓게.... 자자, 모두 내 말들으라고! 결론부터 말하면 절대 안토니우스는 공격하지 않을 거야!이봐, 둘 다 노골적으로 못 믿겠 다는 표정을 지을 필요 없잖아? 왜냐구? 첫째, 섹스투스 문제부터. 그가 히스파니아에서 세력을 키웠으면 키웠지 먼저 치고 들어올 가 능성은 없어. 이곳에서 이루어질 협정 결과에 따라 움직일 거야. 지금 움직이면 삼두 정치관 모두의 타겟이 되 는건데, 경거망동하지는 않을 거라구. 하지만 만약 내전이 정말 일어난다면 적어도 절대 우리 쪽엔 붙으려 하지 않겠지. 그거 나에게 던질 건 아니겠지? 제발 내려놓게 옥타비안. 우리는 그를 칠 생각을 하기 전에 먼저 포섭할 문제부터 걱정해야 해. 둘째, 레피두스(다른 삼두 정치관)는 아마 지금쯤 저울질하느냐고 정신이 없을 거야. 하지만 그는 장사꾼이지 군인은 아니야. 아프리카에 대한 권리만 확실히 해주면 만용을 부리지 않을 거야. 오히려 이번에 한몫 단단히 잡으려 할걸? 마지막으로 안토니우스는 내란을 일으킬 수 있는 상황이 아니야. 안토니우스는 파르테아(페르시아)원정을 기획하고 있어. 그의 속주(이탈리아 동쪽, 그리스와 소아시아 지방)에서 날뛰는 파르테아를 뒤에 두고 내전을 일으킬 리 없 지. 뒤끝이 깨끗한 사내거든. 게다가 그의 아내와 동생이 반란을 일으켜서 소환된 마당에 명분도 없고 원로원에서 탄핵을 당할 팔자에 내란을 일으키는 짓은 안 할거야. 그가 반란군의 수뇌가 되서 로마의 공적이 될테니. 오히려 우리가 공격할 것 을 걱정하고 있을걸? 그래서 저렇게 치장을 하고 나타난 거겠지~ " "...........목 아프지? 이거 한잔 마셔." " 쿨록, 고맙네, 옥타비안 " 마이케나스는 옥타비아누스의 아명을 부르며 미소지었지만 옥타비아누스는 손에 들었던 상아로 만든 미네르바(지혜의 여신 아테네)조각상, 그에게 던지려고 했던 것을 한번 더 들었다 놓을 뿐이었다. " 하지만 안토니우스가 쉽게 협정을 맺으려고 할까? " "할거야. 안토니우스는 키케로가 말한 것처럼 황소가죽을 두르고 여자만 후리고 다니는 머릿속에 술만 들어찬 사내가 아니야." 하지만 손속이 잔인한 사내이긴 하지. 아그리파는 그를 교양이 없는 방탕한 인간이라고 비방한 키케로의 시체 에서 오른쪽 손목을 잘라내던 안토니우스를 떠올렸다. 카이사르의 암살배후 세력으로 지목된 그를 별장에서 사로잡았을 때, 시체가 되어 안토니우스앞에 끌려온 키케로의 오른팔을 자르고 냉소 짓던 그의 모습은 사신과도 같았다. 만약 그와 칼을 맞댄다면 살아남을 수 있을 가에 대한 확신이 들지 않았다. 카이사르 임페라토르(쥴리어스 시저) 하데스의 품으로 떠난 후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명실공히 이 시대 최고의 전사이자 사령관이 아닌가. 이제 겨우 22살이 된 자신의 상대가 아닌 것이다. 아그리파는 동갑내기의 상관, 옥타비아누스를 바라봤다. 저렇게 나약하고 여린 모습에서 그렇게 커다란 사내와 맞 설 의지가 숨어 있는 것일까? 옥타비아누스는 다시 창문 가에 기대어 흔들리는 녹색의 눈동자로 자줏빛 돛을 단 범선을 내려다보았다. 선원들이 바쁘게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다. 그 가운데 반짝이는 황금색의 머리가 유독 눈에 박혀 들었다. 수백 명의 군중 속에 있어도 자신의 빛을 찬란히 뿜어대는 사내. 사실은 나보다 아폴로에 어울리는 사내는 저 사람이 아닐까? ㅡ 카이사르는 나의 은인, 나의 주인이 아니지. 내 검의 주인은 나고 나를 정복 할 수 있는 것도 오직 나 하나다. .............언젠가 너의 검이 되어주지. 저음의 목소리가 귓가에 아직도 선명한데, 당신 내게 거짓말을 했어. 당신의 손으로 내 심장에 검을 꽂겠지? 아니면 내가? 당신을? 옥타비아누스는 창문에서 시선을 돌려 차갑게 가라 앉은 눈으로 자신의 부관이자 친구들에게 카이사르 미노르로써의 명령을 내렸다. "..................이번에 상호 불가침조약을 포함한 제 2차 삼두정치에 대한 재 협정을 맺는다. 마이케나스, 안토니우스와 레피두스에게 사자를 보내고 내 뜻을 전해. 아그리파는 브린디시움 밖에 있는 군대를 평야 밖까지 물려. 쓸데없이 안토니우스를 자극할 필요는 없으니까." 먼저 배신한 사람은 당신이야. 나에게 등을 돌렸어. 잠시 숨을 고른 옥타비아누스는 다시 말을 이었다. "...........안토니우스와 화합을 했다고 대외적으로 알릴 수 있는 방책을 찾아와. 물론 그러는 척 할뿐 이이야. 당분간 로마에 내전은 없다. 브린디시움 협정이 끝나는 대로 시행할 수 있어야해. 그리고 히스파니아로 계속 스파이를 보내 섹스투스의 움직임을 보고하도록." " 명대로 따르겠습니다, 카이사르 미노르! " 마이케나스, 아그리파 카이사르 미노르의 양팔이라고 불리는 불리며, 후에 팍스 로마나(Pax Romana, 로마의 전성기)의 초석을 닦는 두 사내는 진정한 카이사르 임페라토르의 후계자에게 깊이 머리 를 숙이고 답했다. # 2 '도대체, 작은 별장이라더니...이 정도면 거의 왕궁 수준 아닌가?' 브린디시움에 도착 한지 벌써 일주일 째, 태우는 오늘도 한가하게 저택을 돌아다녔다. 안토니우스와 이아로스, 퀸투스 델리우스도 브리딘시움에 있는 포룸(지금의 시청)에서 거의 살다시피 하고 있다. 듣기에는 삼두 정치관들을 위한 숙소가 따로 마련되어있다고 하던가. 내심 다들보고 싶다. 밉살스런 이아로스까지도. 후훗 그리고 안토니우스에게 고맙다는 말을 아직 못했다. "카피토! 우리 시내에 나가보면 안될까요? 사실은 당신도 가고싶죠? " "......................" "............" ".................." "............네, 알았어요. 오늘은 그럼 후원에 있는 별관 구경가기로 해요. " 도대체 무슨 말을 해도 세 마디이상 하지 않는 구만. 그 일을 아직도 마음에 두고 있었나...... 카피토는 의외로 순진한 구석이 있는 사람이었다. 브린디시움에 도착한 안토니우스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옥타비아누스의 사자였다. 그자는 정중하게 안토니우스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말을 퀸투스 못지 않은 미사어구로 떠들어댔고 태우는 옆에 서있던 이 아로스의 중얼거림을 똑똑히 들었다. "..........젠장할, 요새 집정관들은 입에 기름을 쳐 바른 자를 데리고 있는 게 유행인가? 흥! 그래도 퀸투스님 보단 문장력이 떨어지는군....유치하기는....... " " 오호~~드디어 나를 인정하는 거야? " " 큭큭큭 " 안토니우스 옆에 나란히 서있던 퀸투스가 살짝 돌아보며 윙크를 보내자 참았던 웃음이 터져나왔다. 그 바람에 안토니우스의 군사들이 노려봐 찔 끔했지만 이아로스가 앞에 조금 나서며 매섭게 훑어보자 모두 딴청을 피웠다. 그때 이아로스에 대한 호감도가 조금 늘었달까? "............그렇게 맘대로 행동하면 안토니우스님에게 누가 됩니다." 귓가에 속삭이는 그 말로 방금 전 호감도 상승 취소. " ...............안됩니다! " 이리저리 주위를 둘러보다 안토니우스의 말을 놓쳤는데 저 조용한 카피토가 소리를 치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이아로스를 바라보니 그는 한번 쳐다보고 한숨을 쉬더니 고개를 돌렸다. 퀸투스는............정 말 정말 재미있어 하는 표정이다........... ".......외곽에 있는 퀸투스의 별장에 가서 테리우스를 호위하라는데 뭐가 안 된다는 거야? " 에? 호위? 누가요? 누구를? "..........저도 포룸(시청)에 가서 안토니우스님을 호위할겁니다." "안돼! 곧 회의에 가는데 내가 테리우스를 데려 갈 수 없으니까 너와 별장에 가 있으라는 거야. 게다가 테리우스는 합법적인 내 피후견인인데 후견인의 군사인 자네가 그를 보호하는 건 당연한 의무잖아? 잔말 말고 데리고 가고 싶은 녀석들이나 골라. " "하지만..........." "폰티우스(카피토의 아명.........) 생각해봐. 테리우스는 아직 환자인데다 어젯밤에 무리(?)를 해서 더 피곤할거야. 이 땡볕에 서있는 것도 무리라고. 이아로스에게 맡겼다간 저 녀석 잔소리에 말라죽을 지도 몰라. 그러니까 내가 너를 믿.고. 부탁하는 거야. 내가 저 실없는 퀸 투스를 믿겠어? 당연히 너밖에 없잖아. 그러니 제발 네가 별장에 가서 테리우스좀 돌보란 말이야." 어린 애도 아니고 세상에 저런 빤히 보이는 설득에 넘어가는 사람이 있을리가......... ".............하지만 환자를 돌볼 줄 모릅니다." "푸훕, 아냐, 폰티우스...... 메로스(의사)의 제자랑 시중들 노예정도는 같이 보낼 테니까, 큭큭, 걱정하지마......" 정말 어이없게 카피토를 바라보는데 안토니우스가 웃음을 참으면서 카피토의 어깨를 두드리는 것을 보고 퀸투스에게 물었다. "...항상 저런가요? " 흐음,,,,,,,,,,지금은 많이 좋아진 거지. 몇 년 전만 해도 어미오리를 따라 다니는 새끼였다니까...역 시 귀여운 녀석이야. " " 퀸투스님도 별장에도 기별을 넣어 놓으세요. 그리고 테리우스님............ 저래 보여도 카피토는 최고의 검투 실력을 지닌 군인입니다. 별일은 없겠지만 만약의 사태라면 절대 떨 어지지 마세요. 안토니우스님의 명령이 있었으니 내키지는 않아도 당신을 꼭 지켜 줄겁니다. " 그거 위로라고 하는 건가요? 내키지는 않아도??? 이아로스? 고개를 숙이고 무표정에 침울함이 조금 더 칠해진 듯한 얼굴을 하고 카피토는 백인대장들로 보이는 사람들과 어디론가 가면서 출발 준비를 서두르는 것 같았다. 안토니우스도 주변에 있는 부하들에게 지시를 내리는 게 끝났는지 다가와 토가를 입혀주었다. 춥지 않다는 그의 말에 그저 옷깃을 좀더 여며 줄 뿐이다. " 카피토는 착한 녀석이야. 잘 부탁해. 나와 떨어지면 좀 불안해 할 테지만........너라면 괜찮을 것 같은 생각이 드는군. " "내 호위를 카피토에게 맡기는 거 아니었어요? " 왠지 보모가 되는 기분이다. "맞아! 그랬지.. 후훗...... 필요한 게 있으면 카피토에게 부탁해. 저 녀석 말은 안 해도 다 챙겨 줄 거야. " 어느새 멀리서 이아로스가 준비가 다 되었음을 알리고 카피토도 군사들과 어디서 구했는지 마차를 가지고 와서 내 앞에 섰다. 기분이 이상했다. 분명 브린디시움이라는 같은 도시에 있을 텐데, 하지만 도시는 배(ship)보다 갑절이나 크잖아. "..저봐, 환자라니까 벌써 마차까지 구해왔잖아? " " 그러게요............푸후후훗 " 생각보다 카피토는 귀여운 구석이 있었다. 내 웃음소리에 안토니우스의 푸른 눈동자가 더욱 휘어졌고 항구의 군사들은 그들의 상관이 폭소를 터뜨리 는 것을 멍하게 바라봤다. "그래, 이제 잘 웃도록 해. 빠르게 처리하고 나도 곧 별장으로 갈 테니까. 그때는 말을 탈 수있도록 건강해져야 한다. " " 네, 다녀오세요. " 안토니우스는 카피토의 어깨를 다시 두드려주고 퀸투스와 이아로스와 함께 말에 올랐다. 그의 당당한 모습에 한참 거만을 떨던 옥타비아누스의 사자의 얼굴이 찌그러드는 것을 보며 기분이 좋아지는 태우였다. " 이제 우리도 가요! 카피토! 우리 잘해봐요! " "..............."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조심스레 부축해 마차에 태워주는 카피토의 손길을 느끼며 태우는 다시 터져 나오는 웃음을 막으려 애써야했다. "푸후후후후후" 일주일 전의 일을 생각하다 다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 동안 지내본 결과 카피토는 정말 어린아이 같은 면이 있었 지만 유치하거나 그런 것이 아닌 순수함이라는 것을 깨달은 태우였다. 점점 카피토 에게 호감을 들었다. 여동생이 있었으면 꽉 잡아서 매부를 삼는 건데. 이제 그럼 장미정원이라고 불리는 별관으로 가볼까? 자기도 모르게 노래를 흥얼거리며 태우는 어설픈 탭 댄스를 추면서 걸으려는데 들리는 카피토의 목소리. "........................그 쪽이 아닙니다. " 왜 장미 정원이라 불리는지 알 것 만 같았다. 덩굴장미가 별관의 벽을 따라 이어 있었고, 주위는 각양각색의 장미들이 찬란히 아찔한 향기를 뿜고 있었다. 오로지 장미하나로 뒤덮인 백색의 작은 성, 그것이 장미 정원이었다. 아름답지만 무섭도록 새빨갛게 피어있는 장미의 기세에 눌려 아스라한 현기증을 느끼며 다른 쪽의 정원으로 넘어섰다. 조금 전에 화려한 매혹적인 장미들이 거짓말처럼 느껴지는 푸르른 공간. 하얀 대리석으로 조각된 분수대를 시중들듯 이름 모를 금빛의 꽃들이 우아하게 피어있었다. 허브종류의 풀들이 야생에서와 같이 자연스럽게 멋대로 자라고 있어 분수대만 없었다면 인공적인 정원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푸르른 월계수가 시원한 청량감을 뿌리며 근엄하게 서 있었다. 홀리듯이 월계수 가까이 다가갔다. 나무 아래는 비석이 놓여 있었다. 아무런 장식도 없이 단순히 네모난 돌 위에 뿌옇게 앉은 먼지를 쓸어내자 깊게 파여진 글씨가 드러났다. "『 소망 사랑하는 친구여, 내가 죽거든 내 검은 무덤 위에 월계수를 심어다오. 내 머리에 어울리지 않으나 창백한 그 빛이 정답고 그리워라, 내가 잠든 땅 위라면 그 그늘 사뿐히 드리우리. 아폴로나우스 』" ' 아름다운 시네......그런데 이곳 누군가의 무덤인 것일까? 아폴로나우스라는 사람의? ' 혹시 정말 엉뚱한 곳에 와버린 것이 아닌가 걱정이 되었다. 이곳은 퀸투스의 별장이니 비석의 주인은 그와 절친한 사이일 것 같았다. 어떤 사람이 길래 퀸투스는 이런 공 간을 마련해 놓은 걸까? 계속해서 꼬리를 무는 호기심과 함께 슬픔이 묻어 나오는 싯귀에 정신이 팔려 버렸다. 뿌우우--뿌우-뿌우우우, 뿌우우--뿌우-뿌우우우 갑자기 들려오는 뿔나팔 소리에 태우는 무의식적으로 카피토의 토가 자락을 붙잡았다. 무슨 일인가 물어보려고 고개를 드는데 태우는 카피토의 무표정한 얼굴에 '기쁨'이라는 글자가 떠오르 는 것을 보고 그만 할말을 잃어버렸다. 에? "....................돌아오셨습니다." 묻지 않아도 뻔하다. 카피토와 태우는 누구라고 할 것 없이 본관을 향해 신나게 뛰었다. # 3 "하아~~ 이 얼마나 오랜만에 돌아온 즐거운 나의 집인가. 그리워서 눈물이 다 나는 구만." 이아로스는 '입에다 침이나 바르시지'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 올랐으나 퀸투스의 말에 감격의 눈물을 참지 못하는 집사를 보고 이내 삼켜야했다. 도대체 어릴 때부터 봐왔을 텥데 저 인간의 본색을 모르는 게 말이 되나! 퀸투스는 집사와 사병들에게 이것저것 지시를 내리면서도 입가에 가늘게 드리워진 미소가 걷히지 않았 다. 이아로스는 저 가벼운 사내에게도 집은 집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돌아오는 윙크에 다시 접어 버려야했다. " 산책을 갔다고? 카피토는 함께 있겠지? 아니, 굳이 찾아올 필요는 없다. 뿔 나팔을 들었을 테니 오고 있는 중일 거다. "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그 이방인의 안부부터 묻는 안토니우스의 행동에 발끈 하는 이아로스였지만 퀸투스의 서재에서 협정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도 불만을 표시하지 못하는 성실한 부 관이기도 했다. "어쨌든, 저희로서는 잘된 겁니다. 시간을 번 셈이니까요. 섹스투스 폼페이우스 때문에 카이사르 미노 르도 우리를 공격하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했겠죠. 그런데 폴비아님은.........정말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 까? " 정말 묻고 싶은 것은 그게 아니었다. 그렇게 까지 하실 필요가 있으셨습니까? 이아로스는 약간은 질린 표정을 짓던 카이사르 미노르, 옥타비아누스를 떠올렸다. - 증거가 필요하다면 내 손으로 폴비아의 머리를 자네에게 가져다주지. 페루자의 일은 분수를 모르는 동생과 아내의 철없는 행동이었다. 그 일로 계속 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추궁할 셈인가? 카이사르 미노르는 이탈리아에서 추방한 것으로 되었다고 태연한 척 했지만 그 방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안토니우스의 패도적인 기세에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던 순간이었다. 아름답지만 섬뜩한 안토니우스의 미소는 능글맞은 퀸투스 델리우스조차 굳게 만들었으니까. 그 순간 그 곳에서 최강자는 다른 누구도 아닌 안토니우스였다. 육중한 몸의 레피두스(삼두 정치관의 한명)가 땀을 뻘뻘 흘리면서 분위기를 다잡으려 했지만 회의는 살얼음 같은 분위기로 진행되었다. 그리고 오늘 아침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에밀리우스 레피두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 세사람은 제 2차 삼두 정치를 공고히 하는 협정을 맺었다. 그 협정에서 승자는 아무도 없었지만 강자는 안토니우스였다. "......내가 목을 가지러 직접 갈 필요도 없어. 홧병이 나서 죽어 버릴걸. " -저주해! 지옥에서 당신을 기다릴 거야!!!! 당신은 미쳤어!!!!!!!!!!!!!!!! 그래, 그녀는 나를 원망하면서 죽어가겠지. 안토니우스는 그리스에서 만났던 폴비아를 떠올렸다. 방안으로 들어서는 그에게 손거울을 집어던지며 그 속에 비치는 정신나간 사내의 얼굴을 똑똑히 보라고 소리질렀다. 그대는 그래도 나의 아내였군, 내가 미쳤음을 유일하게 알고 있는 나의 가엾은 풀비아. "안토니우스님................" "안토니우스!!!!!!!!!!!!!!!" 테리우스(태우)는 퀸투스의 서재로 뛰어들었다. 그 곳에 놀람을 담고 크게 뜬눈을 부드러운 초생달로 만드는 안토니우스 가 있었다. 잠시간의 이별이었지만 그 일주일이 길게만 느껴졌었다. 포근한 느낌, 오리새끼가 알에서 깨면 처음 보는 상대를 졸졸 따라다니는 것처럼 안토니우스를 그리워하는지도 모른다. 혜준과는 분명 다른 느낌, 태우는 안토니우스를 안으며 그를 따뜻하게 감아오는 커다란 울타리와도 같은 팔을 느꼈다. " 그래? 카피토가? 하하하하하하 " 안토니우스는 긴 카우치에 누워 테리우스가 그간의 사정을 이야기 해주는 것을 들으며 연신 폭소를 터 트렸다. 중간 중간에 얼굴이 붉어진 카피토가 항의하려는 듯 입을 달싹였지만 끝내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그냥 밖으로 달아나는 것으로 불만을 표시했다. 지난 일주일 동안의 긴장이 눈 녹듯 사라져 감을 느꼈다. 부지런히 산책을 시키고 시중을 든 카피토의 노력이 테리우스의 건강한 미소에 들어 있었다. 뭘까, 이 대책 없는 따뜻함은.........그리운 향기는, 안토니우스는 연신 웃음을 잃지 않았다. "그런데 어딜 다녀 온 거지? 좋은 향기가 나는군..........." 향기라는 말에 토가 자락을 살펴보니 태우의 옷깃에 어느 샌가 붉은 꽃잎이 군데군데 묻어 있었다. 새삼 몸에 강렬한 장미향이 남아 있는 것 같아 조금은 난감해지는 태우였고 그 순간을 놓 치지 않는 안토니우스였다. 강렬한 그의 눈빛이 온몸을 훑어 내리는 것 같아 태우는 애꿎은 방바닥만 노려보았다. 그 시선에 세포 하나 하나가 타오르고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안토니우스는 눈길을 돌리는 테리우스의 고개를 그에게 향하도록 잡았다. 태우는 안토니우스의 눈에서 순식간에 나타났다 사라진 욕정이라는 단어를 읽었다. 두근. 아찔한 장미의 향기가 유혹처럼 피어오르는 것 같다. 새빨간 장미빛이 눈앞에 피어올랐다 사라졌다. ".........장미 정원에 갔었어요. 정말 장미가 많아서 현기증이 날 뻔했어요. " " 퀸투스가 말하길, 그 후원은 밀회의 장소로 제격이라 하더군, 그 녀석도 종종 이용했다지. 후후......달콤한 장미향은 어떤 미약 보다도 연인들을 취하게 한다지? 어땠어? 그대도 장미의 항연에 빠졌나? 그 향이 아직 그대에게 남아있군............" 안토니우스는 상체를 숙여 다리사이에 아슬아슬 하게 걸쳐져 있는 태우의 튜닉자락을 들쳐 장난스럽게 향기를 맡았다. 다리에 스친 손가락이 불에 데인 듯 뜨거웠다. 두근. 하얀 손이 무릎에서 허벅지로, 은밀한 그곳을 유혹적으로 스쳐지나 토가를 벗겨냈다. 벽안의 눈동자에 붉게 상기된 태우의 얼굴이 비쳤다. 살금살금 웃옷이 모두 벗겨진 태우는 한기에 몸을 떨었다. 낮은 웃음소리가 귓전을 간지럽혔다. 부드러운 손이 그의 머리를 쓸어 올렸다. 이윽고 손가락이 볼을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태우는 미친 듯이 뛰는 심장의 소리를 들으며 안토니우스의 눈을 바라봤다. 푸른 눈은 광폭하지는 않았지만 분명한 욕망을 담고 있었다. 하지만 다정함을 잃지 않는 눈은 태우에게 묻고 있었다. ........태우는 눈을 감고 그의 입술에 키스했다. 뒤통수를 감싸 안아오는 손이 느껴졌다. 미안해, 혜준아.....나 너를 잊은 게 아니야. 지금 난 너무 무서워서, 너에게 영원히 가지 못할 것 같아서 누군가가 나를 안아주었으면 좋겠어. 비겁하다는 것은 알아. 언젠가 안토니우스와 헤어질 것을 알아, 난 이 사람이 죽는 순간을 영화로, 연극으로, 소설로 수도 없이 봤어...... 그러니 그 전까지는 괜찮잖아? 안토니우스는 한없이 부드러웠다. 어떤 말도 없었지만 그의 다감함은 다분히 전해졌다. 그는 서두르거나 거칠거나 하지 않았다. 짙은 키스가 머리카락에서 눈가로 얼굴 선을 따라 입술로 이어졌다. 둔부를 애무하는 아찔한 손길에 태 우는 허리를 들어 그의 페니스의 자신의 것을 리드미컬하게 마찰 시켰다. " 하아, 이런 참을 수가 없는걸? 후훗 " "...!!!!!!! 흐읏.........하읏....... " 참을 수 없다는 말과는 달리 안토니우스는 느리기만 했다. 끈적끈적한 정사의 느낌이 실감나 태우는 이공간에서 부유하는 것만 같았 다. 태우의 손가락 사이로 금실 같은 머리가 빠져 나왔다. 누구라고 할 것 없이 간간히 신음을 삼켰다. 한 차례의 절정을 맞이하고 나른해진 태우는 푹신한 양탄자 위로 비스듬히 엎드렸다. 안토니우스는 자신의 허벅지를 베고 엎드린 태우의 등을 쓰다듬다가 올리브 오일을 손에 적셔 농염한 애무를 시작했다. 받아들이는 섹스는 자주하지 않아서 태우는 긴장한 상태였다. 안토니우스는 조심스레 손가락을 움직여 입구를 부드럽게 풀어주고 충분히 마사지가 되었을 때쯤 조심 스레 삽입했다. 태우의 허리가 안토니우스를 도와 유연하게 움직였다. 점차 힘을 더해 가는 안토니우스의 움직임에 머 릿속은 하얗게 지워지는 것 같았다. 안토니우스의 손이 태우의 페니스를 쥐고 그의 절정을 이끌었고 안토니우 스의 움직임이 순간적으로 멎었다. . . . 태우는 편안한 얼굴의 안토니우스를 바라보았다. 그 간의 일정이 피곤했었는지 나른한 정사 후에 그는 태우를 품에 안고 잠들었다. 안기는 것은 정말 오래간만이라 힘이 들었다. 아무리 안토니우스가 부드럽게 움직였어도 익숙치 않은 허리가 뻐근했다. '하긴........세 번이나 했으니..뭐야,,아래는 한 3년 만인가??? ' 태우의 첫 경험은 바텀 이었고, 그 기억은 언제나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중학교 3학년 게이임을 자각하고 헌신을 다해 유혹했던 그의 첫 상대는 사촌형이었다. 큰아버지와 사이가 나빴던 그는 마음이 고픈 사람이었고 뜬금 없이 여행을 떠나 엽서만 달랑 보내고 하였다. 서툴렀던 사촌형과의 관계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게이라는 사실을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받아들리던 시기의 혼란은 안정적인 관계를 유지하는데 힘이 들었다. 설날에 모인 가족들은 연신 태우의 법대 합격을 축하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밖으로 나돌던 사촌형은 보이지 않았고 어른 들은 관심도 없었다. 일주일 후 사촌형의 사고소식이 들려왔다. 눈이 내리는 밤, 헬멧도 쓰지 않은 채 강변북로를 달렸다고 했다. 미친 듯이 병원으로 달려갔을 때 1년 전에 사랑해서 살을 섞었던 남자는 식물인간이 되어 누워 있었다. 사촌 형의 자켓에는 아무 것도 없이 달랑 장기의식증서와 그가 좋아했던 샤갈의 그림 엽서만이 있었다. 엽서에는 " 태우에게,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 이라는 짤막한 문장. 서툴러서 거친 손길과는 달리 사촌형은 부드럽게 태우를 보고있었다는 것 을 그가 죽고 난 다음에야 알았다. 태우는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재수를 선택해서 원래 가고 싶었던 사학과에 합격했다. 대학 시절 바텀을 할 상대를 만나면 항상 사촌형이 떠올랐다. 스스로에게 화를 내며 자학적이던 사촌형, 큰아버지의 강압에서 몸부림치던 태우의 첫사랑. 바텀으로 섹스한 후 밀려오는 서글픔과 그리움이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처음으로 안긴 상대여서 그런가 보다 했지만 계속 되는 연상에 언제부터인가 안고 싶은 상대를 찾고 있 었다. 몇 몇의 상대를 보내고 선가 드디어 혜준을 만났다...... 안토니우스는 그의 사촌형과 닮았다. 안토니우스에게도 사촌형에게 보았던 스스로를 옭아매는 사슬이 있는 것 같았다. 안토니우스가 훨씬 잘생겼고 음침했던 형과는 다르지만 어딘가 보이는 그늘이 태우의 눈길을 잡았다. 안토니우스에게도 그의 사촌형이 가졌던 그림자가 있었다. 남자는 첫사랑을 잊지 못한다더니, 태우는 7년 전의 일을 떠올리는 자신이 우스워졌다. 땀에 젖어 이마에 달라붙은 금발머리를 쓸어 올리면서 태우는 현재의 감정에 대해 곰곰히 생각해 보았지만 결론은 나지 않았다. 일 치르고 나서 이렇게 잡생각이 떠오르는 적도 없었던 거 같다. 예전에 느끼던 적막감과는 다른 느낌. 혜준과 느끼던 충만감과도 다른 기분. 사랑인가? 사랑일까? 낯선 곳에서는 외로워진다더니, 아이처럼 그를 졸졸 따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혜준이는? 지금도 혜준을 생각하면 눈물이 치밀어 오른다. 혜준이 에게 키스하고 싶고 보드라운 몸을 안고 싶다. 아직은 알 수 없지만, 이 감정이 사랑이라 단정지을 수는 없지만 태우는 안토니우스의 팔을 들어 그의 가슴으로 파고든 채 잠을 청했다. 잠결에 강인한 팔이 태우를 감싸 안는 게 느껴져서 하마터면 큰 소리로 울 뻔했다. 위험에서 지켜주는 울타리 같은 사람, 폭풍을 피할 수 있는 우산 같은 사람, 지금은, 잠시 낯선 이의 품에서 쉰다하여도 신은 용서하실게다. # 4 시간은 시위를 떠난 활과 갔다 했던가. 2천년전의 시대로 날아 온지, 혹은 던져 진지, 한 달이 되어간다는 사실에 태우는 가슴 한켠이 묵직해졌다. 테라스에 내려다보이는 로마시내의 전경은 박물관에서 보다 프레스코의 벽화보다 더 아득해 보였다. 이 곳은 지금 내가 숨쉬는 곳........이 모든 영화는 언젠가 돌무더기가 되어 관광객들의 사진 속의 풍경이 되겠지. 그렇게 한줌의 먼지가 되어 분자 조각 하나에 의지해 2000년 동안 떠돌다 운 좋게 한국인 관광객 옷자락에 묻혀서 고향으로 돌아갈 지도 모른다. 분자 한 조각의 희망, 그 것은 현실이다. 처음 로마로 들어섰을 때, 로마는 그가 알던 로마가 아니었다. 마차 밖의 풍경은 글레디에이터에 나온 장면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단지 영화 속의 장면은 생명이 없는 사진 같았다면 지금 태우의 눈에 비치는 로마시내는 살아있었다. 퀸투스는 옆에서 로마에 대한 찬사를 연발하고 있었지만 태우는 그저 망연히 고대 로마의 풍경을 보고 있었다. "포로 로마나! 아름다운 건축물에 추악한 인간들이 모인 슬픈 장소지! 언제 로마는 건물의 위용에 걸 맞는 인재를 맞을 수 있을까......? 이봐!! 테리우스! 위험해!!!!" 포로 로마나?! 퀸투스의 외침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유일하게 낯설지 않았던 장소는 혜준과 함께 거닐던 포로 로마나 였다. 태우는 마차에서 뛰어내려 포로 로마나를 향해 정신없이 달렸다. 뒤에서 안토니우스등이 따라오는 것을 알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얼마나 달렸을까? 건물사이로 보이는 광장의 모습에 태우는 숨을 삼켰다. 포로 로마나에서 지금 이 위치라 면.........스페인 광장! 망설이지 않고 골목으로 뛰었다. 골목 끝에 탁 그인 광장이 보였다. 그 광장에는 긴 계단이 있을 것 같았다. 그 계단에서 오드리 헵번이 치마를 나폴거리며 계단을 내려올 것 같았다. 그 광장 끝에는 분수대가 있을 거야, 이번에는 꼭 동전을 2개 던지자, 태우는 골목을 빠져나가 광장에 섰다. 그 곳에는 오드리 헵번이 내려오는 계단도 트레비 분수도 없었다. 치마 같은 고대 로마의 복장을 입은 사람들이 재래 시장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태우는 광장의 한 구석에서 활발하게 살아 움직이는 2000년 전의 고대인들을 보았다. 여느 재래 시장과 같지만, 이국의 향취를 풍기는, 이곳은 로마였지만 태우가 알고있는 로마가 아니었다. 아직도 인정하지 못했던가? 태우는 트레비 분수가 있었을 법한 장소에 있는 우물을 보았다. 그가 서있는 로마에는 아직 트레비 분수는 세워지지 않았다. 적어도 1500 년 후에나 바로크 시대의 장인에 의해 대리석으로 아름다운 분수대는 만들어 질 것이다. 여기에는 아무 것도 없어.....모두 다 사라질 거야......... 나는 2000년 전의 시간 속에서 사라질거야. 나도 먼지가 되어 버릴거야.... " 흐어어어어!!!!!!!!!!!" 무릎에 힘이 빠져 더 이상 서있을 수 없었다. 그의 목소리라고 믿기지 않는 짐승의 소리가 목에서 터져 나왔다.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몸이 떨려오고 세상이 거지는 것 같았다. 후들거리는 무릎을 지탱하려 팔을 뻗었지만 균형을 잃기만 했다. 휘청거리는 순간에 아찔한 현기증이 났다. 발 아래가 무너지는 듯한 순간에 그를 받치는 디딤돌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멀어져 가는 의식 속에서 희극적으로 외치는 퀸투스가 네 놈이 얼마나 해댔으면 도망가다 기절까지 하느냐고 외치는 소리를 들으 면서 순간 비통함에서 벗어나 "실신"에서 "수면"으로 정신을 가다듬을 수 있었다. 게다가 무너지는 몸을 받쳐드는 손이 카피토의 것임을 지각하고, 의사를 부르라고 소리치는 격한 목소리가 이아로스 것임을 느끼는 순간, 눈앞에 햇살처럼 뿌 려지는 금발이 아름답다고 생각했을 때 문득 웃음이 흘렀다. 역설적이게도 폐부를 찢어발길 듯한 고통에서 묘한 안도감 속에서 고 대라는 시간 속에서 살아가는 그의 존재를 받아 들였다. 난 고대 로마에서 사는 최초의 배달의 민족이라고, 이 것이 또 하나의 역사라면, 난 최선을 다해 살겠노라고........ 로마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자리한 안토니우스 저택의 테라스에 서서 온몸으로 바람을 맞으며 태우는 진정으로 고대의 주민임을 느꼈다. ........................ "정말 알 수 없는 사람이에요. 분명 평범한 신분은 아닐 테죠..........." 이아로스는 테라스에 서있는 테리우스를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퀸투스는 아직도 포기를 못했냐고 비아냥댔지만, 이아로스는 그저 부드럽게 웃고 말뿐이었다. 포기고 그런 것을 떠나서 이제 그의 정체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그만 두기로 했다. 그의 이질감에 묘하게 동화되었다 고나 할까. 안토니우스님이 처음부 터 그를 받아들인 것처럼 어느새 이아로스는 그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아마 로마에 도착하고 나서 멀리 보이는 포룸(현재의 포로 로마나 지역)을 보고 달려가다 주저앉아 처절하게 울부짖을 때부터였던가. 세상의 모든 적막과 고독과 함께 하는 사람의 모습을 보았다. 논리적으로 해석할 수는 없지만 분명 그 순간 그가 이방인이라는 사실이 뼈져리게 느껴졌고 그 동안 보 인 적개심과 경계가 얼마나 부끄럽고 비겁하게 생각되었다. 이아로스는 그 간 자신의 혓바닥에서 나와 비 수가 되어 그의 가슴에 꽂혔을 말들을 생각하며 스스로의 잔인함에 치를 떨어야했다. 그는 이방인이었다. 이곳에서 철저하게 혼자인. 하지만 묘한 이방인이었다. 이곳에 서있는 것 자체가 어울리지 않았지만 풍경과 조화를 이루는 기묘한 느낌. 그런 그가 낭랑한 목소리로 시를 읊었다. -사랑하는 친구여, 내가 죽거든 내 검은 무덤 위에 월계수를 심어다오. 내 머리에 어울리지 않으나 창백한 그 빛이 정답고 그리워라, 내가 잠든 땅 위라면 그 그늘 사뿐히 드리우리. -굉장히 아름다운 시였어요. 그래서 금방 외어 버렸어요. 그런데 눈물이 나게 슬프더라구요........ 이아로스도 그 시를 알고 있다. 월계수 나무 아래에 놓여 있는 짧은 시. 얼마나 비통함이 서려 있는지도. 하지만 이아로스는 그 짧은 구절에 숨어 있는 비애를 찾아내는 그의 애달픈 동조를 무시하고 단지 정체를 알 수 없는 이방인이 "문자"를 읽는다는 사실에 사 정없이 그를 몰아 세웠었다. - 누구의 간자인가! 암살자인가! 얼마나 잔인했던가? 얼마나 독선적이이고 또......어리석었던가. 그의 시선 속에 담긴 고독과 도움의 요청을 어째서 보지 못했던가. 순수함을 간교함으로....... 다정함을 위선으로..... 쓰러진 그를 안고 달리는 카피토의 절실한 모습에서 그는 이방인- 테리우스의 본모습, 그동안 아집에 가려 보지 못했던 그 모습을 발견하고 망연해했다. 난 무엇을 보고 있었던가....... 그가 느끼고 있던 절박한 공포를 전혀 몰랐었다. 그가 그대로 깨어나지 않으면 나의 탓이라고 끊임없이 생각했다. 퀸투스가 계속해서 괜찮을 거라고 속삭여주지 않았더라면, 그가 사흘만에 깨어나 배고프다는 우스운 투정을 부리지 않았더라면, 아니, 그가 그렇게 영원히 잠들어 버렸다면, 여기 있는 어떤 사람도 불 자격이 없었을 것이다. " 정말, 다이아나(달의 여신)가 우리들에게, 안토니우스님께, 보낸 천사일까요? " 얼마나 용서받지 못할 죄를 지은 것일까. 퀸투스는 그의 시선에서 예전 같은 날카로움 대신 자리잡은 연민과 함께 떠오르는 감정을을 보면서 그의 손에 입맞추었다. "........넌 다정한 아이야, 이아로스. 저 아이도 알고 있으니 그렇게 자책하지마......" "퀸투스..............." 손바닥에서 손등으로 이마에서 양 눈가로 움직이는 퀸투스의 입술을 느끼면서 이아로스는 눈을 감았다. 듣기 싫을 만큼 탁하고 젖은 목소리가 이아로스의 귓가에 들렸다. "..........용서해줄까요?..........." " 물론이야, 이미 모든 것을 용서했어........." 한가로운 여름 햇살이 비치는 정원에서 퀸투스와 이아로스는 길고 긴 입맞춤을 나눴다. 테라스에서 국민체조를 하다 그 광경을 목격한 테리우스가 난간 밖으로 떨러질 뻔했고 그런 그를 카피토가 아슬아슬하게 그를 낚아챘고, 정원에 들어서던 안토니우스 역시 모든 것을 보고 대리석 기둥 뒤에서 숨 죽여 웃고 있다는 사실은 전혀 모르는 채........... 두 사람은 한가한 정원에서 아모르의 축복을 받은 듯 했다. # 5 폴비아의 죽음을 알리는 전령이 도착한 지 한 달이 지났다. 안토니우스의 저택은 여전히 상중이었고 하데스에게 바치는 제에서 쓰이는 사향의 내음이 죽음의 적막 함을 알리듯 저택에 떠돌았다. 태우의 기억에 의하면 폴비아는 반란의 실패 후 그리스로 도망쳤다가 안토니우스의 배신으로 그야말로 홧 병을 얻어 죽었다고 전해진다. 그녀의 마지막 유언은 "인생에 더 이상 흥미도 없다" 라는 한탄이었다고 하는데 그게 사실이 아니었었나 보다. 폴비아가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안토니우스는 별반 반응이 없었지만 그 날 저녁 늦게까지 술을 마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폴비아의 죽음을 알린 전령이 도착하고 나서 이틀 뒤, 그녀의 유품을 가지고 다른 전령이 왔다. 긴장한 듯한 전령은 더듬거리는 목소리로 부인이 눈을 감을 때까지 애타게 안토니우스를 찾았다고 감동 적으로 전했으나 퀸투스가 "애타게 저주했겠지!" 라고 더 붙이자 시뻘개진 얼굴로 그의 말이 사실임을 온몸으 로 뒷받침 해주었다. 정말 저주했단 말이야?? 새파랗게 질린 전령에게 안토니우스는 덤덤한 목소리로 전령은 언제나 진실만을 전해야한다고 말하자 더 이상 회복불능의 공황상태로 빠졌다. 아무리 그래도 안주인의 유언이 남편에 대한 저주였음 을 알리기는 어려웠겠지..........만 아아 이 역사적 진실! 사학도로서 정말 눈물이 돈다, 돌아.... 가엾은 전령은 나중에 퀸투스에게 "임기응변과 언어 유희"라는 강의를 듣고 더 회복 불능에 빠졌다던가......... ".....아직 폴비아님이 돌아가신지 한 달밖에 안되었는데도 집사가 말하길 매일 같이 날라오는 연애편지와 혼담을 넣으려는 집안의 전령들 때문에 일을 보기가 어려울 정 도라고 하더군요. " ".......게다가 갑자기 이혼하는 부부가 늘어났다고 하던데? " ".....그.....그 정도에요??" "....예, 테리우스......저도 돕고 있지만, 끝도 없답니다..........로마에 그렇게 많은 미혼여성이 있는지 몰랐습니다. 왜 한 분 소개시켜드릴까요? " " 켁...쿨럭..쿨럭......." 요새 들어 묘하게 친절해진 이아로스가 웃으며(!) 덧붙은 말에 사레가 걸리고 말았다. 밉살스런 이아로스도 무서웠지만 심심할 때 읽으라며 <일리어드>며 <갈리아 전기>, <카툴루스 시집> 같은 주옥같은 두루마리들 가져다주는 이아로스도 적응이 안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 두루마리들은 현재 경매에 부친다면 수십 억을 호가할 것들이라, 읽으면서도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주체할 수 없어 몸이 다 낳지 않은 것이라고 오해한 카피토가 들고 있는 상태에서 읽은 적도 있었다. 이상한 곳에서 엄격한 그는 가끔 지 나가는 말처럼 문제를 내면서 은근히 부담을 주었고 지금은 거의 모든 문학작품을 대학 입시 공부처럼 읽고 있는 신세 였으니 까. 기침을 하는 그에게 물잔을 건네며 이아로스가 곧 무표정으로 태연히 "농담이었습니다" 라는 말에 차라리 괴롭힐 때가 그리 워지는 태우였다. "......혼인이라........." 상복을 입고 있지만 슬픔 같은 어떠한 감정을 찾을 수 없는 표정으로 안토니우스는 중얼거렸다. 화려한 금발에는 어떠한 빛도 없는 검은색이 정말 잘 어울렸다. 검은색의 토가는 상처한 남편의 외모를 더욱 빛나게 해서 로마의 뭇 여성들을 유혹하고 있는 것이리라. 하지만 뭔가 잊고 있다는 생각에 테리우스는 애꿎은 닭다리를 헤집었지만, 알듯 말듯........정녕 닭대가리인가! 혼담? 혼담이라,..뭔가 있는데, 기억이 날듯 말듯 한데 최근에는 긴장이 풀렸는지 역사책의 내용도 잘 정리가 안되었다. 스스 로 사학과를 졸업했음이 부끄러워졌다. 이미 지금의 생활이 과거가 아닌 그의 현재가 되어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지금쯤 무슨 일이 벌어지는데, 브린디시 협정후 삼두 정치관은 서로에 대한 견제와 함께 결속을 다지기 위 해.........좀 있다가 반란이 일어나서, 아냐 그 전에.......동맹을 맺는데..앗........맞아!' " 결혼!! " 머리 속으로 생각한다는게 그만 입으로 튀어나왔고 행동으로 보여졌나 보다. 소리치며 벌떡 일어섰던 태우가 세 사람에게 변명거리를 찾는 중에 운 좋게도 도착한 손님덕분이 그 고민을 덜어 주었다. 그 손님은 카이사르 미노르, 옥타비아누스가 보낸 마이케나스였다. . . . 어떻게 식사시간이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언제나 말이 많은 퀸투스도 골똘히 생각에 잠겨 음식을 흘리기 일 수였고, 안토니우스는 음식에 거의 손을 대지 않은 채 와인만 들이켰다. 마이케나스의 이름은 현대에도 남아 있다. 흔히 유비가 제갈공명을 얻었듯 옥타비아누스는 마이케나스를 옆에 두었기 때문에 지중해의 패자가 될 수 있었을 거라고 학자들이 이야기 하곤 한다. 그의 현란한 수완과 외교술은 지금까지도 메세나 기술이라는 이름으로 전해지고 있다. 침묵 속에서 식사 아닌 식사가 끝나고 퀸투스와 안토니우스는 응접실로 가고 카피토는 가병 몇 명을 데리고 호위하러 가버리고 식당에는 이아로스와 태 우만 덩그라니 남았다. " 무슨 일입니까? " " 네? 뭐가요? " 이제까지 조용히 침묵을 지키고 있던 이아로스가 뜬금 없이 물었다. 그의 눈은 너무나 담담해서 어떤 의도도 읽을 수 없었지만 질문의 내용이 심상치 않음을 알 수는 있었다. "..............휴우........ 마이케나스가 왜 왔는지 알고 계신 것 같아서요. " "!!!!!!!!!!!!!!!!!!!!!!!!" 알고 있는 게 당연한 것이지만, 그렇다고 이아로스에게 '난 미래에서 왔어요, 그래서 역사책에서 다 봤어요' 라고 말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답답한 마음에 눈앞에 있는 와인 잔을 단숨에 비어버렸다. "..........어? 히야 좋은데? " 목이나 축일 생각에 원샷했던 와인은 보통의 것이 아니었다. 이아로스의 질문도 잊어버릴 만큼 환상적인. 새콤달콤한 맛과 향긋한 꽃향이 입가에 맴돌아 한국어로 연신 굉장하다는 말을 연신 내뱉었 다. 좀 전에 무심코 마셔버린 와인의 환상적인 맛에 앞에 있는 와인 단지를 보고 눈치를 보는 찰나 짧은 한숨을 쉬던 이아 로스가 손을 뻗어 잔에 와인을 채워주었다. "고마워요. 근데 정말 좋은 포도주네요. 햇 포도주지만 워낙 깔끔해서....... 정말 죽이는데? 장미향도 적절하고...으음,,," 정말 굉장한 와인이야, 알싸한 청량감이 갓 수확한 포도라는 것을 알게 해주었다. 이곳에서 로마시대의 와인을 먹게될 줄이야. 뼈속까지 애주가인 태우는 그간에 주워들 었던 와인들이 머리 속에 떠오르는 것을 느끼며 감격했다. 흐읏, 로마네콩티보다 더 맛있어!!!!!! "네, 이번에 브린디시움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퀸투스님의 집안은 예로부터 질좋은 포도주를 담그기로 유명하답니다. 포도주에서 나 오는 향은 장미정원의 장미들입니다. 그곳은 별채이기도 하지만 델리우스가의 포도주 저장고로도 유명하지요." "그랬군요.........." 지금으로 치자면 일종의 로제 와인인 셈이로군. 연신 감탄하던 테우는 뭔가 잊어버렸던 것을 생각해 내었고 조용히 그를 바라보는 이아로스를 보면서 어색하게 웃었다. 정말 뭐라고 해야할까? 그를 속이기는 싫었지만 사실을 말할 수는 없다. 그리고 그에게는 과거의 사실이지만 그들에게는 아직 불확실한 미래였다. ".............." "미안해요............." "아니요, 정말 미안해야할 사람은 접니다. 퀸투스 님께 그렇게 이야기를 듣고도 딱딱하게 질문하는 것은 고치기 가 어렵네요......." "......아뇨! 바보같이 헤실거리는 이아로스보다는 좋아요!!!" "..네? 푸훗........고맙습니다. 후후 전 항상 당신을 곤란하게 하는 질문을 하는 것 같군요. 다른 뜻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마이케나스가 직접 온 것 이 좀 걸려서요." 잠자코 있자 이아로스는 포도주를 한잔 더 따라주며 말을 이었다. "...........마이케나스를 보낼 정도의 사안이라면 보통 것은 아닐테죠. 아..그는 카이사르 미노르의 측근 중의 측근입니다. 만만한 상대가 아닌데 퀸투스 가 또 쓸데 없는 말을 하는 건 아닌지....두 사람은 알고 지내는 사인데....사이가 좋다기 보다는..하여간. 퀸투스가 무례하 게 군다면..안토니우스님께 폐가 될 테고.......사절에게 모욕을 주고 보내면 선전포고가 되거든요. 또 동 급의 사절을 보내야하니까 분명 다음 회담에는 퀸투스님이 갈테고....상대방도 받은 대로 돌려주겠죠.. 퀸투스님이 좀..........." 이아로스의 망상은 계속 이어져서 마침내 퀸투스 때문에 내전이 일어난다는 것까지 도달했다. 아무리 그래도, 너무하잖아, 애인인데. 황당한 내용전개와는 달리 이아로스의 표정이 너무 진중해서 태 우는 웃음이 나오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헤헤, 그러니까 퀸투스가 걱정된다는 거지요? " "네? 무슨! 그런 인간의 걱정 따위는 안합니다!!!!!!!" 솔직하지 못하네, 이아로스. 저번에 정원에서 끝나지 않을 것 같은 키스를 한 건 누구더라? 설마 퀸투스와 그렇고 그런 사이일 줄은....... 항상 이아로스가 퀸투스에게 잔소리를 하는 것 만 보아왔던 터라 정원에서의 일은 좀 놀라웠다. "그런데 누가 먼저 고백했어요? " "무,,,,무슨,,,,,,,,," " 다 봤어요. 정원에서.......거긴 테라스에서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 이라구요." 망치로 얻어맞은 듯한 표정에 다른 곳에서도 심심치 않제 목격했다는 것은 말하지 않는 게 좋겠다............... "!!!!!!!!!!!!!" 언제까지나 냉정하고 땍땍거리기만 하던 이아로스의 얼굴이 잘 익은 사과처럼 익어버렸다. 무언가 말을 하려고 쉴새 없이 뻐금거렸지만 소리가 되어 돌아오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생각보다 무지 순진 무구한 고대인이 아닌가? 지금 남의 연애사정에 밤 내놔라, 감 내놔라 할 수는 없는 것이지만 태우는 묘하게 올라오는 호기심을 누르면서 계속해서 부들부들 떨고있는 (아마 그의 머리 속은 퀸투스에 대한 욕설이 난무하고 있을 것이다.) 이아로스를 향해 카운셀링을 시작했다. "이아로스? 에이, 괜찮아요~~까놓고 말하면 나도 안토니우스랄 매일 그렇고 그런 짓을 하는 사이잖아요? (이 때 이아로스 는 마시던 물을 사정없이 뿜어냈다!) 내가 보기에 퀸투스가 나이가 많고 능글능글해서 이아로스가 가끔 진심도 아니면서 화를 내고 그러잖아요? 그리고 대책 없는 퀸투스의 가벼움이 신경 쓰이죠? 혹시 퀸투스가 하는 말이 농담인지 아닌지 헷갈려 하면서 고민하는 건 아니겠지요? 이아로스....연애에서 중요한 건...." 태우는 대학시절 게이바를 드나들며 들었던 연애담과 현대의 세련된 연애 지침을 예를 들어주면서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사랑의 기술들을 전해주었다. 부들부들 떨기만 하던 이아로스도 어느새 경청하고 있었고 두 사람은 곧 "연애" 란 무엇인가를 가지고 즐거운 토 론을 나누었다. 아 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역시 사랑이란 동서고금을 막론한 주제가 아니더냐, 태우는 응접실에서 나누고 있는 회담의 내용이 심장을 쿡쿡 쑤시는 것을 무시하고 기분 좋게 웃고 있었다. 아니 웃으려 노력했다. # 6 마이케나스는 안내된 응접실에서 식사 중이라는 안토니우스를 기다리면서 방 안을 둘러보았다. 본래 이 저택은 폼페이우스 거였는데 그 가 카이사르(쥴리어스 시저)에게 패한 뒤 안토니우스의 소유가 되었다. 폼페이우스는 저택을 온통 황금으로 도배했었지만 저 택의 새주인이 된 안토니우스는 그 황금을 떼어다 빈민가에 뿌리고 나머지는 폼페이우스의 부인에게 집값으로 지불했다. 집안을 살펴보면 그 사람의 품성을 알 수 있다고 했던가. 응접실에 깔린 양탄자는 부드럽지만 군화에 눌릴 만큼 약하지 않았고 여기 저기 보이는 조각과 자기는 그리스의 장인이 심혈을 기울여 만들었을 예술품들이었다. 게다가 벽에 걸린 무구는 소 아시아(지금의 터키)산 청금석으로 화려하게 빛났지만 시퍼렇게 날이 선 도검은 지금 당장 전쟁터에 가서도 본래의 역할을 수 행할 터였다. 어느 것 하나 장군이라는 이름에 어울리지 않는 것이 없었다. "흐음..........생각보다 취미가 좋으시군......" ".........그거 고맙군, 마이케나스. " 드디어 등장하셨나. 기다린 시간을 창문사이로 달의 기울어짐으로 가늠하려했지만 이미 달은 사라지고 없었다. " 마루쿠스 안토니우스 장군을 미천한 식견으로 카이사르 미노르의 입을 맡은 마이케나스가 뵙습니다. 훌륭한 장식과 그에 걸 맞는 주인에 대한 순수한 탄사였으니 오해하지 말아 주 십시오." "............." 역시 퀸투스 델리우스도 함께 인가? 당당하게 들어서서 인사를 받은 채 마는 채 상석에 앉는 안토니우스를 뒤따라 들어와 맞은 편에 앉는 퀸투스를 보며 마이케나스는 씁쓸해졌다. 한 때 아카데미에서 동문수학하며 청운의 꿈을 키우던 선배와 이렇게 적의 군사로 만날 줄이야........ "그런데 무슨 일인가? 옥타비아누스가 폴비아의 영전에 꽃이라도 바치고 오라 하던가? 아니지, 위문 사절은 이미 다녀갔었지...." "이번 브린디시움에 있었던 화합으로 로마에 퍼진 평화를 좀더 공고히 하고 앞으로 번영을 앞둔 로마의 앞날에.........." "..............역시 자네들의 스승이 문제였구만. 짧게 말하게." ........그게 아니라 인정하긴 싫지만 퀸투스 선배에게 옮은 겁니다. " 단도 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옥타비아누스님께서 안토니우스님과의 혼인을 원하십니다." "....................." "....................." 반가워하리라고는 기대도 안 했지만 적막한 침묵은 뭔가. 혹시 그가 아닌 졸개를 하나 보냈었다면 목만 돌아오지 않았을 까? 하지만 한다면 하는 안토니우스가 자잘한 것을 따지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든 순간 마이케나스는 무의식중에 그의 목을 쓰 다듬고 말았다. 제길! 딴 놈을 보내는 건데!!!!!!!!!!!!! 아그리파아~~~~~~~~~~~~~~ " 그건 곤란한데? " 조금 전의 망상에도 불고하고 실제로는 거절할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마이케나스는 선배인 퀸투스를 향해 눈을 부라리는 결례을 범하고 말았다! 떨떠름해 할지라도 승낙할 거라고 확신했던 마이 케나스는 서둘려 부연 설명을 하려 했지만 퀸투스의 얼굴에 '내 말 아직 안 끝났다' 라고 써있는 바람에 입을 다 물었다. "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가 화해한다면 온 로마는 환영하겠지! 게다가 혼.인. 이라면 말이야..." 당연한 말이잖아~~~~~그런데 뭐가 곤란한데? "안토니우스는 상처한지 얼마 되지 않은 외로운 남자지......" 이때 마이케나스는 안토니우스를 돌아보는 실례를 하지 않기 위해 그의 허벅지를 꼬집어야했다. "하지만......로마의 법률에서 그 혼.인.은 불가해 보이는군....." 언제 로마법에 재혼 금지조항이 추가되었단 말인가? "뭐, 로마의 혼인은 관대하신 유노(헤라, 제우스의 아내이지 혼인과 가정의 신)의 가호아래서 이루지지만 말이야..... 옥타비아누스는 아무리 미혼이라고 해도 남자가 아닌가? 비너스(사랑의 신)의 보호아래 연애는 가능해도 유노께서 결혼은 허락하지 않는다네......" "그게 무슨............!!!!!!!!!" 발끈하려던 마이케나스는 그가 한 말 중에 심각한 오류가 있었음을 깨닫고 얼굴이 붉어졌다. 처음부터 그를 놀리려는 의도가 다분한 퀸투스의 장난어린 미소가 이제야 눈 에 들어왔다. 안토니우스에게 쫄아서 너무 간단하게 말해버렸잖아!!!!!!!!!!!!!! 하지만 그 시덥지 않은 농담에 숨은 의도를 깨닫지 못할 만큼 마이케나스는 우둔하지 않았다. 그 찰나 안토니우스에게 시간을 벌어 주기 위해 그의 말에서 말꼬리를 잡은 것이리라. 어느새 안토니우스는 퀸투스를 돌아보며 가벼운 실소를 짓더니 그를 직시하였다. "...죄송합니다. 명확한 뜻을 전해드리지 못했습니다. " "..........옥타비아누스는 어느 귀한 여성분을 위해 큐피드를 자처하시는가? " 괜찮다던가 신경쓰지 않는 다는 위로의 말을 들었다면 혀를 깨물고 싶은 심정이 되었을 거라는 생각을 하며 이번에는 절대 실수하지 않도록 단어의 선택에 신중을 기하면서 마이케나스는 옥타비아누스의 전언을 전했다.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님께서 친누님 되시는 옥타비아님을 안토니우스님의 반려로 맞이하여 두 가문의 화합을 도모함이 어떠한지 의향을 묻고 계십니다. " . . . . 일단은 성공한 셈인가? 파르테아(페르시아)산 러그가 깔린 마차 안에서 의자에 깊숙히 상체를 묻으며 마이케나스는 그제서야 긴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에게는 뒷거래보다는 정공법이 통했다. 그는 그런 사내이니 까. 지금 로마 정세는 폭풍전의 고요와 같은 상태다. 카이사르(쥴리어스 시저)에게 히스파니아으로 쫒겨간 폼페이우스 의 장남 섹스투스가 노골적으로 흑심을 드러낸 상태에서 로마 내부의 반목은 치명적이다. 한시적이더라도 안토니우스와 결 속이 필요했고 마침 상처한 안토니우스에게 다른 세력이 붙기 전에 선수를 쳐야했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현재 로마 최고의 신 랑감이니까. 어째서 미혼인 옥타비아누스보다 홀아비에다 나이도 않은 안토니우스가 더 인기인지는 생각지 않기로 했다. 폴비아의 반란과 클레오파트라와의 스캔들로 이미지가 망가진 안토니우스는 이번 기회에 좋은 혼처를 찾고 있을 것이다. 세상이 다 아는 방탕아 안토니우스에게 로마최고의 미녀이지 그 이름 또한 '정숙한 옥타비아'는 정말 환상적인 짝이 아닌가. 안토니우스와의 결속을 다지자는 마당에 어설픈 패라면 실패할 게 뻔했고 나름대로 가까운 인척 중에서 마땅한 아가씨를 찾기 위해 고심하는 차에 뜻밖에도 옥타비아가 나섰다. - 안토니우스님의 혼처를 찾는다고 했나요? 정략결혼이라도 그 분과 라면 난 하겠어요. 옥타비안, 사실은 오랬동안 그 분을 흠모해왔어요. 나를 보내줘요. 아그리파마저 경악시킨 청천벽력 같은 소리가 우아함와 기품으로 만들어진 그녀에게 나왔을 때 옥타비아누스의 눈에서 화산이 폭발하는 것을 마이케나스는 똑똑히 보았다. 도대체 이 결혼의 행방은 어떻게 될까. 정략결혼에서 한쪽만이 상대방에게 마음이 있는 구도는 치명적이다. 옥타비아를 말려야 했을까? 현숙하고 얌전한 줄만 알았던 그녀의 고집을 꺽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그녀 자신이 이미 오래 전에 안토니우스에게 마음을 주었다는 데야 더 이상 말해봤자 무엇하랴. 아그리파의 마음을 알고 있는 그로서는 착잡한 심정이었다. '도대체 언제 규방에만 있던 옥타비아를 꾀어낸 거야~~~" 마이케나스는 의아해 하는 시종의 물음을 무시하고 마부에게 최대한 돌아서 갈 것을 명령하고 머리를 쥐어뜯었다. - 가서 전하게, 마이케나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신부가 바뀐 것을 정말 유감으로 생각하며 이 청혼을 받아 들인다고 말일세. 옥타비아누스정도의 신부라면 신의 법인들 무서우랴. 방을 나서는데 등뒤에서 안토니우스의 말이 아직도 머릿속에서 메아리치고 있었다. 옥타비아누스가 알게되면 그는 집정관이 던진 조각에 맞아 죽은 최초의 비서관으로 역사에 남을 것이다. " 우워워워워!!!!!!!!!!!!!! 역시 아그리파를 보냈어야 했어~~~~~~~~~~~~~~~~" 발광하는 그의 앞에 앉은 시종은 마부에게 서둘러서 의원으로 방향을 돌리라는 이야기를 하고 주인을 측은하게 바라봤다. *************************************************** +로마의 휴일 제3장 Pudicitia Octavia - 정숙한 옥타비아 # 1 "나라라라라~~라라라라~~" '에구,,,저렇게 좋으실까..' 레아의 눈에 비친 옥타비아는 정말 행복한 신부의 모습이었다. 호박색의 머리카락은 아직 물기가 남아 있어 순수한 그녀의 모습을 더 돋보이게 했다. 목욕을 마치고 나서부터 옥타비아는 이 옷 저 옷을 꺼내 입어보고 보석함을 뒤져 온갖 장신구를 살피는데 여념이 없었다. 사실 결혼 예물과 예복은 이미 다 준비가 되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이 그녀를 분주하게 만들었다. 레아는 아가씨의 행복한 모습을 쓸데없이 입방아를 찢는 사람들에게 모두 보여주고 싶었다. 잘 모르는 집안의 하인들은 레아에게 안토니우스가 얼마나 잔인한 사람이고 바람둥이인지 실컷 떠들어댔다. 정략 결혼으로 팔려가시는 거라며 눈물을 찍어대는 침모에, 언감생심 아가씨를 마음에 품었던 남자들의 술에 찌들어 울부짖는 모습,,,, 하지만 생생하게 빛나는 아가씨의 뺨을 보면 저주의 여신도 축복을 남기고 떠날 것이다. 지금 옥타비아누스의 저택은 집안에서 가장 고귀하고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옥타비아의 결혼식을 앞두고 분주한 상태였다. " Est forma! " (나는 아름다워!) 옥타비아는 탐스럽게 늘어진 머리 위에 황금으로 만들어진 머리핀을 대보며 소리쳤다. " 난 아름다워! 그렇지 않니? 레아? " " 예예~ 아씨는 아름다우세요! 어떤 핀을 꽂아도 아름다우시니까 제발 빨리 좀 고르시는게 어때요? " 레아는 방안에 가득 늘어진 옷가지들을 보고 한숨을 내쉬며 옥타비아를 향해 투덜거렸다. 아무리 내일이 결혼식이라지만 저렇게 들떠서 어쩔 줄을 모르다니... 누가 우리 아가씨를 '정숙' 하다고 했던가~ 물론 옥타비아는 얌전하고 조신한 아가씨임에 틀림없다. 게다가 허리까지 폭포수처럼 흘러내리는 흑갈색의 머리카락, 머리보다 좀더 밝은 빛을 띄는 선명한 눈동자, 붉은 꽃잎 같은 입술, 상아빛의 피부. 명실공히 자타가 공인하는 로마의 최고의 미인이 아니던가. 지금 그녀가 속옷 차림으로 이 옷 저 옷을 걸쳐보며 머리를 올렸다 내렸다 부산을 떨어도 그녀의 아름다움은 전혀 영향받지 않았다. ' 클레오파트라인지 뭔지 하는 이집트의 마녀보다 우리 아가씨가 훨씬 아름다우실거야! 안토니우스 장군님과 약혼이 발표되었을 때 얼마나 많은 로마여성들이 질투심에 눈물을 흘렸다지만 큭큭 아무도 아가씨께 대적 할 수 없지~ 가문을 보나, 외모 를 보나~~ 에구......나는 언제나....' " 아이 참~ 레아! 무슨 생각해?? 내말 들었어? " " 네? 난 언제나 시집갈 수 있을까...에휴~ 그렇게 좋으셔요? " "호호호호~ 레아도 참.. 그나저나 벌써 내일이구나. 정말 가슴이 진정되지가 않아. 내일 내가 입을 예식복이 세상에 주홍색이지 뭐니! 예전에 그분을 처음 뵈었을 때도 노란 팔라(긴 원피스)에 주홍색 토가를 걸치고 있었는데...." 옥타비아는 거울에 비친 그녀의 모습에서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지금보다 키가 작고 얼굴도 동그랗고 수줍은 많던 소녀.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재혼한 어머니와 헤어져 외가에서 남매는 자랐다. 엄격하지만 따뜻하셨던 증조 할머니, 맛있는 스튜를 만들어주시던 외할머니, 집에 돌아오실 때면 신기한 선물을 하 나 가득 안고 찾아와 남매를 안아주시던 큰할아버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장군이라던 카이사르. 어린 남매의 눈에 그 분의 등은 산처럼 높게 보였다. 옥타비아누스는 언젠가 카이사르처럼 커다란 사내가 되고 싶다고 말했고 그럴 때면 카이 사르는 큰소리로 웃곤 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집으로 돌아온 카이사르 옆에 낯선 사내가 있었다. 아버지가 있다면 저런 모습일꺼야. 남자는 카이사르보다도 큰 키에 황금빛 머리카락, 푸른 하늘을 담은 듯한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옥타비아는 햇살처럼 웃는 금발의 미청년에게 마음을 송두리째 빼앗겼다. -귀여운 꼬마 숙녀님, 소인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라고 하는 카이사르님의 부관입니다. 존귀하신 이름은 무엇인지요? 외할머니손에 이끌려 보았던 연극에 나오는 배우처럼 유연한 동작으로 인사하는 그의 모습에 옥타비아는 빨개진 얼굴을 숨기려 자기 보다 키가 작은 동생의 옷자락 뒤로 숨었다. 그런 그녀를 보고 크게 웃는 그의 모습에 옥타비아는 동생에게 작은 목소리로 '저 사람 아폴로 신인가 봐! ' 소곤거리자 옥타비아누스는 ' 아니야, 바보! ' 라고 그녀의 손을 꼬집었었다. 아픈 손목을 잡으 며 돌아본 동생의 뒷덜미는 그녀보다 더 새빨개져 있었던 것 같았다. 청년은 카이사르가 오지 않을 때도 남매를 찾아와 놀아 주었다. 바깥출입을 금하셨던 두 할머니도 그 남자가 오면 멀리 마차를 타고 산책하는 것도 허락해 주셨다. 남 자는 남매와 시종을 마차에 태우고 직접 마차를 몰기도 했었다. 옥타비아는 목검을 들고 놀고 있는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를 몰래 훔쳐보다 그들이 들판에 누워 쉬는 참이면 할머니를 졸라 얻어낸 과일 바구니를 들고 뛰어가곤 했었다. 그녀의 기억 속에 안토니우스는 언제나 그들을 향해 웃어주었었다. "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어린 시절의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계속되는 원정으로 안토니우스의 발길은 뜸해 졌고 그들은 나이가 들어갔다. 어느 날 날아온 비보는 그들과 안토니우스 사이에 건널 수 없는 강을 만들었다. 옥타비아는 조부인 카이사르의 죽음이 어째서 안토니우스와 그들을 갈라놓는지 이해 할 수 없었다. 언제나 그들을 따뜻하게 대해주던 안토니우스는 없었다. 사람들은 동생과 안토니우스 중 한사람은 죽어야 한다 고 말했다. "......내가 다리가 될 꺼야. 그분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어. 안토니우스님도 옛날의 우리들을 잊지 않으셨을꺼야....... 내 결혼이 두 사람 사이의 오해를 풀고 화해를 할 수 있게 할거야... " 몇 년 전부터 미소를 잃어버린 동생을 생각하며 신부는 진심으로 사랑과 평화를 신께 기도 드렸다. . . . "안 들어 갈꺼야? " "...................." 누이의 방문 앞에서 옥타비아누스는 발길을 돌렸다. 내일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는 모두의 축복 속에서 혼인을 할 것이다. 자신의 손에 의해서. 방안에서 간간히 터져 나오는 웃음 소리에는 분명 행복이 들어 있었다. 귀를 막으면 그 웃음소리가 들리지 않을까? 누이의 들뜬 웃음소리 따위 듣고 싶지 않았다. 곧 깨어질 행복 속에서 바보같이 웃지마. 나를 용서하지 말아, 사랑하는 나의 누이. 내 손으로 산산조각을 낼 거야. 사랑하는 나의 누이, 착하고 순진한 나의 누이, 부디 나를 용서하지마. 난 절대 그를 용서하지 않아.................. # 2 "유노의 이름으로 그대들의 성혼을 선포하노라! " 하얀 대리석이 화려하게 빛나는 유노의 신전의 홀에 사제의 목소리가 낭랑하게 퍼졌다. 안토니우스는 우렁찬 함성 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아, 나 결혼 중이었지..........' 밤새 퀸투스와 마셔 댄 것이 탈이 난 듯 싶었다. 아침에 부산하게 움직여 예식에 참가했지만 복잡한 절차 중에 그의 기억에 남아있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문득 앞을 보니 플람메움(로마식 면사포)을 곱게 쓴 옥타비아가 있었다. 개나리빛의 혼인 예복을 입은 그녀의 모습에서 예전 카이사르의 본가에서 보았던 12살의 소녀의 모습을 희미하게나 떠올릴 수 있었다. 그리고 당돌한 눈빛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던 녹색 눈동자의 소년. 옛 기억은 안토니우스의 심장을 죄어왔다. ' 임페라토르, 나의 장군...카이사르여....... 저승의 가면 그대의 칼을 달게 받겠습니다.....................' 옥타비아의 따뜻한 눈빛이 그의 심장을 비수처럼 찔렀다. ' 나를........용서하지마.............' 옥타비아누스의 표정 없는 눈빛이 그의 심장을 산산히 조각 내었다. ' 나를......너희들을 지키지 못하는 나를.........용서하지마..........' . . . " 축하해요! " " 축배를 드세! " "로마의 평화를! " "유노의 축복이 함께하기를! " 결혼식을 알리는 색색의 등불이 저택을 화려하게 빛나게 했다. 옥타비아누스의 저택은 세가의 결혼식을 축하하는 인파로 북적였다. 서로를 향해 으르렁 대던 반대 파벌의 원로원의 고귀한 의원들도 오늘만은 함께 어울려 주연을 즐겼다. 아침에 안토니우스는 바쿠스의 신전에서, 옥타비아는 아폴로의 신전에서 축복을 받아 결혼을 주관하는 유노의 신전에서 예식을 올렸다. 유노의 신전에서 예식을 마친 후 온갖 종류의 꽃으로 치장된 마차를 타고 로마시내를 돌아 시민들의 축복을 받으며 초야를 치를 신부의 집으로 도착했다. 초야를 치르기 전까지 신랑과 신부는 만날 수 없는 로마의 결혼 의식. 신랑은 피로연장으로 신부는 유노의 신관들에게 이끌려 초야를 준비하는 의식을 한다. 신랑은 하객들에게 붙들려 연거푸 술을 마시고 신부는 여관들의 손에 몸을 정갈히 하고 신랑을 기다린다. 신랑이 신부에게 가는 것으로 피로연은 끝나고 남은 이들은 아침까지 주연을 즐기며 두 사람의 화합을 축하한다. 안토니우스는 여기 저기서 올라오는 술잔을 가리지 않고 비웠다. 큰 소리로 노래하고 소리치는 가운데도 술은 끊임없이 그 의 속을 차갑게 가라앉혔다. 술취한 사내들의 거센 입담도, 매춘부들의 애교 어린 음성도, 그의 입에서 나오는 상스런 소리들도 다 먼 곳에서 들리는 소음일 뿐이었다. 흐트러지는 육체와는 다르게 정신은 잡념이 사라지고 지독히 냉철해져 갔다. 옥타비아는 더 이상 소녀가 아니었다. 수줍음 많던 소녀는 사라지고 성숙한 아름다움을 가진 여인이 되어있었다. 언제나 누군가의 옷자락 뒤에서 말갛게 익은 얼굴을 하고 미소 짓던 어린아이는 사라지고 없었다. - 당신에게 복종하는 정숙하고 현명한 아내가 되겠어요. 안토니우스는 호박색의 꿀 술에 떠오르는 그녀의 그림자에 신경질적으로 술잔을 머리에 쏟아 부었다. 천진하던 아이는 사랑스러운 여인이 되어 그의 아내가 되겠다고 한다. " 안토니우스니임~~" 피로연을 위해 불려온 아찔한 차림의 매춘부들 중 하나가 안토니우스에게 매달렸다. 안토니우스가 그녀의 귓볼을 깨물자 여인은 자지러지는 교성을 질었다. 아침 햇살을 맞으며 유노(헤라, 결혼의 여신, 제우스의 아내)에게 신성한 예를 올렸다면 지는 햇살을 맞아 시작되는 피로연은 향락의 시간이다. 신부가 정결한 의식을 통해 성에 대한 눈을 드는 동안 신랑은 결혼 전에 마지막으로 쾌락이 허락되는 것이다. . . . 옥타비아는 향유로 그녀의 몸을 꼼꼼히 바르는 여관들의 손길에 어쩔 줄을 몰라했다. 그녀는 로마를 떠들썩하게 하는 결혼식의 주인공이었지만 결혼이라는 절차가 이렇게 복잡 다난한 것인 지 몰랐었다. 작고 소박했던 그녀의 첫 결혼식은 데메테르 여신(농업의 여신)의 신전에서 열린 모든 사람 들의 즐거운 잔치였었다. 이번 결혼식은 너무 화려했고 복잡했다. 그녀의 첫 번째 결혼은 소박한 들꽃과 같았다. 거센 바람에 흩날려 사라지는 꽃과 같은. 시뻘겋게 된 얼굴로 율리아님(카이사르의 여동생이자 옥타비아남매의 외할머니)에게 자신을 달라고 매 일 매일 그녀를 웃게 해주겠다던 순진했던 청년을 기억해냈다. 율리우스라는 이름을 가진 일가의 먼 친척인 그 사람은 욕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18세의 옥타비아는 너무나 거대해 보이던 남자의 등을 더 이상 바라볼 자신이 없어 그녀만 을 바라보는 착한 남자에게 그녀를 맡겼다. 마음을 다잡지 못하던 어린 신부를 따뜻한 미소로 감싸주었다. 조금 씩 녹아가던 그녀의 행복은 길지 못했다. 남자는 카이사르의 암살로 때문에 징집된 군인의 일원이 되어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옥타비아는 결혼식 날 죽은 전 남편을 떠올리는 그녀를 탓하였다. 몸과 마음을 정갈히 하고 신방으로 가야 할 판에 엉뚱한 생각이라니.... 옥타비아누스가 안토니우스와의 혼인할 일가의 여인을 구한 다고 들었을 대 두 번 생각하지 않고 그녀 가 가겠다고 했었다. 옥타비아는 옥타비아누스가 그렇게 까지 불같이 화를 낼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계 속해서 동생을 설득했다. 왜, 옥타비안. 너도 안토니우스를 좋아했잖아? 온몸으로 거부의 의사를 표하는 그가 이해되지 않았다. 옥타비아누스의 녹해같은 눈에 안토니우스에 대한 신뢰와 애정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지만 지금 그의 눈에는 분노와 증오의 감정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나 노력할게, 옥타비안......... 평화의 여신께 부탁드릴게............ 예전처럼 돌아갈 수 있을꺼야. 그분의 황금빛 미소가 다시 우리에게 향할거야,,,, 여관들의 손길이 더욱 섬세해지고 부드러워졌다. 알몸인 그녀는 무릎까지 오는 따뜻한 물에서 일으켜 세워지자 한기에 몸을 움추렸다. 한 여관이 붉은 장미기름을 그녀의 유두와 음부에 정성껏 바르기 시작했다. "하앗......." 옥타비아는 유연한 여관의 손놀림에 터져 나오는 신음을 화들짝 놀라며 삼켜버렸다. 당황한 그녀를 차분한 손길로 다래며 여관은 다시 그녀의 몸에 다른 향유를 바르기 시작했다. "호호~ 아가씨 부끄러워하나요? " 나이 많은 여관이 농을 건네자 여러 여관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 들은 그녀가 초야에 입을 옷가지며 장식품을 준비하면서도 눈부 시게 아름다운 옥타비아의 나신을 훔쳐보고 있던 터였다. "어쩜, 아가씨의 피부는 비단보다 곱군요. 이렇게나 아름다운 아가씨를 맞이하시는 분은 로마 최고의 장군님이라지요? 오늘밤 듬뿍 사랑 받으실 수 있게 저희가 도와드릴게요." 옥타비아의 얼굴은 잘 악은 사과처럼 붉어졌다. 이제 그녀는 오늘 밤, 처음 본 순간부터 10여년을 마음 속 깊이 품어왔던 정인에게 안길 것이다. 얼마나 이 순간을 꿈꿔왔던가. 그녀의 손에는 닿지 않는 천상에 있는 신과 같다고 생각했었다. 그 분의 품에서 그 분을 닮은 아이를 낳고....... 사랑으로 채워갈꺼야.... 여관들이 붉은 장미가 화려하게 수놓아 진 은빛의 능라(비단)을 그녀의 몸에 입혔다. 하얀 비단 속의 옥타비아는 마치 올림푸스에서 미의 여신이 강림한 듯 싶었다. # 3 "후아~ 이제 좀 숨쉴 것 같다............" 태우는 정원에 나와 밤하늘을 향해 심호흡을 했다. 현대에서 일부 일처제에 익숙하고 나름대로 도덕관이 확실한 그에게 지금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은 충격과 혼란으로 다가왔다. 컬쳐 쇼크! 로마 문화가 좀 향략적이고 퇴폐적이라는 것은 폼페이의 유적에서 익히 보아 알았지만.......이건 정말 심하다... 로마법은 공평하고 현대적이라고 들었었는데 혼인관계에 대해선 느슨한가에 대해 떠올려보려고 했지만 불가능했다. 저택에서 벌어지는 장면은 그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태우는 이방인이라는 그의 신분 때문에 유노 신전에서의 의식은 참가하지 못했다. 하지만 고대의 결혼식에 참가하고 싶다는 그의 간곡한 부탁에 카피토를 대동하고 옥타비아누스의 저택에서 벌어지는 결혼식의 후반부 행사에 겨우 참가 할 수 있었다. 옥타비아누스의 저택이 원래 카이사르가 살던 집이라는 말에 태우는 감탄성을 흘리며 저택을 관찰하는데 정신이 없었다. 전체적으로 화려하고 전망이 탁트인 높은 언덕 꼭대기에 자리한 안토니우스의 집과는 다른 분위기의 집이 였다. 옥타비아누 스의 저택은 뒷산에서 내려오는 숲을 정원까지 끼고 있어서 숲가에 서있는 산장 같은 느낌이 풍겼다. 결혼식 때문에 대문에서 부터 화려하게 내려오는 천개(커튼)와 융단, 그리고 아름답게 피어오르는 등블. 입구에서부터 황홀한 저택에 터져나오던 태우의 감탄은 피로연장에 들어서면서 경악으로 바뀌었다. 만약 소위 말하는 '향락'은 이런 장면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 새 신랑이 남들이 다 보는데서 딴 여자랑! " 붉은 빛이 도는 검은 머리를 탐스럽게 올린, 한 눈에도 글래머임이 확인되는 여인이 안토니우스에게 유혹적인 자태로 다가섰 다. 주위의 엉켜 있던 남녀들이 "메로디아"를 외치며 그녀를 연호 했다. 이아로스에게 누구냐고 물으니 그는 씁쓸하게 웃으며 로마에서 최고로 인기 있는 매춘부라고 알려주었다. 안토니우스도 로마에 오면 가끔(이아로스는 진짜 가끔이라고 강조했 지만, 글쎄...)찾았다나. 이윽고 터지는 함성에 피로연장이 후끈 달아올랐다. 안토니우스는 메로디아라는 여인과 새 신랑으로서 도저히 할 수 없다고 생각되는 행동을 서슴없이 해댔다. 그녀의 풍만한 가슴을 물어뜯는 가 싶더니 그 녀의 손에 이끌려 딥키스로 이어졌다. 메로디아는 안토니우스의 무릎에서 반쯤 기대듯 누워 한 손으로 그의 황금빛 머리 를 잡고 다른 한손으로는 그녀의 가슴으로 안토니우스의 손을 인도하며 짙은 애무를 재촉하고 있었다. " 저,,저래도 되는 거에요???? " " 못 말릴 관습이지요.... 신부가 유노의 신관들에게 첫날밤에 대해 배우는 동안 남자는 최고의 매춘부에게 위로를 받는 겁니다....부족시대의 약탈혼에서 나온 악습입니다... 설마 옥타비아누스가 이렇게까지 준비할 줄은 몰랐는데요......." 여자가 그의 가슴에 붉은 입술을 퍼부울 때 술잔을 던지며 웃는 안토니우스의 목소리가 태우의 귀에는 아프게 들렸다. 허공을 향해 던지는 그의 시선에서 지독한 슬픔을 봤던 것 같 다. 다시 새로운 술병을 든 그와 시선이 마주쳤다. 안토니우스는 그를 향해 웃어주었지만 태우는 웃지 못했다. 퀸투스에게 추파를 던지며 다가서는 붉은 머리의 매춘부를 보자 이아로스는 성큼 그 곳으로 가서 퀸투스의 팔을 잡아끌고 나가버렸고 카피 토는 피로연장에 돌아다니는 군사들에게 지시를 내리고 았었다. 잠시 그들의 시선에서 해방된 태우는 답답한 실내의 공기를 떠나 바 깥으로 나왔다. 시끄러운 안의 향연과 달리 후원은 고즈넉한 적막감마저 감돌았다. 정원의 한 면에서 시작되는 숲은 저택의 후방을 보호하듯 장벽처럼 둘러져 산 능선으로 이어져 있었다. 숲의 싱그러운 향기가 삼림욕장에 온 듯 한 기분이 들어 태우는 숲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등산을 좋아하던 혜준과 가끔 서울 근교의 산을 오르곤 했었다. 어떨 때는 그들의 섹스소리가 메아리로 울려 퍼지지 않을까 실험해보자는 혜준의 말에 기겁을 해서 도망다닌 적도 있었다. 어찌나 농 염하게 유혹해오는 통해 태우는 산에서 기어내려 가도록 만들겠다는 엄포로 혜준을 떼어놓을 수 있었다. 결국 인적이 없는 바위 뒤에서 혜준의 달콤한 입술로 성난 페니스를 달랬었는데........... 산 속에서 서로의 분신을 입으로 받아냈었다. 산에서 불미스러운 짓을 한 그들에게 산신령이 노하실까 제사를 드려야 한다는 혜준의 말에 약수까지 떠다 절을 올리고 " 우리 사랑하게 해주세요~~"를 외치고 내려왔다. "쿡쿡....." 실소를 자아내는 재미있는 기억들은 갑자기 밀려드는 그리움으로 바뀌었다. 무심코 쥐었던 나뭇가지가 부러지면서 조용한 숲 속을 울리는 소음을 냈다. 그 소리에 놀라기도 전에 태우는 눈앞으로 날라 오는 번쩍이는 것을 보았다. " 누구냐! " 달빛에 번쩍이는 물건은 분명 칼이었다. 목덜미에 닿는 서늘한 감촉에 태우는 아무 말도 떠올릴 수도 할 수도 없었다. 그의 목에 칼을 대고 있는 짧은 머리의 사내의 딱딱한 얼굴이 어디선가 본 듯 했지만 눈앞에 번쩍이는 검광이 기억해내는 것 을 방해했다. 이 세계에서 그에게 낯익은 얼굴이 있을 턱이 없다는 생각에 무심코 실소를 흘리자 짧은 머리의 사내는 미 간에 주름을 그리며 더 가까이 칼날을 들이대었다. 앞쪽에서 바스락거리며 누군가 다가오는 소리에 더욱 파랗게 질린 태우의 눈에 창백한 안색의 미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아그리파? " 경계심이 어린 에메랄드의 눈동자가 태우를 향하더니 놀람으로, 호기심으로 바뀌었고 태우의 목을 겨눈 칼날을 보고 눈살을 찌푸리자 검날이 조금 물러섰다. 뚫어지게 쳐다보는 태우의 시선을 느낀 듯 에메랄드의 눈동자가 의아함을 띄고 있었다. 거짓말.......... 태우에게 목에 드리워진 칼은 이미 관심 밖이었다. 태우는 눈앞에 서있는 유약한 인상의 아름다운 사내를 넋을 잃고 바라봤다. 너야? 정말 너야? 내가 꿈을 꾸는 거야? 아니면 지금까지가 꿈이었던 거야? 살아있었던 거야? 태우는 손을 들어 선명한 이목구비를 만져 보려했지만 뒤로 물러서는 남자의 움직임에 손은 자리를 잃고 허공에 버려졌다. 자신의 손을 피하는 남자의 모습에서 치밀어 오르는 그리움을 토해냈다. ".......혜준아.........혜준아,,,,,,,으흑,,,,,,,,,혜준아......." 옥타비아누스는 피로연장에서 나와 아그리파만 데리고 후원을 산책하는 중이었다. 앞 쪽에서 무슨 소리가 들려 아그리 파가 뛰어 나갔고 두 사람은 외국인으로 보이는 남자와 마주쳤다. 그 외국인의 검은 눈이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그를 바라 보자 옥타비아누스는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 검은 눈동자가 갑자기 흔들리는가 싶더니 알 수 없는 말들을 쏟아내었다. "......혜준아.........혜준아......" "......... 저기 당신 괜찮은 겁니까? " 옥타비아누스는 조심스레 낯선 남자를 향해 물었고 남자는 자신의 목소리에 몸이 기울어지는가 싶더니 자신을 안아왔다. 옥타비아누스와 아그리파는 당황하며 그 남자를 떼어 놓으려고 했지만 남자는 한사코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태우의 품에서 벗어나기를 포기한 옥타비아누스는 곤혹스러워하면서 경련하 듯 떨고 있는 남자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적어도 자신을 노리는 자객은 아닌 듯 싶었다. 태우는 알고 있었다. 그가 안고 있는 남자는 혜준이 아니라는 것을. 놀랍게도 닮은 이미지였지만 다르다, 헤준과는. 굽실거리는 검은머리, 동양인에게는 나타나지 않는 녹색의 눈동자, 선명한 서구인의 이목구비는 혜준의 것 보다 더 날카롭다. 하지만 이 느낌, 분위기........ 한없이 그리운 이끌림은 분명 혜준과 같다. 처음 바에서 피아노를 치던 혜준을 보았을 때 심장을 관통하던 그 느낌. 그 영혼의 냄새............. "당신은 누구지요? 나를 압니까? " 태우는 침착하게 물어오는 남자의 목소리에 그를 안은 팔을 풀고 그의 얼굴을 다시금 찬찬히 바라보았다. 얼굴이 틀려. 혜준의 눈은 선명한 녹색이 아닌 달콤한 초콜렛 색이고 혜준의 코는 날카롭게 서있지 않는 약간 둥근 코, 혜준의 입술은 부드러워........ 그리고 혜준은 그렇게 딱딱한 목소리로 말을 걸지 않아. 어째서 당신은 혜준과 같은 향내를 가지고 있지? 당신의 모습이 혜준과 겹쳐 보이지? "........죄송합니다. 아는 사람과 착각을 했어요. " "그랬군요........" 옥타비아누스는 자신과 닮았다는 사람에 궁금했지만 아직도 아프게 바라보는 물기 가득한 검은 눈동자에 그 질문을 삼켰다. 평정을 되찾은 듯한 남자는 불편한 기색으로 아직도 검을 빼들고 잇는 아그리파의 눈치를 살폈다. 어디서 온 사람일까? 파르테아(페르시아)인 이라면 동방에서 노예로 많이 들여온 터라 로마의 귀족들 사이에서 흔했다. 몇 번 그들을 본적이 있는 옥타비아누스는 그들과 조금 다른 모습을 하고 있 는 남자가 어디 출신인지 좀처럼 종잡을 수가 없었다. 노예 팔찌가 없는 것을 보면 결혼식에 온 외국인의 수행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 결혼식에 오셨습니까? 그런데 왜 나와 계시지요? " " 안이 소란스러워서.....바람을 좀 쐴까하고 나왔습니다. " "..............." "..............." 태우는 눈앞의 남자에 모습에 자꾸 헤준이 아려와 이를 악물어야 했다. 이제껏 잘 버텨왔는데 여기서 쓰러질 수는 없 다. 그리고 눈물은 안토니우스 앞에서만 흘리기로 약속했으니까.. "저......저는 이만....실례하겠습니다! " " 잠깐만!!! " 옥타비아누스는 돌아서는 태우를 잡으려 손을 뻗쳤지만 허공만 움켜쥐었다. 황망히 숲을 빠져나간 태우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 내달렸다. 뒤에서 옥타비아누스가 그를 부르는 듯했지만 더 이상 혜 준과 닮은 사람과 같이 있을 자신이 없었다. "............이상한 사람이로군.........." 옥타비아누스는 태우가 뛰어간 방향을 바라보았지만 그의 모습은 이미 숲에 가려진 뒤었다. 숲을 벗어나 정신없이 뛰어가던 태우는 거세게 잡아끄는 손길에 본능적으로 팔꿈치로 상대를 가격했다. "크윽........." 명치를 정통으로 맞은 상대는 신음을 흘리면서도 태우의 팔을 놓지 않고 힘들게 말을 이었다. " 테리우스? " " 으아? 카피토?? 미안해요... 괜찮아요? " 군대에서 배운 호신술을 이런 때에 써먹을 거라고는 생각 안 했는데. 푸후후....헛웃음이 나왔다. 세상에 저 카피토에게 신음을 흘리게 할 줄이야. "헤헤헤...미안해요..." " 아닙니다...그런데.........." 카피토는 사과에 미미한 웃음을 지으며 팔을 놓아주었지만 달빛의 드러난 말간 얼굴에 빨갛게 충혈된 눈에 다시 인상이 굳어졌다. 무슨 일인가 싶었지만 뭐라고 물어야 할지 카 피토에게는 어려운 일이었다. 만약 이아로스 라면 시원하게 심문을 했을 테지만 스스로의 답답함을 한심해 하면서 카피토 는 결국 자신의 토가를 벗어 주는 것으로 복잡한 심정을 표현했다. "..........방으로 안내하겠습니다. " 앞장서서 길을 안내하는 카피토의 뒤를 따라 발걸음을 옮기던 태우는 카피토의 목덜미에 눈이 갔다. 처음 만났을 때는 스포츠에 가까운 짧은 머리였는데 지금은 땀에 젖어 목에 달라붙을 만큼 자라있었다. 이마와 목덜미에 송글히 맺혀있는 땀방울이 그가 얼마나 태우를 찾아다녔는지를 알려주었다. 말도 않고 사라진데다 눈물 투성이의 얼굴로 돌아왔으니, 카피토의 딱딱힌 표정에 입이 열 개라도 할말이 없을 정도로 미안했다. ".................미안해요........말도 없이 나와서........" "..................." "..............걱정시켜서 미안해요.......그냥 잠시 바람을 쐬러..........미안해요.........." "....................." 카피토는 묵묵부답이었고 무언의 질책을 받는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워졌다. 화해의 분위기가 흐르고 있다고 해도 이곳은 안토니우스의 최대의 적 옥타비아누스의 영역이다. 다들 긴장하고 있을 텐데 생각없이 움직인 잘못이 크지만... 진심으로 축복하는 이도 축복받는 이도 없는 이상한 결혼식에 오래있고 싶지 않았다. "................" "................" 카피토는 정말...........................답답했다. 잠시 눈을 뗀 사이 사라졌을 때 걱정은 했지만 화가 난 것 은 절대 아니라고 생각했다. 자신도 안토니우스님의 결혼식에는 오래 있고 싶지 않았으니까 테리우스는 오죽하랴. 그런데................안타까움, 안쓰러움, 가여움, 귀여움, 예쁨............화 안났음. 어떻게 말을 해야할 지 카피토에게는 어려운 문제였다. 가슴께 밖에 오지 않는 테리우스의 머리를 쓰다듬어 줘야할까? 안토니우스님께서 그건 싫어하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보류했다. 카피토의 머릿 속에서 말로는 나오지 않는 복잡한 사고가 일어나는 동안 태우가 묵을 방앞에 당도했다. 방문을 열어주며 카피 토는 정말 일상적인 이야기 밖에 할 수 없었다. "......피곤하실텐데 편히 쉬십시오...." "........네에........." "......................화 안났습니다..........." "예에? 아...예.........푸후후훗...." "..............." "그럼 카피토도 쉬어요......." "........... 전 옆방에 묵을 겁니다. 쉬십시오. " 정중하게 인사하고 나가는 카피토를 눈으로 배웅하며 태우는 깨끗하게 마련된 침상에 몸을 뉘였다. 고 대 로마의 결혼식에 대한 단순한 호기심에 우겨가며 따라왔지만 그냥 집에서 기다리고 있는 게 더 나았을 것 같았다. 누구의 집에서? 이곳에서 태우의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지독하게 센티멘탈 하고 우울한 기분이다. 조금전 숲에서 만난 남자는 누굴까. 호리호리하지만 강단 있어 보이는 사람이었다. 로마에 와서 처음으로 자신보다 작은 남자를 만났다. 카 피토는 190가까이 되는 장신이었고 안토니우스나 이아로스도 180은 훨 넘은 키에 근육질의 몸을 가지고 있었다. 178인 태우는 스스로 어렸을 때부터 키가 작다고 생각한 적은 단 한번도 없었기 때문에 마치 약한 동물을 다루는 듯 하는 그들의 태도가 불만인 것은 사실이었다. " 하지만 그 사람은......정말 아름답고 연약한 여자 같았어......" 선명한 이목구비, 신비한 에메랄드의 눈동자, 곱슬 곱슬한 검은머리, 그리고 선명하게 울리는 영혼까지. 몸 속 깊지 않은 곳이 아릿해져 왔다. 바람피지 않으려고 했는데.............미안.... 오늘은 널 생각할게, 예쁜 너만 생각할께..... ".....그래도 혜준이가 훨 이쁘다...이쁘다... 혜준이의 입술은 약해서 키스하다 맨 날 터져서 피가 난다. 혜준이는 귓등이 약해서 ' 하자 후우~' 한방에 넘어가고 으음,, 젖꼭지 무는걸 싫어하고..... 후우.. 손가락을 일일이 빨아주는 걸 좋아한다. 위에서 움직이는 걸 좋아한다. 얼굴을 볼 수 있으니까.. .........하아 혜준이의 속은 슈크림 빵 속 같아.......하아...." 느리게 손가락을 움직였다. 피아노를 치는 혜준의 손놀림을 따라 갈 수는 없지만, 혜준과 같은 영혼을 가진 그 아름다운 남자와 어제까지 자신을 격렬하게 안아 주는 금발의 남자에 대한 생각을 밀어냈다. 혜준아,,,,,,,,,미안,,,, "하아..........으읏..........하아..........." 밀려드는 잠에 취하면서 눈을 감고 나른한 자위를 즐겼다. 폭력에 가까웠던 첫 경험, 수많은 사람들과 원 나잇, 달콤한 혜준과의 섹스, 온몸으로 안기는 안토니우스와의 섹스....... 지금 그는 그의 아내를 안고 있겠지만, 오늘 나는 혜준아, 너만 생각할게, 울지도 않아......... 설핏 잠이 몰려 들었지만 태우는 무의식적으로 페니스를 자극하는 손길을 멈추지 않았다. 느릿한 절정으로 향하면서 태우는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잠결에 낮게 웃는 목소리가 들렸던 것도 같다. 사정을 하려고 손을 느슨하게 풀었지만 뜨거운 느낌에 강제적으로 멈춰졌다. 분출되지 못한 욕망이 신음으로 새어나왔다. "아읏, 하아,,,하아,,,,,," 뜨거운 불길에 쌓인 듯한 페니스,,,,, 가슴을 누르는 답답함........ 허벅지 안쪽이 들리는 느낌....... 강하게 젖혀지는 다리...젖혀지는 다리.........에? 화들짝 놀란 태우가 잠에서 깨며 비명을 지르려 했지만 곧 앞으로 끌려가 강한 키스에 실패하고 말았다. "웁....우읍,,,,,,,," 길게 흐른 타액이 목덜미에 떨어지는 느낌이 생경했다. 벗어나려 버둥거려 보아도 눈 앞의 남자는 완강했다. 의지를 가진 남자의 손이 태우의 그 곳에 길을 만들고 있었다. 늘어나는 손가락에 아픔을 호소하고 싶었지만 키스로 막혀 버린 태우의 입에선 미미한 신음만 이 흘렀다. 이윽고 뜨거운 남자의 페니스가 태우의 그 곳을 치고 들어 왔다. " 아아아악!!!!! " 삽입과 동시에 떨어진 남자의 입술은 태우의 쇄골을 사정없이 물었다. 미친 듯이 남자의 가슴을 때리고 밀어내던 태우의 저항은 구름 사이로 드러난 달이 비추는 금발 머리에 돌이 된 듯이 멎었다. "........미안......아프게 했구나...." "..........안토니우스? " "...미안......미안...약속을 지키지 못해서....." 안토니우스의 낮은 목소리가 태우의 굳은 몸을 감싸 안았다. 끊임없이 미안하다는 중얼거림이 태우의 눈물이 되어 떨어졌다. 뭐가 미안해? 왜 그렇게 슬퍼하는 거야? 몸이 이어진 상태에서 놀랄 만큼 안토니우스의 저린 마음이 전해졌다. 이미 찢어진 듯 피가 흐르는 것이 느껴졌지만 태우는 허리를 들어 그를 도왔다. 뜨거운 액체가 태우의 몸 속에 퍼졌다. 태우는 자신의 위로 무너져 내리는 안토니우스의 등을 감싸 안았다. 금빛의 머리카락이 황금비처럼 부서져 내렸다. 이제 알 것 같아............나는 당신에게 온 거야. 고대의 시간을 넘어......... 내가 받은 건 정액이 아니야........ 그의 눈물이야... Non lacrimare........울지 말아요. Non Illacrimare........슬퍼하지 말아요. Vivo cum te....................내가 당신 곁에 살아있어요........ Sum hic............나는 여기에 있어요. Ita..........그러니까 Non lacrimare........울지 말아요. Non Illacrimare........슬퍼하지 말아요. Vasio te.........내가 당신께 키스해드릴께요. 내가 이곳에 있는 동안만은 당신을 생각 할께요,,,, # 4 찻잔에 떨어지려는 낙엽을 피해 잔을 들며 태우는 퀸투스에게 또 질문을 했다. " 안토니우스는 언제 와요? " "....올 때가 되면 오겠지......" 무심하게 꽃잎차를 잎으로 털어 넣는 퀸투스의 선문답같은 대답에 사과를 던지려다 머쓱하게 내려놓았다. 따지고 보면 답답한 건 퀸투스도 마찬가지 일테니까. 주인 없는 저택의 공기가 무겁게 태우의 머리를 짓눌렀다.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 레피두스와 함께 나폴리로 떠났다.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의 극적인 타협이후 로마의 정세는 겉으로는 고요하지만 빠른 물살을 숨기고 있는 강물처럼 거침없이 흘렀다. 로마의 내부 사정은 거대한 두 세력의 혼인에 의한 화해로 안정된 듯했지만 외부 사정은 전혀 여유롭지 못했다. 안토니우스 가 다스리는 동방의 속주는 반란의 기미가 보였고 파르테아와의 일전이 앙금처럼 남아있었다. 언젠가 안토니우스는 파르테 아 원정을 나갈 것이다. 하지만 지금 가장 큰 문제는 히스파니아(스페인)속주에서 세력을 키워 로마로 입성하려는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였다. 내부 반란을 겨우 추스린 옥타비아누스나 언제 파르테아가 대규모 전쟁을 일으킬지 모 르는 안토니우스나 사정이 안 좋은 것은 매한가지여서 결국 섹스투스에게 한 발 양보하기로 협정을 맺으러 갔다. 나폴리만을 보고 싶어 따라간다고 고집을 부렸지만 퀸투스와 남아있으라고 오히려 설득당했다. 퀸투스가 남는 대신에 오랜만에 카피토는 안토니우스를 호위를 맡았다. 은근히 좋아하는 카피토가 얄미워서 심술을 부렸지만 어떻게 이해했는지 카피토는 단검을 주면 서 간단한 사용법을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안토니우스와 떠날 때 이아로스의 기분이 좋지않아 보였다. 어째서 함께 가지 않았냐고 퀸투스 에게 물었지만 그는 섹스투스와는 악연이라며 웃음으로 넘겼다. 안토니우스가 미세노로 떠난지 한달이 되었지만 태우에게는 1년같이 느껴지는 시간이었다. 아마 퀸투스도 마찬가지겠지? "...........이아로스 보고 싶지 않아요? " "........아아, 그 근엄한 얼굴에서 신음을 흘리면서 냉정한 이면에 숨어있는 정열적인 욕망, 세차게 퍼붓는 소나기와도 같은 키스, 큐피도의 화살이 심장을 관통하는 구나! 어떤 시로도 표현 할 수 없는 격렬한 감정을, 그리움이란 단어로 표현 할 수 있을까? 오오, 이아로스!.........나를 뚫는 뜨거운 창을 가진........." "......잘못했어요......" 낯뜨거운 대사를 아무렇지도 않게 잘도 퍼붓는 퀸투스에게 태우는 항복을 선언했다. 많이 보고싶은 가보다. 그래도 다행이군요, 예전처럼 돌아와서. 퀸투스의 부활은 거북한 공기를 날려버릴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잊을 수 없는 결혼식 다음 날, 태우는 끊어질 듯한 허리를 부여잡고 정오를 훨씬 지나서야 일어날 수 있었다. 카피토 는 전신에서 비명을 지르는 태우의 수발을 들었고 이아로스는 깊은 한숨을 쉬며 - 그 의미는 태우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태우의 탓이 아니라고 위로해주웠다. 하지만 침대에서 겨우 점심인지 저녁인지 알 수 없는 식사를 마치고 테라스에서 정원을 내려다 보았을 때 진심으로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노을이 말갛게 지는 하늘을 배경으로 긴 호박색의 머리를 늘어뜨린 여인이 정원에서 꽃을 따고 있었다. 문득 그가 서있는 2층의 테라스를 올려다보던 그녀의 눈가가 빨갛게 부어있었던 것 은 그의 착각이었을까. 안토니우스의 저택에 돌아온 날에도 그 다음 날에도, 일주일 후에도, 안토니우스가 떠난 뒤에도 지금까 지 옥타비아만 보면 태우는 가슴 한켠이 묵직하게 아려왔다. 신혼 첫날에 소박맞은 신부의 심정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을 까, 그 상대가 다름아닌 자신인 다음에야. 안토니우스의 저택에서도 눈치 빠른 하인들은 옥타비아가 아닌 테리우스에게 더 살갑게 대하고 있는 터였다. 해가 지려는 듯 하늘의 한쪽이 짙은 황금색으로 물들어갔다. 길게 늘어진 호박색에 그림자에 태우는 끝 없는 죄책감에 빠졌다. " 흐흐, 아마 모레쯤이면 도착할 거야. " " 네? " "오늘 아침 도착한 전서구에 의하면 어제 출발했다고 하니까. 이틀 밤만 보내면 ........돌아올거야." 부드럽게 웃으면서 퀸투스는 입안에서 맴도는 이름을 차와 함께 삼켰다. 이아로스, 어서 돌아와. 안토니우스 자네도 어서 비 맞은 강아지 마냥 풀죽은 테리우스를 안아줘야지? . . 옥타비아는 안토니우스의 머리색에서 점차 자신의 머리카락 색으로 물들어 가는 하늘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노을지는 하늘에서는 아름답게 화합하건만 그녀가 딛고 서 있는 땅에서 황금의 사자는 자신의 품에 머물지 않았다. 저물어 가는 햇살을 받아 정원에 가득한 월계수가 그분의 머리칼 같았다. 아직 반대편의 하늘은 짙은 푸르름을 잃지 않고 있다. 그분의 눈동자 같아. 장미가 흐드러지게 핀 계절에 그녀는 안토니우스의 안사람이 되었다. 청명한 푸른색으로 덮여있던 저택은 한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성큼 다가오자 금빛으로 붉은 빛으로 물들 어갔다. 제법 스산하게 불어 오는 가을 바람이 황량한 그녀의 마음을 더 시리게 했다. ".......벌써 가을 이구나." 옥타비아가 중얼거리는 소리에 레아와 셀리나는 그녀를 돌아보았지만, 옥타비아는 수틀을 손에 든채 정원을 내려다 볼 뿐이었다. 옥타비아의 시선을 따라 옮긴 그녀들의 눈에 퀸투스 델리우스와 다과를 먹고 있는 검은 머리의 청년, 테리우스가 눈에 들어왔다. 옥타비아 눈에는 어떤 감정도 실려있지 않았다. 감정이 자리하지 못할 만큼 심장이 찢겨졋으니까.......... 굴곡이 없이 수직으로 쭉 뻗은 검은머리가 가을 바람에 흔들렸다. 하얗다고 해야 할까, 그의 피부는 그녀가 보았던 어떤 사람과도 달랐다. 잘 익은 사과의 속살과도 같은 색깔. 금가루 가 적당히 뿌려진 듯한 매끄러운 피부는 가히 매력적이었다. 가까이서 그의 얼굴을 보았을 때 옥타비아는 흑요석을 박아 놓은 듯한, 그 깊이를 가는 할 수 없는 검은 눈동자를 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어떤 것과도 비교 할 수 없는 압도적인 존재감, 이질적인 분위기. 그의 주위를 떠도는 공기는 그녀가 숨쉬는 것과 다르게 느껴져 옥타비아는 절망 할 수밖에 없었다. 안토니우스의 저택으로 들어온 다음 날, 옥타비아는 그의 앞에서 스톨라를 벗었다. - 전 당신의 아내입니다. 원치 않으셔도 저를 취하셔야해요. 당신의 씨를 받아 아이를 낳아야할 의무가 있는 당신의 아내는 저에요. 안토니우스는 그녀의 직접적인 요구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거칠게 침대에 내던져지고 다리가 벌려졌다. 그녀의 다리사이에 자리잡은 안토니우스는 한 손에 포도주를 들고 마실 뿐이었다. 방바닥에 그가 집어던진 포도주병이 박살나는 소리는 그녀의 심장이 부서지는 소리처럼 들렸다. 안토니우스의 얼굴이 그녀의 귓가로 다가왔다. -......네가 원한다면, 언제라도 씨는 뿌려주겠다. 안토니우스의 하얀 손이 거대한 그의 페니스를 드러내고 손으로 훑었다. 차갑게 가라앉은 안토니우스의 눈은 어떤 감정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입가에 비릿한 미소와 안토니우스는 거칠게 몸을 움직였다. 그의 딱딱한 그 것이 몸 속을 파고들자 살이 찢기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그 녀는 비명을 가까스로 삼켰다. 그녀의 몸 안의 그의 씨가 퍼지는 순간 옥타비아는 잔인한 속삼임을 들어야했다. 창백하게 굳어버린 그녀를 내버려두고 안토니우스는 나가버렸지만 그의 목소리는 선명하게 귓가에 남아있었다. - 하지만 아이가 태어난다면 난 사투르누스(크로노스)가 되어주지. 사르타누스, 태어나는 자식들은 삼켜버린 시간의 신. 안토니우스는 아이를 원하지 않아. 아이가 태어난다면 그의 손에 바로 죽을 것이라고 그의 남편은 아내를 처음 안는 순간에 경고했다. 어째서? 어디에도 지난 날 다정했던 그 햇살 같은 남자는 없었다. 아니, 그의 햇살 같은 미소는 그녀의 것이 아니었다........... 안토니우스가 미세노로 떠나기 전 날 늦여름의 더위에 잠들지 못한 그녀는 하지 않았어야 했던 산책을 나섰다. 잠이 든 레아를 나두고 가벼운 숄을 걸친 그녀 는 조용한 복도를 걸었다. 반대편 회랑에 울리는 희미한 소리를 듣지 말고 정원으로 나갔어야했다. 계단을 따라 내려간 그녀의 눈에 후원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중앙의 테라스가 보였다. 달빛을 받아 오묘하게 빛나는 상아색의 천개 사이에, 황금빛의 머리가 빛나는 것을 보지 않았더라면, 눈부시게 아름다운 완벽한 나신이 리드미컬하게 움직이는 것을 보지 않을 수도 있었는데. 향락에 젖어 흐느끼는 쾌락의 소리가 소름끼치도록 차가웠던 안토니우스의 목소리와 겹쳐졌다. "아야......" 하얀 수틀에 붉은 얼룩이 떨어졌다. "아가씨 괜찮으세요???" 황급히 옥타비아의 손을 감싸쥔 레아의 손등위로 뜨거운 물방울이 떨어졌다. 걱정스레 호들갑을 떠는 레아의 손을 잡고 옥타비아는 참았던 눈물을 토해냈다. 안토니우스를 기다리던 첫날밤에도 안토니우스에게 안겼던 유일한 날에도 울지 않았던 그녀였다. 그 것을 보지 않았더라면, 그 것을 듣지 않았더라면, 내 두 눈을 뽑았더라면, 내 귀를 잘라버렸더라면............ 그녀에게 단 한번도 허락되지 않은 구리 빛의 아름다운 나신이 아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안고 있었다. 테라스의 바닥에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검은머리의 사내의 다리가 안토니우스의 허리를 감싸고 있었다. 두 남자의 나신이 어지럽게 엉켜있는 모습을, 그날 산책을 나가지 않았더라면 보지 않을 수도 있었는데, 지금 이렇게 가슴이 산산히 부서지는 고통도 느끼지 않았을 텐데...... 정원에 한가로이 앉아있는 검은머리가 눈에 시리도록 그녀의 눈물을 흘려내고 있었다. 제3장 Pudicitia Octavia - 정숙한 옥타비아 편 끝 *************************************************** +로마의 휴일 24 제4장 Tumulti Pacis - 평화속의 혼전 # 1 "제기랄!!!!!!!!! 내가 안토니우스에게 써먹었던 수작을 그 빌어먹을 자식이 그대로 걸다니! " " 그러게, 진작에 참한 처자랑 살림을 차렸으면 10살이나 연상인 과부에게 꿰이는 일은 없었을 것 아냐..." 옥타비아누스 손에서 떨어지는 두루마리를 유연한 동작으로 피하며 마이케나스는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좋게 이야기해서 순박한 아낙처럼 보이는 스크리보니아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무리 그래도 섹스투스 녀석, 적어도 모자지간으로 보이지는 않을 처자를 골라줄 것이지... "남부 이탈리아를 떼어줬으면 됐지! 감히 나를 옮아 매려고 해!!!!! " 콰당! 책상에 더 이상 던질 물건들이 남아 있지 않자 옥타비아누스는 애꿎은 책상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오늘 따라 손에 잡히는 물건이 평소보다 적을 것을 눈치 챌 법도 하지만 흥분한 상 태의 옥타비아누스는 집사가 미리 값비싼 장식품들을 빼돌린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당연히 안토니우스와의 결혼이 물 건너갔으니 자네를 노릴 수 밖에. 마이케나스는 섹스투스가 내세우는 스크리보니아가 사실은 안토니우스의 신부감 후보였다는 사실을 옥타비아누스에게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 정도의 눈치도 없다면 집정관의 비서 자리는 내놓아야지. "우아아아!!!!!! #@$%$^%&*(&$#@!! %^&#@!!!!!! ^*^&$#@^&!!!!!!!!!!!!!!!! " 도대체 저 아릉 다운 입술에서! 쏟아지는 말들은 과연 라틴어인가! 이번 협상도 그렇고 섹스투스에게 한방 먹었음을 솔직히 인정해야했다. 섹스투스가 안토니우스와 연합하지 못하기 위해 서둘러서 결혼이라는 것으로 타협을 이끌어 내었던 것까지는 좋았 다. 설마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가 화해하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섹스투스가 늦장을 부린 덕에 완만히 사돈을 맺을 수 있었다. 하지만 선수를 빼았긴 섹스투스가 설마 옥타비아누스에게 10살이나 연상의 과부를 혼처라고 수작을 걸어올 줄이야........... 여동생을 떠나 보내고 얼마나 쓸쓸하냐며 빙글거리는 면상을 치워버리고 싶었지만 거절할 명분도 없이 옴짝달싹 못하게 걸려들었다. 언젠가 베어버릴 세력이라면, 잠시간의 평화를 자비롭게 베풀어줄 수도 있다. 군대 사정이 좋지 않은 지금은 일단 숨을 돌릴 시간이 필요했고 그 것을 잘 알고 있는 옥타비아누스는 그 청혼을 거절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22살의 총각 집정관에게 33살의 과부라니 너무한거 아닌가.... "섹스투스 그 새끼 지금 어디 쯤에 있지? " "아마, 내일 쯤에 로마에 오겠지. 안토니우스보다 3~4일 늦게 출발한다고 했으니. " "흥!!!!!! 언젠가 그 시커먼 속을 뒤집어 줄 테다.........지금 뿐이야, 그 더러운 발을 로마에 들이밀 수 있는 건. 절대 두 번은 없어!!! " 마이케나스는 손이 더럽기로 이름난 섹스투스랑 마주칠 생각에 몸서리가 쳐졌다. 생리적으로 싫은 상대 다. 그의 광폭함은 치가 떨렸다. 안토니우스는 적이라고는 하지만 인물을 보나, 능력을 보나 찬탄을 금할 수 없는 상대다. 아그리파도 그렇듯이 은연중에 그와 대적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섹스투스는...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 섹스투스 폼페이우스. 절대 잊을 수 없다. 마이케나스는 영혼이 빠져나간 시체 같았던 퀸투스를 기억하고 있었다. "......... 1년 안에, 섹스투스는 이 땅에서 사라질 겁니다. 반드시 그렇게 해 보이지요." 흥분한 옥타비아누스는 미처 보지 못했지만 생선비늘 같이 비릿한 미소가 마이케나스 얼굴에서 피어올랐다. ** " Roma! Roma! Roma! ..." 동물 가죽으로 만든 토가를 몸에 두르고 뱃전을 주먹으로 내리치며 한 사내가 서 있었다. 장신의 키는 근육으로 덮여 있었고 몸에 남아있는 험한 상흔은 그가 어떤 세월을 보냈는지 알려주고 있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로마가 지척에 있다. 얼마나 이 순간을 기다렸던가, 그리고 그 곳에 그가 있다. " 괜찮으십니까? 바닷바람은 몸에 좋지 않습니다!!! 우어억....." 퍽 쿠당당...... 곁에 서서 걱정어린 말을 건네던 남자가 사내가 커다란 손에 맞아 갑판위로 나동그라졌고 상관의 성정을 잘 알고 있는 수하들이 슬금 슬금 뒤로 물러섰다. "시끄럽다. " 섹스투스는 부드러운 회색 빛의 눈동자를 떠올리려다 방해를 받자 가차없이 미노스를 차버렸다. 감히 네 녀석이...... "죄송합니다 사색을 방해할 생각은,,,,,,,,,,죽여주십시오,,,,,,,,," 미누스는 얼마 전에 섹스투스 앞에서 말 한번 잘못했다가 바다로 던져진 녀석의 전철을 밟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기에 손이 발이 되도록 빌 수밖에 없었다. 그런 미누스를 발로 힘껏 한번 차버리면서 섹스투스는 그의 선실로 들어갔다. 로마에 입성하는 것을 자찬하는 마음에서 뱃머리에 섰건만 순식간에 기분을 잡쳐버렸다. 로마의 지배권을 두고 폼페이우스가는 카이사르와의 일전을 치렀지만 패했다. 아버지가 이집트에서 배신당한 채 살해당한 뒤 히스파니아(스페인)에서 이제껏 세력을 키웠다. 폼페이우스가의 이름을 걸고, 로마에 입성하기 위하여. 그리고 지금 그 목전에 있었다. 카이사르의 이름을 등에 업고 날뛰는 애송이 자식도, 잘나신 안토니우스도 내 앞에 무릎꿇게 만들어 주겠다. "이제, 로마는 내 것이 될 거야..........." 섹스투스의 음산한 목소리에 미노스가 들여보낸 갈리아의 노예가 몸을 흠칫 떨었다. 재수없게도 갈리아(지금의 프랑스 지방)에서 잡아온 노예는 그 자식과 같은 금발머리였다. 억세게 금발을 잡아 쥐는 손길에 노예가 바둥거리며 비명을 질렀지만, 섹스투스의 눈에는 그 머리가 안토니우스 것처 럼 느껴져 불끈거리는 쾌감 몰려왔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히스파니아에서 싸울 때 그의 군대를 박살내버렸던 천재적인 무장. 선두에서 거침없이 지휘하던 금발의 사내에게서 섹스투스는 형용할 수 없는 증오심이 일었었다. 두 번이나 그의 것을 가로채버린 건방진 사내. 완전하게 로마를 손에 넣으려면 삼두 정치의 세력과 손을 잡아야했다. 옥타비아누스와의 연합도 필수적이었다. 로마 최고의 미녀 옥타비아가 그의 손에 들어올 수 있었는데, 안토니우스에게 선수를 뺐길 줄이야. 손이 빠는 사내로군........... 섹스투스는 앞섶을 서투르게 헤치는 갈리아 노예의 짜증스런 손놀림에 얼굴을 끌어 페니스를 삼키게 했다. 그 빌어먹을 자식은 언제까지 내 앞길을 막아서는 것인가. 히스파니아에서의 굴욕적인 패배를 잊을 수 없다. 눈뜨고 처를 앉히려던 여인을 넘겨주다니, 감히 두 번씩이나 내 것을 가로채다니..... 먼 기억 속에서 폼페이우스가로 보내졌던 얌전한 사내를 떠올렸다. 아버지들 사이의 청산되지 않은 은원 관계 속에 강제로 끌려왔던 델리우스가의 차남. 단 한번도 폼페이우스가에 고개를 숙이지 않았던 건방진 군사. 안토니우스에게로 달아났던 그 배신자를 이번 미세노에서 다시 보게 되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를 맞이한 것은 안토니우스 옆에서 차갑게 자신을 노려보던 애송이였다. 꼭꼭 숨겨두었단 말이지......... 히스파니아에서 그의 군대를 패배를 몰고 간 것은 안토니우스만이 아니었다. 제 발로 찾아가 그의 포로가 된 퀸투스 델리우스. 그의 지략과 안토니우스의 전략으로 섹스투스의 군대는 괴멸 직전까지 갔 었다. 감히 자신을 배신했다. 나는 아직도 네 안의 열기가 이렇게 생생한데, 퀸투스.......... "감히, 나를 물 먹였겠다......." 섹스투스의 목소리에 노예의 혓바닥이 멈칫했다. 섹스투스의 험악한 눈초리에 본능적으로 뒷걸음 치던 노예의 몸이 탁자 위에 개구리처럼 엎어졌다. 몸에서 찢겨나가는 옷가지에 노예가 살려달라고 흐느꼈지만 섹스투스를 자극할 뿐이었다. 눈앞에서 파닥거리는 노예의 뒤를 한번에 뚫었다. 헐거워.............얼마나 몸을 굴렸기에 이 모양이야? 섹스투스는 거칠게 몸을 움직이면서 탄력적이고 융통성없던 퀸투스 델리우스를 떠올렸다. 죽어라 패고, 발가벗겨도 단 한마디 신음도 흘리지 않던 도도한 사내. 그 잘 익은 엉덩이를 안토니우스에게 흔들기라도 한 건가. 생각이 거기까지 미친 섹스투스는 헐거워서 흥미를 잃은 노예의 애널에서 그의 것을 거칠게 뽑아냈다. 방문을 열고 문 밖의 수하들에게 알몸인 노예를 내던졌다. 수하들의 환호를 귓등으로 들으며 섹스투스는 술병을 들이켰다. 섹스투스의 진영에서 그의 방밖으로 나체로 던져진 여자 혹은 남자라도, 그것은 수하들에게 윤간을 허 락한다는 뜻이었다. 젊은 군사와 놀아났던 섹스투스의 부인도 그녀의 정부와 함께 나체로 연무장에 던져졌었다. 그들은 짐승같이 달려드는 군사들의 해결소가 되었다. 이런 섹스투스의 유희 아닌 유희는 군사들의 사기를 높이는 기능도 했다. 패전한 장군을 일반 보병들에게 던져준 적도 있었다. 하지만 단 한번도 퀸투스 델리우스는 나체로 밖으로 내보내지 않았다. ".........내 발을 핥게 만들어주마, 안토니우스..............." 이번에야 말로 그 회색의 눈동자에 나만을 담게 만들어 주겠어. 다시는 내 손에서 달아나지 못할 것이다. 퀸투스........... # 2 "으하하하하하!!!!!!!! 성공이에요! 가요!" "허허, 이것 참" 땅거미가 내려 앉아 어둑 어둑해질 무렵, 거리에는 횃불을 붙이려는 움직임이 분주해질 시간이었다. 황 금 나무의 성이라고 불리는 저택의 뒷편은 아직 불이 지피는 병사들의 손길이 닿지 않아 어둔 그림자를 만 들고 있었고, 그 속에서 두 사람이 로마 최고의 장군의 저택의 담 장을 겁도 없이 넘고 있었다. 도둑인가? 암살자인가? 어쨌든 그들은 저택의 담을 안에서! 밖으로 넘고 있었다. 아직 오후 햇살이 따스하게 정원에 내리쬐고 있을 무렵, 정원 한켠에 서있는 과실수에서 탐스럽게 익은 과일 하나가 정확히 바구니에 골인했다. "도대체가 말도 안돼!!!!!!!!!!!!!! 이럴 수는 없다구!!!!" 그건 나도 충분히 공감하지만, 그렇다고 열을 참 이상하게 푸는군.... 또 하나의 과일이 정확히 바구니에 들어가는 것을 보고 퀸투스는 진심으로 탄복했다. 중학교 때 취미로 야구부에 몸담았던 태우에게 사과 던지기 정도야 식은 죽 먹기겠지만,(오히려 사과가 터지지 않도록 힘 조절에 신경써야했다...) 청룡기 4강 신화를 이룬 에이스 투수의 분노는 여전히 위력을 과시해서 사과 중 열에 3개는 그의 손아귀에서 박살나고 있었다. "오오~ 그건 아직 파랗잖아~ 안 익었다고!! 오른쪽, 아니 그 옆에 그거! 좋았어! " " 우우~~~~~~~~~~~~~이제 못 참겠어!!!!" 퍽! 살벌하게 지상으로 내리 꽂혀진 사과는 박살나다 못해 운석구 같은 구멍을 만들었다. 퀸투스는 무의식적으로 물러서며 웃기 위해 노력하며 말을 이었다. " 그래도, 집주인이 나가지 말라는데 어쩌겠어? " "하지만!!!!!!!! " 안토니우스가 돌아오고 나서 보름 동안 꼬박 집안에 갇혀 있었다. 이제 본격적으로 관광을 결심했던 태우의 바람은 여지없이 깨졌고 카피토에게 부탁도 해보고(당연히 침묵으로 묵살당했다) 심지어 이아로 스에게까지 애걸복걸했지만 퀸투스마저 금족령이 내려진 것만 알아냈다. 나가고 싶어, 시장을 구경하고 싶고, 고대 로마인들과 이야기 해보고 싶어. 과거로만 알고 있던 모든 사실들이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기적 같은 순간을 체험하고 싶단말이야!! 정원에 있는 과실수를 괴롭히는 것도 싫증이 났다. 놀다 놀다 지쳐 4일전부터 정원에 있는 나무에 열린 과일들 을 따고 있었지만, 주방에 가져다 주면 솜씨 있는 요리사 손에 갖가지 샐러드와 푸딩으로 돌변하는 것도 재미있었지만........... 정말 나가고 싶단 말이야!!!!!!!!!!!!! 그래 결심했어! " 도망가요!!!!!!!!!!!" "뭐？!？!" 그로부터 약 반나절 후, 비너스(샛별, 금성)가 서쪽 하늘에서 미소지을 때 퀸투스와 태우는 사이좋게 안토니우스의 저택의 담을 넘었다. 고대의 밤이란 공포. 전기도 석유도 없는 적막의 시간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저녁 어스름이 내려않은 로마의 거리는 등불의 행렬이었다. 전기가 없는 이 시대에는 밤은 어둠 그 자체였다. 하지만 가장 찬란한 번영의 시기 를 맞고 있는 로마는 미약하게라도 그 광대한 어둠에 대항하여 빛의 거리를 만들고 있었다. 뚜렷한 빛과 어둠의 대조, 사람들은 활기차게 밤거리를 매우고 있었다. "우와........저기 봐요! 와 먹을 것도 파네?!" 연신 주위를 둘러보며 감탄하는 태우의 모습에 퀸투스는 작게 실소했다. 안토니우스가 알면 당장에 불호령이 떨어지 겠지만, 솔직히 그 동안 갑갑하긴 했다. ..........계속해서 마음 한 구석에 밀어 넣은 불안함이 고개를 들었다. 붉은 사자가 언제가 그의 심장을 옮아 매었다. 이제 다 잊어 버렸다고 생각했는데, 하지만 만에 하나 마주치기라도 한다면 설마, 그렇게 까지 재수가 없으려고．．．퀸투스는 불길한 생각을 떨쳐냈다. 사실 그의 투정아닌 투정에 나오기는 했지만....... 이 아름다운 밤에 재수 없는 일이 일어나겠어? 테리우스의 흥겨운 모습만으로, 이렇게나 즐거워지는데... "흐흐, 그럼 이쪽으로 갈까? 로마의 밤이 시작되는 곳이지!!!" 짤랑짤랑 따라오는 테리우스를 퀸투스는 음흉한 미소를 숨기지 않고 그 곳으로 이끌었다. 오늘은 밤새, 노곤한 몸이나 풀어볼까? ** 대리석으로 깔려있는 밟고 서있기가 민망하도록 번쩍전쩍 빛나는 바닥. 호화롭게 늘어져 있는 색색의 비단, 은은한 촛불 사이로 퍼지는 향유냄새가 증기와 함께 퍼지는 탕. 여기저기 놓여있는 대리석의 침상에 누워 마사지를 받은 남자들, 군데군데 주연을 벌이고 있는 사람들, 나긋나긋한 자태로 시중을 드는 여인들...... 여기가 그 말로만 듯 던 로마의 대욕탕이었다. 벤허에 나오는 것보다 수배는 화려했다. 바닥에 새겨져있는 터키석은 그저 넘어갈 수 있지만, 뜨아, 이건 금이잖아?! 바닥에 박혀있는 돌! 이아닌 보석들을 피해 이리 저리 깡총거리는 테리우스의 모습은 목욕탕에 잇는 사람들의 시선을 한 데 모으고 있었다. 본인이야 화려하게 치장된 목욕탕에 정신을 못 차리고 어벙벙해 있는 상태였지만 다른 사람들 눈에는 천진하다못해 귀여움마저 자아내고 있었다. 이질적인 모래색의 피부에 유래를 알 수 없는 검은머리와 호기심에 초롱초롱한 검은 눈은 나른한 대 온천의 후끈 한 여기 속에서 신선한 파장을 불러왔고 벌써 뭇사내들이 음험한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또 그 옆 에서 유쾌한 미소를 지우지 않는 사내에게도 사람들의 관심은 모이고 있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둔하기는 테리우스와 쌍벽 을 이루는 퀸투스는 그들이 욕정어린 시선 속에 노출되어 잇다는 사실을 눈치 채지 못한 채 온천을 즐길 생각에 들떠 있었다. 그래서 퀸투스는 어떤 구석에서 그 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한 남자가 황급히 어디론가 사라지는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 . . . 유성 온천에라도 온 것 같다. 고대 로마에서 공중 시설, 뭐 극장, 광장 같은 대중 시설이 발달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호화로운 목욕탕이 있을 줄은 정말 몰랐다. 퀸 투스는 로마에 사는 사람들 중에서도 부유한 상인이나, 귀족들만 올 수 있는 곳이라며 이 안에서도 뚜렷하게 계급에 따른 구분이 있다고 설명해 주었다. 알싸한 향초의 빛이 수증기와 함께 은은하게 퍼져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각각의 탕마다 온갖 약 초, 향유가 풀어져 있었다. 그 중에서도 태우가 택한 것은 붉은 빛의 물이 꽤나 고혹적인 곳이다. "헤에 좋다..........취하는 구만.........." 찰랑 찰랑, 물을 손으로 휘이 젖자 코끝에 감도는 와인의 향내가 아찔했다. 고개를 들어 맞은 편를 바라보니 퀸투스는 대리석으로 된 침상에 누워 나긋나 긋한 여성에게 마사지를 받으며 흐믓한 미소를 짓고 있다. 특히 허리에 여자의 손놀림이 집중되는 것으로 보아 그 동안 이아로 스가 얼마나 괴롭혔는지 알 것 같다. 오랜만에 마사지나 받아볼까..........아 좋다....... "저어.........." 에헤라 디야~ "저어,,,,,,,,,,손님,,,,저.." 응? 고개를 돌리니 한 열 두 세살은 되어 보이는 소년이 태우에게 주삣 주삣 말을 건네고 있었다. " 나 말인가요? " "네........." " 무슨 일이죠? " 테우는 묘하게 움추리고 있는 소년에게 최대한 다정하게 물었다. 발목에 찬 고리는 소녕의 신분이 노예라는 것을 충분히 알려주고 있었고 겁먹 은 모습이 안쓰러운 것은 인지상정. "저 이곳으로 오시면, .....기다리고 있으시다고........." 뭐가 기다린다는 건가 하고 의문은 들었지만 건너 편 탕에 있던 사내가 노예의 안내를 받아 어디론가 자리를 옮기는 것 을 보고 태우는 감히 잡힌다는 듯 환하게 웃었다. 오 서비스로군! "그래요? " 호화로운 온천의 특유의 나른한 분위기에 태우는 긴장이 풀린 상태였기 때문에(원래 긴장하는 편도 아닌데다가) 그의 다정한 존대말에 소년의 얼굴에서 죄책감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을 보지 못했다. 힐끗 퀸투스를 돌아보니 아예 대자로 엎드려 잠이 든 것 같았고 계속 물 속에만 있었더니 손끝이 하얗게 부풀어 올라 때라도 밀고 싶었기에 태우는 망설이지 않고 소년을 따라 나서기 로 결심했다. . . . 왠지 망설이는 듯한 소년을 왜 눈치 채지 못했을까? 눈에 눈물을 덩그라니 달고 그 속에 어린 공포를 읽었더라면 이런 개 같은 일은 없었을 거야. 퍼퍽, "커헉..컥,,,," 어째서 이렇게 복날에 개 맞듯이 맞아야 하는 거지... 퍼억, 위를 정통으로 맞은 것인지 신물이 올라온다. " 쿨럭, 아윽, 이게 무슨 짓이야? 쿨럭.........."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두들겨 맞고 있는 몸으로는 충분히 느껴지고 있다. 최고급의 안마 서비스를 기대하며 명랑하게 소년을 따랐지만 화려한 방 앞에 드리워진 붉은 바탕에 금 빛 사자가 수놓아진 휘장이 젖혀지는 순간, 태우는 날라 오는 주먹에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이윽고 이어지는 발길 질에 정신차릴 새도 없이 맞았다. 제기랄, 이유는 알고 좀 맞아야 할 것 아냐?! 쏟아지는 매질 사이로 두목으로 보이는 거칠어 보이는 사내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그의 번뜩이는 눈동자가 태우의 시선과 얽혔지만 두들겨 맞고 있을지언정, 지지않고 마주 쏘아 봤다. " 그만! " 카우치에 앉아있던 사내가 몸을 일으켜 다가서서 태우의 턱을 손으로 들어 올려 시선을 맞췄다. 앉아 있을 때도 어지간한 덩치라고는 생각했지만 근육질도 보통 근육질이 아 니고 백구십은 가볍게 넘길 것 같다. 싸늘한 암갈색 눈동자에는 명맥한 분노를 담고 있었고 어떤 광기마저 느껴져 태우는 몸 을 뒤로 주춤주춤 뺐지만 엉덩이를 쥐어트는 손길에 막혀버렸다. " 이 미친! 무슨 짓이야? " ".........보아하니 그 녀석이 네게 엉덩이를 흔들었을 리는 없고, 네놈이 대주고 있었나? " 밑도 끝도 없이 무슨 소리인가 했더니........ 안토니우스 이야기인가보다. 그럼 좀 찔리는 게 없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다짜고짜 맞을 만한 일은 아니잖아!!!! 그건 그렇다 치더라도 저 덩치와 안토니우스는 무슨 사이인 거지?? 머릿속에 오만가지 상황이 연상되었지만 딱히 떠오르는 생각은 없었고, 게다가 외출도 하지 않았는데 안토니우스와 자신을 연관지 을 사람들은 이 로마 안에 얼마 없었다. 하지만 이어서 나오는 덩치의 발언에 태우는 납치(?)되어온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황당해 서 삿대질까지 해버렸다! " 내게 신음을 흘리며 안겼던 녀석이 아무 데나 물건을 흔들고 다닌 다라, 이거 상당히 불쾌하군...........안 그런가? 도둑 구멍씨? " 큭큭거리는 근처의 군사들의 웃음소리가 명확하게 들리는 것을 보면 귓구궁은 분명 정상이다. 하지만 방금 들은 저 소리는, "거짓말!!!!!!!!!!!!!!!!!!!" 순간 방금까지도 끌려와서 매질을 당한 것도 까맣게 잊어버리고 태우는 마주 보고 있는 대로 고함을 질렀다. 저 새끼가 어디서 생 구라를 치는 거야!!??!!! 안토니우스가 머리에 총 맞았냐?? 네 놈 따위에게 깔리...으으으 있을 수도 없는 일이야!!!!!!! 소금 가져와!!!!!!! 누가 누구한테 깔린다는 거야?! 우욱~~ 쏠릴 것 같아!!!!!!!!!! 서태우!! 상상하지맛!!! "야 이 미친놈아!!!!!!! 어디서 거짓말이야?!? 너 같으면 너한테 깔리겠냐??? 별 해괴한 소리 다 듣겠네!!!!!!!!!!!! 그럴 리가 없잖아???..................요...." 안토니우스가 누군데 당신 같은 산적에게 깔리겠어................요....... 험악하게 올라가는 잿빛의 눈썹에 태우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꼴까닥 삼켰다. 잠시 상황에 걸맞지 않은 행동을 한 것 같았지만 이미 쏟아진 말을 수습 할 수 없다. 사내의 눈이 더욱 광폭해졌다. 어머니, 나 오늘 진짜 정말 죽나봐요........ "얼마나 좋은 맛 인지, 한번 맛보고 싶구만....... 너희들도 그렇겠지? " 정신적인 쇼크 상태에서 데미지 200%의 발언, 공포가 머릿속을 잠식해 가는 과정에도 머릿속은 차가워져서 그의 말뜻을 충분히 새길 수 있었다. 주춤 뒤로 물러서는데 뒤쪽에 서 있던 병사의 다리가 등에 닿고 무의식적으로 올려보는데 마주쳐버린 병사의 욕정어린 눈동자가 추측을 확신으로 바 꿨다. 저 자식, 날 돌릴 셈이야.. 욱신거리는 배를 부여잡고 순식간에 일어선 태우는 병사들 사리로 달아나려고 했지만 곧 사내에게 머리채를 잡혀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엎드린 상태에서 그의 무릎이 허리를 강하게 눌러 움직임이 봉쇄되었다. 귓가에 섬뜻한 목소리가 울렸다. 눈을 질끈 감았지만, 목소리는 사라지지 않는다. "....지금 난 네놈의 뼈를 모두 부셔버리고 싶다, 그 전에 그 속부터 후벼 파주지......큭큭, 감히 내게서 도망을 가더니........고작 너 같은 동방노예 따위라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제길, 안토니우스..... 가슴과 얼굴에 닿은 대리석의 차가운 느낌이 소름이 끼쳤다. 거칠게 옷가지가 찢겨나가는 소리가 멍하게 들렸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지금 나 무슨 일을 당하는 거야? 머리가 백지장처럼 하얗게 비워졌다. 다리가 기묘한 자세로 들리고 엉덩이를 가르는 손가락에 정신이 든 태우나 바락바락 악을 쓰며 반항했지만 거칠게 돌려 세워져 주먹으로 한 대맞고 손 목이 위로 올려져 근처에 서있던 병사에게 결박되었다. "싫어,,,,,이거 놔!!!!!! 아악.......싫어!!!!!!! " 다리가 강제로 벌려지고, 사내의 열띤 얼굴이 코앞에 닿았다. 그의 미소에서 피비린내가 나는 것 같았다. 싫어........ 다가올 공포에 태우는 눈을 감았다. " 그만하시지요. 섹스투스 폼페이우스..........." 나른하게 좋은 날씨라고 평이하게 건 내는 듯한 한가한 목소리에 방안에 모든 움직임이 일시에 멈췄다. "이게 누군가? 제 발로 찾아오다니. 이런 영광이 있나.........." 사내가 자신의 몸에서 몸을 일으키자 태우도 따라서 시선을 옮겼다. 흘러내리는 눈물 사이로 억지로 웃고 있는 듯한 퀸투스가 창백하게 서 있었다. # 3 다그닥, 다그닥...... 사납게 거리를 질주하는 세 마리의 말 때문에, 따뜻한 저녁을 기대하며 집으로 돌아가던 몇 몇 사람들이 낮은 욕설과 함께 황급히 길가로 물러섰다. " 이랴-! " 푸르륵 거리는 백마의 고삐를 더욱 세게 내리치자 달빛에 반사되는 금빛의 머리가 바람에 거칠게 휘날렸다. 안토니우스는 다시 한번 말 등에 채찍을 내리쳤다. 제길, 꽤 오래 참는다 했다. 퀸투스! 그래도 지가 거리끼는 게 있으니 조용하게 집안에 박혀 있을 거라 고 생각했던 게 큰 오산이었다. 테리우스도 퀸투스보다 더하면 더했지........머리가 터질 것 같다. 카피 토라도 붙여놨어야 하는 건데! 원로원의 호출과 동방 속주의 일로 바빠 그 두 사람을 살피지 못했다. 그런데 난데없이 가출이라니! 퀸 투스 이 새끼 네 놈이 애냐?! 지금 때가 어느 때야! 이럴 줄 알았으면 테리우스를 좀 데리고 다니면서 달래놓을 걸 하는 후회가 들었지만 이미 늦었다. 차라리 테리우스 혼자 나갔다면 군사를 풀어 찾아내는 것은 손쉬운 일이었다. 길도 모르니 집 근처에서 곧 찾을 수 있을 터였고 특이한 외모를 가진 것뿐만 아니라 안토니우스가 데려온 "동방의 진주"라는 소문이 저잣거리에 파다하게 퍼져있어서 감히 손을 댈만한 간이 배밖에 나온 이는 없을 거라고 믿었다. 게다가 총명하니까 다른 사람을 함부로 따라가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퀸투스. 그가 문제였다. 섹스투스가 사람을 풀어 그를 수소문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야 했을까. 기우일 뿐이라고 그저 지금처럼만 잠시라도 한가로운 나날을 원했던 것이 욕심이었을 까? 섹스투스 폼페이우스. 네 아비 만한 그릇도 못되는 것이 어디서 나대는 것이냐! 이아로스가 소득이 없는 수하들의 소식에 짜증을 내며 직접 말을 몰고 나가려는 채비를 할 때, 가병 하나가 파로스의 대욕탕에서 온 노예하나가 이아로스를 만나기를 원한다고 알려왔다. 병사의 뒤를 따라 파들파들 떨면서 '그 반지'를 보여 주었을 때 순간 이아로스의 눈에서 번개라도 뿜었는 줄 알았다. 소녀의 어깨를 잡고 다그치는 이아로스를 아이에게서 떼어놓고 들은 이야기에 안토니우스도 이아로스의 뒤를 따라 정신없이 말을 달렸다. - ................ 회색머리의 회색 눈을 가지신 분이 새끼손가락에서 반지를 빼어 주시고는 이로스 이아로스님께 달의 아이가 사자의 발톱에 걸렸으니 속히 와달라고........... '부다 늦지 않기를! 퀸투스! 제발 쓸데 없는 짓 하지말고 얌전히 있어!' 옆에서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말을 몰아세우는 이아로스도 같은 생각일거라고 안토니우스는 확신하며 질세라 말을 달렸다. 또 울고 있지나 않을까, 눈 앞에 새카만 눈동자가 떠오르는 것을 느끼며 안토니우스는 고삐를 세게 움켜잡았다. . . . "퀸투스............" 섹스투스는 그 이름이 공중에 흩어지며 사라지던 매일 매일을 생각했다. 지난 십 년 간 단 한번도 불러도 되돌아오지 않는 이름. 지 금, 그가 십 년 전과 같은 모습으로 그의 앞에 서 있었다. 정말 너 인가? 십 년을 매일같이 꿈 속 에서 품었던 너 인가? ".......퀸투스..........퀸투스....." 퀸투스는 무표정한 얼굴로 다가오는 섹스투스의 손을 굳이 거부하지 않았다. 아니. 꼼짝할 수도 없었다. 언제나 그의 앞에만 서면 고양이 앞의 쥐처럼 온몸이 굳어버렸다. 어린아이처럼, 그의 이름만을 주문처럼 부르는 섹스투스의 목소리에 퀸투스는 잠시동안 섹스투스의 손 이 얼굴을 더듬도록 내버려두었다. 당신은.......섹스투스 당신은...........어째서............ 고개를 내리자 바닥에 눈물 투성이로 엉망이 되어 쓰러져 있는 태우를 보고 퀸투스가 서둘러 다가섰다. "테리우스? 괜찮아? " "콜록, 흐흑, 퀸투스? 흐흑 " 태우는 토가를 벗어 다독이며 안아 올리는 퀸투스의 품에 안겨 들었지만 팔목을 꺽는 강한 힘에 섹스투스의 손 아귀에 붙잡혔다. " 섹스투스! 무슨 짓 입니까? " " 무슨 짓이냐고? 정말 몰라서 묻은 거야? " "아악!" 섹스투스는 더욱 세게 태우의 팔을 꺽어올리며 말그대로 짐승처럼 으르릉 거렸다. " 고귀하신 퀸투스 델리우스가, 이런 젖비린내 나는 노예 녀석 때문에 제발로 나를 찾아왔다 이건가? 고작 이런 녀석 때문에? 하! " " 무슨 오해가 있으셨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분은 제 상관의 피보호자이십니다. " "............ 상관이라면, 설마 안토니우스를 말하는 건가? " 불쾌한 듯 얼굴을 찌푸리는 그의 얼굴에 느슨해진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발버둥 쳤지만 다시 강한 힘에 의해 섹스투스와 얼굴을 마주보게 되었다. "이...이거 놔요! 난 안토니우스의 클리엔스(피보호자)라구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내 호스페스란 말입니다. 노예가 아니라구! " "흐음, 그것 참 재미있군. 혹여 동방 속주에서 납치한 왕족이라도 돼나? 거만하기가 이를 데 없군 그래. " 사실 테리우스는 어디에 내놓아도 귀티가 흐르긴 하지만, 멋대로 생각하게 나둘 수는 없어 퀸투스는 조금의 거짓을 덧붙 이기로 했다. 이대로 완만히 넘어가야 할텐 데 예전부터 섹스투스란 사내의 행동은 예측 불가능했다. "파르테아에서 안토니우스님께 도움을 주신 귀족가의 자제 분입니다. 로마 시내를 구경하고 싶으시다 길래 제가 모시고 나온 것입니다. 사고가 생긴다면 안토니우스님께도, 섹스투스님께도 누가 되는 일입니다. " "후후, 그것 참 재미있군, 그러니까 동방에서 데려온 장남감이라? 이집트의 여우에게만 빠져있는 줄 알았더니 여러 가지로 노는 자 였구만. " "..........." 섹스투스의 말에 박혀 있는 가시에 퀸투스는 입술을 깨물었다. 10년 전보다 그의 광폭함은 하나도 변한 것이 없었다. 그가 너무 늦는 게 아닐까. 초초함이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다. 장난스레 키득거리던 섹스투스의 기도가 사나운 폭풍처럼 변했고 바둥 거리던 테우도 순간 움찔했다. "언제까지 내가 안토니우스라는 그 이름에 물러설 거라고 생각하나? 난 십년 전의 내가 아니다, 퀸투스. 큭큭 오랜만에 그 잘난 면상이 일그러지는 것도 보고 싶군. 장난감에 흡집을 내어 돌려준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하지 않은가, 퀸투스? " "아앗, 이거놔!! 어디다! 아아아악!!!!!!!" " 섹스투스!!!!!!!!!!!!!! 그만 두십시오!!!!!!!!" 사타구니를 거칠게 쥐어트는 손에 태우는 자지러지게 비명을 질렀다. 마음 같아선 당장에 후려치고 도망가고 싶지만 좀 전의 매질이 몸을 무디게 만든 데다 정상인 상태였더라도 이런 덩치에게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퀸투스는 섹스투스에게 덤벼들려다 자신을 가로막은 상대를 올려다보았다. 익숙한 외눈. 차갑게 가라앉은 눈동자. 자신 때문에 눈을 잃은 남자. 갈루스................. 어깨를 잡힌 손에서 미미한 분노가 전해져 왔다. 나는 이들을 배신했지. 보자마자 목이 베어지지 않는 게 다행인가? 당신의 눈엔 여전히 나는 더러운 창부겠지? 갈루스. 테리우스의 비명이 심장을 후려친다. 십 년전과 똑같다. 섹스투스도 자신도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사자의 발톱의 흔적은 깊이 새겨져 있었다.............. "아아아아~ 싫어~~~~~~~~~~" 갈루스가 퀸투스의 처연한 미소에 길을 움찔하며 열어주었다. 생각할 시간은 없다. 저 아이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자신을 절대 용서 할 수 없다. 안토니우스에게 기적 같은 사내, 황금의 저택에 봄을 불러온 다이아나의 선물인 것을. 소녀의 발걸음으로 온천에서 안토니우스의 저택까지는 먼 거리였다. 저러다 그전에 태우가 섹스투스 손에 살아 남기 힘들 것이다. 너무 늦잖아, 이아로스. 테리우스가 다친다면 난 안토니우스를 볼 면목이 없다고. 난 괜찮아, 이미 굴릴 대로 굴렸던 몸이 한 번 더 한다고 죽기야 하겠어? 미안, 이아로스. 미안해........... 이아로스............이아로스.......... ................정말 미안해.......... "..........무슨?! " 섹스투스는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그의 앞섭을 들추는 퀸투스의 행동에 헛바람을 삼켰다. "무슨 짓이냐고 묻잖아!!!!!!!!!!!!!!" 반쯤 서있는 물건에 닿은 뜨거운 혀의 감촉에 신음을 삼키며 섹스투스는 퀸투스의 뒷통수를 잡아 눈을 마주 댔다. 여전히 서늘한 눈동자가 있었다. 지독하게 감정이 서려있지 않은 눈동자. 처음부터 계속, 그랬었다, 퀸투스는. 내가 어떤 미친 짓을 해도 넌 항상 그대로였다. 내 속의 뜨거운 불길은 너의 눈동자 속에서 식어갔어. 사막처럼 말러버린 그 속에 나만을 담기를 원했다. 네가 스스로 내게 안기기를 원했다. " 이것을 바라는 것 아니었습니까? 이 분은 더 이상 건드리지 말아주십시오. 원래, 새 신발보다는............" 퀸투스는 잠시 말을 끊고 붉은 혓바닥으로 입술을 축였다. "...............헌 신발이 몸에 맞는 법이지요.........." "이런 제길!!! 으윽............" 섹스투스는 퀸투스의 도발에 그의 머리채를 끌고 페니스를 거칠게 밀어 넣었다. 비명을 지르고 달겨드는 태우를 갈루스에게 던져 버리고 퀸투스의 뜨거운 입안을 느꼈다. 십 년이야. 십 년. 그렇게 바라던 일이야. 매일 같이 네 이름을 부르며 사정했지.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스스로 다리를 벌리는 네 모습을 언제나 상상했어. 하지만 이것은 아니야. 어째서 내 심장이 갈갈히 찢기는 것이냐! "퀸투스!!!!!!!!!!!!!!!" 사정과 동시에 입을 뗀 퀸투스의 머리를 부여잡고 거칠게 입술을 빨았다. 부드러운 엉덩이의 속살을 손가락 사이로 느껴졌다. 그의 손가락을 받아들이는 그 곳은 지금도 뜨거웠다. "흐어어엉........." 테리우스의 울음소리와 거칠게 찢겨져 나가는 옷자락의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괜찮아, 퀸투스는 테리우스에게 미소지었다. '나는 괜찮아' 스스로에게 인지 테리우스에게 아니면 그 누군가에게 인지 모르게 퀸투스는 끊임없이 되뇌였다. 한줄기 물방울이 그의 눈에서 천천히 떨어지는 순간 강하게 밀려오는 격통에 퀸투스는 허공을 그려줬다. 이..아.....로스..... 바보.... 굼벵이 자식,........ 너무 늦잖아..... 허윽,........ 이....아로스............ 이아로스!!!!!!!! "안돼!!!!!!!!!!!!!!!!!!! 야 이 개새끼야!!!!!!!!!!!! 퀸투스!!!!!!!!! 허어어엉!!!! 아아아!!!!!" 바보같이 병사들에게 잡혀 대리석에 엎어져서 눈물만 흘리는 자신이 추하고 병신같이 느껴졌다. 태우는 그를 잡고 있는 뱡사들의 손에서 벗어나기 위해 바둥거렸지만 아무 소용도 없었다. 눈 앞의 광경이 믿기지 않는다. 탁자 위에 엎드린 퀸투스의 몸이 섹스투스의 움직임과 함께 격하게 흔들렸다. 고통으로 이그러진 얼굴에서 가늘게 웃는 눈에서 눈물이 흐르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나 때문이야..... 내가 도망치자는 소리만 안 했어도,,,,,,,,,나 때문이야..... 이아로스 어떻해.............이아로스가 날 죽일거야....... 안토니우스........... 안토니우스...제발.......... 안토니우스!!!!!!!!!!!!!!!!!!!!!!!!!! 우당탕, 밖이 소란스러웠다. 챙, 챙캉.... 병사들의 거친 욕설과 병장기가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사자문양의 휘장이 거칠게 찢어지며 난입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 섹스투스 폼페이우스!!!!!! " "이게 무슨 일인가!!!!!!!!!!!!" ".....퀸투스!!!!!!!!!!!!!" 안토니우스? 당신이야? "........................... 안토니우스? " # 4 손에 든 잔을 크게 빙글 돌리며 옥타비아누스는 객실에 있는 그를 떠올렸다. 그다지 유쾌한 재회는 아니었다. 첫 만남도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으니까...... 항상 곤란할 때 마주치게 되는군, 곧게 뻗은 검은 머리, 오닉스의 눈동자. 누이의 결혼식때 잠깐 정원에서 마주친 그 남자였다. '분명 안토니우스라고 했었지.....' 느긋하게 온천이나 즐기자는 생각에 마이케나스와 아그리파를 데리고 파로스의 대온천으로 향했다. 제법 쌀쌀한 가을 날씨에 고질병인 천식이 도질까 닦달하는 집사의 성화도 있었지만 폼페이우스의 세력 이 로마에 퍼지고 있고 안토니우스마저 로마에 체류하는 터라 옥타비아누스는 여러 가지로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고 있는 실정 이라 온천에서 그간의 피로를 풀고 싶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래서 섹스투스 폼페이우스가 와 있다기에 될 수 있으면 마주치지 않으려고 했지만 그가 퀸투스 델리우스와 함께 있다는 있다는 말을 듣자마자 무작정 처들어가야 한다는 마이케나스를 따 라 얼떨결에 섹스투스가 있던 방으로 난입한 것이다. 방안의 풍경은 감정의 기복이 적은 아그리파의 눈살까지도 찌푸리게 하는 것이었다. 테이블위에 반라로 엎어져 있는 사람은 분명 퀸투스 델리우스라는 자였고 그 위에 허리를 흔들고 있는 자는 섹스투스였다. "퀸투스!" 마이케나스가 비명을 지르며 섹스투스에게 달려들었다. 순간 옥타비아누스는 마이케나스의 간이 배밖에 나오지 않았나 확인하고 싶었다. 아그리파가 제압한 군사들 사이로 걸어가면서 옥타비아누스는 불쾌한 기색으로 섹스투스에게로 다가섰다. " 이게 무슨 짓인가!" 퀸투스와 마이케나스의 안전을 확인하고 거세게 항의하려는 옥타비아누스의 발걸음을 잡는 미약한 소리가 있었다. "......... 안토니우스? " 아그리파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검은 머리의 사내를 부축하고 있었다. 흘러내리는 머리카락 사이로 보 이는 눈동자는 더욱 검었다. .................안토니우스라고? "......................미안하군. .................................... 기다리던 이가 아니라서." 지독하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흘러나와 옥타비아누스는 흠짓했다. 실망하는 기색이 완연한 그와 안토니우스의 관계가 신경을 거슬렀다. 어째서 그 이름을 그렇게 당연하다는 듯, 자연스럽게 부르는 것이지. 저택으로 돌아오는 마차 안에서 그제서야 이질적인 진주빛의 피부가 눈에 들어왔다. 옥타비아누스의 머리 속에 저잣거리에서나 떠돌던 소문이 떠올랐다. 황금의 저택의 주인에게는 동방에서 가져온 신비한 진주 가 있다는 이야기. 그저 클레오파트라가 바친 보물정도라고 생각하고 넘겼었다. 누이의 첫날밤에 안토니우스가 찾았다던 창부가 바로 그대인가. 술잔을 집어던지는 옥타비아누스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어째서? 어째서 당신은........... 언제까지 당신은 나를 비참하게 할 셈이지? 안토니우스...안토니우스......' ** 창백한 얼굴의 퀸투스가 죽은 듯이 잠들어 있는 침상 곁에 태우는 그 옆에서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앉아 있었다. 모든 게 자기 잘못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조금만 주의했다면. 잠든 퀸투스의 얼굴에 겹쳐 떠오르는 이아로스의 얼굴이 태우의 심장을 심하게 채찍질했다. "테리우스!!!!!!!!!!!!!!" 안토니우스는 자신의 목소리에 천천히 일어서 뒤를 돌아보는 태우의 몸에 울긋불긋 남아있는 멍자욱에 인상이 찌푸러졌다. 그가 테리우스에게 다가서는 것 보다 이아로스가 한발 앞섰고 테리우스가 이이로스 앞에 다가갔다. "죄송해요........" ".............." 태우는 목이 매어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쥐어 짜내었다. 휘청거리는 다리를 잡고 힙겹게 말을 계속이었다. "...내가 멋대로 그 사람을 따라가지 않았다면...아니 몰래 빠져 나오지만 않았어도..." "..................." 정상이 아닌 듯한 상태에서도 힘들게 서서 고개를 숙이는 테리우스의 모습에서 우려했던 일이 현실로 일어났음을 이아로스는 짐작할 수 있었다. 대욕탕에서 대강의 사실을 전해 들은 터라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고 있었지만....이아로스는 죄책감에 고개를 들지 못하는 테리 우스도 침상에 누워있는 퀸투스도 바라볼 수 없었다. '당신 탓이 아닙니다.'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입에 밀랍을 발라놓은 듯 떨어지지 않았다. 퀸투스가 그 상황에서 어떤 행동을 취할지 알고 있었다. 그래서 테리우스를 원망할 수 없었다. 오히려 그 자신이 스스로가.......... 테리우스 너머에 퀸투스의 얼굴을 바라보기가 어려웠다. 다가서고 싶은데 스스로의 얼굴이 너무 추할 것 같아 갈 수가 없었다. 너무 늦었다고 퀸투스가 원망할까 두려웠다. 아니, 퀸투스 를 향해 웃어 줘야하는데 그의 아픔이 너무 절실하게 느껴져 이아로스는 멍하게 서 있을 뿐이었다. "......이아로스...." 잔뜩 쉰 목소리가 이아로스를 불렀다. 번개를 맞은 사람처럼 이아로스는 경련했다. "이아로스.........이리와,,," "............." 최면에 걸린 사람처럼 이아로스는 목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걸어가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였다. 익숙한 손이 얼 굴을 감싸안지 이아로스는 소중하게 그 손을 잡았다. "난 괜찮아. 그러니까 울지마, 이아로스....괜찮아,, 이아로스.............. 이아로스.......이아로스......이아로스........" "늦어서 미안합니다. 퀸투스..." 안토니우스는 두 사람을 지켜보다 살며시 태우를 안고 나왔다. 문 밖에 서있던 옥타비아누스의 눈동자가 순간 미미하게 흔들렸다. "제 탓이에요." "테리우스...." 뒤에서 안은 팔로 몸을 돌려세워 품에 안았다. 차라리 울기라도 한다면 좋으련만. 죄책감에 괴로워하는 테리우스를 안으며 안토니우스는 씁쓸합을 접을 수 없었다. 뒷 덜미를 감싼 손에 뜨거움이 범상치 않았다. 장독이라도 오르는 가 싶어 테리우스를 번쩍 안아 들었다. "이런 열이 심하군! 옥타비안! 쉴 곳을 안내 해줄 수 있겠나? 의사를 다시 한번 부탁하네." 옥타비안...... 옥타비안....그 입술에서 얼마 만에 듣는 이름이지?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의 말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옥타비안' 이라고 불리는 순간 옥타비아누스의 눈동자가 바람이 이는 숲처럼 출렁이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무섭게 뛰던 심장이 그의 품에 안긴 검은머리의 사내를 보는 순간 차갑게 식어갔다. 목소리가 갈라지지 않을까 걱정되었다. 꽉 다문 입술에서 피 맛이 느껴졌다. 어째서? 7년 만에 듣는 그 이름이...... 그토록 불러지기를 원했던 그 이름이 내 심장을 이렇게 관통하는 것이지? "......이쪽입니다..." 이름을 불러주었던 그 목소리도, 안아주었던 그 강인한 팔도, 햇살같던 그 금빛의 미소도, "편히 쉬십시오. 누님께는 연락해 놓겠습니다." .......................나를 향한 것이 아니야. "................부탁하겠네..." 안토니우스는 침상에 테리우스를 뉘여 놓고 방문 앞에서 인사를 하고 돌아서는 옥타비아누스를 배웅했다. "곧 아테네로 떠날 예정이네." "아테네?" 되풀이하는 목소리에 흔들림을 무시하며 안토니우스는 다시 말을 이었다. 젖어드는 녹색의 눈동자에 하마터면 손을 뻗을 뻔했다. 아테네로 돌아간다는 말에 충격을 반은 듯한 옥타비아누스는 평소와 다른 서글픈 달빛 같은 안토니우스의 미소를 눈치채지 못했다. 마음을 묶어 놓은 사슬 한 겹이 순식간에 풀어져 내렸다. 그 간의 맹세를 잊을 수는 없다. 안토니우스는 조금 열렸던 마음의 빗장을 단단히 부여잡았다. " 동방을 살펴야지. 그곳이 좀 시끄럽다는 보고가 계속 올라오고 있거든. 자리를 너무 오래 비워놓은 것 같아. 곧 파르테아도 원정을 시작해야지. " ".....언제?" " 조만간. " 안토니우스는 차분히 감정이 사그러가는 녹색의 눈동자를 마주했다. 그래. 그래 야지, 옥타비안. 언제나 차분함을 잃지 말고. 이제부터 시작이야. 넌 현명하니까 잘 할 수 있을 거다. 동방은 내가 맡는다. 너는 네가 해야할 일을 하면 되는 거야. 그리고...그 다음은 우리의 결전이겠지...... "....안전한 여정이 되길 포세이돈에게 기도하겠습니다. 누님을 잘 부탁드립니다. " "그러지...잘 있게. 카이사르 미노르." "...................네." 뭔가 항의하듯 입술을 달싹였지만 시리도록 푸른 눈동자에 그만 말을 삼키고 편히 쉬라는 인사 만을 남기고 옥타비아누스는 돌아섰다. 폭풍우가 이는 바다처럼 한 순간 거칠게 타오르던 푸른 눈동자가 옥타비아누스의 뒷모습을 쫓고 있었다. "Salve, Pulcher puer...... (안녕, 아름다운 소년) Salve, Octavian....... (안녕, 옥타비안) " # 5 아테네. 로마에서 그리스까지. 길고 긴 여정이었다. 나지막한 구릉이 유연한 곡선을 그리며 흐르고 있는 아테네의 외곽 평야에서 태우는 정신 없이 풍경에 도취되어 있었다. 아테네에 도착 한지 얼마 되지 않아 본격적으로 카피토에게 승마를 배웠고 그 성과로 아테네 외곽으로 직접 말을 몰고 나왔다. 말 등에서 내려와 허리 높이 까지 오는 꽃밭에서 태우는 연신 주위를 향해 감탄사를 흘렸다. "이 곳은 아테네 인들이 크세르크세스(페르시아 왕, "아드리안의 네 딸"들에 나옴)를 격퇴시킨 평야지. 아테네는 기병을 활용할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을 가지고 있었고 전차를 사용 했던 파르테아는 대패했다........ 지금은 전혀 치열했던 전쟁터 같지 않지 않나? " 하나가득 붉은 들꽃들이 점점히 퍼져있는 아름다운 평야에서 동서양의 문명이 충돌하였단 말이지...........그들의 역사는 남아 이렇게 회자되지만 흔적은 남아있지 않다. 서양 문화의 뿌리가 되는 그리스 문명과 동양의 페르시아는 지금으로 부터 500년 전에 운명적인 충돌을 하였고 그 땅에는 세월이 흘러 풀만 무성하다. 시간이란 잔인하게 모든 걸 덮어버리는데..................... 지금 어느 시간 위에 서 있는 것일까 자문하지만 돌아오는 답은 없다. 큰 것은 가슴께 까지 대개 키가 허리보다 높은 붉은 꽃이 벌판에 가득 피어있었다. 붉은 꽃잎 은 튤립처럼 두껍지 않고 아주 얇다. 비단에 그린 유리잔 같다고나 할까? "무슨 꽃이죠? 굉장히 붉은데..............." "파파베라. 일명 전장의 꽃. 시체에서 흘러나오는 피를 먹고 자란다고 하지. 수 백년 전 전투에서 죽어간 병사들의 피를 아테네께서 굽어 살펴 아름다운 붉은 꽃으로 피게 하 셨다는 전설이 있지... 그리고 어김없이 큰 전투가 끝나면 개양귀비가 핀다더군" 홀린 듯이 한송이를 따다 코 끝으로 가져갔다. 신비롭고도 요염한 향기가 아스라이 느껴졌다. 빛이 내려 앉은 꽃잎은 루비처럼 빨갛게 불타 는 것 같다. 꽃송이의 주위 공기마저도 모두 따뜻한 열기로 채우는 것 같다. "어이, 그거 유독 식물이라고.... 즙을 내어 마시면 죽을 수도 있어! " 화들짝 놀라 꽃을 던져버리자 안토니우스가 호쾌하게 웃는다. "그런 건 진작 말했어야죠!!!!!!!!!!!" "푸후훕......... 미안. 하지만 말이야, 이 꽃이 전장의 꽃이라고 불리는 진정한 이유는 따로 있지...... 정말 신이 내린 축복인지도 몰라........" "독이 있다면서요!!!!!!!!!!" 태우가 놀라 던져버린 꽃을 주워 꽃잎을 뜯어 입 속에서 잘근 씹는 안토니우스를 보고 기겁을 해서 소리 질렀지만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웃기만 했다. "전쟁에서 수많은 병사들이 고통 속에서 죽어가지. 잘려나간 팔다리, 흘러내리는 내장, 피웅덩이 속에서 고향 땅을 그리며 죽어가......" "................" "그런데 이렇게 이 꽃잎을 씹으면 그들에게 신의 마지막 축복이 내려진다. 고향에 두고 온 가족, 사랑하는 여인의 품에서 죽는 환상을 보게되 지............그는 마지막 레테의 강물을 마시기 전에 꿈을 선사 받아, 이 꽃잎 한 장에 말이야............." ".............." " 정말 사신의 마지막 선물이지....." 허리에 조금 못 미치는 키를 파파베라는 그 전설을 증명하던 새빨갛게 피어 있었다. 그제 서야 태우는 그 커다란 꽃잎을 가진 붉은 꽃이 어떤 식물인지를 알 수 있었다. 양귀비. 그 열매즙을 응고시킨 것이 바로 아편. 잎사귀와 꽃잎에는 환각과 마취제의 성분이 있다. 그래서 별다른 치료를 받지 못하고 죽어 가는 병사들에게 양귀비 한 송이는 이승에서의 마지막 축복, 저승으로 가는 안락한 길을 선사한다. 여전히 양귀비를 씹고 있는 안토니우스에게 다가가 꽃을 빼앗아 던져 버렸다. 생아편이라 순도가 높지 않을테니 꽃을 통째로 씹는다해도 별 탈은 없겠지만.......... 이천 년 후 이 꽃에서 나온 아편이라는 괴물이 수백만의 목숨을 앗아가는 전쟁을 일으키고 마약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사람들이 괴로워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태우에게 조금 전까지 아름다웠 던 꽃이 독사처럼 느껴졌다. 아직은 먼 미래의 이야기. 지금 양귀비는 신이 내린 선물. 고통을 잊게 해주는 마법의 약이다. 고대에 최고이자 유일한 마취제이자 안정제. 하지만 수많은 공익 광고에 길들여진 태우는 안토니우스가 아무렇지도 않게 아편(정확히는 양귀비의 즙일 뿐이지만)을 먹는 모습이 곱게 보이지 않았다. 팩 돌아서서 먼저 말고삐를 잡고 걸어 가버리는 테리우스를 보고 안토니우스가 솜씨 좋게 말을 몰아 그를 낚아챘다. "우아악! 무슨 짓이에요! 위험하잖아요!!!!!!!!!!!" "............흐흐흐흐 이 파파베라라는 꽃은 말야...한가지 효능이 더 있거든?? 우리 확인해 보지 않을래? " 호기심이 고양이를 잡는다는 말이 있다................. "...........뭔데요? " ".......이런거야! " 파고드는 혀 속에 숨겨진 꽃잎이 입안으로 들어와 혀를 얼얼하게 만들었다. 안토니우스의 집요한 혀 놀 림이 마지막 꽃잎까지도 붉은 즙으로 만들어 버리고 나서야 태우의 입 속에서 빠져나왔다. " 이게 무슨 짓이............어...........하아.......당,,신!!!!!!..........." 설마. 이런 거였다.............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이고 제 발등을 제 도끼로 찍는 다는 말이 맞다. 심각하지는 않지만 점점 나른해져하는 몸과 몽환적인 정신, 미미한 열기가 양귀비의 즙이 어떤 의도로 쓰이는 지 몸소 깨닫게 혜준다. 수많은 전쟁터를 겪으면서 면역이 되었는지 아니면 다른 곳에서 만성이 되었는지 더 빨 리 꽃잎을 씹은 안토니우스가 먼저 흥분을 해야 이치에 맞건만 안토니우스의 계속되는 키스에 어쩐지 태우의 앞섶만 팽 팽하게 긴장감을 더해 가고 있었다. ' 윽 당했다!!!!!!!!!!!! ' 태연하게 허리를 쓸어 내리는 안토니우스의 손이 얄미웠지만 일단 급한 일부터 처리해야하기에 태우의 팔은 곧 곧게 뻗은 어깨위로 둘렀다. 혀끝에서 돌고 있는 양귀비의 향에 취한 듯 몸에서 힘이 하나 둘씩 빠져나가 안토니우스에게 기대야했다.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들리 는 가 싶더니 그대로 미려 넘어져 한창 흐드러지게 핀 붉은 양귀비꽃 사이로 파묻혀 버렸다. 양귀비의 즙이 보여주는 환상인지, 하늘을 덮고 있는 양귀비꽃의 향내의 힘인지, 절정에 다다르는 순간 태우는 온화하고 선명한 분홍빛이 시야를 가득 매우 는 것을 보았다. . . . 하늘이 푸르다.............고 생각했지만 어느 쪽이라고 굳이 말하지 않아도 서쪽 하늘이 불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원망스러운 양귀비 즙 색깔이군............휘파람을 불면서 말에게 풀을 먹게 하는 안토니우스는 곱지 않은 눈으로 노려보자 어깨가 움찔하는 것 같더니 절대 뒤돌아보지 않는다. 그렇겠지. 양심있고 명망있는 장군님이시라면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정도는 아셔야지....... "...................." "...흠흠 이제 돌아가야지?................" " 뭐 타구요? " 말에 가시가 박혀 있는 것을 아는지 안토니우스가 멎쩍게 웃었지만 그렇다고 즈금 상태의 허리로 말을 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원래 오늘의 목표는 멋지게 휘페리온(태우의 말이름)을 타고 아테네 외곽을 돌아오는 것이었는데 중간에서 붉은 양귀비에 혹해 옆 으로 샌 것이다. " 흥! " 풀을 뜯어먹는데 정신이 없는 휘페리온을 잡아 차마 올라 타지는 못하고 고삐를 쥐고 어스름히 어둠이 내려앉는 아테네로 향했다. 뒤에서 어기적 어기적 역시 말을 끌고 오는 안토니우스가 오늘따라 심술 맞게 느껴진 적은 없었는데..... 게이 바에 돌아다닐 때도 엑스터시니 약이니 이런 것은 전혀 손 안댔었는데 처음으로 맛본 미약의 강렬함이 아직도 몸의 구석에 남아 있는 것 같았다. " 파파베라는 말이야...." 다시 나오는 양귀비의 이름에 눈살을 찌뿌려도 아랑곳 않고 한가롭게 꽃을 따며 안토니우스는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 하루 밖에 피지 않지.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 단 하루의 삶에 파파베라는 그녀가 겪은 모든 흔적을 새겨 넣는 다는 거야......... 꽃이 피기 전에 연약한 꽃잎이 비좁은 꽃받침 속에 갇혀있는 동안에 생긴 듯한 구김살이 꽃이 다 질 때까지도 그대로 있다는 거야......... 단 하루, 길어야 3일 밤 동안이지만 말이야............지난날 겪어야했던 비운의 그림자가 한 여인의 아름다움에 미묘한 음영과 깊이를 더하듯이............ " 안토니우스는 조심스럽게 태우의 눈앞에 손을 펴 보여졌다. 작은 구김이 여린 꽃잎에 안타깝게 놓여 있 었다. 처음 양귀비를 봤을 때의 그 강렬한 붉은 빛이 한업이 가냘프게 보였다. 이상한 일이다. 조금 전 까지 는 분명, 마약이니 뭐니. 그 붉은 빛에 현혹되어 그 연약함을 몰랐는데............... "........ 이 섬세한 상흔이 오히려 연약한 이 꽃을 한결 애처로운 마음 없이는 결코 바라볼 수 없게 하는 거야........ 그 런데 그 연약함 속에 무서운 독을 품고 있다니...놀랍지 않나? 장미의 가시 정도는 차라리 애교스럽지......... 애처로울 정도로 유약해 보이는데 말이야.........그 녀석도 그렇지.......후훗 " ".......아름다워요........." "........그래 아름답지................내가 아는 어떤 사람도 이 파파베라를 무척 닮았어...... 여리고 유약하지만 누구보다 강한 심지를 갖고 있다........." "................" ".......하지만 난 그를 파파베라처럼 단 하루만에 지게하고 싶지 않아............ 가련한 꽃으로 남게 하고 싶지 않아................" "............." ".............세상에서 가장 오래오래 아름답게 피게 하고 싶어.............." . . . . 누구냐고 묻지 않았고 물을 수 없었다.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너무너무 싫고 서글픈. 괴롭고 안타까운 표정이 보는 것 만으로도 치가 떨릴 만큼 마음이 아팠기 때문이다. 어째서 이렇게 오싹할 정도로 슬프고 불쾌하고 괴로운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돌아오는 길에 나와 안토니우스는 더 이상 파파베라에 대한 이야기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조용한 안토니우스의 얼굴에 떠오르는 그림자를 보았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 날밤 꿈을 꾸었다. 양귀비가 가득 찬 들판에 나는 안토니우스와 손을 잡고 걷고 있었다. 그리고 한 발짝 옆에 그가 같이 걷고 있었다. 검고 풍부한 검은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옥타비아누스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비취색의 아름다운 눈이 다정하게 웃고 있어서 나는 눈물이 났다. ............................ 멀리서 혜준의 피아노 소리가 들렸던 것도 같다. # 6 ** 지중해 크루즈 투어는 워낙에 돈이 많이 들기 때문에 먼 훗날의 일로 넘어갔었는데 갤리 선을 타고 신화의 땅 아테네를 밟을 줄이야. 오디세우스라도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고향을 떠나 전장으로 나가던 그의 심정을 절실히 느끼고 있었 다. 오디세우스가 20년 만에 귀향했던 것처럼, 그의 아내가 20년을 한결 같이 그를 기다렸던 것처럼 언젠가 돌아갈 수 있을까....... 거대한 스케일의 시뮬레이션 게임의 주인공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그렇다하더라고 그래픽으로 탄생시킨 가상의 공간과 바람의 소리마저 느껴지는 실제의 풍광을 비교한다는 것은 대자연에 대한 크나 큰 실례라는 생각이 들었다. 에게 해의 녹색 바탕에 점점이 뿌려진 회갈색의 섬들이 파도에 부딪쳐 아름다운 그림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보석 같다. 산산히 부서지는 햇살은 다이아몬드 수만 개를 뿌려놓은 것처럼 빛났다. 푸르게 요동치는 포세이돈의 바다, 천공을 가르는 아폴론의 뜨거운 태양, 에레보스의 바람, 비옥한 데메테르의 젖이 흐 르는 땅.............. 아테네는 그리스 로마의 신들이 정말 살아 숨쉴 것 같은 신화의 땅이었다. 꼭꼭 갇혀 지냈던 로마에서와는 달리, 아테네는 말 그대로 자유의 땅이었다. 안토니우스는 동방의 군주였고, 아테네의 모든 것이 그에게 경의를 표했다. 짐작했던 것 보다 훨씬 거대한, 다른 사람(이탈리아반도는 당시 옥타비아누스의 영향권)의 세력에서 느끼지 못했던 안토니우스의 강대한 군사력과 그 영향력에 태우는 진심으로 감탄해야했다. 퀸투스가 농담처럼 마음만 독하게 먹으면 무력으로 로마를 함락시키는 것이야 문제도 아니라고 했던 말이 거짓이 아님을 아테네 앞을 가 득 메운 위용을 자랑하는 군함들과 평야에 주둔하고 있는 절도 있는 육군이 여실히 증명해 주고 있었다. 안토니우스의 피보호자라는 묘한 신분은 군대 조직에서 혼란을 일으켰지만 카피토의 엄중한 보호가 따라다녔기에 시비를 거는 군인은 없었고 실 제로 태우는 전혀 군권에 관여하지 않았게 때문에 시비에 걸릴 일도 없어서 곧 옥타비아와 다르지만 비슷한 오묘한 위치로 자리 잡았다. 로마에서 돌아오는 길에 옥타비아와는 같은 기함에 타지 않아 그녀를 만날 기회는 그다지 없었다. 대온천에서 사 건 때 옥타비아누스에게 도움을 받았던 일에 그녀에게 감사를 표하고 싶었지만 아테네로 항해하는 준비에 어영부영 시기를 놓치 고 말았다. 여전히 옥타비아와는 뭔가 껄끄러운 것이 있는 채 아테네까지 왔던 것이다. 하지만 태우의 기우를 비웃기라도 하듯 옥타비아와 친해진 계기는 엉뚱하게도 클레오파트라의 도움으로 이루어졌다. " 누가 왔다고? " 황당하다는 듯한 퀸투스의 물음에 앞서 걸어가던 이아로스는 그 답지 않은 뭐 씹은 표정으로 퉁명스레 대답했지만 내용 은 전혀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 이집트의 여왕 클레오파트라의 사자가 도착했다고 합니다. 뭐 옥타비아님께 혼례를 축하하는 선물을 가지고 왔다고 합니다만..... 지금 안토니우스님께서 맞이하고 계십니다. " 이집트에서 사신이 왔다는 이야기에 파르테논 신전 구경을 계획하고 있던 퀸투스는 안토니우스에게 호출되었고 태우는 호기심에 그 뒤를 따 라 나섰지만 이아로스의 저지로 안타깝게도 그 자리에 서지는 못했다. 처음으로 보는 외국의 사절이 아닌가! 게다가 선물을 바리바리 싸들고 왔다는데 호기심이 동하지 않는 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리고 클레오파트라라는 이름은 그리 작은 무 게를 가지지 않았으니까. 사신이 있는 자리에는 가지 못했지만 그들이 가져왔다는 공물을 구경할 수 있었다. 이집트에서 보내왔다는 하례물은 생각했던 것 보다 굉장히 화려해서 방안에 가득 빛을 밝혀 놓은 듯한 착각을 들게 했다. 요색 찬란한 비단과 진주, 눈이 어지러울 정도로 빛나는 보석과 황금의 장신구들....... 투탕카멘의 무덤에서 나온 것들은 지금 눈앞에 펼쳐진 것들에 비하면 새발의 피였다. 이집트의 여신 중에 하나인 암소 형상의 흑요석 조각상의 눈은 루비로 장식되어 있었다. 심기가 불편하다는 소문이 이곳 까지 돌고 있는 사람의 선물치고는 조금 과한 감이 없잖아 있었다. " 당신! 여기가 어디라고 함부로 들어오는 거야! " 검은 레게머리 비슷한 가발에 황금 머리띠를 메고 민망할 정도로 속살이 비치는 원피스를 입은 여인이 오만하게 소리쳤다. 표독스럽게 외치는 모습에 움찔했지만 태우는 곧 그녀를 차분히 관찰 할 수 있었다. 어딜 봐도 그림 속이나 영화 속에서 갓 튀어나온 듯한 이집트 여성이었다. 사신의 일행인가....... " 아..그저 구경이나 하려고 한 겁니다. 실례했습니다. " " 흥! 말이나 달리고 쌈질이나 할 줄 아는 너희 라티노(로마인 이라는 뜻)들에게는 진귀한 물건일 수 밖에! 여왕님도 어쩌자고 이런 보물들은 이런 말도 안되는 이유로 갖다 바치는 거야! " 눈 앞의 여인은 겉으로 한 20대 초반 하는 짓을 봐선 십대 후반으로도 느껴졌다. 짙게 그린 눈화장 때문에 나이가 들어 보였지만 어쩐지 철이 없는 것이...... " 내 말 듣고 있는 거야!!! 네 주인은 대체 네게 뭘 가르친 게야! " 뭐라고? " 노예 주제에 그 건방진 눈은 또 뭐야!! 하여간 라티노들은 노예 훈련을 어떻게 시키는 건지...원....넌 어디서 왔냐? " "..로마에서...." 한국이라고 해봐야 알리도 없고 로마에서 아테네로 온 것은 사실이니까..라고 생각했지만 여자의 표정이 점차 일그러지는 것이 좋 은 조짐은 아닌 듯 싶었다. " 호오- 그렇다는 거야? " "?" " 그럼 그렇지...그런 건방지고 주제도 모르는 여자의 노예였군! " "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 " 네 주인을 말하는 거다, 지금은 이렇게 호사를 누리지만 곧 피눈물을 뽑게 될걸? 우리 여왕님께 도전한 대가를 철저히 치르게 될 거야!!!!! 우리 여왕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는 주제에? " "당신 설마 옥타비아를 말하는 건가! " " 하! 제 주인의 이름을 막 부르다니 역시 그년의 노예답군! 머리카락은 지푸라기 같이 말라비틀어진 똥색이고, 강에 떠오른 흐리멍텅한 물고기 눈에, 젓가락 같이 빼빼 말라서 가슴이랑 등짝을 구분 할 수 없는 조그만 년이 감히 안토니우스 장군님곁에 설 자격이 있는 것 같아!!!" ".................." 한참 저 여자가 지껄이는 말을 듣고 보니 열이 올라오는 것이... "그분 옆에는 위대하신 라의 따님이자 이시스의 아름다움을 이어 받은 클레오파트라 프롤레마이오스 여왕페하뿐이 없다고!!!! 그런데 혼례 선물따위를 보내다니 여왕님께서는 어떻게 된 일이야! " " 듣자듣자 하니까 너 뭐라고 지껄이는 거야!!! 너 나이가 대체 몇이야!! 어디서 함부로 반말이야! 그리고 너 눈이 어떻게 되었냐? 옥타비아가 어딜봐서 물고기라는 거야! " 차악! " 아악!!!!!!! 무슨 짓이야!? " "건방지게! 뭐라는 거야 노예 주제에!!!!!!!!" 차악! 다시 날라 오는 채찍을 간신히 피하고 태우는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 서리가 내린다는 이야기를 실감해야했다. 쌔액- 하고 다시 날라 오는 채찍을 손으로 감싸 쥐고 당겼다. 분한 표정의 여자가 고함을 지르는 것을 들으니 핏물이 맺 힐 정도의 아픈 손이 잊혀질 정도로 통쾌했다. " 이것 놓지 못해!! 노예 주제에!!!!" "너 아까부터 자꾸 자꾸 노예 노예 하는데 네 눈 에는 내 팔, 다리 어디에 노예 팔찌가 있는 것으로 보이냐!!! 그리고 손님으로 와서 안주인의 욕을 하는 게 제대로 된 예절이냐? 너 몇 살이야!!!! " " 열...일..곱..아니 열 아홉이야!!!!!!!!!!!" 뭬야? 열일곱? 뒤에 갑자기 바꾼 말을 믿을 정도로 순진하지도 않다. 다시 보니 십대의 치기어린 얼굴이 드러난다...지금 10살이나 어린 애를 가지고.. 태우는 채찍을 놓고 꽉 잡은 소녀의 손목을 놓았고 그녀는 사나운 욕설을 하며 뒤로 물러섰고 끝없는 싸움이 시작되었다. " 나보다 열 살이나 어린 주제에 어디서 반말이냐! " "뭐야!! 너 거짓말하는 것만 배운 노예지!! " " 누가 노예라는 거야!!! 그리고 왜 시비를 거는 거야!! 채찍질을 하다니 내가 말이냐! " " 그 못생기고 건방진 주제에 감히 장군님의 처가 된 라티노 여자를 믿고 네가 날뛰는 모양인데! 나는 여왕님의 총애 를 받는 몸이다!!!!!!!!!!!1" " 누가 못생겼는데! 너보다 훨씬 우아하다! " " 흥! 게다가 두꺼비 같이 낮은 목소리에, 시체같이 비리비리 한 과부주제에! 여왕폐하를 근심하게 했단 말이야!!!" " 어딜 봐서 옥타비아가 두꺼비라는 거야!!! 옥타비아가 두꺼비면 클레오파트라는 도룡뇽이냐! " " 흥! 게다가 두꺼비 같이 낮은 목소리에, 시체같이 비리비리 한 과부주제에! 여왕폐하를 근심하게 했단 말이야!!!" " 어딜 봐서 옥타비아가 두꺼비라는 거야!!! 옥타비아가 두꺼비면 클레오파트라는 도룡뇽이냐! " '두꺼비?' '도룡뇽?'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는 방에 들어가려다 안에서 들리는 말소리에 발걸음을 멈췄다. 난데없이 두꺼비라니....옥타비아는 분명 자신의 이름이 같이 들렸기에 더없이 당황했고 안토니우스는 그 목소리가 테리우스라는 것을 알고 황당했다.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가 이상한 표정으로 문 앞에 서자 퀸투스와 이아로스도 문 안에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고 뒤에 있는 이집트 사절들은 핏기가 사라져 갔다. 그래도.... 안 쪽에서의 말다툼은 계속 되었다..... " 여왕님은 검고 탐스러운 대지의 머리색을 가지신 분이야! 저런 말라 비틀어진 풀쪼가리 같은 여자가 상대가 될거 같애!!! " " 뭐야! 맹물로 눈 좀 씻고 와라! 꿀색 같은 황갈색 머리가 얼마나 윤기가 흐르는데 내가 여기와서 옥타비아보다 예쁜 여자를 보지 못했다!!!! " "얼굴이 둥글둥글 한게 얼띠기 같고 이마는 체신머리 없이 좁고! 위엄이라곤 모래 한 알도 없는 계집이 감히 여왕님 눈에 눈물을 흘리게 하다니!!!!!!!! " " 그게 왜 옥타비아 잘못이야!!!!!!! 아무 여자가 홀리고 다니는 자식이 문제지!!!!" " 너 감히 동방의 군주이자 태양이신 분께 뭐라고 하는 거야!!!!!!!!!!!" " 동방불패인지 뭔지 알게 뭐야!!! 안토니우스는 안토니우스라고!!! " " 하여간 그 여자가 나쁜거야!!!" " 아내가 있는 남자한테 먼저 꼬리친 게 누군데!!! 코만 높으면 다야!! 그 여자가 코가 1cm만 낮았어도 세계 역사가 바뀌었을 거다! " "뭐!!뭤!!! 너 우리 여왕님이 코 이야기를 얼마나 싫어 하시는데!!! 이잇 " 촤악! " 흥! 아까 당한 걸 또 당할 줄 알았냐!!!!!!!!!!!!! " 채찍을 날린 소녀에게서 채찍을 빼어들고 의기양양하게 소리쳤다. 파랗게 질린 소녀를 보고 더욱 기세가 등등했다... " 너 사람 잘못 봤어!!! 당장 의사한테 데려다 줄 테니까 눈 치료부터 받아라! " ".....저...." " 이제 네가 뭘 잘못했는지 알겠냐! 잘 모르는 사람을 그렇게 함부로 말하면...." "...............테리우스." 한참을 설교를 늘어놓으려던 테우는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소녀가 파랗게 질렸던 진정한 이유를 알게 되었다. "....안토니우스?..............헉! 옥타비아...." 게다가 이아로스와 퀸투스, 그 뒤로 이집트 사신으로 보이는 자들까지 서 있었기에 태우는 피가 싸악 빠져 나가는 것이 느 껴졌다. 다 들은 것은 설마..... " .....너는 차르미안이 아니냐...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 " 장군님, 저 건방진 노예가 감히 위대하신 여왕님과 장군을 모욕하는 지라........" " 안토니우스, 그게 아니라 저 여자애가 이상한 소리를 해서...." " 내가 두꺼비라 구요? " 불쑥 튀어나온 말에 안토니우스도 테리우스도 그 소녀와 그들을 따라온 이들도 한결같이 굳어버렸다. " 옥타비아? 괜찮소? " ".....아니, 전 아무렇지도 않아요,,, 단지...푸훗 세상에.... 호호... 전 제가 두꺼비랑 비교될 줄은..호호호호호호!!!!!!!" 갑자기 방안에 울려 퍼진 옥타비아의 웃음 소리에 모든 사람들은 황망해했지만 옥타비아는 눈물까지 글썽이며 시원하게 웃고 있었다. 태우는 처음으로 웃는 그녀의 모습에 넋을 잃고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 저 옥타비아,,,그 건,,,저 애가 지어낸 얘기에요,,,아........저,,," "..후훗.. 테리우스라고 했죠? " "...네..." " 아까 나를 위한 변호 잘 들었어요....인상적이었어요,,, 도룡뇽이라니... 호호호호호호호호!!" 옥타비아는 계속해서 웃음을 그칠 줄 몰랐고 차르미안이라는 이집트 소녀는 얼굴이 시뻘게 졌지만 감히 안토니우스 앞이라 씩씩거리기만 할 뿐 나서지는 못했다. 처음으로 웃는 그녀였다. 안토니우스는 그녀의 웃음이 예전처럼 티없고 맑다는 것에 안도했다. 그녀는 여전히 순수한 시골 소녀 였다. "...웃으니까 보기 좋군, 옥타비아.... " " 아..죄송해요...제가 경우 없이....... " "아니오, 저 아이는 분명 그대에 대한 모욕을 했으니 어떠한 처벌을 내리던 그대의 재량에 있소..." "안토니우스 장군님............." 서슬이 퍼런 안토니우스 말에 차르미안은 무릎을 꿇고 부들부들 떨었다. 자신은 장군의 아내를 모욕했으니 지금 죽는다해도 구명해줄 사람은 없 다. 좀 전까지 들리던 그 여인의 웃음소리가 소름끼치는 사신의 비명처럼 느껴졌다. "...............고개를 드세요, 차르미안. 그녀를 벌한다면 테리우스 또한 그녀의 윗전을 욕보인 것이 되어 어려워질 듯하니 없었던 일로 넘어가 는 것이 어떨까요? 저는 정말로 오랜만에 재미있게 웃었습니다, 전혀 불쾌하지 않았으니 이쯤에서 접도록 하세요. " " 정녕 그대의 뜻이 그렇다면 따르도록 하지. 차르미안. 네가 한 짓은 내 부인이 관대히 웃음으로 풀어내니 나도 그만 넘어 가도록 하겠다. 하지만 기억해야 할 것이다. 나의 소유에 대한 모욕은 곧 나에 대한 도전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네 눈 앞에 이 자는 노예가 아니라 내 피보호자이다, 그에 합당한 예를 갖추어 대하도록 해라! " "아 예!!!! 소녀가 큰 실례를 했습니다..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조금 전까지 바락바락 대들면서 싸웠던 상대가 무릎을 꿇고 조아리자 태우는 당황했지만 곧 의연하게 사과를 받아들였다. 그렇지 않으 면 일이 더 커질 것 같기도 했다. "..아,,,뭐....나도 실례를 한 건 사실 이니까......" 한동안 차르미안의 절과 '죽을 죄를...'이 이어졌고 뒤에서 안절 부절 못하는 이집트 사절들의' 죽을 죄를...' 이 이어지 면서 안토니우스는 그들을 방밖으로 몰아 냈다. 차르미안과 이집트 사신들이 물러가고 장내에는 침묵이 맴돌았다. 태우는 옥타비아의 얼굴을 마주 볼수가 없어 고개을 숙이고 있었고 모두들 방금 전의 일들을 생각하는 지 아무 말도 없었다.. "큭.........큭큭큭큭....도룡뇽이라니....푸하하하하하!!!!!!!!!!!!!!!!!!!" 갑자기 퀸투스의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아로스도 삐져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하례품의 목록을 작성하고 있었고 안토니우스의 어깨가 들썩이기 시작했다. "도대체 코 이야기는 어디서 들은 거야? 큭큭,,,,,그녀 코가 진짜 크거든,,,,그래서 키스할 때 애먹고는 했는데.. 푸하하하하하 !!!!!!!!" "안토니우스!!!!!!!!!!!!! " 민망함에 소리쳤지만 시원한 황금빛의 폭소는 그칠 줄을 몰랐다. 이제 세 사나이는 저마다의 자세로 웃기에 여념이 없었고 살짝 돌아본 옥타비아도 빙긋이 웃고 있었다. 태우는 헐리우드 여배우들도 그녀보다는 아름답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테리우스? 나와 과일 먹으러 가지 않겠어요? " 처음 듣는 그녀의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어딘가 어머니가 생각났다. "네? " "...모두들 웃기에 정신 없는 데다 이 물건들을 정리하려면 오래 걸릴 거에요.. 나와 같이 가지 않을래요 ? " 처음 보는 그녀의 부드러운 미소였다. 그 미소에 그 동안 갑갑하게 심장을 눌렀던 찌거기가 녹은 것이 느껴졌다. "........네............" 태우는 여전히 정신없이 웃고 있는 세 사나이들을 뒤로하고 비구름인 걷힌 하늘처럼 미소를 짓는 옥타비아의 초대를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 7 " 옥타비아누스가 이혼했다며? " " 에? 결혼한 지 얼마나 됐다고요? " 태우는 비록 참석하지 않았지만 아테네로 오기 전에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가 그의 결혼식에 다녀 온 것을 떠올렸다. 그 때 상대가 섹스투스의 고모뻘이 되는 여자라고 해서 이아로스도 퀸투스도 가지 않아 어색한 분위기에 집을 지켰었다. 들리는 소문에는 서른이 넘은 노처녀라고 했었고 옥타비아누스가 아깝다며 안토니우스는 한동안 불평을 늘어놓기도 했다. "....뭐 섹스투스와 본격적으로 한판 하려는 거겠죠. 아니면 섹스투스를 자극해서 먼저 도발할 속셈이거나....." " 그렇겠지, 바보가 아닌 이상 그 결혼을 오래 끌지 않을 테니까. " " 왜요? " "원래가 무리가 있던 결혼이었죠. 나이 차이도 많이 나는 데다가 지참금도 형편없었고 옥타비아누스가 내전을 수습하느냐 출혈이 커서 그렇지 조금만 여유가 있었다면 이루어지지 않을 관계였습니다. 그리고 어차피 터질 전쟁이죠, 폼페이우스와는 " "그러니까 옥타비아누스는 자기 세력을 수습하는 동안 눈가림으로 섹스투스와 인척 관계를 맺은 건가요? 어차피 제거할 상대니까? " " 그렇죠, 정략결혼이란 것이....." 이아로스가 씁쓸히 눈을 후원 쪽으로 두었다. 그 곳에 머물고 있는 아름다운 여인도 정략결혼의 희생물이라면 그렇겠지. 말끝을 흐리는 이아로스에게 퀸투스는 빙긋이 웃으며 맞장구를 쳤다. " 그런 셈이지. 일단 적을 방심시키는 게 하니까. 역시 똑똑한 학생은 가르칠 맛이 난다는 말이야... 그리고 곧 리비아와 결혼한다고 하던데? " " 엑! 또 결혼을 해요? " 태우는 안토니우스에게 섹스투스와 옥타비아누스와 전투가 멀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얼핏들은 터라 곧 이아로스의 말을 이해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다시 재혼을 한다는 말에 정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자유롭게 이혼하고 결혼 할 수 있었던가! 이아로스는 태우와 다른 관점에서 놀람을 표시했다. " 리비아? 설마 네로의 아내 리비아를 말하는 건가요? 둘 사이에 아이들도 있을 텐데요? " " 뭐 네로와 옥타비아누스가 알아서 처리를 하겠지..........." 네로? 네로 황제는 아닐테고.....그 네로는 쿼바디스에 나오는 로마를 불태우면서 노래를 불렀던 사람이고....(앞 으로 한 60년 후 이야기이니) 지금 이야기하는 네로는 누구인지 생각해보려고 해도 저장된 기억이 없다. 고대 로마사를 전공할 것을..... 그런데, " 안토니우스는 뭐래요? " "............" "..........." " 뭐에요? 왜 그렇게 빤히 쳐다봐요? " "................내 생각에는 테리우스 네가 알아보는 게 빠를 것 같은데...." " 동감입니다. 장군님의 심기가 어떤지는 테리우스가 더 잘 알텐데요...." "....무...무슨 소리를 하는 거에요? 내가 무슨 장희빈이야? " " 장허비? 그게 뭡니까? " " 그런게 있어요..." " 아니면 아닌 거지..왜 정색을 하고 그러시나...." "...됐어요..." 두 사람은 여러 가지 면에서 여전했다. 진심으로 다행이라고 아직 태어나지 않으신(지금은 기원전 38년이니까) 예수님께 감사했다. 아직 성모 마리아도 태어나지 않 았을 때니까. 무슨 말을 나누다가 닭살 돋는 투닥 거림을 시작하는 두 사람을 보고 가볍게 한숨을 내쉰 태우는 조용 히 일어나서 후원으로 향했다. 오후 햇살이 은은하게 내리쬐는 후원에는 이미 손님이 있었다. " 어머, 테리우스? " " 안녕하세요, 옥타비아" 부드럽게 웃으며 맞아주는 그녀의 모습을 보면 여전히 죄책감이 들었지만 그녀가 거짓 웃음으로 맞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태우는 그녀 에게 더 미안해했다. 옥타비아는 수틀을 내려놓으며 며칠이 지나도 어색한 표정으로 웃고 있는 테리우스에게 자리를 권했다. " 뭐 하세요? 제가 방해가 된건가요? " " 아니에요. 옥타비아누스에게 줄 토가를 손보고 있었어요. " 짙은 녹색의 비단에 금빛과 적색의 실로 곡선과 직선이 간간히 섞인 기하학적인 수를 놓은 토가는 정말 멋스러웠다. 검은 머리에 녹색눈을 가진 그에게 무척 잘 어울릴 것 같았다. 엉겹결에 손까지 떨어가며 부드러운 비단을 조심스레 만지자 가늘게 웃는 그녀의 목소리에 황급히 손을 떼고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 하나 만들어 드릴까요? " " 네? 아니..저... 그러니까,," 사실 부드러운 비단의 촉감을 느끼면서 하나 있었으면 하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정성이 가득한 물건이 과하다고 생각했다. 당황해서 버벅거리는 태우 에게 옥타비아는 어차피 할 일도 없으니 찬찬히 수를 놓으며 된다고 웃으며 말했지만 황공하기는 마찬가지였다. " 여기 과일즙 한 잔 들어요. " "....네, 잘 먹겠습니다. " " 당신도 머리가 검으니까 녹색이 어울릴까요? 아니 그것보단 피부빛이 특이하니까 좀 더 붉은 빛이 도는 것이 어울리겠어요! " " 아..하하..." 당황한 듯 웃음을 흘리는 테리우스를 옥타비아는 가만히 바라봤다. 그는 미워 할 수 없는 이상한 사람이었다.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 같은 초월감. 소름끼치던 로마의 생활에서 벗어나, 따뜻한 바람이 감싸주는 아테네의 아름다운 자연 풍광은 지친 옥타비아의 심신을 위로해주었다. 동방의 일을 오래 제쳐둔 뒤라 속주를 단속하느냐 바쁜 안토니우스 때문에 옥타비아는 홀로 지내는 시간이 많았고 아테네에 온 뒤로는 안토니 우스의 태도도 변해서 그녀는 점차 안정을 찾아갔다. 안토니우스는 여전히 거리를 두고 그녀를 대했고 더 없이 절도 있는 모 습만을 보였기에 서글픔과 서운함이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옥타비아는 천성에서 타고난 자애로움과 현명함으로 정숙한 부인으로 써의 자리를 다지고 있었다. " 그런데...이 토가 옥타비아누스에게 전한다고 했는데 누가 로마로 가나요? " "이번에 동생에게 일이 있어서 안토니우스님께 허락을 받고 로마에 가게되었어요." " 아....재혼한다는 것 말이죠? " "네,, 들었나요? 옥타비안이 결혼을 또 한다네요. 아직은 철없는 어린애인데..." " 아 네..." '아마 지중해 세계의 절반을 다스리는 집정관에게 철이 없다고 하는 사람은 옥타비아 당신밖에 없을걸요..... ' 달콤한 과즙과 함께 속내를 삼키며 태우는 잔으로 표정을 가려야했다. 역시 누나는 누나인 가보다. 태우는 냉랭했던 옥타비아누스가 옥타비아 앞에서 귀엽게 웃는 모습을 상상해보려 했지만 어설 프게 애교를 떠는 혜준만 생각났다. " 옥타비안이 두 번째 결혼이라고들 하지만 지난번에는 13살이나 만은 연상에 이번에는 또 아이가 있는 부인이래요.. 미망인도 아니고 이혼했다고 하던데......정략결혼이라는 게 마음에 걸려요......옥타비안은.....그런 것 하지 않았으면 했는데.........." 점차 사그러드는 목소리에 묻은 쓸쓸함은 비단 옥타비아누스에게만 향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옥타비아는 어느새 동생을 끔찍이 생각하는 누나모드로 돌입하여 '옥타비안'을 연발했다. 옥타비안...옥타비안? " 옥타비안? " "네, 옥타비안은 아명이에요. 우리는 그 애를 옥타비안이라고 불렀어요. " " ...우리는?" 멍하게 되묻는 태우에게 부드럽던 옥타비아의 미소가 한층 깊어지고 풍부해졌다. " 네, 우리는요.... 옥타비안은 이름을 줄여 부르는 것을 무척 싫어했는데, 안토니우스님이 그렇게 부르고 나서는 투정이 거짓말 같이 사라졌어요. " " 안토니우스와... 가까웠나요? 아 이건 그러니까...주제넘은 질문이었죠..." "아니에요.. 그 분은 우리 남매의 태양이면서 동시에 우리를 지켜주는 울타리셨죠. " "................" "그런데,,,,그 모든 것이 큰 할아버님이 횡사하신 후 달라졌어요..... 모든 것이...거짓말처럼,,, " " 옥타비아...." 그녀에 눈에 어린 눈물이 녹색에 비단에 검은 얼룩을 만들었다. " 아이참, 나도 주책이네....오랜만에 동생을 만나려니까 가슴이 설레서 그런가봐요. " " 내일이 출발이죠? " "네.........곧 전쟁이 터질 꺼라는 흉흉한 소문이 돌고 있어 만류하는 사람도 있지만 가봐야 할 것 같아요. " " 괜찮을 거에요, 옥타비아누스가 반드시 이겨요. " 확실하다, 책에서 봤으니까. "네? 후후, 말씀만으로도 고마워요. 이번 전쟁에서 승리하는 자가, 안토니우스님과 전쟁을 치를 거라고들 하더군요." " 그건! " " 나도 알고 있어요. 규방에만 박혀 있어도 들리는 소문을 듣고 있어요. 난 나쁜 여자에요. 매일 신께 기도 드려요... '아, 저의 사랑하는 남편에게 영광을 주소서! ' 라고 빌고 나서 똑같은 목소리로 ' 아, 저의 소중한 동 생에게 영광을 주소서! ' 라고 기도를 드리니 신께서는 저를 조소하시겠죠..." "옥타비아........." "그 양극단 사이에는 가운데 길이 절대로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부질없이 나는 기도해요. 어리석게도 두 사람 사이의 조정자가 되어 평화를 여전히 바라고 있어요. 그래서 나는 로마에 가요. 옥타비안을 마지막으로 말리겠어요. " "...꼭 이루어지길 빌어요. 진심이에요..." 옥타비아는 불안한 표정을 밀어내며 환하게 웃었지만 태우는 겨우 웃는 얼굴을 보일 수 있었다. 여자의 직감이란 괴로움 것일 수록 민감하고 무섭도록 정확한 것이었다. 이튿날 옥타비아는 모두의 환송을 받으며 배에 올랐다. 그녀는 이상할 정도로 심장이 두근 거리고 알수없는 불안함을 느껴야했 다...... 가슴 한 구석에서는 지금 떠나지 말라는 경고가 들려왔다. 지금 이 곳을 떠나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것 같은, 안토니우스를 다시는 보지 못할 것 같은 그런 고약한 생각이 들었다. 잠깐, 아주 잠깐 동안 헤어지는 것인데도 안토니우스의 모습이 갑자기 사라질 것처럼 희미하게 보였다. 다시 아테네로 돌아올 것이라고 마음을 다잡아 보지만 두근 거림은 쉬이 가라앉이 않았다. 옥타비아는 평화라는 한 송이의 희망을 가슴에 담고 로마로 향했지만 그녀의 그 가슴이 산산이 찢어지 는 날은 그리 멀지 않았다. # 8 " 옥타비아누스랑, 옥타비아 랑 다 옛날부터 알던 사이지요? " 태우는 무릎을 베고 누운 안토니우스의 귀 청소를 해주며 지나가듯 물었다. "아얏! 좀 살살하지......" "말 돌리지 말아요. 안 움직이면 되잖아요. 그냥 아는 사이 아니지요? " 꼭 대답을 듣고 말리라고 다짐하며 태우는 귀이개라는 희대의 발명품을(?) 손에 들고 안토니우스를 협박(?)했다. 어디서 누가 욕을 하는 지 귀가 간지러워 못 견디던 태우가 아테네의 보석 세공사를 불러다 겨우 설명을 해서 얻어낸 전리품이었다. 처음 세공사에게 그림까지 그려가며 용도를 설명했지만 세공사가 진상한 순금에 보석으로 덕지 덕지 치장된 귀이개를 가장한 국자(?)를 받게 되었다. 놀란 태우가 더욱 열심히 설명을 해서 황금과 루비를 고집하는 세공사를 꺽고 순은에 끝에 사파이어와 터키석 조각을 둘러 박는 것으로 타협을 봤다.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비싼 귀이개이리라. "아아,,,시원하군,,,," "안토니우스............." "아얏! 그래 당연히 알지,,,알았다,,말한 다니까.. 내가 카이사르 임페라토르 밑에서 있었잖아...." 율리우스 카이사르(쥴리어스 시저) 의 조카 손주들이니까 충분히 볼 수 있었겠지만 단순히 그 것만이 아니라는 것을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 안토니우스에게 옥타비안이라고 불리던 사내. "흐음............전에 보니까 옥타비아누스 진짜 잘생겼던데... " "어릴 땐 더 예뻤지...후후............ 아얏!...살살해줘,,," 그야 정말 한눈에 반할 만큼 아름답다고 생각은 했었지만 막상 안토니우스 입에서 그 소리가 나오자 마자 손이 흔들리는 건 무슨 이유일까. "흐음..........사이 나빴어요? " 그 반대였겠지........ "글세..." "에이. 솔직히 이야기 해봐요......." 목소리가 떨릴까 아무렇지도 않게 목청을 높였다. "후훗" 어째 말하는 폼새가 점점 남편을 추궁하는 부인 네를 닮아간다고 느꼈지만...이런 것이 베갯잎 송사라는 것 인가...한심한 마음도 들었지만 지금 태우의 짐작이 사실이라면, 이전에 공부했었던 고대 로마사를 다 잊어버린지 오래였다. 책이란 것이 수 십년에 걸친 사건들도 단 한 줄에 적어버린 것이라 그다지 도움도 되지 않았고 어느 샌가 고대라는 시 간에 동화되어 역사라는 관념이 사라져 버린 탓이다. 그리고 지금의 사건들이 그가 알고 있던 역사와 얼마나 많은 차이가 나는지.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의 관계는 그가 역사책에서 외었던 것처럼, 영화로, 소설로 보았던 것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생각하기도 싫은 그 날 저녁의 옥타비아누스가 눈이 시리도록 밟히는 이유도 태우는 알고 싶었다. 옥타비아가 슬프게 추억하는 그들의 진실을 알고 싶었다. 단순한 호기심인지 아니면 어떤 감정이 깃들 어 있는지 정말 알 수 없었다. 이별을 이야기하는 잔잔한 그들의 대화가 생생하게 기억이 나는지 알고 싶었다. 그 날밤 돌아서는 옥타비아누스를 향해 나즈 막히 읊조린 이름이, 그 의미가 생각났다. -Salve, Pulcher puer...... Salve, Octavian......." 공허하게 공기 중으로 흩어지던 단어가 이토록 심장에 박히는 이유를 알고 싶었다. -안녕, 아름다운 소년아... 안녕, 옥타비안....... 옥타비안... "............무슨 생각하나? " " 반대 쪽 해야죠. 옆으로 돌아 누우세요. " 실소를 흘리며 안토니우스는 시키는 대로 옆으로 몸을 돌려 누웠다. 그의 고향의 특산품이라는 귀이개는 정말 유용한 것 같았다. 무엇을 묻고 싶은지 계속해서 돌려서 질문을 하는 그에게 읏으며 대답을 회피하면 바로 귀이개 공격을 해오는데 효과적인 고문기술이 따로 없다. ' 퀸투스에게도 알려줄까? ' 영민하고 총기가 있는 그가 눈치채지 못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아마 저 검은 눈 속에는 여러 가지 생각들로 가득 차 있을 것이다. 옥타비아를 대하는 자신의 태도에 태우가 불만이 있다는 것도 알고는 있었다. 그 이유는 감히 잘 오지 않았지만 일단은 정부(?)인 그가 본부인에게 냉대한다고 해서 열올릴 이유는 없었으니까. 그런 바보같은 이유와는 관계가 없다는 것을 안다. 그 어떤 이도 접근하지 못한 심연을 그 가 건드리고 있었다. 그런 테리우스가 이해된다는 것이 안토니우스에게는 더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풀어놓는 이야기는 당혹스럽기 그지 없다. ".............사랑스러운 남매였지. " 귀이개를 내려놓은 손이 부드럽게 머리를 만지는 손길을 느끼면서 안토니우스는 두 눈을 감은 채 말을 이었다. 순수하게 빛나는 비취색의 눈동자가 눈앞에 가득차 떠오른다. 아무리 달려도 닿지 않는 바닷가처럼 그는 그렇게 표표히 서 있다. 그 시절을 회상하는 것조차 죄악처럼 느껴졌다. 그들을 생각할 자격이 있는가. " 카이사르의 명을 받고 그 아이들을 지키러 간 적이 있었다. 당시 임페라토르(쥴리우스 시저)는 정적들이 많아서 식솔들도 위험했었거든. 조카딸의 아이들이라고 해서 아주 어린 아이들인 줄 알았지. 처음 만났을 때가 옥타비아가 14살이었고 옥타비안이 12살이 였던 가? 녹색 눈의 꼬마가 들지도 못하는 목검을 들고 덤비는데.....하하하하.... 정말 귀엽더군................ 정말 귀여운 아이였지........" "...........그럴 것 같아요......." " 총명하고 순수했었지. 세상 어떤 더러움에도 오염되지 않을 듯했어..... 그 애가 어른이 된 세상에는 전쟁도 기아도 슬픔도 괴로움도 없는 세상이었으면 했다. ..............언제까지나 그 맑은 웃음을 잃지 않았으면............" "................좋아했었지요? " " 그래........." " 지금도? " ".............." 안토니우스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태우는 그 대답을 짐작 할 수 있었다. 황금빛이 내려앉은 이마에 살며시 키스했다. 가슴이 답답했다. 커다란 손이 올라와 얼굴을 감싸 안았고 부드러운 키스를 안토니우스에게 놓았다. 난 알고 있어요, 안토니우스. "...다음 번에는 옥타비아한테 잘해주세요....." 이제 그녀를 다시는 보지 못하겠지요. "....그래....." "그녀는 아무 죄가 없잖아요. " " 그래..............." 당신은 그럴 수밖에 없었죠. 그것이 그들을 위한 일이라는 것을 알지만.......... 역사의 어느 페이지에도 안토니우스의 아이들이 성장했다는 이야기는 들려 오지 않아. 그 어떤 아이도 성인이 되지 못했어. 만약 옥타비아가 당신의 아이를 낳은 다면, 그 아이는 외삼촌의 손에 죽임을 당하겠지. 어머니는 동생에 손에 피붙이가 살해당하는 것을 봐야 할거야. 당신은 그에게 그런 잔안한 일을 시킬 수는 없었겠지.............. 하지만 옥타비아누스에게까지 잘 해주라는 말은 못하겠어요. 그러니까 그렇게 모든 것을 다 안다는 듯 웃지 말아요. "............................." "...........그래.. 난 괜찮아............테리우스." ".......... 피곤하죠? 주무세요.....노래 불러드릴께요..." "후후...........그래..그럼 눈 좀 붙여볼까..." 안토니우스가 머리를 만져주면 노곤히 잠이 드는 것을 그간의 경험으로 체득했기에 조심스레 머리를 쓸어 내리면서 라틴어로 대화를 한다해도 노래를 부르는 데는 무리가 있었으므로 평소에 좋아하 던 노래를 허밍으로 불렀다. 가사가 없다고 투덜거리던 그가 피곤했는지 금방 단잠에 빠져들었다. 곧게 뻗은 콧날과 눈꺼풀 뒤에 숨어있는 비취빛의 눈동자, 휘장처럼 늘어진 금발 머리는 가히 신의 외모였다. 가슴께에 나 있는 크고 작은 상처와 그을린 피부가 그가 살아있는 인간임을, 끊이지 않는 전쟁터에서 살아왔음을 알려줬다. 태우는 그의 가슴한 가운데에서 옆구리까지 깊게 패인 검상을 가만히 쓸다가 그가 몸을 뒤척이는 통에 황급히 손을 떼었다. 그의 몸에 있는 흉터보다 더 큰 상처가 그의 가슴에 있다. 그랬구나....당신은 그랬구나............. - 한번도 사랑한다 말하지 못했고 앞으로도 영원히 침묵할거다..... 그런데 너의 눈물이 내 가슴에 묻은 이를 깨우는 구나. 네 덕분에 나도 오늘은 그 사람을 생각할 수 있구나. 너는 너의 연인을 나는 나의 연인을 생각하자꾸나,,, 내 가슴에서 너의 샘이 마를 때까지 울어도 좋아. 너의 연인을 만날 때까지 내가 품에 너를 안아주마. 오늘은 울어도 내일은 웃을 수 있게, 참지 말고 울어라, 내가 너의 눈물을 모두 받아 줄테니... 그랬던거야? 그렇게나.........당신은.............. 그 사람을.......... 난 알고 있어요. 당신의 미래를, 당신의 선택을, 당신이 어째서 옥타비아에게 차갑게 대하는지......... 당신이 어째서 옥타비안을 부를 수가 없는지......... 앞으로 당신들의 미래가 어떻게 펼쳐지는 지........ 그 슬픈 결론을.................. 알고 있어. 그러니까 연애소설처럼 바보 같은 질문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아. . . . . -그 사람을 사랑하나요? 제4장 Tumulti Pacis - 평화속의 혼전 끝 ****************************** + 로마의 휴일 제5장 Si me amasⅠ - 부디 나를 사랑하신다면 # 1 카이사르는 한 잔의 포도주를 들고 테라스에 나서 찬 공기를 맞았다. 데메테르여신의 새싹이 천지에 돋아난 지 한참이 되었건만 바람은 겨울을 담고 있었다. 여린 나뭇잎이 돋아난 나무 가지 사이로 보이는 원형에 조금 못 미치는 달이 내일이 3월의 보름날이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 날씨가 찹니다. 감기 기운이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안으로 드시지요. " " 아아, 그래 안토니우스. 그대의 말을 따르지. 내 언제 그대의 청을 거절한 적이 있었던가? 그대가 나의 명을 거절한 적이 없었던 것처럼 말이야... 날씨가 정말 묘하게 춥군... 달은 저리도 시리도록 밝은 데 이상하군, 정말 이상해. " "..............."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가 내실로 들어오자마자 기분 나쁘게 창백한 달을 두꺼운 캐노피로 가려버렸다. 그 순간에 찰 나의 속도로 하늘을 가르고 떨어진 별똥별을 보았다. 유성치고는 지나치게 밝았고 또한 불길하게 붉은 꼬리를 가졌었다. 뭐지 저건? " 참, 그 아이는 잘 지내고 있던가? 지난 번 폼페이우스와의 전투에서 보고, 벌써 일 년이 지났군. " " 네, 건강하던데요. 여전히 명랑하고... 떠나는 전 날까지 저를 이겨보겠다며 목검을 가지고 덤비는 통에, 결국은 포도주를 먹이고 재워야 했습니다. 후훗 " 녹색 눈에 분기와 눈물을 담고 바락 바락 덤비던 그를 떠올리다 안토니우스는 끝내 너털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조금 전 보았던 흉조 따위는 훨훨 날 려버릴 듯한 따뜻하고 아름다운 기억이었다. 아침에 일찍 떠나야했던 안토니우스는 전날 마신 포도주 때문에 눈을 뜨지 못하는 옥타비안의 잠든 모습을 한참동안이나 바라보았다. 그 전날 옥타비안이 나루터까지 배웅을 해주겠다던 약속을 잊은 것도 아니고 은근히 기대했던 일이었으나 술기운에 붉어진 얼굴로 깊은 숨을 내쉬는 그를 깨우고 싶지 않았다. 어슴프레 밝아 오는 동녘의 빛을 의지하며 숙취로 간간히 인상을 쓰는 그의 이마를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주었다. 혹여 그의 손길에 신록의 눈동자가 눈을 뜨지 않을까 조심스레, 아니 녹빛의 눈동자가 기적처럼 그에게 향하기를 고대하면서. 나루터로 말을 달리는 와중에도 몇 번을 뒤돌아 보았던 것을, 안토니우스는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그의 눈동자를 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고 안타까웠다. " ........... 안토니우스, 안토니우스! " "아, 네..뭐라고 하셨습니까? " " 이런 이런, 의원에 가봐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자네가 아닌가! " " 하하하, 내일 그럼 저와 의원에 가시는 거죠? 내일 하루는 원로원에 나가지 마시지요. 몸도 미령하신 듯 한데..." " 흐음, 자네도 그 점쟁이와 같은 말을 하는군! " " 점쟁이라니요?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 " 얼마 전에 눈먼 노인이 와서 내게 3월 15일을 조심하라고 알리더군! 이 내가, 지상에서 가장 강력한 힘과 권위를 가진 이 카이사르가 미신을 두려워해서야 되겠는가! " " 그렇기는 합니다만, 요새 분위기가 좀 심상치 않은 것 같습니다. 저도 로마에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은 터라 수하를 풀어 알아 보고 있지만 시일이 좀 걸릴 듯합니다." 실로 그 것이 걱정되었다. 너무 오래 로마를 비운 듯 싶었다. 폼페이우스와의 일전이 끝나고 퀸투스를 데리고 휴가 차 카이사르의 명을 받고 그리스의 아름다운 서해안의 도시 아폴로니아에 간 것 까지는 좋았지만 카이사르가 로마를 비우고 있었다는 게 문제였다면 문제였다. 카이사르가 이집트에서 개선을 하고 뒤이어 바로 안 토니우스는 돌아왔지만 두 사람이 동시에 로마를 비운 시간이 1년에 가까웠다. 카이사르와 안토니우스 둘 중 한사람은 로마에 남 아 있어야했다고 후회했지만 불온한 공기가 전장에서 단련한 감각에 감지되는 이 순간에는 이미 늦은 감이 있었다. 퀸투스의 추측대로 불순한 무리들이 사특한 일을 꾸미고 있다면... " 나를 걱정하는 것인가. 마르쿠스? " " 임페라토르........" " 자네는 예전의 나를 파테르(pater, 아버지)라고 불렀지. 기억하네. 뮤즈의 축복을 받아 샘물같은 글을 쓰던 자네의 손에 칼을 들게 한 것은 나였지. " " 아닙니다, 제가 선택한 것입니다. 후회하지 않습니다. " " 아니, 난 항상 후회한다네, 자네를 군인으로 만든 것을... 자네는 지금도 아름다운 목소리로 현을 켜며 노래하고 있었을지도 몰라. " " 파테르!! " " 마르쿠스, 나는 이 세상 단 두 사람에게 파테르라는 호칭을 허락했지. 세 간에 내 서자라고 소문이 나있는 부르투스에게도, 이집트의 왕이 될지도 모르는 작은 카이사르라는 아이에게도 허락하지 않았다. 누군지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겠지. 안토니우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들에게 너무 큰짐을 지우는 것 같아 마음에 묵직한 돌덩이가 가라 앉는 것 같네. " " 파테르....." " 이제 나는 그대에게 아비라는 호칭으로 불리는 것이 부끄럽다네. " " 아닙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 씁쓸한 미소를 짓는 카이사르는 지중해를 호령하는 임페라토르가 아니었다. '붉은 여우' 라고 불리며 갈리아를 굴복시키고 루비콘강을 건넌 장수 가 아니었다. 얼마나 많은 시간을 전장터에서, 얼마나 많은 피를 이 손에 묻혔던가. 그리고 그 피의 업보를 또 누구에게 지게 하는 것인가. 포도주에 비친 얼굴을 바라보던 그의 눈에 아폴로의 현신 같은 그의 아들이 서 있었다. ".........마르쿠스, 그 아이를 부탁하네. 언젠가 내가 하데스의 부름을 받는 다면 그 아이를 지켜주게나. " " ...네, 그리하겠습니다. " " 이리 가까이 오게, 내 아들, 마르쿠스. 자네는 정말 그대의 아비를 빼다 박았군. " "파테르..." 안토니우스는 하얗게 서리가 내린 그의 머리카락이 안타까웠다. 크로노스의 냉정한 시간의 낫은 그를 비켜가지 않았다. 그 날 밤 팔 안에 느껴지는 카이사르가 작고 왜소하게 느껴졌다. 그 것은 안토니우스가 만난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카이사르는 더 이상 아버지 같은 미소를 지어주지 못했다. " 카이사르!!!!!!!!! 카이사르!!!!!!!!!! . . . " 파테르!!!!!!!!!!!!!!!!!!!" 조금 전까지 손에 생생하게 느껴지던 끈적 끈적한 피웅덩이 대신 안토니우스의 눈을 채우는 것은 연두색으로 휘날리는 천개였다. " 꿈이었나..... " 비록 꿈이었으나 그 일은 6년이 지난 지금도 바로 어제 일어난 일 같았다. 3월 15일... 크로노스의 낫을 세울 수 만 있다면... 그 날 카이사르를 원로원까지 호위했어야했다. 아니 그 분을 그리 가게 두지 말았어야했다. 안토니우스를 만나고 싶어하는 원로원의 귀족의 요청 따위는 거절했어야했다. 충분히 막을 수 있는 일이었다. 단검을 든 모략자들은 불패의 명장 안토니우스의 상대는 되지 않을 터였다. 막을 수 있었다, 그 모든 비극은........... 불길한 예감에 걸음을 재촉한 안토니우스를 맞이한 것은 폼페이우스의 흉상아래 피투성이가 된 채 쓰러진 카이사르의 주검이었다. 쓰러진 그의 발치에서 피가 떨어지는 칼은 들고 서 있었던 부르투스와 카시우스의 얼굴을 안토니우스는 망막에 깊이 새겼다. 감히 누구에게 그 참람된 검을 겨누었는가! 복수의 칼날이 너희를 빗겨가지 못하리라. 그 가증스러운 목을 내 손으로 치리라! 너희들이 흘린 피로 죽음의 강을 건너 카이사르의 발치에 속죄해야할 것이다! 복수의 맹세를 지켰다. 카이사르를 비방했던 키케로의 손목을 잘랐고 요망한 혀로 암살을 모의했던 카시우스의 혀를 잘랐다. 단지 부르투스는 카이사르가 주었던 정리를 생각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는 기회를 주었다. 안토니우스의 분노의 찬 검 앞에 살아남은 이는 거의 없었다. 피로 물든 칼을 내리고 주위를 살펴보았을 때는 그 어디에도 아름다운 녹색의 눈동자의 아이는 없었다. .........옥타비안은 피의 젖은 그를 공포에 찬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 것은 명백한 공포와 거부였었다. 내가 한 일은 무엇을 위함이었던가. 무엇을? 나를? 아니면 너를........ 내가 지나는 길에 남겨진 해골과 내 손에 가득한 피는 누구를 위함인가. "으음.........." 면사로 나비문양이 곱게 수놓아진 이불 속에서 뒤척거리는 사람은 그늘로 얼룩진 안토니우스의 얼굴에 다시금 화사한 빛을 돌려놓았다. 안토니우스는 뒤척이는 상대를 언제 그랬냐는 듯 따스한 얼굴로 내려다 보았다. " 테리우스...." 자는 자는 말이 없다. 삐져 나오는 웃음을 애써 삼키며 반쯤 흘러내린 이불을 다시 덮어주었다. 방금 자신이 지른 비명 소리에 문앞의 병사가 침실까지 들어왔다 그의 눈짓에 물러갔지만 테리우스는 미동도 하지 않고 잠에 취해 있었다. 점차 잠귀가 어두워지는 것이 좋은 현상이겠지만 서운함도 없잖아 들었다. 악몽을 꾼 아이가 어미를 찾아 그 온기에서 위안을 얻는 것처럼, 안토니우스는 몸을 반쯤 뉘여 웅크리 고 잠든 이를 품에 안았다. 부드럽게 쉬지 않고 등과 어깨를 어루만지던 그의 손에 뭔가 거슬리는 것이 만져졌다. 이불을 들춰 추운 듯 몸을 움찔하는 것을 무시하고 어깨와 가슴 부위를 자세히 살펴봤다. 깨끗하게 빛나고 있어야 할 몸에 그의 신경을 곤두세우는 흔적들이 있었다. 어깨에 길게 새겨진 실선은 붉게 살이 부풀어 오른 상처였고 가슴과 팔에는 크고 작은 멍이 있었다. 군데 군데 점점이 박혀있는 안토니우스가 직접 만든 흔적 사이에 안토니우스가 테리우스를 때리지 않은 이상 생길 리 없는 타박상들이 있었다. " 뭐야? 대체 이 상처들은?? " 간 밤의 정사에서도 눈치채지 못한 스스로의 무신경함에 기가 찼다. 당장에 테리우스를 깨우려는 안토니우스는 한 눈에 들 어온 어깨의 상처에 손을 멈추었다. 가느다란 선은 어딘지 익숙한 것이라고 느낀 순간에 생애의 절반을 전장에서 살아온 그는 그 정체를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무엇에 의한 상처인지, 얼마나 되었는지. 온몸의 상처가 그간 수상했던 그들의 흔적을 여지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내 이 녀석을 당장............. " 휴우, 그런 것이었나? " 안토니우스는 결국 흔들어 깨우려고 올렸던 손의 용도를 바꿀 수밖에 없었다. 요새 카피토와 상당히 어울리고 다니는 것 같더니......... 갑자기 밖으로 나온 안토니우스의 모습에 병사들은 놀랬지만 그의 명령에 따라 칼렌두라즙으로 만든 고약을 가지러 뛰어 갔다. 칼렌두라는 염증과 상처에 새살이 돋는 것 을 도와주고 통증을 없애는 데 탁월했다. 무슨 상상을 했는지 얼굴이 붉어지는 카루스를 보고 안토니우스는 혀를 찼지만 관 대하게도 못 본 척 해주었다. 테리우스의 상처가 상당히 쓰라릴 텐 데도 정신 없이 늘어져 자는 모습에 안토니우스는 혀를 차며 곳곳에 난 상처에 꼼꼼히 약을 발랐다. 한동안 얌전하다 싶었더니 이번에 선택한 일은 검을 배우는 것이었나. 얼마 전부터 카피토가 울 것 같은 얼굴로 테리우스를 따라 다닌다 했더니만. 어떻게 카피토를 구슬렸는지는 모르겠지만 그에게 검술과 승마를 배우고 있는 것 같았다. 어깨에 나 있는 상처는 목검의 자국이었고 굳은 살 하나 없던 테리우스의 손바닥에는 말고삐의 흔적이 선명하게 새겨져있었다. 다시금 살펴본 그의 몸은 상당히 달라져 있었다. 지중해의 태양빛이 그의 피부를 구리빛으로 물들였고 검을 휘두르느냐 몸에는 크고 작은 상처가 곳곳에 눈에 띄 었다. 마치 그의 몸은 나는 더 이상 약하고 어리지 않다고 고집을 부리는 어린 아이처럼 느껴져 안토니우스는 우습기도 했지만, 그보다 손에서 모래가 빠져나가는 듯한 서글픈 상실감이 들었다. 당연하게 테리우스를 보호하려고 했던 자신의 모습과는 다르게 스스로의 힘을 키우겠다는 그의 의지가 섭섭하기도 했다. "....음..그래도 내가 보호자인데...너무 하잖아, 이런 상처들은........." 굳은살하나 없던 손에 물집이 생기고 매끄럽던 피부가 거칠거칠 해진 것 같기도 했다. 근육이 생겨 가는 테리우스의 모습을 떠올려보던 안토니우스는 내일 당장 카피토를 부르리라 다짐했다. # 2 아크로폴리스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둔덕에 자리잡은 안토니우스의 관저에 마련된 연무장에는 평상시 라면 군사들의 훈련이 한창일 터였다. 훈련을 하고 있어야 할 군사들은 삼삼오오 연무장 주변을 빙 둘러치고 앉아 연무장을 활보하는 두 사람의 대련아닌 대련을 넋을 놓고 보고 있었다. 무리에는 연신 박수를 치며 응원하는 퀸투스와 굳은 얼굴의 이아로스, 그리고 창백한 얼굴의 카피토가 있었다. 눈 부신 금발이 하늘을 가르면서, 날카로운 파공음이 실린 검이 호선을 그었다. " 하앗! 하앗! 발을 움직여! 그렇지! 잘 하는 걸! " " 우앗! 살살해요!! 우아아!! " 도대체 뭐란 말이냐. 간신히 목검을 피한 태우는 이렇다할 반격도 하지 못하고 꼬리에 불붙은 개마냥 연무장을 뛰어다녔다. 안토니우스에게 잘잘하게 늘어가던 상처를 들키고야 말았다. 태우의 몸에 멍이라도 들라치면 얼굴이 파랗게 질려 울상이 되는 카피토를 겨우 겨우 설득해(협박에 가까웠지만) 안토니우스 몰래 검술 을 배우고 있었다. 원체 멍이 잘 들지 않고 금방 사라지는 체질이라 쉽게 들키지 않을 거라고 안심했지만 어깨에 목검을 맞은 상처가 생긴 그 날 그만 딱 걸리고 말았다. 안토니우스는 카피토를 설득한 조건을 듣고 황당해했지만 워낙에 카피토가 '그 일'을 싫어하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안토니우스는 카피토를 보고 측은하게 한숨을 쉴 뿐이었다. 이 곳은 2000년 전의 로마인 것이다. 기억하는가? 로마의 숫자들을....숫자가 아닌 문자인 그 것들을. 느리기 짝이 없는 그들의 계산법으론 태우가 암산으로 가능 한 것을 한참을 적고 긋고 해야 답이 나왔다. 오히려 태우는 그렇게 늦게 계산할 수 있는 것에 신기해했다. 보기가 답답해서 한 두 번 도와 주던 태우가 영악한 생각을 하게 된 것도 우연은 아 니었던 것이다. 검술과 승마를 배우는 댓가로 카피토에게 제시 한 것은 산수였다. 기본 적인 개념이 없는 그를 가르치 면서 이 세상 모든 초등학교 교사께 진심 어린 존경을 보냈다. 하지만 겨우 검을 쥐고 휘두르는 법만 배웠는데... 어째서....... 우아아아--- "우아아아아--" " 숨을 크게 쉬지마! 힘이 금방 떨어진다고! " 안토니우스는 헝겊으로 칭칭 동여맨 목검으로 어깨로 두드리면서 시원하게 미소짓고 있었지만 태우의 눈에는 헨델과 그레텔에 나오는 과자의 집 할머니의 표정이 꼭 그럴 것만 같 았다. 모레시계가 한 번 뒤집어 질 때까지 안토니우스에게 공격을 한번 성공하거나 버텨내면 정식으로 검을 가르쳐 준다 고 해서 시작한 대련아닌 대련이었다. 단 한번의 무딪침으로 손목이 찌릿찌릿한 통증에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 히익! 뒤를 !!!!!!!!!!!' 아슬아슬하게 목검의 궤적에서 벗어난 테리우스의 움직임은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 동안 피하는 것만 가르칠 것을! 표정에는 전혀 드러나지 않았지만 카피토의 속은 까맣게 타들어가고 있었다. 카피토는 안토니우스 휘하의 정식 장수가 아닌 사병이었고 로마에서 데려온 사병과 아테네에 주둔하고 있는 군대, 그 밖의 나뉘어 있는 부대 편성에서 독립적이었다. 다른 부대가 각각의 집사가 있는 반면에 카피토는 사병부대의 살림을 떠맡고 있었다. 보름에 한번 퀸투스에게 재가를 받는 장부의 작성은 카피 토에게 큰 고역이었다. 그가 끙끙거리며 적어내는 것을 테리우스가 너무나 순식간에 해치웠기 때문에 카피토는 몇 번을 시간을 들여 검산했고 모두 맞았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날마다 복잡한 숫자들에 헤메던(보름마다 밀려하기엔 너무나 큰 일이었다, 카피토에게는) 카피토에게 태우는 한줄기 광명이었고 울며 겨자 먹기로 앞으로 계산을 도와주는 대신 검술을 가르쳐 달라는 그의 말을 따를 수 밖에 없었다. 안토니우스가 알면 경을 칠지도 모르지만 결국 태우에게 신기한 계산법을 다 배울 때까지 검술을 가르 쳐 주기로 했다. 하지만 카피토에게 두 개의 선이 만나는 교차로 모양의 문자(+)와 수평으로 그어진 문자 (-)는 절대로 만만한 것 이 아니었다. 그러다 새벽부터 딱딱하게 굳은 안토니우스에게 호출을 당했던 것이었다. 더 이상 마음 졸이며 목검에 힘을 빼는 힘든 일을 하는 것도 이제 끝이라는 기쁨도 잠시, 카피토는 조금 복잡한 심정으로 이리저리 뛰는 두 사람, 정확히는 파공음을 흘리며 떨어지는 목검을 피하며 팔짝 팔짝 뛰는 태우를 측은하게 바라봤다. 난 정말 많이 봐주었는데......... 유연한 곡선을 그리며 날카롭게 떨어지는 검은 한 치의 배려도 없었다. '히익, 정말 화가 나신 건가? ' " 으아아악 안토니우스!!!!!!!!!!!!!!!!" 날라 오는 검을 무심결에 방패가 아닌 발차기로 막아낸 태우는 빠각하는 소리에 기겁했지만 다행이 뼈가 부러지지는 않 은 듯했다. 몸에 밴 운동이라고 간간히 태권도의 움직임으로 검을 피해내는 태우를 안토니우스는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바라 봤다. 수 십번을 전장에 다녔지만 저런 움직임은 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검을 다리로 받아내다니... 손에 든 것이 진검이었다면 피를 보는 것으로 끝나지 않을 터였다. 그냥 좀 모양새만 갖추고 혼을 내주려던 마음이 사라져버렸다. 검은 가벼이 쥐는 것이 아니다. 이곳이 지금 전쟁터였다면, 앞에 서 있는 자가 자신이 아닌 적이었다면 순식간에 테리우 스의 머리를 몸과 분리되어 땅을 구르고 있었을 것이다. 순간적으로 든 불쾌한 생각은 안토니우스의 살기를 피워냈다. 죽는다고? 누가 감히 나에게 속한 자를 헤하려 한단 말인가. 진득한 투기에 테리우스가 주춤주춤 물러서는 것이 보이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미소로서 답했다. 서서히 테리우스를 중앙으로 몰면서 오른쪽 다리에서 올라오는 통증에 정신을 차릴 때까지 이렇다할 공격은 하지 않았지만 안토니우스는 무엇인가 결심했는지 타격을 약화시키기 위해 목검에 둘 렀던 천을 벗겨내었다. 다시는 검 같은 것을 손에 들고 싶지 않게 해주겠어. "헥헥...우리 말로 해요!!!!" "문답무용! " 바람에 흩날리면서 안토니우스 손에서 떨어지는 천 조각이 사신의 날개처럼 보였던 것은 환각이었을까. 겨우 정신을 차린 태우는 연무장 안을 이리 저리 뛰어 도망가기 시작했지만 당대 최고의 검사의 손에서 벗어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쌔애액, 하는 이 소리는 정말 목검에서 나는 것 맞아?? "으아아악! " 팡, 콰다당. 안토니우스의 목검이 거세게 가르고 들어오는 것을 힘겹게 이번에는 다행히 방패로 막았지만 방배가 두 조각이 나는 것 과 동시에 태우의 몸은 공중 을 날아 멋지게- 착지 하지 못했다. 흙먼지를 뒤집어 쓰며 태우는 다시 군대에 들어온 기분을 맛봤다. 으아,,,정말 날 죽일 셈이야?? " 어이? 괜찮아? " 자욱하게 번지는 흙가루가 가라앉길 기다리며 안토니우스는 태우가 넘어진, 정확히는 떨어진 곳에 다가갔다. 적당히 힘 조절을 했기 때문에 (한 사흘 정도 꼼짝 않고 쉬면 걸어 다닐 정도가 안토니우스의 '적당히' 였지만) 큰 일 날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조금 더 힘을 뺄 걸 그랬 나하는 성의 없는 후회를 하면서 안토니우스는 태우의 앞에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꿈틀거리면서 대자로 뻗어 테리우스는 대련에서 패배를 시인하는 손짓을 했다. 흙투성이가 되어 노려보는 그에게 키스를 하고 싶었지만, 그 몰골에 간신히 참 았다. 이런 흙투성이 환자로 만들어 버린 것은 나군, 안토니우스는 진심으로 후회가 들었다. 흐음, 하루 정도로 봐줄걸... " 쿨럭..쿨럭....날 죽일 셈이죠?? 힘껏 날려 버렸잖아! " 어깨를 으쓱하며 웃는 얼굴을 날려 버리고 싶었지만 온몸의 뼈와 근육이 비명성을 질렀다. 겨우 모래시계가 절반밖에 떨어진 대련(?)에 무참히 깨질 줄이야... 태권도 검은 띠가 무색해지는 순간이다. "하하, 이제 실컷 뛰었으니 이제 들어가자. " ' 누가 뛰고 싶어서 뛰었어? %@@$^!!!!! %&*^(!! @ $& ^%^(^!! ^%$&%$!!! ' 안토니우스에게 전혀 통할리 없는 육두문자가 입안에서 멤돌았지난 소리로 만들어 낼 힘은 없었다. 안토니우스는 휘청거리는 그를 번쩍 안아들고 성큼 성큼 걸어나갔다. 모세가 바다를 가른 것처럼 이제 까지 구경하다 흩어지는 병사들의 눈에는 비웃음과 동정이 담겨 있는 것 같아 태우는 안토니우스의 토가로 화끈거리는 얼굴을 가렸다. 주군의 뒤를 따라 걸음을 옮기는 카피토의 귀에 병사들이 수근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그저 고개를 축 늘어뜨린 채로 연무장 밖을 나섰다. " 이야...그래도 맵집 하나는 끝내준다. 진짜 잘 피하더라... " " 그러게...장군이 좀 봐주기는 했지만, 그래도 우리가 시범받을 때랑은 차원이 틀렸어," "진짜 대단하다... 우린 장군한테 한 대 맞으면 그냥 골로 가는데..." " 그래 그래. " " 맞어... 야 근데 그 발차기 봤어? " " 조금만 더 연습하면 그럭저럭 하겠는걸? " "그치? 역시 안토니우스님이 직접 가르치시는 건가??" "우와 진짜 좋겠다!! " 태우는 불행하게도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길에 동정뿐 만 아니라 경탄과 존경이 섞여있다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랬더라면 검술의 소질이 없다는 안토니우스의 공갈에 쉽게 넘어가지 않았을 테니까. " 정말 아팠다구요..." "그래.. 후훗, 자 이제 엎드려 봐... " 끙끙거리며 몸을 돌린 테리우스의 등허리는 가관이었다. 허벅지에서 엉덩이까지 커다랗게 자리잡은 짙 은 녹색과 보랏빛이 어우러진 흔적에 안토니우스는 손간 가슴이 쓰려왔다. 흐음...오래 가겠는걸. 그가 손수 새기는 흔적도 잘 남지 않고 쉬이 사라지는 것을 생각해보면 지금 자리잡은 이 거대한 멍이 생겼을 때의 충격은 짐작하고 도 남음이었다. 부드럽게 카모마일을 발라주며 상처를 건드리자 약하게 신음소리를 흘렸다. 미안, 매끈한 목덜미의 감촉에 가슴이 아려왔다. 이렇게나 약하고 연약한데.... "....지금 하면 난 정말 죽을거에요....." " 푸훗!! 알아, 나도 양심은 있다고,,," 양심이 있어서 칼도 제대로 안 잡아 본 사람을 그렇게 무식하게 팹니까? 말로는 하지 않겠다고 하면서도 등으로 쏟아지는 간질간질한 키스에 몸살이 날 지경이었다. 고개를 들고 항의하려는 입술에 깊고 짙은 키스를 마지막으로 안토니우스는 계속해서 향긋한 냄새가 나 는 끈적 끈적한 오일을 몸에 발라댔고 점차 욱신욱신하는 통증이 사라져 갔다. 안토니우스의 마사지를 받으면서 카피토가 얼마나 봐주었었나를 뼈저리게 느꼈다. 가르쳐주려면 제대로 가르쳐 줄 것이지! 적어도 피하는 법만이라도. 그랬다면 복날에 개 맞듯 맞을 일도 없을 것 아닌가... " 앞으로 검은 어떻게 할거지? 갑자기 왜 배우려는 생각을 했나? " "...........나도 좀 할 일이 있었으면 했어요. 나 하나쯤은 지키고 싶었어요. 이 곳은 검이 지배하는 곳이니까......배워야겠다고.........." "후우.............그래? 지금 배운다고 하더라도 너는 나는 당연한 거겠지만 다른 군사들에게도 상대가 안돼. 그건 알고 있겠지? " " 뼈저리게요. " " 후우- 좀 거칠었었지, 검이란 건 쉽게 손에 잡는 것이 아니야. 그걸 알려주려고 했던 건데... 검을 다루는 것은 무리가 있을 거야. 검이라는 것은 상당한 기술과 근력이 필요한 것이니까. " 그리고 상대를 벨 수 있는 마음도 필요하지. 손에 피 한 방울 묻혀보지 않는 네겐 검은 굉장한 무게를 가질거야. 무게가 무거워지면 주인의 발등을 찍는 것이 검이야. " 그렇겠죠....... 그래도.............." " 전장에서 손에 익지 않는 검은 칼자루를 거꾸로 들고 있는 것과 진배없어. 사실 네가 검을 가지고 필사를 다해 싸울 일은 없다고 생각한다. 정 그렇다면 자신의 몸을 보호하려는 거면 격투술을 배우는 것이 차라리 낳을 것 같다. 그것도 어느 정도 한계는 있겠지만. " " 격투요? " " 그래, 아까 목검이 아닌 진검이었다면 네 다리는 벌써 잘려 나갔을 거야! 세상에 검을 발로 막는 경우가 어디 있나? 진짜 검이었으면 어쩔 뻔했어? 하여튼 발놀림을 보니 격투는 어느정도 배울 수는 있을 것 같은데." 이 걸로 타협을 하지? " "..........." 안토니우스는 엎드려 있는 태우의 몸을 뒤집어 깊고 부드러운 푸른 눈으로 대답을 재촉했다. 그래도 원래 사나이는 한번 칼을 뽑으면 무라도 베라고 했는데... 태권도를 했으니 안토니우스의 말이 일리가 있다는 것도 알고 있지만 자고로 손에 뭘 들고 있는 것이.... " 테리우스? " "................" " 휴우- 좋아, 그럼 단검 다루는 것도 배워둬. 몸놀림이 좋으니 체술과 함께 배운다면 그럭 저럭 자기한 몸 지킬 정도는 되겠지. 하지만 절대 싸우라고 허락하는 게 아냐. 만약 적을 만난다면, 사실 그럴 가능성은 뭐 거의 없겠지만. 그냥 도망치면 돼! 싸움을 피해 달아나는 것은 절대 흠이 아니니까. " "헤에- 네! 사나이 서태우- 아니 테리우스 절대 도망은 안가요! " " 그래그래...그럼 한 두 번 싸우다가 아니다 싶으면 도망치던지 소리를 질러 도움을 청하던지. 후훗. 몸은 한 사나흘 푹 쉬면 괜찮을 거야. " " 한 열흘은 누워 있고 싶은데요..." "하하, 그럼 나흘 후에 엿새를 누워지낼 수 있도록 안아 줄테니까.... 그럼 열흘 동안 원대로 누워있을 수 있을 걸? " "...........이이익!!!!!! 지금 그걸 말이라고,,,아얏!!! 에구구구 " " 푸하하하- 그럼 잘 자, 저녁 때 보자구. Mea Rosa canina! " 안토니우스는 부들부들 떨고 있는 등에 가벼운 입마춤을 남기고 크게 웃으면서 내실을 나섰다. 메아 로자 카니나? 장미가 어쩌고 한 것 같은데... 무슨 뜻이지? 로자 카니나. 나의 로자 카니나. 달콤하게 느껴지는 단어가 귓가에 맴돌았다. 이리저리 뜻을 굴려보았지만 딱히 생각나는 것이 없어 노곤한 피로 에 태우는 잠에 몸을 맡겼다. 로자 카니나........... 태우는 안토니우스의 예언대로 (사실 그렇게 만든 것이 안토니우스였지만) 내리 사흘을 침대에서 보내야했다. 사흘을 죽은 듯이 자다가 일어난 태우를 기다리는 것은, .... 안토니우스의 부대의 모든 재정에 관련된 서류를 하나 가득 안고 방싯 방싯 미소짓는 퀸투스였다. " 이건 엄연한 노동법 위반에 착취야...." 주산학원에 다녔던 기억을 떠올려 어설프게 나마 주판을 만들어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이 다행이었다. 귀이개를 만들었던 장인이 만들었는지 그의 요청대로 배달 된 주판은 순금과 알알이 박힌 진주로 되어 있었다. 다시 되돌려 보내고 싶었지만 산적한 계산 거리에 번쩍 번쩍 빛나는 그 것을 사용 할 수밖에 없었다. 퀸투스는 교묘하게 움직이는 손가락의 비밀을 알아내고자 뚫어져라 바라보았지만 이 많은 숫자를 처리하는 그 구슬판과 태 우의 손의 신비를 밝혀내는 것은 역부족이었다. "호오! " 양피지에 아라비아 숫자로 구해진 정답을 로마자로 옮겨 적는 순간 퀸투스는 탄성을 질렀다. 퀸투스는 카피토가 틀리지도 않고 빠르게 해온 서류를 보고 감탄하다가 이틀 전에 있었던 연무장에서의 소동의 원인을 알게 되었다. 카피토가 힘들여 설명하는 방법은 일일이 그어가며 셈을 하 던 그들에게는 정말 획기적이고 빠른 방법이 아닐 수 없었다. 당장에 퀸투스는 안토니우스에게 그 사실을 알렸고 반신반의하던 그도 깨어나자 마자 서류를 보고 어려움 없이 오류를 집어내는 그의 능력에 무척 놀란 듯 싶었다. " 참 퀸투스..로자 카니나가 뭐에요? " " 로자 카니나? 장미 열매잖아? " "...............열매? 밑도 끝도 없이 그냥 열매? " " 그냥 열매라니! 열오를 때는 직빵 이라고! ............피로 회복에도 얼마나 좋은데!!!" " 그래요? " 가문의 문양이 장미답게 한참을 퀸투스는 로자 카니나의 효능에 대해서 설명했지만 그저 장미 열매라는 데 맥이 빠져 버렸다. 그럼 열나지 말라고 로자 카니나라고 한건가? 아님 뭐 내가 해열제야? 장미의 열매였군. 뭔가 굉장한 뜻이 있다고 기대했었나. "그런데 그 것은 누구 한테 들었어? " " 아니....저 번에 안토니우스한테 두들겨 맞고 뻗었을 때 그러더라구요. " " 안토니우스가? " "네" " 자네더러? 그...로자 카니나라고 했다고? " " 네... 그 때 나 열이 있었나.........." " 그래? 로자 카니나..... " "?" 혼자 중얼중얼 뭐라고 곱씹는 퀸투스를 뒤로하고 태우는 다시 진주알을 굴렸다. 도대체 이게 얼마야? 형수님이 혼수로 해오신 진주 목걸이를 보석함에 두고 두고 보시는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지금 어머니가 이 것을 보신다면........ ........ 어머니가 아까워서 눈으로만 보시는 것을 불효자는 계산기로 씁니다. 퀸투스와 하는 서류 정리는 주로 누락된 공물의 양이나, 실제 소비량과 재고량의 차이를 밝혀 내는 것 이었는데 몇 개의 두루마리를 하고 나서야 태우는 이 문서의 중요성을 알게 되었다. 이 문서는 안토니우스에게 들어오는 수입의 대부분을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로마의 속주는 공물을 집정관에게 세금의 형식으로 바친다. 속주의 보호와 상권의 보호의 의무가 집정관에게 주어지고 세금말고도 각 속주의 왕실에서는 안토니우스 개인에게도 뇌물을 주고 있 었다. 그 것뿐만이 아니었다. 이중 삼중의 징수체계의 허점은 당연 안토니우스에게 돌아와야 할 재정의 일부가 새어가가는 틈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그가 정확하게 집어내고 있는 오류는 안토니우스의 불벼락으로 변해 착복한 장수에게 떨어질 것이었다. 원래 회장보다는 총무의 목소리가 큰 것은 그가 돈을 틀어쥐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장수들은 테리우스가 회계 감사에 뛰어들면서부터 (정작 본인은 눈치채지 못했지만) 이전의 태도를 조금씩 고치고 있었다. 다른 때처럼 한참을 걸리던 장부정리가 하루 이틀만에 끝나는 지라 장수들은 감히 공물에 손을 댈 생각을 꿈에도 꾸지 못했다. 공물이 누락 되더러도 보통은 이듬 해에 적당한 핑계로 무마하던 속주들의 사신들은 그 자리에서 이전 해의 차이까지도 정확하게 잡 아내는 검은 머리의 청년을 경악스럽게 바라봤다. 공물과 곡식을 실은 마차와 배와 아테네로 끊임없이 모여 들었다. 안토니우스의 명으로 군사물자가 소집된 차였다. 유스티아의 저울보다도 냉정하고 정확한 눈금을 가진 청년이 있다는 소문이 인근에 퍼 져 어느 때 보다도 빠르고 신속하게 물자가 아테네로 모이고 있었다. 태우의 정확한 계산은 군사이자 참모인 퀸투스에게 정확한 작전과 병참을 준비하는데 큰 도움을 주고 있었다. 투덜거리면서 소일거리처럼 하고 있는 진주알 주판 놀음이 당초 다음 해로 잡혀 있었던 파르테아 원정의 날을 앞당기고 있다는 것을 태우는 미처 알지 못했다. " 여어! 수고 하는군! " 쾌활한 목소리가 들렸다고 생각하고 고개를 돌렸을 때는 이미 입안을 가득 휘 젖고 다니는 말캉한 혀가 있었다. 바둥거리는 움직임은 뒷통수를 강하게 잡고 있는 탄탄한 손과 현란한 키스에 허무하게 사라졌고 어느 새 고개를 기울이며 동조하는 태우였다. 훗- 하는 짧은 웃음 소리와 함께 이마에 닿는 부드러운 촉감으로 쏟아지 던 키스는 마무리되었다. " 20년 우정은 한 줌의 모래처럼 손안에서 사라지는 구나. 수고는 나도 하고 있다고. " " 흥? 그래서? 내가 보기엔 자네는 테리우스에게 일을 뺏기고 한가해진 듯 하네만" ' 맞아요! ' 소리는 못 내었지만 눈빛만으로도 뜻이 전해졌는지 안토니우스는 의기양양하게 퀸투스에게 으쓱해 보였다. "그런데 여기는 왠일 이신가? 장군. " 삐딱한 목소리에 퀸투스의 심기가 여지 없이 실려있었다. " 아참, 선물! " 주섬주섬 품속에서 꺼내는 것은 흰 천에 쌓인 봇다리였다. " 내거 에요? 뭐에요? " 조심스레 받아든 천봇다리를 풀자 나오는 것은 보기에도 아름다운 단검 두 쌍. 크기는 한 뼘이 조금 넘은 크기에 날렵하게 뻗은 검이었다. 검은 가죽으로 만든 검 집은 어디엔 가 달 수 있도록 가죽 끈까지 있었다. 검 날은 날카롭고 자루는 동물의 뼈로 만들어져 있었는데 정교한 조각이 빽빽이 새겨져 있었다. 안토니우스가 다른 검 집에서 단검을 꺼내자 시퍼런 칼날이 한기를 뿜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양날이긴 하지만 부드럽게 굴곡을 이루며 휘어 있었다. "얄밉긴 하지만 단검 만드는 솜씨는 동방 놈들이지. 특별히 이즈미르에서 가져온 것이니까 잘 써야해, 이건 던지기 용이 아니라 휘두르는 거야. 베기 전용이라고. " 시범차 휘두른 손에 퀸투스가 내미는 양피지가 한번에 잘려져 나갔다. " 여기 칼자루는 상아로 만들었거든, 이 조각은 장식적인 기능도 있지만 손에서 미끌어 지지 말라고 있는 것이지. 여기 보면 내 이름과 문장도 있어, 다른 검에는 네 이름을 새겨 넣었지 " " 우와- " 어떤 말도 하지 못하는 입에서 나오는 것은 탄성, 탄성. 안토니우스에게 받아든 두 개의 단검을 어딜 봐도 한 쌍임을 알 수 있었다. 하얀 상아로 만든 자루에 새겨진 안토니우스의 이름. 다른 쌍 똑 같은 위치에 새겨진 박히는 이름. 이 곳에서의 이름. 단검은 우아했으나 화려하지 않았다. 보석이 주렁 주렁 달린 칼은 고기 자를 때나 쓰는 것이라며 안토니우스는 소박하리만큼 투박한 자신의 검을 들어보였다. "단검 쓰는 것은 내가 직접 알려주고 싶지만 난 주로 대검이나 창을 쓰거든, 잘 쓰는 녀석을 하나 붙여 줄 테니까 열심히 배워, 시험 볼거야! " " 네, 감사해요. " 만지작, 만지작, 선물을 얻은 아이 처럼 단검을 이리 저리 돌려보는 테리우스의 모습에 안토니우스는 실소를 머금었다. " 안토니우스, 온 김에 이 것 좀 보지. 군량은 충분히 모였어. 군사자금도 넉넉하고. " " 예상 보다 빠르군. " " 겨울에나 파악이 가능 할거라고 생각했는데, 테리우스 덕에 한 계절을 앞당겼어." 양피지를 두 번을 접어 잘라보는 테리우스의 모습에서 시선을 돌려 퀸투스가 내미는 서류를 받아들었다. 원정을 위한 물자가 넉넉하게 갖추어져 있었다. 이 상태라면 내 년 봄까지 기다리지 않아도 될 터였다. " 갈 텐가? 겨울을 낄지도 모르는데. " " 어쨌든 장기전은 불가피 해. 전선이 길어지면 우기를 맞는 것이 더 위험해. 식량사정이 좋다면 차라리 겨울이 낫겠지. " " 먼저 알렉산드리아로 갈 건가? 이집트에서 자금을 지원해 줄텐데. " 다른 서류를 훑어보던 안토니우스는 금괴의 양이 예상보다 두 배는 더 써있는 곳에 눈을 멈추었다. 지금도 마케도니아에서 황금이 올라오는 중이었다. " 아니, 테리우스 덕에 이집트의 황금은 필요가 없겠군. 이제 그녀에게는 볼 일이 없어. 안티오키아로 간다. " " 저런, 가엾은 클레오파트라여! 황금으로 장군의 마음을 얻더니 황금으로 버림받는 구나. " " 준비해둬, 퀸투스. 이만 가봐야겠어. 아크로폴리스에 들려야하거든. ..........테리우스에게는 아직 말하지 말게, 내가 직접 말할테니. " " 그래. " 테리우스가 새로 받은 단검으로 사과 껍질을 끊어뜨리지 않고 자른 것을 흔들었다. 단검을 만든 장인이 보았다면 땅을 치고 한탄할 일일지도 모르겠지만 부디 저 검에 피가 맺히는 일은 일어나지 않기를. 퀸투스는 안토니우스의 눈이 다시 테리우스를 쫒는 것을 보며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그 자신은 잘 모르고 있지만 안토니우스는 칼 끝에 서 있는 듯한 위태로움이 사라지고 있었다. 안토니우스는 테리우스에게 깊은 키스를 해주는 댓가로 얻은 사과를 씹으며 방을 나섰다. 테리우스가 보기 좋은 미소로 배웅했다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새로 받은 단검을 허리춤에 차고 다른 하나는 손에 던졌다 잡았다 하면서 다시 서류에 몰두한다. 안토니우스의 말처럼 테리우스 덕분에 일이 훨씬 수월해졌고 퀸투스는 정확한 자료를 바탕으로 원정에 관한 예산과 계획을 무리 없이 짜낼 수 있었다. 그것은 퀸투스의 의무. 전쟁을 앞당기고 있는 것은 간간히 계속되는 파르테아의 해적질도, 알렉산드리아에서 날아드는 연서도 아닌 진주알을 굴리고 있는 검은 머리의 동쪽에서 온 남자. " 테리우스 로자 카니나의 뜻 알려줄까 ?" " 장미 열매라면서요? " " 그거야 표면적인 거고.. " 유쾌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오는 퀸투스의 모습에 불안감은 배가 되었다. 주춤주춤 뒷걸음 쳤지만 다가온 그의 손에 귀가 잡혔다. 이윽고 들리는 귓속말에 손 들고 있던 주판이 맑은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것을 무시하고 그냥 들어야 했다. "!!?!!??!?!!!?!?????!!!!???!!??!!?!?? " " 큭큭...자네 얼굴이 정말 불타는 노을같은 걸? " 거..거..짓말? 우우 이거 혼자 다해요!!!!!!!!!! " "어이? 어어 테리우스 이봐!!!!!!!!!" 붉어진 얼굴을 감싸쥐고 한 손에 단검을 들고 뛰어가는 모습에 군사들이 주춤 주춤 물러서고 있었지만 태우의 눈에는 그 것이 보이지도 않았다. 퀸투스의 목소리가 귓전에 맴돌았다, 에코처럼 겹쳐지는 "로자 카니나" 라고 속삭이던 낮은 베이스 보이스.......... " 우아아아 " ' 로자 카니나는 말야, 장미의 열매라고... 하지만 정인(情人)이라는 뜻도 있지. 흐흐 로마의 남자들은 말야, 특히 같이 뜨겁고 달콤한 밤을 보내고 싶은 상대에게 유혹하듯 던지는 밀어로 사용한다고........" # 3 " 그래, 그래서 그분은 어찌하고 계시더냐? " 매끄러운 곡선을 그리는 손이 석류의 껍질을 열어 붉고 도발적인 입술에 털어 넣었다. 근처에 시립해 있던 병사가 무엄하게도 화사한 빛이 서린 얼굴을 바라봤기에, 그녀는 차가운 눈을 돌리지도 않 고 왼손을 들어 그 병사를 성스러운 코브라에게 제물로 바칠 것을 명했다. 차르미안은 여왕의 심기가 불편하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닫고 더듬 더듬 아테네에서의 일을 고했다. 언제 여왕의 손이 위대하신 라의 사자인 코브라에게 그녀를 보낼지 모른다. 여왕의 검고 깊은 눈동자는 아테네에서 보았던 그 자의 눈 보다 깊고 두려운 늪과 같았다. " 카이사르의 누이가 로마로 떠나셨지만 이렇다할 움직임은 없는 듯하옵니다. 안토니우스님은 당분간 아테네에 머무실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파르테아가 계속해서 무력 도발을 하고 있습니다만 아직 동방으로 군사를 돌리고 계시지 않습니다. 카이사르 미노르가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와의 전쟁을 치르고 난 뒤 수습에 여념이 없고 또 카이사르 미노르가 레피두스와의 동맹을 깨고 그를 탄핵하여 집정관에 자리에서 몰아냈는지라 현재 로마는 안토 니우스 장군님과 카이사르 미노르 손에 양분되어 있는 실정입니다. 그래서 안토니우스님께서도 이곳으로 오지 않으시는 것..... " " 그런데도............ 내게 오지 않는다? " 클레오파트라는 파들파들 떨고 있는 차르미안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고 누비아에서 잡았다던 표범 가죽에 깊이 몸을 묻으며 중얼거렸다. 차르미안의 이야기는 며칠 전 호루스의 날개들에게 들었 던과 전혀 다르지 않았다. 단지 호루스의 날개들이 상세한 정보를 여왕에게 전해 주었지만 차르미안은 은근히 자신의 생각까지도 아뢰는 영특함을 보이고 있었다. 지금 쯤이라면 안토니우스는 그녀의 품안에 있어야한다. 건방진 라티노 계집의 품이 아니라. 안토니우스의 세력이 동방에서는 아직 위세를 떨치고 있으나 옥타비아누스가 폼페이우스의 잔당을 규합하고 레피두스의 세력마저 흡수했다면, 힘의 저울은 수염이 덜 자란 카이사르의 편을 들게 될 것이다. 안토니우스의 무력의 힘은 강력한 육군에 있었다. 카이사르와 함께 갈리아의 땅을 유린 한 것도 안토니우스의 육군이었다. 옥타비아누스가 그 자신의 세력에 레피두스의 해군을 흡수했다면 안토니우스 는 그녀의, 이집트의 해군이 필요할 것 이다. 그런데도..........내게 오지 않는다? 옥타비아누스와의 일전을 안토니우스는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녀의 힘을 필요로 하는데도 고개를 숙이지 않는 그의 오만함에 클레오파트라는 웃음이 새어 나오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누가 있어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정복하랴. 그를 정복할 수 있는 것은 그 자신 뿐일 테지........... 지금 당장 옥타비아누스가 안토니우스의 뒤를 칠 수는 없을 지라도, 먼 훗날의 일이 아니다. 그러니 안토니우스는 알렉산드리아로 올 것이다. 나의 품안에, 나 이집트의 여왕 클레오파트라 프톨레마이오스에게. " 허나 속주에서 물자를 차출하고 계시고 파르테아가 소란스러우니 곧 이 곳으로 납실 것입니다. " 냉큼 여왕의 혼잣말에 말을 바꿔 대꾸한 차르미안은 고혹적인 검은 눈동자가 그녀에게로 향하자 납작 엎드려 자비를 구했다. 여왕께서는 그녀에게 대답을 구하지 않으신 것이다. 제발, 코브라에게는 바치지 말아주세요... 나일의 악어들도 저는 맛없어 할 거에요... 바들 바들 떨던 차르미안은 높아지는 여왕의 웃음 소리에 무엄하게도 고개를 살며시 들었다. "호호호호! 차르미안, 차르미안. 너의 말대로 될 것이다. 어찌 두려워하느냐? " " 여....여왕 폐하....." " 그런데 네가 보았다던 파르테아의 남자에 대해서는 더 아는 것이 없느냐? " " 예...잘은 모르오나 알아본 바로는 옥타비아와도 아무런 관련이 없었고 어느 해역에서 바다에 빠진 그를 구했다는 것 뿐, 파르테아를 비롯한 트라키아나 다른 어느 나라와도 연줄이 없었습니다. 그래서...출신을 알아내지는 못하였나이다..." " 그래? 그럼 첩자나 간자는 아니라는 말이구나. " 최고의 실력을 자랑하는 호루스의 날개들도 알아내지 못한 것이라면 차르미안이 직접 보고도 그의 출신 을 살피지 못한 것이 흠이 될 수는 없는 일이었다. 호루스의 날개는 '테리우스' 라는 이름의 남자가 유스티아의 저울보다 더 정확한 셈으로 어리석은 속주의 왕가의 곳간을 열고 있다는 소식을 가져왔다. 클레오파트라는 그가 차르미안이 보았던 남자임을 확신했다. 지중해 최고의 정보력을 자랑하는 호루스의 날개들은 그의 내력을 알아보지 못한 것에 여왕은 불쾌한 불안감이 들었다. 그에 대한 처벌을 생각하면서 바닥에서 떨고 있는 차르미안에세 여왕은 부드럽게 말문을 열었다. "차르미안, 내 곧 편지를 써 네게 줄 터이니 실류커스를 시켜 안토니우스에게 떠날 차비를 하라고 일러라. 그리고 이 것은 네게 내리는 황금이다. 이만 물러가도록 해라. " " 예, 분부 받들겠나이다.. 세상에나....너무나 과분한..... 황공하옵니다, 마마 " 차르미안의 두 주먹만한 황금을 내리고 손짓으로 주위를 물린 클레오파트라는 신맛이 도는 무화과를 천천히 삼켰다. 달콤한 향에 홀리듯이 입에 넣었지만 남는 것은 혀끝이 에리도록 시린 맛. 마치 당신의 키스와 같은 맛이로군, 안토니우스. 손 끝에 닿지 않은 심장을 가진 사람. 안토니우스............... 안토니우스............... 처음 만났을 때의 그는 활기찬 젊은 장수였고 클레오파트라 7세는 이집트의 여왕이자 카이사르의 정부였다. 라의 영광와 이시스의 은총을 이어가는 것, 그것이 이집트 여왕의 신성한 의무였다. 파라오 율법에 따라 남매 간의 결혼을 통한 여인들의 왕위계승을 인정했기 때문에 그녀는 왕위계승의 음모와 야심의 질투로 갈기갈기 찢겨진 왕실에서 살아남기 위해 18 세의 나이에 10살 난 남동생과 혼인해야했다. 그녀는 왕의 딸이었고 왕의 아내였지만, 그녀의 영민함을 두려워한 남동생의 세력에게 사막으로 밀려나 언제 죽을지 모를 운명에서 카이사르를 만났다. 카이사르의 칼에 피를 나눈 동생이자 한때는 남 편이었으며 정적이었던 프톨레마이오스 13세가 죽었다. 그녀는 로마인의 손에 여왕이 되었지만 파라오의 율법에 따라 유일하게 살아남았던 막내 동생과 혼인해야했다. 막내 동생을 차가운 신전에 유페시킨 그녀는 파라오의 어마어마한 권한을 두 손에 쥔 ' 살아있는 법'이 된 것이었다. 혹자들은 그녀가 카이사르를 농락하여 이집트를 얻어내었다고, 고귀한 이시스의 여왕이 바다건너 침략 자에게 이집트를 바쳤다고 이야기하곤 했다. 하지만 너의 남편을 죽여 줄 테니 네가 가진 것을 달라며 미소를 지은 것은 다름 아닌 카이사르 임페라토르였다. 남동생에게 호위군도 없이 시녀들과 함께 쫓겨난 여왕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다. 처음으로 남편이 13살 난 어린아이였다는 사실에 진심으로 감사했다. 카이사르는 이집트를 그녀의 손에 쥐어주는 대가로 여왕의 동정을 받았다. " 안토니우스! 이 친구는 내가 가장 신뢰하고 아끼는 장수일세. 모두들 군신 마르스의 현신이라고들 하지! " " 처음 뵙겠습니다. 여왕폐하. 신은 임페라토르의 기사대장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라 합니다. " " 반가와요. 금빛의 장수여. " 클레오파트라는 살구 색의 비단으로 만든 부채로 살며시 얼굴을 가리며 인사했다. 혹시나 목소리가 떨리지는 않았을까 걱정하였지만 카이사르는 그녀의 어깨를 쓰다듬으며 호쾌한 웃음을 보일 뿐이었다. 카이사르는 이 젊은 장수의 마중을 진심으로 기뻐하는 눈치였다. 알렉산드리아에서 로마로 개선하는 카이사르의 길을 클레오파트라가 따라 나섰다. 로마에서 그녀의 소문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던터라, 항구에서부터 카이사르의 별장에 이르기까지 조소와 멸시어린 눈길에 익숙했던 그녀에게 예의바른 장수 의 환영은 의외였고 내심 반갑기도 했다. 카이사르의 물음에 순순히 대답하며 식사를 하는 와중에도 거친 군인 같지 않은 공손함 을 잃지 않았다. 안토니우스는 서른의 나이를 채우려면 이태가 남았다고 했다. 전장을 호령했던 기질이 가라앉지 않아 십 년을 젊어 보이던 카이사르가 안토니우스 옆에서는 푸른 들판에 서있는 시든 고목처럼 보였다. 벌써 사 년 간 카이사르를 가까이에서 지켜보았지만 그의 눈에는 그 어디서도, 그의 침상 안에서도 볼 수 없었던 신뢰와 애정이 담겨 있었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표정에서도 진심 어린 경애(敬愛)를 읽을 수 있었다. 불가사의했다. 그녀가 아는 카이사르 미노르는 냉혹하고 속을 드러내지 않는 위정가였다. 그는 그녀가 나이에도 힘을 잃지 않는 그의 상징을 애무할 때도 검을 멀리 떼어놓지 않았다. 태양처럼 빛나는 웃음 속에서 클레오파트라는 젊은 장수의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깊은 시련과 상처를 발견했다. 그럼에도 환하게 웃을 수 있는 그를 잊을 수 없었다. 그의 내력이 진심으로 궁금했었다. 그랬다. 그 때는 단지 잊었다고, 그녀의 가슴 속 에서 이미 사라져 버렸다고 생각했던 소녀같은 호기심일 뿐이었다. 어떤 사내이기에, 몸을 섞는 그녀에게도 진심을 내주지 않았던 카이사르가 진실로 신뢰하는지, 한 인간에 대 해 그토록 진심으로 존경 어린 마음을 가질 수 있는지 피로 얼룩진 그녀의 삶 속에서 찾아든 단 한줄기 호기심이었다. 그 호기심이 다른 감정으로 전이되는 것은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무화과의 즙이 혀끝에서 사라지는 순간 클레오파트라의 흑갈색의 눈동자가 떠졌다. " 그 푸른 눈에 담고 있는 것은 무엇이지? " 클레오파트라는 바다보다 깊고 하늘 보다 푸른는 눈동자를 떠올렸다. 마음이 없는 사내에게 몸을 맡기는 것은 단 한번이면 족했다. 안토니우스 당신의 그 칼 앞에 영예의 승리가 장식되기를, 가시는 발길마다 승리의 꽃송이가 뿌려지기를, 그러나 그대가 누울 관은 오직 나 한 사람뿐이기를. 그대의 마지막은 나이기를. # 4 안토니우스가 하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머리 속으로 이해가 되었다. 잔인하게도 너무 잘 이해가 되었다. 그가 이유와 정황을 들어 차근히 설명해 주고 있었지만 그저 단 한 문장 아닌 문장이 기억 날 뿐이었다. 차가운 활자로 써있었던 안토니우스의 파르테아 원정 실패의 원인이라는 로마사 책의 한 소제목과 그 내용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은 왜 일까. 글자 하나 하나가 생생히 기억이 나는 것은. " 그러니까, 테레우스? 듣고 있어? " 화들짝 놀라 그렇다고 어색한 미소를 지을 수 밖에 없었다. 어떻게 해석을 했는지 안토니우스는 작은 한숨을 내쉬고는 멍한 표정의 태우를 껴안아 주 었다. 토닥이는 그의 손길에 눈가가 아려왔다. " 걱정하지마, 언젠가는 치를 전쟁이고 지금이 때가 되었던 것 뿐이야. 나는 돌아오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아. " 나는 알고 있어요. 당신의 전쟁의 결과를. " 왜 이 원정을 시작하나요? 파르테아를 평정하는 자가 지중해와 오리엔트를 통일하고 황제가 될 거라는 전설 때문인가요? " 하지만 모르고 있어요. 당신이 전쟁을 하는 이유를. " 그걸 알고 있었나? 그래, 그런 미신도 있긴 하지. 알렉산도로스(알렉산더 대왕)처럼 끝이 없는 영토를 갖게 될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 런 것과 상관 없어. 동방의 집정관으로서 개전하는 거야. 파르테아가 더 이상 방자하게 구는 것을 볼 수만은 없지. 동방무 역이 어려워지고 있어. 꼭 승리해서 개선할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아. " 자신 있게 웃는 안토니우스를 향해 똑같은 미소를 되돌려 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웃을 수 없다. 만약 연기를 배웠더라면, 하다 못해 학예회에서 지나가는 남자2의 역이라도 했었더라면 나는 그의 앞에서 여전히 웃을 수 있을까. " 왜 그런 표정을 짓는 거야? 내가 걱정되는 것인가? " " 네......" 기분이 이상했다. 말 한마디의 무게가 이리도 무거웠던 적이 있었을까? 가슴 속에 치밀어 오르는 두 개의 욕망. 그에게 말해. 너는 그래서는 안 돼. 두 개의 파라독스. 나는......나는........ " 테리우스? " 안토니우스는 너무 성급하게 전쟁의 이야기를 꺼낸 것이 아닌가 후회가 들었다. 전쟁이 시작된다면, 이 전쟁은 오래 끌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초반에는 떨어져 있어야하는 것도 사실이다. 피가 난무하는 전쟁터에, 어디서 시작될지 모르는 적의 공격이 있는 곳에 데려갈 수는 없었다. 많이 익숙해졌다고 하지만 그는 이 곳의 사람이 아니다. 그 부분에 있어서 안토니우스는 근거 없는 강한 확신이 있었다. 검을 배우겠다는 철없는 결심을 강경하게 반대했던 것도 그에게는 한번 쥐게 되면 반드시 피로 물드는 검의 무게를 알게 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는 전쟁에 나가는 자신의 입장을 설명하고 있었다. 그에게는 허락하지 않은 검을 쥐고 자신 있게 돌아오겠다고 그 검에 수백, 수천의 피를 묻혀 돌아오겠노라 자신하고 있었다.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이 깊이 가라앉은 눈으로 응시하는 그에게. 그의 눈에 비친 자신의 그림자가 이렇게 수치스럽고 초라했던 적이 없었다. 단 한번도 초라함을, 유약함을 느끼지 않았었다. 그러나 이 검은 눈을 마주할 때면 안토니우스는 한없이 작고 약한 짐승이 되었다. 이 밤하늘 보다 광활하고 많은 빛을 가진 검은 눈동자에, 안토니우스는 길게 입을 맞췄다. " 돌아올게. 네게 돌아올게. " 툭. 툭. 투둑. 안토니우스의 옷자락에 짙은 얼룩이 점점히 박혔다. 로마를 떠나온 이유 어느 샌가 눈물을 그쳐 버린 그였다. 악몽을 꾸는 일도 없어지고 어딘가 멍하게 응시하는 버릇도 사라져 버린 그였다. 그래도 단 한마디 자신의 말에 눈물을 흘리는 그였다. 안토니우스는 주먹을 쥐고 고개를 숙인 채 말없이 눈물만 흘리고 있는 그를 보듬어 안았다. 뜨거운 물이 어깨 죽지에 닿았다. 얼굴에 비단 같은 검은 머리의 감촉이 느껴졌다. 머리를 쓰다듬고 등등 토닥이며 볼에 닿은 정수리의 감촉을 느끼며 안토니우스는 테리우스를 안은 손을 풀지 않았다. " 약속할게, 상처 하나 없이 지금 이 모습 그대로 너의 앞에 서겠다. 네게 돌아올게. 네게 돌아올게.........." 부드럽지만 강하게 조여오는 팔 안에서 태우는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르는 말을 삼키고 또 삼켜야했다. 악몽에서 깨어나면 눈 앞에 항상 눈부시게 아름다운 이 사람이 있었다. 눈물을 흘리는 가슴이 되어 주었다. 울라고 했다, 원 없이. 언젠가 멈추는 것이 눈물이라면 다 흘려보낼 때까지 울어도 된다며 그 눈물을 모두다 받아준 이가 있어서 살 수가 있었다. 돌아가고 싶었다! 자신의 고향은 이 곳이 아니다! 혜준이 화사하게 웃고 있을 그 곳으로 가고 싶었다. 죽고 싶었다. 죽은 자의 영혼에게 시간과 공간의 속박이 없다면 그리운 이를 만나고, 기다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죽는 것으로 끝이라면? 천국도 지옥도 없이, 윤회나 환생이니 하는 것이 모두 거짓이라면? 카피토가 쥐어준 단검으로 심장을 겨누고 목을 찌르려 한 적이 수도 없이 많았다. 적막같은 공포가, 그가 속한 세상에 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쉽게 생을 포기할 수 없게 했다. 그래서 살 수 있었다. 살내음이 있어, 안아주는 이가 있어 생명의 끈을 놓지 않고 살아있었다. 웃으며, 숨쉬며, 살아 있다는 것을 느꼈다. 죽지 않고 살아남은 것을 감사했다. 그래서 착각했었다. 그토록 가슴 아프게 사랑하는 혜준도 잊고 그와 보냈던 기억들을 저 구석으로 밀어버리고, 마치 이 곳의 사람인양 살았다. 모두를 기만하고, 속이면서 살았다. 이 사람에게 기대어 살았다. 이 사람에게 안겨 모든 것을 잊고 살았다. 그러나 자신은 이 곳에 속한 이가 아니었다. 눈부신 그가 돌아올 장소는 자신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애초부터 불가능한 설정이었다. 나는 이 곳에 있어서도 안되고 존재할 수 없는 사람이야. 언젠가 한줌의 먼지처럼 사라질......... 어쩌면 한 순간에 이곳으로 왔던 것처럼 순식간에 다시 미래로 돌아갈지도 모른다. 시대에 속하지 않은 허상 같은 자신. 그러나 그림자 속에서 또아리를 틀고 있던 욕망은 이 사람을 원한다. 대답하지 않았다. -내게 돌아오세요. 내게는 불가능한 자리였다. 이제야 깨닫게 된다. 그와 나 사이에는 2000년의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나는 당신께 돌아오라는 말을, 내게 돌아오라는 말을 할 수가 없어요. 태우는 안토니우스의 입술에 격하고 깊은 키스를 했다. 당황하는 그의 얼굴을 잡고 처절한 키스를 했다. 그의 목덜미에 이를 세우고 그의 귓불을 훑었다. 그의 가슴에 키스했다. 나지막한 웃음과 한숨에 귓가에 실려왔다. 두 팔로 그의 목을 안고, 그의 두 팔은 나를 안아들었다. 금빛으로 빛나는 그의 머리 한올 한올에 일일이 입맞추었다. 둔부를 감아쥔 그는 성큼 성큼 침실로 걸어 갔다. 우리가 지나간 자리에는 흔적처럼 옷가지가 피었다. 노을 받아 동황빛으로 빛나는 침상에 걸터 앉은 그에게 끊임없이 입맞추었다. " 테리우스.........." 이름 아닌 이름에 대답하지 않고 그를 침상에 뉘여 그의 탄탄한 허벅지에 걸터 앉았다. 춤추듯이, 부드럽게 그의 수술과 위에 나의 수술을 감싸쥐고 율동을 탔다. 나른한 신음을 흘리는 그의 입술에 입맞추고 싶었지만, 노래 가락같은 신음성에 한쪽 귀를 그의 심장에 가져다 대었다. 두근 두근 두근 살아있다. 그는 살아있다. 활자속이 아닌 내앞에서 숨을 쉬고 있다. "하아, 테리우스.........으음, 하아........하아.........." 등줄기를 훓어 내려온 손이 굴곡과 굴곡 사이를 침범하고, 눈을 감고 움직임을 즐기는 그가 얄미워 가슴에 솟은 그것을 힘껏 깨물어 주었다. 쿡쿡 거리는 웃음소리와 항의 어린 불기 한 대. "눈을 감지 말아요, 푸른 눈을 보여줘요. 하늘인지, 바다인지 보고 싶어. " 티끌하나 없는 최상급의 터키석 같은 눈동자 속에 비치는 나는 마치 익사체같아서 슬펐지만 그 때 내가 추락한 곳은 파도치는 바다가 아니라 이 푸른 눈동자였음을 지금에서야 알 수 있었다. 그 눈을 마주하고, 유채꽃에 흰나비가 내려앉듯, 그의 수술을 품었다. 눈앞이 하얗다. 푸른 하늘을 표류하는 나의 정신에 햇살이 수직으로 떨어졌다. 깊은 바다에 비치는 살아있는 나. 타오르는 불꽃, 불사르는 열락. 추락, 끊임없는 추락. 상승, 끝없는 상승. 심해에서 올라오는 듯한 소용돌이가 나의 몸을 감싸 흔들었다. 내부에서 용솟은 치는 뜨거운 불기둥에 매달렸다. 산산히 재로 화해 부서지는 몸을 그가 받쳐드는 순간, 눈부시게 빛나는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거대한 백색의 수선화가 피었다. # 5 나는 알고 있다. 그의 원정이 실패하게 되리라는 것을. 그러나 그에게 실패를 말 할 수 없다. 아르메니아가 파르테아와 내통해서 게릴라전을 펼친다. 파르테아는 대군을 이끌고 전선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교묘한 게릴라 전으로 당신의 군대를 괴롭혀 사기를 떨어뜨린다. 전면전에 탁월한 당신은 그들의 잔 공격에 지치고 열병을 앓고, 당신의 군대에 한 겨울에는 드문 열병이 돌아서 많은 병사들이 죽는다. 현지 마을에서 당신의 군대를 도와주지 않아 당신은 많은 마을을 약탈하고 그들을 학살한다. 확실히 기억하고 있다. 수업시간에 이탈리아에서 고대 로마사를 전공한 강사는 이런 코멘트를 했었다. 만약 안토니우스가 파르테아 원정을 시작하지 않았다면 지중해의 패자는 아우구스투스가 아닌 안토니우 스가 되었을 것이다. 역사에 가정이란, 만약이란 없다는 것이지만, 나에게 그것을 바꿀 힘이 있지만 그러나.......나는 말할 수 없다. "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안토니우스가 떠나는 게 섭섭해? " " 후후, 퀸투스도 많이 보고 싶을 거에요, 이아로스도요. " " 드미트리우스에게 잘 말해두었습니다. 아무쪼록 아테네 밖으로는 나가지 마시구요 " " 네. " 안토니우스는 함대 사령관과 함께 선장들을 만나고 있었다. 출항 준비에 한창인 함선을 보는 데 퀸투스가 이아로스를 달고 다가왔다. 이아로스는 안토니우스의 부관이 아닌 전차부대로 이루어진 독립대의 지휘관을 맡게 될 것이라고 했다. " 엑! 이아로스가 전차를 몰아요? " ".........자랑은 아니지만, 전장에서 짐이 될 정도는 아닙니다. 일단 저도 군인입니다만. " 항상 서류 정리를 하는 이아로스를 보았던 차라 그가 군대를 지휘한다는 것에 상당히 놀랐다. 그게 상당히 불만이고 자존심이 상했던지 이아로스는 이튿날 태우에게 현란한 솜씨로 전차를 모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벤허에서 보았던 경주용 전차가 아니었다. 한 사람은 전차를 몰고 다른 사람이 창이나 검을 가지고 공격을 한다고 한다. 보통은 셋이 타지만 이아로스는 말을 모는 사람 외에 혼자 올라 장창 으로 허수아비를 찌르고 단창으로 허수아비의 머리를 날려 버렸다. 어느 새 곁에 와서 선 안토니우스는 저 창 솜씨는 자신도 이길 수 없다며 웃었다. 서류를 들고 잔소리를 하는 그만 보아서 낯설었지만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애창을 손질하는 그의 모 습은 진정 군인 같았다. 퀸투스는 참모겸 군사로 본대에서 안토니우스와 있을 것이니 이들은 같이 전장에 나가서도 이별을 하게 된 셈이다. 새로운 부관은 안티오키아에서 합류하는 군대에 있는 기병대장이라 했다. " 걱정되나? " " 사실은 그래요. " " 의외였어, 네가 따라나설 줄 알았거든. 안토니우스도 알게 모르게 너를 데리고 갈 준비를 했지. " 퀸투스는 자주색의 돛을 펄럭이는 기함 아이스타스를 바라보고 있는 그에게 물었다. 검은 눈이 무슨 생각을 담고 있는 지 퀸투스는 정말 알 수 없었다. 안토니우스는 강하게 데려갈 의사를 표현하지도 않았지만 두고 가는 것도 내켜하지 않았다. 진정 그렇게 보였다. 그러나 테리우스는 자신은 폐만 될 거라며 아테네에 남겠다했다. 피가 난무하는 전장에 분명 테리우스는 어울리지 않는다. 퀸투스는 내심 안심이 되면서도 한편 걱정스러웠다. 며칠 새 그의 검은 눈은 더욱 깊어진 것 같다. " 걱정은 되지만 두렵거나하지는 않아요. 안토니우스는 무사해요." " 그래? 너의 말이라 그런지 더 신뢰가 가는 걸? " " 퀸투스도, 이아로스도 무사히 돌아오세요. " 테리우스는 퀸투스와 이아로스도 무사하다고 말하지 않았다. " 물론 이야 " " 건강하십시오 " 그들은 떠난다. 나는 웃으며 그들을 사지로 보낸다. 어쩌면 내가 아는 군인들이 영영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아로스도 퀸투스도 다시 볼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역사는 그가 파르테아 원정을 실패했다는 단순한 사실을 전하고 있을 뿐이다. 무뚝뚝한 카피토가 사실은 얼마나 다정하고 귀여운 사람인지, 깐깐하고 잔소리가 많지만 마음이 무척 따뜻한 이아로스가 있다는 사실도, 하고 싶은 말을 한없이 늘려할 수 있는 재주를 가진 유쾌한 미소를 짓는 퀸투스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 지는 않다. 내가 이 사람들을 얼마나 사랑하는 지 따위는 역사에 나오지 않는다. 안토니우스는 살지만 이들은 그 원정에서 죽었을지도 모른다. 겨울에 감기를 조심하라고, 했던 말을 또 하고 또 하는 이아로스를, 돌아올 때 멋진 페르시아산 양탄자를 사다주겠다는 퀸투스를 다시 만나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 단 한 마디면, 그들을 살릴 수 있을까. 혹은 그 한마디가 이들을 죽게 하는 것은 아닌가. 살아남을 자가 죽고, 죽을 자가 살아남게 되는 것은 아닐까. " 꼭 돌아오세요. " 또 한 번의 당부에 두 사람을 혹시 다시 볼 수 없을 지도 모르는 미소를 환하게 지어 주었다. . . . " 잘 다녀올게, 승리한다면 네가 와서 개선을 하지! " 뱃전에 오르기 전에 안토니우스는 한 번 더 다짐을 했다. 웃자, 지금은 웃어야 할 때, 얼굴에 가득 신뢰를 담고 지금은 웃어야 할 때. " 네.......기다릴게요. " 너무 힘들어하지 말고 돌아오세요. 빙그레 웃는 그에게 승리의 월계수가 아닌 패배는 어울릴 것 같지 않았다. 그런데도 신은 그에게 패배를 주신다. 하느님. 당신의 아들이 아직 오시지 않는 이 땅에 저는 서 있지만 지금 제가 이곳에 있는 것이 당신의 뜻이라면 당신의 은총을 이 사람에게 내려주세요. 당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달아 매다는 자들이 그의 후손들일지라도 그를 보호해주세요. 그를 무사히......지켜주세요. " 그럼 갈게, 카피토, 테리우스를 잘 부탁한다. 너를 믿는다. " " 예, 주인님. 제 생명을 걸고 지키겠습니다. " 카피토는 그 전과 같이 그를 따러나서겠다거나 하지 않았다. 어느 샌가 테리우스를 지키는 것이 자신의 본분인양, 안토니우스의 당부를 가슴깊이 새겼다. 안토니우스는 그의 생명의 은인이요, 그의 생명의 주인이었다. 그래서 카피토는 아테네에 남는 것을 선택했다. 그의 주인이 그것을 바라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기에, 카피토 는 테리우스의 오른편 한 발짝 뒤에 섰다. 전 날밤에 테리우스는 떠나주지 않아서 고맙다고 이야기했다. 원래대로라면 당신을 떠나보내야 옳지만 그가 남아줘서 다행이라고 이야기했다. 그 의미는 알 수 없었지만 카피토는 안토니우스님께서 돌아오실 때까지 이 아름다운 사람을 상처하나 없이 지킬 거라고 맹세하였다. 그 맹세를 카피토는 지켜내었고 훗날에도 전혀 후회하 지 않았다. 안토니우스는 그런 카피토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얼굴을 쓰다듬는 손이 조금 떨리고 있는 것은 착각일까. 그럼, 안녕을 속삭이며 떠나는 손을 잡았다. 의아한 얼굴에 그에게 며칠 전부터 생각하고 있던 말을 꺼냈다. " 부탁이 있어요. 다음에 다시 저를 만나면, 태우라고 불러주세요. " " 그게 너의 진정한 이름인가? " " 네..." " 약속하지, 돌아오는 그 때에 진실된 그 이름 앞에 네게 입맞추리니....." 이마에 닿은 짧은 키스, " Salve, meus! " " Salve...." 금빛으로 빛나는 미소가 보고싶을 것 같다. 낮게 읊조리는 목소리가 그리울 것 같다. 그의 함대는 거대한 돛을 펴고 그가 올라 출항을 명하길 기다리고 있다. 배에 오르는 그의 모습은 당당하고 아름다웠다. 부디 무사히 개선하기를. 역사의 어떤 미묘한 변화가 당신을 해하는 일이 없기를. " 출발! 닻을 올려라!!!!!!!!!!!! " Slave, 안녕히. Meus 라고 속삭일 수 없는 나. 메우스, 나의 사람. # 6 "누나~ 옥타비아 누나, 빨리 해! 아이씨!!!!!" "어머, 얘는! 머리를 감았으면 말려야지~ 어딜 도망가려구!!! " "정오쯤에 도착하신다고 했단 말이야! 나 나갈래~~ " "감기 들어! 어머 얘 옥타비안 머리 다 말리고 가!!!!!!!!!" 물에 젖은 검은 곱슬머리를 흔들어 물기를 털어버리고는 옥타비안은 한 켠에 놓여있던 토가를 들고 누이의 손에 벗어나 달아났다. 평소에 큰 소리를 잘 내지않는 그녀의 드물고 드문 고함소리를 뒤로하고 정원을 가로질러 뛰었다. 지나가던 군사들이 어린 도련님께 인사를 건냈지만 그 쪽에 눈길 한번 돌리지 않고 마을 입구에 자리잡은 언덕으로 신나게 달렸다. 벌써 오셨으면 어떡하지? 다 누나 때문이야!!! 수확물을 걷고 있는 아낙들도 양을 몰고 가던 목동들고 봄날의 새싹처럼 고운 연두빛의 튜니카를 입고 짙은 녹색의 토가를 손에 쥐고 뛰어가는 소년의 모습에 하던 일을 멈추고 미소를 보냈다. " 하하! 옥타비아누스님, 어디를 가시나요? " " 벤투스 언덕에! " " 오늘 누가 오시나요? " " 그래! 아참! 루시아! 이따 새로 짠 염소젖 가져다 주는 거 잊지마! " " 예에!! 막 잡은 양고기도 가져 갈테니 걱정마세요!! " 옥타비안은 푸근한 얼굴의 루시아에게 손을 크게 흔들어 보이고 벤투스 언덕, 바람을 맞는 곳이라는 아름다운 이름 을 가진 그 곳으로 신나게 달렸다. 데메테르가 약속하신 은총을 거두워 들이는 황금의 계절, 동쪽에서 불어오는 에우로스의 숨결과 함께 그 분이 오시는 날이다. 톡... 떼구르르 톡... 꼬르르륵...... 푸른 하늘 한가운데 수레를 멈추고 서 있던 헬리오스가 벌써 지평선을 향해 달린지도 꽤 되었다. 뉘역 뉘역 해는 기울고 있고 정오가 지난 지 한 참이 되었지만 양떼를 모는 목동들만 지나갈 뿐 흔하디 흔한 말먼지는 보이지도 않았다. 벤투스 언덕 위에 우뚝 서있은 상수리 나무 아래에 앉아있는 소년은 손에 쥐었던 돌을 또 한번 던졌다. 식사시간을 훨씬 전에 놓친터 라 배속에서 꾸르륵 소리가 연신 흘러나왔지만 소년의 머리 속에는 좋아하는 양고기 구이도, 스튜도 떠오르지 않고 있었다. "거짓말쟁이....... " 탄식같이 흘러나온 중얼거림에 손등으로 톡톡 떨어지는 눈물까지. 서럽고 서러워서 펑펑 눈물을 쏟고 싶었다. 기다렸는데. 눈이 빠지도록 건널목에서 들어오는 길을 바라봤는데. 지평선은 무심하게도 잠잠하기만하다. 바스락, 자박 자박. 아까 옥타비아가 식사를 하라고 부르러 보낸 시종이 다시 온 것 같아 옥타비안은 다짜고짜 소리부터 질렀다. " 안 먹어!!!!!!! 아무것도 안 먹어!!!! 날 좀 그냥 내버려두고 가란 말이야!!!!!!! " 저벅 저벅, 크게 소리를 질렀음에도 발자국 소리의 주인은 더 가까이 다가왔다. " 그냥 가라니까!!!!!!!!!! 가 버려!!!!!!!!! " 저벅 저벅 탁. 발자국 소리가 바로 옆에서 멈추었지만 옥타비안은 무릎에 고개를 파 묻은 채 움직일 생각도 하지 않았다. 오늘 오신다고 했는데..... " 정말 그냥 갈까? " 어딘가 모르게 웃음기를 담고 있는 기분 좋은 울림. 쏟아지던 눈물이 거짓말처럼 멈추었지만 옥타비안은 차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설마? " 옥타비아가 맛있는 양고기 찜과 염소젖까지 준비했는데 네가 안 온다고 속상해하던데. 그럼 나라도 맛있게 먹어줘야지. 진짜 나 갈게, 옥타비안 " 하루종일 기다렸던 낮은 목소리의 주인은 야속하게도 단 번에 가버린다고 한다. 정말로 가버릴 까 황급히 고개를 들었는데 눈 안에 펼쳐지는 것은 환한 미소를 짓고 있는 그의 얼굴. "흐엉...흐어어엉...정..훌쩍..정오에...온다고 해서..흐어엉..여기서 기다렸는데...훌쩍.. 흐어어엉" "이런 이런, 옥타비안.. 이렇게 왔잖아? 그만 울어,, 착하지? " 커다란 손이 번쩍 소년을 안아들었다. 옥타비아는 코끝에 황금실같은 머리가 간질간질하게 닿는 것을 느끼며 그의 목덜미 를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등을 토닥이는 그의 손길에 14살의 나이를 잊어버리고 더더욱 큰소리를 내고 울어버렸다. "우아아아앙!!!!!!! " " 여기서 기다렸던거야? 이 번에는 더 빨리 오려고 배를 타고 온 거였는데. 그래서 서쪽 입구로 들어왔었거든. 몰랐었어? " 잊고 있었다. 항상 말을 타고 오던 생각만 하고 정오에 배가 닿는 다는 옥타비아의 설명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밀았다. 얼굴이 홍당무처럼 빨개졌을거라 생각하고 옥타비안은 더욱 그의 넓은 가슴팍으로 파고들었다. " 에취! " " 옥타비안? 열이 있구나. 너 머리도 말리지 않고 그냥 나갔다며? 감기라도 걸리면 어쩌려고..." 걱정스러운 목소리와 함께 몸을 감싸는 것은 짙은 푸른빛의 토가. 다시 한번 그를 고쳐 안은 채로 안토니우스는 14살의 소년의 무게를 거의 의식하지 않는 듯 벤투스의 언덕을 쉽게 내려갔다. 그의 팔에 안긴 채 열에 취해 흔들리면서도 옥타비안은 집에 돌아가는 내내 실실 잘도 웃었다. 안토니우스가 돌아왔다. 그가 돌아왔다. " 안토니우스.........." 안토니우스!?!?!? 벌떡 일어선 옥타비안은 더 이상 14살의 소년이 아니었다. 지중해의 절반을 호령하는 25세의 집정관이 바로 그였다. " 꿈인가......." 꿈이었다. 지금은 현실인지 아닌지 조차 희미한 기억의 그림자. 동쪽하늘이 어슴프레 붉은 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밤의 여신은 아직 헬리오스에게 그 자리를 내어주지 않고 있었다. 새벽의 여신의 숨결이 아직 차가워 옥타비아누스는 두꺼운 가죽을 몸에 둘러야했다. 전혀 강인하지 못한 자신의 육체가 진정으로 저주스러웠다. 승마라도 할라치면 숨이 가빠오고 손에는 철검을 들기도 버거웠다. 어째서 백부님은 자신에게 로마를 남겨주신 것일까. 허약하고 유약한 나에게. 버거운 짐을 지어주신 것일까. 백부를 사랑했고 존경했다. 그처럼 거대한 사람이 또 어디에 있을까. 백부의 등은 바다처럼 넓고 산처럼 높았다. 전장을 호령하고 지중해를 발아래 두었던 마르스의 현신같던 백부를 진심으로 경애했다. 옥타비아누스는 언젠가 카이사르처럼 커다란 사내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백부는 큰소리로 웃으며 그를 번쩍 안아 주었다. 세상에서 백부보다 위대한 장군은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어느 신록이 빛나던 초여름 날에 햇살보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그를 만났다. 백부는 그를 이 땅에서 가장 신뢰하고 가장 강인한 군인이라고 했다. 카이사르보다도 큰 키에 황금빛 머리카락, 푸른 하늘을 담은 듯한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처음으로 백부보다 큰 사내를 보았다. .................그리고 그를 또한 사랑했다. 다정한 아버지였으며 든든한 형제였으며, 아름다운 그를 사랑했었다. 누이가 귓속말로 아폴론 신이 신가봐 '라고 말했을 때 아니라고 면박을 주었지만 정말 그럴지도 모른 다고 생각했다. 올림푸스에서 금방 페가수스를 타고 왔을지도 모른다고 진심으로 생각했다. 태양과도 같은 미소는 금방이라도 다시 하늘로 사라질 것 같아서 옥타비아누스는 그가 떠날 때면 항상 울음을 터뜨리곤 했다. 그대로 돌아오지 않을 것 같아서........ 영원히 잡히지 않을 것 같아서.......... 단 한번도 웃으면서 그를 배웅하지 못했다. 불안은 현실이 되었다. 이제 안토니우스가 떠났음을, 더 이상 벤투스의 아름다운 언덕으로 돌아갈 수 없음을, 인정해야한다. 꿈은 한낮 꿈일 뿐이다. 꿈은 꿈이기에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 기억은 망각이란 축복이 있기에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 추억 속에서 헤메이고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어리석은 자의 몫이다. 지금은 앞으로 나아가야 할때, 백부의 유지를 받들어야 할 때. 옥타비아누스는 빨갛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해를 바라보며 흐르는 눈물을 훔쳤다. 아직도 흘릴 눈물이 있었던가. 아직도 눈물을 흘릴 이유가 남아 있었던가. " 집정관님! 급한 전갈입니다!! 기침 하셨습니까? " 소란스러운 소리와 함께 군사의 말소리가 문밖 다급하게 들렸다. 무슨 일이지? 새벽부터. 등골이 서늘하게 떨려오는 것은 분명 바람 때문인가. " 깨어있다, 말하라! " 문을 열고 부복한 전령은 양피지를 옥타비아누스에게 전했다. 엄습해오는 불안감을 무시하며 옥타비아누스는 그것을 펴 읽었다. " 옥타비아님이 아테네를 떠나 로마의 외항에 도착하셔서 이곳으로 오시고 있다고 합니다. 도중에 풍랑을 만나 많이 지체되었으나 곧 저택으로 도착하실 듯 합니다. " " ...........누이가? ........여기로? " 어째서? 지금 아테네에서 행복하게 지내고 있어야할 그녀가 아닌가? 얼마 전 조카가 태어났다는 전갈을 듣고 선물도 보냈었다. 섹스투스와 전쟁을 벌이는 중에 안토니우스는 브린디시로 군함을 보내 무력시위를 하면서 그를 도왔다. 더 이상의 전쟁을 없을 것이라 고 생각했다. 평화라고 생각했다. 희망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3년 간의 평화로운 나날에서 옥타비아누스는 분명 희망을 생각했다. 그런데 그녀가 로마로 돌아왔다고? 옥타비아누스는 심장이 뛰는 불안함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었다. 단 하나 그와 연결하고 있는 끈이 끊어졌다는 것만을 알 수 있었다. 지끈 아파 오는 심장을 부여잡으며 옥타비아누스는 이곳으로 달려온, 혹은 쫒겨 났을 지도 모르는 그의 누이가 진심으로 원망스러웠다. 그녀가 있기에 언제 깨질지 모르는 이 평화가 유지되고 있었다. 옥타비아가 그 곳에 있어야 옥타비아누스는 싸움을 피할 수 있었다. 그녀는 그 곳에 있어야만했다. 그녀 만이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안을 연결하는 유일한 다리였다. 그 다리가 산산이 부서져 내리고 있었다. 단 한번도 디뎌 보지도 못한 다리가 무너지고 있었다. 전쟁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운명의 세 여신은 자신에게 에로스의 화살을 날리고 그 상대를 겨누는 검을 쥐어주었다. # 7 시리아 해안에 자리잡은 아름다운 안티오키아는 흐드러진 사이프러스나무호 안토니우스를 환영했다. 항구에서 가장 먼저 안토니우스를 맞 은 것은 검은머리를 휘날리며 흑마를 타고 달려온 기병대장 가이우스 리키리우스였다. " 안토니우스님! 어서 오십시오!! 여행은 즐거우셨습니까? " " 여행이라니, 리키리우스. 나는 원정을 나온 것이야. " " 장군께서 오셔서 군사들이 모두 기뻐하고 있습니다. 사기가 올림푸스에 닿을 듯 합니다. 미네르바께서 틀림없이 장군께 승리를 점지하신 것입니다. " 차분하고 다정다감한 성격으로 알려진 리키리우스는 드물게 말을 빨리 하고 있었다. 붉게 상기된 얼굴은 기쁨으로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안토니우스를 안티오키아의 요새로 안내하면서도 그는 끊임없이 안토니우스를 향해 미소짓고 있었다. 누구나 그 이유를 알고 있었기에 웃음이 헤픈 군인을 탓하는 이는 없었다. 가이우스 리키리우스는 안토니우스가 가장 아끼는 수하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명석한 지휘력을 가진 기병대장이었고 신기 에 가까운 활솜씨를 자랑하는 궁수이기도 했다. 안토니우스는 그런 그를 전장에서도 침상에서도 가까이했다. 퀸투스는 그 것을 잘 알고 있었고, 이 아름다운 군인이 두 눈에 경애를 담고 안토니우스는 대하는 것도 알 수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안토니 우스를 향한 깊은 신뢰와 애정이 흐르고 있어 퀸투스는 목이 갑갑하게 매어왔다. 그러나 안토니우스의 휘장을 달고 말을 달려 오 는 그의 모습에 다른 검은 머리의 사내가 떠오르는 것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리키리우스를 포옹하는 안토니우스를 퀸투스는 조금 복잡한 심정으로 바라봤다. 요새를 둘러보며 지시를 내린 안토니우스는 마련된 바다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달에 잔뜩 이그러져 있는 것이 내일은 비가 올 것 만 같았다. 낮게 깔린 구름은 밤하늘에 총총히 막혀 있는 별빛을 지상에 허락하지 않았다. 검게 물든 바다를 응시하고 있는 안토니우스에게 맛깔스런 과일와 와인을 가져온 것은 그리스식으로 검은 머리를 틀어 올린 리키리우스였다. "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 " 그냥, 언제 봐도 네 검은 머리는 참 탐스럽군. " 안토니우스는 와인을 입에 털어놓으며 그의 가슴을 애무하고 있는 리키리우스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조금 다른가? 그의 머리는 한 없이 곧게 뻗은 진실 같았지. 그의 위에서 허리를 숙이고 있는 날렵하게 뻗은 몸은 군인이라는 신분을 알려주듯 자잘한 상처와 보기 좋게 붙은 근 육으로 쌓여있었다. 그의 몸에는 흔하디 흔한 근육이 없고 말랑 말랑한 올리브와 같았다. 희지만 금빛을 뿌려넣은 듯한 황 색의 피부........... " 이곳까지 소문이 자자한 동방의 진주를 떠올리시는 겁니까? " " 후후 " 검은 머리의 흑갈색 눈동자로 부드러운 눈웃음을 보이며 리키리우스는 안토니우스의 유두를 혀로 굴리 면서 말했다. 그의 뜨거운 입김이 가슴에 닿았지만, 안토니우스는 어느 때보다 차가운 것 같다는 느낌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근육으로 잘 다듬어진 등을 쓸어 내리자 리키리우스는 점차 혀를 아래로 아래로 움직였다. 리키리우스는 안토니우스가 가장 오래 안았고, 그를 이해하는 정부였다. 처음 그를 안았을 때는 기억나지 않지만 어느 샌가 그는 한 발짝 뒤에서 조용히 따르고 있었다. 수많은 전장을 함께 했고 함께 피로 물들었다. 최강의 기마부대를 이끄는 그도 안토니우스의 침상에서는 둘도 없는 요부였다. - 질이 좋은 검은 머리로군 그 머리카락에서 안토니우스가 누군가의 흔적을 찾고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지만, 그가 자신을 통해서 누군가를 보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순간 만큼 실제로 안토니우스에게 안겨있는 것은 그 누군가가 아닌 자신임을, 그의 육체를 애무하고 있는 것은 안 토니우스임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괜찮았다. 가슴 한 켠에 나있는 커다란 구멍따위는. 그에게 안겨 있다는 사실 만으로 채워지고 있었다. 채워진다고 생각했다. 리키리우스는 막 도착한 숲속에 숨어있던 거근을 찾아 입에 담았다. 계속해서 머리를 쓸어내리는 손의 주인을 떠올리면서 정성스레 핥았다. " 으음......하아..... 하아.........." 그의 손이 머리를 거세게 쥔 순간, 리키리우스는 일어서 눈을 감고 있는 그의 장군을 올려보았다. 안토니우스는 언제가 눈을 감고 관계를 가졌다. 푸른 눈은 닫혀 있었다. 리키리우스는 허리를 들어 조심스레 중심 위에 내려 앉았다. "헉!!!!!!!!!! " " 아흑!!!!!!!!! " 리키리우스는 저릿한 허리가 무너지는 것 같았지만 가득찬 충만감을 느끼며 허리를 움직였다. 안토니우스의 커다란 손이 자꾸 휘청히는 허리를 받혀주었다. " 데려오고 싶었어, " 리키리우스는 아무 말도 없이 부드럽게 허리를 움직이면서 그의 가슴을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 정말 곁에, 밧줄에라도 묶어놓고 싶었지............." 순간 리키리우스는 자신도 모르게 그의 애널에 힘을 주고 말았고 안토니우스는 신음과 함께 낮게 웃으며 그의 엉덩이를 애무했다. " 단 한번만 따라 오겠다고 했다면 난 그냥 데려 왔을 거야. 눈에 보이는 곳에 놔두고 전장 한 가운데라 하더라도 데려오고 싶었어. " 안토니우스님............. " 이상하지? 따라올 거라고 믿었다. 말로는 남으라고 했지만............계속해서 그가 나를 따라와 주기를 믿어 의심치 않았어. 마지막까지 함께 가자고 말 하고 싶은 것은 나였다. 아니 따라 오겠다고 매달리는 그를 상상했지. " " 흐읏..하하........" " 그런데 오지 않았어, 내가 그에게 돌아간다고 해도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마치 책망하고 원망하는 듯했어. 나를............아니면 그 누군가를..... 데려오고 싶었다. 곁에 두고 싶었다. 지금도 그를 데려오지 않은 것을.......... 데려오고 싶었어................. 곁에 두고 싶었어. 그가 곁에 있다면, 내가 달려가고 있는 이 길에 후회도, 원망도 없이 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리키리우스, 이해 하겠나? 피로 물든 나를 정말 기다려 줄 것 같았어. " 잔인하시군요. 당신이란 분은. 그러나 그는 대답을 하는 대신 허리를 숙여 그의 입술을 거칠게 탐했다. 호응이 없이 받아주기만 하는 키스에 리키리우스는 가슴이 저려왔다. 당신을 경애합니다, 나의 장군. " 이제 저를 찾지 않으실 겁니까? " "............그래. " " 오늘 밤이 당신에게 안기는 마지막이 되겠군요. " "...................그래. " " 그 분을 사랑하십니까? " ".................." 리키리우스는 허리를 움직이면서 대답을 재촉했지만 안토니우스는 그저 말없이 웃을 뿐이었다. " 왜 우는 거지? 리키리우스? " " 그래도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나의 장군. " 안토니우스는 그의 것을 품고서 조용히 눈물을 흘리는 사내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기억이 났다. 그때도 너는 울지 않았었는데......지금은 눈물을 흘리는 구나. 나의 욕심은 그를 촉망한 장수에서 창부로 전락시켰다. 리키리우스가 처음 그를 받아들일 때는 18살의 뛰어난 기병이었다. 어린 기병은 단지 머리가 검다는 이유만으로 그에게 잔인하게 유린되었을 때도 조용히 웃음지을 뿐 단 한번도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착한 사람. 가이우스 리키리우스. 욕심이 없던 사람. 언제나 울음을 삼키던 사람. 순간 그의 얼굴에 비치는 것은 언제나 눈물이 글썽하던 옥타비안, 가엾은 옥타비아였다. 가여운 나의 사람들. 내가 상처 입히고 버린 나의 아이들. 안토니우스는 그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핥아 주었다, 눈물의 맛이 이렇게 쓴지 예전에는 미처 몰랐었다. 그의 얼굴에 입맞추고 그를 안아 순식간에 침상에 눕혔다. 리키리우스는 여전히 천장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 리키리우스...너는 착하고 강한 아이야......." " 장군!!! 장군!!!!!!! " 단 한번도 관계를 가지면서 이름을 불러주지 않았던 장군이었다. 짙고 푸른 눈이 정신없이 울고 있는 그의 얼굴을 담고 있어서 리키리우스는 이 것이 정말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팔을 그의 목에 둘러 매달렸다. 등을 파고든 손에 허리가 들리는 가 싶더니 순식간에 안토니우스의 거근이 그의 안 속으로 파고 들어왔다. " 아악!!!!! 하앗!!!!!!!!!! " " 리키리우스................. 착한 리키리우스............" " 흐윽.........흑흑.... 하앗..........." 리키리우스는 마지막으로 그의 사랑하는 장군의 품에 안겨 그 동안 차곡차곡 가슴에 묻어두었던 설움과 눈물을 모두 토해내었다. 정신 없이 흔들리는 몸에서 울음과 안토니우스를 부르는 외침이 세되게 흘러나왔다. 장군, 나의 장군님.......... 당신을 사랑합니다. 오늘이 마지막이라 하여도, 내일 떠오르는 태양을 눈에 담을 수 없다하여도, 나는 후회하지 않습니다. 리키리우스는 강하게 안아오는 그의 팔과 안에서 터지는 뜨거운 사정의 순간에 정신을 잃으면서도 마지 막이라는 단어가 너무나 서글퍼 눈물을 그칠 수가 없었다. # 8 안토니우스는 멀리서 보이는 진홍빛의 돛을 보고 항구에 다다를 시간을 가늠했다. 오늘, 해질 녂에는 도착할 것이다. 다행이 저 번처럼 요란한 선상연회를 준비하지 않았기에 안토니우스는 휘날리는 진홍빛 돛을 보며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타르수스에서 맞이했던 그녀의 배도 지금처럼 진홍빛 돛을 달고 있었다. 금은으로 수놓인 천개를 늘어뜨린 갑판에는 순백색의 옷자락을 길게 늘어뜨린 여왕이 서 있었다. 상냥하게 웃으며 그의 손을 잡고 연회장을 이끄는 그녀의 모습에 카이사르가 로마에서 수 많은 비난을 받아가면서도 그녀를 가까이한 이유를 알 것 같기 도 했다. 낮을 방불케 하는 수많은 등불이 밝혀져 있고 색색의 비단으로 사이사이 가려진 덕분에 몽환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고있었다. 같이 수행해온 장교들도 마시고 취하면서 환락에 빠져들었다. 천장에 드리어진 보석의 현란한 빛, 관능을 자극하는 달콤한 향내, 나른한 피리의 울림, 전라에 가까운 상태로 성애를 암시하는 춤을 추는 무희들이 그들의 이성을 유린하였다. 안토니우스는 그녀의 연회에서 그리 감흥을 받지 못하였다. 카이사르를 따라 로마와 속주의 화려한 연 회를 다녔었고 안토니우스는 연회를 즐기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것을 눈치챈 그녀는 포도주에 큼직한 진주를 녹여 마 셨고 안토니우스는 웃으면서 다른 어떤 자리보다도 그녀가 준비한 연회의 승리를 인정했다. 지난 날처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공작의 깃털 뒤로 얼굴을 숨겼던 그녀는 온데 간데 없었다. 로마에서 카이사르의 별장에서 만났던 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 우스에게 카이사르의 정부이며 이집트의 여왕으로 기억되어 있었다. 그저 그뿐이었다. 다시 만난 그녀는 마케도니아의 핏줄을 받아서 그런지 흡사 올림푸스에서 하강한 여신 같았다. 아름다웠고 총명했다. 카이사르가 암살된 뒤 쫒겨나다시피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로 돌아왔다. 그녀는 카이사르의 후계자가 자신의 아들 카이사리온이 아니라는 사실에 분노했을 것이고 옥타비아누스가 장악해 가는 로마의 정세는 클레오파트라에게는 심각한 위협이었다. 황금의 나라 이집트는 로마의 지배자에게는 달콤한 꿀과 같은 것이었고 이집트는 로마의 비호가 있어야 왕위를 유지할 만큼 내부적으로 위태로운 상태였다. 그녀는 안토니우스를 선택했다. 안토니우스는 그녀가 또 한번 자신의 몸을 무기로 삼아 이 곳에 오기까지 겪었을 고민이 이해되었다. 그녀는 여왕이었다. 나라를 위해 사사로운 감정이 허락되지 않은. 노골적인 그녀의 유혹은 나라를 지키려는 처절한 움직임으로 보였으나 천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가치를 알고 거래를 해왔고 안토니우스는 그 것을 받아들였다. 환락적인 연회 뒤에서 안토니우스는 그녀의 왕관대신에 얇은 순백의 비단으로 겹겹이 만들어진 드레스를 벗겼다. 28살의 한 아이의 어머니이기도 한 그녀의 육체는 한참 무르익은 여성의 성숙함을 풍기고 있었기에 안토니우스는 그녀의 유혹을 뿌리치기가 어려웠다. 언제나 전투적이었던 아내 풀비아나, 로마의 매춘부와는 전혀 다른 그녀의 매력에 단잠에 빠지듯 열중하였다. 카이사르에 대한 죄책감이 그를 괴롭혔지만 당시의 안 토니우스는 여러 가지로 힘든 상황이었다. 동방의 집정관으로 옥타비안과 함께 삼두정치체제를 출범시킨 직후라 몸과 마음이 지 친 상황이었다. 절실한 황금을 안겨주며 몸을 맡긴 그녀를 안토니우스는 내치지 않았다. 내칠 수가 없었다. 카이사르를 잃고 생존과 나라를 위해 발버둥치는 그녀를 동정했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이용하는 자신을 저주했다. 알렉산드리아에서의 7개월은 아프로디테가 마련한 백일몽 같은 것이라고 여겼다. 달달한 낮잠처럼 깨고 나면 나른한 기억만 몸에 새겨지는 그런 꿈이라고 생각했다. 누구보다도 도도하고 영민한 그녀였기에 자신을 찾아올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이집트의 여왕이 한번 그를 위해 몸을 바쳤고, 안토니우스는 그 대가로 그녀의 왕국을 지켜주었기에 그 것으로 그들의 거래를 끝이라고 생각하였다. 지난 삼 년간 단 한번의 연락도 취하지 않은 그였기에 아테네에 공물을 보낸 클레오파트라의 심정도 그 저 자존심이 상했으려니 여겼었다. 그래도 그녀가 배를 타고 직접 안티오키아로 오고 있다는 사실에 안토니우는 당혹스러울 뿐이었다. " 회의장에서 관료들과 함께 만나기를 원하신다고 합니다. " 리키리우스는 막 닻을 내린 진홍빛으로 보이는 돛을 응시하는 안토니우스의 옆에서 이집트의 사자의 말을 전했다. " 회의장에서라..........." " 흐음, 그녀도 자신이 화가 나 있다는 것을 알릴 필요가 있겠지. 어쨌든 이집트의 여왕의 호의를 물리고 다른 여자와 결혼을 한 것은 사실이니까. 타르수스에서처럼 전라의 무 희들이 춤을 추고 황금이 널려있는 선상연회는 물건너 간건가? " 퀸투스는 묵묵히 앞을 바라보고 있는 안토니우스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녀는 앞으로 펼처질 정세의 향방에 무시할 수 없는 존재이다. 가라앉은 안토니우스의 눈에는 여러 가 지 가능성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 여왕을 오래 기다리게 하는 것은 실례겠지, 가세. " 안토니우스는 막료장이자 원로 장군인 아헤노발부스와 부관인 퀸투스, 리키리우스, 단 셋의 부하를 데리고 회의실로 들어섰다. 이전부터 클레오파트라에 대한 반감이 강했던 아헤노발부스는 그녀를 당장 이집트로 돌려보낼 것을 주 장하였고 리키리우스는 이집트의 재력을 들면서 협상을 해야한다고 주장했다. 안토니우스는 묵묵히 그들의 말을 들으며 클레오파트라가 기다리고 있을 회의장으로 들어섰다. 회의실로 장식한 요새의 한 방에서 이집트의 관료들이 안토니우스를 맞았다. " 오오, 동방의 지배자이신 안토니우스장군이시여, 실로 오래간만입니다. " 이집트의 재상 암모니우스는 과장된 인사로 그를 맞았으나 안토니우스는 일체의 말도 인사도 없이 중앙에 마련된 의자에 가서 앉았다. 열 명이 넘는 이집트의 각료들이 순간 불쾌한 심중을 드러냈지만 안토니우스의 의자 뒤로 걸음을 옮기는 리키리우스의 곧 허리 춤에 찬 패검이 흔들리는 소리에 입을 다물어야했다. 달랑 세 명의 부하를 데리고 들어온 안토니우스의 처사에 이집트의 각료들은 황당함을 넘어선 수치감마저 느껴졌다. 젊은 각료가 오리엔트의 최고의 왕국인 이집트앞에서 안토니우스의 오만함에 항 의를 하려는 순간 은사로 짠 망토를 걸치고 공작털의 부채를 손에 쥔 클레오파트라가 여유있는 미소를 지으면서 나타났다. 안토니우스의 맞은 편에 앉으면서 그녀는 시종 미소를 거두지 않았으나 단 한 마디로 하지 않았다. 모든 것은 그리스어로, 이집트의 재상 암모니우스와 퀸투스 사이에서 이루어졌다. 안토니우스의 표정에서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으나 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우스를 향해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 이런 조항을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이미 안토니우스 장군은 결혼했습니다. 여왕폐하와 중혼한다는 것은 로마법에 의해 불가합니다. " " 이집트의 법에 따라 혼인을 하자는 것입니다. 여왕폐하께서는 혼인을 위해 로마로 가실 필요가 없습니다. " "이집트의 영토에 관한 권리는 세명의 삼두 정치관에게 모두 있습니다, 안토니우스님의 결정만으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닙니다. " " 동방의 속주의 주인은 다름아닌 안토니우스님이 아닙니까? 레피두스는 이름 뿐인 삼두정치관이고 카이사르 미 노르(옥타비아누스)는 서방을 맞고 있지 않습니까? " 클레오파트라가 가지고 온 다섯 문항은 뼈속까지 로마인인 아헤노발부스를 분노시키고 있었고 퀸투스 마저 의의를 제기했다. 안토니우스는 다섯 문항을 그저 훑어보고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이집트의 황금을 얻는 댓가로 안토니우스는 무엇을 내어 주어야 하는가. " 그리고, 이집트의 황금을 필요로 할 정도로 이곳의 재정은 얇지 않습니다. 오히려 풍족하다고 할까요. " 퀸투스의 마지막 발언으로 이집트의 각료들은 무척 당황하는 듯 했다. 그들이 파르테아 원정을 앞두고 있는 안토니우스에게 내어 놓을 수 있는 최상의 카드는 바로 원정에 필요한 재정적 군사적 지원이었다. 허나 무거운 침묵으로 회의를 지켜보는 안토니 우스는 황금에도 함대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것으로 이집트와 여왕을 보호할 수 있다면, 각료들은 어쩔줄 모르며 여왕을 돌아보았지만 안토니우스와 마찬기지로 그녀의 얼굴에서는 미소밖에 찾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클레오파트라는 그녀의 짐작이 맞았음을 인정해야 했다. 그녀가 안토니우스를 원하는 것처럼 이집트는 안토니우스의 힘이 필요했다. 하지만 안토니우스는 자신을 내칠 것이다. 그만한 힘이 있는 남자였다. 그래서 갖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그 품속에 안기고 싶은 것이다. 진작에 알고 있었으면서 이렇게 내달려온 자신이 어리석다. 안토니우스가 그녀를 내칠 수 있는 힘을 가졌다면 클레오파트라는 그의 곁에 설 수 있는 힘을 가졌다. " 모두 물러나세요. 장군께 홀로 드릴 말씀이 있어요. " 처음으로 입을 여는 클레오파트라의 음성은 천상의 가락과도 같았다. 노래하듯 회의장을 장악하는 그녀의 목소리에는 마법이 깃들여 있는 것 같기도했다. " 모두 나가 있으시오. " 안토니우스의 말에 퀸투스는 뭔가 말을 하려다 가장 먼저 방을 나섰다. 망설이는 듯한 이집트의 각료들 은 여왕의 미소에 서둘러 방을 빠져나갔다. 방안에는 마주보고 앉은 두 사람만 남았다. " 내가 반갑지 않나요? " 의자에서 일어서 고혹적인 미소로 다가오는 그녀를 안토니우스는 나지막한 한숨으로 외면했다. 그녀는 안토니우스의 앞에서 서서히 무릎을 꿇었다. 매끄러운 손이 뱀이 또와리를 틀 듯 안토니우스의 허리를 살며시 감았다. 그녀의 손은 그의 토가를 들추고 아랫배를 지나 덥수룩 한 숲에서 머물렀다. 손가락에 감기는 음모의 감촉을 즐기며 더욱 짙게 미소지었다. " 내가 그립지 않았나요? " 클레오파트라는 그의 단단한 허벅지를 손으로 훑었으나 그의 인상이 더욱 굳어질 뿐이다. 그녀는 잘잘한 미소를 짓고 일어섰다. " 안토니우스, 무정한 사람!" 안토니우스의 무릎에 앉아 눈높이를 맞춘 그녀가 그의 입술에 짙은 키스를 했다. 손가락에 부서지는 황금의 머리채에 여왕의 손이 갈퀴처럼 파고 들었다. 묵묵히 키스를 받으며 반응이 없는 그의 혀를 피가 나도록 깨물면서 그녀는 입을 떼었다. " 나는 당신이 그리웠어요, 안토니우스. " " 클레오파트라................" " 크리논이라고 불러요! 내 사랑. " " 왜 왔지? 당신이 이곳으로 행차하지 않아도 이집트는 무사 할거야. 카이사리온은 이집트의 파라오가 될 수 있을거요. 황금은 이전에 주었던 것만으로 충분하니까 돌아가시오. 그러니 이런 창부의 흉내를 낼 필요는 없소 " " 이런 천한 유혹으로 당신을 되찾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어요." 클레오파트라는 여전히 미소를 지으며 안토니우스의 무릎에서 일어섰다. " 어떤 일이 있어도 그럴 일은 없을 것이오. " " 이곳에 오기 전에 물떼새들에게 로마에 소식을 전하라 했어요. " 안토니우스가 의문을 표하기도 전에 클레오파트라는 짙은 미소를 지으며 빠르게 말을 이었다. " 안토니우스가 이집트에 사신을 보내 여왕을 청했다고 말이죠. 그 내용은 이래요 ' 여왕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다. 아이도 보고싶다. 옥타비아가 낳은 딸이 아닌 그 아이야말로 진정한 나의 후계자이다. 3년 간의 정략결혼으로 따분한 옥타비아는 로마로 돌려보냈으니 이번에야말로 결혼을 하자. 여전히 여왕을 그리워하고 있다 ' 그래서 여왕은 아이들을 데리고 한달음에 사랑하는 이에게 달려온 것이에요. " " 클레오파트라!!!!!!!!!!!!!!! " 안토니우스는 노성을 지르며 일어서서 그녀의 목을 쥐었다. 가느다란 그녀의 목은 금방 부서질 것 같았지만 한 가닥의 이성으로 이집트의 여왕을 살해하는 만행을 저지르지 않을 수 있었다. " 로마에 있는 카이사르 미노르가 참으로 좋아하겠죠? 당신은 그와의 전쟁을 피할 수 없어요. " " 크리논!!!!!!!!!!!!!!!!!! " " 당신은 전쟁을 해야만해요. " 클레오파트라의 목을 죄던 손의 힘이 빠져나갔다. 전쟁을 피할 수 없다? 혹여 전쟁을 피하고 싶다고 생각했었단 말인가? 지금의 평화를 지키고 싶었던 말인가? 지킬 수 있을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원정을 시작했다.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이 전쟁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거란 희망이 있었다. 그리고..........돌아가고 싶었다. 약속대로 돌아가고 싶었다. 순간적으로 드는 생각에 안토니우스는 딱딱하게 몸이 굳어버렸다. 지금, 나는 어디로 돌아간다고 말하고 있는가? " 나는 카이사리온이 그 이름에 맞게 진정한 카이사르의 후계자가 되기를 원해요. 하지만 나의 카이사리온은 아직 어려요! 보호자가 필요하죠. 옥타비아누스는 반드시 카이사리온을 죽이려 할 거에요. 그에게 로마는 너무 과분 하죠. 로마의 주인은 당신이 될 수 있어요. 당신은 동방제국의 독재자가 되어 내 옆에 서야해요. 로마와 이집트는 나와 당신의 아이들이 다스릴거에요. " 클레오파트라의 말은 독과 같았다. 이제서 옥타비안에게 변명의 사신을 보낸다 하더라도 클레오파트라가 안티오키아에 온 사실은 피할 수 없었다. 원로원은 안토니우스를 탄핵할 것이고, 옥타비안은...........옥타비안은..... 옥타비아누스는 군사를 일으킬 명분을 갖게 될 것이다. 옥타비안이.......내게 검을? " 파르테아 원정에 모든 것을 쏟아 붓고, 집정관에서 물러날 생각이라도 했나요? 당신이 동방을 평정하고 사라지면 그 어린 옥타비안이 힘들이지 않고 로마를 차지 하겠지요? 솜털이 빠지지도 않은 카이사르 미노르에세 모든 것을 물려주려 했나요? " 그의 가슴을 클레오파트라는 부드럽게 애무했다.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카이사르 임페라토르에게 안겼던 그녀였다. 귀에 못이 박히도록 안토니우스의 칭 찬을 카이사르에게서 들었었다. 그가 언제나 벤투스의 마을로 간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안토니우스의 심중 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바보가 아니다. " 당신은 싸울 수 밖에 없어요. 전쟁을 피하기엔 너무 늦어버렸군요. " ".................." " 옥타비아가 둘째 아이를 임신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나요?" 클레오파트라는 검게 물드는 안토니우스의 아름다운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 9 " 안토니우스는 혹시 손목이라고 다친 것일까? " " 네? 장군이 어디 부상이라도 당하셨답니까??? " 정색을 하며 일어서는 드미트리우스를 바라보며 태우는 한숨을 폭 쉬었다. 온몸으로 강직, 정직, 성실로 무장한 이 사내는 정말 이아로스가 고른 것이라는 느낌이 팍팍 들었다. 드미트리우스는 붉은 고수머리가 매우 인상적인 전형적인 군인이었다. 이아로스가 잘 벼러진 검사같은 이미지고, 카피토가 외인부대, 외로운 용병같다면 드미트리우스는 " 전 우여!!!"를 외칠 것만 같은 인상이었다. 시원시원하고 솔직한 성격을 가진 이 군인은 순진함과 소탈하기까지 해서 태우의 좋은 말벗도 되어주고 있었다. 단지, 좀 둔하다는 것이 문제이지만. " 아니. 손목이 부러졌으니 펜을 들지도 못하는 거 아냐. " 24살이라는 이 젊은 친구는 겉보기에는 30대를 훌쩍 넘어 보였지만 덩치 큰 초등학생같다. 동생이 있다면 이런 느낌일까? " 네? 펜이라니요? 전장에 펜을 들고 가면 어쩝니까!!!!!!!!! 자고로 군인이란 창과 방패로..." " 서신이 온다하더라도 20 여일은 걸립니다. 곧 도착하겠지요. " 카피토의 무심한 대꾸는 그다지 위안이 되지는 않는다. 인터넷이다, 전화, 이-메일까지 현란한 속도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에 기약없는 기다림과 소식의 시간차를 견디기는 너무 힘들었다. 그제서야 '손가락이 부러져 전화 한 통 없었냐'를 패러디한 농담을 알아들은 드미트리우스는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 뛰어난 문장력이십니다!!! 뮤즈가 감탄하시겠어요!!! " 그 생각을 하기는 했다. 현대에 나와있는 시와 소설, 심지어 노래가사를 라틴어으로 옮긴다면 단번에 인기작가가 되지 않을까. 만약 어디엔 가 문헌이 남아있게 되면 미래의 작가들은 표절의혹을 벗지 못하 겠지. 간혹 흥얼거리는 노래 가락에 퀸투스는 비상한 관심을 나타내었지만 오선보가 만들어지기 1000년 전의 시대 의 표기로 옮기는 노력은 실패로 돌아갔다. 음의 표기, 조법부터 거의 외계언어였고, 둘 다 절대음감 따위를 가지지 않았기 때문 에 배우려는 사람도, 가르치는 사람도 포기해야했다. " 지금은 어디더라? 유프라테스 강가까지 진군했다지요? " " 네, 제우그마로 향한다는 전갈이 왔었습니다. 아마 계속 북진하여 유프라테스의 상류인 아르메니아로 향하 실 겁니다. 그 곳에서 동맹군과 합류하신다고 합니다. " " 10만 대군이라고 했던가요? " " 거기에 경험이 풍부한 우수한 로마군인이 절반이상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승리는 안토니우스 장군의 것입니다!! " 주먹을 불끈 쥐고 큰소리로 외치는 드미트리우스의 모습에 태우는 웃음을 터트렸다. 낭랑한 웃음 소리에 드미트리우스는 얼굴이 붉어졌지만 곧 그간 알려온 전장의 소식들이 다시 태우에게 신나게 설명해주었다. 지금 까지는 모두 낭보였다. 안토니우스의 군대가 얼마나 위풍당당한지, 새로 편입된 이집트의 군단이라던지. 더욱 태우를 열받게 하는 것은 스파이(?), 첩보부대의 활약을 굉장해서 전황의 소식-처음 이 사실을 들었을 때 군사기밀이 아닌 가 놀랐었다, 지금 안토니우스의 침상에서 자고 있는 여인의 속옷색깔까지 알려주는 주제에 적장 장본인에게서는 어떤 언 질도 편지도 없다는 것이었다. 타르수스의 연회를 기억하고 있는 병사들이 거의 비치는 순백색의 드레스만 걸쳤던 그녀가 이번에는 어떤 옷을 입고 나타났을까를 두고 내기를 하면서 전해진 사실이었다. 그녀는 이번에 은빛망토에 붉은 드레스를 입었다고 한다. 또 속에는 아무것 도 입지 않았겠지. 편지 쓴다고 약속해 놓구선... 태우가 듣고 싶은 소식은 클레오파트라가 동맹군에 합류했다는 것, 지금 아르메니아로 가고 있다는 것, 곧 대규모의 전투가 벌어질 것이라는 것 이 아니었다. 그런 것은 아무래도 상관이 없었다. 살아 있는 그들이 궁금했다. " 하아, 비행기가 있다면 하루도 안 걸리는 거리일텐데........ 자 이제 한숨 돌렸으니까 다시 한번 부탁해요! 드미트리우스!! " " 하하!! 날로 실력이 느십니다!! 각오하십시오!!! " 다시 단검을 들고 연무장으로 향하는 두 사람을 보며 카피토는 나지막히 한숨을 쉬었다. 나날이 표정이 어두워지는 것을 눈치채지 못할 카피토가 아니었다. 가끔 멍하니 동쪽 하늘을 바라보며 한숨을 쉴 때면 안쓰럽기도 했다. 가끔 알수 없는 언어를 중얼거리는 그를 보고 있자면 금방 어디론가 사라질 것 만 같기도 했다. 오전에는 격투기 수련을 하고 점심을 먹고나면 말을 타고 외곽을 달리고 돌아와서 단검을 수련하고 저녁을 먹고는 예의 그 일을 한다. 안토니우스가 준 두 개의 단검을 휘두르며 그는 무슨 생각을 할까. 해가 지고, 해가 뜨면 행하는 의식 같은 행위를 보면서도 카피토는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 갑갑해왔다. 요새 들어 차라리 그냥 안토니우스님께 데려가고 싶다는 생각이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드는 카피토였다. " 들어가시지요. 날이 찹니다. " " 오늘은 이만해요, 점점 실력이 느는 걸요? " " 감사해요! 그런 내일 또 부탁해요!!! " 연무장을 정리한다는 드미트리우스를 뒤로하고 카피토를 따라 저녁 식사를 했다. 깨작이는 그를 며칠 간 눈여겨보았던 카피토는 한 그릇을 비우지 않으면 절대 식당을 떠나지 못할 것이라고 엄포를 놓아서 태우는 꾸역 꾸역 깔깔한 입에 음식을 털어넣었다. 방에 돌아와서도 과일을 잔뜩 안겨주고는 먹으라고 우기는 카피토 때문에 태우는 한 손에 사과를 들고 한 손에 깃펜을 들고 있었다. 이곳으로 와서 세 번째로 맞는 가을이다. 시간은 흐르고 있는데, 그 흐름에서 벗어나 있는 자신. 뉘역 뉘역 지는 해를 바라보며 태우는 오늘은 어떤 말로 편지를 시작할까 궁리했다. 당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클레오파트라에 대한 것이었지만 클레오파트라에 대해서는 초연해있었기 때문에 그녀의 존재를 굳이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가슴이 쿡쿡 쑤시고 아파오는 것은 무리하게 몸을 움직이는 대다 식사를 제대로 넘기지 못하는 탓이라고 생각했다. 식사가 제대로 넘 어가지 않는 이유는 너무 무리한 운동을 한탓이야 라는 수레바퀴처럼 돌고 도는 이유를 대고 있었다. 어쨌든 한번도 만나지 않았지만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그녀를 생각하는 것이 괴로운 일임에는 변함이 없다. 하지만 들려오는 소식은 온통 그녀의 이야기 뿐이다. 도대체 무슨 생각인 것인지 안토니우스의 머릿속을 해부하고 싶었지만 그것도 가까이 있어야 할 수 있 는 일이다. " 이런 돈 쥬앙, 카사노바, 바람둥이, 변강쇠 같은 놈... 칫 뭐야,,바람난 남편을 추궁하는 마누라 같잖아... " 고개를 휘휘저으며 머릿 속에서 안토니우스의 정부들에 대한 이야기를 털어 내었다. 클래오파트라가 오면서 소박맞았다던 리키라던가 하는 기병대장의 이야기도 잊고싶었다. " 정말 팔이라도 다친 걸까.....아님 정말 바쁜가... " 수없이 날라 오는 문서 중에 야속하게도 편지 한 통이 없다. 전쟁의 소식도 알고 싶지만 지금 태우가 원하는 것은 단 한 문장. 단지 유려한 문체로 " Si vales, valeo - 너는 잘 지내니? 나는 잘 지내. " 한 마디를 원할 뿐이었다. 그럼 " valete, valeo.- 잘 지내세요, 저는 잘 있어요. " 라고 할 텐데............ 매일 매일 편지를 쓰지만 전활 방도는 없다. 매일 매일 한 장의 편지를 쓰고 일기처럼 그의 신변잡기적인 일들을 적는다. 드미트리우스가 얼마나 단검 사용법을 잘 알려주는지, 카피토가 매일매일 아테네외곽까지 밀을 타고 산책을 시켜준다던 지, 오늘은 요리사가 조개요리를 해서 주었다던지... Si vales, valeo라고 깃펜으로 한글자 한글자를 적으며 하루를 마감한다. 그러나 또 매일 매일 전 날의 편지를 태우면서 하루를 시작한다. 매일 저녁 한가득 편지를 적고 매일 아침 머리 맡에 두었던 편지를 태운다. 이 재가 멀리 멀리 날아가서, 그의 머리에 닿기를 기원하며. . . . 서편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바닷 내음이 실려왔다. 바닷가로 가려면 말로 며칠을 달려야하지만 이오니아 해의 옥빛이 그대로 느껴져 안토니우스는 말을 잠시 멈추었다. 쌀쌀한 바람이 머리를 흐트러트리고 날려갔다. " 안토니우스님 안색이 좋지 않으십니다. " 옆에서 흑마를 몰던 리키리우스가 가까이 다가와 걱정스레 말을 건냈다. " 아니, 그저 제피로스께서 나를 부르시는 것 같아서. " 제피로스(서풍의 신)께서 오늘은 어디를 향해 달리고 계시는 걸까... 그의 바람에 그리운 향기가 묻어있는 것은 그저 착각일 뿐일까... 안토니우스의 대군은 고고하게 흐르는 유프라테스의 강가에 붉은 진흙으로 만든 벽돌집의 군락을 지나고 있었다. 구릉지에 자리잡은 제우그마는 진흙으로 만들어진 성채였다. 동방으로 와서 가장 놀라게 되는 것은 흙으로 만든 집이었다. 로마에서처럼 나무나, 돌이나 구운 벽돌이 아닌 진흙을 빚어 만든 유 프라테스강가의 건물들은 알싸한 흙내음을 피우고 있었다. 비가 오면 그들의 집은 붉은 피같은 흙물을 흘리고, 사람들은 또 다시 진흙을 발라 집을 지었다. 지금은 돌로 만든 거대한 성도 많이 생겼지만 행군 도중에 지나게 되는 작은 촌락들, 한 번의 홍수로 다 사라져버리는 마을을 지날 때면 안토니우스는 어떤 이름을 기억해냈다. terra, terrius. 흙의 아이라는 이름. " 태우라고 했던가..." 네? 하고 의문을 표하는 리키리우스를 무시하고 안토니우스는 붉은 색으로 흐르는 유프라테스를 바라보았다. 처음 듣는 생소한 언어의 이름이었다. 파르테아, 마케도니아, 아르메니아, 시리아, 이스라엘 그 어느 언어에서도 찾을 수 없는 기묘한 느낌의 이름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그의 진 정한 이름이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생각해보니 무슨 뜻인지 물어 보지 않았군, 하며 안토니우스는 씁쓸하게 웃었다. 가마에서 내려다보는 클레오파트라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뒤돌아 보거나 하지는 않았다. 아테네에 있는 그의 존재를 들킬 만큼 안토니우스는 어리석지 않았다. 절대 태우마저 그녀에게 들킬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로마에는 이미 안토니우스가 클레오파트라의 품에 뛰어들었다는 소문이 나있을 터였다. 클레오파트라는 제우그마에서 알렉산드리아로 돌아 갈테지만 그녀는 안토니우스의 세 번째 아이를 가지고 있었다. 과정이 어찌되었든 불변한 사실이고 로마는 분노할 것이다. 클레오파트라는 이번 원정에 참가하는 대가로 다섯 조항을 요구했고 안토니우스는 수락했다. 아니 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황금은 풍족했고 퀸투스는 절대 안 된다고 반대했지만 그녀의 말대로 피할 수 없는 전쟁이라면, 약속을 어기는 것은 그의 몫인 것이다. 그는 어떻게 생각을 할까. 울먹이는 녹색 눈동자 너머로 떠오르는 것은 깊이를 알 수 없는 흑요석의 눈동자. 그것은 안토니우스의 심기를 무척 흔들고 있었다. 왜 그 검은 눈동자에 추악한 그의 영혼이 비치지는 않을까. 그가 옆에 있다면 어떤 조언을 할까. 사무치게 보고싶은 것은 그리움인가. 사치스러운 감정이 자꾸 시선을 서편으로 향하게 했다. 코끝을 간질이는 서풍에 실려오는 것은 누구의 소식인가. 부디 이 바람이 시작되는 곳이 옥빛으로 빛나는 그리스의 해안이기를. # 10 " 그 모든 행위는 로마를 모욕한 것이며 모두 그자가 한 짓입니다! 창녀 클레오파트라를 이집트의 여왕으로 인정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로마의 속주인 시리아와 사이프러스, 리디아까지 통치하게 했단 말입니다. 그자의 오만 불손을 로마에 알려야 합니다, 그 구역 질 나는 행위들을!!! " 코르넬리우스 돌라벨라는 동방에서 들려오는 소식에 분개하며 안토니우스의 탄핵을 카이사르 미노르- 옥타비아누스에게 주장했다. 돌라벨라는 과거에 카이사르를 추종했던 인물이었다. 카이사르의 사후 그의 유지에 따라 옥타비아누스를 지원했고 유지를 어긴 안토니우스를 비방하는데 앞장섰다. 옥타비아누스의 서재에 모인 측근들, 아그리파, 마이케나스, 돌라벨라, 프로쿨레이우스는 옥타비아누스의 의견을 기다렸으나 옥타비아누스는 책상에 앉 아 창 밖을 응시할 뿐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주먹을 쥔 그의 손에 하얀 힘줄이 즐비하게 돋아났다. "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사이의 조약의 내용은 이렇지. 제1항, 이집트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에게 재정적, 군사적 지원을 한다. 신나겠군, 이집트의 황금이 모두 안토니우스의 소중으로 떨어졌는걸? 제2항,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의 의식에 따라 혼인할 것. ........ 이 여자가 진짜. 제3항, 안토니우스는 이집트의 왕이 아닌 동방제국 군주라는 호칭을 사용할 것. 결혼을 하되, 이집트의 왕권을 넘겨줄 수는 없다는 말인가? 완전히 클레오파트라의 간계에 놀아나고 있 는 거잖아? 제4항,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리온을 이집트 왕의 후계자로 인정하고 안토니우스와의 자제들에게는 이집 트 여왕이 영토내 동방의 속주를 상속한다. 이집트의 왕위후계도 자기 자식이 아닌 카이사리온으로 인정을 하다니. 도대체 안토니우스는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군, 절대로 불평등한 조약이라고. 황금과 바꾸기에는. 제5항, 안토니우스는 이집트의 영토를 이집트 18왕조시대의 국경으로 인정할 것. 그리고 이런 말도 안 되는 조약들 들어주다니. 로마의 속주를 원로원과 너에게 고하지도 않고 마음대로 처리해버렸어. 이 것만으로도 안토니우스는 반역행위를 한거 야. 그만 인정해, 옥타비안. " 쾅- 옥타비안이 마호가니로 만든 책상을 강하게 내리쳤다. 인정하라고? 무엇을? 누이가 이집트의 여왕 때문에 소박을 맞고 돌아온 사실을? 삼두정치관인 그가 사사로이 로마의 속주를 정부에게 내어준 것? 아니면 그가 정말로 나를 배신했다는 것? " 옥타비안? " 서재의 문가에 과일과 벌꿀 음료를 쟁반에 든 옥타비아가 불안한 얼굴로 서 있었다. 그녀가 로마로 돌아온 지 일주일이 지나고 있었지만 옥타비안은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려고도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지도 않았다. 새벽같이 저택을 나서 한밤중에야 들어오는 그를 같은 저택에 있으면서도 얼굴을 보기가 힘들었다. " 누님. " "아, 말씀이 길어지는 것 같아, 목을 축일 것을 준비했어요. " 시녀에게 손짓을 하며 옥타비아는 서재 가운데 있는 탁자에 과일 접시를 내려놓았다. 창백한 얼굴의 그녀의 손이 떨리는 것을 보면 어느 정도 이야기를 들을 듯 했다. 그녀의 배는 제법 불러 임산부의 태를 내고 있었다. 그녀는 옥타비아누스가 전쟁을 준비한다는 말을 듣고 그를 말리기 위해 로마로 왔다고 했다. 옥타비아는 웃으면서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자신의 자유의사로 온 것이라고 했다. 옥타비아누스가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는 보고에 안토니우스의 허락을 받고 옥타비안의 결혼을 축하할 겸, 아이들을 데 리고 왔다고 누이는 밝게 웃었다. 옥타비아누스는 그런 누이를 향해 같이 웃어줄 수 없었다. 그는 전쟁을 준비한 적도 계획한 적도 없었다. " 옥타비안? " " 지금 그 사람은 어디에 있습니까? " 무미 건조한 목소리가 목울대를 타고 넘어왔다. " 그 사람이라니? 안토니우스님을 말하는 건가요? 지금 아테네에 있을 거에요. 봄에 있을 파르테아 원정준비로 바쁘실거에요. " 어두운 옥타비안의 표정에 불안감을 느끼면서도 옥타비아는 웃으며 대답했다. 그곳에 계실 거에요. 옥타비안은 그런 누이를 빤히 바라보면서 잠시 말을 멈추었다. " 옥타비안? " 한 번더 누이가 채근하고서야 그는 말문을 열었다. " 아닙니다, 누님. 그는 파르테아 원정을 위해 동방으로 떠났습니다. 누님은 큰 모욕을 당하고 계십니다. 클레오파트라가 그를 불러들였어요. 두 사람이 함께 파르테아 원정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각지의 동방의 군소영주들이 합류하고 있다고 합니다. 안토니우스는 로마를 나를, 그리고 누님을 기만했습니다!!! " " 그게 무슨? 안토니우스님이 어디에 가셨다구? " " 클레오파트라와 함께 있습니다. " " 그럴 리가! 그분이 그럴 리가 없어! 뭔가 잘못 알고 있는 거야!! 옥타비안!!! " " 그가 우리를 배신했습니다! " " 아니야!! 그분은 변하지 않았어!! 나는 알아!! 옥타비안! 그분은 변하지 않았어! " " 누나!! 그만해!! 인정해야 해!! 모든 정황이 확실해! 그는.........." 우리를 버렸어, 란 말은 옥타비안의 입에서 소리가 되어 나오지 않았다. " 둘다 그만 진정해요!! 그만해, 옥타비아는 좀 쉬어야한다고...." 순간 방안에 있던 사람들은 홀몸이 아닌 그녀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아그리파의 시선에는 깊은 상처가 있었지만 마이케나스는 그것을 모르는 척했다. 우직한 아그리파는 여전히 옥타비아를 가슴에 담고 있었다. 돌라벨라는 자 정부를 불러들이기 위해 신의 아이를 가진 정부인을 로마로 보내버린 안토니우스의 행위 에 치가 떨렸다. 그는 무슨 일이 있어도 안토니우스를 처벌해야한다고 결심을 굳혔다. 미적 미적한 옥타비아누스의 마음은 자신이 돌려 놓으리라. " 일단 더 지켜보기로 하지. " 마이케나스가 좌중을 돌아보며 선언하듯 말했다. " 지켜보다니! 당장 소환해서 추궁을 해도 모자랄 판국에!!! " 돌라벨라가 반대를 하고 나섰다. " 일리리아도 시끄러운 판국입니다. 안토니우스의 일은 그의 원정의 결과를 놓고 생각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 그는 반드시 내 손에 죽을 것입니다. 옥타비아, 당신이 말린다 하더라도 지금 흘리는 그대의 눈물의 대가는 받아내겠습니다. 창백하게 질려 있는 옥타비아를 바라보면서 아그리파는 가슴깊이 맹세했다. 아그리파는 굳은 표정으로 안토니우스와의 결전을 넌지시 암시했다. 옥타비아누스가 흠칫 그를 바라보았으나 아그리파는 흔들리지 않는 시선으로 마주했다. 그도 이젠 이 전쟁을 피할 수 없음을 알아야했다. 10년을 넘어가는 우정이었기에 옥타비아누스이 망설이는 이유를 아그리파는 짐작하고 있었다. 교관학교를 다니던 소년시절 카이사르의 명령으로 옥타비아누스를 만나러 갔을 때부터 그에게 충성을 다할 것을 맹세한 아그리파였다. 친우가 검을 쥐기 힘들다면 그가 대신 검을 쥐면 되는 일이었다. 그러니까 옥타비안, 그렇게 눈물 흘리지 말아. 피를 묻히는 것은 나의 손이 할 일. 당신의 할일은 그 위에서 군림하는 것. 그것은 안토니우스도 잘 알고 있을 거라고 아그리파는 생각했다. 이미 두 사람은 같은 하늘 아래 살아가기에는 너무 많은 길을 돌아왔다. 옥타비아누스는 눈물을 겨우 참고 있는 누이를 다시 한번 돌아보았다. 옥타비아는 그에게 안토니우스가 전혀 전쟁의 생각이 없음을, 여전히 자상하고 자신들을 생각하고 있음을 말했다. 너무나도 행복하게, 일말의 불안을 희망으로 감추고 이야기했다. 믿고 싶었다. 하지만, 하지만............ " 프로쿨레이우스, 정보부대를 증원해서 동방으로 파견해. 아테네에도, 알렉산드리아에도, 안토니우스에 대한 동정은 모두 살피도록. 전황을 빠짐없이 알아오라고 해. " . . . " 클레오파트라 여왕은 알렉산드리아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비공식적이지만 아마 임신을 했기 때문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 "........ " " 안토니우스님은 계속 북상하여 유프라테스강 상류에 해당하는 아르메니아의 요새인 엘체룸에 도착해 동맹군인 아르메니아의 왕 아르타바테스, 폰토스의 왕 포리몬등과 합류했습니 다. 이곳에서 진영을 두 개로 나누어 제 1 군단은 스타티니아누스님의 지휘하에 메디아를 향해 아락스 강의 계곡을 따라 진 군하였습니다. 제2군단은 안토니우스님이 직접 이끌고 아시리아북부를 가로질러 메디아로 진군하셨습니다. " " 그건 알고 있으니까!!!!!!!! 그걸 물어본 게 아니잖아!!!!!!!!! " " 제 1군단이 궤멸 당했습니다. 아락스 협곡을 지날 때 매복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예기치 않은 적의 습격 때문에 스타티니아누스님은 전사하시고 폰투스왕은 포로가 되었습니다. 아르메니아 국왕은 배신을 하고 도주했다고 합니다. 그 바람에 군인들의 피해가 컸 습니다. ................기병대 말고는 거의 전멸했다고 합니다. " ".................." 최대한 차분하게 전황의 보고를 이어가던 군인은 눈 앞의 사람이 주먹을 쥐고 휘청거리는 것을 보고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꽉 깨물은 입술에서 피맛이 났지만 군인은 계속 처참한 전장의 사정을 보고했다. " 제 1군단이 보급과 공성기운반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무기들을 모두 잃어버린 상황에서 제2군단의 사정도 그리 좋지는 않은 듯합니다. 프라아아스파를 공략하고 있지만 식량보급이 좋지 못하고 파르테아의 기병들이 후미를 치고 있어 어려운 전투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 " 제 1군단에.........남은 군대가 정말 기병대밖에 없나요? " " 네....그들만이 제2군단과 조우하기로 한 장소로 돌아왔다고합니다. 아마........... 전차부대도 전멸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 털썩. 간신히 지탱했던 몸이 무너져 내렸다. 감은 눈 너머로 익숙하고 그리운 얼굴들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지금 눈앞에서 웃고 있는 사람은 갈색의 고수머리가 잘 어울리는 서늘한 인상의 남자였다. 갈색눈은 이지적이었고 그 안에 숨어 있는 다정함을 찾을 수 있었다. 그는 언제나 곁에 있는 회색머리의 사내에게 가볍게 잔소리를 하곤 했지만 갈색의 눈동자에는 사랑이 담겨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처음의 그는 자신을 경계하고 고운 시선으로 보지 않았었다. 그러나 그는 떠나기 전에 몇 번씩 특유의 잔소리를 잊지 않았다. 그 안에 담긴 걱정과 자상함이 아직도 귓가에 남아있는 것 같았다. 이아로스.............. 이아로스............. 무사한가요? 당신이 스스로 능력있는 장수라고 말했는데... 당신은 빈말을 하지 않고 언제나 진지해서 철썩같이 믿었었는데... 무사한가요? 이아로스......... 무사한가요? 당신은.............당신은 무사한가요..... 어깨를 당겨 안는 손길에 태우는 그 손의 주인의 토가를 잡고 이를 악물고 울음을 삼켰다. 카피토는 묵묵히 어깨를 살며시 안고 있을 뿐이었다. 드미트리우스는 손에 든 양피지를 꾸기면서 아려 오는 눈을 신경질적으로 비벼대었다. ".............무사하실겁니다. 안토니우스님은 강한 분이십니다. " ".............흐윽...." 카피토는 미처 태우가 묻지못한 일을 덤덤히, 스스로에게 확신하듯이 말했다. 안토니우스가 제1군단에게 맡긴 보급선이 끊어져 파르테아의 식량부대를 공격하고 마을을 약탈하고 있다는 소식은 일부러 전하지 않았다. 그의 군대가 파르테아의 기마병에게 처절히 유린당하고 있다는 것도 전하지 않았다. 카피토는 안토니우스가 있는 제2군단이 쉽게 무너지는 원인이 아테네까지 전해지지 않고 있다고 믿었다. 속으로 되뇌였다. 그 분은 강한 분이시니. 무사하실까.......... "....이아로스는 살아있겠지? 그렇겠지? 우리가 아직 모르고 있는 거겠지? " "..네 모두 무사하실겁니다. " 다시 한번 자신에게 되뇌이듯이 카피토는 조용히 말했다. " 흐흑,,,이아로스.........." # 11 " 이아로스.............." 퀸투스는 안토니우스의 막사의 천막을 거두며 밖으로 나왔다. 어느새 계절은 한 바퀴를 돌아 처음 떠나왔을 때처럼 청명한 가을 햇살을 내비치고 있었다. 파르테아 원정을 시작한지 1년이 되어가고 있었다. 아테네를 떠난지 8개월만에 메디아에 도착했지만 군대는 절반도 남아있지 않았다. 퀸투스는 서쪽에서 혹시 다른 살아 남은 군인들이 돌아오지 않을까 지평선을 바라봤지만 어제 백인장이 단 20여명의 병사들만을 데리고 돌아왔을 뿐이었다. 제1군단의 기마대장의 결정은 최선이었다. 안토니우스의 명령은 아락스 계곡을 우회해서 진군하는 것이었다. 메디아에 가는 길까지 동맹군의 요새 가 있어 보급로의 문제가 없을 것이라는 판단 하에서였다. 스타티니우스는 어리석게도 이아로스의 강한 항의에 도 불구하고 아락스 협곡을 가로지르는 군로로 정했다고 제2군단의 기병대장 마르쿠스 티티우스는 전했다. 퀸투스는 궁수대 출신인 그가 전차부대를 이끄는 이아로스에게 견제의식같은 것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아락스 협 곡이 아닌 구릉을 따라 이동했다면 이아로스의 전차부대는 최강의 실력을 과시했을 것이다. 스타티우스는 젋은 나이에 안토니우스의 신임을 받는 이아로스를 시기하고 있었다. 그를 제2군단에 남겨 두어야했을까. 군사로서 최적의 판단이었다. 아시리아로 대규모의 병력을 과시하며 이동하는 사이 보급부대는 아군의 요새가 있는 아락스로 돌렸다. 시선이 제2 군단에 주목된다면 보급은 무사할 것이라고 믿었다. 아락스의 협곡을 지날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랬다면 그런 계곡에 전차부대를 보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락스의 협곡에 들어서고 능선을 타고 매복해있던 파르테아군이 그들을 공격했다고. 앞뒤로 불을 놓고, 보병의 3분의 1을 채우고 있던 아르메니아왕이 도주하고 전차부대는 그 가운데서 화살받이가 되 었다고 했다. 계곡에서 전차는 무용지물이니까. 전차 부대가 양옆으로 보루를 만들어 기병을 보호했고 그들은 결사의 탈출을 할 수 있었다고 했다. 티티우스는 선두에서 지휘하는 이아로스는 본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살아남은 자들 중에서 이아로스를 기억하는 이는 거의 없었다. ' 이아로스..............' " 안토니우스님은 좀 어떠십니까? " 리키리우스가 다가오며 걱정스레 물었다. " 열이 쉬이 내리지 않아. 제1군이 당했다는 것이 부담으로 작용했겠지. 병사들 앞에서는 건재해 보여야하니까 무리가 많을 거야. 바람이 더 차가워지기 전에 정양하는 것이 좋을 텐데. " " 그날 제가 좀 더 주의만 했더라도......." " 자네 탓이 아니야. 그리고 주변에 말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주의하게. 안토니우스가 병중이라는 것이 알려지면 군 의 사기가 크게 떨어질거야. " 그 전에 로마의 군대가 파르테아에게 궤멸될지도 모르지만, 퀸투스는 씁쓸하게 뒷말을 삼켰다. 안토니우스의 병은 참모들만 알고 있었다. 휘청거리면서도 안토니우스는 모든 군의 지휘를 했고 아침 저녁으로 말을 직접몰고 달리며 군사들을 독려했다. 지금까지 제2군영이 무사한 것도 안토니우스의 역량 때문이었다. 믿었던 아군에게 배신을 당하고 보급로가 끊긴 상태에서 기습적인 공격을 펼치는 파르테아의 군사들에게 로마 군은 철저히 유린당하고 있었다. 퀸투스는 뭔가 결정을 내려야한다고 생각했다. 나중에 안토니우스가 안다면 퀸투스를 원망할지는 모르지만 일단 살아남는 것이 중요했다. " 강화조약이라.... 쿨럭........쿨럭..........." 안토니우스는 몰라보게 창백한 안색이었다. 퀸투스의 호출로 안토니우스의 막사로 들어선 장수들은 순간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저기 흩어져있는 천에는 안토니우스가 토해낸 핏물이 흥건했다. 리키리우스는 허브를 끓인 물을 안토니우스에게 건내며 기색을 살폈지만 그는 간간히 기침을 섞으며 숨을 고를 뿐이었다. " 파르테아의 왕 프라테스에게 서한을 보내 휴전을 요청해야 해. 이대로 있다간 보급도 없이 겨울을 맞게 돼, 안토니우스. " " 프라테스는 교활한 사람이야, 퀸투스. 우리의 등을 칠거다. " " 그렇다 하더라고 지금 보다 나빠지지는 않을 거야. 파르테아 왕실도 시끄러우니까 로마군과 오래 대 치할 여력은 없어. 퇴각을 하세, 안토니우스. " 황금빛바탕에 검은 무늬가 아름다운 재규어의 털가죽을 몸에 걸친 안토니우스는 흔들림없는 시선으로 응시하는 퀸투스를 마주 보았다. 퀸투스는 사실 최선의 방법은 지휘부만 야음을 타 탈출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안토니우스가 절대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아군을 버 리고 탈주하는 일을 절대 하지 않을테니까. 그리고 또 한가지. 지금 안토니우스에게 이야기할 수는 없는 일. 내부에 있는 첩자 때문이라도 말할 수 없는 일. 안토니우스가 절대 용서하지 않을 일. 퀸투스는 안토니우스 몰래 지원을 요청할 준비를 끝내고 있었다. 장교들의 설득에 안토니우스는 서한을 썼다. 어짜피 내부의 첩자가 있다면 파르테아에게 탈주는 알려질 것이다. 장교들이 원한다면 그렇게 해주자. 안토니우스는 내부의 첩자가 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파르테아군 몰래 퇴각을 시도한다고 해도 첩자에 의해 발각 될 것이다. 정식으로 휴전협정을 맺는다면 적어도 파르테아가 전면적으로 움직이지는 않을 테니까. 이틀 뒤 도착한 답신에서 파르테아측은 로마 군이 철수를 한다면 공격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였고 리키리우스의 지휘에 따라 안토니우스의 군단은 산을 넘었다. 안토니우스의 병세는 지극히 악화되어 이제 병사들까지도 그의 죽음을 논하는 상태였다. 병사들은 스스로 장례 행렬 같다는 농담을 주고 받았다. 하지만 정오 무렵이면 파리한 안색에도 어김없이 말을 타고 후미에서 선두까지 왕복하며 군사들을 독려하는 모 습에 그들의 장군에 대한 믿음은 깊어져만 갔다. " 좀 어떠십니까? " 선두에서 전방을 살피고 돌아온 리키리우스는 마차 속에 깊이 몸을 묻고 잠들어 있는 안토니우스가 깨지 않게 나즉히 퀸 투스에게 물었다. " 아, 조금 전에 막 잠이 들었어. 메로스가 수면향을 피웠거든. 계속 말을 타고 가겠다고 우겨서 말이야, 재워버렸지. " 퀸투스는 웃었지만 리키리우스는 따라 웃을 수 없었다. 리키리우스는 퀸투스가 지도를 보거나 장수들과 퇴각로를 이야기하는 군사의 일을 하지 않을 때는 언제나 서쪽 지평선을 멍하니 바라 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오히려 진중해진 리키리우스의 태도에 퀸투스가 가벼운 실소를 흘렸다. " 후후, 안토니우스는 괜찮을 거야. 그리 약한 사람이 아니니. 계속 수고하게, 리키리우스. " " 예, 군사께서도 눈을 좀 붙이시지요. " 꾸벅 인사를 하고 마차에서 멀어지는 모습에는 한치의 흔들림도 없다. 어째서 안토니우스의 측근이라는 자들은 이렇게 하나같이 진지한 걸까. 군사들 사이에선 공공연히 안토니우스의 정부쯤으로 불리고 있지만 전장에서는 미네르바의 사랑을 받고 있는 게 확실해 보이는 실력 있는 장수다, 리키리우스는. 노장군 아헤노발부스도 잔소리라면 그 누구에 못지 않고 정말 안토니우스의 친부처럼 그를 아껴주고 있다. 자청에서 후미에서 보병들과 함께 보조를 맞추고 있는 그는 자애로운 노장군임에 틀림 없다. 그리고ㅡ 진지함에 있어서는 그 누구에게 지지 않을, 지금도 그의 잔소리가 귓가에 선한데. 어째서 자네를 그리워하는데, 선하게 웃는 모습도 아닌, 부드럽게 키스할 때 눈을 감는 모습도, 짓궂은 장난에 귀엽게 당황하는 모습도 아닌, 조잘조잘 잔소리를 하는 모습이라니. 자네도 반성해야 해, 이로스 이아로스. # 12 약속대로 파르테아 군은 초원을 벗어날 때까지 이렇다 할 공격을 해오지는 않았다. 눈 앞에 하얀 서리가 내린 산이 보였다. 아락스 협곡, 몇 개월이 지났음에도 산에는 지난 날 이곳을 미처 넘지 못한 로마군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부서진 전차와 널려진 병장기 사이에서 여전히 피내음이 진동하는 듯 했다. 병사들은 한결같이 생각했다. 저 산만 넘으면, 저 산만 넘으면, 고향으로 갈 수 있다. 첫눈이 내리기 시작한 산을 넘어 퇴각하는 안토니우스의 군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지중해의 향기가 아닌, 파상적인 공격을 퍼붓는 파르테아의 매복병이었다. " 파르테아 군이다!!!!!! 공격이다!!!!!!!!!! 매복이다!!!!!!!!!!!!! " " 보병은 4열로!! 방패를 세워!!!! 궁병대를 보호하라!!! " 리키리우스의 다급한 외침이 계곡에 메아리쳤지만 함성을 지르며 측면에서 쏟아지는 파르테아군에 의해 가로막혀 병사들은 당황한 채 처참하게 죽어갔다. " 이런!!! 프라테스 이놈!!!!!!!!!! " 안토니우스는 퀸투스가 말릴 틈도 없이 마차에서 뛰어 내려 근처에 주인 잃은 말을 타고 리키리우스의 등을 노리던 창병의 목을 가차 없이 날 렸다. " 리키리우스!! 대열이 끊기면 안돼!! 각개격파 당한다!! 보급대를 보호해!!! " " 네, 장군!!! 제4보병대!!! 대열을 유지하라!!! " 리키리우스는 순간 안토니우스가 독한 폐렴을 앓고 있다는 것도 잊어버린 채 명령을 받아 말을 몰았다. 뒤늦게 안토니우스를 보호하기 위해 주변에서 그를 찾았지만 혼전의 틈에 서 장군의 표식도 달지 않고, 무장도 하지 않은 채 가벼운 차림인 그를 찾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 장군!!!!!!!!!!! ' " 이 병신같은 놈아!!!!!!!!!!! 안토니우스!!!!!! " 퀸투스는 있는 대로 아는 대로 욕설을 퍼부으면서 전장 한 가운데로 사라진 안토니우스를 찾기 위해, 눈을 부릅떴다. 도대체 마 차를 지키고 있는 병사들은 안토니우스를 막지 않고 뭘 했단 말인가!!! 뼈속부터 문관인 퀸투스에게 검이란 그저 휘두르기 운동에 지나지 않았다. 테리우스가 검을 배운다고 설칠 때 미리미리 좀 배워둘걸, 후회했지만 늦은 일이었다. 미안, 이아로스, 약속을 못 지킬 것 같아. 지금 나의 할 일은 군사로서 발광중인 대장군을 무사히 모셔오는 것이거든. 퀸투스는 메로스가 주신 제우스를 찾는 것을 무시하며 마차의 문을 힘차게 열었다. " 이놈들아!!!! 감히 누가 이 안토니우스님의 군사들을 공격하는 것이냐!!!! " 푸른 망토에 현란하게 수 놓여진 황금 나무 문양이 전투에 여념이 없는 병사들의 시선을 잡았다. 그의 머리에는 황금빛의 아름다운 사자의 털로 만든 모자가 얌전히 씌여져 있었다. ' 으아아!!! 정말 끈질기게 따라오네!!!! ' 말에 거의 납작 엎드려 달리는 퀸투스의 뒤로 둥근 투구를 쓴 파르테아의 근사들이 뒤따랐다. 그들은 시종 뭔가를 외쳐댔지만 5개국어의 실력을 자랑하는 퀸투스도 지금 만큼은 그들의 말소리를 알아들을 수 없었다. ' 제길, 이 정도 따라왔으면 내가 안토니우스가 아닌 것쯤은 알아 차렸야지!! 이 바보같은 놈들아!!! 머리는 투구 쓰려고 달고 태어났냐!!!! ' [ 잡아!!! 저놈이 안토니우스다!!! ] [ 놈을 잡는 자에겐 황금상이 주어진다!!! ] [ 와아아아아!!!! ] 애초에 안토니우스의 흉내를 내서 군사들의 시선을 돌리고 도망가다 어느 구석에 옷을 버리고 숨어있다 본영에 돌아온다는 퀸투스의 야심찬 계획은 포상에 눈이 멀어 타겟을 알아보지 못하는 미련한 파르테아군사들 때문에 점점 꼬여가고 있었다. ' 난 안토니우스가 아니란 말야!!!!' 뒤로 돌아보며 달리던 퀸투스의 머리를 비스듬하게 부러져 내린 나뭇가지가 가격했다. " 커어억!!!!!!!!!! " 말에서 떨어진 퀸투스는 눈위로 한참을 굴러 떨어졌다. 눈 때문에 충격을 받지는 않았지만 눈을 가리는 핏물은 분명 그의 것이었다. 서둘러 푸른 망토를 눈 속에 묻어 버리고 몸을 숨겼지만 점점히 떨어진 핏물에 금방 파르테아 군에게 눈에 들었다. 이미 전장에서 멀어진지 오래다, 주변에는 잔뜩 성이 난 파르테아 군들만이 있을 뿐이다. 한참을 추격하면서 활을 날린 통에 그들에세 화살이 떨어진 것이 달아나는 퀸투스에게는 다행한 일이었다. ' 안토니우스!!!!!! 이 병신 같은 새끼!!! 네 새끼 때문에 내가 무슨 고생이야!! ' 지금이라도 군사의 탈주(?)를 눈치 챈 대장군이 군사를 보내준다면 좋을 텐데. 아마 퀸투스가 생각 없이(?) 실시한 교란극은 소수정예로 부대의 취약점만 노리며 공격한 그들에게 적 잖은 혼란을 주었을 것이다. 미친 안토니우스가 직접 전장을 지휘하고 있고 리키리우스도 있고 아헤노발부스 장군이 후미에 버티고 있으니 이 정도 혼란이면 전장에 남아있는 파르테아군은 모두 살해되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장교급으로 보이는 놈들도 상급에 눈이 멀어 가짜 안토니우스를 찾아올 지경이라면, 그런 버러지 같은 놈들에게 당했을 대 로마의 군인이 아니다. 퀸투스는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에 가까운 곳으로 몸을 날렸다. 큰 소리로 외쳤다. " Noli timere!! Sum filius Romani! " ( 두려워 하지 마라! 나는 로마의 아들이다!) 싸움은 못해도 뜀박질 하나에는 자신이 있다. 퀸투스는 잎이 떨어지고 앙상한 나뭇가지에 뜯기고 찔리면서도 쉬지 않고 뛰었다. 뒤에는 여전히 짐승같은 표효를 하는 파르테아의 군이 따라 오고 있었다. " 아악! " 눈에 덮여 미처 보지 못한 토끼굴에 발이 빠져 퀸투스는 신음을 흘리며 눈밭에 나뒹굴었다. 일어나려 몸을 부산히 움직여보지만 발목이 크게 접질러진 듯했다. 등 너머로 가까이 다가오는 군사들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철걱 거리는 쇠가 부딪치는 소리가 점차 가까워졌다. " 아,,,안돼......... 이런...." 이럴 때 페르시아어를 몰랐다면 좀더 편하게 죽을 수 있었을까. 그들의 말소리에서 벗어날 수 없는 죽음의 선고를 잔인한 귀는 심장에 그 의미를 전달했다. ' 이아로스! ' 단 한마디, 단 한사람. 비명 같은 울음이 하늘을 갈랐다. . . .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있는 나무의 검은 그림자가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검은 숲의 덫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태우는 달리고 달렸지만 숲은 계속해서 태우의 뒤를 쫓았다. 어디지? 어디로 가야하지? 한 줄기 빛이 희미하게 비추는 방향을 향해 뛰고 또 뛰었다. 숲에서 벗어나야 해. 달려야 해. 찾아야 해. 무엇을? 무엇을? 태우는 쉭쉭 거리는, 커다란 아나콘다처럼 죄어오는 숲을 벗어나기 위해 달렸다. 코 끝에 낯선 향기기 닿았다. 빛이 비치는 방향에서 낯설고 익숙한 향이 풍겼다. 숲의 끝에 눈부신 금빛의 관을 쓴 사람이 있었다. 아니 금발머리의 남자. 저 사람을 알고 있어. 저 사람을 기다리고 있어! 아아, 있는 힘껏 달렸다. 숲이 집어 삼키기 전에, 그에게 가야해!!! 눈 앞에 서 있는 남자의 옷자락이 손가락에서 빠져나갔다. 그에게서 풍겨오는 향은 싱그러운, 익숙한 체향이 아닌, 비릿한 혈향, 그의 몸에서 수십줄기의 피가 솟구쳐 올랐다! 아름다운 빛의 그는 피줄기가 되어 녹아내리고 있었다. 안돼, 안돼!!!!!!!!! 발밑에 검은 늪이 생기면서, 피웅덩이 속으로 하염없이 끌려 들어갔다. 안 돼, 안 돼!!!!!!!!!!!!!!! " 으아아아!!!!!!!!!!!!!!!!!!! " 태우는 벌떡 일어났다. 악몽인가? 땀에 흥건히 젖은 머리가 기분 나쁜 한기를 품고 목덜미에 닿았다. 어스름하게 밖이 밝고 있었다. 쾅! " 테리우스!!!!!!!!!!!! " 오늘도 어김없이 한 손에 검을 든 채 카피토가 방문을 열었다. 아니, 방문을 발로 차 부셔버리면서 방안에 난입했다. 집사인 딕투스가 얼마나 눈물을 흘릴지는 뻔한 일이다. " 카피토..." 침상에 멍한 표정으로 앉아있는 그를 보고 카피토는 나지막한 한숨을 쉬었다. 요 근래 그는 새벽녂이면 처절한 비명성과 함께 깨어나곤 했다. " .........악몽을 꾸셨습니까 " 카피토는 선반 위에 올려져 있던 포도주를 잔에 따라 거친 숨을 고르고 침상 위에 앉아 있는 태우에게 건내 주었다. 붉게 출렁이는 포도주의 빛이 마치, 마치, 새빨간 피같아 태우는 한참을 잔을 들지 못했다. " 꿈을 꿨어요. 그런데 기억이 나질 않아요 " 거짓말, 지금도 피내음이 선명하게 남아있다. " 테리우스...." 며칠 전 전령이 가지고 온 보고는 아테네를 단 번에 쥐 죽은 듯 고요하게 만들었다. 제1군단의 전멸소식, 제2군단의 퇴패소식. 안토니우스의 개선만을 기다리던 군사들도, 남편을 아들을 기다리던 여인들도 간간히 흐느낌만을 흘릴 뿐이었다. 태우는 감정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로 전황을 알려주는 카피토를 멍하게 바라봤었다. 그의 목소리에서는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담담한 목소리로 비극적인 소식을 전하는 카피토에게 거짓말이라고 외치고 싶었다. 하지만 그의 눈에 어린 지독한 슬픔이 모든 것이 사실임을 알게 해 주었다. 믿을 수 없다. 저택 여기저기에 분개하는 병사들도, 거리에서 그들의 남자들의 이름을 부르며 통곡하는 여인들의 모습도 모두 영화의 한 장면 같이 지독하게도 현실감이 없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믿지 않겠어. 공포영화를 보는 것은 끔찍이도 싫어하면서 귀신이 없다고 강력하게 주장하는 혜준처럼 속으로 되뇌여 보지만 들려오는 소식은 절망적이다. 와인잔을 내려놓고 다가선 창가에서는 어슴프레 밝아오는 새벽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짙은 감색의 하늘위로 붉은 그림자는 동녘을 드리워 있었다. 동쪽, 동방. 오리엔트. 지금 그 사람이 있는 곳... 살아 있을까. 무사히 돌아올까. - 돌아올게. 네게 돌아올게. 내게 약속했잖아. - 약속할게, 상처 하나 없이 지금 이 모습 그대로 너의 앞에 서겠다. 네게 돌아올게. 네게 돌아올게......... 약속했잖아요. 입맞추며 맹세했잖아...... - 약속하지, 돌아오는 그 때에 진실된 그 이름 앞에 네게 입맞추리니... 내 이름을 불러주겠다고, 나의 사람이라고........ 검은 바다에 지금이라도 그의 함대가 나타날 것만 같은데.... 저렇게 백색의 돛을 펄럭이며... 하얀 돛? 눈을 비비고 다시 보아도 수평선에 점점이 떠오르는 것은........... 설마? " 카피토? 저기 수평선에 하얀 것이?? " " 저것은! " 카피토가 더 멀리 보려는 듯이 창문에서 몸을 내미는 순간, 육중한 고동의 소리가 아테네의 새벽을 깨웠다. 뿌우우우우우 뿌우우우우우 " 전방에 함대입니다!! 함선이 접근하고 있습니다!!! " " 경계 나팔을 불어라!!!! " 사방에 횃불이 켜지면서 분주하게 아테네는 순식간에 환하게 밝혀졌다. 동쪽만 바로 내려다보이는 절벽에 위치한 안토니우스의 요새에서 하나 둘씩 거리에 피어오르는 봉화에 휩싸인 아테네는 전장을 방불케 했다. 검은 어둠을 사이에 두고 도시와 함대가 함께 불을 피웠다. 아테네와 서서히 다가오는 함대 사이에 검은 장막이 드리워져 있는 듯 했다. 태우는 뱃전에 환하게 불을 켜고 다가오는 함대를 망연하게 바라보았다. 그제 서야 태우는 역사를 다시 떠올릴 수 있었다. 카피토가 만류하는 것을 뿌리치고 그와 함께 포구를 향해 달렸다. 지금 들어오고 있는 함대의 주인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그를 만나기 위해 그를 돕기 위해 돌아온 것이다. 가냘픈 여인의 몸으로 동생을 설득하여 물자와 병력을 가지고 안토니우스를 위하여. 하지만.......... 돌아오지 않아. 그는 이곳으로 돌아오지 않아요. 죽을 때까지 단 한번도 이 땅을 밟지 않아요. 안토니우스는 돌아오지 않아. 안토니우스는 내게 돌아오지 않아... 아아, 그는 이곳으로 돌아오지 않아..... # 13 아락스 협곡에서의 파르테아의 기습은 엄청난 피해를 입혔다. 대부분 지중해 출신의 군인들은 눈이라는 장애물에 속절없이 무너져갔다. 기습으로 흐투러진 전열을 가다듬고 전황이 수습되자 안토니우스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하는 티티우스였다. " 죄송합니다. 제 부주의였습니다. " 티티우스(제1군단이었다가 살아 돌아온 기병대장^^;; )는 고개를 떨굴 채 안토니우스에게 용서를 구했다. 마차의 보호는 티티우스가 맡고 있었다. 그는 안토니우스가 수하의 말을 빼앗아 전장으로 나서는 안토 니우스를 저지하지 못하였으며 그 후에 퀸투스가 엉성한 황색의 털모자와 푸른 망토를 뒤집어쓰고 달릴 때에도 저지하지 못했다. 장수들은 하나같이 그의 처벌을 주장했지만 안토니우스는 그를 강등시키는 것으로 일을 마무리 지었다. 지금은 단 한명의 군사라도 더 살아서 돌아가게 하고 싶었다. 장수들은 불만이 가득한 표정으로 안토니우스의 결정을 따랐다. 장수들을 물리고 안토니우스는 새롭게 임명한 기병대장을 찾아 안토니우스는 막사를 나섰다. 티티우스의 자리를 맡을 예정인 새 기병대장은 안토니우스의 막사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그가 있는 막사에서 막 나온 군의관은 안토니우스에게 아침 저녁으로 그리스 산 타임차를 마실 것을 또 한번 강조했다. 안토니우스는 군의관에게 미소를 지어주고 막사의 천막을 걷었다. 그는 우두커니 침상 곁에 앉아있었다. 안토니우스를 향해 예를 갖추고 일어서는 그를 만류하며 안토니우스도 곁에 있던 의자에 앉았다. " 많이 안 좋은가? " " 상처는 별것 아닌데, 무리를 많이 했나봅니다. 원래 몸을 움직이는 것을 싫어하니까요. " " 오래 깨어나지를 않는군. " " 네. 지난 일주일간 잠깐 일어났다 자기를 반복했습니다. " " 곧 일어 날걸세. 그 동안 잠을 좀 못 잤거든. 좋은 꿈을 꾸고 있는 거겠지. " " 그래야지요, 장군께서도 쾌차 하십시오. " " 고마워. 서둘러 도착해 준 덕분에 피해를 많이 줄일 수 있었어. 매복의 정도는 어떻던가? " " 아락스 협곡을 타고 산세에 능숙한 병사들이 만 여명이 앞길에 있습니다. 이대로 행군하는 것은 자살 행위입니다. 절반의 희생은 감수해야할지도 모릅니다. " " 회군 할 수도 없지. 그랬다간 포위된 채 사냥될 뿐이다. " "으으윽........" 침상에서 들려온 신음소리에 전황에 대한 대화는 곧 끊어졌다. 이 후의 이야기는 신음성의 주인이 깨어나야 이루어질 것이다. " 허참. ,기절하다니, 어지간히 놀랬었나보지. " " 저도 놀랐습니다. 보자마자 기절해 버려서..." " 수고했어, 이아로스 " " 아닙니다. " 어깨에 닿을 듯한 갈색머리를 뒤로 넘기며 웃는 사내, 이아로스는 신음성을 흘리는 퀸투스의 손을 놓지 않은 채였다. " 두 사람 다 잃어버리는 줄 알았어. " " 그럴리가요. " 드물게 이아로스는 소리를 내어 웃었다. 그 생각을 안 한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살아서 이 사람의 손을 다시 잡게 되었으니까. 모든 것은 무사히 우리들의 바다(지중해)로 돌아가는 것을 위한 것이었으니까, 너무 화내지 말아요, 사랑하는 퀸투스. . . . 아락스 협곡을 이십일만에 주파했다. 한 달에 걸친 퇴각로에서 스무 차례나 계속된 파르테아의 군의 기습에 2만의 군사를 잃었다. 다행히 기병들은 무사했지만 보병들의 희생이 너무나 컸다. 안토니우스는 필사적으로 몸을 움직여 죽음의 계곡과 같은 이곳에서 나머지 군사들을 구해내었다. 쉴새도 없이 산을 빠져 나와 야트막한 구릉지에 진영을 가다듬은 안토니우스는 이후의 진군로를 정하기 위해 여념이 없었다. " 손에 칼 한번 제대로 쥐지 않은 문인주제에 전장으로 뛰쳐나가다니 " 안토니우스는 지도에 표시를 하다말고 발치에 있던 의자를 발로 차 부서뜨리며 신경질을 냈다. 리키리우스는 여기저기서 날라든 전서구가 가져온 각 지역의 상황을 종합하다말고 원래 이일을 도맡아 야 했던 사람을 떠올렸다. 덩달아 안토니우스의 일은 가중되었고 리키리우스는 팔자에도 없는 서류정리에 몸살을 앓고 있었다. 신경질적으로 지도를 살피며 안토니우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게 생각이 있는 듯 하면서 생각 없이 움직이는 것이 퀸투스였다. 퀸투스 생각에야 몸도 성치 않는 자신이 염려되었겠지만 그렇다면 그의 할 일은 얌전히 마차에서 되돌아온 장군에게 앞으로의 대책에 대해서 생각해 놓고 있는 것이다. 쓸데없이 망토를 두르고 전쟁터를 누비라고 데려온 것이 아니었다! 병사들에게 사냥감처럼 몰이나 당하라고 데려온 것이 아니었다! 그는 , 퀸투스는 30년을 같이한 친우였다. 집안이 불타고 계부가 죽어갈 때도 같이했던 유일무이한 친우였다. . . . "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거야!!!!!!!!!!! 어떻게 나를 속여!!!! 이 죽일 놈들아!!!! " " 어쩔 수 없었어. " " 어쩔 수 없었습니다. " 동시에 같이 터져나온 대답에 깨어난 퀸투스는 더욱 고함을 질렀다. " 나는 군사야!!! 그전의 네 친구고!!! 그 전의 너의 연인이야!!! 그런데 죽은 걸로 날 속여!!! 일부러 뛰쳐나가!!!!!!!!!!!!!! " 파르테아군인의 칼이 목덜미로 떨어질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들은 분명, 머리를 베어가자, 뒷목을 쳐버려라는 말을 했었다. 그들의 발걸음이 바로 등뒤에서 느껴지는 순간 두 눈을 감았고 떠오르는 얼굴에, 부르고 싶은 그 이름에, 눈을 감아도 보이지 않는 이아로스의 얼굴에 다시 눈을 떴을 때 거짓말 같이 이아로스가 눈앞에 있었다, 밉살스런 잔소리도 함께!! - 군사라는 사람이 본영을 지키지는 않고 도대체 여기서 뭐 하는 겁니까. - 자네.... 너...너....죽은거 아니었어? 살풋이 이마를 찡그리며 이아로스는 정말 죽었으면 좋겠습니까, 라고 덧붙이고 테리우스의 턱을 빠지게 했던 멋진 창술로 달려 오는 파르테아의 군사들을 처리했다. 어느새 등뒤로 단 한 명도 살아나지 못했다는 제3기병대와 전차부대의 군인들이 나타났다. 다시 눈을 앞으로 돌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묻고 싶은 것도 많았지만 죽음의 고비를 넘나들고 죽었다던 연인이 되돌 아오는 정신적 충격에 퀸투스는 욱신거리는 발목의 상처에도 불구하고 기절을 했다. 그 와중에도 정말 안토니우스님이 아무런 언질도 주지 않으신건가, 라고 중얼거리며 그를 안아드는 이아로스의 목소리를 똑똑히 들었다. 이,,,이놈들을!!!! 이 죽일 놈들아!!! " 그건 나도 할말이 있어, 누가 따라 나오라고 했어. 군사라면 당연히 전장을 읽고 차후대비를 했어야지. 설마 내가 그 산 벌레같은 파르테아군에게 당할 거라고 생각했나? " " 그야 당연히 몸도 성치 않은데다 무구도 걸치지 않고 나갔으...설,,설마!!! 너 꾀병이었어!?!?!!?! " " 그럴 리가, 옆에서 간 병호까지 도맡아 했으면서 꾀병이라니. " 능청스레 웃고 있지만 입술은 갈라지고 여전히 창백한 안색의 안토니우스였다. 그렇다면 결론은 이아로스가 매복된 병사들에게 들키지 않게 접근할 수 있도록 일부로 전방에서 지휘를 했단 말인가. 그 몸으로, 열이 펄펄 끓고 각혈을 하면서도. 단 하나뿐인 친우까지도 속여가며. 언제 쓰러질지 모르는 몸을 이끌고. 이 미련한 친구야, 그 모든 것을 혼자서 짊어지나. 이 바보 같은 친구야... 코끝이 찡해졌다. " 그런 무모한 짓을!!!!!!!!! " " 최선이었어. 그렇기에 절반의 군사를 살릴 수 있었다. " 절반의 군사. 퀸투스는 뭐라 대꾸하고 싶었지만 입에서 나오는 소리는 없었다. 만약 안토니우스가 건강이 나쁘지 않았다면, 그는 참모로서 안토니우스가 전방에서 적의 시선을 끌 것 을 제안했을지도 모른다. 절반의 군사를 살리기 위해서는. 그렇지 않았다면, 안토니우스의 군대는 전멸했을 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 하여간 퀸투스 덕분에 이상한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 " 무슨 소리야? " 죽었다 살아났어도(사실은 안토니우스의 명에 따라 군사들을 데리고 아락스에 매복하고 있었던 것이지 만) 이아로스의 잔소리는 여전했다. " 병사들이 안토니우스님이 자살을 하려고 했다는 이야기들을 하더군요." " 왜 그런 소문이? " 퀸투스가 의아한 듯 묻고 안토니우스는 인상을 썼다. 안 그래도 안토니우스는 그 소문에 자손심에 금이 가는 소리가 들릴 지경이다. " 안토니우스님이 자살을 하려고 했다는 소문입니다. 도망칠 때, 내가 안토니우스다! 나를 죽여라!! 라고 했다면서요? 그게 와전이 돼서 안토니우스님이 파르테아의 공격에 상심한 나머지 자살을 기도했다는 소문이 파다합니다. 온 지중해에 퍼질 겁니다. 구체적으로 서사시로 떠돌지도 모른다구요. " 한방 얻어맞은 듯한 퀸투스의 표정에 이아로스는 웃음이 나오는 것을 참았다. 안토니우스가 정말 위험한 지경이었다면(사실 위험하기는 했다) 퀸투스의 행동을 추앙받아 마땅할 것이 었다. 안토니우스가 직접 전방에서 군사들과 싸우고 퀸투스가 제2매복조를 유인한 덕에 이아로스는 손쉽게 파 르테아의 이중 매복군을 덮치고 본진으로 합류할 수 있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안토니우스는 인정하는 바였지만 검을 제대로 만지지도 못하면서 본영을 벗어난 무모한 행동이 용서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심장이 떨어져 나가는 기분이었다. 본 진에 남겨둔 수하가 퀸투스가 달리는 방향을 뿔피리로 알려주지 않았다면, 조금만 늦었다면, 만약은 없는 것이지만 이아로스는 신께 진심으로 감사했다. 그리고 그의 연인은 다행이라고 진심으로 안도하는 리키리우스의 말처럼 전과 다르지 않았다. 그것이 자신때문이라는 사실에 가슴이 아리기도 하고 벅차오르기도 했다. " 후후.. 푸하하하하하!!!!!!!! 그거 쌤통이다!!! 푸하하! 한번 당해봐야 해!!! 질난 척만 하더니만, 자살하려는 안토니우스라!!! 창피하지??? 푸하하하하!!! " " 말을 말자! 말을 말어! 파르테스가 얼마나 부풀려 떠들어 댈지!! " " 푸하하하하!!!!!!!!! " 퀸투스의 웃음 소리는 여간해서 멎을 것 같지 않았다. 한번 웃기 시작하면 지칠줄 모르는 그였다. 듣고 싶었다. 말하고 싶었다. 안고 싶었다. 퀸투스, 나의 퀸투스. 이아로스의 깊은 시선을 느낀 퀸투스가 정말 드물게 일찍 웃음을 걷어버렸다. 어울리지 않게 쑥스러운 듯한 그 모습은 십년 전 이아로스의 진지한 고백을 받았을 때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안토니우스는 그윽한 시선으로 퀸투스를 바라보는 이아로스의 모습에서 다시는 이런 전략을 세우지는 않을 것이라고 다짐했다. 최선이었다지만 잔혹한 방법이었다. 서로를 따뜻하게 바라보는 그들의 모습을 다시는 잃고 싶지 않았다. . . . " 안토니우스님? " " 왜 그러지. 리키리우스? " 퀸투스가 깨어날 때의 상황을 떠올리며 실소하던 안토니우스는 리키리우스의 부름에 정신이 들었다. " 시리아에서는 어떻게 하실 계획인지... " " 퀸투스가 내가 쓰러졌을 때 나 모르게 지원을 요청했다고 하더군. " " 지원이라 하심은............. 누구에게? " " 그녀가 곧 함대를 이끌고 시리아로 도착할 것이야, 꼭 와줄거다. 그녀는 그런 여인이거든. " "..............." 리키리우스는 안토니우스가 말하는 여인에 대해 직잠이 갔다. 하지만 그녀가 정말 지원군을 이끌고 시리아로 올 것이라는 것에는 사실 확신이 서지 않았다. 지옥 같은 이 순간을 벗어날 수만 있다면 수십 번을 리키리우스의 심장을 난도질 했던 그녀의 도움이라도 진 정으로 받고 싶었다. <제 5 장 Si me amas - 부디 나를 사랑하신다면> 끝. ****************************** + 로마의 휴일 제6장 Octavianus - 옥타비아누스 # 1 아테네 만에 가득한 군함은 로마의 위풍당당함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삼천의 병력이 타고온 군함은 이오니아의 하얀 햇살에 비쳐 그 위용이 느껴졌다. 눈처럼 하얀 돛에 녹색으로 그려진 독수리는 로마의 집정관인 카이사르 미노르의 문장이었다. 옥타비아가 이끌고 온 삼천의 군사와 물자는 아테네의 희망과 함께 무엇인가 불편함을 함께 갖고 왔다. 술렁이는 아테네의 공기는 언제 끊어질지 모르는 팽팽한 실과 같았다. 아테네의 남아있는 안토니우스의 식솔들은 지원군이라는 사실에 안도하면서도 언제 그들이 침략군으로 변할지 몰라 두려워했다. 카이사르 미노르의 문장이 선명한 돛은 그렇게 아테네를 긴장과 정적속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그들의 안주인이었던 옥타비아가 환하게 웃으며 그들의 안전와 안토니우스의 무사를 기원했지만 그들의 뇌리 속에는 클레오파트라라는 이름도 함께 각인되어 있는 터였다. " 우리는 살았어, 안토니우스님을 지원하는 군대래. " " 그치만 안토니우스님은 옥타비아님하고 이혼한 거 아니었어? " " 아까 들었잖아! 옥타비아님은 부군이 걱정되어 한달음에 달려 오셨다잖아. " " 안토니우스님을 도울 거면 동방으로 가야지.. 왜 아테네에 오느냔 말이야? " 수군거리는 군사들의 대화는 테라스에 앉아있는 태우에게도 똑똑히 들려왔다. 그들 뿐만 아니라 당장 시장에 나가더라도 흔히 들을 수 있는 소문이었다. " 저들의 말이 맞아, 카피토. 안토니우스는 이곳으로 오지 않아. " " 테리우스. " 카피토는 나무라듯 확신 어린 목소리로 단정하는 그의 이름을 불렀다. " 사실이야. 그래서 고민하고 있어. 옥타비아에게 사실을 말 해주고 그녀의 함대를 시리아로 보내는 것에. " " 시리아라고 하셨습니까? " 의심어린 눈초리로 자신을 바라보는 카피토를 향해 태우는 마주 웃어주었다. 카피토에게는 그 미소가 마치 우는 것 같아 보였다. " 안토니우스는 군사의 절반을 잃었어. 동방의 군주들이 배반을 하고 파르테아에게 기습을 당하고 시리아로 가서 지원병을 기다릴거야. " 어떻게? 마치 안토니우스와 대화을 나눈 것처럼 테리우스는 카피토도 알지 못하는 전황을 줄줄이 읊었다. 곧 전령이 도착할 테지만, 아직 아테네의 있는 그 누구도 정확한 사실을 알고 있는 이는 없었다. 어떻게 그런 사실을 알고 있는 지 묻지 않았다. 그 전에 카피토는 테리우스의 말이 사실임을 믿고 있는 스스로 에게 놀라고 있었기에. "........그럼 지원병을 데리고 시리아로 가면 되지 않습니까. " " 가고 싶지만, 그래서는 안 돼. " " 무슨? " 카피토는 이해 할 수 없었다. 매일 같이 안토니우스에게 편지를 쓰고 태우는 일을 반복하는 그였다. 아테네에 있는 그 누구보다도 안토니우스에 게 가고싶어하는 사람이 바로 테리우스라고 카피토는 생각했다, 자신보다도 더. 옥타비아에게 시리아로 같이 가자고 한다면 그녀는 분명 거절하지 않을텐데. 테리우스는 주저하고 있었다. 아니 가서는 안된다고 스스로를 다잡고 있었다. 카피토의 눈에는 정녕 그리 보였다. " 카피토, 안토니우스에게 지원군은 도착해. 하지만 옥타비아도, 옥타비아누스도 아니야. " 우리도 아니야. 속으로 중얼거린 작은 목소리였지만 카피토는 테리우스의 목소리도 놓치지 않았다. " 테리우스.........." " 클레오파트라를 본 적 있어? " " 네? 갑자기 그건 왜 물으시는 겁니까? " 테라스의 난간에 걸터앉은 채 태우는 동방을 응시한 채 소설에서, 영화에서 익히 보았던 그녀를 떠올려 보았다. 엘리자베스 테일러처럼 그녀도 아름다울까. 그레이스 켈리처럼 기품이 있을까. 소피아 로렌처럼 관능적일까. " 클레오파트라는 정말 안토니우스를 사랑하고 있나봐. " 그렇지 않다면 패색이 짙은 안토니우스를 구원하러 가지 않았을 거야. 그를 위해 함대를 이끌고 그에게 가지 않았겠지. 이곳에서 그를 기다리는 사람이 이렇게나 많은데........... 안토니우스가 돌아오지 않을 이유가 없잖아. 옥타비아는 안토니우스가 아테네로 돌아올 수 있게 만반의 준비를 했다고 했다. 옥타비아누스가 군량와 군사들을 원 없이 써도 좋다는 허락까지 내렸다며 두 사람의 화해를 믿어 의심 치 않았다. " 안토니우스님께 사자를 보냈어요. 곧 좋은 소식을 가지고 돌아올 거에요. 안토니우스님에게 함께 가도록 해요. " 옥타비아는 태우의 손을 잡으며 아름답게 웃었지만 태우는 그녀가 떠날 때와 마찬가지로 마주 웃을 수가 없었다. 만날 수 없다는 말을 외치고 싶었다. 천진하게 웃는 미소를 지우고 싶었다. 아니 사실은 마음 깊은 곳에서는 옥타비아와 함께 안토니우스에게 가고 싶었다. 지금 태우가 이 시간에 서 있는 것 자체로 역사가 비틀어진 것이라면, 정말 그에게 달려가도 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안토니우스는 살 수 있을 지도 몰라........... " 테리우스? " 지금, 무슨 생각을..... 앞으로 펼쳐질 역사가 머릿 속에서 메아리쳤다. 의식하지 않으려는 기억이 머리를 부술 듯이 날뛰기 시작했다. 지금 내가 간다면? 옥타비아와 함께 안토니우스를 도우려 간다면? 지금 내가 간다면? " 테리우스!!!!!!!!!! " 뺨에 느껴지는 얼얼한 통증과 함께 머리가 깨질 듯한 두통이 씻은 듯히 사라졌다. 눈 앞에는 심장에 칼을 꽂고 피를 흘리고 있는 안토니우스가 아니라 걱정스런 얼굴로 그의 뺨을 어루만 지고 있는 카피토가 있을 뿐이었다. " 카피토.......... 난 모르겠어... 정말 모르겠어.... 우우욱......으흑.. " 이를 악물고 눈물을 삼키는 그를 카피토는 망연히 보고 있었다. 더 가늘고 많은 울음을 안은 목소리가 귀에 들릴 때까지. " 소식을 들은 건가요? " 창백한 안색의 옥타비아가 문설주를 잡고 쓰러질 듯 위태하게 서 있었다. " 전령이 도착했는데 안토니우스님은 무사하시다고 하더군요. 군사인 델리우스도 이아로스도 무사하다고 해요. " 기쁜 소식을 전하는 옥타비아였지만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고 태우는 직감적으로 이어질 소식을 알 수 있었다. " 지원군이 도착해서 무사히 안티오키아로 귀환하셨다고 해요. ...........이집트의 여왕이.....안토니우스님을 돕기 위해 함대를 이끌고 시리아로 갔다더군요. .... 내가 데려온 군사들은 필요가 없게 되었네요. " 옥타비아는 자조적으로 웃었지만 이윽고 그녀의 눈에서는 맑은 물이 흘러내렸다. 태우는 그녀에게 다가가 위로하고 싶었지만 그에게는 그럴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로마에서도 사신이 왔는데.... 나의 동생은 모든 것을 예상하고 있었나봐요 ................. 옥타비아누스가 화가 무척 났어요. " 넋이 나간 얼굴로 그녀가 덧붙이듯 중얼거리는 말에 태우가 의아한 듯 옥타비아에게 다가서려했지만 카피토가 검을 빼어 들고 옥 타비아에게 다가서려는 태우를 막아섰다. 그와 동시에 옥타비아가 로마에서 데려온 장수과 십여 명의 병사들이 방안으로 들어와 카피토와 태우를 에워 쌓다. " 미안해요.................난 옥타비안을 말릴 수가 없었어요..." . . . 굴곡이 없이 수직으로 쭉 뻗은 검은머리. 하얗다고 해야 할지 부드러운 크림을 떠올리게 하는 피부. 잘 익은 사과의 속살과도 같은 색깔. 누이는 금가루가 적당히 뿌려진 듯한 마치 신의 사자와 같다고 했었다. " 오랜만이군요. 테리우스라고 했던가요. " "..........안녕하세요. " 흑요석을 박아 놓은 듯한, 그 깊이를 가는 할 수 없는 검은 눈동자는 불안을 담고 있다. 옥타비아누스는 충분히 짐작이 가능한 그의 불안감에 기분이 과히 언짢아졌다. 자신을 바라보고 깜짝 놀라기도 하고, 시선을 돌리기도 하고 무엇인가 호소하는 듯한 아련한 눈이 신경 을 거슬리고 있었다. 그는 로마로 오는 내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고 했다. 눈물로 누이는 그의 안전에 대해 선처를 호소했지만 어딘가 모르게 옥타비아누스는 여유를 잃고 있었다. 어째서 자신이 그를 로마로 불려들였는지는 스스로도 이해가 되지 않는 행위였다. 그가, 테리우스라는 파르테아의 첩자일지도 모르는 저 자에 안토니우스에게 인질로서의 가치가 있을까. 그의 누이보다도 더. 그의 누이는 풀비아가 낳은 아이들까지(안토니우스는 전처 풀비아와 사이의 세 아이를 두었음) 돌보고 있었지만, 안토니우스는 그것에 대해 일말의 언급도 없었다. 아예 아이들의 목숨을 맡겨둔 것처럼 행동하는 그 때문에 당혹스러워하는 것은 옥타비아누스의 부하 각료들이었다. 안토니우스의 다섯 아이는 모두 옥타비아누스의 수중에 있었다. 그의 단 한마디면 그 아이들은 제 아비를 다시 볼 수 없을 지도 모르지만, 하나같이 어디인가 하나쯤은 안토니우스를 닮아서 탐스러운 금발이거나 혹은 푸른 눈을 가지고 있는 아이들을 옥타비아누스는 차마 손댈 수 없었다. 참모들 사이에서 안토니우스의 아이들을 인질로 사용하자는 이야기를 옥타비아누스는 항상 거절해왔었다. 게다가 옥타비아까지도 소박을 맞았다는 소문이 퍼지고 있고, 안토니우스가 클레오파트라와 합류했다면 옥타비아는 더 이상 정치적인 협상물로서의 가치는 없었다. 옥타비아누스에게는 안토니우스와 연결되는 단 하나의 끈 조차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제 그녀는 단지 아테네에서 오매불망 안토니우스만을 기다리고 있는 가여운 아낙일 뿐인 것이다. 그런데, 이 사내에게 그런 가치가 있는 것일까....... 안토니우스의 마음을 돌릴 수 있는 가치가 이 신비롭고 이질적인 동방의 사내에게서 찾을 수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나의 심장을 뽑아내는 한 이 있어도 그의 마을을 돌려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대는 내 손에 죽을 것이다. 옥타비아누스는 마치 자신이 절벽에 서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 불편한 점이 많겠지만 매형의 피보호자라면, 남이 아니니 편히 쉬시지요. " 녹색의 눈동자는 그리운 녹차의 향기를 생각나게 했다. 태우는 선실에서 단 한발자국도 나가지 않았지만 드나드는 자들의 말의 파편을 주워담아 하나의 가설을 세울 수 있었고 지금의 옥타비아누스의 태도로 절반 정도는 짐작한 대로라고 생각했다. 인질이다. 하지만 어째서? 태우는 로마로 오는 배에서 자신의 죽음을 확신하였다.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의 행위에 대한 보복으로 태우를 처형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옥타비아의 첫날밤을 빼앗은, 동방의 진주라는 이름으로 알려질 대로 알려진, 대외적으로 실상도 그러하지만 태우는 안토니우스의 정인이었다. 그의 누이와의 결혼의 의무를 버리고 클레오파트라와의 연합한 안토니우스를 도발하고 분노를 표하는 확실한 방법은 자신의 죽음일 것이다. 그러나 옥타비아누스는 그를 살려두기로 한 모양이었다. 언젠가 스치듯이 보았던 마이케나스가 자신의 처형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을 태우는 느끼고 있었다. 한시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왜 살려두는 것일까. 안토니우스에게 자신은 인질로서의 가치가 있는 것일까. 그 순간만큼은 태우와 옥타비아누스는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무슨 할말이라도 있습니까. " " 카피토를 만나고 싶습니다. " 당돌하군. 편히 쉬라는 자신의 말에 프로크레이우스를 따라 그의 처소로 나갔다고 생각하고 고개를 돌렸던 옥타비아누스는 조금전과는 달리 차분한 테리우스를 묘하게 바라보았다. 옥타비아누스의 친우이자 부관인 프로크레이우스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테리우스와 옥타비아누스를 번갈아 쳐다봤다. ".... 그는 선상에서 여러번 소란을 피웠고 나의 군사들을 해친 관계로 하옥되어있습니다. " 카피토는 테리우스를 구출하기 위해 그의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 저와 같이 있게 해주십시오. 제가 설득한다면 지난 번과 같은 일은 없을 겁니다. " " .........그대를 데리고 도주할 수도 있습니다. " " 서쪽으로는 히스파니아, 남으로는 시칠리아, 카르타고까지 북으로는 에르투스카, 동으로는 지중해가 가로막고 있습니다. 어디로 달아날 수가 있습니까? 카피토의 목적은 나의 안전입니다. 무모한 행동을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 "............생각보다 정세에 밝군요. " " 카피토도 상처를 입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부탁합니다. " 한국의 예법에 따라 허리를 굽혀 인사하는 태우의 모습은 공손하기 그지 없었다. 본인은 잘 모르고 있겠지만 동방예의지국이라고 불리는 조국의 습성은 고대인에게 생소하고도 경건한, 고귀한 자태로 보이고 있었다. 옥타비아누스는 그런 그를 잠시동안 관찰하였지만 그의 말에서 거짓을 찾을 수는 없었다. 그의 말대로 로마에서 도망을 친다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 . " 무슨 소리인가! 그를 석방한다니! " " 돌라벨라, 옥타비아누스님의 명령입니다. " " 흥! 그 검은 눈의 세이렌이 카이사르 미노르의 총기마저 흐린 것인가! 그 요물은 본보기로 당장에 처형해버려 야 했어! 천하의 안토니우스여! 어찌 그런 근본도 없는 사내를! " 옥타비아누스의 명으로 돌라벨라에게 죄수 석방을 요청하러 온 프로크레이우스는 남몰래 한숨을 쉬었다. 그런 요부로 보이지는 않던데.. 오히려 동방의 왕자라면 모를 까. 끊임없이 또다시 오디세이아다, 오 뮤즈시여. 돌라벨라는 군인이지만 스스로 시인이라고 자처하는 사내다. 하지만 그가 알고 있는 시가라고는 단지 오디세이아일 것이라고 프로크레이우스는 자신의 목을 걸 수도 있었다. 오디세이아의 한 부분을 읊어대며 비분강개하는 돌라벨라를 보면서 프로크레이우스는 현기증이 날 지경이었다. 마이케나스가 잠시 자리를 비운 지금 지하감옥에 대한 통제는 돌라벨라의 몫이었다. 카피토의 석방도 그를 통해 이루어져야하는데 돌라벨라는 지금 위대한 장 군 오디세우스가 마녀 칼립소의 손에 잡혀있는 장면을 읊어대며 칼립소와 신비한 검은 머리 청년을 비교하고 있었다. 프로크레이우스는 서사시에 나오는 칼립소와 그 검은 동방의 청년은 전혀 닮지 않았다구요..라고 외치고 싶었다. 오히려 가니메데 스라면 모를까라는 엉뚱한 상상을 덧붙이며 이제 헤르메스의 도움으로 칼립소의 손에서 벗어나는 오디세우스의 장면을 묘사하면서 헤르메스를 돌라벨라 자신에 비교하며 마녀(?)의 손에서 주군이 벗어나게 하는 꿈을 꾸는 그에게 겨우 한마디를 해서 장황한 서사시 를 멈출 수 있었다. ".........그렇게 궁금하면 카피토를 데려다주면서 직접보시면 되잖아요....." " 그렇군!! 곧 준비하지!!! " "..............." 아아, 돌라벨라. 방금 전 까지 절대 카피토의 석방을 반대하던 당신이 진정 맞으십니까. 프로크레이우스는 정말이지 성자 같은 자신의 주군 곁에 왜 제대로 된 군사가 없는 것인지 심각하게 고민했다. 그가 보기에 마이케나스 역시 정상적인 사람은 아니었다. . . . " 카피토!!! " " 폰티우스 카피토, 집정관께서 하해와 같은 아량을 베풀어 그대를 풀어주신 것이다. 그대의 주인의 이름에 먹칠을 하는 짓거리를 하지 말거라! " 돌라벨라라는 이름의 남자가 카피토를 방안으로 쓰러뜨릴 듯이 던져 넣고 태우를 향해 경멸의 시선을 던진 채 방을 나갔다. 돌라벨라는 안토니우스의 정부라는 사내의 면상을 똑똑히 보고 싶었다. 소문처럼 천박하 고 혼을 어지럽히는 창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남창과도 같은 모습을 단 하나도 찾아내지 못한 자신에 오히려 화가 났 다. 소문과 같은 사내가 아니다. 황금으로 온몸을 싸고있는 이집트의 여왕보다 더 아름다운 사내였다. 여인의 몸이 었다면 황제의 반려가 되었을 자다. 안토니우스가 단지 육욕을 풀기 위한 창부가 아니다. 범상한 인물이 아니다, 저 사내는. 돌라벨라는 옥타비아누스가 뭐라 하여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의 곁에서 숙련된 그의 직감에 따라 태우 를 위협적인 적이라고 단정지었다. 살려두어선 안 돼. 저런 자가 안토니우스의 곁에 있다면 절대로 위험하다. 인질로 삼기에도 위험할 정도로......... 돌라벨라가 방을 나가고 방 앞이 한동안 소란스럽더니 보초들이 증강된 듯 싶었다. 온몸이 멍투성이인 카피토는 힘겹게 침상에 앉아있었다. 안토니우스에 대한 험악한 감정이 한 대로 끝날 매를 배로 늘어나게 했겠지.... 그 매가 자신에게 향할 수도 있다는 것을 태우는 짐작하고 있었다. " 괜찮아요? 카피토? " " 괜찮습니다, 테리우스는 괜찮습니까? 그들이 무례하게 굴지 않던가요? " " 네... 좋아요." 힘없이 웃는 얼굴에서 겉으로 표현하는 말과는 정 반대의 뜻을 읽을 수 있었지만 카피토는 지금과 같은 상황속에서도 여전히 상대를 배려하는 것을 잊지 않은 그에게 안도했다. 저택의 분위기는 가벼운 것이 아니었으니까. 지하감옥에서 매질을 당하면서도 행여 무례한 자들이 그의 심성을 다치지 않게 하지 않을까 걱정했었다. 진심이든 아니든, 아니 진심으로 힘을 내려는 테리우스를 보며서 정작 추스러야 할 것은 자기 자신임을 커피토는 깨달았다. 그리고 맹세했다. " 꼭 돌아갈 수 있을 겁니다. " " 네. 그러니 지금은 좀 쉬어요. " 활짝 웃는 얼굴은 맹세의 정표. 돌아가자, 함께. 주인께로. 주인이 약속을 지키실 수 있도록, 그분께로 돌아가는 일. 카피토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그 맹세를 지킬 것을 다짐했다. # 2 "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 " .................... " "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사람치고는 무척 초조한 표정인걸? " 마이케나스는 속주에서 진상 받은 고급 술을 들이키면서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정말로 여유 만만이로군, 마치 두 사람의 상황이 뒤바뀐 것 같았다. 각지에서 들려오는 흉흉한 소문들을 뒤로 하고 검은 눈의 사내와 카피토는 저택의 정원을 산책하거나 서가의 책을 읽으면서 소일했다. 주변의 살벌한 기세로 감시를 하는 군사들이나 호기심이 어린 눈으로 흘깃대는 시녀들을 무시한 채 그야말로 유유자적이었다. 그가 로마에 온지 벌써 두 해가 지나고 있었다. 이상할 정도로 존재감 없이 옥타비아누스의 저택에 머물렀다. 동방에 있는 안토니우스의 첩자 가 드나들지 않을까하는 감시가 있었다. 그가 안토니우스의 간자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무색해질 정도로 이방인과 카피토는 하 릴없이 지냈다. 옥타비아누스와 아그리파가 저택을 비우고 일리리아에서 일 년이라는 시간을 지내고 돌아왔을 때도 그 는 무심하게 그들을 맞았다. 그 안에 단 한 번도 도주의 시도도 없었다고 했다. 그는 어떤 사람이지? 마이케나스는 슬며시 등허리로 내려오는 한기에 몸을 흠칫했다. 어지간히 둔감하던가, 혹은... 그만큼 담대하다는 뜻. 어쩌면 안토니우스가 총애한 이유가 따로 있을 거란 생각이 고개를 들었다. 깍득한 카피토의 태도를 보아도 심증이 굳어졌다. 이제 결정을 해야 한다. 2년에 걸린 일리리아의 원정은 옥타비아누스의 승리로 돌아왔다. 안토니우스는 아르메니아로 원정하여 승리를 거머쥐었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로마의 진정한 패자를 가리는 일 전의 때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로마에 없다. 저 사내는 이 일전에 어떤 패로 작용할 것인가. 죽여야 하는가. 아니면 살려 두어야하는가. 마이케나스는 옥타비아누스의 표정에서 같은 고민을 읽었다. 저 사내를 죽여야 하는가, 살려두어야 하는가. " 그건 뭐야? 호오, 멋진 검인걸? " " ........... " 푸른 빛이 감도는 철은 분명 옛 히타이트의 제련법으로 만들어 진 것이다. 과거 철기시대를 열어 오리엔트의 절반을 지배했던 히타이트의 검은 1000년이 지난 지금도 세계 최고의 검으로 통했다. 상아로 된 손잡이는 단검에 익숙치 않은 사람이라도 손에 맞게끔 잘 다듬어져 있었다. 양각인지 음각인지 구분이 안가는 부조는 검의 아름다움 뿐 아니라 실용성까지 염두에 두고 만든 듯 했다. 섬세한 무늬 중에는 넝쿨 넝쿨 올라가는 나무 문양과 함께 해와 달, 그리고 사람의 이름이 있었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단검이 개인적인 목적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보여준다. 장군의 검이라면 그에 상응하는 로마의 문장이 새겨져 있거나 집정관의 명칭이 함께 있을 테지만 그 검에는 허 망할 정도로 단순하게 그 이름만이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누가 봐도 한 쌍이라는 것이 분명한 다른 한 검에는 안토니우스의 문장 아래 똑 같은 위치에 어떤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달랑 한 단어의 이름일진데 이렇게 시리도록 눈에 박히고 그 무게를 가늠하기 어려운 것은 무엇 때문인가. - 다음에는 멋진 검을 선물하지. 장검에는 익숙지 못하니까.. 흐음.. 뭐가 좋을까... - 나도 당신처럼 멋진 검을 가질 거에요! - 하하! 들어 올릴 수나 있겠어? 짖꿎은 농담이라는 것을 알지만 언제나처럼 발끈해서 달려 든다. 그 핑계로 넓은 가슴으로 뛰어든다. - 마르쿠스! 그 다음에 어떻게 했더라? 아마 그의 품으로 뛰어들었지만 붙잡혀서 업혔던가? 가늘게 웃는 탓에 그 울림이 그의 등으로 그리고 미친 듯이 쿵쾅거리는 가슴으로 전해졌었다. - 후후, 이 번에 동방에 가면 멋진 검을 사올게. 내게 어울리는 검으로. 손잡이는 상아가 좋겠지? 상상했다. 어떤 검일까? 검투사들이 쓰는 글라디우스일까? 군인들이 쓰는 그리스식 에니스일까? 묵직한 푸기오? 아니면 부드럽게 휘어진 시카? 하지만 상상 속의 어떤 검도 소년 옥타비안의 손에 들리지 않았다. 웃으며 떠났던 그는 다시는 웃는 얼굴로 그에게 돌아오지 않았다. 상아의 손잡이를 가진 시카(휘어진 단검)에는 옥타비아누스의 이름이 새겨져 있지 않았다. 테리우스. 그의 이름이었다. 그의 소지품에서 그 검을 보자 마자 옥타비아누스는 그 단검을 챙겨 들었다. 일리리아 반란을 진압하면서도 고집스레 그 단검을 품에서 꺼내지 않았다. 그의 검을 훔쳤다. " 옥타비안. " "..........." 후우. 마이케나스는 나지막히 한 숨을 쉬었다. " 마이케나스." " 어? " 이 방에 들어와 처음 듣는 옥바티아누스의 목소리는 신음하듯 잠겨 있었다. " 저 사내, 테리우스를 내실로 불러 줘.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 ".......... 그러지." 왜냐고 묻지 않았다. 옥바티아누스의 꽉 잠긴 목소리가 그저 지독한 감기에 든 것이라고 생각 한 것처럼, 마이케나스는 복잡한 생각을 하는 것을 포기했다. . . . " 한 잔 들겠습니까? " 투스카니 지방에서 가져온 특상의 포도주를 그의 잔에 따랐다. 그는 잔 끝에 코를 대고 향기를 맡는 가 싶더니 조심스레 술을 한 모금 마셨다. 머뭇 거리는 것은 독에 대한 두려움이 아닌 귀한 술에 대한 예의라는 것이 느껴져 옥바티아누스는 오히 려 긴장하고 있는 것은 검은 머리의 이방인이 아닌 자신이었음을 깨달았다. " 좋은 술이네요. 정말 진해요. " 퀸투스의 집에서 가져온 투명한 로제 와인과는 다른 깊고 짙은 포도의 향기. 태우는 아찔한 술 내음을 코로 마시며 남은 술도 입에 털어 넣었다. 상당히 도수가 높은 듯해서 식도로 흘러드는 술이 가는 길마다 불을 내지르는 것 같았다. 옥타비아누스도 자신의 잔에 술을 따랐다. 지독한 독주라 이그니스 퓨로 ( 불의 분노)라는 별명이 붙은 술이었다. 평소에 전혀 즐겨 마시지 않는 술이지만 눈을 감고 들이켰다. " 콜록... 콜록...." " 괘..괜찮으세요? " 물 컵을 건 내며 옥바티아누스의 등을 두드리며 태우는 웃음이 나올 뻔 한 것을 참았다. 아마 이 사람은 혜준처럼 술과는 원수지간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괴로운 듯 연신 기침을 해대는 옥바티아누스가 로마의 집정관이자 안토니우스의 숙적이 아닌 그저 평범 한 술 못하는 청년으로 보였다. 간신히 진정된 옥바티아누스에게 태우는 과실즙을 건냈다. 사례가 걸려서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에서 인지 붉은 물든 얼굴의 옥바티아누스는 망설이는 듯 하면서 쥬스잔을 받아들었다. 그러면서 술독을 한 번 힐끗 보는 것이 아직 술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것 같았다. 아니면 독주에 기대야만 할 수 있는 말들이 남아있거나. 태우의 눈에 산딸기 즙이 눈에 들어왔다. 다른 잔에 산딸기 즙을 반 정도 덜어내고 그 독한 술을 따랐다. 동그랗게 뜬 녹색 눈이 그의 손을 호기심 있게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물 잔에 꿀을 넣고 잘 녹여서 불의 분노와 산딸기즙의 혼합물에 부어 잘 흔들었다. 급조한 칵테일이지만 맛은 괜찮았고 알콜이 어느 정도 희석되어 술이 약한 그가 마시기에도 괜찮은 듯 했다. 잔을 내밀자 옥바티아누스는 냉큼 받아 들었다. 킁킁 향기를 맡 더니 한 모금을 마셨다. 그리고 옥바티아누스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칵테일 잔과 태우를 번갈아 바라봤다. " 저희 고향에서는 독한 술을 마실 때 과일 쥬스와 섞어 먹곤 하거든요. 입에 맞을지 모르겠군요. " " 아니요, 굉장합니다. 정말 맛있습니다. 놀라운 재주로군요. " 순간 옥바티아누스는 차가운 가면을 벋고 집정관의 짐을 짊어진 평범한 로마의 청년의 얼굴이 되었다. 부드러운 미소가 그의 얼굴에 퍼졌다. 찰나였지만 태우는 그 얼굴을 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놀랄 만큼 사랑스럽고 가슴이 뛸 만큼 아찔했다. 정말 아름다웠다. 이 사람이구나. 정녕 이 사람구나. 콕콕 쑤시는 심장을 무시하고 태우는 '불의 분노' 라는 이름의 술을 다시 한 잔 따라 그대로 원 샷을 했다. 폐부에서 올라오는 열기, 미친 듯이 돌아가는 머리와 조여드는 심장 장도리로 내려 찢는 듯한 고통이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태우는 구분 할 수 없었다. 아니 어째서 이렇게 아픈 것인지 알 수 없었다. - 나는 가슴에 사랑하는 이를 묻었다. 한번도 사랑한다 말하지 못했고 앞으로도 영원히 침묵할거다..... - Salve, Pulcher puer......(안녕, 아름다운 소년) Salve, Octavian....... (안녕, 옥바티안) 짙은 술내음과 함께 나지막한 울림을 가진 목소리가 환청처럼 그의 귓가에 울렸다. 갑자기 술을 연거푸 들이키는 이방인의 모습에 옥바티아누스는 당혹스러웠다. 이야기를 하고자 불렀지만 그 자신도 어떤 말을 꺼내야 할지 알 수 없는 상태였다. 술을 마시는 이방인을 보며 그가 만 들어준 혼합주를 홀짝이고 있는데 그가 한 잔을 채 비우기도 전에 이방인은 두 잔 째 석잔째를 계속하고 있었다. 벌써 넉 잔째였다. 술이 센 돌라벨라도 다섯 잔이면 혀가 꼬부라진 목소리를 내던 술임을 기억하고 다섯 번 째 잔을 들이키는 이방 인의 손에 옥바티아누스는 잔을 빼앗았다. "................." 일단 술잔을 빼앗았지만 뭔가 마땅히 할 말이 없어 옥타비아누스 녹색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 당신을 보니까 술을 마시고 싶어서 그래요. 돌려 주세요. " 검은 눈동자는 어떤 열기를 가지고 그를 노려보았다. 그 눈에 들어있는 적의는 낯선 것이면서 또한 익숙한 것이기도 했다. 분명 자신의 눈에도 들어있는 열기 라고 옥타비아누스는 생각했다. 그렇구나. 당신도 그랬구나. 옥바티아누스는 술잔을 돌려 주는 대신에 그 술을 자신의 입 속에 털어 넣었다. 주방장의 만류를 뿌리치고 가장 독한 술을 가져온 것은 다름 아닌 옥타비 아누스 자신이었다. 눈을 꼭 감고 꿀꺽 삼켰다. 목 안에서 불이 화르륵 타오르는 것 같았다. 한 번 호되게 당해 적응한 탓인지 아까처럼 흉하게 기침을 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놀란 눈의 사내가 갑자기 크게 웃기 시작했다. " 하하하하하하하 " 옥바티아누스는 그가 웃는 것인지 우는 것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그리고 그 모습이 자신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옥바비아누스도 태우도 다시 불의 분노라는 이름의 술을 한 잔 더 마셨다. 주거니 받거니 그들은 웃으면서 혹은 울면서 신이 내린 축복이라는 술을 신의 은총을 받는 것처럼 마셨다. "내 누이의 첫날밤을 빼앗았다고 해서 클레오파트라가 보낸 동방의 매춘부라고 생각했어. " " 본의는 아니었다구, 그건 정말 옥타비아에게도 미안하다고 생각하고 있어. " 방 안에는 이미 텅 비어버린 불의 분노 의외에 집정관에게 바쳐진 각 국의 최고급 술동이들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웅얼거리면서 빈 단지를 던져 박살내고 새로운 술단지를 뜯다가 절반을 쏟아버린 옥타비아누스는 킬킬거리며 얼굴은 술 동이에 박고 술을 마셨다. " 큭큭, 다 지난 일이지. 자 한 잔 더 마시라구. 동방의 진주씨. " 자기가 얼굴을 박았던 술단지를 태우에게 던져주며 옥타비아누스는 그대로 방안에 대자로 누워버렸다. 태우는 한 잔이 아니라 한 동이잖아 라고 중얼거리며 받은 술동이에 입을 대고 마셨다. " 꿀꺽, 하- 좋다. 끄윽.." " 큭큭.. 아니 사실은 그 때 누이가 소박을 맞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기뻐서 날뛰고 싶었어. 슬퍼하는 누이의 앞에서 나는 속으로 웃고 있었어.. 하하하......... 정말 클레오파트라가 보낸 자였다면 그녀에게 감사의 선물이라도 보내고 싶었지. 그녀에게 로마의 영토 따위 원하는 대로 줘버리고 싶었어...... 누이를 안고 있는 마르쿠스 따위 상상하기 조차 싫었으니......." " 나쁜 녀석이네.." 정말 솔직하지 못한 나쁜 녀석이잖아... 팔을 들어 눈가를 가리고 있는 옥타비아누스를 돌아보며 태우는 낮게 혀를 찼다. " 그래, 나는 약해. 그러니 나쁜 거지. " 물기 어린 목소리가 그 사람이 그렇게 원했었을 붉은 입술에서 흘러나왔다. " 강해지고 싶어. 강하면 얻을 수 있을까? " 멍하게 옥타비아누스는 중얼 거렸다. " 약해서 나쁘다고? 겉보기에 강하다고 해서 그 속까지 강한 것은 아니야. 강한 자도 여리고 약해. 세상에 강한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 안토니우스는 강하지만 그 껍질 속에는 여린 영혼이 숨어 있었다. 그가 나빠? 그렇지 않아. 강하면 다야? 강하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해? 약하면 원할 수도 없는 거야? 유치한 투정에 태우는 순간적으로 화가 났다. " 어린애로군. 옥타비아누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 어린애? 내가 어린애라고? " " 그래 당신은 어린애야. 자신의 가진 힘이 두려워서 움츠리고 약한 척 하고. 그래서 다른 사람이 해결해 주기를 원하는 거겠지? 두렵다 는 핑계로 부딪쳐 보지도 않고. 다른 사람의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자기를 버렸다고 유치하게 바닥에 주저앉아 울어버리 는 어린 애. " " 이익! 그가 먼저 나를 배신했어! 나를 버렸어!! " 술에 취한 사람답지 않게 빠르게 일어난 옥타비아누스가 태우에게 달려 들었다. 가볍게 그 주먹을 피하고 분노로 물은 녹색 눈을 피하지 않고 마저 노려봐 주었다. 화가 났다. 사랑 받고 있으면서. 그 사람의 정인 이면서. 그 사람이 전장에 나가는 게 누구 때문인데. 가여운 자신의 누이를 이용해서 그를 묶어 놓으려 하고. 그래놓고 버림받은 것은 자신이라고 숨어버리고. " 네가 뭘 알아! 너야말로! 그에게 안긴 주제에! 그 사람의 손길이 닿고! 그의 입술을 맛보고! 그의 여자였던 주제에! " 붉에 물든 얼굴오 옥타비아누스는 맨 정신이라면 절대 토해내지 않았을 말들을 쏟아내었다. " 그래서 질투해? 어린 왕자님? " " 닥쳐! " " 네 말대로야! 그의 입술이 이 입술을 원 없이 탐했지! 그 뿐인 줄 알아? 내 목덜미에 이를 박고 내의 가슴 위에 샐 수도 없을 만큼 흔적을 남겼어! " " 그만! 듣기 싫어! " 세된 비명을 지르는 옥타비아누스의 손을 태우는 자신의 입술에 목덜미에 가슴에 억지로 갖다 대었다. 바둥거리는 그에게 똑똑히 들리게 그의 귀를 물면 서 계속해서 말했다. " 그래 네 말대로 섹스도 했어! 옥타비아의 첫날밤을 뺏은 것? 하 그 수많은 일들 중에 겨우 한 번인걸? 이 입술로 그의 입술만을 탐했는 줄 알아? 그의 것이 얼마나 멋진지 너 한번이라도 보기라고 했어? 그 의 것을 물고 쾌락에 신음한 적이 있어? 모르겠지! 어린애는! 순진하기 만한 어린애는 잔혹하게 그의 욕정을 밀 어냈을 테니! " 귀여워? 소중해서 사랑한다는 말 한번 못하고 가슴에 묻기로 했다고? 처연하게 말하던 푸른 눈이 눈 앞에 떠올랐다. 불나방처럼 불을 향해 달려드는 맹목적인 그 사랑에 태우는 화가나고 슬펐다. 바보 같은 사람! 바보 같은 사람! 세상에 둘 밖에 없는 천치들! " 그만...흐흐윽......." " 어디로 그의 것을 최종적으로 품는 줄 알아? 유부남이라 여자랑 경험은 있을 테지! 나의 동굴은 그의 것을 수도 없이 받아들였어! 그의 씨가 내 안에 퍼지는 그 찰나의 엑스 터시를 알아? 솔직하지 못한 어린애는 투정만 부릴 줄 아는 어린애는 죽었다 깨어나도 모를 거야! " " 아니야! " " 아니긴 뭐가 아니야! 이 비겁한 자식! 너 한번이라도 단 한번이라고 그를 원한다고 매달린 적 있어? 그의 진심을 믿은 적이 있어? " " !!!!!!!!!!!!!!!!" " 매달리려해도 매달리지 못한 심정을 네가 알아? 전장에서 패할 것을 뻔히 알면서 다른 이에게 가는 것을 뻔히 알면서 붙잡지 못한 자의 심정을 네가 알아? 절대 같이 있을 수 없 는 사람을 원하는 자의 기분을 네가 알아? " 그를 붙잡지 않았어, 옳다고 생각해서. 역사의 흐름을 거슬리는 것을 두려워해서. 다정한 그들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지도 모른 다는 것을 알면서, 단 한사람 안토니우스가 생존한다는 것에 퀸투스와 이아로스를 사지로 떠나 보냈어. 나를 향해 다정하게 웃어주던 자상한 그들이 다시는 살아돌아오지 못할 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면서 단지 안토니우스가 산다는 그 사실 때문에 그들이 사지로 가는 것을 막지 않았어. 전쟁에 패하고 다른 여인에게 떠나고 다시는 내게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 떠나 보냈어. 그를 구원하는 것은 클레오파트라라는 것을 알아서 눈뜨고 멀쩡히 다른 여인에게 보냈어. 그가 깊고 푸른 눈으로 나를 갈망한다는 것을 알면서 그의 곁에 있기를 진정으로 원한다는 것을 알면서 돌아오겠다는 그 약속이 진실이라는 것을 알면서, 그 약속이 절대 지켜 지지 않는 다는 것을 알면서 그를 보냈어. 그 심정을 네가 알아? 그의 미래를 너의 미래를........그저 지켜보기만 해야하는 나를............ " 그만........." " 미치도록 원해도 2000년의 시간을 건너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는 연인을 원하는 자의 심정을 네가 알아? 죽음도 아닌 공간의 벽도 아닌 시 간의 벽에 가로막혀 헤어진 자들의 심정을 네가 알아? 원해도 같이 있을 수 없고 존재하지 않는 자를 원하는 것을 네가 알아? " 나의 하나 뿐인 연인은 나만 바라보는 그 애는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어. 2000년 후에나 동쪽 끝에서 태어나겠지. 나는 그 곳에 있을까? 이 뒤섞여 버린 시공간 속에서 다시 그애를 만날 수 있을까? 나의 혜준이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아. 원하는데 손에 잡히지 않는다고? 강해지면 그의 곁으로 가겠다고? 방법을 모르는 유치한 어린아이 같으니........ " 비겁한 어린애! 손에 잡을 수 있었는데도 제풀에 그 손을 놓고 그를 사지로 몰아 넣은 것은 너야, 옥타비안. " "..................흐윽......." 옥타비안은 처절하게 울었다. 그의 눈에 담긴 분노의 근원이 안토니우스에 대한 믿음과 사랑이라는 것에 가슴이 커질 듯 추하게 질투하고 그의 비겁함을 탓하는 그에게 대꾸조차 할 수 없는 자신이 비참했다. 모든 것을 파괴하는 것은 시간. 그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이 원망스러워 옥타비아누스는 울었다. 사정없이 옥타비아누스를 패던, 술기운에 제대로 맞는 부위는 없었지만 태우는 방안의 소란에 뛰어들어온 군사들에게 제압 당해 끌려 나갔다. 고래 고래 소리를 지르는 그의 목소리는 점차 멀어져갔다. 막판의 욕설은 거의 한국어로 되어 있어 옥타비아누스는 그 뜻을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검은 머리의 사내의 말이 비수가 되어 가슴에 박히고 그 안에 닫혀있던 더러운 피가 흘러내렸다. 옥타비아누스는 아그리파가 그를 안고 의원을 부르는 중에도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 손이 떨리고 가슴이 아팠다. 이제야 기억이 났다. 눈이 떠지고 귀가 열렸다. 그는 항상 말했다. 다정한 푸른 눈으로, 따스한 손가락으로, 부드러운 목소리로, 작은 자신을 품에 안으며 - 너를 사랑한다, 작은 아가야. 듣지 못한 것은 나, 보지 못한 것은 나. 그 바다처럼 깊고 하늘처럼 넓고 파도처럼 밀려오는 거대한 사랑에 도망친 것은 나. 틀린 것은 나. 나는 배신당하지 않았지. 당신은 나를 버리지 않았어. 돌이킬 수 없어. 나는 그의 가슴에 검을 박아 넣을 테지. 당신은 나의 검을 피하지 않겠지. 이제 당신을 배신하는 것은 나. # 3 " 아르메니아의 승전의 개선식을 알렉산드리아에서 거행하고, 카이사리온(시저와 클레오파트라사이의 아들)을 이집트의 왕으로 인정했습니다. 클레오파트라는 왕태후로 물러나 이집트의 카이사리온의 대부인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이집트의 신전 에서 정식으로 성혼을 선포 했구요. 여기까지는 확인된 사실이고. " 마이케나스는 얼굴이 다채롭게 변해 가는 장군들을 한번 쓰윽 훑어보며 사무적으로 말을 이었다. 옥타비아누스의 표정은 평소보다 더 차갑고 무표정했다. 파랗게 질릴 것이라 고 생각했는데 왠지 중요한 무엇인가를 잊은 듯한 느낌, 목에 걸린 껄끄러움을 애써 무시하며 마이케나스는 요새 들어 로마를 들쑤 시고 있는 소문들을 간추려 말했다. "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안토니우스의 유언장이 발표되었는데 그의 속주를 클레오파트라와의 사이에서 난 아이들에게 남겨준다고 했다던가. 안토니우스가 이제 로마의 장군의 복장을 버리고 이집트 의 왕의 복식을 차려입고 공식석상에 나타난다던가. 또 자신이 죽으면 클레오파트라와 합장해 달라던가. 여자에 빠져 이제 안토 니우스는 옛날의 그 용맹함과 장군의 능력을 잃고 이빨 빠진 호랑이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휘하의 장군들이 잇달아 탈선하 고 있고. 하여간 이런 소문들 덕에 시민들이 동요하고 있습니다. " " 안토니우스 그 작자가 도대체, 정말 미친건가? " 돌라벨라는 당혹스럽게 중얼거렸다. 카이사르 아래에서 수년을 함께 보낸 사이였다. 비록 입장이 달라 적이 되었지만 안토니우스가 어떤 사람인지는 돌라벨라는 알고 있었다. 그는 소문 속의 사내가 아니었다. 그가 황소가죽을 두르고 여자만 후리고 다니는 머릿속에 술만 들어찬 사내라고 말한 키케로는 로마 제일의 우둔한 자임 에 틀림없다. 그 푸른 눈에 가득한 높은 기상. 가슴에 품은 티끌 없는 이상. 카이사르의 주검 앞에서 진정으로 슬퍼하던 그였기에 돌라벨라는 부쩍 로마에서 떠도는 소문을 믿을 수 없었다. 날조된 것인가? 만약 그에 대한 소문을 날조하고 그를 비방하는 세력의 제 1순위는 다름 아닌 자신들이었다. 하지만 들려오는 소문은 그들을 당황스럽게 할 뿐이다. 안 토니우스에 대한 비방을 하지않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소문은 그들이 생각하는 것 보다 더욱 역겨웠고 빠르게 퍼져나갔다. 그렇다면 누가? 누가 있어 카이사르 미노르와 안토니우스를 이간질하는 것인가. 누군가 있다. 돌라벨라는 생각했다. 뭔가 껄끄러운 표정의 영리한 군사 마이케나스도 충분히 그 것을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동시에 마이케나 스가 그 명석한 두뇌로도 어떤 추론으로 내어놓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돌라벨라는 짐작했다. " 시민들이 걱정이군요. 거리 곳곳에서 안토니우스를 탄핵하는 집회가 열리고 있습니다. " 일리리아에서 귀환한 장수 중 한 명이 옥타비아누스의 저택으로 오는 길에 몇 번 마주쳤던 시민의 무리들을 떠올리며 말했다. 옥타비아누스의 인기는 하늘을 찌를 듯 했다. 섹스투스 폼페이우스를 제거하여 히스파니아를 손에 넣고 레피두스를 실각시키고 아프리카를 장악하고 일리리아 반란을 진압안 옥타비아누스는 명실공히 카이사르 임페라토르의 후계자로 인정받고 있었다. 허약한 후계자보다 강한 장군 안토니우스 를 사랑했던 로마는 이제 열열하게 옥타비아누스의 이름을 외쳤다. 그들은 약속이나 한 듯 안토니우스의 처벌을 외치고 있었다.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추잡한 이야기들이 로마의 곳곳에 흘러들고 있었다. " 안토니우스를 당장 로마로 끌어와 시민의 심판대에 세우자! 나일의 마려 클레오파트라를 우리 손으로 쳐죽이자! 로마를 팔아먹은 배덕한 장군 안토니우스 에게 죽음을! " 시민들의 목소리가 열기를 띄고 높아질수록 돌라벨라의 머릿속은 차갑게 식어갔다. 그 역시 전쟁을 원했다. 안토니우스의 일전이라니 이 얼마나 가슴이 뛰는 기회인가. 안토니우스와 검을 섞는 것을 평생의 숙원으로 살고 있는 군인들도 많았다. 그도 전쟁을 원했다. 하지만 이런 방식은 아니었다. 정당한 승자가 되고 싶었다. 돌라벨라는 지난 날 카이사르 임페라토르 곁에서 말을 모는 안토니우스와 함께 있었다. " 전쟁을 피할 수 없겠지. " 침묵하고 있던 장수들의 주인 카이사르 미노르가 담담하게 말문을 열었다. 혈기 넘치는 장수들을 제지하던 그였다. 안토니우스와의 일이 얽히면 평소의 냉정함을 잃어버리고 감정적으로 되었던 옥타비아누스였다. 옥타비아누스는 차갑게 가라 앉았다. " 옥타........" 뭔가 말을 하려던 마이케나스는 옥타비아누스의 무심한 눈길을 받고 말을 삼켰다. " 시민을 안정시키는 것이 먼저다. 안토니우스의 알렉산드리아 선언을 무효화한다는 성명을 발표해. 그 것이 진실이든 아니든 시민들은 이 미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어. 민심을 진정시킬 필요가 있어. 공공사업을 벌여. 일리리아 승전을 기리는 회랑와 도시를 세워. 보수할 건축물들을 찾아. 일제 보수 공사를 벌인다. 일거리가 생기면 폭동을 일으킬 생각은 하지 않을 테니. 전리품을 푼다면 시민들에게 돌아갈 임금을 충당할 수 있겠지. " 옥타비아누스는 시민들을 다독일 효율적인 일들을 생각해내고 명령했다. 마이케나스는 그의 명령을 빠르게 머리 속에 입력시키면서도 한가지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변했다. 옥타비아누스는 변했다. 그의 안에서 무엇인가 변했다. 불안해. 이방인과 무슨 일이 있었던거지? " 모두 해산하시오. " 주춤 주춤 장수들은 개전론도 신중론도 펼치지 못한 채 하나 둘씩 밖으로 나갔다. 마지막 까지 남아있는 것은 세 사람. 마이케나스와 아그리파, 그리고 옥타비아누스. ".............." ".............." ".............." 뭔가 말을 해야하는데 주저리 주저리 말이 많은 마이케나스였지만 목에 무엇인가 걸린 듯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 옥타..." " 카이사르 미노르. " 마이케나스보다 먼저 아그리파가 입을 열었다. 아그리파 역시 회의중에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 뭐지, 아그리파. " " 당신이 어떤 결정을 하던 저는 당신의 뜻을 따릅니다. " 아그리파는 갑자기 충성 서약을 했다. " 고마워, 아그리파. " 아그리파는 고개를 깊이 숙여 예를 표하고 밖으로 나갔다. 마이케나스는 그런 아그리파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 내게 뭔가 할 말이라도 있나? " " 아니.......... 자네가 낯설어서. 분명 자네인데....." 횡설수설하는 그에게 옥타비아누스는 부드럽게 웃었다. " 이제 어린 애가 아니니까. " " 뭐? " " 아무 것도 아니야, 공사 기획을 하려면 시간이 모자랄 텐데 부지런히 일해야지, 마이케나스. " " 옥타비안? " " 난 정말 괜찮아 " 그의 부름에 가볍게 웃으면서 그의 어깨를 두드리고 옥타비아누스는 밖으로 나갔다. 마이케나스는 그의 뒷모습이 훌쩍 커버린 것 같다고 생각했다. . . . " 오랜만이군요. " " 아, 어서 오세요.." 태우는 옥타비아누스의 갑작스러운 방문에 놀랐지만 이내 평정을 찾았다. 이미 짐작했던 일인데. 그러니까 그 불의 분노의 날 이후로 처음이었다. 그 날의 소동 끝에 참수하자는 의견까지 나왔으나 옥타비아누스는 그런 의견들을 묵살하였다. 대신 태우는 로마의 옥타비 아누스의 저택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 옥타비아누스는 그를 로마 근교의 한 별장에 연금하고 단 한 번도 찾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만 무심히 흘러갔다. 그리고 로마에 도는 소문을 이 곳에서 태우도 듣고 있었기에 그의 방문을 어느 정도 예견하고 있었다. "......................." "......................." "......................" "......................" "..................." " 뭐 마실거라도? " 계속되는 침묵에 태우는 마지못해 먼저 말문을 열었다. 용건이 있는 사람은 옥타비아누스 였지만 일단 그는 손님이었기에. " 아니요, 오늘은 술을 마시지 않아도 이야기 정도는 할 수 있습니다. " "아아............" 옥타비아누스는 그들 앞을 짓누르는 긴장감을 가벼운 농담으로 흘려 보내려 했다. 쓴웃음을 짓는 태우의 얼굴을 옥타비아누스는 빤히 바라보았고 그가 힘들게 날려버린 무거운 침묵은 다 시 되돌아왔다. "......................." "......................" "......................" " 뭔가 할 말이 있는 거 아닌가요? " " 아, 네. 전할 물건도 있고 해서. " 옥타비아누스가 '할 이야기'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태우는 그가 가진 흰 보퉁이를 발견하지 못했었다. 그가 손에 들고 있던 흰 천에 쌓인 물건을 태우에게 내밀었다. 태우는 그 물건을 선뜻 받지 못했다. " 괜찮아요,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려는 것이니까. " "..........." 태우는 흰 보퉁이에 쌓인 물건이 원래 자신의 것이라는 말에 조심스레 그 물건을 받아들었다. 길쭉한 모양의 것들이 서로 부딪었는지 가벼운 금속의 마찰음이 들렸다. 흰 천을 걷어내었다. 익숙한 두 자루의 단도가 있었다. 몇 년이 흘렀지만 섬세한 상아의 세공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검집은 새로 만들었는지 기억의 것과 조금 달랐다. 손잡이의 끝에 새겨진 이름은 시간의 흔적 속에서도 선명했다. " 아아. " 태우가 가볍게 탄성을 질렀다. 잃었다고 생각해서 되찾는 것을 포기하고 있었다. 거짓말 같이 눈 앞에 있는 두 자루의 단도는 안토니우스가 장담했던 것처럼 시간이 흘러도 새 것 같았다. " 감사해요. 정말 고마워요. 다시는 찾지 못할 줄 알았는데. " " 아닙니다. 더 빨리 돌려주어야 했던 걸요. " 그는 단검을 돌려 받은 것이 무척 기쁜 것 같았다. 만지작 만지작 새로 장난감을 얻은 아이처럼 그 것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단검은 원래부터 그의 물건이었던 것이다.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고집스레 검을 손아귀에서 놓지 않았던 자신의 아집에 옥타비아수느는 낮게 실소했다. 눈치채지 못한 듯 테리우스는 단검을, 특히 어떤 한 개를, 특히 손잡이를, 특히 이름이 새겨져 있는 부분을, 안토니우스의 이름이 새 겨져 있는 부분을 소중하게 손으로 쓸고만 있었다. " 행운의 단검인 모양입니다 " " 네? " 옥타비아누스의 밑도 끝도 없는 이야기에 태우는 단검을 쓰다듬는 손길을 멈췄다. " 그 검을 가지고 일리리아로 갔었습니다. 승기를 잡아 전장이 어느 정도 소강 상태에 빠져들었던 때였습니다. 야 습이 있었지요. 암살자가 입을 틀어막고 가슴을 찌르는데 챙강하는 소리가 났어요. 그 단검이 암살자의 검을 막아주었어요. 그 소리를 듣고 막사 밖에 있는 병사들이 들어와 무사할 수 있었습니다. 그 때 검집이 망가져서 새로 만든 거에요. " " 그런 일이... " 암살당할 뻔했다는 엄청난 이야기를 옛날 이야기는 하듯 너무 담담히 말해서 태우는 위로 할말을 찾지 못했다. " 그러니 당신도 무사할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도적의 손에서도 행운을 불러왔던 검인데 이제 주인의 손에 들어갔으니까요. " " 네? " 어떤 의문을 표현하기도 전에 옥타비아누스는 빠르게 말을 이었다. " 내일 이 곳에 일리리아로 가는 상인들이 들릴 것입니다. 나는 그 들에게 두 사람을 데려다 달라고 했습니다. 일리리아에 있는 나의 부장에게 보내는 사람이라고 했지요. 그 상인들이 카피토와 당신을 일 리리아까지 데려다 줄 것입니다. " " 나를 풀어준다는 것인가요? " " 네, 공식적으로 당신은 나의 별장에서 병사 한 것으로 알려질 겁니다. 시민들이 로마에 남아있는 안토니우스의 식솔들을 살해하는 일이 빈번히 일 어나고 있습니다. 로마는 더 이상 안전하지 않아요, 떠나십시오. " " 하지만 당신이 곤란해질텐데............ " " 그 일은 당신이 걱정할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 " 아..........." " 일리리아를 지나 그리스로 간다해도 그 곳은 전장한 복판입니다. 나의 군대와 안토니우스의 군대가 대치 중에 있어 언제 전면전이 벌어질지 모릅니다. 그런 전장을 지나 위험한 해역을 건너야 안토니우스가 있는 오리엔트가 나옵니다. 이집트까지는 긴 거리입니다. 나는 그저 당신을 로마에서 벗 어나게 하는 것 밖에 한 일이 없습니다." "................" 그는 여전히 담담하게 말했지만 진심으로 자신의 안전을 바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윽고 태우는 조용히 감사의 말을 전했다. " 감사해요, 당신의 최선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 옥타비아누스는 말없이 아름다운 미소를 지었다. " 나는 내가 해야할 일을 하는 것 뿐입니다. 나는 전쟁을 할겁니다. 당신이 떠나면 나는 '적 이집트를 공격하는 최고 사령관' 으로 등극 할 것입니다. " " 그 것이 당신의 선택입니까? 꼭 전쟁을 해야합니까? " 절박하게 외치는 이방인의 표정이 그의 심연의 모습과 다를 리 없었다. 하지만 자신은 선택했다. " 이제야 나는 백부님의 유지를, 안토니우스의 숙원을 깨달았습니다. 되돌리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내 두 팔과 같이 내 삶을 흔들면서 앞으로 나아갈 수 밖 에요. " " 다른 선택으로 나아갈 수도 있어요! " 옥타비아누스는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 당신의 질책을 듣고 서야 닫혔던 귀가 열리고, 멀었던 눈을 떴습니다. 나의 백부님과 그 사람이 원했던 것처럼 나는 만인지상의 자리로 가려합니다. " "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역사가 기록한대로 시간이 흘러버리면......... 그 사람은............그 사람은.......... 태우의 안색이 점차 창백하게 변했다. " 생각했습니다.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왜 당신은 달아나지 않았을까. 나의 저택에서 이곳 별장으로 옮겨진 후 당신과 카피토는 마음만 먹으면 도망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그러지 않았 지요. 무엇인가를 기다리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내가 심어놓은 감시인들은 당신이 안토니우스에 대한 어떤 소식을 들어도 담담히 놀라지 않더라고 내게 전했지요. 그래서 생각했습니다. 그 날 나를 비난하던 당신의 모습을 기억하고 당신을 비난하던 당신을 발견했습니다. 왜 자신을 비난하는가. 알고 있었다고 했지요. 막지 못했다 했지요. 전장에서 패할 것을 뻔히 알면서 다른 이에게 가는 것을 뻔히 알면서 붙잡지 못했다고 매달리지 못했다고 했었습니다. " " 나는..........." " 당신을 추궁하는 것이 아닙니다. 소문처럼 정말로 당신은 다이아나의 전인일지도 모릅니다. 나는 나를 일깨워준 당신에게 그저 기회를 주려고 합니다. 내가 하려는 일을 깨닫게 혜준 당 신에게 은혜를 갚으려 합니다. " ".........." 태우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 내가 진심을 알게 되는 것을 두려워 한 것처럼, 당신이 알고 있는 진실을 두려워하지 마세요. 죽은 사람처럼 포기하지 말고 그 사람에게 돌아가십시오. 이 것이 내가 당신에게 갚은 마지막 보답입니다. " 그 말을 마지막으로 옥타비아누스는 대답을 듣지 않고 별장을 나섰다. 바쁜 걸음으로 별장을 빠져 나가 마차에 타기 전에 옥타비아누스는 문득 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렸다. 그가 가느다랗고 흰 손을 들어 태우의 얼굴을 살며시 감싸쥐고 서투르게 옅은 키스를 했다. 새 부리가 살짝 부딪치는 것처럼 입술만 닿게 하고 벌게진 얼굴로 도망치는 그를 잡은 것은 태우였다. 태우는 손을 올려 검은 고수머리를 감아쥐고 놀라 움찔거리는 옥타비아누스에게 길고 긴 키스를 했다. 벗어나려던 옥타비아누스는 순순히 그의 혀를 받아들였다. 거침없이 얽혀드는 혀에서 태우는 짭조름한 맛을 느꼈다. 경악하는 병사들 사이에서 길고 긴 딥키스가 끝났다. 옥타비아누스는 고개를 숙이고 마차 위로 올랐다. 태우는 떠나려는 마차를 잡았다. " 꼭 전해 줄게요! " 번개처럼 옥타비아누스는 고개를 들었다. 물기가 흥건한 그의 얼굴에서 아름다운 미소가 퍼졌다. " Valle, Terrius.... (안녕히, 테리우스) " " Valle, Octavian....... (안녕히 옥타비안) " 짧은 인사를 마치고 석양을 맞으며 옥타비아누스의 마차가 출발했다. 옥타비아누스가 출전을 앞두고 치르는 의식이 카피톨리노 언덕에 있는 신전에서 치러진 것은 그로부터 한 달 후였다. 적 이집트를 타도하는 최고 사령관으로 등극하는 호화로운 의식에서 옥타비아누스는 자신의 승리를 확언하였다. 로마는 열광했다. 이것은 신들에게 로마의 수호를 기원하고, 로마군의 승리를 빌고, 적에게 선전포고를 하는 의식으로, 공식적인 로마의 적은 클레오파트라였기 때문에 안토니우스의 이름은 한번 도 거론되지 않았지만 그의 상대가 안토니우스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제6장 Octavianus - 옥타비아누스 편 끝 ****************************** + 로마의 휴일 제7장 Reditus - 귀환 # 1 " 다시 말해 보아라! 네 방금 무어라 했느냐? " 콰당탕. 의자가 넘어지는 소리가 방안에 울려 퍼졌다. 갑자기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 안토니우스 때문에 전령을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치고 조금 전에 아 뢰었던 내용을 다시 되풀이했다. " 그.... 로마에서... 시민들이 소요를 일으켰는데... 로마의 저택에 남아있던 가병들이 시민들에게 공격당하였고... 남은 병사들도 대부분 도망쳤다고 합니다... " " 그 것을 묻는 것이 아니야! 누가 죽었다는 것이냐! " 안토니우스는 벌벌 떠는 전령의 목을 틀어쥐고 으르렁 거렸다. 그러나 방안에 있는 누구 하나도 그의 행동을 막지 못했다. 그들 역시 전령이 전해 온 소식을 다시 확인하기를 원했다. " 그... 장군의 피보호인인 그 동방의 청년은..... 카이사르 미노르의 별장에 연금되었다가 병을 얻어 석 달 전에 숨을 거두었다고... 로마의 저택에 남아 있던 병사들이 그 장례를 치렀다고 합니다. " " 그럴 리가..........." 휘청거리는 안토니우스를 부축한 리키리우스가 다른 의자에 그를 앉혔다. " 다른 소식은 없는가? 폰티우스 카피토는 어찌되었다고 하더냐? " 퀸투스가 전령을 채근했다. " 그게 동방의 청년이 죽기 얼마 전에 일리리아로 팔려 가셨다고....." 전령을 말을 잇지 못했다. 격분한 안토니우스가 그를 향해 손에 잡힌 양피지 두루말이를 집어던졌기 때문이다. " 안토니우스님! 고정하십시오! " 일어나 전령을 향해 뛰어 들려는 안토니우스를 리키리우스와 이아로스가 필사적으로 막았다. " 저 놈이 지금 나를 능멸하고 있지 않아! 누가 죽었다는 것이냐! 누가 노예가 되었다는 게야! " " 자네는 물러가 있어! " 퀸투스는 일단 전령을 밖으로 물렸다. 겁에 질린 전령은 예를 갖추지도 못하고 도망치듯 밖으로 내빼었다. 우당탕. 콰직하고 탁자가 부셔져 내리며 위에 있던 물건들이 와르르 쏟아져 내렸다. 안토니우스는 부서지고 깨지는 물건들을 맨발로 짓밟고 걷어찼다. 미친 듯이 안토니우스는 부수고 또 부쉈다. 클레오파트라가 심혈을 기울여 치장한 방안이 삽시간에 난장판이 되었다. 콰장창! 청동거울이 요란하게 바닥을 때리는 소리에 안토니우스는 바닥에 주저 앉았다. 바닥에 꿇어앉은 상태로 그는 바닥을 후려갈겼다. 주먹이 까지고 손톱이 부서져 피가 흘렀지만 아픔을 느끼지 못하는 듯 계속해서 바닥을 쳤다. " 안토니우스님! 그만 하세요! 피가 나.... 크으억. ". 보다 못한 리키리우스가 그 주먹을 자신의 손으로 잡았지만 안토니우스의 주먹에 맞아 구석에 나가 떨어졌다. " 안토니우스! 그만 하게! 제발! 아폴로나우스! " 미친 듯이 움직이던 주먹이 거짓말 같이 멈췄다. 고개를 든 안토니우스의 얼굴을 젖어 있었지만 눈물은 아니었다. 흥건히 땀에 젖은 얼굴이 더욱 흉포해 보였다. ".............. 그 이름으로 나를 부르지마. " " 일단 진정해! 이렇게 자네가 날뛰어 봤자 해결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 " 이아로스의 부축으로 겨우 일어 선 리키리우스는 입안이 찢어졌는지 한 웅큼의 피를 뱉어내었다. 어지간히 놀랐는지 그는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십 년을 장군의 곁에 있으면서 맞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안토니우스는 그 난장판에 용케 무사했던 술항아리를 찾아 엉망이 된 방 한복판에서 단숨에 들이키고 나머지 술을 머리에 부었다. 머리에 뭍은 알콜이 증발하면서 안토니우스의 뇌를 차갑게 식게 했다. 눈짓으로 모두 물러가라는 의사를 밝혔지만 머뭇거릴 뿐 누구하나 빨리 나가는 자가 없다. " 제기랄! " 와장창. 이마 한 번 부숴 졌던 탁자가 안토니우스의 발길질에 다시 한번 방안을 굴렀다. " 일단 제가 사람을 보내 알아보겠습니다. " "..............." 리키리우스를 부축하고 방을 나서면서 이아로스가 조심스레 말을 했지만 안토니우스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주위에 살얼음 같은 긴장이 퍼지고 있었다. 로마에 있는 측근을 통해 테리우스의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로마의 소요로 연락이 끊긴 것은 그리 오랜 기간이 아니었다. 그 기간에 한 사람이 병사(病死)를 한다? 믿을 수 없었다. 움직임이 들키면 오히려 테리우스와 카피토의 안전을 위협할까 조심스레 먼발치에서 그들을 살펴보게 하였다. 정확한 그의 상태를 알아보기는 힘들었지만 어느 정도 파악을 할 수 있었다. 긴 시간이 흘러도 동요 없는 테리우스의 모습에 안심하면서 잠시 방심했던 것이 이리 큰 결과가 되어 되돌아 올 줄은 몰랐다. " 내가 어리석었어. 진작에 무리를 해서라도 데려와야 했어. " 콰직. 손에 들린 청동병 마저 안토니우스의 약력에 우그러졌다. " 안토니우스........." " 내 탓이야.. 처음부터 두고 오는 것이 아니었어. " 되뇌이는 안토니우스에게 퀸투스는 뭔가 말을 하려 했지만 무겁게 한숨을 쉬고 방을 나섰다. 데려와야 했다. 처음부터. 싫다고 하더라도 억지로 끌고 왔어야 했다. 그의 곁을 떠나지 않게 해야 했었다. 두고 오는 것이 아니었어. 무엇 때문에 주저하는지 따위 신경 쓰지 않고 곁에 두어야 했다. 옥타비아가 아테네로 들어올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 안토니우스의 세력권인 그 곳에 그녀가 함대를 이끌고 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옥타비아누스가 로마로 소환했다는 소식에도 일단 자신의 피후견인이니 안전하리라고 생각하고 안일하게 대처했다. 그에게 무관심 한 것이 그를 안전하게 살리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혹여 눈치 빠른 클레오파트라가 그에게 어떤 술수를 부릴지 몰라 무심한 척, 단신으로 낯선 로마에 있는 그 를 버려 두었다. " 젠장할.........." 왜 그때 그 불안감을 눈치채지 못했을까. 검은 눈에 서린 고통이 그저 전장으로 떠나는 자신에 대한 걱정일 것이라고 우쭐해 했던 것일까. 그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약속을 지키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그래서 그렇게 처연하게 웃었었나. 어째서 인간은 잃어버리고 나서야 그 것의 소중함을 깨닫는 것인가. 챙그랑. 안토니우스의 약력에 사정없이 우그러졌던 술병이 바닥에 굴렀다. 방 안에는 어느 새 안토니우스 혼자 남아 있었다. 창 밖에서 밀려드는 달빛이 한기를 뿜었다. 그를 처음 만난 그 날도 달이 무척 밝았었다. . . . " 이 길이 맞는 걸까? " " 맞습니다 " 자신 없이 중얼거리는 테리우스에게 카피토는 확신을 담아 말했다. 테리우스는 방긋 웃었지만 그 안에 서린 의혹이 사라진 것은 아닌 듯 했다. 그러니까 며칠 전일은 실수였단 말입니다........ 라고 소리를 내어 말하고 싶었지만 카피토가 길을 잘못 잡는 바람에 출발 지점까지 다시 돌아와야 했던 일은 테리우스에게 쉽게 잊혀지는 일이 아니리라. " 여기서 노숙을 해야겠습니다. 쉬고 계십시오. " " 싫어, 나도 뭔가 해야지. 내가 장작을 주워 올 테니 카피토는 사냥이나 해와! 이왕이면 삼겹살이 좋으련만........ " 말리기도 전에 석양이 내려앉은 들판 위를 돌아다니는 그의 뒷모습을 보고 카피토는 나지막하게 혀를 찼다. "이 근처에서만 장작을 모으십시오, 위험한 일이 있으면 뿔피리 부는 것 잊지 마시구요 " " 알았어! 알았어! 오옷, 좋은 나무다! 바짝 말랐는 걸? " 장군에게 돌아가는 비장한 길이 어째 뒷산으로 놀러온 듯한 기분이 드는 것은 착각일까. 눈먼 멧돼지라도 하나 지나가길 바라면서 카피토는 활을 꺼내들었다. 그 것은 벌써 석 달 전의 일. 옥타비아누스의 방문이 있던 날 저녁이었다. " 가요, 카피토 " " 어디로? " 뜬금 없는 이야기에 카피토는 검을 닦던 손을 멈추고 반짝이는 검은 눈을 올려다보았다. " 해가 뜨는 동쪽으로! " " 네? 네............ " 카피토는 웃으면서 그의 말에 화답했다. 언젠가부터 그는 환하게 웃지 않았었다. 잃어버렸던 미소를 되찾은 그는 동쪽을 향해 예전처럼 환하게 웃었다. ' 그럼 어떻게 달아갈까요 ' 라고 묻는 것이 정상이 아니었을까하고 지금에서야 생각이 들었다. 묻지 않고 진작에 세워 놓았던 탈출 계획을 다시 한번 점검하려는데 테리우스의 들뜬 목소리에 끌려 다니다 정신을 차려 보니 카피토는 일리리아로 향하는 상인의 '상품' 이 되어 있었 다. 어린 시절에도 상인의 상품이 되었던 적이 있었다. 다른 점은 그 때는 노예였고 지금은 일리리아로 가는 배달품이라는 것. 탈주 계획을 세운 것은 아마도 카이사르 미노르. 무슨 생각인지는 짐작하기 어려웠지만 테리우스가 가자고 하니까 하며 카피토는 불평 않고 일리리아로 향했다. 옥타비아누스의 안배가 있었는지 일리리아에서 얼마간의 돈과 말, 여행 물품들을 얻을 수 있었다. 그 들은 말머리를 해가 뜨는 동쪽으로 잡았다. 남쪽으로 내려가 항구에서 배를 구해 이집트로 가거나 육로로 갈 것이면 그리스로 가야하는 것이 아니냐고 카피토는 생각했지만 테리우스는 웃으면서 동쪽으로, 소아시 아로 가야한다고 자신 있게 말했다. " 우리가 갈 때쯤이면 아마 에페수스에 있을 거에요 " 확신을 담아 그렇게 말했다. 신비하고 신기롭고 기이했지만, 그래 정말로 신의 사자일지도 모르니까 하며 언제나 그렇듯이 카피토는 군소리 않고 테리우스가 하자는 대로 따랐다. 그리고 지금 카피토가 두 마리의 토끼를 사냥한 곳은 트라케, 트라키아라고도 불리우는 발칸 반도의 에게 해 북동해안 지방에 있는 이름 모를 계곡이었다. ' 흠, 잘 익었군 ' 겉보기에는 무표정했지만 내심 흐믓 해 하며 카피토는 토끼의 여린 부분을 잘라 태우에게 내밀었다. 카 피토는 사냥 솜씨가 뛰어났지만 요리 솜씨는 중간 정도, 냉정하게 말하면 수준이하에 가까웠다. 태우는 한국에 있을 때는 제법 먹을 만한 수준의 음식을 만드는 정도였지만 그 것은 21세기의 문명의 이기와 풍부한 재료가 뒷받침 해주어 서 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에 여정 속에서 그들을 가장 곤란하게 만든 것은 끼니 때우기였다. 어쨌든 인간은 학습하는 동물인 지라 설익은 고기를 먹어서 배탈도 나보고, 숯이 된 고기를 검댕이를 묻혀가며 삼키고 하는 도중에 그들은 이제 제법 먹을 만한 수준의 끼니를 준비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 맛있다.." 쩝쩝. ' 후추가 있으면 더 좋을 텐데. 하긴 소금이라도 있는 게 어디야. ' " 카피토도 어서 들어요. " " 네." 참기 힘들었었는지 카피토는 빠른 손놀림으로 토끼의 넓적다리 하나를 뜯었다. 태우는 그런 카피토를 보고 실소하며 살짝 구워져 향긋한 내음을 풍기는 버섯에 손을 뻗었다. 노릇 노릇 구워진 토끼 고기에 귀하다는 버섯까지, 군침을 흘리며 달려드는 그 행복한 시간에 동쪽 너머에 있는 안토니우스가 그들이 죽었다는 오보를 듣고 그의 방안을 한바탕 뒤집어 놓고 있다는 것을 테리우스도 카피토도 전혀 짐작하지 못했다. " 여기가 트라케라고 했던가요? " " 네.. 마케도니아의 영역은 그나마 로마의 영향력이 강해서 별 문제가 없습니다만.... 이 곳은 상당히 위험한 야만인들의 지역이라 조심해야할 것 같습니다. " 옥타비아누스는 그리스까지는 그의 배려로 안전하게 여행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태우는 안토니우스가 곧 알렉산드리아를 떠나 에페수스로 간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리스는 그 전장의 한복판이라 잘못하면 태우가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의 발목을 잡게 될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옥타비아누스가 사사로이 그를 풀어준 것이 밝혀지면 곤란을 겪게 될지도 모르니까. 그래서 카피토를 설득해 마케도니아에서 남하하여 그리스로 넘어가지 않고 트라키아(트라케)를 선택했다. 계속 산맥을 따라 이동을 해서 산주민들과 몇 번 마주쳤을 뿐 이렇다할 충돌은 없었다. 하지만 내일이면 계곡도 끝나고 태우와 카피토는 트라키아의 한복판에 서게 될 것이다. 태우는 트라키아에 대해 아는 것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 " 야만인이요? " 카피토는 다른 토끼의 가슴살을 발라내면서 말을 이었다. " 트라케 인들은 몸에 그림을 그리고 죽은 자를 태운다고 합니다. 또 어린 아이들을 사고 파는 짓도 서슴치 않고..... 호전적이라 일개의 부 족은 하나의 군대라고 생각해야 한다고 합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도 트라케를 점령하는 데 무척 애를 먹었다고 전 해집니다. 나중에는 강한 민족이라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군대에서 활약을 했습니다. 또 각 부족의 율법을 잔혹하기로도 유명합니다. 어린 아이를 사고 팔기도 해 그리스로 들어가는 노예는 대부분 트라케에서 팔려온 자들입니다. 낯선 자는 잡아서 노 예로 파는 일이 빈번하다고 하니까 조심해야 합니다. 안토니우스님의 세력권이기는 하지만 장군께서는 워낙 방임주의시 라 독립적인 성격이 강하고 또 반발도 있는 곳이라 위험합니다. " 태우는 놀랐다. 일단 카피토가 그렇게 길게 말하는 것을 처음 보았고 어떤 화제에 대하 이토록 흥분하는 그를 처음 보았다. 흥분한다고 해봤자 평소보다 목소리가 조 금 높아지고 볼이 붉어진 정도였지만. 노예라는 단어에 카피토는 상당히 민감했던 것 같다. 그리고 상상했던 것 보다 위험한 곳이라는 것에 놀랐다. 카피토는 적어도 한 달은 걸어야 해안에 당도 할 수 있을 거라고 했다. 에게 해를 건너면 소아시아 반도. 에페수스는 그리 먼 곳이 아니다. 문득 태우는 제법 높이 떠 있는 달을 바라봤다. 해가 뜨고 달이 뜨고 별이 뜨는 동쪽. 단순히 지구가 서에서 동으로 자전을 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자연 현상이지만 예로부터 동쪽은 희망의 상징이었다. 오늘은 해가 져도 내일은 해가 뜬다. 이상한 일이다. 그는 동쪽에서 이 곳으로 왔다. 그런데 지금은 동녂으로 향한다. 동쪽에는 그가 소망하는 것들이 있다. 멀리에는 그의 고향이 있다. 아니 앞으로 자신이 태어나게 될 한반도가 있다. 그 곳에는 2000년의 시간의 강이 놓여 있지만 그의 연인도 있다. 그의 가족들도, 그의 친구들도 모두 저 먼 동쪽에 있다. 하지만 가까이에, 가장 가까운 동쪽에는 그 사람이 있다. 약속은 지키라고 있는 것이니까. 당신이 약속을 지킬 수 있게 지금 가고 있어요. 나는 동으로 간다. . . . " 한 번 얼굴을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했었는데, 아쉽게 되었구나. " " 여왕님이 직접 보실 가치도 없는 자이옵니다! 여왕님의 혜안을 어지럽힐 뿐이에요! " 클레오파트라의 말에 차르미안은 일 전 아테네에서 겪었던 수모를 떠올리며 냉큼 대꾸했다. 아차 싶었지만 여왕은 그저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실 뿐이다. 며칠 전 안토니우스를 흠모했다는 이유 로 산 채로 혀가 잘리고 눈이 뽑히고 가슴이 도려진 시녀를 생각하면서 차르미안은 부르르 떨었다. 여왕님은 아름다웠지만 그 보다 더 무서웠다. " 하지만 정말 그렇게 광분할 줄이야............ 그 이답지 않았어........." 그 사람답지 않았다고? 그 사람다운 것이 무엇이었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가 어떤 사람이었더라? 일 국의 여왕인 내게도 전장의 시체를 보는 것과 같이 무심한 눈길을 주는 자가 아니던가. 주군이었던 카이사르에게 깊이를 가늠 할 수 없는 애정과 존경을 가지던 자가 아니던가. 살을 맞댄 처와 친 동기가 죽어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던 자가 아니던가. 그 청년은 어떤 자 이길래? 그 검은머리가 나보다 더 탐스럽더냐? 그 검은 눈이 나보다 더 빛나더냐? 그 신기하다는 살빛이 나보다 더 곱더냐? 그 현명함이 나보다 더 깊더냐? 이렇게 허무하게 죽어버릴 줄 알았다면 미리 손을 쓰는 거였다. 안토니우스가 일부러 그 자를 로마에 머물게 하고 있었다는 것 정도를 눈치 채지 못할 여왕이 아니었다. 무심한 척하는 그의 껍질 속에 뜨거운 가슴이 그 이방인을 원하고 있다는 것 정도는 살을 맞대고 있는 사이에서도 모두 전해졌다. 그가 여왕을 품에 안을 때, 가슴이 한켠에 차가운 북풍이 일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 로마의 애송이가 나 대신 큰 일을 해주었군..........." 안토니우스가 카이사르 미노르의 별장에서 병사했다는 소식을 믿으려 하지 않는 것처럼, 여왕도 그 사실을 믿지 않았다. 차마 안토니우스가 생각조차 하지 않으려 하는 가설을 머리 속에 세우고 있었다. 어떻게 숨을 거두었을까? 병사라 했으니 도검을 사용하지는 않았을 터. 매일 식사마다 비소를 넣었는가? 한 방울이면 급사할 독을 사용하였는가? 질긴 비단 끈으로 그 목을 졸랐는가? 아니면 물 한 방울 주지 않고 아사 시켰는가? 매일 매일 장정들에게 겁간시켜 복상사를 맞게 하였는가? 로마의 애송이가 사용했던 방법보다 수배는 잔인하게 그의 명줄을 끊어 놓았을 진 대. 궁지에 몰린 어린양을 향해 다가서는 맹수가 제풀에 죽어 나자빠진 사냥감에게 흥미를 잃은 것 같은 심정. 칼을 뽑았으되, 벨 것이 없는 심정. 클레오파트라는 손안에 든 장난감을 놓쳐 버린 것 같은 아쉬움에 혀를 찼다. " 어찌되었든, 이 일로 은혜를 입은 바와 같으니 사례를 할 수밖에........" " 여왕님? " 차르미안이 알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 나는 이집트의 여왕이란다. " 남자를 손안에 넣을 수 없다면, 그 남자의 파멸을 기원 할 밖에. 여왕은 핏빛과 같은 포도주를 들이키며 고혹적인 미소를 지었다. . . . . " 뭐 좀 알아 본 것 있어? " 퀸투스는 일리리아에서 돌아 온 부하를 만나고 들어오는 이아로스에게 다그치듯 물었다. " 휴우 " 이아로스는 대답대신 한 숨을 쉬었고 퀸투스는 입안이 바짝 마르는 것 같았다. " 이아로스! 무슨 소식이냐니까! " " 카피토가 일리리아로 간 것은 사실 인 것 같습니다. " " 뭐?! " 사실이 아니기를 그리 기원하였건만. 신은 어디에 계시는가. 이아로스는 방금 부하가 전해온 소식을 안토니우스에게 어떻게 알리나 고심하면서 먼저 퀸투스에게 알렸다. 장군에게 전하는 일을 내심 퀸투스에게 미루고 싶은 심정이었으니 까. " 옥타비아누스의 별장에서 출발했다는 상인들을 수소문했는데 안토니우스님의 가병 출신의 노예가 하나 있었던 모양입니다. 마케도니아의 전장으로 팔았다고 하더군요. 수하가 그 뒤를 쫓았지만 카피토가 팔렸다던 군단은 이미 상대에게 괴멸된 직후여서 소식을 찾을 수 없었답니다. 생존자들은 포로나 노예가 되었다는데............." " 말도 안돼...... 달포가 넘도록 알아본 게 겨우 그 정도라니......... " " 퀸투스가 좀 장군에게 전해주세요." "엑- 싫다, 싫어...... 네가 전해! 왜 나한테 떠넘기고 그래? " " 저 번에 퀸투스님이 알아오신 소식 제가 전해 드리지 않았습니까. 덕분에 지옥의 문지기 케르베로스를 만 날 뻔했습니다만. " 이봐. 이아로스! 너 연인을 사자 입에 던져 넣을 생각인 거야? " " 저번에 그 사자 입에 연인을 집어 던진 것은 누구시더라? " " 끄으으응..........." 반박할 여지가 없었다. 그나저나 그 광폭한 야수에게 뭐라고 말한다. 두 달 가까이 주위에 뇌전을 일으키고 다니는 인간이었다. 살기가 넘쳐흘러 노예들은 가까이에도 가지 못했다. 퀸투스의 고민은 그 소식을 전해 받아야 할 당사자에 의해 간단히 해결되었다. " 이미 들었으니 그리 고심할 필요 없네. " 이아로스의 방안을 들어서는 그림자가 말했다. " 안토니우스........" " 안토니우스님........." 뒤따르는 리키리우스의 표정이 어색한 것을 보아 그들의 대화를 모두 들은 듯하다. " 두 사람이 나를 평소에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 것 까지 아주 똑똑히 잘 들었어. " " 이봐, 안토니우스 이럴 때는 못들은 척 하는 것이 대장부아닌가? " " 그대가 말했듯이, 나는 흉포한 야수라서. " "...................." "...................." " 저어, 일단 자세한 소식을 먼저 듣는 것이............." 힘겹게 리키리우스가 분위기를 만회한답시고 말을 꺼냈지만 방안의 기온은 더욱 내려갔다. 숨을 한 번 들이킨 이아로스가 카피토의 생사가 불분명하다는 이야기까지 말했다. 리키리우스가 아무런 반응이 없는 안토니우스에게 안도했고 퀸투스가 미리 값진 물건들을 치워둔 것에 안도하는 순간 여지없이 의자의 손잡이가 부서져 나갔다. 우지끈. "...................." 아끼는 의자의 한 쪽이 부서지는 것을 보며 이아로스는 찹찹했지만 이 정도가 어디인가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 동안 안토니 우스의 손에서 부서져 버린 집기들은 셀 수도 없을 정도였다. ".......... 그만 알아보도록 해. " " 안토니우스? " " 카피토가 로마에서 일리리아로 떠난 것이 내 달이면 벌써 반 년이다. 그 녀석이 살아있다면 그리스든 어디든 내 힘이 미치는 곳에 당도했을 거야. 이 곳 에페수스로 와도 벌써 왔겠지. 살아있다면 어딘가 갇혀 있던가, 거동을 하지 못할 정도의 일이 생겼던가. 아니면............." 죽은 것이겠지. 안토니우스는 굳이 그 말을 입에 담지 않았다. 간 밤에 피를 철철 흘리고 나타난 카피토의 환한 미소를 뭐라고 이해해야 할까. 치명상을 입고 그의 머리맡에 나타나 카피토는 계속해서 뭐라고 하였지만 안토니우스에게 들리지 않았다. 떨리는 목소리로 너는 죽은 것이냐고 물었을 때 짓던 기묘한 미소.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은 카피토였다. 테리우스가 어찌되었냐고 그 가여운 아이가 어찌되었냐고 소리쳐 묻는 순간 안토니우스는 새벽에 흠뻑 젖은 채로 침상에서 눈을 떴다. 입 밖에 내는 순간 사실이 되어버릴 것 같은 두려움. 또 하나 테리우스에게 정말로 무슨 일인가 벌어졌다면 카피토는 정말 살아있지 않을 것이다. 그 우직하고 미련한 녀석은 스스로를 책하며 자진했을 것이라고 안토니우스는 생각했다. 안토니우스는 테리우스가 살아있다는 확신도 죽었다는 확신도 가질 수 없었다. 처음 그의 앞에 나타난 것처럼 어디론가 사라진 것은 아닌가? 살해당한 그의 죽음을 병사로 숨기고, 자진한 카피토를 거짓으로 노예로 만든 것은 아닐까? 가장 설득력있고 정황이 분명한 추측이 메아리처럼 머리 속에 맴돈다. 이 방에 있는 누구하나 안토니우스에게 그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지만 누구나 도달할 수 있는 결론. "............................" ".................." "....................." 어째서? 옥타비안...........어째서? 나의 아름다운 소년아, 어째서 그 가엾은 아이를......... 옥타비안이 그를 해치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했던 것이 잘못이었던가. 침묵으로 잦아드는 그 날밤 이후 누구하나 안토니우스 앞에서 두 사람의 이름을 말하는 자는 없었다. # 2 에페수스의 대로를 따라 한 그림자가 홀린 듯이 정면만을 보고 걸어갔다. 그의 눈동자는 대로의 끝에 위엄 있게 서있는 토성에 고정되어 있었다. 길을 걷는 사람들에게 부딪쳐 욕설을 듣고 쓰러질 뻔했어도 그는 고집스레 정면을 응시했다. 성문에는 여러 개의 깃발이 휘날리고 있었다. 자주빛 바탕에 그려진 포도나무, 이집트를 상징하는 태양의 문양과 여왕의 것으로 보이는 이시스의 날 개 문양. 그리고 가장 높이 휘날리고 있는 푸른 바탕에 그려진 황금 월계수 문양의 깃발.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지만 어딘가 위태로워 보이던 그는 거대한 성문 앞에 섰다. ' 드디어 도착했어. ' 그 그림자는 머리에 단단히 두른 터번을 하나 씩 풀어내었다. 짙은 색의 천이 흘러내릴 때마다 더 짙은 검은머리가 새어나왔다. 그는 한 손에 소중한 듯 그의 두 주먹을 합친 것 보다 조금 큰 단지를 들고 있었다. 검은 터번이 땅에 떨어지자 터번을 곱게 편 그가 그 위에 단지를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기이한 그의 행동에 사람들이 돌아보고 성문을 지키던 병사들이 긴장했다. 그들의 시선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검은머리의 남자는 단지를 향해 두 번 절을 했다. 모두 당신의 덕이에요. 같이 돌아오기로 했잖아요. 눈가가 아려왔다. 눈물이 말라버린 듯 아팠다. 단지를 향해 다시 반절을 한 그는 단지를 다시 검은 터번으로 곱게 감쌌다. 자리에서 일어선 그는 붉은 벽돌과 검은 돌로 지어진 안토니우스의 관저의 입구로 향했다. 문지기들이 창을 들이대며 그의 길을 막을 때, 그는 품속에 간직했던 단검을 꺼내 병사에게 주었다. 단검을 살펴보던 병사는 차분한 그의 이야기에 새파랗게 질려 안으로 뛰어 들어갔고 그는 성문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웅성대는 병사들에게 둘러 쌓인 채 너른 마당에 서있던 그는 멀리서 그를 달려오는 금빛의 그림자를 기다렸다. ' 안토니우스..............' . . " 안토니우스님! 이 단검을 보십시오! 장군의 문장이 새겨져 있는데 이름이 다릅니다! " 평소라면 크게 경을 칠 일이지만 너무나 급박하게 달려온 병사의 말에 안토니우스는 회의중이었다는 것도 잊고 그 단검을 전해 받았다. 두근. 병사의 손에서 그의 손에 단검이 들리기까지의 시간은 찰나였는데 마치 영겁의 세월 같았다. 나무의 문장. 군단의 문양인 포도나무가 아닌, 그의 가문 안토니우스를 상징하는 승리의 월계수 나무. 상아의 결을 따라 섬세하게 조각된 나뭇잎사이로 새겨진 이름은 단 한 단어. " 테리우스............" 멍하게 단 검을 손에 들었다. 머리가 백지장이 된 것처럼 하얗게 비워졌다. 마주보고 앉아 있는 클레오파트라의 크게 뜬눈도 바로 옆의 리키리우스의 당황하는 얼굴도 보이지 않았다. 이 검이 어째서 내 손에 들려 있는가. 머릿속을 헤집는 의문을 토해낼 수 없을 정도로 안토니우스의 정신은 복잡하게 얽혀갔다. 보다 못한 퀸투스가 그를 대신하여 문지기에게 물었다. " 이 단검을 어디서 났느냐? 누가 전해주었느냐? " " 방금 전에 장군님을 만나겠다고 여행객이 찾아왔는데 부랑자의 행색이라 돌려보내려 하였더니 이 단검을 장군님에게 그 것이 곤란하다 면 델리우스님이나 이아로스님에게 보여달라고 하기에......단검의 문양이 장군의 가문의 것이라 이리 달려왔습니다. " " 그래서 지금 그자는 어디에 있는가? " " 생김새가 어땠지? " 퀸투스와 이아로스가 동시에 물어 병사는 갈등했지만 곧 이아로스의 질문에 먼저 답했다. " 지금 성문 안의 첫 번째 마당에 군사들이 지키고 있습니다........" "안토니우스!!!!!!!!!" 그대로 회의실을 박차고 나가려는 안토니우스를 이아로스가 잡았다. " 진정하십시오! 자객일지도 모릅니다! 제가 먼저 만나보겠습니다! " " 비켜! 이아로스!!! 비키라니까!!! " " 신중해! 제발 이성을 찾으라고! " " 아니라면 그 손으로 이 단검을 쥐었다는 이유로 베어버리면 그만이다! 이 것 놔! " " 저 생김은........... 검은머리의 검은 눈을 가지고 있어 페르시아인이 아닌가...." 미쳐 퀸투스의 질문에 대답을 못했던 병사가 갑자기 끼어 들어 단검을 가져온 자의 생김새를 전했다. 검은 눈 검은 머리. 순간 이아로스는 안토니우스를 잡았던 팔을 놓았고 퀸투스가 먼저 달려나갔다. 안토니우스도 미친 듯이 달렸다. 방에서 나서는 것은 퀸투스보다 늦었지만 어느 새 가장 앞서 달리고 있었다. 머릿속에는 오직 한 단어만이 울렸다. ' 테리우스! ' 건물에서 빠져나와 이 곳을 향해 달려오는 그림자는 검은머리의 남자를 향하고 있었다. 그는 그 그림자를 놓칠 새라 보고 있었다. 분명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그림자를 눈으로 쫓았다. 꽉 쥔 주먹과 떨리는 다리를 부여잡고 그는 달려가고 싶은 충동을 속으로 삼켰다. 마치 그 그림자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그는 그 자리에서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림자가 검은 눈의 청년의 앞에 당도했을 때 주위에 깊고 깊은 감정의 적막이 내려앉았다. 병사들을 헤치고 거침없이 달려오던 안토니우스는 그의 몇 걸음 앞에 섰다. 그 바람에 안토니우스의 뒤를 따랐던 퀸투스도, 이아로스도 리키리우스도 그의 뒤에 엉거주춤 서게 되 었다. " 테...........읍!!!!!!” 앞으로 나가 반갑게 그 이름을 외치려던 퀸투스는 이아로스의 손에 입막음을 당하고 뒤로 끌려졌다. 퀸투스가 노기를 띄고 이아로스를 올려봤지만 이아로스의 시선은 앞에 고정되어 있었다. "................." "............... " 그는 가죽끈이 헤어진 신발을 신고 빛 바랜 튜니카를 입고 끝이 닳은 토가를 망토처럼 걸치고 있었다. 그는 고집스레 검은 찬에 쌓은 단지를 품에 단단히 안고 서 있었다.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었다는 듯 생명이 사라진 조각처럼 서 있었다. 먼지에 휩싸여 사라져 버릴 듯이 그는 그렇게 유령처럼 서 있었다. 안토니우스가 한 발 더 그의 앞으로 다가섰다. 그 공간에는 두 사람만이 있는 것 같았다. 기묘한 적막이 두 사람을 감쌌다. 침조차 넘기기 어려운 금방 터질 듯한 긴장감. 웅성대던 병사들의 소리도 사라졌다. 그들은 뚫어져라 서로 바라보고만 있는 두 사람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 긴장감을 맥없이 흩어지게 만든 것은 방울방울 소리 없이 떨어지는 물줄기였다. 방울방울 점점이 떨어지던 눈물이 비가 되고 폭포수가 되어 흘렀다. 참았던 눈물을 한꺼번에 터뜨리는 듯 그는 하염없이 눈물을 쏟고 있었다. 그에게 다가서지도 않고, 그를 바라보지도 않고, 그를 부르지도 않으면서 말 없이 서서 온몸으로 눈물을 흘렸다. 가슴에 안은 단지를 더욱 꽉 껴안으면서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소리를 내는 것이 죄악인 것처럼 그렇게 눈물이 샘솟듯 흘렀다. "............" 안토니우스가 한 발 다가섰다. 억눌린 듯한 울음소리가 새어나왔다. " ...............으흑 " 다시 한 걸음 다가섰다. 흐느낌이 더욱 거세졌다. " ...............흐으으윽 " 또 한발 다가서자 이 전보다 더 가늘어진 어깨가 흔들렸다. 안토니우스는 그 어깨를 감싸 안았다. 감싸안은 어깨가 흠칫 떨렸다. 곧게 뻗은 머리카락이 손에 감겼다. 뜨거운 눈물이 목덜미에 닿았다. - 네게 돌아올게. 네게 돌아가겠다. 그리 약속한 것은 누구였던가. - 약속할게, 상처 하나 없이 지금 이 모습 그대로 너의 앞에 서겠다.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은 누구였던가. " 태우............" 검은 눈동자가 놀람을 담고 안토니우스를 올려다보았다. 물기가 흥건한 눈동자에, 밤하늘 보다 광활하고 많은 빛을 가진 검은 눈동자에, 안토니우스는 길게 입을 맞췄다. 그 진정한 이름의 주인의 입술에 안토니우스는 보답하듯 깊고 깊은 키스를 했다. " 태우........." 아아......신께서 너를 다시 내게 돌려 보내주셨구나. 이 타락한 영혼에게 암흑 속의 한 줄기 광명이었던 그대를 내게 돌려 주셨구나. 이 북받치는 감정을 어떻게 표현하랴. 이미 나는 시인이 아니었던 것을............... " 태우..........." - 다음에 다시 저를 만나면, 태우라고 불러주세요. - 약속하지, 돌아오는 그 때에 진실 된 그 이름 앞에 네게 입맞추리니... " 태우....." 다시 한번 안토니우스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태우의 귓가에 떨어졌다. 떨리는 검은 눈동자는 피하지 않고 안토니우스의 눈동자를 마주 보았다. 가슴 떨리는 미소가, 다시는 보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던 그 미소가 푸른 동공에 새겨졌다. 그러나 그 미소에 깊게 새겨져 있는 고통과 상처에 안토니우스는 신음을 흘렸다. 문득 안토니우스는 그가 혼자라는 것에 생각이 미쳤다. 그는 홀로 겨우 겨우 버티며 서 있었다. 혼자? 그 것을 읽기라도 한 듯 태우는 한 번 크게 숨을 삼켰다. "..............카피토도 왔어요. 같이 돌아오기로 해서 함께 왔어요. " " 뭐? " 작은 목소리는 조용한 마당에 큰소리로 퍼졌다. 그 말에 이아로스와 퀸투스가 주위를 샅샅이 훑었지만 카피토는 없었다. 순간 망치로 얻어 맏은 듯한 표정의 퀸투스가 태우가 품에 안고 있는 단지를 뚫어져라 쳐다보면서 그들 가까이에 다가섰다. 이번에는 이아로스도 그를 막지 않았다. " 태우? 카피토가 어디에 있다는 거지? " 안토니우스는 그를 품에서 잠시 떨어뜨리고 그 기묘한 검은 눈동자를 마주 보았다. " 여기에 있어요." 태우는 단지를 안토니우스에게 내밀었다. " 무슨 ? " 안토니우스는 전신을 휘어 감는 안 좋은 예감을 느끼면서 그에게서 단지를 받아들었다. " Reincarnatio........." " Reincarnatio ? " Reincarnatio. 영혼의 재래. " 우리 나라에서는 윤회(reincarnatio)를 믿어요. 육체가 식어도 영혼은 영원히 죽지 않아요. 사람이 죽으면 영원히 죽지 않고 영혼이 되어 또 환생을 하고 은혜를 입으면 그 은혜를 다음 생에서 갚을 수 있게 정해져 있대요. 그래 서 헤어져도 다음 생에서 다시 만날 수 있어요. 그러니까 분명히 다른 생에서 다시 만날 수 있을 거 에요. " " 그게 무슨..........." "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니까 꼭 다시 카피토를 만날 수 있어요.........." 순간 안토니우스는 손에 든 단지를 떨어뜨릴 뻔했다. 퀸투스가 뛰어와 강탈하듯 그 단지를 가져가지 않았으면 분명 그랬을 것이다. 단지를 열어본 퀸투스의 표정이 하얗게 질리는 것을 보며 안토니우스는 언젠가부터 들었던 불길한 예감이 현실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카피토가 꿈속에서 자신이 죽은 자인가 산 자인가를 물었을 때 지었던 기묘한 미소를 이해 할 수 있었다. 영혼은 영원히 죽지 않는다 했다. 퀸투스의 손에서 산산히 부서져 흐르는 뿌연 가루가 흩어졌다. - 카피토, 테리우스를 잘 부탁한다. 너를 믿는다. - 예, 주인님 카피토는 심지가 굳고 신의가 있는 아이였다. - 제 이름과 제 생명을 걸고 지켰습니다. 환청같이 카피토의 담담한 목소리가 귓가에 들렸다. 그랬는가, 그 날 너의 영혼이 다가와 내게 속삭인 말은 그 것이었는가. 우직한 그의 얼굴이 안토니우스의 눈앞에 떠올랐다 사라졌다. 그는 죽었느냐는 그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 영혼은 죽지 않고 영생한다 하였던가. 무표정한 얼굴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 고맙구나. 잊지 않고 데려와 주어서. " 카피토에게 하는 말인지, 태우에게 하는 말인지 안토니우스는 대상이 분명치 않게 독백처럼 읊조렸다. 그 순간에 기력을 다한 듯이 허물어져 버리는 태우를 안토니우스는 두 팔로 단단히 안았다. # 3 헉헉 [ 저쪽이다! 저리로 갔다!!!!!!!!! ] [ 잡아!! 작은 놈은 산채로 잡아!! ] 나무 가지에 얼굴이 찢겼다. 벌써 얼마나 달렸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쉴새 없이 땀이 흘렀다. 좀더 많은 공기를 들이마시기 위해 벌린 입에는 소금기 어린 땀의 찝찔한 맛이 느껴졌다. " 하아, 하아, " 땀 내음이 아닌 더 근원적인 짠 내음이 코끝에 걸렸다. 바다 바람이 이렇게 강하게 느껴지는데. 이제 저 언덕만 넘으면 되는데. 다리가 풀려 쓰러지는 테리우스를 카피토가 재빠르게 부축을 했다. 손목을 잡고 있던 손을 풀고 카피토는 그의 어깨를 단단히 부여잡고 한 손으로 길을 막는 풀숲을 헤치며 앞으로 달렸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카피토는 아랫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었다. 비릿한 혈향과 함께 입에서는 단내가 풍겼다. 더 이상 뛰는 것은 무리였다. 카피토는 주변의 엄호물이 될만한 것을 찾으면서 앞으로 계속 내 달렸다. 그리고 그의 눈에 기묘하게 꺽어진 고목과 그 주변에 자란 관목 때문에 은폐물로 적당한 곳이 보였다. " 여기 계세요. " " 헉헉........ 카피토? " " 이곳이면 쉽게 눈에 띄지 않을 것입니다. 아무 소리도 내지 말고 여기 계세요." 지친 태우의 몸을 꺽어진 고목 사이로 밀어 넣고 관목을 헤쳐 그의 모습을 가리면서 카피토가 말했다. " 카피토는? 카피토는 어떡하고? 이 쪽에 공간이 있으니까............ 같이 숨어.... " " 제가 저자들을 따돌리겠습니다. 여기 계세요. 제가 만약 달이 지기까지 돌아오지 않으면 이 안에서 절대 나오지 마세 요. 내일 아침 해가 뜨면 바로 포구로 가셔야합니다. 거기서 에페수스로 가는 상선을 타세요. " " 카피토!!! " 칼을 뽑아 들고 일어서는 그의 팔을 테리우스가 잡았다. 그의 눈에는 불안과 걱정, 공포가 가득했다. 그냥 몸을 돌리려던 카피토는 테리우스의 손을 잡아 그의 팔에서 떼어놓으면서 단호하게 말했다. " 잘 들으세요. 남쪽입니다. 내일 아침해가 뜨면 해의 오른 쪽으로 가세요. 숲을 지나 길을 따라 걸으면 포구가 나올 겁니다. 이 패를 가지고 있으면 신분 보장이 될겁니다. " " 카피토! 가지마!! 같이 숨어 있으면........ " " 만약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기다리세요. 절대 달이 지기 전까지는 나오면 안됩니다. " 가볍게 웃으면서 카피토는 태우의 이마에 입맞춤을 했다. 평소의 그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카피토는 점차 가까워지는 병장기의 소리를 들으며 관목으로 태우를 완전히 덮어 버렸다. 나뭇잎의 가려지던 마지막 까지 그는 두 손으로 입을 막고 그 큰 검은 눈동자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욕설과 거친 걸음 소리를 가늠하면서 카피토는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다. 그들은 트라케의 한 부족이었다. 최근 트라케의 왕정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그 세력이 안토니우스에게 반기를 들고 있다는 것을 카피토는 미쳐 알지 못했다. 곧 에페수스 로 가는 항구가 가까워졌다는 생각에 인근 부족의 마을을 의심 없이 들어간 것이 화근이었다. 그 부족은 반란 세력의 중심이 되는 왕자의 외가였었다. 무기에 관심이 많은 촌장의 아들에게 무심코 태우가 단검을 보여준 것이 화근이었다. 처음 에는 단지 단검을 빼앗고자 했지만 카피토가 싸우면서 전투에 단련된 그들은 카피토의 검술이 로마의 군인의 것임을 금방 알아보았다. 그들에게 로마는 치욕을 가져다준 정복자일 뿐. 적의 숫자는 4명. 4명씩 무리를 지어 수색을 하는 모양이었다. 이미 검은 빛나지 않게 하기 위해 흙은 바른 상태였다. 뒤를 쫒던 무리는 20여명 정도였다. 도망치기 전에 카피토가 대충 해치운 상대가 죽은 자는 셋, 상태 불능으로 빠뜨린 자도 대략 그 정도 였다. 남은 자가 스물 정도라고 하면 앞으로 그가 상대해야 할 무리는 다섯. 손바닥에 단단히 감은 천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후우. 크게 심호흡을 한 카피토가 벼락 같이 제일 뒤에 있던 상대의 머리를 날렸다. 쓰러지는 적의 몸을 발로 차 뛰어 들어오는 자의 시선을 막고 그의 허리를 베고 수도로 먹뼈를 뿌러뜨렸다. 옆으로 공격해 들어오는 자의 검을 가까스로 피하고 그의 심장에 검을 박았다. 남은 한 명을 고함을 질러 다른 무리에게 알리려는 순간 카피토의 검이 그의 목젖을 찢었다. - 빠르게, 소리 없이. 상대를 단 칼에 급소를 찔러 빠르게 제압하는 것이지. 그 분은 마치 시를 읊듯이 낭송하듯 그에게 가르쳤다. 이제 셋. 가까이 있던 무리가 다가오는 기척을 느꼈다. -상대가 많을 때는 나누는 거야. 사과를 한번에 먹을 수는 없잖아? 잘라먹어야지.. 그 분 전술의 기초를 옛날 이야기처럼 가르쳐 주었다. 카피토는 나무를 끼고 돌아 그 들의 뒤로 다가섰다. 무방비했던 그들은 카피토에게 속절없이 당했다. 옆구리에 불에 데는 듯한 통증이 있었지만 검을 든 손을 쉬지 않았다. [으어억..........] 이제 둘. 비명 소리에 멀리서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 상대 보다 빨리, 상대 보다 먼저 검을 뽑는 자가 승리한다. 가장 기초적인 싸움의 기본. 카피토는 가르침을 잊지 않았다. " 크으윽............." 가슴에 박힌 단검을 뽑아 마주 달려오는 상대의 미간에 꽂았다. 주저앉아 뒷걸음치는 자의 가슴에 칼을 박아 넣었다. 등에서 다시 한 번 불에 데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이제 하나 - 부상을 당했을 때는 도망가는 게 최고지, 별 수 있어? 그 분은 진실을 농담처럼 말했다. 그런데 그 진실을 따를 수가 없다. 두 개의 단검을 던지며 한 명의 목을 노렸다. 한 개의 단검이 퉁겨 나왔다. 그가 휘두르는 칼에 어깨를 내주고 그대로 횡으로 베었다. 검이 복부에 박혀 빠지지 않았다. 마지막 남은 상대가 먼저 검을 뽑아 들고 비리게 웃었다. 카피토는 자꾸만 풀어지려는 손으로 힘겹게 검을 뽑아 다시 바르게 쥐었다. 검과 검이 맞부딪쳤다. 날라 간 카피토의 몸이 나무 등걸에 박혔다. 부러진 검을 버리고 상대가 죽은 동료의 손에서 검을 빼앗아 다가왔다. 상대는 카피토의 검을 발로 차내면서 비릿하게 웃었다. 퉁겨진 커피토가 그의 옆구리에 박혀있던 단검을 뽑아 들고 덤볐다. 단 검이 허리에 박히고 상대의 검이 카피토의 가슴을 위에서 길게 찢었다. " 쿨럭..........." 카피토가 나무를 등에 지고 휘청 였다. 허리가 계속 밑으로 내려갔다. [ 크윽. 독한 놈.......이제 끝이다. ] 허리에 박힌 단검을 뽑으며 사내가 인상을 썼다. 나무에 기대어 겨우 서있던 카피토는 바닥에 꺼지듯 쓰러져 앉았다. 달이 지고 있었다. 상대의 얼굴빛은 좋지 않았다. 상대 역시 오랜 시간을 버티지 못할 것이다. [ 죽어라, 로마노. ] 로마노. 언제나 갈리아의 노예로 불렸던 그에게 생소한 호칭이었다. 이들에게 자신은 로마인이던가. 사내의 검이 달을 향해 쳐 들렸다. 심장을 향해 박힐 검 날을 생각하며 카피토는 눈을 감았다. 언젠가 장군이 제게 말했지요. 생명을 바칠 상대가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라고. 지금 나는 행복합니다. . . . 타닥 타닥..... 새벽 녂의 한기를 몰아내기에는 화덕의 불이 너무 약한 듯 싶었다. 안토니우스는 침상에서 일어나 장작을 더 집어넣었다. "..후우..........." 에페수스에 온 뒤로 태우는 깨지 않고 잠을 자고 있었다. 하루는 그의 심신이 지친 탓이라고 생각하고 그의 잠을 방해하지 않았다. 이튿날은 언제 그의 검은 눈이 떠질까싶어 안토니우스는 그 곁을 떠나지 않았다. 사흘 째, 불에 잦아드는 장작처럼 그의 속도 시커멓게 타고 있었다. 타닥 타닥.... 장작 타는 소리만 방안에 공허하게 맴돌았다. 불이 잘 붙도록 불쏘시개로 이리저리 장작을 굴리고 불길이 세차게 타오르는 것을 확인하고 다시 침상으로 다가갔다. 밤하늘 같은 검은 눈동자가 그를 맞아 주었다. 검은 눈동자? 숨이 멎을 것 같은 벅찬 이 감정을 뭐라고 불러야 할까. 안토니우스는 떨리는 손으로 그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 " 너를 다시는 보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 " 다시는 이 눈동자를 보지 못할 거라 생각했지. " 너를 다시는 안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 " 다시는 이 입술에 입맞출 수 없다고 생각했지. " 네 목소리를 다시는 듣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 야속한 입술은 계속되는 키스에도 아무런 소리도 들려주지 않았다. " 그렇게 웃지만 말고..........네 목소리를 들려줘...... " 안토니우스는 침상에 파묻히는 누워있는 태우를 굽어보며 말했다. 떨고 있는 검은 눈동자가 그를 향해 웃고 있었다. 열망. 상대에 대한 염원. 가늘게 떨리는 두 팔이 안토니우스의 금빛 머리와 얽혀 들었다. 당신을 원해. 열기를 띄어 가는 숨소리가 소리 없이 안토니우스에게 속삭였다. 하얀 시트에 두드러지는 검은 머리에 안토니우스의 입술이 닿았다. 잔잔하게 안토니우스의 키스가 태우의 머리에 수를 놓았다. 머리카락 한 올 한 올마다 키스를 할 것 같은 안토니우스의 입술을 멈추게 한 것은 그렇게도 원했던 청아한 목소리였다. "안아줘요 " 굴러 떨어지는 눈물 속에서 그는 미소지었다. " 태우......." " 다시 한 번 불러줘요..." " 태우......" " 다시 한 번....... " " 태우........" " 한 번만 더..........." 안토니우스는 대답 대신 태우의 입술을 빨아 들였다. 태우는 오른 손에 금빛의 머리가 감겼다. 입술을 떠난 또 하나의 입술은 태우의 목덜미로 내려왔다. 한 손이 태우의 얼굴을 보듬었다. 태우는 자신의 얼굴을 쓰다듬는 큰 손을 잡아 그 손에 부드럽게 키스했다. 안토니우스의 입술이 닿은 곳을 따라서 그의 두 손이 가슴 위를 부유했다. "하아..........." 탄식과도 같은 신음이 새어나왔다. 안토니우스의 손이 태우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살짝 들린 듯한 포즈에서 태우는 그대로 손을 뻗어 안토니우스에게 매달렸다. 허리를 지분거리던 손이 완만한 굴곡을 향해 내달렸다. 이윽고 긴 손가락이 마른 그 곳에 침입했다. " 하윽............." " 쉬이...괜찮아........" 손가락을 움직이면서 안토니우스는 다른 한 손으로 태우의 등을 쓸어주었다. 팽팽하게 긴장되어있던 태우의 근육이 조금씩 풀리는 것과 동시에 손가락의 개수를 늘렸다. 움찔하는 그에게 내리 쪼듯이 얼굴과 목덜미에 키스를 퍼부었다. 고개를 흔들어 거부의 몸짓을 보이던 태우는 안토니우스가 주춤하는 사이의 그의 입술을 덮쳤다. 누가 먼저 입술을 떼고 서로의 눈을 응시하였는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안토니우스는 그 검은 눈에서 시선을 놓지 안고 그 안으로 서서히 들어갔다. 흔들리는 검은 눈동자의 희락의 빛이 떠오르는 것을 느끼며 바싹 조여오는 힘에 안토니우스는 낮게 신음하며 움직였다. " 하아.........아아........." " 흐윽........흐윽............" 움직임은 점차 거칠어지고 신음소리는 더욱 높아졌다. 안토니우스의 폭풍 같던 움직임이 멈추고 동시의 태우의 등이 활처럼 휘었다. 누가 먼저 절정에 다다랐는지 알 수 없었다. 안토니우스는 그의 안에서 나오지 않은 채 태우에게 쏟아붇는 키스를 멈추지 않았다. " 안아줘요......." " 안고 있어.......네 안에 내가 있다. " " 더 세게 안아줘요. " 안토니우스는 대답 대신 떨고 있는 그의 몸을 꽉 껴안았다. 화답하듯 태우의 다리가 안토니우스의 허리를 세게 감았다. 양손에 금빛의 타래를 만들며 태우는 다시 안을 채우는 충만감에 허리를 움직였다. 그의 둔부를 감싸안은 안토니우스의 손이 그의 움직임을 도왔다. " 내가 너를 안고있다........." "흐읏..........." 대답대신 태우는 가는 신음소리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 네가 내 품안에 있어..........." 자신에게 확인하듯 안토니우스는 다시 한번 말했다. " 네가 내 품안에 있어..........." 다시는 이 품안에서 나가지 못하게 하리라. 이 눈이 미치지 않는 곳에 두지 않으리라. 또 한 번의 절정의 순간 안토니우스는 깊고 깊은 입맞춤을 했다. 아침 햇살이라고 하기에는 햇살을 뜨거웠고 하늘의 중앙에 자리하고 있었다. 태우는 침상에 앉아 그 햇살을 그대로 맞이하고 있었다. 따뜻하게 비추는 햇살이 눈이 부시고 부끄러운 통증이 사라지지 않는 것을 보면 지금 이 순간은 꿈이 아니리라. 원칙대로라면 스스로 뺨을 꼬집거나 때려야 하지만 온 몸에 힘이 하나도 남아 있는 상태에서 그 것은 무리인 듯 싶었다. 정말은 기쁜 마음에, 반쯤은 원망을 담아 태우가 안토니우스의 볼을 꼬집었다. 잠들어 있는 그의 얼굴이 살짝 찌그러지는 것을 보니 정말 꿈은 아니었다. 행복했다. 카피토. 나는 행복해요. 미안해하지는 않아요. 단지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어요. 우리는 약속을 지켰어요. 고마워요, 폰티우스. 힘겹게 일어나 앉으며 태우는 허공에 정말 그가 있는 것처럼 작게 속삭였다. " 일어나 있었군요. " 이아로스가 한 손에 음식이 담긴 쟁반을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 이아...........로스 " 반가움에 소리치려던 태우는 안토니우스가 아직도 그의 허리를 안고 깊이 잠들어 있다는 것과 나체라는 사실에 목소리를 줄여야 했 다. " 배고프지요? 나흘 째 아무것도 안 먹었어요. 스프를 좀 끓여 왔어요. 좀 들어요. " " 아........." 꼬르륵. 때맞추어 울린 뱃고동에 이아로스는 자상한 미소를 지었다. 몇 년 만인데도 그 미소의 따스함이 변한 것이 없어 태우는 그가 너무나 반가웠다. 기뻤다. " 정말 반가워요, 이아로스. 많이 보고 싶었어요. " " 후훗, 저도 그랬습니다. " 침상 곁에 있는 의자에 앉아 이아로스는 스프를 한 숟갈 덜어 태우의 입안에 덜어 주었다. 멋쩍음에 직접 수저를 들려고 했지만 팔이 마음대로 움직여 주지 않아 얌전히 입을 벌렸다. 감기 걸렸을 때 어머니가 떠 먹여 준 죽이 생각나 태우는 눈이 핑 돌았 다. " 맛있어요. " 한 입을 삼키고 냉큼 대꾸하는 그의 모습은 조금 마르고 상하기는 했지만 빛을 잃고 있지는 않아 이아로스는 적잖게 안심이 되었다. " 다행이군요. 제가 직접 끓인 것이라 좀 불안했습니다만. " " 에엣? " " 그렇게 놀란 표정을 짓지 않아도 됩니다. 자 한 술 더. " 굳이 부엌을 이집트인 요리사가 장악하고 있어서 그랬다 라고 말할 필요는 없으니까. 며칠 째 클레오파트라의 심기가 불편하다는 것을 이아로스는 모르지 않았다. 그 이유도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 에 무엇보다 조심해야했다. 하물며 물 한 잔까지도 이아로스는 그가 직접 샘에서 길어왔다. 이아로스는 부드럽게 웃으며 어린 동생을 돌보는 기분으로 태우에게 스프를 계속 먹였다. 어느 정도 배가 부른 태우는 그제 서야 흘깃 안토니우스를 돌아보았다. 어딘가 죄책감이 다분한 모습에 이아로스는 피식 웃었다. 시장기 앞에서는 연인도 뒷전인 것이다. 이 점은 퀸 투스와 닮았다고 이아로스는 생각했다. " 신경쓰지 마세요. 아마 더 주무셔야 할 것입니다. 테리우스가 에페수스에 오고 사흘째 잠을 안 주무셨거든요. 어젯밤에 복도까지 울리는 소리에 당신이 깨어났다는 것을 알았지요. " " 쿨럭...."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폭탄발언을 일삼는 버릇도 그대로였다. 이아로스는. " 여기 물. 천천히 들어요, 체하겠어요. ................................................... 그리고 환자를 괴롭힌 사람에게 스프를 직접 끓여줄 만큼 관대한 성격은 아니라서요. " 조금 뜸을 들이면서 이아로스는 짓꿎게 덧붙였다. 자신의 허리를 감싸고 있는 안토니우스의 왼 팔이 조금 떨린 것 같은 생각에 금빛의 뒷통수를 바라봤다. 엎드려 누워있는 그는 미동도 하지 않아서 조금 안심이 되었다. 사각 사각. 그 웃음에 동조하며 이아로스는 과도로 사과의 껍질을 능숙하게 벗겨 내었다. 은으로 만들어진 과도는 마치 그 날 밤의 달빛처럼 반짝였다. " 나...살인을 했어요. " 푹. 헛손질에 손을 베어 흰 사과의 속살에 피가 새겨졌다. " 테리우스? " 이아로스는 당혹함에 과도를 떨어뜨렸다. 챙그랑 하는 소리에 흠짓 이아로스는 안토니우스를 반사적으로 돌아 봤지만 깊은 숨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흐르는 피를 닦을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이아로스는 태우의 검은 눈을 바라봤다. 찌이익. 태우는 시트를 가늘게 찢은 다음 그 것을 피가 베어 나오는 이아로스의 손에 감았다. 제법 깊게 베었는지 여러 번을 감은 뒤에도 핏물이 집요하게 베어 나왔다. " 피가 많이 흘러서 막으려고 했는데 내 손이 모자랐어요. 한 손으로 막고 있어도 다른 손으로 막고 있는데도 눈앞에서 계속 피가 났어요. "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가. 아니 이아로스는 직감적으로 이야기 속의 대상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의 검은 눈이 깊은 우물처럼 보였다. . . . 창그랑. 멀리서 검과 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 곳을 향해 달리면서 태우는 단검을 손에 잡았다. 딱딱한 무기질의 감촉이 그의 손을 더욱 떨리게 했다. 가까이서 서걱하는 소리가 소름끼치게 들려왔다. 처음 듣는 소리이지만 태우는 그 것이 사람의 뼈를 베는 소리라는 것을 느꼈다. 싸우는 소리가 들리는 방향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짧게 혹은 길게 끊어지며 이어졌다. '카피토, 카피토 ' 악다문 입이 덜덜 떨렸다. 이가 서로 부딪치는 소리가 날까 태우는 입안에 손을 집어넣었다. 하늘 중앙에 박혀 있던 달이 어느 새 서편으로 기울고 있었다. 나뭇잎 사이로 달빛을 바라보던 태우는 어느 순간 병장기가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다는 것을 깨닫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카피토가 나무 등걸에 눈을 감고 기대어 앉아 있었다. 그의 앞에 카피토를 향해 검을 내리치려는 사람이 있었다. 푹. " 크아악 " 처절한 비명소리에 카피토가 눈을 떴다. 비명소리고 살을 파고드는 섬뜩한 소리는 카피토에게 나온 것이 아니었다. 안토니우스가 단 검을 주면서 이 검을 뽑을 일이 일어나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했던 일이 생각났다. 손에서 전해지는 감촉은 생경했다. 분명 단검을 그 사내의 등에 박은 것은 자신이었는데 마치 그 사내의 등이 검을 빨아들이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가 천천히 뒤를 돌아 보었다. 핏발이 선 붉은 눈동자가 사납게 노려 보았다. 그의 두 눈에 분노와 고통의 혈광이 넘쳤다. 한 발 남자가 다가섰다. 그 남자는 검을 들고 괴성을 질렀다. 또 하나의 단검이 태우의 손에 만져 졌다. - 그리고 상대를 벨 수 있는 마음이 검을 휘두르는 것이다. 망설임은 없었다. 번쩍 하는 순간 남자의 목이 절반이 잘려져 나갔다. 비틀 비틀 앞으로 비적 거리던 몸이 짚단처럼 무너져 내렸다. 꿀럭 꿀럭 기분 나쁜 소리를 내며 남자의 목에서 검붉은 피가 솟아져 나왔다. 생명이 꺼져가는 눈에는 지금의 상황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의심이 서려 있었다. 그의 손에 죽은 남자의 모습을 멍하니 태우는 내려다 보았다. 남자의 몸에서 솟구치던 피는 어느 순간에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심장이 멈추자 동맥은 그 활기차던 흐름을 멈추고 죽은 피가 되어 태우의 발을 적셨다. " 아.......... 카피토?! 카피토!!! 피가........카피토........흐흑......... " 놀란 눈으로 책망하듯 그를 바라보는 카피토를 향해 태우는 뛰어갔다. 죽은 남자 따위보다는 카피토가 훨씬 중요했다. " ................약속을 지킬 줄 모르는군요. 달이 지기 전에는 나오지 말라고 했는데......." 그는 희미하게 웃었다. 카피토가 잘 웃지 않았는데 오늘 밤 벌써 두 번째 그의 미소를 보았다. 덜컥하는 두려움이 태우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 미소를 마지막으로 카피토는 다시 눈을 감았다. " 그딴 약속 한적 없어!!!!! .....싸우는 소리가 들려서........ 따돌리기만 한다고 해놓고선.. 카피토!! 흐윽..제발 눈을 떠!!!!!!!!!! 카피토!!!!!!!!!!!!!!!!!...... " 카피토의 숨소리가 점점 사그러 들었다. 피가 새어나오는 가슴에 귀를 대었다. 얼굴이 카피토의 피로 물들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가늘게 뛰는 맥박에 기쁜 것도 잠시 카피토의 몸에서는 꾸역 꾸역 피가 흘러나왔다. 자신의 옷을 찢어 피가 새어 나오는 곳을 막으려고 했다. 한 손으로 옆구리를 막고, 다른 한 손으로 배를 막았어도, 가슴에서, 허벅지에서, 등에서 끊임없이 카피토의 몸에서는 피가 흘러 나왔다. 붉게 물들어 가는 그의 손과, 그의 옷을 보면서 사람의 몸에 이렇게 많은 피가 흐르고 있었다는 사실이 두려웠다. 아니 이렇게 많은 피가 몸속에 들어있는지 조차 몰랐다. 지금 흐르는 피를 막지 못하면 안 되는데........ 야속하게도 피는 대지를 적시고 태우의 발을 적시면서 계속 흐르기만 했다. " 흐윽..........." "................"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태우는 어느 새 같이 피투성이가 되어 카피토의 몸에서 조금이라도 피가 덜 흘러나오게 하기 위해 애썼다. 흐르는 피만큼 카피토의 생명이 사라져 버릴 것 같았다. 문득 얼굴에 얼음장 같은 한기가 느껴졌다. 울고 있는 자신의 얼굴에 카피토가 손을 가져다 대고 있었다. 카피토의 손은 차가웠다. 너무나 차가워서 두려웠다. 카피토는 그런 태우를 바라보며 희미하게 미소짓고 있었다. 몸은 이렇게나 차가운데 그의 미소는 봄날의 햇살처럼 따스했다. "...........당신이 흘리는 눈물과 내가 흘리는 피 중에서 어떤 것이 많을까요? " " 무슨 바보 같은 소리를 하는 거야?! 카피토!!!!!!! " 다시 길게 옷을 찢어 감으려는 태우의 손을 다른 한 손 카피토가 잡았다. 강하게 붙잡은 것이 아니라 그저 힘겹게 태우의 손에 자신의 손을 올려놓은 것 뿐이었지만 태우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카피토의 눈에서 생명의 빛이 한올 한올 빠져나가고 있었다. 희미하게 흩어지는 빛을 잡고 싶었지만 허무하게 그 빛은 공기 중에 사그라지고 있었다. 그런 것이 눈에 보일 리 없지만 정말 그렇게 보여서 비명 같은 울음이 새어나왔다. 마지막 생명이 빛을 발하듯 카피토의 얼굴에 빛이 서려있었다. 마지막 불꽃이 타고 있었다. " 카피토.......우욱..." 그의 손이 얼굴에서 떨어져 내렸다. 태우는 반사적으로 그 손을 잡아 쥐었다. " 나는 노예라서.......내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주인을 위해 목숨을 바치지 않을까 생각했었습니다...... 하지만 안토니우스님은 자신은 그 상대가 아니라고 목숨을 바칠 상대를 만나면 알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 상대를 만나면 심장이 먼저 알 수 있다고........... 언젠가 심장을 뽑을 수 있는 상대가 나타날 것이니까 나를 소중히 하라 가르치셨습니다......그 사람을 위해..........그 것은 자유라고.. .. ..............그 때는 너무 어려서 그 뜻을 몰랐는데............ ..............이제는 알겠습니다......... 그 것이 내가 노예가 아니라는 증거라고.......... " " 카피토..............." 그는 갈리아의 노예였다고 했다. 아버지는 로마의 귀족이었지만 어머니는 안토니우스와 같은 파란 눈을 가진 골족 출신 노예 여인이었었다. 그의 어머니는 언제나 카피토의 아버 지를 주인님이라고 불렀고, 그의 아버지는 그를 사랑해서 종족과 신분이 다른 어머니와 연결한다는 의미로 그의 이름을 폰 티우스(다리, 교량이라는 뜻)라고 지어 주었다. 골족의 반란이 거세지고 그의 아버지는 골족의 노예를 부인으로 거두었다는 이유로 반역의 혐의가 쓰여졌고 그의 어머니는 카피토의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 대신 매를 맞고 죽었다. 카피토의 아버지는 반란군과 싸우다 전사했고 카피토는 노예로 팔렸다. 노예 상인에게 매를 맞고 도망친 열두 살의 그가 굶주려 죽어갈 때 기적처럼 어머니의 눈동자를 가진 그를 만났다. 카피토는 손가락 하나 조차 들 힘이 없었었는데 어머니와 같은 푸른 눈을 보는 순간 안토니우스의 토가를 잡고 매달릴 힘이 솟았다고 했다. " ........나는 자유입니까? " 카피토가 물었다. " 응......" 태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환하게 웃었다. 죽음 앞에서는 누구나 평등하고 자유롭다. 인간은 약하지만 평등하고 존엄하고 자유로운데 그 것을 모든 이가 알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러야 할까. 그는 언제나 자유롭고 당당했다. 하지만 태우는 말없이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 이번에는 약속을 어기면 안됩니다. 에페수스로 가셔서 그 분께 꼭 돌아가셔야 합니다. " 카피토는 다짐받겠다는 듯이 말했다. " 응....응......" 태우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뒤돌아보지 말고 가셔야 합니다.........." " 응..응" " 도착할 때까지는 쓰러지지 말고 울어서도 안됩니다. " " 응..." 만족했다는 듯이 카피토는 웃었다. 하지만 그 미소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고 있지 않아 태우는 덜컥 겁이 났다. 카피토도 함께 돌아가야 하는데. " 함께 돌아가자.......카피토......내가 데려가 줄게.....응? " "........................" "카피토. 같이 돌아가자......" " .................." 카피토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희미하게 고개를 숙여 긍정의 의미를 표했다. "...........카피토? " " ...................." "카피토? " " ...................." "카피토............... " " ...................." 달이 지고 푸르스름한 새벽이 밝아왔다. 태우는 카피토를 업고 산길을 걸었다. 그보다 머리하나는 더 큰 카피토를 옮기는 것은 무척 힘들었지만 하룻밤을 꼬박 걸어 너른 바위들이 흩어져 있는 구릉의 정상에 섰다. 가까이 있는 샘터에서 물을 떠와 그의 얼굴을 깨끗이 씻겼다. 새 옷을 꺼내 갈아 입히고 신발로 다시 신겨 주었다. 가장 너른 바위에 나무 가지를 모아 쌓았다. 나무 가지 위에 다시 카피토의 망토를 깔고 그를 그 위에 눕혔다. 작은 불꽃을 그의 손에 쥐어 주었다. " 야훼여, 깊은 구렁 속에서 당신을 부르짖사오니 주여 이 부르는 소리를 들어 주소서. 애원하는 이 소리 귀 기울여 들으소서. 야훼여, 당신께서 사람의 죄를 살피신다면, 그 감당할 자 누구이리까? 그러나 용서하심이 당신께 있사오니, 이에 당신을 경외하리이다. 나는 야훼님 믿고 또 믿어 나의 희망 그 말씀 속에 있사오니, 새벽을 기다리는 파수꾼보다 내 영혼이 주님을 더 기다리옵니다. 새벽을 기다리는 파수꾼보다 이 영혼이 주님을 더 기다리옵니다. 인자하심이 야훼께 있고 풍요로운 속량이 그에게 있으니 그가 내 영혼을 속량하시리라, 그 모든 죄에서 구하시리라. 그가 이 영혼을 속량하시리라, 그 모든 죄에서 구하시리라. " 약했던 불길이 점차 거세지면서 그의 육신이 재가 되어 갔다. 꼬박 하루 동안 검은 연기가 하늘로 올랐다. 하얗게 뼈만 남은 카피토를 조심스레 추스렸다. 곱게 빻아서 작은 단지에 담았다. 조금이라도 이 곳에 남을까 조심스레 담았다. 로마의 매장법 따위는 모른다. 그저 그를 안토니우스에게 데려가고 싶었다. 다시 그를 만나고 싶었다. 인도의 어느 곳에서는 영혼이 어서 다른 육신을 찾아 생을 이어가라고 화장을 한다는 이야기가 생각났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인 것을. 태우는 다시 카피토를 만나고 싶었다. 그에게 입은 은혜를 그 은혜를 다음 생에서 그에게 갚을 수 있게. 노예가 아닌 자유로운 인간임을 알면서 다시 살아갈 수 있게. 어느 시간, 어느 공간에서 카피토가 푸른 눈이 아름다운 어머니의 품에서 웃을 수 있게. 진정으로 윤회의 수레바퀴가 그를 위해 돌기를 기원했다. Deus! Reincarnatio, Credo Reincarnatem, Kyrie Elesion............. 주여, 윤회, 영혼의 부활을 믿사오니. 자비를 베푸소서.............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고....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니까.... 그 인연이 시간이나 공간에 상관없이 이어질 거라고...." "..............." 이아로스는 어떻게 그를 위안해야 할지 어떻게 그의 생각에 동조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더 이상 눈물이 아닌 희미하고 서글픈 미소로 죽은 이를 배웅하는 이를 위로하는 일은 어찌해야하는가. 아아, 카피토여. " ........... 그 아이는 내게 행복하다 말했다. 나는 그 아이가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보았다. " 언제부터 깨어 있었는지 안토니우스는 일어나 앉아 태우를 뒤에서 감싸듯이 안았다. " 그리 가르친 것은 나였으니 그 것으로 되었다. " 안토니우스는 태우의 목덜미에 고개를 박고 조용히 읊조렸다. 목소리는 높지도 않고 낮지도 않았지만 처연했다. 태우는 자신의 어깨에 닿는 뜨거운 물에 한 손을 뒤로 돌려 그의 금빛 머리를 쓸어주었다. " 돌아왔으니 그 것으로 되었어.............." - 예, 파테르. 안토니우스의 감은 눈앞에 떠오르는 카피토는 환하게 웃었다. - 제 이름과 제 생명을 걸고 지켰습니다. 잘 했다, 나의 아이야. 제7장 Reditus - 귀환 편 끝. ***************************************** + 로마의 휴일 제 8 장 Actium - 악티움 # 1 쾅. " 브린디시움을 출발한 카이사르 미노르의 함대가 이오니아의 토리나를 점령했으니 혜안을 좀 내보시오! " 노장군 아헤노발부스가 탁자를 내리치며 좌중을 돌아보았다. 그의 분노에는 악티움에서 옥타비아누스가 그리스의 절반을 장악하도록 방치해둔 안토니우스에 대한 것도 섞여 있었다. 옥타비아누스가 해군을 이용해 이오니아를 점령했다는 것은 에게 해의 제해권을 절반 가량 잃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자칫하면 해군과 육군으로 포위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 다. 노 장군은 차마 자신의 제자이자 주군인 안토니우스에게 화를 내지 못하고 애꿎은 태우를 향해 눈을 부라렸다. 카피토가 없는 지금, 태우는 안토니우스의 개인 시종이자 호위병의 신분으로 전시 회의실에 들어 올 수 있었다. 물론 첩자일 수도 있다는 의혹과 호위병으로서의 능력을 의심하는 세력들이 있었으나, 일단 우두머리가 좋은 것은 그 불만들을 모두 입 다물게 할 수 있는 것을 증명했을 뿐이었다. " 제법이군, 그 녀석 꽤 하는 걸? 스피키오의 재래같군. " 안토니우스는 진심으로 감탄하고 있었다. 생각보다 빠른 진군과 효율적인 병력이동은 고금에 유래 없이 뛰어났다. 로 마를 위협했던 한니발을 뛰어난 전략, 전술로 막아내었던 스피키오의 언급에 자리에 앉아 있던 장군들의 얼굴이 불편해져갔다. " 스피키오든, 한니발이든 대책을 세워야 합니다. " 카니디우스가 말했다. 그는 안토니우스의 휘하 장수로서 시리아에 주둔해 있다가 안토니우스에 의해 소환되었다. 날카로운 인상의 그는 신경질적으로 토가의 매 듭을 만져 댔다. " 카이사르 미노르는 해전을 원하는 모양이지요? 선전포고에는 내 이름도 들어있더군요. " 이집트의 여왕 클레오파트라는 공작 깃으로 만든 부채를 손에 든 채 오만한 미소를 지었다. " 우리 수군은 해전의 경험이 거의 없습니다. 카이사르 미노르의 해군은 폼페이우스의 해군과 자주 접전 을 치렀던 지라 경험이 풍부하고 노련합니다. 여러모로 아군이 불리합니다. " 이아로스는 조리 있게 해전의 부당함을 설파했다. 대부분의 장수들은 그의 말에 동조하는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안토니우스의 군대는 거의 육군이었 다. 카이사르 임페라토르(쥴리우스 시저)의 해군은 거의 대부분 옥타비아누스이게 승계되었으니 옥타비아누스가 해군 에 강한 것은 사실이었고 안토니우스는 그 출신부터 보병장수가 아니던가. "호오, 나의 수군이 그런 오합지졸에 불과하다는 것인가요? 나의 이집트의 수군이? " " 그런 것은 아닙니다. 비하의 뜻은 없었습니다. " " 어쨌든 육지에서의 전황이 불리해 진다면 해군이 상륙해 언제 뒤를 치게 될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 이아로스와 클레오파트라 사이의 기류가 심상치 않자 스카우루스라고 했던 장수가 급히 화제를 돌렸다. 적절한 타이밍이었지만 급조한 의견의 전제가 육군에서 밀릴지도 모른다는 것이었기 때문에 아헤노발부스의 눈총을 샀다. 그는 노장군의 눈총에 그저 사람 좋게 웃어 보였다. " 육지에서든 해상에서든 장기전이 된다면 옥타비아누스가 불리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스를 장악했다하더라도 완전한 것은 아니고, 그리스가 전장이 되다면 소아시아 북부나 아르메니아에 있는 아 군의 지원이 가능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해전이라면 저희도 위험을 감수해야 할겁니다. 육 전이라면 장기전이 되겠지만 해전 이라면 단판승부입니다. " 리키리우스가 신중하게 그들의 전략적 이점과 약점을 설명했다. 장수들은 이래 저래 고심하기 시작했다. 적장의 선전포고를 무시하자니 명예가 실추되는 것이고 불리한 싸움을 받아들이자니 내키지 않는 불편한 심정 들이었다. 안토니우스는 그런 장수들을 돌아보고 자뭇 상쾌하게 웃으며 선언했다. " 이러나 저러나 언젠가 바다 위에서든 땅 위에서는 만나야 할 상대다. 어느 곳에서 먼저 만나는 것이 무엇이 그리 중요한가. " " 당연히 중요하지.............요. 장군........님. " 쭉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드디어 한 마디를 했던 퀸투스는 생략된 경칭 때문에 아헤노발부스의 째림을 받고 말을 늘렸다. 아헤노발부스는 카이사르의 측근이자 안토니우스의 사부쯤 되는 사람이라 이 회의에선 가장 연장자였다. 그의 고지식함 과 올곧음에는 어쩐지 퀸투스도 당해내지 못하는 것 같았다. " 그 걸 지금 말이라고 하십니까! 내가 뭐라 가르쳤습니까! 내 누누이 승리의 삼 요소란 사람과! 장소와! " " 운이라고 하셨죠. " 아헤노발부스의 노성에 안토니우스는 장난스레 웃으며 답했다. 그의 미소에 노장군은 약한 것 같았다. 끙하는 신음소리와 함께 그는 고개를 휘휘 저었다. " 흠. 육군은 온전하게 보전해야하니 해전도 그리 나쁘지만은 않은데...... 운이 따라 주는 것이 문제로군. " 퀸투스는 이아로스와는 의견이 다른 모양이었다. 퀸투스는 어쩐지 육군의 희생을 꺼리고 있었다. 그 것은 안토니우스도 마찬가지. 어째서? 무엇인가 기억이 나려 했지만 뭐에 막힌 듯 기억이 나질 않는다. 악티움 해전. 해전은 도박이다. 모든 것을 거는. 태우는 안토니우스의 선택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당신은 해전을 선택하는가. 당신의 가슴을 파먹고, 그의 가슴이 좀먹게 한 이 저주받은 운명의 전쟁을 더 이상 길게 끌고 싶지 않은 것이 당신의 생각이겠지. 하지만. 정말로. 하지만 나는 당신이 살아주었으면 좋겠어. 안개에 쌓인 듯한 태우의 머릿 속은 복잡해져갔다. 클레오파트라를 바라보는 태우의 눈이 점차 가라앉았다. " 바다에서 싸움을 걸어왔다면 바다에서 받아들여야 하는 법이겠지 ! " 안토니우스가 과장되게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 그 모습에 슬프면서도 이상하게 안도가 되었다. " 내게 60척의 함선이 있으니 시저의 것보다 많아요. " 클래오파트라가 손에 든 공작깃의 부채를 가볍게 흔들면서 안토니우스를 향해 고혹적인 미소를 지었다. " 호오, 나와 함께 가겠단 말인가? " " 나 역시 이집트의 여왕, 당신과 동등한 자리에서 그의 선전포고를 받았어요. 그 대의 왼쪽은 나의 자리가 아니던가요? " " 안 되실 말씀! " " 안 돼! " 노장군의 노성에 뒤이어 새된 목소리가 방안에 울려 퍼졌다. 자신도 모르게 안토니우스의 토가 자락을 뒤로 잡아끌고 말았다. " 테리우스? " 자신도 모르게 입밖으로 튀어나온 말 때문에 당황했다. 두 눈으로 부정의 뜻을 전했다. 안토니우스는 그저 알았다는 듯이 담담히 눈으로 괜찮다고 전하고 있어서 그만 다시 그 손을 태우는 놓 고 말았다. " 방금 그대가 이 이집트의 여왕의 의견에 정면으로 반대를 한 것인가? " 갑작스러운 클레오파트라의 물음에 회의실 안에 있는 눈동자가 모두 태우를 향했다. 그 많은 눈동자들 중에 마주하고 있는 것은 단 두 개의 흑갈색 눈동자. 한 나라를 손에 쥐고 있는 그녀의 시선은 형용할 수 없는 기품과 기도가 있었다. 성숙한, 그리고 우아함을 잃지 않은 관능미. 그 아름다움에서 묻어나는 여인의 잔혹함. 가까이서 바라본 그녀는 정말 아름다웠다. 지나치게 높은 코는 오히려 얼굴의 조각미를 더했다. 아름다운을 인식하는 것과 그 아름다움에 끌리는 것은 별개의 문제. 보통의 남자라면 한 번쯤 흔들릴 듯한 여신의 미모인데도 일단 태우는 남자의 매력을 더 사랑하는 이반 이었기에 그녀의 아름다움에 좀 더 냉정해 질 수 있었다. 움추렸던 것도 잠시, 탐색하듯 그를 훑어보는 그 오만한 시선을 회피하지 않고 태우는 마주 볼 수 있었다. 예전에 혜준의 누나와 만났던 기억이 새삼 힘이 되었다. 여자의 꽤 뚫는 듯한 그 시선에는 이미 면역이 되어 있었다. 혜준의 누나는 화살처럼 시선을 쏘아 보냈었다. 연민과, 동생과 그에 대한 기묘한 애증을 담고 인정을 할 수 있지만 이해가 어렵다고 하였다. 그녀는 시선을 떨어뜨리는 자신에게 지금 이 자리에서 그녀의 시선을 마주하지 못할 것이라면 평생 어떤 사람의 시선 에서도 당당하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시선을 돌리지 않고 당당하게. 태우는 팽팽하게 밀려오는 여왕에 기세에 맞섰다. " 이집트의 여왕 앞에서 고개를 빳빳히 들고 맞서다니! " 여왕에 뒤에 시립해 있던 호위대장쯤으로 보이는 사람이 태우를 향해 소리쳤다. 이집트어 였기에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충분히 뜻은 전달되었다. 그래서 일단, 사실 그다지 예를 차리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지만 태우는 스님들처럼 합장한 채로 허리를 가볍게 숙였다. ".............본 적이 없는 인사법이로군 " " 테리우스의 고향의 인사법이라고 합니다. " 떨떠름한 목소리로 이아로스가 덧붙였지만 태우는 이 방에 있는 사람 모두가 그 것을 믿지 않을 것이라는 데 자신 있었다. 무릎을 꿇는 것은 절대 하기 싫었다. 슬쩍 눈썹이 올라가는 폼이 확실히 여왕은 자신을 모욕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듯 했다. 확실히, 싫다 여자라는 존재는. 사이에 내 남자가 끼어있을 때는 더더욱 더. " 내 여러 국가의 예을 보았지만 그대와 같은 것은 처음 보는 군. " " 그럴 것입니다. 제가 온 것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마지막으로 당도했던 동녂의 땅, 인더스 보다 훨씬 동쪽의 땅이니까 요. 그는 결국 진정한 오리엔트에 도달하지 못하고 굴복하고 말았던 그 너머 동쪽의 대륙을 지나 넒은 사막과, 천혜의 산맥과, 고고히 달리는 장강을 지나 다시 끝없는 초원을 지나야 당도하는 곳이니까요.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그 세상의 끝에 서겠다는 야망을 이루지 못했지요." 사실 이 말은 알렉산드로스의 후계자가 새운 프톨레마이오스가의 후손인 그녀에게는 모욕이 될 수도 있는 발언이었다. 7개 국어를 하고 이 곳 오리엔트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었어도 저 동쪽 너머에는 이 오리엔트 보다 수 배는 넓은 평야가 있고, 고향 땅의 조상들은 그 땅을 달리며 진짜 '대륙'을 호령했단다가 아니라, 앞으로 할 예정이다. 지금은 기원전 1세기니까. 고구려는 그녀가 다스리는 이집트의 땅보다 더 넓은 초원을 달릴 것이다. 배달의 민족. 단군의 자손. 쑥과 마늘............ 태우는 자신감을 가지고 그녀를 바라봤다. 오만한 클레오파트라의 표정이 조금 흔들린 듯 했고 안토니우스조차 놀란 것 같았다. 이 곳에 오고 나서 단 한 번도 한국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적이 없으니 그들이 놀라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방안의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의 말을 반신반의하는 듯했다. " 어째서 그대는 나의 출정을 반대하는 거지? 나의 귀가 잘못되지 않았다면, 그대는 분명 안 된다고 하였어. " "................" 부담스러운 시선들이 태우를 향해 있었다. 태우는 클레오파트라의 거듭된 질문에 잠시 침묵을 지켰다. " 이유를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 " 이런 무례한! " " 테리우스! " " 아니 자네 그게 무슨 말인가! " 이집트의 장군의 노성과 당황한 아헤노발부스의 음성까지 태우를 향해 날려들었다. 하지만 정말 태우는 이유를 말할 수 없었다. 그 이유를 말한다면 그가 살아남는 것은 불가능했다. 전투에 임박하여 그 승패를 점치는 자가 패함을 말한다면 그는 반드시 교수형에 처해지고 말 것이다. 그 패배의 실마리를 가진 것이 여왕이라면? 태우는 클레오파트라가 악티움의 해전에서 하는 행동을 알고 있었다. 역사가들은 그녀의 행동에 대해 갖가지 추측을 하곤 했다. 태우는 그들 보다 사실적이고 확실한 추론에 다다를 수 있었다. 이집트의 여왕이라면 승패의 두 가지 길에서 이집트가 살아남는 방법 모두를 생각할 것이다. 당신은 해전의 결과가 어찌되었든 안토니우스가 육전에서 승리를 거둘 것이라고 믿고 있는 거겠지. 그녀는 안토니우스를 사랑했지만 평범한 아낙의 신분이 아니었다. 여왕으로서 그녀는 냉정하고 이지적인 군주라고 안토니우스는 감탄하곤 했었다. " 재미있군, 이집트의 여왕의 명령에도 말하지 않을 텐가? " 그녀의 고혹적인 미소의 온도가 빙점을 향해 떨어지고 있었다. 이집트에는 눈이 내리지 않는다지만, 지금 그녀의 눈에는 우박이라도 내릴 기세였다. " 저는 흰 달의 인도로 이 땅으로 왔습니다. 하늘의 율법은 지상의 율법 위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 비행기를 흰 달로 비유한다면 태우는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분명 비행기의 추락사고로 고대의 로마로 왔으니까. 뒤의 말은 함무라비 법전이 상징하고 있는 바다. 함무라비 대왕은 법전을 만들면서 하늘에서 받은 것이라고 적어놓고 있으니까. 그녀가 아무리 여왕의 권위로 위협을 하여도 일단 '신의 사자'라고 사칭하고 있는 이상 클레오파트라는 태우를 핍박하기 어려웠다. 그가 말하기를 거부하는 것이 신의 뜻이라면, 여왕일지라도 그의 말을 들을 수 없었다. 태우는 안토니우스에게 듣지 않아도, 자신이 클레오파트라에게 위해를 당할 수 있다고 짐작하고 있었다. 아니, 자신이 그녀의 입장이라도 충분히 그럴 것 같으니까. 항상 안토니우스가 곁에 끼고 있는 터라 클레오파트라가 직접적인 손을 쓰기는 어려웠다. 회의에서 그녀의 말에 반기를 든 것은 분명 실수였고 그녀에게 기회를 제공하는 꼴이 되었다. 안토니우스의 권위와 보호 안에서 안전하리라는 보장도 없다. 그가 전장에 나가면 태우는 언제든지 암 살자의 표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태우는 약간의 거짓을 섞더라도 자신의 위치를 부각시킬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곳은 고대다. 여전히 바다의 밀물과 썰물이 포세이돈이 몸을 일으켰다 누워서 생기는 현상 인 줄 알고 있는 고대. 신화가 곧 역사이며, 신화가 곧 지식이요, 신화가 곧 사상인시대. 태우는 그 점을 이용하기로 했다. 어짜피 현대로 돌아갈 수 없다면. 그가 고대로 떨어진 것이 정말로 운명이고 신의 뜻이라면. 충분히 이용해주자. 작은 욕심을 부려보자. 손을 내밀어 잡아보자. 태우는 책과 영화, 그림 속에서만 보아왔던 여인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지금 현실로 눈앞에 있었다. ' 신의 사자라고? ' 페르시아나 시리아의 왕족이라고 짐작했었지만 그는 전혀 다른 색다른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많은 교육을 받고 문화를 겪은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지혜의 향기를 가지고 있었다. 고귀한 태생으로 짐작되지만 그의 출신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었다. 단지 안토니우스의 주변에서 그가 다이아나의 사자라는 소문이 돌고 있을 뿐이었다. 사실일까? 의혹 스러운 눈으로 클레오파트라는 검은 머리의 그를 살펴보았다. 그가 신비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그녀의 정보원들이 알려주기도 했다. 그가 신의 사자인지, 아니면 정말 다이아나의 신관인지 알 수 없었지만 한가지 분명한 사실을 총명한 클레토파트라는 눈치챌 수 있었다. 그는 그녀에게 용서를 빌지 않았다는 것. 그녀의 요구를 신을 내세워 거절했다는 것. 신의 이름을 내세웠기에 클레오파트라는 물러설 수 밖에 없었다. 물러서지 않는다면, 그녀는 로마의 12주신의 이름에 거역하는 꼴이 되었다. 영리한 사내였다. 그가 만약 그녀에게 용서를 구하였다면 그녀는 그 댓가를 요구할 수 있었다. 그것은 그의 눈 일수도, 그의 혀일 수도, 그의 귀일 수도 있었다. 그는 당당하게 자신은 신의 사자이므로 치외에 서 있음을 명시 했다. 핑계를 대거나, 눈에 보이지 않게 해치울 수는 없겠다고 클레오파트라는 생각했다. " 호호, 이유를 말할 수 없다니, 나의 출전을 막을 수도 없겠군. 아무리 신의 뜻이라지만 인간들의 우매함으로 그 뜻을 곡해한다면 신의 말씀은 아니 들은 것만 못하겠지. " 그녀는 태우에게 다시 한 번 고혹적인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생각은 이미 알고 있었다. 태우는 그런 그녀에게 그의 생각을 말했다. 그녀가 어떤 선택을 하던 간에 태우는 클레오파트라의 결정을 되돌리고 싶었다. 우려했던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진정으로 바랬다. 자신의 뜻을 그녀가 잘 이해하기를 빌었다. 그녀는 총명한 여왕이니까.... "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오, 죽고자 하면 살 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꼭 명심하세요. 사자 무리의 우두머리는 아무리 어린 숫사자라도 살려두지 않는 법입니다. " 한 참을 클레오파트라와 태우의 시선이 허공에서 교차했다. 그녀의 차가운 눈이 거센 불길을 품고 그를 응시했지만 태우는 담담하게 그 시선을 맞받아쳤다. 미세하게 변한 그녀의 표정을 읽을 수 있는 것은 태우 뿐이었다. 그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는 것 역시 그녀 뿐이었다. # 2 " 감히 이 내게! " 챙그랑. 하는 소리와 함께 이즈미르산 유리 화병이 산산조각이 나서 깨어졌다. 차르미안은 맨발로 방안을 서성이는 여왕의 발에 파편이 하나라도 밟히는 날에는 그녀가 죽은 목숨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손바닥에 파고드 는 유리조각을 무시하고 방안에 흩어진 조각을 치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시녀장인 아이러스 조차 클레오파트라의 서슬에 쥐 죽은 듯이 있었다. 클레오파트라의 젖형제이자 유모의 딸이기도 한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라 누구보다도 여왕의 심 기를 이해하는 유일한 존재였다. " 하지만 어떻게? " 클레오파트라는 주위를 신경질적으로 둘러보았다. 유리조각을 치우는데 여념이 없는 차르미안은 항상 자신의 곁에 있었지만 그녀의 속내를 들추어낼 베짱도 짐작해낼 영민함과는 거리가 있었다. 아이러스는 그녀의 분신같은 존재였다. 그녀의 깊은 눈동자에서는 오로지 여왕에 대한 걱정만 이 묻어있었다. 그녀의 사자들 역시 그녀의 비밀스런 서신들을 건네기는 했으나 그 내용을 알리 없고 또한 타인의 손에 들어갔을 리 없었다. 아니 그런 것을 떠나서 클레오파트라는 자신의 속내를 그 누구에게라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심중에 간직했던 일을 그는 정확히 짚어내고 있었다. 그녀는 이집트의 여왕이었다. 안토니우스의 승리를 누구보다도 바라고 기원하지만 만약을 생각해야만 했다. 그녀는 적어 두었던 밀서의 봉인을 확 인했다. 어디에도 뜯겨진 흔적은 없었다. 밀서 안의 내용을 아는 것은 오직 그녀 혼자였다. 하지만 그는 그 것을 알고 그녀에게 경고를 했다. 클레오파트라는 망설이지 않고 밀서를 화로에 집어 던졌다. 밀랍이 녹는 냄새가 방안에 진동을 하였다. ' 어떻게?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하였는가? '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요, 죽고자 하면 산다? 무리의 숫사자는 다른 숫사자를 용납하지 않는다? 다른 숫사자? 그녀는 왜 자신이 옥타비아누스에게 밀서를 보내려고 했는지 결심했는가에 생각이 멈췄다. 만약 안토니우스가 패한다면 이집트는 멸망할 것이 불을 보듯 뻔했다. 그 것을 막기 위해, 만약을 위해 클레오파트라는 옥타비아누스에게 교섭을 할 수 있는 이유를 만들고자 하였다. 안토니우스가 패배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과는 다른 그 어떤 군주로서의 의무가 그녀에게는 있었다. 이집트의 왕가를, 자신의 아이들을 살리기 위해. ' 무리의 숫사자는 다른 숫사자를 살려 두지 않는다. ' 그녀는 문득 깨달았다. 그랬다. 로마의 지배자는 카이사르의 후계자였다. 로마에 카이사르라는 이름은 둘일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작은 카이사르. " 카이사리온은 어디에 있느냐? 카이사리온을 내게 데려오라! 어서 그 애들 데려와! 카이사리온!! " 여왕의 신경질적인 외침에 놀란 시녀들이 엎드려 절했다. 유리 조각을 치마 자락에 집어넣고 있던 차르미안은 여왕의 서늘한 시선에 부딪치자 황급히 엎드렸다. " 마마, 왕자전하께서는 이미 침수 드신 줄 아옵니다. 그만 진정하시옵고 심신을 편히 다스리소서. " 아이러스가 조심스레 진언을 올렸으니 클레오파트라는 그 것을 무시하고 더 큰 소리로 카이사리온을 불렀다. " 카이사리온! 아니, 내가 직접가야겠다! 어서 차비를 놓아라! " 클레오파트라는 후원 뒤쪽에 있는 아이들의 거처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 넓지 않은 정원을 지나면 바로 아이들의 처소인데, 그 거리가 멀게 느껴졌다. 그녀는 젊고 아름다웠지만 이미 네 아이의 어머니였다. 그녀는 여인이었지만 여왕이었고 어머니였다. ' 카이사리온! ' 그녀는 아이들을 사랑하였다. 막내 아이에게는 아폴로의 별명을 이름으로 줄만큼, 쌍둥이 남매에게는 해와 달의 이름을 지어 줄만큼 그녀의 아이들은 고귀하였고 사랑스러웠다. 하지만 그녀는 그녀의 후계자는 단 한 명의 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작은 카이사르라는 뜻을 가진 이름의 아이. 나의 카이사리온. 어미의 배속에 들어섬으로서 어미의 목숨을 구원하고 아비의 죽음에서도 어미의 목숨을 구하였고 영광의 자리를 어미에게 가져다줄 사랑스러운 그녀의 장자. 누가 뭐라고 하든 이 아이는 그녀의 적자였다. " 카이사리온! " " 으음? 어마마마? " 늦은 밤 갑작스러운 어머니의 방문에 잠에 들었던 소년이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열 여섯 살의 소년은 이제 제법 남자의 티가 났다. 어머니를 꼭 닮은 흑갈색의 눈동자는 잠에 취해 있었지만 그 미모를 숨기지 않았다. 지나칠 정도로 아름다운 소년은 어머니의 절색을 물려받았다. 곧은 콧날과 반듯한 이마는 어딘가 로마의 장수를 연상시키는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작은 카이사르, 이름처럼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유일한 친자인 카이사리온이었다. 옥타비아누스가 카이사르의 후계자로 지명되는 바람에 로마에서는 '서자'로 불리는 이집트의 왕자였다. " 아아, 나의 작은 종달새! 카이사리온. 나의 아들. 너는 내가 지켜 줄 것이다. 너의 머리에 오리엔트의 왕관을 로마의 독수리의 문장을 네 손에 들려 줄 것이다. 내 모든 것을 걸고 너에게 영광의 자리를 줄 것이야. 나의 아가야! " " 어마마마? " 갑작스레 자신을 깨우고 품에 안는 어머니의 행동에 카이사리온은 놀랐다. 단 한번도 카이사리온은 이런 어머니의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무슨 일이 계셨는가? 최근 어머니의 심기가 불편하다는 것과 그 이유가 계부의 남창때문이라는 소문을 들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알기로 그녀의 어미는 그런 사소한 일로 흐트러질 여인이 아니었다. 제법 어른스레 카이사리온은 어머니를 꼭 안고서 손으로 매끄러운 어머니의 등을 조심스레 쓸었다. " 그 누구라도 너를 절대 헤하지 못하게 할 것이다. 나는 이집트의 여왕이며, 태양의 왕자의 어미이니라. " " 네, 어마마마. " 카이사리온은 어머니를 향해 고개를 크게 주억거렸다. 희미하게 큰 전운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카이사리온은 알고 있었다. 그 것이 강철같던 그의 어미를 불안하게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곧 치러질 전투에서 이집트의 운명이 판가름 날 것이다. 자신의 운명와 어미의 목숨이 달린 전투가 다가오고 있었다. " 어마마마, 어머니는 아몬 라의 안주인이시며 나일의 여신이십니다. 저는 위대한 파라오가 되어 지중해를 어머니의 치마 속에 던져드릴 것입니다. " " 아아, 내 아기, 나의 카이사리온! 태양의 아들이여! " 그는 어머니에게 단 한번도 내색하지 않았지만 로마를 증오했다. 자신의 미래가 양쪽으로 갈라진 로마의 전쟁 속에 있다는 것이 치욕스러웠다. 자신은 태양의 왕자인데, 그의 친부는 그의 어미와 자신을 인정하지 않고 버렸다. 카이사리온은 그의 자리를 빼앗은 그의 의형인 옥타비아누스도, 그의 계부인 안토니우스도 증오했다. 계부와 꼭 닮은 그의 친동기들까지도 카이사리온은 외면했다. 어머니가 계부에게 교태로운 미소를 지을 때, 계부의 손이 어머니의 우윳빛 피부에서 미끄러질 때, 카이사리온은 피가 거꾸로 솟는 듯한 살의에 휩싸였다. 그녀의 어머니는 아름다웠다. 세상의 어떤 여인보다도 고귀하고 아름다웠다. 카이사리온은 어머니의 가슴에 더욱 얼굴을 깊이 파묻었다. 아찔한 사향의 냄새가 그의 후각을 자극했다. 카이사리온의 혀가 조심스레 클레오파트라의 유방을 핥았다. 놀라서 몸을 빼려는 어머니를 강하게 안고서 카이사리온은 봉긋 솟아오른 유두를 혀로 돌리며 장난치듯 깨물었다. " 카이사리온? 그만.........하읏............." 어머니의 등을 둘렀던 손을 앞으로 가져와 흰 복숭아처럼 탐스러운 유방을 만지면서 카이사리온은 계속해서 유두를 빨아대었다. 어린 아이처럼 카이사리온은 젖을 빨았다. 더 이상 클레오파트라의 젖에서는 자신이 마셨던 꿀물이 나오지는 않았다. 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카이사리온은 낮게 신음했다. 가슴에 무너지듯 쓰러지는 아들의 머리를 클레오파트라는 부드럽게 감싸안았다. 낮은 허밍으로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왕가에서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축복의 노래를 불렀다. 카이사리온은 어머니를 품에 안고 깊이 파고들었다. 여전히 사랑스러운 어린 아이이다. " 어머니.......... 어머니.........."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을 농락하는 자들은 절대 용서하지 않겠습니다. 카이사리온의 눈이 범상치 않게 번득였다. ' 안토니우스여! 너는 내 어머니를 모욕한 대가를 받게 될 것이다. 옥타비아누스여! 네게 빼앗긴 진정한 권리를 되찾을 때, 너는 더 없는 치욕을 겪게 해줄 것이다.' 그는 작은 카이사리온, 이집트의 여왕 클레오파트라의 어린 아들이었지만 로마의 위대한 장군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유일한 아들이기도 했다. 그는 더 이상 어린 종달새가 아니었다. 그의 머리 속에는 계부와 의붓 형의 종말에 대한 그림이 서서히 그려지고 있었다. . . . " 정말 여왕과 함께 가시렵니까? 무슨 수를 꾸미고 있을 지도 모르는데 너무 위험합니다. 차라리 이집트의 함대를 후방으로 배치하시지요! " 아헤노발부스는 다시금 안토니우스를 설득하러 찾아왔다. 며칠 째 계속되는 방문, 며칠 째 지루하게 이어지는 똑 같은 대화 내용. 어느 한 사람이 질려 버릴 때가 되었지만 노장군의 고집도 만만 치 않았다. 안토니우스는 그저 빙그레 웃을 뿐이었다. " 아헤노발부스, 그녀는 이집트의 여왕입니다. 당연히 그녀의 의무를 다해야지요. 나는 그녀에게 아내로서의 의무를 요구한 적은 없습니다. 군주가 된 자로서 여왕은 분명 훌륭합니다. 그녀는 여왕으로서 참전하는 것입니다. " " 그러니 더더욱 아니 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남동생을 실각시키기 위해 임페라토르(쥴리어스 시저)를 이용하지 않았습니까! " 아헤노발부스는 카이사르의 친우이자 측근이었다. 그는 그 시절부터 클레오파트라를 못마땅하게 생각하였고 지금 안토니우스 곁에 있는 것은 더더욱 싫어했다. " 제가 그녀에게 이용당할 것이라고 보십니까? 그리고 파테르(시저)는 그녀를 진정 아끼셨습니다. 총명한 여인이니까요. " " 으음... 안토니우스......." 아헤노발부스는 마음에 안드는 듯 눈썹을 실룩였다. 안토니우스는 그런 노장군을 보고 작게 웃었다. 안토니우스는 아헤노발부스에게 붉은 포도주가 찰랑이는 잔을 내밀며 말했다. " 오늘은 제 이야기를 들어주세요. 클레오파트라의 이야기는 그만 하시구요. 제 부탁을 들어주십시오. " " 말씀하시오. " " 군단을 이끌고 이탈해 주세요. 이미 티티우스와 소시우스는 군단을 이탈했습니다. " " 그게 무슨 소리오! 그 놈들이 감히 배신하였다는 게요! 내 당장 군영을 떠나 이놈들의 목을 가져오리다! " 아헤노발부스는 더 이상 들을 것도 없다는 듯이 벌떡 일어나 방안을 나가려고 했다. 노인장이라 말귀가 어두웠는가 하고 안토니우스는 작게 한숨지었다. 자신은 '추격' 이 아니라 '이탈'이라고 했다. 그런 노장군의 손을 잡아 자리에 앉힌 안토니우스는 심중에 지녔던 말을 꺼냈다. " 그게 아닙니다. 스승님. 그 녀석들을 쳐달라는 것이 아니에요. 옥타비안에게 가주세요. "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아헤노발부스의 눈동자가 화등잔만하게 커졌다. 놀란 그는 카이사르 사후 안토니우스의 휘하로 들어가 면서 단 한번도 쓰지 않던 하대를 하고 있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 무슨 뜻이냐? 그게 무슨 말이야? 너 무엇을 하려는 게냐? " 아헤노발부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안토니우스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그의 눈동자는 믿을 수 없다는 빛이 가득 떠올라 있었다. " 약속해주세요. 스승님. 부족한 제자의 마지막 부탁입니다. 저를 떠나 옥타비안에게 항복해주세요. " " 마르쿠스! " " 지중해의 패자가 되는 것은 제가 아닙니다. 파테르의 뜻도 그러하셨지요. 당신도 잘 알고 계시잖아요. " 그랬다. 잘 알고 있었다. 누구보다 절친했기에 그의 속내를 알고 있었다. 카이사르가 안토니우스를 친아들처럼 여겼다는 것을, 그 후계로 다른 사람을 점찍었다는 것을. 그리 쉽게 세상을 떠날 것이라고 스스로 생각하지 못했던 그는 안토니우스와 자신이 점찍은 후계자가 로마를 세계 최강의 제국으로 발전시킬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아헤노발부스는 카이사르가 하다 못해 5년이라도 더 살았다면 로마의 양분되어 카이사르의 아끼는 두 사람이 서로 칼을 겨누는 비극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 각했다.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의 대부로서 그에게 충성하며 로마의 제2인자의 삶을 살 수도 있었다. 그렇게 증오하는 검 은 손에 쥐지 않고 다시 시를 쓰며 여유롭게 여생을 보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카이사르는 죽었다. 성인도 되지 않은 후계자를 남긴 채. 로마는 제2인자였던 안토니우스와 후계자 옥타비아누스를 중심으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안토니우스는 원래 카이사르가 살아서 해야했던 일들을 홀로 하기 시작했다. " 카이사르. 난 그 친구를 존경했고 진정으로 따랐다. 그가 품기에는 지중해는 너무 좁은 호수였지. 그 사내가 너를 진정으로 아꼈다는 것을 알아. 그 친구 덕분에 나는 너를 제자로 맞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난 아직도 그 친구를 원망한다. 후계자의 자리는 네 것이었어. 너는 명실공히 지중해의 2인자였다. 그 어린 아이의 자리가 아니야! 너는 요구해야 했다. 네 권리를 요구해야했어! 네가 아무리 광인처럼 돌아다녀도 나를 속일 수는 없다. 네게 검을 쓰는 법, 싸움에 이기는 법, 군사를 다스리는 법, 모든 것을 가르친 것이 나다. 네가 하는 행동 하나 하나가 옥타비안의 권좌를 위한 포석이었다는 것을 이 내가 모를 줄 알았느냐? 차 라리 클레오파트라의 치마폭에 정신을 놓고 지중해의 패권을 탐하기를 내가 얼마나 기원했는지 너는 아느냐? 그런데 지금 네가 나에게 떠나가라 하느냐! " 피를 토하며 외치는 스승의 말이 비수가 되어 안토니우스의 가슴에 박혔다. 어리석은 제자를 사랑하여 시궁창마저 마다하지 않고 뒤를 지켜준 은혜로운 그에게 배은망덕한 짓을 하 고 있다는 것을 안토니우스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스승이 자신의 승리를 바라듯이 안토니우스는 그의 승리를 바랬다. " 스승님. 압니다. 당신의 심정을 저도 압니다. 저도 바라고 있습니다. 스승님보다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오래 전에 맹세를 했습니다. 그 애의 검이 되겠노라 그리 약조하였습니다. 저는 그 애가 월계관을 쓰고 권좌에 오르는 것을 보고 싶습니다. 그 애 발에 제 피가 밟혀져도 저는 그 것을 바랍니다. 제가 지나온 길에 남겨진 해골과 제 손에 가득한 피는 이미 지울 수 없는 저의 죄입니다. 스승님. 지중해는 제가 품기에 너무 좁은 곳이 아닙니까? 그러니 옥타비안에게 주렵니다. " 가볍게 웃는 그의 모습은 눈이 부셨다. 카이사르, 이 나쁜 사람아. 아폴로의 현신이라고 불리던 총명하고 어진 사내의 손에 자네는 어찌 검을 쥐어 주었는가. 이 모자란 녀석에게 그리 큰짐을 남겨놓고 자네는 그리 쉽게 가버렸는가. 이 죄 많은 사람아. 그러고도 자네는 그리 쉽게 레테의 강이 건너지던가. "................" 노장군의 눈에 굵은 눈물이 맺혔다. " 이 천치같은 사람아. " " 네, 저는 천치입니다. " " 이 바보같은 사람아. " " 예, 저는 바보입니다. " " 이................" 더 이상 노장군은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그의 제자는 이렇게 어리석고 바보 같은 사내였다. 검이니 전쟁 따위는 가르치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멍청한 시인으로 살게 내버려뒀어야 했다. 저 푸른 눈에는 피에 젖은 모습 따위는 어울리지 않는데. 카이사르, 자네는 이 친구를 거두지 말아야 했어. 자네는 이 친구를 그저 아폴로나우스로 살게 두어야 했어. 이 어리석고 욕심 많은 친구야. " 옥타비안을 잘 보살펴 주세요. 당신이 계시면 다른 군사들의 반발도 적겠지요. 더 이상의 전쟁이 없게 해주세요. 부탁드립니다. 스승님. " " 지금은 가지 않겠네. " " 스승님! " " 나도 그것만은 양보할 수 없네. 악티움에는 나도 가겠네. 그 후에 떠나겠네. " 안토니우스의 대답도 듣지 않고 아헤노발부스는 군율에 맞는 인사를 남기고 방안을 떠났다. 돌아서는 그의 등이 왜소하고 작게 보여 안토니우스는 안쓰러움과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홀로 남은 안토니우스는 남은 포도주를 입속으로 털어 놓았다. 달이 눈이 부시게 밝았다. # 3 "카이사르의 후계자인 옥타비아누스입니다. 백부가 당신께 맡긴 유산을 가지러 왔습니다." 이제 어린 아이가 아니니까, 옥타비안은 얼굴이 달아 오르는 것을 느끼며 최대한 의젓하게 말했다. 안토니우스는 의자에서 일어서지도 않고 위아래로 그를 훑어보고는 엷게 미소지었다. 1년 만인가? 그는 여전히 아폴론 신이 강림한 듯 아름다웠다. 백부의 부음을 받고 달리는 로마의 길이 너무 길었다. 하루 빨리 안토니우스의 곁에서 그 큰 슬픔을 이기고 싶었다. 백부의 그의 곁에 세워졌던 아늑한 울타리 대신 그의 품안에 서 쉬고 싶었다. 모여드는 사람들이 두려웠고 변해가는 사람들이 두려웠다. 옥타비안은 도망친다는 것도 느끼지 못한 채 도망치고 있었다. "후훗, 이제 몇 살이 되었지? " " 열 아홉입니다. " 정말 모르고서 묻는 것이냐고 옥타비아누스는 반문하고 싶었다. 이 번 생일에 동방에서 만든 특별한 검을 사다주겠노라 장담하던 그였다. 일 년 전 만해도 그의 가슴 팍에 매달려 뛰어 놀았는데 지금 그의 가슴에는 보이지 않는 송곳들이 가득 돋아나 있는 것 같았다. 안토니우스는 창 밖으로 고개를 돌리고 옥타비아누스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말했다. 그는 두려웠고 도망치고 싶었다. 그 길의 끝에는 안토니우스가 있었다. 백부가 암살 된 뒤에 옥타비아누스의 곁에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았다. 그를 만나 백부를 추억하는 사람, 백부의 후계를 노리는 사람, 백부를 살해한 자들 까지고 그의 곁에 모여들었다. 백부가 죽고 나서 그의 삶이 송두리 채 변했다. 사람들이 변했다. 그의 미소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하지만 이전에는 없던 다른 것이 첨가되어 있었다. 반가움과 설레임, 안도감에 쿵쾅거리던 심장이 서서히 느려졌다. "너는 아직도 자신이 얼마나 어리다는 것을 모르는 모양이로구나. 머지않아 알게되겠지, 네가 원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아무런 정치에 대한 경험도 없는 네가 독재관에 자리에 앉다니. 아무리 임페라토르의 유언이라 하더라도 로마는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그.............은......................다..." ' 어째서? 왜 나를 보지 않아? 그 사람들의 말이 사실인가? 당신이 정말 나를 죽일 건가? 안토니우스! 안토니우스! 나는 당신의 옥타비안인데................. 왜 나를 보지 않아...........' 차가운 일갈을 남기고 안토니우스는 의자에서 일어나 내실로 사라졌다. 그가 마지막에 덧붙인 말은 충격을 받은 옥타비아누스의 귀에 전해지지 않았다. 응접실에 홀로 남겨진 옥타비아누스는 손바닥에서 피가 맺히도록 주먹을 쥐었다. 기원전 44년 4월의 어느 날, Idus Martiae(3월 15일- 카이사르가 암살된 날)에서 한 달이 지나고 있을 때였다. . . . " 서신? 안토니우스군에서? " 의아해하는 옥타비아누스에게 마이케나스는 밀서를 내밀었다. 겉봉에는 어떤 표식도 없었지만 파피루스가 분명한 밀서에는 선명하게 태양의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옥타비아누스는 보기 좋은 이마를 가볍게 찡그렸다. " 태양의 문장? 클레오파트라가 보내온 것인가? " 옥타비아누스는 빠르게 내용을 훑어 내려갔다. 시선이 아래로 흐를수록 옥타비아누스의 얼굴이 일그러져갔다. 부들 부들 떨리는 손에 밀서가 사정없이 구겨졌다. 신경질적으로 마이케나스에게 밀서를 던진 옥타비아누스는 그가 들고 있던 포도주잔을 빼앗 아 단 숨에 마셔버렸다. " 도대체 무슨 내용이 길래 그렇게 화를 내는 거야? 어디 보자.... 음? 왜 화를 내는 거야? 이거 기뻐해야 하는 내용 아니야? " 마이케나스는 황당하다는 듯이 옥타비아누스를 돌아보았다. 밀서의 내용은 사실이라면 옥타비아누스에게 대승을 가져올 것이고 거짓이라 하더라도 옥타비아누스가 패할 리는 없었다. 수하가 등을 돌리는 장수에게 지는 것은 절대 생각할 수 없었다. 그는 내일의 승리는 확신할 수 있었다. " 나는 이런 것을 바라지 않아! 이런 더러운 술책이라니! 그 사악한 세이렌이! " 옥타비아누스는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 정신차려! 옥타비아누스! 너는 사령관이야! 더럽고 추악해도 승리를 위해서는 가야할 길이야! 안토니우스의 운이 여기까지 인거야! 아군에게 배신당한 장군을 이용하는 것이 뭐가 어때? 그 자의 운이 다한 거라고! " " 그렇지만 어째서..... 이런 일이..." 어떻게 그를 배신할 수 있는 거지? 어떻게 당신이! 다른 사람도 아닌 그대가? " 이건 전쟁이야. 이번 전투가 모든 것을 결정지을 거야. 옥타비아누스. 기억해. 네가 누구인지. 무엇을 해야하는 지 잊지마. " 마이케나스는 흔들리는 녹색 눈을 마주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그의 주군은 명석하고 영민했지만 가끔 흔들릴 때가 있었다. 그 흔들림이 어디서 기하는 것인지 짐작하고 있지만 마이케나스는 절대 말하지 않았다. 어른이 된지 얼마 되지 않는 그는 여전히 어린 시절을 그리워했다. 행복한 일, 노여운 일, 즐거운 일, 괴로운 일, 기쁜 일, 슬픈 일, 아름다운 일, 안타까운 일, 사랑하는 일, 미워하는 일, 그리워하는 일. 이런 것들을 가슴에 묻으면서 또 한편 잊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 그 것이 당신이 해야할 일. 나의 주군 율리우스 옥타비아누스 카이사르. "..............." 마이케나스의 침묵에 사위가 잠잠히 잦아 들었다. 철썩이는 파도 소리만 방안에 맴돌았다. 일렁이는 녹색의 눈동자 역시 침묵 속에 열기가 가라앉았다. 깊은 숲의 향기를 머금은 눈동자가 이내 밀서를 다시 한번 훑었다. 녹색의 눈동자에 지혜로운 한기가 서렸다.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해야할 일과 해야만 하는 일.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고 되돌아가고 피해갈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람도 잘 알고 있을 것이라고 옥타비아누스는 생각했다. 지금은 전쟁을 해야할 때. 그 동안 피하고 도망치기만 했었지만 이제 더 이상 달아날 곳은 없다. 달아날 수 없다면 가야할 곳은 앞으로 나아가는 것. "........ 내일 해군의 선봉은 아그리파가 맡는다. 모든 전권을 그에게 위임하겠어. 육군은 토루스에게 맡기고 해전이 끝나기 전까지는 교전을 금할 것이다. 밀서에 적힌 내용은 내일 전황에 따라 판단한다. " 사무적인 목소리가 방안에 울렸다. 작지만 거역할 수 없는 힘이 실린 목소리였다. 마이케나스는 주군의 명을 가볍게 읍하며 받아 들었다. " 장군들에게 전령을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 " 그리고......... 밀서에 대한 내용은 우리만 알고 있는 것이다. 소문이 나봤자 사기만 어수선 할 뿐이 다. 단지 안토니우스의 군사들의 탈영이 잦다는 것만 알려. 모두 물러가. 혼자 있고 싶어. " " 알겠습니다. 카이사르 미노르. " 마이케나스가 대답하고 망설이지 않고 방 밖으로 나갔다. 그가 떠나는 것을 눈으로 배웅하던 옥타비아누스는 창문 쪽으로 몸을 돌렸다. 옥타비아누스의 눈에 언덕아래 악티움 곶이 내려다 보였다. 저 언덕 너머 어딘가에 안토니우스가 있을 것이다. 바다에 떨어지는 달빛 속에 그의 얼굴이 웃고 있었다. 환청처럼 낮은 목관 악기와도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 안토니우스! 난 커서 백부님처럼 훌륭한 장수가 될거에요! - 당근과 피망을 먹는다면 그럴 수도 있지. - 윽. 그럼 나 장군같은 거 안해! - 아하하! 최초로 편식하는 로마의 집정관이 나겠는걸? 넌 반드시 세상에서 가장 존엄한 자가 될 게야! 옥타비안, 넌 로마에서 가장 고귀한 사내가 될 거란다. 내가 약속하마! - 내가 존엄한 자가 되면 안토니우스랑 항상 같이 있을 수 있는 거에요? - 그럼, 항상 네 곁에서 너를 지켜주마...아폴론께 맹세하지! - 약속한거야! 항상 같이 있는거야! - 그래, 아름다운 소년, 나의 옥타비안! " 거짓말쟁이......" 존엄한 자가 되어도 그는 곁에 있을 수 없다. 옥타비아누스의 눈동자에 방울방울 물기가 맺혔다. 작게 투정을 부려보아도 투정을 받아줄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새 잔에 포도주를 따랐다. 다른 한 잔에 또 포도주를 따라 단숨에 마셨다. " 나는 당신을 밟고 일어서서.... 존엄한 자가 되겠습니다. 안녕히, 나의 안토니우스...." 옥타비아누스는 손에 든 포도주 잔을 창밖에 흘러버리면서 나즈막히 읊조렸다. .검푸르게 출렁이는 바다는 내일 얼마나 많은 생명과 피를 집어삼킬 것인가. 시리도록 밝은 달이 악티움에 흐르고 있었다. 마치 그 달빛이 산산히 부서져 흐르는 눈물처럼 보여 옥타비아누스는 두꺼운 캐노피를 쳐버렸다. . . . " 카이사르의 후계자인 옥타비아누스입니다. 백부가 당신께 맡긴 유산을 가지러 왔습니다." 안토니우스는 의자에서 일어서지도 않고 위아래로 그를 훑어보고는 엷게 미소지었다. 소년은 1 년 새 키가 부쩍 자라 있었다. 빈혈기가 있어서인지 얼굴이 창백했다. 지친 그의 모습에 안토니우스는 당장이라도 달려가 안아주고 싶었다. 손톱이 파고 들어가도록 주먹을 쥐고 충동을 참아내었다. 후계자니, 전쟁이니, 음모니, 더러운 것들은 감히 접근도 못하게 보듬어 안고 싶었다. 날씨가 어떤지 날짜가 지나가는 지도 모르게 단지 자신의 얼굴만을 바라보게 하고 가두어 놓고 싶었다. 진정 품안에 안고 세상의 아픔에서 격리시켜 아름다운이 퇴색되지 않게 지켜주고 싶었다. 덧없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그러든 하나의 소망. "후훗, 이제 몇 살이 되었지? " "........... 열 아홉입니다. " 분명 자신을 무시하는 물음이었음에도 청년은 그저 당혹스럽기만 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 나약한 신체 속에 꺼지지 않는 불꽃 숨어 있을테지. 아직 붙지 않은 그 불을 지펴야 하는 것이 자신임을 안토니우스는 통감하고 있었다. 손에 쥐고 싶은 기름진 흙빛의 머리칼에, 지중해의 녹빛을 담은 순수한 눈동자에, 당장이라도 탐하고 싶은 입술에, 상아로 세공 한 듯한 그 손으로 내 심장에 비수를 꽂을. 그 고운 심정을 벼러 강인한 검으로 자라게 하는 것이 그가 해야할 일. 돌아가신 주군의 아버지의 마지막 유지인 것을. 아름다운 소년아! ( Pulcher puer! ) 강한 사내가 되어라. 나를 딛고 일어서 세상이 우러르는 그런 사내가 되거라. 안토니우스는 창 밖으로 고개를 돌리고 옥타비아누스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말했다. "너는 아직도 자신이 얼마나 어리다는 것을 모르는 모양이로구나. 머지않아 알게되겠지, 네가 원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아무런 정치에 대한 경험도 없는 네가 독재관에 자리에 앉다니. 아무리 임페라토르의 유언이라 하더라도 로마는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그분은 너무 빨리 세상을 뜨셨다......." '아직은 때가 아니었는데, 10년이라도 하물며 2-3년만이라도 더 살아 계셨다면, 너와 나는 이렇게 만나지는 않았을 테지. 나의 옥타비안.........너는 나와 다른 길을 걷게 될 것이다......' 차가운 일갈을 남기고 안토니우스는 의자에서 일어나 내실로 사라졌다. 보지 않아도 녹색 눈에 가득 찬 물기가 눈에 잡히도록 선명했지만 안토니우스는 뒤돌아 서지 않았다. 기원전 44년 4월의 어느 날, Idus Martiae(3월 15일- 카이사르가 암살된 날)에서 한 달이 지나고 있을 때였다. . . . " 달이 밝은데. 좋은 징조인가? " " 내일은 날씨가 맑겠어요. 달 주변이 깨끗하잖아요. " " 그런 것도 알아? 정말 신기한걸? " " 놀리지 마세요. " 안토니우스는 태우의 무릎을 베고 길게 누워 있었다. 감기에 걸린다며 태우는 극구 반대했지만 두 사람은 바다가 훤히 내려다 보이는 테라스에 침구를 깔고 밤바다와 밤하늘 을 구경하고 있었다. 예전에 할머니가 대청 마루에서 무릎 배개를 해주시면 사르르 잠이 오곤 했던 기억이 나서 태우는 더 이상 거절하지 않고 그의 청을 들어 주었다. 며칠 째 그가 잠 못이루고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터였다. " 정말 아름다운 밤이로군... " "..................." 태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을 쉬지 않고 그의 머리를 빗질해주었다. 곱슬 거리는 금빛 머리에 손가락 사이로 얽히다가 빠져나가 곤 했다. 그 움직임이 기분 좋은 듯 안토니우스는 낮게 웃었다. " 후후, 네가 처음 내 앞에 나타난 날도 이렇게 달이 밝았지. 마치 달빛 속에서 태어난 것 같았어. " " 그랬었나요? " 태우는 그 날의 일을 떠올리며 웃었다. 죽음의 저편에서 시공간을 넘어 그의 곁으로 온 기적이라고 밖에 표현 할 수 없는 일. 황금빛으로 빛나는 그가 정말 태양의 신 아폴론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차라리 그가 정말로 그리스 신화 속의 신이었다면.... 가슴을 콕콕 쑤시는 듯한 아픔을 겪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서글픔이 몰려와 태우의 손이 가볍게 떨렸다. 미세한 흔들림에 안토니우스는 일어나 앉아 그의 검은 눈을 마주 보았다. 자조적인 미소를 그리던 태우의 입술은 따뜻하고 강한 입술에 의해 막혀버렸다. " 으웁!!! " 안토니우스는 완전히 덮어 버렸던 입술을 조금 떨어뜨리면서 태우의 호흡을 도왔다. 숨을 쉬기 위해 잠시 열린 입술 사이로 파고 들어 가볍게 윗입술을 깨물었다. 어깨에 매달린 팔에 힘이 주어지는 것을 느끼며 혀를 움직였다. 태우는 그의 입 속으로 들어온 뜨거운 혀를 가볍게 물면서 손을 올려 안토니우스의 머리를 감싸 안았다. " 하아... 하아... " " 소크라테스는 키스를 ' 마음을 빼앗는 가장 힘세고 위대한 도둑 ' 이라고 했지. 너는 얼마나 많은 내 마음을 훔쳐간 것이지? " 태우의 입술에서 떠나 눈 위로 코 끝으로 새털이 간질이는 듯한 키스의 비가 떨어졌다. " 그런 누명이 어디 있어요. 도둑은 바로 당신이잖아... 당신이야말로 바보에.....천치면서........." 말을 꺼낸 태우는 움찔하면서 고개를 푹 숙였다. 안토니우스는 키스를 멈추고 그의 이마를 태우의 이마에 대었다. 콩소리가 나도록 가볍게 이마를 부딪치며 안토니우스는 장난스레 웃었다. 이마의 통증에 얼굴을 찌푸리면서도 태우는 시선을 들지 않았다. " 쿡쿡... 그래 나는 바보에다가 천치에다가 도둑이기까지 하지, " " ........" 태우는 안토니우스를 말없이 올려다 보다 그를 안았다. 안토니우스는 안겨오는 그를 꼭 안아주었다. 그의 강한 팔이 태우의 등을 감싸 안았다. " 아헤노발부스와의 이야기를 다 들은 건가? " 대답대신 태우는 안토니우스를 안은 팔에 더욱 힘을 주었다. 신비한 검은 눈은 꼭 감고 있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 지 알 수는 없었다. 하지만 모든 것을 알고 있을 테지. 자신의 선택을 이해해 줄 테지. 마지막을 너의 품에서 잠드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신께서 보내 주신 마지막 은총이여.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신비한 검은 눈의 사내. 안토니우스는 밤 바다처럼 어두운 머리를 감싸안았다. 가슴이 저리도록 아파 왔다. 다시는 이렇게 가슴이 아플 날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태우의 눈을 바라보면, 태우의 숨결을 느낄 때면, 태우의 목소리를 들을 때면 항상 가슴 한 켠에 묵직하게 가라앉는 무엇이 있었다.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슬픈 아해. "............그래... 전쟁이 끝나면 동쪽으로 여행이라도 가볼까? " 어두운 분위기를 환기시키려는 듯 점짓 쾌활하게 안토니우스가 말했다. " 네... 같이 가요. " 웃음기 어린 목소리가 작게 대답했다. 안토니우스는 가슴을 적시는 물기를 애써 외면했다. " 그래, 전쟁이 끝나면 너의 고향에 가자. " " 응..." 작은 소리의 대답은 흔들려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태우는 필사적으로 그 넓은 가슴에 매달렸다. 다가오는 시간을 어떻게든 막고 싶었다. 제발 죽지 말아요. 꼭 살아야해요. 제발 죽지 말아요......... " 해전을 하면 안돼요....제발 바다로 가지 마세요! " 태우는 처음으로 안토니우스에게 매달렸다. 그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들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고 역사를 헝클어 놓을지 그런 고민은 생각 할 여를이 없었다. 아니 모든 것을 각오하고 태우는 입을 열었다. 붙잡고 싶었다. 막고 싶었다. 다가오는 결말을 막고 싶었다. 안토니우스는 아무런 말도 없이 태우를 응시했다. 복잡한 빛이 그의 얼굴에서 떠올랐다. BC 31년 9월 2일. 싸움이 벌어진 해역의 이름을 따서 역사상 '악티움 해전'이라고 불리는 결전의 날이 밝아 오고 있었다. # 4 " 아군을 카이사르 미노르의 군대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 너머에 진을 치게 하라. 그 곳에서 는 해전의 상황을 살필 수도 있고 그에 따라 작전을 살필 수도 있을 것이다. 해전의 승패가 갈릴 때까지 육지에서의 교전은 금한다. 해전이 끝나면 재량에 맡기도록 하겠다. 카니디우스, 그대가 육군의 제 1군단을 맡도록 하라! 리키리우스, 제2 군단을 맡아 함께 가도록 하라! 스카우루스, 그대에게 해군의 선봉을 맡긴다. 중군은 내가, 후군은 이집트의 함대가 맡을 것이다. " 아침 해가 서서히 바다를 밝힐 무렵 안토니우스는 장수들을 불러 명령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쏟아지는 명령에 장수들은 긴장한 듯 했지만 빠르게 명령을 수행했다. 아헤노발부스는 안토니우스의 기함에 타기로 했고 이아로스와 퀸투스는 안토니우스의 곁에서 참모를 맡는다고 하였다. 태우는 함께 가겠다고 고집을 부렸고 이아로스가 결사적으로 반대했지만 안토니우스가 가타부타 말이 없어 승선 할 수 있게 되었다. 전함의 출항 준비를 보면서 태우는 앞으로 다가올 전쟁의 결과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두렵고도 두렵고 도망치고 싶었지만 곁에 있고 싶었다. 바쁘게 뛰어 다니는 군인들 그림자 사이로 검은 사신의 낫이 스쳐 지나가는 것 같았다. 불쾌한 상상 속에서 벗어나려 애쓰던 태우는 그의 모습을 차갑게 바라보다 다가서는 그림자가 있음을 눈치 채지 못했다. " 그대가 그 동방의 진주인가? 다이아나의 사자라고 하던데. 사실인가? " 갓 변성기를 거치고 날이 서있는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흠칫 놀라 돌린 시선 끝에는 이집트의 왕족의 복장을 한 소년이 서 있었다. 청년이라고 하기에는 어린 듯 한 그는 오만한 시선으로 태우를 보 고 있었다. " 제가 테리우스 안토니우스인 것은 사실입니다. 말씀하신 별명으로도 불리고는 합니다만. " 누굴까? 십대 후반으로 보이지만 눈빛은 청소년의 그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차가운 파충류의 눈동자. 등골에서 올라오는 한기에 태우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 나는 피러파톨 피로메텔 카이사르 프톨레마이오스. 모두들 나를 카이사리온이라고 부르지. " 카이사리온. 작은 카이사르. 클레오파트라와 율리우스 카이사르사이의 난 유일한 아들. 태우는 예절에 어긋난다는 것을 알면서도 눈을 크게 뜨고 그 소년을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화려한 그의 복장은 평소에 그가 보아왔던 이집트 인들의 일상복과는 거리가 멀었다. 의례적인 장식이 눈에 띄었지만 군복임을 알 수 있었다. " 혹시 전쟁에 참가하십니까? " " 그래, 내 어머니가 참전하신 다기에 아들 된 도리로서 보호를 자청하였지. 계부께서도 무척 기뻐하시더군. " 그의 미소는 클레오파트라의 것과 무척 닮아 있었다. 뿜어지는 저 기세는 여왕에게 물려받은 것이 아니라 카이사르 의 것일 거라고 태우는 생각했다. 여왕은 좀더 우아하고 기품이 있었다. 안토니우스를 향한 적의가 눈에 보이는 살기가 되어 태우의 심장을 위협하고 있었다. " 자네도 계부를 따라 참가한다지? " " 그리 되었습니다. 왕자 전하. " 카이사리온의 눈동자가 기함 위에 서서 지휘를 하는 안토니우스에게 가서 멈추었다. 그의 어두운 눈동자가 순식간에 빛이 번득이는 것 같았다. 그는 더더욱 짙은 미소를 짓고 다시금 태우를 향해 말했다. " 계부를 잘 모시도록 하게. 오늘의 싸움은 우리의 운명을 결정짓는 날이니까. 하하하하 " 낭랑한 미소를 남기며 카이사리온은 태우를 남겨 놓고 이집트의 함선들 중 가장 화려한 자주빛의 돛을 펄럭이고 있는 기함 안 토니아드로 향했다. 그의 뒷모습을 보며 태우는 불길한 생각이 들었지만 그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 . . 우와와! 안토니우스 측은 투석기를 갖고 돌을 쏟아 부었고, 아그리파는 불이 붙은 목탄과 기름 항아리를 던져 서로를 할퀴고 있었다. 함포가 발사되는 소리, 수병들의 외치는 소리, 서로의 배로 뛰어들어 싸우는 병사들의 병장기 소리, 노예들을 독촉하는 소리, 주변은 그녀가 상상도 할 수 없는 지옥의 도가니 같았다. 가장 후방에 있는 안토니아드도 이런 지경인데. 연기에 가려 안토니우스가 있는 전방의 모습은 보이지도 않았다. 클레오파트라는 초조함에 입술을 깨물었다. 육지에서의 전투는 여러 번 참관하였다. 하지만 언제나 그녀는 후방에 있었고 절반은 유흥거리처럼 전투를 지켜보았었다. 하지만 해전은 그녀의 상상과 는 너무나 달랐다. 사방이 검푸른 물살로 포위되어 있었다. 지척에 있는 배가 포격에 침몰하는 것을 보면서 그녀는 새파랗게 질렸다. 잘못하면 이집트의 함대를 모두 잃는 것이 아닌가 걱정되었지만 전방 쪽에서는 안토니우스가 승기를 잡 고 있다는 것이 그녀에게 위안이 되었다. 그녀의 함대는 옥타비아누스의 본 진이 우회하여 안토니우스의 본 대를 치는 것을 막고 있었다. 옥타비아누스의 함대는 아그리파가 전권을 맡아 지휘하고 있었다. 양쪽 함대는 오전에는 서로 대치했지 만 정오 경에 안토니우스 진영의 왼쪽에서 북풍이 불자 대치 상태가 깨어졌다. 안토니우스가 북풍을 타고 그가 지휘하는 좌익을 전진시키자, 아그리파는 후퇴하다가 적의 바깥 쪽으로 우회하려고 시도하였다. 아그리파의 우회로를 막 고 있는 것이 클레오파트라의 60여척의 함선이었다. 이집트의 함대가 있는 길목이 뚫린 다면 안토니우스는 패배는 자 명한 일이었다. 클레오파트라는 시녀들의 만류에도 전황을 보기 위해 갑판을 떠나지 않았다. 이 전투에는 그녀의 모든 것이 걸려 있었다. 그녀의 야망과, 그녀의 생명과, 그녀의 권력과, 그녀의 사랑이 걸려 있었다. " 안토니우스....." 클레오파트라는 연기너머에 있을 그녀의 사랑을 떠올렸다. " 계부가 걱정 되십니까? " 어느 새 그녀의 아들 카이사리온이 곁에 서 있었다. 그는 보일 듯 말듯한 미소를 짓고 있었는데 어머니의 눈에는 그 것이 따뜻하게만 보였다. " 오! 카이사리온, 이 어미를 안아주오. 그대가 곁에 있어 나는 피비린내가 나는 전장터에서 이렇게 서 있을 수 있다오. " 클레오파트라는 그녀의 의자 앞에 무릎을 세워 앉은 자신의 아들에게 팔을 벌렸다. 카이사리온은 어머니를 품에 안았다. 그는 어머니의 어깨 너머로 멀리 진을 치고 있는 옥타비아누스의 함대를 쳐다 보았다. " 어머니, 제 말씀을 들어주셔야 합니다. " " 말해보오, 나의 카이사리온. " 그녀가 고개를 들어 자신을 올려다보는 그녀와 꼭 닮은 눈동자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 이집트의 함대는 침로를 변경 할 것입니다. " " 무슨 소리요? 카이사리온? " 따스한 어머니의 눈동자에서 순식간의 여왕의 눈동자로 돌아선 그녀가 카이사리온의 팔을 잡으며 말했 다. 그녀는 순간 아들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는 따뜻하지만 않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자신을 안은 팔에서 벗어나 려고 했지만 그녀의 아들의 악력은 그녀가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강했다. " 나의 의붓 형에게 밀서를 보냈습니다. 어머니. " " 카이사리온! 네가 배신을 하다니!! " 찰싹. 클레오파트라는 아들의 뺨을 힘껏 내리쳤다. 입가에 한줄기 핏물이 흘러내렸지만 카이사리온은 미소를 잃지 않았다. " 먼저 배신을 한 것은 안토니우스 저자일 텐데요. 나의 어머니. 사랑에 눈이 멀어 나라와 아들을 버리시려는 겁니까? 총명하신 나의 어머니? " " 나는 여왕으로써 나의 의무를 다했음이야! " " 저는 왕자로서 저의 의무를 다할 것입니다. " " 여기서 함대를 돌리면 안토니우스의 함대는 전멸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이집트도 살아남지 못할 거야! " " 안토니우스가 승리한다면 제가 살아남으리라고 생각하십니까? " " 그는 너에게 이집트의 왕좌를 약속했다! 카이사리온! 설마... 너 너의 동생들 마저 해치려는 것이냐? " 클레오파트라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갔다. 그녀의 막내아들은 이제 막 세 돌이 지나고 있었다. " 여왕이 되기 위해 삼촌들과 이모들을 모두 죽이신 어머니의 말씀답지 않군요. " " 카이사리온!!!!!!! " 클레오파트라의 앞에 무릎을 꿇고 있던 그가 몸을 일으켰다. 그의 손짓에 몇몇의 군사들이 시녀들을 제압하는 것이 클레오파트라의 눈에 들어왔다. 눈 앞에 아들이 내미는 손을 외면하면서 클레오파트라는 일어섰다. 쓰러질 것 같았지만 그녀는 이를 악물고 어린 아들을 노려보았다. " 옥타비안이 너를 살려둘 것 같으냐! 사자 무리의 우두머리는 아무리 어린 숫사자라도 살려두지 않는 법이라 했다! 카이사리온! " " 숫사자는 자신의 자식이라도 살려두지 않는 법이지요. 형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제가 그 우두머 리가 되는 수 밖에요. " 카이사리온은 어머니를 향해 그 아름다운 미소를 다시 한 번 지었다. 클레오파트라는 그 미소가 오래 전에 자신을 사막으로 내쫓던 자신의 남편이자 친동생이었던 프톨레마이오스와 닮았다고 생각했다. 아 니 더 이전에 자신을 죽이고 왕비가 되려고 했던 그녀의 친언니이자 같은 이름의 클레오파트라와 닮았다고 생각했다. 아니, 그녀는 자신의 아들이었다. 마치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비춰주는 거울을 보는 것 같아 클레오파트라는 눈을 감았다. 아아, 안토니우스.........안토니우스....... 그녀의 귓가에 함대의 후퇴를 명하는 북소리가 천둥처럼 들려왔다. 아그리파 함선들이 전진하는 이집트의 함선들을 그대로 통과시켜 버리고 있었다. 아그리파가 지휘하는 좌익이 안토니우스의 본대를 거대한 날개로 덮어버리려 하고 있었다. " 이집트의 함대의 움직임이 이상합니다. " " 뭐라고? " 전방을 살피고 있던 이아로스는 다급한 수하의 보고를 받았다. " 이집트 함대 쪽으로 다른 우회병력이라도 있다는 것인가? " 양동작전인가 하고 생각했지만 그러기에는 옥타비아누스의 함대의 숫자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 이집트의 함대는 아그리파 의 함대를 충분히 막을 수 있었다. 다른 지원세력을 생각해봐도 딱히 답이 나오지 않아 이아로스는 수하와 고물 쪽으로 달렸다. 이아로스의 눈에 뿌연 연기 사이로 점점 멀어지는 자주빛의 돛이 보였다. 안토니우스의 이름을 따서 지은 이집트 함대의 기함 안토니아드가 뱃머리를 돌려 빠르게 전장을 이탈하고 있었다. 안토니아드호를 따라 60척의 함선이 후퇴하고 있었다. 한 순간에 후방이 사라지고 있었다. 다른 함선에서도 이집트 군의 이탈을 눈치챘는 지 수병들이 동요하고 있었다. " 제기랄! 그녀가 배신이라고 한 것인가! " 이아로스는 선실을 향해 뛰었다. 안토니우스는 퀸투스, 아헤노발부스 장군과 해도를 살피고 있었다. " 무슨 소란인가? " 지도에서 눈을 떼고 아헤누발주스가 인상을 썼다. " 배들이 후퇴하고 있습니다! " " 후퇴? 적군이? 누가? " 퀸투스가 의아한 듯 물었다. " 이집트 함대가 달아나고 있습니다! " " 뭐!!! " 방 안의 사람은 모두 놀랐다. 다른 장군들이 벌떡 일어나 그의 말을 확인하러 선실 밖으로 뛰어 나갔고 퀸 투스는 선실에 나 있는 조그마한 창에 매달렸다. 안토니우스만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해도를 살피고 있었다. " 안토니우스님! 이집트의 함대가....." " 이미 들어 알고 있다. " 이아로스가 다시 다급하게 외쳤지만 안토니우스는 가볍게 제지했다. 이아로스와 퀸투스는 그가 이미 들어 알고 있다는 것에 놀랐 다. 개전 이 후 안토니우스는 계속 세 사람과 전황을 살피다가 조금 전에 퀸투스와 선실로 들어왔었다. " 안토니우스? " "..................." 안토니우스는 아무 말 없이 해도를 보았다. 그의 손 끝에 옥타비아누스의 함대를 뜻하는 검은 돌이 닿았다. 그 앞에 안토니우스의 군대를 뜻하는 푸른 돌이, 그 뒤로 이집트의 군을 뜻하는 붉은 돌이 놓여 있었다. 그의 손이 붉은 돌을 뒤 쪽으로 치웠다. 안토니우스의 군대는 두 개의 검은 돌과 마주 보고 있었다. 전장에서 멀리 놓여 있던 검은 돌을 손에 쥐고 잠시 그 것을 바라보던 안토니우스는 이집 트 함대가 사라진 빈틈을 채웠다. 안토니우스를 상징하는 푸른 돌은 4개의 검은 돌에 둘러 쌓인 형국이었다. " ...... 이집트의 군선을 따라 후퇴한다. " " 후퇴라니! 다 이긴 전투인데!! " 퀸투스가 분개하여 외쳤다. 이집트 군만 제자리에 지키고 있다면 승리할 수 있는 전투였다. " 곧 후방에 있는 옥타비아누스의 함대가 뒤를 치고 온다. 포위 당해서 사냥당하고 싶지 않다면 이집트 함선을 따라 뒤로 빠져야 해. " 안토니우스의 손은 방금 움직인 검은 돌을 가르키고 있었다. " 전진해서 돌파한다면 승기를 잡을 수 있습니다! 가능성이 있습니다. 전방은 무너지기 직전입니다! " 이아로스는 필사적으로 외쳤다. 그의 말대로 전진하여 돌파하고 육군과 합류한다면 승리할 수도 있었다. 안토니우스는 고개를 저었다. 그는 배수진 을 칠 수는 없었다. 창백한 안색으로 서 있는 검은 눈의 사내가 안토니우스 눈에 들어왔다. 그 검은 눈이 처절하게 외쳤었다. . . " 해전을 하면 안돼요! 제발 바다로 가지 마요! " 한 번도 우기거나 억지를 부리지 않던 그가 자신의 손을 잡고 매달렸다. 그가 파르테아로 떠날 때는 그저 말없이 보내주었던 그였다. 자신의 패배를 알면서도 의연하게 다가오는 시간에 순응했던 그였다. " 무엇을 알고 있는가? " 검은 눈이 흔들렸다. " 그녀가 배신을 해요! 그녀에게 함선을 돌려서는 안 된다고 암시했지만... 하지만 내일 그녀의 함대가 달아나면.... 이집트 군이 달아나면.... 이집트의 함대가 달아나서 크게 패한단 말이에요.... " "........ " 군단 내의 배신세력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그 였다. 그 자신이 수하들의 배신을 부추기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새삼스럽게 이집트 의 배신이 그렇게 놀라운 사실은 아니었다. 그녀는 충분히 그런 짓을 할 베짱과 명분이 있었으니까. 클레오파트라가 배신을 한다. 그녀는 여왕이다. 이집트의 안전을 위해서라면 자신마저 팔 수 있는 여인이었다. 그녀는 곧 이집트요, 이집트가 곧 그녀였다. 그렇기 때문에 안토니우스는 일국의 군주로서의 그녀를 한편으로 존경할 수 밖 에 없었다. 여왕으로서도, 여인으로서도 그녀는 자신을 용서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클레오파트라가 배신을 생각하다 안토니우스는 자신도 그 사실을 짐작하고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태우가 알고 있 는가. 의문이 들었지만 의심은 아니었다. 납득이 되었다. 바람이 왜 부는가, 봄은 왜 오는가에 대답을 할 수 없는 것처럼, 초자연의 원리처럼 느껴졌기에 안토니우스는 그의 이야기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문득 안토니우스는 태우의 말의 시제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태우는 이미 그녀의 배신이 일어나서 자신의 패배를 알고 있는 상태였다. 그는 이미 일어났던 사실을 말하고 있다. 안토니우스는 자신의 심장 부근에 묵직하게 가라앉는 바위를 느낄 수 있었다. 크게 심호흡을 하고 안토니우스는 차마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움직였다. "....... 나는 죽는가? " 입술을 깨물고 필사적으로 고개를 가로 저었다. 머리가 아프도록 몸이 휘청거리도록 가로젓는 얼굴을 양손으로 잡아 그 눈을 마주했다. 안토니우스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운명의 그림자를 읽을 수 있었다. " 이 전쟁에서 나는 죽는가? " 처음 보다는 담담하게 물을 수 있었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 흐흑.... 아니.... 아니에요.. 지금은....아니에요... " 울먹이며 그는 부정을 했고 안도하는 안토니우스의 귓가에 또 다른 이야기가 들렸다. 지금은 아니에요. 그는 분명 그렇게 말했다. 안토니우스는 하데스의 그림자가 지척에 와있음을 알 수 있었다. 무엇인가 계속 말을 하려는 그의 입술을 막고 깊게 키스했다. 그의 영혼까지 빨아들일 것처럼 깊이 입을 맞추었다. 그의 말이 듣는 것이 두려웠다. 치기 어린 호탕함으로 그 두려움을 쫓는 것만이 안토니우스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 나는 죽지 않아. 약속하지 않았느냐. 이제 너와 함께 할 것이야. 너와 함께 살아갈 것이야. " 안토니우스는 계속해서 태우에게 속삭였다. "나는 너의 과거가 아니다. 나는 지금 너의 앞에 있고 나는 너의 현재이다." 그 자신에게 맹세하듯 살아야 한다고 자신에게 말했다. " 나는 너와 함께 미래를 살아갈 것이다." . . . " 안토니우스님? " 이아로스의 걱정스러운 목소리에 안토니우스는 해도에서 시선을 돌려 세 사람을 바라보았다. 이아로스 와 퀸투스가 그의 판단을 기다리고 있었고 태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초초한 듯 단검의 손잡이를 만지작 거리 고 있었다. " 후퇴한다. 북동풍을 타고 남쪽으로 빠져나간다. 이집트의 함선을 쫒아. " " 그게 말이 돼? 전투중인 함선을 어떻게 돌려! " 스스로 말한 뒤 퀸투스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안토니우스는 전투가 시작되면 제거해야만 하는 돛대와 돛을 세운 채 전투에 임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집트의 함대가 달아날 것을 예상하고 있었던 걸까? 퀸투스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태우에게 향했다. 그는 복잡한 검은 눈을 한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 모든 전투가 한 낱 연극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닐까? 안토니우스의 표정에서는 아무 것도 읽을 수 없었다. 갑판으로 나간 안토니우스스는 전군에게 퇴각할 것을 명했다. 병사들은 승기를 잡아가는 전투에서 퇴각하는 것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달아나는 이집트의 여왕에 대한 저주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들은 자신들의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들의 장군은 그들의 희망이었고 태양이었다. 이제 그들의 머릿 속에는 붉은 석양이 그려지고 있었다. . . . 안토니우스의 함대는 포위하려는 아그리파의 함대를 조롱하듯 빠른 북풍을 타고 전장에서 이탈해 나갔다. 장군의 기함이 전장을 이탈하자 당황한 스카우루스 장군은 그가 지휘하던 안토니우스의 우익함대를 데리고 옥타비아누스에게 투항했다. 그는 자신들을 버리고 여자의 뒤를 쫒아 전장을 이탈한 장군에 대 해 분노했고 실망했다.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의 군선에 타고 있던 사람들의 목숨은 살려주었지만, 이집트 선박임이 분명 한 배는 전리품으로 뱃머리를 모두 잘라내고 불태워버렸다. 이집트의 함선 60여척을 제외한 200여척의 안토니우스의 함대 중에서 전장을 빠져 나간 것은 안토니우스가 지휘하던 좌익 40여 척에 불과했다. 옥타비아누스군은 그들의 승리를 자축했다. 군사들은 달아나는 안토니우스의 함대를 보며 조롱했고 비난했다. 여자의 뒤를 쫓아 달아난 비겁한 장수라는 꼬리가 안토니우스에게 붙었다. 악티움 해전이 끝나고 일주일 뒤 안토니우스의 최측근으로 알려진 노장군 아헤노발부스가 육군 군단장인 카니디우스와 함께 항복해왔다. 옥티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의 사람들에게는 관대했다. 이들을 따뜻하게 맞아주었다는 소문이 퍼지자 소아시아와 필레폰네소스에 있던 안토니우스의 군단 대부분이 옥타비아누스에게 투항하 였다. 옥타비아누스는 악티움 해전이 끝난 뒤에도 로마로 돌아가지 않고, 아그리파와 함께 그리스와 소아시아 를 거쳐 시리아로 진격하면서 안토니우스의 세력권이었던 로마의 동부를 서서히 자신의 수중으로 장악하였다. 해가 바뀌고 사람들은 이제 알렉산드리아에서 꼬리를 말고 있는 안토니우스만 처치하면 로마의 패자는 옥타비아누스 의 것이라고 외쳤다. 그 누구도 옥타비아누스의 승리를 의심하는 자는 없었다. 안토니우스 그 자신 조차도. 제 9 장 Actium - 악티움 편 끝 ***************************************** + 로마의 휴일 제 9 장 Furiosa Aurora - 사나운 새벽 # 1 " 역시 사람은 말이야, 약속을 잘 지켜야 해. " " 무슨 헛소리야? " 방방 곳곳에서 날라 오는 전서구와 전령들이 가지고온 서신들을 정리하던 퀸투스가 인상을 쓰며 말했다. 안토니우스는 퀸투스가 양피지와 파피루스 속에 파묻히던 말든 한가하게 포도주잔만 기울이고 있었다. 절대 패배한 장수로서의 모범적인 모습이 아니다. " 너 말이야. 뭔가 군사들을 독려한다던가 군단을 재정비한다던가 하는 건설적인 작업을 할 생각은 없는 거냐? " " 왜 요새 이아로스가 안 놀아주나? " 최근 안토니우스의 일을 떠맡은 이아로스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서 새벽이 되면 녹초가 되어 들어와 퀸투스의 허리를 잡고 잠시 눈을 붙였다가 해가 뜨면 다시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고 있었다. 장난스런 어린애 같은 안토니우스의 표정에 퀸투스는 이를 갈다 가 애꿎은 사람에게 화풀이를 했다. " 흥! 자네는 좋겠구만! 밤새 사랑을 받으니 피부도 탱탱하네? " " 네? " 퀸투스 옆에서 열심히 진주알 주판을 굴리던 태우는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돌아봤다. " 푸하하하!!!!!! " 천장이 떠나갈 듯한 명랑하고 밝은 미소는 안토니우스의 것이었다. 악티움 해전이 끝나고 묘하게 후련하고 밝아진 그는 예전의 모습을 서서히 되찾아가고 있었다. 말단의 병사들은 그들의 장군의 패배의 의기소침한 모습이었지만 안토니우스 가까이 있는 측근들은 장군의 변화에 기뻐하면서도 의아함 을 감추지 못했다. 악티움 해전에서 그들은 완패하지 않았던가? 그들의 장군의 모습은 절대 패배한 장수가 아닌 뭐랄까 여유롭고 행복해 보였다. 장군이 실성한게 아닌가 하는 소문이 돌 정도로 안토니우스는 쾌활했다. " 도대체 그렇게 웃음이 나오십니까? " 한 더미의 서류를 가지고 나타난 이아로스가 안토니우스에게 인상을 썼다. " 와, 이아로스 오래간만....그런데...저기 살이 좀 빠졌네요? " 태우는 정말 오랜만에 만났기 때문에 반가움에 인사를 하려다가 말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 안녕하세요, 태우. 건강해 보이시네요. 음.. 좀 그래 보이나요? 이게 다 장군의 은덕 아니겠습니까. " 이아로스는 한자 한자 힘을 주어 말하여 원흉을 노려봤지만 안토니우스는 어깨를 으쓱하며 웃을 뿐이었다. 에페수스로 귀환한 후부터 사석에서 태우의 부탁으로 퀸투스와 이아로스는 그의 본명을 불렀다. " 그런데 아까 하려던 말을 뭐야? 약속을 잘 지켜야 한다고? " 퀸투스는 이아로스가 가져온 한 다발의 양피지를 건내 받으면서 말했다. 그의 입술에서 가벼운 한숨이 새어나왔 고 연인들은 서로를 측은하게 바라보았다. 진주 알 위를 바쁘게 돌아다니던 손가락이 멈추고 안토니우스를 올려다보았다. " 아니, 생각해 보니까. 나란 놈 약속을 어기는 데 뭐가 있는 것 같아서. 이번에 굵직한 약속만 마무리지으면 앞으로는 약속 같은 것을 어기지 않는 신의 있는 사람으로 살아볼까 해서." " 퀸투스나 태우는 그 굵직한 약속이 뭐냐고 묻는 우를 범하지는 않았다. 퀸투스는 스스로 신의 없는 사람이었음을 자인하는 친구를 한심하게 바라 볼 뿐이었다. 이아로스 조차도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사실이 그렇군요 라고 맞장구 쳐주었다. 안토니우스는 그런 그들을 보며 상큼하게 미소지었다. 너무 아름다워서 퀸투스 조차 심장이 두근거렸다. 덕분에 이아로스의 눈 화살을 받아야했 지만. 곧 지루하게 이어졌던 싸움 아닌 싸움이 끝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율리우스 카이사르와의 맹세를 지킬 수 있게 될 것이다. 그 때가 그의 생의 마지막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또 다른 약속 때문에 안토니우스는 가볍게 웃을 수 있었다. 비록 다른 이에게 약속했던 영원히 지켜주겠다는 것은 어기게 되었지만 또 다른 약속을 어길 수는 없다 고 안토니우스는 생각했다. 옥타비안에게 했던 약속은 단 하나도 지키지 못했지만 그 것만 빼면 자신도 신 의 있는 남자가 아니던가. 아닌가. 확신할 수 없다는 사실이 안토니우스를 조금 서글프게 했다. 그러고 보면 자신의 인 생은 거짓 투성이였다. 가볍게 실소하며 안토니우스는 자신을 빤히 올려다보고 있는 태우를 향해 또 한번 미소지었다. 붉게 물드는 얼굴이 미치도록 사랑스러웠다. 카피토가 지켜준 약속이다. 마지막 약속은 꼭 지켜줄 것이다. 너와의 약속은 꼭 지켜야지. 지금부터라도 신의 있는 사람이 되자. 안토니우스는 참 대견한 결심을 하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다가 태우를 향해 물었다. " 얼마나 빼돌릴 수 있을 것 같아? " " 아? 군단장들에게 위로금 차원에서 나눠주는 거랑 전쟁 보상금을 빼면.... 거의 바닥인데요..." 점짓 우울하게 태우가 말했다. 빼돌리다니, 장군의 입에서 나올 소리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근래에 악티움에서 패배한 이후 안토니우 스는 뭔가 벗어 던진 사람처럼 홀가분해 보였다. 안토니우스는 노는 것처럼 보였지만 매일 밤 태우와 함께 장밋빛 미래를 설계하는 중이다. 꿈만 꾸는 일이 아니라 현실적인 뒷받침이 필요했기에 태우는 다시 그의 진주알 주판을 손에 들었다. 태우가 달려들어 계산한 바로는 안토니우스는 빈털터리였다. 아니 이집트에게 빌린 전쟁자금도 반환하지 않았으니 빚도 어마어마했다. 이집트에 진 빚은 그들의 함대가 악티움에서 달아난 것으로 채무불이행선언을 하면 되니까 상관이 없었다. 그래도 돈이 바닥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 흐음. 정말 용병이라도 해야하는 건가. " 안토니우스의 중얼거림에 이아로스는 정말 참지 못하고 따졌다. 그 동안은 패배하신 장군의 심기를 어지럽힐까 자중했었지만 안토니우스의 얼굴에서 패배감이란 눈 씻고 찾으래야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시는 겁니까? 재기할 생각이 있으시긴 합니까? 그렇다고 이집트에 가실 겁니까? 아니면 옥타비아누스에게 항복이라도 하실 생각입니까? 네? 뭘 계획하고 계시기에 하루 종일 실실거리며 쪼개는 겁니까! " 쪼개다니. 그게 장군에게 할 법한 이야기인가. 과중한 업무에 사적인 생활에 큰 지장이 있는 이아로스의 스트레스 곡선은 한계 치를 모르고 솟아있었다. " 도망. " 간단히 대답했고 반응은 곧 나타났다. " 도망이라니요? " 일단 이아로스는 지극히 정상적인 반응으로 되물었다. " 나도 데리고 갈 거지? " 이어지는 퀸투스의 말에 이아로스가 휙하는 소리와 함께 고개를 돌려 연인을 바라봤다. 퀸투스는 두 눈을 반짝 반짝이고 있었다. " 도망이라는 것 보다. 여행이라던가, 유람이라던가 하는 표현도 있는데. 어감이 달라요, 어감이. " 태우의 지적에 안토니우스는 그럼 하고 뜸을 들이더니 밀월여행은 어때 라고 말해서 퀸투스를 자지러지게 만들었다. 한 참을 투닥거리며 웃던 퀸투스와 태우는 썰렁한 이아로스의 반응에 조용해졌다. 태우는 이아로스가 화가 났다고 생각해서 긴장했지만, 오랜 세월을 함께 했던 퀸투스는 그의 반응이 단 지 화가 났다는 그런 단순한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 좋은 계획이시네요. " 이아로스는 딱딱한 시선을 들었다. 어쩐지 이아로스가 정색을 하면 세 사람 다 긴장하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 동쪽으로 가실 건가요? " 힐긋 태우를 보며 이아로스는 말을 이었다. 안토니우스는 말을 하지 않음으로 긍정을 표했다. " 이곳은 키레나이카. 옛 카르타고의 영토입니다. (주- 지금의 리비아의 해안 지역) 동쪽에는 당연히 이집트가 있는데 그 곳을 어떻게 빠져나가실 것이며, 육로를 택하지 않고 해로를 택한다 하더라 도 지중해를 장악하고 있는 카이사르 미노르의 함선을 어떻게 피하실 생각입니까? " 그런 문제가 있었구나 라고 동시에 생각한 태우와 퀸투스는 서로를 돌아보았다. " 뭐, 어떻게든 되겠지 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자살 소동이라도 버려 볼까나. " 안토니우스는 나름대로 해결책을 내놓았고 반응은 곧 나타났다. " 그런 품위 없는 짓을!! " 퀸투스가 혀를 찼다. " 행여나 자살의 자 자도 꺼내지 마요! 정말 죽여 버릴꺼야! " 태우의 극단적인 반응은 ' 절대 안 한다' 와 더불어 '말도 꺼내지 않는다'는 맹세를 하고 나서야 잠잠해졌다. 안토니우스는 농담 삼아 한 이야기에 태우가 예민하게 굴 줄을 몰랐기에 더욱 당황했다. 물론 안토니우스는 자신의 미래는 역사가 되어 그는 클레오파트라와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며 자살했다 라고 적혀있다고는 전혀 생 각지도 못했다. 장내를 정리한 것은 이아로스의 차분한 말이었다. " 그런 짓을 했다간 이 곳을 빠져나가기도 전에 군단들이 반란을 일으킬 것입니다. 헛소문을 기정사실해서 옥타비아누스에게 항복하려는 놈들도 있을 텐 데요. " 그의 말에 담긴 뼈를 무시하며 안토니우스는 빙그레 웃었다. " 자네, 뭔가 계획이 있는 것 같군. " 그제야 이아로스는 특유의 밉살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 이집트로 가시면 됩니다. " " 왜 이야기가 그리로 튀어? 그 배신자에게 가서 뭘 어쩌자고? " 퀸투스가 항의했다. 연인을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바라보는 것만으로 그 시끄러운 입을 다물게 만들어 태우를 놀라게 한 이아로스는 득의양양하게 말했다. " 그 배신자가 장군을 알렉산드리아로 제발 오시라고 애원하는 편지를 줄기차게 보내더군요. 뭐 장군께 서 이미 끝난 사이라고 제 갈길 가자고 편지를 보냈어도 여왕은 인정하지 않으신 모양입니다만. 일단 이집트로 가서 요르단이나 유다 왕국으로 넘어간다면 인도로 가는 수도 있으니까요. 알렉산드리아에서 도망가는 것쯤이야 그리 어렵겠습니까? 왕궁에서 황금 몇 덩이 훔친다고 해서 이집트의 재정이 흔들리는 것도 아니고. " "............" "..........." ".........." 세 사람은 아무 말도 없이 멍하니 이아로스의 얼굴을 바라볼 뿐이었다. 잠시의 침묵 끝에 안토니우스가 선언했다. " 흠. 역시 참모장은 퀸투스가 아니라 자네에게 줄 걸 그랬어. " " 이제야 아셨습니까. " 밉살스럽게 이아로스가 겸허함이나 겸손함 없이 말했고 퀸투스가 고함을 지르며 그런 이아로스에게 항의했다. 태우는 그저 킬킬거리며 웃다가 안토니우스에게 키스를 당했다. 방밖에 보초를 서있던 군사들은 안쪽에서 들려오는 커다란 웃음소리에 정말로 장군과 그 일행이 실성한 것이 아닌가 진지하게 생각해야했다. 이 들은 그 다음 날 카이사르 미노르에게 항복하는 군단에 끼어 들었고 안토니우스가 악티움 해전에 패해 정신이 이상해졌 다는 소문은 바람을 타고 지중해 구석구석 퍼져나갔다. # 2 클레오파트라는 리비아의 해변에서 그를 불러오는 것까지는 좋았지만 끊임없이 달아나는 안토니우스의 군사들을 보면서 초조하기 이를 데 없었다. 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우스가 실의에 빠졌다 는 소문을 듣고 서둘러 그를 알렉산드리아로 불러들인 터였다. 그와 소원해진 관계를 돌이킬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악티움 해전의 일은 그녀의 뜻이 아닌 카이사리온의 독자적인 행동이었다고 해명했지만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리온에게 징계 를 내리는 일도 하지 않았다. 유념치 않는다기보다 될 대로 되라는 식이어서 그녀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옥타비아누스의 군대는 알렉산드리아와 지척인 시리아 사막까지 진주해 있었다. 알렉산드리아는 함락의 위기였다. 몇 차례에 걸친 공방전이 있었지만 이렇다할 승부는 나지 않았다.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 사이에는 서로를 비방하는 항복을 요구하는 사자들이 형식처럼 오고 갔다. 옥타비아누스는 바다와 육지 양쪽 모두에서 알렉산드리아를 압박하고 있었다. 그는 전쟁을 하지 않을 생각일까? 항복하려는 걸까? 그가 없다면 누가 이집트를 지킬 수 있는가? 카이사리온이 옳았는가? 옥타비아누스가 이집트를 멸망시킬 것인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후손으로 프롤레마이오스 왕조는 300여년을 내려왔다. 그녀가 마지막이 될 수는 없었다. 그녀는 왕궁을 나서 이시스의 신전으로 향했다. 모든 신관을 물리고 스스로 신관의 복장을 입은 클레오파트라는 이시스의 신전에 홀로 앉아 신께 기도를 드렸다. 하얀 신관의 정복을 입고 그녀는 이시스의 날개 상 앞에 엎드렸다. " 아아, 이집트의 어머니, 이시스시여. 당신의 용기와 지혜를 제게 베풀어 주소서. " 클레오파트라는 이시스의 신전에서 기도를 드렸다. 제일 처음 이시스의 신전을 찾은 것은 그녀의 배다 른 오라버니가 그녀의 친 언니에게 살해당한 아침. 그때 클레오파트라는 이시스의 여신께 자신을 남자로 태어나게 해주지 않으신 것을 원망했다. 그녀와 같은 모습에 같은 지혜를 가진 언니와 자신 중 만약 다른 한 명이 남자 였다면 같은 젖을 먹고 같은 옷을 입고 연꽃을 따고 놀던 언니의 목숨을 빼앗는 일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너무나 같았지만 단 한가지가 달랐다면 클레오파트라는 또 한 명의 클레오파트라를 사랑했을 거라고 진심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사랑하는 언니는 그녀에게 독배를 내밀었고 그녀는 언니를 죽였다. 그 이후로 단 한번도 이시스의 신전을 찾지 않았는데. 그녀는 겉으로 흘리지 않았지만 울고 있었다. 오랜 시간 그녀를 보필해온 아이러스는 알 수 있었다. 클레오파트라는 밀려오는 생각들과 가정들과 결과들 속에 파묻힐 지경이었다. 어떤 선택을 해야하는 가. 그녀는 여왕이고 아내였으며 어머니였다. 하지만 그 세 가지를 모두 가질 수 없다고 그녀의 이성은 소리치고 있었다. " 이시스 여신이여, 당신은 그대의 남편 오시리스가 세티에게 사지가 절단되고 14개의 조각으로 흩어진 남편의 유해를 찾아 부활시켜 명계의 왕 좌에 오르게 하였나이다. 또 그대의 아들 호루스를 하늘의 왕좌에 오르게 지혜를 발휘하였나이다. 부디, 제게 아내로서의 당신의 지혜와 어머니로서의 당신의 용기를 베풀어 주소서. " 여신은 이전처럼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그녀는 살아있는 이시스의 화신으로 불렸지만 정작 이시스 여신은 클레오파트라에게 냉담하였다. 클레오파트라 는 눈부시게 하얀 날개를 달고 있는 여신의 신상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머리 속은 아내와, 여왕과 어머니가 어우러져 거친 풍랑과도 같은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아아, 안토니우스여. 이시스여, 당신은 아내였습니까, 어머니였습니까, 여왕이었습니까. 너는 누구인가. 여신의 음성이 들린 것도 같았다. 나는 이집트의 여왕 클레오파트라입니다. 너는 누구인가. 나는 이집트의 여왕이며 한 남자의 아내인 클레오파트라입니다. 너는 누구인가. 나는 이집트의 여왕이여 한 남자의 아내이며, 네 아이의 어미인 클레오파트라입니다. 너는 누구인가. 여신의 목소리가 조금 엄해진 것 같았다. " 나는 클레오파트라입니다." 사흘 만에 신전에서 나온 클레오파트라는 그녀를 기다리던 심복에게 고통을 주지 않고 순식간에 황천의 강을 건널 수 있는 독약을 준비하라고 일렀다. . . . " 흠. 오래간 만이군. 신전에 기도를 드리러 갔다던데? " " 네, 가끔은 이시스의 날개 속에서 쉬고 싶을 때가 있는 법이죠. " " 호오, 그대 같은 철의 여인이? " 안토니우스는 웃으며 그녀의 잔을 받아 들었다. 클레오파트라는 초대를 했을 때 안토니우스는 거절하지 않았다. 카이사리온은 근신 중이었고 이집트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신전까지 다녀온 그녀를 거절하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라 저녁을 같이했다. 클레오파트라는 포도주의 향을 음미하며 마시는 길고 곧은 손가락을 응시했다. 그녀의 시선은 팽팽한 힘이 느껴지는 팔의 근육을 따라 쭉 뻗은 목선, 높이 솟은 코, 반듯한 이마로 향했다. 그의 얼굴. 어떤 표정을 짓고 어떤 식으로 미소를 짓고 돌아보는 지 하나 하나 그녀의 눈에 담았다. " 크리논? " 아무 말도 없이 응시하는 곧은 시선에 안토니우스는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애칭을 불렀다. "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군요. " 생각을 멈추고 그녀는 살며시 눈을 감았다. 이번에는 나지막하고 깊게 울리는 목소리를 담았다. 아아. 사랑하는 사람. 진정으로 원하는 사람. 피가 난무하는 전장에서 그를 두고 떠나는 배 위에서 클레오파트라는 속으로 피눈물을 삼켜야했다. 항 상 이용하는 것은 자신이라고 그렇게 생각해왔는데. 당신의 마지막에 있는 것은 자신이라고 그렇게 믿어왔는데. 그 마음 속에 뚫고 들어갈 수 없는 견고한 성곽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클레오파트라는 몸을 마음까지도 그에 게 주었던 것이다. 수 없이 '나는 이집트의 여왕이다' 라고 다짐했으면서도 결국 이 사내를 사랑하고 만 것인다. 클레오파트라는 쓴웃음을 지으며 잔을 들었다. " 카이사리온의 일은 당신의 관대함에 감사드려요, 안토니우스. " " 아아. 영리한 녀석이었지. 그 정도의 배짱과 머리가 없다면 어떻게 그대의 자식이라고 할 수 있을까. " 진심으로 안토니우스는 말했다. 보기 좋은 웃음이 그의 얼굴에 피었다. 클레오파트라는 다시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카이사리온은 정말 그녀를 많이 닮아 있었으니까. 그는 자신까지도 용서한다 말하고 있었다. " 옥타비아누스는 프톨레마이오스를 이어가도록 나두지 않을 테지요? " 그녀는 담담히 남의 이야기를 하듯 말했다. 안토니우스는 그녀에게 옥타비아누스에게 이집트에 대한 선처를 바라는 내용의 편지를 썼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편지에서 안토니우스가 모든 공석 석상에서 물러나고 항복한다면 그의 가솔들의 목숨을 살려줄 것을 옥타비아누스에게 부탁했다. 하지만 답장은 끝내 오지 않았고 안토니우스의 마음은 무거워 질 수밖에 없었다. 그가 떠나고 나면 이집트는 무사할까? 자신의 가여운 아이들은 무사할까? " 악티움 해전의 일은 그대의 뜻이 아니라고 했던가? 이집트의 함대가 뒤로 물러날 때도 이미 그대의 뜻이 아닐 거라고 생각했지. ......그대답지 않았지. 여왕이라면 보다 확실하게 나의 숨통을 조였겠지. 그저 물러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선단을 공격하는 것이 그대의 이집트를 지키는 데 도움이 되었을 거야. 그랬다면 자신을 도와준 그대를 옥타비아누스라도 함부로 대하지 못했을 테지. 지금이라도 나를 죽인다면 이집트를 살아남을 수 있을 텐데. 왜 무모한 도박을 하는 거지? 총명하지만 더더욱 아름다운 그대여. " " 내가 사랑하는 이의 등에 칼을 꽂을 여인으로 보였다는 건가요? " " 흐음. 아니라고 하지는 못할 텐데. " 클레오파트라의 손등에 키스하며 안토니우스는 짓궂게 말했다. 클레오파트라는 그런 그를 또 한번 눈에 담았다. 자신은 이제 어디까지 어리석을 수 있을까. " 이상하군요. 그 동안 수없이 살을 맞대고 그대의 여인이라고 생각해왔는데 서로 이렇게 솔직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던가요? " 왜 이렇게 늦게. 왜 이제야 당신의 마음이 유리 그릇처럼 투명하게 느껴지는 가. " 하하, 죽을 때가 다 되었나? " 안토니우스는 웃었지만 클레오파트라는 웃지 않았다. " 당신, 떠날 건가요? " " .............. " 나를 버리고, 아이들을 버리고, 만인지상의 권력을 버리고, 애초부터 그 자신의 것이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그렇게 떠날 건가요. 당신의 그 칼 앞에 영예의 승리가 장식되기를, 가시는 발길마다 승리의 꽃송이가 뿌려지기를, 그러나 그대가 누울 관은 오직 나 한 사람뿐이기를. 그대의 마지막은 나이기를. 그렇게 기원했건만. " 크리논. " 아름다운 운율을 가진 목소리. 어떤 음악보다도 달콤하였다. 차라리 그의 목소리가 긁히는 쇳소리처럼 끔찍하다면 잊을 수 있을까. " 나는 이집트의 여왕이지요. 승리를 가져다주지 않을 장수에게 더 이상 베풀 아량이 없어요. " " 아아. 빈털터리로 사막으로 쫓겨나는 신세가 된건가. " 클레오파트라는 억지로 상처받은 표정을 짓는 그를 보고 가볍게 웃고 시종에게 미리 명했던 것을 가져 오라고 손짓했다. 아이러스는 쟁반에 두 개의 잔을 들고 조심스레 들어왔다. 쟁반을 든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황금으로 주조된 잔에는 색색의 보석이 점점이 박혀 있었다. 보는 각도에 따라 찬란한 빛을 뿜어내는 잔은 세상의 어떤 제왕의 왕관보다도 아름다웠다. 잔 속에는 투명한 술이 손의 떨림 때문에 가볍게 출렁였다. " 당신의 마지막을 기념하여 제가 준비한 것이에요. 나와 마지막 축배 정도는 들어줄 수 있겠지요? " " 아아. 향이 좋은 곡주로군. " 단번에 안토니우스는 그 술이 귀한 증류수임을 알 수 있었다. 독한 향기와 더불어 은밀한 단내가 풍겼다. 클레오파트라는 창백하게 질린 아이러스를 눈빛으로 내보냈다. 두 개의 잔을 들고 안토니우스 가까이 다가서 맞은 편에 앉았다. 푸른 눈의 더욱 푸르고 깊게 보였다. 클레오파트라는 빨 려 들어 갈듯한 그 눈동자를 한없이 바라보다 그 눈동자의 주인에게 잔을 건냈다. " 안녕히. 내 사랑. 우리 사이에 존재했던 시간들은 이 한잔의 술로 녹아 버리겠지요. " 시간뿐만이 아니라 그 술은 뼈를 녹이고 내장을 녹이고 혈관을 녹이고 살을 녹여버리겠지. 클레오파트라의 깊고 어두운 눈이 가라앉았다. 내가 그대의 심장을 녹이고 다시 뛰게 한 주인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어리석은 가슴을 가진 나는 그래도 그대의 마지막을 함께 하길 원해. 이집트의 여왕도, 세 아이의 어머니도 아닌 나는 당신과 마지막을 함께 하길 원해. 클레오파트라는 잔을 들어 안토니우스의 잔과 맞부딪쳤다. 챙- 하는 가벼운 소리가 조용한 방안에 스며들었다. 그가 곧은 손가락으로 잔을 들어 입에 가져다 대는 것을 보고 그녀는 눈을 감고 그녀의 잔에 든 독주를 단숨에 들이켰다. 챙그랑. 잔과 잔이 부딪쳐 아까와는 다르게 요란한 소리가 방안에 퍼졌다. 클레오파트라가 들고 있던 잔은 안토니우스가 던진 잔과 부딪쳐 바닥에 뒹구르고 있었다. 아아. 어째서. " 당신은 나를 끝까지 모욕할 셈인가! 나를 이렇게 비참하게 만들기 위해 이집트로 온 것인가? " 알고 있으면서 독배를 마시려고 했는가? 이 추악하고 어리석은 나를 알면서도 그렇게 미소짓는 건가? 어째서 당신은 나를 어디까지 비참하게 만들 셈이지? 어째서 나의 잔을 거부하는 것이지. 영원을 함께 하고 싶은 나의 바람은 당신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인가. 아니.... 그런 것이 아니야. 왜 나를 죽게 내버려두지 않는 거지...... 그런 눈으로 바라보는 거지...... 안토니우스는 흔들림 없는 푸른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그 눈에는 방금 자신을 독살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하는 여인에 대한 분노도 동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저 한 줄기의 정. 다정 다감한 눈동자가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 크리논. 나는 살려고 하오. 세상 사람들이 나를 조롱하고 백안시해도 감히 나는 살려고 하오. " " 그런 치욕스러운 삶을 산다고 말하는 건가요? " 평생을 왕족으로 살아온 그녀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의 죽음은 세상으로부터 모욕당하지 않고 그들의 사랑을 영원하게 할 수 있었다. " 그가 이렇게 말하더군. '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 ' 고. 그러니 그대도 살아야지. 죽지말고 이집트의 여왕으로 당당하게 살아가야지. " 어김없이 금빛의 미소는 아름답고 멋졌다. 전에는 이 미소가 강렬한 여름의 태양처럼 그저 멋지게만 보였는데 그의 미소는 따스한 봄 햇살을 담고 있었다. " 나의 가치는 당신에게 한 잔 술 보다 못했나요? 그렇게 쉽게 당신은 나를 잊을 건가요? "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의 이마에 입맞추었다. " 그렇지 않아. 그대의 가치는 독배를 마실 수도 있는 것이었지. 아마도 마지막을 함께 하고 싶을 만큼. 편히 저승의 잠 속에서 쉴 수도 있었겠지. 그대와 함께. 하지만 난 살고 싶으니, 그대도 살아. 크리논. " 그녀는 영민 했다. 하지만 그 역시 지중해의 절반을 지탱하던 사람이었다. 그의 뜻을 그녀는 알 수 있었다. 그는 아마도 굴욕적인 항복을 한 채로 추방되겠지. 이집트는 이 사내를 추방하고 옥타비아누스에게 화친을 청할 것이다. 안토니우스가 죽으면 로마의 인심이 그녀를 용 서할 리 없었다. 하지만 안토니우스가 이집트의 보물을 털어 달아난다면 로마의 인심은 버림받은 그녀를 동정하겠지. 너무나 명 료하고 간단하게 클레오파트라는 그의 내심을 짚어 낼 수 있었다. 모든 것을 계산하고 온갖 더러운 누명과 무거운 짐을 지고 떠나는 것은 태양보다도 더 밝은 이 사람. 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우스가 농담처럼 했던 말처럼, 테리우스라는 사내가 경고했었던 것처럼. 그녀의 아들과 이집트를 위하여 그를 배신하려 했었다. 손에 넣을 수 없다면 아무도 가지지 못하게 하겠다는 여인의 마음은 여왕으로서 가져야할 냉정한 계산을 흔들리게 했었다. 하지만 함께 살고 함께 죽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가를 깨닫는 것은 자신이 생각했던 일들을 거리낌 없이 행하는 그녀의 아들을 보면서 그리 길게 걸리지 않았다. 여왕이라는 것, 어머니라는 것. 그런 지위를 떠나서 그저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사람으로 그녀가 원하 는 것은 눈부신 태양도 아닌 그저 한 인간이었음을. 떠나 보내는 때가 돼서야 깨닫게 되는 것인지. 신의 배려는 너무나 잔혹하기 그지없다.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가 사라지고 난 지중해에서 해바라기가 아닌 진짜 태양이 되어 빛날 것이다. 어쩌면 당신은 태양이 아닌 새벽의 신성이었을 지도. 당신은 앞으로 환하게 비출 태양을 위해 어둠을 몰아내었지만 그 빛에 가려 사라지는 새벽 별이었다. 어둠 속에서 너무나 아름답게 빛나서 그 빛에 취해 당신이 태양인 줄 알고 모두들 당신을 사랑했지. 하지만 당신은 새벽 별이었어. 태양 빛에 사라지고 마는 운명을 가진............. 검은 어둠의 품에 안주하는 새벽 별. " 정말 당신은 바보 천치로군요. " " 하하. 요새 모두들 나를 바보 천치라고 하는군. " 안토니우스는 호탕하게 웃었다. 내장 깊숙한 곳에서 진득하게 스며드는 통증이 느껴졌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시녀들이 다가와 발 밑에 쏟아진 술을 닦고 새로운 술을 가져올 때도 안토니우스는 그 자신이 한 모금의 독주를 마셨다는 사실을 클레오파트라에게 말하지 않았다. 간절한 그녀의 눈동자에 흔들려 단 한 모금이지만 그녀의 청을 받아들였노라고 안토니우스는 말하지 않았다. 지나가는 말로 그가 마신 독이 아무런 통증도 고통도 없이 깊은 잠에 빠져드는 듯 죽음으로 인도하는 것으로 일명 "레테의 뱃사 공" 이라고 불린다는 것을 알고도 안토니우스는 그저 클레오파트라와의 마지막 만찬을 즐겼다. 단 한 모금이었다. 치사량에 극히 못 미치는 이 미미한 독주를 안토니우스는 그의 관대한 가슴을 시험하듯 받아들였다. # 3 " Moon river, wider than a mile I'm crossing you in style some day Oh, dream maker, you heart breaker Wherever you're goin', I'm goin' your way Two drifters, off to see the world There's such a lot of world to see We're after the same rainbow's end, waitin' 'round the bend My huckleberry friend, Moon River, and me " 달빛이 흐르는 강, 무척 넓은데 언젠가 멋진 모습으로 너를 건너리 오! 꿈꾸는 너, 심장을 부숴 버린 너 네가 어디로 가던, 나는 너의 길을 따라 가리 저 멀리서 세상을 바라보는 두 방랑자 세상은 볼만한 아름다운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둘이서 한 개의 무지개 끌을 쫓아, 무지개 주위를 맴돌며 나의 영원한 친구, 달빛 흐르는 강, 그리고 나 ( " Moon River " from Breakfast at Tiffany's ) 조용한 노래 소리가 달빛을 받아 방안에 흘렀다. 달빛에 반짝이는 나일 강은 노래에 화답하듯이 고고하게 흘렀다. 그리운, 너무나 그리운 노래를 부르면서 태우는 옷가지와 기타 필요한 물품들을 하나 하나 확인하며 싸고 있었다. 하루, 하루 날짜가 다가오고 있었다. 곧 이집트를 떠나게 될 것이다. 어디로 가게될까. 막연히 동쪽으로 길을 잡고 있다. 혹시 이대로 지중해를 떠나면 영원히 미래로 돌아갈 길은 없어지는 게 아닐까? 일말의 불안감이 고개를 들었다. 영원히 미래로 갈 수 없다는 것은 다시는 혜준을 보지 못한다는 것과 같은 말이었다. 혹시 혜준도 지중해로 떨어진 것이 아닌가 했지만 세상의 우연이 그렇게 만만한 것이 아니라고 스스로도 생각하고 있었다. 이미 태우는 고대에서 그의 곁에서 살기로 결심했다. 그 결심을 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흘렀다. 언제나 깊은 곳에서는 자신 스스로 이방인이요, 언젠가는 떠날 운명이라고 다잡았지만.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고 하지 않던가. 혜준아. 사랑하는 나의 혜준아. 벌써 많은 시간이 흘렀다. 한 해만 지나면 강산이 변한다는 십 년이다. 이제... 나 너의 목소리도, 너의 얼굴도 희미해. 빛 바랜 사진처럼 너무나 희미하다. 네가 연주하던 문 리버도, 문 라이트도 너무가 희미해. 저 달빛처럼 은은해서 가슴이 아파. 너는 그대로 일까? 나는 얼마나 변했을까? 문득 태우는 방안에 있는 거울을 보았다. 은은 시간이 조금만 흘러도 뿌옇게 흐려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화려한 조각과 보석으로 치장된 은제 거울은 눈이 부시게 반짝거렸 고, 비치는 상 역시 일그러짐 하나 없이 깨끗했다. 거울을 만든 장인의 솜씨와 그것을 관리하는 시녀들의 부지런함을 감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은빛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은 변화가 없었다. 변화가 없다. 기억은 희미하고, 추억은 시리며, 감정은 고요하다. 은빛 거울에 그려진 검은 눈의 검은 머리의 사내는 처음 지중해에 발을 디딘 때와 그리 달라보이지 않았다. 얼굴에는 시간의 흐름이 비껴간 듯 싶었다. 태우는 어깨를 넘어 등 너머에서 흔들리는 머리카락을 보았다. 짧은 컷트였던 머리가 어느 새 등에 닿아 있었다. " 머리를 잘라야 하나? 머리? 헛!!!!!!!!!!!!! " 순간 머리를 만지작거리던 손이 멈췄다. 내가 손톱을 언제 잘랐더라? 분명 자른 기억이 났지만 최근의 일이 아니었다. 머리는? 내 머리는? 태우는 그가 로마에 온 후로 단 한번도 머리를 자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공포에 질린 얼굴로 거울에 비친 그의 모습을 보았다. 십 년에 가까운 시간동안 단 한번도 머리를 자른 적이 없었다. 진짜 시간이 태우를 빗겨 흐르고 있었다. 머리를 뒤흔드는 결론에 태우는 멍하니 거울 속을 바라봤다. 어느 새 거울 한 편에 또 다른 그림자가 어려있었다. 금빛의 고수머리가 반듯한 이마에 흘러 내려와 있었다. 푸른 눈은 더 깊고 더 푸른빛을 발했다. 코는 그의 자신감을 담은 듯 높았지만 오 만해 보이지 않았다. 신의 조각품이라고 해도 좋을 몸 위에 따스하게 웃고 있는 얼굴이 있었다. 하지만 십 년의 세월을 속일 수 없는 듯이 안토니우스의 얼굴에는 시간의 흔적이 서려 있었다. "뭘 그리 빤히 보는 거야? 이왕이면 거울이 비친 거짓보다 실물을 보는 것이 어떤가. " 가벼운 너털웃음과 함께 태우의 등뒤로 강인한 가슴이 느껴졌다. 뒤에서부터 태우를 안고 그의 머리에 키스했다. " ............." " 태우? " 가볍게 쪼는 듯한 키스의 세례에도 반응이 없자 의아한 듯 안토니우스는 귓불을 살짝 물었다. 어깨를 움찔하던 그가 시선을 돌려 거울에 비친 허상이 아닌 실물을 보았다. " 그냥. 시간이 참 빨리 가는 것 같아서요. " " 그렇군. 정말 바쁘게 달려온 것 같은데. " 다정한 눈이 부드럽게 휘었다. " 아마, 너와 함께 있어서 시간이 빨리 흐르는 지도 모르겠는데. " 휘어진 눈에 장난기가 가득 담겼다. " 하하. 시간이란 상대적인 것이니까요. " 태우는 그런 걸 거야 라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자신에게 조금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자. 초자연적이고 비현실적인 것 에 놀랄 일은 없다. 지금 그가 이 자리에 서있는 것을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니까. 그리고 설사 설명할 수 있다 해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것이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체념이라는 이름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니 지금은 현재를 살자. 당신이 어떤 길을 가던 나는 당신을 따른다. 둘이서 세상 밖에서 방랑하게 되어도 이 세상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무지개 너머의 세상을 같이 꿈꾸며. 달빛이 비추는 강을 건너.... 나 그대와 함께. 태우는 안토니우스의 입술에 가볍게 자신의 입술을 대었다. 곧 강하게 밀고 들어오는 혀를 받아들였다. 그의 손이 등을 가볍게 쓸고 그 끝에 자리한 둔덕에 머물렀다. 이어질 행위에 기대하고 기뻐한다. 태우가 기대가 담긴 신음성을 흘렸다. 안토니우스가 가볍게 웃는다. 두 사람이 걸친 옷이 하나씩 바닥에 떨어지고 그 위로 매끄러운 나신이 누웠다. 태우는 안토니우스의 어깨 너머로 그의 금빛 머리를 잡고 매달려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거울에 비친 그의 등은 자잘한 상처가 가득했다. 태우는 그 상처를 어루만지듯 등을 쓰다듬었다. 안토니우스가 작게 신음을 냈다. 희락에 들뜬 숨소리가 방안을 가득 채웠다. 은제 거울이 두 사람의 행위를 하나도 놓치지 않고 지켜보고 있었다. "......하읏.......아아........아! " " .....하아....하아....아!!!!!!!!! "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절정에 다다랐다. 무너지는 태우의 몸을 안고서 안토니우스는 같이 너른 침대위로 쓰러졌다. 영원히 지속될 것만 같은 밤.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섹스가 휴지기를 맞이했다. 몇 번을 몸을 섞었음에도 태우 안토니우스가 위에서 내려오자 마자 이 집트의 질좋은 면으로 된 이불을 목 아래까지 걷어 올렸다. " 큭큭... " 안토니우스는 웃으면서 홑겹의 면 아래 있을 그의 가슴에 키스를 했다. 아무리 숨어도 그 아름다운 몸을 숨길 수 없다. 그의 눈은 이제 언제나 이 동쪽의 향기를 품는 사내에게 가 있었다. " 그만... 간지러워요. " 태우는 감질 맛 나는 키스 세례에 몸을 일으켰다. 푹신한 깃털 배개를 방어막 삼아 앞으로 끌어안아 그와 마주보고 앉았다. 원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연 달아 세 번은 너무하다고 진심으로 태우는 생각했다. 도중에 침대로 옮기지 않았다면 온 몸이 삐그덕거 렸을 것이다. " 이리 와서 옆에 앉아요. " 안토니우스에게 손짓하고 그를 침상에 기대어 앉게 했다. 싱긋 웃으며 안토니우스는 쉽게 포기하고 그의 옆에 나란히 앉았다. 나란히 앉아 있자니 뭔가 새삼스러 운 기분이 들어 묘한 심정이었다. 마치 신혼부부들이 침대 맡에 나란히 앉아 자기가 먼저하며 알콩 달콩하게 투닥거리는 여러 영화 속의 장면들이 순식간에 떠올랐다 사라졌다. 혹은 방금 막 섹스를 끝낸 연인들이 나란히 침대에 앉아 이별을 이야기하는 씁쓸한 장면들도 떠올랐다. 괜히 옆으로 앉게 했다고 복잡해져 오는 머리를 흔들며 태우는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일어나려는 태우를 한 팔로 단단히 끌어안는 것은 조금 전 느낀 쓸데없는 상상을 날려버리는데 일조를 했다. " 나라는 벽이 그대의 마음을 단단히 싸고 있음에 다른 생각들이 그대의 마음을 점령한단 말인가" 딴 생각을 한 태우를 꾸짖듯이 근엄하게 안토니우스는 서사시의 한 구절을 읊는 것처럼 말했다. 정말 어울리지도 않게. " 무슨 시인도 극작가도 아니면서 그런 말을........... " " 무슨 그런 섭섭한 말을. 나도 한 때는 시인이었는 걸. " " 거짓말. " 믿을 수 없다. 생각보다 먼저 말이 튀어나왔다. " 어째서 거짓말이라는 거야? " 묘하게 상처받은 표정의 안토니우스가 보기 좋은 이마를 찡그렸다. " 하지만 어디서도 당신이 시인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도 없어! 나도 베르길리우스나 오비디우스정도는 누구인지 안다구요! " 사실 입에 올린 두 사람은 정도라고 표현하기에는 로마의 유명한 시인이요 문장가이다. 그걸 떠나서 어떤 역사책에서도 이 남자가 시인이었다는 이야기는 들어 본적이 없다. 검투사라면 몰라도. ".........정말? " 안토니우스의 상처받은 표정은 더욱 심화되어 풀이 죽은 표정으로 변했다. "네." 라고 대답하면서 빈말이라도 들어본 적이 있다고 이야기했어야했나 태우는 생각했다. 그 정도로 안토니우스의 반응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침울해져 있었다. " 나 정말 시인이었는데. 문집도 있다고! 이런 말하기는 좀 그렇지만...... 나름대로 이름이 나 있었다고..........아. 그래서 그런건가." 시인이었다고 열변을 토하려던 안토니우스는 갑자기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 뭐가요? " 반은 미심쩍음에 그 이상가는 호기심에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유명한 사람의 문집이 있었다면 후대에 알려지지 않았을 리가 없을텐데. " 나 예명을 쓰고 있었거든. 아니 아명이라고 해야하나? " " 네? " " 아폴로나우스. 그게 내 아명이지. 어머니가 내가 태어났을 때 머리가 황금색이라고 놀라면서 아폴론의 아이라는 거창한 별명을 지어주셨다더군. 집 밖에서는 그다지 별로 불 리는 일은 없었는데 학당에 들어가고 나서 리라를 좀 연주했더니 금방 사람들이 그렇게 부르던걸. 어떤 바보같은 놈들은 내 이름을 아폴로나우스 안토니우스라고 알고 있었어. 그래서 그런건가. " " 리라? 그 등껍질로 만든? 헤르메스가 아폴론의 소 떼를 훔치고 나서 맞바꿨다는? " " 오, 잘 알고 있는걸! " 그는 활짝 웃었다. 그랬다, 지금 생각해보면 안토니우스는 이아로스보다도 문관인 퀸투스보다도 신화나 역사 서사시, 시의 내용에 밝았 었다. 그리스 철학자가 남긴 명언이나 격언들도 그의 입에서 무리 없이 종종 튀어나오곤 했다. 하지만 신화 속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그 외모에 태우는 그가 남들보다 교양이 뛰어나다고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 친 태우는 진심으로 안토니우스에게 미안해졌다. 하지만 아폴로나우스라는 이름도 익숙하지......않은 게 아니었다. 어디서 들어봤더라? " 아!! 소망!!! 그 시 맞죠? 브린디시움의 퀸투스 별장에 있던....그 장미정원의 비석!! " "오? 기억하고 있어? 내 마지막 작품이었지. " 어딘가 부끄러운 기색에 조금은 서글픈 느낌으로 안토니우스는 부드럽게 웃었다. " 사랑하는 친구여, 내가 죽거든 내 검은 무덤 위에 월계수를 심어다오. 내 머리에 어울리지 않으나 창백한 그 빛이 정답고 그리워라, 내가 잠든 땅 위라면 그 그늘 사뿐히 드리우리. " 아름다운 시였기에 기억하고 있었다. 놀란 가슴에 시에 담긴 정서같은 것은 무시하고 그대로 외어버렸지만 그것만으로도 기쁜 듯 안토니우스는 얼굴이 상기되어있었다. 태우는 그의 붉어진 얼굴에 기가 막혔다. 부끄러워해? 저 남자가? " 흠흠.....쑥스럽군. 네가 기억해주다니 정말 영광이야. " 안토니우스는 태우의 손등에 가볍게 키스했다. 손을 잡고 돌려 손목의 안쪽까지 키스하려고하는 그에게서 손을 빼내고 태우 는 물었다. 묻지 않을 수 없었다. " 왜 마지막이라는 거지요? 왜 그 시로 퀸투스는 비석까지 만든 건가요? 그 시는 분명 죽은 자의 비에 적혀있었어요! 그 곳에 묻힌 사람은 누구죠? " " 보았을 텐데. 아폴로나우스라고. " 그의 표정은 담담했다. " 그건 당신이잖아요! " " 아아. 그랬었지 " 옛날 일 이야 하고 덧붙이며 안토니우스는 쓰게 웃었다. " 나는 평민이었지. 뭐야? 정말 몰랐던 거야? 지금은 이름을 막 부르고 그래도 나 어렸을 때는 퀸투스에게 도련님이라고 불렀다고. 나 는 시인이 되고 싶었다. 아버지는 못마땅해했지만 내가 시를 쓴다는 것을 자랑스러워하기도 했지. 우리는 평민이라 먹고살려면 장사나 군인밖에 할 일이 없었지만 아버지는 가난한 군인월급으로 내가 학당에 다닐 수 있게 해주셨지. 퀸투스와 아카데미에 다 니면서 나는 정말로 시인이 될 거라 생각했어. " 안토니우스는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 단 한번도 들을 수 없었던 이야기이기에 태우는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 어머니가 망나니 귀족 나부랭이에게 겁간을 당하고 아버지가 그 가문의 사병에게 맞아죽고 지만 나는 그저 그 들의 발길질에 쓰러질 수밖에 없었지. 내가 아무리 위대한 시인이 된다하 여도 나는 평민이니까 그들의 옷깃을 잘라낼 수도 없었다. 그래서 펜을 버리고 검을 들었어. 퀸투스는 내가 검을 쥐는 것을 말렸지만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도 집안 식구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도 나는 검을 잡아야만 했지. 그런 나를 이끌어 주신 분이 카이사르였어. " 안토니우스는 가족들의 이야기를 단 한번도 하지 않았었다. 언제나 당당하고 강한 사람이라도 내면에는 많은 상처와 고통이 있는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면서 안토니우스의 내면을 짐작조차 못하고 있었다. " 멀리서 뵌 적은 있었지만 정식으로 그분을 만난 것은 그 때가 처음이었지. 아버지는 카이사르님 휘하의 일개 사병이었는데 두 분이 교류가 있었더군. 무기 다루는 것도, 갑주 손질하는 것도 아버지는 워낙에 솜씨도 없고 서툴렀는 데 사람은 무척 좋았지. 그래서였는지 카이사르님은 아버지에게 뭔가 자리를 주려고 하셨던 가봐. 그 전에 운 없는 아버지는 죽 고 말았지만. 카이사르님은 아버지의 죽음을 진심으로 슬퍼하셨고 내가 복수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셨다. " " 하지만 군인이었더라도 시인일 수도 있었잖아요. 카이사르도 군인이지만 훌륭한 문장가였어요! " " 나는 내 안의 시인을 버렸어. 그 유약함이 내 부모를 지키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내 안에 있던 나약함, 치졸한 위선, 두려움 그 모든 것을 버리고, 아폴로나우스를 묻었어. 내가 걸어가는 길에는 시도, 노래도, 음악도 필요 없었으니까. 그렇게 나를 묻었지. " 거짓말. 이라고 쏘아붙이는 대신에 태우는 물어보았다. 당신은 한 번도 그 이름을 버린 적이 없었을 거야. 이상하게도 태우의 눈에는 그가 받은 상처가 고스란히 보였다. " 지금 이 순간도 시인이고 싶나요? " 안토니우스는 잠시 생각하는 듯 하더니 눈을 감고 대답했다. ".................." "................." " 그래. 나는 언제나 시인이고 싶었어. " 『소망 사랑하는 친구여, 내가 죽거든 내 검은 무덤 위에 월계수를 심어다오. 내 머리에 어울리지 않으나 창백한 그 빛이 정답고 그리워라, 내가 잠든 땅 위라면 그 그늘 사뿐히 드리우리 아폴로나우스』 " 지금 이 순간도 시인이고 싶나요? " " 그래. 나는 언제나 시인이고 싶었어. " 태우는 그의 어깨에 놓여있는 거대한 사슬을 본 것도 같았다. 그는 이제 그 사슬을 벗어버리고 싶어하고 있었다. 조심스레 태우는 그의 어깨 를 안았다. 잘은 모르지만 그 사슬을 벗겨주기 위해 아폴로 신은 자신의 여동생 다이아나에게 고집을 피웠을지도 모른다. 아폴론의 손에 이끌려 다이아니의 배려로 이 땅에 선 것이 진실이었는지도 모른다. 퀸투스는 언제나 아폴론 신에게 아폴로나우스를 버리지 말라고, 당신의 아들을 용서하라고 혼자 기도하곤 했었다. 그 의미를 이제야 알게 되었다. 퀸투스는 알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자신의 나약함이라고 포장해서 소중한 꿈을 접고 원치 않는 길을 가야했던 안토니우스를. 언제나 밝은 태양을 향해 달리고 싶었던 사람. 언제나 시인이고 싶어서 시인의 가슴을 억지로 파묻어 버린 사람을. 시인의 소망을 더럽히지 않고 싶어서 억지로 묻어 버린 사람, 바보같이 순진하고 똑 바른 사람. 그는 시인의 손으로 증호하는 검을 들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확실히 자신은 안토니우스를 만나기 위해 온 것일 지도 모른다. 그와 자신의 사이에 놓여진 인연의 끈은 돌고 돌아 연결되어 2000년 의 시간을 가볍게 건너뛰었던 것이다. 달리 설명할 길이 없는 이 기적을 태우는 나름대로 해석하고 받아들이고 싶었다. 새끼손가락에 묶여 있다는 붉은 실의 끝은 당신이 아니었는가. 무지개 끝에 마주 서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닌 당신이 아니었는가. 혜준에게 미안한 마음도, 또 그를 닮아 아름다운 옥타비안에게 미안한 마음도 태우의 가슴 한 구석을 콕콕 쑤시고 있었다. 혜준을 사랑하고 있다. 지금도 그를 생각하면 가슴이 메어진다. 하지만 그 것은 기억이었다. 사랑보다 슬픈 기억으로 그는 태우의 가슴 속에 있었다. 잊지 않는다. 희미해져도 절대로 잊지 않는다. 태우는 느끼고 있었다. 차일 피일 미루고 미루는 바람에 정작 중요한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있었다. 그 약속을 지켜야 할 때. 두 사람의 숙명적인 대결을 앞에 두고도 전하지 못한 것이었다. 지금이 바로 당신에게 그것을 전해 주어야 할 때. 당신의 사슬을 풀고 함께 걸어가야 할 때. 당신의 사슬을 풀어줄 열쇠를 태우는 받아왔었다. " 전해 줄게 있어요. " 태우의 어깨에 머리를 얻고 있던 안토니우스가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에는 단순한 호기심만이 남아 있었다. 말없는 물음에 태우는 대답하지 않고 조심스레 가벼운 립 키스를 했다. 당황한 듯 안토니우스는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의 눈동자를 무시하고 가벼운 립 키스을 하다가 조심스레 그의 입술 속을 파고 들어갔다. 선정적이지도 않고 섹스 후에 하는 여운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마치 첫 키스와 같았다. " 뭐지? " 달콤한 입맞춤에 안토니우스는 생경한 기분이 되었다. " 나를 풀어 준 사람이 마지막으로 당신에게 전하는 것이에요. " 당신의 사슬을 풀어줄 열쇠, 그가 전하는 이별의 인사. " !!!!!!!!!! " 짧은 말이지만 안토니우스는 누가 어떤 의미로 보낸 입맞춤이었는지 충분히 알았던것 같다. 그의 얼굴이 추억으로 기억으로 젖어 들어갔다. " 그는 당당하게 앞으로 걸어가기로 했어요. 괴로운 현실을 똑바로 바라보고 자신의 길을 가기로 결정 했어요. 알고 있지요? " 그가 진정 어른이 되어 홀로 걷기로 결심했다는 것은 당신에게 슬픔인가요, 아니면 크나큰 기쁨인가요. " 옥타비안, 언제나 작은 내 아름다운 소년이라고 생각했지. " 그의 말에 묻은 과거형이 가슴 아프게 들렸다. 그는 아름다운 소년이었다. 안토니우스의 가슴 한 구석에서 각인되어 있었다. 그렇기에 옥타비아누스는 본능적으로 느끼고 도망치고 있었을 것이다. 영원히 아이로 남고 싶은 피터팬처럼 안토니우스의 사랑을 붙들기 위하여. 하지만 당신도 알고 있었잖아? 아이는 언젠가 자라서 어른이 되어버려. 홀로 두 발로 서는 아이의 모습을 보고 싶은 마음, 어른이 되어 당신의 품을 떠나는 것을 원하지 않는 마음. 그 안에서 갈등하고 괴로워 한 것은 바로 당신이었잖아? 그를 진정한 한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피가 흐르는 길을 걸어온 당신이잖아. 이제 보내 주세요. 이제 놓을 때가 되었어요. " 기억은 사라지지 않아. 사랑은 기억이 되어 남아요. 그래서 기억은 사랑보다 슬픈 거에요. " " 태우........." 그의 푸른 눈에 자신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태우는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내었다. " 하지만....하지만.... 기억에 사로잡히지 말아요. 추억에 연연하지 말아요. 옥타비안이 스스로 일어선 것처럼 이제 그를 보내주세요. 안토니우스. " 옥타비안은 용기를 내어 당신에게 이별의 입맞춤을 보내왔잖아요. 당신 품에서 그를 놓아 주세요. 그러니 이제 나만 바라봐 주세요. 태우는 그 푸른 눈에 자신의 감정을 하나 하나 실어 보냈다. 푸른 눈동자는 파도가 치는 것처럼 격류에 휘말렸 다. " 당신은 이미 시인이잖아요. 사랑을 하는 사람은 누구나 시인이니까. 이제 나를 위해 시를 써봐요. 아폴로나우스는 당신의 가슴속에 살아있으니까. " 조금은 민망한 기분을 느끼면서, 나를 위한 시를 써달라는 70년대 포크 송의 가사를 읽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무슨 철없는 여고생도 아니고 얼굴이 화끈거렸지만 이미 작정하고 내뱉은 말 을 주워 담을 수는 없었다. 첫사랑을 잊지 못하는 남자에게 나는 당신의 마지막 사랑이에요 라고 외치는 여자가 된 기분이었다. 자신만을 봐달라고, 다시는 당신의 손을 놓지 않을 테니까. 태우는 안토니우스에게 다가섰다. "......................." " 내일이면 항복의 서한을 옥타비안에게 보낼 것이다. 그렇게 되면 모든 것이 끝나겠지. 같이 동쪽으로 가자. 이제 나는 장군도, 집정관도, 이집트의 국부도 아니다. 그저 시인이고 너의 사람이다. " " 안토니우스.........." 안토니우스는 침대 맡에 있는 등잔을 말없이 보았다. 똑 같은 크기의 등잔은 나란히 서서 붉을 밝히고 있었다. 안토니우스는 하나의 등잔불을 꺼트리면서 한 구의 시를 읊기 시작했다. " 세 개의 등불이 하나 하나씩 밤을 켠다. 첫 번째는 너의 얼굴을 보기 위하여, 두 번째는 너의 눈을 보기 위하여, 마지막은 너의 입을 보기 위하여, 다음으로 캄캄한 어둠 속에 나는 너를 안고 그 모두를 기억하기 위하여. " " !!!!!!!!!!! " 말도 못하고 입을 벌리고 눈을 크게 떴다. 노골적인 시의 의미가 생생하게 전달되었다. 시의 담긴 적나라한 감정이 태우를 당혹하게 만들었다. 그의 눈은 자신을 향해 있었다. " 기억력이 나쁘구나, 태우. 나는 이미 너의 것이라고 하였다. 지중해는 나를 품기에 좁은 호수이나, 너는 나를 품기에 충분한 너른 바다이다." 푸른 동공에 비친 모습은 다른 사람이 아닌 자신의 모습이었다. 이미 그의 눈에는 자신이 담겨 있었 더랬다. 붉어진 얼굴에 안토니우스의 키스가 다시 쏟아져 내렸다. " Amo, Amao te, Semper Amabo te........" 사랑해요. 당신을 사랑해요. I Will Always Love you... 라고 소리쳐 말하고 싶었지만 돌아오는 키스에 태우는 소리를 내지 못했다. 그의 키스를 받으면서도 태우는 절대 안토니우스를 놓지 않았다. # 4 " 아...아직 새벽인가. " 약간의 금빛이 동쪽 하늘에 서리고 있었지만 새벽이라고 하기에도 아직 하늘의 대부분은 검은 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 시간은 결렬하고 순식간이지만, 순간을 넘기면 남는 것은 깊은 충만감과 몸을 가누기 힘든 나른함이었다. 섹스 후의 서로의 몸을 안고 깊은 잠을 청했다. 꽤 오랜 시간 잤다고 생각했는데 관계가 깊은 밤 내내 이어졌다는 것을 생각하면 오래 잠들지 않은 것 같았다. 문득 옆을 보니 그는 금빛 머리로 잘생긴 얼굴을 가리고 깊은 숨을 쉬고 있었다. 태우는 자신의 허리를 감싸 안고 있는 팔을 조심스레 내려놓고 일어섰다. 다리 사이로 흘러내리다 어느 선에서부터 말라있는 끈적한 물질이 상쾌한 새벽 공기를 몰아내는 것 같았다. 사랑의 흔적은 굳은 정액말고도 온몸에 피어있는 터였다. 은제 거울은 태우의 몸에 알알이 박혀있는 붉은 흔적들을 여과 없이 비추고 있었다. 빨리 씻는 다고 해서 사랑의 기억이 사라지는 것도 아닌걸. 언젠가 첫 키스 후에 고집스레 이를 닦지 않았던 일을 떠올리며 태우는 키득였다. 일단 목욕부터 하기로 한 태우는 근처에 널려있는 옷 중에서 안토니우스의 토가를 대충 몸에 감고 차가 운 새벽 공기를 마시며 밖으로 나왔다. 나오기 전에 그에게 가벼운 키스를 남기는 것을 잊지 않았다. 목욕물을 준비해 달라는 태우의 말에 시립해 있던 시녀들이 총총 걸음으로 사라졌다. 이집트의 왕궁은 모든 생활의 기반이 노예였다. 모든 일들이 노예의 손을 타고 이루어졌다. 이 새벽에도 그들은 방밖에서 주인의 명을 기다 리고 있다. 씁쓸한 마음이 들면서도 안도하는 것은 오랜 시간이 흐르면 노예제도는 지구상에서 사라진다는 것. 그 빈 공간 에 새로운 악이 채우더라도 그들의 후손은 언젠가 더 이상 노예이지 않을 때가 온다는 것이었다. 카피토도 노예가 없는 세상에서 태어나서 사랑을 하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이제야 태우는 순한 곰 같은 사내를 떠올리며 작게 웃을 수 있었다. 언젠가 하고 태우는 생각했다. 다음 생에 그에게 꼭 태우는 은혜를 갚을 수 있다고 믿었다. 꼭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좀더 따끈한 물에 몸을 노곤하게 녹이고 싶었지만 아침에 깨어나면 누군가가 옆에 없다는 것이 얼마나 서글프고 초라한 심정을 가져온다는 것을 잘 알고있기에 태우는 욕조에서 일어섰다. 태우는 물소리에 행여 안토니우스가 깰까 조금 떨어진 방에서 목욕을 했던 차였다. 시녀들이 걸쳐주는 옷을 입고 나가다가 태우는 처음 그가 입고 온 안토니우스의 토가를 집어들었다. 막 물기가 가신 몸에 걸치자 따뜻한 느낌이 포근하게 감싸왔다. 하지만 물건은 주인의 기를 조금씩 담는 다고 했던가. 토가 자락을 코에 대고 냄새를 맡으며 태우는 물건에 남 겨진 잔 향이 아니라 정말 그 사람의 체취를 맡고 싶었다. 그의 발걸음이 점차 빨라졌다. ** 눈을 떴을 때, 가슴 한켠이 서늘했다. 그의 옆구리를 차지하고 있어야 할 사람의 체온이 느껴지지 않았다. 밀려오는 한기는 한 줄기 외로움 마저 실려 있어서 안토니우스는 작게 혀를 찼다. 그가 없다는 것이 이렇게도 쓸쓸하고 무거운 일인지 예전에는 미쳐 몰랐었다. 그가 로마에 있을 때는 막연한 그리움이려니 했었다. 다시 그를 안으면서 자신의 안이함을 깨닫는 것은 순간이었다. 한 번 그를 잃고 되찾은 후에는 절실하게 깨닫고 있었다. 그가 필요하고, 그를 원하고, 그와 함께 하고 싶은 욕심. 사랑이라는 천박한 단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그 이상의 그 무엇. 그런 것이 그와 자신의 사이에 놓여있었다. 최근에 바보에, 천치라는 말까지 듣고 있다. 많이 약해진 모양이다. 정말 죽을 때가 다 되었나 라고 생각하며 안토니우스는 몸을 일으켰다. 아 정말 바보가 된 기분이다. 잠에 깨었을 때 함께 밤을 보낸 사람이 없다는 것이 이렇게 서러운 일이었나. 안토니우스는 씁쓸하게 웃었다. 이른 아침 햇살이 차가운 새벽의 공기를 뚫고 희미하게 비치고 있었다. 희미하게 샛별의 빛이 사그라지고 있었다. 안토니우스는 그 샛별을 한참이나 넋을 놓고 보고 있었다. 스스로 깨닫지 못하면서 사라지는 새벽 별을 배웅했다. 그는 어느 방안에서 목욕을 하고 있는 것이 자명했다. 또 자신의 잠을 깨울 것이라는 핑계로 조금 떨어진 곳에 있 을 것이다. 하지만 이른 아침이라도 퐁당이는 물소리를 배경으로 깨어나는 것이, 그 보다는 눈을 떴을 때 제일 먼 저 들어오는 것이 잠들어 있는 그의 모습인 것이 더욱 행복한 일이다. 외로이 자신을 나두고 시녀들의 시중을 들으며 목욕을 하고 있는 사람을 생각하자 심술궂은 생각이 비집고 올라온다. 이집트의 향수는 가히 지중해 제일이라고 할 만하다. 향유는 또 어떠한가. 이른 아침이라고 해도 시녀들은 향수를 푼 물을 제공할 것이다. 생각하는 것만으로 밀려오는 심술은 욕망으로 기대를 부풀게 했다. 아침에 혼자 눈을 뜨게 한 죄는 목욕한 것을 무로 돌리는 것으로 갚아주자. 짓궂게 웃으며 안토니우스는 그의 옷을 찾았다. 대충 튜니카를 걸쳐 입은 안토니우스는 토가가 보이지 않자 금방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한참을 옷을 찾아 서성였다. 이내 범인을 추측해낸 안토니우스는 범인 이 두고 간 토가를 걸치며 작게 실소했다. 그의 토가에 남아있는 잔향은 충분히 그를 만족시키지 못했다. 물건에 남겨진 잔 향이 아니라 정말 그의 체취를 폐부 깊은 곳까지 들이쉬고 싶었다. " 안토니우스님. 기침하셨습니까. " 아름답게 부풀고 있던 푸른 아침의 꿈을 깨버린 것은 케루스 두시투스였다. " 무슨 일이냐? " 달콤한 상상에서 깨어난 안토니우스의 목소리는 약간의 불만을 담고 있었지만 두시투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가까이 다가섰다. "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 " 말해보라. 꼭 이른 아침에 해야하는 것인가? " 두시투스가 토가 속에 한 손을 넣고 있다는 것을 무심코 보았다. " 죄송합니다. " 두시투스는 얼굴 표정이 숨겨질 만큼 깊이 고개를 숙였다. 알 수 없는 불쾌감에 안토니우스는 짜증이 밀려오는 것을 억지로 참았다. " 두시투스, 죄송하다면 용건을 말.............헉!!!!!!!!!!! " 안토니우스는 용건을 듣지 못했다. 그의 용건은 무엇인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하는 것. " 이게 무슨 짓이냐? " 안토니우스는 이를 악물고 눈앞에 선 사내를 노려보았다. 비릿한 내음이 그의 코를 계속 자극했다. 몸 속의 내장이 모두 거꾸로 솟을 것 같았다. 두시투스의 뒤로 몇몇의 사내가 방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 모두 당신이 자초한 바요! 카이사르 미노르가 이집트와 붙어먹은 우리를 살려 둘 것 같은가? 살길을 마련해야하지 않겠소? " 어리석은 것들. 너희가 스스로 살길에서 돌아 나왔다는 것을 모르느냐. 외치고 싶지만 안토니우스는 토기를 억누르는 것도 벅찼다. 비릿한 것이 목 울대를 넘어 오려고 용트림 을 했다. 당신의 심정도 이러했습니까. 안토니우스는 "부르투스 너 마저" 를 외치고 쓰러진 율리우스 시저의 모습을 떠올리고 있었다. 당신도 이렇게 아프고 고통스러웠습니까. 방안에 놓은 은제 거울은 오래 전에 망막 속에 새겨졌던 풍경을 재현하고 있었다. 단지 머리맡에 폼페이우스의 동상이 아닌 아누비스의 동상이 서있는 것이 달랐다. ' 다행이다. ' 안토니우스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조금 전에 느꼈던 허전함과 외로움이 거짓말 같이 축복처럼 느껴졌다. 네가 없어 다행이야. 하지만 보고 싶구나. 흐려지는 안토니우스 시야에 거짓말 같이 그리운 이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 안토니우스!!!!!!!!!!!!!!!!! " 미치도록 그리운 목소리가 그의 고막에 울렸다. " 오지마!!!!!!!!! " 피를 쏟고 있는 사람의 목소리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안토니우스는 고함을 질렀다. 그는 안 돼. 아아. 안 돼. 제발 그는 안 된다! 가슴에서 검이 뽑혀져 나가고 안토니우스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한웅큼의 피가 그의 입에서 쏟아졌다. 안토니우스의 눈에 그에게 검을 쥐고 다가가는 사내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피가 떨어지는 검을 들고 다가서는 두시투스의 기세에 그는 뒷걸음쳤다. 방 밖에 있던 군사들이 검을 들고 들어섰다. 흉흉한 그들의 눈에 안토니우스는 절망했다. 그는 순식간에 검을 쥔 군사들에게 포위되었다. 한 병사가 그의 입을 틀어 막았다. 두려움에 떨면서도 그는 끝까지 안토니우스에게 시선을 붙잡고 있었다. 그의 검은 눈동자가 공포와 절망으로 물들고 있었다. " 안토니우스 장군. 그 대의 저승 동무로 이 창부도 함께 보내 주리다. 가는 길이 외롭지는 않을 것이오. " 두시투스가 붉은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검을 들고 비릿하게 웃었다. # 5 옥타비아누스의 얼굴에 뜨거운 모래 바람이 닿았다. 사막의 뜨거운 열기가 뇌수를 녹이는 것 같아, 옥타비아누스는 밖에 시찰을 나가는 것을 포기하고 오아시스 한 쪽에 마련된 자신의 막사에서 땀을 식혔다. 태어나면서부터 천식기가 있는 옥타비아누스에게 모래 먼지가 가득한 사막의 환경은 쥐약과 같았다. 식지 않은 미열는 사막의 뜨거운 바람의 탓이리라. 막사의 캐노피를 거칠게 내리며 옥타비아누스는 한숨을 쉬었다. 정말 고작 오후 햇살에 비루먹은 나귀 마냥 픽픽 쓰러지는 자신의 몸뚱이가 저주스러울 지경이다. 조금 전에 오아시스의 차가운 물에 적셔온 수건도 금방 미지근해졌다. 신경질 적으로 물수건을 집어 던졌다. 바닥에 떨어진 물방울이 순식간에 공기 중으로 사라지는 것이 눈 앞에 보인다. 정말 살인이라도 저질러 버릴 것 같은 더위다. 빌어먹을 사막. 옥타비아누스는 알렉산드리아 외곽, 시리아 사막에 주둔하고 있었다. 마이케나스는 필승의 요충지라고 호언했지만, 옥타비아누스는 그저 이 불덩어리 같은 사막을 벗어나고 싶은 지경이다. 수 차례에 걸친 공방전에서 옥타비아누스의 군사들은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포로들은 전향하기 일수였고, 야음을 틈타 도망쳐 온 군사들도 날이 지날수록 늘어만 갔다. 수하 장수들은 소모전을 끝내고 알렉산드리아로 진군하자는 것을 건의했다. 아그리파가 막사의 천막을 걷고 들어왔다. 그 바람의 바깥의 뜨거운 열기가 한꺼번에 몰려와 옥타비아누스는 신음을 터뜨렸다. " 장군, 만나 보셔야 할 사람이 있습니다. " " 으윽. 빌어먹을 사막. 만나다니 누구를? 사자라면, 어제 도착했잖아? 누가 또 사자를 보냈나? " 안토니우스에게 보냈던 사자들은 아무도 문을 열어 주지 않아서 그저 문밖에 서 있다가 돌아왔다고 했다. " 그게........" 아그리파는 평소와 다르게 말하지 못하고 망설였다. " 뭐야? 누가 보낸 사자야? " 짜증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옥타비아누스가 재촉했다. 더위 때문이 아니라 평소에 감정 변화가 거의 없는 아그리파의 태도가 묘하게 그의 성질을 돋구고 있었다. 심호흡을 하고 아그리파가 체념하듯 말하기 시작했다. " 사절은 아니고..... 두시투스라는 자가 만나 뵙기를 청합니다. ...........................안토니우스의 신변에 대해 할말이 있다고 합니다. " 아그리파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옥타비아누스는 뜨거운 태양 속으로 달려나갔다. 귀가 웅웅하고 울렸다. 방금 들은 이야기가 머리로는 이해가 되었지만 가슴에서 거부하고 있었다. " 다시 찬찬히 말해보게!! 두시투스. " 마이케나스가 의자에 앉은 채로 굳어버린 옥타비아누스의 눈치를 보면서 두시투스를 채근했다. " 저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장군을 섬기던 두시투스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생전의 안토니우스 장군은 훌륭한 장수로서 로마를 드높이는 혁혁한 공을 세웠습니다. 허나 아쉽게도 카이사르 미노르님과 대적하 여 악티움에서 패한 뒤 이상증세를 보이고 수하들을 핍박하는 일이 있어, 저를 비롯한 로마의 충신들은 카이사르님께 몸을 의 탁하러 이렇게 왔습니다. " "...........헌데 어째서 그대가 안토니우스의 장검을 들고 있는 것이냐? " 옥타비아누스는 그 검을 기억하고 있었다. 이름 높은 장군이 들기에는 모자라 보이는 듯한 평범한 철검 에 가는 가죽 천으로 손잡이가 메워져 있었다. 잘 길들여진 검 날은 피와 기름이 엉겨 은색의 광택이 아닌 광택 없는 묵빛이었다. 그리고 검막 부분에는 단순하게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라는 글자만이 아무런 무늬 없이 성의없게 새겨져 있었다. " 안토니우스 장군은 돌아가셨습니다. 이 검이 그 증거이고, 이 검에 묻은 피는 오늘 새벽 그가 흘린 피 입니다. " 두시투스는 안토니우스의 장검을 옥타비아누스에게 넘겨주었다. 아직 붉은 빛을 띄고 있는 얼룩이 선명 하게 남아있었다. " 그대가 방금.......누구를....." 옥타비아누스의 머릿속은 새하얗게 비워져갔다. 누가 죽었다고? 누구의 피라고? 손끝에 부서져 내리는 검붉은 조각들이 옥타비아누스의 눈앞에 흩어졌다. 되묻는 옥타비아누스를 의아하게 바라보며 두스투스옆에 서 있던 드미트리우스가 다시 그들의 공적을 강조했다. " 저기 있는 두시투스와 함께 여러 장병들의 뜻을 모아 오늘 새벽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장군을 차고 카이사르 미노르에게 항복하기로 하였습니다. 다른 자들의 방해로 안토니우스 장군의 그 수급을 수습하 지는 못했습니다만, 여기 있는 검이 저희의 말이 진실임을 알려줄 것입니다. " 저 자들이 지금 내게 무슨 말을 하는 것인가. 옥타비아누스는 이해할 수 없었다. 어째서 그들은 저렇게 당당하게 그의 죽음을 고하는가. 폐부에서 솟아나는 뜨거운 열기로 머리에서 휘몰아치고 가슴이 터져 나갈 지경이었다. 너희들이 감히... 너희들이 감히... 그의 검에 손을 대고, 그의 몸에 검을 대고...... 바닥이 꺼지고 천장이 빙글 빙글 도는 것 같았다. 꽉 깨문 입술에서 피가 베어 나왔다. 꽉 쥔 주먹에서 쉴새없이 땀이 흘러내렸다. 일부의 장수들은 그들의 노고를 칭찬하고, 그들의 용기를 감탄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일부는 그들의 행위에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느끼고 있었다. 옥타비아누스는 자랑스럽게 미소짓는 입술을 갈기 갈기 찢어버리고 싶었다. 침착해야 해. 결심했잖아. 진정해야 해. 약속했잖아. " 그래서, 내게 어떤 치하를 바라는 것인가? " 놀랍도록 서늘하고 차가운 목소리가 그의 목울대를 타고 흘러나왔다. 막사 안의 뜨거운 사막의 열기가 슬며시 비껴 흘렀다. " 치하는 무슨, 당치도 않으십니다. 그저 부족한 이 놈들을 속하로 거두어 주십시오. " 두시투스와 드미트리우스는 냉랭한 옥타비아누스의 반응에 의아해 하면서도 자신이 있었다. 그들은 역적을 처단한 위대한 장수로 이름을 날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 너희들은 지난 날 나의 백부님께서 폼페이우스와 일전을 벌이신 것을 기억하는가? " 장수들은 갑자기 옛이야기를 꺼내는 옥타비아누스를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마이케나스만이 무엇인가 눈치 챈 듯 옥타비아누스를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 기억하고 있습니다. " 두시투스는 뭔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여전히 그의 머릿 속에는 로마로 개선하는 위풍 당당한 그의 모습만이 그려져 있었다. " 폼페이우스가 나의 백부님에게 피해 이곳 알렉산드리아에 피신한 적이 있었다. 그 때 폼페이우스에게 은신처를 제공한 것으로 당시의 이집트 국왕 프톨레마이오스는 백부님에 의해 실 각 당하였다. " 옥타비아누스를 잠시 숨을 고르는 듯 말음 멈추고 두시투스를 노려보았다. 그의 시선에 담긴 분노와 위 엄에 저도 모르게 두시투스는 뒷걸음 쳤다. " 백부님께서 알렉산드리아로 진격하시기 전, 한 이집트의 고문관이었던 로마의 장군이 폼페이우스를 살해하고 바로 자네처럼 백부님을 찾았지. 그 대가가 무엇인지 기억하는 가? " 두시투스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갔다. " 그대는 내가 어떤 이름으로 이곳 진주하였는지 잊었는가? 나는 적 이집트를 공격하는 최고 사령관이다. 그대가 내게 반역자의 수급을 가져와야 했다면 안토니우스가 아닌 이집트의 요녀 클레오파트라의 것을 가져와야 했다! 네 놈이 내게 아부를 하고, 영달을 쫓으려 로마의 장군을 죽이다니! 여봐라! 이자들을 끌어내 당장에 참수하도록 해라! 시체는 사막에 내다버려 짐승의 밥이 되게 할 것이 다! 저자들의 목을 깃대에 걸어 배신자의 말로가 어떠한지 철저히 보여주도록 해라! 뭣 들하고 있는가! 지금 당장 참 형에 처하라 했거늘! " 옥타비아누스의 서릿발같은 노성에 주춤하던 병사들이 그들을 끌어내었다. 끌려가던 비명을 지르며 그들은 목숨을 구걸 하였지만 옥타비아누스는 산채로 갈기 갈기 찢어 태워버리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옥타비아누스를 바라보는 장수들의 눈에 경외와 두려움이 아로 새겨졌다. 그들의 사령관은 더 이상 유약하고 배경이 좋은 명석한 젊은 후계자가 아니었다. 그는 이미 후계자가 아닌 한 사람의 지도자가 되어 있었다. 고래 고래 고함을 지르던 그들의 목소리가 한 줄기 비명으로 모아지면서 사위가 침묵으로 잦아들었다. 또 한줄기의 비명이 들리고 곧이어 병사 하나가 비릿한 피내음을 가지고 돌아와 그의 명령이 어김없이 수행되었음을 알렸다. " 옥타비아누스? " 말없이 숨를 고르고 있는 옥타비아누스에게 마이케나스가 조심스럽게 다가섰다. " 옥타비아누스? 자네 괜찮은가? " 마이케나스가 손을 올려 옥타비아누스의 어깨를 잡았다. 축축한 물기가 그대로 그의 손에 전해왔다. 온몸으로 식은 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의 눈은 울고 있지 않지만 그의 몸은 미쳐 나오지 못한 물을 하염없이 흘리고 있었다. " 옥타비아누스!!!!!! " 마이케나스의 손을 뿌리치고 옥타비아누스는 밖으로 달렸다. 그는 막사 밖에 메어있는 아무 말에 올라타고 달려나가려고 했다. 놀란 아그리파의 온몸으로 그의 말의 질주를 막았다. 마이케나스가 뛰어나와 옥타비아누스를 잡았다. " 어딜 가는 거야? 미쳤어? 그 곳은 적진이야! " " 시끄러워!!! " 옥타비아누스는 막무가내였다. 그의 눈은 오아시스 너머의 알렉산드리아의 흰 석벽에 닿아있었다. 달려야 해. " 옥타비아누스, 제발 진정하고!!!!! " " 닥쳐! 뭘 진정하라는 거야! 그가 죽었다면 내 눈으로 확인하겠어!!!!!!!!!!!!! " " 옥타비안!!!!!!!!!!! " 마이케나스가 비명을 질렀다. " 지금 당장 군대를 보내면 됩니다. 안토니우스가 죽었다면 성안도 혼란스러울 터, 지금이 점령의 기회일지도 모릅니다. 제가 함께 가겠습 니다. 그러니 좀 진정하십시오! " 아그리파의 말에 옥타비아누스는 파닥거리던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의 녹색 눈에 깊은 상처가 새겨졌다. 옥타비아누스는 망각하고 있었다. 나는 갈 수 없어. 아무리 달려도 당신의 곁에는 갈 수 없어. 그들을 탓할 수도 없어. 그들이 아니었다면 내가 당신을 죽였을까? 그렇구나, 당신에게 가기 위해서는 나는 창과 방패를 앞세우고 검을 들어야 해. " 아그리파, 지금 당장 군사들을 정비하고 알렉산드리아를 함락한다. 오늘 저녁까지 알렉산드리아의 석벽에 우리의 깃발이 휘날리게 하라. " 아그리파는 그의 주군에 눈을 차마 마주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 6 " 안토니우스..........." 믿을 수 없어. 시각은 자신이 본 것을 거부했다. 붉은 그 것이 그의 몸에서 범람하고 있었다. 거짓말이야. 후각은 자신이 맡은 것을 거부했다. 그 향기는 너무나도 익숙했다. 달려오는 검 끝에서 어떻게 움직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입을 막고 있는 병사의 손을 피가 나도록 물고, 토가를 집어 던져 방심하는 상대의 시야를 가리고 옆에 있던 화병을 걷어찼다. 화병이 요란한 소리를 내고 부서지고 멀리서 사람들이 달려오는 소리가 났다. 당황한 두시투스가 태우를 검으로 찌르려고 할 때, 안토니우스가 벼락처럼 움직였다. 그의 손에는 어느 새 그의 장검이 들려 있었다. 다친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안토니우스의 검은 흔들림 없이 상대를 향해 뻗어갔다. 두시투스의 검과 안토니우스의 검이 교차했다. 챙강하는 소리와 함께 두시투스의 검이 두 동강났다. 두시투스의 어깨에 긴 혈선을 남긴 안토니우스의 검이 바닥에 떨어졌다. 안토니우스는 무리한 움직임에 상처가 벌어졌는지 가슴에서 흘러나오는 피의 양이 눈에 띄게 늘었다. 안토니우스에게 달려가려는 태우의 머리를 향해 한 병사가 검을 내리쳤다. 가까스로 검끝에서 벗어난 태우는 바닥을 굴렀다. 찢어진 이마에서 흘러 내리는 피가 시야에 붉은 장막을 만들었다. 희미해지는 시야 속에 그가 찾는 사람이 피투성이가 되어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한 손으로 상처를 부여잡고 다른 한 손으로 바 닥을 짚고 쓰러지지 않게 버티고 있었다. 안토니우스의 장검을 주워들은 두시투스가 안토니우스를 향해 찬찬히 다가섰다. ' 안돼............' 붉게 물든 시야에서 태우는 안토니우스를 찾기 위해 일어서려고 했지만 몸이 거부했다. 그가 안토니우스에게 검을 내리치는 순간 태우의 시야가 검게 물들었다. 점점 귓가에 들리는 소리들이 작게 줄어들었다. 방 밖에서 병사들끼리 충돌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란 속에서 이아로스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태우는 눈을 뜰 수가 없었다. . . . " 안토니우스? 이아로스? 퀸투스? 모두들 어디에 있어요? 안토니우스? " 어둡고 긴 길을 걷고 있었다. 울창한 숲이 하늘을 빽빽이 덮고 있어 지금이 밤인지 낮인지 분간조차 할 수가 없었다. 어디선가 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자연스레 소리의 방향을 가늠하며 물가를 찾아 걸었다. 이상한 숲 속이었다. 산새가 지저귀는 소리도, 산짐승이 풀숲에서 뛰어다니는 소리도, 바람에 이파리가 부딪치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사위가 너무 고요했고, 그 침묵속에 유난히 물이 흐 르는 장대한 소리만이 고막을 울리도록 들렸다. 검은 숲을 지나자, 끝이 보이지도 않을 만큼 넓은 강이 흐르고 있었다. 바다라고 해도 믿을 만큼 넓은 강이었다. 하지만 일정하게 흐르는 물의 움직임이 이 넓은 물의 모임이 바다가 아닌 강 임을 증명해주고 있었다. " 도대체 여기가 어디지? 모두들 어디에 간 거지? " 천천히 물가를 향해 다가섰다. 너무 목이 말랐다. 조심스레 한 손으로 물을 담아 살짝 맛을 보았다. 시원하고 청량한 향기가 입안에 감돌아 망설이지 않고 두 손에 가득 담고 마시려는데 너무나 그리운 목소리가 그것을 말렸다. [ 그 물은 몸에 좋지 않습니다. 마시지 마세요. ] 익숙한 손이 자신의 손바닥에 담긴 물을 강물에 흘러버렸다. " 아..............카피토? " 그는 대답 대신 빙긋 웃었다. [ 아직 이 물은 당신이 마시기에는 이릅니다. 조금 더 참으십시오. ] 한 모금 마셨는데......설마 한 모금이니까 괜찮겠지 싶어 태우는 시침뚝 떼고 카피토를 향해 웃었다. 믿을 수가 없었다. 정말 카피토였다. 그는 깨끗해 보이는 흰 토가를 걸치고 어느 새 다가와 앉았다. " 카피토....여기서 뭐하는 거야? 날 찾으러 왔어? " [ 누구를 좀 대신해서 오늘은 제가 이 강을 건너는 배의 사공을 하기로 했습니다. 당신을 찾으러 온 것은 아니고 다른 분을 만나러 나왔습니다. ] 사공이란 말에 주위를 둘러보니 작은 배가 숲의 가장자리에 메어 있었다. 이 넓은 강을 카피토 혼자 노를 저어간다는 것인가? 그러기에는 강이 너무 넓어 보였다. " 여길 혼자 어떻게 건너? 내가 도와 줄게. 같이 건너가자. 혼자 기다리면 심심하잖아. 내가 같이 기다려줄게. " 카피토는 자신의 말에 고개를 저어 거절을 표했다. [ 아니요. 제가 기다리고 있는 분은 당신을 여기서 만나고 싶어하지 않으실 겁니다. 당신은 아직 이 강을 건너시면 안됩니다. ] " 왜? 이 강이 무슨 강인데? " 카피토는 대답하지 않고 빙그레 웃었다. 그 웃음이 눈물이 날 만큼 따스해서 따라 웃었다. 뭔가 잊고 있는 있는데 기억이 나지 않았다. " 카피토는 이 강을 건넜어? 되게 넓은데 무섭지 않았어? " [ 네, 오래 전 건넜습니다. 이 강은 소중한 기억을 하나 들고 갈 수 있어서 무섭지 않았습니다. ] 무엇인가 더 물어보려고 하는데, 그 때 멀리서 누군가 부르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 태우...........태우............ " 어? 이아로스 목소리야. 카피토 같이 만나러 가자. " [ 아닙니다. 저는 이 배를 지켜야합니다. 저 쪽 빛나는 곳에서 소리가 들리십니까? 저리로 돌아가십시오. 뒤돌아 보지말고 똑바로 가셔야 합니다. 약속할 수 있지요? ] 언제 어디선가 들었던 이야기였다. 그 때도 알겠다고 약속을 했던 것 같지만 기억이 나지 않았다. 이상한 데자뷰를 느 끼면서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카피토는 또 한번 부드럽게 웃었다. 그가 원래 이렇게 잘 웃었던가? 기억이 나지 않는다. - 태우........태우......... 다시 한번 이아로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 어서 가십시오. 꼭 다시 만날 겁니다. ] " 응, 또 만나, 카피토. " 전에도 이런 약속을 했었던 것 같은데 머리 속에 뿌연 안개가 낀 것만 같았다. 카피토의 말을 따라 빛이 있는 곳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갔다.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이아로스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가까이 다가서자 그 목소리의 절박함이 점점 더 커져갔다. 뭐지? 심장이 두든 두근 뛰었다. 무엇인가 잊고 있었다. 카피토와의 약속을 되새길 겨를이 없었다. 뒤를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빛을 향해 뛰었다. 눈이 부신 빛이 가까워질수록 머리 속을 덮고 있던 안개가 서서히 걷혀졌다. 아아, 안토니우스....... 몸이 녹아 내릴 것 같은 눈부신 빛이 작렬했다. " 안토니우스!!!!!!!!!!!!" 허공을 그러쥐며 몸을 일으켰다. 걱정이 가득 담긴 이아로스의 얼굴이 눈 앞에 있었다. 방금... 카피토는? 뭐가 어떻게 된거지? " 정신이 들어요? 내가 누구인지 알겠어요? " " 이아로스..........." " 다행입니다. 정말 다행이에요. " 이아로스가 태우의 손을 잡고 연신 다행이라고 중얼거렸다. 그의 눈에는 기쁜 안도의 기색과 같이 숨길 수 없는 슬픔이 가득 차 있었다. 두근. 두근.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 이아로스....안토니우스는? " 손등을 감싸고 쓰다듬던 이아로스의 손이 멈칫했다. 그의 갈색 눈에 호수처럼 파문이 일었다. " 제 손을 잡고 일어서세요. " 태우는 떨리는 손으로 이아로스의 손을 잡고 침상에서 일어섰다. 주위를 둘러보니 안토니우스와 함께 쓴 방에 딸린 곁방의 침실이었다. 멀리서 여러 사람들의 두런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방향은 어제 안토니우스와 함께 사랑을 나누던 세 개의 등잔이 밤을 밝히던 그 곳이었다. " 이쪽입니다. 제가 부축하겠습니다. " 한 발 한 발, 태우가 발을 디뎠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더 가까워 졌다. 이아로스를 알아본 시녀들과 병사들이 뒤로 물러섰다. 방안에는 바쁘게 움직이는 의사로 보이는 사람들과 한 켠에서 기도를 올리고 있는 신관들이 있었다. 클레오파트라가 무 릎을 꿇고 침상 앞에서 오열하고 있었다. 태우는 그렇게 강인한 여성이 서글프게 눈물을 흘리는 것이 기이했다. 클레오파트라 옆에 여덟 살 정도로 보이는, 한 눈에도 쌍둥이 인 것을 알 수 있는 인형같이 아름다운 아이들이 어머니의 옆에 앉아 훌쩍이 고 있었다. 클레오파트라의 뒤쪽에 서있는 한 시녀의 품에는 어린 아이가 안겨서 잠들어 있었는데 눈이 부시게 밝 은 금빛머리를 가지고 있었다. 침대 가까이에 서 있던 사람들 중에 한 명이었던 퀸투스가 이아로스와 태우를 알아보고 손짓을 했다. 태우는 다가서는 것이 두려웠다. 도망치고 싶었다. 천개가 눈앞에 펄럭였다. 희고 투명한 비단이 바람이 휘날렸다. 그 사이로 너무나 아름다운 남자가 누워 있었다. 하늘거리는 천개 사이로 붉은 물결 속에 그가 있었다. 핏기가 사라진 피부 때문에 금발이 더욱 두드려지게 빛났다. 따스하게 웃던 푸른 눈은 굳게 닫혀 있었다. 태우는 다가가서 조심스레 그의 입가에 손을 대었다. 어제까지 자신을 사랑한다고 말했던 입술이 닫혀 있었다. 가느다란 숨이 태우의 손에 느껴졌다.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뜨거운 눈물이 안토니우스의 얼굴에 점점이 떨어졌다. 자신의 눈물을 조심스레 닦아주는 손길을 느끼면서도 태우는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 손길은 부드러웠지만 전처럼 강한 의지를 담고 있지 않음이 느껴졌다. 다시 마주 본 푸른 눈이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바다와 같이 푸른 눈에 정말 물이 담겨 있었다. 그의 조각 같은 얼굴에서 한줄기 짠물이 흘러 넘쳤다. " 이리..." 손 짓으로 안토니우스가 태우를 불렀다. 태우가 침상 곁에 앉았다. 또 한 번의 손짓으로 안토니우스는 무엇인가를 퀸투스에게 말했고, 오랜 친구사이라는 것을 증명하듯 퀸투스는 방안의 사람들을 내보냈다. 방안에는 의원인 메로스와 퀸투스, 이아로스만이 남았다. " 네가 무사해서 다행이야. " 안토니우스가 말했다. 태우는 고개를 저었다. 뭐가 다행이라는 거야. 반박하고 싶지만 목에 걸린 이야기는 소리가 되지 않았다. " 이마가 찢어졌군. 아프지는 않아? " 아무 말도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누굴 걱정하는 거야. 반박하고 싶지만 목에 걸린 이야기는 소리가 되지 않았다. " ... 네가 무사해서 다행이야. " 고개를 마구 저었다. 다행인 것은 아무것도 없어. 안토니우스의 눈이 처연해졌다. " 역시 나는 신의 있는 사람이 못 되는가 보군. " 그는 자조적으로 말했다. " 아니에요.. 약속을 지키면 되잖아요.. 같이 동쪽으로 가지로 했잖아......포기하지 말아요.... 함께 살아가기로 약속했잖아요......." "..........태우............" 그래, 단 한마디 대답할 수 없는 자신이 저주스러웠다. 너와 함께 하고 싶다. 그 약속을 지킬 거라고 확언할 수 없는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작은 욕심이라 생각했었다. 지킬 수 있는 약속이라고 장담했었다. 안토니우스는 그가 회생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차마, 그의 검은 눈동자에 진실을 말해 주기 어려웠다. 메로스는 그의 상처는 깊지만 절명할 정도는 아니라고 했다. 하지만 안토니우스의 피는 멈추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피가 굳어 출혈을 막아야 했지만 안토니우스의 상처에서는 계속해서 피가 베어 나왔다. 상 처 때문인지 아닌지 원인을 알 수 없는 미열이 가라앉지 않았다. 피가 녹아버리는 것처럼 굳지 않았다. 모든 것을 알아채고 쓰러진 것은 클레오파트라였다. 그녀만이 안토니우스의 피가 굳지 않는 원인을 알았다. 모르고 있던 사실을 그의 상처를 보고 영민한 그녀는 깨달을 수 있었다. 그는 독배를 마셨다. 단 한 모금이었다. 뼈와 내장을 녹이는 독수는 그 미미한 양으로 안토니우스의 생명을 앗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미미한 양의 독수는 안토니우스의 상처가 아무는 것을 생명이 새어나가는 것을 방관했다. 오열하는 클레오파트라를 원망하지는 않았다. 원망스러운 것은 나약한 자신. 그 잔을 거절하지 못하고 여인의 가냘픈 목을 꺽지 못하는 유약한 시인의 마음.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저주와 원망. 사랑한다 말했던 이를 두고 떠나야 하는 가슴 아픔. 새벽 이슬이 싸늘했던 것은 지금의 슬픔에 대한 경고였는가. 사나운 새벽의 여신은 그에게 아침을 허락하지 않으심인가. 다시는 태양의 곁에 갈 수 없음인가. 해가 뜨는 동쪽으로 가려했다. 그의 고향이라던 동쪽으로 가려했다. 해가 뜨는 곳으로....... 내일이 오는 곳으로, 미래를 살고 싶었다. 절실하게 바라고 바랬다. 함께 내일을 맞이하고 싶었다. 그와 함께 미래를 만들고 싶었다. 눈물이 흘러 내렸다. 가슴이 아프고 너무나 슬펐다.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의 눈앞에서 울고 있는 이의 아픔을, 그의 눈앞에서 울고 있는 이의 슬픔을, 가늠할 수 없었다. 가슴이 찢어지고, 난도질당하고, 산채로 태워져도 지금 안토니우스의 심정보다 심하지는 않으리라. 무너지는 자신의 심정보다, 절절하게 매어지는 이 가슴보다, 눈앞의 이의 슬픔과 아픔이 더 크다는 것이, 그 아픔과 슬픔을 막아주지 못하는 것이, 그 아픔과 슬픔의 원인이 자신에게 있다는 것이........ 안토니우스를 안타깝게 하였다. " 제발 약한 소리하지 마세요. 나를 두고 떠나지 마세요. 같이 함께 살아가기로 했잖아요. 죽지 않겠다고 약속 했잖아요.... 옥타비안이 지중해의 패자가 되는 것을 함께 지켜보자고 했잖아요..." 그가 고집스레 약속을 지키라고 하지만 지킬 수 있다고 빈말조차 하지 못한다. 멀리서 공격을 알리는 각적의 소리가 성안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처음 보다 더 가깝게 들리는 소리는 옥타비아누스의 군대가 지척에 와있음을 말해주었다 안토니우스의 시선이 잠시 창 밖을 향하였다, " 난 그 애가 월계관을 쓰는 것을 보지 못할 것 같아. 그대가 대신 지켜봐 줘. 7개 언덕에 로마가 세워진 이래, 가장 빛나는 별이 되겠지..." 승자의 월계관을 쓴 이제 어른이 된 그를 보고 싶었지만, 눈이 점차 흐려지고 있었다. " 옥타비안은 지중해에서 가장 위대한 지도자가 될 거에요. 로마는 그를 제 1의 시민이라고 부르고, 원로원은 그에게 황제의 관을 바쳐요. 옥타비아누스는 황제의 칭호대신에 아우구스투스, 존엄한 자라고 불리지요. 옥타비안은 그의 후계자들 보가 오래 오래 장수하며, 로마의 역사가 지속되는 한 그보다 더 위대한 지 도자는 다시없어요. 위대한 팍스 로마나(Pax Romana)를 만드는 반석이 돼요. " 태우는 그가 알고 있는 옥타비아누스의 찬란한 미래를 안토니우스에게 말해 주었다. 안토니우스는 티끌만큼의 의심도 없이 태우의 말을 믿었다. 안토니우스의 얼굴에 조금 만족해하는 미소가 피어올랐다가 사라졌다. 태우의 눈에서 쉴새 없이 맑은 물이 흘러내렸다. 그 눈물을 그치게 할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까웠다. 그의 눈에서 흘러내리는 눈물과 자신이 흘리는 피 중에 어떤 것이 더 많을까. "Meus. Meus Amor. Mea Uxor. " 나의 사람, 나의 연인, 나의 반려. Amo, Amo te, Semper Amabo te. 사랑한다, 너를 사랑한다, 영원히 너를 사랑한다. " 흐흑. 안토니우스.........." 안토니우스의 손이 태우의 얼굴을 잡고 조심스레 그의 곁에 오게 했다. 맑고 깊은 그의 검은 눈동자에 희미하게 자신의 모습이 비쳤다. 이 검은 눈동자를 다시 볼 수 없다면........ 그가 자신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상처에서 베어 나오는 피가 구의 얼굴과 손을 붉게 물들였다. 자신이 흘리는 피보다 더 진한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것을 안토니우스는 알고 있다. 그 눈물을 닦아 줄 수 없다. 다시는 그대를 안지 못하겠지. 다시는 그대의 검은 눈을 보지 못하겠지. 다시는 그대의 입술을 맛보지 못하겠지. 그대를 두고 떠나는 나를 용서하지 말아. 영원히 나를 잊고, 나에게 죄의 대가를 치르게 해. 그대의 기억은 모두 내가 가지고 망각의 강을 건널 테니, 부디 나를 잊고, 그대는 그대의 미래를 향해 나아가야 해. " 미안하다. 하지만 그대가 살기를 바란다. 나를 구원해 주었듯이 언제가 그대도 누군가의 손에 다시 희망을 찾기를 바래. " " 싫어........그런 말...나도........나도........." 뒷말을 듣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안토니우스는 손을 들고 태우의 입에서 나오려는 말을 막았다. " 그 녀석은 절대 그대를 나와 같은 배에 태우지 않을 거야. 그렇지? " 구석에 말 없이 서 있는 이가 고래를 끄덕였다. 흰 토가를 맵시 있게 걸친 그림자가 진작에 와 있었다. 방안의 그 누구도 소리 없는 방문자의 존재를 눈치 못했지만 안토니우스는 그가 잊지 않고 와준 것이 너무 고마웠다. 그래, 오래 기다리게 해서는 안되겠지. 태우의 얼굴을 감싸쥐고 있던 손이 털썩하고 떨어졌다. 심호흡을 하듯 안토니우스는 깊은 숨을 몰아 쉬었다. 태우의 모든 향기를 담아 내듯 한 번의 큰 들숨이 있고 그 숨은 다시 공기 중으로 흩어지지 않았다. 푸른 동공은 사랑하는 이의 얼굴을 조금이라도 더 담겠다는 듯 고집스레 열려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처연한 미소만이 남아 있었다. 사나운 새벽이 끝나나고 있었다. 제 9 장 Furiosa Aurora - 사나운 새벽 편 끝. ***************************************** + 로마의 휴일 종 장 Augustus - 존엄한 자 철썩. 쏴아아. 파도가 발끝까지 밀려왔다가 다시 밀려 내려갔다. 햐얀 포말이 발가락을 간질이다가 손으로 잡을라치면 손가락 사이로 매정하게 빠져나갔다. 등을 돌리고 떠나려고 하면 어느 새 다시 발 밑으로 다가와 매달린다. 가지 말라고 그렇게 붙잡다가도 뒤돌아 서버리는 파도에 부름에 사내는 꼼짝도 않고 밀려오는 바다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바닷바람이 그의 검은 머리를 거칠게 휘젓고 지나쳐도 그는 그저 푸른 바다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 거기서! 넘어 진단 말이야!! 필라델포스!!! " 낭랑하고 앳된 목소리에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해변에 어린 아이가 맨발로 뛰고 있었다. 해변에 한가롭게 날아다니던 갈매기들이 놀라 날개를 펴자 아이는 까르르 웃으면서 새를 잡기 위해 앞도 보지 않고 폴짝 폴짝 뛰기 시작했다. 그 뒤로 아이 의 누나뻘로 보이는 소녀가 난감한 듯 아이를 잡기 위해 뛰었다. 파도에서 뛰어 오른 물방울이 아이의 금빛 머리에 앉아 보석을 뿌려 논 것처럼 반짝였다. 남자의 눈이 아이의 금빛 머리로 향했다. 황금을 햇살로 녹여 바른 것 같았다. 필라델포스라고 불리는 아이는 남자의 검은 눈을 마주 보자 활짝 웃고서 그를 향해 달려왔다. 꼬마 아이의 관심사는 더 이상 하늘을 나는 새에게 있지 않았다. " 아햐햐햐햐- 아찌~ " 고사리같은 손바닥을 펼치고 작은 발이 모래에 폭폭 빠지면서 뒤뚱 뒤뚱, 해변에 앉아 있던 남자의 눈이 부드럽게 웃었다. 아이의 뒤에서 아이가 넘어질까 걱정하던 소녀와 그 뒤를 시립 하듯이 따르던 시녀들과 병사들도 정말 오랜만에 보는 그의 미소에 숨을 삼켰다. 오랜 가뭄 뒤에 단비가 내린 것같았다. " 아찌~~ " 아기 천사같은 꼬마가 남자의 품에 파고들었다. 부비 부비 얼굴을 묻고 모래 투성이의 손을 남자의 머리에 가져다 대었다. 남자는 어리광을 부리는 아이를 안고 천천히 일어섰다. " 누나가 걱정하지 않니. 앞을 보고 달리지 않으면 넘어진다. " 부드럽게 타이르지만 아이는 고개를 도리질치며 큰소리로 외친다. " 필라델포스는 넘어져도 안 울어! 괜찮아, 아찌! " 그러게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 작은 아이의 몸을 안고 남자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푸른 아이의 눈에는 눈이 부신 순수함이 가득 담겨 있었다. 문득 남자의 다시 검푸른 바다를 향했다. 그의 푸른 눈은 깊고, 광활했다. 그래서 바다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매일 매일 바닷가를 찾았다. 그 눈동자에 몸을 던지고 싶다는 충동이 하루에서 수십 번은 더 들었다. 아이의 푸른 눈은 정말 한없이 맑고 투명한, 푸른 빛. 그 어떤 파랑도 아이의 눈앞에서는 푸르다 하지 못할 것이다. 그토록 보고싶은 눈동자는, 바로 이 곳에 있었는데. 아이를 안은 남자의 팔이 잠시 흔들렸다. " 죄송합니다. 필라델포스가 제멋대로....산책을 방해한 것은 아닌지....." 소녀가 앞으로 나서며 사과를 했다. 어딘가 어색함이 묻어나 있었다. 어머니를 닮은 흑갈색의 눈동자가 남자의 기분을 파악하러 애썼지만 조금 전의 미소가 사라진 남자는 그저 묵묵히 앞 을 걸을 뿐이었다. 뭔가 말을 하려던 소녀는 그의 발걸음이 저택을 향하고 있어 그 뒤를 따랐다. 셀레네스는 남자가 어려웠다. 시녀들의 입 방정에 일찍이 남자를 알고 있었다. 그녀의 쌍둥이 오빠인 헬리오스도 그녀의 큰 오라비도 그를 매우 싫어했다. 남자는 쌍둥이들에게 무관심했다. 아니, 그는 모든 것에 무심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필라 델포스는 유독 남자만을 따랐고 남자는 필라델포스에게는 다정하게 대해 주었다. ' 아마...........아버지를 가장 많이 닮아서일 꺼야. ' 소녀의 얼굴이 금빛 머리가 간지럽게 부딪쳐왔다. 이집트 식으로 땋아 내리던 금빛 머리를 그리스 식으로 틀어 올린 것이 아직 어색하기만 했다. 헬리오스 역시 태양의 신의 이름을 가진 이답게 셀레네 스의 옅은 금빛 머리보다는 짙은 금색의 머리를 가지고 있었다. 셀레네스는 알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은 아버지 보다 어머니를 닮아 있었지만 자신들을 보살펴 주는 이, 앞으로 어머니라고 불러야 하는 이, 그리고 눈앞에 걸어가는 남자 가 종종 그들의 금빛 머리를 그립게 바라본다는 것을. 그리고 부러웠다. 필라델포스의 사파이어를 박아 놓은 듯한, 아버지를 닮은 그 푸른 눈동자가. 저택에 돌아갔을 때는 서산에 해가 걸려 있었다. " 어서 와요, 산책을 즐거우셨나요? "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그들의 앞으로 아름다운 여인이 다가왔다. " 네, 늦어서 죄송합니다. 저 방에 올라가 옷을 갈아입고 오겠습니다. " " 필라델포스가 잠이 들었군요. 이리 주세요, 방에 가서 재워야겠어요. " " 아니요. 제 방에 가는 길에 데려다 줄게요. " 칭얼대는 아이를 조심스레 고쳐 안으면서 대답했다. 그 모습을 보며 옥타비아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아이들의 철없는 발랄함이 그에게 적지 않은 생기를 나누어주고 있는 것 같았다. " 그리고....잠이 필요한 분은 당신인 것 같아요. 오늘도 새벽부터 계속 바닷가에 나가 있었지요? 테리우스. 제발 몸을 좀 생각하세요. " 옥타비아는 피곤의 기색이 역력한 태우를 보며 걱정스레 말했다. ".............괜찮아요. " 목례를 하고 아이를 안고 계단을 오르는 그의 뒷모습을 옥타비아는 작은 한숨과 함께 보았다. 토가를 두 번이나 조였는데도 그에게 헐렁했다. 점점 말라가는 것은 그의 몸일까, 아니면 마음일까. 옥타비아누스는 아이들과 함께 그를 데려왔다. 옥타비아누스가 잘 보살펴 달라고 할 때도 죽어서 장례까지 치른 사람이 살아 돌아온 것에 놀라야 했는지, 아니면 옥타비아누스의 낯선 모습 에 놀랐는지 그녀도 알 수 없었다. 그는 정말 무덤에서 살아 돌아온 것 같았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지만 그는 살아가고 있었다. 위태로워 보이는 그의 표정과는 다르게 강인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매일처럼 깊은 밤 악몽을 꾸고, 새벽부터 바닷가에 앉아 멍하니 바다를 바라보면서 하루 하루를 걸어가고 있었다. " 옥타비안..............." " 누님. 그는 어디에 있습니까? " 옥타비아는 전령에게 양피지를 건내 주고 나서 다가오는 동생을 보았다. 그는 원로원에서 프린켑스(제1 시민)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전쟁으로 혼란스러워진 동방의 속주를 단속하고 로마내의 권력을 착실히 장악해 가는 동생의 모습이 낯 설었다. " 응. 필라델포스의 방에 있을 거야. " 옥타비아누스의 눈이 이층 계단에 잠시 머물렀다. " .........그는 잘 지내고.........아닙니다... 제가 직접만나보죠. " 옥타비아누스는 방금 전 올라갔던 사람의 뒤를 따라 층계를 올랐다. 그리고 옥타비아는 층계를 오르는 뒷모습이 낯익다는 생각이 들었다. 위태로워 보이는 그들의 뒷모습과, 마지못해 하루하루 살아가는 그들의 모습이 누군가와 너무나 닮아 있었다. 천천히 이층으로 올라가는 옥타비아누스의 귀에 낯선 가락의 노래 소리가 들렸다. 공손히 인사하는 시녀를 뒤로하고 옥타비아누스는 소리의 근원지를 들여다보았다. 방문에 등을 돌리고 침대에 걸터앉은 그가 나지막히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 엄마가 섬 그늘에 굴 따러 가면 아기가 혼자 남아 집을 보다가 바다가 불러주는 자장 노래에 팔 베고 스르르르 잠이 듭니다 아기는 잠을 곤히 자고 있지만 갈매기 울음소리 맘이 설레어 다못찬 굴 바구니 머리에 이고 엄마는 모랫길을 달려옵니다 " 그의 입에서 나오는 노래는 그 의미를 알 수 없었지만 무척 슬픈 느낌이 들었다. 아이의 등을 노래에 맞추어 토닥이자 칭얼거리던 필라델포스는 스르르 잠이 들었다. 필라델포스가 색색거리며 잠이 들었지만 그는 나오지 않고 아이의 금발 머리를 계속해서 쓰다듬었다. 금빛 머리, 그의 하얀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금색의 타래를 보자 눈시울이 시큰해졌다. 그때에도, 저 남자는 그의 금빛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알렉산드리아를 점령하고 옥타비아누스가 입성했을 때 그를 맞이한 것은 죽음들이었다. 프로크레이우스와 돌라벨라에게 클레오파트라의 신병을 확보하라고 했지만 옥타비아누스를 우롱하듯 그녀는 그들이 돌아서자마자 자살을 했다. 무화과의 바구니에서 나온 두 마리의 독사는 그녀를 고통 없이 죽음의 강으로 인도했다. 그녀는 자신의 아이들에 대한 선처를 부탁했고 이집트에 허울뿐인 파라오를 세우지 말 것을 요구하였다. 어머니로서 그녀는 자신의 죽음이 아이들을 살리는 길이라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여왕으로서 그녀는 이집트가 로마의 속국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이집트는 옥타비아누스의 개인적인 영지가 되었다. 옥타비아누스는 유언에 그녀가 그토록 아꼈던 아들인 카이사리온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는 것이 의아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애초부터 옥타비아누스는 클레오파트라와 카이사리온을 살려둘 생각이 없었으니까. 카이사리온은 시리아로 달아나려다 아그리파에 의해 살해되었다. 그는 조용히 옆에서 앉아 금빛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악몽을 꾸는 사람을 달래는 것처럼, 온화하고 따뜻하게 손가락을 움직였다. 그가 안토니우스의 발치에서 무릎을 꿇고 앉았을 때에도, 그는 가만히 서서 단지 금빛 머리를 손으로 빗고 있었다. 그래서 그가 단지 잠이 들었다고 생각했다. 저 남자의 손질이 끝나면, 그가 일어나 앉아 인사를 할 것 만 같았다. 금방이라도 다시 그 푸른 눈으로 환하게 웃어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옥타비아누스가 발치에 하룻밤을 지새웠어도 안토니우스는 일어나지 않았다. 날이 밝아올 무렵, 햇살이 안토니우스의 몸을 비췄다. 그의 머리는 언제나 햇살에 부딪쳐 햇살보다 밝은 빛을 냈었는데 금빛머리는 광택이 사라져 있었다. 그의 눈은 언제나 하늘보다 더 푸른 빛을 담고 있었는데 푸른 눈은 굳게 닫혀 있었다. 그의 입술은 언제나 산들바람보다 부드러운 소리를 토해내었는데 그의 입술은 파리했다. 뚝뚝 바닥에 점점이 물방울이 맺혔다. 눈물이 흘러 그의 죽음을 알았다. 옥타비아누스는 태우가 일어나 다가설 때까지 안토니우스의 발치에서 한참을 울었다. 그가 죽었다. 그 사람을 다시 볼 수 없다. 그 사람을 다시 만날 수 없다. 그 사람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그 사람에게 단 한 마디 하지 못한 말이 있었다. 그는 죽었다. 단 한번도 그의 죽음을 상상하지 못했다. 자신이 걸어가는 길에는 어김없이 그의 죽음이 놓여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상상하지 못했다. 그의 죽음이 가져올 고통과 번민과 아픔을 감히 상상도 가늠도 하지 못했다. 가슴이 갈갈이 찢어진다는 것을 알면서도 앞으로 걸어야 했었다....... " 언제 오셨어요? " 필라델포스가 깰 것을 걱정했는지 태우는 소리 없이 다가와 작게 속삭였다. 말없이 복도에 나와 잠시 걸어 두 사람은 바다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테라스에 섰다. 바다에 붉은 노을이 서서히 드리우고 있었다. 약속이나 한 듯 잠시 그들은 일몰을 감상하였다. " 잘 지내고 있었나요? " 붉은 해가 바다에 잠기고 나서 하늘이 검푸른 바다빛으로 물들고 있을 때 즈음에 그가 갑자기 말문을 열었다. " 네, 국내의 일도 거의 마무리가 되었습니다. " 사실, 잘 지내고 있냐는 평범하고 당연한 물음은 자신이 그에게 해야하지 않나 하고 옥타비아누스는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다행이군요 라고 호의를 담아 대답하였다. ".................." "..................." 또 말없이 이제는 하나 둘씩 빛이 켜지는 별들을 세었다. 별의 숫자가 열 개에서 순식간에 수십여 개로 늘 어날 무렵, 이번에는 옥타비아누스가 계속되는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말을 건냈다. " 이번에 원로원에서 존엄한 자(Augustus) 라는 칭호를 내게 준다고 하더군요. 거절을 했어요. 나는 그런 것 원하지 않아. " 옥타비아누스는 원로원에서 자신에게 황제의 관을 바치려고 하는 것을 수 차례나 막았다. 오히려 전쟁이 끝난 후에는 그가 누렸던 제 1시민의 지위와 군총수의 지위를 반납했다. 카이사르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려고 했다는 소문 때문에 암살 당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옥타비아누스는 제1 시민(Princeps)의 지위도 아우구스투스의 지위도 달갑지 않 았다. 하지만 충분히 숙지하고 있다. 자신이 나아가야 할 길을.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고, 거부하지 않았으며 그의 희생을 딛고 걸어야만 했던 것이다. " .............. 당신은 존엄한 자가 되어야해요. " 확신? 아니 단정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담담하게 그는 오늘 원로원에서 이야기 된 일을 이치에 맞다는 듯 이 이야기했다. " 하지만 내게는 너무 무겁습니다. " 투정은 아니다. 로마는 너무 혼란스러워서 지금처럼 원로원의 느슨한 지배가 지탱할 수 없을 정도로 강대해져 있었다. 이제 그들이 두려워하는 티 라누스(독재자)가 나타나야 할 시점인지도 몰랐다. 백부는 그 것을 알고 있었고 자신에게 그 것을 기대했었다. 하지만 무거웠다. 너무나 무거웠다. 고통스러웠다. 너무 아팠다... " 그가 쥐어준 짐이에요. 끝까지 버텨야지요. " " 무슨? " 로마로 돌아오고 나서 그의 웃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티끌하나 없이 환하게 웃었다. 그 검은 눈이 당황하는 옥타비아누스를 똑 바르게 바라보았다. " 난.....아직 당신이 존엄한 자에 어울리는 지는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당신은 로마의 가장 위대한 지도자였지요. 내가 만약 이 곳에 오지 않았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당신은 그저 이름뿐 인 겉보기에만 존엄한 자가 되었을 수도 있겠지요. 수완 좋고 운이 좋고 능력 있는 정치가가 되었을 테죠. " ".................." 자신을 낮게 낮추어 말하고 있었지만 기분이 언짢거나 하지 않았다. 이해하기 어려워서 였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 하지만......나는 아무도 믿지 않겠지만, 그 누구도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어디에도 그런 기록이 남아 있지 않지만.. 나만은 알고 있는 사실이 있어요. 세상은, 역사는 사람들은 당신이 로마의 제1시민, 첫 번째 황제요, 존엄한 자라고 기억하겠지만... 나는 정말 존엄한 자는 안토니우스라는 것을 알아요. " " !!!!!!!!!! " 옥타비아누스는 숨을 삼켰다. 갑자기 목울대에서 뜨거운 곳이 솟구쳐 올랐다. " 그리고, 안토니우스가 그 존엄한 자라는 이름을 당신에게 물려주었다는 것을요. 그러니 당신은 그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어야해요. 세상사람들이 아무도 모른다고 하여도 내가 알고 있으니까 내가 지켜보고 있으니까 그 사람대신 내가 당신을 보고있으니까... 옥타비아누스, 당신은 존엄한 자가 되어야해요. " " 으흐흑 " 옥타비아누스는 기어코 울음을 터뜨렸다. 흐느끼는 그를 안으면서 태우는 다시 한번 그의 귓가에 말해주었다. " 그가 진실로 존엄한 자였다는 사실을 잊지 않아요. 이 세상 그 아무도 알지 못해도 우리 두 사람이 꼭 기억해야해....." 당신은 그의 꿈을 이루어 주어야 해. 그 것이 그의 삶의 이유였으니까. 옥타비안은 그렇게 한 동안 눈물을 흘리고 돌아갔다. 자신의 품에 안겨 눈물을 흘리면서도 그는 예전처럼 어리거나 유약해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나갈 때 벽난로에 불을 붙여 따뜻하게 하는 것을 잊 지 않았다. 그의 세심함에 방안은 따스하면서도 약간은 포근했고 새벽에 처음으로 꿈을 꾸었다. 붉은 꽃이 흐드러지게 핀 넓은 들판에 안토니우스와 카피토와 함께 손을 잡고 걷고 있었다. 멀리서 큰 목소리로 다툼 아닌 다툼을 벌이는 이아로스와 퀸투스가 보였다. 그 안에서 무척이나 행복한 얼굴로 웃고 있었지만 꿈에서 깼을 때에는 왠지 모르게 눈물이 그치지 않았 다. 아득하게 문 리버의 곡조가 흘렀었다. 눈을 떴을 때는 지중해의 강렬한 햇살도, 허리까지 오는 키로 흔들리고 있는 붉은 양귀비도 없었다. 남아있는 새벽의 한기가 조금씩 새어 나오는 햇살과 경쟁하듯 차가웠다. 철썩 쏴아아 철썩 쏴아아 파도 소리가 나를 부른다, 라는 해수욕장에 뛰어들 때나 들어봤음직한 상투적인 문장이 절로 생각이 났다. 그 소리에 홀리듯이 바닷가로 나갔다. 문을 지키던 경비병은 사색이 되었지만 아그리파가 나타나 두 명의 병사를 딸려줘서 겨우 바다로 나올 수 있었다. 바다는 검은 빛을 띄고 있었다. 동쪽 지평선은 희미한 빛이 머물고 있었고, 곧 그 빛은 하늘과 바다와 땅을 삼켜 버릴 것이다. 퀸투스는 옥타비아누스와 마이케나스의 추천으로 브리타니아(영국) 총독부로 가게 되었다고 했다. 원로원에서 사형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있었지만, 옥타비아누스는 그들을 다치게 하지 않았다. 이아로스는 서신에서 함께 가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이아로스는 장군에서 일반 병사로 강등되어 퀸투스의 호위를 서게 되었다고 웃음기 어린 글씨로 전했다. 희미하게 밝아오는 빛 때문에 하나 둘씩 별들이 사라져 갔다. 저 별들처럼, 이 땅위에 사라져야 하는 것이 아닐까. 마지막까지 빛을 내던 샛별마저도 아침 햇살에 잠기고 말았다. 지금 이 시간 속에 발을 디디고 있을 곳이 과연 존재하는 걸까. " 안토니우스 " 철썩 쏴아아 " 안토니우스 " 철썩 쏴아아 이름을 불러도 돌아오는 것은 공허한 파도 소리. 푸른 빛의 바다는 그의 푸른 눈과 다르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바다의 푸르름에 눈을 뗄 수가 없다. 눈을 감았다. 연한 햇살이 눈꺼풀위를 다정하게 키스했다. 쌉쌀한 바닷 바람이 부드럽게 코끝을 애무했다. 쏴아아 낮게 술렁이는 파도 소리가 밀어를 속삭인다. 자박 자박 걸어오는 소리에도 태우는 눈을 뜨지 않았다. 작고 여린 손이 얼굴을 토닥거리면서 칭얼 거렸지만 눈을 뜨고 싶지 않았다. 자박 자박 걸어오는 소리가 앞으로 멀어지고 있었지만 모든 심상이 한꺼번에 사라질 것 같은 두려움에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잠시라도 찰나지만 허상이라는 것을, 환각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지금 눈앞에 그가 서서 다정하게 키스하고 부드럽게 애무하고 밀어를 속삭이는 것이라고 믿고 싶었다. 달콤한 환상은 째지는 여성의 비명소리에 부서졌다. " 필라델포스!!!!!!!!!!!!!!!" 번쩍 눈을 뜨자 거짓말 같이 금빛 머리가 시야에 들어왔다. 금빛 머리가 그와 똑같은 금빛머리가 푸른 물에 휩싸였다가 사라졌다. " 필라델포스!!!!!!!!!!!!!!!!" 파도에 밀려 작은 몸이 떠오르자 바다보다 깊고 푸른 눈이 태우의 검은 눈과 마주쳤다. 안 돼. 안 돼!!!!!!!!!!!!!! 바다여, 그 아이는!!!!!!!!!!! 이름을 부르는 비명 끝에 다른 이름이 하나 덧붙여졌다. " 테리우스!!!!!!!!!!!!!!!!!!!" 첨벙 첨벙, 파도에 작은 아이의 몸은 점점 육지와는 반대 방향으로 떠내려갔다. 물이 허리까지 차 오르고, 가슴까지 차 오르고, 바닥을 딛을 수가 없었지만 작은 금빛의 부표를 따라 태우는 필사적으로 헤엄을 쳤다. 손끝에 물에 젖어 뻣뻣한 옷자락이 쥐어졌다. 늘어져서 점점 밑으로 쳐지는 아이의 몸을 잡고 생명이 움트는 대지를 향해 힘껏 팔을 저었다. 다가오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렸고 순식간에 긴장이 풀렸는지 다리에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다리에 무거운 추가 달린 듯이 점점 몸이 밑으로 가라앉았다. 익숙한, 너무나도 익숙한 바다의 거대한 손길. 가라앉은 몸의 위로 물의 장막이 펼쳐지고 수면에서 산란된 빛이 어지럽게 빛났다. 한 팔로 안고 있던 아이를 수면 위로 힘껏 던져 올렸다. 아이의 몸이 수면위로 떠오르는 것을 보며 몸은 점점 어두운 바다로 가라앉았다. 눈앞이 끝이 없는 푸르름으로 뒤 덮였다. 심해에서 올라오는 듯한 소용돌이가 몸을 감싸고 있었다. 온몸이 갈기갈기 찢기는 듯한 격류에 휘말리는 순간, 태우는 정신을 잃었다. . . . 애초에 아무 것도 없었던 것처럼 파도가 밀려오는 백사장에는 정적만이 감돌았다. 해변에 서 있는 사람들은 그 흔적조차도 찾을 수 없었다. 종 장 Augustus - 존엄한 자 끝 ****************************** + 로마의 휴일 epilogue [ Moon & Lover ] Piano by Hye Jun Yu 심플한 신문광고를 보고 공원 벤치에 앉아 있던 남자는 작게 미소를 지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어딘가 유치하고 상투적인 제목이었지만 동명의 소설을 물론이고 소설을 테마로 한 공연까지 앵콜의 연장선을 걸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한국에 돌아와서 몽롱한 머릿속을 헤집으며 내놓았던 소설은 그 해의 베스트 셀러의 반열에 오 를 정도로 인기몰이를 했다 곧 영화로 만들어질 원작 소설 때문에 소설의 모티브를 따라 곡을 썼던 혜준도 당연히 OST의 멤버 가 되었다. 이번 공연이 끝나면 정말 바빠질 것이다. 내심, 직접 각색하지 않고 시나리오를 전문작가에게 넘겨버리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어쩐지 직접 토해놓은 소설을 다시 해체해서 쓰는 것이 적성에 맞지 않았다. " 이제, 슬슬 가볼까. " 성격 급한 연인은 리허설에 맞추어 가겠다고 약속했음에도 분명 일찍 끝내버리고 냅다 공원으로 달려나올지도 모른다. 스텝들의 부탁도 있고 해서 리허설이 끝날 시간보다 조금 일찍 일어나기로 했다. " Moon River, wider than a mile, I'm crossing you in style some day Oh, dream maker, you heart breaker , Wherever you're goin', I'm goin' your way "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어지던 노래는 계속 되지 못했다. " ................." 갑자기 모퉁이에서 튀어나온 장신의 남자는 자신의 실수임에도 어째서인지 아무 말도 못하고 멀뚱히 서서 쳐다보기만 했다. [ 괜찮으십니까? ] 어설픈 프랑스 어로 말을 걸어 보아도 그는 어딘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끈. 머리가 아팠다. 뭔가 중요하고 그리운 것을 잃어버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토록 강렬하게 그 느낌이 강했던 적은 없었다. 무엇인가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느낌. 머리는 기억을 하지 못해도, 가슴이 알고, 몸이 느끼고 있는 그 어떤 것에 대한 강렬한 반응이 전심에서 나타났다. 자신을 아느냐고, 어리석은 질문을 막 던지려고 할 때 갈색머리의 푸른 눈을 가진 시원스런 미인이 남자의 뒤 에서 튀어나왔다. [ 어머!! 미쉘! 누구랑 부딪친거야? 괜찮아? 뭐? 어머 자기가 잘못한 거야? 그럼 사과 해야지!! 뭐? 너무 미안하고 쑥쓰러워서 말 못했다고? 자기도 참~ ] 맹세코 남자는 그 여자가 속사포처럼 말을 퍼부을 때도 '어', '아', '에' 보다 긴 말을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런 남자를 사랑스럽다는 듯이 푸른 눈을 반짝이며 웃는 여인과 그래도 미안 이라는 말 한마디 못하는 남자를 멍하게 쳐다 보았다. 결코 불 쾌하거나 하지 않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그리움이 밀려들었다. [ 미안해요. 일부러 사과하지 않는 건 아니에요. 워낙 숫기가 없거든요, 미쉘은 착한 사람이에요. ] - .........는 착한 녀석이야. 잘 부탁해 미안한 표정을 지으면서 여인이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와 또 다른 목소리가 울렸다. [ 저 보세요, 손수건이랑, 물병이랑, 반창고까지 꺼내들고 있잖아요? ] - ..저 봐, 환자라니까 벌써 .........까지 구해왔잖아? " 괜찮습니다. 말은 안 해도..........진심은 전해지는 법입니다. "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오르는 것을 끝까지 막으면서 겨우 겨우 그녀의 명랑한 사과를 받아들였다. 장신의 남자와 여인은 팔짱을 끼고 연거푸 사과의 말과 맑은 미소를 남기고 한가로운 공원 풍경의 한 요소가 되어 점 점 멀어져 갔다. 그들의 뒷모습이 점점 흐려졌다. 볼에 닿은 손에 물기가 젖어 들었다. 갑자기 쏟아지는 눈물과 그리움을 주체할 수 없어서. 심장을 파고드는 아픔과, 상실감이 정신을 뒤흔들 듯이 찾아 들어서 눈물이 흘렀다. 말없는 장신의 남자의 수줍음과, 그녀의 아름다운 푸른 눈이 너무나 그립고 정겨워서 너무 고통스러워서. " 태우야? 무슨 일이야? 갑자기 왜 그래? 다 큰 어른이 길에서 울기나 하고... " 혜준은 공원입구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연인의 모습을 보고 한걸음에 달려왔다. 하지만 말없이 서서 절절히 울고있는 태우를 발견하고 지끈 거리는 심장을 부져잡고 그를 안아주었다. 돌아온 뒤로, 그 3년 간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그는 때때로 홀로 깨어나 서글프게 눈물을 흘리곤했다. 지난 3년 간의 기억 속에 어떤 것이 들어있는지 " 아니. 그냥. 굉장히 뭔가........ 반가운 사람을 만난 거 같아서. " " 뭐야 그게? " 혜준은 쓸쓸한 얼굴로 석양을 바라보는 태우의 팔짱을 끼었다. 석양을 뒤로하고 점점 어두워지는 동쪽을 향해 두 사람은 걸었다. "................ 우리 다음에 로마에 갈까? " " .......... 갑자기 왜..." 로마는 두 사람에 있어서 한 가지 금언이었다. 금기의 장소였다. 갑자기 불안감이 밀려들었다. 손이 덜덜 떨렸다. 떨림은 단단히 쥐어오는 따뜻한 손에 의해서 멈춰졌다. "..............이번에는 꼭 동전을 두 개 던져 볼까해서. " 깊은 미소를 담고 태우는 혜준을 향해 말했다. "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 말을 그렇게 했지만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은 막을 수가 없었다. 그래, 같이 가자. 이번에는 둘이 꼭 두 개의 동전을 트레비 분수에 던지자. 그 때 네가 한 개의 동전을 던져서 정말 다행이야. 그 때 내가 두 개의 동전을 던져서 정말 다행이야. 그래서 기다릴 수 있었다. 실종자의 명단에 네 이름이 올라와 있을 때, 트레비 분수의 전설을 떠올리고 너를 돌아올 거라고 믿을 수 있었어. 네가 다시 돌아온 것처럼, 이제 다시 우리 사랑을 하자. 고개를 숙이고 눈물이 글썽한 혜준의 이마에 태우는 슬쩍 입술을 대었다. 목 뒤까지 벌개져서 고함을 지르는 혜준을 남기고 태우는 동쪽을 향해 숨이 차도록 뛰었다. 난데없이 파리의 유서깊은 파크 몽수리(Parc Montsouris)에 나타난 독특한 커플의 자유와 박애와 평등을 사랑하는 파리의 시민들은 열열한 환호를 보내주었다. .................................긴 휴일이 끝났다. Holiday in Rome - 로마의 휴일 끝 [아비케나] 로마의 휴일-외전 " 섹스투스가 레스보스에서 죽었다더군. 아그리파라는 젊은 녀석이 꽤나 활약한 모양이야. " " 아아. " 털썩. 양피지 두루말이가 손에서 미끌어졌다. 단조로운 안토니우스의 목소리 사이로 이아로스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애써 모르는 척 아무렇지도 않게 양피지를 주워 떨리는 손을 감췄다. 군사를 일으키리라는 것을, 그리고 그가 패배할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다. 섹스투스 폼페이우스. 이제 불러도 대답할 사람은 이 세상에 없다. 섹스투스 폼페이우스. 낙인처럼 가슴에 새겨진 그 이름. 섹스투스 폼페이우스. 탄식과도 같은 그 이름. 섹스투스, 포효하는 레오니다스(Leonidas). ************************************************** + 로마의 휴일 외전 제 1 편 Leonidas - 사자의 심장 (1) -미안하구나. 폼페이우스의 요청을 거절할 수가 없구나. 가병과 재물을 보내기로 했다. 그리고......네가 가줘야겠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 들어가는 것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주먹을 쥐고 떨리는 몸을 가다듬었다. 그래서 며칠 전에 형님께서 갑작스레 낙마사고가 났던 거군요. 비릿한 미소가 새어 나오는 것을 감추면서 고개를 돌리는 아버지의 옆모습을 차갑게 응시했다. 꽉 다문 입술의 그는 늙어 있었다. 세 아 들 중에 고민은 했을까? 가문을 이을 장남도 어린 후처에게 얻은 막내도 아닌 어중간한 차남이라면 탁월한 선택이군요. 게다가 유산분배 때문에 아양을 떠는 새 어머님이 무척 좋아하시겠군요. 막내의 몫이 그 만큼 늘어날 테니. 가슴이 서늘해졌다. 어머니가 나를 낳고 돌아가신 것이 내가 어머님의 머리칼과 눈동자를 이어받은 것이 당신께 그리 큰짐 이 되었습니까? ......................제가 그리 큰 죄를 짓고 세상에 나온 것입니까?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를 이길 수 없을 겁니다. 하지만 델리우스가는 폼페이우스에게 빚을 갚아야하죠. 승리할 카이 사르에게 아들이 볼모로 잡혀갔다는 사실만큼 근사한 변명거리가 어디 있을까요. 가 드리겠습니다. 소원대로 눈앞에서 사라져 드리죠, 아.버.지. 내일이면 이 장미 정원도 마지막이겠지. 흐드러지게 핀 장미라도 있다면 이 적막함이 덜어질까? 차가워져 가는 날씨에 장미목은 잎도 꽃도 떨군채 였고 아련했던 향기만 유령처럼 떠돌았다. 차라리 장미가 가득 핀 계절에 떠난다면 조금은 아쉬워하는 이가 있다고 착각할 수도 있을텐데.............. 다이아나(달)가 은은히 하강하는 밤의 사위가 조용해서 바람에 서걱거리는 월계수잎이 책망하는 소리처럼 들렸다. " 사랑하는 친구여, 내가 죽거든 내 검은 무덤 위에 월계수를 심어다오. 내 머리에 어울리지 않으나 창백한 그 빛이 정답고 그리워라, 내가 잠든 땅 위라면 그 그늘 사뿐히 드리우리. " 조용히 그의 시를 읊조린다. 그대의 소망을 이루어주고 싶었는데...... "아폴로나우스............너와의 약속을 지킬 수 있을까? " 아니, 지켜야겠지............ 난 잊지 않는다, 너와 한 맹세를. 길게 땋은 머리를 잘라 비석 앞에 놓았다. 짧아진 머리 때문에 드러난 목덜미가 한기가 서렸다. 화사힌 금빛의 머리가 환상처럼 눈앞에 떠올랐다 사라졌다. 곧 우리는 전장에서 적으로 만나겠구나. 아폴로나우스, 나의 친구, 울부짖는 영혼이여! 격풍에 휘말려 잠시 그대를 떠나는 나를 용서하게! 아폴로나우스(Apollonaus).... 그리운 자네의 이름! 그 이름을 부를 자격도 없는 나를, 어리석은 퀸투스를 용서하지 말게, 나의 친우여! 아폴로나우스, 그대가 버린 맹세의 이름을 나는 기억하네, 나의 친우여. . . . 오호! 네 명째! " 으아악! " " 덤벼랏!!!!!!! 하얏! " 짝짝짝. 병장기가 부딪치는 사이로 무심한 박수소리가 퍼지자 암습자들을 막으며 싸우던 병사들도 황당한 듯 움직임이 멈칫했지만, 어이 거기 조심하라고! 그런 병사들의 심정을 아는 지 모르는 지 여전히 손뼉을 치며 퀸투스는 진심으로(정말) 응원했다. 하는 수 없지 않은가, 나는 뼈 속까지 문관 이라고. 칼은 잡아본 적도 없다네. 이번이 몇 번째 습격이더라. 네 번째인가, 다섯 번째인가. 병사들이 솜씨가 좋아서인지 내 운이 뛰어나서 인지 아직 목은 성했다. 목은. 한꺼번에 20여명이 덤벼든 것은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고 여기는 거겠지. 히스파니아에 들어서고 나서 암습자들이 줄기차게 따라다녔다. 내일이면 폼페이우스 본진영에 들어서니 저들로서는 필사적일 것이다. " 잘한다! 베어버려! " 입으로는 열심히 응원하고 있지만 어깨에 박힌 단검 때문에 한쪽 팔의 감각이 전혀 없다. 혹시나 했지만 처음 암살자들이 나타났을 때 정말 심장이 덜컹했다. 그냥 죽어드릴까요, 아버지. 지금 어깨가 너무 아파서 정말 죽고 싶어요. 정말 아프다구요. 어깨에서 뽑아낸 단검을 쥐고 손목에 슬쩍 내리 그었다. 타들어가는 듯한 어깨 통증 때문인지 가느다란 상처는 눈에는 보이지만 실제로는 없는 듯했다. 방울방울 솟아나는 피가 실선을 이루는 것을 보며 한 번도 힘을 줘 굵은 줄기가 되어 흘러내린 다고 생각했는데, 뭐냐, 이 곰 발바닥은. 단검을 쥔 손은 다른 이의 손에 의해 막혀있었다. ".........뭡니까? " 숭고한 자살의 순간을 방해받아 기분이 나빠진 내 목소리가 삐딱선을 탔다. 적들을 물리친 병사들이 정말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생각해보라, 누구 때문에 똥 빠지게 싸우고 있는데 당사자는 박수를 치고 구경하다 자살하려고 했다면 열 안 받겠는가? ) "뭐냐니? 황당한 놈이잖아? " 나 정도는 아니지만 너야말로 황당하다는 것을 알고 있냐. 자살하려는 불쌍한 인생(나 정말 불쌍하지 않나? 아버지한테 전쟁터로 쫓겨 난데다 죽을 뻔했는데)을 구하겠다는 정의감은 충분히 알겠다만 뒤에서 안은 듯한 이 포즈는 뭐냔 말이다. 겨드랑이에서 나와 배를 감싸고 한 손은 손목을(물론 칼은 든 손!) 잡고 있는 것은 충분히 불순해 보인다. 게다가 당신의 상태도 그리 좋아 보이지는 않는 다만. 황당하다는 듯 나를 내려다보고 뒤에서 안고 있는 자의 배에는 이미 붕대가 튼튼하게 감겨 있었다. 꽤 작은 상처는 아닌 듯한 게 옆에서 안절부절 못하는 부하의 표정에서 충분히 읽을 수 있다. "..............이거 좀 놓으시죠. 뭐냐고 물었습니다만? " " 하! 거참, 너야말로 뭐냐? 포로는 자살이 금지일텐데." 포로. 맞다 포로겠지. 그래도 직접 들으니까 기분이 나빠졌다. 정확히는 포로가 아니라 인질이겠지만. 시건방진 말투, 저 커다란 생김새, 이곳의 위치에 어깨에 걸쳐진 붉은 토가에 수 놓아진 사자의 문양. 말끄러미 올려다보자 얼굴이 붉어지는 게 과다 출혈에 의한 착시로 보인다. 그 산적같은 모습에 쑥쓰럽다는 표정이라니. 원래 저런 자였던가? "포로보다 못한 신세지요....." 씨익 웃어주자, "그..그래도 ....주..죽을 생각은 하..지마.///" 얼굴이 시뻘게지는 게, 역시 소문은 믿을 것이 못된다니까. 휘청, 아 돈다 돌아..피를 한바가지를 흘렸으니 당연한 건가. 쓰러지는 몸을 당황한 듯이 받아 올리는 폼페이우스가의 막내 도련님의 손길에 실소가 흘렀다. 아마 자꾸 늦어지는 나의 도착에 미리 나와본 것이겠지. 나는 돈줄의 인질이 아니던가. 가슴에서 단단하게 감긴 그의 붕대가 확실하게 느껴졌다. 왜 아름 다운 브린디시움을 떠나 이런 황량한 히스파니아로 와야하는지, 집안문제로 볼모로 쫒겨나야 하는지. 왜 이런 곳에서 죽을 결심이나 하고 있는 것인지. 이게 다 폼페이우스가 때문인 것을. 폼페이우스가 카이사르에게 개기지만 않았어도 지금쯤이면 로마에서 실컷 놀고 있을텐 데. 거기가지 생각이 미치자 하염없이 짜증이 나서 울컥하는 순간에 나를 들어올리려 애쓰는 녀석의 붕대감 긴 배를 빡! 소리가 나도록 차버리고 기절을 감행했다. 설마 환자를 때리기야 하겠냐. (자신이 환자를 때린 것은 생각 못함) " 아윽!!!! 이 자식 죽여버린다!!!!!!!!!!" 멀어지는 의식 사이로 들리는 괴성에 그래, 죽이든 살리든 맘대로 해봐라고 생각했지만 그 생각을 머리를 쥐어뜯으며 후회하게 되는 것은 그리 멀지 않은 미래였다. . . . " 이게 무슨 짓 입니까? " " 죽여준다고 했잖아! " 아 그렇습니까 라고 할 줄 알았냐! " 사람을 죽이는 방법에는 독살도 있고 절벽에서 밀어버리던가 말에 사지를 묶어 찢는 것, 또 아앗!............뭐 제일 싫긴 하지만......태형이 지나 치면 죽기도 하고............" "하. 거참, 섹스하면서 이렇게 말많은 녀석은 진짜 처음이네..........." 누가 당신이랑 섹스하고 싶다고 했냐............... " 가장 간편하게 개인적으로 참수를 원합니다만.... 아흑.........." 복.상.사.는 내 방식이 아니란 말이다, 거기다 남자에게 깔려서.....어딜!!!! " 정말 말이 많군! 넌 입으로 하는 섹스하냐? 아니 할 수도 있지! 큭큭.... " 하여간 나는 그의 말대로 죽여준다는 말을 실감했을 뿐만 아니라 입으로 하는 섹스의 의미도 파악했다. 또한 그 일은 한번이 아니라....................이후로 계속되었다, 거의 매일, 하루에 수 번. 밥먹듯이 되풀이되는 일에 그저 익숙해졌다. 그렇다 그저 익숙해졌다. 큰 소리로 웃거나 소리치며 말을 몰고 병사들과 격투를 벌이는 그의 모습에도 밤마다 격렬히 벌어지는 정사에도. 섹스투스는 소문에 들었던 것처럼 산야를 누비는 짐승같은 면이 없잖아 있었다. 소문에는 무자비하고 거칠고 광폭 한 사내, 아버지의 품위를 전혀 이어받지 못했다고 하지만 지금처럼 사냥을 하러 말을 몰아 멧돼지에 정확히 창을 찔러넣는 것을 보면, 폼페이우스의 상징인 사자의 피가 그에게도 확실히 흐르는 것 같다. 오늘 저녁은 멧돼지 구이가 되겠군, 벌써 5마리째지만 사냥을 멈출 기색이 보이지 않는 것을 보면 크게 한탕을 벌릴 모양이다. "어이! 퀸투스 뭐 먹고싶어? 혹시 가지고 싶은 가죽 있어?" "..........별....로." 방금 전 멧돼지를 잡느냐고 부러진 창을 옆에 던져 놓고 가쁜 숨을 내쉬며 그가 다가왔다. 그렇다고 지친 기색이 아니라 "나 한판 더 뛸 수 있어" 라는 폼이라 그의 지칠 줄 모르는 체력을 또 한번 인정해야했다. 다른 곳 어디에서 인정했는 지 같은 어리석 은 질문은 받지 않겠다. " 오랜만의 사냥이야, 뭘 잡아다줄까? " "........사자요. " " 뭐?! 푸하하하하하하 무슨 소리야? 히스파니아에는 사자가 없다고....... 그리고 네겐 이미 사자가 있잖아? 푸하하하하하하하 " 왜 방정맞은 입에서 뜬금없이 사자라는 소리가 튀어 나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여기 저기서 펄럭이는 붉은 사자의 문장 때문인지도........한참을 웃던 섹스투스는 가벼운 입맞춤을 남기고 이틀 뒤 그 귀하다던 은빛여우를 무리 채 잡아왔다. 네 머리색 같아. 달빛에 반사되는 은빛여우의 털은 어머니의 머리색도 닮아있어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옆에서 섹스투스가 깊은 회색 숲에 들어간 보람이 있었다는 둥, 멋진 토가를 만 들 수 있겠다고 한참을 떠들었지만 환상적인 은빛여우의 털빛에 멍하니 고개를 주억거렸다. 섹스투스가 집안의 여자 노예들을 닥달한 끝에 달포 후에 나는 은회색의 여우가죽 토가를 얻게되었다. 무척 따뜻했고 또 아름다운 은빛이었다. ************************************************** + 로마의 휴일 외전 제 1 편 Leonidas - 사자의 심장 (2) 군영에서 나를 보는 무리는 대개 세 부류였다. 첫째 부류는 노골적인 경멸과 적개심. 폼페이우스가의 가주이자, 섹스투스의 맏형을 중심으로 한 무리로 아버지가 카이사르(쥴리우스 시저)에게 연줄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더욱 나를 벌레 보듯 하는 자들. 섹스투스의 남창이라고 공공연히 비웃고 있다. 둘째 부류는 호기심으로 초롱초롱 바라보는 하급 군인들과 시녀들, 혹은 나를 동정하는 사람들..............섹스투스에게 깔리고 난 후 뒤처리를 해주는 착한 시 녀들과 노예들이 여기에 속한다. 가끔 좋은 정보를 가져다 주기도 하는, 내 밥들이다. 뭐 머리부터 발끝까지 충성심으로 무장한 갈루스도 여기에 넣어 줄 수 있겠다. 마지막 부류는 노골적인 접근을 하는, 주로 상습적인 한 사람으로 국한되는데, 바로 "라비에누스............." "여어-- 퀸투스 델리우스. 여전히 나의 동생의 사랑을 받고 있나보지...신수가 훤하지 않군 그래......" 능글맞은 소리를 해대는 섹스투스 바로 위의 형인 라비에누스 폼페이우스. 그가 얼굴을 매만지는 손길을 거부하지 않았다. 그가 턱을 잡아 입술을 빨아들일 때도 나는 뿌리치지 않았다. 섹스투스는 모르고 있지만 그가 없을 때면 나는 라비에누스의 상대가 되기도 했다. 본능적인 직감이 섹스투스에게 절대 알리지 말 것을 경고하고 있었고, 그 것은 라비에누스도 마찬가지였다. 지금 처럼 섹스투스가 정찰이라도 나간 때에는 어김없이 라비에누스는 찾아왔다. " 언제 봐도 아름다운 몸이로군, 그러니 우리 막내가 그 구멍에 흠뻑 빠져 있는 겐가..." "......아흑................하아, ......으윽...." 섹스투스가 내가 주저리 주저리 말이 많다고 불평을 하는 지 이 사내에게 관계를 하다보면 십분 이해가 갔다. 폼페이우스가의 장남인 그나이우스가 그의 아버지를 가장 닮은 유능한 정치가라면, 섹스투스는 뼈속까지 단순한 군인이요, 이 라비에누스는 입만 산 모사꾼같은 자였다. 허리를 흔드는 와중에도 쉴 새없이 떠든다.................하긴 그래서 얌전히 안기는 거지만,, 진짜 정신 사납다. "으흠, 더 힘을 빼, .............적당히 조이라구.....좋아, 더,,,,,,,,,,더,,,,,,,,,흔들어........." 네네, 분부대로 합죠. 털이 북슬북슬한 가죽이 깔린 침대에 반쯤 누운 자세의 라비에누스의 허벅지에 앉아 허리를 흔들었다. 오늘은 그의 불평이 그나이우스에게 집중되는 것을 보니 그나이우스가 군권을 거의 장악해나가고 있나보다. 내부 단속 후 곧 전쟁이라도 벌리려는 건 가. 섹스투스가 밀려날지가 궁금했지만 그리 쉽게 물러설 그가 아니니.... "..아파..........헉,,,,,,,,,,,좀............천천히............하윽............" "좋아, 더,,,,,,,,,깊게 내려 앉으라구!...........흐으윽!!!!!!!" 그의 커다란 손이 엉덩이를 잡고 움직임을 유도하지만 힘든 건 힘든 거다. 계속 움직일 것을 재촉하는 그는 범하는 것 보다 내가 스스로 움직이는 것을 좋아했다. 섹스투스는 그 반대다, 정반대! 어쨌든 라비에누스는 거칠지 않다는 점이, 몸에 별로 무리가 가지 않는 다는 게 편했다. 좀더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데, 좀 더 움직이면서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 헉! " 아아, 아폴로시여! 정녕 당신은 저를 버리시는 군요. "우왁! 이봐 퀸투스!!! 아프잖나! 힘을 좀 빼!!!!!!!! 흐억!! 퀸투스!!!! " 나도 그러고 싶지만.......빳빳하게 굳은 몸이 의지를 배반한다. 몸 덜덜 떨리는 것이.... 소름이 돋는다. 긴장 때문에 그 곳이 심하게 조여진 탓에 라비에누스는 고통어린 신음을 흘렸다. 그가 빨리 그 것을 빼내고 싶은 만큼, 나 역시 빨리 그의 것을 뽑아내 버리고 싶었지만 손 하나 까닥일 수 없었다. 저기 문가에 귀신의 형상을 하고 서 있는 자의 눈에서 뿜어나오는 살기가 뱀 앞에 선 개구리마냥, 공포가 신경을 지배해간다. ".......섹스투스....." " 뭣! 어!?!? 섹스투스라니?......... 섹스투스! 이건.............잠깐!!!!!!!!!! 으아아아악!!!!!!!!!!" 라비에누스가 친형이라는 사실을 망각한(누가보면 부모를 죽인 원수인줄 알겠다) 섹스투스는 살벌하게 칼을 휘둘러(마지막 이성이 검집을 뽑지 않게 했다) 뼈가 부서지는 소리가 난무했 다. 때 마침 들어온 갈루스가 라비에누스를 무사히 구출해 내고, 공포스러운 표정의 섹스투스가 나를 바닥으로 집어 던졌다. 그는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은 채 발길질을 했다. 얼마나 맞았는 지 고통마저 둔감해졌을 때, 그는 나를 뒤집어 단숨에 꽤 뚫었다. 다행히 라비에누스가 사정을 한 번 한 뒤여서 그는 쉽게 뿌리까지 박아 넣었다. 씹어 뱉는 듯한 욕설이 들린 듯 도 했다. 거칠게 머리를 휘어잡은 손, 바닥에 쓸린 가슴의 쓰라림, 뒤에 작렬하는 통증이 뒤섞여 공중에 부여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어느 순간 부욱하는 소리와 함께 사흘의 시간을 건너뛰었다. 그 동안 어떤 일이 있었는지 몸에 남은 흔적과 주변 사람들의 반응으로 유추 할 수있었지만 확인 사살해 보고 싶지는 않다. 환청처럼 남아있는 소리의 향연을 기억의 저편에 묻어버렸다. 나는 기억해 내지 않았다. 모든 것을 잊었다. 나는 아무 것도 듣지 않았다. 나는 아무 것도 기억하고 있지 않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듣지 않았으니까. 확실히 깨달은 것은 라비에누스 말고도 더 상대가 있었다는 것을(여자도 있었다.) 절대 섹스투스에게 들키지 말아야겠다는 것. 그 것은 상대들 도 마찬가지였는지(형이 아니었다면 라비에누스는 죽었을 거라고 내 목을 건다) 더 이상 추근거리는 세 번째 부류는 완전히 사 라졌다. 그와 더불어 잠자리에서 얻었던 유용한 정보들을 (군사기밀까지도) 잃어버린 관계로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야 했다. 그 전과 달라진 것은........나는 ..할 때 섹스투스에게 더 이상 주절거리지 않았다. 그 역시 거칠게, 때로는 부드럽게 나를 취할 뿐이었다. 매일 해가 뜨듯이. 수 년 동안.......... 나는 섹스투스의 고분 고분한 여자가 되었다. 섹스투스는 새벽 녂에 내가 일어나 있는 때에도 나를 안고 있는 손을 풀지 않고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속삭였지만, 내 눈에서는 그저 눈물이 고이기만 했다. 그저 물기가 어렸었던 것 같다. 나는 그의 품 안에서는 벙어리요, 장님이요, 귀머거리가 되었다. . . . " 춥군, 이제 겨울이 오려는가? " 밖에서 밀려오는 찬 공기에 저절로 눈이 떠졌다. 서늘한 냉기가 허전한 하체로 여과 없이 밀려왔다. 바람에 날리는 머리가 등을 간지럽게 했다. 히스파니아에서 맞는 세 번째 겨울이다. 그 간 수 천 번 몸을 섞었으면서도 이불하나 덮어주고 나가지 않은 그를 원망해보지만 그럴 사내가 아니라는 것을 모를 만큼 어리석지는 않다. 게 중에 좀 온전한 토가를 허리에 감싸고 침대에 앉아 창문 사이로 드러난 새파란 하늘을 멍하게 바라 보았다. 뿌연 안개처럼 떠오르는 눈동자, 푸른 터키석 같은, 그대의 눈 같아. 아폴로나우스 ............ "아폴로나우스.................." 무심코 중얼거린 이 한 단어가 어제의 사단을 냈다. 여기 저기 시퍼렇게 자국이 난 몸과 갈기갈기 찢겨 형태를 알 수 없는 옷가지들, 유혈이 낭자한 침대와 꿀럭 꿀럭 삐져 나오는 희뿌연 액체가 어제의 난리를 증명해준다. - 아폴로나우스? 그게 누구지? 왜 대답을 못하나!!!!!!!!!!!!!!!!!!!! 지난 3년 간 별다르게 화를 내거나 광분하는 일이 없었기에(거친 섹스를 즐기는 것은 여전했지만) 미친 사람처럼 날뛰는 그의 모습은 무척 생소했다. 사건의 시작은 묘하게 들떠 보이는 섹스투스가 내민 이집트에서 건너왔다는 팔찌였다. 황금으로 두 개의 줄이 곱게 매듭을 지으면서 꼬여있는 정교한 문양이 새겨진 가운데 티 하나 없이 맑은 터키석이 박혀있었다. 눈이 부시게 푸르른 그리움, 지난 시간동안 망각했던 것이 부끄러워지는, 그 이름.......... "아폴로나우스..................아폴로나우스................." 팔찌에 경건하게 자리한 터키석이 마치 선명한 그의 푸른 눈동자인 것처럼 신성하게 입을 맞추며 그리운 그 이 름을 한없이 불렀다. 그 서글픈 그리움에 눈 앞에 경악한 표정의 섹스투스가 있다는 것도 망각한 채, 그 황금빛의 팔찌를, 마치 그의 빛나는 머리칼 인양, 그 푸른 보석을, 마치 시원한 그의 눈동자인양, 밀려오는 그리움에 정성스레 매만졌고, 강한 힘에 힘없이 부서지는 것을 보았다. " 뭐야? 뭐 하는 거야?! 아폴로나우스? 아폴론의 아이? 그게 누군데!? 그게 누구냐니까!!!!!!!!!!! 왜 우는 거야!!!!!!!!!!!!!!!" "......................"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나 자신도 이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광분하는 섹스투스도 물론이거니와 주책맞을 정도로 흐르는 눈물 의 의미를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잊고 있었다. 아폴로나우스를 묻으면서 한 맹세를. 나의 맹세를 신성한 약속을, 아폴로나우스의 소망을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부끄럽게도, 그의 품에 안기면서 망각했었다. 이어지는 섹스투스의 발길질에, 비명같은 고함 소리, 성나게 울부짖는 모습에도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 다. 옷이 찢겨져 나가고 사나운 기세로 섹스투스가 나를 격하게 꽤뚫을 때도, 그의 눈물이 얼굴에 떨어져 나의 눈물과 섞여 흘 러내릴 때도............ 나는 혼란스러운 정신을 수습할 수가 없었다. 지금 이 남자에게 사정없이 안기고 있다. 그 동안 그의 앞에서 엉덩이를 흔들어 유혹하던 나 자신의 그의 눈동자에 비췄다. 수치스러웠다. 무엇이? 두려웠다. 무엇이? 증오스러웠다. 누가? 이렇게 힘없이 흔들리는 나는 누구인가. 가슴속에서 피어오르는 울분과 증오와 지독한 절망이 심신을 침식해갔다. 처음으로 반항했다. 가슴을 때리고, 고함을 지르고, 몸부림을 치며 그에게 벗어나도록 노력했다. 섹스투스의 힘을 이기기에는 역부족이었지만 거미줄에 걸린 하루살이가 날개가 찢기도록 퍼덕거리듯, 나는 벗어나려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거미줄은 더 두터워지고 끈적끈적하게 나를 옮아 맸다. 매일처럼 벗어나려는 자와 잡으려는 자의 다툼이 시작되었다. 혼미한 정신 속에 사납게 울부짖는 섹스투스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그 의미를 알 수 없었다. 아니 나는 알려하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아무것도 듣지 않았다. ......................사자는 고통스럽게 포효했다. . . . 갈루스는 날이 갈수록 처참해져가는 막사 안의 풍경과 나의 몰골에 눈살을 찌푸렸다. 혀를 차며 그는 노예를 불러 따뜻한 물과 새 옷을 가져오도록 시켰다. 노예들이 나를 씻기고 옷을 입힐 때까지 그는 석상처럼 우두커니 서 있었다. ".............." "............." ".........." "..........무슨 할 말이라도? " " 임페라토르의 군대가 출정했다더군. 곧 도착할 모양이야. " 의외였다, 그가 그런 소식을 전해준다는 것이. 묘하게 흥분되어 있는 듯한 모습에 혹시 폼페이우스군이 뭔가 승기를 잡을 굉장한 것이 있는가 생각되었다. 애써 담담하게 물었다. " 카이사르의 친정입니까? " "그렇다더군, 독수리의 문양을 본 자가 있으니. " 두근, 두근. 심장의 맥박이 빨라졌다. 옷을 정리해주던 노예 하나가 의아한 듯 돌아보았지만 흥분했음을 갈루스에게 들키지 않도록 최대한 목소리를 가다듬어서 휘하 장수 들에 대해서 물었다. 갈루스는 기다렸다는 듯이 묻지 않았던 것도 말했다. 그는 임페라토르가 아닌 그의 휘하의 장군하나에 흥분하고 있었다. 군인인 그가 이번 전투를 얼마나 고대하고 있는지 그 투기가 저절로 뿜어져 나왔다. 영광이라고 했다. 그 와의 싸움이 흥분된다고 했다. 군인으로써 남자로써 상대하고픈 사내라했다. 갈루스는 진심으로 선물을 받은 어린이처럼 기뻐했다. 나는 마주 웃었다. 그가 온다. 나의 친구, 나의 주군, 안토니우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스스로의 이름을 버린 사내. 태양이 떴다. . . . 막사 안은 긴장으로 술렁였다. 그나이우스는 지금 본대를 이끌고 좀 떨어진 곳에 주둔하고있어 이 자리에 없 었지만 이를 갈고 있는 섹스투스와 라비에누스를 포함한 휘하의 장수들은 모두 한 사내를 죽일 듯이 노려봤다. 정작 당사자는 험악한 시선을 한 몸에 받고도 무심한 표정으로 꼿꼿이 서 있었다. " 그러니까 뭔가, 이 내게 얌전히 투항하라는 건가 지금?! " 섹스투스의 분노는 하늘을 찌를 듯 높았으나 갈색머리의 청년은 무심히 머리를 쓸어 올리면서 덤덤하게 말했다. " 개전 전 의례인 권고사항 일뿐입니다. 저의 주군 안토니우스님께서도 대충 전장에서 만나자는 말씀을 함께 전하라 하셨습니다만. " "........................." 좌중에 황당하다는 표정이 공통적으로 흘렀다. 이로스 이아로스라고 했던가? 도대체 왜 온거야? 안토니우스가 무슨 생각으 로 저 친구를 보냈는 지 알 길이 없었다. 만약 섹스투스를 도발할 생각이었다면 아주 성공적이라고 하겠다. 지금 섹스투스는 눈 앞의 사자를 당장 내려칠 기세였으니까... 말하는 폼이나 기세를 보건 데 이아로스라는 사내는 '적군을 열받게 해서 처형 당해 아군의 사기를 높인다'라는 설정으로 버리기에는 재주가 아까워 보였다. 하긴..........그래서 저 불곰 같은 섹스투스가 단칼에 이아로스를 베지 못하는 것이겠지. 의외로 막내기질이 남아있는 그는 자신 보다 어린 자에게 약했다. 응? 그런데 왜들 날 빤히 보는 거야?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어 좌중에 집중된 시선이 당황스러웠다. "....................델리우스가의 자제 분되십니까? " 나? 눈초리가 다시금 험악해진 섹스투스를 더불어 좌중의 시선이 내게 모아졌다. 진심으로 아까 모두의 살 기 어린 시선을 받고도 태연하게 서 있던 이아로스에게 다시금 탄복했다. 진짜 간덩이가 부은 놈이 었구만........ 이 자는 분명 안토니우스가 무척 아끼는 사내 일게다. " 내가 퀸투스 델리우스요. 브린디시움의 델리우스가의 차남이 되오. " " 당신께 전하라는 물건이 있었습니다. " 이아로스는 품속에서 목갑을 꺼내 주었다. 중간에서 섹스투스는 상자를 가로채 열어보았다. 상자안을 들여다 본 섹스투스는 어이없어 하는 표정으로 내게 건내 주었다. 열린 상자안에서 아찔한 장미향기가 진하게 피어올랐다. 상자 안에는 잘 마른 장미 잎이 진한 향기를 간직한 채 가득 담겨 있었고 황금으로 만든 작은 월계잎이 고이 들어 있었다. 이건......................... " 델리우스가의 가주이시자 당신의 아버님께서 하데스의 품으로 떠나셨습니다. 전언이 있습니다. 전해도 되겠는지요? " 이아로스는 교묘하게 주어를 빼놓고 주체를 밝히지 않았고 섹스투스는 별 의심없이-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에 당혹해 하며 허락했다. ".........' 장미 가득한 정원 안에, 월계수를 기억하는가 ' 라고 전하라 하셨습니다. " 후후. 역시 안토니우스답군,,, ".............장미는 시들어도 여전히 그 향기를 간직하고 있고 월계수는 봄이 되면 다시 푸르른 잎이 돋는 것 아니겠습니까................" 누가 들어도 나와 이아로스의 대화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남긴 마지막 사과와 당부의 말로 다짐하는 것으로 들렸다. 델리우스 가의 상징은 장미였고 월계수는 축복의 의미를 가진다, 마치 죽어가는 아버지가 사지로 떠나보낸 아들 에게 "너는 아직 델리우스가의 아이이다, 너를 축복한다" 라는 애틋한 애정의 말로 해석되었다. 아들은 집을 떠나 있어 도 나는 델리우스가의 아이이고 아버지의 축복을 겸허히 받아들이겠다는 의미로 풀이되었다. 섹스투스도 좌중의 거친 장수들고 한동안 숙연해졌다. 이아로스의 교묘한 화법은 그 속에 들어있는 제 삼자를 눈치채지 못하게 했다. 그 누구도 그 이면의 담긴 뜻을 살피지 못했다. ************************************************** + 로마의 휴일 외전 제 1 편 Leonidas - 사자의 심장 (3) 불타오르는 진영의 열기가 후끈하게 다가왔다. "..................잘 타는 걸...건조해서 그런가? " 멸절. 섹스투스의 군대는 괴멸할 것이다. 두 개의 군대로 나뉘어진 폼페이우스의 군대는 섹스투스의 군부터 각개격파 당할 것이다. 내가 그렇게 유도했으니까....... 교묘하게 군대를 이동시켰다. 그나이우스가 본대 진영에 있는 이상 나의 의견은 별다른 의심없이 받아들여졌다. 현란한 안토니우스의 기만 전술과 나의 간교한 화술이 섹스투스의 군대를 필패의 장소로 몰아갔다. 사방에서 시작된 화공, 밀려오는 푸른 튜닉의 기마 부대가 붉은 튜닉의 군사들을 도륙했다. 지휘부부터 습격 당했기에 아직 이곳 보급대는 안전했다. 지휘관들은 다 피신을 했을까? 산 너머에 있는 그나이우스의 폼페이우스 본대가 들어오기 전에 안토니우스가 치고 빠지는 것이 관건이 다. 그는 어디에 있을까. 이미 그나이우스의 본대로 피신했겠지. 이제 준비를 해야 할 때다. " 퀸투스!!!!!!!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어서 가자!!! " " ..............섹스투스? 어째서? 여기에? " 왜, 여기에 있는 거지? 그나이우스의 본대로 가지 않았던가?!?! 후퇴하지 않았다면 그 성질에 최전방에서 날뛰고 있을 그가 막사 안으로 뛰어들어 나는 하던 행동을 멈추고 말았다. 완전히 여미지 않은 망토가 어깨에서 흔들렸다. "...그게 뭐지?...퀸투스..." 푸른색의 망토에 수 놓아진 월계수나무의 문양이 가슴으로 흘러 내렸다. 푸른 바탕의 금빛나무는 지금 진영을 누비는 안토니우스의 기병들의 차 림과 똑 같았다. 단지 이 망토는 안토니우스의 것이기 때문에 좀더 화려하고 짙은 푸른 빛 이라는 것.... ...밖으로 나가면 망토는 표식에 되어 나는 그들의 보호를 받고 도망칠 수 있었다. 지금, 굳은 채로 눈을 부릅뜬 섹스투스를 지나쳐 나가기만 하면 되었다. 그냥, 나가기 만 하면... " 섹스투스님! 급합니다. 어서 북쪽으로 빠져 나가야합니다!!! 퀸투스?!??! " 막사 안으로 뛰어들어 온 갈루스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그 역시 사방에서 날뛰고 있는 푸른 빛의 망토를 못알아 볼리 없다. 그의 손에 들린 피에 젖은 칼은 같은 차림의 병사들을 수도 없이 베었 을 것이다. "...........설마, 배신자가 바로 너인가!?!" " 닥쳐!!!!!!!!! 갈루스!! 당장 벗어! 당장 벗어 퀸투스!!!!!!!!!!! 벗으란 말이야!!! " 섹스투스의 손에 안토니우스의 군사복을 사정없이 찢기면서도 선명하게 붉은 사자의 문양이 눈에 밟혔다. 서둘러야한다는 갈루스의 외침은 섹스투스의 귀에 전혀 닿지 않았다. 그는 미친 듯이 망토를 찢고 밟아 대었다. 마치 못볼 것을 본 사람처럼 푸른 망토를 사정없이 갈기 갈기 찢었다. "...........내가 했습니다.." " 뭘? 네가 어떻게? 넌 계속 내 옆에 있었어! 앞으로도 그러면 돼! " 그 역시 나처럼 귀머거리 행세를 할 셈인가.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는 배신자입니다!!!!!!!!!!!!! " 아니, 내게 배신이라는 단어가 어울리기는 한 건가... 배신은, 배덕은 그 이전에 선행되는 신뢰와 애정이 전제되어야 하는 것. 배덕이라는 단어의 무게가 심장을 짓누르는 것 같다. "거짓말!!!!!!!!!! 간자는 내가 베어버렸어! 넌 아니야! 아니라고 말해!!! " 그랬으리라 생각했다. 그렇지 않다면 오늘 아침 안토니우스의 망토와 군복이 배달되었을 리 없다. 서로의 생각을 잘 아는 죽마고우라 할지라도 간자는 필요했을 것이 다. " 아니오, 당신을 배신하지 않았습니다. " " 발뺌 할 셈이냐!!! " " 그래! 빨리 여길 빠져 나가자!!!! 어서 여길...... " 섹스투스의 표정이 단번에 풀어져 희망을 잡은 사람처럼 웃었다. " 난 단 한 번도....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배신 한 적이 없으니까요. " " 뭐? " " 이 간교한!! " " 난 처음부터, 이 전쟁이 시작 되기 전부터, 훨씬 그 이전부터 안토니우스의 사람이었습니다. " " 으아아아아! " 그가 휘두른 칼이 허공을 갈랐다. 차마 나를 벨 수 없다는 상처 입은 사자의 눈을 본다. 붉은 사자의 영혼을 본다. 울부짖는 사자의 영혼을 들었다. 울부짖고 포효하는 것은 섹스투스인데, 그 울음소리에 맞추어 한조각, 한조각, 부서져 내리는 것은 누 구의 심장? 무너지는 사자의 심장은.......... 무릎을 꺽고 주저앉은 그에게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었지만 닿지 않았다. 화끈거리는 통증이 배속에서 올라오는 것인지 심장에서 시작 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 갈루스!!!!!!!!! 이 자식 무슨 짓이야!!!!!!! 퀸투스!! " 내가 흘린 피웅덩이 속으로 고꾸러지는 나를 안아듦과 동시에 섹스투스 손에서 번쩍인 검이 갈루스의 얼굴을 찢었다. 고통스럽게 얼굴을 부여잡고 노려보는 그의 모습은 타르타누스에 갇힌 기간테스같았다. 어째서? 당신을 베어야 할 상대는 갈루스가 아니라 나인데..... 당신의 검에 죽어야 할 자는 바로 나인데..... 어째서 눈물을 흘리는 거지? 처음 보았다. 지난 3년간 수 많은 일들을 겪으면서도 그가 우는 모습을 보지 못했었는데.... 그 눈물이 실제인가 확인하려 손을 올리려 했지만 피가 빠져나간 몸은 마음대로 옴직이지 않았다. 악다구니를 쓰는 섹스투스를 이어서 뛰어 들어온 군사들과 마누스가 끌고 나갔다. 갈루스가 어깨를 내리치는 때도 나는 그 모습을 뒤쫓았다. "크어억..........." 끌려나가는 그가, 부하 들 손에 붙들려 가면서도 나를 부르는 그가, 고통스럽게 울부짖는 그가, 막사의 자락이 드리워지며 시야에서 벗어난 그가 환각처럼 눈 앞에 어리는 것인지. 희뿌옇게 흐려지는 것은 정신을 잃어가기 때문인지, 눈에서 흐르는 눈물 탓인지..... 생각이 났다. 기억 저편에서 생각해 내는 것을 거부했던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했던 수 많은 밀어들이 기억났다. 정사 후에 속삭이던 말들, 언제나 그 눈으로 외치던 말들, 울부짖던 말들........... 내가 거부했던 단어들........ 막혔던 둑이 터져 나가 쏟아지는 거센 물결처럼 금제했던 감정이 혼미해지는 정신을 뚫고 떠올랐다. 나는 그를...................... - 사랑해. 사랑하고 있어....... - 그 회색 눈은 영원히 내 것이야.... - 아름다운 나의 사람....나의 연인......나의 심장..... -사랑해.......사랑해........ - 나의 심장. 나의 레오니다스...... . . . " 레오니다스, 나의 심장, 나의 레오니다스..................." 흐릿해지는 시야에 회색빛의 다정하게 눈이 웃고 있는 것 같다. 다정하게? 바보같이 웃기는 군.. 언제 그가 단 한번이라도 따뜻하게 웃는 것을 본적이 있었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하게 웃는 그의 미소가 생생하게 떠오르는 것이 기이했다. 패배한 장수에게 남은 유일한 것은 파파베라의 즙뿐이었다. 나른해지는 몸과 빠져나가는 피와는 반대로 기억이 홍수처럼 밀려왔다. 퀸투스............ 옥타비아누스의 군대에 레스보스섬까지 후퇴해야했다. 동방에서 안토니우스의 함대가 벌인 무력 시위 때문에 섹스투스의 동맹군들이 내란에서 발을 빼기 시작했다. 파 르테아를 뒤에 두고 안토니우스가 내란에 참가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실수였다. 안토니우스는 아드리아해에서 훈련을 빙자한 대규모 무력시위를 벌리면서 섹스투스의 숨통을 서서히 조였다. 아그리파의 상륙군에 마지막 요새가 함락되었다. 갈루스는 전차에 밟혀 뭉그러진 시신조차 수습할 수 없었다. 폼페이우스가는 이제 섹스투스의 죽음으로 문을 닫을 것이다. 섹스투스는 쓰러져 있는 자신의 군사들을 밟고 적의 군사들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다시 손에 검을 쥐고 제일 가까운 군인의 머리를 쳐 올렸다. 군사들은 피투성이가 되어서도 검을 휘두르는 그에게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마약에 의해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그는 광전사가 되어있었다. 대 여섯이 섹스투스의 칼에 쓰러졌을 때, 멀찍한 곳에서 그 광경을 바라보던 옥타비아누스가 손을 들어 올렸다. 커다란 활을 꺼내든 궁병대장 프로쿨레이우스가 시위를 당겼다. 파악- 가슴 께에 느껴지는 화끈한 통증에 다리가 휘청거렸다. 바닥에 주저앉은 그에게 다가오던 병사의 배를 뚫고 그의 검을 빼앗아 또 한 명의 병사를 죽였다. 파악- 오른 손에 명중한 활에 검을 떨어뜨린 섹스투스가 왼손으로 근처에 떨어진 창을 휘둘러 또 한명의 목숨을 빼앗았다. 파악- 입에서 쿨럭 쿨럭 올라오는 피와 함께 포효하는 섹스투스는 한 마리 사자와도 같았다. 레테의 강물은 마시지 않으리라. 망각의 강물 따위로 그 얼굴을 그 사내를 잊는 일 따위는 절대하지 않으리라.... 타르타누스에 떨어진다 하더라고 망령이 되어 지옥의 불길에 타오르다 하더라도... 그대를 잊을 수는 없어.... 나의 연꽃, 나의 영혼, 나의 심장... 나의 레오니다스...... "후후" 드디어 쓰러진 그의 주위로 조심스레 군사들이 둘러서고 그 사이로 아그리파는 이 한 사내를 잡기 위해 죽은 병사의 수를 떠올리고 이맛살을 찌푸렸다. 프로쿨레이우스의 활에 고슴도치가 된 그는 가뿐 숨을 몰아 쉬고 있었다. 피로 물든 얼굴이 웃는 것처럼 보인 것은 착각이었을까..... 적에게 베푸는 마지막 자비는 조금이라고 고통없이 생을 마감해 주는 것, 망설이지 않는 검이 섹스투스의 목을 쳤다. 그 순간에 흩어진 목소리는 사람의 이름이었으나 아그리파는 듣지 못했다. -퀸투스............ . . . " 퀸투스? " "흐윽,,,흐윽,,,," 이아로스는 식은 땀을 흘리며 뒤척이는 연인의 머리를 조심스레 가슴에 안았다. 가슴에 닿는 축축한 물기에 후벼파이는 듯 화끈거렸지만 이아로스는 더욱 그의 얼굴을 깊게 끌 어 안았다. 오늘 만이야... 오늘 만이라고 이아로스는 피가 맺히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섹스투스 폼페이우스. 그가 죽었다. 언제나 그의 머리를 베는 것을 상상하곤 했다. 그의 심장에 창을 찔러 넣는 것을 꿈꾸었다. 하지만 절대로 그를 죽이지 못한다는 것도 뼈저리게 절망했었다. 죽은 자에게 베푸는 마지막 자비는, 그를 기억하는 애도. 그 이상은 없다. 섹스투스의 죽음을 전해 들은 퀸투스의 손이 떨리는 것도 , 그 눈이 깊이 가라 앉는 것을 보았다. 그의 탄식과도 같은 한숨도 들었다. 아니, 오늘 하루는 이아로스는 벙어리요, 귀머거리요, 장님이었다. 오늘 하루는 깊은 바다와 같은 아량을 포세이돈에게 청했다. 하데스에세 은밀하고 깊은 대지의 침묵을 청했다. "퀸투스........" 그는 지금 내 품안에 있다. 그가 내 품안에서 안도하고 있다. 안도하고 있다. ' 나는 비겁한 남자다. ' 그러니까 당신이 알지 못하는 감정 따위를 일깨우는 짓은 절대 하지 않아. 당신은 지금 내 품에 있으니까. 당신은 나를 사랑하고 있으니까. 그대의 눈물을 받는 것도, 그대에게 눈물을 흘리게 하는 것도, 이제는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사랑합니다, 퀸투스. 이 세상 누구보다도 더 깊이, 나 자신 보다 더. 이 땅위에 숨쉬는 모든 것들 가운데 나보다 당신을 더 사랑하는 이는 없습니다. 당신이 섹스투스를 사랑했었던 것 보다 더 깊이.......... 당신을 사랑합니다. 퀸투스................ ************* 외전의 시점은 4장와 5장 사이, 외전의 배경은 약 10년 전 쥴리우스 시저의 에스파니아 원정을 배경으로 합니다.